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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천공섬의 봄 (14/16)

외전: 천공섬의 봄



 

하얀 구름이 푸른 하늘을 갈라놓고 있었다. 쏟아지는 햇볕이 아사야의 시야를 발갛고 어지럽게 만들었다.

약한 두통과 멀미를 느끼며 소녀는 떴던 눈을 다시 질끈 감았다. 빛에 눈이 익을 때까지 잠시간 무엇도 하지 않고, 천천히 마음을 가라앉히는 게 최선이었다.

정신을 차리려 애쓸 적에 처음 느낀 감각은 발목을 간질이는 흙 알갱이였다. 거칠고 단단한 흙이 아사야의 복사뼈에 눌린 자국을 남겼고 신발 안까지 침투해 들어왔다. 가려운 감촉에 눈썹을 찡그리며 아사야는 실눈을 떴다. 그리고 근방의 풍경을 둘러보았다.

가장 먼저 바위산이 보였고, 다음으로는 연두색 밀림지대가 눈에 들어왔다. 빽빽이 들어찬 흰 나무숲이며 자연의 질서로 타원형을 이룬 꽃봉오리에 이르기까지, 이곳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아샤로서는 처음이었다.

아샤는 로베쯔를 떠난 적 없는 고아였다. 황폐화된 언덕을 매일같이 오르내리던 소녀에게는 이와 같은 풍경이 비친 적이 없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낯선 동시에 이미 만난 친구처럼 익숙했다. 지독한 데자뷔는 착각이 아니었다. 아사야는 이곳이 어디인가를 알아보았으며 저를 데려온 동행인의 품에 안긴 채였다.

시선을 들어 아사야는 저를 끌어안은 팔과 어깨를, 그리고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의 손이 아사야의 여린 팔뚝을 감싸 쥐고 있었고, 어깨에는 은색 꽃가루가 묻었으며, 보라색 눈동자엔 그녀를 향한 걱정이 넘실거렸다.

검고 짙은 눈썹 사이에 진 구김을, 아사야는 엄지손가락으로 눌렀다.

“가브리엘.”

아사야가 부르자,

“미안해.”

가브리엘이 속삭였다.

“널 힘들게 할 생각은 없었는데……. 내가 너무 빨리 날았나 봐.”

그 말에 아사야는 희미한 미소만 지어 보였다. 아니야, 나는 괜찮아…… 착한 대답을 꺼내 주고 싶었지만 입을 열 수 없었다. 그랬다가는 제 드래곤의 가슴에 신물을 토해 버릴 것 같았다.

멀미에 시달리느라 희게 질린 얼굴을, 아사야는 다시 그의 어깨에 묻었다. 반쯤 누운 채 가브리엘은 제 몸 위에 안긴 열 살 소녀를 토닥거렸다. 단단한 손바닥이 어찌나 크고 손가락은 또 얼마나 긴지, 그가 손을 올리자 아사야의 허리가 전부 가려질 정도였다.

“미안해.”

가브리엘이 또 한 번 속삭였다.

드래곤의 등을 타는 일이, 어린 몸으로 처음임을 잠시 잊은 게 그의 죄였다. 마침내 맞닥뜨린 재회에 흥분한 나머지 제멋대로 속도를 낸 것 또한 그의 죄였고, 그로 인해 의식을 잃고 쓰러진 어린 인간을 안고도 행복감을 감추지 못하는 것 또한 잘못처럼 생각됐다.

가브리엘의 입술이 아사야의 정수리에 닿았다. 부드러운 입맞춤을 느끼며 아사야가 입을 열었다.

“아니야. 괜찮아……, 난 괜찮아.”

느릿느릿, 착한 대답을 늘어놓을 힘이 천천히 돌아왔다.

“기뻐, 가브리엘. 다시 너와 천공섬에 오게 되어서…….”

소녀의 두 팔은 아직 한참 짧았다. 가브리엘의 허리를 힘껏 안고 쓰다듬고 싶은데, 아사야가 보인 동작이라고는 그의 등에 엉거주춤 손바닥을 대고 비빈 게 전부였다.

열 살 아이가 어지러운 속을 가라앉히고 씨근덕대는 숨을 정리할 때까지 가브리엘은 몇번이고 그녀의 등을 쓸어 주었다.

덕분에 아사야의 몸에도 기운이 돌아왔다. 그러나 가브리엘은 아사야가 홀로 걷게끔 내버려 두질 못했다. 자리에서 일어서며 그는 어린 인간을 단단히 안아 들었다.

“……가브리엘, 나 정신은 그대로야.”

민망함을 감추지 못하며 아사야가 속삭였다. 가브리엘의 귀로 듣기엔 영 설득력이 없는 말이었다. ‘가브리엘’ 하고 저를 부르는 목소리가 꾀꼬리처럼 여리고 그 발음 역시 어린아이답게 어눌한 데다,

“내려 줘.”

말만 그럴 뿐 두 팔이 그의 목을 꼬옥 끌어안았기 때문이었다.

“구경할 게 산더미야.”

가브리엘이 대꾸했다.

“네 걷는 속도로는 백 년이 지나도 다 둘러보지 못할 게 뻔해.”

“……나라고 백 년이나 늦을 계획은 아니었다, 뭐.”

핀잔에 입술을 삐죽 내밀기도 잠시였다. 이내 아사야의 얼굴 위엔 발그레한 꽃이 피었고 잠시나마 토라졌던 심장도 말랑하게 녹아내렸다. 천공섬의 새로운 풍경에 매료된 탓이었다.

“와…….”

새카만 호수를 바라보며 아사야는 입을 다물 줄을 몰랐다. 발 디딜 틈 없이 비좁게 자란 열대우림 사이에 갑작스레 자리 잡은 호수는 답답한 시야를 뻥 뚫을 만큼 넓었다. 잔잔한 물결이 어째서 검정색인가 하고 자세히 들여다보니, 호수를 가득 채운 물은 투명한 빛깔이나 바닥이 죄 검은 조약돌로 채워진 것이었다.

“내려 줘, 구경하고 싶어.”

어린 인간이 말하자 가브리엘이 말 잘 듣는 시종처럼 몸을 숙였다. 바닥에 발을 딛자마자 아사야는 낡은 신발을 벗었다. 검은 조약돌의 감촉을 고스란히 느끼기 위해서였다.

“예쁘다…….”

아사야가 속삭였고,

“예쁘다고?”

가브리엘이 되물었다. 그의 음성에 놀란 기색이 묻어나는 것을 아사야는 눈치채지 못했다. 다만 미소 지었다.

“응. 너무 예쁜 곳이야.”

오래전 발락이 누워 몸부림을 친 자리를, 아사야는 맨발로 밟았다. 돌과 돌 사이에 흐르는 맑은 물은 어디에 흡수되지도 햇볕에 증발하지도 않는 가브리엘의 눈물이었다.

아사야는 그 속을 깊이 들여다보며 아름답다 감탄했지만, 새카만 호수에는 그럴 만한 가치가 없었다. 검은 용의 눈물에서는 어떤 물고기도 살지 못하고 어느 정령도 그 물을 긷길 원치 않는지라, 그 자리에 고인 채 방치되어 우울한 호수가 된 게 전부였다.

말라 죽는 한이 있어도 나무뿌리조차 마시길 거부한 물에, 아사야는 발을 담갔다.

“여기에 조그만 배를 띄우면 좋겠어. 아주 작아서 너랑 나만 탈 수 있는 걸로. 그리고, 저기에 작은 테이블을 놓고 싶어.”

아사야의 손짓을 따라 가브리엘이 고개를 돌렸다. ‘저기’란 호수의 중앙, 불쑥 존재하여 섬처럼 돌출된 바위를 뜻했다. 오래전에 가브리엘은 저 바위에 제 머리를 찧어 죽고자 시도했었다.

“날이 좋은 날 저기 앉아서, 햇볕에 까만 돌이 반짝이는 걸 구경하고 그림을 그릴래.”

아사야가 그렇게 말한 순간 가브리엘은 이전의 그 자신을 잊어버렸다.

어쩌면 아사야는 보통의 어린 인간이 아니라 타고난 최면술사일지도 모른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녀가 꾸린 문장 몇 가지에 발락의 기억이 흐려지고, 비극의 잔해에 불과하던 호수가 멋진 휴양지로 돌변할 이유가 없었다.

그 점을 꼬집어 말하는 대신,

“너 그림 못 그리잖아.”

가브리엘은 더 신경 쓰이는 부분을 지적했다.

“뭐어?”

그의 말에 아사야는 놀란 듯 입을 크게 벌렸다. 황당하다는 듯 실소를 흘리며 아사야가 두 손을 제 허리춤에 올렸다.

“무슨 소리야. 고아원에 있던 친구들은 나더러 천재 화가라고 그랬거든?”

“네가 꼬마인 줄 알고 그런 거겠지.”

재깍 돌아온 대답 역시 황당무계하기 그지없었다. 가브리엘의 얼굴을 노려보느라 아사야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몇 분 전까지만 하더라도 어린아이 취급을 하며 걷지도 못하게 안아 들더니, 이제 와 ‘너는 보통 꼬마가 아니잖아’ 라며 저를 놀리다니 얄밉기가 하늘을 찔렀다.

