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어제와의 안녕 (15/16)

외전: 어제와의 안녕



 

비밀 공간을 발견한 것은 아사야의 나이 열다섯의 일이었다. 어디론가 향하는 가브리엘을 복도에서 보았다가, 로베쯔에서 익힌 장난을 쳐 보려 뒤따라가던 중 알아낸 공간이었다.

아사야가 ‘와악’ 소리를 지르며 뛰어들기 전에, 가브리엘은 수상한 동작을 보였다. 난데없이 왕성의 복도 구석에 깔린 카펫을 걷더니 반으로 접는 것이었다. 그 아래에 드러난 문을 보고 아사야는 깜짝 놀랐다. 석판으로 된 작은 문에는 손을 끼울 홈이 파여 있었는데, 그것을 문고리 삼아 당기자 지하 공간이 드러났다.

서슴없이 가브리엘은 지하로 내려가 사라졌고,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금 모습을 드러냈다. 어깨에 묻은 먼지를 가볍게 털어 내며 올라오는 가브리엘을 피해 아사야는 저도 모르게 모퉁이 뒤로 몸을 숨겼다.

‘저건 어디로 통하는 문이지? 뭘 하고 올라온 거지?’

드물게도 가브리엘은 방심한 채였고 숨어 있는 아사야를 발견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숨을 죽이고 입을 다물고서 아사야는 고민에 잠겼다.

첫째로, 석판 문을 여는 데에 열쇠 같은 건 필요치 않아 보였다. 그러니 가브리엘이 먼저 떠나거든 살금살금 다가가 저 문을 열어 보고, 아래를 살펴볼 기회가 아사야에겐 충분했다.

그러나 둘째로, 그런 것은 가브리엘과 제 사이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됐다.

“가브리엘.”

두 손으론 뒷짐을 지고 상체는 살짝 기울인 채, 아사야는 숨었던 고개를 내밀었다.

걷었던 카펫을 다시 덮으려던 차에 가브리엘이 얼굴을 들었다. 적잖이 놀란 듯 보라색 눈이 커져 있었다. 어색하고 머쓱한 순간을 어떻게든 빨리 넘겨 보려, 아사야는 얼른 그에게로 다가갔다.

“일부러 훔쳐본 건 아닌데……, 너 놀래 주려고 따라왔다가 봐 버렸어. 여기 아래는 어떤 공간이야? 뭘 하고 올라온 거야?”

그들 관계에서 여태껏, 솔직함은 가장 큰 무기였다. 무얼 잘못했어도 잠깐 실수했어도, 둘 사이에 비밀이란 없었다. 아사야는 가브리엘의 모든 것을 알았고 그녀 스스로도 비밀을 만들지 않고자 애썼다.

그러나 오늘, 의문의 지하실을 본 순간 그 믿음에 지진이 일었다. 제가 꼬집어 ‘어떤 공간이냐’ 물었음에도 가브리엘이 대답하지 않자 아사야는 다소 침울해졌다. 가브리엘과 제 사이에 틈새 따윈 없다 믿었건만 결국은 비밀이 똬리를 틀었구나 싶었다.

그러면서도, 제게 알려 주지 않을 일이 도대체 무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왜 대답이 없어, 가브리엘. ……내가 알아선 안 되는 거라도 있어?”

서운함을 감추지 못하며 아사야가 물었다. 한참을 침묵하던 가브리엘은 대답 대신, 덮으려던 다시 카펫을 도로 접었다. 그리고 두 발 비켜섰다.

“정 궁금하다면…… 들어가 봐도 돼.”

그 말에 아사야는 설렘 반, 두려움 반을 집어먹었다. 설렘은 가브리엘과 제 사이에 못 보일 비밀 따위는 없다는 믿음에 의해서였고, 두려움은 그런 가브리엘이 저에게 알려 주지 않은 공간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서는 아닐까 하는 의심에 의해서였다.

그런들, 자리에서 물러설 아사야가 아니었다.

“그래, 들어가 볼게.”

당당하게 발을 뻗어 아사야는 석판 문 앞에 다가섰다. 조금 전 가브리엘이 그랬던 것처럼 문고리에 손을 집어넣고, 위로 잡아당겼다. 그러나 문은 꿈쩍도 하질 않았다.

“…….”

두 손을 써 보아도, 체중을 실어 올려 보아도 매한가지였다. 석판 문은 왕성의 바닥과 같이 돌로 만들어진 데다 두꺼워서, 아사야의 힘으로는 도무지 열 수가 없었다.

민망함에 얼굴을 발갛게 붉힌 그녀 뒤로 가브리엘이 오른손을 뻗었다. 그가 한 손을 거들어 당기자 석판 문이 종이라도 되는 양 쉽게 들렸다.

놀란 눈으로 아사야는 제 발치에 벌어진 사각 공간을 내려다봤다. 그러나 당장은, 아래로 향하는 계단 두 칸이 희미하게 보일 뿐 나머지 공간은 어둠에 잠겨 볼 수 없었다.

얼어붙은 아사야를 대신하여 가브리엘이 먼저 계단을 내려갔다. 그러고는 불을 밝힌 램프를 들고, 아래에서부터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을 맞잡고 아사야는 조심조심 난간 없는 돌계단을 내려갔다.

호기심 많은 꼬마처럼 비밀의 지하실에 도착한 순간, 아사야는 숨을 멈추었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연두색 드레스였다. 나무 마네킹에 입혀 놓은 드레스는 무척이나 오래되어 밑단이 닳은 유물이었다. 소매 폭이 짧았고 어깨와 스커트에 잡힌 주름은 아래로 푹 꺼진 모습이었다. 아주 오래전 사렙탄 세일산의 아내가 병을 앓을 적에, 언젠가 맞이할 며느리를 위하여 미리 구해 둔 드레스였다.

옆으로는 알이 큰 진주 귀걸이 한 쌍이 보였는데, 다시 보니 한쪽은 진주알 자리가 비어 있었다.

그 앞에는 낮은 탁자가 하나 있었고 금색 로브가 그 위에 직선으로 펼쳐져 있었다. 꽃을 수놓은 금사는 세월이 지나도 귀한 빛을 잃지 않았지만, 백색이던 원단은 누렇게 색이 뜬 채 푸석푸석한 모습이었다.

탁자 옆에는 〈모험록〉 3권과 6권이 세워져 있었다. 보급형 서적의 16배 크기로 제작되어, 표지에 들소 가죽을 쓰고 글자를 크게 옮겨 적는 데에만 돈을 제법 들인 물건이었다. 열 권 이상의 장편 서적임에도 이 방 안에 놓인 것은 두 권뿐이었다.

방의 중앙에는 새장이 걸려 있었는데 좌측이 구겨지고 새가 앉던 자리가 사라진 채였다.

벽장에는 검의 걸이가 하나 놓였고 은제 단검이 길쭉한 모양을 자랑하고 있었다. 날렵하던 검날은 이가 나간 모습이나 손잡이에 박힌 토파즈는 금 간 구석 없이 단단했다.

마지막으로, 아사야는 이 방에 놓인 물건 가운데 가장 작은 상자 앞에 도착했다. 겉면에 그려져 있던 그림은 잉크가 말라 사라진 지 오래였지만, 그 속에 든 물건만큼은 여전한 빛을 자랑했다. 귀하다는 그린 사파이어를 중앙에 박아 넣고, 물결무늬로 세공한 금테를 두른 귀걸이가, 한 짝만 들어 있었다.

“가브리엘…….”

이 방이 무얼 하는 공간인지 아사야는 알아차렸다. 모를 수가 없었다. 방에 놓인 모든 게 눈에 익었다.

용의 철문을 열 적에 입었던 드레스, 베데르 성을 찾을 적에 걸었던 귀걸이, 드로인을 시켜 주문한 책, 마도구의 열쇠, 가브리엘이 찾아다 돌려주었던 귀걸이 한 짝……. 그 모든 것들이, 아사야 세일산의 유산이었다.

입을 벙긋거릴 뿐 아사야는 어떤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침묵했다. 그녀 자신의 유산으로 만들어진 공간 안에 선 아사야를, 가브리엘은 가만히 바라보았다.

