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 호상일 수도 있었는데 (6/11)

6. 호상일 수도 있었는데

마지막 신 촬영이 진행 중인 현장은 묘하게 들뜬 분위기였다. 외워 놓은 대본 역시 점차 막바지에 접어들고 있었다. 고고한 자세를 유지하는 중에도 밤새 시달린 근육이 욱신거렸다. 어젯밤 백이선은 토라진 그를 그냥 재우지 않았다. 굴욕과 수치를 안겨 준 섹스로도 모자라 애인에게 하는 것처럼 다정하고도 집요히 괴롭혀 댔다. 오늘 아침에는 근육통을 호소하는 그를 위해 손수 마사지까지 해 주었다.

‘짐승 같은 새끼…….’

아니, 집중하자. 남지유는 밖으로 튀어 버리려는 사고를 붙잡고 연기에 집중했다. 그나마 대사 없는 단독 신이라 다행이었다. 속눈썹만 내리깔아도 여심을 울리는 잘난 외모는 어수선한 속내를 우수에 젖은 분위기 따위로 용케 포장해 냈다. 카메라가 그 옆선을 따라잡는다.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는 짧은 떨림까지 도착적일 만큼 섬세하게 담겼다. 잠깐의 정적 후, 드디어 끝을 알리는 말이 나왔다.

“컷! 잘했어!”

“하아, 고생하셨어요.”

“다들 수고했어요!”

현장 분위기가 순식간에 풀어졌다. 촬영장 곳곳에서 수고했다는 인사말이 터져 나왔다. 서로 밝게 나누는 인사말에는 촬영이 끝난 것을 기껍게 여기는 뜻도 있겠으나 아까부터 돌아가던 카메라 탓도 있었다. 남지유는 조 감독과 함께 다가온 카메라를 보고 의식적으로 미소 지었다. 촬영이 재개된 뒤부터 틈틈이 찍어 온 제작영상이었다.

“고생하셨습니다.”

“고생했어요, 지유 씨. 촬영 끝난 기념으로 한마디 해 주세요.”

“아, 이렇게 바로 인터뷰 들어가는 건가요?”

절로 손목으로 시선이 갔다. 시계가 걸려 있지 않아 지금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가늠도 되지 않았다. 이 추가 촬영이 얼마나 길어질지도 장담 못하는 바였다. 권성하 혹은 백이선의 끄나풀이 오기 전에 촬영을 끝마치고 서둘러 공항으로 떠야 했다. 감독에게는 이미 급한 일이 생겨 뒤풀이에 참석하지 못한다고 운을 떼어 놓긴 했지만, 막상 아쉬워하며 잡을 그를 떼어 놓을 시간도 고려해야 했다. 초조함이 불쑥 올라왔다. 숙련된 배우는 회사에서 지겹게 레슨 받았던 대로 정석적인 답변을 꺼내기 시작했다.

“사실…… 뜻하지 않게 쉬는 기간이 길었잖아요. 감독님이 연락 주신다고 해 놓고서는 몇 달을 말씀이 없으셔서 이 영화 못 나오나 싶었거든요.”

남지유는 장난스럽게 덧붙이며 웃고는 쑥스러운 척 앞머리 부근을 매만졌다. 상투를 곱게 틀어 잔머리 한 올 잡히지 않는 대신 매끈하게 뻗은 눈썹산만 만져졌다. 내리깔린 속눈썹이 잘게 깜빡였다. 그 자잘한 시선 처리 하나하나가 몽땅 계산속이었다.

“무사히 촬영이 재개돼서 얼마나 안심했는지 몰라요. 제가 정말 존경하는 감독님과 작품을 함께할 수 있단 것만도 영광이어서…… 선배님들, 또 동료 배우들 연기를 보며 배울 점도 많았어요. 영화를 찍으면서 배우로서도 많이 배운 것 같아 기쁩니다. 즐거웠어요.”

성실한 답변 태도는 한시라도 빨리 보내 주길 바라는 불성실한 속내에서 발아된 것이었으나 외려 질문을 하나 더 불러오고 말았다.

“그러고 보니 촬영 도중에 우셨다고 들었어요. 힘든 일이 있었나요?”

남지유는 슬금슬금 치미는 짜증을 난감한 웃음으로 감췄다.

“아……. 이거 꼭 말씀드려야 해요? 창피한데……. 모른 척해 주세요.”

“말해 줘, 내가 지유 씨 괴롭혔다고 이상한 소문 났어.”

“네? 그런 소문도 났어요? 아니에요, 아닙니다. 감독님이 절 얼마나 잘 챙겨 주셨는데요.”

그 얘기가 벌써 그렇게 퍼졌나. 아무리 그래도 그걸 마케팅에 써먹으려고 해? 백이선에게 붙잡혀 억지로 몸을 바치고 온 게 바로 어제다. 시간이 빠듯해 울음기를 지우지 못한 채 돌아갔더니 그새 그가 촬영 중에 울었다는 뜬소문이 퍼지고 말았다. 추측도 다양했다. 감독에게 처참하게 깨졌다느니, 역에 과몰입했다느니, 선배에게 혹독한 말을 들었다느니. 그저 혹독한 좆질에 처참하게 깨졌을 뿐이었는데 말이다.

“그럼 이번에 아니라고 확실히 해명하시는 건 어때요.”

“하하하. 따로 해명할 만큼 대단한 이유는 아닌걸요. 그냥 연기를 하다 보니 북받쳤던 게 있었던 모양이에요.”

회피할 궁리를 하던 남지유는 멀리서 케이크를 든 스태프를 발견하자 천연덕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와, 커팅식 하는 거예요?”

“맞다. 그거랑 뭐…… 기념사 하는 것도 찍어야지.”

“감독님 원래 이런 거 안 챙기셨잖아요.”

“어쩌겠어요. 볼륨 두껍게 채워서 뽑아 주겠다는데 시키는 대로 해야지.”

투자자…… 백이선 오더인가 보네. 남지유는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백이선은 영화에 아낌없이 투자를 해 주었지만 간혹 비즈니스인지 단순한 흑심인지 헷갈리는 요구를 해 오곤 했다. 제작영상이랍시고 촬영 내내 남지유를 쫓아다니던 카메라가 적절한 예다.

“다들 이쪽으로 오세요. 하나만 더 찍고 진짜 끝냅시다!”

조 감독이 촬영장 곳곳에 있는 배우들을 불러 모으기 시작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영화의 무대였던 장소로 민낯의 배우들이 속속 모였다. 이제야 정말 촬영 여정이 끝났다는 게 실감이 났다. 시원섭섭한 기분으로 서 있던 남지유는 조 감독의 호명을 받고 정신을 차렸다.

“그럼 지유 씨가 기념사 읊는 걸로 할까?”

“이런 건 감독님이 하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무슨 소리. 우리 지유 씨가 이 영화 제일 오래 기다려 줬는데. 최고 공헌자한테 기념사를 읊을 영광을 돌리겠습니다.”

“이걸 이런 식으로 넘기시네.”

“지유 씨 기념사 기대된다. 그죠?”

몰아가는 분위기가 됐으니 더 빼 봤자 분위기만 망칠 뿐이었다. 결국 총대를 넘겨받은 남지유가 ‘파이팅’이라는 재미없고도 무난한 기념사를 정했을 때는 장난스러운 야유가 터져 나왔다. 어차피 어떤 기념사를 꺼내든 놀림을 받았을 테니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그동안 다들 고생 많으셨습니다. 그럼 초 끄고 다 같이 기념사해요.”

파이팅, 웃음기 어린 목소리들이 그의 목소리를 복창했다. 초가 꺼지고 곳곳에서 박수가 터졌다. 오랫동안 질질 끌었던 영화가 드디어 끝이 나는 순간, 아이러니하게도 남지유는 권성하를 떠올렸다. 그 뒤를 이어 화대로 영화 제작 지원금을 출자해 준 백이선도 떠올렸다. 로맨틱한 함유는 전혀 아니었다. 영화 촬영 내내 그를 안팎으로 괴롭힌 면면들일 뿐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것도 끝이다. 아침부터 대표를 닦달하여 결국 퀵으로 전달받은 여권은 매니저가 보관 중이었다. 오늘부로 어디 공기 좋고 물 좋은 곳으로 떠나, 당분간 핸드폰은 거들떠도 보지 않을 것이다. 매끄럽게 흘러나오는 웃음에 드디어 후련함이 걸렸다.

* * *

“도엽아, 나 여권은?”

“형 가방에 넣어 드렸어요. 근데 제가 진짜 운전 안 해 드려도 괜찮아요?”

“어. 그냥 택시타고 가면 돼. 조용히 휴가 가는 거니까 누가 물어봐도 나 공항 갔다고 하지 말고.”

“네, 형.”

남지유는 마지막 촬영의 기념 촬영까지 끝나고 나서야 겨우 풀려날 수 있었다. 그를 뒤풀이로 데려가고 싶어 했던 조 감독이 유감을 표했지만 끈질기게 붙잡진 않았다. 나중에 꼭 식사를 함께하겠다는 약속을 해야 하긴 했지만.

평상복으로 갈아입은 그는 매니저가 가져다준 가방을 뒤적거렸다. 넉넉한 가방 안은 백이선이 봤다면 ‘당신 머릿속 같네요.’라는 말을 들었을 만큼 든 게 없었다. 사실상 여권과 카드 한 장만 있으면 되는 일탈이었다. 더 확인할 것도 없었다. 형, 여권을 체크하는 그를 매니저가 조심스럽게 불렀다. 표정에 걱정이 넘실거리는 상태였다.

“형, 그런데…… 혹시, 사채 같은 거 쓰셨어요?”

“뭐? 내가 미쳤냐?”

“아뇨! 그게. 쫓기는 사람처럼 구시니까 혹시나 하고…….”

“도엽아.”

“넵.”

“형은 사채 안 써도 돈 많아.”

“넵…….”

걱정스럽던 얼굴에 납득으로 만들어진 안도감이 흘렀다. 저 한마디로 납득할 것이었으면 왜 물었는지 모를 일이다. ‘사채’라는 단어 탓에 반갑지 않은 얼굴만 떠올랐다. 돈 굴리는 놈들 특유의 끈질긴 추격 솜씨는 덤으로.

설마 이 지방에까지 사람을 붙여 놓진 않았겠지. 남지유는 무럭무럭 자라나려는 불안을 애써 털어 내고 가방을 들쳐 멨다. 이제 와서 걱정해 봤자 할 수 있는 건 없다. 늦지 않게 출발하는 게 최선이었다.

“형, 전화 온 것 같은데요.”

“……아, 씨발.”

매니저가 가져다준 핸드폰 화면에는 익숙한 하트가 떠 있었다. 전화를 하는 타이밍이 기가 막혔다. 어쩌면 정말 사람을 붙여 놓은 건지도 모르겠다. 골이 띵했으나 포기하기에는 아직 일렀다.

“넌 곧장 호텔로 가라. 누가 와도 없는 척해.”

“형 진짜 괜찮으신 거 맞죠? ……저도 괜찮은 거 맞죠?”

“…….”

괜찮다고 말해 줘야 하는데 양심이 찔린다. 문득, 권성하가 조폭으로서의 기개를 보여 주었던 날이 스쳐 지나갔다. 다정한 척, 신사다운 척. 온갖 척은 다 해 놓고 외박 한 번 했다고 부하들에게 그를 돌릴 생각까지 했었던 날 말이다. 외박 한 번에 콘셉트질을 때려치울 만큼 단번에 빡돌아 그 지랄을 떨었는데 그가 사라진다면 어떤 짓을 할지 모른다. 그제야 대표와 매니저가 연좌제로 말려들진 않을지 맘에 걸렸다. 만신창이로 자신을 맞아 주었던 최 사장의 모습도 떠올랐다.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씨발…… 설마 그러진 않겠지?’

설마 남배우 하나 때문에 그런 쪼잔한 짓을 할까 싶다가도, 외박 한 번에 존나 쪼잔해졌던 권성하를 생각하면 그럴 것도 같다. 아쉬워지면 본전 생각부터 하는 게 고추 달린 놈들 심보 아니던가. 현금을 다발로 안겨 주고 숨만 쉬어도 예뻐 죽겠다며 들러붙었지만, 한창 좆질 하는 재미에 미쳐 있는 남자가 속삭이는 달콤함 따위에 현혹되어선 안 됐다. 남지유는 스스로에게 되새겼다. 성은 입은 총비라도 된 기분이라 착잡해졌다. 그가 계속 울리는 전화를 미루며 다시금 나갈 채비를 시작했다.

“괜찮을 거야. 혹시 안 괜찮으면 그냥 나한테 전화해.”

“네?! …형, 저 지금 좀 쫄리는데요.”

“진짜 쫄리기 전에 호텔로 들어가 있어. 그럼 나 간다.”

“형!”

“얼른 들어가.”

만약 찾아온다고 해도 목적은 어차피 자신일 테니 사실대로 불기만 하면 아무 문제 없을 것이다. 벌써부터 괜히 나쁜 경우를 상정할 필요는 없었다.

마음을 다잡은 남지유가 모자를 깊이 눌러쓰며 밖으로 나선다. 얼마 안 가 콜택시 기사의 문자가 도착했다. 지정된 장소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문자였다. 다행히 오늘 촬영지는 번화가에서 멀지 않은 곳이라 장소까지도 금방이었다. 따지자면 5분도 걸리지 않았다. 절대 먼 거리가 아님에도 쫓기는 사람처럼 심장이 벌렁거리기 시작했다. 감시가 붙었다는 심증 때문에 뒷덜미를 붙잡힐까 싶어 조마조마하기까지 했다. 남지유는 긴 다리를 휘적거리며 콜택시를 향해 뛰었다. 손에 꼭 쥐고 있는 핸드폰이 다시 한번 울렸다. 누군지는 안 봐도 뻔했다.

“씨발.”

얼마 뛰지 않았는데 숨이 찬 듯한 느낌이다. 실제로 숨이 차진 않았으니 긴장한 것이 맞았다. 그는 잠깐 심호흡을 하고는 전화를 받았다.

“네.”

- 촬영은 다 끝났다는데 왜 이제 받아. 걱정했잖아. 응?

어젯밤 일은 없던 것처럼 능청스러운 목소리였으나 방금 끝난 촬영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남지유는 흠칫하여 주변을 둘러보았다. 당연한 일이지만 평범한 일반인인 남지유 눈에는 딱히 수상한 점이 보이지 않았다. 묘한 기시감을 그저 기분 탓이라 믿고 싶었다.

“잠깐 옷을 갈아입느라… 못 봤어요. 죄송해요.”

- 그랬어. 눈은 안 부었고? 예쁜이 어제 많이 울어서 촬영은 잘 했을지 걱정이네.

지금 굳이 어제 일을 꺼내는 건 아마, 화가 나셨으니 알아서 달래라는 의도일 것이다. 정작 어젯밤의 굴욕은 두 남자 앞에서 발랑 벗겨졌던 남지유의 몫이었는데 말이다. 권성하에게도 굴욕이 있었다면 ‘자기 여자’가 딴 놈과 놀아났다는 것 정도이리라.

