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화 (12/16)

세일산의 해



 

아사야 세일산의 죽음은 불행의 시작에 불과했다. 밤과 함께 닥쳐온 재앙은 전 대륙을 공포로 물들였다.

가브리엘은 잃어버린 힘과 마력을 돌려받았으나, 그와 함께 해묵은 분노와 거친 증오 역시 되받아야 했다. 그의 집이 폐허이고 그의 이름이 발락이던 시절로 돌아온 것을, 가브리엘은 느꼈다. 그리고 그는 미쳐 버렸다.

발락의 고함성과 함께 왕성의 탑과 예배당이 붕괴되었다. 흙먼지가 쓸고 지나간 자리에 검은 그림자만이 다닥다닥 바닥을 기어 다녔다. 아사야 세일산의 화형을 구경하던 이들이 한날한시에 사라져 버렸다. 왕성의 희고 깨끗하던 뜰에 그들의 그림자가 옹기종기 모였다가, 흩어지며 팔다리를 흔들어 댈 뿐이었다.

이제껏 그의 존재를 전쟁이 아닌 재해로 표기한 이유가 있었다. 전쟁이라 함은 두 존재가 서로 맞붙음을 뜻하건만, 발락이 벌인 살생은 일방적인 파괴에 불과했다. 삽시간에 대륙의 위대한 왕성이 박살나고 가라앉았다. 화형대가 놓인 원형 탑만이 높은 자리를 지키며 버틸 뿐이었다.

원형 탑의 꼭대기를 바라보며 검은 짐승은 보라색 눈을 크게 떴다. 흙먼지에 덮인 장작더미의 불씨는 꺼졌으나, 그런들 이미 타 버린 무어가 돌아오진 않았다. 아사야 세일산이 그 자리에서,

“가브리엘.”

그를 불렀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고개를 들고 가브리엘은 입을 쩍 벌렸다. 그리고 비명을 내지르고자 하였으나, 그의 잇새로는 어떤 소리도 빠져나오질 않았다. 큰 슬픔이 그를 무기력하게 짓눌렀다. 분노가 그의 목구멍을 막아 놓았다. 배신감이 그의 사고를 정지시켜 놓았다.

검은 재앙 앞에 대륙의 수도는 속수무책으로 망가졌다. 3일간, 수도에서는 누구도 태어나지 않았고 누구도 싸우지 않았으며 누구도 돈을 벌지 않았고 누구도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3일간, 대륙의 수도에는 그 누구도 없었다. 모든 생명과 그림자가 사라져 버렸다.

폐허가 된 땅덩어리에 머리를 박고 앉아 검은 드래곤은 성난 숨을 씩씩거렸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멸하기까지 아주 짧은 시간이 걸릴 뿐이었고, 무엇도 죽이거나 망가뜨리지 않는 시간은 그에게 슬픔만을 안겨 주었다.

고요한 수도를 요새 삼아 검은 육신을 처박은 채 그는 고통에 몸부림쳤다. 그가 울고 소리 지르고 원망하는 동안에는 해가 뜨지 않았다.

왕성 붕괴로부터 나흘째 되는 날부터 그럴싸한 전쟁이 시작되었다. 수도 외곽의 병영에서 군인들을 보내왔고 마법사와 기사들이 진을 쳤다. 그들 그림자를 우두커니 응시하다 가브리엘은, 그들이 저를 찌르고 쏘고 찢어 놓는 것을 방치하고 종용하기 시작했다. 상처 입은 그의 육신은 그림자를 떼어 내며 줄어들었으나, 고통은 그의 슬픔을 덜어 주었다.

인간을 죽이며 그는 죽어 가기 시작했다. 끝없는 살생이 한 달 넘게 벌어졌다. 실체 없이 거대하던 발락의 육신이 쇠퇴하는 것을 깨닫고 병사들은 그를 무찌를 계획을 세웠다. 드래곤이 두 번 다시 날 수도, 되살아날 수도 없게 그의 뼈를 부러뜨리고 육신을 동강내어 완벽하게 살해하는 계획이었다.

에파타의 창에 찔려 가브리엘은 추락했다. 그는 큰 슬픔으로 무거워진 육신을, 붕괴된 왕성 위에 떨어뜨렸다. 한 차례 박살난 바 있는 그의 심핵은 같은 무기에 두 번은 뚫리지 않았으나, 이미 흉터투성이인 등딱지를 찢어 놓기엔 충분했다.

쓰러진 드래곤의 등허리에 대포와 창이 날아가 꽂혔다. 갈비뼈가 부러지고 다리가 망가지는 것을 느끼며 가브리엘은 원형 탑을 올려다봤다. 끔찍한 고통 속에 그는 두 눈을 끔벅거렸다.

‘너도 아팠을까.’

그것만이 궁금했다. 그는 아사야의 몸이 불탄 자리에 목을 뻗고, 흙먼지 위에 주둥이를 문질렀다. 상처에 입을 맞추면 덜 아프다던, 아사야가 전해 준 미신만이 그를 움직였다.

제가 죽거든 누군가 아사야를 찾아 주고, 묻어 주고, 데려가지 않을까 그는 생각했다. 아니, ‘데려갔어야 했다’고, 그는 생각했다.

‘멀리 데려가서 강제로라도 가둬 버렸어야 하는 건데……, 진작 데리고 떠났어야 하는 건데.’

몸뚱이가 동강 난 상태에서도 발락은 쉽게 죽질 않았다. 허리를 가르는 상처가 생기고 피부가 너덜너덜하게 찢긴 채 그는 장기를 내보인 생선처럼 경련했다. 그때마다 그 자신의 피 웅덩이에 물살이 쳤다. 지난날 족쇄가 얼마나 강했고 그가 어찌나 무기력했었는지, 척추뼈가 부러지고 피가 강을 이룬 뒤에도 그의 덩치는 용의 철문에 갇혀 지낸 시절보다 훨씬 컸다.

‘널 데리고 떠났어야 했는데…….’

폐허 위에 턱을 올리고서 그는 생각을 멈췄다.

그를 향한 폭격 역시 그 즈음에 멈추었다. 군인들이 사방에 즐비한 시신을 수습했고 왕성의 잔해 밑에 짓뭉개진 야베스 세일산이 끌려 나갔다. 반역자의 시신을 담는 검은 자루를 끌다가, 군인들이 비명을 지르고 넌더리를 냈다. 야베스의 숨이 아직 끊기질 않았다는 말과 함께 그들은,

“폐하께 보고하라!”

외치며 소란을 피웠다.

가브리엘이 아는 것은 그게 전부였다. 반역은 끝이 났고, 발락의 재앙 역시 끝을 맺었다는 것.

넋이 빠져 버린 드래곤의 텅 빈 눈깔을, 근방의 병사들이 기웃거렸다. 무너진 왕성에 좀도둑이 들지 않게 순찰하는 병사들의 주요 업무는, 죽어 가는 드래곤을 구경하는 일이었다. 찢겨 나간 용의 육신을 농담 삼아, 그들은 이런저런 수다를 떨어 댔다.

“야베스 왕자 소식은 들었어?”

“교수형에 처했는데도 안 죽었다며. 바퀴벌레라고들 부르던데.”

숨도 쉬지 않고 눈알 하나 움직이지 않는 드래곤의 뿔을 툭툭 발로 차며, 붉은 머리 병사가 말했다.

“목뼈가 부러졌는데도 살아 있다잖아.”

그 음성을 끝으로 가브리엘은 의식을 잃었다.

꼼짝없이 죽은 줄로 알았던 그는 그러나,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에 홀로 눈을 떴다. 그의 절단 난 하체 위로 기어올라 옆구리에 칼을 쑤셔 넣으며, 소년들이 드래곤의 비늘을 뜯고 있었다.

눈알을 움직여 가브리엘은 소년들을 바라보았고, 작은 숨을 씨근덕댔다.

“야……, 이거 살아 있나 봐.”

가브리엘의 코앞으로 달려와, 소년들이 고개를 기웃거렸다. 번쩍대는 비늘을 주머니에 넣으며 그들은 드래곤의 보라색 눈을 들여다보았다. 먼지 쌓인 눈동자를, 가브리엘이 한 차례 끔벅였다. 그러자 우물쭈물 버티기를 잠깐, 소년들은 소리를 지르며 달아나기 시작했다.

