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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악녀가 검을 든 이유-2화 (2/121)

그 악녀가 검을 든 이유 2화

그녀가 태어난 곳은 난생처음 보는 곳이었다. 그곳은 마법과 마나가 존재하지 않는 세상. 바로 현대였다.

현대에서의 삶은 에린으로서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녀의 부모는 아이를 귀찮아하며 거의 내버려 두다시피 했기 때문이다.

한때, 눈치는 없지만 자상한 후작을 보며 아버지란 존재는 모두 그와 같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새로운 삶을 겪어 보고 나서야 세상에 그보다 무신경한 부모가 많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강해지고 싶어. 나 자신을 지킬 수 있을 만큼.’

그런 자신의 열망 때문이었을까, 다행스럽게도 세 번째 삶은 기사 가문의 딸로 태어났다.

왜 계속해서 새 삶을 살 기회가 주어지는지 그녀조차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살아가기로 했다. 전생과 달리 아무도 자신을 업신여기지 못하는 삶을 살고 싶었다.

그래서 검을 잡았다.

기사가 되어서, 검을 배우는 것.

첫 번째 삶에서부터 줄곧 시도하고 싶었으나 후작 부인에 의해 번번이 가로막힌 꿈이었다.

놀랍게도 그녀는 검에 재능이 있었다. 그것도 그냥 보통 재능이 아니었다.

몇백, 어쩌면 몇천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천재성을 타고난 것이다.

그렇게 꿈에 그리던 기사가 된 그녀는 그 세 번째 생을 후회 없이 살았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만약 자신이 환생한 이유가 전생의 억울함 때문이라면 다시 눈 뜰 일은 없겠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하지만 삶은 다시 반복됐다. 이번에는 환생이 아니었다.

그녀는 가장 불행했던 첫 번째 삶으로 돌아왔다.

에린 리서스.

멍청하고 한심한 후작가의 영애라고 불리던 그때로.

처음 그녀가 눈을 떴을 때 사방에서 비명이 울리고 있었다.

매일 전장에서 구르던 그녀에겐 너무나도 익숙한 소리였다. 그 탓에 자연스럽게 몸을 움직여 마차 밖의 마물들을 소탕했다.

그러고 나서야 자신이 다시 에린 리서스가 되었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레켄은 원래 이곳에서 팔 한쪽을 잃어야 했어.’

과거에선 그랬다. 레켄은 자신을 지키다 팔을 잃었고, 그의 찬란한 미래 역시 엉망으로 꼬이게 됐다.

에린의 잘못은 아니었지만 비난의 화살은 온통 그녀에게 날아들었다.

쓸모없는 그녀를 지키느라 제국을 이끌어 갈 인재를 잃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녀가 레켄을 도우면서 모든 게 변해 버렸다.

‘어쩌면 그도 구할 수 있지 않을까.’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에린은 한 남자를 떠올렸다.

두 번의 환생을 거치면서도 잊지 못했던 사람.

‘나와 약혼해서 모든 걸 잃었던 남자.’

페르딘 렉시아를.

* * *

에린이 다니고 있는 아텐츠 아카데미는 제국의 유일한 아카데미였다.

아카데미 안에는 재능 있는 평민, 귀족뿐만 아니라 타국의 왕족과 제국의 황족마저 다니고 있었다.

거의 작은 영지만 한 크기의 아카데미에는 늘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에린은 그 부산스러움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진짜로 돌아왔어.’

사라와 에린이 아카데미에 들어서자마자 레켄은 급한 일이 생겼다고 리서스 영지로 돌아갔다.

망설임 없이 발걸음을 옮기자 사라가 걱정스럽다는 어조로 말을 건넸다.

“아가씨, 괜찮으시겠어요?”

그 갑작스러운 말에 에린은 미간을 찌푸렸다.

‘뭐가 괜찮냐는 거지?’

에린은 이 시기의 자신이 어땠는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러나 사라가 아카데미에 도착해서 이 물음을 던진 데는 분명 이유가 있을 거였다.

“이번에 검술 학부로 전과하신 게 걱정되어서요.”

아, 지금이 그때인가.

그녀의 말에 물꼬가 트인 듯 과거의 기억이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그녀는 이맘때쯤 제국의 2황자, 페르딘과 약혼을 했다. 원해서 한 것이 아니었으나 사람들은 에린이 우겨서 이루어진 약혼이라고 알고 있었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녀는 페르딘 렉시아와 조금이라도 같이 있기 위해 검술 학부로 전공을 바꿨다.

검을 제대로 다루지도 못하면서 말이다.

물론 이것 역시 에린의 의지가 아니었다.

그녀는 안 보이는 곳에 있는 수많은 상처를 떠올리며 말했다.

“그래. 내가 매우 못된 악녀여서 2황자와 결혼하고 싶다고 패악을 부리고 부모님을 이용했어. 심지어 검술 학부로 전과해 기사들의 명예를 모욕하기까지 했으니…… 내가 생각해도 정말 엄청나구나.”

스스로를 깎아내리는 말에 사라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저었다.

