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 돌려막기의 끝? (7/11)

7. 돌려막기의 끝?

다음 날, 남지유는 곧장 짐을 챙겨 권성하의 뒤를 따랐다. 리조트 경비행기로 향하는데 몰디브의 아름다운 경치를 두고 떠나자니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자꾸 걸음을 늦추며 바다를 돌아보는 그의 손을 권성하가 부드럽게 감아쥐었다. 그러나 재촉하지 않고 해변을 산책하는 연인처럼 보폭을 맞추어 걷는다. 시선은 꿀물처럼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외려 남사스러워진 남지유의 걸음이 빨라졌다. 권성하는 빠져나가려는 손을 제게로 끌어당기며 웃었다.

경비행기는 십여 분을 날아 공항에 도착했다. 서울로 돌아가는 전용기는 이미 이륙 준비를 마친 지 오래였다. 남지유는 경비행기에 오르기 전부터 붙잡혀 있던 손을 어쩌지 못한 채로 걸었다. 이륙장까지는 전용 통로를 이용한 데다 수행원들에게 둘러싸여 있어 남의 눈을 의식할 필요가 없긴 했으나, 권성하는 유독 과시하려는 것처럼 유난스럽게 굴었다. 높은 구두를 신어 걸음걸이가 위태로운 상대를 대하듯 손을 잡아 이끄는 것이다. 그래도 못 맞춰 줄 비위는 아니었다. 그는 권성하의 손을 잡은 채 계단을 올랐다. 권성하는 막 비행기에 오른 그의 허리를 감고 짧게 입을 맞추었다. 남지유가 깜짝 놀라 주변을 살폈을 때는 수행원과 승무원 모두 못 본 척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귀 끝까지 새빨개지는 느낌이었다. 그는 얼굴도 들지 못한 채로 권성하를 따라 안까지 들어섰다.

“하지 마세요, 남들 보는 데에서…….”

마스터 룸에 당도하고 나서야 남지유가 슬쩍 짜증을 냈다. 체념 섞인 말투는 마치 투정처럼 들렸다. 권성하는 웃음을 굳이 참지 않으며 남지유를 좌석에 앉혔다. 마스터 룸의 좌석은 소파처럼 편안했다.

“예뻐서 그랬어, 예뻐서.”

“……그래도, 이상한 소문 돌면 어떡해요.”

“걱정돼?”

그들은 간혹 제가 부리는 아랫사람들을 눈과 귀가 없는 존재처럼 대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니까 보는 앞에서 지분거리는 것이고, 차 밖에 세워 놓고도 아무렇지 않게 떡을 치는 것이다. 사고방식부터 다른 사람들이었다. 남지유는 설득을 포기하고는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때마침 기장의 안내 방송이 나왔다.

- ……서울까지의 비행시간은 10시간 30분으로 예정하고 있으며, 현재 시각은…….

이륙을 시작한 전용기의 창 너머로 푸르른 풍경이 펼쳐진다. 원래대로라면 비행 안내부터 세세한 편의까지 도와주었을 승무원은 애인과 함께 룸에 틀어박힌 승객을 위해 밖에서 대기하는 중이었다. 둘뿐인 공간에 제트엔진 소음이 희미하게 스며들었다. 의도가 어찌 되었든 가만 앉아 고개를 돌리고 있는 남지유는 토라진 새침데기처럼 보였다. 권성하는 비스듬히 앉아 턱을 괴었다. 비행기가 완전히 이륙하여 창밖이 새파랗게 물들 때까지 지켜보던 그가 문득 남지유를 불렀다.

“지유야.”

“…네.”

“이리 와.”

어째 부르는 표정과 말투가 엄해 보인다. 남지유는 머뭇거리다가 권성하에게 다가갔다. 벌 받는 학생처럼 옆에 서자, 바로 손목을 붙잡혀 무릎에 앉혀졌다. 권성하는 그를 무릎에 앉힌 채 품종묘의 털을 빗기듯 부드럽게 허벅지를 쓰다듬었다. 목선을 훑고 올라온 시선이 긴장한 얼굴을 향했다. 손길은 해초처럼 나긋나긋 감긴다. 심통이 난 애인을 달래 주는 것처럼 정성스러웠다.

“남들 보는 데에서 뽀뽀한 게 싫었어?”

“그런 건 아니구요……. 그냥…….”

“그냥?”

“그냥, 안 좋은 소문이 날까 봐. 그래서 예민하게 굴었어요. 죄송해요.”

“오빠가 무신경했네. 우리 예쁜이 기분을 어떻게 풀어 줘야 하나…….”

고심하는 척 찌푸린 눈매는 제법 진정성이 있어 보였으나 더듬거리는 손끝에서는 야릇한 의도가 물씬 풍겼다. 이미 배운 바가 있는 몸이 확실한 의도 아래서 슬슬 달아오르고 있다. 성기에 반응이 왔다. 남지유는 다리 사이로 파고드는 손을 떨어뜨리려 애를 쓰며 무릎을 모았다. 다리가 오므라들자 권성하는 오히려 과감하게 더 깊은 안쪽으로 손을 미끄러뜨렸다. 면바지 위로 성기를 붙잡혔다. 남지유는 짧게 숨을 들이켰다. 권성하의 무릎에 다리를 조신하게 모으고 앉은 몸이 경직되었다.

“마음 약한 우리 지유가 이렇게 토라질 정도면 기분이 많이 상한 건데, 오빠가 풀어 줘야겠지. 으응?”

“아뇨, 아니요…! 저 괜찮아요, 삐친 거 아니에요, 오빠…… 아읏!”

순간 고간을 움켜잡혔다. 도리질을 쳐 가며 급히 변명하던 입이 곧장 다물렸다. 성질대로 굴었다가 괜한 트집거리를 주고 말았다. 어젯밤에도 권성하의 단단한 몸 아래서 수없이 절정에 올랐던 몸은 기억하는 바를 고스란히 답습했다. 배 속에 열이 피어올랐고 성기는 큰 손에 주물러지며 크기를 불렸다. 삽입 용도로 쓰인 적 없고, 앞으로도 그럴 일 없는 성기가 권성하의 손아귀에서 장난감처럼 놀아났다. 가지런히 모은 다리가 움찔움찔 튀었다. 자연스레 어깨에 감았던 손은 관계 중인 것처럼 손톱자국을 내려 안달이었다.

“아앗…. 아, 흐응.”

옷 위로 만지는 게 아쉽다. 문득 스친 생각은 자신의 흥분을 온전히 드러낸 것이라 부정하고픈 맘이 듦과 동시에 몸이 달았다. 이렇게 쾌감에 약한 몸이었던가. 그를 만나기 전에는 숱한 관계에서도 드물게 흥분을 느꼈던 것이 전부였는데. 완벽히 길이 들고 말았다. 한 번 열린 몸은 다시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 남지유는 서글프게 흐느꼈다.

“아으응, 아, 안… 안 돼.”

“여긴 지유랑 오빠밖에 없는데 뭐가 부끄러워.”

“…하지만, 밖에… 앗! 으응….”

“밖에? 밖에서, 다 보는 앞에서 만져 줄까?”

“싫어, 싫어. 하지 마요…….”

가장 안쪽의 마스터 룸까지 이끌려 오면서 멀지 않은 위치에 수행원 석이 있는 것을 이미 보았다. 두꺼운 벽과 문으로 분리를 해 놨다고 하지만 같은 공간에 있는 것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다. 남지유는 이런 섹스가 달갑지 않았다. 그러나 항상 그렇듯 권성하는 남지유의 사정 따위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어쩌면 불안에 젖어 쩔쩔매는 반응을 즐기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것을 증명하듯 웃음기 어린 시선이 달아오른 얼굴을 훑었다. 남지유는 시선을 피해 버렸다.

똑똑, 돌연히 노크 소리가 났다. 내외하던 남지유가 깜짝 놀라 권성하에게 매달려 안겼다. 의지할 수 있는 상대라고는 그밖에 없었다.

“누, 누구예요?”

“글쎄, 지유가 하도 끙끙거려서 아픈 줄 알았나.”

“쫓아내요, 네? 흐으. 밖에 누구 있는 거 싫어요, 오빠….”

베갯머리송사를 하는 것처럼 간드러지는 목소리였다. 권성하는 그가 못내 귀여운 듯이 들여다보고 있다.

- 필요한 게 있으십니까?

좌석 근처에서 인터폰이 반짝거렸다. 필요한 것 따위 없으니 근처에 얼씬도 말라고 으름장을 놔 주면 좋겠는데, 아직도 가랑이에서 손을 떼지 않은 권성하에게서는 그런 기미조차 없었다. 외려 애무하는 손길이 더욱 농밀해졌다. 뒷골까지 솟구치는 쾌락을 간신히 눌렀다. 미처 절정에 다다르지 못한 쾌감이 등골에 고여 아랫목을 간지럽혔다. 남지유는 소리를 죽인 채로 밭은 숨만 겨우 토해 낸다. 숫제 울상이었다.

- 이사님?

“하으으….”

울상이 넓은 어깨에 파묻혔다. 싫다며 작게 도리질도 친다. 권성하는 그 얼굴을 들게 하고는 눈을 맞췄다. 그리고 속삭였다.

“키스해 봐.”