목을 돌려, 가브리엘은 주위를 살폈다. 그는 원형 탑을 비롯하여 왕성의 잔해가 죄 철거되었음을 깨달았다. 얼마의 시간 동안 쓰러져 있었는지 알 길이 없었다. 다만 아사야의 자리가 사라진 이상 그에겐 인간들의 땅덩어리에 남을 이유가 없었다.

‘죽어야만 한다면…… 천공섬으로 가야겠어.’

최소한 그곳에는, 아사야와 함께 거닌 기억이 남아 있었다.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천공섬의 아침 해를 보고 싶었다.

마지막 힘을 쥐어짜 내어 그는 날개를 움직였다. 군데군데 비늘이 뜯기고 누군가 칼로 글씨마저 새겨 놓은 날개짝이 너덜너덜했다.

부러진 갈비뼈를 중심으로 동강 난 상체를 꿈틀거리며 그는 날갯짓했다. 도시에 핏물이 비처럼 떨어졌다. 하늘 위로 오르면서도 그는, 저에게 도대체 무슨 힘이 남아 이렇게까지 움직일 수 있는지 믿을 수가 없었다. 날갯짓을 할 때마다 배 속에서 비이상적인 괴성이 울렸고, 아래를 내려다보면 끊어진 하체와 비틀린 갈비뼈가 남아 있었다.

천공섬으로 날기까지 그를 지탱한 것은 오로지 집념이었다. 하늘을 날다가도 그는 기절했고, 바다 위로 떨어지던 중 피를 흘리며 다시 날아올랐다. 마침내 천공섬의 풀숲 위에 몸을 떨어뜨린 순간 그가 느낄 수 있는 것이라곤 너덜너덜한 날개와 텅 빈 머리, 멈춰 가는 심장뿐이었다.

하늘로 이어지는 절벽을 바라보며 그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죽음이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한참의 시간 끝에, 그는 다시 깨어났다. 제 호흡을 따라 움직이는 흙 알갱이를, 그는 멍하니 바라보았다. 아직 숨이 붙어 있단 게 끔찍하다고 생각됐다.

그제야 가브리엘은 이상을 알아차렸다. 전신을 휘감던 고통이 느릿느릿 물러서고 있었다. 물끄러미, 그는 제 허리 밑을 바라보았다. 살아 있는 벌레처럼 꿈틀거리며, 찢긴 살점이 제자리를 찾아 움직이고 있었다.

드래곤의 비명이 천공섬의 바람을 갈랐다.

“야베스 왕자 소식은 들었어?”

“교수형에 처했는데도 안 죽었다며. 바퀴벌레라고들 부르던데.”

병사들의 낄낄대던 목소리가 기억났고,

“꼭 다시 만나.”

아사야의 속삭임이 기억났다.

‘아사야…….’

소리를 지르고 싶었으나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의 목구멍 안에서는 꺼져 가는 숨이, 초라한 입김이 되어 빠져나올 뿐이었다.

‘무슨 짓을 한 거야, 도대체…….’

눈물로 비늘을 적시며 그는 흙바닥에 제 머리를 처박았다.

그의 시커먼 그림자가 닿자 풀도, 꽃도, 나무조차 검게 물들었다. 부글거리며 끓는 드래곤의 상처를 중심으로 불이라도 번진 듯, 숲은 다 타 버린 모습으로 그을려 비쩍 말라붙었다.

발락의 본능이 꿈틀거리며 사방의 생명력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너를 어떻게 기다리라고, 어떻게 다시 만나라고, 내게…… 내게 이런 짓을…….’

한때는, 살고자 하여 제 그림자를 자르고 도망친 몸이었다. 이제 그는 죽고자 하였으나 죽을 수 없는 몸이 되었다. 불길에 휩싸여 안녕이라는 인사도 없이 떠나 버린 아사야를 다시 만날 날까지, 그에게는 자살도 허용되지 않았다.

어린 인간의 희생으로 부지한 추악한 목숨줄이 끔찍한 흉터처럼 그에게 붙어 있었다.

기한 없는 기다림 속에 절단 난 육신이 안겨 주는 고통만이 그와 함께했다.

눈물로 흙을 적시며 드래곤이 입을 쩍 벌렸다. 쉬어 버린 비명이 텅 빈 천공섬을 울렸다.

“하루만 속아 달라 그랬잖아.”

돌바닥에 머리를 찧으며, 그가 외쳤다.

“하루만 기다리면 된다고 그랬잖아, 아사야. 하루만…… 하루만 기다리면…….”

대답 대신 그 자신의 메아리가 숲을 지나 돌아왔다. 제 목소리를 그는 낯선 것처럼 들었다. 그 목소리의 주인이 가브리엘인지 발락인지 재앙인지, 폐허인지 고통인지 상처인지 알 수 없었다.

“널 기다릴 수 없어.”

가진 힘을 쥐어짜 내어, 또 한 번 그는 바닥에 제 머리를 내리쳤다. 눈물이 피와 함께 흘러내렸다.

“하루도 기다릴 수 없어. ……널 용서할 수 없어, 널 잊을 수 없어. 하루도 견딜 수가 없어.”

정령마저 달아나 버린 검은 구덩이에, 오래된 존재의 애원이 울렸다. 그 밖에는, 자신의 머리를 돌에 찧는 괴팍한 소리뿐이었다.

“죽게 해 줘…….”

가브리엘은 의식을 잃었다가 깨기를 몇 번이고 반복했다. 다시 눈을 뜰 때마다 하늘의 빛깔이 달랐다. 그 외에는, 모든 것이 똑같았다. 열 번이고 백 번이고 그는 죽고자 제 머리를 바닥 위에 처박았다.

“아사야, 죽여 줘……. 죽게 해 줘.”

더는 눈물도 흐르지 않고 제 이름도 기억나지 않을 즈음,

“야……, 약…….”

신음하는 듯 가느다란 목소리가 그를 찾았다.

“약을…… 가져왔어…….”

멍하니, 그는 안개 너머로 아른거리는 어린 인간을 바라보았다. 작은 아이는 흰색 잠옷을 입고 있었다. 두 발에는 제 발보다 커 보이는 장화를 신었고, 어깨에 걸친 망토 끈은 리본 모양으로 턱 아래에 매듭지어 놓았다.

젖은 숨을 헐떡거리며 아이는 느릿느릿한 속도로 그에게로 다가왔다. 어둠 안에서도 하얗게 빛나는 작은 손에 약품들이 안겨 있었다. 어린 소녀가 그것들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기사님들이 칼에 베였을 때 바르는 걸 본 적이 있어……. 이걸 바르면 피가 멎는 거야.”

그제야 그는 눈앞의 소녀를 알아보았다. 젖살이 채 빠지지 않은 통통한 뺨에 별처럼 반짝이는 황금빛 눈동자, 다정한 목소리와 잊을 수 없는 향기를 내는, 아이는 아사야가 아니었다.

“신관들이 만든 건데…… 너, 너한테 발라 줄게.”

아이는, 그의 주마등이었다.

시커먼 머리를 환영 앞에 놓고 그는 자신의 주마등을 구경했다. 어린 인간이 꼬물거리며 가져온 약 상자를 뒤적거리고, 전문 약사라도 되는 양 그것들을 소개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네가 많이 아플 거 같아서…… 몰래 나온 거야.”

답이 돌아오지 않는 대화를 하며 아이는 어둠을 향해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그리고 램프를 들었다. 환한 불빛이 달처럼 두둥실, 그의 곁에 섰다.

두 눈을 가늘게 뜬 채 그는 아이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으려 노력했다. 밝고 노란 불빛 속에 희미하게 비치는 아사야의 뺨과 코를, 제대로 살피기 위해 애를 썼다. 그녀가 속삭이는 작은 목소리를 향해 귀를 기울였고, 꼬물거리며 움직이는 손가락 하나하나를 두 눈에 담았다.

“나…… 내일 또 올게.”