‘흥’, 아사야가 콧방귀를 뀌었다. 어리숙한 얼굴과 작은 키로 인해 그녀의 행동들은 조금씩 연극배우처럼 과장되어 보였다.

“아닌데요, 아저씨. 저는 열 살 꼬맹이인데요? 아사야는요, 아무것도 모르는 착한 아이예요.”

턱을 들고 뒷짐을 진 채 아사야는 상체를 이리저리 흔들었다. 고아원에서 보고 익힌, 어린아이들이 으레 보이는 동작 중 하나였다. 작은 어깨를 좌우로 흔들며 어린 시늉을 할 때면 니칼 선생님은 물론이며, 무섭기가 태풍 같던 원장 선생님도 화를 풀곤 했었다.

그러나 가브리엘이 보인 반응은 그들과는 달랐다. 그는 모로 기운 아사야의 얼굴을 말없이 바라보았고, 천천히 손을 뻗더니 그녀의 어깨를 쥐고 당겼다. 단숨에 아사야의 가벼운 몸은 가브리엘의 품에 안겼다.

“……가브리엘?”

놀란 아사야가 불러 보아도 돌아오는 말은 없었다. 그저 깊은 포옹에 조금 더 힘이 실렸을 뿐이었다. 와중에도 그는 저로 인해 아사야의 피부에 멍울이 질까 염려하느라 주먹을 꽉 말아 쥐고 있었다.

“그래, 가브리엘. 나도……, 나도 네가 그리웠어.”

들은 말은 없었으나 아사야는 대답했다. 힘을 덜어 내려 애쓰는 연인을, 가진 힘을 전부 쥐어짜 내어 끌어안기도 잊지 않았다. 소녀의 몸으로 얼굴이 발개지도록 세게 안아 주어야 가브리엘의 가뿐한 포옹에 필적할 수 있었다.

한참간 포옹을 나눈 끝에 가브리엘은 젖었던 발목이 건조해진 것을 느꼈다. 오래도록 고여 있던 눈물이 이제야 마르기 시작했다.

“……집을 보러 가자.”

어린 인간의 볼에 제 뺨을 대고, 가브리엘이 귓속말했다.

“집?”

“우리 집.”

아사야의 눈이 커다래졌다. 그녀의 어린 얼굴은 너무나 작고 두 눈동자는 그에 비해 지나치게 커 보여서, 더 놀라게 했다가는 금색 눈동자를 떨구기라도 할까 무서울 지경이었다.

그렇게 큰 눈동자를 보옥처럼 빛내며 아사야가 소리쳤다.

“우리, 집이 있어?”

기쁜 듯 외치는 소리에는 설움마저 묻어났다. 눈물을 찔끔 흘리며 아사야는 폴짝 뛰어올랐다. 가브리엘의 옆구리에 소녀의 두 다리가 감겼다. 데려가 줘…… 온몸으로 외치는 소녀를 가브리엘은 가뿐히 안아 들었다.

검은 용의 품에 안겨 아사야는 사방을 둘러보았다. 이어 만난 풍경들에 데자뷔는 없었다. 숲을 벗어나 만나는 모든 것이 생면부지인 덕이었다.

새 책의 첫 페이지를 펼친 순간처럼 아사야는 주위를 둘러싼 모든 것에 감탄했다. 작은 밭에 심긴 작물이 만든 열매들과 과수원의 달콤새콤한 향기, 납작한 돌을 깔아 만든 평평한 길을 지나 거대한 성벽에 이르자, 심장이 사나운 말처럼 뛰어 댔다.

성벽은 돌을 깎고 부수어 만든 듯한 모양새로 거칠었으나 성문 위에 천둥새가 앉아 있었다. 살아 있는 것으로 착각될 만치 섬세하게 깎아 만든 천둥새는 사자의 머리에 독수리의 형상을 하여 두 날개를 양방향으로 뻗은 채였다.

거대한 날개 아래에 각각 쌍여닫이 구조의 성문이 활짝 열려 있어 마치 두 팔 벌린 천둥새로부터 성대한 환영을 받는 듯했다. 두 짝의 성문에는 두 마리 사슴이 새겨져 있되 각기 좌와 우로 향하는 모습이었으나, 자세히 보면 그들 꼬리가 천둥새의 발에 잡힌 채였다.

문지기 없는 성문을 지날 때에 아사야는 거대한 깃발에 정신이 팔렸다. 바람에 날려 펼쳐질 때마다 검은 깃발에 새겨진 노란 눈이 사방을 내려다보았다. 깃대 위로는 푸른 새 두 마리가 날고 있었는데, 다시 보니 꼬리가 긴 드래곤이었다. 아사야보다도 나이가 어려, 성체가 되지 못한 작은 용이었다.

이어서 생명력이 끓어 넘치는 왕성의 풍경이 아사야를 맞이했다. 성벽과 가까운 외곽에는 거대한 둥지를 튼 언덕들이 자리했고 중앙에 우뚝 선 거대한 성에 가까이 향할수록 작은 건물들이 그 수를 늘려 나갔다. 돌을 깔아 만든 길목은 거미줄처럼 이리저리 이어져 있었다.

멀찍이 제 둥지에 몸을 틀며 백색의 용 하나가 머리를 내밀었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아사야는 얼어붙고야 말았다.

“가브리엘……, 여기가 어디야?”

놀란 마음에 감탄하는 것조차 잊어버린 채 아사야가 물었다. 그러나 가브리엘로부터는 돌아오는 답이 없었다. 말로써 설명하는 대신 그는 성으로 향하는 풍경 곳곳을 직접 보여 주고자 했다.

천공섬에 똬리를 튼 용은 당장 눈앞에 보이는 수만 해도 스물이 넘었으며, 인간의 경우 그보다 많았다. 가브리엘의 품에 꽉 안긴 채 아사야가 그들을 바라보는 동안, 그들 역시 길 밖으로 나와 새로운 아이를 구경했다.

몇몇 이들과 눈이 마주칠 때마다 아사야는 그들이 보통의 사람은 아님을 알아챘다. 인간의 형상을 하였을 뿐 절반은 폴리모프를 한 용이었으며 나머지는 드래곤의 피를 물려받은 혼혈이었다. 순수한 인간은 극히 일부로 생각됐다.

‘어쩌면 나만 인간인지도 몰라…….’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까 모르게 되어 아사야는 가브리엘의 어깨를 꼭 쥐었다. 그러자 긴 머리칼을 여러 갈래로 땋아 내린 여자가 옆으로 다가오더니, 아사야의 품에 꽃 한 송이를 넣어 주었다. 낯선 여인의 미소를 바라보며 아사야는 부드러운 꽃줄기를 손에 쥐었다.

“아…….”

어린 인간이 무어라 답하고자 입을 열었지만, 그럴 새가 주어지질 않았다. 가브리엘이 빠른 속도로 걸어 아치형의 성문 앞에 도착했고, 지체 없이 성 안으로 들어선 탓이었다.

연인의 어깨 위에 턱을 올리고 아사야는 바깥에 선 존재들을 바라보았다. 인간의 모습을 한 드래곤들이 아사야의 이마와 눈동자, 뺨을 살피고자 고개를 기웃거렸다. 성문이 닫히기까지 그들은 제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막막함에 집어먹은 겁이 해소되자마자 아사야는 깨달았다. 왕성의 드래곤들은 하나같이 저를 반기고 있었다.

천공섬에는 시도 소설도 연극도 없었다. 용들의 언어는 사실만을 기록했다. 지나간 역사만이 종이에 쓰일 자격을 지녀 책으로 만들어졌다. 개인적인 성향과 각기 다른 본성을 이유로 동족에 대한 연대란 없이 흩어져 지내온 세월이 수백 페이지였다. 수백 장의 각기 다른 역사 끝에, 최초로 건설된 드래곤의 국가를 천공섬으로 명시해 놓았다.

“이제는 가브리엘로 이름을 고친, 발락으로 하여금 열의 순혈과 수십의 혼혈이 모여들다.”

그것이 80년 전의 기록이었다. 마물로 취급되어 대륙에서 내쫓겨 섬과 심해에 숨어 살던 수십의 드래곤에게 80년의 시간은 나라를 건설하기 충분한 기간이었다.

오늘날 천공섬은 세계에서 가장 머릿수가 적은 나라이며 동시에 가장 강력한 국가였다.

역사를 통해, 용들은 아사야를 알았다. 잠든 용들을 깨워 낸 대륙의 재앙이 어린 공주의 희생에 기반하였음을 몰라서는 안 됐다.

빼앗긴 마력과 일족의 힘을 돌려준 단검마저 ‘아사야의 열쇠’라 불렸으니, 천공섬에는 그 이름을 모르는 드래곤이 없었다.

“생각보다 더 작은데.”

야속하게 닫힌 문을 바라보며 금발의 용이 말했다.

“우리 때문에 겁에 질린 거 같아. 인사도 받아 주질 않던데.”

팔짱을 낀 채 늙은 용이 중얼거렸고,

“그러게 다 같이 인간 모습으로 있자니까, 그새를 못 참아서 멍청하게 폴리모프를 푼 놈들이 잘못이지.”

