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스물한 살의 서약
근래 들어 아사야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녀의 속을 썩이는 원흉은 가브리엘의 태도였다. 한때는 답답한 하루의 구원이고 작년까지만 해도 낙원의 다른 이름이던 ‘가브리엘’이, 오늘은 고민 덩어리로 전락한 것이었다.
그 고민의 나쁜 점은 애매함에 있었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이며 그토록 고민인가를 짚어 내자니 어느 한 군데를 꼬집어 설명하기가 어렵고, 그렇다고 무시하며 지나가자니 그 어색한 기류가 못내 거슬렸다.
가브리엘의 어디가 특별히 달라졌느냐면 그렇진 않았다. 아침이면 그는 가벼운 입맞춤으로 아사야의 잠을 깨워 주었고, 왕성의 앞뜰에 그녀가 심어 둔 꽃이 봉오리를 피워 냈노라 새 소식을 전해 주었다. 식사 자리에는 언제나와 같이 마주 보며 앉았으며 점심에는 산책을, 저녁에는 내일의 계획을 나누기도 잊지 않았다.
지난주에는 아사야가 주최한 제3회 다과 연회에도 함께 어울린 가브리엘이었다. 천공섬의 드래곤들은 아사야가 얼마나 빨리 자라는가에 대해 말하기를 좋아했고, 어른이 된 그녀의 변화는 누구보다도 가브리엘이 좋아하는 주제였다.
“몇 달 뒤면 스물한 번째 생일이라니 시간이 참 빨라.”
유독 아사야를 귀여워하는 늙은 드래곤이 말했고,
“이러다 금방 어른이 되겠어.”
금발의 드래곤이 말을 보탰다. 저를 순전히 아이 취급하는 이들을 앉혀 놓고, 아사야는 저는 이미 어른이라 외쳐 보았지만 소용없는 짓이었다. 바삭한 쿠키와 따듯한 차를 들이켜 대며 그들은 십 년 전 아사야가 얼마나 작았는지, 볼살이 어떤 생김이었고 또 얼마나 귀여웠는지에 대해 이쁜 손주를 둔 할아버지, 할머니들처럼 이야기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제 이야기를 하며 제 말은 듣지 않는 고집불통 드래곤들을 바라보며 아사야는 실소했다. 그러고는 가브리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평소 같았더라면 저를 마주 보며 함께 웃어 주었을 가브리엘은 딴생각에 잠겨 있었다. 두 눈을 접시 모서리에 고정시킨 채 움직이지 않는 것이었다.
“가브리엘.”
아사야가 손끝으로 팔을 건드리자,
“응.”
재빠른 답을 내주긴 했으나 그뿐이었다. 얼굴을 맞대며 실소하고, 함께 농담을 나눌 타이밍은 이미 지나 버렸다.
돌이켜 보면 그때부터 가브리엘의 어딘가가 이상했다. 아주 미묘한 변화이긴 하나 아사야는 제 드래곤에 대해서라면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 애매하게 어색한 기류는 그날 이후 가브리엘의 곁을 떠나지를 않았다.
몸을 겹치고 앉아 같이 책을 읽기는 하나 가브리엘의 책장은 한 시간이 지나도록 넘어가질 않고, 제 농담을 듣고 웃기는 하나 이를 보이는 시간이 묘하게 짧고, 제가 그의 배에 올라탈 때면 흥분한 기색이긴 하나……
‘아냐.’
아사야는 생각을 멈추었다.
‘침대에서는 아무 문제가 없어. 오히려 전보다 좋아진 거 같은걸.’
고민은 그렇게 애매했다.
몸이 마음을 따라 어른이 된 이래, 그와 제 사이에 붙은 불씨는 커졌으면 커졌지 식을 날이 없었다. 갓 스무 살이 된 작년에는 아주 몸이 닳을 지경이었다. 눈만 마주치면 입술을 쪽쪽거리고 볼을 부벼 대고, 배를 맞추기 바빴다. 주말이면 엘라의 방문도 거절하고 침대에서 종일을 보내기도 잦았다.
어제도 본 얼굴이지만 가브리엘은 저를 보면 미소 지었다. 며칠 전에도 안은 몸이지만 제가 벗을 때면 눈빛부터 달라지던 그였다. 어쩌다 몸이 동하면 그 신호를 어떻게 알아차렸는지 허리를 번쩍 안아 들고 침대로 돌진하기도 부지기수였다.
그런 가브리엘과 제 사이에 권태기란 영원히 없는 단어였다. 적어도 이제까지는 그렇게 믿어 왔다.
‘혹시…… 가브리엘이 무리를 하고 있나?’
도리어 너무 잦은 스킨십이 문제일 수도 있었다. 성인의 몸을 되찾은 것에 제가 너무 신나고 들떠 해서, 어쩌면 가브리엘이 저에게 맞춰 주느라 애를 쓰는 것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아사야는 그 가능성에 일말의 기대도 걸고 싶지 않았다. 가브리엘이 제 무엇에 질리기라도 한 것일까 고민하는 순간 아사야는 스스로를 가치 있는 존재로 여길 수 없게 됐다. 주위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급속도로 쪼그라들고 제 몸과 마음이 볼품없이 시들어 버리는 느낌이었다.
그럴 리 없어…… 확신인지 바람인지 모를 말이 아사야의 잇새로 빠져나갔다. 그럴 리 없어, 가브리엘이 날 얼마나 사랑하는데, 날 속일 리 없어…… 연거푸 속삭이며 아사야는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그게 아니라면, 여전히 저를 보면 몸도 마음도 동하는 이전 모습 그대로의 가브리엘이라면, 그의 마음 안에 똬리를 튼 정체불명의 이상 기후는 무엇이냔 말이었다.
아사야가 그 고민을 떠안고 제 딸을 찾았을 때,
“에이…….”
엘라는 시시한 소리를 냈다.
“어머니께서 무얼 오해하신 거겠죠.”
그리곤 속편한 대꾸를 꺼내 놓는 것이었다. 그 바람에 아사야는 두 발로 땅을 거칠게 구르고 싶은 것을 겨우 참았다.
“정말이야. 어딘지 이상해, 잠깐씩 딴생각에 잠긴 것만 같다니까.”
심각한 얼굴로 진지한 목소리를 내는 아사야를 위해서라면, 엘라에겐 못할 일이 없었다. 그러나 아사야가 꺼낸 말이 ‘네 아버지가 날 두고 딴생각을 한다’는 문장이라면 경우가 달랐다. 엘라 나자렛의 귀로 듣기에 그보다 허황된 소리가 없기 때문이었다.
언제 어디서, 무얼 하건 가브리엘의 두 눈은 아사야를 향해 고정되어 있었다.
엘라의 기억이 노트여서 페이지를 펼친다 치면, 여느 페이지에건 가브리엘은 같은 그림으로 그려져 있었다. 그의 고개는 아사야가 있는 방향으로 틀어진 채였고 두 눈은 깜빡임 없이 그녀의 눈과 코와 입을 좇고 있었다. 그녀가 열 살이건 열네 살이건 스무 살이건 그 눈빛엔 변화가 없었다.
오죽하면, 아사야가 없을 때엔 그녀의 얼굴을 그려 놓고 그 종이를 쳐다보다 잠들던 아버지였다. 지하 생활을 자처하는 그를 볼 적에 엘라는 제 아버지라는 남자는 참 지독하다 생각하다가도 가엾게 여겼고, 애처롭게 생각하며 보다가도 또 괴짜 같은 면에 넌더리를 내게 됐다.
그런 아버지에게, 아사야는 이상하게 잘 어울리는 상대였다. 저 같으면 애인이라는 남자가 제 초상화를 그려 놓고 바라보며 잔다 하면 소름이 끼칠 것 같은데, 어머니는 그 사실을 알고는 더더욱 아버지를 좋아했다.
그런 두 사람이니, 당장에 어떤 문제가 있다 한들 금세 헤쳐 나갈 게 분명했다. 엘라에게 있어 부모는 그런 존재였다. 내일이면 제 노크 소리도 무시한 채 침실 안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을, 두 마리 잉꼬가 가브리엘과 아사야였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어머니.”
엘라가 남길 것이라곤 편한 위로뿐이었다.
“아버지야 본디 알기 어려운 분이시니까요.”
그녀의 위로에 아사야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사야에게는 가브리엘만큼 제 의사가 분명하고 거짓 없는 존재도 없기 때문이었다.
좀처럼 어머니께서 제 위로를 믿지 않는 눈치이니, 엘라는 말을 보탰다.
“조금 전만 해도 기분이 나빠 보이진 않았습니다. 기운이 넘치시는지 근방을 둘러보고 오신댔어요. 섬의 끄트머리 바위까지 말을 달릴 모양이던걸요.”
엘라의 말은 그러나 아사야의 불길한 예감에 덧댈 장작에 불과했다. 어떤 문제가 생긴 건 아닐까 하던 희미한 추측이 이제는 확신이 되어 아사야를 놀라게 했다. 가브리엘이 천공섬의 끄트머리 바위에 오른다는 것은, 옛일을 추억해야 할 정도로 심란한 일이 생겼다는 증거였다.
“언제 돌아온다는 말은 없었니?”
엘라의 턱을 올려다보며 아사야가 물었다. 어른이 된 뒤에도 그녀의 키는 제 딸의 어깨에 닿는 수준이었다. 습관적으로, 엘라는 두 다리를 넓게 벌리는 것으로 눈높이를 조절했다.
“천평선을 정찰할 적에도 반나절이 걸리지 않는 분이니 아마, 해가 지기 전엔 돌아오시겠죠.”
“응. 당장 주방에 가서 맛난 저녁을 차려 달라 해야겠어. 가브리엘이 기운이 날 정도로…….”
그렇게 말을 마치며 돌아서는 아사야를,
“그건 그렇고, 어머니.”
엘라가 잡아 세웠다.