그로부터 한 발 물러서며, 그녀가 속삭였다.

‘가지 마.’

드래곤이 소리쳤다.

‘가지 마, 아사야. 가지 마.’

그의 애원은 그러나, 환시에게 가닿지 않았다.

“여기 꼭 있어야 해. ……내일은 맛있는 걸 가져올게.”

흐느끼는 그를 남겨두고 어린 인간이 뒤로, 뒤로 물러났다. 그녀의 작은 손에 들린 램프 불빛이 태양처럼 거대했다가, 반딧불이처럼 조그마해졌다. 삽시간에 멀어져 가는 어린 인간을 쫓아 그는 두 팔로 바닥을 기며 몸을 끌었다.

‘가지 마, 떠나지 마.’

아사야 역시 발이 쉽게 떨어지지 않는 듯, 걷다 멈추기를 자꾸만 반복했다. 안개 속에서 우물쭈물하며 소녀가 외쳤다.

“꼭이야. 여기서 기다려야 해. 약속한 거야, 응?”

그리고 어둠이 찾아왔다. 의식을 잃은 그의 거대한 턱이 쿵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그는 달콤한 꿈을 꿨다. 그 꿈에는 어떠한 등장인물도, 사건도, 배경조차 없었다. 죽음이라는 시커먼 심연만이 존재할 따름이었다. 또한 죽음은 그를 무엇보다 편안하게 만드는 그의 친구였다.

“나…… 나 왔어.”

그러나 조그마한 속삭임이 그의 잠을 깨웠다. 눈을 감은 채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대로 어둠 안에 처박혀 영원한 잠에 빠져들고 싶었다. 먹지도, 걷지도,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않고 거대한 그림자로만 남고 싶었다.

“아직 여기 있어?”

어린 목소리가 한층 커졌다.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어둠 안을 헤매는 인기척이 그의 피부를 간질였다. 새끼 사슴처럼 작은 발소리도 들렸다. 사슴 발굽이 아닌, 아사야의 장화가 내는 소리였다.

“제발…….”

이내 아사야의 목소리가 눈물로 젖었다. 훌쩍훌쩍 흐느끼며 어린 인간이, 어둠 속에서 저를 찾고 있었다.

“멍멍아…….”

두 눈을 뜨기가 끔찍이도 싫었다. 그런들, 달리 도리가 없었다. 작고 환한 어린 인간이 ‘멍멍아’ 하고 저를 부를 때면, 그는 눈을 뜨고 기척을 내야 했다.

‘여기 있어.’

제자리에 멈추어 서 우는 아사야에게로, 그가 목을 뻗었다. 부러진 뼈가 피부를 찔러 댔고 아물지 않은 상처에서 피가 흘렀다. 그러나 그는 이제 고통을 느낄 수 없었다. 그가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이라고는,

“바보야!”

아사야의 화난 얼굴과 외침, 어리숙한 슬픔뿐이었다.

“왜 빨리 안 나왔어, 가 버린 줄 알았잖아……. 죽은 줄 알았단 말이야!”

발을 동동 구르며 안달 내는 환각을 보며 그는 미소 지었다. 어린 아사야는 책과 같았다. 돌아오는 대답이 없어도 저 혼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이어 나가며, 제멋대로 질문을 하고 제멋대로 결론을 내고는 했다.

‘맞아, 그랬었지.’

혼자 마음껏 화를 내고 투정을 부린 다음, 아사야는 까만 눈썹을 끌어 내리며 미소 지었다.

“날 기다렸어?”

아이가 물었다.

‘그래, 너를 기다렸어.’

그가 대답했다.

“미안해. 몸살이 걸려서 눕는 바람에 여기로 올 수가 없었어.”

‘알아. 걸핏하면 기침하고 앓아눕는 아가씨지.’

“내가 많이 건강했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

‘건강하지 않아도 괜찮아. 아픈 게 네 잘못은 아니잖아.’

“그래도 나는 약속은 꼭 지켜.”

비밀 주문을 외는 양 아사야가 속삭였다.

“늦었지만 널 보려고 왔어.”

거친 숨으로 흙먼지를 일으키며, 그는 성난 말처럼 몸을 떨었다. 작은 환각은 귀여운 바구니를 팔에 낀 채 그를 향해 웃고 있었다.

‘아니야.’

그가 소리쳤다.

‘너는 약속 따위는 지키지 않아. 너는 최악의 거짓말쟁이야.’

머리를 흔들며 그는 아사야에게서 등을 돌렸다. 그러나 환각에게는 고정된 위치가 없었다. 어디를 보건 눈을 뜰 때마다 그는 어린 인간의 미소를 만났다.

“이건 레몬청인데, 꿀을 넣고 절인 거야.”

새의 부리처럼 작은 입술을 오물거리며 아사야가 말했다.

“아플 때 꿀을 먹으면 입맛이 돌아. 달달하고 맛있을 거야. 입 벌려 봐.”

벅찬 슬픔으로 그는 울었다. 눈물이 검은 비늘을 적시고 핏물을 씻기며 흘러내려 갔다. 환각을 향해 그는 입을 벌렸지만, 느껴지는 것이라고는 제 눈물의 씁쓸한 맛뿐이었다.

천천히, 아사야가 작은 손을 뻗었다.

“우리 포옹할까?”

그러고는 제멋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작은 몸을 꼬물거리며 그의 날갯죽지 아래로 숨듯이 들어왔다. 포옹이라기보다는 큰 이불 밑에 몸을 숨긴 것에 가까웠다. 그래도 그는 만족스러웠다. 자그만 아사야의 몸에서는 포근하고 좋은 향기가 났고, 새근거리는 숨결이 그의 날개를 간질였다.

“내 이름은 아사야 아졸이야.”

아사야가 속삭였다.

“내가 너를 부를 수 있게…… 이름을 짓는 건 어떨까?”

오만상을 찡그리며 그는 낮게 신음했다. 그 자신의 헐떡대는 숨소리와 쿵쾅거리는 심장 박동에, 아사야의 향기며 숨결은 파묻히고야 말았다.

“가브리엘.”

천둥처럼, 그가 목소리를 냈다.

“내 이름은 가브리엘이야…….”

가브리엘이 다시 날개를 들었을 때, 그 밑에는 누구도 없었다. 고개를 번쩍 들고 그는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멀리 헤맬 필요는 없었다. 꽃향기와 함께, 아사야는 그의 옆에 앉아 있었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그녀는 화관을 만들었다. 작은 손가락이 요리조리 꽃줄기와 잎을 엮는 모습을 가브리엘은 마술을 보듯 구경했다. 완성된 색색의 화관을 들고, 아사야는 장난꾸러기처럼 웃었다. 살금살금 다가오더니 가브리엘의 뿔 위에 화관을 올려놓았다.

신이 난 듯, 아사야는 제자리에서 팔짝거렸다. 꺄르르 터뜨린 웃음소리에 마음이 벅찼다. 아사야를 따라 웃으며 가브리엘은 콧김 소리를 냈다.

다시 눈을 깜빡였을 때 아사야는 가을 잠옷을 입고 있었다. 가을 잠옷은 당시 아사야가 가장 좋아하던 옷으로, 도톰하고 부드러운 천으로 지은 원피스였다. 몇 번인가 치맛자락을 당겨 제 콧잔등에 문지르던 것을 가브리엘은 기억했다.

아사야의 가을 잠옷은 배가 불룩하게 부풀어 있었다. 치마 밑이 붕 뜰 정도였다. 가져온 담요를 공처럼 돌돌 말아 원피스 안에 집어넣은 탓이었다.

“진짜야. 배가 이따만 하다니까?”

좌우로 뒤뚱뒤뚱 걸으며 아사야는 가브리엘의 머리 주변을 배회했다. 주방보조 하녀가 임신을 했는데 그 배가 이만큼이나 크다는 설명도 뒤따랐다.

그러나 가브리엘이 보기에 아사야의 모습은, 임신한 하녀라기보다 갓 태어난 아기새 같았다. 작은 발로 뒤뚱대는 걸음걸이는 금방이라도 넘어질 것 같았고, 쉼 없이 조잘대는 입술은 먹이를 기다리는 아기새의 부리 같았다.

