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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봉분 쌓기 (4/11)

4. 봉분 쌓기

누군가 맨살을 만지고 있다.

남지유는 썩 달갑지 않은 감각과 함께 눈을 떴다. 순간 밤새 집요하게 괴롭히던 백이선이 떠올랐으나 그 꼰대 같은 새끼가 한낱 남창과 아침까지 함께할 리 없었다. 그런 자각이 들자 징그럽던 손길이 달게 느껴진다. 묵묵하게 근육을 풀어 주는 손끝의 정체는 아마 백이선이 불러 놓은 관리사겠지. 무식한 섹스에 어울려 주느라 혹사당한 근육이 야무진 손길 아래서 호사를 누린다. 나른함이 물밀듯 밀려왔다. 다시금 잠이 들려던 남지유가 깜짝 깨어났다. 아무리 편해도 섹스의 흔적이 남아 있을지도 모르는 몸을 남에게 내줄 순 없었다. 숙취와 간밤의 후유증이 겹쳐 그저 쉬고 싶은 마음에 정신이 나갔던 모양이다. 그가 잠긴 목소리를 겨우 꺼낸다.

“마사지는 됐으니, 이만 나가 보세요.”

“곧 끝나니까 조금만 더 받으시죠.”

대꾸는 전혀 뜻밖의 인물이 돌려주었다. 남지유는 잠이 확 달아나 가물거리던 눈을 바로 떴다. 베드룸 창가에 마련된 티 테이블에서, 쓰리피스 정장을 입은 백이선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제와 다른 정장이었다. 비서에게 새로운 정장을 주문하고, 관리사를 부르고, 커피나 마시며 구경하고 있을 여유가 있다면 집으로 꺼지기나 할 것이지. 웃는 낯짝은 첫 만남 때처럼 정중해 보였으나 지난밤 내내 본모습을 몸소 체험했던 남지유로서는 우습지도 않았다. 외려 기가 막혔다.

‘이거 미친놈 아냐?’

재벌이 되면 남자 연예인과 섹스 스캔들이 나는 것쯤 아무렇지도 않나 보다. 쏘아붙이고 싶은 말이 입에 한가득 맴돌았지만 단둘만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남지유는 짜증이 난 중에도 말을 골라 내뱉었다.

“여기 계신 줄은 몰랐네요.”

“지유 씨 혼자만 남겨 둘 순 없잖습니까. 제가 그렇게 무정한 사람으로 보였나요?”

아주 선한 사람처럼 말하는 꼴을 보자니 울화가 치민다. 대기업의 전무씩이나 하는 사람이 왜 여기 있냐며 눈치 주는 말을 못 알아들을 리는 없고, 자기 좋을 대로 받아넘기는 게 권성하와 비슷한 수준이었다. 무식하고 저급한 섹스 방식도 비슷했다. 좆같은 취향은 말할 것도 없고. 남지유는 순간 지난밤의 아득한 정사가 떠올라 절로 피가 말랐다.

‘싫어, 더는…… 못해요! 흐으, 살려 주세요. 아, 앗!’

‘고작 이 정도로 힘들면 어떡합니까. 남지유 씨 소비 수준에 맞추려면 더, 열심히, 일해야죠.’

‘흐으, 흑…. 네가 씨발, 무식하게 박, 는다고는, 생각 안 하냐?’

‘영, 의욕이 없으시네. 성과급이라도 쳐 드릴까요? 한 번 박을 때마다 다섯 장, 어때요. 그럼 지금부터 숫자 잘 세셔야겠어요. 지유 씨.’

힘들다고 호소하는 사람을 붙잡고 얼마나 무식하게 박아 대는지. 권성하나 백이선이나, 창밖으로 행성이 날아드는 장면 하나쯤 넣어 주는 게 좋을 만한 섹스를 해 댔다. 이대로 구멍이 영영 닫히지 않을까 불안에 떨게 되는 섹스. 오늘이 마지막일 것 같은 섹스였고, 정말 그러다 뒈질 것 같았다.

‘아, 맞다, 씨발 권성하.’

남지유는 권성하를 떠올리고 나자 그제야 조금 걱정이 되었다. 말 그대로 ‘조금’이었던지라 치기 어린 반발심에 곧장 묻히고 말았다. 말로만 애인이지 실상 ‘오빠’, ‘자기’ 하며 연애 흉내 내는 스폰 관계에 불과했다. 남지유에게 최 사장의 화대보다 몇 배를 더 쳐 주겠다며 접근했던 것이 권성하였고 남지유는 그 화대만큼 열심히 ‘일’했다. 최 사장의 마지막을 생각하면 솔직히, 무섭지 않은 건 아니었으나…… 지가 뭐라고 화를 낸단 말인가? 사실 권성하가 그리 화를 낼 것 같지도 않았다. 좀 예뻐하는 남창이 남창 짓도 한 게 무어 대수라고. 조소한 남지유가 베개에 얼굴을 묻는다. 스폰서를 청산하고 청렴한 새 삶을 살려고 했는데 결국 하나로도 모자라 둘을 물었으니, 어쩌면 이 짓이 천직일지도 모르겠다.

문득 허벅지 근육을 풀어 주던 손길이 떨어진다. 마사지 중 한마디도 붙이지 않았던 관리사는 자리를 떠날 때조차 아무 말도 없었다. 베개에 고개를 처박고 있던 남지유가 비로소 고개를 든다. 백이선은 어느덧 소파에서 일어나 남지유가 누운 침대로 다가오는 중이었다. 남창 취급하며 얼마든 써먹을 수 있는 구멍 다루듯 굴던 걸 까맣게 잊은 것처럼 다정한 얼굴로 말이다. 남지유는 빈정거리듯 웃었다. 그래 봤자 잘생긴 얼굴이라 불쾌감을 전달하기에는 다소 달리는 감이 있었다.

“이 동네 소문 빠른 거 모르시는 건 아니죠?”

“저와 잠자리를 가진 일로 남지유 씨에게 불쾌한 일이 생기면 안 되죠. 조치 취할 테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아까 저분은 어쩌고요? 눈이 있으면 다 봤을 텐데. 뚫린 입 단속이 제일 어려운 건 아세요?”

몸을 일으켜 가운을 입는 남지유를 백이선이 못내 자상하게 지켜본다. 눈빛만큼 부드러운 목소리가 애인을 어르는 것처럼 흘러나왔다.

“남지유 씨는 걱정도 참 귀엽게 하시는군요.”

“…….”

이번에는 기가 찬 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남지유는 하룻밤 만에 태도를 바꾼 백이선이 수상쩍어 더 말을 섞지 않고 침대에서 내려왔다. 푹신한 카펫에 발을 내딛자마자 둔통이 찌르르 울린다. 그동안 무리한 섹스를 조금 쉬었다고 몸이 곧장 동정 같은 상태로 돌아간 것 같았다. 비틀거리는 남지유를 백이선이 단단히 부축해 준다. 다정한 눈웃음과 달리 손아귀 힘은 남지유가 감히 뿌리치지 못할 만큼 억셌다. 쇼할 거면 일관성이라도 있지. 남지유는 곱지 않은 눈길로 그를 흘겨보았다.

“놔주시죠. 제가 걸을 테니까.”

“그 말 들으니 어젯밤 일이 생각나네요. 지유 씨 술 취해서 옹알이하던 게 참 귀여웠는데요.”

“…그건 잊으시고요. 어차피 더 볼 일은 없잖아요.”

“누구 마음대로.”

백이선을 돌아보자, 그는 언제 냉랭하게 대꾸했냐는 듯 여전히 웃음을 머금은 상태였다. 몇 년을 변태들의 추파에 시달려 왔던 남지유는 묘한 촉이 곤두서는 걸 느꼈다. 일종의 생존본능이었다. 유감스럽게도 남지유 자신의 의지로는 타파하기 어려운 위험이었지만 말이다.

백이선은 남지유의 팔목을 감아쥐며 제게로 끌어당겼다. 가운 하나 달랑 입혀진 몸이 백이선의 너른 품에 안겨진다. 술에 취한 상태에서도 사납게 벌어진 근육이 느껴졌는데 맨 정신에 만져 보니 더 단단한 것 같다. 골격부터 남달랐다. 몸을 만든답시고 닭 가슴살 샐러드와 영양제만 먹으며 죽음의 PT를 견뎌 온 남지유는 백이선이 살짝 부러워졌다. 백이선은 제 어깨근육에 관심이 지대한 남지유를 바라보며 곧게 뻗은 눈썹을 까닥이다 이내 웃었다. 손아귀 힘이 한결 너그러워졌다.

“태워 드릴 테니 식사는 하고 가세요. 어제 무리하셨잖아요.”

“알아서 할 테니 신경 끄세요.”

“같이 밤을 지새운 분께 이 정도 배려는 하게 해 주시죠.”

“…….”

이 좆같은 느끼함이 어디서 비롯되었나 곰곰이 생각해 보니, 백이선은 첫 만남 때의 정중함을 흉내 내는 것 같았다. 이미 잠자리에서 한 꺼풀 벗어던진 민낯을 생생히 보았던 터라 우습지도 않았다. 남지유는 저보다 조금 높은 위치에 있는 백이선을 바라보다가 손끝으로 어깨를 슬쩍 밀었다. 조신한 새색시 흉내를 내게 만들었던 강압적인 태도는 어디 갔는지, 백이선이 웃음을 머금은 채 물러나 준다. 이쯤 되니 언제까지 내숭을 부릴지 궁금해질 지경이다. 남지유가 냉소를 감추지 않은 채 말한다.

“씻고 올 테니 룸서비스 시켜 놓으시든가요.”

“분부대로 하죠.”

순순히 대답하는 꼴을 보자니 소름이 끼친다. 남지유는 유감을 솔직하게 드러내며 진저리치듯 떨어졌다. 나직한 웃음이 흘렀다.

* * *

부재 중 전화 1통.

백이선이 불러 준 차를 타고 돌아가는 길, 남지유는 손끝으로 스마트폰 모서리를 매만졌다. 목욕을 마치고 나와 스마트폰을 확인했을 때 순간 올랐던 오싹함을 아직 떨칠 수가 없었다. 그가 소속사 대표의 전화를 받고 나가 술을 진탕 퍼먹고, 백이선의 차에 올라타 호텔로 향했을 때. 혹은 권성하가 제 자신의 만족을 위해 아껴 두었던 몸을 생판 모르는 놈에게 열어 주고 있을 때. 어느 순간이든 권성하에게서 전화가 왔던 것은 확실했다. 초조함에 입이 말랐다.

‘이 새끼 설마 진짜, 날 감시하는 건…….’

아냐, 허튼 생각이다. 권성하가 그렇게까지 제게 공을 들일 리가 없었다. 남지유는 스스로 권성하 같은 부류를 잘 안다고 자부했다. 가진 것이 너무 많아 삶이 무료하여 늘 새로운 자극을 찾아다니는 부류 말이다. 그런 놈들은 대체로 변덕이 심하고 무엇 하나에 진득이 흥미를 보이는 법이 없었다. 그게 섹스라면 더더욱.

고급 리무진은 흔들림 하나 없이 매끄럽게 움직이고 있다. 남지유는 빌딩이 줄지어선 창밖을 바라보다 한숨을 토했다. 어쩌다 제 삶이 이 꼴이 됐나 싶다. 최 사장 하나 떨어뜨리려고 했더니 웬 조폭새끼가 붙고, 이제는 대놓고 스폰 제의를 하는 재벌새끼까지 붙었다. 모든 원흉은 이미 뒈진 최 사장이었다. 그 새끼가 영상만 안 찍었어도 씨발. 한때 꿈꾸었던 건강하고 쾌적한 노후는 언제 찾아올지 모를 복상사에 위협이나 받는 처지다. 생각에 잠겨 있는 그에게 운전기사가 말을 걸어온다.

“남지유 님, 도착했습니다.”

“아, 고마워요.”

겨우 정신을 차린 그가 차에서 내린다. 맡은 바를 끝낸 차는 대로변을 빠져나간다. 평일 오후의 거리는 퍽 한산했다. 남지유는 괜히 주변을 휘 둘러보았다. 권성하의 감시인이 붙어 있지 않을까 싶은 마음에 한 행동이었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눈에 띄는 차량이나 인물은 없었다. 남지유가 픽 웃으며 성큼성큼 건물로 들어선다.

“그럼 그렇지.”

권성하에 대한 반발심과 좋지 못한 술버릇이 만나 벌어진 사고는 그저 사고로 그칠 모양인가 보다. 남지유는 엘리베이터로 향하며 스마트폰을 확인했다. 권성하의 전화 한 통에 모조리 미뤄 두었던 문자 답신을 하고 나자 알림음과 함께 엘리베이터가 내려왔다. 생각보다 빨랐다. 안으로 들어서려던 남지유의 어깨로 팔이 하나 둘러진다. 훅 끼쳐 드는 향수냄새는, 참 공교롭게도 익숙한 것이었다.

“지유야, 핸드폰 보면서 걸으면 못써.”

웃음기 어린 목소리가 바로 귓가에 흘렀다. 순식간에 굳은 몸을 권성하가 자연스럽게 이끌고 엘리베이터에 오른다. 카드를 찍고 층수를 눌러야 하는 시스템인데, 놀랍게도 권성하는 어디서 난 건지 모를 카드를 찍고 남지유의 집이 있는 36층을 눌렀다. 문이 닫히고 엘리베이터가 올라가기 시작한다. 외부와 완벽히 단절되자 그제야 남지유가 고개를 들어 권성하를 본다. 권성하는 기분 좋은 듯 웃고 있었다.

“오, 오빠… 어쩐 일이세요?”

“오빠 얼굴 보자마자 하는 소리가 그거야?”

“반가워서요. 낮에 뵙는 건 처음이라….”

“지유 보고 싶어서 왔지. 왜, 싫어?”

“아뇨! 그럴 리가요. 지유가 오빠 매일 기다리는 거 아시잖아요.”

