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화 (13/16)

검은 용의 갈빗대



 

로베쯔는 백 년 전까지만 해도 대륙의 수도로서 그 명성을 알린 축복의 땅이었다. 그러나 지금으로서는, ‘로베쯔’의 어원이 곧 이 땅을 설명하는 전부였다.

백 년 전, 발락의 재앙이 벌어지던 당시 이 땅에서 사렙탄 세일산이 제 아들에게 살해당했다. 대륙의 심장이라 불리던 왕성은 제왕과 절명을 같이하듯 무너져 내렸으며 이 땅의 빛나던 모든 것이 발락의 발밑에 폐허로 변해 버렸다.

그러니 ‘납작 엎드리다’, ‘웅크리다’ 따위의 의미를 담아 로베쯔라 명명할 뿐, 이 땅에는 더는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발락이 짓밟고 뭉개 놓은 유적들이 납작해진 채 남은 땅, 그 땅이 로베쯔였다.

오죽하면 왕성을 바로 세워 보려 노력하던 대륙의 왕, 블란테 세일산조차 백기를 들고 수도 이전을 추진했다. 블랙 드래곤의 피가 묻은 흙에는 무얼 짓건 벽이 제대로 서질 않았으며 무얼 심건 그 싹이 제대로 움트지를 못하는데, 수도 전역에 발락의 붉은 피가 비처럼 내린 탓이었다.

블란테의 명령에 따라 마법사들은 재건의 재료가 될 작품과 장식물들을 전부 새로운 수도로 옮겼다. 그러고 나니 이 땅 위에 남은 것은 황폐화된 흙뿐이었다.

“발락의 그림자가 아직 남아 그런 게지.”

혀를 끌끌 차며, 노인들은 구부정하니 허리를 숙인 채 지팡이를 끌고 다녔다. 로베쯔의 인구 7할 이상이 그처럼 병든 노인이었다. 동시에, 로베쯔에는 어린아이가 기이할 정도로 많았는데 대체로 부모가 몰래 버리고 간 고아들이었다. 덕분에 시설 대부분이 노인을 위한 것이거나, 아니라면 고아원일 지경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베쯔에는 아직 생기가 남아 있었다. 희생정신을 발휘하여 아이들을 보살피는 젊은 선생들과 봉사를 온 의사들, 세일산 왕가에서 매년 보내오는 물자 덕분이었다,

기쁜 날을 기념하는 이들은 많지만 슬픈 날을 굳이 기념하진 않듯이, 로베쯔의 사람들 역시 발락의 재앙이 벌어진 해를 기억하지 않았다. 그 탓에 누구도 오늘이 재앙일로부터 정확히 백 년 되는 날임을 몰랐다.

모두가 잠잠하니 죽은 듯한 도시에 젊은 여인 하나가 비틀비틀 걸어 들어왔다. 닫힌 창문을 두려운 눈으로 살피며 그녀는, 솔이 달린 낡은 망토를 되도록 깊이 뒤집어쓴 채였다. 왼팔에는 손수건을 덮어 가린 바구니 하나를 들고, 젊은 손님은 어두운 길목을 헤매어 다녔다.

한참 동안 그녀는 이곳저곳에 즐비한 고아원의 문문마다 둘러보다가는, 지나온 네 채의 시설 가운데 가장 모습이 성하고 나름의 앞뜰과 놀이터를 갖춘 고아원 앞에 바구니를 놓았다. 그러고는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헐떡거리며 급히 그 자리를 떠났다.

그로부터 십여 분쯤 지난 후에야 동이 트고 닭이 울기 시작했다. 고아원 앞뜰을 쓸고자 빗자루를 들고 나온 또 다른 여인이 버려진 바구니를 발견했다. 이름은 니칼이며 성씨는 따로 없는, 그녀는 고아원에 머무르며 아이들을 보살피는 선생이었다.

발치에 덩그러니 놓인 바구니를 바라보며 니칼은 기다란 빗자루를 떨어뜨렸다. 그리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천으로 덮은 바구니가 고아원 문 앞에 놓였을 적엔 그 속에 아이가 들었을 게 뻔한데, 미동도 없고 울음소리도 들리질 않으니 이미 죽어 버렸겠거니 생각한 것이었다.

겨우내 그렇게 발견한 죽은 아이만 넷이었다. 어린아이의 깡마른 시신을 보는 일은 언제나 끔찍했다.

그 수를 더 늘리기를 조금이라도 미루고픈 마음에, 고요한 바구니로 다가가는 니칼의 걸음은 느릿느릿했다.

그러나 바구니를 덮은 천을 걷었을 때, 그녀가 발견한 것은 파리하게 질린 시체가 아니었다. 바구니 속에 든 것은 아기가 맞되 발그레한 두 뺨과 반짝이는 눈동자를 깜빡이며 살아 있는 채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 아기는 선생이 평생 만나 온 아이들 중 가장 어렸으며 또한 가장 어여뻤다. 자그마한 크기에 탯줄도 덜 잘린 것을 보면 갓난아기가 분명했다. 그러나 아기의 피부는 말갛게 흰빛이었다. 보통의 갓난아기라면 피부는 붉고 온몸이 양수에 불어 주름지게 마련인데, 바구니 속 아기는 흠 하나 없는 모습이었다.

허둥지둥 바구니를 안아 들고, 니칼은 아기를 감싼 포대 밑을 뒤졌다. 자식을 버릴 적에 편지 한 장, 동전 한 푼 남기지 않는 부모는 없는 법이었다. 제아무리 험난한 사정으로 버려진 아이라도 주머니를 뒤지면 리스 한 닢이라도 들어 있기 마련이었다.

이 아이도 마찬가지였다. 포대 밑에 손을 넣자, 네 번 접은 편지 한 장과 낡은 가죽 주머니 하나가 잡혔다.

니칼은 허둥지둥 편지부터 펼쳤다. 이미 한 번 쓰인 종이처럼 희미한 잉크 자국이 군데군데 묻은 종이는 모서리가 닳아 거의 둥글었다.

간밤 열병을 앓고는 이 아기를 낳았습니다. 도대체 누구의 자식인지 그 아버지가 없고 어째서 하루아침에 아이가 생긴 건지 알 길이 없으니 저 또한 이 애의 어머니가 아닙니다. 제가 아는 이 그 누구도 닮지 않은 이상한 아기예요. 하지만 이 아이를 사랑하지 않을지언정 미워할 수가 없어 이곳에 맡깁니다. 가진 돈이 이뿐이라 정말 죄송합니다. 부디 이 아기를 거둬 주세요.

편지를 읽어 내리며 니칼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가 낳아 놓고는 제 자식도 아니며 아버지도 없다 말하다니, 읽어 본 중 가장 괴상한 변명이었다.

‘헛소리를 적을 거라면 차라리 편지를 안 쓰고야 말지. 아기 이름도 지어 주질 않고 가 버리다니…….’

얼굴도 모르는 부모를 원망하며, 니칼이 편지를 제 주머니에 감췄다. 훗날 아이에게 보여 줄 수조차 없는 내용이니 보관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됐다. 벽난로에 집어넣어 태워 버릴 생각이었다.

함께 든 가죽 주머니의 사정은 그나마 편지보단 나았다. 리스 동전이 스무 개 남짓, 큐빅이 박힌 머리핀이 두 개 들어 있었다. 동전으로는 치료사를 부를 때에 품삯이나마 거들 것이고 머리핀은 훗날 아이가 자라거든 전해 줄 것이었다.

한숨 쉬며, 니칼은 갓난아기의 얼굴을 내려다 봤다. 시선이 마주치자 아기는 무얼 알기라도 하는 존재처럼 제 두 눈을 가늘게 뜨고, 어색하게 입술 끝을 올렸다. 갓난아기가 짓는 미소에 니칼의 마음은 와르르 무너져 내리고야 말았다.