큰 손으로 덥석 어깨를 쥐자마자 아사야의 가벼운 몸이 허공에서 잠시 휘청거렸다. 그러나 놀란 기색일랑 없었다. 저보다 큰 딸이 저를 홱홱 날쌔게 다루는 것에 십 년을 들여 익숙해진 아사야였다.
가브리엘에 대해 더 할 말이 남았냐는 양 눈을 둥그렇게 뜬 아사야를 향해, 엘라가 물었다.
“생일 선물로는 무얼 드릴까요?”
기둥처럼 곧게 뻗은 몸에 건장한 몸, 무뚝뚝한 말투를 가진 그녀는 어머니의 생일을 개국기념일보다 더욱 중히 챙기는 왕이었다.
아사야는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네가 건강하면 나는 그것으로 좋단다.”
“입 발린 소리는 아버지께나 통하는 거죠.”
동시에, 엘라는 아사야보다 한 세기의 세월을 더 산 존재이기도 했다. 아사야가 그녀를 귀여운 딸아이 취급할 때면, 엘라는 제 어머니를 어린 소녀처럼 내려다보며 한숨 쉬었다.
“뭐…… 됐습니다. 제가 알아서 준비하겠습니다.”
할 말을 마친 엘라는 그것으로 만족한 듯 자리를 떴다. 멀어져 가는 엘라의 뒷모습을 아사야는 황당한 듯 몇 초간 바라보았다.
‘가브리엘을 쏙 빼닮았다니까.’
단 한 번도 빼먹는 일 없이, 아사야의 생일날마다 멋진 선물을 안겨 줘 온 엘라였다. 또한 단 한 번도, 가브리엘의 선물을 이겨 본 일 없는 엘라였다.
엘라가 소중하게 보관해 온 젬 드래곤의 비늘을 주었던 해에 가브리엘은 닳디닳은 펠트 여우 인형을 줌으로써 아사야를 기쁘게 했다. 어머니께서 무얼 좋아하시는지 야심차게 연구, 기획하여 유리 정원을 선물했을 적에는, 가브리엘이 난데없이 여행을 선물로 내놓은 바람에 상처 입은 엘라였다.
엘라의 눈으로 볼 적엔 분명 제 선물이 더 좋은 것 같은데, 아사야의 반응을 보면 아버지가 주는 선물에 더욱 기뻐하는 것이었다. 매해 생일날마다 그렇게 패배하고 나니 오기마저 고개를 들었다. 다음 선물은 반드시 제 것이 더 좋으리라 다짐하며 강해지는 것이었다.
그런 엘라의 경쟁의식에 아사야는 고개를 갸우뚱거릴 따름이었다. 홀로 생각할 적엔 저도 가브리엘도 경쟁심이 크지 않고 무던하니 패배에도 곧잘 순응하는데, 엘라의 성미는 어디에서 온 걸까 의문이었다.
무어라 농담하기 위해 아사야는 고개를 돌렸다. 습관적으로 제 옆자리를 올려다본 것이었다. 그러나 저와 함께 웃어 줘야 할 가브리엘은 보이질 않았다. 작은 한숨을 삼킨 뒤 아사야는 주방으로 향했다. 가브리엘이 좋아하는 요리로 성대한 저녁을 차려 달라 요청하기 위해서였다.
주방에 들른 뒤에는 느릿느릿 걸어 나가, 성문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엘라의 말마따나 금세 돌아올 가브리엘을 생각하며 기다린 것이었다. 그러나 오후가 되자 바람은 차가워지기 시작했고 앉은 자리는 돌로 빚은 의자인지라 엉덩이가 불편했다.
그렇게 한 시간쯤 버티고 나니 스스로가 바보처럼 생각되어, 아사야는 침실로 돌아왔다. 차라리 욕조 가득 따듯한 물을 채우고 촛불을 켜 두는 것으로 가브리엘을 반기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러나 욕조 주변의 훈기가 가라앉고 촛농이 모두 녹을 때까지도 가브리엘은 돌아오질 않았다. 깜빡 잠들었다가 눈을 떴을 때 방 안은 이미 어슴푸레했고, 아사야는 홀로 침대 귀퉁이에 누워 있었다.
두 눈을 끔벅거리기도 잠시, 아사야는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밤이 되도록 저에게 말도 없이, 가브리엘이 돌아오지 않았단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경중은 다를지라도 왕성의 존재 대다수가 아사야와 비슷한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그녀가 주문해 둔 멋진 식사는 트레이에 실린 채 침실 문 앞에 놓여 있었다. 당연히 가브리엘이 침실로 돌아왔을 것이라고 생각해, 2인분을 가져다 둔 것이었다.
“…….”
식어 가는 접시를 바라보다가, 아사야는 트레이를 뒤로 밀고 복도를 가로질렀다. 한달음에 도착한 곳은 다름 아닌 마구간이었다. 발 없는 사람처럼 자리보전하며 기다리는 일은 아무래도 성미에 맞지 않았다. 직접 말을 타고 가브리엘을 찾아야 답답함이 풀릴 듯했다.
‘진작 이럴걸 그랬어.’
말발굽소리를 크게 내며 바람을 가르자 그제야, 숨통이 트이는 듯했다. 묶었던 머리끈이 떨어져 머리칼이 깃발처럼 나부끼게끔 내버려 둔 채, 아사야는 고삐를 꽉 쥐고 엉덩이를 들었다. 차가운 바람도 제가 만든 것이라 생각하니 춥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게 반 시간을 내달리면 금세, 천공섬의 끝이 보였다.
“워, 워!”
하늘을 향해 질주할 기세인 말을 달래며, 아사야가 고삐를 세게 당겼다. 거친 숨을 몰아쉬는 말의 흥분을 가라앉히기까지 얼마의 시간이 필요했다. 말의 뒷목을 토닥이며 아사야는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작게 탄식했다.
‘이것 봐. 내 말이 맞지.’
그녀의 예상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쓸쓸한 모습으로, 가브리엘은 천공섬의 끄트머리 바위에 서 있었다.
단단한 바위는 긴 시간이 지났음에도 깎인 면 없이 가팔랐다. 가브리엘의 팔에 안겨 올랐던 바위 위를, 아사야는 부츠가 구겨져라 딛고 올랐다.
“가브리엘.”
두 손으로 바위 위를 짚으며 엉거주춤한 채 부르자, 멀리 별을 응시하던 가브리엘이 어깨를 흠칫 떨었다. 아사야는 놀란 듯 저를 돌아보는 연인의 얼굴을 바라봤다.
당황하는 것도 잠시, 성큼성큼 다가와 손을 잡아 주는 것을 보면 그는 제 드래곤이 맞았다.
“아사야. 왜 여기까지…….”
무어라 묻고자 입을 열었다가, 가브리엘은 두 눈을 끔벅거리며 말을 멈췄다. 멍하니 시간을 보내느라 밤이 된 줄도 모른 눈치였다. 그의 팔에 안겨 바위 위에 오르며, 아사야는 짧은 숨을 세차게 헐떡거렸다.
“가브리엘!”
그리고 외쳤다.
“대체 뭐가 그렇게도 고민이야? 기다리는 사람도 잊어버린 이유가 뭐냔 말이야. 너 요즘 이상해.”
아무래도, 그럴싸한 연극이란 가브리엘과 제 사이엔 성립되지 않을 모양이었다.
기분을 풀어 줄 식사도 행복한 척 가장하는 마중도, 야시시한 욕조 놀이도 소용없게 된 뒤에 아사야에겐 직구만이 남았다. 정리되지 않은 숨으로 화난 듯 쏘아붙이는 게 최선이었다.
“……아사야.”
그런 아사야를 달래려는 듯 가브리엘이 입을 열었고,
“너, 괜찮으니 신경 쓰지 말라고 말하기만 해 봐. 진짜 가만 안 둘 거야.”
그녀의 매서운 눈길에 못 이겨 다시 입을 다물어야 했다.
제 앞에만 서면 온순해지는 가브리엘이었다. 용병처럼 큰 덩치에 근육질 몸, 딱딱한 눈을 가진 그가 착한 태도를 취할 적엔 아사야도 한풀 기운이 꺾였다. 그에게 화내고 싶지 않았다.
사실, 화난 적도 없었다. 그저 걱정이 될 따름이었다.
“네가 걱정돼, 가브리엘…….”
다소 시무룩해진 기색으로, 아사야가 말했다.
“나마저 피하는 이유가 뭐야?”
그러자 가브리엘이 고개를 숙였다. ‘난 괜찮으니 신경 쓰지 마’,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이미 봉쇄당한 출구였다. 때문에 그로서는 솔직히 답할 밖에 방도가 없었다.
“몇 달 뒤면 네 생일이야, 아사야.”
가브리엘이 말했다. 낮고 조용한 목소리에 아사야는 두 눈을 둥그렇게 떴다.
“……네 생일이야. 스물한 번째 생일.”
제가 이해하지 못한 듯 보여 덧붙이는 속삭임까지 뒤따랐지만, 아사야는 단숨에 그의 감정을 쫓진 못했다. 오늘 그녀는 반 박자 늦었다. 그게 왜 그렇게 우울한 일이냐며 묻기 위해 입술을 연 뒤에야, 질문의 답을 아는 식이었다.
목소리는 내질 않고 아사야는 입술만 벙긋거렸다. 제 스물한 번째 생일이 어째서 가브리엘을 우울하게 만드는지, 그날에 왜 그렇게나 대단한 의미가 실린 건지, 아사야는 느리게 깨달았다.
두 번째 삶을 사는 그녀였으나 스물한 번째 생일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스물한 번째 생일이 오기 몇 달 전에, 아사야 세일산은 기름을 뒤집어쓰고 화형대에 올랐다. 수백의 눈길이 지켜보는 가운데 검게 타 버렸다.
아사야라는 사람의 스물한 번째 생일은 그녀에게도, 가브리엘에게도 처음이었다.
결국, 가브리엘의 고민은 저로 인한 것임을 아사야는 알아냈다. 갈증을 해소했음에도 그녀는 기쁘지가 않았다.