어젯밤 일을 떠올리니 겨우 진정시킨 심기가 뒤틀렸다. 백이선에게 처박히며 오빠, 오빠 하며 울었던 기억은 두 남자에게 동시에 능욕을 당한 듯한 기분을 선사했다. 맘껏 화를 낼 수 없는 처지임에도 사람은 사람인지라 반발심이 솟구쳤다. 그는 발끈한 심정을 고분고분한 어조에 섞어 흘려보냈다.

“네. 전무님이 직접 마사지를 해 주셔서요. 덕분에 붓기가 많이 빠져서 티 하나도 안 났어요. 걱정 마세요.”

- 음, 지유야.

“……네.”

- 그거 지금 질투하라고 그러는 거야?

“…….”

- 그런가 보네. 하하…… 뭘 믿고 그렇게 귀여운 짓만 골라서 해?

깜찍해 죽겠네, 아주. 권성하가 한참을 웃었다.

- 지유야. 오빠 지금도 많이 참고 있어. 여기서 더 질투하면 지유가 무서워할까 봐. 응?

“……그런 뜻은, 아니었어요. 오해하지 마세요.”

- 봐. 벌써 겁먹었잖아. 으응? 이런데 오빠가 어떻게 더 질투를 해.

“……죄송해요.”

- 기죽지 말고. 오빠 화 많이 안 났어. 지유가 그냥 오빠 말 잘 듣고, 예쁘게 웃기만 하면 금방 풀리는 거 알지?

대로변으로 향하던 발걸음이 멈칫한다. 멀리 정차된 택시가 보였다. 어쩌면 이대로 돌아가서 권성하를 달래 주는 게 최선일지도 모른다. 애초에 그가 벌였던 일이었다. 이런 일이 생길 수도 있단 걸 알면서도 영화가 욕심나 백이선의 제안을 받아들였었다. 책임을 져야 했다. 권성하와 어떠한 관계도 되고 싶지 않은 것과는 별개로 말이다. 그런데…….

‘씨발 내가 만나 달라 그랬어?’

싫다는 사람 붙잡고 연애하자는 개소리를 했던 게 누군데 왜 내가 기어야 하지? 새삼스럽게 열이 올랐다. 권성하든 백이선이든 다 지들 좆대로 굴면서 계산은 정확하게 받아 갔다. 시간 내서 웃어 주고 대 줬더니 이제는 마음까지 계산에 넣으려고 드는 게 뻔뻔스럽기 짝이 없었다. 화를 지르고 싶었으나, 여전히 갑일 수 없는 남지유는 열심히 참았다. 그가 목구멍까지 올라온 욕을 간신히 참고 배우다운 능숙한 감정 처리를 해냈다.

“죄송해요……. 저는, 그분이, 영화 도와준다고 하셔서……. 정말 기대하던 영화라 꼭 찍고 싶었어요. 기대를 저버려서 죄송해요.”

- 말하는 것도 예뻐, 지유는. 이러니까 오빠가 화를 못 내지. 응?

“…….”

- 호텔에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 차 보내 줄 테니까.

“네…….”

- 착하네.

권성하는 조금 이따 보자는 살벌한 인사를 남기고는 전화를 끊었다. 동시에 남지유는 콜택시를 향해 뛰었다. 택시에 오른 그가 급하게 말했다.

“인천공항으로 가 주세요.”

* * *

아무래도 걱정이 된다.

매니저 도엽은 밴을 호텔로 운전하며 거치대에 놓인 핸드폰을 확인했다. 제멋대로 굴긴 하지만 그건 배우들 특성이 다 그러했고, 제 배우는 딱히 심한 편도 아니었다. 다만 이렇게 충동적으로 군 적이 없어 찝찝하다. 집 밖으로 잘 나가지 않는 기질을 알기 때문에 더 수상쩍어 보이기도 했다.

“역시 대표님께 연락을 드려 봐야 하나?”

오전에 짧게 연락을 하긴 했지만 대표님도 많은 걸 알고 있는 기색은 아니었다. 도엽은 지갑과 여권만 달랑 들고 떠난 제 배우 걱정을 지울 수가 없었다. 몰래 만나는 사람이 있나, 심경에 변화가 생겼나…… 돌이켜 보면 재촬영을 시작한 이래 그가 편하게 있는 걸 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갑자기 핸드폰을 들고 사라지는 일도 잦아졌다. 어제는 울어서 빨개진 눈을 하고 돌아오기도 했었다. 혹시 정말 연애를 하나?

“그 성격에…….”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낸 말에 깜짝 놀랐다가, 차에 남지유가 없음을 깨달은 도엽이 겨우 한숨을 내쉰다.

원래라면 남지유를 태우고 있었을 밴은 매니저만 탄 채로 호텔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체크아웃은 내일 예정이었다. 하루 정도는 호텔에서 쉬다가 짐을 챙겨 돌아가면 될 것 같았다. 형 짐도 내일 집에 갖다 놓으면 되겠지. 도엽은 나름대로 계획을 세우며 호텔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거치대에 두었던 핸드폰을 회수하고 가방을 챙겨 내리는데, 그 앞을 웬 장정들이 가로막았다. 하나같이 체격이 건장한 남자들이었다. 순간 백이선이 데리고 다니던 말끔한 경호원들이 떠올랐으나 이들은 그보다 좀 더 날것 느낌이 났다. 한마디로 조폭 같았다. 도엽이 주춤하는 사이, 그 조폭들은 아직 열려 있는 운전석 문을 잡고 뒷좌석 잠금장치를 풀었다. 그러고는 차를 제멋대로 열어 안을 살폈다.

“안 계신데. 이 차 맞아?”

“차 번호는 맞잖아. 이 사람 얼굴도 맞고.”

“무, 무슨 일이세요?”

도엽이 겁에 질린 채 간신히 질문했다. 조폭들의 험상궂은 시선들이 한 번에 꽂혀 들었다.

“여기 남지유 님 안 계십니까?”

“지유 형, 이요? 지유 형은 왜 찾으시는지…….”

“그건 알 필요 없고요. 어디 계신지만 알려 주쇼.”

“그렇게 물으면 알려 주겠냐? 이봐요, 우리 나쁜 사람들 아닙니다. 지유 씨가, 우리랑 어딜 좀 가기로 했는데 안 보이네? 어디 갔는지 알아요?”

알아도 절대 알려 주면 안 될 것 같은 사람들이었다. 도엽은 가방을 구명줄처럼 안은 채로 번뇌에 휩싸였다. 아직 점잖은 태도를 보이고 있었지만 어떻게 돌변할지 모르는 일이다. 이쯤 되니 정말 지유 형이 사채를 쓴 게 아닌지 의심될 지경이다.

“정확한 신분을 알려 주지 않으시면 말씀드릴 수 없, 습니다. 죄송합니다…….”

“지금 우리가 좀 급해서. 그쪽이 자꾸 고집부리면 조금 곤란해질 것 같은데.”

빠득 소리가 나는 쪽으로 뻣뻣한 시선이 돌아갔다. 차 문을 우그러뜨릴 기세로 쥐고 있는 손은 솥뚜껑만 했다. 항상 그렇듯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까운 법이다. 도엽은 남지유가 말했던 ‘안 괜찮은 상황’이 바로 지금을 뜻하는 것임을 눈치챘다.

“아, 아뇨. 아닙니다. 지금 지유 형 여기 없어요.”

“뭐요? 그럼 어딜 가셨는데.”

“급한 일이 있어서 먼저 서울로 가신다고…… 저도 그것만 알아요. 전 여기 짐만 챙기러 온 거예요. 잘 모릅니다.”

“씨발, 이거 진짜 좆됐네. 언제 갔어요?”

“그, 그러니까…… 삼십 분쯤 된 것 같습니다…….”

그 말에 도엽을 추궁하던 조폭들이 어수선해졌다. 각각 어디론가 전화해서 보고하고 수배를 내리는 것 같은 말들이 오갔다. 도엽은 급하게 차에 오르는 조폭들을 보며 겨우 한숨을 돌렸다. 그러기가 무섭게 등골 오싹한 불안이 치밀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이대로 만약 지유 형이 잡힌다면 큰일이 날 것 같았다. 그는 재빨리 호텔로 들어서며 핸드폰을 꺼냈다.

* * *

택시는 무사히 공항에 도착했다. 매니저의 걱정 가득한 전화를 받았던 남지유는 곧장 카운터로 달려가 가장 대기 시간이 짧은 티켓을 구매했다. 라운지부터 외부와 격리되어 있는 일등석 티켓이었다. 안경과 모자, 마스크를 써 가며 가리긴 했으나 훤칠한 키와 남다른 비율은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라운지로 향하는 중에도 몇몇이 말을 걸어오려는 걸 피하느라 진을 뺐다.

“이게 뭐 하는 짓인지…….”

파티션이 쳐진 공간 중 가장 구석진 자리에 앉고 나서야 남지유가 한숨을 돌렸다. 토요일 저녁 예능에 나가서도 이만큼 열심히 뛰어 본 적이 없었다. 눌러쓴 모자를 벗고 이마를 훔치자 땀이 잡혔다.

평일의 한중간. 낮도 저녁도 아닌 애매한 시간대의 라운지는 직원과 승객 한둘을 제외하고는 조용했다. 이륙까지 남은 시간은 삼십 분 남짓이었다. 남지유는 초조하게 손목시계를 매만졌다. 일 분, 이 분, 삼 분…… 느리게 흘러가는 시간에 애간장이 녹아내리는 것만 같았다. 괜히 입이 말라 테이블에 세팅되어 있던 생수병을 열어 들이켰다. 마른입을 축여도 초조함이 가시지 않았다. 좀처럼 가만둘 수 없는 손끝이 입술과 안경테, 시계를 번갈아 스쳤다.

지잉―.

그때, 내내 조용하던 전화가 울렸다. 예상한 바였다. 오히려 생각보다 늦어 슬슬 의심이 될 정도였다. 조용한 라운지에는 승무원이 몇 안 되는 승객들에게 탑승 안내를 하는 모습만 덩그러니 보였다. 남지유는 한참 망설이다가, 전화를 받았다.

“…….”

오빠 전화를 받을 때면 살갑게 붙던 인사말은 없었다. 수화기 너머에서 무언가 참는 듯한 한숨 소리가 샜다. 그것만으로도 피식자는 털이 곤두섰다. 그럼에도 극복해 내야만 했다.

- 어디야.

“…….”

- 지유가 뭐가 맘에 안 들어서 자꾸 토라질까…. 오빠가 화 안 냈다고 지유 많이 안 좋아하는 것 같아서 속상했나? 으응?

언뜻 가벼웠지만 화를 내기 전에 적당히 기어오르라는 속뜻이 엿보이는 말투였다. 남지유는 다른 승객에게 탑승 안내를 하고 있는 승무원을 보았다. 이제 정말 출국이 다가오고 있었다. 내내 속을 짓누르고 있던 초조와 불안이 서서히 불식되어진다. 비행기에만 오르면 당장은 무사할 것이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남지유의 기저를 간지럽혔다. 불만은 재채기처럼 터졌다.

“더는 만나기 싫어요. 이만하면 거래 대가는 충분히 치렀잖아요. 실컷 가지고 놀았으니 이제 됐잖아요. 왜 자꾸 이래요? 저 진짜 힘들어요.”

욕이나 실컷 퍼붓고 싶었는데 몇 달을 권성하의 ‘귀여운 예쁜이’로 지냈더니 불만마저 칭얼거리는 것처럼 나오고 말았다. 남지유는 얼굴을 달구는 열기를 느꼈다. 단순한 수치심은 아니었다. 드디어 속내를 털었다는 일종의 카타르시스에서 나오는 흥분이었다.

- 오빠 만나는 게 힘들었어?

“네, 존나요. 존나 힘드니까 제발 연락 좀 그만해요. 전화 끊으면 오빠 번호 차단할 거예요. 구질구질하게 문자 보내고 전화하고 그런 짓 하지 마세요.”

- 하하하…… 미치겠네. 지유야. 일부러 그래?

“…….”

씨발. 곧장 전화를 끊은 남지유가 핸드폰 전원까지 꺼 버리더니 섬섬옥수처럼 길고 예쁘게 뻗은 손으로 얼굴을 가린다. 이번에야말로 수치심으로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입에 자연스럽게 붙어 버린 호칭이 이런 상황에서도 나올 줄이야. 권성하와 백이선이 그의 온갖 짜증을 앙탈로만 치부하는 까닭을 가장 수치스러운 방식으로 깨달았다.

“아, 씨발, 씨발…….”

너무 열이 올라 손끝까지 화끈거리는 것 같다. 수치심에 눈물까지 찔끔 고였다. 그런 그에게로 승무원이 조심스럽게 다가섰다.

“손님? 어디 불편하신 곳이 있으신가요?”

“아뇨, 아뇨…. 아닙니다.”

“의무실이 있으니 혹 불편하신 곳이 있으시다면 말씀해 주세요.”

“예…… 알겠습니다.”

남지유는 얼굴을 가린 채 다 죽어 가는 목소리로 간신히 대꾸했다. 승무원은 그에게 간단한 탑승시간 안내를 해 주고는 자리를 떴다. 귓등까지 후끈거리던 열이 겨우 가라앉고 난 후, 남지유는 가방을 챙겨 소파에서 일어났다. 진짜, 쪽팔려서라도 한국을 뜨고 싶었다.

* * *

홍콩의 끝내주는 하버 뷰가 천장 높은 전면 유리창을 통해 고스란히 그려졌다. 날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아 수평선 너머 빌딩숲까지 선명했다. 바로 얼마 전에 비가 내렸다고 하더니 어젯밤 체크인 했을 때는 야경이 그림처럼 펼쳐져 있었다. 쫓기듯 택시에 올라타 닥치는 대로 호텔 예약을 하고 온 그에게는 미용실 그림만큼의 감흥도 주지 못했지만 말이다.

그래도 한숨 자고 일어나서 다시 보니 관광지로 유명한 까닭을 알겠다. 남지유는 소파에 깊숙이 누운 채 창밖을 바라보았다. 거의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는 바람에 온몸이 피곤했다. 내내 긴장 상태였던 탓에 미약한 두통도 느껴졌다. 비행기가 무사히 뜨고, 입국 수속을 밟고, 호텔로 들어선 후에도 불안감이 좀처럼 가시질 않았었다. 공돈을 들여 홍콩 시내 호텔 곳곳에 제 이름으로 예약을 걸어 놨음에도 그러했다. 갑자기 들이닥쳐 이번에는 정말 다른 놈과 섹스 할 엄두조차 못 내게끔 뒤를 찢어 놓을 것 같아 몸서리가 쳐졌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문득 한국에 버리고 온 대표와 매니저가 떠올랐다.

“별일 없겠지…….”

테이블에 올려놓은 핸드폰에 공연히 시선이 갔다. 연락할까 싶었지만 괜한 꼬투리가 잡힐 것 같다. 부디 권성하가 엄한 사람 잡을 만큼 좀생이는 아니길 바랄 뿐이었다.