백색 머리칼을 은사처럼 늘어뜨린 용이 잔소리를 했다. 그러자 멀찍이 언덕 위에 똬리를 튼 용들이 이런저런 변명들을 꺼내 놓기 시작했다. 수십의 드래곤은 그렇게 성문 앞에 모여 한참을 웅성거리다가, 아쉬움으로 자리를 떠나야 했다.

한동안 용들의 대화 소재는 작고 어린 인간일 성싶었다.


 

.*. *. *. *. *. *.


 

“어딜 돌아다니시다 이제 오십니까!”

천둥 같은 소리가 아사야를 놀라게 했다. 가브리엘이 천천히 그녀를 복도에 내려 주었고, 아사야의 흰 발은 그보다 더욱 창백하고 매끄러운 바닥에 닿았다.

멀리, 성난 목소리의 주인공이 다가오고 있었다.

“일이 잘못된 줄 알았다고요. 와이번을 타고 정찰까지 나섰단 말입니다!”

얼굴에는 금색 보호모를 쓰고 전신에 갑주를 두른 이가 외쳤다. 실루엣만 보면 언뜻 남자인가 싶었으나, 자세히 보면 골반의 굴곡이며 음성의 높낮이가 여성이었다. 그러나 남성이라 착각해도 좋을 만큼 키가 크고 체격이 좋은 자였다.

아사야가 만나 본 이들 중 가장 큰 여자는 블란테 세일산이었는데, 견고하던 순위에 변동이 생겼다.

벌어진 어깨 끝이 직선으로 떨어지고 길쭉한 목을 곧게 편 여인은 아사야 앞에 두 발을 멈춰 세웠다. 대륙에서 지낼 적에 마주한 왕성의 기사들도 아사야 앞에 이처럼 정자세를 취하진 않았었다.

얼굴 전체를 가린 보호모를, 아사야는 한참 올려다보았다. 여인의 턱이 보일 듯 말 듯했다.

“안녕하세요…….”

아사야가 속삭였다.

그러자 여인이 아사야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단단한 갑주가 바닥과 부딪치며 ‘캉’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예리한 소음이 복도 끝까지 울리는 통에 아사야는 정신이 없었다.

큰 눈을 깜빡이며 살펴볼 적에, 거대한 여인이 쓴 보호모의 중앙에는 날렵하게 꼬집은 듯 돌출된 선이 있었고 그를 중심으로 파도와 같은 날개 무늬가 뾰족한 광대 모양을 자아냈다. 그처럼 세밀한 세공은 드워프의 손으로나 가능함을 알기에, 아사야는 입을 벌린 채 그것을 관찰했다.

“…….”

열 살 소녀 앞에 무릎 꿇은 채 그녀는 어떤 말도 않았다. 아사야는 어리둥절해져 그녀와, 제 옆에 선 가브리엘을 번갈아 살폈다.

“나자렛.”

보다 못해 가브리엘이 입을 열었다.

“네 어머니께 인사해야지.”

그 말에 아사야는 화들짝 놀랐다. 제자리에서 튀어 오를 정도였다. 눈앞의 거대한 여인이 제 아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기까지 잠깐의 시간이 더 필요했다.

그러나 엘라는 어머니께 몇 초의 여유조차 주지 못했다.

가브리엘의 딸, 아사야의 아이가 보호모를 벗었다. 황금색 장식이 걷힌 뒤에 그녀의 얼굴엔 더욱 밝은 태양 두 개가 떠 있었다. 검은 머리칼이 땀에 젖어 들러붙은 이마와 짙은 눈썹, 크게 뜬 눈을 아사야는 홀린 듯 담았다.

“당신을 다시 뵙길 오래도록 기다렸습니다.”

엘라가 말했다.

“반가워요. 엘라 나자렛입니다.”

그러고는 고개를 깊이 숙였다.

놀람을 감추지 못해 아사야는 입을 크게 벌린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엘라의 외모는 이십 대 중후반은 되어 보였고, 나이는 백 하고도 열이었다. 반면 아사야의 나이는 열 살로 그녀와 한 세기는 차이가 났다. 전생의 일생을 전부 합하더라도 서른둘에 불과한, 아사야의 눈동자가 연상의 딸을 향했다.

세상에서 가장 이상한 모녀는 그렇게 재회했다.

긴장한 탓에 귀까지 벌겋게 붉히는 엘라의 머리칼을 아사야가 정리했다. 이마에 붙은 흑발을 떼어 내고 옆머리를 귀 뒤로 넘겨주자 엘라는 흥분한 듯 더운 숨을 쉬었다.

“엘라 나자렛……, 좋은 이름이야.”

아사야가 말했다.

“‘아사야’도 아니고, ‘가브리엘’도 아니네.”

그렇게 덧붙일 적에 아사야의 뺨에 미소가 번졌다. 그 말을 기다렸다는 양, 가브리엘 역시 그녀를 따라 웃었다.

저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농담을 나누는 부모를, 엘라는 무릎 굽힌 채 올려다봤다.

“네 이름은 엠마오가 지어 주었어?”

다시, 아사야가 엘라에게 물었다.

“그렇습니다.”

엘라는 즉답했다.

“엠마오는…… 너와 잘 지내었어?”

“아뇨. 할머니께서는 자주 우셨습니다.”

거침없는 대꾸에 아사야의 두 눈이 동그래졌다.

벌어진 입술과 창백해진 안색이 무얼 의미하는지 살필 정신이 엘라에겐 없는 듯했다. 그녀는 듣기 좋은 거짓말은 할 줄을 몰랐으며 사실을 명시하는 데에만 소질이 있었다.

“말년에는 입만 열면 공주님 이야기를 늘어놓았고 기억력이 나빠져 저를 아가씨라 불렀습니다. 매해 당신의 생일과 기일을 꼬박꼬박 챙겼고, 대체로 쿠키를 구워다 놓고 엉엉 우는 날이었죠. 저를 볼 때마다 어디가 공주님을 닮았는지 설명하기를 좋아했습니다.”

멈출 줄 모르는 상세한 폭로를,

“엘라.”

가브리엘이 가로막았다.

‘왜 그렇게 부르시냐’는 듯 눈썹을 추켜 올린 채 제 아버지를 보았다가, 엘라는 아사야의 기죽은 어깨와 속상한 듯 다문 입술을 발견했다. 작은 얼굴에는 아직 젖살이 붙어 있어, 희미하게 서린 슬픈 기운이 더욱 안쓰럽게 느껴졌다.

“……그래도 잘 지냈습니다.”

애써, 엘라가 거짓말을 덧붙였으나 어머니의 기분을 풀 기회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

애매한 침묵이 세 사람을 감쌌다. 가브리엘은 저를 닮아 융통성이라곤 눈을 씻고도 찾아볼 수 없는 딸을 노려보았고, 아사야는 엠마오를 향한 그리움과 미안함에 기가 죽었다. 엘라의 경우 당혹감에 목을 붉힌 채 눈치를 보기 바빴다.

“그럼…… 마저 구경을 마치세요. 인사드렸으니 제 용무는 끝났으니까요.”

자리에서 일어서며 엘라가 말했다. 저를 보기 싫으실 테니 사라져 드리겠단 의미였다. 질질 끌 것 없이 즉시 돌아서는 엘라를 향해 아사야가 손을 뻗었다.

“엘라, 잠깐만!”

그녀의 조그마한 손가락이 엘라의 바지 무릎을 움켜쥐었다. 어머니의 약한 부름은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명령이나 진배없었다. 뻗었던 발을 우뚝 멈추고, 엘라는 열 살 소녀의 말을 들어야 했다.

“네, 말씀하세요.”

긴장한 채 엘라가 말했고,

“한 번…… 널 안아 봐도 될까?”

눈시울이 붉어진 채 아사야가 속삭였다.

어색한 기색을 감추지를 못하며, 엘라는 가브리엘의 눈치를 한번 살폈다. 팔짱을 낀 채 그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가브리엘의 신호에 따라 엘라는 두 무릎을 천천히 바닥에 꿇었다. 그래야만 조그마한 어머니가 저를 안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두 팔을 엘라의 곧은 목에 두르자 아사야의 몸은 다람쥐처럼 작아 보였다. 오밀조밀 작은 입을 열어 아사야는, 엘라의 귀에 들리게끔 조용한 말을 속삭였다.

“같이 있어 주지 못해서…… 엄마가 미안해.”

입을 다문 채 엘라는 턱에 힘을 주었다. 아니라고, 대답하고 싶었지만 혓바닥이 굳어 버린 듯 움직이질 않았다. 그런 의미로 한 말이 아닙니다, 이미 지난 일이라 다 괜찮아져 꺼낸 투정이었어요…… 변명하는 대신에 엘라는 아사야의 머리칼에 코를 묻었다. 타인의 살냄새로 하여금 위로를 얻기란 처음 있는 일이었다.

긴긴 포옹이었다.


 

.*. *. *. *. *. *.


 

가브리엘이 제 성씨를 나자렛으로 붙이고, 엘라에게 왕좌를 넘겨주었단 말을 들었을 때 아사야는 놀라지 않았다. 무얼 차지하거나 빼앗는 일에는 욕심이 없고, 그 자신도 제 성미를 아는 남자였다. 딸에게 왕홀을 쥐여 준 것이 가브리엘다웠다.