‘아사야 공주’를 찾아 헤맬 적에 수집한 물건들이었다. 도굴꾼이 훔쳐 가 밀매하던 상품이기도 했다. 일부는 빼앗거나 훔친 것이었지만, 대부분은 그 자신의 비늘 네 개와 맞바꾸어 값을 치렀다. 이미 뽑힌 비늘을 다시 붙일 순 없는 노릇이며 돈으로 바꾼들 쓸 일도 없으니, 우연찮게 만난 아사야의 물건들과 맞바꾸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이내 아사야는 방의 가장 구석에 위치한 침대를 발견했다. 1인용 침대 위에는 얇은 이불 한 장이 접혀 있었다.

“…….”

아사야는 그 자리에 누워 보았다. 그제야 낮은 천장과 벽에 붙인 그림들이 눈에 들어왔다. 서툰 솜씨로 그려 놓은 낙서 같은 초상화가 다닥다닥 수십 장이었다. 검고 긴 머리, 광대는 동그랗고 턱은 갸름한 얼굴, 크고 속눈썹이 촘촘한 눈, 오뚝한 코, 미소 짓는 입술…… 아사야는 저를 그려 놓은 초상화들을 멍하니 훑어보았다.

“왜…… 내게 보여 주지 않았어? 이 방…….”

딱딱한 베개에 머리를 기댄 채 아사야가 물었다.

대답은 한참 후에나 들려왔다.

“네가 안다면 징그러워할 줄 알았어.”

그 말에, 아사야는 얼른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외쳤다.

“내가 그럴 리가 없잖아!”

“금고 같은 건 싫다고 말했었잖아.”

빨랐던 대화가 뚝 끊겼다. 이을 말을 찾지 못해 침묵하는 아사야를, 바보 같은 드래곤이 물끄러미 살피고 있었다. 죽은 사람을 잊지 못해 물건들을 사다가 방을 만들어 놓고는, 그로 인해 놀라고 안쓰러워하는 아사야를 이해하지 못해, 가브리엘은 변명마저 덧붙였다.

“이제 지난 일이니까, 지금의 너에게 떠올리게 하고 싶지 않았어.”

“그래도, 너는 이 방에 내려왔잖아. 내 물건들…… 너는 버리지 못한 거잖아, 가브리엘.”

제 이마를 짚으며 아사야가 말했다. 마음이 어지럽고 속이 울렁거렸다. 가브리엘의 말마따나 금고가 싫어서는 아니었다. 소름이 돋았지만 나쁜 의미의 놀람 때문은 아니었다. 서로가 서로의 유해를 보며 살았구나…… 깨달은 탓이었다.

고아 아샤가 검은 용의 갈빗대에 몸을 구기는 동안, 가브리엘은 서툰 솜씨로 그려 놓은 초상화를 보며 이 방 안에 누워 있었다.

“이 귀걸이를 한 날의 너를 정말 좋아했어.”

알이 빠진 진주 귀걸이를 가리키며 가브리엘이 말했다.

“이걸 입은 날에는 네가 나를 찾아왔어. 너를 보자마자 다쳤다는 걸 알았지. 네 피 냄새를 처음 맡았어. 그래서 기억에 남았어.”

“오, 가브리엘…….”

손등으로 입술 밑을 훔치며 아사야는 고개를 숙였다. 흐느낌을 참아 내느라 흰 목울대에 핏줄이 섰다.

“너에게 화를 내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어.”

분한 듯 시트를 긁어쥐며 아사야가 말했다.

“날 데려오기 전까지 너, 이 방에서 살았던 거야? 성대한 왕성을 지어 놓고, 넌 이런 방에서 지낸 거야?”

“응.”

야속할 만큼 가브리엘의 대답은 빨랐다. 마침내 아사야의 표정이 무너져 내렸다.

“그만큼 내가 보고 싶었어?”

“그래…….”

“가브리엘, 네가 불쌍해.”

이번에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질문이 아니라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다만 그는 아사야 앞에 다가갔다. 그러고는 가죽을 엮어 만든 카펫 위에 무릎을 꿇었다. 아사야의 여린 무릎에 고개를 기댔다.

착한 용의 머리칼에 아사야는 눈물을 묻혔다.


 

.*. *. *. *. *. *.


 

그러나 가브리엘은 후회했다. 아사야에게 석판 문을 들키지 말았어야 했다고, 그는 생각했다. 들키더라도 내려가게 하질 말았어야 했다, 암만 미련이 남아도 잊어버리게 두었어야 했다…… 이제는 늦은 후회였다. 방 안에 모아 둔 유산들이 아사야로 하여금 지난 일을 떠올리게 만든 탓이었다.

창가 자리의 흔들의자에 몸을 기댄 채 아사야는 딴생각에 잠겨 있곤 했다. 상체가 의자 밑으로 흘러내리고 창밖으로 해가 지도록, 그녀는 이미 오래전 떠나온 대륙의 일을 궁금해했다. 역사를 익히고 배우겠노라 책에 묻혀 지낸 1년이 있었지만 그것으로는 모자랐다.

그녀가 궁금해하는 것들은 그 어느 책에도 나와 있질 않았다. 가디엘의 자식 관계는 어떠했는지, 블란테 세일산은 행복해졌는지, 폼 에드레이는 영웅 베데르를 잊었는지, 야베스 세일산의 시신은 어디로 갔는지…… 아사야는 알 수 없었다.

“모두들 어떻게 됐을까?”

흔들의자 팔걸이를 손끝으로 긁으며 아사야가 물었다.

“가브리엘, 혹시 들은 소식이 있어?”

그렇게 물을 때마다,

“너처럼 어린아이가 알 이야기가 아니야.”

가브리엘은 야속한 답만을 들려주었다. 그가 절 어린아이 취급하는 게 무얼 뜻하는지 아사야는 알았다. 그러니 이 대화가 이어지길 원치 않는다는 완강한 회피의 메시지였다.

“몸은 어려도 머리는, 아주 오래전부터 너의 친구이던 나란 말이야.”

구시렁대며, 아사야는 왼발을 바닥에 대고 굴렀다. 그러자 멈췄던 의자가 다시금 아사야의 몸을 앞으로, 뒤로 느릿느릿 흔들었다.

자꾸만 창문 밖으로 향하는 아사야의 시선을, 가브리엘의 몸짓이 가로막았다.

“가브리엘.”

제 시야를 가로막고 선 큰 남자를 보기 위해 아사야는 고개를 올렸다가, 천천히 아래로, 아래로 내렸다. 그녀의 흔들의자 앞에 무릎을 굽힌 가브리엘의 머리가 마침내 아사야의 무릎에 묻혔다.

“가브리엘, 간지러워…….”

속삭이며 아사야는 그의 머리칼을 만졌다. 가브리엘의 짧은 뒷머리는 겉으로 볼 적엔 돌처럼 단단해 보이는데, 막상 머리칼 새로 손가락을 집어넣고 쓰다듬으면 결이 무척 좋았다. 가브리엘 역시 그녀가 제 뒷머리를 좋아하는 걸 알았다. 알기에, 대륙의 어떤 것에 대해서도 언급하길 피해 보고자 먼저 머리를 대준 것이었다.

그러나 가브리엘의 무던한 시도들은 거듭 실패를 맞이했다. 주의를 돌려놓고, 돌려놓고, 또 돌려놓아도 아사야는 오뚝이 인형처럼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가브리엘, 야베스 세일산은 어떻게 됐어?”

새끼 말을 화두로 돌려놓았던 주의가 다시 대륙으로 향한 날에는 끝내,

“도대체 그게 왜 궁금해?”

가브리엘도 대답을 피하지 못했다.

“왜 그들을 궁금해하는 거야, 아사야! 이제 지난 일에 불과한 것들을, 이제 네 나라도 네 사람도 아닌 것들을……. 이곳에 천공섬이 있고 내가 있고 네 아이가 있어. 우리 아기가 여기에 있잖아. 그럼 된 거잖아.”

소리치는 가브리엘을 마주할 적에 아사야는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로베쯔의 언덕에서 백 년 만에 재회하던 순간에도, 이처럼 언성을 높이지는 않던 가브리엘이었다. 천공섬에 도착한 뒤 많은 일이 있었지만 단 한 번도, 가브리엘은 아사야를 상대로 화를 낸 적 없었다.