이 새끼가 왜 여기 있지? 왜 이 시간에 내 집에? 혼란스러운 머릿속과 달리 애교스럽게 웃는 표정은 자연스러웠고 소곤소곤 떨어 대는 아양은 늘 그렇듯 달았다. 권성하가 눈꼬리를 접어 웃으며 남지유의 귓불을 만지작거린다. 고개를 기울여 부드러운 머리카락에 반듯한 콧대를 갖다 대기도 하고 손으로 쓸어 보기도 한다. 하나같이 정다운 스킨십이다. 심장이 쪼그라드는 기분이었다. 남지유는 바싹 긴장한 채로 스킨십이 부끄러운 척을 했다.

“오빠, 저기… CCTV 있어요…….”

“오늘은 샴푸 냄새가 다르네.”

남지유가 뚝 굳는다. 권성하는 웃음기를 머금은 눈으로 남지유의 귓가부터 목선 따위를 유심히 훑고 있다. 기분이 정말 좋은 건지, 아님 틀어진 속내를 좋은 척 포장하고 있는 건지 감조차 오지 않았다. 남지유는 뱀 같은 눈빛에 얌전히 목덜미를 내어 준 채 애써 태연한 흉내를 냈다.

“지유가 샴푸를 바꿔서요. 오빠 맘에 안 드시면 원래 쓰던 걸로 다시 바꿀까요?”

순진하게 속눈썹을 깜빡이는 그를 권성하가 고개를 살짝 기울여 물끄러미 지켜본다. 그러더니 입꼬리를 올려 웃는다. 그린 듯한 미소였다.

“지유야.”

“네, 오빠.”

“어제 집에는 왜 안 들어갔어?”

띵- 엘리베이터가 멈추는 소리와 함께 겨우 남은 혼까지 털렸다. 남지유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할 말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가 입을 방긋 벌렸다가 곤란한 얼굴로 다물고는, 속눈썹을 내리깐다. 시간을 지체하는 사이 엘리베이터 문이 다시 닫히려 든다. 이대로 사람 많은 로비로 내려가 주었으면 하는 바람과 달리, 권성하는 닫히려는 문을 막곤 남지유의 어깨를 안은 채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섰다. 그리고 자연스레 남지유의 집 앞으로 이끈다. 어쩔 수 없이 이끌리는 남지유는 입이 마르고 피가 마르는 기분이었다. 이대로, 이 미친 조폭새끼와 밀폐된 공간으로 들어설 순 없었다.

문 앞에서 머뭇거리는 남지유에게 권성하가 다정하게 속살거린다.

“지유야, 뭐 해.”

“아, 그게….”

욕설이 난무하는 속내와 달리 머뭇거리는 남지유는 퍽 애처로워 보였다. 그는 대본을 외울 때 외에는 잘 굴리지 않는 머리를 열심히 굴려 보았다. 그래야 했다. 변명거리를 생각하는 머릿속에는 최 사장의 꼴을 한 자신의 모습이 선명히 재생되는 중이었으니까. 그 끔찍한 상상은 뜻밖의 선물을 안겨 주었다. 남지유가 글썽글썽 눈물이 차오른 채로 권성하를 바라본다. 그러잖아도 사슴 같던 눈망울이 더욱 반짝거렸다.

“오, 오빠… 혹시 화나신, 거예요?”

“지유가 보기에 오빠가 화난 것 같아?”

“네에…. 저, 지유 무서워요. 오빠. 화내지 마세요.”

“우리 지유 귀여워서 화도 못 내겠네.”

못내 귀여워 죽겠단 듯 웃는 얼굴은 늘 보았던 그 표정과 흡사했다. 남지유는 볼을 꼬집고 눈가를 훔쳐 주는 손길에 얌전히 얼굴을 내주었다.

“오빠 전화도 안 받고, 다시 전화도 안 하고. 걱정돼서 와 봤더니 샴푸 바꿨다는 깜찍한 거짓말이나 하고 말이야.”

흐르는 목소리는 나긋나긋했으나 남지유는 점차 긴장을 감출 수가 없어졌다. 애써 외면하고 있던 추측이 기정사실이 되어 가는 중이었다. 누군가 오갈 수 있는 복도였음에도, 남자끼리 묘한 장면을 들킬까 봐 걱정되는 것보다 누구든 와 주어서 당장 이 불편한 상황을 면피하고픈 욕심이 커진다.

두려움에 휩싸여도 잘생긴 얼굴은 제 본분을 잊지 않았다. 권성하는 뿌듯한 충족감을 채워 주는 반듯한 얼굴을 들여다보며 어느 때보다 달게 웃었다.

“예쁜 얼굴 믿고 이렇게 깜찍하게 구는 거야? 응?”

“거짓말해서 죄송해요, 오빠…. 지유는, 그게….”

“오빠가 예쁘다고 너무 오냐오냐해 줬나. 그래서 그랬어?”

“아, 아니에요.”

능청스럽게 굴고 있지만 어젯밤 부재의 이유를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남지유는 단순히 집에서 잠들기 싫었다는 변명을 붙일 수도, 그렇다고 솔직히 토로할 수도 없어 속이 탔다. 권성하가 무얼 원하는지 알 수가 없으니 거기에 맞출 수가 없었다. 억울하고 짜증이 나 진짜 눈물이 차올랐다.

남지유의 부정 따위를 추궁해 봤자 사생활을 캐고 다니는 건 권성하였다. 편할 때 박을 수 있는 남창 취급을 해 온 것도 권성하다. 솔직히 왜 추궁을 하는지도 영 납득이 되지 않았다. 왈칵 반발감이 치밀었으나 권성하에 대한 두려움만 못하다. 남지유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러자 권성하가 ‘오빠 앞에서 지금 귀여운 척하는 거야?’하며 입술을 건드린다. 평범한 상대였으면 기분이 대충 풀렸으리라 짐작하고 애교나 피웠을 텐데, 이 조폭새끼는 상또라이라 어디로 튈지 짐작도 되지 않았다.

속눈썹을 내리깐 채 말이 없는 남지유에게 문득 권성하가 고개를 기울인다. 귓가에 숨결과 입술이 스쳤다. 그는 남지유가 엘리베이터에서 수줍은 척 내뱉었던 말을 흉내 내듯 간지럽게 말했다.

“지유야, 저기 CCTV 있는데.”

“네, 네에.”

“여기서 바지 내리고 오빠한테 보지 검사받고 싶어?”

그 말에, 내내 버티던 남지유가 얌전히 문을 연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문을 열고도 들어서질 못하는 남지유를 권성하가 에스코트한다. 평소처럼 나긋나긋하게 굴지 못하고 뻣뻣하게 굳어 있는데도 권성하는 못내 귀엽다는 얼굴이었다. 그게 정말 ‘애인’을 향한 건지, 아니면 ‘키우는 강아지’를 향한 건지. 어느 쪽이든 그 얄팍한 애정에 매달려 용서를 빌고 싶은 충동이 치밀었다. 아직도 뇌리에 선명한 최 사장의 마지막은 어설픈 반발감과 자존심을 모조리 꺾어 주기에 충분했다.

어떻게 말을 꺼내야 좋을까, 권성하의 눈치를 살피던 남지유는 거실에 이른 순간 벼락같은 깨달음을 느꼈다. 어제 버린 꽃을 바깥에 내놨었던가? 아니, 아닌 것 같다. 이것까지 걸린다면…… 씨발. 아찔한 상상에 뒷덜미가 찌릿했다.

“성하 오빠….”

그는 곧장 권성하의 팔을 끌어안으며 시선을 끌었다. 다정한 듯, 혹은 무심한 듯, 종잡을 수 없는 눈웃음이 남지유를 향한다. 어떻게 해서든 권성하의 기분을 누그러뜨려야 했다. 또다시 생사의 기로에 서니 꾸며내지 않아도 절절한 얼굴이 완성된다. 긴 속눈썹이 똑, 떨어졌다가 애처롭게 들렸다.

“지유는, 지유는 그게…. 오빠 몰래, 바람피우려고 한 게 아니라요.”

“응, 계속해 봐.”

“대표님이 갑자기 불러내서 가 봤더니, 그, 그 사람이 있어서요.”

“아. 그 새끼가 우리 지유를 출장도우미로 써? 으응?”

한마디 잘못했다가 아내에 애까지 딸린 형을 골로 보내게 생겼다. 남지유는 숫제 매달리듯 안기며 고개를 팔락거렸다. 일견 사소해 보이는 고갯짓에도 의도된 애교가 담뿍 흘렀다.

“아니에요! 대표님은, 저… 최 사장님이랑, 만난 것도 모르셨구…. 좋은 분이에요! 지유가, 지유가 잘못한 건데…….”

“그 새끼하고도 붙어먹었어? 우리 지유가, 이렇게 필사적으로 편드니까 오빠가 자꾸 의심되잖아.”

“아, 아니에요…. 지유는 오빠밖에 없어요, 지유한테는 오빠가 제일 중요한걸요. 그런 말씀 하시면 지유 너무, 속상해요….”

그러지 마세요. 예쁜 울상을 지은 남지유가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권성하를 끌어안는다. 권성하는 목 뒤로 감기는 팔을 가만 내버려 두었다. 꼬리를 살랑거리며 아양을 떠는 남지유를 들여다보는 눈빛만 선명할 뿐이다. 그가 미온적인 태도일수록 남지유는 더욱 애가 타 평소엔 잘 써먹지 않던 애교까지 꺼내 놓았다.

“오빠아, 화 푸세요…. 네?”

달콤한 아양을 소곤거리며 쪽쪽 입을 맞춰 대는 남지유는 정말 애인의 기분을 풀어 주는 것처럼 정성스러웠다. 다소 느릿하게 깜빡이는 눈꺼풀도 예쁘게 보이려는 의도가 여실했다. 이토록 노골적으로 애교를 부려 대는데 받는 당사자에게 안 보일 리가 없다. 권성하는 묘한 미소를 지은 채로 남지유의 애교를 실컷 감상했다. 험한 일을 하는 것에 비하면 곱기만 한 눈이 제게 입을 맞추며 의도적으로 속눈썹을 나풀대는 미남을 바라본다. 그가 커다란 손으로 창백한 뺨을 감쌌다. 그리고 고개를 기울인다. 입술은 순순히 벌어졌다.

입맞춤은 전에 없이 다정했다. 그는 남지유가 열어 주는 대로 들어서서 혀를 섞고, 빨고, 가장 간지러운 부분을 훑어 주었다. 느긋하고 부드러운 행위였다. 지금껏 남지유가 했던 키스 중 가장 키스다운 키스를 꼽으라면 지금 권성하와 나누는 키스일지도 모른다. 제 혼신의 발악에 기분이 풀린 건가 싶어 남지유는 더 적극적으로 혀를 섞었다. 눈을 감고 애무를 하며 달달한 분위기로 필사적으로 파고들었다. 맞대고 있는 입술에서 나직한 웃음이 흘렀다.

잠깐의 입맞춤 뒤 권성하가 입술을 떨어뜨린다. 남지유는 아직 제 뺨을 감싸고 있는 커다란 손에 살며시 고개를 기대었다. 앙큼한 애교에 권성하가 눈웃음을 짓는다. 곱게 휜 눈이 하룻밤 사이 외간남자와 술을 마시고 호텔에서 뒹굴기까지 한 놈의 귀여운 짓을 지켜본다.

“지유야.”

“네에. 오빠.”

“우리 예쁜이, 하는 짓마다 귀여워서 오빠도 화내기 싫은데.”

“네, 네에….”

불안한 서두다. 갖은 아양을 다 떨던 남지유가 흠칫 굳자 권성하는 아주 귀여운 애교를 본 것처럼 웃었다. 그의 눈이 남지유에게서 채광 훌륭한 거실로 향했다가, 이내 한 곳에 멈춘다. 시선의 방향을 눈치챈 남지유가 파랗게 질린 얼굴로 침묵한다. 권성하가 흥미롭게 지켜보는 곳에는 어제 미처 버리지 못한 쓰레기가 쌓여 있었다. 이런 썅. 등골이 오싹해졌다.

“오, 오빠….”

말을 붙였으나 뒤를 이을 변명이 떠오르지 않았다. 남자들 허리 아래서 비위를 맞춰 온 게 벌써 수년째라지만 이런 상황에 대처하는 매뉴얼은 없었다. 낭패 어린 욕설이 오가는 속내에 비해 권성하를 바라보는 얼굴은 순하기 짝이 없다. 속눈썹이 떨리고 젖은 눈동자는 흔들리고, 금방 키스를 해 촉촉한 입술은 방긋 벌어져 어쩔 줄을 모른다. 권성하가 도톰한 아랫입술을 손끝으로 톡 건드렸다. 잘못한 강아지 콧등 때리는 주인 비슷한 손짓이었다.

“지유가, 오빠한테 거짓말도 하더니 오빠가 준 선물까지 버려서, 그건 좀 속상하네?”

“자, 잘못했어요. 오빠 죄송해요. 지유는, 그게….”

“지유야.”

어차피 붙일 변명도 없던 남지유가 가만 권성하의 말을 기다린다. 불안에 떠는 표정은 화를 풀라며 갖은 애교를 떨 때보다 진실해 보였다. 권성하는 퍽 자상하게 웃어 주었다.

“우리 지유, 보지는 예쁘게 쓰고 왔나 검사해야겠네.”

* * *

할 수만 있다면 권성하의 명함을 찾아냈다고 좋아하던 그때의 자신을 패고 싶은 심정이다.

이 새끼보단 차라리 최 사장이 나았다. 권성하의 변덕을 숱하게 겪으며 깨달은 사실이었다. 적어도 최 사장은 대낮에 엉덩이를 까게 만들고, 식탁에 납작 엎드리게 만들어 딴 놈과 붙어먹었는지 ‘검사’하는 굴욕을 주진 않았다. 오히려 관계를 정리하려는 남지유의 낌새를 눈치챈 뒤로는 돌아선 애인의 맘을 잡으려는 것처럼 혼자 구구절절했었지. 지금이야 바다에 가라앉았는지 산에 묻혔는지 행방조차 묘연했지만.