‘가브리엘 나자렛’을 바라보며 아사야는 한참을 말없이 미소 지었다. 어린 인간의 마음이 넘치는 애정으로 포화 상태인 줄을 꿈에도 모르는 채,

“내가 왕이 되길 원한다면 엘라에게 비키라고 할게.”

허황된 소리를 늘어놓는 것까지 가브리엘다웠고,

“네가 직접 왕좌에 앉고 싶으면 엘라에게 비키라고 하면 돼.”

2절까지 완성하는 것마저 지독하게 가브리엘다웠다. 웃지 않고 버티면 그가 또 무슨 소리를 할까 궁금했지만, 아사야는 폭소를 참아 내질 못했다.

“우리 딸한테 무슨 소릴 하는 거야.”

깔깔 웃으며 아사야의 작은 몸은 침대 위를 굴러다녔다. 어린 소녀는 물론이며 어지간한 문짝만큼 큰 키를 지닌 가브리엘이 눕기에도 충분히 큰 침대였다. 이불에서는 점심 해의 따듯한 향이 풍겼고 시트 위로는 넓은 창의 그림자가 그물망처럼 구불구불 흘렀다.

가브리엘과 저를 위해 마련된 방, 그와 함께 눕는 침대, 아랫니가 보이도록 깔깔거리며 나누는 수다…… 아사야를 행복하게 하는 모든 것이 사각 공간에 존재했다.

종일 웃음이 끊이지 않는 아사야의 보드라운 뺨에 가브리엘의 손끝이 다가가 붙었다.

“오늘은 내가 널 너무 많은 곳에 끌고 다녔어. 내일은 푹 쉬도록 해.”

그가 속삭였다. 아사야는 미소로 답했다.

“바보 같은 소리 마, 가브리엘. 나는 오늘 최고의 하루를 보냈어. 네가 종일 나를 안고 다녔잖아……. 내 다리로 걸은 거리라곤 열 발짝도 안 될 거야, 아마.”

오늘의 가브리엘은 아사야에게 기쁜 선물과 같았다. 종일 사람의 모습으로 저와 함께했음에도 그는 일말의 부담조차 느끼지 않는 기색이었다. 빼앗긴 그림자 한 올 없이, 건강하며 온전한 힘을 지닌 가브리엘은 그렇게나 평온했다.

그 덕분에 종일 가슴이 떨리고 설렌 하루였다. 작은 전신에 아드레날린이 빗발치는 통에, 아사야는 아직도 온몸이 쌩쌩했다. 불편한 곳이라고는 뺨이 전부였는데, 그마저 오후 내내 웃고 다닌 탓에 광대가 아린 것뿐이었다.

아사야의 어린 손이 그의 눈가와 뺨, 턱과 아랫입술을 매만졌다. 그 모양을 기억하고 영원히 잊지 않으려는 맹인처럼 느릿하고 지극한 손길이었다.

서로를 마주 볼 때 그들은 농아래도 무관했다. 하는 말도 듣는 귀도 없이 침묵 안에 잠긴 채로 그렇게나 편안할 수 없었다. 이대로 시간이 멈춘대도 아무런 번뇌 없이 안전할 것 같았다.

고요 속에 흐르는 시간을 먼저 깨운 쪽은 가브리엘이었다.

“아사야.”

달이 들을까 염려하는 양 작은 소리였다.

“응, 가브리엘.”

“입 맞추고 싶어.”

아사야가 숨을 짧게 들이켰다. 그러고는 내쉬는 법을 잊어버렸다.

가브리엘은 눈도 깜빡이지 않고 어린 인간을 보고 있었다. 보라색 눈동자에 제 모습이 비치기를, 얼마나 오래도록 깊이 소망한 아사야인지 그는 모를 것이었다.

대답 대신, 아사야는 눈을 감았다. 그녀에게는 오늘 하루가 고아 아샤의 일생을 합한 것보다 훨씬 길고 값졌다. 가브리엘의 입맞춤으로 하루를 마친다면 그보다 더 찬란할 순 없을 것이었다.

부드러운 감촉이 입술 위에 눌렸다. 확인 도장이라도 되는 양 한곳에 맞댄 채, 오래도록 머무르는 입맞춤이었다.

그렇게 한참, 아사야가 내심 그의 이름을 네 번 부른 뒤에야 가브리엘이 고개를 떼어 냈다. 긴장한 나머지 움츠린 어깨가 얼얼해 아사야는 움직이질 못했다. 얼어붙은 그녀를 대신해 가브리엘은 동그란 이마와 예쁜 눈썹, 말랑한 뺨과 자그만 턱에 번갈아 입을 맞췄다.

“이제야…… 잠을 청할 수 있겠어.”

긴 불면증의 막이 내려감을 느끼며, 가브리엘이 말했다.

그를 따라 고개를 끄덕인 뒤 아사야는 제 목 위로 덮어 주는 이불을 받았다. 한 이불 밑에 나란히 누워, 가브리엘은 아무런 뜻 없이 ‘아사야’ 하고 그녀를 불렀다.

“아사야.”

불렀다가,

“아사야.”

다시 부르고는,

“아사야…….”

저 혼자 만족한 듯 미소 짓는 식이었다. 그 모습이 아주 귀엽고 조금은 안쓰러워, 아사야는 그의 어깨에 제 고개를 바짝 붙였다. 그러고는 서로의 숨결이 들리도록 가까운 거리에서 잠을 청했다.

먼저 곯아떨어진 쪽은 가브리엘이었다. 그는 자그마치 백 년의 잠을 미뤄 온 남자였다. 공주, 천사, 여신, 미녀…… 그런 수식어를 지닌 여자를 찾아 온 대륙을 헤매어 다니길 백 년을 했다.

그러나 막상 제 연인을 발견한 날, 고아원의 운동장에 앉아 꽃을 엮는 그녀를 본 순간에는, 용기가 나질 않고 제 영혼을 추악하게 느낀 그는 괴물이었다.

아사야 아졸의 인생을 엉망으로 비틀어 놓은 주제, 저를 위해 죽음을 선택하게 만든 처지에, 백 하고도 아홉 해를 거쳐 다시 그녀를 옭아매려는 괴물. 집착 덩어리. 불운한 폐허. 재앙을 안기는 존재…… ‘가브리엘’, 그렇게 불릴 자신이 도무지 나질 않았다.

때론 광인처럼 때론 거지 같은 행색으로, 동정을 받고 혐오를 받고 필요하다면 인간을 고문하고 죽이기도 하며 아사야를 찾은 가브리엘이었다. 그녀인 척 연기하는 자와 그녀라고 오해를 산 자를 만나기가 백여 년간 수백도, 수천도 아닌 수만 명이었다.

너무 좋아해서 그랬다. 너무 아껴서 그랬다.

그러나 같은 이유로, 그는 원피스에 흙을 묻히며 꽃을 엮는 어린 인간에게 다가갈 수 없었다. 그녀를 좋아하고 아끼기 위하여 그녀 곁에서 사라져야 할 것은 그 자신임을, 불현듯 깨달은 것이었다.

그래서 지켜만 보았다. 아주 오래전, 그 자신이 떨어져 만들어 낸 어두운 동굴에서 만난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어리고 여린 아사야의 얼굴을 그는 멀찍이서 바라만 봤다.

커다란 몸을 훤히 드러낸 채 눈에 띄지 않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는지, 고아원의 아이들 중 여럿이 그를 힐끔거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소년 하나가 아사야에게 말을 수군거렸다. 그 바람에 그의 어린 인간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리고 내달리기 시작했다.

가브리엘이 재빨리 그림자에 몸을 숨긴 탓에 그녀는 숲길까지 내달렸다. 전에 본 적 없이 잽싼 것을 보면, 이번에야말로 아사야는 건강한 몸을 얻은 듯했다.

“가브리엘?”

나무를 향해 소리치는 아사야를 가브리엘이 소리 없이 쫓았다.

“가브리엘…….”

눈물 흘리는 어린 인간의 머리를 그는 상상으로 쓰다듬었다. 울지 마, 그렇게 말했다. 얼마 뒤면 네 생일이잖아…… 그렇게도 말했다.

아사야가 이전 생애의 생일을 챙기길 원한다면 그날이 오기 전에, 누구이건 저보다 나은 이가 그녀를 찾을 것이었다. 벌써 제 귀에 들어오도록 소문이 났으므로, 몇 주 내로 그녀의 후원자가 되겠노란 귀족이 줄을 이루리라. 그리되면 대륙의 국왕이 그녀를 데려다가, 이번에야말로 행복한 공주로 만들어 줄 것이었다.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나무뿌리에 주저앉아 우는 아사야를 내려다보며, 가브리엘이 속삭였다.

“두 번 다신…… 널 불행하게 하지 않을 거야.”

눈물 젖은 두 눈이 달빛 아래 그렁그렁했다. 어슴푸레한 밤의 공기를 들이쉬며 가브리엘은 무거운 눈을 끔벅였다. 언제부터 잠에 빠진 것인지 어디부터가 꿈이었는지 그는 일순 분간하지 못했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깨달음과 함께, 가브리엘은 몸을 번쩍 일으켰다. 그녀를 위해 준비한 방, 푹신하고 넓은 침대의 아주 작은 면만을 차지한 채 아사야는 울고 있었다. 가로로 흐른 눈물방울이 그녀의 작은 콧대를 지나 베개 시트에 스몄다.