에린은 그녀를 괴롭힐 생각이 없었다. 방금 한 말은 그저 현재 상황에 대한 조소였다.

“일부러 들으라고 한 말은 아니야. 걱정해 줘서 고마워.”

에린은 사라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자상한 미소를 지었다. 그에 사라는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

에린이 걸음을 옮겨 아카데미 안으로 들어서자 모든 시선이 집중되었다.

얼굴을 찌르는 따가운 시선에 그녀는 이 시기쯤 자신의 평판이 어땠는지 떠올렸다.

‘기사의 명예를 우습게 여기는 악녀였던가. 게다가 페르딘은 아실리 공녀와 암묵적인 연인 사이였지. 나와의 약혼으로 그들이 헤어졌으니 뭐라 할 말이 없어.’

마치 현대에서 읽었던 로맨스 판타지 소설 속 악녀가 된 것 같았다.

앞으로 닥칠 일이 훤해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세간에 그녀가 했다고 알려진 것들은 사실 모두 후작 부인에 의해 꾸며진 일이었다.

그러나 모두 그 거짓 소문을 믿고 있는 상황에서 에린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으리라.

그저 사람들의 시선을 삼키고 버티는 수밖에.

* * *

‘이땐 다들 날 싫어할 만해.’

에린은 냉정한 얼굴로 주변을 살폈다. 머릿속에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과거 그녀에게 아카데미는 후작 부인을 피할 수 있는 일종의 도피처였다.

그렇다고 이곳을 좋아하지는 않았다.

아카데미 안에도 온통 그녀에 대한 적대적인 시선만이 가득했으니까.

사실 당장에라도 난리를 치며 모든 게 후작 부인의 술수라고 소리칠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에린은 자신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을 거란 걸 알고 있었다.

지금은 후작 부인의 뒤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내는 것이 먼저였기 때문이다.

그녀가 죽기 전 후작가는 거의 멸문 직전까지 갔었다.

그때는 그 이유를 알지 못했지만 이제는 어느 정도 짐작이 가는 게 있었다.

“걱정하지 말렴, 곧 네 가족도 따라갈 테니까.”

그녀가 죽기 전의 마지막 순간에 후작 부인이 한 말 때문이었다.

후작 부인 혼자서 리서스가를 멸문시키는 건 불가능하다. 그동안 일어났던 수많은 불행 뒤엔 누군가가 있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이런 에린의 생각은 그녀의 손을 강하게 붙잡는 누군가로 인해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너……!”

뒤를 돌자 자신과 닮은 얼굴이 보였다.

“젠장. 오다가 마물 떼를 만났다면서, 괜찮아?”

카론 리서스. 그녀의 남동생이 그곳에 있었다. 정말 오랜만이었다.

에린은 그렇게 생각하며 그의 얼굴을 살폈다. 카론은 그녀가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훨씬 앳돼 보였다.

좌절로 얼룩진 얼굴도 아니었고, 힘들어 보이지도 않았다.

과거와 똑같은 점은 그녀를 싫어한다는 사실 하나뿐이었다.

에린은 멀쩡한 카론의 오른팔을 보며 더 확신할 수 있었다.

바꿀 수 있다. 그녀가 겪었던 끔찍한 과거들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미래였다.

문득 카론에게 잡힌 손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에린은 생각보다 카론의 손아귀 힘이 세다는 것을 깨달았다. 겨우 손 좀 잡혔다고 이렇게 아프다니.

그와 동시에 이까짓 아픔도 견디지 못하는 몸뚱이가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에린은 카론이 손을 잡아챌 걸 알면서도 일부러 막지 않았다.

검술의 검 자도 모르는 그녀가 그의 기척을 감지하는 건 무척 부자연스러운 일이었으니까.

어쩌면 내심 저를 붙잡을 동생의 얼굴을 보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카론은 그녀의 몸 구석구석을 살피다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마음이 한결 편해진 듯한 얼굴을 하더니 그녀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새삼스러운 것도 없는 일이었다.

카론은 에린을 부끄러워했다.

그들의 가문인 리서스 후작가는 긍지 높은 검의 명가였다.

그런 가문의 명성을 등에 업고 안하무인으로 행동하는 에린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리라.

누구보다 가문의 긍지를 중요하게 여기는 카론은 그런 그녀를 특히 더 싫어했다.

“그나저나 너……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무슨 짓?”

“기어코 검술 학부로 전과했다며? 대체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사는 거야? 그게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지 몰라?”

“…….”

“안 그래도 다들 널 싫어하는데, 굳이 상황을 최악으로 만들어야겠어?”

어쩔 수 없었는데……. 하지만 에린은 그 생각을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그가 지금 그녀에게 화를 내는 이유를 알고 있었으니까.

카론 역시 기사를 꿈꾸는 검술 학부의 학생인 만큼 그녀의 행동에 모욕감을 느꼈을 것이다.

“네가 정말 부끄러워.”

에린은 과거 이 순간 그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땐 그와 설전을 벌이고 기숙사로 돌아가 한참을 울었다.

그러면서 홀로 그들의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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