그토록 침착하던 남자가 말끝을 흐려 가며 횡설수설, ‘우리 아기’ 이야기까지 꺼내는 게 이상했다.

“가브리엘.”

검은 용을 진정시켜 보고자 아사야가 두 손을 뻗었다. 그녀의 손은 아직 어리고 작은 탓에, 가브리엘의 두 손을 잡을 순 있었지만 모두 덮어 줄 순 없었다.

“예전 일이 마음에 남아서 이러는 게 아니야. 더는 나에게 중요하지 않게 된 일이어서, 전부 털어 낸 과거여서…… 다시 살펴본다고 해도 상처 입지 않을 자신이 있어서 그러는 거야.”

속삭일 적에 아사야에겐 신뢰가 있었다. 제가 원하는 무엇이건 가브리엘은 안겨 줄 것이라는, 하고자 하는 무엇이건 하도록 응원할 것이라는, 가고자 하는 어디이건 데려다줄 것이라는 신뢰였다.

그러나 오늘 이 순간만큼은, 가브리엘은 아사야의 믿음을 저버리는 존재였다.

“그 이야기는 이제 그만해.”

그의 단정적인 태도가 아사야를 놀라게 했다. ‘가브리엘’ 하며 마주 쥔 손에 힘을 주었으나, 그마저도 빼내어 버리는 게 검은 용이었다. 그는 아예 아사야로부터 몸을 돌려 버렸다.

커다란 창밖으로 밝은 노을이 스며들고 있었다. 주홍빛이 찬 바닥을 카펫처럼 뒤덮기 시작했다. 제 발치로 기어 오는 노을빛을 노려보며 아사야는 입술을 짓씹었다. 가브리엘이 허락하지 않으면 그녀는 천공섬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가브리엘이 제 등에 태워 주고 내려가질 않으면, 대륙으로 가 원하는 이를 만날 수도 없었다.

“너도 날…… 바보인 채로 가둬 놓고 싶은 거야?”

지독한 데자뷔에 시달리며 아사야는 혼잣말을 했다가,

“아니야.”

퍼뜩 소스라치며 제 입술을 틀어막았다.

그러나 이미, 날카롭게 뱉은 말은 가브리엘의 귀로 흘러 들어가 마음에 칼상을 남긴 지 오래였다.

‘너도 날…….’

아픈 말의 고약한 점은 그 메아리가 크게 남아, 쉽게 떨치거나 잊을 수 없단 점이었다.

‘너도, 너도 날…….’

선 자리에서 비틀거리며 가브리엘은 이마를 짚었다. 단 한 순간이라도 그는 그 자신을, 어린 인간의 형제나 야베스 세일산과 비슷하게 생각한 적 없었다. 오히려 가브리엘은 언제고 그들을 혐오하였으며 증오했다.

그런데 단 한 사람, 지상에서 유일하게 그의 애정을 받는 존재인 어린 인간이 저를 그들과 같이 묶어 말했다. 가브리엘은 제 귀를 의심했다. 컴컴해진 얼굴 위로 상처 입은 기색이 여과 없이 드러났다.

가브리엘이 아픈 표정을 짓자 아사야는 제 가슴이 찢기는 듯했다. 허공 위로 손을 뻗으며 그녀는 허둥지둥 그에게로 다가갔다.

“진심이 아니었어, 가브리엘. 진심으로 한 말이 아니야. 그냥 화가 나서…… 나도 모르게, 그냥 화가 나서 나온 말이야……, 미안해.”

그의 허리를 끌어안을 적에 아사야는 떨고 있었다. 아주 잠깐의 순간일지라도 제 드래곤을 통해 야베스 세일산의 그림자를 느끼다니 제가 미쳤다고 생각됐다. 미치지 않고서야, 가브리엘에게 모욕을 줄 순 없는 노릇이었다. 언제나 바위처럼 단단하던 그의 눈에 눈물이 나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 없는 것이었고, 결국 그녀는 가브리엘을 울렸다.

“가브리엘…….”

보라색 눈동자가 삽시간에 젖어 들더니 검은 속눈썹에 눈물방울이 엉겼다. 이를 악문 채 가브리엘은 혼란스러운 모습이었다. 두 눈동자를 이리저리 흔들며 그는 아사야의 어린 얼굴을 노려보고 있었다.

“미안해, 미안해……, 정말 그런 의미가 아니었어…….”

손을 뻗어 정신없이, 아사야는 그의 눈물을 닦아 냈다.

“네가 죽은 땅으로 다시 널 보내고 싶지 않아.”

그러자 가브리엘의 입 밖으로, 뜻밖의 말이 새어 나왔다.

“네가 그 땅의 이야기를 궁금해하는 것조차도 끔찍해.”

눈물이 가브리엘의 코끝에 고였다가 뚝 떨어졌다.

“끔찍하다고…….”

아사야는 소스라쳤다. 오늘처럼 스스로가 이기적이라고 생각된 날이 없었다.

잊힌 상처인 줄 알았다. 저는 치유가 되었으니 괜찮다고 생각했다. 가브리엘에게 그 왕성이 얼마나 끔찍한 장소였는지, 그가 제 마지막 모습을 어떻게 지켜보았는지, 그런 것은 고려하지 못했다.

대륙에서의 삶은 그녀의 상처이기도 했지만 가브리엘의 상처이기도 했다. 그녀의 상처는 아물었지만 가브리엘의 상처는 아직도 살을 벌린 채 피 흘리고 있었다. 아사야 세일산은 그를 위해 제 목숨을 희생하였으나, 가브리엘은 연인의 죽음을 넋 놓고 지켜봐야만 했다.

“미안해, 가브리엘.”

가브리엘의 손을, 아사야는 다시금 힘주어 잡았다. 그녀를 바라보지 않을지언정 그는 열다섯의 어린 인간을 뿌리치지 못했다.

“너에게 거짓말을 해서 미안해……. 내가 너를 속여서, 그래서 미안해. 떠나도록 강요해서 미안해, 너를 두고…… 너를 두고 죽기를 선택해서 미안해.”

횡설수설 말을 할 적에 아사야는, 가브리엘의 슬픔이 제게로 옮겨 온 것을 느꼈다. 눈물이 제멋대로 흘러나와 숨결과 목소리를 온통 적셔 놓았다.

“모두 내 잘못이야. 두 번 다신 그런 말 하지 않을게.”

맞잡은 손에 어찌나 힘이 들어가는지, 가느다란 뼈대가 하얗게 올라왔다.

“대륙에서는 네가 내 말대로 모두 다 해 주었으니까, 하늘에선 내가 네 말대로 무엇이든 할게……. 대륙으로 돌아가지 않아도 돼. 여기서…… 우리 여기서 영원히 살자.”

마침내 가브리엘이 그녀의 사과를 받아 주었다.

화해에서는 쓴맛이 났다. 서로의 눈물을 문질러 닦아 주고 맛보며 그들은 해묵은 상처를 만졌다.


 

.*. *. *. *. *. *.


 

두 번 다시 가브리엘을 속이지 않겠노라 아사야는 다짐했고, 일 년 열두 달이 흐르는 동안에도 그 다짐을 지켰다. 평화로운 일상이 그녀의 정신을 말랑하게, 심장을 설레게, 다리는 재빠르게 만들었다.

싫은 이는 만나지 않고 맛난 음식만 먹으며 하고픈 것만 하는 나날이 어찌나 빠르게 흐르는지, 게으름의 미학에 아사야는 빠져들었다. 열여섯의 생일날이 순식간에 밝았다.

오전에는 엘라에게 멋진 선물을 받았는데, 그 정체가 무척 뜻밖이었다. 한 손으로 아사야의 눈을 가리고 한 손으로는 방향을 알려 주며 향한 곳에, 엘라가 준비한 선물은 유리 천장이 달린 정원이었다.

지난해, 가브리엘을 울리고 눈물로 화해를 이룬 아사야는 줄을 쳐 가며 공부했던 역사책들을 왕성 도서관에 반납했다. 제 어머니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던 엘라 나자렛이 그 책을 고스란히 빌렸고, 베데르 성의 건축 역사 페이지를 둘러보다 ‘유리 정원’이라는 단어를 발견했다.