왜 우느냐고, 묻고자 연 그의 입을 아사야는 이른 대답으로 가로막았다.

“무서워, 가브리엘.”

어린 인간이 그렇게 말했다. 그처럼 가브리엘을 소스라치게 하는 주문도 없었다.

“뭐가 무서워? 도대체 무어가……. 아사야, 울지 마.”

어느 때보다 더 야단을 떨며 가브리엘은 아사야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세게 잡으면 부러질까, 당겼다가 빠져 버릴까, 열 살 아사야를 대할 적엔 모든 게 모험이고 위험이었다.

조심스럽게 제 품 안에 끌어안자 아사야는 파도에 시달리는 배처럼 그의 몸 위로 미끄러졌다.

“모든 게 꿈만 같아. 이 모든 게…….”

그리고 의외의 답을 꺼내 놓았다.

“……내일이면 잠에서 깰까 봐 무서워. 눈을 뜨면…… 내 옆자리에 다른 사람이 있을까 봐 무서워.”

작은 충격이 가브리엘의 머리를 때리고 지났다. 손바닥을 펼쳐 그는 추운 사람처럼 몸을 떠는 아사야의 등을 감싸 안았다. 고아원에 숨어 지낸 그녀의 허리는 살점 없이 깡마른 탓에 옴폭 들어가 있었고, 갈비뼈의 감촉이 오돌토돌하게 도드라졌다.

“……내일이 지나면 알게 될 거야.”

가브리엘이 속삭였다.

“이 모든 게 꿈이 아니라는 걸……. 내일이 지나도 나는 네 옆에 있을 거야.”

“그럼, 내일 밤에 다시 무서워지면?”

“그래도 괜찮아. 하루가 지나면 다시 알게 될 테니……. 두 번 다신 너를 두고 가지 않을 거야. 네가 백 번 천 번 나를 떠민다 해도.”

아사야는 제 드래곤에 대해서라면 그 자신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이었다. 가브리엘은 아이를 달래는 일에 무척 소질이 있었다. 적어도, 그 아이가 어린 날의 아사야라면 의심의 여지없이 그러했다.

“가브리엘, 부탁이 있어.”

그의 가슴에 눈물을 묻히며 아사야는 응석을 부렸다.

“내일이 오는 걸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 해를 보러 가고 싶어.”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가브리엘이 두툼한 이불로 아사야의 몸을 감쌌다. 어른을 위한 큰 이불 절반에 그녀의 몸이 덮였고, 절반은 생선의 꼬리처럼 주르륵 늘어졌지만 괜찮았다. 이불 끝을 더럽히는 대가로 아사야가 춥지 않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했다.

이불 속에 돌돌 말린 아사야를 번쩍 안아 들고, 가브리엘은 걷기 시작했다. 방을 나서 기나긴 복도를 지나, 성문 밖을 나서기까지 일말의 머뭇거림도 없었다. 천공섬의 아침은 일찍 오기 때문에 속도를 맞춘 것이었다.

덕분에 아사야는 거대하고 힘없는 스크롤 서류가 된 기분이었다. 그 황당함에 눈물이 쏙 들어갔다. 투정을 부리던 어린 마음도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천공섬의 왕성에 놀라운 점이 하나 있다면, 성벽을 둘러싼 경관에 아주 약간의 흐트러짐조차 없단 부분이었다. 섬의 끄트머리 풍경은 아사야의 기억과 조금도 다르지가 않았다. 깎인 나무 하나, 벌초당한 야생 꽃 한 송이 없이 모든 게 제자리에 온전했다. 함께 해를 맞이했던 바위도 마찬가지였다.

어슴푸레한 하늘에 아직 덜 진 별이 떠 있었다. 차가운 돌 바위에 앉아, 가브리엘은 이불 더미의 어린 인간을 제 무릎 사이에 앉혔다. 그러자 아사야는 솜으로 된 날개를 가진 새처럼 이불을 펼쳐 가브리엘의 어깨 위로 넘겨주었다.

한 이불을 덮고 겹쳐 앉은 채 두 사람은 새벽의 하늘을 바라보았다. 검은 용의 팔을 울타리 삼으니, 눈앞에 펼쳐진 하늘의 높이조차 아사야를 두렵게 하지 못했다.

소리 없이, 그들은 해가 뜨길 기다렸다.

그날의 태양은 어느 때보다 찬란했다.


 

.*. *. *. *. *. *.


 

열한 살이 되던 해에 아사야의 앞니가 빠졌다. 왕성에 거의 살다시피 하는 드래곤 여섯을 초대하여 처음으로 벌인 다과회에서, 첫 번째 쿠키를 씹자마자 이를 흘린 것이었다. ‘툭’ 떨어진 이가 마른 무릎 사이로 떨어져 대리석 바닥을 나뒹굴었다. 모든 손님이 그 이를 보았고, 깜짝 놀라 소스라쳤다.

특히나 가브리엘의 반응이 유난스러웠다. 그는 아사야의 빠진 이를 결코 모른 척할 수 없었고, 상석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제 손톱보다 작은 앞니를 조심스레 주웠다. 그러고는 정성껏 닦아 냈다. 엘라의 유치도 챙기지를 않아 단 하나도 남지 않게 한 아버지인 동시에, 그는 제 애인의 앞니를 챙기기로는 부산스러운 남자였다.

“흐걸 왜 주워?”

휙휙 바람이 새는 발음으로 아사야가 물었고,

“인간들은 드래곤 비늘도 발톱도 이빨도 다 줍잖아. 나도 네 이를 챙긴 것뿐이야.”

가브리엘이 대꾸했다. 사파이어 알이 박힌 자그만 액자 안에 집어넣고 영원히 보관할 요량이었다.

“어디 봐. 더 흔들리는 이는 없어? 아프진 않고?”

대뜸 다가와 턱을 잡는 손에 아사야는 머리를 흔들었다.

“보지 마.”

버둥대는 모습을 엘라는 물론이고 손님들까지 함께 지켜보고 있었다. 어린 인간의 유치 빠진 얼굴이란, 굳이 매달릴 수준으로 구경거리는 아니었으나 고개를 돌리고 피할 정도로 재미없는 일도 아니었다.

“실허, 보지 말라니까.”

붉어진 얼굴을 허둥지둥 가리며 아사야는 귀까지 발갛게 달아올랐다.

‘이런 건 계획에 없었단 말이야!’

천공섬의 왕으로서 엘라 나자렛이, 지난 백여 년간 단 한 번도 다과회를 열어 본 적 없다기에 준비한 자리였다. 다과회는 그야말로 아사야의 전문 분야였다. 블란테와 함께할 때까지만 해도, 아사야가 준비한 다과회에선 찻주전자를 세 번씩 데웠었다.

과거의 자부심을 기억해 초대장까지 준비한 아사야였다. 며칠을 공들여 야심차게 준비한 자리에서 제 앞니가 빠질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내 이에 관심 끄고 자리에 안하, 가브리엘.”

‘앉아’를 제대로 발음하지 못해서는, 매몰찬 잔소리도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몇몇 손님들은 웃음을 감추려 애쓰고 있었고, 나머지 손님들은 대놓고 미소 지으며 아사야의 텅 빈 앞니를 기웃거렸다.

결국 아사야는 제가 준비한 다과회에서 가장 먼저 일어나야 했다. 왼손으로 입술을 덮은 채 절망하며 걸어 나가는 아사야의 뒤를 가브리엘이 쫓았다.

“따라오지 마. 너까지 나와 버리면 어떡해.”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아사야가 말했다. 열한 살 어린아이의 몸으로 화려한 드레스나 완벽한 구두 따위의 착장은 불가능한 거라지만, 목을 내놓고 허리를 조이지 않은 편한 복장으로도 즐거운 다과회를 꾸릴 수 있음을 보여 주고 싶었다.

“다 망했어…….”

책망의 화살은 그녀 자신의 눈치 없는 앞니를 향했다가,

“네가 자꾸 쳐다봐서 그렇게 된 거야.”

그 자리는 텅 비어 버렸으니 다시 휙, 가브리엘을 향했다. 가브리엘은 재빨리 손수건을 주머니에 접어 넣었다. 화난 아사야가 제 손에 든 유치를 뺏어갈 까 싶어 빠른 동작이었다.

“네가 말하면 보이는데 어떻게 안 봐?”

어린 인간의 턱을 만지며 가브리엘이 변명했다. 그에, 아사야의 표정은 단연 심란해졌다.

“말 안 할 거야……. 이 다 날 때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을 거야.”

아사야는 그 말을 지키고자 노력했다. 복도를 지나 침실 문을 열고, 푹신한 소파 위에 몸을 묻을 때까지는 그랬다.

하지만,

“정말…… 아무 말도 안 할 거야?”

걱정 어린 얼굴로 저를 보는 가브리엘을 무시하기란 거기까지가 한계였다.

“나 웃기게 생겼잖아, 지금…….”

그녀답지 않게 아사야는 기가 팍 죽어 버렸다. 무거운 어깨가 소파 등받이를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런 아사야를, 가브리엘은 조금도 이해할 수 없었다.

