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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악녀가 검을 든 이유-1화 (프롤로그) (1/121)

그 악녀가 검을 든 이유 1화

프롤로그

“후작님! 마물 떼에 상단이 습격당했답니다.”

문을 강하게 열고 들어오는 리안의 말에 리서스 후작이 들고 있던 신문을 떨어트렸다.

상단이 습격당했다니! 그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상단의 행렬엔 후작의 딸 에린이 함께하고 있었다.

“에린은? 에린은 괜찮으냐?”

로이드의 질문에 리안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사이 리서스 후작의 머릿속에 여러 가지 상황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죽은 제 엄마를 꼭 닮은 연약하고 아름다운 그의 딸, 에린 리서스.

얼마 전 에린은 과한 매질로 하녀 몇 명에게 중상을 입혔다. 후작은 그 사실을 듣고도 평소처럼 모르는 척 지나가려 했다.

그런 그가 마음을 바꾼 건 부인 코렐리아의 간절한 부탁 때문이었다.

후작 부인은 사랑하는 에린을 위해서라도 그녀의 행동을 고쳐야 한다고 호소했다.

후작은 혹시라도 에린의 기분이 상할까 봐 걱정됐지만, 후작 부인의 부탁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확실히 에린의 행동은 도를 넘고 있었다.

‘이 일이 밖으로 퍼지면 에린의 입지가 더욱 좁아지겠어.’

결국 후작은 코렐리아의 조언에 따라 에린의 이번 아카데미행을 상단과 함께하도록 했다.

항상 수많은 기사와 하녀를 대동하여 아카데미로 복귀하곤 하던 에린에게는 적절한 벌이 될 테고, 사람들에게도 그녀가 뉘우치고 있음을 알리기 좋을 거라고 생각했다.

충격을 받은 후작이 몸을 휘청거리자 옆에 있던 코렐리아가 그를 부축했다.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로이드, 다 제 잘못이에요. 결혼 전에 조금만 철이 들었으면 한 것뿐인데…….”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말을 하는 코렐리아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 있었다.

후작과 리안의 시선이 그녀에게 향하지 않을 때 벌어진 행동이었다.

그에 대해 전혀 눈치채지 못한 후작은 하녀들이 종일 어깨와 다리를 주무르지 않으면 힘들어하던 에린을 떠올렸다.

이번처럼 기사 한 명과 하녀 한 명만 붙여 준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왜 하필 지금 마물 떼가 나타난 건지. 후작의 안색이 더 나빠졌다.

그때 리안이 몇 번 숨을 고르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그의 얼굴이 이해하기 힘들다는 듯 일그러져 있었다.

“아가씨께서는…….”

“내가, 내가 그러면 안 됐어! 역시 크게 다친 게냐? 아니면 설마…….”

최악을 가정하는 후작의 말에 리안이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입을 열기를 주저했다.

그가 들었던 말이 너무 어처구니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가씨께서 마물들을 전부 죽이고 상단을 구하셨다고 합니다!”

“뭐?”

후작과 코렐리아는 리안의 말을 듣고도 그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에린이 마물 떼를 토벌해……?

물론 이 일대에 강한 마물이 있을 리는 없었다. 후작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에린을 상단의 행렬에 함께 보낸 거니까.

게다가 자신이 아끼는 기사 레켄 경을 함께 보냈으니 큰일은 없을 거라 여겼다.

‘아마 레켄 경이 해낸 일을 잘못 알고 있는 거겠지.’

사람은 너무 충격적인 일을 겪게 되면 자기 합리화를 하고는 했다. 후작 역시 그랬다.

연약한 그의 딸이 어떻게 마물 떼를 토벌한단 말인가. 만약에 상급 마물이라도 끼어 있으면 상급 기사 한 명이 감당하기 힘들 거였다.

“역시 레켄 경이 무찌른 건가? 그를 함께 보내서 얼마나 다행인지. 하여간 에린은 무사한 것이겠지?”

“네, 아가씨는 무사하신데…… 마물을 토벌한 건 레켄 경이 아니라…….”

리안은 리서스 후작에게 사실을 설명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그도 전령의 말을 듣고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으니까.

‘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거지.’

그래서 결국 리안은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 후작을 이해시키는 걸 포기하기로 했다.

* * *

레켄은 자신의 눈앞에 있는 에린을 멍하니 쳐다봤다.

“아가씨…… 마차 안에서 편히 드셔도 됩니다.”

왜 귀족이 상인들과 같이 밥을 먹고 있는 걸까. 그게 자신 같은 일반적인 기사라면 가능한 일이었다.

만약 에린이 리서스 후작의 뒤를 이어서 기사의 길을 걷고 있었다면 지금 상황이 이해됐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녀는 기사가 될 생각이 전혀 없던 사람이다.

에린의 목표는 좋은 남편감을 찾아 결혼하는 일이었고, 실제로 어느 정도 목표에 도달하지 않았나.

그러니 절대로 그와 같이 길가에서 야영할 사람은 아니었다.

“경이 이러고 있는데 나 혼자 마차에서 먹을 수 있을 리가 없잖아.”

그렇게 말하는 에린의 손에는 붕대가 감겨 있었다.

그 붕대에서 나온 피에 그녀 옆에 있던 하녀 사라가 안절부절못하는 게 느껴졌다. 이내 사라가 울먹이며 말했다.