생각에 잠긴 가브리엘 앞에, 아사야가 정면으로 섰다. 그러고는 치마 안에 넣었던 담요를 다시 꺼내서는,

“아기 나왔다!”

소리를 쳤다.

소녀의 목소리가 어둠 안에서 밖으로, 다시 안으로 메아리를 치며 울렸다. 제 목소리가 만들어 낸 메아리에 놀란 듯, 아사야는 두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작은 손으로 제 입술을 틀어막았다.

몇 초 뒤에야 메아리가 그쳤다. 민망한 듯 아사야는 귀를 붉히며 웃었다.

“자, 가브리엘. 아기 안아 줘.”

또 다른 메아리를 만들지 않기 위해, 아사야가 소곤거리며 말했다. 가브리엘은 소녀의 얼굴만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두 눈은 태양처럼 반짝거리고, 입술은 말괄량이처럼 수다스럽고, 두 뺨에는 장난기와 호기심이 잔뜩 묻은, 순진하고 어린 아사야였다.

가브리엘의 시선을 느낀 듯,

“나 말고, 아기 말이야.”

아사야가 꺄르륵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말했다.

“나 말고 아기를 보라니까.”

작은 속삭임이 메아리를 만들며 가브리엘의 머릿속에 울렸다. 환영이 말하는 ‘아기’를, 그러나 그는 볼 수 없었다. 그의 곁엔 더 이상 완전한 어둠도, 어린 인간도, 조잘거리던 말소리도 남지 않았다.

가브리엘은 정신없이 환영을 찾아 두리번댔다. 눈물이 시야를 가로막은 탓으로 알고, 그는 힘껏 눈꺼풀을 움직여 눈물을 떨구어 냈다. 그래도 아사야는 보이질 않았다.

고개를 들어 그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사야.”

소리 내어 불러 보았으나 그 어디에서도, ‘워’, 놀래는 소리를 내며 두 발을 폴짝대는 어린 인간은 나타나지 않았다.

“아사야!”

턱을 들고 가브리엘은 낼 수 있는 모든 소리를 쥐어짜 냈다. 그의 외침에 천공섬의 땅덩어리가 낮게 진동했다.

“아사야, 아사야…….”

덜덜 떨리는 다리를 바르작대며 그는 오래도록 쓰러져 있던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추락한 흙바닥에 비늘 조각들이 조약돌처럼 고여 있었다. 그의 피와 눈물이 탁한 웅성이가 되어 고여 있었다.

숨을 헐떡거리며 그는 사방을 둘러보았다. 천공섬의 나무와 풀과 꽃을, 바위와 구름을, 멀찍이 유적처럼 남은 무너진 신전을, 그는 정신없이 둘러보았다.

이내 가브리엘의 두 눈은 제 발에 닿았다. 검은 흙을 딛고 일어선 발에는 열 개의 발가락이 붙어 있었다.

손을 들어 그는 제 얼굴을 더듬어 댔다. 열 개의 손가락으로, 반듯한 이마와 코, 눈두덩이와 턱을 번갈아 만졌다.

그는 자신이 생각만으로 폴리모프를 마쳤음을 깨달았다. 동강 났던 하반신이 회복되었단 것을, 죽을 위기를 넘기고 질긴 생명을 얻었음을, 심장이 요동치며 거친 마력을 뿜어냄을 깨달았다.

그 순간 가브리엘은 바닥에 쓰러졌다. 그리고 울기 시작했다. 그는 마력을 되찾고 싶지 않았다. 고통에서 벗어나 완전히 일어서고 싶지도 않았다. 그의 소원은 단 하나였다. 그는 죽고 싶었다.

죽어서, 주마등 속에 비친 아사야를 다시 만나고 싶었다.

그러나,

“나 말고, 아기 말이야.”

오래된 속삭임이 그의 이성을 일깨웠다.

“나 말고 아기를 보라니까.”

고개를 들어 가브리엘은 절벽 끝을 바라봤다. 밤이 남긴 푸르스름한 멍을 지우며, 천공섬에 해가 뜨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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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색 모래 알갱이가 검은 용의 발가락을 간질였다. 왼발을 들어, 가브리엘은 제 발바닥을 바라보았다. 축축한 모래가 들러붙은 그의 발바닥은 어느 때보다 흰색이었다.

나젤탄의 해안가 모래알은 여느 해변의 모래와 달리 거친 면 없이 부드럽고 그 입자가 무척 작았다. 오랜 시간에 거쳐 풍파를 맞아 부서지고 부서지기를 반복한 결과였다.

갈아 놓은 소금 같기도, 녹지 않는 눈 같기도, 아주 고운 밀가루 같기도 한 해변을 가브리엘은 혼자 걸었다.

고개를 들면 그는 거대한 회색 바위를 볼 수 있었다. 본디 땅 밑이었던 지반에는 누군가 자를 대고 그은 듯한 굵은 선이 몇백, 몇천 개씩 새겨져 있었다.

똑똑한 아사야라면 저것이 땅덩이가 지닌 나이테임을 알아보았을 것이었다. 책을 통해 지겹도록 읽은 지진과 지반의 역사에 대하여, 교사라도 된 것처럼 설명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챙이 넓은 밀짚모자에 일평생 입어 본 중 가장 편안한 원피스 한 장을 걸치고, 어깨가 타건 말건 아랑곳없이 해변을 거닐 이가 아사야였다. 부드러운 모래에 발가락을 묻고 깔깔거리다가 파도가 닥쳐오면 흰 거품이 싫어 도망칠 그녀였다.

물에 몸을 담가 본 역사라고는 시녀들이 챙겨 주는 입욕이 전부인 공주님께선 수영하는 법을 몰랐다. 그러니 파도가 다가오거든, 고양이처럼 다리를 팔짝거릴 터였다.

가브리엘은 묵묵히 해변가를 가로질렀다. 그에겐 어떠한 즐거움도, 웃을 일도, 해방감도 없었다. 마땅히 제 곁에 있어야 할 동행인이 없는 탓이었다.

해안가에 위치한 항구 도시는 아사야가 묘사한 것과 무척 흡사했다. 흰 돛대를 단 거대한 배가 바닷가에 즐비했다. 조개와 따개비로 뒤덮인 성벽은 온통 상아색이었다. 바람에서는 짠 냄새가 났다. 숨을 죽이면, 도심에서조차 파도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사람을 피하는 법을 잊은 갈매기를 지나 가브리엘은 걸었다. 표정 없이 움직이는 그를 오가는 행인들이 힐끔대며 살폈다. 몇몇 소녀들은 키득거리며 웃기도 했다. 그가, 저와는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 항해 모자를 쓴 탓이었다. 그의 큰 키 탓에, 짧은 챙을 접어 올리고 금색 띠를 두른 항해 모자는 인파 위를 둥둥 떠다니는 듯 보였다.

여관과 상가가 이어지는 오르막길에 접어들어, 가브리엘은 도심 중앙에 위치한 시계탑을 올려다보았다. 시계탑의 중앙에는 눈에 익은 깃발 하나가 걸려 있었다. 진남색 거대한 천에, 앞다리를 든 백마가 그려진 깃발이었다. 나젤탄에 도착한 이후 같은 문양의 깃발만 열댓 개는 본 것 같았다.

발 닿는 대로 가브리엘은 가까운 여관에 들렀다. 지금이 몇 년도이며 계절은 언제쯤 되었는지 알기 위해서였다. 작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커다란 손님을, 여관 주인이 힐끔 살폈지만 그게 전부였다. 규모가 큰 상단을 단체 손님으로 맞이하여 이미 바쁜 탓이었다.

여관 벽에는 많은 이의 손길이 닿은 달력 하나가 걸려 있었다. 그러나 가브리엘은 달력에 쓰인 숫자를 물끄러미 노려볼 뿐 그 뜻을 읽어 내지 못했다. 그가 기억하고 아사야가 알려 주기로, 그는 대륙년에 살고 있었다. 그러나 달력에는 ‘세일산 해. 20’ 따위의 알 수 없는 연호와 숫자가 쓰여 있었다.