아샤라는 이름으로 살 적에 수차례, 지난 일을 되새김질하며 제 얼굴과 팔과 다리가 성한지 훑어보고 더듬어 댄 그녀였다.
어떤 날은 제 처지가 처량하고 슬프게 생각되어 스스로를 세상에서 가장 가여운 존재로 여기기도 서슴지 않았었다. 우울한 생각이 고개를 쳐들 때면 용의 갈빗대 아래에 숨어들어, 번데기처럼 몸을 웅크렸었다.
그러나 지나간 일을 하나둘씩 헤집으며 원인과 결과를 분석하는 일은 결코 그녀의 오늘을 낫게 하지 못했었다. 아버지가 떠나서, 가디가 거짓말을 해서, 야베스 세일산이 나빴기 때문에, 제 몸이 약했기 때문에…… 원인은 다양했고 결과는 단 하나였다.
장작더미에 묶인 채 불화살을 맞아 죽어야 했던 아사야 공주. 그녀 자신의 가장 아픈 시간으로 돌아오고야 마는 것이었다.
고아 아샤의 유년기는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어른의 머리와 기억들이 작은 몸에 갇힌 탓이었다. 그러다 보니 생각밖에는 달리 할 것이 없었다.
기억 속에 갇혀 아사야는 수십 가지 과거를 떠올렸고 수백 가지의 상상을 덧댔다. 그날 다른 말을 했더라면 어땠을까, 다른 사람과 어울렸더라면 어땠을까, 다른 길로 향하고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조금은 더 나아졌을까…… 하나같이 후회로 점철된 망상이었다.
그런 방식으로 지나간 일들을 분석하는 일은 무의미했다. 몇 년의 시간을 허비한 끝에 얻은 깨달음이었다. 그러고 나니 그녀 자신을 불쌍하게 여기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것만이 할 일의 전부였다.
그러나 가브리엘은 다른 모양이었다. 백 년 하고도 스무 해가 지난 오늘에 이르러서도, 가브리엘은 아사야를 가여워했다. 스물한 번째 생일을 맞이하지 못한, 원형탑 위에 제물처럼 놓인 채 불타 죽은, 슬프고 아팠던 어린 인간을 그는 마음에서 놓아주질 못했다.
그를 무어라 위로해야 할지 몰라 아사야의 입술은 얼어붙었다. 저로 인해 슬퍼하고 연민하는 그의 감정을, 아사야로서는 지울 방도가 없었다. 그가 저보다 더욱 저 자신을, 사랑하고 아끼기 때문임을 알아서였다.
아사야는 가브리엘에게로 한 발 두 발 다가갔다. 그리고 두 팔을 천천히 뻗었다. 그녀의 팔은 묶여 있지 않았고 피부는 차갑지 않았고, 옷 위에도 기름 따윈 묻어 있질 않았다. 덕분에 온 힘을 다해 제 연인의 허리를 안아 줄 수 있었다.
“두려워하지 마…….”
아사야가 말했다. 기이하게도, 그녀가 그렇게 속삭이기 전까지만 해도 가브리엘은 그 자신이 두려움에 떨고 있음을 몰랐다.
“나는 어디에도 가지 않아. 두 번 다신 네 곁을 떠나지 않을 거야. 알잖아……, 이젠 네가 보이지 않으면 내가 널 찾을 거야. 지금도, 봐…….”
가브리엘의 가슴에 고개를 묻으면, 아사야는 정리되지 않은 진심을 용기 내어 말할 수 있게 됐다. 떨어진 채로는 빳빳하게 굳어 움직이지 않던 혀가 그의 품 안에선 몹시도 유연해졌다. 말을 나눌 때도 그러했고, 입맞춤을 나눌 때도 그랬다.
“나는 영원히 너와 함께야, 가브리엘.”
용의 뺨을 쓰다듬으며 아사야가 속삭였다. 그의 입술에 제 입술을 맞대기 위해 그녀는 발뒤꿈치를 힘껏 올려야 했다. 휘청거리는 아사야의 몸을 가브리엘이 두 팔 벌려 끌어안았다.
그의 품에 안겨 아사야는 두 눈을 꾹 감았다. 가브리엘을 만난 뒤로 제가 그런 것처럼, 그 역시 저로 인해 오래된 악몽을 떨쳤으면 싶었다. 스물한 번째 생일이 처음이라는 이유로 두려움에 밤을 새우지 말고, 앞으로 있을 더욱 많은 ‘처음’을 후련하게 즐겼으면 했다.
그러자면, 아사야 자신부터가 강해져야 했다. 먼저 용기를 내어 저와의 처음을 받아 주기를 요청해야 했다.
제 허리를 끌어안은 가브리엘의 팔을, 아사야는 천천히 풀어냈다. 그 행동의 뜻을 모르는 듯 가브리엘은 더 강한 포옹으로 아사야를 실소하게 했다. 작은 웃음을 흘린 뒤 아사야는 다시금 그의 팔을 옷 벗듯이 풀어 내렸다. 그리고 긴 숨을 들이켰다.
“내 생일날에 전해 주려 한 건데…… 못 참겠어, 가브리엘. 너를 위해 준비한 게 있어.”
놀란 눈으로, 가브리엘은 아사야의 표정을 살폈다. 그의 어린 인간의 눈동자는 초를 다투며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제가 봐 온 그 어느 때보다 긴장하고 떨리는 기색이었다. 마치 어떤 큰일을 충동적으로 치르려는 사람 같았다.
“아사야?”
“가브리엘……, 너는 태어난 날이 기억에 없고 중요하지도 않다고 말했지만, 난 너에게도 생일이 있었으면 했어. 그리고 그날이…… 내 생일과 같다면 참 좋을 거라 생각했어.”
떨리는 손을, 아사야는 재킷 밑단에 문질러 닦았다. 한 주에 한 번은 꼭 걸칠 정도로 좋아하는 재킷이었다. 그 재킷의 안주머니로 아사야의 손이 천천히 흘러들어 갔다.
“너를 위해 준비한 선물이 있어……. 반드시 받아 주었으면 해. 네가 거절한다면 나는 저 절벽 밑으로 뛰어내릴 테니까.”
보통의 인간이라면 이때쯤 ‘선물’이 무언지를 깨닫고 기대할 테지만, 가브리엘은 달랐다. 아사야의 검은 용은 제 거절로 인해 그녀가 절벽 밑으로 뛰어내릴 수도 있다는 말에 더 놀란 것 같았다.
보라색 눈을 크게 뜨고 경악하는 가브리엘로 인해 아사야는 작게 웃었다. 그러고는 평평한 바위 위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가브리엘 나자렛.”
주머니 속에 오래도록 품어 온 소품을 꺼내며 아사야가 말했다. 단조롭고 깔끔한 디자인의 금테에, 젬 드래곤의 비늘이 박힌 반지였다.
“나와 결혼해 주겠어?”
청혼이 끝나기도 전에 가브리엘은 대뜸 고개를 끄덕였다. 아사야의 말이 무엇이건 간에 고개를 끄덕여야, 그녀가 절벽 밑으로 몸을 던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말의 뜻을 이해한 것은 그로부터 몇 초가 지난 뒤의 일이었다. 잠시간 가브리엘은 움직이지 않다가, 아사야의 여린 손이 쥔 반지의 의미를 알아차렸다.
“그래…….”
그리고 신음처럼 대꾸했다.
“그래, 아사야. ……그래.”
제대로 된 대답이 연거푸,
“그래, 좋아. 그러자.”
질리도록 이어져 나왔다.
.*. *. *. *. *. *.
제가 원하는 남자와의 결혼식은 필시 미소와 기쁨, 축복과 환호성, 꽃잎과 햇살만이 가득하리라 상상해 온 아사야였다. 그러나 현실은 좀처럼 그녀의 상상처럼 이어지질 않았다.
결혼식을 계획하는 단계에서부터 듬성듬성 공백이 생겼고, 그러한 공백들은 망상이 아닌 실체인지라 직접 머리를 쓰고 고민하지 않으면 채워지질 않았다.
야베스 세일산과 올린 것 이상으로 성대하고 화려한 결혼식을 아사야는 꿈꿨다. 그러자니 가브리엘과의 결혼식은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결혼식이 되어야 했다. 그녀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멋진 남편과 결혼식장의 테마, 아름다운 드레스와 꽃다발과 악단, 요리사와 케이크와 주례가 필요했다.
개중 당장 아사야가 가진 것은 ‘세상에서 가장 멋진 남편’이었고, 지금부터 준비해 나가야 할 것은 나머지 전부였다.
‘신경 써야 할 게 너무 많아. 머리가 터질 것 같아…….’
종이 더미 위에 고개를 묻은 채 아사야는 골머리를 끙끙 앓았다. 수소문하여 모은 자료들과 서너 가지 테마 계획서가 있긴 하나 그뿐, 며칠째 계획에는 실질적인 진척이 없었다.
도통 결혼식의 테마를 고를 수가 없고 서류에 실린 이름들 중 누구를 고용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이미 한 차례, 대륙에서 가장 화려한 결혼식의 신부였던 몸인지라 결정에 더욱 부담이 실렸다.
‘나…… 너무 잘 먹고 잘 쉬었나 봐.’
아사야는 본래 연회를 꾸리는 일에는 소질이 없음을 인정하기보단, 긴 시간을 편안히 쉰 탓에 일머리가 죽어 버렸다고 믿길 택했다.
‘폼! 백 년만 더 살다 가지 그랬어.’
한편으로는 곁을 떠난 조력자를 그리워하기도 잊지 않았다.
하기야 만에 하나 폼이 매우 장수하여 아직 살아 있다 한들. 아사야는 그녀를 제 결혼식에 초대하지 못했을 것이었다.
가브리엘과 아사야의 결혼식이란 천공섬의 국가적인 경사인지라, 이 땅에 머무르는 드래곤과 그들의 자식만이 자리할 수 있었다. 외지인은 왕성 안에 초대받기는커녕 이 섬의 흙 알갱이 하나 밟아 볼 수 없었다.