룸서비스로 주문한 음식이 식어 가고 있다. 의무감으로 딤섬을 깨작거리던 그가 결국 수저를 내려놓고 다기를 쥐었다. 열이 남아 있는 차에서 훈기 어린 향이 피어올랐다. 몸을 감싸는 소파는 깜빡 잠이 들 만큼 편안했다. 홍콩에서 무사히 아침을 맞았다는 사실만으로도 밤잠을 설치게 만들었던 불안이 가라앉는 중이다. 남지유는 한낮의 여유를 실컷 누렸다. 약간 희망적인 생각도 들었다.

적당히 시간을 보내다 귀국하면 잠깐 데리고 놀았던 남배우는 잊고 벌써 새로운 상대와 귀여운 여인을 찍고 있지 않을까 하는.

‘지유야. 오빠 화 많이 안 났어.’

방어기제로 펼쳐지던 긍정적 사고는 어지간히 화난 것 같던 권성하를 떠올리는 순간 폭삭 무너져 내렸다. 권성하가 제게 들이는 공을 남지유라고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휴가를 빙자한 도주 역시 사실상 객기에 가까웠다. 지금부터 지구 반대편으로 떠나든 섬나라로 떠나든, 결국 남지유가 돌아갈 곳은 뻔히 정해져 있었다.

괜한 짓을 했나. 어차피 버린 자존심 다시 한번 굽히는 게 뭐가 어렵다고 내가……. 차라리 지금이라도 권성하에게 돌아가 꼬리를 흔들며 용서를 구하자는 비굴함이 찔끔 새어 나왔다가 도로 들어간다. 자신의 뒷구멍에 전세금이라도 예치한 것처럼 굴던 만행을 생각하자 없던 울화가 치미는 것이다. 싫다고 해도 안 듣고, 그만하자고 해도 못 들은 척하니 객기라도 부려야 했다. 그러지 않고선 화병이 나 제명에 못 살 것 같았다.

남지유는 서서히 식어 가는 차를 머금었다. 식은 차는 씁쓰레했고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끝내줬다. 가시거리에 온통 탁 트인 바다뿐이었다. 홍콩 땅에는 권성하와 백이선이 없다. 자각하자 그제야 속이 트였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실컷 둘러보다 갈까. 체념이 가져다준 안정 속에서 남지유는 여행일정을 짜기 시작했다.

* * *

홍콩에서 시작된 여행은 하노이를 거쳐 싱가포르로 이어졌다. 사실상 도피생활에 가까운 여정이었다. 얼굴이 알려져 있어 맘 놓고 다닐 수 없었고 호텔에서는 누군가 들이닥칠까 봐 주기적으로 불안에 떨어야만 했다. 오죽하면 꿈에도 나왔다. 이번에는 고추 다발을 선물당하는 꿈이었다. 너무나 끔찍했던 터라 그날 남지유는 호텔 방의 불을 온통 켜 둔 채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그러나 인간은 망각의 생물이다. 권성하는커녕 그 끄나풀도 보지 못한 채 보름을 넘어서니 원래 낙관적인 사고의 소유자는 금세 해이해지고 말았다. 항상 방 안에만 처박혀 있어 알아보는 사람이 없던 것도 결코 들키지 않으리란 근거 없는 자신감에 일조했다. 이제 그는 호텔 근처 산책로를 슬렁슬렁 돌아다녔고 매일 와인을 오픈하며 부주의하게 취기에 올랐다. 얼마 전 거나하게 취했을 땐 왠지 모를 자신감이 치솟아 욕을 퍼부어 주려고 내내 꺼 놨던 핸드폰도 켰었다. 만취한 남지유는 전화도 제대로 걸지 못하는 얼간이였기에 미수로 그친 사건이었다. 가슴 철렁한 그날의 여운이 채 가시지도 않았건만, 남지유는 안전불감증의 화신처럼 쇼핑에 나섰다.

<안 입어 보셔도 괜찮으시겠어요?>

남지유는 고개를 끄덕이며 마스크를 고쳐 썼다. 호텔과 연결된 유명 백화점에는 각지에서 온 관광객이 넘쳐나고 있었다. 간간이 한국말이 들릴 때면 훤칠한 신장을 구겨 사각지대로 숨어야만 했다.

사실 그로서도 백화점 나들이가 달가운 건 아니었다. 보는 눈 많은 곳으로 나왔다가 모르는 사이에 사진이라도 찍히면 낭패지 않는가. 여권과 지갑 하나만 들고 튄 처지가 아니었다면 굳이 이런 곳으로 외출을 시도하진 않았을 것이다. 남지유는 괜스레 모자챙을 눌렀다. 기분 탓인지 계속 시선이 느껴지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면 돌이킬 수 없을 것 같아 고개를 돌리지도 못하겠다. 계산을 기다리는 그의 손이 초조하게 마스크를 건드렸다.

<환불이나 교환은 영수증 지참하시고 일주일 내로 방문해 주세요.>

<네. 고마워요.>

얇은 옷만 가득한 쇼핑백은 들어간 비용보다 가벼웠다. 그는 쇼핑백을 받아 들고 곧장 매장을 빠져나왔다. 사야 할 건 아직 많았지만 아까부터 느껴지는 시선이 불안해 일단 호텔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에스컬레이터로 향하는 남지유의 시야에 그를 보며 소곤거리는 관광객들이 잡혔다. 평범한 관광객처럼 보였던지라 설마했던 불안은 가라앉았으나 대신 곤란함이 피어올랐다. 남지유는 자연스레 시선을 굴려 태연한 체를 했다. 그래 봤자 조막만한 얼굴에 가지런하게 잡힌 이목구비는 감출 수가 없었다. 연예인은 가리고 감춰도 어쨌든 태가 났다. 당연한 수순처럼 관광객들이 다가왔다.

“저기, 혹시 남지유 씨 아니세요?”

“아…… 예. 안녕하세요.”

상기된 얼굴에 웃음을 머금은 사람들이었다. 타지에서 아는 얼굴을 봐 반가워하는 사람들에게 도저히 모질게 굴 수가 없어 남지유는 마스크를 내리고 부드럽게 웃었다. 차분한 미소는 그를 다정한 사람으로 보이게끔 만들었다. 뭐든 항상 빈 수레가 요란한 법이다.

“와! 진짜 팬이에요. 여기서 남지유 씨 볼 줄은 몰랐는데. 와, 와아.”

“사인 한 장 해 주실 수 있나요? 사진도요! 아, 종이 없나? 종이?”

“죄송해요. 휴가로 온 거라 사진은 좀 그렇고 사인은 해 드릴 수 있어요. 종이만 주신다면요.”

“네, 네! 있어요! 드릴게요. 와, 진짜 잘생겼다.”

자기 얼굴 잘난 건 이미 잘 아는 남지유는 그저 초조하게 종이와 펜이 나오길 기다렸다. 사람들 눈이 더 쏠리기 전에 빠져나가고 싶었다. 몇 명이 모여 떠들고 있으니 벌써 관심 있게 보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여기요. 저, 제 이름은 민지예요. 민지.”

“아. 어디 대고 쓸 거 없을까요?”

“헉! 어쩌지, 제 등에 대고 하실래요? 그래도 되나?”

“하하하… 아뇨, 그럼 안 되죠. 벽에 대고 쓸게요.”

남지유가 종이와 펜을 들고 이동하려던 때였다. 갑자기 옆에서 불쑥 튀어나온 시커먼 남자가 두툼한 여행 책으로 종이를 받쳐 주었다. 화들짝 놀라서 바라보니 나름대로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려 노력하는 표정이 보였다.

“곤란해 보이셔서. 여기 대고 쓰세요.”

“아…… 예.”

깜짝 놀란 새가슴이 벌렁거렸다. 이 사람도 관광객인가? 행색은 그렇긴 한데, 우람한 체격에서 느껴지는 기운은 그렇지 않았다. 이 느낌은 흡사……. 남지유는 남자의 과한 친절에 굉장한 부담을 느끼며 서둘러 사인을 그려 나갔다. 남자는 종이가 몇 장이고 바뀔 때도 묵묵히 받침대 역할을 수행해 주고 있었다. 매니저도 힘들어할 때가 많은데, 이 남자는 누굴 섬기는 게 퍽 익숙한 것 같단 느낌이 들었다. 마침내 마지막 한 장을 마쳤을 때 남지유가 슬그머니 남자를 보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감사합니다. 친절하시네요. …여행 오셨나 봐요?”

“네, 가족들이랑 같이 왔습니다.”

“그러시구나……. 아, 사인해 드릴까요?”

“그럼 감사하죠.”

남지유는 남자가 가져온 책에 큼직하게 사인을 해 주었다. 여행 책은 거의 새 책이었다. 괜한 사람을 의심하는 것 같다가도, 범상치 않은 체격과 인상을 보면 의심할 만한 것 같기도 하다. 남지유는 사인을 건네주며 남자를 배웅했다. 그리고 거의 뛰는 듯한 걸음으로 호텔로 돌아갔다. 호텔 방으로 들어서자마자 가득한 짐을 내팽개친 그는 고장 난 장난감처럼 한참을 빙빙 돌았다. 그렇게 빙빙 돌다가 결국 짐을 싸기 시작했다. 결정부터 비행기에 오르기까지 반나절도 걸리지 않았으나 한 번 피어오른 불안감은 좀체 사그라지지 않았다.

* * *

흑단 원목 테이블 위에 유명 남배우 사진이 숱하게 펼쳐진다. 우아하게 뻗은 손가락이 그중 몇 장을 추려 냈다. 긴장한 표정으로 공항을 나서는 사진, 모자를 눌러쓴 채 아이스크림을 빨아먹는 사진, 샌들 끈이 끊어져 짜증을 내는 사진…… 보디가드로 붙여 놓은 놈들에게서 주기적으로 들어오는 기록이었다. 대놓고 사람을 붙여 놨던 한국에서도 눈치채지 못했던 남지유는 해외라고 다르지 않았다. 외려 그가 찾아오지 않는 것에 자신감이 붙었는지 그나마 남아 있던 조심성도 바닥을 드러내는 중이었다. 하긴, 조심성이 있는 남자였다면 애당초 남자 스폰서를 달고 있다는 소문도 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로 인해 자신의 눈에 띄지도 않았을 것이고.

주변을 경계하느라 항시 또랑또랑하던 얼굴이 해이하게 풀어져 가는 사진을 지켜보는 권성하의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우리 공주님이 이번에는 어디로 행차하셨나.”

“이틀 전 싱가포르에서 말레로 가신 후, 현재 후라왈리 섬에서 숙박 중이십니다. 리조트 밖으로 나오시진 않고 가끔 울적한 얼굴로 바다를 구경하신다고 하네요. 말씀은 그렇게 하셨어도 이사님을 그리워하시는 게 아닐까요?”

“그렇게 깜찍한 애였으면 얼마나 좋아.”

오빠, 저는요, 지유는요…… 살갑게 애교를 속삭이다가도 ‘자지 달린 놈한테서 오빠 소리 듣고 싶어 하는 이상성욕자’를 보는 눈빛을 감추지 못했던 남지유다. 가끔은 욕도 했다. 그러고는 그런 적 없는 척 시치미를 뚝 떼며 다시 내숭을 떠는 게 얼마나 재밌는지. 그는 문득 ‘오빠’ 연락은 몽땅 차단해 버릴 거라는 으름장을 놓았던 남지유를 떠올렸다. 귀여워도 그렇게 귀여울 수가 있나. 픽픽 싱거운 웃음이 터졌다.

“이왕 나간 거 느긋하게 놀다 오면 좋겠는데 예쁜이는 뭐가 그리 급한지 모르겠어.”

“유명한 분이신 만큼 이목을 많이 끄시니까요……. SNS에도 벌써 목격담과 사진이 올라오고 있습니다.”

“그런 주제에 잘 숨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야. 정말 귀엽지 않아?”

“예, 이사님과 잘 어울리는 분입니다.”

사진을 한 장씩 살펴보던 시선이 우뚝 멈추었다. 남지유가 드넓게 펼쳐진 바닷가를 산책하는 사진이었다. 항시 은하수가 담긴 것처럼 깊던 눈은 수평선 너머를 향하고 있었고 손끝에는 샌들이 들려 있었다. 피사체가 훌륭하니 몰래 찍은 사진도 화보처럼 아름다웠다. 끌어안아 정성껏 달래 주고픈 맘이 들 만큼 처연해 보이기도 했다. 실제로 리조트 내에서는 그런 손님으로 통했을지도 모르겠다. 남자 혼자 휴양지를 찾는 일이 얼마나 된다고, 그러잖아도 사연 많아 보이는 얼굴이었다. 아마 실연당한 잘생긴 동양인 손님으로 통하지 않았을까. 조건 좋은 남자를 둘씩이나 차고 떠난 장본인인데 말이다.

가만 사진을 들여다보던 그가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비서에게 물었다.

“내일 일정이 어떻게 되지?”

“오전에 주간 미팅이 있으시고 J건설 이 사장님과 점심 약속이 잡혀 있습니다. 오후 4시에는…….”

“취소해. 미룰 수 있는 건 미뤄 놓고.”

“전용기를 준비해 놓을까요?”

권성하는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대답을 대신하며 사각프레임에 갇힌 귀여운 애인을 바라보았다. 남지유가 외유를 시작한 지 어느덧 보름이 넘어가는 중이다. 이만하면 많이 봐준 거였다. 공항에서 그런 애교를 부리지만 않았어도 해외여행이 가당키나 했겠나. 싱겁게 웃은 그가 손끝으로 테이블 위 사진을 툭툭 건드린다. 보지 못한 시간이 길어질수록 자신이 남지유에게 꽤 맘을 쓰고 있었다는 것이 실감났다. 손끝에 감기는 살결과 머리카락, 마지못해 웃는 얼굴이 벌써 그리웠다.

* * *

……어두컴컴한 지하실, 백열전구 하나만 위태롭게 빛나는 공간에는 무시무시한 장정들을 위시한 권성하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시멘트 바닥에 나자빠진 몸에는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무방비하게 엎어진 자세라 위협이 배로 느껴졌다. 몸을 일으키고 싶었으나 손발이 꽉 묶여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절망감이 명치를 퍽 치고 목구멍을 메웠다. 이제 정말 인생 종친 게 실감났다.

전등 아래로 선명하게 그려진 이목구비가 과장된 감정을 실은 채 그를 향했다. 배변실수를 계속하는 강아지를 보는 것처럼 애틋했지만, 꽤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눈빛이었다.

“지유야, 왜 그랬어. 응? 지유 혼내는 거 오빠도 속상해.”

그럼 혼내지 말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말이 나오지 않는다. 왜 그런가 했더니 입에 두꺼운 천이 물려 있었다.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 몸만 지렁이처럼 꿈틀거릴 수밖에 없었다. 권성하는 차가운 시멘트 바닥으로 친히 임해 주었다. 가죽장갑을 낀 손이 차갑게 식은 뺨을 두드렸다.

“그렇게 울어도 안 돼. 오빠 많이 화났거든. 지유도 알지?”