“이가 빠진 게 뭐가 웃기단 거지?”

“다들 나를 비웃었어……, 네가 못 봐서 그래.”

“그 녀석들은 너를 신기해할 뿐이야.”

작은 몸이 액체처럼 흘러내려 바닥에 자빠지진 않을까 염려하며 가브리엘은 아사야의 무릎을 만졌다.

“인간이 연 다과회에 참석할 정도로 널 궁금해하는 녀석들이야. 네가 웃겨서가 아니라, 신기하고 재밌어서 웃은 거겠지.”

“정말 그런 거야?”

“물론이지.”

기운 없는 아사야의 뺨에는 발그스레한 홍조가 남아 있었고 울적한 금색 눈동자도 붉은 눈가로 덮여 있었다.

“……진짜 나를 비웃은 게 아닌 거지?”

젖은 목소리로 아사야가 물었다.

그제야 가브리엘은 아사야가 오늘 다과회에 제 생각보다 더 큰 정성을 쏟았음을 알아차렸다.

드래곤의 사회에는 인간의 그것과 같은 질서나 규율 따위가 없어, 다과회 역시 배를 채우는 자리에 불과할 거라고 미리 전했건만 공주 출신의 어린 인간에게는 와닿지 않은 모양이었다.

“지금의 나도…… 뭔가를 할 수 있다는 걸 보여 주고 싶었어.”

고개를 푹 숙이고 두 손은 원피스 치마를 구겨 쥔 채, 아사야가 속삭였다.

“……엘라가 좋은 다과회를 경험했으면 싶었어. 그런 건 엄마에게 배울 때 가장 즐거운 거니까.”

그렇게 말하는 아사야에겐 다과회를 주최하는 법이나 예절 따위를 알려 줄 엄마가 없었다.

양심에도 털이 자란다면 아사야의 양심은 아직 배내털로 덮였을 것이었다. 태어나 단 한 번도, 제 마음이 외치는 옳은 소리를 어겨 본 적 없는 탓이었다. 그런 양심에 엘라의 존재가 계속 엉켰다.

유모의 품에 기대어 외로운 유년기를 지내고, 부모 없이 결혼식을 올린 아사야였다. 엄마 없는 설움에 대해서라면 누구보다 잘 알았다. 불가피한 이별은 언제나 아사야를 슬프게 했고, 그 대상이 제 아이일 적의 상실감은 이루 말할 데 없었다. 엘라의 유년기를 지켜 주지 못하였음은 아사야가 지닌 유감의 감정 중 가장 덩치가 컸다.

마침내 돌아온 곁이었다. 가브리엘의 연인으로서, 엘라의 어머니로서, 따듯하게 기댈 품이 되고팠다. 든든한 반려자이자 믿음직한 선생이고 싶었다.

‘그런데 이게 뭐야…….’

쿠키를 씹다 유치가 빠진 열한 살 어린애, 아사야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나 지금 엄청 바보 같지…….”

울적한 목소리로 아사야가 속삭였다.

“어디, 봐.”

그러자 가브리엘의 검지와 중지가 나란히 아사야의 아래턱에 닿았다. 두 눈을 내리깐 채 아사야는 입을 꾹 다물었다. 앞니가 빠져 맹추 같을 제 얼굴이 걱정됐고, 가브리엘의 눈에 더 이상 매력 있는 존재가 아니게 될까 봐 속이 탔다.

그래도 제 드래곤이 뻗어 온 조심스러운 손길을 거부하고 싶진 않았다. 단둘이 남은 침실에서라면, 그에게 얼굴을 보여 주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어렵사리 아사야가 고개를 들었다. 가브리엘의 엄지손가락이 그녀의 조그만 아래턱을 누르고는 살짝 당겼다. 입을 벌린 아사야의 작은 얼굴은 슬픈 강아지처럼 못마땅했다.

“어때?”

아사야가 물었고,

“바보 같지 않아.”

가브리엘이 대답했다.

“거짓말…….”

“난 너에게 거짓말은 하지 않아, 아사야.”

이가 빠진 자리마저 그저 귀엽다, 윗입술이 통통하게 부었을 뿐 여전히 어여쁘다, 어떤 모습이건 너는 나의 어린 인간이다…… 많은 말을 하는 대신 가브리엘은 아사야의 입술에 제 입을 맞댔다.

‘쪽’ 소리가 나도록 입술을 떼어 내자 울상이던 금안에 빛이 들었다. 짧은 입맞춤의 효과는 지대했다. 아사야는 더는 슬프지도 우울하지도 않았다.

두 팔 벌려, 그녀는 저보다 두 배로 큰 연인의 목을 껴안았다.

“너랑 함께 있으면 시간이 너무 빠르게 흐르는 것 같아, 가브리엘.”

그러고는 제가 받은 입맞춤을 돌려주었다. 말랑한 입술을 가브리엘의 윗입술에 가져다 붙인 것이었다.

그 순간 가브리엘은 작은 실수를 저질렀다. 아사야의 입맞춤에 기분이 좋아져, 오랜 습관대로 혀를 밀어 넣은 것이었다. 그의 혀끝은 자연스레 아사야의 입안으로 들어섰다가, 앞니가 빠진 자리의 잇몸에 닿자마자 깜짝 놀란 듯 사라졌다.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며 가브리엘은 허둥지둥했다. 그는 이유 없이 아사야의 양 볼에 입을 맞춰 댔다. 좀 전의 실수를 없던 일로 무마하려는 듯 많은 뽀뽀였다. 그런들 지나간 입맞춤이 잊힐 리 없단 것을, 알면서도 멈추지 못했다.

이내 말없이, 가브리엘은 아사야의 작은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서로 간에 얼굴을 붉힌 채 아사야는, 가브리엘의 혀가 닿았던 앞니 자리를 혀끝으로 건드려 보길 참지 못했다.

“시간이 빠르다는 말, 이제 취소야…….”

그리고 애타는 음성으로 소곤거리기를,

“……빨리 어른이 되고 싶어.”

가브리엘의 바람과 같은 소원이었다.


 

.*. *. *. *. *. *.


 

열두 살의 아사야는 역사를 배웠다. 무엇이건 한번 배우기 시작하면 건성건성 훑는 법이 없는 탓에 그녀는 본격적인 도표와 지도를 그려 놓고 책 더미에 둘러싸였다. 매일매일 아사야는 배우는 기쁨에 잠겼으며 가브리엘은 그녀의 손에 들린 두툼한 책을 빼앗아 찢어발기고픈 충동에 휩싸였다.

아사야가 대륙의 역사를 아는 일이 그는 싫었다. 교수형에 처한 반역자 야베스며 왕좌에 앉은 블란테 세일산, 영웅으로 칭송받은 가디엘 아졸이 그 후 어찌 되었는지 떠올리지도, 궁금해하지도 말았으면 싶었다. 무엇보다도 제가 벌인 학살이며 재앙의 실체를 그녀가 아는 것이 싫었다.

그러나 책을 덮은 뒤에, 아사야는 가브리엘을 질책하지 않았다. 그를 미워하거나 원망하거나 두려워하는 기색 없이, 그녀는 가브리엘의 무릎에 몸을 앉히고는 다정한 포옹만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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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세 살, 아사야는 처음으로 제 딸을 꾸중했다.

우유 한 잔과 홍차, 과일과 쿠키를 들고 왕의 집무실을 찾는 이가 천공섬에 아사야뿐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아사야는 기분이 좋았다. 젖니가 다 빠지고 튼튼한 간니만이 남은 덕에 그녀는 바삭바삭한 쿠키를 먹는 데 부담이 없었고, 엘라와의 다과 역시 모녀 사이의 공백을 좁혀 놓을 기회이니 좋았다. 저는 우유를 마시고 엘라에겐 차를 줄 생각이었다.

문제는 엘라가 치워 버린 스크롤이었다. 그녀의 집무실 책상 위에 쟁반을 내려 주며 아사야는 왼편 바구니로 추락하는 스크롤을 힐끔 보았고, 망명 신청서라 쓰인 식자를 읽고야 말았다.

“엘라.”

무슨 일인지 자초지종을 듣기도 전에, 아사야는 바구니 앞에 몸을 숙였다. 갈색 바구니 속에 든 것은 대체로 폐지였다. 윤허 불가, 보류, 폐기의 도장이 찍힌 서류 위에 떨어진 망명 신청서를 아사야는 펼치고는 읽어 보았다.

내용인즉 사티로스의 일족이 멸종 위기에 처하였으니 부디 망명을 허락해 달라는 긴긴 편지로, 요청이라기보다 애원에 가까운 문장들로 채워져 있었다.

“엘라, 이게 뭐야?”

아사야가 물었고,

“어머니.”

엘라는 곤란하다는 듯 이마를 구겼다.

열두 달 내내 역사를 배우고 변해 버린 세상사를 익힌 바, 아사야는 사티로스의 사정을 속속들이 알았다.

악마를 수색하여 처단해야 한다는 광신도 집단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 육십여 년 전의 일이었다. 그들 주장에 따르면 발락의 정체는 블랙 드래곤이 아닌 악마였다. 핏물로 이뤄진 비가 내린 밤이며 죽은 드래곤의 유해가 한 치의 무너짐 없이 그 모습을 유지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그들에게는 발락의 신화가 곧 악마의 상징이었다.