“세상에나……, 이렇게 예쁜 아기를……. 너를 어쩌면 좋으니…….”

주섬주섬 가죽 주머니를 챙겨, 그녀는 서른네 번째 고아를 품에 안았다. 앞으로 아이의 집이 될 시설에는 이렇다 할 이름 하나 없었다. 고아원에 이름이 있어 그 이름이 알려지면, 원치 않는 손님들이 제 자식을 버리고자 찾는다는 이유에서였다.

이름 없는 아이를 이름 없는 고아원으로 데려가며 니칼은 아기 포대를 단단히 감쌌다.

“너에게도 운명의 상대가 있어. 분명히 나타날 거란다.”

그리고 속삭였다.

“네 가족이 필시 너를 찾으러 올 거야.”

혼잣말하듯 중얼거리는 선생의 얼굴을, 아기의 황금색 눈동자가 빤히 구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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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다란 언덕 위의 평평한 터에 본디 찬란한 왕성이 세워져 있었다는 이야기를 아이들은 믿지 않았다. 씨를 뿌려도 꽃이 피질 않고 풀조차 누르스름한 빛깔로 시들어 버린 언덕 위에 왕성의 흔적은 온데간데없었다. 드래곤의 반쪽짜리 유해만이 덩그러니 존재할 따름이었다.

로베쯔의 가장 늙은 할아버지가 태어나기도 전의 아주 옛날에, 피의 비가 내렸더랬다. 그날 밤 발락의 몸뚱이 절반은 사라져 버리고, 늑골과 하반신의 뼈만이 남았다. 어떻게든 부수어 무너뜨리고 다른 곳으로 옮겨 보려 애를 썼으나 그 자리에 박힌 듯 꿈쩍도 않은 검은 용의 갈빗대는 로베쯔의 가장 유명한 유산이었다.

거대한 지붕처럼 하늘을 가로지른 뼈대는 외로운 아이들의 관심사였다. 거대하고 웅장한 뼈대는 가까이 다가가 바라보면 허물어진 건축물의 일부 같기도 했고, 넝쿨 식물들이 다닥다닥 들러붙어 갈빗대와 함께 화석이 되어 가는 모습은 여름밤 담력을 시험하기에 딱 좋게 무서웠다.

열네 살이 넘는 소년들조차 다가가길 꺼리는 갈빗대 속으로, 제 몸을 집어넣는 이는 이 마을에 여섯 살 소녀 하나뿐이었다. 아치형으로 길게 뻗은 뼈대와 뼈대의 틈새를 출입문 삼아, 소녀는 용의 갈빗대 안에 몸을 감췄다.

“너 정말 겁 없는 아이구나!”

귀여운 소녀의 관심을 끌어 보고자, 남자아이 하나가 달려와 소리를 질렀다. 나무를 깎아 만든 뭉툭한 검을 허리에 찬 채였다.

“너, 드래곤이 너를 잡아먹으면은 그렇게 된다!”

그러니 드래곤의 무시무시한 배 속에 숨어있지 말고 나와 놀자는 소리였다. 양 뺨 가득 젖살이 통통한 소녀가 힐끔, 뼈대와 뼈대 사이로 얼굴을 보였다. 이마는 하얀 조약돌처럼 동그랗고 코는 아직 자그마한, 소녀의 황금색 눈동자는 로베쯔의 어느 아이들보다 예뻤다.

그렇게 귀엽고 어린 얼굴로,

“난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노아.”

누구보다도 어른처럼 대꾸하는 게 소녀의 매력이었다.

저보다 어린아이가 제대로 된 문장을 또박또박 말하는 것이 좋아, 노아는 얼굴을 홍당무처럼 붉혔다. 우물쭈물하며 그는 몸을 이리저리 꼬다가, 주머니에 든 도토리 뭉치를 대뜸 용의 갈빗대 안에 던져 놓고 달아나 버렸다.

와아아…… 신난 듯 벌어지는 아이들 환호성 소리를 들으며, 여섯 살 소녀가 홀로 남았다. 윗입술을 삐죽 내밀고 혀끝으로 앞니가 빠진 자리를 건드리면서, 아이는 제 아지트에 떨어진 도토리들을 전부 주웠다.

“휴…….”

노아의 관심에서 해방되고 나면 아이에겐 더는 무서울 게 없었다. 언니들이 무서워하는 귀신 손갈퀴도 아이에겐 넝쿨식물의 잎사귀에 불과했고, 오빠들이 되살아날 거라고 겁을 주는 용의 유해도 빛의 번짐이 아름다운 저만의 보금자리였다.

매해 가족을 찾는 아이보다 새로이 버려진 아이의 수가 많다 보니, 고아원을 채운 유아들의 수도 벌써 오십이 넘었다. 하나하나가 어디에서 무얼 하고 있는지 찾아내기도 만만찮게 노동인지라 니칼 선생님의 골머리도 하루가 다르게 썩어 갔다. 그녀에겐 미안한 말이었지만 아이는 그 사실을 기회처럼 생각했다. 선생님이 바쁜 덕분에, 제지하는 어른 하나 없이 용의 갈빗대에 숨어들 수 있어 좋았다.

미리 가져다 둔 담요 위에 몸을 눕힌 채 아이는 갈빗대와 식물의 틈새로 스며드는 햇빛을 구경했다. 반짝반짝, 이리저리 비추는 것이 별빛 같았다. 제 몸에 비해 큰 탓에 자꾸만 흘러내리는 원피스 어깨 끈을 올리며, 아이는 느릿느릿 닥쳐오는 두통을 느꼈다.

“음…….”

여섯 살 소녀 애의 통통한 손가락이 아이 자신의 이마와 눈꺼풀, 코와 입술, 작은 턱을 만졌다. 혹시 어디에, 다친 자국이 없나 확인하는 손길이었다.

자그마한 손으로 몇 번을 만져 확인해도 답은 같았다. 아이의 얼굴은 매끈하고 촉촉했으며 상처 하나 없이 매끄러웠다. 코를 찌르는 기름 냄새도 나질 않았고, 시야를 가로막는 불씨도, 벌겋게 부풀어 오르던 물집도 존재하지 않았다.

“아샤!”

불쑥, 외침이 아이의 적막을 부쉈다. 그러나 이번에 들려온 목소리는 노아의 것과는 달랐다. 그보다 훨씬 더 어리고 높은 목소리가 ‘아샤 언니야’, ‘아샤’ 하며 이중주로 울려왔다.

자리에서 일어나, 아이는 용의 갈빗대 사이로 얼굴을 내밀었다. ‘아샤’는 아이가 스스로 붙인 이름이었다. 부모로부터 받은 이름 없이 고아원에 흘러들어 온 아이들에겐 자신의 이름을 제가 지을 기회가 주어졌고, 그때 정한 이름이 아샤였다.

‘아사야’라는 이름은 인기가 많아, 제가 머무르는 고아원에만 열두 살 아사야와 일곱 살 아사야가 이미 있기 때문에 고른 차선책이었다.

“유라, 사라.”

저를 찾겠다고 언덕 위까지 헥헥거리며 올라온 두 아이를 아샤는 그렇게 불렀다. 저처럼 이름 없이 버려진 자매에게 아샤가 지어 준 이름이 유라, 그리고 사라였다.

“언니야, 뭐 해? 또 책 읽어?”

풀린 신발 끈을 질질 끌며 유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 옷소매를 접고 손을 뻗어 아샤는 유라의 인중에 묻은 콧물을 닦아 주었다.

“아니. 숨어서 낮잠 자고 있었어.”

아샤가 말했다. 그러자 유라와 사라가 아샤의 팔을 잡고는 그녀를 용의 갈빗대 밖으로 빼냈다. 동생들의 힘에 못 이겨 아샤가 걸어 나오자, 사라는 떼를 쓰기 시작했다.

“아샤, 나 그 이야기 또 해 주면 안 돼?”

“무슨 이야기?”