눈물을 닦아 주는 것처럼 손길이 섬세하게 움직였다. 쉴 새 없이 눈물이 차오르는 눈이 뜨거웠다. 인생에 급작스러운 회한이 몰려들었다. 그냥 도망가지 말걸, 백이선이 질척거려도 받아 주지 말걸, 아니 애초에 스폰을 시작하지 말 걸 그랬다. 눈물에 젖은 속눈썹이 무겁게 삼박거렸다. 흐린 시야는 금방 캄캄해졌다. 그는 몰려드는 두려움에 수장되어 숨을 헐떡거렸다.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로 손끝 발끝을 꿈틀거리다가 이내…….

“헉!”

남지유는 잠에서 깨어났다. 숨이 막히던 감각이 너무나 생생해 꿈인 걸 자각하기까지도 한참이 걸렸다. 그는 한참 동안 잠수한 것처럼 가쁘게 헐떡거렸다. 자면서 정말 울었는지 눈꺼풀도 무거웠다. 침대헤드에 몸을 기댄 그가 벌렁거리는 가슴을 겨우 진정시킨다. 큰 손으로 얼굴을 문지르며 욕설을 중얼거리는 그는 정말 크게 놀란 것처럼 보였다.

“뭔, 씨발…… 꿈을 꿔도 이런 좆같은 걸…….”

아무래도 타지 생활을 너무 오래한 모양이었다. 잠자리가 계속 바뀌니까 적응을 못하는 모양이지. 악몽의 원인을 훤히 알면서 애써 부정하는 그에게서는 어떻게든 회복하려는 근성까지 엿보였다. 원래 스스로 어쩔 수 없는 문제는 외면할 수밖에 없는 법이다. 직면해 봤자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겠는가. 예정된 고통이 다가올 때까지 괴로워하며 기다리는 게 전부다.

남지유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맨발로 창가까지 다가갔다. 길게 드리워진 커튼을 걷자 에메랄드빛으로 물든 바다가 드러났다.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살이 뭉개졌던 감각이 현실에 밀려 서서히 사라져 갔다. 그가 베란다 창을 열어젖히고 밖으로 향했다. 그리고 파라솔 아래 소파에 몸을 눕혔다. 셔츠 한 장 대충 걸치고 있는 가슴팍이 숨을 들이쉴 때마다 빠듯하게 부풀었다. 신선한 바닷바람이 가슴을 꽉 채웠다.

그 새끼는 여길 모른다. 모를 것이다. 한 기업체의 이사씩이나 맡은 놈이니 섣불리 해외까지 따라오지도 못할 것이다. 남지유는 눈을 감고 파도 소리에 집중했다. 도심에서는 결코 들을 수 없는 소리였다. 몰디브 섬의 오감을 자극하는 모든 것이 지금 그에게 안정을 가져다주고 있었다.

“하아…….”

깊은 한숨이 샜다. 그가 몰디브로 들어온 지 이제 겨우 닷새째였다. 인천공항에서 비행기를 탄 날로부터는 거의 3주째다. 이 정도 시간이 흐르도록 보이지 않는 걸 보면 정말 관심이 떨어진 건가 싶다가도, 묘하게 심장이 근질거려 불안을 참을 수가 없었다. 실제로 접해 본 성정이 있으니 쉽게 안심이 안 되는 것이었다.

남지유는 가방 속에 잠들어 있는 핸드폰을 떠올렸다. 차라리 그냥 못 이긴 척 한 수 접고 들어갈까. 그가 큰 손으로 얼굴을 덮는다. 지금 생각하고 싶지 않은 부분이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리조트 밖으로 향했다. 바깥바람을 쐬어야 기분이 나아질 것 같았다.

야트막한 섬에 지어진 리조트는 어딜 향하든 바다가 보였다. 고립된 기분을 주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안정감을 주는 곳이었다. 남지유는 백사장을 느긋하게 걸었다. 정기적으로 오고 가는 리조트 경비행기가 착륙하는 모습이 보였다. 시간대를 보아하니 얼추 저녁이 다가오려는 것 같다. 식사 때는 한참 지났음에도 허기가 돌지 않는 걸 보면 아직도 놀란 맘이 가라앉지 않은 모양이었다.

“안녕, 지유.”

문득, 친숙함을 듬뿍 담은 어눌한 한국말이 들렸다. 마지못해 돌아보자 금발 남자가 씩 웃으며 서 있었다. 스페인이었나, 이태리였나. 아무튼 지중해 어디에서 온 돈 많은 게이였다. 왜 외간남자의 주머니 사정까지 아냐면 그가 자랑스럽게 떠들어 댔기 때문이다. 이층짜리 요트가 몇 대 있고, 그곳에서 파트너가 되어 준 상대에게 얼마짜리 선물을 안겨 줬고…… 하룻밤 상대로 꾀어내려는 의도가 확실해서 오히려 정직해 보일 정도였다. 남지유는 한숨을 쉬었다.

“꺼져.”

<아, 나도 그 말 배웠어. 내 변호사한테 물어봤지. 뜻을 아니까 더 섹시하게 들리는데. 한 번 더 해 볼래?>

“씨발, 어떻게 꼬이는 새끼들마다…….”

같은 날, 같은 비행기를 타고 온 남자는 눈이 마주친 순간부터 남지유에게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처음엔 붙임성이 심히 좋은 놈인 줄 알았는데 하필 게이였고 옐로 피버 기질도 있었다. 첫눈에 반했다며 따라붙는 게 얼마나 끈질긴지 리조트까지 따라왔다. 그동안은 리조트 안에서만 생활하느라 마주칠 기회조차 없어 잊고 있었는데 아직 떠나지 않은 모양이다. 소름이 끼칠 만도 했지만 뜻하지 않게 단련된 남지유는 자연히 무시하는 법을 터득했다. 홱 몸을 돌려 떠나는 그를 남자가 집요하게 따라붙었다.

<이봐, 자기야. 기회 좀 줘. 이렇게 애원하는 내가 불쌍하지도 않아?>

“…….”

<너 때문에 내 일정 다 미루고 여기까지 왔어. 한 번 만나 줄 순 있잖아.>

남자는 영어와 모국어를 섞어 가며 애원 같은 구걸을 해 댔다. 고마운 점은 있었다. 너무 좆같아서 권성하에 대한 걱정이 깡그리 날아간 것이다.

<요트에서 놀아 본 적 있어? 바다 한가운데서 하는 섹스는 정말 로맨틱해, 자기. 나랑 몇 번 놀고 돈도 버는 거야. 손해 보는 거 없다고.>

백사장에서 리조트 건물로 접어들기 시작하자 슬슬 초조해지는 모양이다. 남자가 팔목을 붙잡으며 그를 붙들었다. 인도양의 열기에 달궈진 후덥지근한 체온이 역겨움을 자아냈다. 남지유는 짜증을 가감 없이 드러내며 손을 뿌리쳤다. 마음 같아서는 흠씬 패 주고 싶었지만, 신분이 신분이었다.

‘충격! 남지유, 휴가 중 서양男과 싸움 붙어…… 사실은 게이?’

이따위 타이틀이 붙어 떠돌아다닐 걸 생각하면 없던 인내심도 생긴다. 남지유는 답답함을 한숨에 담아 밀어냈다. 말 한마디 섞지 않고 다시 뒤를 돌자 남자가 손을 뻗어 왔다. 그러나 이번에는 채 뻗기도 전에 붙잡는 인물이 있었다.

“이 새끼가 누굴 만져.”

꿈속에서 튀어나온 것처럼 생생한 목소리였다. 징그러운 집적거림에도 미동도 않던 남지유가 펄쩍 튀어 올랐다.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처럼 머릿속이 멍했다. 설마, 설마. 그러나 이어지는 목소리는 외면하고 싶은 현실을 차디차게 일깨워 주었다.

“가는 곳마다 날파리가 꼬여서…… 혼자 둘 수가 없네.”

그때, 비명 소리가 났다. 반사적으로 뒤를 돌자 비딱하게 선 권성하가 남자의 팔목을 으스러질 듯 잡고 있었다. 남지유로서는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표정이었다. 화가 난 그를 몇 번이나 봤다고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다. 그는 여태껏 남지유에게 진심으로 화를 낸 적이 없었다. 지금의 화가 모조리 자신에게로 쏟아질 것을 생각하자 모골이 송연해졌다. 남지유는 밖이라는 것도 잊고 권성하의 팔에 매달렸다.

“오, 오빠.”

<이, 이 새끼 뭐야? 당신 애인이야?!>

“지유야, 물러나야지. 다치면 어쩌려고.”

화가 난 것 같은데…… 목소리는 또 다정하다. 어물어물 물러나자 권성하가 남자의 팔을 놓아준다. 팔목을 붙잡으며 고꾸라지는 남자는 주먹질 한 번에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곱상하게 생겼어도 조폭은 조폭이었나 보다. 정확하게 명치를 가격한 주먹에 남자는 숨넘어갈 듯 꺽꺽거리며 바닥을 기었다. 폭력에 정통으로 맞닥뜨린 남지유가 움찔 움츠러들었다. 권성하는 부하가 건네주는 손수건을 받아 접촉했던 손을 꼼꼼히 닦았다. 그제야 그가 남지유에게로 팔을 뻗었다. 그는 굳은 어깨를 다정히 감싸며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혼자 다니니까 저런 새끼가 꼬이는 거 아냐. 오빠 없었으면 어쩔 뻔했어. 응?”

“아니, 아뇨…… 그게. 전, 아니 지유는 싫다고 했는데요. 저 새끼… 아니, 저 사람이 억지로…….”

“응, 알지. 지유가 오빠 두고 딴 놈이랑 배 맞을 애는 아니잖아.”

“…….”

말에 뼈가 있었다. 남지유는 단박에 할 말이 궁해져 입을 다물었다. 억지로 끌려가는 중에 남자가 욕설을 하는 소리와 급하게 뭔가로 입을 틀어막히는 소리가 났다. 이미 저지른 짓이 있고, 폭력의 한중간에 서 있다 보니 더욱 심장이 벌렁거렸다. 말없이 움츠러드는 그를 끌어안는 팔이 단단했다. 이대로 리조트 안으로 끌려 들어가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은 들었으나…… 뿌리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남지유는 그대로 방 앞까지 이끌려 갔다. 알려 주지 않았음에도 권성하는 남지유의 방 호수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언제부터인진 몰라도 진작부터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어디로 향하고, 어디서 묵는 것인지 따위를.

몇 시간 전으로 돌아가고 싶다. 방 안에 처박혀 나오지 않았더라면 안전했을까. 아니 차라리 진작 체크아웃을 하고 다른 곳으로 떴더라면…… 초조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 쩔쩔매는 그를 권성하가 다정히 지켜본다. 어깨를 감싼 팔이 살며시 내려와 허리를 감쌌다. 더욱 깊어진 접촉에 익숙하고 싶지 않은 향기가 폐부로 스며들었다. 학습된 것처럼 가슴이 떨렸다. 권성하가 그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왜 이렇게 쑥스러워해. 방이 더러워서 그래? 그럼 오빠 방으로 갈까? 지유 편한 대로 해.”

다가선 손길이 머리카락을 천천히 넘겨 준다. 다정한 건지 아닌 건지 헷갈릴 정도로 부드러운 어조였다. 허리를 끌어안은 팔 힘도 적당히 신사다웠다. 그러나 켕기는 게 많은 남지유는 그의 모든 것이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꾹 깨문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이윽고 떨리는 숨이 토해졌다.

“아니에요, 들어가요.”

며칠간 아늑한 안식처가 되어 주었던 방이 불청객의 등장으로 순식간에 삭막한 밀실로 뒤바뀌었다. 베란다를 열어 둔 채 나온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여차하면 방을 박차고 나와 바다에 뛰어들자는 극단적인 선택지가 동아줄처럼 내려왔다.

남지유는 단단한 팔 안에 갇힌 채로 답답한 숨을 짧게 들이쉬었다. 권성하의 체취가 가슴팍으로 빨려 들어갔다. 가슴에 열이 오르고 관자놀이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 같았다. 사선에서 내리꽂히는 시선이 부담스러워 감히 고개를 들지도 못하겠다. 한참 머뭇거리던 그는 원목 마룻바닥에 하얀 슬리퍼 한 쌍이 덩그러니 있는 것을 보고는 슬그머니 품을 밀어냈다. 당연하지만, 단단한 품은 쉽게 물러나 주지 않았다. 고급 맞춤정장의 매무새에 자그마한 주름이나 만들 뿐이었다. 결국 남지유가 시선을 들어 올린다. 그리고 곧장 속눈썹으로 눈동자를 가려 버렸다. 가슴 두근거리는 정적을 파도 소리가 대신 메웠다.

“저, 슬리퍼 내려 드릴게요.”

권성하가 코웃음 치듯 웃었다.

“오빠 기분 풀어 줄 궁리를 해야지. 우리 지유, 얼굴만 예쁘고 요령이 없어서 어떡해. 응?”

“……죄송해요. 어떻게, 말씀드릴…… 면목이 없어서.”

여기서 대답을 잘못하면 어떻게 되는 걸까. 남지유는 잠깐, 권성하가 대동하고 온 인물들을 떠올렸다. 하나같이 듬직한 체격에 과묵한 인상들이었다. 그중에는 싱가포르에서 마주쳤던 남성과 동일인으로 추정되는 사람이 있었다. 모르긴 몰라도 아마 그때도 감시 중이었던 거겠지. 대체 언제부터 권성하의 손바닥 안이었는지 짐작조차 되지 않는다. 까딱 잘못하면 연고도 없는 인도양에 가라앉게 될지도 모르겠다. 순간, 죽어도 고국에서 죽겠다는 애국심이 열사처럼 끓어올랐다.

권성하의 품에 가지런히 놓였던 손이 머뭇머뭇 오므라든다. 남지유가 얌전히 무릎을 꿇고 앉더니, 권성하의 구둣발에 손을 올린다. 반질반질 윤이 나게끔 관리가 된 구두는 결벽증이 도질 틈조차 주지 않았다. 남지유는 권성하의 구두를 천천히 벗겨 내고는 살그미 시선을 올렸다가, 손수 슬리퍼를 신겨 주기 시작했다. 무얼 하나 유심히 지켜보던 권성하가 소리 죽여 웃었다.

“지유야.”

“…네.”

“오빠가 예쁘게 굴라고 했지 노예처럼 굴라고 한 게 아니잖아.”

“…죄송해요.”

일어나. 가만 속눈썹을 내리깔고 있는 남지유를 권성하가 일으킨다. 그는 기가 죽은 애인의 허리를 제게로 끌어당겼다.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얼굴이 꽤나 가련했다. 눈가를 스친 입술이 다정함을 머금고 속닥거렸다.

“예쁜이 무릎은 오빠 좆 빨아 줄 때나 꿇는 거야. 알았어?”

“…네.”

“이렇게 겁이 많은데 무슨 배짱으로 사고를 쳤어.”

그거야 그대로 한국에 있다가는 뒈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결과적으로 더 뒈질 것 같은 상황에 놓이긴 했다. 뒷일은 생각지 않고 홧김에 출국 티켓을 끊었던 남지유는 할 말이 없어 눈만 느릿하게 삼박거렸다. 제 얼굴이 권성하에게 어떠한 감흥이든 준다는 것을 잘 아는 눈짓이었다. 권성하가 짧게 욕설 같은 한숨을 쉬는 것이 들렸다.