부당한 요구였으나 잃을 게 많은 남지유는 찍소리도 못 한 채 고개를 기울였다. 혀를 섞을 생각은 하지 못하고 입술만 모아 쪽쪽 맞대기만 한다. 감질나게 하려 한 것이라면 성공이었다. 권성하는 입술이 벌어진 틈으로 혀를 밀어 넣으며 뜨거운 안을 마음껏 헤집었다. 촉촉하고 부드러운 점막이 있는 부분이라면 어디든 잘 느끼는 몸이 품 안에서 움찔거렸다. 혀를 빨아들이면서 성기를 문지르자 이번에는 벌어진 입새로 교성이 새었다. 남지유는 차마 밀어내지도 못한 채 애꿎은 셔츠만 긁어쥐고 있다. 권성하는 자비를 베풀 듯이 혀를 놓아주었다. 한껏 풀어진 얼굴이 가쁜 숨을 몰아쉰다.

“하아, 하아….”

“밖에 들려주고 싶어? 아예 불러다 예쁜이 보지 쑤시는 소리 들려줄까?”

“시, 싫어…. 아으응, 그러지 마세요….”

소리가 새는 게 싫으면 쓸데없는 애무를 멈추면 그만이었다. 그러지도 않으면서, 이미 야외 테라스에서 실컷 따먹었으면서 시치미를 떼는 게 너무도 억울하고 서럽다. 그날 권성하가 쓸 일도 없는 룸을 몇 개나 잡아 놨는지 모르는 남지유는 울화가 치밀어 어쩔 줄 몰라 했다. 권성하는 축축한 눈가를 손수 닦아 주며 차오르는 설움을 지켜보았다. 그가 드디어 인터폰 응답버튼을 눌렀다.

“잘못 눌렀으니 가서 볼일 봐요.”

- 알겠습니다. 필요한 게 있으시면 불러 주세요.

숨소리만 겨우 남은 룸에 멀어지는 구두 소리가 들렸다. 구명줄 붙잡듯 매달린 팔에 긴장이 풀어지자 권성하가 나직하게 웃는다. 그는 애인의 약한 부분을 슬슬 문지르며 속삭였다.

“우리 예쁜이, 오빠 몰래 호출은 언제 누른 거야. 응?”

“…정말, 정말 너무하세요. 그건 오빠가… 하아, 아! 으응….”

“오빠가?”

“오빠가… 아, 흐응. 일부러… 저, 엿 먹이려고 누른, 거, 잖아요….”

“하하하. 그래서 이렇게 앙칼지게 보는 거야?”

아! 성기를 붙잡힌 그가 단번에 허리를 경직시키며 교성을 터뜨린다. 성기에서 흘러나온 물은 속옷을 적셨고 미뤄 놓은 절정은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겨우 긴장이 풀린 입에서 그토록 수줍어하던 신음이 줄줄 새었다. 이대로 쌀 것만 같았다. 속옷이 다 젖든 바지가 다 젖든 아무래도 좋을 만큼 황홀했다. 미미한 이성이 당장 터질 것 같은 사정을 막았다. 손톱을 세운 손이 권성하의 어깨를 애처롭게 긁어 댔으나 사정을 유도하는 손길은 멈추지 않았다.

“아아…! 오빠, 저, 쌀 것 같아요…….”

“쉬야 할 것 같아?”

“으응, 아냐…… 아! 하으, 거기, 아, 으응…!”

어쩔 줄 모르고 할딱거리던 그가 결국 권성하의 손아귀 안에서 사정을 시작한다. 오줌보가 터지는 것처럼 어쩔 도리가 없는 사정이었다. 움찔움찔 허리가 떨렸다. 금세 실례를 저지른 것처럼 속옷이 순식간에 척척하게 젖어 들었다. 바지에도 티가 났다. 그런 사소함이야 아무 상관 없을 만큼 달뜬 여운이 흘렀다. 앙칼진 얼굴은 녹녹하게 풀어져 있었다.

“기저귀라도 사 줘야 하나. 다 커서도 바지에다 싸네, 응?”

“…너무하세요. 싫다는데 억지로 하셨으면서….”

안 된다고 했는데…… 서글프게 흘러나온 목소리는 언뜻 울먹이는 것도 같았다. 권성하는 웬일로 울지 말라며 달래 주는가 싶더니, 어느 틈엔가 남지유의 상의 단추를 하나 둘 풀고 있었다. 언행이 다른 남자였다. 남지유가 제 배꼽 근처까지 내려온 손을 조심스럽게 붙잡는다. 금세 풀어 헤쳐진 앞섶 사이로 발그스름하게 달아오른 속살이 비친다. 곤두선 유두가 셔츠에 그대로 도드라졌다. 스스로 얼마나 농익었는지 알 길이 없는 남지유는 고개만 살살 저으며 소심하게 피력했다.

“이제 그만해요…… 네?”

아직 사정의 여운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애원을 해 봤자 아랫도리만 달굴 뿐이었다. 권성하의 무릎에 다리를 가지런히 모으고 앉아 있는 그가 가장 깊이 실감하고 있는 부분인지라, 그는 더욱 울상이 되었다.

“옷 젖었잖아. 고집부리면 안 되지.”

“거기는, 안 젖었잖아요…….”

“여기까지 젖게 한 번 더 할까?”

“…….”

남지유는 아랫입술을 꾹 깨물며 고개를 돌렸다. 권성하는 웃음을 참지 않았다. 흠뻑 젖은 얼굴로 새침데기처럼 구는 게 얼마나 꼴리는지, 일부러 그러나 싶을 정도다. 그는 얌전해진 남지유의 상의를 천천히 벗기면서 속삭였다.

“이러니까 손을 안 댈 수가 없잖아.”

* * *

남지유는 사실, 권성하가 전용기로 이끌 때까지만 해도 약간의 의외성을 느끼고 있었다. 이런 제트 여객기를 유지할 만한 재력이라면 마냥 근본 없는 조폭은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하기야 그냥 돈 좀 많은 놈이 애인에게 들이는 정성이라기엔 씀씀이부터 남달랐다. 누가 잠자리나 데워 주는 상대한테 그런 값비싼 선물을 덥석 안겨 주겠는가. 돈이 너무 많아 썩어나는 놈이 아닌 이상 말이다.

기껏해야 명품 쇼핑이나 즐기는 수준으로는 가늠할 수 없는 재력에 처음에는 잠깐 경외감 비슷한 것을 느꼈었으나, 열 시간이 넘는 비행 끝에 완벽히 전소되었다. 짐승새끼는 어디서든 절륜했고, 비행기에는 도망갈 구석조차 없었다. 오늘따라 삽입 없이 집요하게 괴롭히는 시간도 길었다. 함께 비행기에 오른 수행원들, 기내식과 술을 운반하는 승무원이 신경 쓰여 소리 죽여 울던 그는 종내에는 참을 기력조차 없어 목 놓아 울었다. 느끼면 느끼는 그대로 흐느끼며 안을 조였다. 싫다는 투정과는 달리 녹진하게 풀어진 구멍은 탐욕스레 좆을 물고는 정액을 먹여 줄 때까지 놔주질 않았다. 권성하는 포식이 끝날 때까지 객실 근처에 개미새끼 하나 얼씬 못하게 만들어 놓았다. 누구든 애인의 교성을 엿들으면 다신 들을 일 없게 만들어 주겠다는 으름장도 놓았다. 목 놓아 울게 만든 장본인이 내린 명령이라기에는 뻔뻔스럽기 짝이 없었다. 남지유는 혼절과 섹스, 틈틈이 주어지는 휴식을 반복하다가 결국 기절하듯 잠들었다. 전용기는 순조롭게 서울로 향하고 있었다.

“애기처럼 자네….”

색색 깃털 같은 숨을 내뱉는 입술을 건드리며 권성하는 옆자리에 곤히 잠든 남지유를 들여다봤다. 지나치게 울린 탓에 아직도 눈가가 붉었다. 내리 예뻐해 주고 싶다가도 막상 눈앞에 두면 자제가 되지 않았다. 좋아하는 여자아이를 괴롭혀 울리는 철부지처럼 짓궂어진다. 실상 공연히 건들고 싶을 만큼 깜찍한 존재이기도 했다. 하는 짓마다 새침데기 같았다. 홱 토라져서 떠나더니, 인도양의 아름다운 섬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던 걸 생각하면 물리적 자극 없이 아랫도리가 달아올랐다. 워낙 청순한 머릿속이라 여행지 선택에 달리 의도가 없으리라는 걸 알면서도 하나하나 아양을 떠는 것처럼 느껴졌다. 홀리는 데에 재주가 있었다. 볼수록 탐이 났고, 탐이 나서 양껏 취하였더니 속절없이 빠지고 말았다. 까탈을 부리는 것도 퍽 귀여웠다. 자신이 조금만 배려가 없었더라면 아무도 못 보는 곳에 가둬 놓고 원할 때마다 취했을 것이다.

차근차근 얼굴선을 훑어 내리던 손이 다물린 입술을 살짝 건드렸다. 손끝을 따라 벌어진 입술 사이로 하얀 앞니가 엿보였다. 펠라티오를 받을 때 종종 닿는 부분이었다. 아직 어깨에 남아 있는 상흔이 간지러웠다. 온통 무른 구석뿐인 그에게 이리 단단한 부분이 존재한다는 건 색다른 감흥을 주었다. 권성하가 느끼는 감흥을 다디달게 포장해 봤자 기르는 애묘에게서 송곳니를 발견한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한참 미인을 감상하던 권성하가 한숨을 흘렸다. 웃음기가 배어 있었다.

“어디 데려갈 줄 알고 순진하게 자고 있어.”

속삭이는 목소리에는 깨우려는 일말의 의지도 엿보이지 않았다. 비행장을 돌던 전용기가 비로소 멈추었다. 돌아갈 때가 되었다. 권성하는 사용인이 다가와 잠든 남지유를 안아 들려는 것을 막고는 직접 품에 안았다. 부드러운 온기가 품을 채웠다. 소심하게 뒤척이는 것이 귀여웠다. 통로를 지나 전용 라운지에 당도하자,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던 남지유가 눈을 떴다.