“하늘에 뜬 섬 이야기.”

그러면서 발을 동동 구르는 모습이 벌써부터 예사롭지 않았다.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고 쫓아냈다가는 앞으로 이틀간은 ‘미워’ 하며 지르는 비명소리를 들어야 할 게 틀림없었다. 동생들의 미움을 사는 대신 아샤는, 그들이 원하는 대로 오래된 이야기를 들려주길 택했다.

“옛날 옛날에, 대륙이 아직 하나의 땅덩어리이던 시절에…….”

엉덩이 밑을 쓸어 치마를 접으며 아샤는 노란 풀이 자란 언덕에 앉았다. 아샤를 따라 코흘리개 두 아이도 철푸덕 바닥에 주저앉았다. 유라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만져 주며 아샤가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엄청나게 커다란 지진이 일었어요. 우르릉, 쾅! 대륙에서 떨어져 나간 땅덩어리들은 섬이 되어 바다 건너로 가 버렸답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섬나라 중에는 바위로 된 친구도 있었어요. 그 이름이…….”

“날탄!”

사라가 소리쳤다.

“날탄이 아니라, 나젤탄이야!”

유라도 목소리를 키웠다.

“날탄이 아니라 나젤탄이구, 거긴 블란테 폐하가 온 곳이구, 거기는, 음, 거기는 섬이야. 내 말이 맞지?”

손가락을 꼽으며 종알거리는 유라를 바라보며 아샤는 웃었다. 말한 내용은 세 가지인데 왜 꼽은 손가락은 넷인지 미스터리였다.

“그래, 맞아.”

아샤가 대답하자 유라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이어 아샤는 무시무시하게 강력했던 드래곤 마법사에 대하여, 그 마법사가 하늘에 띄워 올린 섬에 대하여, 그 섬이 저 멀리 구름 위에 떠다니게 된 과정에 대하여 이야기를 꾸려냈다. 그러면서 어린 아샤는 손을 뻗어, 저보다 어리고 작은 아이의 머리칼을 쓰다듬고 헤집어 주었다.

정이 고픈 아이들은 숨을 죽인 채 제 머리를 만져 주는 언니의 손길을 즐겼다.

“언니야, 표정이 이상해.”

아샤의 무릎을 베개 삼아 드러누운 채 사라가 종알거렸다. 뜻밖의 말에 아샤는 두 눈을 깜빡거리며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사라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아샤의 치맛자락을 움켜쥐었다.

“내가 잘못했어. 이제 이야기 안 조를게. 언니 슬퍼하지 마.”

“아니야, 하나도 안 슬픈걸. 네가 원한다면 백 번은 더 이야기해 줄 수 있어.”

“아니야!”

사라가 빽 소리쳤다. 한쪽 귀가 벙벙해지는 것을 느끼며 아샤는 어색한 미소만 지어 보였다. 그 나이대 아이들은 목소리가 더 큰 쪽이 맞는 말을 하는 쪽이라고 믿는 것 같았다. 멋대로 소리를 질러 놓고는 사라는 흡족한 듯 웃었다.

“이제 안 들을래. 어차피 하늘에 있잖아. 가지도 못할 섬인데, 뭐.”

피로한 미소조차 사라진 채 아샤는 멍하니 두 손을 내렸다.

“그렇지 않아.”

대답했으나, 사라는 그 말을 듣지 못했다. 다섯 살 사라는 유라와 함께 무어라 키득거리기 시작했다. 서로의 어깨를 밀치며 다투고, 다시 웃음을 터뜨려 대는 식이었다. 어린 소녀들의 감정은 숨 가쁘게 변화하여, 아샤로서는 따라잡지 못할 때가 많았다.

그때마다 아샤는 제 또래의 아이들을 멍하니 지켜보는 방관자였다. 그럴 수밖에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이름만 같을 뿐 다섯 살 아이들은 왕성의 시녀가 아니었고, 아샤를 좋아하며 따르는 듯하다가도 따돌리기도 십상이었다. 어쩌면 어린아이의 본능으로, 아샤가 저들과는 다르다는 걸 아는 것만 같았다.

집중하는 법을 잊어버리고 저들끼리 떠드는 동생들을 향해 아샤가 속삭였다.

“가지 못할 섬이 아니야.”

들어 주는 이 없는 속삭임은 결국 혼잣말이 되었다.

“언젠가 꼭 갈 거야…….”

아샤는 제 음성의 메아리를 들었다.


 

.*. *. *. *. *. *.


 

일곱 살이 된 뒤에야 아샤는 고아원 생활에 적응을 마쳤다.

딱딱한 바닥에 몸을 눕히고 아이들의 체온을 난로 삼아 밤을 보내기도 제법 익숙해졌고, 마냥 상냥하지만은 않은 몇몇 친구들의 태도에도 덤덤해졌으며, 단순하고 쉬운 낱말 게임도 못 하는 척 어울리기가 일상이 됐다.

몸은 불편해도 마음만큼은 편한 날들이었다. 다리가 저리면 아무 데나 주저앉아 쉴 수 있었고, 입을 크게 벌리고 하품을 해도 눈치 볼 사람이 없었으며, 제 머리를 잡아당기고 도망치는 노아를 쫓아가 그의 배를 작은 주먹으로 때려 준 날엔 심장이 미친 듯이 벌렁거렸다.

그러나 여전히, 아샤는 아이들과는 완벽하게 친해지지 못했다. 그녀의 가장 친한 친구는 단연 말 없는 검은 용의 갈빗대였고, 다음으로 친한 이는 니칼 선생님이었으며, 세 번째로 친한 것을 굳이 꼽으라면 철창 안의 토끼들이었다.

지저분한 토끼우리 바닥을 빗자루로 살짝 쓸어 낸 뒤에, 아샤는 싱싱한 건초를 뜯어다 토끼에게 건네주었다. 황색 토끼 하나가 뒷다리를 팔짝대며 다가와 아샤의 손앞에 코를 대고 킁킁거렸다.

소리 없이 건초를 먹어 치우는 토끼의 이마를, 아샤는 남는 손으로 조심스럽게 만져 보았다. 점심으로 나온 채소 잎이나 건초를 가져온 날에만 만지기를 허락하는 황색 토끼는 이 고아원에서 가장 도도한 존재였다. 아샤는 그 매력에 빠져 헤어나질 못했다.

“내 말 여물도 직접 줘 본 적이 없는데…….”

혼잣말하며, 아샤는 두 번째 건초 잎을 토끼의 주둥이에 가져다 댔다.

“너는 완전 상전이구나?”

가르마가 없는 토끼의 이마는 동그랗고 보들보들했다. 이따금 운이 좋은 날이면 제 치마에 묻은 토끼 수염을 주울 수도 있었다. 굵고 하얀 토끼 수염을 줍는 것은 심심한 고아원 생활을 견디기 위한 취미 중 하나였다.

완전히 마음의 문을 연 듯 황색 토끼가 발라당 몸을 눕혔다. 제 손길을 허락하는 모습이 감격스러워 아샤는 활짝 미소를 지었다.

“내가 지금 누구를 생각하고 있는지 알면, 너도 그도 황당해할 텐데. 내가 널 보면서 자기를 떠올렸단 걸 알면…… 아마도 한참을 웃었을 거야.”

혼자만의 조용한 속삭임을,

“아샤!”

아이들의 외침이 끊어 놓았다.

놀란 아샤가 손을 움찔거린 순간 예민한 토끼는 제집 안으로 달아나 버렸다. 먹다 만 건초 조각을 움켜쥔 채, 아샤는 왁자지껄 소리를 지르며 등장한 소년들을 돌아보았다.

“니칼 선생님이 너 빨리 데리고 오래. 어떤 노부부가 왔는데, 되게 부자 같애!”

잔뜩 흥분한 채 아이들은 더운 숨을 할딱거렸다.