‘세일산 해…….’

언제부터 연호가 바뀌었는지 추리하기를 포기한 채 가브리엘은 걸음을 옮겼다. 그러고는 창가에 걸린 도시 약도를 살폈다.

아사야와 저의 아이를 찾기 위하여 가브리엘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그는 제 자식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저를 닮았는지 아니면 아사야를 닮았는지 그 생김새는 물론이며 그 아이의 성별조차 알지 못했다. 만난 적이 없어 일면식이 없고 목소리도, 가진 재산도, 사는 지역도 모르는 이를 찾기란 드래곤인 그에게조차 막막한 일이었다.

가브리엘에게 일말의 힌트가 될 것이라고는 머릿속의 아사야 세일산이 제멋대로 떠들어 대는 수다뿐이었다.

“어서, 아기 이름을 지어 줘.”

그렇게 독촉할 적에, 아사야는 구두를 벗은 발끝으로 가브리엘의 옆구리를 밀고 있었다. 유리 정원의 침대에 앉아 가브리엘이 시큰둥한 표정을 짓자, ‘어어?’ 하는 의미 없는 소리를 내며 조금도 위협적이지 않은 표정을 지어 보이기가 일상이었다.

“그러는 넌.”

마땅히 떠오르는 이름이 없어 골머리를 앓으며, 가브리엘이 물었다.

“……넌 아기에게 뭘 줄 생각이야?”

그의 손에 발을 잡힌 채 아사야는 두 눈을 둥그렇게 떴다. 하얀 스타킹의 질감이 그녀의 여린 발을 매끄럽게 감싸고 있었다. 부드러운 발바닥을 간질이듯 만져 줄 때면, 그녀의 날씬한 뺨에 미소가 올랐다. 웃을 때면 아사야의 얼굴은 유년기처럼 동그랗게 환해졌다.

“간지러워.”

늘씬하고 여린 몸을 시트 위에 풀썩 눕히며, 아사야가 소곤거렸다.

“나는 말이야. 아기에게 내가 받은 선물을 물려줄 거야. 아버지가 남겨 주신 유산을…… 이 아이가 이어받게 할 거야.”

그때엔 그녀가 말하는 ‘유산’이 영웅 집안의 명예와 부귀한 삶인 줄로 착각한 가브리엘이었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날의 아사야는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제 아이가 아졸가의 사람으로 살기는커녕 나자마자 왕성을 떠나야 하는 방랑자임을, 이미 알고 준비해 둔 것이었다.

생각 속의 아사야가 작은 발을 까딱거리도록 내버려 둔 채, 가브리엘은 약도에 적힌 글자들을 열심히 읽었다. 어둠의 탄생과 생애를 함께해 온 그로서는 못 읽을 언어가 없었다. 어차피 인간들이 만들어 내는 언어란 대체로 거기서 거기였다. 가브리엘에게는 대륙의 언어와 나젤탄의 언어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약도 위의 필기체를 훑으며 가브리엘이 찾은 것은 ‘보석상’이란 단어였다. 근방의 가장 큰 보석상의 위치를 알아내자마자 그는 여관을 떠났다. 달력과 약도만 확인하고 떠나는 손님이 적진 않은지, 여관 주인은 그를 붙잡지 않았다.

가브리엘은 보석상으로 향하는 걸음에 속도를 올렸다. 그러지 않고서는 제 뒤를 따라 걸으며 노래 부르는 아사야를 떨칠 수가 없었다.

종소리가 요란하게 울리는 가게 문을 열자마자, 가브리엘은 유리알 안경을 낀 남자를 발견했다.

그리고 물었다.

“드래곤 비늘이 매물로 오간 기록이 있소?”

그러자 보석상이 두 눈을 끔벅거리며 가브리엘의 행색을 위아래로 살폈다. 드래곤 비늘을 찾는 이는 많지 않았다. 누구나가 그 진귀한 유해를 갖기 원하였으나, 누구나의 재산으로는 구입할 수 없는 희귀품인 탓이었다.

“비늘이 있으면, 사실 돈은 있고?”

새치 수염을 매만지며 보석상이 되물었다. 그의 질문에 답할 의무가 그러나, 가브리엘에겐 없었다. 해야 할 것이라고는 건방진 인간의 눈을 직시하며 또 한 번,

“드래곤 비늘이 매물로 오간 기록이 있나 물었어.”

명령할 뿐이었다.

그러자 보석상은 멍하니 굳어 버렸다. 비아냥대던 입꼬리가 작게 경련하더니 그마저도 차분해졌다. 눈을 깜빡이는 일마저 멈춘 탓에 흰자위가 벌겠다.

이어 그는 꼭두각시 인형처럼 움직이기 시작했다. 벽장 속의 금고를 열더니, 보석상 장사의 전부라 해도 손색없는 판매 명부를 꺼낸 것이었다. 세뇌가 풀리고 나면 그는 가브리엘이라는 손님이 다녀간 사실조차 기억하지 못할 터였다.

넋이 나간 인간이 판매 명부를 펼쳐 놓았다. 그 기록에 남겨진 품목들을 전부 훑었으나 가브리엘은 ‘젬 드래곤의 비늘’ 따위는 찾아내질 못했다.

발 닿는 곳에 놓인 모든 보석상을, 가브리엘은 같은 방식으로 오갔다.

“이렇게 찾아봐야 헛수고요.”

제대로 된 정보는 열댓 번째 들른 가게의 주인, 반올림하여 백 살쯤 먹었을까 싶게 늙은 인간의 입에서 나왔다. 세뇌를 걸기도 전에 나온 말에 가브리엘이 눈살을 찌푸리자 그는 혀를 끌끌 찼다.

“그렇게 귀한 물건이 매물로 돌아다닐 이유가 없지. 어차피 살 사람은 정해져 있으니 말이야.”

그리고 알려 주기를, 드래곤이라면 환장을 하는 백작이 있다 했다. 비늘 한 조각을 사기 위해서라면 아무리 높은 값이라도 부르는 대로 치르니, 나젤탄으로 흘러들어 온 비늘은 필시 그가 손에 쥐게 마련이란 것이었다. 제 영지의 세금을 올려서라도 드래곤 비늘을 모으는 통에 그 땅을 떠난 소작농도 여럿이더랬다.

“하니 이런 항구 마을에 그 비늘이 떠돌 턱이 있겠나.”

제 수염을 만지작대며 노인이 말을 마쳤다.

당장에 백작이라는 자를 찾고자 돌아서는 가브리엘을,

“그에게서 무얼 살 생각은 덜어 내는 게 좋을 거요.”

노인의 쉰 목소리가 붙잡았다.

“……제 것을 누구에게 팔 사람이 아니오. 어떤 조건을 걸건 거래에 응하질 않을 거요, 아주 욕심 많은 사람이니…….”

넌더리를 내는 말투에는 약간의 싫증마저 묻어났다. 제 할 말을 마친 노인은 읽던 신문을 다시 펼쳤다.

왔던 것처럼, 가브리엘은 순식간에 보석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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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칠이 된 욕조 팔걸이가 촛불 빛에 반짝거렸다. 그런들, 백작의 어깨와 팔만큼 빛나지는 못했다. 매끄럽게 번들거리는 팔뚝을 쓰다듬으며 그는 온수에 몸을 씻어 냈다.

그럴 적에 그는 날 듯이 기쁜 사람이었다. 대륙으로 보낸 집사와 하인들이 마침내, 발락의 다섯 번째 비늘을 찾아 값을 치렀단 소식을 들은 덕이었다. 한 달 내로 돌아올 마차와 제 품에 안길 비늘을 생각하니 절로 배가 불렀다.

발락의 비늘은 이미 그의 수중에 넷 있되, 네 가지 전부 다 크고 아름다워 그가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보물이었다. 누구의 그림자보다 짙고 어두운 비늘에는 빛을 쬐어도 반사광이 없고 망치를 두들겨도 구부러짐이 없는 데다, 불에 넣어도 달아오르질 않고 물에 담가도 젖지를 않았다. 게다가 지난날의 끔찍했던 참상을 상징하는 양 조각 하나하나가 어른의 손바닥 크기로 거대했다.