“오기 전까지는 어떻게 혼을 내 주나 고민이었는데……. 막상 얼굴 보니 이 예쁜 걸 어디 혼내 줄 수도 없고. 응? 우리 지유, 얼굴 하나 믿고 오빠 갖고 노는 거야?”

“아니에요, 지유는…… 그냥, 그런 일이 있어서…… 오빠 얼굴 뵙기가 죄송스러워서. 그래서 그랬어요. 나쁜 의도로 그런 건 아니었어요.”

연기력을 인정받는 남배우는 스폰서를 상대로도 연기력을 펼쳤다.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이며 속눈썹을 들어 올리는 그를 권성하가 웃음기 어린 얼굴로 지켜보았다. 속눈썹이 짙은 눈매는 구태여 말을 더하지 않아도 상대를 빨아들이는 흡입력이 있었다. 눈물 한 방울 걸려 있지 않음에도 마음 한구석을 저리게 해 그만 깜빡 물러지고 마는 것이다.

권성하가 감싸 안은 허리 아래로 손을 뻗는다. 그러고는 백팔십 장신을 어린애 안아 올리듯 가볍게 안아 올렸다.

“아…!”

“계속해 봐. 그런 일이 뭐.”

“제, 제가 그냥…….”

권성하는 남지유를 안아 든 채로 성큼성큼 방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허공에 얌전히 매달려 있는 것도 상호간의 신뢰가 탄탄할 때 이야기다. 권성하에 대한 신뢰가 바닥을 치는 남지유는 땅에 닿지 않는 발이 신경 쓰여 듬성듬성 말을 끊었다. 달랑거리는 발끝에서 비치 샌들이 떨어졌고, 내내 옷깃 하나 제대로 쥐지 못했던 손은 시키지 않아도 권성하의 목 뒤로 꼭 감겨들었다. 그게, 오, 오빠 몰래…… 더듬거리며 나온 말은 등이 침대에 닿은 후에야 멈추었다. 불과 몇 시간 전 남지유가 둥지를 틀었던 자리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침대였다.

바로 눈앞에 목숨 줄을 휘잡은 권성하가 있다. 남지유는 본능적으로 몸을 물렸다. 그래 봤자 곧장 팔목이 잡혀 침대 끝으로도 도망가지 못했다. 주춤주춤 피하려 드는 시선을 권성하가 억지로 붙들며 마주한다. 마른침이 절로 삼켜졌다. 남지유는 더 도망갈 곳이 없음을 깨닫고는 잡아먹히기 직전의 짐승처럼 바싹 겁에 질렸다.

“지유야, 말을 끝까지 해야지.”

“그러니까…… 저, 제가, 오빠 몰래…… 백이선, 전무님이랑…….”

“응, 그 개새끼랑.”

“……죄송해요. 그러면 안 되는 거였는데, 영화를 너무, 찍고 싶어서…….”

“왜, 오빠가 그 정도도 못 해 줬을 것 같았어?”

“아뇨, 아니에요. 저는 그냥, 부담 드리고 싶지 않아서 그랬어요. 지유가 오랫동안 스폰을 받다 보니까, 또 오빠도 지유가 그런 걸 아시니까…… 그래도 된다고 생각했었던 것 같아요. 제가, 지유가 생각이 짧았어요…….”

어설프게 떨어지는 음절마다 권성하는 고개를 까닥거리며 경청하는 흉내를 냈다. 표정이 지워진 얼굴은 오만한 분위기를 더욱 배가시켰다. 기분이 괜찮은 건지 아닌 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권성하가 기울였던 몸을 일으킨다. 세팅된 머리카락이 미간으로 흘러내렸다. 그는 흉기 같은 커다란 손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남지유를 내려다보았다. 오직 사선으로 내리꽂는 시선 하나뿐이었다. 그럼에도 남지유는 사지가 묶인 것처럼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오빠 몰래 서방질하다가 들키니까 도망간 거구나, 우리 지유가.”

“……죄, 송해요. 그때, 전화로 버릇없이 군 것도…….”

“아니야. 뭘 사과하고 그래. 오빠가 그런 걸로 화내는 것 같아?”

대답할 수 없었다. 남지유는 제게로 내리꽂히는 시선에 꿰뚫린 채 뻣뻣한 고개를 간신히 흔들었다. 권성하의 입매에 삐뚜름한 웃음이 걸렸다. 그의 손이 무미건조하게 남지유의 뺨을 건드렸다.

“오빠가 왜 화났는지는 알겠어?”

“……몰래 바람, 피운 거랑…… 오빠한테 사과도 안, 하고, 여행…… 온 거하구요……. 그리고 또, 연락 안 받아서 오빠한테 걱정 끼쳐 드린 것도요…….”

“그럼 오빠 화 풀어 주려면 지유가 어떻게 해야 할까…… 응?”

이 새끼들은 원하는 게 있으면 말을 할 것이지 꼭 창의력과 순발력을 요하는 질문을 해 댄다. 찔끔 솟아오른 미약한 반발감은 곧 권력에 굴복했다. 차마 말을 꺼내지 못하는 남지유의 아랫입술이 연신 깨물리느라 발갛게 부어올랐다. 몹시 애가 타는 것처럼 보이는 그를 권성하가 귀한 걸 구경하듯 유심히 지켜보고 있다. 이내 입술이 벌어졌다. 기가 막힌 내용과 함께였다.

“얼굴은 빼고…… 때려 주세요.”

“뭐? 예쁜이 때릴 데가 어디 있다고 때리겠어. 그런 말 하지 마, 오빠 속상하게.”

권성하는 황당한 듯 웃다가도 정말 말도 안 되는 말을 들은 것처럼 미간을 찌푸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간당간당하던 수명이 안정주로 자리 잡는 순간이었다. 그래도 이 새끼가 사람새끼는 맞구나, 일반인은 건드리지 않는 양심이 남아 있었구나, 남지유는 권성하의 인간적 무게감에 조금 신뢰를 더하기로 했다. 그리고 그러기가 무섭게 엉덩이를 움켜잡혔다. 헉, 짧은 숨을 삼킨 남지유에게로 권성하가 몸을 기울인다. 벌어진 가랑이로 사타구니가 맞닿고 있다. 침대에 나자빠진 몸을 덮은 체구는 벗어날 엄두조차 내지 못할 만큼 단단하게 단련되어 있었다.

씨발, 치사한 새끼, 내가 이럴 줄 알았지, 네가 그냥 넘어갈 리가 없지…… 온갖 비난이 난무하는 머릿속과 달리 자신의 무력함을 아는 몸에서는 가늘게 흐느끼는 듯한 한숨이 새었다. 권성하는 낑낑거리는 남지유에게 다정한 훈육자처럼 속삭였다.

“그래도…… 오빠가 맘을 모질게 먹어야겠지. 으응?”

“…….”

“오빠도 다 큰 지유 맴매하는 거 맘이 아픈데, 어쩔 수가 없네.”

움켜잡힌 엉덩이와 가랑이에 문질러지는 좆. 어디를 무엇으로 맞을지 뻔한 일이었다. 남지유는 팔을 뻗어 권성하의 어깨에 매달렸다. 수줍은 척 너른 어깨에 얼굴을 묻은 남지유가 신혼방에서 불 꺼 달라는 새색시처럼 자그맣게 속삭인다.

“……커튼, 쳐 주세요.”

* * *

커튼을 친 실내를 부드러운 무드 등이 밝혔다. 신혼여행지로 소문난 섬 리조트는 인테리어부터 낭만을 가득 머금고 있었다. 누군가는 행복을 안고 묵었을 방에서 남지유는 발가벗은 채 엉덩이를 얻어맞았다. 웬만한 성인들이 그렇듯 그가 엉덩이를 맞는 것도 거의 이십여 년 만의 일이었다. 마지막으로 맞았던 게 아마 해외출장 가는 아버지 여권에다 낙서를 했던 때였을 것이다. 작았던 몸은 아버지의 무릎에 사뿐히 얹어졌었다. 물론, 어린 시절 감상에 젖을 만한 상황은 아니었다.

“아……!”

엉덩이를 내리치는 손길에 몽롱해지던 정신이 번쩍 들었다. 몇 차례 사정과 실금을 오가는 사이 수치심은 진작 한계에 다다라 소리를 참을 여유조차 남기지 않았다. 한 대, 두 대, 세 대. 내리 맞을 때마다 앓는 소리가 연달아 새어 나왔다. 권성하의 일방적인 훈육이 시작될 때, 결코 소리를 내지 않으리라 다짐했던 게 무색할 정도였다.

“……아, 흐윽!”

네 발로 서 있는 흉내라도 내고 있던 몸이 결국 침대에 무너지고 만다. 남지유는 이불보에 젖은 얼굴을 묻은 채 헐떡였다. 누가 조폭새끼 아니랄까 봐 손이 어마어마하게 매웠다. 구멍을 가득 메운 좆이 버거운 건지, 엉덩이를 때리는 손이 버거운 건지 분간도 안 될 만큼 머릿속이 온통 혼잡스러웠다.

잘 익은 자두처럼 발갛게 익은 살갗이 은은한 조명 속에 드러났다. 남지유가 흉기라 칭했던 손이 먹음직스러운 과일 같은 엉덩이를 움켜쥐었다가, 천천히 미끄러져 허리를 붙잡는다. 침대로 무너진 몸에 바싹 긴장감이 어리는 순간 반쯤 빠져나왔던 좆이 다시 틀어박혔다.

“흐앗!”

늘어졌던 허리가 다시금 휘었다. 몽둥이 같은 존재감을 자랑하는 성기는 한 번 처박을 때마다 깊은 안쪽의 성감대를 자극했다. 삽입한 채 지그시 허리를 돌리기만 해도 물을 질질 싸게 만드는 극점이었다. 지금도 강렬한 통증에 풀이 죽었던 자지가 슬슬 일어나고 있었다. 더는 사정도, 발기도 무리였다. 통증과 쾌감을 한계까지 끌어낸 탓에 온몸이 짜릿짜릿한 전율로 절여진 것 같았다. 남지유가 떨리는 손을 더듬거리며 제 허리를 붙잡은 팔을 붙든다.

“오빠, 오빠…… 잠깐만요, 제발…… 아아!”

겨우 꺼내진 말은 구슬픈 신음으로 마무리되었다. 간신히 팔뚝을 붙들고 있던 손이 힘없이 시트에 흐트러지려는 것을 권성하가 잡아당겼다. 한쪽 어깨는 침대에 무너진 채로, 오른팔을 길게 잡아당겨져 박히는 남지유는 기력을 상실한 것처럼 보였다. 그럼에도 속살은 바지런히 좆을 조여 물고 있었다. 안쪽 깊은 곳, 살짝 부푼 곳에 귀두를 문지를 때면 오르가즘을 느끼는 것처럼 경련하기도 했다.

권성하는 밑동까지 처박은 채로 한숨을 토했다. 열기에 달궈진 숨이 남지유의 등으로 길게 흐드러졌다. 그는 남지유의 양손을 잡은 채 몸을 겹쳤다. 이불보에 쿡 묻은 고개에서 헐떡임 같은 울음이 새고 있었다. 권성하가 새빨간 귓불에 입을 맞췄다. 그러자 꾹 감고 있던 눈꺼풀이 올라가더니, 축축하게 젖은 눈이 그를 흘겨본다. 삽입된 좆이 정액을 싸지를 것처럼 꿈틀거렸다.

“또, 커지고 지랄…… 흑, 씨발 오빠 비아그라 처먹었어요? 존나, 좆이 안 죽잖아…….”

“지유야, 많이 힘들어?”

“네, 네에…… 오빠 지유 힘들어요…… 진짜 죽겠어요…….”

“지유가 힘들어하니까 오빠 가슴도 찢어질 것 같네.”

삽입된 채로 부푼 좆이 슬슬 전후운동을 한다. 남지유가 권성하의 조상 욕을 하면서 울었다. 그는 양팔과 커다란 몸으로 남지유를 가두곤 한참을 채우지 못했던 욕구를 충족시켰다. 부드럽고 매끈한 살갗을 만지는 거나, 비좁은 속살을 가르고 들어서는 거나, 귀엽다 못해 깜찍한 예쁜이를 맴매해 주는 거나…… 그러다가 결국에는 울리고 마는 것까지.

눈물이 방울지는 눈가에 입 맞춘 권성하가 손을 하반신으로 뻗었다. 약간 풀이 죽은 자지를 애무해 주는 손길에 보기 드문 다정함이 물씬 배어 있었다. 섬세하게 움직이는 손끝에서 자지는 착실히 달아올라 갔다. 당하는 남지유로서는 죽을 맛이었다.

“흐윽, 응…… 그만, 더 안 나와……. 앗. 아아……!”

자극을 피하기 위해 몸을 틀어 봤자 결국 권성하의 품 안이었다. 속과 겉을 동시에 자극당하니 눈앞이 핑글핑글 도는 기분이다. 처음 맴매랍시고 엉덩이를 얻어맞았던 순간부터 지금까지 절정이 몇 차례나 있었는지 가늠도 안 되었다. 절정이 가라앉을 만하면 또 절정이었고, 그 과정에는 권성하의 사랑의 매가 함께했다. 흠씬 혼이 났던 엉덩이가 아직도 얼얼한데, 교접하는 몸짓에 아픈 엉덩이가 또 두들겨졌다.

“오빠아…… 앙, 흐앙! 그, 마안…… 흑.”

굵은 성기가 푹푹 깊숙이도 가르고 들어왔다. 이미 진이 다 빠졌다고 생각했는데 신음은 줄줄이 흘렀다. 권성하의 손에 잡힌 자지에서도 찔끔찔끔 물이 새기 시작했다. 다가오는 절정이 이토록 무서운 것이란 걸 권성하와의 섹스로 배웠다. 남지유는 몇 배나 불어난 오르가즘의 전조에 등허리를 달달 떨며 앞으로 기어가려 애를 썼다. 공연히 엉덩이만 흔들려 엇박으로 처박히는 게 전부였다. 남지유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애타게 울었다. 조상 욕도 집어치운 애원은 정말 궁지에 다다랐음을 보여 주고 있었다.

“오빠, 싫어요…… 흑, 그만…… 아으응!”

애원에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체온에 녹은 젤이 애액처럼 튈 만큼 삽입이 깊고 빨라졌다. 그는 아예 절정으로 치닫는 데에 몰두한 것처럼 보였다. 드문 일이었고, 그만큼 두려웠다. 평소 그토록 얄밉던 말대꾸가 외려 그리워질 지경이었다. 남지유가 권성하의 품에 갇힌 채 눈물을 펑펑 쏟았다.

“잘못, 흐윽, 잘못했어요…… 그만, 저, 무서워요, 오빠아 제발…….”

대답 대신 흐트러진 숨소리가 들렸다. 그마저도 누구 것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온갖 자극에 허물어진 머릿속이 멍했다. 두려운 와중에도 하반신에 쏟아지는 자극에 본능적으로 허리가 흔들렸다. 이윽고 아찔한 여운이 휘몰아쳤다.