블란테에게만 해도 그랬다. 화이트 드래곤의 피가 흐른다고는 하나, 그녀의 혈통보다는 그녀가 대륙의 왕이라는 사실이 더욱 크게 작용하는 식이었다. 대륙의 왕을 초대하는 순간 천공섬은 더는 기밀 국가도, 안전지대도 아니게 될 터였다.
이 땅은 아사야의 집이기 이전에 드래곤들의 요새이자 둥지였다. 백여 년의 시간을 들여 완성된 국가에 아사야가 붙일 수 있는 참견이란, 사티로스의 망명을 허락한 것으로 충분했다. 그보다 과한 요구를, 제 딸이라곤 하나 이 땅의 왕에게 왈가왈부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아사야의 이성이 그렇게 말하는 동안 감성은 서운함에 시무룩해졌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녀는 제 두 손바닥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작은 손바닥 그림자가 만들어 놓은 컴컴한 그늘에 숨어 있다가, 아사야는 헛숨을 들이켰다.
“헉…….”
고아 ‘아샤’가 지어 놓은 자기만의 방에, 또다시 들어가고야 만 것이었다.
아사야는 이마를 짚고 한숨을 쉬다가, 이내 책상 위로 엎어졌다. ‘자기만의 방’에 들어서는 순간 그녀는 완벽한 공주님이 아니게 됐다. 그보다는 누군가 입다 버린 넝마를 입고 흙바닥에 앉아 놀던 고아 아샤와 가까운 존재였다.
“안 돼, 안 돼.”
정신을 차려 보려 제 뺨을 두들기며 아사야는 눈을 부릅떴다.
‘난 할 수 있어. 내가 누구야? 베데르의 딸, 대륙의 보물이었던 몸이시다, 이 말이야. 세상에서 가장 멋진 결혼식 따위는 일도 아니라고!’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며, 아사야는 소매를 걷어붙였다. 그러고는 넘치는 의욕을 담아 서류 더미를 향해 손을 뻗었다.
.*. *. *. *. *. *.
한 시간 뒤, 아사야의 상체는 침대 위에 엎어지고 두 다리는 바닥에 늘어진 채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의 주위에는 마치 살인 현장의 증거 자료처럼 보이는 결혼식 계획서 낱장이 흩어져 있었다.
언데드처럼 쓰러진 아사야의 작은 뒤통수를 가브리엘이 슬픈 눈으로 바라보았다.
“……내가 도울 수 있다니까.”
보다 못해 가브리엘이 말했다.
“그건 정말로 안 될 일이야, 가브리엘…….”
그러자 죽은 줄로만 알았던 그의 어린 인간이 말했다. 이불에 반쯤 파묻혀 아사야의 목소리는 아이의 웅얼거림처럼 불분명했다.
“내가 준비한 내 선물이야, 너는 가만히 평화를 즐기다가…… 행복한 신랑이 되어 주기만 하면 돼.”
행복한 신랑이라는 말이 어떤 주문이라도 된 것처럼, 아사야가 고개를 들게 만들었다.
‘그래, 행복한 신랑…….’
행복한 가브리엘의 행복한 결혼식. 그것만이 아사야의 목표였다. 세상 누구보다 사랑스러운 저만의 드래곤, 저만의 남자에게 완벽한 하루를 선물하는 것. 번쩍 머리를 들고 허리를 일으키며 그녀는 힘을 실은 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리고 외쳤다.
“모든 게 완벽할 거야. 나만 믿어, 가브리엘. 알지?”
가브리엘이 두 눈을 끔벅거렸다. 도대체 무얼 아느냐는 말인지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그러나 가브리엘은, 아사야의 고집에 대해서라면 아주 잘 알았다.
검술에 소질이 없다고 꼬집어 말했다가 엘라는 후들거리는 다리로 달려드는 어린 엄마의 검을 몇 번이고 막아 내야 했다. 제 엄마를 해치게 될까 봐 겁에 질린 엘라가 항복 선언을 할 때까지, 아사야는 멈추질 않았었다.
그런 아사야가 밝은 눈동자를 열 배로 빛내며 호언장담을 할 적에는 그녀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는 편이 신상에 좋았다.
“그래, 알아.”
그래서 가브리엘은 거짓말을 했다. 뭔지도 모를 질문에 ‘그래’, 답을 뱉고야 만 것이었다. 인간 사회에서는 거짓말에 경중을 매겨 ‘하얀 거짓말’과 ‘사기’를 가린다지만 드래곤에게 있어 그런 분류는 의미 없는 짓이었다. 특히나 오래도록 남들과 섞인 일 없이 제 성격을 지켜 온 가브리엘에게 거짓말이란 대단히 해로웠다.
태어나 처음 해 보는 거짓말에 그는 온몸에 소름이 오르고 심장이 벌렁댔다. 눈동자에는 지진이 일었고 인중에는 쥐가 났다.
드래곤이 식은땀을 흘리며 오싹한 죄책감을 맛보는 동안, 아사야는 표지가 닳아 버린 책을 여든 번째 펼쳤다. 드레스 원단을 사각형으로 잘라 종이 대신 이어 붙인 책이었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화려한 레이스를 훑어보는 아사야를 두고, ‘사실 거짓말을 했다’, ‘뭘 아냐고 물어본 거냐’ 고백해야 할까 가브리엘은 고민에 잠겼다. 심란한 얼굴로 보석함을 노려보는 예비 신랑을 훔쳐보며 아사야는 미소 지었다. 전전긍긍하는 가브리엘의 속이야 아사야에겐 손바닥 안의 책처럼 훤했다.
‘귀여운 가브리엘.’
그녀가 대륙을 덮친 역사적인 재앙을 귀여워하는 사이, 드워프와 사티로스가 도착했다. 짤따란 키에 오렌지색 수염, 두꺼운 종아리를 가진 드워프는 보석 세공사였고 염소의 머리에 뒤꿈치가 들린 발을 가진 사티로스는 드레스 재봉사였다.
제 분야에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지경으로 솜씨 좋은 두 존재는 몹시도 다른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드워프의 경우 작은 어깨를 활처럼 벌린 채 거만한 턱을 치켜들고 있었고, 사티로스의 경우 두 손을 공손히 모은 채 정수리의 뿔이 보이도록 고개를 숙인 채였다.
거두절미하고, 아사야는 그들을 불러 놓은 본론부터 내놓았다. 드워프의 불같은 성질을 알기 때문이었다.
“두 달 뒤 나의 생일날 결혼식을 올릴 거예요. 여러분에게 내 드레스와 장신구 제작을 맡기고 싶어요. 나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신부로 만들어 주었으면 해요. 그럴 수 있나요?”
그녀의 말에 사티로스가 무어라 말하고자 코를 움찔거렸다. 그러나 먼저 소리를 낸 쪽은 드워프였다.
“그럴 수야 있지. 마땅히 그럴 자격이 있는 신부라면 말이야!”
코웃음이 섞인 외침이었다. 그가 팔짱을 끼자 열 갈래로 땋은 오렌지색 수염이 팔뚝에 걸려 대롱거렸다. 오만방자한 태도에 가브리엘이 눈썹을 꿈질 올렸다. 그러나 아사야는 제 예비신랑이 보석 세공사를 해치길 원치 않았다.
“나는 이미 그런 신부였어요.”
다만 대꾸했다.
연회 계획에는 소질이 없을지언정, 사람을 대하는 일에는 일가견이 있는 아사야였다. 생전에 천지의 주인이자 변덕쟁이라던 사렙탄 세일산의 환심까지 얻은 그녀였다. 누군가를 제 뜻대로 움직이게 하자면, 상대의 성질을 이해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때문에 아사야는 드워프가 지닌 성질을 연구했다. 그들 역사를 둘러보면 정착과 이민의 기록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광산 주변에 자리를 잡았다가도, 이내 핍박받고 거처를 옮기기 십상이었다. 해묵은 감정이 있어 드워프들은, 기본적으로 타종족을 좋아하질 않았다.
오늘날 천공섬에 머무르는 이유 또한 딱히 드래곤에게 호감이 있어서는 아니었다. 드래곤이고 요정이고 인간이고 그들에게는 동등하게 짜증 나는 상대이지만, 적어도 드래곤만큼은 드워프를 굳이 꼽아 혐오하진 않기 때문이었다.
드래곤으로 말할 것 같으면 모든 이종족을 동등하게 깔보며 혐오하는, 차별 없는 차별주의자들이었다. 그러니 드워프의 입장에서야, 인간 세상에 부대끼며 사는 것보다는 귀한 광물이 넘치고 거처를 위협받을 일 없는 천공섬에 사는 것이 백배 나았다.
아사야는 그런 천공섬에 존재하는 유일한 인간이었다. 그것도 얼굴이 작고 팔다리가 가느다란, 어여쁜 인간이었다. 팔다리가 굵고 짧고, 체모가 많아야 미인이라는 드워프의 기준과는 반대되는 존재인 동시에 그들을 오래도록 핍박해 온 종족의 일원이니, 천공섬에서 가장 뛰어난 실력을 지닌 세공사가 그녀를 마음에 들어 할 턱이 없었다.
때문에 아사야는 그가 지닌 두 번째 성질을 이용했다.
“내 말은, 나를 이전보다 나은 신부로 만들어 줄 수 있겠느냔 거예요. 당신 실력이 내가 알던 세공사들보다 나은지 궁금하다고요.”
아사야가 말했다. 턱은 치켜들고 두 눈은 내리깐 그녀의 태도는, 제 결혼식에 쓰일 장신구를 부탁하는 신부와는 거리가 멀었다. 도도하고 고압적인 목소리에 사티로스뿐만 아니라 가브리엘까지 눈알을 굴릴 정도였다.
“지, 지금…… 지금 뭐라 했소?”
드워프가 겪은 모멸은 이루 말할 데 없이 컸다.
드워프가 지닌 ‘인간에 대한 싫증’을 수치로 표시하여 1이라면, ‘지는 것에 대한 싫증’은 그 수치가 1만 즈음 되었다. 특히나 우월하기를 태생적으로 타고난 분야인 보석 세공에 있어서라면, 인간에게 지느니 망치로 머리를 때려 자결하고야 말 것이었다.