그토록 아름다운 비늘을 한 조각이라도 더 얻고자, 저를 지킬 경비대마저 상인으로 둔갑시켜 대륙으로 보내 놓은 백작이었다.

덕분에 가브리엘은 손쉽게 그의 침실에 숨어들었다. 거대한 저택을 지키는 이라고는 늙거나 어린 하녀 다섯뿐이었고 그들 눈을 피하기란 숨쉬기처럼 쉬운 일이었다.

서슬 퍼런 눈을 들어, 가브리엘은 백작의 등을 노려보았다. 어둠 안에 설 때면 그의 존재는 그림자처럼 희미해지곤 했다. 흰자위와 보라색 눈동자만이 박쥐의 동공처럼 비쳤다.

가브리엘의 눈길이 닿은 곳엔 드래곤의 비늘로 만들어진 침의가 있었다. 욕조에 앉아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백작의 온몸이 번들대는 것도 그 탓이었다. 달빛, 별빛, 벽난로의 온기와 촛불의 가느다란 빛줄기 하나하나를 품고 반사하며 비늘들은 각기 다른 모양과 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반사광 탓에 흐려졌던 가브리엘의 시야가 뚜렷해지기까지 긴 시간은 필요치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백작이 몸에 두른 것이 단순한 침의가 아님을 알았다. 그는 비늘로 옷을 꿴 적 없었으며 옷가지를 걸치고 있지도 않았다. 그가 긁어모은 비늘들은 그의 피부에 심겨 드래곤의 피부와 같은 모양새를 갖추고 있었다.

그는 단순히 드래곤을 좋아하는 애호가가 아니었다. 비늘을 수집하고 아끼는 것을 넘어서, 그 자신이 드래곤이 되고자 하는 미치광이였다.

조악하고 작은 비늘들이 그의 오른팔과 등과 목덜미를 완전히 뒤덮었다. 왼팔에는 본래의 피부가 남아 있었으나 그마저도 곧 있을 수술을 준비하며 약물에 절인 채였다.

백작의 정체를 깨달은 순간 가브리엘은 터져 나오는 비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가 소리 내어 크게 웃자, 놀란 백작이 휘둥그렇게 뜬 눈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나젤탄이 평화와 자유의 땅이라더니, 꼭 그렇지만은 않은 모양이었다. 평화와 자유의 땅에서 그 누가, 전쟁과 사냥으로 죽임당한 드래곤의 비늘을 벗겨다가 제 몸에 다닥다닥 붙여 놓는단 말인가.

어쭙잖게 제 존재를 흉내 내는 모양새가, 가브리엘의 눈에는 기괴하고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었다.

“누, 누구요, 당신…….”

백작의 떨리는 물음에,

“그렇게 좋은 수가 있는 줄은 몰랐군.”

가브리엘은 동문서답했다.

“나도 인간을 죽이고 그들 가죽을 뒤집어쓸걸 그랬어. 그러면 인간이 되는 줄을, 왜 진작 몰랐을까?”

비아냥대는 목소리에 백작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가 하인을 부르기 위해 입을 벌린 순간, 가브리엘은 그의 머리채를 쥐고는 바닥으로 패대기쳤다. 단단한 대리석 바닥에 배를 깔고 엎드리며 백작은 새된 비명을 내질렀다.

헐떡대는 백작의 등을, 가브리엘의 왼발이 밟았다. 허리를 숙이며 그는 제 옆구리에 찬 조그만 단검을 뽑아 들었다.

가브리엘이 말했다.

“대대적인 복수 따위엔 관심이 없어. 개인적인 일이 아니고서는 움직일 필요가 없으니.”

벌벌 떨며 오줌을 지리는 백작의 어깨 위를 가브리엘의 검날이 쓸었다. 날카로운 검의 끝에 닿는 피부가, 찢어지는 대신 토독토독 듣기 좋은 소리를 냈다. 두께와 색깔, 모양이 각기 다른 비늘들이 내는 마찰음이었다.

제가 뱉은 말마따나 가브리엘에겐 대의가 없었다. 그는 제 종족을 위한 복수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가 원하는 것은 아주 조그맣게 반짝거리는 젬 드래곤의 비늘 한 조각이었다. 베데르 아졸이 제 딸에게 남겼던 유산이자, 제 자식을 찾을 유일한 근거, 어린아이의 새끼손톱처럼 자그마한 보석. 그것 하나면 충분했다.

그 비늘이 백작의 피부에 들러붙어 깊게 박혀 있음은 제가 신경 쓸 바 아니었다.

산 인간의 생살을 칼로 쑤셔 비늘을 뜯어낼 적에 가브리엘은 무표정했다. 덜 아문 피딱지를 떼어 내듯 심드렁한 기분이었다.

“힉…….”

놀란 백작이 신음하며 몸을 떨었다. 가까스로 고개를 돌린 그의 눈앞에, 가브리엘은 자그마한 비늘 조각을 보여 주었다.

“이 비늘을 언제, 누구에게서 구입하였어? 그자는 어디로 갔지?”

피에 젖은 비늘을 백작이 정신없이 살폈다. 그와 같은 수집가에게, 드래곤의 비늘을 분간하기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그는 제 몸에 유일하게 하나 있던 젬 드래곤 비늘을 알아보았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하, 한참도 더 된 일인데…… 아주 예전에 어, 어떤 노파한테서 샀습니다. 소, 손자의 손을 잡고 온 노파였는데, 돈이랑 마차가 필요하다 해서…….”

“해서?”

“오십 세실을 주고 마차를 빌려주는 대가로…….”

백작이 말끝을 흐렸다. 자신의 염치없음을 저도 아는 눈치였다. 급전이 간절한 듯 애원하는 노파로부터 헐값에 보물을 구한 사정을, 줄줄 읊어놓기가 민망하고 창피했다. 젬 드래곤의 비늘은 그 모양이 이미 완벽해 세공할 필요가 없는 보석이었다. 제아무리 작은 조각이래도 개당 오백 세실은 쳐야 옳았다.

그러나 가브리엘은 그가 치른 값 따위엔 관심이 없었다. 그의 관심은 오직 ‘손자의 손을 잡고 온 노파’라는 묘사에 치중되었다. 노파라 함은 아사야의 유모이던 엠마오를 말하는 것일 테고,

“손자라고…….”

그와 함께 있던 이가 아사야와 저의 아이일 터였다.

“……아들이었군.”

의외였다. 어째서인지 아사야가 낳는 아이라면 필시 딸일 것이라고 이유 없이 확신한 탓이었다.

저에게 자식이 있단 사실은 그 아이를 찾으면서도 실감이 나질 않았는데, 그게 아들이라 하니 더욱 모호한 기분이 들었다.

‘나에게 아이가 있고 그 아이가 아들이라니…….’

가족을 꾸리거나 무리를 지키는 일은 물론이며, 종의 번식에 관하여도 욕구가 현저히 낮은 블랙 드래곤이었다. 날 때부터 타고난 기질에 의하여 가브리엘 또한 아이를 원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베데르 성에 머무르며 아사야의 배를 볼 적에는, 그녀의 아기가 딸이었으면 바랐었다. 아사야가 여자이니 그 자식도 여자여야 그녀를 더 닮을 것이란 생각 때문이었다. 그의 모자란 상상력으로는 도무지 아사야를 닮은 아들을 떠올리기가 어려웠었다.

‘아들이라니…….’

그는 도리 없이 실망감에 빠져들었다.

아사야가 알았더라면 ‘못써, 가브리엘’ 하고는 화를 냈을지도 몰랐다. ‘우리 아이이니 조건 없이 사랑해야지’ 하는 듣기 좋은 꾸중을 하고 그의 이마에 작은 꿀밤을 놓았으리라.

생각이 거기에 닿자 가브리엘은 기분이 좋아졌다. 그러나 상상 속의 아사야와 노닥거리기에는 그를 방해하는 것이 너무 많았다. 이를테면 발밑에서 꿈틀거리며 반항할 방도를 찾는 백작이 그랬다.