되는대로 정보를 긁어모아 구현해 낸 유리 정원은 과연 아사야의 기억 속 정원과 무척 흡사했다. 나무의 종이나 풀의 모양은 물론 각기 달랐지만, 천장과 벽의 유리가 불투명한 것이나 계절에 맞는 꽃을 심되 숲의 경관처럼 다듬은 생김새, 곳곳에 새장이 걸린 모습은 감동적인 수준이었다.

“마음에 들어. 정말이야…….”

아름답고 따듯한 정원을 거닐며 아사야가 속삭였다.

말을 타고 이십 분만 내달려도 열대우림 숲이 펼쳐지는 천공섬이었다. 꽃을 보길 원한다면 꽃밭으로, 풀을 보고 싶거든 초원으로 가면 그만인지라 식물원이나 정원이라 함은 몹시 비실용적인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어머니를 기쁘게 해 보겠다며 선물을 완성해 낸 엘라가, 아사야의 눈으로 볼 때 귀엽기 짝이 없었다.

아사야를 놀라게 한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두꺼운 기둥을 지닌 나무를 지나치자, 흰 커튼이 달린 2인용 침대가 눈에 들어온 것이었다. 이불마저 흰색으로 덮어 놓은 모양에 아사야는 작게 환성을 냈다.

기쁜 마음에 침대 위로 달려들자 푹신한 매트리스가 아사야의 몸을 받아 주었다.

“그런데, 엘라…… 이건 무슨 용도야?”

두 눈을 깜빡이며 아사야는 깃대를 손가락질했다. 침대 헤드에 고정되어 유리 정원의 천장 밖까지 이어지는 막대에는 붉은색의 각진 깃발이 묶여 있었다.

어머니의 질문에 엘라는 흐뭇한 듯 미소 지으며 뒷짐을 졌다. 그리고 답했다.

“아버지와 단둘이 시간을 보내실 적에 걸어 두실 깃발입니다. 그러면 방해받으실 일 없을 겁니다.”

들은 말을 소화하기까지 아사야에겐 적잖은 시간이 필요했다. 잠시간 꿈쩍 않고 깃대의 끈을 잡고 있다가, 아사야는 후다닥 손을 놓았다. 그러자 벌건 깃발이 수루룩 빨려 올라가는 듯 깃대 위로 당겨지더니, 바람에 펄럭대며 날렸다.

아사야의 얼굴도 깃발처럼 벌겋게 달아올랐다.

“이런 깃발까진 필요 없어, 엘라. 가브리엘이랑 나는 아직……, 그러니까…….”

“……아직?”

“내가 아직…… 많이 작잖니. 몸이 덜 커서, 아직…….”

어머니의 모자란 설명에도 엘라는 쉽게 수긍했다.

그럴 적에 그녀는 무뚝뚝한 눈동자로, 막 열여섯 살이 된 아사야의 몸을 훑어보았다. 팔과 다리가 길어지고 젖살이 빠진 아사야의 얼굴에서는 오래전 가브리엘이 지겹도록 그리던 초상화 속 여인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가브리엘의 옆에 설 때면 그의 허벅지 굵기가 아사야의 허리둘레와 비슷할 지경으로, 둘 사이의 체격 차는 쉬이 좁혀지질 않았다.

그날 오후, 아사야는 가브리엘의 품에 안겨 ‘엘라의 성격은 누굴 닮은 것이냐’며 투정해야 했다. 부끄러움에 몸부림을 치며 벌이는 투정에 가브리엘은 작게 코웃음을 쳤다.

“깃대를 만들었다니, 재밌는데 왜 그래.”

아버지로서 보인다는 반응이 그게 전부였다. 덕분에 아사야는 엘라 나자렛이 누구를 그렇게 쏙 빼닮았나 답을 얻었다.

아사야를 이해하며 위로해 주는 대신, 가브리엘은 다른 방식으로 그녀의 기분을 풀어 주길 택했다. 준비한 선물이 있으니 함께 걷자며 손을 맞잡은 것이었다.

“엘라의 선물이 워낙 좋아서, 올해는 네가 이기기 어렵겠는걸.”

도도한 척 속삭이면서도 아사야는 기쁜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얼마 못 가, 선물이 도대체 뭐냐며 미리 알려 달라 조르기까지 했다. 팔짱을 낀 채 매달리는 아사야를 번쩍 안아 들기도, 손깍지를 단단히 끼기도 하며 가브리엘은 신전으로 향했다.

아직 바다에 뜬 섬이던 시절에 지어진 신전은 예전 모습 그대로였다. 무너진 천장의 그림과 정교한 기둥, 두 면만이 남은 벽을 그 누구도 해체하거나 재건하지 않고 내버려 둔 결과였다. 덕분에 이곳은 누구의 발도 잘 닿지 않고 정령들이 가장 많이 모여드는 명소였다.

빛무더기처럼 반짝이는 정령들을 아사야는 웃으며 둘러보았다. 발치에서 빛을 뿜으며, 그들은 아사야의 발등 위에 올랐다가 뛰어내리기도 하며 통통거렸다.

이내 아사야는 재단 위에 놓인 가방을 발견했다. 두 눈을 끔벅거리며 그녀는 가브리엘을 돌아보았는데, 저 가방이 그가 저를 위해 준비한 선물이 맞는지 확신이 들지 않아서였다. 그도 그럴 것이 갈색의 가죽 가방은 이미 사용감이 묻어나는 상태였다. 뭔지 모를 내용물로 가득 찬 듯 겉면도 구겨져 있었다.

“열어 봐도 돼?”

고개를 갸웃거리며 아사야는 가방 앞에 다가갔다. 단단히 묶인 끈을 풀어 그 내용물을 열어 보았다. 그러자 아사야의 해소되지 않은 의문이 도리어 덩치를 키웠다.

“이게 뭐야, 가브리엘? 내 옷이잖아.”

당황한 채 아사야는 가방 속에 정돈된 물건들을 흐트러뜨려 놓았다. 네다섯 벌의 편한 옷가지와 승마바지, 가죽 부츠는 분명 아침까지만 해도 그녀의 옷장에 들어 있던 것들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커다란 가방의 아래에는 남성용 셔츠 한 장과 바지, 여벌 속옷이 들어 있었는데 그 옷들은 또 가브리엘의 것이었다.

이내 아사야는 이 가방의 의미를 깨달았다. 놀란 눈을 하며 아사야가 고개를 홱 돌리자, 가브리엘은 어깨에 정령 빛을 묻힌 채 어색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사야. ……몇 주 뒤면 가을도 사라질 거야. 선선한 계절이 가기 전에, 멀리 여행을 다녀오면 즐겁겠지.”

엘라의 선물보다 좋을 수는 없을 거라며 호언장담했던 말을, 아사야는 도로 물러야 했다. 가브리엘이 준비한 선물은 유리 정원보다 스무 배로 좋았다.

“같이 떠나자.”

그렇게 말하며 손을 내밀 적에, 아사야는 그의 등 뒤로 펼쳐진 검은 날개를 볼 수 있었다. 설렘과 기쁨으로 심장이 쿵쿵 뛰어 댔다. 대륙으로 가 궁금했던 사람들을 찾는다는 것보다도, 가브리엘이 저를 위해 한발 뒤로 양보하며 여행 가방을 준비했단 것이 좋았다.

“여행을 마치거든 함께 돌아오는 거야. 너랑 나랑…… 둘이 함께.”

가브리엘만 곁에 있다면, 아사야는 두려울 게 없었다.


 

.*. *. *. *. *. *.


 

이전된 수도의 분위기가 낯설어서인지 아니면 물이 맞지 않아서인지, 아사야는 상태가 좋지 못했다. 팔과 다리에 생전 얻어 본 적 없는 두드러기가 오른 것이었다. 가브리엘이 신경 써 구해다 준 생수로 전신을 헹구니 부기가 가라앉긴 하였지만, 나아진 기분이 반나절을 못 갔다. 뒤바뀐 공작성의 모습 때문이었다.

아졸가 공작성은 아사야의 기억과 일부 흡사했고, 나머지는 모두 달랐다. 고쳐 말하자면, 발락의 재앙이 벌어진 이후 성한 조각과 파사드 일부만을 떼어 와 덧댄 뒤 지어 올린 건물은 일부만 옛날 모습 그대로이고 나머지는 완전히 새 건물이었다.