“고운 아가씨의 손에 상처가…… 너무 속상해요…….”

지금 중요한 게 그게 아닐 텐데? 레켄은 그렇게 생각하며 에린을 구석구석 살폈다.

아무리 봐도 눈앞에 있는 사람은 그가 알고 있는 에린 리서스가 맞았다. 그렇다면 어제 그 일은 어떻게 된 일일까.

잠에서 깨어났을 때만 해도 레켄은 자신이 꿈을 꿨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에린의 손에 있는 상처는 어제 일이 꿈이 아니란 명백한 증거가 되어 주었다.

‘그동안 비밀리에 검을 배우셨나?’

그러나 레켄은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그동안 아무도 몰래 검을 배웠다는 사실 자체가 말이 되지 않았다.

리서스 후작가가 검술로 유명한 가문이라지만 에린은 검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사치, 향락. 게으름. 듣기만 해도 부정적인 단어들로 표현되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런 그녀가 검을 익혔다면 그가 모를 리가 없었다.

그와 같은 상급 기사는 자신보다 미숙한 자의 실력을 가늠할 수 있다.

만약 에린이 어린 시절부터 검을 연마했다면, 그가 눈치를 챌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에린 아가씨가 나보다 강할 리는 없잖아.’

레켄은 리서스 후작이 가장 총애하는 기사이자 아텐츠 아카데미 검술 학부를 차석으로 졸업한 유망한 인재였다.

‘그렇다면 대체 그 검술은 뭐였을까?’

어제 상단이 마물 떼에게 습격당했을 때 레켄은 팔 하나쯤은 잃을 각오를 다지고 있었다.

에린이 함께 있는 만큼 상단의 호위가 적지는 않았지만, 마물들의 수도 많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중급 마물들이 끼어 있는 무리였다. 만약 그 혼자 상대했다면 많은 사상자가 나왔을 게 분명했다.

처음엔 괜찮았으나 갈수록 힘에 부쳤다.

‘분명 그 정도로 강한 마물들이었다.’

평소 걷는 것조차 힘들어하는 에린이나 여타 일반인이 당해 낼 수 있는 마물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 불가능한 일을 해냈다.

“아가씨, 검은 대체 어디서 배우신 거죠?”

레켄의 질문에 에린은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말이 없었다.

그의 눈엔 에린의 그 침착한 반응마저 이상했다. 마치 다른 사람이 그녀의 몸에 들어온 것 같았다.

그게 아니라면 사람이 이렇게 한순간에 변할 수가 있는 걸까?

“검은 카론이 연습하는 걸 보고 배웠어.”

“보기만 하셨다고요?”

“…….”

“아니, 어떻게 그런…….”

레켄의 반응에 에린의 얼굴이 설핏 굳었다. 그녀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수프 그릇을 치웠다.

‘언제 다 드신 거지?’

에린의 그릇엔 분명 많은 양의 수프가 담겨 있었다.

레켄은 당연히 그 음식들이 버려질 것으로 생각했다. 그녀는 항상 새 모이만큼의 음식만 먹었으니까.

“이만 일어날게. 어제 일 때문인지 아직도 좀 피곤하네.”

그녀의 얼굴은 전혀 피곤해 보이지 않았지만 레켄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어느새 에린의 기세에 휘둘리고 있었다.

* * *

에린의 마차는 화려한 보석으로 장식되어 있어 상단의 행렬과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후작은 에린에게 벌을 주겠다고 말하면서도, 상단의 마차를 불편해할 딸을 생각해 전용 마차를 준비해 주었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 행동은 에린의 평판을 좋게 하는 데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에린은 마차에 장식된 보석을 보며 머리가 아픈 듯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면서도 곰곰이 자신의 인생을 돌이켜 보았다.

무려 두 번의 환생 끝에 다시 돌아온 삶이었다.

그녀는 잘게 떨리는 손을 반대쪽 손으로 꽉 쥐었다.

레켄이 의심하는 것과 다르게 그녀는 에린 리서스가 맞았다.

“에린 리서스.”

그녀는 잠시 그 이름을 음미했다.

희대의 악녀이자, 패악과 사치를 일삼는 소녀.

하지만 그 모든 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에린은 자신의 치맛자락을 살짝 들어 올렸다.

다리에 아직 아물지 않은 멍이 보였다. 모두 후작 부인 코렐리아가 내린 ‘벌’에 의한 상처였다.

‘다른 곳에도 덜 아문 상처가 있겠지.’

황제의 주선으로 아버지가 코렐리아와 재혼한 순간부터 에린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성할 날이 없었다.

“에린, 넌 정말 쓸모없는 아이야. 네 아버지가 그 사실을 알면 어떻게 될까?”

아무도 모르게 은밀히 이루어진 학대였다. 어린 시절부터 툭툭 던져진 말들은 그녀의 정신을 마모시켰다.

마치 세뇌라도 된 듯 혹시라도 아버지가 실망할까 봐 그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야말로 죽지 못해 사는 삶이었다.

그녀는 후작 부인의 꼭두각시가 되어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살았었다.

그러다가 결국 에린은 후작 부인에게 살해당했다.

‘죽고 나서 다시 살아날 줄은 몰랐지만.’

그리고 다른 세상에서 다시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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