“나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신부로 만들어 달라 말했어요.”
‘부탁드릴게요’, 그렇게 덧붙이고픈 것을 아사야는 겨우 참아 냈다. 그리고 최대한 떨림 없이, 고집 센 드워프를 노려보았다.
두 달 뒤 결혼식에서 입을 드레스와 걸칠 장신구는, 아사야 세일산이 되었던 날 치장한 물건들보다 더욱 화려하고 아름다워야 했다.
아사야 나자렛이 되는 날 그녀는 보통의 신부는 되고 싶지 않았다. 최고의 신부가 되어야만 제 원이 풀릴 것만 같았다. 일생에 있어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고 싶었고, 그런 모습으로 가브리엘의 곁에 서고 싶었다.
아사야의 도발에 드워프는 눈을 번쩍거렸다. 여태껏 수없이 많은 의뢰를 받아 온 그였지만 그녀와 같은 의뢰인은 처음이었다.
“하, 누가…… 그렇게 말하면 못 할 줄 알고?”
오렌지색 수염을 만지작거리며 드워프가 외쳤다.
“어떤 인간이 허접한 장신구를 만들어 줬나 모르겠지만, 어디 그 커다란 강아지 같은 눈이 튀어나오게 멋진 드레스 아머를 뽑아내 주지.”
지금 보니 그는 소리를 지르는 게 아니라, 원체 목청이 좋을 뿐인 모양이었다. ‘그 커다란 강아지 같은 눈’이라는 말을 할 적에 그는 아주 약간은 칭찬하는 어투였는데, 그 말마저 거친 목소리 탓에 화내는 것처럼 들렸다.
드워프의 승낙에 안도하며, 아사야의 눈동자가 재봉사 사티로스를 향했다. 그녀가 부탁의 말을 꺼내기도 전에, 사티로스는 구부정한 무릎을 꿇고 섬세한 두 손을 바닥에 붙였다. 그러고는 이마의 뿔이 바닥에 닿도록 머리 숙였다.
“성대한 결혼식에 어울리는 드레스를 만들어 낼 것을 감히 약속드립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신부로 만들어 드리겠어요.”
미소 지으며, 아사야는 사티로스의 손을 잡고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바짝 깎아 각진 손톱을 가진 반인반수의 손가락은 세상 무엇보다 부드러웠다.
남은 일은 치수를 재는 것뿐이었다. 사티로스와 드워프가 각자 줄자를 뽑아든 순간, 아사야는 어째서 가브리엘이 곁을 떠나지 않고 지켰는지 알게 되었다. 누구도 제 신부의 몸에 손을 댈 수 없게, 직접 재겠다며 줄자를 뺏어 든 것이었다.
아사야가 웃어 대는 통에 그녀의 허리와 가슴 치수는 연거푸 서너 번은 더 재야만 했다.
.*. *. *. *. *. *.
일생일대의 계획 앞에 두 달의 시간은 몹시 짧은 것이었다. 연회장 정비와 간단한 공사가 끝나고, 아사야의 드레스와 가브리엘의 정장 또한 준비를 마치기가 무섭게, 스물한 번째 생일의 아침이 밝았다.
‘두 번째 결혼식이야. 내가 원하는 남자와의 결혼식……. 모든 게 완벽해야 해.’
새벽부터 아사야는 정신없이 바빴다. 식장에 들어서기 전까지는 서로를 봐선 안 된다는 규칙에 따라, 아쉬운 듯 머뭇거리는 가브리엘도 쫓아낸 그녀였다. 엘라가 부른 드래곤들의 도움을 받아 머리칼과 얼굴을 치장했고, 남은 것은 제 드레스가 오기를 기다리는 일뿐이었다.
완벽에 완벽을 기하느라 보석 세공사와 재봉사는 오늘 해가 뜨는 순간까지 머리를 맞대고 전투적인 작업을 마쳤다고 했다. 한 차례 허리에 둘러 본 일이 있어 치수가 틀릴 걱정은 없었지만, 혹시나 싶어 몇 주간 식사를 반으로 줄인 아사야였다. 덕분에, 그녀는 체중이 조금 줄었고 꼭 그만큼 인내심이 사라진 상태였다.
초조함에 덜덜 떨리는 아사야의 무릎을 엘라의 큰 손이 잡았다.
“걱정하지 마세요, 어머니. 드워프의 작은 마차가 지금 막 성문을 넘었답니다. 드레스가 곧 도착할 거예요.”
엘라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내 늦지 않을 거라 했지!”
거친 목소리가 신부의 방을 뚫고 들어왔다. 고개를 들어 살필 적에, 아사야는 수염을 흔드는 드워프는 보지 못했다. 그가 짊어지고 온 드레스가 더욱 크고 풍성한 탓에, 드워프의 온몸을 가린 탓이었다. 키 큰 사티로스가 드레스 뒷자락을 두 손으로 받쳐 든 채 곤란한 듯 종종걸음을 하고 있었다.
공을 들인 만큼이나 드레스는 완벽했다. 오늘, 그녀는 백의의 신부가 아니었다. 그보단 붉은 드레스를 걸친 전사에 가까웠다.
어깨를 내놓은 디자인의 드레스는 붉은 천으로 만들어졌고, 상체에는 철사와 가죽으로 지은 코르셋 대신 드레스 아머가 채워졌다. 깃털 무늬로 세공된 티아라는 만지면 부드럽게 무너질 것처럼 섬세한 보석이었다. 아름다우면서 연약하지 않았고, 화려하면서도 군더더기 없는, 아사야의 웨딩드레스는 세상에서 가장 강인한 드레스였다.
사티로스의 도움을 받아 티아라와 드레스, 아머와 팔찌까지 복착을 마치고 나니 아사야는 날아갈 듯 기뻤다. 거울 속 제 모습을 바라보며 감탄하기도 오랜만의 일이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든 것이 황홀할 지경으로 좋았다.
“구두.”
저도 모르게, 아사야가 왕족처럼 읊조렸다.
“……좀 신겨 주시겠어요?”
뒷말은 민망함에 붙인 소리였다. 애매하게 늘어진 요청에도 사티로스는 의심 없이, 아름다운 상자에 보물처럼 실어 온 구두 한 쌍을 꺼냈다. 발끝과 뒤꿈치가 직각에 가깝게 꺾이도록 높은 구두 위에도 티아라와 같은 깃털 장식이 박혀 있었다. 앉았다 날아갈 새처럼, 겉으로 보기에 그 구두는 몹시 가벼워 보였다.
그러나 구두에 두 발을 꿰어 넣은 순간, 아사야의 육신이 ‘왜 나를 배신하느냐’며 고통으로 소리치기 시작했다.
‘헉…….’
스무 살이 된 이후 거울만 수천 번은 더 들여다본 아사야였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그녀의 생김은 전과 한 차의 오차도 없이 같았다. 그러나 발만큼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스물한 해, 이번 생애의 평생을 살아오며 구두라고는 신어 본 역사가 없는 아사야의 발바닥은 부드러웠고 새끼발톱은 여린 원형이었다. 무희인지 기사인지 고문을 당한 사람인지 알 길이 없을 만치 작은 돌덩이 같던 것이 아사야 공주의 새끼발가락이었다. 마모되어 사라진 발톱과 단단히 박인 굳은살이 그녀를 연회장에서도 꼿꼿이 서게끔 지탱시켰었다.
그때의 자신을 떠올리며 구두를 주문한 게 실수였다. 그마저도, 가브리엘의 큰 키에 어울리게끔 맞추느라 굽의 높이만 4델랑-약 11cm-이 넘어 가파른 구두였다.
숨을 참고 어떻게든 서 보고자 노력했으나, 문제는 호흡이 아니었다. 문제는 말도 안 되게 생겨 먹은 구두 자체에 있었으며, 그런 구두를 상습적으로 신고 다닌 지나간 공주의 인생에 있었다. 이대로 십 분만 더 서 있다가는 발목이 끊어지고 발가락이 부러질 것 같았다.
그래도 아사야는 걸어야만 했다. 어떻게든 식장까지 도착하여, 제 남편을 향해 직선으로 스무 걸음을 걸어야 했다.
‘그 정도는 할 수 있을 거야. 그 정도는 할 수 있어…….’
다짐인지 자기 세뇌인지를 하며 아사야는 두 눈을 깊이 감았다. 그리고 긴 숨을 ‘후우’, ‘후우’ 내쉬었다. 그런 그녀의 태도를 결혼식에 대한 긴장으로 읽었는지, 사티로스를 비롯한 손님들이 자리를 비워 주겠다며 방을 떠났다.
홀로 남아 아사야는 붉어진 얼굴을 향해 손부채질했다. 덜덜 떨리는 무릎을 억지로 움직여, 아사야는 비틀거리며 중심을 잡았다. ‘스무 걸음을 제대로 걷기’란 말로만 쉬운 일이었다. 첫발을 내딛는 것과 동시에 그녀는 카우치를 향해 나자빠졌다.
“악…….”
작은 비명소리보다는, 제 몸을 두른 아름다운 드레스 스커트가 찢어지는 소리가 더욱 컸다. 아사야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것과, 미친 듯이 뛰어 대는 감각을 동시에 느꼈다.
‘아냐, 아냐……, 아닐 거야.’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그녀는 카우치에 얼굴을 묻고 숨을 골랐다. 부디 드레스가 찢긴 것이 아니기를, 찢어졌다 해도 내의가 잘못된 것이기를 바라며 고개를 돌리자, 아름다운 수가 놓인 붉은 드레스를 뚫고 나온 구두 굽이 보였다.
황급한 손길로 아사야는 드레스 주름을 들춰 보았다. 길게 나간 올의 길이가 심상치 않게 길었다. 수습해 보려 이리저리 덮는 와중에도 작은 자극을 견디지 못해 찢긴 범위가 슬금슬금 넓어져 갔다. 넘어지고 부딪친 바람에 멍든 종아리가 고스란히 드러나도록 큰 구멍이었다.