“어디 가요…….”

“피곤하면 자. 집에 태워 줄 테니까.”

“……주제에, 웬일로…….”

눈도 못 뜬 채 무어라 입속말을 해 대더니 다시 잠에 든다. 아무래도 너무 괴롭힌 모양이다. 가볍게 웃은 권성하가 높다란 콧대를 손끝으로 건드렸다. 그는 잠든 이가 깨지 않게끔 고쳐 안고는 임의로 입국 수속을 밟았다. 전담 서비스팀이 진행하는 수속은 금방 끝이 났고, 짐은 이미 차에 실린 지 오래다. 권성하는 출구에 주차된 차 뒷좌석에 남지유를 앉혔다. 품에서 내려놓는 순간 감긴 눈이 열렸다.

“집에 가요…?”

“깼어?”

“왜…….”

“응?”

“…왜 멀쩡한데? 떡은 같이 쳤는데, 왜 나만 힘드냐고….”

“하하하. 잠꼬대도 귀엽게 하네.”

지루새끼, 좆만 더럽게 커서…… 서러움 가득한 잠꼬대가 권성하의 어깨에 흩어졌다. 남지유는 그렇게 미운 남자의 어깨에 기댄 채로 꾸벅꾸벅 졸더니 스며들 듯이 잠에 빠졌다. 권성하는 독기 없는 원망만 늘어놓다 잠든 얼굴을 내려다보며 어깨에 닿는 간지러운 무게를 즐겼다. 자기 정도면 잇속을 잘 챙긴다고 생각하는 순진한 머리답게 가벼웠다. 그에게서는 타고난 외모와 그럴싸한 애교로 남자들에게 여태 공주취급을 받아 온 태가 났다. 어떤 상황이 와도 아양 몇 번 떨어 주면 그만이리라 여기는 오만함이 태도에서 엿보였다. 권성하는 그에게서 귀하게 자란 흔적이 보일 때마다 못 견디게 사랑스러웠다. 가끔 도가 지나칠 만큼 까부는 것도 귀여울 지경이니 말 다했다.

“이사님, 청담동으로 모실까요?”

권성하가 남지유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 채로 입가에 검지를 세운다. 명령을 알아들은 기사가 조용히 격벽을 올렸다. 고급 외제차가 부드럽게 주행을 시작했다. 목적지는 권성하가 얼마 전 구매한 청담동 고급 빌라였다. 세대마다 프라이빗 엘리베이터가 있어 입주민조차 서로 마주칠 일 없게끔 설계되어 있는 곳이었다. 남의 눈을 과히 신경 쓰는 애인을 위해 고심 끝에 결정했다. 권성하는 남지유가 모쪼록 새 신혼집을 마음에 들어 하길 바라며 잠든 얼굴에 입을 맞췄다.

* * *

비행기에서 밤낮없이 시달렸던 남지유는 한참을 더 잤다. 공연히 건드리는 사람이 없으니 피로한 몸은 자연히 숙면에 빠져들었다. 한결 맑아진 정신으로 눈을 떴을 때에는 이미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 가는 중이었다. 다물리지 않은 커튼 사이로 노을이 새어 들었다. 그가 앓는 소리를 내며 이불 속으로 몸을 숨겼다. 온기가 밴 잠자리는 지난 보름간의 고생을 잠깐이나마 잊게 해 줄 만큼 아늑했다. 눈만 배꼼 내밀어 졸린 눈을 가물거리고 있자니 노을빛이 눈가에 스며든다. 언뜻 보이는 창밖 풍경이 낯설었다. 다시 찾아들려던 졸음이 곧장 날아갔다.

“……뭐야?”

몸을 벌떡 일으킨 그가 그제야 주변을 둘러본다. 그의 집이 아니었다. 상황 파악을 하던 남지유는 잠들기 전 함께 있던 인물을 떠올렸고, 동시에 욕설을 토해 냈다. 초대하지 않아도 몇 번이고 집에 들락거렸던 권성하가 새삼 집 위치를 모를 리는 없었다. 비행기에서 그토록 집요하게 지분거리던 까닭을 이제 알겠다. 까무룩 잠이 들게 만들어 쥐도 새도 모르게 납치할 심산이었던 것이다. 어쩐지 물고 빨고 놔주지를 않더라니. 기가 막혔다.

그는 침대에 주저앉은 채 식식대다가 문득 협탁을 돌아보았다. 자동으로 불이 밝혀진 전등 아래에 시계가 반짝이고 있었다. 벌인 짓이 하도 치졸하기에 혹시나 싶었는데, 줬다 뺏을 만큼 파렴치한은 아니라 다행이다. 날카롭게 치솟았던 맘이 슬슬 가라앉는다. 영롱한 자태를 들여다볼수록 울분이 식고 너그러운 맘이 차올랐다.

눈 뜨자마자 한참 시계 구경에 빠져 있던 그가 겨우 몸을 일으킨다. 침대 아래에는 귀여운 토끼모양 슬리퍼가 놓여 있었다. 남지유는 그것을 구겨 신었다. 택시를 잡아타든 매니저를 부르든 일단 돌아가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갑이든 핸드폰이든 찾아야 한다.

“어디다 놓은 거야.”

그러나 베개 밑, 이불 속, 수납장을 모두 뒤져 보아도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권성하가 숨겨 놓은 모양이었다. 막막함이 몰려들었다. 수확이라고는 시계뿐인지라 남지유는 그것을 손목에 걸었다. 잠든 사이 갈아입혀진 실크 잠옷과는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다.

자고 일어나자 주거지와 재산 현황이 바뀌었다. 남지유는 이 집이 어디에 붙어 있는 곳인지 감도 오지 않았다. 이쯤 되니 의심에 무게가 실렸다. 어차피 시키면 시키는 대로 다 해야 하는 처지인 걸 알면서도 굳이 가둬 놓는 행태에 불안감이 올라왔다. 권성하가 정말 애인이라도 된 것처럼 지분거려도 참겠다는 다짐을 아득히 뛰어넘는 전개였다. 이러다 정말 코가 꿰이겠다는 경보가 본능적으로 울렸으나, 알아도 어쩔 수 없었다. 몰디브까지 따라오는 남자를 어디로 피하겠는가.

침실을 나서자 길게 뻗은 복도너머로 천장이 드높은 거실이 보였다. 모델 하우스를 그대로 옮겨 놓은 듯 생활감이 전혀 없는 새집이었다. 주위를 둘러보며 거실로 나온 그가 창가에 선다. 폴딩도어 너머에 자갈이 깔린 정원이 펼쳐져 있다. 복도에서도 비슷한 풍경이 보였던 걸 생각하면 아마 침실 근처까지 이어져 있지 않을까 싶다. 침실에서 본 조경도 나쁘지 않았다. 어디 붙어 있는 집인지는 몰라도 돈으로 둥지를 튼다면 이런 느낌일 것이다. 돈에 쪼들리던 지난날을 억지로 덮씌우듯, 서울 한가운데 높고 넓은 집에 둥지를 틀었던 남지유로서는 가슴 설레는 곳이었다. 이런 집을 아무렇지 않게 턱턱 사는 권성하의 재력이 새삼 부럽다.

“이게 뭐야.”

제집처럼 주방을 찾아 들어간 그가 물을 따르다가 메모를 발견한다. 아일랜드 식탁에 곱게 놓여 있는 메모지에는 권성하의 필체가 담겨 있었다. 뜻밖에도 단정한 필체였다.

[곤히 자길래 못 깨웠어. 금방 올 테니까 배고파도 조금만 참아. 같이 저녁 먹게.]

왜 이곳으로 데려왔는지 설명조차 없이 시치미를 뚝 떼는 말이었다. 남지유는 권성하가 참으로 배려가 없는 남자라 생각했다. 남에게 예의를 차릴 위치에 있는 남자가 아니라 그걸 지적할 수 없다는 점도 짜증이 났다. 울화를 다스리려는 듯 한참 물만 홀짝이던 그가 결국 주방을 박차고 나온다. 하늘하늘한 잠옷을 입고 있단 자각도 없이 현관을 열어젖혔다.

“아! 깜짝이야…….”

그리고 나란히 문 앞을 지키고 있던 덩치들을 보고 외려 가슴을 부여잡는다. 무뚝뚝하게 생긴 덩치들은 남지유를 향해 깍듯이 고개를 숙여 보였다.

“실례했습니다. 혹시 필요한 게 있으십니까?”

“아, 아니요.”

“금방 오신다고 하셨으니 조금만 기다리십쇼, 형수님.”

“…….”

혀, 형수…… 세 글자가 주는 파괴력에 굴복한 남지유는 얌전히 문을 닫고 돌아섰다. 형수님이라니, 씨발, 오장육부가 꼬이는 것처럼 괴로웠다. 권성하나 백이선이나 수행원들에게 감추려는 의지가 딱히 없는 놈들이라 다들 알고 있으리라 짐작하긴 했었다. 다만 머리로 아는 것과 실제로 듣는 것의 차이가 어마어마했을 뿐이다. 모르긴 몰라도 배우 남지유가 지들 보스 아래 깔리는 놈이라고 뒷담을 하든 상상을 하든 무엇이든 해 봤을 것이다. 이번 비행에서는 객실로 데리고 가 한 번을 나오질 않았으니 상상의 자유도 훨씬 컸으리라. 쪽팔려서 도무지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하, 씨발. 진짜…….”