“아, 아아……!”

성기에서는 맑은 액체 외에는 아무것도 나오지 못했다. 그럼에도 절정의 잔열이 한참 동안 가시지 않았다. 내리깔린 몸이, 좆을 문 내벽이 달달 떨렸다. 내내 머릿속을 채우던 굴욕감과 얼얼한 통증마저 잊게 해 주는 절정이었다.

남지유는 좆이 처박힌 빠듯한 틈을 비집고 가랑이로 정액이 흐르자 조금이나마 정신이 돌아왔다. 이불보를 잔뜩 적신 눈물, 질질 흘린 좆물, 혼쭐이 나 얼얼한 살갗의 감각도 생생해졌다. 그것은 곧장 수치심이 되어 먹먹한 목구멍을 메웠다. 금방이라도 터질 듯 넘실대는 수치심이 완벽히 서열정리를 당한 자의 굴종과 반발을 동시에 끌어냈다.

“으웃…… 흑, 흐윽…….”

섹스를 할 때와는 다른 종류의 울음이 터지고 말았다. 이게 제일 쪽팔린 짓이라는 자각도 할 수 없을 만큼 비참하여 울음을 견딜 수가 없었다. 권성하가 눈물과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떼어 주면서 남지유를 들여다본다. 흥분이 가라앉은 눈은 퍽 애틋해 보였다.

“우리 지유가 뭐가 그렇게 억울할까…….”

“내가 씨발, 힘들다고, 했, 잖아…… 개새끼야.”

“그래. 오빠가 다 잘못했네. 그러니까 뚝해. 으응?”

“흑, 이러니까 씨발 내가…….”

예뻐서 때릴 곳도 없다더니 존나 잘 패, 개새끼…… 한 입으로 두 말하는 건달새끼…… 양아치새끼…… 비아그라는 왜 처먹고 왔어, 씨발놈아…….

권성하는 이불보에 매달려 우는 남지유를 제 품으로 끌어당겼다. 비난과 욕설이 그의 품으로 흩어졌다. 입만 험한 남배우의 욕설 따위야 권성하에게는 그저 귀여운 애교였으므로 달래고 어르는 토닥임은 그치지 않았다. 그는 흐느낌이 점점 잦아드는 얼굴에다 입을 맞췄다. 설탕공예품처럼 예쁘게 우는 얼굴은 눈물 때문에 짠 맛이 났다.

“조금 맴매했다고 이렇게 서럽게 울면 오빠 마음이 너무 아프잖아.”

‘조금 맴매’라는 앙증맞은 말로 표현하기에는 엉덩이가 아파 운신도 못할 정도였다. 남지유가 울컥하여 고개를 들었다가 그대로 입을 다문다. 여태껏 섹스 중에 한 번도 옷을 벗은 적 없는 권성하의 속살이 보였던 것이다. 셔츠 위로 잡아도 단단했던 몸에는 일반인이 결코 볼 수 없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아무리 좋은 말로도 패션 타투라 포장할 수 없는 비주얼이었다.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으나, 사람 담금질하는 게 직업인 것을 다시 확인하니 정말 놀랍게도 억울함이 저절로 참아졌다. 금세 얌전해진 그를 보며 권성하가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이제 지유 말 안 들을 때마다 호랑이가 잡아간다고 해야 하나……. 오빠가 혼내는 것보다 그림을 더 무서워하네.”

농담이라고 한 것 같지만 당연하게도 남지유는 웃을 수 없었다.

* * *

나이트가운이 대리석 바닥으로 흘러내린다. 남지유는 제 손을 잡고 부드럽게 허리를 감싸는 권성하에게 묵묵히 몸을 맡겼다. 하늘거리는 시폰 커튼을 걷고 테라스로 나가자 와인이 세팅된 야외욕조가 보였다.

‘씻겨 줄까?’

다정히 속삭였던 권성하는 이제 욕조에 발을 디디는 남지유의 손을 잡고 에스코트해 주고 있다. 종전의 정사와는 달리 아주 신사적인 태도였다. 계속 엉덩이를 얻어맞으며 펑펑 울었던 걸 생각하면 몽땅 뿌리치고 싶었지만, 이미 한 차례의 기나긴 정사가 있었던 탓에 남지유는 좀체 힘을 낼 수 없었다. 정력이 달려 다리도 후들거렸다. 그저 유일한 지지대인 권성하의 팔뚝만 그러쥐자 그에게서 만족스러운 웃음이 샜다.

“그동안 오빠 품이 그리워서 혼자 어떻게 살았어, 우리 지유.”

“……그게 아니라, 힘이 다 빠져서요.”

“놀리는 거 아니니까 솔직하게 말해도 돼. 응?”

“…….”

“이런, 또 삐쳤네.”

말없는 입을 입술이 덮었다. 권성하는 입맞춤 한 번에 경직된 남지유의 허리를 단단하게 받쳐 주며 물속으로 이끌었다.

첨벙, 넘친 물이 원목 마루로 쏟아진다. 연보라색이 도는 물에서는 은은한 라벤더 향기가 났다. 비록 권성하의 품이었지만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니 살 것 같았다. 남지유는 욕조 물에 흠뻑 몸을 담갔다가, 슬며시 몸을 일으켜 파티션 창으로 바다를 구경했다. 새파랗게 가라앉은 바다 위로 뉘엿뉘엿 해가 지기 시작해 노을과 별밤이 공존하고 있었다. 잠깐이나마 욱신거리는 통증이 잊힐 만큼 황홀한 풍경이었다. 그는 뒤에서부터 자신을 끌어안는 품에 몸을 기댔다. 권성하의 다리 사이에 앉는 것이 언제부터 익숙해졌더라. 짧은 회한이 들었다. 울적해진 그에게 권성하가 와인 잔을 집어 건넸다.

“이러니까 꼭 신혼여행 온 것 같네.”

“……그러시구나.”

욕조에 물을 받고, 향기 나는 입욕제를 풀고, 트레이에 와인과 향초를 준비하는 것. 자기 손으로는 구두끈도 묶지 않을 것 같은 권성하가 남지유를 위해 베푼 친절이었다. 이 점만 본다면 그럭저럭 신혼 느낌은 났다. 허니문 첫날밤에 엉덩이를 두들겨 패는 신랑감은 귀국하는 순간 당장 이혼감이겠지만.

남지유의 잔에 와인을 채워 주던 권성하가 떨떠름한 얼굴을 보고는 픽 웃었다.

“왜. 예쁜이는 싫어?”

“아뇨, 아녜요……. 지유도 너무 좋아요.”

“응, 그렇지.”

잔이 살짝 마주쳤다. 무식하게 따라 놓은 와인이 얇은 잔 입구에서 찰랑거렸다. 취하게 만들어서 대체 무슨 짓을 하려고? 의심이 비죽 솟았으나, 허튼 생각이었다. 권성하는 구태여 자신을 취하게 만들 필요 없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는 권력을 가진 인물이었다.

취한 게 새삼 궁금하기라도 한가 보지…… 그가 도수 센 와인을 단숨에 들이마시기 시작한다. 울대뼈가 파도처럼 넘실거리는 옆선으로 미처 삼키지 못한 와인이 흘러내렸다. 흰 피부에 물방울이 맺혀 흘러내리는 궤적을 권성하의 눈동자가 좇았다. 눈길로 어루만지기라도 하는 양 정성스레 새겨지는 시선이었다. 남지유가 가득 찬 와인을 비워 낼 동안 한 모금 마시지 않은 그가 트레이에 잔을 돌려놓는다. 그러고는 젖은 몸을 끌어당겨 안았다. 숨결이 남지유의 목덜미에 번졌다.

“예쁜이는 와인 잔도 섹시하게 무네. 어디 가서 술 먹이면 안 되겠어.”

“오빠한테나 그렇게 보이는, 거예요…….”

따뜻한 물에 달은 건지 금세 취기가 오른 건지, 발개진 얼굴이 권성하를 흘겼다. 토라져 은근슬쩍 쏘아붙이는 것이 다 티가 났다. 의도하지 않은 애교가 넘쳐흐르는 애인이었다. 어쩌면 그렇게 보이는 것까지 계산속일지도 모른다. 권성하는 기다란 목덜미에다 잇자국을 냈다. 남지유가 앓는 소리를 흘렸다.

“그래서. 며칠 안 본 사이에 남자를 달고 다녔어?”

“그건, 으응… 그냥, 운이 나빠서……. 보통은 오빠처럼…… 흐웃. 그렇게, 안 봐요…….”

“오빠처럼?”

위에서 내려다보는 얼굴에 곤란이 어렸다. 가느다랗게 뜬 눈은 쾌감에 취한 것 같기도 했고, 취기에 오른 것 같기도 했다. 목덜미와 젖꼭지에 슬슬 새붉은 빛이 맺히기 시작했다. 먹음직스럽게 익어 가는 과정이었다. 남지유의 허리를 받쳐 주고 있던 손이 곡선을 타고 미끄러졌다.

“흐읏…….”

이미 한 차례 매를 맞아 새빨갛게 익은 볼기가 큰 손에 다시금 희롱당한다. 남지유의 몸에서 가장 맛있게 익은 부위가 권성하의 손짓을 따라 뭉개지고 풀어졌다. 물에만 닿아도 따끔거리는 곳이었다. 얌전히 안겨 있던 남지유가 결국 “아파요…….”하며 앓는 소리를 내었으나 눈빛만 더 노골적으로 변할 뿐이다. 가학심이나 부추긴 꼴이었다. 억센 손아귀 사이사이로 도톰하게 살이 삐져나올 만큼 세게 붙잡히자 골짜기 사이 구멍에도 슬금슬금 틈이 생겼다. 잘생긴 얼굴에 금이 그어졌다. 아랫입술을 깨문 남지유가 그를 밀어내려는 듯 어깨를 잡았다가, 제 처지를 깨닫고는 힘을 풀었다. 나긋나긋하게 풀린 몸을 권성하가 깊숙이 끌어당겼다. 슬슬 일어서고 있는 성기가 남지유의 둔덕을 건드렸다. 움찔. 민감한 몸이 예민하게 반응했다.

“시, 싫…… 아으응, 오빠. 저 아직 아프단 말예요…….”

“지유야. 오빠가 예쁜이를 어떻게 봤어?”

“……침대에서 해요, 네? 오빠아. 여기 밖이잖아요…….”

“말 돌리지 말고. 응?”

“……지금처럼, 흣, 따먹고 싶단, 눈, 으로…… 아! 으응.”

꺼덕거리며 일어선 좆이 볼기 사이로 문질러졌다. 곧장 삽입이 되어도 이상하지 않은 구도였다. 싫어, 안 돼요…… 소리를 잔뜩 죽인 만류가 권성하에게로 흘러들었다. 그는 물 많은 얼굴을 바라보았다. 눈물을 머금은 얼굴이 곧장 서럽게 울 것처럼 일그러져 있었으나 그에게는 좆을 데우는 땔감에 불과했다. 물속에서 꺼덕꺼덕 잘도 발기한 좆이 삽입부를 건드린다. 방금 겪은 수난을 다시 겪어야 함을 직감한 남지유가 결국 우는 소리를 냈다. 눈물인지 목욕물인지 모를 물방울이 갸름한 턱 끝에 맺혀 떨어졌다.

“오, 오빠…… 아니죠? 안 하실 거죠? 우리 성하 오빠 짐승처럼 붙어먹을 공간 구분 못하시는 분은 아니잖아요…….”

“왜 울고 그래. 괜찮아, 응? 지유가 소리 잘 참으면 돼.”

“못 참아요. 못한다구요. 오빠, 지유가 기분 좋게 해 드릴게요. 입으로 해 드리는 거 좋아하시잖아요. 그러니까, 그냥 침대로 가서…… 흐앗!”

만류를 늘어놓는 와중에 그대로 꿰뚫리고 말았다. 길게 뻗은 목줄기가 강제로 주입된 쾌감으로 바들바들 애처롭게도 떨렸다. 가냘픈 손짓이 언뜻 매달릴 구석을 찾는 것처럼 제 엉덩이를 붙잡은 팔뚝에 내려앉았지만 붙어먹을 공간 구분 못하는 짐승은 전혀 봐주지 않았다. 남지유는 짐승의 손에 붙잡혀 스스로 허리를 흔드는 것처럼 움직여야만 했다.

“하아, 아……! 으으응…….”

“예쁜아. 떡치는 거 광고할 일 있어? 옆방에 다 들리겠네.”

“……으응, 흐. 후으……!”

좆질은 물속에서도 거침이 없었다. 파도 소리가 들리는 야외 테라스에 두 남성이 욕조에서 부대끼는 소리가 선정적으로 흘러나왔다. 남지유는 제 손으로 입을 틀어막으며 신음을 삼켰다. 원목 파티션 하나로 가려진 테라스에서 섹스를 하고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심장이 떨려 몸이 절로 움츠러들었다.

권성하는 남지유가 자신의 품으로 무너진 후에야 다정히 달래는 흉내를 내 주었다. 제게로 숨으려 드는 남지유가 퍽 꼴렸는지 좆질은 더 사나워져 있었다.

“괜찮아……. 아무도 안 봐. 응?”

“다, 다 들리잖, 하앗, 아, 아으응.”

“오빠만 듣는데 뭐가 부끄러워.”

그의 어깨에 매달린 남지유가 고개를 가로젓는다. 권성하에게 억지로 붙들려 삽입 운동을 할 때마다 목욕물이 욕조를 때리는 소리가 났다. 스스로 앓는 소리를 내는 것도 들렸다. 이런 상황에서도 착실히 달아오르는 몸이 수치스러웠다. 권성하를 붙어먹을 공간도 구분 못하는 짐승으로 비난할 처지가 못 되었다. 깊은 속을 찌르는 좆이 아쉬워져, 이제는 그가 손을 놓아도 허리를 흔들 것만 같았다.

문득, 엉덩이를 붙잡은 손아귀 힘이 억세졌다. 살결이 당겨지며 빠듯하게 열린 구멍도 벌어졌다. 남지유가 허리를 움찔 떨었다.

“오, 오빠. 물 들어와요…….”

“어디에. 지유 보지에?”

“네에, 네…… 느낌이, 이상, 하으, 응.”

“신경 쓰지 마. 예쁜이 보지 젖는 게 하루 이틀 일이야?”

“안, 젖는다니까, 아, 아앙…… 흐으응.”

취기와 열기에 바싹 달아오른 남지유는 어느 한 군데 빼 놓지 않고 빨고 싶을 만큼 젖어 있었다. 깜빡거릴 때마다 눈물에 짙어지는 속눈썹이 대표적이다. 권성하가 깜빡 죽는 그 얼굴로 남지유가 아양을 떨었다. 입술을 맞추고, 아래를 가득 조이며 달뜬 목소리로 속삭인다.

“지유 보지에, 오빠 좆만 받고 싶어요……. 물, 들어오는 거, 싫, ……하아아!”

욕설을 짓씹는 소리와 함께 처박는 좆질이 거세졌다. 깊숙하게 처박힌 좆이 내벽 가장 끄트머리까지 닿았다. 순간 비명을 내지를 뻔한 남지유가 어쩔 줄 몰라 하며 권성하에게 매달렸다. 당장 신음을 틀어막아야 하는 입으로 권성하의 어깨를 깨물자 묵직한 좆이 마구잡이로 처박혔다.