두 달간 밤낮을 새워 가며 사티로스가 만들어 준 드레스였다. 다루기 까다로운 천을 당장에 꿰맬 수도, 접어 감출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바닥에 주저앉은 채 아사야는 황망한 얼굴로 드레스를 내려다보았다.
“어떡하면 좋아…….”
크게 당황한 탓에 그녀는 누구를 부르거나 도움을 청할 수도 없게 되었다. 바닥에 나자빠진 자세 그대로 생각도 동작도 멈춰 버린 것이었다. 멍하니 두 눈을 끔벅거리는 게 할 수 있는 행동의 전부였다.
‘완벽한 신부가 되겠다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었나?’
이내 자괴감이 아사야를 향해 달려들었다. 몇 주를 쫄쫄 굶은 탓에 배에서는 눈치 없이 꼬르륵 소리까지 났다. 도대체 오늘이 뭐라고 이렇게 고생을 했나 싶다가도, 가브리엘과의 결혼식이라 생각하니 소름이 끼침과 동시에 정신이 돌아왔다.
어떻게든, 무엇이건 해내야만 한다는 생각에 아사야는 허우적거리며 벗겨진 구두를 찾았다. 왼쪽 구두는 멀쩡한 모습으로 그녀의 발에 끼워져 있었지만, 오른쪽 구두는 몸체는 바닥에 떨어지고 굽은 드레스에 박힌 채였다.
“…….”
조용히 구두 굽을 쥐고 내려다보는 아사야의 목 뒤로 발소리가 들려왔다. 저벅거리는 소리에 아사야는 고개를 깊이 숙였다. 준비를 마치고 나올 그녀를 식장까지 에스코트할 존재가, 하나 있었다.
“엘라, 나 큰일 났어…….”
아사야가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다가온 이는 그녀를 번쩍 안아 들어 소파 자리로 옮겨 놓았다. 그리고 외쳤다.
“다쳤어?”
놀란 눈을 깜빡거리며 아사야는 눈앞에 선 가브리엘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제 비늘처럼 까만 정장을 둘러 입은 가브리엘은 어느 때보다 훤한 모습이었다. 머리칼을 멀끔히 걷어 넘긴 덕에 잘생긴 이마와 눈썹이 평소보다 돋보였으며, 벌어진 어깨 끝에서 직각으로 떨어지는 재킷 주름은 그의 체구를 더욱 건장해 보이게 했다. 인간이었더라면 ‘발락’이 아니라 ‘대륙에서 가장 멋있는 남자’로 이름을 날렸을 수준이었다.
잠시간 넋을 놓고 그의 외모를 감상하다, 아사야는 뒤늦게 외쳤다.
“가브리엘? 아, 아직 신부를 봐서는 안 된단 말이야. 왜 여기까지…….”
무어라 그를 돌려보내려던 말도 허탈한 한숨으로 끝맺었다. 이제 와 신랑이 신부를 보건 말건 그런 규칙이 무슨 소용인가 싶었다. 드레스를 찢어 버리고 구두 굽마저 망가진 이상, 완벽한 결혼식은 이미 물 건너간 셈이었다.
저도 모르게, 아사야는 두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었다. 긴 숨을 내쉬느라 들썩거리는 그녀의 작은 어깨를 가브리엘의 손바닥이 천천히 쓸었다. 제 어린 인간이 자기만의 방에 들어갈 때면, 쓰다듬는 것이 그 나름의 노크였다.
한참 시간이 지난 뒤에야 아사야는 얼굴을 가린 손을 치웠다. 코끝이 빨개지고 두 눈에는 눈물이 맺힌 채였다.
“미안해, 가브리엘. 너무 긴장돼서 어젯밤엔 한숨도 잠을 못 잤어……, 내 피부도 머리카락도 드레스도 구두도 전부 이상해. 완벽한 결혼식을 올리고 싶었는데, 나 때문에 다 망쳤어…….”
슬픈 목소리로 전한 탄식을, 가브리엘은 묵묵히 들었다.
“그냥 결혼식이어도 괜찮잖아. 왜 완벽해야 한다고 생각했어?”
가브리엘이 물었고,
“너랑…… 더 잘하고 싶었어.”
아사야가 고백했다.
“야베스 세일산보다 더…… 너와 더 잘하고 싶었어. 나에겐 두 번째지만, 너에겐 첫 번째 결혼식이니까. 내가 원하는…… 내가 사랑하는 남자랑 더…… 더 멋진 결혼식을 올리고 싶었어.”
말끝에 흐느낌이 묻어났다. 원망할 대상을 찾지 못해 아사야의 마음이 이리저리 흔들거렸다. 눈동자에 고인 눈물 또한 그 떨림을 따라 일렁대고 있었다. 참지 못해 한 방울, 눈물이 뺨을 타고 떨어지자 아사야는 황급히 그 눈물을 닦았다. 울상이 된 얼굴로 식장에 들어설 순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그 순간, 가브리엘이 제 재킷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그러고는 ‘북’ 뜯어지는 소리가 나도록 봉제선을 찢어 버렸다.
돌발적인 행동에 아사야는 작은 비명을 질렀다. 두 눈을 크게 뜬 채, 그녀는 두 손으로 제 입을 틀어막았다. 그리고 제 손으로 결혼식 옷을 망가뜨린 신랑을 바라보았다.
“너…… 뭐…… 뭐 한 거야, 가브리엘?”
아사야가 묻자, 가브리엘이 말했다.
“내 옷도 찢어 버렸어. 이러면 너랑 똑같지.”
“왜…… 왜?”
“나는 널 따라 할 거야. 너는 내가 아는 것들 중 가장 완벽하니까.”
가뿐한 대답에는 거짓 한 점 없었다. 꿈에도 생각지 못한 말이었다. 그러나 가브리엘로부터 그 말을 듣는 순간, 아사야는 그 문장이 두 달 내내 자신이 듣고 싶어 했던 이야기임을 깨달았다.
이내 아사야의 잇새로 작은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허탈하고 기쁜 소리였다. 고개를 숙인 채 어깨를 들썩이며 숨소리를 내는 그녀가 웃는 것인지 우는 것인지 알기 위해, 가브리엘이 목을 뻗었다. 그러자 아사야의 시야에 그의 두 눈이 가득 찼다.
보라색 눈동자에 비친 제 모습은 과연 완벽한 신부였다. 그의 눈동자를 통해서만 볼 수 있는, 사랑스러운 제 얼굴을 아사야는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속삭였다.
“도망가자.”
두 손 뻗어, 아사야가 가브리엘의 큰 손을 잡았다. 그리곤 오른발에 매달린 구두마저 벗어 버렸다. 소파에서 내려와 예비신랑의 손을 끌고, 아사야는 복도 밖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예비신부를 말리는 대신 가브리엘은 그녀와 함께 달리길 선택했다. 그러면서 그는 정신없이 바빴다. 어린 인간이 파도처럼 일렁거리는 드레스 스커트를 밟지 않게끔, 틀어 올려 움켜쥐는 그는 신랑이라기보다 신부 들러리처럼 보였다.
식장에 모든 인파가 몰려든 덕분에 두 사람은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고 성 밖으로 빠져나왔다. 멀리, 결혼식장에서 악단의 합주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신랑도 신부도 식장으로는 들어설 일이 없었다. 그들 발이 닿은 장소는 무너진 신전 뒤편에 놓인, 용들의 묘지였다.
웃음소리를 참느라 애쓰며 아사야는 풀을 밟았다. 왕성에서 완벽하게 벗어난 뒤에야 그녀의 입 밖으로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배가 당기도록 웃으며 아사야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무지개에 홀린 아이처럼 저를 보는 가브리엘이 보였다.
언젠가 백여 년도 더 된 기억 속에서, 아사야 세일산이 알몸으로 이곳을 거닐었었다. 가브리엘은 그녀와 처음으로 몸을 섞었던 장소를 여전히 기억했다. 푸른 잎사귀가 정령의 손자국처럼 남은 풀 무더기 동굴 속으로, 그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숨어들었다.
무릎을 웅크리고 앉을 적에 아사야의 심장은 기분 좋게 콩닥거렸다. 머리칼과 드레스 장식이 죄 흐트러진 채 쪼그려 앉는 아사야는 스물두 살의 얼굴을 한 어린 소녀였다. 숨을 헐떡대는 그녀의 두 뺨은 발갛게 달아올랐고 입술 위로는, 가지런한 이를 죄 드러내도록 큰 웃음이 걸려 있었다.
“가브리엘, 손 줘…….”
아사야가 하얀 손바닥을 내밀자 가브리엘이 묵묵히 제 왼손을 그녀의 손 위에 올렸다. 그의 딱딱한 손가락을 소중한 무어라도 되는 양 감싸 쥔 채, 아사야가 말했다.
“가브리엘 나자렛, 나 아사야를 신부로 맞이하여…….”
“그래.”
“아니지, 가브리엘! 벌써 대답하면 어떡해.”
가브리엘은 제 어린 인간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오래도록 그래 왔듯이 그녀의 작은 머리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고 어린 새의 부리 같은 입술은 저 혼자 몹시도 바빴다.
늘 무언가 즐거운 일을 꾸미느라 분주한 그녀 앞에서, 가브리엘은 스스로를 바보라고 여길 때가 많았다. 그녀 앞에만 앉으면, 그는 그녀의 눈과 코와 입술, 뺨에 걸린 미소를 훔쳐보는 것 외엔 어떤 일도 할 수가 없었다.
“결혼식 서약이란 말이야. 여생을 내건 계약이나 다름없이 중요한 순간이야. 다 듣고 신중하게 대답해야 해. 알았지?”
아사야가 소곤거렸다. 그 말이 제 귓바퀴를 간질이는 느낌에 가브리엘은 단단한 어깨를 살짝 구겼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가브리엘 나자렛, 나 아사야를 신부로 맞이하여…….”