공작성으로 돌아가 눈에 익은 울타리와 조각상, 줄지어 선 나무를 만난다면 분명 고향 집으로 돌아온 기분이리라, 아사야는 생각했었다. 그러나 낯선 얼굴을 한 성의 입구에서부터 그녀는 찬물을 끼얹은 듯 서늘해졌다.

언짢은 기분으로 털레털레 걷는 아사야의 짐 가방을, 가브리엘이 대신 들어 주겠노라 잡아당겼다. 아사야가 괜찮다며 제가 들겠다 버티자, 그는 그러라고 대꾸하더니 짐 가방을 든 아사야를 번쩍 안아 들었다.

덕분에 공작성의 문을 두드릴 적에는 아사야의 기분이 나아져 있었다.

“약속된 손님이십니까?”

문지기가 뒷짐을 진 채 다가와 물었다. 작은 미소를 지으며 아사야는 철제 울타리 너머로 엿보이는 기사단 깃발을 구경했다.

“아사야 공주가 왔다고 전하세요.”

그렇게 자신을 소개한 손님이 한 해에만 열댓 명이었다. 그러니 어지간해서는, 문지기는 아사야 공주가 왔단 소식에 헐레벌떡 뛰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은 달랐다. 오늘 찾은 손님께서는 화려한 티아라는 물론이며 주름이 풍성한 드레스도, 귀걸이도, 최소한의 치장조차 하지 않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태껏 공작성을 찾은 손님들 가운데 가장 아사야 공주를 닮은 것이었다.

문지기가 허둥지둥하며 사라지자 아사야는 울타리 밖을 거닐며 파사드의 반조를 구경했다. 갈색 범이 뱀의 대가리를 물고 있는 반조는, 베데르 아졸의 상징은 아니었으므로 가디엘 아졸을 기리는 조각일 가능성이 컸다.

‘갈색 범이라…… 잘 어울리네.’

원피스에 달린 가죽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아사야는 멍하니 옛 기억에 잠겼다.

기다림은 길지 않았다. 중년의 공작 가주가 말을 타고 달려 나온 것이었다. 그를 가디엘로 착각하고 하마터면, 아사야는 달려가 그를 끌어안을 뻔했다. 그러나 가디엘 아졸과 얼굴과 인상을 쏙 빼닮았을 뿐 그는 가디엘이 아니었다.

회색 수염으로 턱을 뒤덮은 그는 가디엘의 아들이었다.

“아버지께서 언젠가 누이가 찾아올 것이라며…… 진짜 누이만이 맞힐 수 있는 질문들을 남겨 두었습니다. 하여 감히 여쭙겠습니다.”

고삐를 세게 쥔 채 그는 긴장한 기색으로 아사야를 내려다봤다. 그리고 물었다.

“두 분께서 함께 피크닉을 갔던 날 먹었던 디저트는 무엇입니까?”

가브리엘의 시선이 힐끔 아사야를 향했다. 제가 ‘진짜’ 아사야 공주임을 증명해야 할 요긴한 순간에 아사야는, 두 눈을 깜빡거리며 답을 미뤘다. 침묵이 길어지자 아졸 공작은 헛기침을 했다.

“답을 모르십니까?”

그가 물었고,

“모르지, 그럼.”

아사야가 대꾸했다.

“피크닉 같은 건 함께 간 적이 없으니까요.”

그러자 아졸 공작은 아주 잠시간, 소녀의 얼굴을 한 아사야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그는 허리를 깊이 숙이며 고삐를 틀어쥐었다. 제 주인을 따라 말까지 머리를 숙이는 묘기를 아사야는 미소로 바라보았다.

“문을 활짝 열어라!”

말머리를 돌리며 공작이 말했다. 그러자 굳게 닫혀 있던 울타리 철문이 좌우로 활짝 열렸고 넓은 입구 정원이 드러났다. 화려하게 꾸미고자 한다면 왕성에 견줄 수준으로 꽃을 심을 수 있긴 하나, 수수한 나무와 색이 적은 풀들로 채운 정원은 단정한 인상을 자아냈다.

공작성을 구경하며 아사야는 느릿느릿 걸었다. 하인들이 다가와 짐 가방을 받고자 하였지만, 가브리엘이 넘기지 않았다.

“……아사야 공주께서 돌아오시거든 건네 드리라던 물건이 있습니다. 응접실로 안내해 드리죠.”

공작이 말했다. 저보다 스물은 더 어려 보이는 아사야를 향해, 그는 깍듯한 태도였다.

“성 안까지는 들어가 볼 생각이 없어요.”

아사야가 속삭였다. 단정적인 대꾸에 공작은 당황한 기색이었다. 가브리엘은 제 연인의 작은 뒤통수를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성에 도착한다면 기뻐할 아사야였다. 그녀는 쉽게 변치 않는 사람이었다.

변화는 그녀가 태어나고 자란 성에 있었다. 가디엘의 기합 소리가 울리는 대련장과 포근한 저의 침실, 아버지의 서재며 제가 노닐던 공간들은 더 이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게 된 것이었다. 잔인하면서 당연한 사실을 아사야는 조용히 받아들였다.

그러니, 제가 가진 추억들로부터 떠나 버린 성 내부를 훑어볼 필요가 없었다.

“정원을 더 구경하고 싶은데, 그래도 될까요?”

“그러십시오. ……물건을 가지고 나오겠습니다.”

아사야를 완전히 신뢰하는 듯, 그는 제 성 안을 그녀가 마음대로 누비게끔 내버려 둔 채 말을 달렸다. 그런 조카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아사야는 입을 다물었다. 가디엘 아졸은 어디에 있느냐고는 묻지 않았다. 그의 죽음을 굳이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면 슬픔에 실체가 생길 것이라는, 막연한 두려움이 아사야의 어깨를 감쌌다.

“미안해.”

대신에 아사야는 사과했다. 난데없는 사과를 받은 가브리엘은 두 눈을 끔벅거리며 눈썹을 살짝 올려 보였다. 그를 향해, 아사야는 맥없이 웃었다.

“아졸 성이 이렇게 달라졌을 줄은 몰랐어. 너에게 내 집을 소개해 주고 싶었는데, 나도 전혀 모르는 곳이 되어 버렸네.”

그렇게 말하며 아사야는 정원에 난 길을 따라 걸었다. 가브리엘은 군말 없이 팔을 뻗어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

공작성의 내부에는 관심이 가지 않는 듯, 아사야의 걸음은 뒤뜰 정원에서 멈추었다. 잠시간 눈앞의 풍경을 바라보다가 아사야는 푹신한 잔디 위에 몸을 앉혔다. 하늘과 풀과 꽃을 바라보는 그녀의 뒤로, 아졸 공작이 다가와 섰다. 그러고는 어린 고모의 품에 아버지의 유품 상자를 건네주었다.

아사야는 그것을 무릎에 올려놓고, 천천히 열어 보았다. 속에 든 것은 뜻밖에 편지였다. 종이 끝이 꼬질꼬질해지도록 자주 펴고 다시 접은 편지에는 떨리는 글씨들이 이리저리 적혀 있었다.

가디, 우린 속았어.

편지는 그렇게 시작했다.

야베스 세일산이 날 속인 것처럼 오빠도 속인 거야. 그는 가디가 생각하는 것처럼 날 사랑하지 않아. 어젯밤에 난 기절했어…….

이리저리 흐트러진 구부정한 글씨를, 아사야는 찡그린 얼굴로 노려보았다. 그 편지는 가디엘이 저에게 건네준 게 아니었다. 그녀 자신이 오래전에, 원망과 그보다 큰 그리움을 담아 갈겨 적고는 구겨 버린 편지였다.

편지들을 가디엘에게 전해 준 이가 누구인지 추측하기는 그리 어려운 문제가 아니었다. 공주께서 버려 놓은 고급스러운 종이를 보물처럼 모아 두던 시녀들이 있었고, 그 시녀들을 아졸 공작성으로 쫓아낸 것이 아사야 본인이었다.

전쟁이 갈무리된 뒤, 누이의 사망 소식을 들으며 그 편지를 받았을 가디엘이었다. 그 모습을 떠올리니 아사야의 마음은 온통 씁쓸해졌다.