남지유는 보이지 않는 뒤가 신경 쓰여 돌아보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았다. 뒤에는 자신이 버린 장미꽃 몇 송이를 매만지며 가시를 떼는 권성하가 서 있다. 그는 바지와 속옷을 허벅지까지 내린 채로 권성하의 뜻 모를 침묵을 온전히 감내해야만 했다. 차가운 대리석 식탁에 바싹 붙인 뺨이 벌써 미지근하게 데워졌다. 그 위에 놓인 손에는 식은땀이 잡혔다.

불편한 정적 속 긴장된 살갗에 나붓나붓한 것이 스친다. 남지유는 엎드린 몸을 움찔거렸다. 이제 보니 뒤에 닿는 감촉은 장미 꽃잎인 것 같았다.

“오빠가 많이 속상해, 지유야.”

“죄송해요….”

“예쁜 보지가 다 부었잖아. 오빠 속상하라고 보지 씹창내고 온 거야?”

“아, 아니요…. 오빠 속상하게 하려고 그런 게 아니라….”

남지유는 도무지 권성하의 용서를 끌어낼 방법이 생각나지 않아 입이 말랐다. 베갯머리송사에 능한 혀조차 제대로 굴러가질 못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권성하가 그리 화난 것처럼 느껴지진 않는다는 사실이다. 남지유는 그가 어떤 변명을 귀엽게 여길지 고민하다 말을 꺼냈다.

“오빠 잘못했어요…. 지유는, 성하 오빠 건데, 지유가 멋대로…… 앗.”

기죽은 목소리로 변명을 늘어놓던 남지유가 뒤에 닿는 무언가에 놀라 다리를 오므린다. 발갛게 부은 살결에 가느다란 막대 같은 것이 닿았다. 이번에는 그게 장미꽃의 줄기라는 걸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황당하여 말문이 막혔다. 뒤를 돌아본 남지유에게 녹을 듯 다정히 웃은 권성하가 귀여운 화병에 꽃을 마저 꽂아 준다. 새빨간 장미꽃 한 송이가 흰 엉덩이를 도화지 삼아 만개했다.

“왜. 계속 말해 봐.”

“그게, 그러니까…….”

“응?”

미친 새끼. 솔직히 욕할 수 없는 처지인지라 남지유는 입을 다무는 걸 선택했다. 뒤에 넣어 본 것이라고는 물컹한 젤과 남의 살이 전부였던 삶에 권성하가 새 지평을 열어 준다. 가식이 지워진 얼굴로 그의 큼직한 손이 뻗어졌다. 권성하는 창백한 옥면을 부드럽게 내리눌렀다. 후배위를 할 때처럼 바투 붙은 몸과 손아귀에 짓눌린 고개가 새삼스러운 굴욕을 일깨운다. 오, 오빠. 만류하는 소리가 났지만 싫어하든 말든 관심 없는 권성하는 들은 척도 않았다. 남지유의 등에 대충 펼쳐 놓은 장미 중 하나를 집은 그가 꽃을 한 송이 더 꽂는다.

“집에 꽃병이 없으면 말을 하지. 지유야.”

“죄송해요…. 다신, 오빠 선물 멋대로 안, 버릴게요.”

“보지 아무 데서나 벌리고 온 건.”

“앞으로는 성하 오빠 앞에서만 벌릴게요…. 오빠, 지유 용서해 주세요. 네?”

권성하는 자신이 가진 화병 중 가장 고운 화병에다 꽃을 꽂아 놓으며 픽 웃었다.

“오빤 장난인데 지유는 왜 이렇게 진지할까.”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 모르겠다. 한마디 끝날 때마다 널을 뛰는 변덕 때문에 비위 맞추기 참 까다롭다. 남지유는 입을 다물었다가, 또 추궁을 당할까 싶어 ‘지유는 정말 오빠뿐이에요.’라는 맘에도 없는 내숭을 떨었다. 뒤에서 웃음이 흐른다. 권성하는 ‘오빠도 지유뿐이에요.’라고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지껄이며 꽃꽂이를 이어 나갔다. 장미가 한 송이씩 꽂힐 때마다 불쾌감이 치민다. 말자지로 밤새 처박혔던 구멍에 가느다란 꽃줄기 따위가 부담되는 건 아니었다. 자신을 손바닥에 놓고 갖고 노는 권성하에 대한 짜증이었다. 진짜 애인으로 여긴다면 이별 통보나 받아 주었으면 싶었다. 가망 없는 희망을 되새기던 남지유가 문득 나직한 비명을 지른다.

“아! 오, 오빠….”

뒤에 날카로운 통증이 일었다. 가시가 제거되지 않았는지 억지로 비집고 들어서는 움직임에 여린 살갗이 밀려난다. 뒤를 돌아보고 싶었으나, 커다란 손에 얼굴을 짓눌린 탓에 손가락 사이로만 흐릿하게 보였다. 못 참을 통증은 아니었다. 다만 못내 자신을 예뻐하던 그가 정말로 제게 상처를 내리라곤 생각지 못했던 안일함이 다소의 충격을 일으킨다.

권성하는 제 손아귀 아래서 저를 애처롭게 바라보는 눈을 마주 보며, 가시를 밀어 넣었다. 얇은 살갗이 찢어지며 피가 났다. 남지유가 작게 바르작거린다.

“으읏. 오빠 아, 아파요….”

“지유 아다 떼 준 날 생각나네. 그때도 ‘오빠 아파요.’ 하고 울었잖아. 우리 예쁜이, 자꾸 아프다고 울면 오빠가 너무 꼴려서 실수로 박아 버릴지도 몰라.”

그때는 찢어지지 않았지만 지금은 정말 찢어지고 피가 나는 중이다. 울컥했으나 남지유는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찢어진 구멍에다 정말 말자지를 처박을 수 있는 미친놈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뒤에 닿는 그의 물건도 단단해지고 있었다.

“으. 흐읏.”

“우리 지유는 어쩜 신음 참는 것도 섹시해. 응?”

“…….”

남지유가 필사적으로 숨을 참았다. 앙다문 입술 사이로 앓는 소리가 샌다. 손가락 사이로 보이는 젖은 눈이 권성하를 바라보고 있다. 언뜻 순종적으로 보이나 실은 전혀 그렇지 않단 것쯤 권성하도 잘 아는 사실이었다. 그는 가느다랗게 웃고는 이미 안까지 상처를 내며 들어간 것을 천천히 돌렸다. 납작 엎드린 몸이 움찔거렸다. 남지유가 숨을 헐떡인다. 바깥도 모자라 내벽에도 흠집을 내는 가시가 선명하게 느껴졌다. 가장 여리고 연약한 부분에서 일어나는 통증은 겨우 참은 숨까지 토해 내게 만들었다.

“하아! 흐, 오빠….”

“오빠는 왜 그렇게 찾아.”

“지유 보지 망, 가져요…. 피, 피나….”

“그러게. 많이 아프겠네.”

“네, 네에…. 아파요.”

“그냥 아다 떼는 거라고 생각해.”

그가 다정함이 밴 목소리로 말을 잇는다.

“오빠가 아다 떼 줄 때는 피도 안 났는데, 그럼 지유 아다는 장미가 떼 준 건가? 낭만적이네.”

“아! 흐으. 윽.”

“그렇다고 너무 떨진 말고. 괜히 찔려서 아프잖아, 지유야.”

줄기에 듬성듬성 박힌 가시가 빙글 돌며 안에서 통증을 터뜨린다. 날카로운 가시에 점막이 찢겨지는 느낌이 생생하다. 피가 나는 것도 같았다. 괜히 움직이면 더욱 아프단 건 알지만 신경이 반응하는 걸 그도 어쩔 순 없었다. 남지유가 통증에 못 이겨 헐떡거릴 때마다 안에 가득 꽂힌 장미도 따라 움직인다. 장미들이 살아 움직이는 듯한 모습이었다. 권성하가 즐겁게 웃는다.

“장미가 우리 지유 처녀 떼 주려고 열심히 움직이네.”

“씨…발. 오빠, 지유 존나 아파요….”

“지유 보지가 얼마나 좁은지. 조금만 조여도 이게 발딱거리잖아, 응?”

“아…! 미친, 씨발….”

“우리 예쁜이 입은 언제 얌전해지려나.”

목소리에 웃음기가 섞여 있다. 권성하는 빙글 돌리던 장미를 천천히 꺼내며 잘생긴 얼굴에 서린 고통을 들여다보았다. 꺼내면 꺼낼수록 꽉 깨문 입술이 파리하게 질려 갔다. 생리적으로 떠오른 눈물은 높다란 콧대를 지나 식탁에 조그맣게 웅덩이졌다. 노려보는 눈빛이 퍽 귀엽다. 그는 맘이 조금 누그러져 그새 식은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하나둘 떼어 주었다.

“틈만 나면 꼬시려 들어. 응?”

“흐윽….”

“그렇게 보면 오빠 맘이 약해지잖아.”

마침내 가시 박힌 장미가 꺼내지자 핏물이 찔끔 흐른다. 남지유는 식탁에 납작 엎드린 채로 헐떡였다. 권성하는 모처럼 장식한 꽃을 모두 뽑더니 빨갛게 부어 피를 흘리는 뒤를 안타깝게 바라보았다. 단단한 손이 한껏 예민해진 살갗을 느긋하게 훑는다. 그가 자신을 바라보는 남지유에게 눈웃음을 친다.

“이제 지유가 좋아하는 거 할까?”

“오빠… 지유 피나는데요.”

“응, 알아.”

“너무, 너무 아파요….”

“응, 신음 죽이더라. 오빠 실수할 뻔했어.”

씨발새끼. 잘 아신다니 할 말이 없다. 입을 다문 채 짜증과 수치심을 감내하는 얼굴에 권성하가 멋대로 입을 맞춘다. 상처가 나 얼얼한 그곳으로 말자지가 들어설 걸 생각하니 벌써 몸이 떨렸다. 남지유는 눈을 감고 이어질 통증을 기다렸으나, 웬일인지 들어올 기미도 보이지 않는다. 눈을 떠 보자 권성하가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고 있었다. 문득 기시감이 든다. 불안감도 함께 치밀어 권성하에게 손을 뻗었다. 무력한 손이 권성하의 옷자락을 붙잡았으나 그는 웃기나 할 뿐 전화를 멈추지 않았다. 외려 남지유가 귀여워 죽겠다는 듯 웃으며 전화 상대에게 적당히 주문한다.

“애들 좀 올려 보내. 좆 큰 새끼들로.”

“오, 오빠…?”

“우리 예쁜이는 좆 작은 새끼들 거들떠도 안 보니까.”

“왜, 왜, 왜요?”

“왜긴. 우리 지유가 그런 거 좋아하잖아.”

전화를 끊은 권성하가 남지유의 파리한 뺨을 툭툭 건드린다. 남지유는 창백하게 질려 아무 말도 못 하다가 겨우 한마디를 꺼냈다.

“지, 지유… 그런 거, 안, 좋아해요…. 오빠, 진짜로 저…….”

“그런 거 뭐, 지유야.”

“오빠 말고 다른 남자랑…… 오빠, 제발요. 지유 여기 피도 나고 아프고, 정말 못해요. 네?”

“왜. 좋아하니까 아픈데도 떡치고 다닌 거 아냐. 응?”

“아, 아니요. 아니에요… 지유 그런 거 아니에요, 오빠…. 지유가, 술 먹고, 취해서… 취해서 실수한 거예요. 믿어 주세요.”

식탁에 납작 엎드려 있던 남지유는 어느덧 권성하에게 매달리듯 안긴 채 애원을 늘어놓고 있다. 아래에서는 피가 질질 흐르고, 위에서는 눈물이 질질 흐르니 보기 퍽 안타까운 모습이었다. 권성하는 너그러운 애인처럼 눈물을 닦아 주었다. 눈물에 젖어 짙어진 속눈썹이 그를 향해 애타게 깜빡여진다.

“오빠, 지유가 잘못했어요…. 정말 실수였어요, 다신 안 그럴게요. 지유 믿어 주세요…….”

“음.”

“지유 보지 진짜 망가질지도 몰라요…. 그럼 이제 오빠 기쁘게 해 드릴 수도 없고, 지유는…….”

가만 내려다보는 눈빛을 알 수가 없다. 남지유는 지금이라도 권성하를 뿌리치고 어디로든 도망을 쳐야 하나 싶었다. 그런데, 어디로 도망을 친단 말인가? 사람 찾기라면 누구보다 빠삭한 뒷세계 인간을 두고 말이다. 어린 시절 이미 빚쟁이였던 전적이 있는 남지유는 순간 발밑이 아득해졌다. 어떻게든 면피하고 싶어 안달이 났던 몸이 순식간에 무기력하게 늘어진다.

동시에, 벨이 울렸다. 남지유가 깜짝 놀라 권성하를 바라본다. 어깨에 매달렸던 팔에 힘을 주고 고개를 저었지만 권성하는 귀여운 재롱 보듯 웃기나 할 뿐이다. 그는 남지유의 뺨을 잡고 짧게 입을 맞췄다. 그리고 속삭였다.

“오늘 지유가 좋아하는 거 실컷 해. 오빠가 주는 선물이니까 부담 갖지 말고. 응?”

간절하게 매달렸던 몸이 권성하의 손짓에 밀려난다. 그대로 식탁에 무너진 남지유에게 또다시 입을 맞춘 권성하는 ‘아무리 좋아도 이렇게 울면 오빠 좀 섭섭해’ 따위 시답잖은 말을 속삭였다. 이대로 가다가는 정말 윤간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몸이 벌벌 떨렸다. 권성하는 도저히 말이 안 통하는 쓰레기새끼였다.

남지유는 멀어지는 그를 확인하고 몸을 일으켰다. 찢어진 뒤에서 상처가 따끔거리며 존재를 알린다. 바지를 추스를 겨를도 없이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묵직한 걸음 소리도 여럿 났다. 털이 찌릿 곤두서는 기분이었다. 떡대들 사이에서 저항도 제대로 못한 채 돌려지는 미래가 선명하게 그려졌다. 황급히 달아나는 뒷덜미를 누군가 잡아챈다. 퍽! 남지유는 맨바닥에 그대로 엎어졌다. 그는 묵직하게 짓눌린 몸을 어쩌지도 못한 채 당장 오빠부터 찾았다. 오빠는 거실 소파에 앉아 윤간 직전의 지유를 감상하고 있었다. 그 좆같이 여유로운 모습이 자신을 둘러싼 남자들 사이로 엿보였다.