두 번째, 그들만의 결혼식 서약을 읊으며 아사야는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습관적으로 ‘그래’라고 말하려는 가브리엘의 입술을 노려본 것이었다. 가까스로 가브리엘이 대답을 참아 내자, 아사야는 뒷말을 꾸렸다.
“……영원히 곁을 떠나지 않으며 사랑하고 아낄 것을 약속합니까?”
“그래.”
마침내 가브리엘이 서약했다. 그러자 아사야는 제 손바닥에 감추었던 반지를 꺼내 가브리엘의 손가락에 끼워 주었다. 베데르 아졸의 유품이 드래곤의 약지 위에 놓였다.
그녀를 따라, 가브리엘은 재킷 안주머니를 뒤적였다. 조그만 주머니 속에는 아사야의 치수에 맞는 작은 반지가 들어 있었다. 두 달간 이 반지를 간직하며 몇 번이나 만지작거렸는지 몰랐다. 제게는 새끼손가락에도 들어가지 않게 작은 탓에, 혹여 아사야가 치수를 잘못 잰 것은 아닐까 몹시도 궁금했었다.
무턱대고 반지를 끼워 주려 하자 아사야가 그의 손을 만류했다.
“서약을 말할 마지막 기회인데, 놓치지 말아야지. 내게 원하는 것이라면 무어든 좋아. 어떤 조건이든 내걸어도 돼.”
속삭임에, 가브리엘은 입을 다문 채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아사야.”
그리고 말했다.
“사랑해.”
이제 다물린 입술은 아사야의 것이 됐다. 심장은 벌겋게 끓어오르고 머릿속은 새하얗게 번져 버렸다. ‘이것으로 두 사람을 부부로 임명합니다’, 간단한 문장 하나조차 떠오르질 않았다. 대신에 아사야는 뜨거운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가, 가브리엘의 입술에 제 입술을 힘껏 맞대며 문질러 댔다.
넘치는 애정을 견디기가 벅찼다. 흉곽 밖으로 생기가 끓어 나와 넘치는 듯했다. 행복한 나머지 죽어 버릴 수도 있겠다는, 무서운 생각마저 들었다.
“사랑해.”
비명처럼, 아사야가 외쳤다.
“사랑해, 가브리엘. 사랑해…….”
두 번 다시 외롭고 싶지 않았다. 두 번 다시 슬프고 싶지 않았으며, 두 번 다시는 헤어지고 싶지 않았다.
“사랑해…….”
앵무새처럼 번복되는 서약을 들으며, 가브리엘은 아사야의 몸을 감싼 복잡한 드레스를 벗겨 냈다. 그가 제 옷가지를 사탕 포장지 벗기듯이 거칠게 뜯어내는 것을, 아사야는 황홀한 듯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이미 알았다, 가브리엘의 흥분한 눈동자와 급한 숨결, 다급한 손짓 끝에 제게 올 것이라곤 기쁜 환희와 달콤한 애정뿐이라는 걸. 가슴을 맞대고 살을 부비면 온몸이 볕에 말린 이불처럼 보드라워지는 듯했고 서로의 품을 파고들며 애정을 갈구할 때면 온전한 세계에 도착한 아이처럼 천진난만해지곤 했다.
백하고도 스무 해의 세월이 가브리엘의 몸에 묻어 있었다. 늙지 않는 몸에 회복되지 않는 흉터가 수없이 남았다. 갈라진 흉터 위에 아사야의 보드라운 입술이 봄비처럼 닿았다. 그 순간 가브리엘이 느낄 수 있는 감정은 행복, 오직 그뿐이었다.
볕에 그을린 듯 짙은 피부 아래서 아사야가 두 팔을 활짝 벌렸다. 창백하리만치 하얀 가슴에 가브리엘이 고개를 묻으며 안겼다. 그러고는 그녀의 젖꼭지를 소리 나게 빨았다.
“아!”
아사야의 허리가 놀란 듯 들썩거렸다. 배를 내밀고 헐떡거리면서, 아사야는 가브리엘의 빳빳한 몸을 팔다리로 포박하듯 끌어안았다.
서로 간에 이마를 맞댄 채 열이 오른 시선을 마주하길 한참, 가브리엘이 발딱 선 제 성기를 쥐고 아사야의 밑에 가져다 댔다. 흥분한 탓에 축축해진 살점이 미끌거리며 맞물렸다.
“가브리엘, 나…… 나 처음이니까…….”
아사야가 무어라 말을 완성하기도 전에,
“꺅!”
가브리엘이 성난 듯 부푼 남성을 밀어 넣었다.
“학……, 아, 앗, 가브리엘!”
무릎이 벌어진 채 헐떡거리며 아사야가 소리를 내질렀다. 주먹으로 가브리엘을 아주 세게 때리면서 그녀는 눈앞이 하얗게 번졌다가, 이내 빨갛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이마까지 새빨개진 채 고개 젖힌 아사야에게 가브리엘이 흥분한 입맞춤을 마구잡이로 남겼다.
대번에 가브리엘은 제 성기를 끝까지 쑤셔 넣었다. 집어넣어 박다시피 하는 동작에 아사야의 허벅지가 팽팽해졌다.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아사야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그가 세게 밀칠 때마다 아사야의 부푼 가슴이 위아래로 흔들거렸다.
갑작스레 밀려드는 감각에 아사야는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 심장이 쿵쾅거리며 내달렸고 눈앞에 불똥이 튀는 듯했다. 밑 배가 뻑뻑하게 꽉 찼고 여린 성기가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아, 아, 윽…….”
다리 사이가 화끈대며 뜨거워지는 감각에 아사야가 이를 악물었다. 가브리엘의 흥분한 숨이 귀에 닿자 자꾸만 소름이 올랐다. 허벅다리에 경련이 일고 잇새로는 제 것이 아닌 듯한 신음성이 새어 나갔다.
“아, 아파……, 응, 흐윽.”
아사야는 있는 힘껏 가브리엘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그러고는 ‘꿍’ 소리가 나도록 그의 이마에 제 이마를 붙였다.
“나…… 나 아파, 가브리엘!”
그러자 흥분한 개처럼 달라붙기 바쁘던 가브리엘이 우뚝 멈췄다. 놀란 몸이 순식간에 굳었다. 시선을 내려 아사야의 아래를 살필 적에, 흥건한 체액에 섞여 분홍색으로 배어 나온 피를 볼 수 있었다. 아사야가 흘린 피 냄새에 가브리엘은 전신의 털이 비늘처럼 삐죽 서는 듯했다.
그가 입을 벙긋거리며 두 눈을 휘둥그레 뜨자, 오히려 미안해지는 쪽은 아사야였다. 아무래도 가브리엘은 단 한 번도, 처녀인 인간과 관계해 본 적이 없는 모양이었다.
“바보…….”
할딱할딱 숨을 몰아쉬며 아사야는 가브리엘의 두 뺨을 손바닥으로 감쌌다. 그의 귀를 꼬집듯이 잡고, 억지로 눈을 맞추게 하자 어느새 눈물에 적신 보라색 눈동자가 보였다.
“더…… 많이 키스해 주고 더 많이 만져 준 다음 해야지.”
어린아이 다독이듯이 아사야가 속삭였고,
“미안해.”
가브리엘이 울먹였다.
저보다 꼭 머리 두 개만큼은 키가 크고 두껍기로는 허벅다리가 제 허리만 한 주제에 눈물을 쉽게 보이는 게 아사야의 남편이었다. 백여 년 만의 관계에 달아올라서는 앞뒤 가리지 못하고 달려든 그녀의 연인이었다. 그런 주제에 ‘미안해’ 하며 울먹대는 모습이 너무 좋아 아사야는 비명을 지르고만 싶었다.
우물쭈물하며 가브리엘은 몹시 조심스럽게 제 핏발 선 남성을 아사야의 밑에서 빼냈다. 체액과 섞여 나온 피는 그리 많지 않았다.
“아파, 아사야?”
저 역시 흥분되어 많이 아프진 않았다고, 또 네 것이 워낙 커서 어차피 피는 흘렸을 거라고 알려 줄까 하다가 아사야는 입을 다물었다. 나중에 진실을 알고 나면 가브리엘이 절 두고 야속하다 생각할지도 몰랐다. 그러나 지금으로서는 조심조심 애지중지하며 제 밑을 살피는 눈짓이 좋았다.
“응. 호 해 줘.”
“……호.”
아사야의 밑에 대고 가브리엘이 작게 바람을 불었다. 간지러운 감촉에 아사야는 무릎을 오므렸다.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꾹 눌러 참으며 아사야가 말했다.
“처음부터 다시 해 보자.”
더 많이 키스해 줘…… 그렇게 속삭이며 입술을 내밀 때쯤,
“꺅!”
가브리엘의 고개가 아사야의 다리 사이로 파고들었다.
“가브리엘, 거기……, 거기가 아니라…… 난 그런 게 아니라…….”
허둥지둥 팔을 뻗어 아사야는 가브리엘의 머리를 밀어내려 애썼다. 그러나 그녀의 석상 같은 남편은 끄떡도 않았다. 오히려 그 손길을 머리를 쓰다듬는 동작으로 착각한 듯, 발갛게 부은 살결에 더욱 자신감 있게 입술을 문질렀다. 그리고 맹렬한 키스를 은밀한 부위에 퍼부어 댔다.
얼굴을 새빨갛게 붉힌 채 수치심에 물드는 쪽은 아사야였다. 잊고 있었다, 가브리엘이 어떤 키스를 좋아하는지…… 풀숲으로 덮인 천장을 올려다보며 아사야는 신음을 삼켰다. 그의 잘생긴 코가 감춰진 살결에 닿고 혓바닥이 피를 핥는 짐승처럼 파고드는 통에 죄책감이 그녀의 가슴에 불을 피웠다.
“아, 가브리엘, 그만, 그만…….”
고개를 내젓고 허리를 비틀며 아사야가 두 다리를 버둥거렸다.
“그만, 응? 그만…….”