첨벙첨벙 욕조 물이 넘치기 시작한다. 사정하여 씨를 뿌리기 위한 좆질이 막바지에 치달았다. 머리 위로 까마득한 별밤이 흐드러져 있는 것이 아무 상관없어질 만큼 쾌락의 극치였다. 오로지 몸을 채우는 자극만이 남았다. 남지유는 절정과 함께 터지려는 신음을 입 안 가득 권성하의 어깨를 깨무는 것으로 참았다. 미처 삼키지 못했던 군침에 피가 섞였다. 나른하게 늘어지는 몸을 권성하가 다정히 보듬었다.

“이제 입질도 할 줄 알고…… 기특해. 우리 지유.”

그는 삽입한 좆을 빼지 않은 채 그대로 끌어안아 빨간 입술에다 입을 맞췄다. 연달아 수난을 당한 남지유는 저항할 힘도, 응할 힘도 없어 가만 입만 벌렸다. 그것만으로도 또 기특하다며 칭찬을 받았다. 고요한 야외 테라스에 울적한 파도 소리만 돌아왔다.

* * *

울기도 많이 울고, 싸기도 많이 싼 남지유는 기진맥진하여 침대에 늘어졌다. 목욕을 빙자한 야외 섹스를 즐기는 사이 보송보송한 새 이불로 바뀌어 있었다. 남자 혼자 묵는 방이라는 걸 알 텐데. 혹시 소리가 들리진 않았을까. 어렴풋이 걱정이 떠올랐으나 계속 이어 갈 기력이 없어 까무룩 기절하듯이 잠들고 말았다. 욱신거리는 엉덩이에 시원한 수분크림을 발라 주는 권성하의 손길을 느끼면서 말이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이미 한창 밝은 오후였다. 오랜만에 안 쓰던 근육을 써 온몸이 쑤셨다. 남지유는 옆자리에 권성하가 없는 것에 안도하면서도, 실컷 따먹고 말도 없이 떠난 개매너에 치를 떨었다. 장장 열다섯 시간을 내리 잔 스스로에 대한 고찰은 없었다.

“씨발…… 안 쑤시는 데가 없어.”

간신히 몸을 일으켜 씻고 온 그가 소파에 드러눕듯 앉았다. 씻고 나오면 권성하가 돌아와 있을 줄 알았건만, 흔적도 없었다. 대체 어디로 간 건지 모르겠다. 눈에 보여도 불안하고 없어도 불안했다. 이대로 용서해 줄 것 같진 않았는데. 다가올 앞날이 맘에 걸려 초조하기 짝이 없었다.

딩동―

초인종이 울렸다. 순간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던 남지유는 벌렁거리는 가슴을 안고 현관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문밖에는 전혀 딴 사람이 서 있었다. 권성하의 비서였다.

“잘 주무셨습니까. 깨우려던 참이었는데 일어나셨군요.”

“……뭡니까. 이사님이 또 시계라도 준대요?”

“아뇨. 간밤에 무리를 많이 시키셨다며 스파 마사지를 예약하셨습니다. 깨어나질 않으셔서 지금까지 미뤄지긴 했습니다만.”

“…….”

뭘 씨발 하룻밤 만에 떠벌리고 다니는 건지. 이제는 화를 내기도 지쳤다. 말없이 몸을 돌리는 남지유의 뒤로 비서가 따라붙었다.

“잠이 깨셨다면 지금 테라피스트를 불러 드릴까요?”

“맘대로 하십쇼.”

“그럼 곧 들여보내도록 하겠습니다.”

소파에 다시금 몸을 눕힌 그가 아직 사라지지 않는 인기척에 눈을 떴다. 비서가 정자세로 서 있었다. 무슨 할 말이 있나. 그럴 일은 없겠으나 이사님의 앞길을 막지 말아 달라며 수표라도 내밀었으면 참 좋겠다. 남지유는 가망 없는 상상을 하며 심드렁하게 고개를 들었다.

“왜요?”

“이사님께서 남지유 씨를 많이 아끼십니다. 중요한 계약을 미루고 여기까지 찾아오실 만큼 말입니다.”

“그래서요?”

상사의 무능을 고발해 봤자 남지유는 좆도 관심 없었다. 오히려 그 조폭새끼가 회사를 제대로 굴리는 게 신기했다. 하긴, 수완이 있으니 숫자놀이하면서 사업을 확장했던 거겠지……. 이래서 대한민국이 안 되는 거다. 조폭 나부랭이가 무슨 사업이야. 다 감방에 처넣으라고. 가석방 없이 종신형 때려서. 속으로 실컷 투덜거리는 그에게로 비서가 다시 말을 이었다.

“남지유 씨도 이사님께 아주 마음이 없으신 것 같진 않으신데…….”

“뭐요?”

“……아무튼, 이사님께서는 남지유 씨가 원하는 걸 이루어드릴 여건을 충분히 갖추신 분입니다. 부디 이사님께 섭섭한 점이 있으셔도…….”

“그럼 그쪽이 애인 하시든가.”

비서는 난생처음 개소리를 듣는 것처럼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남지유가 손을 휘저었다. 잡상인 내쫓는 모양새였다.

“요컨대, 괜히 까불지 말고 이사님 비위나 잘 맞추라는 소리 아닙니까. 그 변덕 제일 잘 아시는 분이 그래요?”

“……저, 남지유 씨…….”

“애당초 그쪽도 싫은 걸 왜 나한테 강요합니까. 가세요.”

“……아니. 아, 알겠습니다. 테라피스트는…… 나중에 들여보내겠습니다.”

아연실색하여 떠나는 비서를 남지유가 눈을 감고 배웅한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기 무섭게 외따로 앉아 있던 그의 어깨에 나란히 손이 올라왔다.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자 다정히 웃는 얼굴이 보였다. 쿵. 그야말로 심장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예쁜이가 오빠를 그렇게 생각하는 줄은 몰랐네.”

“오, 오빠…… 어, 어디 계셨어요? 안 계신 줄 알고…….”

“전화하느라 잠깐 테라스에 있었지. 그나저나 오빠 비위 맞추는 게 그렇게 힘들었어?”

“아, 아아뇨. 그럴 리가요……. 그냥 비서님이 훈수 두는 게 짜증 나서 그런 거예요. 전혀 아니에요!”

“그래?”

“네, 네에. 정말요.”

“그래도 오빠를 그렇게 쉽게 다른 놈한테 넘기다니 마음이 아프네. 지유야. 어쩌지?”

권성하의 웃음이 결이 달라진다. 남지유는 조폭새끼 심사 뒤틀린 걸 또 어떻게 풀어 줄지 쩔쩔매다 자리에서 일어나 대뜸 진하게 입술부터 부딪쳤다. 어젯밤과 달리 미적지근하게 응하는 건 권성하였고 열렬히 구애하는 것은 남지유였다. 남지유는 부러 목에다 팔까지 감아가며 혀를 섞었다. 중간중간 입술을 맞대고 쪽쪽 소리도 내었다. 그러다 눈을 마주 보며 권성하에게만 달콤한 생계형 아양을 떨었다.

“오빠…… 지유가 잘못했어요. 속상해하지 마세요. 네? 지유는 정말 오빠뿐이에요…….”

“애교만 부리면 다 통하는 줄 알지. 으응?”

“지유는 그냥 오빠 속상해하지 마시라구…… 아앗.”

내내 손 놓고 아양만 즐기던 권성하가 갑자기 남지유의 엉덩이를 움켜잡았다. 꼭 맞붙은 사타구니에 웬 아나콘다 같은 게 닿았다. 남지유는 권성하의 속상한 맘을 풀어 주기까지 한참이 걸리리라는 것을 직감했다. 그제야 비서가 테라피스트를 ‘나중에’ 들여보내겠다고 말한 뜻도 실감할 수 있었다. 성질이 뻗쳤으나 감히 티를 내지는 못하는 남지유가 매달리는 척 어제 깨물어 놓은 상처를 지그시 내리누른다. 그 속 보이는 반항에 권성하의 웃음이 짙어졌다.

“그래서 우리 예쁜이, 오빠 속상한 건 어떻게 풀어 주려고.”

마지못해 미소 지은 남지유가 어젯밤 그토록 원했던 침대로 권성하를 이끈다. 결국, 스파 마사지는 한 시간이 훌쩍 지난 후에야 받을 수 있었다.

* * *

두꺼운 아크릴 유리로 만들어진 창이 푸른 바다 속을 고스란히 비춰 주고 있다. 에메랄드빛 물속에 열대어 무리가 흐드러진 버드나무처럼 지느러미를 살랑거렸다. 부서지는 햇살은 먼지처럼 보얗게 산란했다. 거대한 아쿠아리움을 레스토랑에 고스란히 옮겨 놓은 듯한 진풍경이었다.

다들 입을 모아 이 리조트의 레스토랑은 꼭 방문하라는 이유가 있었다. 남지유는 오기 싫다며 투정을 부렸던 것이 우스울 만큼 넋을 놓고 빠져들었다. 어젯밤부터 내내 물어 뜯겨 도톰하게 부은 입술이 헤 벌어진 꼴이 볼 만했다.

<그럼, 자리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이쪽으로 따라오세요.>

머리 위로 펼쳐진 바다 대신 남지유를 감상하던 권성하가 그를 끌어안았다. 늘씬한 허리가 남자의 품으로 빨려들었다.

“물고기 다 구경했어?”

“말씀을 해 주시지…. 밖에서 이런 건 좀, 그래요.”

“불렀는데 듣지도 못하던걸.”

권성하가 철없는 아이 다루듯 아프지 않게 뺨을 꼬집었다. 솜털을 만지는 것처럼 간지러운 손길이었다. 세게 쥐면 부서지는 공예품이라도 된 듯했다. 속눈썹을 내리까는 그의 손을 권성하가 부드럽게 감아쥐고는 제게 팔짱을 끼게끔 만들었다. 권성하는 통째로 빌린 레스토랑을 궁전처럼 거닐며 그를 에스코트했다. 대놓고 벌이는 애정 행각에 남지유만 난처해졌다.

그들을 위해 비워진 레스토랑에는 직원 몇몇을 제외하고는 보는 눈이 없었다. 비행기로 한나절이 걸리는 섬에 새삼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 거라 생각되지도 않았다. 그 점이 권성하를 밀어낼 수 없는 구실이 되어 그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오기 싫다더니. 안 데리고 왔으면 속상해서 어쩔 뻔했어.”

“과장이 심하세요.”

“우리 지유, 일곱 살이었으면 방금 미아 됐을 텐데.”

“…….”

대답 없는 침묵 사이로 웃음소리가 흘렀다. 삐치지 마, 응? 귓가에 키스하듯 속삭이는 목소리에는 감출 수 없는 즐거움이 배어 있었다. 신혼 기분에 젖은 것처럼 다정한 태도였다. 이쯤 되니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이 새끼 왜 기분이 좋지?’

그의 경고를 무시한 채로 백이선과 놀아났고, 섹스 장면을 들키기까지 했다. 권성하의 입장에선 제 ‘여자’가, 외간남자와 배를 맞더니 적반하장으로 화를 내고 해외로 튀어 버린 상황인 것이다.

화가 단단히 난 그에게 해코지를 당할지도 모른다는 예상은 완벽하게 빗나갔다. 그는 엉덩이를 두들겨 주는 것으로 이 일련의 사태를 마무리 지으려는 것처럼 더 이상 추궁하지 않았다. 항상 폭력을 곁에 두고 사는 남자가 보일 처사라기에는 지나치게 너그러웠다. 내내 다정함을 잃지 않는 태도는 마치 자신의 외도와 결별 선언은 아예 접한 적도 없는 것처럼 태연자약했다.

‘설마.’

순간, 배꼽을 간질이던 위화감이 확신으로 뒤바뀐다. 일생일대의 용기를 내어 고백한 결별이 권성하에 의해 대수롭지 않은 사랑싸움으로 종결되었다는 확신. 진심으로 화를 내든, 짜증을 내든, 혹은 이별을 선언하든. 권성하가 그것을 대수롭지 않은 투정으로 여긴다면 남지유로서는 타개할 방도가 없었다. 관계를 끝내고 말고는 전적으로 권성하의 변덕에 달려 있는 것이었다. 앞날이 까마득해졌다.

“발 조심해야지.”

“앗….”

새삼스러운 충격에 빠지느라 넋을 잃은 그를 권성하가 잡아 세웠다. 발을 헛디딘 곳 바로 아래로 계단이 줄지어져 있었다. 남지유는 저도 모르게 권성하의 팔뚝에 매달렸다. 권성하가 못 말리는 사고뭉치를 대하듯 코끝을 살짝 꼬집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했어. 응?”

“아뇨, 그냥… 오빠랑 외식하는 게 너무 오랜만이라 긴장했나 봐요. 죄송해요.”

백이선에게 양다리를 걸친 사실도, 권성하에게 한 결별 선언도 몽땅 없던 일이 되었으니 이 관계도 무기한 연장이었다. 해코지당할까 싶어 설설 기었던 게 바로 지난밤인데 참 모순적이게도 피로감이 몰려들었다. 그러나 익숙한 무력감이기도 했다. 없는 정신을 애써 긁어모아 다시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한 남지유의 손을 권성하가 다정히 잡아 주었다. 친절의 진위를 파악하려는 시선이 권성하의 옆얼굴을 틈틈이 살폈다. 문득 그가 웃었다.

“정신 못 차리지. 지유야. 그러다 넘어지면 어쩌려고. 안 그래도 연약해서 픽픽 쓰러지는 게. 오빠 얼굴 그렇게 보고 싶은 걸 그동안 어떻게 참았어, 어?”

“네? 아…….”

하도 진지하게 말해서 놀리려는 의도를 뒤늦게 깨달았다. 좀 쳐다봤다고 이런 소리까지 들어야 하나. 굴욕적이었다. 남지유는 대꾸하지 않고 짙은 속눈썹만 깜빡거렸다. 못 알아들은 척 시치미를 뚝 떼는 얼굴은 언뜻 순진해 보였다.

나선형 계단 아래에는 전면이 유리벽으로 이뤄진 홀이 펼쳐져 있었다. 천장마저 유리로 되어 있어 바다가 훤히 들여다보였다. 특별한 날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게끔 도와줄 만한 낭만적인 장소였다. 어디를 보아도 진풍경인지라 남지유는 세팅된 자리에 앉으며 사방을 둘러보았다. 때마침 머리 위로 상어가 지나갔다. 감탄한 입술이 봉긋해지며 잇새가 벌어졌다. 권성하는 그가 물고기 구경에 실컷 빠지도록 내버려 두고는 프랑스식 코스요리를 2인분 주문했다. 식전주가 나왔으나 그보다 식욕을 더 돋우는 것이 눈앞에 있었으므로 눈길도 가지 않았다. 남지유가 눈치챘다면 기겁했을 만한 진득한 시선이 그의 몸 곳곳을 훑었다.