“오빠! 지, 진짜 지유 이 사람들한테 내주실 거 아니죠? 그죠?”

“지유야. 좋다고 떡치고 다닌 건 넌데 이제 와서 왜 빼고 그래.”

“정말 실수였단 말예요, 좋아서 한 게 아니라… 오빠, 제 말 좀 믿어 주세요!”

남지유가 처절하게 변명하든 말든, 그는 부하에게서 와인을 건네받고 있었다. 와인셀러에 고이 모셔 놓았던 르로아 리쉬부르였다. 씨발 저게 얼마짜린데! 좋은 날 개봉하려고 아껴 놓은 걸 홀랑 처먹고 있는 권성하에게 열이 올랐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벗어나게 해 준다면 얼마를 처먹어도 아깝지 않았다. 비록 이 상황을 만든 것도 권성하였지만 말이다.

“오빠, 오빠… 지유 살려 주세요. 이대로 하면 지유 진짜 죽어요. 오빠 예쁜이 죽는다구요. 네에?”

“지유야, 그런 걸로 안 죽어. 오빠 믿지?”

“야 이 개새끼야! 씨발, 딴 놈이랑 한 번 잤다고 이 지랄을 떨어?”

남지유는 얼마 못 가 얌전해졌다. 그를 제압하고 있던 남자가 어중간하게 걸쳐져 있던 바지와 속옷을 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나름대로 필사적인 저항을 해 보았으나 제압하는 남자만 더 늘어났다. 비싼 남배우의 몸에 멍이 들 만큼 강한 힘이 주어진다. 부서질 듯 아픈 것보다도, 맨살에 닿는 손이 역겹고 그 사이에서 피가 질질 흐르는 아래를 발랑 까고 있는 사실이 역겨워 견디기가 힘들다. 남지유는 단단한 손들에 사지를 붙들린 채 덜덜 떨었다. 진짜 이대로…….

아니야, 다른 새끼랑 한 번 잤다고 별 유난을 다 떠는 새끼가 그럴 리가 없다. 어떻게든 좋은 방향으로 생각해 보려고 해도 권성하는 아무런 제지도 해 주지 않았다. 남지유를 안주 삼아 값비싼 와인이나 즐길 뿐이었다.

“오, 오빠…. 아니죠? 정말, 아니죠?”

“뭐 해. 우리 예쁜이 기다리잖아.”

“아, 아, 아니에요! 싫어요! 오빠, 저 진짜 싫어요…! 씨발 하지 마!”

다시금 바동거리기 시작한 몸은 남자들의 억센 손 아래서 무력해졌다. 드라마에서도 보기 힘들고, 예능에서는 더욱 보기 힘든 값비싼 몸이 바닥에서 바르작거린다. 처음 남지유의 뒷덜미를 붙잡아 제압했던 남자는 바로 흰 엉덩이를 잡아 벌렸다. 이미 찢어져 피가 흐르는 구멍이 드러난다. 인터뷰에서 온갖 고고한 척은 다 하는 남배우가 뒤로는 남자 스폰서나 받는 창놈이란 걸 누가 알까. 머리카락 한 올 한 올까지 정성 들여 빚어낸 듯한 미남은 아래에 까는 것만으로 묘한 고양감을 일으킨다. 아랫배에 피가 쏠리자 남지유가 흠칫 놀라며 의미 없는 저항을 시도한다.

“꺼져!”

남지유의 명령을 따르는 게 아닌 남자들은 당연히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남지유는 바로 뒤에서 들리는 지퍼 소리에 미친 듯이 저항했다. 꾸준한 운동으로 관리된 몸이라곤 해도 달라붙은 장정 몇을 혼자 떨쳐 낼 순 없는 노릇이다. 제대로 휘젓지도 못한 사지에 진이 빠진다. 벌어진 엉덩이에 묵직한 살덩이가 닿았다. 눈이 마주친 권성하는 아무런 감흥도 없는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대로 정말, 강간당하는 것이다.

“흐윽! 흑, 싫… 어….”

절망감에 울음이 터졌다. 저를 둘러싼 남자들이 절대 무너뜨릴 수 없는 철벽처럼 느껴졌다. 무력감과 절망, 그리고 우습게도 배신감이 명치를 때린다. 남지유는 마지막 자존심을 놓지 못하고 소리 죽여 흐느꼈다. 잘생긴 남자, 그것도 발가벗기까지 한 미남이 울어 봤자 이런 상황에서는 흥분밖에 되지 않는다. 뒤에 닿은 남자의 살덩이가 뜨끈하게 달아오른다. 진저리 쳐질 만큼 싫었으나 그렇다고 그가 이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피가 멎어 가는 구멍에 살덩이가 맞춰졌다. 남지유는 바닥에 고개를 처박은 채 질끈 눈을 감았다. 그 짧은 시간 동안 할 수 있는 살인 수단은 다 떠올리던 차, 권성하가 드디어 침묵을 깬다. 별로 얌전한 방식은 아니었다. 들고 있던 와인글라스로 남지유의 뒤에 올라탄 남자의 머리를 맞힌 것이다. 피가 철철 나는 게 아플 법도 한데 남자는 곧장 권성하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것도 좆이라고 달고 있어? 씨발, 야. 이 실장. 내가 큰 놈만 데려오라고 했지?”

“죄송합니다. 이사님.”

“좆이 허접해서 우리 예쁜이가 맘에 안 찬다잖아. 응?”

남지유의 수없는 저항에도 평온하던 분위기는 권성하의 욕설 몇 마디에 얼어붙었다. 권성하는 남지유와 그 뒤에 올라탄 놈을 번갈아 바라보다 가볍게 혀를 찼다. 이윽고 그가 손짓하자 이 실장이 남자들을 이끌고 밖으로 나선다. 놀랍도록 순식간에 정리된 상황이었다. 남지유는 미약한 허탈감을 느꼈으나, 좆같은 상황에서 벗어났다는 안도감에 밀려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겨우 미뤄 두었던 울음만 서럽게 터졌다.

“흐으, 흑…!”

“우리 예쁜이. 무서웠어?”

바닥에 늘어진 유리 조각을 구둣발로 대충 치운 권성하가 남지유의 곁에 앉으며 묻는다. 남지유는 대답하지 않고 엎드린 그대로 울음을 헐떡였다. 서럽게 헐떡이는 뒷모습이 퍽 처연했다. 권성하는 정말 마음이 아픈 듯 짧게 탄식하더니 얼굴을 보여 주지 않는 애인의 뒷머리를 잡아 일으켰다. 무력하게 딸려 온 몸을 품에 안은 그가 발갛게 익은 얼굴을 쓰다듬는다.

“그만 울어. 오빠 속상하게 하려고 일부러 그래?”

“이… 씨발새끼야…. 너 때문에, 흑! 우는… 거잖아… 개새끼야….”

“오빠가 지유 좋아하는 거 하려는데 못하게 해서 삐쳤어?”

“아니라고! 흐엉엉, 흐윽! 씨발 너 진짜, 내가 죽여 버릴 거야…!”

“우리 예쁜이는 하는 말마다 귀엽네.”

품에 안겨 우는 남지유는 더 반박할 기운도 없는 것 같았다. 그는 저를 쓰다듬는 품에서 엉엉 흐느끼다가, 겨우 이성이 돌아오고 나서야 뒤늦은 수습을 했다. 권성하의 어깨에 깊이 매달린 그가 눈물로 함빡 젖은 시선을 보낸다. 길고 풍성한 속눈썹에 촘촘히 꿰인 눈물을 권성하가 다정한 손길로 거둬 주었다.

“오빠…….”

“응.”

“지유, 오빠 애인인 거, 맞죠?”

“그렇지.”

“그럼, 다신 이런 좆같은 짓… 하지 마요.”

남지유가 짜증인지 애교인지 모를 말을 속삭인다. 권성하는 대답 않고 그저 웃었다. 성질 같아서는 멱살을 붙잡고 드잡이질이라도 하고 싶은데, 조폭새끼를 이길 수 있을지 의문이다. 남지유는 승산이 없는 싸움을 거는 대신 성질을 죽이며 얌전히 입을 맞췄다. 부드럽게 입술을 맞대는 키스가 몇 번, 혀를 섞는 키스도 한참. 남지유의 정성스러운 애교를 받은 권성하가 악당처럼 웃는다.

“지유는 오빠 맘 여린 걸 너무 잘 안다니까.”

정성을 한껏 담은 비위 맞추기의 대가라기에는 터무니없는 개소리였다.

* * *

“아, 흐읏…….”

“오빠 참는데 자꾸 보챌래?”

“그런 게 아니라 아파서… 아!”

연고를 바른 손가락이 깊은 안까지 들어와 슬슬 헤집어 놓는다. 부어서 욱신거리고, 찢어져서 따끔거리는 속살에 닿는 느낌은 정말 최악이었다. 아파서 눈물이 다 났다. 알아서 바르겠다는 걸 억지로 엎드리게 만든 것치고는 배려가 없는 손길이었다. 남지유는 엉덩이를 흠씬 맞은 어린애처럼 권성하의 무릎에 엎드린 채 썩 다정하지 않은 손가락을 받아 내야만 했다.

“보지가 이 지경이 되도록 몰랐어?”

“아, 아… 잘못했어요, 오빠….”

“얼마나 재미가 좋았으면 이렇게 빨개질 때까지 떡을 치다 와, 응?”

“죄송해요…. 하으, 지유는, 시, 싫다고 했는데….”

“우리 예쁜이는 거짓말을 너무 잘해서 이제 믿을 수가 없네.”

귀여워 죽겠어, 아주. 속삭이는 목소리와 함께 손가락으로 장난질을 친다. 손가락이 자지를 넣었다 뺐다 하는 것처럼 움직이자 가득 발린 연고가 질척질척 소리를 냈다. 다소 거친 손길을 따라 녹아내린 연고가 애액처럼 흐른다. 상처는 본인이 내 놓고서는, 약은 넘치게 발라 놓는 심보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못내 박고 싶은지 손가락 두어 개로 추삽질 흉내를 내면서도 용케 참는 것도 신기했다.

아! 미끈거리는 손끝이 남지유의 가장 여린 부분을 건드린다. 권성하의 무릎에 얌전히 엎드려 있던 남지유가 발끝을 오므리며 얕게 헐떡였다. 통증을 동반한 미약한 쾌감은 다물린 잇새로 숨소리가 새게 만들었다.

“으응…. 읏.”

“지금도 오빠가 약 발라 주는데 야하게 보채기나 하잖아. 으응? 이러다 어디서 잡종 애새끼라도 배고 올까 봐 걱정이야.”

“흐, 오빠…. 너무, 아파요….”

“그러게 아플 짓을 왜 했어. 오빠 속상하게.”

단 한 번도 권성하와의 관계 지속을 바란 적 없는 입장에서는 억울해 미칠 지경이었다. 당당히 애인 행세를 하는 권성하도 짜증이 났고, 한 번 따먹어 보려고 그토록 성가시게 굴던 백이선도 짜증이 났다. 전생에 무슨 업보를 지었기에 현생이 이 꼴이 되었는지 모르겠다. 권성하의 비위 한번 맞추겠다고 알랑거리던 것을 까맣게 잊은 남지유가 골이 난 기색을 감추지 않고 드러낸다. 입을 다물어 버린 그를 권성하가 꽤 너그럽게 지켜본다.

“지유 삐쳤어?”

“…….”

“오빠한테 서운해?”

대답 없는 고개로 픽 웃음소리가 떨어진다. 권성하는 혼 좀 났다고 진짜 애처럼 구는 남지유를 무릎 위로 안아 올렸다. 감히 거부하는 손짓은 가볍게 제지당했다. 사람을 번쩍번쩍 들어 올리는 체력이야 그의 목에 매달려 그네를 탔던 날 뼈저리게 실감했었다. 높아진 시야에서 권성하를 내려다보던 남지유가 불편한 듯 시선을 피한다.

“아래에……. 묻어요.”

“지유 물 많은 건 오빠도 알아.”

한결같이 좆같게 말하는 것도 재주였다.

“오빠 옷에 묻잖아요.”

“그건 오빠가 알아서 할 문제고.”

“하지만, 더러워지는데….”

약을 발라 주느라 미끈거리는 손가락이 남지유의 엉덩이를 받친다. 엎어져 있을 때와는 달리 불만스러운 표정을 어찌 감출 도리가 없었다. 속눈썹만 가만 내리깔고 있는 얼굴을 권성하가 어루만진다. 지유야, 왜 삐쳤어. 검사를 한단 명목으로 굴욕을 주고 부하들에게 돌리려던 그가 물을 말은 아니었다. 말이 통하는 상대였다면 뭐라도 되는 양 굴지 말라 솔직하게 퍼부을 수도 있었으리라. 하지만 권성하는 그런 상대가 아니었다. 애초에, 더는 스폰을 받지 않겠다는 말을 누가 연애하자는 말로 받아들일까?

남지유는 목까지 치미는 욕설을 미뤄 놓고는 아직 ‘좋은 오빠’인 척 굴어 주는 권성하의 비위나 맞추기로 했다. 뺨을 어르는 손길에 슬쩍 기댄 남지유가 내리깐 속눈썹을 천천히 들어 권성하를 바라본다. 우수에 젖은 눈이 드러난다. 뭇 여성들의 맘을 설레게 하는 눈이었지만, 물기가 지나치게 많아 음탕한 관상이라는 평을 받기도 했었다.

“그냥, 지유는…. 오빠가 지유 말 안 믿어 주셔서……. 속상했어요.”

“무슨 말?”

“지유한테는, 정말 오빠밖에 없는데 자꾸 안 믿어 주시고…. 또…….”

“또?”

“그, 사람은……. 예전부터 만나자고 귀찮게 했던 분이란 말예요. 아주 높으신 분이라, 지유가 맘대로 거절할 수 없었어요.”

살짝 깨문 입술이 떨린다. 뺨을 감싸고 있던 손이 눈가에 드리운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준다. 그랬어? 달래듯 속삭이는 말에는 한 점의 짓궂음도 없어 보였다. 남지유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며 권성하도 알고 본인도 아는 상황극을 이어 나갔다.