비척비척 돌아와 소파에 주저앉은 그가 마른세수를 해 댄다. 뚫린 입들이 혹시나 소문을 퍼뜨릴까 걱정도 되었다. 솔직히 그렇게 된다 하더라도 결코 선의만으로 도와줄 남자들이 아닌지라 새삼 제 처지가 통탄스러워졌다. 벌거벗은 채 다리를 벌려 상대를 몸속으로 받아들이는, 가장 은밀하고도 무방비한 순간을 수없이 공유한 상대조차 신뢰할 수 없는 현실에 불쑥 외로움이 밀려들었다. 불현듯 깨닫는 고독이었다.

울적하게 앉아 있는 그의 뒤로 막 외출을 하고 온 권성하가 다가선다. 권성하는 코트를 받아 가는 수행원을 눈짓으로 쫓아내고는 남지유가 앉은 소파까지 천천히 다가갔다. 기척조차 듣지 못하고 사색에 잠겨 있는 뒷모습은 가슴을 찡 울리는 처연함을 머금고 있었다. 넉넉한 상의 위로 길게 뻗은 목덜미가 하얗다. 눈으로 속살을 더듬거리던 권성하가 부드럽게 어깨를 감쌌다. 어깨가 움찔 떨렸다.

“왜 추운데 나와 있어.”

“…방금 일어나서 그래요. 어딘지 모르겠어서, 찾아보느라.”

“오래 잤네. 그동안 약을 못 먹어서 그런가, 조금 튼튼해졌나 했더니 도로 연약해졌어.”

“그런데 저, 왜 여기로 데려오셨어요. 집에서 쉬고 싶었는데…….”

핸드폰도 돌려주세요, 매니저랑 대표님한테도 연락 돌려야 해요. 남지유가 얌전하게 조잘거린다. 딱 봐도 성질을 죽이고 있는 표정이었다. 권성하는 허리를 숙여 가만 지켜보다가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귀 뒤쪽으로 넘겨 주었다.

“이 집도 이제 지유 집이야. 여기서 쉬면 되지. 응?”

“네? …전 여기 살겠다고 한 적 없는데요.”

“그럼 어쩌지, 오빠는 당연히 지유가 같이 살아 줄 줄 알고 그 집 정리했는데.”

“네?! 미쳤어요?”

눈 한 번 마주치지 않던 남지유가 권성하를 돌아본다. 권성하는 짓궂게 웃고 있었다. 장난이구나, 깨닫는 동시에 안도감과 짜증이 함께 치밀었다. 울컥한 걸 겨우 다스리는 그를 권성하가 일으켰다. 에스코트하듯 허리를 감싸며 천천히 어디론가 이끈다. 잠옷차림에도 시계는 차고 있는 것을 보고 권성하가 작게 웃었다. 엄지가 시곗줄 안쪽을 살살 문질렀다.

“왜 또 삐쳤어.”

“…왜 그런 장난을 치세요. 정말 깜짝 놀랐잖아요.”

“오빠가 장난치는 것 같아?”

남지유가 권성하를 올려다본다. 허튼수작 부리면 멱살이라도 잡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엿보였다. 권성하의 웃음이 짙어졌다.

“이 집 지유 이름으로 돼 있거든.”

“……네?”

“가구는 지유가 맘에 드는 걸로 골라서 채워 넣어. 괜히 돈 쓰지 말고, 오빠가 준 카드 써서.”

“아, 아니 잠깐만요. 정말이에요?”

“예쁜이, 오빠 말을 자꾸 못 믿네.”

허리를 깊이 끌어안더니 아직 넋 빠진 얼굴에 멋대로 입을 맞춰 댄다. 반듯한 이마서부터 콧대, 입술을 차례로 찍은 그가 벌어진 잇새로 파고들었다. 혀의 삽입이 깊어질수록 남지유는 몸에 힘이 풀렸다. 허리가 꺾여 무너지려는 그를 권성하가 단단하게 붙잡았고, 그는 어깨에 매달렸다. 혀가 엉기며 여운이 안 가신 배 속에 저릿저릿한 전율이 일어났다. 여기서 다시 베드 인 했다가는 살아서 눈 뜰 자신이 없었다. 남지유가 매달린 어깨를 두드리자 권성하는 순순히 물러나 주었다. 입술을 뗀 남지유는 종전보다 훨씬 순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고 있다.

“갑자기, 하아, 이러시면… 깜짝 놀란단 말예요.”

“키스해 달란 눈으로 봤으면서.”

“아니에요. 하… 그렇게 안 봤었어요.”

“고집부리기는.”

“…오빠가 고집부리는 거예요….”

말투부터 달라져 있다. 권성하는 저를 향한 야릇하고도 묘한 얼굴을 바라보며 다시 손을 이끌었다. 귀여운 속물 애인은 집 선물이 몹시 기쁜 것 같았으나, 동시에 의심을 품고 있는 것처럼 눈치를 보았다. 저를 갖고 노는 줄 아는 모양이다. 괘씸한 추측마저 귀여웠다.

권성하가 이끈 곳은 복도 끝에 있는 드레스 룸이었다. 처음 눈을 뜬 침실 바로 근처에 있었는데, 특이하게도 지문인식 도어 락이 걸려 있었다. 권성하는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남지유의 손을 잡아 센서에 댔다. 앞으로는 이렇게 하면 된다고 손수 가르쳐 주는 것처럼 다정한 지도였다. 남지유가 잡힌 손을 언제 빼야 할지 고민하는 사이 자물쇠가 풀렸다. 권성하는 잡은 손을 부드럽게 깍지 끼어 잡으며 열린 문 안쪽으로 그를 이끌었다. 명품 매장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 행거와 진열장이 온갖 브랜드로 가득 차 있었다. 칸마다 간접조명이 있어 반질반질 윤이 나게 닦인 구두가 아름답게 빛난다. 그는 꽤나 놀란 눈치였다. 정말 놀랄 만한 일은 준 적 없는 지문을 등록해 놓은 치밀함인데, 그는 그런 사소한 일에 의심을 둘 줄 모르는 순진한 속물이었다. 그저 뷔페처럼 차려진 명품들에 솔직하게 감탄할 따름이다. 권성하는 다루기 쉬운 애인을 못내 귀엽다는 듯 바라보았다.

“지유가 좋아하는 브랜드로 골랐는데, 맘에 들어?”

“어떻게 이런 것까지 신경을 쓰셨어요. 바쁘실 텐데…… 지유 너무 감동했어요, 오빠.”

“당연히 신경 써 줘야지. 오빠가 데리고 사는 건데.”

불빛에 이끌리는 부나방처럼 남지유는 드레스 룸으로 자연스레 빨려들었다. 방탄유리로 된 진열장을 들여다보다가, 행거에 줄줄이 나열된 옷을 훑어보다가, 또 액세서리를 살펴보는 얼굴에 들뜬 기색이 역력했다. 모두 그가 선호하는 브랜드였다. 권성하는 몹시 솔직한 애인의 허리를 끌어안고 볼에다 입을 맞췄다. 당장 눈에 보이는 선물에만 들뜬 순진한 애인을 바라보는 눈매가 부드럽게 풀어져 있다.

“이렇게 좋아할 줄 알았으면 진작 선물해 줄 걸 그랬네. 오빠가 눈치가 없었지?”

“아녜요, 신경 써 주신 것만으로도 기뻐요……. 항상 바쁘시잖아요.”

“우리 지유는 말하는 것도 예뻐, 아주.”

권성하가 애인을 소중하게 쓰다듬는다. 이 집을 선물 받은 것을 알게 된 이후부터 앙칼진 기색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는 귀여운 얼굴이었다.

“그런데, 오빠가 집에 왔는데 계속 인사도 안 해 줄 거야?”

“아……. 다녀오셨어요?”

“그것도 귀엽긴 한데, 예쁜이 잘하는 거 있잖아.”

“……어떤 걸 말씀하시는지 지유는 잘 모르겠어요.”

“얼른.”

책망하는 시선은 오래가지 않았다. 눈길만 돌려도 값지고 좋은 선물투성이다. 발을 디디고 선 이 집조차 자신의 것이라고 한다. 눈에 날이 설 이유가 없었다. 남지유가 순하게 고개를 들어 권성하에게 입을 맞춘다. 늘 얄미워 죽을 것만 같던 그가 요즘 참 잘생겨 보인다.

남지유가 양껏 애교를 부리는 것처럼 목에다 팔을 두르고 슬쩍 까치발도 든다. 드물게 적극적으로 혀를 섞어 오는 그를 권성하가 눈을 감지 않은 채로 감상한다. 쪽, 쪽, 앙증맞은 접촉을 해 가며 입을 맞추던 남지유는 위화감을 느끼고 슬쩍 감은 눈을 떴다. 남지유는 하얀 이맛살을 찌푸리더니 까치발을 내렸다. 변태. 떨어진 입술이 그렇게 속삭였다. 권성하는 대놓고 요망을 떠는 애인을 양팔로 끌어안았다. 그의 목을 끌어안고 있던 손은 빳빳한 칼라를 손끝으로 어루만진다. 어디로 도망도 못 가는 상태에서 남지유가 약간의 심술을 애교처럼 피웠다.

“그런데 이 집이 제 명의면…… 오빠가 잘 다녀왔습니다, 하고 인사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예의 바르게.”

권성하는 정말 놀란 듯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앙큼해서 깨물어 주고 싶을 정도다. 그는 그 충동을 굳이 참지 않고 못 본 사이 포동포동해진 뺨에 가볍게 잇자국을 남겼다.