“문이 달린 마차를 타고 왔다니깐? 말도 두 마리나 있어! 이쁜 딸을 입양하려고 여기까지 온 거래! 너 보러 온 거래!”

제자리에서 펄쩍펄쩍 뛰어가며 전한 소식에,

“선생님이 말씀하신 게 정말 나였어?”

아샤는 새침한 목소리를 냈다. 두 눈을 가늘게 뜬 채, 그녀는 구겨진 건초를 집어넣고 토끼우리의 문을 잠갔다.

“내가 아니라, ‘아사야’를 찾으신 거겠지.”

그러자 소년들이 눈을 끔벅거리며 ‘어……’, 확신 없는 소리를 흘렸다. 그렇게 꼬집어 물으니, 제가 들은 말이 정확한가 헷갈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남자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아이가 아샤였고, 가장 무서워하는 아이 역시 아샤였다. 전자의 이유는 아샤가 해님처럼 어여쁘기 때문이었고, 후자의 이유는 그런 아샤가 무표정한 얼굴로 단정적인 말을 할 때면 제 심장이 쪼그맣게 줄어들기 때문이었다.

“아닌데……, 분명 아샤라구 그러신 거 같은데에…….”

머뭇거리는 아이들을 향해 아샤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고는 치마를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 어디 가, 아샤.”

귓등까지 새빨갛게 붉힌 소년이 물었고,

“내가 왜 그걸 알려 줘야 해?”

아샤의 대답은 차가웠다.

심장이 쪼그맣게 줄어들다 못해 솜 빠진 인형처럼 흐물흐물해지는 것을 느끼며 소년이 눈시울을 붉혔다. 그런 아이들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아샤가 말했다.

“너네 전부 토끼한테 사과해야 해. 토끼는 귀가 커서 작은 소리도 천둥처럼 크게 듣는단 말이야. 너네 때문에 토끼가 놀라고 상처받았어.”

그러자 소년들이 당황한 듯 어정쩡한 태도로 토끼우리를 기웃거렸다. 작은 나무 집에 숨어 버린 황색 토끼는 꼬리조차 보이질 않았다.

“토끼가 너네 사과를 받아 주거든 그때 날 찾으러 와.”

그 말을 끝으로 아샤는 뒤뜰을 통해 고아원 밖으로 빠져나갔다.

매정하게 사라지는 작은 뒷모습을 쳐다보다가, 아이들은 ‘끙’ 앓는 소리를 내고는 토끼우리 앞에 쪼그려 앉았다. 몇몇은 급한 대로 ‘아사야’를 찾으러 떠났다.

해가 뉘엿뉘엿 질 때까지 아샤는 용의 갈빗대에 숨어 책을 읽었다. 바람이 쌀쌀해지고 어둠이 깔려 글자가 보이지 않게 되어서야 그녀는 책을 들고 일어났다. 구겨진 담요는 세 번 털어 낸 뒤에 반듯하게 접어 제자리에 놓았고, 바람에 날아가지 말라고 소설책과 자갈돌을 올려놓기도 잊지 않았다.

최대한 느리게 걸어, 아샤는 고아원의 뒷문으로 향했다. 조용히 숨어 들어갈 생각이었지만 누군가는 그녀의 계획을 이미 눈치챈 모양이었다. 피로한 얼굴로 팔짱을 단단히 낀 니칼 선생이 뒷문 앞에서 아샤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미 들킨 모습을 숨길 도리는 없어, 아샤는 털레털레 그녀에게로 걸어갔다.

“아샤. 도대체 왜 그러는 거니?”

속상한 듯 니칼이 물었다.

“오늘 온 부부는 좋은 분들이셨어. 네가 어여쁘단 소문을 들으시고 만나 보겠다고 약속을 잡고 오신 거란 말이야. 이렇게 바람을 맞히면 어떡하니?”

선생의 잔소리에 아샤는 입을 닫고 고개를 숙였다. 니칼의 사정을, 아샤만큼 잘 알고 이해하는 아이가 없는 탓이었다.

근방에서는 가장 상태가 좋고 후원을 잘 받는 곳이 이곳 시설이었지만, 그런들 머릿수 서른이 넘는 아이를 돌보기가 수월하진 않았다.

오랜 시간 원장으로서 자리를 지키던 선생이 갑작스럽게 중풍에 걸려 고향으로 떠난 뒤로 고아원의 사정은 더욱 어려워졌다. 아이들의 수는 줄지를 않는데 일손은 터무니없이 모자랐다. 그 바람에 니칼은 열댓이 넘는 아이들을 관리하고 원장의 업무까지 도맡아야 했다.

하루가 다르게 피로감이 쌓이니 니칼의 안색도 어두워졌다. 선생의 지친 얼굴을 아샤가 올려다봤다.

“죄송해요, 선생님.”

아샤가 속삭였다. 시무룩해진 얼굴을 마주 보며 니칼은 답답한 마음에 긴 한숨을 내쉬었다.

세상 모든 게 도덕으로, 순리대로 흘러가면 좋으련만 고아들의 세계는 그렇지 않았다. 성격에 모난 구석이 없고 건강에도 지장이 없고, 예쁘거나 잘생긴 아이여야 입양 가족을 찾을 수 있었다. 상처가 많고 아픈 아이, 몸에 흉이 있고 얼굴이 못난 아이를 원하는 가족은 무척 드물었다.

오늘 들른 노부부만 해도 그랬다. 어디로 사라진 건지, 꽁꽁 숨어 버린 아샤를 대신하여 니칼은 그들에게 다른 아이들을 여럿 보여 주었다. 하나같이 말 잘 듣고 착한 아이였다. 그러나 천사처럼 어여쁘다는 여자아이의 소문을 듣고 찾은 노부부는 차선책을 제 아이로 들이기는 원치 않아 했다.

그들이 오늘 아샤를 만났더라면, 그래서 저 귀여운 얼굴과 예쁜 목소리를 들었더라면, 필시 마음에 들어 하며 제 아이로 삼았을 터였다.

아샤의 자그마한 어깨를 부드럽게 쥐고서, 니칼은 소녀 앞에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 말했다.

“아샤. 좋은 가족을 찾을 기회가 많은 것도 네가 타고난 행운 중 하나인 거야. 입양을 가고 싶어도 선택받지 못하는 아이들이 수두룩하잖니. 왜 번번이 숨기만 하는 거야? 뭐가 그리 수줍어서. 응?”

고작 몇 년 지났을 뿐인데 니칼은 열 살은 더 먹은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녀의 상냥한 눈을 바라보며 머뭇거리기를 잠시, 아샤는 본심을 고백코자 했다. 제 정체를 밝히고 사정을 알려 주면, 언제나 저보다는 아이들을 위하는 니칼이 저를 도와줄지도 몰랐다.

“전…… 여기서 살고 싶어요. 여기 계속 있어야 해요.”

“왜?”

그러나 황당하다는 듯 입을 벌린 선생의 얼굴을 보자마자, 아샤의 혀는 돌처럼 굳어 버렸다.

‘그래야 가브리엘이 나를 찾으러 올 테니까…….’

그런 말은 꺼낼 수가 없었다. 어떤 문장을 얼마나 논리정연하게 늘어놓건 그녀는 일곱 살 어린아이에 불과했다.

자신이 오래전에 죽은 아사야 공주의 환생이라고, 그 옛날 다시 만나기를 약속한 드래곤을 기다리고 있다고, 저기 저 언덕 위에 펼쳐진 갈빗대가 제 연인의 것이라고…… 말했다가는 망상병 환자 취급을 받을 것이었다.

“그냥요…….”

결국 어린 아샤는 입을 다물었다. 니칼은 긴긴 한숨을 쉬며 그녀를 안아 들었다. 선생의 팔에 안겨 대롱대롱 복도로 옮겨지며, 아샤는 그녀의 목을 껴안고 숨을 죽였다.