“오빠는 없으시구…. 그 사람은 계속…. 지유 혼자 너무, 무서웠는데….”

“그 새끼가 무섭게 했었어?”

“네에…. 오빠가 너무 보고 싶었는데, 오늘, 막상 뵈니까…….”

차마 말을 잇지 못한 채로 시선을 떨구자 권성하가 한결 다정해진다. 남지유는 눈가를 살살 문질러 주는 권성하에게 새끼 짐승처럼 굴었다. 기댈 곳이라고는 아무 데도 없는 연약한 생물인 양 청승을 떨었단 뜻이다.

“괜찮으니까 말해 봐. 응?”

“…오빠가 지유 미워하실까 봐…. 겁이 나서, 솔직하게 말씀 못 드렸어요….”

죄송해요. 그는 다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사과하며 손바닥에 뺨을 비볐다. 속 뻔한 알랑거림이었으나 권성하는 성격 더러운 남지유가 배를 발랑 까고 꼬리를 필사적으로 흔드는 꼴을 좋아했다. 권성하가 너그럽게 웃는다.

“우리 지유, 맘이 이렇게 여려서 어떡하나.”

“오빠…. 지유 미워하지 마세요. 네?”

“오빠가 지유를 어떻게 미워해. 이렇게 예쁜걸.”

남지유의 얼굴을 충분히 덮을 만한 큰 손이 섬세하게 눈물을 닦아 주고 머리카락을 정리해 준다. 손짓마다 나름의 애정이 돋보였다. 그래, 그렇게 예쁘면 제발 좆같은 짓 좀 하지 마라. 간절한 맘을 담은 눈이 초롱초롱하게 빛난다. 남지유는 권성하의 손을 양손으로 조신하게 잡고 입술을 찍었다. 움푹한 부분부터 쪽쪽거리며 내려온 입술이 기다란 손가락을 머금는다. 발그스름한 입술에 흰 손끝이 잡혔다. 권성하는 희미하게 닿는 뜨거운 혀를 느끼며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그가 웃는 듯 마는 듯 모호한 표정을 짓는다.

“지유야, 왜 자꾸 오빠를 힘들게 만들어.”

“네에?”

남자들 무릎 맡에서 아양이나 떠는 본분에 충실하던 남지유가 순진한 척 눈을 굴린다. 권성하의 흥분 따위야 무릎에 올라앉았던 순간부터 맨다리로 충분히 느끼고 있던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정말 몰랐다는 듯 어리둥절해하다가, 놀라고, 또 곤란해하는 연기를 능숙히 해내었다. 쩔쩔매는 그를 권성하가 유심히 지켜본다. 남지유는 머뭇거리며 일어나 권성하의 무릎 맡으로 내려왔다. 검은 와이셔츠 상의 아래로 매끈하게 뻗은 다리가 돋보였다. 속살을 집요하게 좇는 시선을 뻔히 알면서도 아슬아슬한 노출을 감추지 않은 그가 슬그머니 권성하의 허벅지로 손을 뻗는다. 늘씬해 보이는 체격과 달리 손에 닿는 하반신은 탄탄하게 근육이 잡혀 있다. 남지유는 권성하의 다리를 살살 어루만지며 다시 시선을 들었다. 권성하가 유려한 미소를 지었다.

“거기서 뭐 하게. 응?”

“오랜만에 입으로 하고 싶어서…. 안 돼요?”

권성하는 이미 암묵적인 허락을 내려 준 상태였다. 손이 슬금슬금 사타구니로 향하는 것도 봐주고, 옆으로 묵직하게 수납된 자지에 얼굴을 비비는 것도 봐준다. 남지유는 일부러 긴 숨을 토했다. 슬쩍 닿은 눈빛에 드디어 짐작 가능한 감정이 스쳤다. 늘 또라이 같아 가늠이 안 되는 권성하에게도 고양감은 감출 수 없는 흔적이었다.

남지유가 사타구니를 입술로 더듬거려 지퍼를 찾는다. 이로 살짝 물고 천천히 앞섶을 벌리자 순한 머리 위에 손이 내려앉았다. 소파에 몸을 기대앉은 권성하는 나른한 기운을 감고 있었다. 남지유는 단단한 기둥에 쪽 입을 맞추고는 권성하를 향해 웃었다.

“오빠 속상하게 해서 죄송해요. 그래도, 지유 너무 미워하지 마세요.”

오늘 너무 무서웠어요. 밉지 않게 속닥거리는 그를 권성하가 쓰다듬는다. 남지유는 속옷 위에서부터 천천히 애무를 시작해 나갔다. 험한 일을 당할 뻔한 거실에서, 고심해서 골랐던 카펫에 다리를 모아 앉은 채 다신 그런 일을 하지 말아 달란 의미의 애교를 부린다. 큰 자지를 양손으로 받친 그가 언뜻언뜻 권성하와 눈을 마주치며 웃는다. 먹고살기 참 더러웠다.

* * *

‘약은 꼭 챙겨 먹어. 응? 잘 먹었는지 오빠가 매일 검사할 거야.’

낮부터 저녁까지, 필사적이기까지 한 애교를 받으며 기분을 푼 권성하는 더 추궁하지 않고 순순히 물러가 주었다. 덕분에 겨우 혼자가 된 남지유는 기가 쭉 빨려 너덜너덜해진 상태였다. 그는 정적이 찾아든 거실에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아늑하기만 했던 집은 이제 찝찝한 기억이 남은 곳이 되고 말았다. 안전해야 하는 집 안 거실에서 그런 꼴을 당할 뻔했는데 편안함을 느낄 수 있을 리가 없다. 침실 문을 꼭 걸어 잠근 그가 이불 속으로 파고든다. 이렇게까지 하고 살아야 하나…. 강렬한 회한이 몰아쳤으나 스스로 어쩔 수 있는 부류의 고민은 아니었다.

“그냥 해외로 튈까.”

좀 괜찮은 생각이다. 재벌도 한국에서나 재벌이지 머나먼 이국땅에서 얼마나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겠는가. 남지유는 당장 현금화할 만한 재산을 떠올리다가 어디에 정착하면 좋을지 따위의 행복한 고민을 했다. 줄줄이 쌓인 계약 때문에 이뤄지지 못할 상상인데도 뭐가 그리 좋은지 실실 웃는 얼굴이 퍽 행복해 보인다.

머릿속에서 도심에 집 한 채, 바다가 보이는 섬에 집 한 채를 샀을 때쯤 그는 겨우 잠이 들었다.

…….

……….

그리고 시끄럽게 울리는 벨소리와 함께 눈을 떴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창문에서 빛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이렇게 밝은데 한 번 깨지 않고 잠들었던 게 신기할 지경이다. 남지유는 묵직한 눈꺼풀을 깜빡거리며 머리맡을 더듬거렸다. 번쩍거리는 핸드폰 화면이 흐릿하게 보였다. 눈가를 문지르고 다시 보자 전화를 걸어 온 사람은 조 감독이었다.

“음…. 여보세요.”

- 지유 씨! 연락이 안 돼서 걱정했네. 얘기는 들었어요?

“무슨 얘기요? 방금 일어났는데….”

- 우리 영화! A사에서 투자 들어왔어.

A사…… 뭐더라? 익숙한데. 아직 졸린 눈을 가물거리던 남지유가 화들짝 놀라 잠에서 깬다. 바로 얼마 전에 잠자리를 함께했던 남자가 A사의 전무님이셨다. 그때 화대니 뭐니 좆같은 말을 해 가며 기분 잡치게 하더니 이렇게 빨리 손을 쓸 줄이야. 남지유는 백이선과의 잠자리로 비롯된 고충이 떠올라 진저리를 쳤다.

- 그쪽 높은 분이 지유 씨 팬이라던데 알고 있었어? 이것도 울 지유 씨 때문에 투자하는 거라던데. 지유 씨가 내 복덩이야. 아주!

근데 꽤 유명하더라. 그 팬. 지유 씨 나온 작품은 다 봤다던데, 자기 찍는다 만다 말 많았던 그 광고도 사실……. 조 감독이 늘어놓는 얘기가 한 귀로 흘러 나간다. 별로 궁금하지 않은 사실이었다. 알고 싶지 않은 사실이기도 했다. 더 얽혔다가는 권성하가 무슨 지랄을 놓을지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이불을 뒤집어쓴 채 낑낑거리던 남지유가 겨우 한마디를 꺼낸다.

“감독님. 나 그 영화 못 하겠어요.”

- 뭐?! 갑자기 왜? 시나리오 다 자기 맞춰서 짜 놓은 건데, 알잖아!

“미안해요. 그런 사정이 생겼어요. 계약 문제는 회사에 말해 줘요.”

- 지유 씨 무슨 일 있어? 일단 못 들은 걸로 할 테니까 만나서 얘기하자고. 응?

평소라면 이쯤에서 전화를 뚝 끊었겠지만, 아직 영화에 미련이 남은 남지유는 미적지근하게 망설이고 있었다. 제작비 문제로 촬영이 진행되다가 스탑되는 걸 반복하면서도 놓지 못했던 영화였다. 맘에 드는 시나리오와 좋아하는 감독을 동시에 만날 일이 앞으로 얼마나 있을까. 최 사장이 영상으로 협박한 이후, 배우로서의 마지막을 생각하게 된 남지유는 이번이 마지막일 것이란 생각을 떨치기가 힘들었다.

그냥 할까? 그 새끼랑은 안 엮이기기만 하면……. 그가 고민하는 사이 수화기에서는 조 감독의 설득이 계속해서 이어진다. 시나리오를 들고 왔을 때 이미 남지유를 홀린 적 있는 이야기였다.

- 이거 자기한테 딱이야, 응? 같이 천만 작품 한번 만들어 보자.

“…나중에 얘기해요. 지금은 좀, 복잡해서.”

- 좋아! 우리 서로한테 좋은 쪽으로 생각해 봐요. 이미 찍어 놓은 것도 있잖아.

그리고 설득이 몇 마디 더 이어졌다. 남지유는 이미 다 알고 있는 얘기를 들으며 더욱 심란해졌다. 좋은 작품이고 좋은 기회인 걸 몰라서 이러는 게 아니다. 백이선만 아니었어도, 아니, 권성하만 아니었어도. 전화를 끊고도 한참을 고민하느라 침대에서 미적거리던 그가 겨우 몸을 일으킨다. 핸드폰을 다시 확인하니 미처 보지 못한 연락이 몇 개 쌓여 있었다. 누군지는 뻔한 일이었다.

“아… 씨발.”

남지유가 거의 징징거림에 가까운 욕설을 하며 마른세수를 한다. 무시하고 싶었다. 사실 어제 일만 아니었다면 정말 그렇게 했을 것이다. 또라이 기질을 제대로 겪고 나니 뒷감당이 두려워 차마 무시를 할 수가 없어졌다. 고작 전화 하나 무시 못해서 이 지랄인데 영화는 찍을 수나 있을지 모르겠다.

남지유는 침실 밖으로 나서려다가 잠깐 망설이고는, 방에 딸린 욕실로 향했다. 그리고 전화를 걸었다. 연결음이 잠깐 울리더니 상대가 전화를 받았다. 방금까지 욕설이나 지껄이던 목소리가 한 톤 높여 애교를 속삭인다.

“네에, 오빠!”

* * *

정사각형 종이를 반으로 접는다. 뾰족한 끝을 잡아 또 반을 접고 반대쪽도 접는다. 납작 붙은 종이를 봉긋하게 벌려서…….

“너 요즘 뭔 일 있냐?”

메모지로 꽃을 접고 있던 손이 멈춘다. 그 일이 있은 후 집에 있기 영 찝찝하여 할 일 없이 쏘다닌 게 벌써 이 주째였다. 평소라면 열 번에 두 번쯤 응해 줬을 호출에 순순히 나와 한가하게 꽃이나 접고 있는 꼴을 보니 대표도 위화감을 느낀 모양이다. 남지유는 종이접기를 마무리하고는 수북이 쌓인 꽃 무덤 위에 살포시 얹어 주었다.

“그 영화 안 찍는다고 해서 그래?”

“그것도 그렇고. 도엽이가 그러는데 너 집에도 안 들어간다며.”

“걔가 오버한 거야. 내가 집엘 왜 안 들어가.”

“매일 호텔로 출근도장 찍는다던데. 옷이랑 한약 갖다 달라 한다고.”

매매가 육십이억. 관리비는 매달 백이십. 지지리 궁상이었던 나날에 보상이라도 하듯 다소 무리하여 사들인 그 집을 권성하의 개짓거리 때문에 못 들어가고 있다. 생각하니 새삼스레 열이 뻗쳤다.

“혹시 호텔에서 그 사람 만나는 건 아니지?”

“뭐?”

“그때 네 스캔들 덮어 준 여자.”

“형은 언제까지 그 얘기 우려먹을 거야?”

“발끈하는 거 보니까 더 수상한데.”

“아니라니까.”

지레짐작으로 아주 잘 맞힌다. 성별만 빼고. 며칠 전, 매니저인 도엽이 내려 준 호텔에서 권성하와 시간을 보냈었던 남지유가 찔리는 속을 태연하게 감춘다.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았다며 삽입은 하지 않았었다. 삽입 없는 섹스가 그리 집요하고 다채로울 수 있단 사실만 일깨워 주었을 뿐이지.

“아무튼 여자 만날 거면 조심해서 만나라. 괜히 덜미 잡히지 말고.”

“예, 맘대로 생각하세요.”

여자문제로 간지럽혀도 반응이 시답잖으니 대표도 금방 흥미가 꺼진 모양이다. 그가 영화 문제로 화제를 돌린다.

“그래서 그건 진짜 안 찍을 거야?”

“아직 고민 중이야.”

“차기작 늦는 것도 안 좋아. 확 뜰 때 대중한테 확 눈도장 찍어 놔야지. 엉?”

“이거 캔슬되면 형이 찍자는 거 찍을게.”

“그 시나리오는 물 건너갔어, 인마. 네가 까자마자 딴 놈이 물고 가셨단다.”