* * *

그날부로 감금 아닌 감금이 시작되었다. 권성하는 2층짜리 신혼집에다 애인을 데려다 놓고는 아무나 쉽게 드나들 수 없게끔 통제하였다. 덩치가 산만 한 경호원들은 남배우가 갇힌 집을 하루 종일 수문장처럼 지켰다. 남지유는 출입을 통제당하는 것보다는 불편한 상대와 생활공간을 공유하는 것에 심리적 부담감을 느끼는 중이었다. 방심하다가 불쑥 권성하와 마주칠 때면 깜짝 놀라 가슴을 부여잡기도 했다. 이를테면 퇴근 시간이 되었는데 상사가 집에 가지 않는 것과 비슷했다. 맘 편히 쉴 수가 없었다. 그의 메리지 블루를 알아챈 권성하는 다음 날 곧장 변호사를 불러 등기권리증과 인감증명서, 위임장, 초본까지 전부 확인시켜 주었다. 설익은 짜증은 공증 앞에서 눈 녹듯 사라졌다.

외출도, 연락도 맘대로 할 수 없으니 사실상 감금과 진배없는 상태였으나 남지유는 그런 사정이라고는 하나 모르는 백치처럼 굴었다. 순진하게 웃으며 자신과 신혼놀이를 하는 데에 한참 재미가 들린 권성하의 비위를 맞췄다.

“지유 혼자 두고 가기가 힘드네.”

“안 돼요. 이 실장님이 저한테 뭐라고 한다구요.”

“걔가 우리 지유 막 쪼았어? 오빠가 혼내 줄까?”

“됐어요. 그러면 또 저만 욕먹어요.”

출근할 때마다 퇴임 욕구를 드러내는 그를 달래서 내보내는 것부터 일이었다. 처음에는 철이 덜 든 줄만 알았는데, 자신을 들여다보는 눈빛에서 알았다. 공연히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며 자신과 실랑이를 벌이는 걸 즐기고 있다는 사실을.

성적인 대상으로서 진득한 시선을 받는 것이야 진절머리 날 만큼 익숙했으나 까마득히 어린놈을 보는 듯이 귀여움을 받는 건 처음이었다. 남지유는 권성하로부터 ‘귀여워 죽겠다’는 눈빛을 받을 때마다 속이 부대껴 어쩔 줄을 몰랐다. 오만 가지 생각이 다 들어 골치가 아플 지경이었다. 권성하는 남지유가 민망해하며 시선을 피하는 순간마저 즐겁게 음미했다. 웃음만 팔아 봤지 연애는 숙맥인 티가 났다. 요즘은 하루에도 몇 번씩 그가 생각나 실없이 웃음이 터지곤 했다.

“이사님, 백 전무님과 약속 시간이십니다. 준비할까요?”

한가하게 애인 생각에나 빠져 있던 그에게 이 실장이 일정을 보고한다. 권성하는 그제야 백이선의 존재를 상기했다. 영화를 빌미로 남지유의 가랑이를 벌렸던 놈이었다. 웬만한 화대를 치르지 않고서는 구경도 할 수 없는 속살을 수없이 훑고 직접 맛보기도 했으리라. 애인의 외도야, 뭐, 백이선처럼 화대를 주고 몸을 열어 보았던 입장으로서는 놀랍지도 않았다. 그 도도한 가랑이 여닫기 쉬운 것쯤은 진작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질투가 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느긋하게 준비해. 급할 것 없으니까.”

“예, 알겠습니다.”

“그런데 이 실장, 나 없을 때 지유 혼내기라도 했어? 기가 죽어서 달래 주느라 진 뺐어.”

남지유의 만류에도 기어이 이야기를 꺼낸다. 진정으로 이 실장을 나무라려는 기색보다는 애인과의 알콩달콩한 일화를 자랑하려는 것처럼 가벼운 어조였다. 그럼에도 이 실장은 식은땀을 흘렸다.

“…송구합니다. 제가 주제넘었습니다.”

“이 실장 고생하는 건 아는데, 멋모르는 애 잡지 마. 속이 좁아서 쉽게 토라진다고. 삐쳐서 도망가면 어떡할래.”

“제가 어떻게든…. 죄송합니다, 이사님. 남지유 님께는 따로 사과드리겠습니다.”

“아니, 내가 이 얘기 꺼낸 건 입 밖에 내지 마.”

“네, 이사님.”

그는 쩔쩔매는 이 실장을 내보내고는, 슬쩍 짜증을 부리던 애인을 떠올렸다. 의도치 않게 베갯머리송사를 한 것을 눈치챈다면 자존심이 상해서는 눈을 흘길 것이다. 실질적으로 다를 바가 없음에도 아양 떠는 제 처지를 실감하는 것을 몸서리칠 만큼 낯간지러워했다. 그는 미러 큐브를 맞추며 웃음을 흘렸다. 백이선과의 약속을 위해 비워 놓은 시간이 큐브를 맞추는 손길과 함께 한가롭게 흘러갔다. 그가 외투를 챙겨 차에 올랐을 때는 이미 약속 시간에서 한참이 지난 후였다.

청담동 주택가에 위치한 개인 카페는 한적할 시간대임에도 사람으로 붐볐다. 가게 곳곳에 앉아 있는 인물들은 백이선 하나를 경호하기 위해 붙은 경호 인력이었다. 권성하는 쏘아지는 시선 속에서 어렵지 않게 백이선을 찾았다. 백이선은 카페 정문을 등진 채로 앉아 있었다. 권성하가 양해도 없이 맞은편에 앉으며 입꼬리를 올렸다.

“아직 계셨군요. 바쁘신 몸이라 오늘은 못 뵐 줄 알았는데.”

“신경 쓸 것 없습니다. 방금 왔으니까요.”

“다행이네요. 그새 좌천해서 할 일 없이 시간이나 죽이는 줄 알았지 뭡니까.”

권성하의 뒤로 험상궂게 생긴 경호원 둘이 붙는다. 위협적으로 눈을 부라리는 그들은 시비가 붙으면 바로 연장질을 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가게 주인은 창가 블라인드를 내리고 정문 팻말을 ‘CLOSED’로 바꿔 놓았다. 짧은 회담을 위해 굳이 이 가게를 통째로 빌린 까닭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권성하가 남배우를 가둬 놓은 집이 한눈에 보이는 곳이었다. 스토킹도 이만하면 순정이라 할 수 있겠다.

“지유 씨는 잘 있습니까? 그쪽을 적잖이 무서워하던데요. 가엾게 울던 모습이 마지막이라 어찌나 걱정이 되던지.”

“씹질 생중계한 건 백 전무 아닙니까. 그게 걱정할 새끼가 할 짓인가?”

“초조했거든요. 설마하니 그쪽이랑 나, 둘 다 걷어차고 도망갈 줄은 생각도 못 했지만.”

권성하는 눈앞의 백이선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헤어진 옛 애인을 그리워하는 것처럼 미련이 철철 흘러넘쳤다.

“그쯤 하죠. 애인 있는 애 그만 건드리라고. 백 전무도 나랑 척져서 좋을 것 없잖아.”

“주기적으로 잔다고 그게 애인은 아니죠. 깡패들은 박는 구멍마다 애인이라고 부르나 봅니다.”

“하, 도련님 말본새 하고는.”

“글쎄요. 지유 씨가, 권 이사 말투를 썩 좋아하진 않던데.”

“하하하…… 정말, 죽일 수도 없고. 난처하게 만드네.”

백이선을 둘러싸고 있는 경호 인력이 아무리 많다 한들 은밀하게 멱을 따긴 어렵지 않았다. 금융회사 명함을 판 이후로 손을 씻은 것처럼 굴었지만 여전히 물밑거래는 오고 갔다. 권성하가 대신 처리해 준 건 중에 백이선과 같은 케이스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잠깐 몇 가지 방법을 떠올리던 그가 곧 생각을 접는다. 고작 질투 때문에 사업 파트너를 죽일 순 없지 않나. 애인을 위한다는 말로 포장하기에는 최 사장이란 놈 멱을 대신 따 줄 때에 심히 떨던 모습이 아직 생생했다. 독한 척하면서도 마음이 참 여렸다. 든든하게 지켜 줘야겠다는 의무감까지 들게 만드니 애착이 갔다.

“아무튼, 남지유 씨 무사한 것 확인했으니 됐습니다. 시간 내 주셔서 감사하군요.”

“내가 지유한테 해코지라도 했을까 봐 달려왔습니까? 백 전무 그렇게 안 봤는데 순정파네.”

“주먹부터 쓰고 보는 족속들을 믿을 수가 있어야지.”

“뭐, 그런 놈한테 잡아먹으라고 들이민 건 백 전무고.”

“내가 권 이사와 이렇게 취향이 잘 맞을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권성하가 집에서 자신을 얌전히 기다리고 있을 남지유를 떠올린다. 길게 말 섞을 사람이라고는 오로지 자신뿐이라, 팔에 매달린 채 참새처럼 조잘대는 입술을 상상한다. 그의 관심이 제 이야기보다는 입술에 더 지대하다는 걸 눈치채고는 싫증을 내는 얼굴도 떠올렸다. 군침이 돌았다. 서둘러 돌아가 애인이나 주물러 대고 싶었다.

그가 마시지도 않은 차를 그대로 둔 채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러고는 백이선을 내려다보며 산뜻 웃어 보였다.

“찻길 조심해요. 요즘 비가 와서 길이 미끄러운데.”

“충고 고맙군요.”

권성하는 부하 직원이 열어 준 차 뒷좌석에 앉으며 시계를 확인했다. 남지유가 소파에 앉아 뜨개질이나 하고 있을 시간이었다. 퇴근 전 CCTV로 확인할 때마다 그는 현관 쪽을 흘끔거리고 있었다. 나가고 싶은 건지, 자신의 귀가를 기다리는 건지 정확히 알 순 없으나 권성하는 자기 좋을 대로 생각했다.