우리의 성은 여전히 밝고 따듯하겠지? 다음 주면 매년 정원에 꽃씨를 뿌리던 날이야. 하인들이 귀띔했나 모르겠어.

성문 앞 화단에 아버지께서 좋아하시던 금작화를 심어 줘. 스파티움으로 울타리를 노랗게 물들여도 좋겠어.

가디. 아버지께서 어머니를 기억하셨듯이, 가디도 노란 꽃으로 날 기억해 주었으면 해. 떠났어도 그곳이 내 집이니까.

내 침대가 그립고 아버지의 서재가 그리워.

적어도 두 번째 편지는 제가 그에게 보낸 것이 맞았다. 여러 장의 두서없는 글을 적었다가 구기고, 다시 적었다 구기기를 반복한 날이 기억났다. 왕성에서 보내는 첫째 날 오전에 아사야는 가디엘에게 편지를 보냈었다.

“구월에는 내게 꽃가지를 보내 줘.”

편지의 마지막 추신을 읽어 내리며 아사야는 상자 밑을 살폈다. 수십 장의 편지들을 한데 묶은 줄에, 오래전에 말라붙은 꽃잎이 붙어 있는 작은 가지가 놓여 있었다.

그 가지를 매만지며 아사야는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공작성의 정원이 그녀를 마주했다. 샛노란 꽃과 줄기로 전신을 치장한 울타리와 노란 꽃봉오리 가운데 붉은 잎을 숨긴 금작화가, 환한 여름처럼 눈앞에 펼쳐졌다.

그 자리에 앉아 아사야는 한참이나 시간을 보냈다.

아졸 성을 떠날 적에 아사야는, 상자의 가장 아래에 놓인 가죽 주머니를 조카에게 돌려주었다. 나라를 지킨 공신으로서 가디엘 아졸에게 하사된 금화와 메달이 든 주머니였다. 공작은 몹시 당황하며 제 아버지의 유품을 두 손으로 받았다. 제겐 필요치 않은 물건이라 말하며 아사야는 로베쯔에 위치한 어느 고아원의 주소와 선생의 이름을 그에게 알려 주었다.

그렇게, 공작의 어린 고모는 왕성으로 떠났다.


 

.*. *. *. *. *. *.


 

“아사야 공주의 자격으로 오셨다고요.”

모르긴 몰라도 이전한 수도의 지하에는 소문을 전하는 마물이 사는 게 틀림없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반나절 전에 떠나온 아졸 공작성에서의 이야기가 저보다 먼저 도착할 방도가 없었다.

눈을 가늘게 뜬 채 아사야는 기사들의 면면을 훑어보았다. 이번에야말로 진짜 아사야 공주가 나타났다는 소식에 미리부터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기사들은 왕실 소속이되, 어깨에 찬 인장이 백여 년 전의 그것과는 다른 문양이었다.

‘하긴, 기사단장이 반역자를 도왔는데 문양을 그냥 둘 순 없었겠지.’

말없이 바라만 보는 아사야 공주를 향해, 세 명의 기사가 다시 물었다.

“아사야 공주의 자격으로 오신 게 맞습니까? 폐하께 알현을 청하시겠냐 물었습니다.”

그럴 적에 구레나룻까지 붉은 털이 난 기사는 설렌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눈치였다. 저도 모르게 아사야는 그들을 향해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고개를 바로 들 뻔했으나, 이제 그럴 필요가 없음을 깨닫곤 편한 자세로 답했다.

“네. 가브리엘과 함께 왔다고 전해 주세요.”

기사들은 분부대로, 제가 들은 말을 고스란히 시녀에게 전달했다. 시녀들은 집무실을 찾았고, 왕을 모시는 하인에게 귓속말을 전했다. 그 하인이 마지막으로 바쁜 왕의 어깨너머에 대고 말을 전하자,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가짜 아사야 공주가 왕성을 찾길 이미 수백 번이었다. 개중 어떠한 시험도 치르지 않고, 단순한 문장 하나를 전한 것으로 폐하를 움직이게 한 손님은 없었다.

그러나 오늘은 달랐다.

“가브리엘과 함께 왔다고? 정말 그렇게 말하더냐?”

왕께서 하문하자,

“네, 정말 그리 전해 달라 하였습니다.”

하인이 허리를 깊이 숙였다.

“공주…… 아사야는 지금 어디 있느냐?”

하인이 대답할 새도 없이, 천지의 주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왕께서 직접 움직이시니 기사 둘과 어린 시녀들이 그 뒤를 따랐다.

“아직 성내에 들여놓진 않아…… 문지기들이 지켜보고 있을 겁니다.”

허둥지둥, 기사들이 왕의 옆으로 붙어 서며 답했다. 국왕의 입장에서야 역정을 낼 답이었다.

“성내에 들여놓질 않았다고? 내가 무엇 때문에 너희 기사들을 셋이나 대기시켰다고 생각했느냐?”

왕께서 하문하실 적에 그 말은 질문이 아니며 순전한 힐난임을, 왕실의 기사라면 누구나가 다 알았다. 때문에 기사들은 그저 고개를 깊이 숙이며 죄를 청하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아사야가 나를 뭐라 생각하겠어? 손님 대접이 엉망이 되었다고 비웃겠군.’

생각하며, 왕께서 걸음을 빨리했다.

뒤에서 바라볼 적에, 수가 놓인 망토가 펄럭거리며 드레스 스커트처럼 넓게 펼쳐져 아름다운 뒷모습을 자아냈으나 그뿐이었다. 빽빽하게 땋은 뒤 돌돌 말아 틀어 올린 백발부터 값비싼 가죽으로 지은 부츠에 이르기까지 그녀의 몸에 팔랑거리는 귀여운 장식일랑 단 하나도 없었다.

그녀 자신의 초상화만 해도 그랬다. 허리에는 칼을 차고 왼팔에는 저울을 건 채 화가에게 맡긴 초상화는, 최초로 임신한 왕을 그린 초상이나 그 모습은 강인한 전사였다.

그 거대한 작품 아래에 아사야가 있었다.

그녀의 뒷모습을 본 순간 왕의 걸음이 느려졌다.

‘이번에도 사기꾼이 온 건가?’

내심 실망감을 감추지 못하며, 왕은 생각했다. 아사야 공주라는 말을 믿기에는 그 뒷모습이 아주 어린아이처럼 보이는 데다가, 품이 넓은 여행용 바지에 탁한 빛깔의 가죽 외투를 입고 있는 탓이었다.

그러나 사기꾼이 아닌가 의심받던 이가 몸을 돌린 순간,

“블란테?”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아사야!”

오래도록 그리웠던 친구를 향해 블란테 세일산은 후다닥 달려갔다. 체통을 잃은 왕을 쫓느라 시녀들까지 난데없이 달리기를 해야 했다. 우르르 달려오는 시녀들 하며 저를 덥석 끌어안는 기다란 팔에, 아사야는 마른 웃음을 터뜨렸다.

“여전하군요, 블란테!”

아졸가 성에서는 미처 겪지 못한, 재회의 인사였다.

화이트 드래곤의 혼혈 왕족답게 블란테 세일산은 남들보다 긴 수명을 자랑했다. 그녀는 오늘날 왕성에 머무르는 이들 가운데 가장 나이가 많았으나 외모는 오십 대에 멈춘 채로, 백 년이 넘는 시간 내내 왕홀을 쥔 절대자였다.

발락의 재앙 이후 황폐화된 수도를 옮기고 왕성을 새로 건축하느라 긴 세월을 고생으로 보낸 블란테였다. 이전의 수도는 로베쯔라 불리고 새로운 수도가 차츰 자리를 잡게 되기까지 이십 년이 걸렸다.

본도 세일산의 피를 물려받은 그녀의 아들은 그러나, 가까스로 안정을 되찾은 국가를 통치하는 일에 큰 부담을 느꼈다. 세일산의 해에 접어들어 블란테의 방식대로 갖춰진 왕성이었다. 그 자리에 왕자를 앉혀야 한다며 야단인 신하들이야말로, 제 손으로 세일산의 혈통을 쫓아낸 셈이었다.

어린 왕자는 부담을 견디지 못하여 왕위계승을 포기하겠노라 선언하고 대륙을 떠나 버렸다.