늘어지는 말꼬리에 은근한 비난이 섞여 있다. 대표는 남지유와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이미지로 뜬 다른 배우를 멋대로 남지유의 라이벌로 삼았었다. 이 반응을 보면 아마 그가 배역을 물고 간 것 같다. 제 코가 석 자인 남지유에게는 별 감흥이 없는 사실이었다. 요즘 남지유의 머릿속은 영화 촬영을 계속하느냐 마느냐로 가득 차 있었다. 투자가 결정되자마자 주연 없는 촬영이 시작되었지만 감독도 마냥 기다려줄 수는 없을 것이다. 남지유는 몹시 심란해져서 종이꽃을 하나 더 접었다.

“기회가 있을 때 잡아야지. 질질 끌다가는 이도 저도 안 돼.”

“알았어.”

“무슨 일 있는 거면 말하고.”

털어놓을 수 있는 부류의 고민이었다면 진작 그랬다. ‘지금 들러붙는 남자가 고민인데’로 시작되는 고민을 늘어놓았다가는 최 사장과의 첫 만남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할 것이다. 첫 스폰서였던 최 사장이 호구라 무의식중에 다른 남자들까지 우습게 봤었다. 남지유는 그 대가를 지금 톡톡히 치르는 중이었다. 돈 많고 할 일 없어 사내새끼 뒷구멍이나 노리는 놈들이 정상일 리가 없었는데. 일단 좆 크기부터 정상이 아니었다. 그딴 걸 남한테 박겠다고 생각하는 발상조차 놀라웠다. 성공한 사업가 중에는 사이코패스가 많다는 말을 몸소 실감하는 요즘이었다.

그래도 위로가 되어 주겠다는 말이 싫은 건 아니어서 남지유는 오랜만에 웃었다. 근데, 형 보름 전에 죽을 뻔했어. 곱게 접은 새하얀 종이꽃을 대표에게 넘기자 그가 떨떠름해하며 받아 든다.

“뭐냐, 나 주는 거야?”

“어. 가져.”

“그래. 고맙다.”

몇 년을 동고동락한 대표님의 영정 앞에다 벌써 생화를 바치고 싶지 않았기에 선택이 더 조심스러웠다.

* * *

차를 주차하고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핸드폰에는 운전 중이라는 핑계로 미뤄 두었던 권성하의 연락이 남아 있었다. 보는 것만으로 피로도가 수직 상승한다. 무시해 봤자 ‘연락이 안 돼서 걱정했잖아’라는 핑계로 불쑥 찾아올 것이 뻔했기에 남지유는 순순히 답장을 작성했다.

[저 이제 집에 도착했어요]

운전 중이라 전화를 못 받았어요, 덧붙이는 순간 핸드폰이 울린다. 화면에 하트가 두 개나 붙은 권성하 이름이 떴다.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다. 어차피 받을 수밖에 없는 전화임에도 남지유는 잠깐 망설였다. 그리고 빠르게 체념했다.

“네, 오빠.”

나직하게 웃는 소리가 난다. 권성하는 남지유가 전화를 받을 때마다 이런 식으로 웃곤 했다. 전화를 받으며 말끝을 늘어뜨리는 목소리가 좋다던가.

- 집에 들어갔어?

“아직이요. 지금 올라가는 중이에요.”

- 뭐 하다 이제 들어와. 날도 안 좋은데.

“회사에 좀 다녀오느라….”

대표님 이름 석 자를 꺼낼 수 없어 두루뭉술하게 흘리자 ‘저녁은 먹었고?’ 다정한 물음이 돌아온다. 아마 알면서 넘어가 준 것 같다. 남지유는 권성하의 맘이 바뀌기 전에 ‘아직 못 먹어서 배고파요’ 애교 섞인 대답을 해 주었다.

이 주째 띄엄띄엄 들어가는 집 안은 먼지 하나 없이 말끔했다. 그날 구둣발로 집 안을 헤집어 놓았던 자국도 깨끗해진지 오래다. 권성하가 치워 준 것이었다. 물론 부하를 통해서 말이다. 그는 부하들이 소리 죽여 정리하는 걸 뻔히 알면서 문 하나를 사이에 둔 채 남지유와 오붓한 시간이나 보냈었다.

- 우리 예쁜이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오빠가 사 줄까?

“아, 아뇨. 오늘은 간단하게 만들어 먹으려고 했어요. 마음 써 주셔서 너무 감사해요, 오빠.”

- 요리도 할 줄 알아?

“간단한 것만요. 잘은 못해요.”

- 오빠도 먹어 보고 싶은데, 지유가 만든 거.

그와 대화하다 보면 거미줄에 걸린 먹잇감이 된 기분이 든다. 무슨 화제를 꺼내든 ‘만나고 싶다’는 결론이 도출되었다. 진짜 연애하는 사이도 아닌데 대화만은 스무 살 새내기 CC 같았다. 피가 끓어 참지 못하는 청춘들처럼 보고 싶다, 만지고 싶다, 박고 싶다, 별 욕망을 숨기지 않고 드러냈다. 만나기만 하면 비위를 맞추고 아랫도리까지 맞춰야 하는 남지유로서는 참 피곤한 상대였다.

“정말 못해요. 보시면 실망하실 거예요….”

- 오빠가 왜 실망해.

“예쁘게도 못 만들고… 맛도, 그냥 그래서….”

부끄럽단 말예요. 조그맣게 말하자 권성하가 못내 즐거운 듯 웃는다. 아무래도 남지유와 연애하듯이 사소한 실랑이를 벌이는 게 좋은 모양이다. 어쩌면 정말 올 생각도 없는 주제에 남지유가 어떻게든 만류하려 아양을 떠는 모습을 즐기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무도 없는 집안이 묘하게 찝찝하다. 인테리어를 갈아엎으면 조금 나아질까. 슬슬 기자들이 따라붙을 것 같아 집으로 왔건만 속이 편하지 않다. 남지유는 거실을 지나 부엌으로 들어섰다. 냉장고에는 아직 싱싱한 재료들과 반찬 몇 가지, 한약 한 무더기가 남아 있다. 오늘도 저 맛없는 걸 요구르트 빨 듯 빨대로 쪽쪽 빨아먹는 사진을 인증샷이랍시고 보내야 했었다.

- 좀 마른 것 같던데. 잘 먹는 거 맞아?

“네. 잘 먹고 있어요.”

- 오빠가 다 챙겨 줄 수가 없어서 걱정이네.

“괜찮아요, 어린애도 아닌걸요….”

시답잖은 대화가 줄줄이 이어진다. 자신을 돌봐 주어야 하는 어린애 취급하는 건 이제 새삼스럽지도 않다. 갑께서 그런 취향이니 맞춰줄 수밖에 없기도 했다. 이러다 잠자리에서 ‘아빠, 아빠’ 하며 박히는 날이 오는 건 아닌지, 권성하의 변태적 성향을 두고 봤을 때 터무니없는 상상은 아닌 것 같다. 소름이 끼쳤다.

- 지유는 오빠 못 본 동안 어떻게 지냈어.

“그냥……. 똑같이 지냈어요. 스케줄 있으면 가고, 운동하고….”

- 다이어트 한다고 절식하는 건 아니고?

“아니에요. 오빠 걱정하시는 거 아는데…. 안 굶고 꼬박꼬박 약도 잘 먹고 있어요.”

권성하는 못 만난 며칠간의 안부를 물으며 계속 조잘거리게 만들었다. 이미 다 들어서 알고 있는 내용을 흥미롭게도 듣는다. 가만 듣는 입장에서야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흐르니 좋겠지만 거슬리지 않게 말을 골라야 하는 입장에서는 피곤한 일이었다.

슬슬 전화를 끊고 싶다. 거품을 낸 욕조에 앉아 와인이나 한 잔 하고 싶었다. 남지유는 벽에 기댄 채로 길어지는 통화를 견뎌냈다. 문득 수화기 너머에서 한숨이 새어 들었다.

- 얼굴 본 지 얼마나 됐다고 또 보고 싶네.

“네에….”

- 지유는? 오빠 안 보고 싶어?

안 보고 싶다.

“지유도……. 오빠 보고 싶어요. 언제쯤 뵐 수 있어요?”

- 오빠 많이 보고 싶어?

“네에….”

- 하아. 큰일이네.

“네?”

- 어쩜 귀여운 말만 골라서 해, 응? 꼴려서 미치겠잖아.

대체 어디서 꼴렸다는 건지 모르겠다. 잘 싸지도 않는 주제에 서기는 또 왜 그렇게 잘 서는지. 차마 좋은 말을 해 줄 수 없어 입을 다물고만 있자 권성하가 장난기 많은 소년처럼 웃는다.

- 목소리 더 듣고 싶은데, 이제 끊어야겠어.

“벌써요?”

속으로 쾌재를 부르는 중에도 아쉬운 척은 물 흐르듯 나왔다.

- 우리 지유, 오빠한테 예쁜 말 안 해 줄 거야?

“네에? 부끄러운데…….”

- 여기 아무도 없어. 오빠만 듣는 거니까, 으응?

참 맞춰 주기 까다로운 사람이 아닐 수 없다. 한참 머뭇거리다가 민망한 말을 보고 싶다는 말 속에 끼워서 내어 주자 그가 ‘오빠도’하며 별로 궁금하지 않은 대답을 해 준다.

겨우 전화를 끝낸 남지유는 짜증으로 심란해졌다. 권성하의 속을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몸을 섞은 지 오래된 관계도 아니고, 몸을 섞게 되기까지 구구절절한 감정과 사연이 있는 관계도 아니었다. 잠깐 가지고 놀 남창 취급을 하는 줄 알았건만 딴 놈과 섹스 좀 했다고 화를 내는 꼴을 보니 딱히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다. 그러고 보면 최 사장의 좆집 역할을 하던 시절에도 이미 알고 있던 것처럼 말하기도 했었다. 언제…… 만났던가? 남지유는 곧 고개를 저었다.

‘하긴, 그런 또라이가 있긴 하지. TV나 영화에서 좀 봤다고 혼자 연애 감정 키워 나가는 망상병자.’

따지자면 백이선도 그런 부류였다. 남지유가 나온 어떤 매체를 보고 팬이 돼서 속속들이 알고 싶어지게 된 그런 부류. 설마하니 뒷구멍까지 궁금해 할 줄은 몰랐지만, 돈이 있는 놈들에게 망상을 현실로 만드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남지유는 슬리퍼를 끌며 와인셀러 앞에 섰다. 가장 아끼는 와인이 없다. 빈자리를 우울하게 바라보던 그가 손에 닿는 와인 한 병과 글라스를 꺼낸다. 오프너를 가져오느라 잠깐 내려놓는 사이 핸드폰 진동이 유리테이블을 시끄럽게 때렸다. 남지유가 과하게 놀란다. 권성하일까 봐 졸아들었던 가슴은 화면에 뜬 이름을 보고 가라앉았다.

“뭐야, 감독님?”

- 아, 빨리 받았네. 지유 씨?

“내가 언제 감독님 전화 씹은 것처럼 말하시네. 무슨 일이에요?”

- 다른 게 아니라 영화 찍는 거 생각해 봤나 해서 전화했지.

“아…. 그거.”

아직 맘을 정하지 못해 말끝이 절로 흐려졌다. 이 주 사이 다섯 번의 재촉을 해 왔던 조 감독이 웬일로 여유롭게 말을 잇는다.

- 아직 고민 중이면 촬영하는 거라도 보고 가요. 이번에 정선에서 촬영하거든.

“그래요?”

- 그래. 와서 현장 돌아가는 것도 보고, 경치 구경도 하고. 힐링하다 가. 응?

이제 보니 여유로운 척하는 재촉이었다. 이 주 전이었다면 크게 망설였겠으나, 인간은 망각의 생물이다. 그때 그 솜털 찌릿한 또라이 짓이 주었던 감흥이 흐릿해진 남지유가 대답을 미룬다. 당장 영화 제작지원에 손을 써 준 것에 비해 백이선은 오늘이 될 때까지 연락이 없었다. 어쩌면 정말 흥미가 떨어진 것일지도 모른다. 한 번 자 봤으니 질 나쁜 호기심이 충족됐겠지. 돈을 대가로 유혹해 온 남자라 더 걱정이 되진 않았다.

다만 권성하가 문제다. 그날 이후로 정말 애인이라도 된 것처럼 구는 집요함이, 영화 촬영과 관련된 모종의 거래를 알게 될 경우 어떻게 드러날지 상상도 안 된다.

- 호텔 잡아 줄 테니까 느긋하게 보고 가. 자기한테 부담 주는 거 아니야. 요즘 맘이 복잡한 것 같은데 그냥 쉬었다 가라고. 거기 요즘 단풍이 아주 예쁘게 들었어. 내가 문자로 찍어 줄게. 거기로 오면 돼.

포근한 욕조에서 와인이나 마실 생각은 진작 사라졌다. 남지유는 고민을 반복하다 일단 생각해 보겠다는 답을 겨우 내놓았다. 문자는 전화를 끊어지기가 기다렸다는 듯 바로 울렸다.

[혼자 찾아오기 어렵겠으면 말해요. 내가 태워 줄게.]

촬영지와 호텔 주소가 적힌 문자는 이미 남지유가 오는 걸 기정사실화한 것 같았다. 가겠다고 한 적 없는데. 아직. 남지유는 심란해하며 코르크 마개를 열었다. 와인 냄새가 달았다.

* * *

단풍이 든 풍경이 끝도 없이 펼쳐진다. 미세먼지 하나 없이 맑은 가을 하늘을 낀 강줄기는 청명한 기운까지 머금고 있었다. 높은 건물 하나 없이 탁 트인 풍경이 꽉 막힌 속도 뚫어줄 것처럼 시원하다. 상쾌한 공기를 들이마시는 간격이 점점 짧아진다.

“오! 지유 씨, 왔어요?”

“오랜만에 보네요. 이 영화 영영 완성 못 되는 줄 알았어요.”

“내가 이거 된다고 했잖아.”