운전기사가 청담동 빌라로 차를 운전한다. 그 뒤를 경호 차량이 따라붙었다. 가까운 거리라 주차까지 셈해도 5분이 안 걸릴 것이다. 권성하는 이 실장에게 물었다.

“집에선 뭐 하고 있어.”

“필요한 게 있다며 애들한테 마트 심부름을 시키셨다고 합니다. 목록을 알려 드릴까요?”

“가서 확인하면 돼.”

처음 며칠은 남의 집처럼 굴더니 이제는 슬슬 익숙해지는 모양이다. 얼마 전에는 커다란 와인셀러를 주문하고는 아까워서 먹지도 않을 비싼 와인을 잔뜩 채워 놨었다. 스스로도 흡족한지 진열장 안의 시계를 들여다보는 것처럼 한참을 그저 바라보기만 했었다. 겨울을 대비해 도토리를 모아 놓는 다람쥐 같았다. 어처구니없으나 귀여운 취미였다.

“수고했어. 들어가 봐.”

“예.”

따라붙은 수행원들을 돌려보낸 권성하가 엘리베이터에 오른다. 현관에서부터 고소한 냄새가 풍겼다. 아직 사늘한 바깥과 달리 온기가 도는 실내에는 동거인이 내는 생활소음이 감미롭게 흐르고 있었다. 권성하는 거실 복도에 멈추어 서서 감미로운 소음을 감상했다. 보글보글 끓는 소리와 함께 규칙적으로 울리던 도마 소리가 멈칫하더니, 이내 종종걸음으로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종일 자신만을 기다렸을 애인이 모퉁이를 돌아 나타났다.

“어, 오셨어요? 왜 안 들어오시고…?”

편한 홈웨어 위에 귀여운 앞치마를 걸친 애인이 당연한 듯 그를 반겨준다. 권성하는 뜻밖의 선물을 받은 것처럼 순간 아연해졌다가, 이내 정신을 차렸다.

“지유야, 오빠한테 시집올래?”

“느닷없이 무슨 소리예요. 식사 안 하셨으면 같이 해요. 만드는 중이에요.”

매정한 애인은 권성하의 감흥을 한마디로 축약하고는 등을 돌렸다. 분홍색 앞치마 리본이 꼬리처럼 살랑거린다. 권성하는 홀린 듯이 그 뒤를 따랐다. 한창 요리 중인데도 어수선하지 않은 부엌은 애인의 깔끔한 성격을 보여 주는 듯하다. 문득 뒤를 돌아본 애인이 왜 여기까지 따라왔느냐는 표정을 지었지만, 피곤해질 것을 예감하였는지 애써 못 본 체를 하며 몸을 돌린다. 권성하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애인을 뒤에서부터 끌어안았다. 야트막한 한숨소리가 들렸다.

“무슨 바람이 들어서 갑자기 요리를 했어.”

“집에만 있으려니까 심심해서요. 오죽하면 뜨개질까지 하겠어요.”

“남자들이 왜 살림하는 여자한테 환장하는지 이제 알겠어.”

“그건 그냥 게을러서 핑계 대는 거고요. …아이, 좀! 음식 탄다구요.”

고개를 묻은 목덜미에서 크림 소스와 같은 향이 났다. 권성하는 깊이 숨을 들이마시며 애인의 체취를 음미했다. 숨결이 스칠 때마다 품에 사로잡힌 애인이 바르작댄다. 도무지 놓아주고 싶지가 않았다. 권성하는 애인의 몸을 감싼 팔을 서서히 아래로 미끄러뜨렸다. 아랫배를 감싼 채로 몸을 밀착하고, 곧은 목덜미부터 새하얀 넥라인을 따라 입술을 움직였다. 민감한 애인이 어쩔 줄 몰라 하며 어깨를 바르르 떨었다. 조금 전까지 채소를 다듬었던 단정한 손이 권성하의 팔뚝에 내려앉았다. 밀어내는 힘이 애교처럼 간지러웠다.

“요리 마저 하구요. 네에?”

“나중에.”

“앗, 으응. 요리 다 타면, 어떡해요. 지유 배고픈데…….”

“과열되면 자동으로 꺼져. 괜찮아. 지유는, 아랫입으로 다른 거 먹자. 오빠가 배부르게 해 줄게. 응?”

“오, 빠아……. 아아, 흐으응. 싫어…….”

권성하는 자신을 거부하는 남지유를 번쩍 안아다 아일랜드 식탁에 앉혔다. 프릴 달린 앞치마 아래로 옷을 하나씩 벗겨 내린다. 바지와 팬티는 바닥에 떨어지고 상의는 젖이 다 보이게끔 쇄골까지 말려 올라갔다. 맨몸에 걸쳐진 것이라고는 앞치마가 전부인 변태적인 차림새가 되었다. 남지유는 체념한 듯이 자신을 헐벗기는 손길에 얌전히 몸을 내맡겼다. 입을 다문 얼굴은 단단히 토라진 것처럼 보였다. 권성하는 앞치마만 입은 채 헐벗은 몸 선을 손바닥으로 정성껏 쓸었다. 엉덩이를 움켜쥔 손이 제게로 확 끌어당겼다. 사타구니가 밀착한다. 두툼한 윤곽이 벌어진 가랑이에 당장이라도 삽입할 것처럼 문질러진다. 아직 흥분의 기미도 없는 성기를 만져 주며 고개를 기울이자, 남지유가 고개를 돌려 피했다. 권성하는 그 뺨에다 키스하며 웃었다.

“저녁 만드는 사람 붙잡고, 꼭, 흐읏, 이러셔야겠어요…?”

“오빠도, 이러면 지유가 다신 요리 안 해 줄 거 아는데, 꼴려서 참기가 힘들어. 봐. 오빠 좆 터질 것 같잖아.”

“이, 변태, 짐승……! 아앗, 아, 거기, 그거, 싫어…….”

“이거 좋아? 으응? 지유야.”

애무가 짙어질수록 앙칼진 말들이 입 안으로 숨어버린다. 권성하는 수줍어하는 애인을 추궁하여 예쁜 입에서 예쁜 소리만 나오게끔 이끌었다. 결국 참지 못한 남지유가 목을 젖히며 자지러진다. 고소한 온기가 피어오르는 키친에 남지유의 교성이 울려 퍼졌다.

* * *

반강제적 신혼생활을 몇 주간 영위하던 중, 드디어 개봉일이 다가왔다. 완벽한 명분으로써 권성하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였다. 남지유는 못내 아쉬운 듯 보이는 권성하를 어르고 달래 빠듯하게 잡힌 스케줄을 시작했다. 그때는 영영 내보내 주지 않는 줄로만 알고 열과 성을 다해 봉사했었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처음부터 붙잡을 생각이 없던 것 같다. 마음만 먹으면 배우 하나 실종시키는 건 일도 아닌 사람이었으니 그럴 작정이었다면 진작 그리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집에서 자신의 실종 소식을 뉴스로 접해야 했겠지…….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쳤다.

오늘은 개봉기념 시사회 인터뷰가 있는 날이었다. 시사회를 다니며 이미 수차례나 본 영화를 다시 한번 보고, 간단한 인터뷰 시간을 가졌다. 본의 아닌 취집 체험을 하느라 밋밋해진 감각이 눈부신 조명과 줄지은 카메라를 마주하며 점차 살아나고 있었다. 남지유는 배우용 미소를 지은 채 인터뷰에 응했다. 남자들 몸 아래서 고양이처럼 응석을 부리며 짓던 미소와는 딴판이었다.

“딜레이가 많이 되었던 만큼 스크린으로 보는 기분이 색다를 것 같아요. 다들 영화를 직접 보고 난 소감이 어떠신가요?”

“저는 오늘로 세 번째 보는 건데, 음, 사실 처음 봤을 때는…….”

제작지원 문제로 오랫동안 묵혀져 있던 영화는 작년에 겨우 지원을 받아 촬영을 끝마쳤다. 그 후로도 편집과 CG작업을 거치느라 개봉까지 몇 달을 더 기다려야만 했다. 촬영의 시작부터 막바지까지, 여러모로 다사다난하였기에 무사히 개봉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회가 새로웠다. 다소 후련함도 느껴졌다.

“촬영하면서 유독 힘들었던 장면이 있으셨다면?”

“아, 생각보다 말 위에서 호흡을 맞추는 게 어려웠어요. 상대배우와 호흡을 맞추면서 연기를 해야 하는데, 말을 타는 것만도 벅차서 힘겹더라구요.”

“NG 내면 위험한 신이라 더 긴장을 많이 했었죠.”

“맞아요. 또 지유 씨는 승마 신을 이번에 처음 해 봤거든요.”

이미 정해져 있던 답변에 덧붙여 여러 감상이 오갔다. 관객들에게 몇 가지 질문을 받는 걸 끝으로 시사회는 막을 내렸다. 남지유는 무대를 내려오며 함께 시사회에 참석한 배우들과 짧은 인사를 나눴다. 어차피 회식을 하며 바로 이번 주에 만난 사이였다. 투자지원을 한 사측에서 열어 준 회식이었다. 마지막 날 회식에도 빠졌던 터라 어쩔 수 없이 참석했었으나, 다행히 백이선은 나타나지 않았었다. 그날을 계기로 남지유는 희미하게 남아 있던 찝찝함을 훌훌 털어버렸다. 덕분에 요즘은 마음의 안정을 되찾아 가고 있었다.

“지유 씨 요즘 나 피하는 것 같아.”