믿음만이 아샤의 기둥이었다. 영원한 헤어짐은 없으리라는 주술에 대한 믿음, 가브리엘이 반드시 저를 찾으러 올 것이라는 믿음, 그녀 자신은 그를 다시 만날 운명을 타고났다는 믿음. 그 믿음으로 아샤는 떨리는 심장을 진정시켰다.

이후에도 아샤를 입양하겠노라 점찍고 찾는 부부는 많았다. 그러나 그들 중 누구도, 아샤에게서 ‘좋아요’란 대답은 받아 내지 못했다. 도망가지 못하게 붙들고 억지로 앉혀 놓으면 아샤는 의자 위에 두 발을 올린 채 자신의 무릎에 고개를 묻어 버렸다.

“아샤, 여길 좀 보렴. 응? 인사라도 좀 해 봐. 인사만 하는 거야.”

선생들의 달래는 소리를 들으며 아샤는 어깨를 떨었다.

‘혹시 날 잊은 건 아닐까?’

그녀의 나이가 일곱, 여덟을 지나 아홉이 되어도 상황은 같았다. 제가 태어난 것을 알기는 하는 것인지 가브리엘은 모습을 보이지 않았으며 가슴 안을 채운 그리움은 날로 커졌다.

‘나를 기다리다가…… 지쳐 버린 건 아닐까?’

불안이 어린 아샤의 가슴을 두들겨 댔다.

기다림으로 9년 하고도 6개월을 채운 달에, 아샤의 무던한 참을성이 바닥을 드러냈다. 노아가 알려 준 이야기가 원흉이었다.

“이상한 남자가 아까부터 너 쳐다봐.”

그렇게 말할 적에, 노아의 미간은 잔뜩 구겨져 있었고 왼손에는 나무 단검이 들려 있었다.

“내가 가서 쫓아내 줄까?”

운동장 밖을 가리키며 노아가 물었다.

그러나 아샤의 시선은 엮은 꽃줄기에 고정된 채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의 관심을 끌기 위해 거짓말을 하는 이가 노아만은 아니기 때문이었다. 심장병에 걸린 것 같다며 엄살을 부리는 조르바가 있었고, 뒤뜰 연못에 유령이 있다며 함께 가자는 도나가 있었으며, 무지개 끝을 보러 가자고 손을 잡아끄는 유라와 사라도 있었다.

아샤로부터 긍정의 답을 얻은 이는 유라와 사라 자매뿐이었다. 니칼 선생의 말에 따르면 아샤는 유독 그들에게 약했다. 특히 고아원의 모난 돌, 고집쟁이 사라는 아샤의 약점이었다. 사라는 울보였고 아샤는 그 아이의 유모가 되길 자처했다. 눈물을 펑펑 흘리며 사라가 소리를 질러 대면 그녀 말에 무조건 복종하는 식이었다.

그때마다 아샤는 그 아이를 안아 주었다. 모두 다 너의 안전을 위해서였다, 너에게 화가 난 게 아니었다…… 알 수 없는 말을 속삭이기도 했다.

오늘만 해도 그랬다. 심심풀이로 엮은 화관을 유라에게 주었다가 사라를 토라지게 만든 탓에 아샤는 무척 바빴다. 유라의 것보다 화려하고 예쁜 화관을 만들어 사라를 달래 주기 위해서였다.

때문에 노아의 영웅 놀이에 동참해 줄 여유가 아샤에겐 없었다.

“어떻게 생긴 남자였는데? 얼굴에 뿔이라도 달렸니.”

아샤가 심드렁하니 대꾸했다. 그러자 노아가 답답한 듯 발을 굴렸다.

“거짓말 아니야! 키가 엄청 크고 까만 남자였어. 무지막지하게 무서운 얼굴에, 눈도 안 깜빡거리고 이쪽을 보고 있었단 말이야. 너 조심하는 게 좋을걸?”

“그래, 그렇겠지…….”

건성으로 대꾸하며 주억거리던 아샤가 행동을 멈췄다. 제 어깨에 끝을 걸고 남은 줄기를 엮던 손이 노란 꽃잎을 구겨 버렸다.

“까만 남자?”

고개를 번쩍 들고, 그녀는 노아의 손이 가리키는 방향을 살폈다. 그러고는 거의 완성되어 가던 화관을 내팽개친 채 달리기 시작했다. ‘어어’ 하며 노아가 뒤늦게 뒤를 쫓았지만, 아샤의 처절한 달리기는 그보다 훨씬 빨랐다.

운동장을 가로질러 숲길까지 내달렸으나 노아가 말한 까만 남자는 보이지 않았다.

정신없이, 아샤는 사방을 둘러보며 치맛자락을 움켜쥐었다. 두 손을 주먹으로 말고 헉헉거리며 그녀는 나무를 향해 소리쳤다.

“가브리엘?”

돌아오는 것은 제 목소리의 메아리뿐이었다.

기다란 나무를 지나 아샤는 왼쪽으로 내달리다가 멈추고, 다시 반대편으로 달리기를 반복했다. 가브리엘, 가브리엘…… 외침 끝에 작은 기침이 따랐다. 가쁜 숨을 내쉬며 아샤는 낡은 나무뿌리 위에 주저앉았다.

“가브리엘…….”

입 밖으로 내어 말하자 대답 대신 실의가 돌아왔다. 심장 박동이 뒷등에서부터 거칠게 들려왔다. 손과 발이 덜덜 떨렸다. 살은 아리고 뼈는 시렸다. 병에 걸려 아파서는 아니었다. 그리움에 통증이 난 것이었다.

날 때부터 기억하고 믿고 있던 모든 것이 혹, 그녀 자신의 망상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고개를 치켜들었다. 애초부터 가브리엘이라는 드래곤은 만난 적이 없었던 건 아닌지, 외로운 마음에 언덕 위의 유해를 보며 홀로 지어낸 소설은 아니었는지, 불안할 때마다 아샤는 별수 없이 슬픔에 잠겼다.

그녀에게는 제 존재를 뒤흔드는 의심을 해소할 작은 증거 하나 없었다. 가브리엘이 저를 데리러 올 것이라는 믿음은 그저 믿음일 뿐, 약속된 서류나 기록일랑 없었다. 세상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는 그를 직접 찾아 나서고 싶을 때가 많았지만, 어린아이인 아샤에겐 그럴 힘도 능력도 없었다.

때문에 슬픔이 닥쳐올 때면 아샤는 제 손바닥 안에 얼굴을 묻어 버렸다. 두 손바닥 안은 그녀가 지닌 유일한 방이었다. 그녀만의 방, 누구도 들어올 수 없는 공간. 비좁고 뜨끈한 손바닥을 열 때마다 아샤는 가브리엘이 제 앞에 서 있기를 원했으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평생 지녀 온 믿음을 의심하기 시작하자 아샤의 심장에도 구멍이 뚫렸다. 밑이 깨진 그릇처럼 그녀의 피도 금을 타고 아래로 새는 듯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종일 안색은 창백하고 발은 무거워 누운 자리에서 일어서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그런 아샤를, 니칼은 근심으로 살폈다. 속사정을 모르는 니칼의 눈으로 볼 때 아샤는 탈진 상태였다. 새로운 가족을 얻기를 거부하던 끝에 힘이 쭉 빠져 버린 건 아닌가 싶었다. 떠나기 싫단 아이를 어른들의 사정으로 억지로 밀어 보내려 하니, 혹 아샤가 자기 자신을 짐짝처럼 느끼게 되어 버린 건 아닐까 미안한 마음이 앞섰다.

“아샤, 그만 고개를 들어 봐. 선생님이 잘못했어요, 응?”

조그맣고 작은 몸을 웅크린 아홉 살 아이 앞에 니칼이 무릎을 쪼그리고 앉았다. 그러나 아샤는 작은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꿈쩍도 않았다.

그녀의 보드라운 손바닥 위에 니칼이 작은 노크를 남겼다.