아직 촬영이 시작되지 않았는지 모두 분주했다. 안면이 있는 몇몇 스태프들이 목례를 해 온다. 카메라 앞에 선 것도 아닌데 벌써부터 가슴이 설레었다. 이래서야 영화를 찍네 마네 하며 계약 파기까지 논했던 게 우스울 지경이다.

“편하게 구경하다가 가. 호텔도 잡아 놨으니까 촬영 끝날 때까지 있어도 돼요.”

“그렇게 오래는 못 있어요. 저도 잠깐 바람 쐬러 온 거라.”

“자기는 바람 한 번 쐬러 이 먼 데까지 와?”

“그냥 겸사겸사요.”

할 말이 궁하여 그저 웃을 수밖에 없었다. 조 감독은 일단 촬영 현장으로 그를 이끌어 낸 것에 만족하는지 이곳저곳을 끌고 다니며 눈도장을 찍게 했다. 미적지근하다 못해 슬쩍 달구어진 태도가 감독의 추측에 확신을 안겨 준 모양이었다.

촬영을 앞둔 감독은 가이드 역할을 오래하지 못하고 자리를 떠났다. 혼자 남은 그에게 스태프 한 명이 따뜻한 커피를 내준다. 의자도 내주었다.

“지유 씨 이거 드세요.”

“고마워요.”

다들 최고의 장면을 담기 위해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먼 데서 구경하는 기분이 묘할 정도였다. 이 영화 하나를 차기작으로 정하고, 다른 촬영은 미뤄 두고 있던 그로서는 현장에 오는 것만도 벅찼다. 그간 인터뷰나 화보 촬영도 종종 했었지만 카메라 앞에서 직접 연기하는 것과는 달랐다. 물론, 백이선이나 권성하 앞에서 고분고분한 흉내를 내는 것과도 다르다.

시나리오에서 이미 본 적 있는 장면들이 펼쳐진다. 따뜻했던 커피는 바깥공기에 차갑게 식어 버렸다. 남지유는 현장에서 한시도 눈을 떼지 못하다가 문득 울리는 진동에 정신을 차렸다. 핸드폰을 꺼내든 그가 촬영장에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이동한다.

“어, 도엽아. 왜.”

- 형, 오늘도 호텔로 가져다드리면 돼요?

“아니. 나 잠깐 정선에 와 있어.”

- 네? 거긴 왜요?

“촬영하는 것 좀 보느라. 그리고 앞으로 호텔 안 가도 돼. 나 집 들어갔어.”

드디어 들어가셨어요? 매니저가 가출한 청소년이 귀가한 것처럼 기뻐한다. 모르는 사람들이 봤을 때는 괜한 변덕으로 좋은 집 놔두고 헛돈 쓴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남지유라고 이 주간 그런 생각을 안 한 건 아니었다. 그는 비뚤어지려는 맘을 다잡았다.

“아무튼 그동안 고생했어.”

- 네, 형! 다음 스케줄 맞춰서 연락드릴게요.

전화를 마무리하는데 문득 현장이 소란스럽다. 유명한 배우라도 왔나? 아니면 팬들이 조공이라도 보냈나. 현장으로 돌아오자 자리에 있던 조 감독도 보이지 않았다. 행방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사람들의 시선을 따라가면 그만이었다.

그리고 남지유는 모여 있는 사람들 중 머리 하나는 더 큰 남자를 발견한다. 뜻밖의 재회에 사고가 잠깐 정지했다. 거의 반사적으로 돌려지는 걸음을 조 감독이 붙잡는다.

“아, 지유 씨! 어디 갔나 했네. 인사드려요. 이분이 지유 씨 팬이라던 그분이셔.”

사람들 시선이 쏠린 가운데서는 성질대로 무시도 못한다. 결국 백이선에게로 다가가자 오랜만에 보는 잘생긴 얼굴이 씩 웃는다.

“오랜만에 뵙네요. 남지유 씨. 그땐 잘 들어가셨어요?”

“아……. 네. 근데, 여긴 어떻게?”

“이미 안면이 있어요? 전무님도 근처에 들른 김에 잠깐 현장 보러 오셨대. 이거 운명 아니야?”

조 감독이 능청스러운 농담을 꺼냈다. 전혀 웃기지 않았다.

이왕 온 거 저녁이나 같이 먹자는 조 감독의 권유를 뿌리치고 차에 올랐다. 강줄기를 따라 이어진 도로를 끝없이 내달리다 소득 없는 추격전이 될 것 같아 자갈밭에 멈추었다. 주차를 하자마자 바로 옆에 외제차 한 대가 미끄러지듯 멈춘다. 남지유는 간절히 나는 담배생각을 떨치고는 차에서 내렸다. 고목나무가 드리운 풍경 아래로 강물이 흐르고 있다. 비딱하게 차에 기대선 그에게로 백이선이 다가왔다.

“좋은 곳을 알고 계시군요.”

“그쪽 보라고 세운 거 아니니까 닥쳐요.”

“어째선지 화도 나셨고.”

웃음기를 머금은 얼굴이 살짝 기운다. 멋들어지게 넘긴 머리와 선이 딱 떨어지는 정장은 고전적이었으나 회사에 어울리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그러기에는 지나치게 잘생겼다.

“그간 일이 좀 있었는데… 연락을 못 드린 게 남지유 씨가 본인의 매력을 의심케 만들었겠군요. 제가 남지유 씨를 배려하지 못했습니다. 미안합니다.”

“미친….”

이런 상황에서, 애프터 신청을 받지 못해 삐친 데이트 상대로 취급하는 사고방식이 놀랍다. 그딴 게 아니라고 말을 받아 봤자 얼굴에 드리워진 미소나 더 짙어질 것이다. 그리고 느끼한 말을 해 대겠지. 끔찍했다.

어쩌다 이런 것들이랑 엮였지? 속이 타니 자꾸 담배 생각이 난다. 끊은 지 한참 된 걸 새삼 떠오르게 만드는 백이선이나 권성하나 참 대단한 인물들이다. 미끈한 손가락이 단정한 입매를 쓸자 백이선의 흑심 가득한 눈이 하얀 손끝에 더듬거려지는 발긋한 입술로 꽂힌다. 남지유는 눈살이나 슬쩍 찌푸릴 뿐 말을 보태지는 않았다. 대신 손을 거두고 팔짱을 낀다.

“그래서, 여기까지 쫓아온 이유가 뭡니까?”

“저와 독대하길 원하시는 것 같아서요.”

“제가요?”

“네. 그런 눈으로 보셨잖습니까. 가슴 떨리게.”

빙긋 웃는 얼굴로 손을 뻗어 온다. 남지유가 멈칫하자 그는 웃음을 흘리며 어깨에 올라앉은 단풍잎을 잡아 보였다. 다른 의도는 없었다는 듯 산뜻한 손짓이었으나 좁혀진 거리는 다시 벌어지지 않았다. 고급스러운 향수 냄새가 끼쳐든다. 한 뼘 높은 위치에서 아래로 흘러드는 시선이 거북했다.

“영화출연 번복하셨다고 들었어요. 이유가 있습니까?”

“그쪽이랑 더 엮이고 싶지 않아서요.”

“글쎄, 그럼 굳이 이 먼 곳까지 드라이브를 오실 필요는 없었을 텐데요.”

“그건 그쪽이…….”

연락을 안 해서, 관심이 없는 줄 알고 그랬다고 말한다면 눈앞의 남자는 크게 기뻐할 것이다. ‘애프터 신청을 받지 못해 골이 난 남지유’라는 초월적인 해석에도 멋대로 개연성을 심어 줄 것이고. 대화를 할수록 피곤해지는 건 재벌놈들 특징인가 싶다. 남지유에게서는 한숨이 새고 백이선에게서는 웃음이 샜다.

“정말 출연을 고사하실 거라면 아쉽게 됐네요. 남지유 씨가 찍는 시대극도 보고 싶었거든요.”

이 새끼 정말 내 팬이었나? 콕 집어 자신이 출연하는 그 영화를 보고 싶다고 말하는 얼굴에는 진실성이 가득하다. 남지유는 미심쩍은 눈초리로 백이선을 바라보았다. 산들바람이 분다. 속은 시꺼먼 주제에 말끔한 미소를 짓고 있는 얼굴로 햇빛이 스며들었다가 그늘에 거두어진다. 사락사락 나뭇잎 소리는 단풍과 강줄기를 낀 고즈넉한 풍경과 퍽 어울렸다. 이어진 상스러운 말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머리카락 한 올 흘리지 않고 틀어 올린 하얀 목덜미가 동정사이로 엿보이는 광경이 아주 관능적일 것 같았는데.”

이 새끼가 가부장적 꼰대 변태새끼라는 걸 잠깐 깜빡했다.

“사람 앞에 두고 변태 같은 소리 좀 하지 마시죠?”

“한복이 어울릴 것 같다는 말을 곡해해서 들으시는군요. 제가 남지유 씨 옷고름 풀고 싶단 소리를 한 건 아니지 않습니까.”

백이선은 질색하는 남지유에게 다정한 미소 따위를 지었다. 어느덧 남지유가 기대고 있는 차체에 그의 팔이 자연스럽게 올라앉는다. 거리가 더욱 좁혀지고 맞부딪치는 눈빛은 묘해진다. 좋은 배경과 번듯한 인물 둘. 영화였다면 이쯤에서 키스 신이 나왔을 것이다. 물론, 이건 영화가 아니었다.

금방이라도 기울어질 듯한 고개를 손으로 밀어내자 백이선이 진하게 눈웃음을 친다. 그는 자신에게로 임해 준 손을 붙잡고 짜증 어린 눈과 시선을 맞댔다. 곧이어 손바닥에 축축한 혀가 닿는다. 남지유가 질색하며 튀어 올랐다.

“씨발!”

“수줍음이 많으신 건 여전하네요. 더한 짓도 한 사이끼리.”

“미쳤어?”

“귀여우신 것도 여전하고.”

혀끝으로 간지럽혀진 손을 붙잡으며 아연실색하는 표정은 흡사 손이 썩어들기라도 하는 것처럼 절박했다. 백이선이 살짝 기울였던 몸을 세운다. 여유가 깃든 태도는 변태 짓을 한 주제에 퍽 당당했다.

“그럼 지유 씨, 달리 원하시는 선물은 없습니까?”

“뭐.”

“영화를 고사하셨으니 달라진 상황에 맞춰 선물을 다시 정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투자 철회하겠다고?”

“그보다는 선물을 바꾼다는 말이 맞겠죠.”

“돈도 많은 새끼가 쪼잔하게!”

혀로 대뜸 애무를 당한 충격이 존댓말을 쓰는 법까지 날려 버린 모양이다. 짧아진 말끝과 거침없는 단어 선정에도 백이선은 굳이 지적하여 창피를 주진 않았다. 지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이 미남이 사실 꼴통이란 건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 점이 꽤 귀여웠다.

“어차피 합류도 안 할 영화에 왜 그리 신경 쓰십니까? 남지유 씨는 그냥 갖고 싶은 걸 말하기만 하면 돼요.”

“…….”

남지유가 입을 다문다. 짜증과 답답함이 뒤섞인 표정은 진심으로 분해 보였다. 사실이 그랬다. 못내 찍고 싶었던 영화라 드라이브를 핑계로 정선까지 온 것도 맞고 미련이 남아 지원 철회에 발끈한 것도 맞아서 할 말이 궁했던 탓이다. 그런데 순순히 인정하자니 백이선의 술수에 놀아나는 기분이었다. 그렇다고 정말 고사하자니 권성하가 얄밉고 영화가 간절해 이도 저도 못하겠다. 돈 많은 또라이들에게 내내 휘둘리기만 하는 현실에 불쑥불쑥 짜증이 치민다. 백이선과의 첫 섹스를 주선해 주었던 분기였다. 그런 짓을 당하지 않았더라면 홧김에 한 번 더 외간남자와 잠자리를 가졌을지도 모른다.

잘생긴 얼굴은 침이 발린 손을 쥔 채 시선을 피하는 것만으로도 그림이 된다. 손을 못 쓰게 된 음악가나 미술가처럼 말이다. 백이선이 조심스럽게 손을 감싼다. 움찔거리며 빠져나가려는 움직임은 손아귀에 갇혔다.

“그렇게 하고 싶은 걸 왜 안 하려고 하세요.”

“정말 몰라서 물어요? 그쪽이 이렇게 질척거리잖습니까.”

“미련이 절절 끓는 얼굴을 하는 건 남지유 씨인데요.”

“신경 끄세요.”

“어떻게 그러겠어요. 당신 일인데.”

짜증 나 씨발. 피상적인 대화만 나누니 본질에 다가갈 수가 없다. 남지유가 그림 같은 풍경을 보며 울컥 솟는 화를 달랜다. 반지르르한 낯짝이 안 보이니 좀 나은 것 같다가도 변태처럼 손을 주물럭거리는 통에 좀체 화가 꺼지질 않았다. 정선까지 괜히 왔다. 권성하를 피해 지방에서 밀회를 하는 모양새가 되지 않았는가.

남지유는 쌀쌀맞게 손을 빼내었다. 백이선이 새침 떠는 소년 보듯이 웃는다. 그러더니 운전석에 오르려던 남지유를 가로막는다. 발칙하게 노려보는 눈빛도 마냥 귀여운지 입가에 떠오른 웃음이 사라지질 않았다. 그가 품에서 꺼낸 명함케이스를 펼친다.

“전 내일까지 여기서 머무를 예정입니다.”

“그래서요?”

“잘 생각해 보시고 답변해 주세요. 남지유 씨.”

유혹하듯 속살거리는 목소리와 함께 주머니에 명함이 꽂혔다. 우습게도 그 순간 어느 때보다 강렬한 욕망이 솟구쳤다. 남지유는 당장 돌려주어야 한다는 위기감을 느끼면서도 명함에 손을 대지 못했다. 백이선이 눈꼬리를 접는다.

“연락해요.”

A사 전무이사 백이선, 그 번듯한 글자 아래로 번호가 적혀 있다.

이 주 내내 질질 끌었던 고민에 강제로 막을 내려야 하는 순간이 왔다. 내일까지 연락을 주지 않는다면 그는 영화 대신 다른 선물을 준비해 올 것이다. 백이선의 난입이 없었거나 권성하가 조금만 더 호구새끼였다면 답을 내놓기 쉬웠을 테지만 공교롭게도 둘 다 좆같은 점에서는 용호상박이었다.