상대역으로 출연한 배우가 그에게로 와서 어깨를 맞댄다. 여성 향수 냄새가 은은하게 풍겼다. 조용히 귀엣말을 하는 태도에서 친근감이 넘쳤다. 남녀 주연인 영화나 드라마에서 흔히 하는 비즈니스였다. 권성하는 둘의 친근한 사이를 보고는 오피스 와이프를 따로 두냐는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해 대며 괴롭혔지만 말이다. 시달린 바가 큰 남지유가 티 나지 않게 거리를 벌리며 웃었다.

“내가 세연 씨를 왜 피해요.”

“이것 봐! 지금도 내가 오니까 도망가잖아요. 나 자존심 상할라 그래.”

“그런 거 아니에요. 세연 씨.”

“흐음.”

지켜보는 눈이 가늘어진다. 그의 어깨에 살며시 손을 감으며 귀엣말을 하는 표정에 호기심이 스쳤다. 둘 다 웃음을 머금고 있었기에 선남선녀가 정담을 나누는 장면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지유 씨 연애하는구나?”

“네?”

“애인이 나랑 친하다고 질투하죠? 그래서 갑자기 거리 두는 거잖아. 뻔하지 뭐.”

“하하하. 무슨 연애예요.”

연애라는 단어가 나오는 순간, 우습게도 찔끔하고 말았다. 연애. 혀로 굴리기도 껄끄러운 단어였으나 권성하와의 관계를 정의한다면 이제는 그 말이 무엇보다 어울릴 것이다. 비록 대가가 오고 가는 관계라고 한들, 한 지붕 아래 살며 아침마다 눈을 맞추고, 낮에는 어깨에 기대며, 밤에는 배를 맞추는 관계를 연애 말고 무엇이라고 하겠는가. 애써 외면하고 있던 사실을 남의 입으로 정의당하자 기분이 묘해졌다. 상대 배우는 남지유의 기분만 싱숭생숭하게 만들어 놓고는 홀연히 떠나 버렸다.

‘연애, 연애……. 씨발.’

아무리 곱씹어도 부정할 수가 없었다. 단순한 스폰 관계였다면 한 집을 공유하는 짓 따윈 하지 않는다. 다른 놈과 대가성 섹스를 했다고 바람난 애인 잡듯 굴지도 않는다. 지난했던 몇 달이 스쳐 지나갔다. 스폰 말고 애인하자던 답정너 새끼, 시집이나 오라던 꼰대새끼, 간혹 말없이 멜로눈깔로 쳐다보는 조폭새끼까지…… 권성하로 그득한 머릿속에는 욕설이 둥실둥실 떠다니는데 사인을 요청하는 팬들에게는 다정하게 웃으며 충실히 응해 준다. 매니저로 따라온 대표의 만류에도 사인을 모두 끝낸 그가 겨우 밴에 올랐다. 그는 곧장 시트에 늘어졌다. 연애라는 한마디가 불러온 심적 소모가 너무나 극심했다.

“수고했어. 오늘 스케줄은 이걸로 끝이야. 집에 가서 쉬자.”

“응.”

배우가 편히 쉴 수 있게끔 라디오 하나 켜지 않은 밴이 조용히 도로로 진입한다. 하나뿐인 간판배우의 복귀 이후 스케줄을 직접 관리하고 있는 대표가 뒷좌석에 웅크리고 잠든 배우를 백미러로 바라보았다. 투자마저 빠듯했던 영화는 배우의 말대로 개봉 이후 줄지어 호평을 받는 중이었다. 제일 중요한 시기에 고집을 부려가며 까다롭게 영화를 고른 보람이 있었다. 남지유 역시 이번 영화를 통해 실력파 배우로서 다시 자리매김했다. 결과적으로 이보다 잘될 순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무언가 마음에 걸린다.

어느덧 밴은 청담동 화랑거리에 들어섰다. 신호대기에 걸린 틈을 타 백미러를 보니, 죽은 듯 자고 있던 남지유가 핸드폰을 보고 있었다. 다소 짜증이 어린 표정이었다. 차라리 연애를 하는 것이면 좋겠는데, 애인과 연락하는 표정이 저럴 순 없었다. 권성하에게 답장을 보내는 남지유에게 대표가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지유야, 너 혹시…….”

“뭐.”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지?”

“일은 무슨 일.”

“뭐 혹시 사채에 손댔다거나…….”

“형 도엽이랑 똑같은 소리한다. 내가 사채를 왜 써. 있는 돈도 못 쓰고 있는데.”

남지유는 시답잖은 소리를 들은 것처럼 웃더니 다시 핸드폰으로 빠져들었다. 누구와 연락을 하는지 단어를 골라 가며 신중히 문장을 작성하는 모습이다. 그냥 넘기기에는 이 몇 주간, 배우의 매니저 노릇을 하면서 본 것이 있었다.

그는 남지유가 갑작스럽게 이사한 집에 장승처럼 서 있던 덩치들을 떠올렸다. 영화 촬영이 끝나자마자 도망치듯 해외로 나갔던 것도, 그 후 조폭들이 지유를 찾아왔다던 도엽이의 말도 전부 불안을 가중시켰다. 그대로 몇 주를 연락조차 없어 걱정시키더니, 스케줄을 열흘 앞두고 겨우 전화가 왔었던 것도 수상했다. 성질은 더러워도 책임감은 강해서 함께 일하던 몇 년 동안 연락이 안 된 적 없던 배우였다. 뒤에서 마약이나 빨고 난교나 즐기며 속 썩이는 배우들과는 성향부터가 달랐다. 성격만 모난 모범생이었던 그에게 몇 달 사이 큰 비밀이 생긴 것 같다. 그간 아이돌을 키워 본답시고 지유에게 너무 무심했었다.

“너, 형이 들은 게 있어. 똑바로 말해.”

“들은 게 뭔데?”

“네가, 사채를 썼다가 못 갚아서 깡패들한테 스폰을 받는다고…….”

“뭐?”

신호가 다시 바뀌었다. 대표는 전방을 주시하며 제가 들었던 소문을 더듬었다.

“깡패들한테 사모님을 소개받아서 만난다던데, 그걸로 빚 갚는다고. 사실이냐?”

“…형은 그 말을 믿어?”

“네가 갑자기 이사한 것도 그렇고, 그, 집 앞에 있던 이상한 깡패들도 그렇고…… 지유야, 형은 너무 걱정된다. 별일 없는 거 맞지?”

“아, 됐어. 무슨 말을 하나 했네.”

내심 철렁했던 남지유는 이어진 말을 듣고 아주 안심하여 고개를 내저었다. 차라리 남자들한테 후장 팔고 다닌다는 소문이 났다면 기겁하여 소문의 근원지부터 찾았을 것인데 이건 아예 헛다리였다. 웃음까지 날 지경이다.

대표가 무어라 다시 말을 걸려고 하였으나, 남지유는 여전히 누군가와 문자를 나누느라 정신이 없다. 대표는 백미러만 흘끔거리다가 결국 입을 다물었다. 오랫동안 형 동생으로 알고 지낸 만큼 스폰이라는 불미스러운 이야기를 계속 입에 담기 그랬다. 그런 의심을 가지는 것부터 미안했다.

밴이 고급 빌라 단지 앞에 멈췄다. 대표는 조수석에 있는 짐을 챙겨주며 남지유를 보았다. 배우를 떠보느라 시사회 중에 연락이 왔던 걸 깜빡했었다.

“맞다, 지유 너 차 광고 관심 있냐.”

“마시는 거? 아님 타는 거?”

“타는 거. 이번에 A사에서 신차를 발매했는데, 우리한테 살짝 언질이 와서. 널 쓰고 싶다더라. 짧게 오디션은 봐야 한다지만.”

“좋은 소식인데 왜 눈치를 봐?”

가방을 건네받은 남지유가 웃음을 짓는다. 대표는 헛기침을 하며 어렵게 말을 꺼냈다.

“그, 형이…… 의심했다고 기분 상한 건 아니지?”

“형도 참 쓸데없는 걱정이 많다. 명색이 엔터 대표라는 사람이 삼류 찌라시에 휘둘리기나 하고 말이야. 일단 내일 얘기해. 나 피곤해.”

“그래. 일단 쉬고, 내일 다시 얘기하자. 들어가.”

남지유는 산뜻 인사를 하고는 밴에서 내렸다. 몇 달 전만 해도 예민한 성정이 극에 달해 있었건만, 거짓말처럼 순해졌다. 여전히 까탈스럽기는 했지만 예민하지 않았고, 쉽게 화를 내는 법도 없었다. 그때는 영화 촬영이 뜻대로 되지 않아 날카로워진 줄 알았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게 전부는 아니었던 것 같다.

대표가 멀어지는 남지유의 뒷모습을 가만 응시한다. 훤칠하게 키가 큰 배우는 곧 보안이 철저한 고급 빌라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입구를 통과하는 데에도 생체정보가 필요한지라 이제는 남지유의 안내 없이는 발을 디딜 수조차 없었다. 사생활이 완벽하게 보장되는 건물이라 돈 많은 여사들이 애인에게 사 주기로 적합한 곳이기도 했다. 대표는 새카만 입구를 바라보며 불안한 상상과 조건 없는 신뢰 속에서 고민하다가, 이내 야릇한 추측을 떨쳐 내고는 차를 돌렸다.