“이제 다른 집에 가라고 강요하지 않을게. 어른들을 만나라고 널 부르지도 않을게. 선생님이 약속할게.”

속삭임에, 아샤는 자기만의 방문을 열어 주었다. 얼굴을 덮었던 손바닥을 치운 것이었다. 어린 아샤의 부드러운 머리칼을 니칼은 얇은 빗으로 빗겨 주었다.

한동안 니칼은 아샤와의 약속을 지켰다. 천사처럼 예쁜 아이가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 아이를 보러 가도 되겠느냐…… 시설로 보내오는 연락들에 정중한 거절의 편지를 남긴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다른, 수없이 많은 아이들이 가족을 기다리고 있음을 추신으로 적어 넣길 잊지 않았다.

그러나 평화는 두 달을 가질 못했다. 고아원을 지키는 평민 선생이 감히 거절할 수 없는 귀족가 직계 남작이 직접 고아원을 찾은 것이었다. 갈기에서부터 꼬리까지 윤기가 흐르는 네 마리 말이 모는 마차를 타고, 남작은 약속된바 없이 등장해서는 원장실의 문을 열고 들어섰다.

“아샤라는 아이를 만나러 왔소.”

남작을 대신하여, 그의 집사 되는 하인이 말했다.

그 앞에 허리를 숙이고 인사를 올리며, 니칼은 별수 없이 아샤를 찾으러 나섰다. 멀리 언덕 위까지 둘러볼 필요는 없었다. 놀란 눈을 토끼처럼 뜬 채, 아샤는 원장실로 향하는 복도 끄트머리에 서 있었다.

“아샤, 잠깐…….”

그녀를 불러 세우려 니칼이 손을 뻗은 순간, 아샤는 있는 힘껏 내달리기 시작했다. 아이의 작은 몸은 날쌘 다람쥐처럼 움직였다. 순식간에 아샤는 계단을 지나 운동장에 도달했다. 당황한 니칼이 헐떡거리며 그녀를 쫓았다.

어지간한 부잣집 부부들은 좋은 말과 그럴싸한 핑계를 지어내어 돌려보낸 니칼이었다. 그러나 그 상대가 귀족이라면, 허튼수작은 부리지 않는 것이 좋았다. 얼굴을 보겠다며 직접 찾아온 남작에게 아이를 보여 주지 않고 감추었다가는 어떤 화를 입게 될지 미지수였다. 남작의 말 몇 마디에 시설의 문을 닫아야 할 수도 있었다.

“아샤, 제발!”

벌써 멀리, 운동장 끝 연못과 숲길 경계선에 선 아샤를 향해 니칼이 소리쳤다.

“제발 한 번만, 한 번만 선생님 말을 들어 줘!”

노란 눈을 보석처럼 뜬 아샤는 예민한 야생 동물처럼 보였다. 작은 아이를 향해 두 팔을 뻗으며 니칼은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속삭였다.

“일이 잘못됐다가 우리 아이들이 다 쫓겨나면……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니…….”

매사에 강인한 척 멋진 선생을 연기하던 니칼의 갑옷도 내구도가 다했다. ‘제발 이리 와’, 갈라진 목소리로 애원하는 그녀의 얼굴을 아샤는 멀리서 지켜보았다.

왔던 길을 돌아가면 저를 입양할 귀족을 만나야 할 것이고, 도주로를 택한다면 숲으로 달아나 밤까지 버틸 수 있을 것이었다. 그녀 자신을 위해서라면 후자를 택해야 했다.

애초에 아샤는 그 누구도 만나길 원치 않았다. 가브리엘이 아닌 이상에야 그 누가 저를 데리러 오건 그 행보엔 어떤 의미도 없었다.

‘오늘만큼은……, 오늘만큼은 안 돼.’

오늘은 그녀의 생일이었다. 부모 없는 아샤가 태어난 날은 그녀 자신의 백 번째 기일이었지만, 오늘은 달랐다. 오늘은 아사야 아졸의 생일이었다. 공작가의 아가씨로 태어나 그녀가 열 살이 되었던 날이었으며, 성대한 생일 연회가 열렸던 날이었고, 늦은 밤 모험을 떠났다가 동굴 안의 강아지를 만난 날이었다.

그러니 오늘만큼은 안 됐다. 다른 날도 아닌 오늘이라면, 가브리엘이 저를 찾아와 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나,

“아샤. 제발…….”

니칼의 목소리가 아샤의 발목을 잡았다.

그 순간, 아샤는 니칼을 향해서도 숲길을 향해서도 뛰지 않았다. 그녀는 밑단의 프릴 장식이 너덜너덜해진 원피스 치맛자락을 움켜쥐고는 연못으로 뛰어들었다. 놀란 비명을 지르며 니칼이 아샤에게로 달려갔다.

여름 내내 보슬비 한 번 내렸을 뿐인지라, 운동장 연못은 절반이 물이요 절반이 진흙 바닥이었다. 연못 위에서 니칼이 내려다볼 적에 아홉 살 소녀는 진흙 구덩이에 얼굴을 처박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세상에…….”

바짓단이 더러워지도록 니칼은 연못물을 첨벙첨벙 가로질렀다.

“아샤, 아샤…….”

머리카락과 흰 얼굴, 목과 가슴팍이 더러운 진흙으로 너저분해진 채 아샤는 끔찍한 냄새가 나는 구덩이에 힘주어 머리를 묻었다. 일으켜 세워지지 않으려 버티는 아샤의 어깨를 잡았다가, 니칼은 화들짝 놀랐다. 아샤의 여린 어깨는 형편없이 떨리고 있었다.

갓난아기 시절부터 아샤를 주워다 길러 온 그녀였다. 그러나 그 아이가 우는 모습을 보는 일은 처음이었다.

“왜…… 아샤, 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

아이를 억지로 일으켜 품에 안으며 니칼은 망연자실해졌다. 우는 아이의 등을 두드리긴 하였으나 순전히 습관적인 동작이었다. 끝내 아샤를 울린 이가 그녀 자신이란 게 못내 충격이었다.

아샤는 니칼에게 있어 언제나 아픈 손가락이었다. 그 아이의 배에 붙은 탯줄을 자른 것이 니칼이었으며, 어머니도 아버지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저주 같은 편지를 태워 버린 것도 니칼이었고, 이른 새벽이면 외로운 존재처럼 창문 밖의 언덕을 올려다보는 뒷모습을 지켜 온 것도 니칼이었다.

아샤가 난생처음 울음을 터뜨리자 니칼은 저도 모르게 아이를 따라 눈물을 줄줄 흘렸다.

니칼의 어깨에 진흙더미 얼굴을 묻은 채 아샤는 소리 내어 크게 울었다. 흐아앙…… 서러운 울음과 함께 눈물, 콧물, 침이 한데 엉겨 흘러내렸다. 설움을 억제하지 못해 아샤는 저도 모르게 팔다리를 허우적댔다.

“싫어, 싫어…….”

귀족가 아가씨가 되고 싶지 않았다. 부잣집 딸로 살고 싶지도 않았다. 이곳을 지켜야만 했다. 가진 것 하나 없는 고아로서, 연인의 갈빗대를 지켜야만 했다. 가브리엘이 저를 찾아오기를, 저를 알아보고 안아 주고 데려가 주기를 기다려야만 했다.

그러자면 행복해져서는 안 됐다. 유복하고 곱고 아름다워서는 안 됐다. 그녀는 제 드래곤의 성미를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가브리엘은 착하고, 다정했으며 저에게만 바보처럼 순종적인 애인이었다. 저 없이 행복해진 아사야를 보게 된다면 그는 두 번 다시 저를 만나러 오지 않을 것이었다. 잃어버렸던 주인을 찾은 개가 그 주인 곁의 새로운 개를 발견하기라도 한 것처럼, 가브리엘은 실망하고 아파할 것이었다.