애원하는 소리가 신음처럼 울렸다. 말 잘 듣는 드래곤답게 가브리엘은 다음 순서를 기억해 냈다. 뜨겁게 달아오른 살 틈새로, ‘더 많이 만져 주기’ 위해 그는 손가락을 비집어 넣었다.
“…….”
입을 꽉 다물고 아사야가 고개를 뒤로 젖혔다. 키가 크고 뼈대가 굵은 만큼이나 가브리엘은 손가락도 길고 굵었다. 그가 쪽, 쪽 입을 맞춰 가며 손가락으로는 밑을 쑤셔 대자 아사야의 몸은 더 이상 주인의 말을 듣지 않았다. 멋대로 발끝까지 힘이 들어가 다리가 빳빳해졌고, 허리는 제멋대로 자꾸만 휘었다.
“아, 응, 응…….”
빨갛게 물든 얼굴을 감춰 보려 아사야가 고개를 이리저리 내저었다. 쪽쪽대며 입 맞추는 달콤한 소리가 제 다리 사이에서 나는 상황은 도무지 익숙해지려도 익숙해지지가 않았다.
흥분한 채 학학거리는 아사야의 몸짓에 가브리엘의 호흡도 덩달아 더워졌다.
“아사야.”
이제 다시 해도 되겠냐는 듯 그가 허락을 갈구하기를,
“아사야…….”
들뜬 숨으로 절박하게 헐떡거리며,
“응?”
아이처럼 애원해 댔다.
“그래, 가브리엘……, 이, 이제…….”
발가락으로 그의 등을 긁으며 아사야가 바삐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해도 돼, 넣어도 돼…….”
그제야 가브리엘이 또 한 번 그녀를 덮쳤다. 그의 허리가 제 다리 사이로 파고들자 아사야는 아랫입술을 짓씹으며 손을 내렸다. 제 다리 사이를 손바닥으로 가리기 위해서였다.
성난 듯 벌겋게 흥분한 성기를 들이민 채 가브리엘이 숨을 씩씩거렸다. 잔뜩 안달 난 그는 채근하듯이 아사야의 손에 대고 성기 끝을 꾹꾹 누르다가, 겨우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맞췄다.
그만큼이나 빨개진 얼굴로, 아사야가 속삭였다.
“살살…….”
“응.”
“약속해?”
“약속해. 빨리…….”
“정말이지?”
“정말이야. 제발, 아사야.”
검은 용이 끓는 숨으로 애원한 뒤에야 아사야가 손을 치웠다. 어린 인간의 허락이 떨어지자 가브리엘은 허겁지겁 그녀의 입술에 제 입술을 겹쳤다. 그러고는 아플 지경으로 발기한 것을 예민하고 여린 피부 사이로 집어넣었다.
그리고 가브리엘은 생각했다, 역시 무엇이건 아사야의 말이 전적으로 옳다고. 조금 전과 달리 아사야의 몸이 부드럽고 축축하게 제 것을 받아들이고, 기쁜 듯 배를 내밀고 파르르 떠는 것을 내려다보면서.
“아, 가브리엘, 응…….”
평소보다 높은 소리로 신음하는 아사야의 입술과 턱, 뺨에 가브리엘은 키스를 남겼다.
뜨겁게 달아오른 몸을 맞대고 더 이상 가까워질 수 없을 지경으로 서로를 끌어안자 그제야 모든 것이 완벽해졌다. 가슴을 뚫고 빠져나갔던 심장의 파편을 마침내 되찾은 기분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심장이 쿵쾅대는 것을 이제야 느낄 수는 없었다. 살아 있다는 감각이 이렇게나 치열하게 전신을 에워쌀 순 없는 노릇이었다.
그녀의 몸 곳곳을 빨고, 핥고, 취하면서 가브리엘은 온몸이 저릴 정도로 큰 애정을 느꼈다.
“사랑해.”
넘치는 애정을 주체 못 해 아사야의 어깨를 세게 깨물었다가, 또 핥아 주며 가브리엘이 고백했다.
“사랑해, 아사야.”
웅변을 토하듯 큰 소리였다.
“나는 네 검은 용이야……, 네가 나의 어린 인간이듯이.”
그러고는 언젠가 아주 먼 옛날, 어느 공주님에게 들었던 고백을 따라 읊었다.
“내 연인은 오직 너뿐이야…….”
그 순간 아사야는 깨달았다. 이제는 모든 꿈을 이루었음을. 저를 따라 결혼식 정장을 찢어 버린 남자의 손을 잡고 멀리 도망쳐, 이름 모를 용이 남긴 수풀 동굴 안에서 애정을 나누기란 어느 누구도 따라 할 수 없는 완벽한 결혼식이었다.
.*. *. *. *. *. *.
어깨 봉제선이 뜯긴 재킷을 담요 삼아 덮고 누운 아사야를, 가브리엘이 부드럽게 잡아끌었다.
“이리 와.”
조금 전까지만 해도 굶은 개처럼 홀린 듯 제 몸을 핥아 대던 그를 따라, 아사야는 다소 어리둥절한 채 몸을 일으켰다. 다리가 후들대는 탓에 바로 서는 데에 제법 시간이 걸렸다. 가브리엘은 제 재킷을 탈탈 털어 아사야의 어깨에 걸쳐 주고는 수풀 동굴 밖으로 몸을 빼냈다. 그러곤 멀리 갈 것 없이 바로 그 자리에 제 몸을 주저앉혔다.
약속된 자리라는 양 아사야는 그의 허벅다리에 엉덩이를 붙였다. 그의 품에 기대며 힘 빠진 몸을 붙이자, 가브리엘이 그녀의 턱 끝을 손으로 잡고는 살짝 각도를 틀어 주었다.
멀리, 왕성을 채운 빛이 보였다. 색색의 빛이 성벽 안에 뭉쳐 있다가, 대여섯 개씩 줄을 이뤄 화살처럼 하늘을 가르고 오르기 시작했다. 가장 높은 자리에 도달해 빛줄기는 꽃봉오리처럼 활짝 폈다. ‘펑’, 기분 좋은 소리를 내며 빛이 사방으로 터져 나갔다.
불꽃이 사라진 자리에 또 다른 빛줄기가 쏘아 붙여졌다.
아사야는 입을 벌린 채 그 광경을 올려다봤다. 마법사들이 쏘아 올린 불꽃놀이였다.
“너무 예뻐…….”
시선을 하늘에 고정한 채, 아사야는 가브리엘의 팔뚝을 아주 세게 껴안았다.
함께 나눈 꿈이 있었고 그 꿈 안의 축제가 있었다. 마을에서는 흥겨운 노랫소리가 들려오고, 하늘에는 마법사의 폭죽이 터지고, 저는 운명의 첫사랑과 처음으로 마주하는 꿈.
만약 그 꿈 안에 들어온 것이라면, 아사야는 영원히 깨고 싶지 않았다. 가브리엘이 준비한 불꽃놀이는 그런 아사야의 소망이 이미 이뤄졌다고 말하고 있었다. 오래된 꿈이 현실이 되었다고, 아주 나중의 일로 그려 놓은 소원이 오늘이 되었다고.
“고마워. 정말 멋진 선물이야.”
속삭이며, 제 남편의 어깨에 둥근 이마를 기댈 적에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신부였다.
“우리끼리 결혼해 버린 거…… 엘라가 알면 엄청나게 화내겠지?”
세 번째 불꽃이 터지는 것을 올려다보며, 아사야가 말했다. 그러자 가브리엘이 아주 작게 실소했다.
“자기보다 내 선물을 먼저 본 거에 더 화를 낼걸.”
“선물? 엘라도 뭘 준비한 거야?”
놀란 듯 아사야가 되묻자,
“우리 딸을 아직도 그렇게 몰라?”
가브리엘이 가뿐히 대꾸했다,
그 말에 아사야의 심장이 두근대며 뛰기 시작했다. 그 선물이 무언지, 물을 필요가 그녀에겐 없었다. 그녀는 엘라에 대해서라면 누구보다 잘 아는 엄마였다. 그러니 제 딸이 준비했다는 선물이 무언지도 수 초 내에 알아채고야 말았다.
밀려드는 웃음을 감추지 못한 채 아사야는 가브리엘의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제 어깨가 젖는 것을 느끼면서도 가브리엘은 당황하지 않았다. 어린 인간은 아주 이상하기에, 이따금은 기쁠 때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네가 말해 줬어?”
주어도 없이 아사야가 물었다. 그러나 가브리엘은 그 속뜻을 알았다. ‘블란테를 초대하고 싶어 하는 것을’, 숨겨진 말은 그것이었다.
“응.”
아사야의 보드라운 머리칼을 쓸어 만지며 가브리엘이 말했다. 담백한 입맞춤을 이마 위에 남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나도 너에게 물어볼 게 있어, 아사야.”
제 남편의 몸에 남은 깊은 흉터를 손끝으로 훑으며, 아사야는 훌쩍임을 삼켰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이자, 가브리엘이 마른침을 넘기며 말을 솎았다.
“결혼식을 준비할 적에…..… 너를 믿으라며 내게 ‘알지’ 라고 말했잖아. 무얼 아냐는 의미였던 거야?”
“오, 세상에.”
그처럼 아사야를 웃게 하는 상대는 지상 위에 누구도 없었다. 꺄르륵 터뜨린 웃음소리가 어찌나 큰지, 하늘 위로 쏘아 올리는 불꽃놀이 소리를 감출 지경이었다. 그런 아사야의 볼을 노려보며 가브리엘은 도리 없이 귀를 붉혔다.
웃음의 끝에 아사야의 입술은 제 남편의 입술에 다가가 붙었다. 긴 입맞춤 끝에, 다시금 웃음 새는 소리가 났다. 그제야 가브리엘이 그녀를 따라 실소했다. 서로의 눈을 보며 킥킥거리며, 두 사람은 이마를 맞댔다.
가브리엘은 그녀의 강아지요, 아사야는 그의 어린 인간이었다.
〈검은 용의 갈빗대 외전 - 완결〉
by BaaRaa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