힘주어, 가브리엘은 그의 허리를 짓밟았다. 거구의 남자가 체중을 실어 짓누르자 백작은 입을 벌리고 혀를 내밀었다. 그러고는 밭은기침을 해 댔다.

“그들에게 마차를 빌려주었다고……. 어디로 바래다주었지?”

가브리엘이 물었다.

“사, 살려…… 살려 주십시오……, 그 비늘을 원하시거든 가져가시고…… 내 목숨만은…….”

백작이 원하는 답을 들려주질 않자 가브리엘은 왼발에 더욱 힘을 실었다. 가브리엘에게 인간을 죽이는 일은 쉬웠지만, 죽지 않을 수준의 고통을 주기란 까다로웠다. 백작의 뼈를 부수되 그 뼈가 심장을 찌르게 하여선 안 됐다.

드래곤의 신중한 고문에 못 이겨 백작은 음식물이 섞인 위액을 토해 냈다. 늑골에 금이 가고 장기가 뒤틀리는 고통에 그는 허덕였다.

“그들을 어디로 바래다주었냐 물었어.”

가브리엘이 꼬집어 말하자, 그는 허둥지둥하며 소리를 질러 댔다.

“아나트!”

가브리엘로서는 처음 듣는 지명과 설명이 그의 입을 통해 새어 나왔다.

“아나트로 갔습니다! 아나트로 바래다 달라, 그, 그렇게 요구하기에, 마부가 노파를 성벽 앞까지 태워다 주고는 돌아왔댔고…… 그게 답니다. 그게 다예요……, 저는 정말 모릅니다. 그 노파한테 무슨 원한이 있으신지 모르겠지만, 저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노파에게 원한이 있다는 말은 순전히 착각이었지만, 뒷말 하나만큼은 옳았다. 필요한 정보를 모두 얻었으니 이제 백작은 가브리엘과 상관없는 인물이었다. 가브리엘은 거대한 멍울이 생겨 보라색이 된 그의 등에서 발을 떼어 냈다.

그제야 백작이 가쁜 숨을 게걸스럽게 들이쉬었다.

“히이익…….”

더는 물을 말이 없는 관계로 가브리엘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조그마한 비늘 하나를 주머니에 넣고 그는 백작에게서 등을 돌렸다. 열린 문을 통해 빠져나가려는 그의 뒷모습을 노려보며, 백작은 바닥을 엉금엉금 기었다.

일평생 제 것을 빼앗겨 본 적 없는 백작이었다. 겉으로는 나젤탄의 평화에 기대어 유복한 삶을 살았으나, 속으로는 타국의 불운한 전쟁을 관음하고 그들 전리품을 구해다 제 몸에 심었다. 비늘의 빛깔과 크기를 맞추기 위해 비싼 값을 들여 세공하였으며, 마법사를 불러 제 피부와 비늘을 맞바꾸는 수술도 여러 차례 했다.

오십 년의 세월을 살았으나 그가 겪은 일들 가운데, 그의 의지에 어긋나는 일이라곤 단 하나도 없었다. 무식하게 힘이 좋은 강도가 제 보물을 훔쳐 가는 꼴을 바라만 볼 인내심이 없다는 의미였다.

‘감히, 나한테……. 내가 누군 줄 알고…….’

백작의 손이 벽난로 앞에 놓인 불쏘시개 손잡이에 닿았다. 이를 악물고 일어서, 그는 그것을 흉기처럼 사용했다. 철로 만들어진 불쏘시개의 끝은 두 갈래로 나뉘어 날카로웠다. 제게서 등을 돌린 강도를 찔러 죽이기에는 충분하다고 생각됐다.

“헉…….”

그러나 불쏘시개의 벌건 날이 강도의 허리를 파고든 순간, 신음하는 이는 그가 아닌 백작이었다. 벌겋게 달아오른 불쏘시개에 몸을 찔리고도 미동이 없는 거대한 남자를, 백작은 두려운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가브리엘은 분노를 삼키려는 사람처럼 목울대를 움직이며 등을 돌렸다. 살이 타는 냄새를 맡으며 그는 제 옆구리에 박힌 불쏘시개를 쥐고는, 뽑아 버렸다. 바닥으로 떨어져 나뒹구는 불쏘시개가 나약한 마찰음을 냈다.

그 순간 촛불이 비춘 것은 비단 그의 형형한 눈동자뿐만은 아니었다. 백작의 가슴과 목울대에 들러붙은 시커먼 비늘 네 조각이 제 주인을 마주했다.

본능적으로 백작은 두 걸음 물러섰다. 그런들, 가브리엘의 시선으로부터 달아날 순 없었다. 그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손을 내려 제 성기를 가리려 애썼다. 만일 가브리엘에게 조금이라도 상냥함이 있었더라면, 네가 가려야 할 것은 초라한 성기가 아니라 내게서 떼어 간 비늘이니라 일러 줬으리라.

가브리엘은 그 자신의 실패한 자살을 기억했다. 죽음을 기다릴 적에 제 허리를 찌르고 할퀴어 대던 마을 소년들, 병사들, 도굴꾼들 또한 기억했다. 버려진 칼이며 조각도를 구해 와서는 그의 피부 밑을 쑤시고 살점이 엉겨 붙은 비늘을 뜯어 가던 파렴치한 얼굴들이 하나둘 뇌리를 스쳤다.

그 기억의 끝에, 가브리엘은 백작의 얼굴을 새겼다.

“나를 불러 세우지 말았어야지.”

일평생을 살며 가브리엘은 거짓을 말한 적 없었다. 개인적인 일이 아니고는, 그는 움직일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내게 그 가슴팍을 보이질 말았어야지.”

소리 없이, 그는 단검을 고쳐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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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트는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변두리 영지로, 바알이라는 이름을 지닌 영주가 거느리는 땅이었다. 동시에 아나트는 유행에 매우 민감하고 바쁜 도시였다. 대륙으로 향하는 항구와 수도를 오갈 적에 여행객과 원정대가 들를 쉼터로 그보다 적합한 영지가 없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아나트에는 수도 못잖게 여관이 많았고 언제고 손님들이 즐비했다. 한 해에도 수없이 많은 극단과 용병들, 기사단과 마법사들, 음유시인과 장사치들이 아나트에 들렀다. 아나트는 나젤탄의 영지들 가운데 상주인구의 비율이 가장 적은 편이었으며, 체류자의 수는 항시 많았다.

가브리엘 또한 방문객 중 하나가 될 것이었다. 다만 그의 목적은 여독을 풀고 다음 목적지로 향하는 데에 있지 않았다. 그의 목적은, 아나트의 어딘가에 남아 있을 제 자식의 흔적을 좇는 일이었다.

훔친 말 하나를 타고 항구 마을을 떠날 적에 그는 낯선 원정대와 함께였다. 가브리엘이 원하건 원치 않건 원정대의 용병들은 그를 마음에 들어 했다.

“어디로 향하시오?”

대뜸 묻는 말에,

“아나트.”

가브리엘은 짧게 답했다. 그랬더니 기막힌 인연이라며, 용병 하나가 펄쩍 뛰었다. 용병들의 참견은 거기에서 그치질 않았다. 우리도 아나트에 들를 계획이니 심심하지 않게 함께 이동하자며 권유해 온 것이었다.

“…….”

내가 왜 그래야 하느냐고 대꾸하고 싶은 것을 가브리엘은 겨우 참았다.

드래곤의 모습으로 날아가면 쉬운 길이었다. 그러나 그랬다가는 만인의 이목을 끌고 두 번째 재앙이니 폐허의 재림이니 하는 재미없는 수식어를 들어야 할 터였다. 그에게 남은 수라고는 말을 타고 초행길을 헤매는 것뿐인데, 길잡이가 있어서 나쁠 게 없었다.

“……그러지.”

가브리엘이 답했다. 필요한 일은 그게 전부였다. 먼 길을 거칠 것 없이 나서는 용병들은 그들 무리에 건장하고 젊은 남자가 낀 것을 길조로 생각했다. 그들은 가브리엘을 둘러싸고 밋밋한 인사를 건네더니, 짐을 꾸리고 곧장 출발했다.