“미치겠네.”

사실 정해 놓은 답은 이미 있었다. 하고 싶다는 결론을 속으로 수없이 논파시키는 과정이 괴로울 뿐. 호텔로 체크인 하면서 버린 명함을 다시 주워 오며 스스로의 구질구질함에 얼마나 치를 떨었는지. 한편으로는 이렇게까지 하게 만든 두 또라이에게 엄청난 반발감이 고개를 쳐들었다.

한참을 소파에 앉아 있던 그가 몸을 일으킨다. 그는 내리 노려보느라 숫자까지 외워 버린 번호를 핸드폰에 입력하고 통화버튼을 눌렀다. 연결음은 오래가지 않았다.

정선에 도착했을 때만 해도 푸르렀던 하늘이 붉게 물들어간다. 능선에 아른거리는 노을은 곧 완전히 꺼질 것이다.

A호텔 외곽에 차를 세운 남지유가 핸들을 두드린다. 이게 잘하는 짓인지 모르겠다. 아니 분명 미친 짓이었다. 그냥 차를 돌릴까. 연약한 갈등이 피어오르려던 찰나 누군가 차창을 두드린다. 그는 겨우 정신을 차리고 문을 열어 주었다. 훤칠한 남자가 훈기를 품은 채 차에 오른다. 따스한 허브티 냄새와 갓 목욕을 한 듯 시원한 체취가 풍긴다. 백이선이 허브티를 내밀며 웃었다.

“해지니까 벌써 쌀쌀하네요.”

“안 마십니다.”

“경계심 강한 길고양이 같군요.”

냉랭한 대꾸를 좆같은 비유로 받아친 백이선이 홀더에 종이컵을 끼워 놓는다. 안 마신다니까. 남지유는 착잡하게 허브티를 바라보다가 백이선에게 시선을 옮겼다. 그가 퍽 다정한 눈빛으로 남지유를 마주 본다.

“받고 싶은 선물은 정하셨습니까?”

“영화 그대로 지원해 줘요. 다른 건 필요 없습니다.”

“잘 생각하셨어요. 남지유 씨 이번 영화 저도 기대가 컸습니다.”

“그리고…….”

“그리고?”

백이선이 말을 따라하며 슬며시 미소를 짓는다. 남지유가 깜빡 속았던 미소였다. 백이선은 권성하와 달리 제 잘난 페이스를 십분 활용할 줄 알았다. 금 탯줄을 쥐고 태어나 어려서부터 군림하는 법을 깨친 사람들 특유의 본성을 지녔으면서도 주변 평판이 좋은 까닭은 그 때문일 것이다.

권성하는…… 하긴, 그 새끼는 구태여 미인계를 쓸 필요가 없었다. 사람 하나 회치는 건 일도 아닌 놈에게 주제도 모르고 뻗댈 놈이 과연 있기나 할지. 이미 숱하게 대들어 온 상대가 조폭이라는 자각은 새삼 찌릿찌릿한 전율을 안겨 주었다. 남지유는 뱀 아가리에 머리를 집어넣는 묘기를 하는 듯 아찔함이 들었다.

“이대로 다신 안 만나면 베스트겠지만, 그럴 리 없겠죠?”

“연락 안 드린 걸로 아직 화가 나 있으시군요. 앞으론 그럴 일 없을 겁니다.”

같은 한국어를 구사하는데 왜 해석 실력은 번역기보다 못할까. 남지유가 제 손끝을 만지작거리는 손길 따위는 무시하고 말을 잇는다.

“아무래도 내가 밑지는 장사 같은데요. 영화 촬영이 끝날 때까지 그쪽이 지분대는 거, 다 봐줘야 하는 거 아닙니까?”

“지유 씨, 당신도 참 귀엽네요.”

마주한 눈웃음이 짙어진다. 백이선은 잡은 손을 끌어다 입을 맞추며 못내 귀엽다는 눈빛으로 남지유를 바라보았다.

“이 주 동안 망설이다가, 권 이사가 화낼 걸 알면서도 어렵게 수락한 걸 그깟 일로 물릴 리가 없잖습니까. 패를 다 보여 놓고 협상을 거는 건 새로운 애교인가요?”

“…….”

“아니면 제가 지분대는 대가로 다른 선물을 받고 싶습니까? 말씀만 하세요. 전부 갖다 바치죠.”

달콤하게 속삭이는 입술이 손가락을 살짝 머금는다. 야릇한 감촉에 손끝을 움찔거리자 이번에는 웃음이 흘렀다. 남지유는 백이선의 장담대로 감히 손을 빼지 못했다. 입술이 손끝에서 손등까지 올라왔을 때도, 몸이 기울어지며 어깨와 어깨가 맞닿았을 때도. 눈살이나 겨우 찌푸릴 뿐 거절의 몸짓은 없었다. 싫은 티는 훤히 내서 억지로 희롱하는 기분을 일깨워 주면서 말이다.

숨결이 스치는 거리에서 백이선이 남지유를 바라본다. 허벅다리 안쪽을 더듬거리는 손길은 차 안에서 벌이기 딱 좋은 정도의 스킨십이다. 더 안쪽으로 움직이지만 않는다면 적당한 스릴을 즐길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고분고분하니까 궁금해지네. 남지유 씨가 어디까지 참을지.”

“…누가 보면 어쩌려고 이러세요.”

“이럴 줄 알고 이 어두운 곳에다 세워 놓고 부른 거 아닙니까?”

“…….”

말대답 잘하던 입이 웬일로 얌전하다. 살갑게 아양을 떠는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꼴린다. 백이선은 귓바퀴를 깨물며 가장 민감한 부위를 대놓고 건드렸다. 지금껏 저항 한 번 안 했던 몸이 작게 움찔거린다. 그날 민감했던 반응이 마냥 술기운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응, 으읏.”

백이선은 아직 말랑한 기둥을 주무르며 남지유가 곤란해하는 얼굴을 관찰했다. 손바닥으로 천천히 쓸어내리면 질척한 한숨이 샜고, 손바닥으로 감아쥐면 야트막한 신음을 터뜨린다. 눈을 내리깐 채 수치심을 감내하는 미남을 보자니 데뷔를 시켜 주겠다며 성희롱을 하는 악덕 사장이라도 된 기분이다. 고상한 취향의 백이선으로서는 색다른 자극이었다. 스크린으로 숱하게 봐 온 얼굴이 쾌감으로 흐트러지는 걸 보자면 단번에 극중으로 빠져드는 듯한 몰입감마저 들었다.

권력의 손길 아래서 순순히 할딱거리던 남지유가 문득 손을 밀어낸다. 정말 떼어 내려는 의지가 있긴 한 건지 의심이 들 만큼 미약한 힘이었다.

“안 돼요….”

“왜 안 됩니까?”

“차에서는, 싫…… 하아!”

순간 뒷골이 울릴 만큼 강렬한 쾌감이 솟구쳤다. 남지유는 떼어 내려던 손을 붙든 채로 몸을 경직시켰다. 세게 쥐어진 성기에서 얼얼하리만치 짜릿한 쾌감이 돌았다. 벌어진 입술이 달달 떨리며 들고양이 울음소리 같은 신음을 토해 낸다. 귓불이나 깨물던 백이선이 떨리는 뺨을 깨문다. 뜨거운 혀가 뺨을 훑었다.

“꽃뱀한테 홀리는 기분인데, 싫지가 않네.”

“으응, 읏.”

“지유 씨. 눈 떠요.”

질끈 감겼던 눈꺼풀이 물기를 머금은 채 천천히 올라간다. 이런 표정을 지을 줄 아는 것도 재주였다. 백이선은 자신을 애처롭게 바라보는 시선에 욕설을 짓씹듯 한숨을 토했다. 손에 잡힌 성기는 단단하게 발정한지 오래다. 제 것을 꺼내 그 위에 무작정 문지르고 싶은 충동이 치민다. 그는 속눈썹의 떨림까지 느껴지는 거리에서 남지유를 추궁했다.

“차에서는 싫어요?”

“누가, 보기라도, 하, 하면, 흐으….”

“근데 왜 이딴 걸 넣고 다닙니까?”

열어젖힌 글로브박스 속에 러브 젤과 콘돔이 보인다. 언젠가 권성하를 만나러 갔을 때 혹시 몰라 넣어 두었던 것이나 쓰이지 못한 것이기도 했다. 물론, 그렇다고 차 안에서 붙어먹지 않은 것은 아니다.

“권 이사와는 차에서도 꽤 즐겼나 봅니다.”

“아, 아니…. 흐읏, 응.”

“대놓고 차별 대우를 받으니 솔직히 서운하네요, 지유 씨.”

“흑! 아, 안 돼…. 소리, 나오는, 으응…!”

“쉬이.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요?”

배우 일 못하게 되면 저한테 시집이라도 오실 겁니까? 웃기지 않은 농담을 하는 목소리에 웃음이 스며든다. 남지유가 고개를 숙인 채로 소리를 참으려 안간힘을 쓴다. 차 안에서 붙어먹는 플랜이 없는 게 아니었을 텐데, 하여간 앙큼한 짓은 잘한다. 백이선은 슬슬 젖기 시작한 바지를 내려 까닥거리는 성기를 잡아 주었다. 러브 젤이 따로 필요 없을 만큼 젖은 성기가 손짓을 따라 찌걱찌걱 야릇한 소리를 터뜨렸다. 그러다 예민한 선단을 문지르자 울음 같은 신음이 섞인다.

“아, 앗…! 흐응, 응. 싫, 살살… 아!”

“지유 씨, 여자랑 할 때도 이럽니까? 박을 때마다 앙앙거리면 가관이겠군요.”

아, 여자 경험은 없다고 하셨나요? 조롱 같은 속삭임이 다정하게 흘렀다. 남지유는 제대로 대꾸하지 못하고 고개만 가로저었다. 절정의 기로를 앞둔 그에게는 더 중요한 게 있었다.

“아흣, 응, 전무님…. 저, 나, 나올….”

“겨우 이 주 지났다고 호칭도 까먹고. 남지유 씨는 얼굴이라도 예뻐서 다행이네요.”

“앗, 아…! 서, 서어… 방, 님. 지유, 나, 나와요….”

“나와요? 뭐가 나와요. 응?”

“애액이, 나올 것, 아, 앗! 흐응, 응, 으응…!”

파정은 순식간이었다. 남지유를 내내 관찰하던 백이선이 사정의 쾌감으로 흐려지는 얼굴에 입을 맞추며 선단을 감싼다. 손바닥으로 요도를 덮은 채로 공 굴리듯 귀두를 애무하니 성기가 까닥거리면서 정액을 길게 토해 낸다. 정액이 손바닥을 타고 바지 앞섶에 툭 떨어졌다. 차 안에 정사의 냄새가 가득 찬다.

“하아….”

백이선이 정액으로 흥건한 손을 닦는다. 글로브박스 안에 있는 티슈를 빼내느라 분주한 손을 어떻게 오해하였는지 남지유가 곤란한 표정을 짓는다. 백이선이 픽 웃었다.

“못 참고 시트 젖히기라도 할까 봐 걱정됩니까?”

“…아니에요?”

“부추기는 건지 말리는 건지 모르겠네. 오늘 당신 차에서 안을 생각이었다면 뜨거운 음료 따위 안 샀습니다. 지금쯤 적당히 식었을 테니 당신 옷에 쏟아붓고 내 방으로 올려 보낼 수도 있겠지만.”

“…….”

“그러면 싫어할 거잖아요?”

그는 잘 쓴 장난감을 정리하듯 남지유의 성기를 선단부터 밑동까지 꼼꼼히 닦아 주었다. 그러면서 만류하려는 손짓은 싸늘하게 다룬다. 배려를 하는 건지 마는 건지 남지유야말로 의문이었다.

어느 정도 고양감이 가라앉은 백이선은 다소 무례했던 존댓말을 거뒀다. 그가 아직 발긋한 눈가를 손등으로 쓸어 주며 말한다.

“오늘 남지유 씨 생각은 잘 알았습니다. 앞으로 기대할게요.”

“…권 이사가 알게 되면 피차 곤란할 테니 서로 적당히 처신하죠.”

“글쎄, 곤란한 건 지유 씨 아닌가요?”

남지유가 눈을 치뜨자 백이선이 웃음을 터뜨린다. 그는 남지유의 뺨을 감싸고는 입을 맞출 듯 잠깐 침묵했다. 아랫도리로는 더한 스킨십을 한 주제에 키스는 입술만 맞닿는 정도에서 끝났다. 그가 악몽을 꾼 어린애한테나 할 법한 인사를 속삭인다.

“무서우면 전화해요. 제 집에 빈방이 아주 많거든요.”

묘한 뉘앙스에 남지유는 문득 착잡해졌다. 이거, 어느 놈을 고르든 똑같은 게 아니었을까?

* * *

남지유는 일부러 차를 몇 바퀴 더 돌렸다. 풍경 좋기로 소문난 곳마다 한참 멈춰 있기도 하다가 해가 아주 졌을 때 호텔로 돌아갔다. 한밤중처럼 어두컴컴한데 정작 시계를 보니 여덟 시도 채 안 된 시간이었다. 저녁을 건너뛰었는데도 식욕이 느껴지지 않았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옷을 갈아입은 남지유가 핸드폰을 든다. 웬일로 문자 한 통 없다. 이러니 괜히 불안해진다. 남지유는 곧장 권성하에게 전화를 걸려다가, 자신이 먼저 건 적이 거의 없음을 깨닫고는 문자를 남겼다. 대충 정선에 잠깐 쉬러 왔는데 풍경이 너무 좋다는 얘기였고 그래서 오빠랑 같이 보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문자를 남긴지 얼마 되지 않아 전화가 걸려 왔다. 초조하게 핸드폰을 지켜보던 남지유가 반갑게 전화를 받는다. 너무 들뜨지 않되 애교는 섞은 목소리가 권성하를 반긴다.

“네, 오빠.”

완전범죄를 꿈꾸는 살가운 인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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