“세계 각지를 여행 다니면서 편지는 또 어찌나 자주 하는지, 귀찮고 성가시기 짝이 없어요.”

차를 홀짝이며 말할 적에 블란테의 입술 끝엔 미소가 걸려 있었다. 말만 그렇게 할 뿐, 제 자식을 미워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수도의 황폐화에 대해 말할 적에는 아주 잠깐이지만 가브리엘의 뺨을 노려본 것도 같았다.

그러나 모든 일의 원흉이자 대륙의 원수나 다름없는 발락은 오늘, 제 입에는 맞지 않는 차를 노려보며 아사야의 숙제가 모두 끝나기를 얌전히 기다리고 있었다.

“블란테가 고생이 심했겠어요.”

열여섯 살의 아사야가 그렇게 속삭이자,

“아사야가 겪은 일에 비하면야, 내 고생은 아주 부끄러운 수준이죠.”

블란테의 손이 덥석 아사야의 손을 감싸쥐었다. 이전에는 서로를 자매라 불렀으며 오늘날에는 엄마와 딸 같은 외형을 한 그녀들의 수다가 언제 끝날까, 딴생각에 잠긴 가브리엘의 손까지 블란테의 손에 잡혔다.

당황한 가브리엘이 눈만 끔벅거리는 때, 블란테가 말했다.

“아직…… 당신들의 나라가 기밀이란 건 알아요. 언제 건설됐고 어디에 위치했는지도 모르니, 날더러 이상한 착각을 한다고 비웃어도 좋아요. 그래도 나는 감사를 표해야만 하겠어요. 사티로스의 망명을 받아 줘서 고마워요.”

그러자 가브리엘은 수 초간 블란테의 눈을 바라보다, 아주 지겨운 사람처럼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 버렸다. 돌아오는 답은 없었으나 블란테는 그가 제 인사를 받아 주었음을 알았다.

밖으로는 ‘사티로스의 악몽’이라 알려진 지난 사태는 블란테에게는 그녀 자신의 악몽과도 다름없었다. 아들에 이어 손주의 존재는 블란테의 일생에 남은 두 번째 골칫덩이였다. 한창 여행을 다니다 돌아온 왕자가 두 달 남짓 왕성에 머무는 사이, 후다닥 정략결혼을 올리고 만든 자식이 하나 있되 그게 문제의 손주였다.

이번에야말로 화이트 왕가의 여자가 아니라 ‘세일산의 진정한 후계’가 나타났다며, 신하들은 무척 신나 하더랬다. 그맘때는 블란테에게 충정을 맹세한 이들의 머릿수도 만만찮아 왕성 회장의 분위기가 제법 떨떠름했다. 하루라도 빨리 왕세손의 계보를 올릴 날을 잡자는 신하들 앞에 블란테는 심드렁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의 손주는 정치에는 조금도 소질 없는 사고뭉치였다.

신하들의 등살에 별수 없이 이따금, 숙제처럼 해결할 정치 문제를 안겨 주던 게 화근이었다. 사티로스의 악몽 사태를 완화시켜 보라며 맡겨 놓았더니, 광신도의 교주를 잡아다가 무턱대고 사형시킨 것이었다. 명분 없이 미쳐 있던 사람들에게 굳이 명분을 안겨 준 꼴이었다. 사태는 급속도로 악화되었고 왕세손을 향한 여론마저 급속도로 나빠져, 계보를 올릴 날짜를 다시 미루어야만 했다.

그맘때 국경의 기사단이 전해 온 소식이 있었다. 와이번이라기엔 거대하고, 드래곤이라기엔 기록된 바 없는 존재가 마지막 사티로스 무리를 데려갔다는 말이었다.

당시에는 그 사실을 감추고 누구도 사티로스의 행방을 모르게 하라 명령하긴 했지만, 블란테에겐 불분명한 의심이 있었다.

그리고 그 의심은 아사야와 함께 돌아온 드래곤의 얼굴을 본 순간 확신이 됐다.

“미안해요.”

아사야가 속삭였다. 난데없는 사과에 블란테의 갈색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런 친구의 주름진 손을, 아사야는 보물처럼 감싸 쥐었다.

“……나의 집에 초대하고 싶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어 미안해요.”

그에 블란테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정령새의 발에 묶어 전한 말이 그랬듯이, 아사야는 긴긴 말을 풀어낼 필요가 없었다. 에둘러 꺼내 준 한 문장에도 숨은 뜻이 환했다. 제 집과 나라가 있되 세간에 알리지 않을 테니, 협조해 달란 요청이었다.

아사야의 부탁이라면 블란테 역시 긴 답을 풀 필요는 없었다. 그저,

“날 따돌릴 거라니 유감이네요. 아사야의 다과 파티는 언제나 최고였는데.”

농담을 하며 미소 지으면 그만이었다.

이전에는 서로를 자매라 불렀으며 오늘날엔 어머니와 딸의 외형을 한 친구들의 긴긴 대화는 마침내, 노을이 질 무렵에야 끝이 났다.

그사이 아사야는 엘라에 대한 자랑을 아주 살짝 흘려 블란테의 원성을 샀으며, 베데르 성이 어떻게 복구되었는지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었다. 벽화와 망루까지 전부 복원한 성 안에, 전쟁 영웅인 폼을 기리는 방을 따로 뒀다는 사실에 아사야는 기뻤다.

마지막으로 물을 이야기는 하나뿐이었다.

“야베스 세일산은 어찌 되었나요?”

제 두 번째 일생에까지 숙제로 남은 남자의 이름이었다. 아사야로서는 하루라도 빨리 마치고픈 일이었고, 가브리엘에겐 예민한 신경을 건드리는 이름이었으며, 블란테에겐 악몽이었다.

“아사야.”

블란테의 주름진 손이 문득, 아사야의 두 뺨을 감쌌다.

“간만에 나를 보러 와 준 게 아니었어요? 좀 더 다과를 나누었으면 하는데…….”

화제를 돌려 보려는 블란테의 두 눈을, 아사야는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왕좌에 앉고 아들에 이어 손주까지 본 뒤에도, 블란테는 여전했다.

“정말이지……, 다들 나를 너무 아이 취급한다니까. 나는 괜찮으니 이야기해 줘요. 그는 어떻게 떠났나요?”

아사야가 묻자, 블란테 세일산은 뜻밖에 가브리엘을 바라보았다. 서로 간에 말없이 눈빛을 교환하는 두 존재를, 아사야는 당황한 듯 둘러보았다.

“왜 그래?”

그렇게 질문한 뒤 아사야는 스스로 답을 찾았다. 죽음으로 하여금 이뤄지는 것이 흑주술이라 했다. 아사야 세일산의 죽음으로 하여금 가브리엘은 죽지 않는 몸이 되었다. 야베스 세일산도 다를 것은 없었다.

다만 가브리엘은 길게는 영원을 사는 존재이며 그는 백 년이 고작인 인간임이 달랐다.

몇 초간 침묵이 흐른 끝에 시녀가 테이블 가까이 다가왔다. 식어 가는 찻주전자를 데울 요량이었다. 그런 시녀의 손길을 블란테가 만류했다.

“갈 데가 있어, 차는 이제 되었다.”

자리에서 일어서는 블란테를, 가브리엘과 아사야가 조용히 따랐다.

야베스 세일산의 말로로 향하는 길은 인적 적고 컴컴했다. 천장이 낮고 기둥이 띄엄띄엄 놓인 복도를 한참 걷다 보면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등장했는데, 그곳에 그 옛날 용의 철문이라 불렸던 무거운 문 두 짝이 놓여 있었다.

당황한 듯 아사야는 가브리엘의 안색을 살폈다. 그 역시 철문의 유무까지는 알지 못했던 듯 동요한 기색이었다. 그러면서도 가브리엘은 오히려 아사야를 걱정하며 그녀의 손목을 조심스레 잡아 쥐었다.

“난 괜찮아, 가브리엘.”

뜻밖에 아사야는 미소마저 지어 보였다.

“조용히 인사하고 나올 거야. 여기에서 잠시만 기다려 줘.”

경비대원 여럿이 문 앞에 들러붙어, 문고리를 단단히 막아 놓은 쇠사슬을 풀었다. 묵직한 소음을 내며 문고리가 움직였다.