의욕 넘치는 인간들이 모여 그릇된 신념을 갖기 시작하자 몇 년 내로 불똥이 튀기 시작했다. 염소의 뿔과 머리를 지닌 반인반수 일족, 사티로스는 그들의 먹잇감이자 최대 피해자였다. 신도들은 각진 동공을 지닌 사티로스를 악마로 의심하며 물질적인 폭력을 가하길 서슴지 않았다. 시골 마을에서 사티로스를 몰아내는 일은 일종의 문화처럼 자리 잡았다.

사티로스는 많은 자격을 박탈당했다. 그들은 인간 마을에 출입해서도, 인간에게 말을 걸어서도 안 됐다. 오죽하면 악마를 처단하겠노란 명목으로 칼을 찬 순찰대가 돌아다니면서, 근방에 사티로스가 보이거든 염소 뿔을 잘라 낼 지경이었다.

최초의 악마 감별이 행해진 것은 그러나 근래의 일이었다. 4주 전, 대륙의 수도에서 벌어진 사건은 사티로스의 악몽이라 불렸다. 광신도 집단의 교주가 사티로스 아기를 납치해서는, 염소의 젖을 끓인 냄비에 집어넣어 죽였으니 무척 악질이었다.

왕위계승후보자인 왕자가 사건의 수사를 진행하였으나 일이 잘 풀리지는 못했다. 그는 집단의 교주를 사형시키라고 명령했는데, 명명백백한 실수였다. 광신도들은 더욱 똘똘 뭉쳤으며 세상을 떠난 교주가 신이 되어 자신들을 지켜 주리라 믿었다.

본디 종교란 실체 없는 것일수록 믿을 증거가 없다 보아야 옳은데, 미친 자들에겐 의심할 증거가 없음으로 보이니 더욱 열광하는 것이었다.

그날 이후 대륙 곳곳에서 동시다발적인 악마 감별이 행해졌다. 근거 없는 처형의 대상이자 살인극의 피해자가 되었을 때 반인반수는 인간이 아닌 짐승으로 다루어졌다. 혹자는 그 일을 농담 삼아 3주간 죽은 돼지의 수보다 사티로스의 수가 많을 거라 했다.

대부분 인간들은 사티로스의 악몽을 가볍게 취급했다. 짐승이 보내오는 망명 요청에는 어느 국가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위대한 대륙에서도 꺼뜨리지 못한 불씨를, 작은 섬나라가 도맡을 수 없다는 게 이유였다.

그러나 천공섬은 그 사정이 달랐다.

“고작 열한 명이야, 엘라!”

버려졌던 스크롤을 다시금 펼쳐 들고, 아사야는 살아남은 사티로스의 명단을 짚었다.

“그중 절반은 스무 살도 되지 않았어. 다섯은 어린아이들이야. 궁지에 몰린 아이들을 내버려 두겠단 말이야?”

흥분한 아사야의 목소리와 달리, 엘라의 경우 표정도 말투도 차분했다.

“아이이건 노인이건 그 나이는 이유가 안 됩니다, 어머니. 천공섬은 드래곤을 위한 땅이에요. 왕성을 쌓기 위해 불러들인 드워프들과 본디 섬에 살던 정령들, 그리고 어머니 당신만이 이종족이죠. 그것으로도 이미 충분해요.”

아사야로서는, 제 딸이 낯선 존재임을 느끼는 순간만큼 애석한 때도 없었다.

“‘충분하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망명이라는 것은 필요한 일꾼을 선택하는 종류의 문제가 아니었다. 필요한 존재를 골라 나라 안으로 불러들인다면 그것은 고용이었다. 망명은 고용과는 전혀 달랐다. 저를 받아 줄 나라가 필요한 이들에게 터전을 내주고, 국가적으로는 손해를 감수하는 것이 망명이었다. 경제적인 셈이 아니라 도덕적인 옳고 그름을 따져 이뤄지는 일이었다.

“어머니가 계시지 않던 지난 백 년간 저는 그 규칙으로 이 나라를 지켰어요. 누구도 받아들이지 않고 누구에게 우리의 위치를 노출하지도 않는 식으로요.”

그러나 엘라의 의견은 아사야와 다른 모양이었다.

“덕분에 천공섬을 노리는 자도 전쟁도 없었습니다.”

뻣뻣하게 허리를 편 엘라의 얼굴을, 아사야는 황망한 듯 올려다봤다. 가져온 우유의 온기도 쿠키의 달콤한 향기도 아사야의 기분을 풀어 주질 못했다.

“네 말대로 이 나라를 노리는 자도 전쟁도 없는데, 너는 도대체 누구로부터 이 땅을 지켰단 말이니?”

끝내 그녀는 제 아이를 꾸중하는 부모가 되고야 말았다.

“우호국도 적대국도 외교도 무역도 없는데, 네가 도대체 무슨 정치를 했단 말이야?”

지난 삼 년간 아사야는 다정한 엄마였다. 언제나 엘라의 편을 들어 주고 그녀를 예뻐하며, 칭찬만을 해 주는 좋은 부모가 아사야였다. 오죽했으면, 엘라 나자렛은 백 하고도 십 년을 함께해 온 아버지보다 어머니를 더 좋아했다.

그러나 오늘 아사야는 엘라를 힐난하길 서슴지 않았다. 제 아이의 실수를 모르는 척 덮어 주는 대신 꾸중하였으며, 듣기 좋을 말들을 버려 놓고 싫은 잔소리만 늘어놓았다.

“널 모욕하려 묻는 말이 아니야, 엘라. 다만 사실을 지적하는 것뿐이야. 지난 구십 년간 네가 해 온 것들은, 미안하지만 정치가 아니야. 네가 해 온 것은 천공섬의 존재를 감추기 위한 숨바꼭질이었던 거야.”

“어머니.”

당황한 엘라가 그렇게 불러 보아도 아사야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깨달은 것이었다, 엘라의 기분을 무조건적으로 맞추어 온 지난 삼 년간 저는 제대로 된 부모가 아니었음을.

“나는 드래곤도 마법사도 기사도 왕도 아니야. 그러니 네게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없을지도 몰라. 하지만, 엘라. 나는 네 어머니야.”

버려진 스크롤을 아사야는 다시금 왕의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구겨진 면을 손바닥으로 눌러 펼쳤고 승인 도장이 찍혀야 할 위치가 엘라를 향하게끔 했다.

그리고 말했다.

“내가 너였더라면 나 자신이 부끄러웠을 거야. 세상 어느 곳보다 찬란하고 강인한 나라를 세워 놓고는 사티로스 열한 명을 들이길 두려워하는 나 자신이 부끄러웠을 거라고.”

잔소리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놀란 듯 얼어붙은 채 움직이지 않는 엘라를 바라보다가, 아사야는 그녀의 집무실을 떠나 버렸다. 당장 그러지 않는다면, ‘쿠키도 먹고 차도 마시고, 진정하며 생각해 보라’는 부드러운 말을 꺼내 버릴 것만 같았다.

가브리엘과 저만의 침실로 돌아왔을 때 아사야는 근심으로 가라앉았다. 엘라를 심하게 꾸중한 것에, 즉시 막대한 후회가 따랐다.

‘그 아이가 나를 주제넘는다고 생각하면 어떡하지? 싫은 소리를 하는 싫은 부모라고 나를 미워하면 어떻게 하지?’

짜증스러운 얼굴로 돌아서는 엘라를 상상하니 가슴이 베인 듯했다. 숨이 막히고 흉통이 답답해졌다. 한숨 쉬고 끙끙 앓으며 아사야는 침대 위에 몸을 눕혔다. 등을 돌리고 모로 돌아누운 채, 베개도 쓰지 않고 그저 몸을 웅크렸다.

그들 침실 방문을 누군가 노크 소리 없이 연 것이 그때였다.

그럴 자격이 있는 사람은 둘뿐이되 개중 하나인 가브리엘은 근방을 기웃대는 와이번을 쫓아내러 순찰에 나선 때였다. 그러니 아사야는 제 뒤로 다가와 침대 위에 몸을 눕히는 이가 누구인지 알았다.

“…….”

가만히 숨죽인 채 누워만 있자, 인영이 아사야의 뒷목에 이마를 붙이고 어린 어머니의 작은 배를 끌어안았다.

“어머니 말씀이 모두 맞아요.”

엘라가 속삭였다.

“뜻대로 할 테니 부디 저를 미워하지 마세요.”

두려워서 그랬어요, 꽁꽁 숨어 지내라고, 정체를 들켜선 안 된다는 말을 듣고 자라 그랬어요……. 부드러운 말소리엔 원망 한 올 묻어 있질 않았다. 이해와 용서를 갈망하는 엘라 나자렛은 아사야에게 여전히 포대기 속의 아기였다.

조용히, 아사야는 딸아이의 큰 손을 잡아 주었다.


 

.*. *. *. *. *. *.


 

열네 살의 아사야에겐 목표가 하나 있었다. ‘원하는 건 뭐가 됐건 전부 해 보는 것’이었다.