주위가 환기되는 데에는 별다른 소음이 필요치 않았다. 집요하게 따라붙는 시선을 느낀 남지유가 표정을 가다듬으며 권성하를 보았다. 고개를 돌리는 잠깐 사이에 반성하는 얼굴이 완성됐다. 권성하는 웃음을 굳이 참지 않았다. 이 대책 없이 귀여운 걸 어떡하나. 그런 눈빛이었다.

“지유야. 오빠가, 사실은 화 많이 났었어.”

“……네.”

“갑자기 해외로 나가더니 전화는 안 받고… 우리 귀염둥이는 생각이 참 짧기도 하지. 어차피 혼날 거 뭐가 무섭다고 몰디브까지 도망을 왔어. 오빠가 화내는 게 그렇게 무서웠어?”

“그게, 오빠를 뵐 면목이 없어서…… 다신 말없이 안 그럴게요. 걱정 끼쳐서 죄송해요, 오빠.”

사내놈 둘이서 사이좋게 오빠, 귀염둥이 호칭을 나누는 가운데 서버는 차례로 접시를 내왔다. 한국이었다면 꿈도 못 꿨을 대담함이었다. 입꼬리를 말아 올린 권성하는 어쩐지 기분이 좋아 보였다.

“겁은 많아 가지고. 예쁜이 울까 봐 오빠는 화도 못 내겠다. 으응?”

“화, 내셔도 돼요. 지유가 잘못한 거니까…….”

“글쎄. 오빠 생각엔 5분도 못 참고 잘못했다고 엉엉 울 것 같은데.”

“…….”

“어쩌겠어. 더 좋아하는 사람이 참는 거지.”

서버가 기다란 접시를 내왔다. 게살과 전복, 크림 브륄레가 담겨 있었다. 권성하는 자신의 접시에서 남지유가 좋아하는 메뉴를 덜어 주었다. 영 식욕이 이는 상황은 아니었지만 성의를 감히 무시할 수 없는지라 그는 어설프게 포크질을 했다. 이곳 셰프가 두바이 7성급호텔에서 주방장을 지냈다더니, 씹는 순간 그대로 녹아들었다.

“그래서, 그 새끼는 어쩔 거야.”

여리고 어린 애인을 다루듯 남지유의 앞에서는 말조심을 하던 권성하로서는 드문 언사였다. 놀란 남지유는 포크를 바로 내려놓고 음식물을 삼켰다.

“그분은 이제 영화가 끝났으니까 더 뵐 일 없을 거예요. 번호도 차단했구요… 오빠가 걱정하시는 그런 일은 더 없을 거예요. 약속드려요.”

권성하는 전복을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 옮겨 주었다. 말자지를 입에 몇 번이고 처박아 봤으면서 전복은 새 모이만한 크기로 잘라 놨다.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해. 낯가리지 말고, 오빠가 준 카드도 좀 쓰고. 응? 다른 놈들 얘기 들어 보면 알아서 긁고 다닌다던데, 오빠가 지유 씀씀이도 감당 못할 것 같아서 그래?”

“아뇨, 아녜요. 지유가, 지금까지 촬영하느라 바빠서 쇼핑을 못 해서 그랬어요. 다음에 오빠 한가하실 때, 그때 지유랑 같이 쇼핑해요. 네?”

“오빠 화 안 났다니까, 왜 그렇게 앙탈을 떨어. 귀엽게시리.”

남지유가 그의 손끝을 잡아 살살 흔들며 말꼬리를 늘어뜨리자 기분이 풀린 모양이다. 지켜보던 권성하의 입매가 느슨해지며 호선이 떠올랐다. 남지유는 벌렁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면서 백치처럼 웃었다.

“화도 못 내게 만들 거면서 무슨 혼이 나겠다고.”

수작부리는 거 다 아는데 넘어가 주겠다는 뉘앙스였다. 이제는 도리어 잡혀 버린 손끝이 살짝 떨렸다. 놓고 싶었으나, 권성하는 가지런한 손끝을 매만지는 것에 재미가 붙은 듯 한참을 만지작거리며 얼굴을 들여다봤다. 뺨이 화끈거릴 지경이었다. 그는 서버가 전채요리를 내온 후에야 손을 놓아주었다.

코스요리는 상대적으로 맛이 깔끔한 버섯요리부터 시작되어 생선, 육류까지 순서대로 나왔다. 권성하는 새로운 메뉴가 나올 때마다 제 몫의 요리를 먹기 좋은 크기로 썬 후 남지유의 접시와 바꿨다. 먹는 것을 지켜보다가 잘 먹는다 싶으면 제 것을 덜어 주기도 했다. 남지유는 손발 없는 인형 취급이 불쾌한 것은 둘째 치고, 자신을 살찌워 잡아먹을 계획인 식인종을 목전에 둔 것처럼 두려워졌다. 그럼에도 불평 한마디 할 수 없는 처지인지라 입을 벌리라 하면 벌려 아기 새처럼 받아먹었다. 남지유는 맛있는 음식도 고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다. 그가 또다시 먹이려드는 권성하에게 고개를 내저어 보였다.

“지유 배불러요… 오빠.”

“아… 지유가 말하니까 야하게 들리는데.”

“네?”

“하하, 겁먹기는. 수중섹스라도 하자고 할까 봐 놀랐어?”

“노, 놀리지 마세요….”

“그러고 보니 살이 좀 올랐나. 더 귀여워졌는데.”

생긴 것만은 유려한 얼굴이 모로 기울어졌다. 권성하는 남지유를 잠깐 지켜보더니 손을 뻗어 한 손으로 뺨을 감싸 보았다. 보드라운 살결이 손바닥에 차오르는 느낌이 전과 달랐다. 예전에 비해 둥글었다. 영화를 찍는다고 그러잖아도 마른 몸을 혹사시키는 것 같더라니, 이제야 체중이 돌아오는 모양이었다. 하긴 엉덩이를 때릴 때 차진 느낌이 나긴 했다. 손바닥으로 때릴 때도, 좆질을 하며 때릴 때도, 속이 꽉 찬 복숭아를 탐하는 느낌이었지. 품기에는 지금이 좋긴 했으나 맛있게 살이 오른 모습은 자신이 없는 동안 속이 편했다는 방증이기도 하여 권성하는 묘한 웃음을 그렸다.

“휴가 온 게 즐거웠어?”

“그, 방에만 있느라 운동을 못해서 그런가 봐요…. 혹시, 보기 싫으세요?”

“그럴 리가. 항상 지나치게 귀엽고 예뻐서 탈이지. 그래서 오빠가 정신을 못 차리잖아.”

“…….”

남지유가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아직 뺨을 감싼 손은 떠나지 않은 상태였다. 손바닥에 감기는 솜털 같은 뺨, 손끝에 스치는 머리카락이 주는 감촉을 즐기는 듯 옆얼굴에 한참을 머물렀다. 아예 화를 내지 못하게끔 고개를 살며시 기대며 뺨을 비비자 권성하에게서 웃음이 터졌다.

큰 손에 얼굴을 기댄 채로 시선을 들어 올리면 푸르른 바다를 배경으로 둔 권성하가 보인다. 막연히 로맨틱하다고 느꼈던 장소였다. 남의 일처럼 회상하기에는 이미 그 로맨틱한 공간에 스며들고 말았다. 항상 예쁘다는 말을 증명하려는 것처럼 정욕이 철철 흘러넘치는 눈빛이 그에게로 쏘아지고 있었다. 연인들이 주로 앉는 테이블은 간격이 좁아 이마도 맞닿을 수 있을 정도다. 이 로맨틱한 공간에 둘밖에 없다는 사실이 주는 압박감이 입술을 바싹 태웠다. 밥이나 처먹지 이게 대체 뭐야. 눈가가 금세 붉어진 남지유가 시선을 어물쩍 피해 버렸다.

“디저트는 먹을 수 있겠어?”

“조금은요….”

뜻밖에도 손길은 쉽게 떨어져 나갔다. 그와 동시에 서버가 비워진 접시를 거둬 갔다. 남지유는 내외하는 것처럼 시선을 모로 떨어뜨린 채로 숨을 죽였다. 집에 가고 싶었다.

접시를 거둬 간 서버가 다시금 디저트를 내왔다. 달달한 냄새가 후각을 자극했으나 아무런 작용도 일으키지 못했다. 남지유는 그저, 앙증맞은 타르트가 줄지어선 옆에 자연스럽게 합류한 프러시안 블루의 사각 케이스를 못 본 체하고 싶었다. 소가죽을 감은 케이스는 누가 봐도 귀금속을 배 속에 품고 있는 조개였다. 이걸 받으면 영영 코가 꿰일 것 같다. 본능적인 직감이 들었다. 흘끗, 고개를 들자 웃음기 어린 시선과 마주쳤다. 남지유는 외간남자와는 눈조차 마주치면 안 되는 귀한 집 규수처럼 곧장 시선을 떨어뜨렸다.

“이, 이게 뭐예요?”

“오는 길에 사 왔어. 맘에 드나 확인해 봐.”

“…지유한테 주시는 거예요?”

“오빠가 지유 말고 다른 여자한테 이런 선물을 할까 봐?”

“지유는 그런 뜻이 아니라…….”

“알아.”

실소한 그가 턱짓으로 케이스를 가리킨다. 남지유는 마지못해 그것을 들었다. 생각보다 무게감이 있었다. 명품 사재기를 즐기는 졸부 배우는 단번에 시계 선물임을 깨달았다. 케이스 가운데에는 세계 최고의 브랜드 값을 자랑하는 이름이 자그맣게 음각되어 있었다. 받아선 안 되는데, 그럴 거면 확인해서도 안 되는데. 이성을 아득히 뛰어넘는 호기심이 손끝을 채근했다. 케이스 겉면을 훑으며 섬세히 음각된 브랜드 명을 재확인하는 그의 얼굴에 감출 수 없는 활기가 돌았다. 알게 모르게 기가 죽어 있던 종전과는 전혀 다른 표정이었다. 그 얼굴을 권성하가 유심히 지켜보았다.

이런 걸 받을 순 없어요, 부담스러워요, 부디 다른 좋은 분 만나세요…… 마땅히 꺼내야 할 말은 나오지 못했다. 판도라의 상자가 열렸다.

“아니, 헉……. 와…….”

세계 굴지의 브랜드 시계는 밝지 않은 조명에서도 훤칠하게 빛이 났다. 그것이 심리적인 효과 때문이란 걸 깨닫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남지유는 얼마 없는 조명에 시계를 비춰 가며 연신 탄성을 내뱉었다. 이 시계가 어떤 소재로 만들어졌는지 알아챘을 때에는 턱이 떨어질 것 같았다. 머리 위로 상어가 지나가든 말든 이제는 관심도 없었다. 그는 시계에 빠져들 것처럼 몰입했다.

권성하가 ‘오는 길에 샀다’던 시계는 황금도 아닌 스테인리스 스틸로 제작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황금 값 이상의, 천정부지의 값어치를 자랑하는 몸이었다. 희소성 때문이었고, 희소성은 곧 돈이었다. 이 시계 하나면 그가 무리하여 구매한 펜트하우스를 사고도 한 채를 더 구매할 수 있었다. 결코 오는 길에 대충 사 올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권성하는 속물기질이 있는 그의 취향을 제대로 저격한 선물을 가져온 것이다. 차마 거절할 수 없는 물건 말이다.

남지유는 케이스를 내려놓고, 권성하를 한 번, 시계를 한 번 보았다. 방탄유리 진열장에 모셔 놓고 매일 밥 대신 보기만 해도 배가 부를 것 같은 존재였다. 돈이 있어도 매물이 없어, 아무나 손댈 수 없는 환상 속 유니콘 같은 걸 보고 있자니 손끝이 떨리고 입이 말랐다. 권성하는 절대 거절하지 못할 선물을 내놓고는 여유롭게 웃고 있었다. 그 얼굴이 잘생겨 보였다. 좆됐다.

“이거, 이거를…… 저한테, 그, 그냥 주시려구요?”

“왜. 맘에 안 들어?”

“아뇨! 그런 건 절대 아니구요. 아니, 그런데 너무…… 진심이세요?”

“진심이 아닐 건 또 뭐야.”

그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대단치도 않은 선물로 호들갑을 떤다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남지유는 좀체 충격에서 벗어나질 못한 채 마른세수를 해 댔다. 치즈 트랩인 걸 알면서도 기꺼이 붙잡히고 싶은 충동이 들 만큼 유혹적이었다. 까딱하다간 인생이 종칠 수도 있는데…… 아니.

‘돈 존나 많은 사장님 낚는 게 왜 인생 종치는 거지?’

억 소리로 곡을 뽑을 수 있을 만큼 대단한 지참금을 가져온 남자였다. 앞으로 보장된 이득은 그 곱절이 될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거절하는 게 손해였다. 뭐, 물론 몸이 고달프고 정신건강에 해롭기는 할 테다. 하지만 삶은 원래 고달픈 법이다.

“손 줘 봐.”

남지유는 홀린 듯이 손을 내밀었다. 권성하는 털 하나 없이 매끈한 팔뚝을 부드럽게 잡고는 남지유가 신줏단지처럼 모셔 놓은 시계를 거침없이 끼워 주었다. 시곗줄은 남지유의 손목에 딱 맞았다. 섬세한 레이아웃을 몇 겹이나 지닌 시계는 다소의 무게감도 느껴졌다. 순식간에 손목에 강남 한복판 빌딩이 채워졌다.

“잘 어울리네.”

“…….”

손목을 감싼 무게감에 남지유는 희끄무레하게 정신이 돌아왔다.

“오빠, 이거 제가 받기엔 너무… 비싼 것 같아요.”

“그런 건 오빠가 정하는 거예요. 예쁜이는 그냥 받기만 하면 되는 거고.”

“하지만 그냥 받기에는…….”

“지유야, 자꾸 그러면 오빠 서운해.”

처음부터 그에겐 선물을 받고 말고 할 결정권이 없었다. 예물 같은 선물이더라도 그랬다. 남지유는 결코 실사용 용도가 아닌 시계를 대담하게 손목에 채우고서는 고뇌했다. 어차피 떨쳐 낼 수 없다면 받을 수 있는 건 모조리 받아 놓는 게 낫지 않을까. 그동안 좀 좆같아도 참으면 그만이다. 재벌놈들 변덕이 오래 갈 것이라 생각도 되지 않았다. 재미 좀 보다가, 더 젊고 예쁜 놈이 나오면 알아서 정리해 줄 것이다. 괜히 걱정할 필요 없었다.

시계 선물 하나에 몰디브까지 도망쳐 오게 된 이유를 까맣게 잊어버린 남지유가 비로소 웃었다. 권성하는 명품에 정신 팔린 그를 고작 사탕에 정신 팔린 어린애 보듯 지켜보고 있었다. 미끼를 조금 흔들어 줬다고 알아서 수렁으로 빠지고 있으니 비슷한 의미로 귀엽다면 귀여운 것이었다.

“하루만 더 쉬었다가, 오빠랑 집에 가자.”

시계 보는 재미에 빠진 남지유는 그 말의 함정을 눈치채지 못하고 유순히 네에, 하고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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