* * *

개봉 이후로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흘러갔다. 영화는 순조롭게 흥행 가도를 달리고 있고, 덩달아 배우로서 몸값도 올라가고 있었다. 대중에 눈도장을 확실히 찍어 놓을 중요한 시기에 영화 하나에만 매달린 보람이 있었다. 억 단위 개런티를 제안하는 광고가 물밀듯이 밀려들어왔다. 아직 계약한 건은 하나도 없건만 삼류 기사에서는 벌써 그가 벌어들인 금액을 추정하고 있었다. 터무니없었으나 믿을 사람은 믿었다. 남 잘 되는 꼴은 죽어도 못 보는 사람들이 천지였다. 이러니 광고 하나 결정하는 데에도 신중에 신중을 기하게 되기 마련이다. 그는 소속사 팀장들과 회의 끝에 광고를 하나 정했다. 일전에 대표가 물고 왔던 차 광고였다. 배려심이 넘치는 광고주는 바쁜 배우의 스케줄에 맞추어 약속을 잡아 주었다.

회사 차를 타고 약속 장소인 특급호텔에 도착했을 때는 해가 저물어가는 중이었다. 이미 내정된 자리지만 간단히 면접을 볼 예정이라 했다. 주차장에 내리자 쪽머리를 한 직원이 깍듯하게 인사를 해 왔다.

“남지유 님, 이쪽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그러더니 따라나서려는 대표를 정중히 막아선다.

“죄송합니다. 남지유 님만 올려 보내라는 지시가 있어서요.”

“간단히 얼굴만 본다고 하셨는데…… 오래 걸린다고 하십니까?”

“그에 관련해선 따로 말씀이 없으셨습니다.”

대표가 걱정스러운 듯 남지유를 바라본다. 설마 혼자 면접도 못 볼까 봐 그러는지, 배우활동만 벌써 몇 년째인데 여전히 걱정이 많은 형이었다. 남지유는 대수롭지 않게 웃었다.

“내가 애도 아니고. 시간 늦었으니까 먼저 들어가. 형수 기다리시잖아.”

“알았다. 끝나면 연락해.”

안내를 나온 직원과 VIP 전용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정중한 미소를 머금은 직원은 남지유를 높고 깊은 방으로 안내해 주었다. 오는 데에만 출입카드를 세 번이나 사용해야 하는 특급호텔의 미팅 룸은 스위트룸처럼 꾸며져 있었다. 높은 분들은 종종 호텔에서 미팅을 한다더니 시설부터가 남다르다. 그는 고급스러운 홀을 구경하며 직원의 뒤를 따랐다. 직원이 멈춘 곳은 커다란 문 앞이었다.

“전무님은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전무님? 의문을 갖기도 전에 문이 묵직하게 열렸다. 아무래도 이상했다. 직원을 부르려 하기가 무섭게 뒤에서 곧장 문이 닫혔다. 커다란 미팅 룸에는 누군지 짐작되는 바가 있는 남자와 남지유만이 남았다. 스멀스멀 불길한 예감이 올라온다. 남지유는 뻣뻣한 고개를 돌려보았다. 룸 안쪽, 가죽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아 있는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단추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단정한 쓰리피스 정장, 누구에게나 호감을 살 만한 미소를 짓고 있는 남자는 백이선이었다. 그가 산뜻 인사를 건네 왔다.

“오랜만에 뵙네요. 잘 지냈습니까? 얼굴은 전보다 좋아졌군요.”

마지막에 어떻게 헤어졌는지를 생각하면 참으로 뻔뻔스러운 인사말이었다. 백이선의 수작질 때문에 겪은 일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열이 뻗쳤지만, 스스로 자초한 일이었다. 위험한 줄 모르고 손을 잡은 것이 아니었다. 남지유는 문간에 선 채로 답했다.

“……저한텐 아예 손 떼신 줄 알았는데요.”

“제가 남지유 씨 오랜 팬이라고 말씀드리지 않았었나요. 잘 크도록 지원해 드리고 싶은 마음은 여전합니다. 앞으로도 변함없을 거고요.”

“어떤 팬이 응원하는 마음으로 따먹을 생각을 한답니까?”

“남지유 씨는 자기 팬들이 어떤지 잘 모르는 모양이군요. 뭐, 됐습니다.”

대가를 받고 지원을 해 주었던 놈이 말은 번지르르하게 한다. 심지어 남지유가 그 영화에 남다른 애착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안 후에는 제작 지원을 빌미로 침대에 끌어들였었다. 수십억에 달하는 화대를 지급한 백이선은 촬영장에서도 거리낌 없이 남지유의 가랑이를 벌렸다. 그리고 당연한 권리를 취하는 것처럼 그 속을 탐했다.

영화 촬영 중 고되었던 기억은 오로지 백이선과 권성하가 관련된 것뿐이었다. 이미 잊힌 줄 알았던 지난한 기억들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백이선이 A사의 임원이라는 건 알고 있었으나, 이번에 계약 이야기가 나온 계열사까지 주무르고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다. 자신을 싸고도는 권성하의 유난스러움에 백이선과의 문제는 진작 해결되었으리라 어림짐작했던 것도 사실이다. 아직도 제 뒷구멍에 관심이 지대하단 사실을 진작 알았더라면 이 호텔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남지유는 그러리라 생각했다.

“앉아요. 지유 씨. 나쁜 얘기하자는 것도 아니고, 일 얘기하자는 거 아닙니까.”

소파에 기대앉은 백이선이 맞은편 자리를 권한다. 남지유는 미간만 살짝 찌푸릴 뿐 움직이지 않았다. 백이선은 그를 사탕 주는 어른을 경계하는 어린아이 보듯 지켜보았다. 눈매가 부드럽게 풀렸다.

“나쁜 짓 안 해요. 지유 씨가 동의하기 전에는.”

“그때 그렇게 엿을 먹여놓고요?”

“미안해요. 많이 반성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 계약에 남지유 씨를 추천한 거예요.”

“…….”

단순하게 성질을 부리기에는 이번 계약이 갖고 있는 의미가 여러모로 컸다. A는 누가 뭐래도 국내 굴지의 기업이었고, 들어온 제의는 그곳에서 야심차게 내놓은 신차 광고였다. 브랜드 광고 중에는 최고로 쳐주는 차 광고를 파격적인 개런티와 함께 제안해 온 것이다. 배우로서, 혹은 연예인으로서 입신양명의 야망을 가진 그로서는 쉽게 거절할 수 없는 조건이었다.

남지유의 머릿속에 주판이 빠르게 굴러갔다. 권성하가 지금 억대 선물을 양손에 넘치도록 쥐여 주며 아낀다고 한들 그에게 성공의 발판을 놔줄 수 있는 남자는 아니었다. 남지유가 머뭇거릴수록 백이선의 눈매에 웃음이 스며들었다. 미안하다, 반성하고 있다며 납작 기는 체를 해도 결국 먹이사슬 최상단에서 내려와 본 적 없는 남자였다. 태도에서 여유가 엿보였다.

“내가 지유 씨를 도울 수 있게 해 주세요. 사죄의 의미로.”

“……사람 낚는 수법이 여전하시네요.”

“그런데도 여전히 넘어가 주시는 배려에 감사드려야 할까요?”

“당신 존나 재수 없는 거 알죠?”

“하하하. 발끈하는 게 참 귀엽네요. 지유 씨는.”

사실 이 거래에서는 주판알을 굴릴 필요도 없었다. 거액이 오고가는 것은 제쳐 놓더라도 이름값을 확실히 올릴 기회였다. 그걸 알기 때문에 백이선은 이런 조건을 제시해 온 것이다. 영악하기 그지없는 남자였다. 문간에 그저 서 있기만 하던 남지유가 천천히 안으로 걸어 들어온다. 최고급 카펫이 깔린 룸에서는 발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백이선이 고른 밀회장소는 누구든 쉽게 들여다볼 수 없게끔 높고 깊은 곳에 숨겨져 있었다. 부디 권성하의 눈이 닿지 않길 바랄 뿐이다.

백이선은 제 앞에 선 남지유를 바라보았다. 긴장한 듯, 혹은 못마땅한 듯 잘생긴 이마를 찌푸리고 있는 그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어떻게 스스로 옷을 벗게끔 만들까 고민하다, 영화로 융통되는 자금을 막아 버린 보람을 한껏 느끼게 해 주었던 얼굴과 몸이다.

“당신이 욕심 많은 사람이라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어요.”

손가락이 손가락사이로 얽혀든다. 가볍게 가해진 힘은 욕심 많은 배우를 가까이로 끌어당겼고, 배우는 순순히 이끌려갔다. 남지유는 소파 팔걸이에 걸터앉은 채 권성하를 떠올렸다. 매일 밤 자신을 품에 안고 은밀한 곳까지 샅샅이 더듬는 그가 외도를 눈치채지 못하리란 기대는 되지 않았다. 그런데, 당장 몸을 섞자는 게 아니지 않는가. 사과라는 명분으로 내놓았으니 섹스는 뭐 요령껏 피하면 그만이었다.

긴장으로 입술이 마른다. 달음박질을 치다 온 것처럼 가슴이 뛰었다. 남지유가 문득 손을 떨쳐 내며 몸을 일으킨다. 그는 자신을 올려다보는 백이선에게 말했다.

“정말 제 화를 풀 목적이시라면 계약부터 확실히 하죠.”

섹스만 안 하면 되지. 적적한 사장님 대화상대 되어 주고, 데이트해 주고, 가끔 키스나 좀 해 준다면 권성하는 절대 모를 것이다. 능구렁이의 속내를 들여다볼 수 없는 남지유는 안일한 생각으로 한 발을 내디뎠다. 욕심 많은 사람의 속은 더 욕심 많은 사람이 알아보는 법이다. 백이선은 제 그물로 걸어 들어온 남지유를 보며, 아무것도 모르는 선량한 호구처럼 산뜻 웃었다.

“이번엔 지유 씨가 곤란할 일 없게끔 하겠습니다.”

맘에도 없는 말이나 해 대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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