그러니 고아 ‘아샤’는 지저분하고 불행하고 가여워야 했다. 가브리엘이 없으면 안 된다는 걸 보여 주고 증명해야 했다. 가브리엘 너를 기다리고 있다고, 너만을 기다리며 사노라고, 온몸으로 외치며 외로움에 떨어야만 했다.

‘너 없이 행복하고 싶지 않아. 너 없이는 행복해질 수가 없어.’

겨우 눈물을 닦아 낸 뒤, 니칼은 아샤의 몰골을 살폈다. 실크처럼 곱던 머리칼은 이끼와 진흙이 꼬여 엉망이 됐고 이마와 뺨, 인중에는 눈물과 흙 알갱이가 너저분했다.

고의로 망가뜨린 아샤의 얼굴을 니칼은 닦아 주지 않았다. 다만, 그 아이를 안아 들고 원장실로 돌아갔다.

거지보다 더한 행색의 아샤를 본 순간, 남작은 실망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아무래도 내가 찾던 아이는 아닌 모양이군.”

제 턱의 수염을 만지며 그가 혀를 끌끌 찼다. 고개를 숙인 채 콧물을 훌쩍대는 아샤를 끌어안으며, 니칼은 상투적인 말을 건넸다.

“아샤의 또래 아이라면 열 명이 더 있어요. 그 아이들을 만나 보시겠어요?”

“아니, 그럴 필요 없소.”

그 말을 끝으로 남작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보석 장식이 길게 붙은 지팡이로 원장실 나무 바닥을 디디며, 남작은 아샤의 더러운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못내 미련이 남은 눈치였다.

“영 실망스럽군. 아사야 공주를 닮은 아이라고 소문이 나 찾은 것인데…….”

그 말에 니칼이 입을 열었다가, 다물었다. 그런 전설을 믿으셨냐고 묻기보다 그녀는 잠시간 어린 아샤의 얼굴을 바라보길 택했다.

일부러 망치고 더럽혀 놓은 아샤의 본래 얼굴을, 니칼은 누구보다 잘 알았다. 아샤는 니칼이 살면서 봐 온 아이들 중 가장 어여쁘고 착하고 어른스러웠다. 때론 정말로 아홉 살 어린애가 맞나 의심스러울 정도로 똑똑하기까지 했다. 아샤는 동생들은 물론이며 또래 아이들을 잘 다뤘으며, 넘어진 아이는 일으켜 세웠고 날뛰는 소년들을 손쉽게 중재시켰다.

그런 아샤가 전설 속의 아사야 공주를 닮았느냐고 묻는다면, 그랬다. 니칼은 흑주술의 존재를 믿지 않는 사람이었지만, 만에 하나라도 아사야 공주가 환생을 했더라면 그 존재는 아샤여야 했다. 아샤보다 더 공주님을 닮은 아이는 있을 수 없었다.

‘공주…….’

소리 없이, 니칼이 입술을 달싹였다. 아샤의 황금색 눈동자는 회색으로 굳고 갈라진 진흙 속에서도 태양처럼 빛났다.

소녀와 눈을 마주친 채 멈추어 있기를 잠시,

“그런 거라면 잘못 찾으셨네요.”

니칼이 말했다.

“아샤가 예쁜 아이인 건 사실이지만, 무척 말괄량이에 고집이 황소 같은 친구거든요. 아사야 공주님과는 전혀 닮지 않은 아이입니다.”

선생이 그렇게 확신하자 남작은 눈살을 찌푸리더니, 잔기침을 하며 고아원을 떠났다. 악취를 참아 내는 사람처럼 옷소매에 코를 묻은 채였다.

손님들이 모두 빠져나가고 말발굽 소리가 멀어진 뒤에야, 니칼은 수건을 물에 적셨다. 그러고는 아샤의 더러워진 얼굴을 닦아 주었다. 희고 동그란 이마와 천사가 꼬집어 올린 듯한 코, 눈물이 얼룩진 뺨과 가느다란 턱을 닦아 주며, 니칼은 그 얼굴을 심란한 듯 들여다봤다.

한참 말을 고른 끝에,

“고마워요, 니칼.”

아샤가 속삭였다.

“고맙긴 무어가 고맙다는 말이니?”

그러자 니칼이 ‘흥’, 콧방귀를 뀌었다.

“사실을 말한 것뿐이란다. 너처럼 고집이 황소 같은 아이가 또 어디 있겠어?”

아샤의 안색이 말끔해지고 흙 알갱이가 전부 닦인 뒤에도, 니칼은 오래도록 그 아이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 *. *. *. *. *.


 

깊은 밤, 아샤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잠꼬대하는 아이들의 웅얼거림과 뒤척이는 몸짓, 새근대는 숨소리가 아샤의 밤을 깨웠다. 컴컴한 어둠에 눈이 익을 때까지 기다린 끝에, 아샤는 이불 밖으로 몸을 빼냈다.

‘아샤’로서는 한밤중의 모험을 나선 일이 없었다. 그러나 아사야 아졸로서라면 달랐다. 열 살의 아사야는 숲의 그림자를 무서워하지 않았으며, 매일 밤 아픈 친구를 만나러 가는 용맹한 모험가였다. 아졸가의 경비대를 따돌릴 정도로 걸음걸이가 조용한 아사야였다. 잠든 아이들 중 누구 하나 깨우지 않고 살금살금 걷기가 그녀에겐 어렵지 않았다.

신발도 없이 아사야는 시설 밖으로 나섰다. 맨발바닥을 더럽혀 가며 털레털레 걸어 그녀는 언덕길을 올랐다. 멀리, 구름에 가린 달의 희미한 빛이 아사야의 발등을 밝히고 있었다.

검은 용의 갈빗대에 도착해 아사야는 마른 풀줄기가 다닥다닥 붙은 뼈대를 한 손으로 쓰다듬었다. 그러고는 두 팔 벌려, 덩그러니 홀로 놓인 드래곤의 유해를 끌어안았다. 그래 봐야 아사야의 작은 팔은 용의 늑골 한 면을 가릴 뿐이었다.

눈물 젖은 얼굴로 아사야는 뼈대와 뼈대 사이로 몸을 집어넣었다. 기억 속 검은 동굴처럼, 갈빗대 아래는 시커멓게 어두웠다.

그림자에 몸을 파묻자 아사야는 더는 침착하지 못했다. 오늘로 십 년이었다. 십 년 내내 눌러 담은 울분이 울컥 입 밖으로 새어 나왔다.

자그맣게 흐느끼며 아사야는 낡은 담요 위에 몸을 웅크렸다. 그럴 적에 그녀는 마치 가브리엘을 처음 만난 그해, 그때의 어린아이로 돌아가 버린 것만 같았다. 그러나 이번에, 그녀의 손에 바르는 약 따위는 들려 있지 않았다. 어둠을 밝힐 램프도 존재하지 않았다. 이번 생에, 다친 드래곤을 만나는 기적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서늘한 몸을 옹송그린 채 아사야는 후회했다. 야베스 세일산의 흑구슬 따위를 믿고 가브리엘을 떠나보낸 것이, 양심의 말에 따라 영웅처럼 행동한 일이, 오래전, 가브리엘의 말을 듣지 않고 천공섬에서 돌아왔던 것이 후회되었다.

‘그러지 말걸…….’

아니, 가브리엘을 진작에 풀어 줬어야 하는 건데…… 내게 돌아오라 말하지 말았어야 했어, 아니야, 애초에 야베스 세일산과 결혼하지 말았어야 했어, 너저분한 사기극에 당하지 말았어야 했어…… 후회가 꼬리의 꼬리를 물었다.

불에 덴 개처럼 그녀는 앓는 소리를 흘렸다. 슬픔과 외로움으로 전신이 천근만근 무겁게만 느껴졌다. 눈을 반쯤 뜬 채 차가운 밤이 저를 잡아먹기를 기다리는 사이, 검은 그림자가 그녀의 어깨 위로 기울었다.