그래서 1월에는 하프를 켜 보았고 2월에는 그림을 그렸으며, 3월에는 검술을 배웠다. 아쉽게도 그녀는 검술에 대해서라면 일말의 소질조차 없었다. 어깨와 손바닥이 너무 약해 진검은 들지조차 못했고, 가문비나무를 깎아 최대한 가볍게 만든 목검조차 똑바로 휘두르기가 어려웠다.

그래도 그녀에게는 엘라라는 멋진 딸이 있었다. 천공섬의 새로운 백성들이 터를 잡고 밭을 일군 올해, 엘라 나자렛의 주요 업무는 어머니에게 검을 가르치는 일이었다. 그럴 적에 그녀는 참을성 많고 침착하며 아사야를 다치게 하지 않을 좋은 선생이었다.

푹신한 초원의 풀을 밟아 가며 모녀가 목검을 부딪치는 모습을 가브리엘은 종일 구경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지켜만 볼 뿐, 피크닉 바구니의 치아바타도 먹질 않고 책 한 권 읽지 않는 것을 보면 지겹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가브리엘, 너도 나랑 붙어 보겠어?”

아사야가 말했을 때,

“그건 안 돼.”

“그건 안 됩니다!”

꼭 닮은 부녀가 소리를 내질렀다. 놀란 탓에 아사야는 한참이나 딸꾹질을 해야만 했다.

“아버지께 목검으로 덤비시려거든 먼저 저를 이기셔야 할 겁니다. 그것도, 제 몸에서 먼지가 날 때까지 두들겨 팬 다음이어야 합니다.”

가브리엘의, 때로 무식하다 싶을 수준으로 넘치는 힘을 알기에 엘라가 말했다. 그에게 덤볐다가는 제가 죽기라도 한다는 양 읊조리는 말에 아사야의 두 눈은 가늘어졌다.

“엘라. 네 엄마가 누구인지 몰라? 베데르 아졸의 딸이란 말이야, 나는.”

제 입으로 그렇게 말했으니, 아버지의 명예를 걸고 그녀 자신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하여 엘라의 손에 들린 목검 정도는 쳐 내어야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아사야는, 반년 하고도 보름이 지난 뒤에도 가문비나무 목검을 벗어나지 못할 줄은 꿈에도 몰랐었다.

아무리 수를 쓰고 재빨리 달려들어도 아사야는 엘라를 이길 수가 없었다. 나이가 열네 살이라곤 하나 원체 뼈대가 가느다랗고 작은 어머니를 배려하느라 엘라는 오른손은 뒷짐을 지고 두 발을 묶은 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사야는 언제나 먼저 나가떨어졌다.

덕분에 오른손잡이이던 엘라는 이제 양손잡이 검술사가 되었다.

‘내 실력은 날로 좋아지는 것 같은데…… 왜 어머니는 그대로시지?’

이따금은 도대체 작금의 연습 경기가 누구를 위한 수련인지 헷갈릴 때도 있었다.

가을의 들판에 보라색 꽃이 필 무렵, 아사야는 바지 밑단과 땋아 내린 머리끝을 온통 꽃가루로 더럽힌 채 지쳐 버렸다. 풀밭 위에 나자빠진 채 숨을 고르길 한참, 일어서려 애썼지만 두 무릎이 후들거려 그럴 힘이 없었다.

슬슬 그녀를 데리고 가 욕조에 담그고 달래 줄까 하여 가브리엘도 자리에서 일어설 즈음,

“검을 못 다룬다고 해도 아쉬워 마십시오. 때론 소질이 없는 일도 있는 법이니까요.”

엘라가 말했다. 나름대로는 어머니를 위로해 보려 건넨 말에,

“아…….”

가브리엘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손으로 이마를 짚은 채 그는 제 딸을 노려보았다. 그가 보이는 이상한 반응에 엘라는 눈을 끔벅이며 어깨를 으쓱여 보였고, 아사야는 목검을 잔디 사이에 꽂아 넣었다.

괴팍한 숨소리를 내며 소녀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한판 더 해.”

두 번째 생애를 살며 처음이었다. 누군가 ‘소질이 없다’는 말을 면전에 대고 뱉은 것이, 아사야에게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충격은 아사야를 상처 입히지 못했다. 다만 더욱 오기를 품도록 종용할 따름이었다.

덕분에 엘라는 다리에 쥐가 날 때까지 저에게 달려드는 어린 어머니를 막아 내야 했다. 대련은 마침내, 엘라의 항복 선언으로 끝났다. 목검을 던져 놓고 두 팔을 번쩍 든 엘라를 보며, 아사야는 하얀 이가 드러나도록 웃어 댔다.

“내가 이겼어, 가브리엘!”

기쁨을 감추지 못해 폴짝폴짝 뛰는 아사야를 가브리엘은 두 팔로 번쩍 받았다. 그러고는 발갛게 살이 부르튼 그녀의 손바닥에 입김을 불어 넣었다.

엘라가 던져 놓은 목검 옆에, 아사야는 손때가 묻은 제 것도 던져 버렸다.

“재밌었어, 엘라.”

아버지의 품에 안겨 먼저 왕성으로 돌아가 버리는 어머니의 뒤통수를, 엘라는 멍하니 쳐다봤다.

그제야 엘라는 아사야의 목표가 애초부터 검술을 익히는 일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어째서 아버지께서 애초부터 아사야와는 겨루는 시늉조차 하지 않았는지 그 역시도 깨달았다. 아사야는 검을 배우고 싶었던 게 아니라, 저에게 패배를 안겨다 준 엘라 나자렛을 이기길 원했던 것이었다.

‘그런 거면 언질이라도 해 주시지…….’

숨을 씩씩거리며 엘라는 버려진 목검을 주웠다. 허탈한 웃음이 났다.

열네 살의 해가 져 버리기 전에, 아사야는 새로운 취미를 익혔고 그것이 승마였다. 그녀의 생일을 맞아 가브리엘이 구해다 준 말이 있어 천공섬에 단 한 마리뿐이니, 아사야가 고삐를 쥐고 말을 몰 때면 드래곤들이 그 모습을 구경했다.

다행히도 승마는 그녀의 적성에 잘 맞았다. 가브리엘이 신중히 골라 온 말은 과연 다리가 튼튼하고 폐활량이 좋을 뿐만 아니라 성질이 착하고 순했다. 말을 타고 달리면서 아사야는 왕성의 성벽을 하루에도 두세 바퀴씩 돌고는 했다.

그녀의 외출 시간이 길어질 무렵 천공섬에 두 번째 말이 도착했다. 승마에 정신이 팔려 아사야의 귀가 시간이 늦어지니, 차라리 저도 말을 몰아 그녀를 쫓기를 선택한 가브리엘의 말이었다.

덕분에 아사야는 신이 났다. 가브리엘이 곁에 있다면 그녀는 가 본 적 없는 컴컴한 숲 주변도 힐끔힐끔 배회할 수 있었고, 왼편은 땅이되 오른편은 끝없는 하늘인 천공섬의 끄트머리를 걱정 없이 내달릴 수도 있었다.

함께 곳곳을 누비는 날이면 아사야는 피크닉 바구니를 꼭 챙겼다. 그러고는 많던 물이 죄다 증발해 버린 검은 조약돌 지대에 담요를 한 장 깔고, 가브리엘과 나란히 앉아 샌드위치를 먹었다.

말을 탈 적에 아사야에겐 나쁜 습관이 하나 있되 언제나 조금씩 무리를 하는 것이었다. 돌아갈 때의 체력을 생각해서 적당히 힘이 들면 멈추어야 하는 게 승마였다. 하지만 아사야는 쉽게 그러질 못했다. 달리는 말 위에서 바람을 쐬는 즐거움을 너무 늦게 알아 버린 탓이었다.

“너무 신나는 걸 어떡해.”

땀에 젖은 승마바지 차림으로 아사야가 투정했다. 그러면서도 종일 말을 탄 엉덩이가 너무 아파 그녀의 자세는 엉거주춤했다.

“힘들면 날아서 돌아가도 돼. 내 등에 태워 줄게.”

보다 못한 가브리엘이 큰 유혹의 덫을 던졌다.

“아니야……, 직접 돌아갈 거야. 아직 견딜 만해.”

그렇게 고집을 부린 일은 아사야 일생일대의 실수였다. 그날부터 사흘간 아사야는 끔찍한 몸살과 근육통에 시달리며 앓아누웠다.

“가브리엘……, 나 아파.”

끙끙거리며 뒤척이는 아사야를 바라볼 적에 가브리엘은, 이 자그마한 어린 인간이 저를 고문하려고 꾀를 쓰는 건 아닌가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여린 팔과 다리뿐만 아니라 등허리와 엉덩이까지 주물러 달라 내맡길 순 없는 노릇이었다.

그럴 적에 그의 마음 안에는 ‘내일’뿐이었다. 내일이 되면 더욱 자라고, 건강해지고, 커질 아사야를 향한 기대가 그의 심장 밖으로 넘실거렸다. 백 년의 시간 내내 어제의 아사야만을 그려 온 그에게, 이제는 내일의 아사야가 당연해졌다.

그 사실이 못내 기뻤고 이따금은 믿기지가 않았다. 잠들었다 깨어나면 이 모든 게 꿈일까 두려움에 그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타는 애정을 꾸역꾸역 집어삼키며, 가브리엘은 밤새도록 아사야의 몸을 주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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