반역자 야베스를 가둔 문이 열린 순간, 아사야는 고민하지 않았다. 컴컴한 어둠 속에 경비대원 여럿이 램프를 달자 자그마한 감옥이 드러났다. 책이나 카펫, 음식은커녕 창문 하나 없는 방이 묘하게 눈에 익숙했다.

‘인과응보야.’

차갑게 생각하고자 노력하면서, 아사야가 반역자의 감옥으로 걸어 들어갔다. 가구라고는 낡은 침대가, 볼 것이라곤 그 위에 누인 커다란 꼭두각시 인형이 전부였다.

자신이 아사야 공주라고 주장하는 이가 비단 어른에 국한되지는 않았다. 그저 엇비슷한 외모를 지닌 자식들을 ‘공주님의 환생’이라며 데려오는 부모들 역시 숱한 탓이었다. 죄 없는 아이들에게 보이기에, 발락이 무너뜨린 왕성 벽면에 뭉개지고 교수형 처벌마저 실패로 돌아간 반역자 야베스의 몰골은 지나치게 자극적이었다.

때문에 블란테가 주문한 것이 속을 비운 꼭두각시 인형이었다. 반역자 야베스의 전신을 가리도록 큰 인형의 머리에는 금색 가발이 쓰였고 얼굴에는 가면이 얹어졌다.

‘금발의 왕자님’, 야베스 세일산은 그 인형 속에 갇혔다.

가만히, 아사야는 그의 옆자리에 섰다. 그를 보자마자 제가 알아본 것처럼, 그 역시 아사야를 알아보았다.

“아사야…….”

그렇게 부를 적에 그 음성이 전과 같으면서도 달랐다. 구겨지고 더럽혀진 글은 읽기 힘든 것처럼, 목소리에도 얼룩과 마모된 흔적이 있었다.

대답 없이, 아사야는 가면 속의 눈동자가 파리한 빛깔로 느릿느릿 움직이는 것을 내려다보았다. 필멸자의 몸으로 죽지 않게 되어, 야베스 세일산은 전신이 부러지고 주름진 채 미라가 되어 가고 있었다.

“당신만큼은 여전해, ……전이랑 아주 똑같군. 꽃처럼…….”

반역자 야베스가 말했다. 그 음성을 듣는 순간 아사야는 이전으로 돌아간 듯한 착각에 잠겼다.

그럴 적에 아사야가 떠올린 순간은 그녀 자신이 화형대에 오르던 날도, 그의 손에 목이 조이던 해의 마지막 날도, 슬픈 마음으로 드레스를 차려 입던 결혼식 날도 아니었다.

아사야가 떠올린 것은 그를 처음 만난 검술 대회날이었다. 제 아름다움에 반했다는 듯 친절하게 행동하며 미소를 짓던 왕자의 얼굴이, 그녀의 머리 안에 떠올랐다.

“아니야.”

천천히, 아사야가 입을 열었다. 외모는 전과 다르지 않을지언정 아사야는, 더는 그의 친절에 감사하며 고개 숙이는 어리숙한 아가씨가 아니었다. 오늘의 아사야는 그때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여전한 건 당신이지, 야베스.”

사실을 알려 주며 천천히, 아사야는 그의 팔 아래를 내려다봤다. 목각 인형을 씌운 것인지 아니면 진짜 손가락인지 분간되지 않을 만치 굳어 버린 손에는, 두툼한 뼈대의 모양과 아주 얇은 가죽만이 남아 있었다.

“이제 그만해도 돼. 이제 그만 떠나. 당신…… 보내 주러 온 거니까.”

그를 다시 만나면 기분이 끔찍하게 나빠질 줄로 믿었던 아사야였다. 그런데 아니었다.

다시 만난 야베스 세일산은 그녀에게 주먹을 휘두르기는커녕 자리에서 일어설 수도 없는 상태였다. 제 편이라고는 무엇 하나 없는 채 버려진 인형처럼 굳어 가는 존재였다. 그런 남자를 바라보며 굳이 공포를 되새길 정도로, 아사야는 연약하지 않았다.

강인하기에 가질 수 있는 감정들이 있었다. 아사야가 느끼는 동정심이 꼭 그랬다.

“난 후회한 적 없어, 아사야……. 그날, 그 소원을 빈 것…….”

성씨를 잃어버리고 더는 왕자가 아니게 된 몸으로, 야베스가 말했다.

“……당신을 다시 만나고 싶었어.”

목재 가면 아래의 푸른 눈을 바라보면서 아사야는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잠깐이나마 그가 ‘다시 만나서 사과를 하고 싶었다’고 말하고, ‘미안하다’ 속삭이진 않을까 기대한 것이었다.

그러나 야베스의 입에서는 늘 그렇듯, 아사야가 원하는 문장이 나올 일이 없었다. 듣고픈 말을 얻어 내려면 아사야는 매달리다시피 신경을 쏟으며 그를 꼬드겨야만 했다. 마지막 인사를 나누는 순간마저 다를 바가 없었다.

천천히 그를 향해 고개를 숙일 적에 아사야는 그의 푸른 눈동자가 제 얼굴을 살피며 떨리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도 아는 것이었다, 제 입에서 미안하다는 말이 나오는 게 마땅한 순서임을. 그리하여 해묵은 감정들을 해소하는 순간 그에게도 영원한 안식이 찾아올 것임을.

그러나 왕자 인형을 뒤집어쓴 순간에도 야베스는 전과 같았다. 저로부터 듣고픈 말을 얻어 내기 위해 아사야가 매달리고, 신경을 써 가며 예쁜 말을 하기를 그는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야베스의 사과엔 그럴 만한 가치가 없었다. 오늘 아사야에게는 그와의 안녕이 썩 중요치가 않았다.

마침내, 아사야가 말했다.

“나도 후회한 적 없어. 그날, 그 소원을 빈 것.”

그와 제 관계가 몹시도 협소하다고, 아사야는 생각했다. 매우 좁고 가파른 탓에 어떤 감정이건 일방향으로만 오가곤 했었다. 이별이라고 다를 게 없었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서로의 안녕일랑 기원해 줄 수가 없는 것이었다.

야베스 세일산이 제멋대로 시작한 관계였다. 아사야는 홀로 그 관계에 마침표를 찍었다.

“잘 가요, 왕자님.”

그녀의 인사를 들은 순간, 미뤄 왔던 죽음이 야베스를 향해 찾아들었다.

그의 눈동자에 파도 같은 눈물이 고이는 것을 아사야는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한때는 푸른 눈의 왕자라며 선망받던 예쁘장한 눈동자는 이내, 무엇도 살지 못할 심해처럼 깊게 가라앉았다. 제 수명의 길이에 맞게 그는 백이십 년을 곪다 죽은 시체로 돌아갔다.

이별은 그렇게 끝이 났다.

죽은 이의 손을 놓고, 아사야는 몸을 돌렸다.

내려왔던 계단을 다시 오르고 보니 어느덧 노을이 진 채였다. 푸르스름한 하늘 밑에서 블란테와 기사단원이 반역자의 말로를 확인코자 기다리고 있었다.

백발 왕의 뺨에 키스를 남긴 뒤 아사야는 멀리 솟은 베데르 성의 망루를 살폈다. 그곳에도 눈짓으로 인사를 마치자, 마침내 모든 숙제를 마친 듯 어깨 위가 홀가분했다.

그제야, 분주한 왕성의 공기 속에 홀로 선 드래곤이 그녀를 반겼다. 걱정 어린 눈으로 제 이마와 뺨, 목과 두 손을 살피는 착한 용을 향해, 아사야가 손을 뻗었다.

“이제 가자, 우리 집으로.”

어린 인간의 작은 손을, 검은 용이 맞잡았다.

아사야는 그렇게 대륙을 떠났다. 진 빚도 숙제도 없이 천공섬으로 오를 적에 떨어지는 귀걸이도 핏물 비도 없었다. 하늘 위에 뜬 섬만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꿈에서 본 그 풍경 그대로.

이제, 행복한 꿈을 꾸었다고 눈물 흘리는 아침은 없었다.

*****************************************************

아지트 소설 (구:아지툰 소설) 에서 배포하였습니다.

웹에서 실시간으로 편리하게 감상하세요

http://novelagit.xyz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