흠칫거리며 아사야는 주위를 살폈다. 달빛을 받아 희미하게 빛나는 용의 갈빗대가 그녀를 둘러싼 채였다. 늑골을 울타리 삼아 그 건너편에, 그녀를 찾으러 온 손님이 있었다.

“왜…….”

우두커니 기립한, 시커먼 그림자가 속삭였다.

“왜 나를 기다리는 거야?”

슬프고 우울한 듯, 아픈 듯한 목소리였다. 눈을 감으면 환청처럼 들려오고 잠을 자면 꿈속에서 만나던 목소리였다. 그녀로서는 십 년 만에 듣는 것이며 저 없이 흘러간 시간으로 그 햇수가 자그마치 백이었다.

“네가 무던하게, 평범하게, 행복하게 잘 살기를 원했어.”

그림자가 말했다.

하고픈 말이 많았는데 아사야는 그중 무엇 하나 내뱉지 못했다. 그저 두 눈을 크게 뜬 채, 컴컴한 그림자가 일렁대는 것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렇게만 된다면 두 번 다시는 널 찾지 않으려 했어. 너는 그럴 수 있으니까……, 그럴 자격이 있으니까. 공작가 아가씨이건 세일산의 공주이건 얼마든지 될 수 있잖아.”

그 말을 끝으로 적막이 찾아들었다. 작은 숨을 훌쩍거리며 아사야는 바깥을 향해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그의 숨결이나 말소리가 더는 들려오질 않았다.

비틀거리며 아사야는 어지러운 상체를 일으켰다. 그러고는 언덕 위에 기립한 커다란 그림자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자세히 보니 그것은, 그저 완벽하게 검을 뿐 그림자가 아니었다. 그것은 시커먼 슬픔으로 전신을 무장시킨 사람이었고, 사람으로 변모한 드래곤이었다.

그리움에, 아사야는 울음을 터뜨렸다. 그를 처음 만났던 지난날과 같이 아사야는 외로운 소녀였다.

“가브리엘.”

그의 이름을 외치며 아사야는 갈빗대를 지나 뛰쳐나갔다. 거짓말을 해 미안하다고, 너를 속인 죗값이라면 치르겠다고, 애원하고 빌 생각이었다. 그의 종아리에 매달리고 발등에 얼굴을 비벼야 한다면 천 번이고 만 번이고 그럴 수 있었다.

그가 저를 용서하게끔, 저에게 화를 내지 않게끔, 저를 두고 떠나버리지 않게끔 이별을 가로막을 수 있다면 아사야는 무엇이든 할 것이었다.

한 발 두 발 다가갈수록 그의 얼굴과 어깨가 뚜렷해졌다. 입을 벌린 채 아사야는 연인의 눈동자를 올려다보았다. 가브리엘은 화를 내지 않았다. 그는 그녀를 원망하며 밀어내지도, 잘못을 뉘우치길 강요하거나 사과를 요구하지도 않았다.

다만 울고 있었다. 볼썽사납게 흐느끼며 눈물로 뺨과 목을 적시고 있었다.

“왜 나를 기다리는 거야…….”

지붕처럼 하늘을 가르는 그 자신의 갈빗대 아래에서, 그가 말했다. 벅찬 슬픔을 감추지 못해 아사야는 그의 품 안으로 뛰어들었다. 신기루는 아닌지 살피려는 양 그의 두 팔과 거친 손을 만졌으며, 탄탄한 허리에 양팔을 두르며 그의 배에 파묻힐 것처럼 파고들었다.

“내 기억 속에 너뿐이야.”

아사야가 말했다.

“가브리엘, 너뿐이야……, 너밖에는…… 누구도 떠올린 적 없었어. 그 누구도 너처럼은 그립지가 않았어. 매일 난 너를 생각해. 네 생각 외에는 그 무엇도 할 수가 없어. 매일 난 너를 기다려…….”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가브리엘의 어린 인간은 여전했다. 덩치가 자그마해지고 목소리가 어려진 채로도 그녀는, 그가 하고픈 말을 가로채어 먼저 전하는 존재였다.

“공주 같은 거 되고 싶지 않아. 예쁨받으며 살고 싶지 않아. 내가 바라는 건 너뿐이야, 가브리엘. 너 없이는 행복해질 수 없어.”

아사야의 여린 손이 가브리엘의 등에 닿았다. 거대한 흉터가 여전히 같은 자리에 남아 있었다. 놀란 듯 아사야는 두 눈을 커다랗게 떴다. 달처럼 노랗고 둥근 눈을, 가브리엘이 내려다보았다. 그의 시선에는 말이 없었다. 고요한 보라색 눈동자에는 어떠한 책망도 변명도 담겨 있지 않았다.

연인의 눈동자를 마주 보며, 아사야가 손을 움직였다. 에파타의 창이 남긴 깊은 흉터를 지나 손을 내리자, 살점을 잃고 옴폭 들어간 옆구리가 느껴졌다. 눈물이 차오르는 것을 억지로 삼키며 아사야는 두 손을 벌벌 떨었다. 마침내, 그녀의 손은 가브리엘의 허리에 닿았다. 몸이 두 동강으로 나뉠 적에 새겨진 거대한 흉터가 가로줄이 되어 그의 몸에 새겨져 있었다.

소리 없이 아사야는 눈물을 쏟았다. 그제야 그녀는 제 드래곤이 단 한 번도 죽지 않았음을, 그녀 자신이 빈 소원으로 인하여 그에게 죽음보다 더한 고통이 주어졌음을 깨달았다. 떨림을 견디지 못해 아사야는 두 다리를 비틀거렸다. 그러자 가브리엘의 두 팔이 그녀의 어린 몸을 번쩍 들고 끌어안았다.

충격과 슬픔으로 인해 눈물을 쏟으며, 아사야는 단 한 번도 저를 잊은 일 없는 연인에게 안겼다. 두 팔로 그의 목을 껴안고 다리로는 허리를 감았다.

처음 만난 순간처럼 가브리엘은 말이 없었고 아사야는 열 살의 어린아이였다. 침묵 속의 연인이 무슨 말을 기다리는지, 그녀는 알고 있었다.

“가브리엘.”

젖은 숨을 씨근덕대며, 아사야가 말했다.

“나를 멀리…...… 아주 멀리...…… 데려가 주겠어?”

그러자 그녀의 드래곤이 웃음 지었다. 오래도록 기다려 온 말에, 그는 검은 날개를 펼쳤다.

사랑한다는 속삭임은 아주 작아서, 그의 등에 몸을 실은 어린 인간만이 들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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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오전, 니칼은 이불을 개는 아이들을 지켜보다 고개를 기울였다. 오십 명이 넘는 아이들 가운데에서도 단 한 명, 부재가 눈에 띄는 아이가 있었다.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니칼이 물었다.

“아샤는 어디로 갔니?”

그러자 두 아이가 니칼의 발치로 모여들었다.

“언니야는 이제 없어요. 저 멀리멀리 날아가 버렸어요!”

“어젯밤에 까맣고 커다란 새가요, 아샤를 데리고 가 버렸어요.”

유라와 사라가 그렇게 소곤거렸다. 두 소녀가 창문 밖을 손짓하자 아이들이 창가에 다닥다닥 붙어 섰다. 저도 모르게 니칼은 아이들과 같이 창문 밖을 내다보았다. 까맣고 커다란 새는커녕 환하게 번져 가는 아침의 해가 떠 있을 뿐, 하늘은 티끌 하나 없이 맑았다.

“맨날 이야기하더니. 천공섬으로 정말로 떠났나 봐.”

아이들의 말소리가 소곤소곤 울려 퍼졌다. 멀리 언덕 위에는 검은 용의 갈빗대가 우두커니 존재할 따름이었다.

〈검은 용의 갈빗대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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