용병들과 함께 하는 여행길은 뜻밖에 나쁘지 않았다. 아나트로 향하는 나흘 내내 그들은 가브리엘에게 이상할 정도로 친절했다. 용병대의 심부름을 도맡은 어린 인간이 말을 걸어오기에, 대답을 솔직히 한 게 원인이었다.

“아나트에는 무슨 용무가 있어 향하십니까?”

“내 아이를 찾으려, 흔적을 추적하는 길이다.”

“어쩌다 아이를 잃어버리셨습니까? 가출이라도 한 건가요?”

수다스러운 소년의 얼굴을, 가브리엘은 힐끔 살폈다. 그러고는 심드렁하니 대꾸했다.

“아이를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 그러니 내가 잃어버린 게 아니야.”

“저런……. 그럼 아이 얼굴도 모른단 말씀이십니까? 무슨 사정이 있으셨기에요? 아내분께서 애를 데리고 야반도주라도 한 겁니까?”

“…….”

숱한 질문에 답하는 대신 가브리엘은 멀리 펼쳐진 협곡을 바라보았다. 가파르게 깎인 거대한 협곡에도 모퉁이는 있었다. 저 모퉁이를 지나 날개를 흔들면, 어디에선가 아사야가 저를 찾으며 부를 것만 같았다. 확신 없이 저를 날려 보내 놓고는 돌아오기만을 믿으며 기다리던 모습 그대로, 제 목을 안기 위해 두 팔을 힘껏 뻗을 것만 같았다.

생각에 잠겨 가브리엘은 한참 먼 곳을 응시했다.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 그제야 심각해진 얼굴들이 눈에 들어왔다. 용병대는 대단히 불쌍한 짐승이라도 본다는 듯한 눈길로 가브리엘을 지켜보고 있었다.

인간 사회에 밀접하게 섞인 경험이 없는 탓에 가브리엘은, 인간의 모습일 적에 그 자신의 얼굴 근육이 어떻게 움직이는가를 알지 못했다. 고쳐 말해 그는 제 감정과 생각들이 표정으로 쉽게 드러난단 사실을 몰랐다.

적막 속에 모닥불이 타는 소리만이 타닥타닥 울렸다. 가브리엘은 팔짱을 낀 채 쌓인 짐 깊숙이 등을 기댔다. 그는 붉은 불씨가 장작더미를 좀먹는 것을 물끄러미 지켜보다가, 두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넋이 빠진 듯 먼 곳을 응시하더니, 이젠 눈을 감아 버린 남자의 얼굴을 용병들이 힐끔힐끔 살폈다. 개중 누군가 어린 막내의 정수리를 쥐어박으며 ‘왜 괜한 것을 물었느냐’고 구박했다. 적막이 그제야 그쳤다.

언제 그랬냐는 듯 용병들은 다른 화두를 꺼내며 웅성웅성 떠들기 시작했다. 인간들 반응일랑 신경 쓰지 않는 가브리엘은 타들어 가는 모닥불을 지켜보며 시간을 보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용병들이 ‘대장’이라 부르는 남자가 가브리엘에게 다가왔다. 그러고는 ‘어쩌다 그런 일을 겪었느냐’고, 주어를 붙이지 않은 채 물어 왔다.

“대륙의 수도에서, 전쟁 때문에 그렇게 됐다.”

가브리엘은 거짓말하지 않았다. 앞뒤 상세한 내용을 생략하고 짧게 대꾸했을 뿐이었다.

그의 무뚝뚝한 대답에 단장은 그 일이 마치 제 비극이라도 된다는 양 가슴 위를 퉁퉁 쳤다. 그러고는 오만상을 찌푸린 채 말했다.

“발락의 재앙 때문에 그리된 게로군. 끔찍한 참상이었지……. 내 친척 일가도 그곳 수도에서 실종되어 돌아오질 않았네. 뭐, 더는 수도라고 부를 수도 없는 땅이지만. 지금은 사람도 짐승도 살지 않는다더군.”

재앙의 원인이신 발락으로서 가브리엘은 할 말이 없었다. 그가 입을 다물고 침묵하자 용병대장은 그 침묵을 은근한 수긍으로 읽은 듯했다. 그는 발락이 저지른 끔찍한 참사에 대해 한참은 더 욕을 했다.

“나젤탄은 자유의 땅이라지만, 그처럼 포악한 드래곤은 결단코 이 땅에 들여선 안 되지.”

포악한 드래곤은 이미 나젤탄에 스며들어, 그의 부하들이 피워 놓은 모닥불을 쬐고 있었다.

“……자네 가족들이 그 고통에 휘말렸다니 참 안됐어. 많아 봐야 서른 살쯤 되었겠거니 했는데, 자네 보기보다 나이가 있는 모양이군.”

그의 나이로 말할 것 같으면 이 세계의 나이와 거의 흡사했다.

“걱정하지 말게. 자네 아이는 꼭 찾을 걸세. 흠, 아나트의 여관은 혼자 온 손님에게 바가지를 씌우기로 유명한데……. 혹시 여비는 충분한가?”

그렇게 물을 적에 용병대장의 시선이 가브리엘의 낡은 가죽 셔츠를 훑었다. 제 비늘을 돌려받고자 백작의 목과 가슴을 뜯어낼 적에 묻힌 피가 갈색 얼룩으로 남은 셔츠는, 등허리 박음질이 뜯어진 채 너덜너덜했다. 불쏘시개 꼬챙이에 찢긴 탓이었다.

가브리엘이 눈을 끔벅거렸다. 인간들이 어째서 이토록 수다스럽게 제 곁으로 들러붙는 것인지 그는 이해하지 못했다. 두 눈은 절망으로 죽어 있고 걸친 셔츠는 넝마 꼴을 하였으나, 그래도 제 탓은 아닐 거라 믿었다.

길게 고민한 끝에, 가브리엘은 이 대화를 끝낼 만한 답을 찾아냈다.

“유산을 팔면 되니 걱정할 것 없소.”

그렇게 말하며 가브리엘은 말에 매달아 둔 가방을 손가락질했다. 그 자신의 비늘 네 조각과 젬 드래곤의 비늘 하나가 든 가죽 가방은 보석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축 늘어져 있었다.

젬 드래곤의 비늘은 아이에게 돌려줄 것이니 팔 수가 없고, 제 비늘로 치자면 그 크기가 손바닥만 하니 값이 제법 나갈 것이었다. 그러니 여비 따위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 정도의 값을 치를 정도의 갑부가 아나트에 있긴 할까 존재 여부가 문제라면 문제였다.

“사겠다는 사람이 없어도 별수 없지.”

가브리엘이 혼잣말했다. 대화는 그렇게 끝이 났다.

지루하기 짝이 없는 용병대와 사흘을 보낸 대가로, 가브리엘은 길을 헤매지 않고도 아나트에 도착했다. 성벽 문지기를 지날 적에 용병대장이 그를 포함한 인원수를 용병대로 소개한 덕에 세뇌 마법을 쓸 필요가 없으니 편리했다.

용병대와의 용무는 성벽을 넘은 순간 끝난 셈이었다. 가브리엘은 곧장 고삐를 틀었다. 원정대와 반대 방향으로 말을 움직인 것이었다.

그에게 남은 것은 가장 무식하고 단순한 수색 작업뿐이었다. 도시 외곽에서부터 한 집 한 집 문을 두들기며 제 아들을 찾을 생각이었다.

짧으면 석 달, 길게는 반년이 걸릴 일이었으나 그 밖에는 달리 수가 없었다. 번영기에는 하루에도 머릿수 백이 넘는 사람들이 들어오고 나가기를 반복하는 아나트였다. 그런 도시의 방문객 기록을 일일이 둘러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느릿느릿 걷는 가브리엘의 회색 말을,

“이봐, 잠깐 멈추어!”

용병대장이 막아 세웠다.

“또 무슨 볼일이 남았나?”

가브리엘이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그러자 용병대장은 군말 없이, 작은 주머니 하나를 그의 가슴팍에 던졌다. 가브리엘이 한 손으로 그것을 낚아채자 용병대장은 ‘무운을 빈다’는 짧은 인사를 끝으로 사라져 버렸다.

주머니 안에는 두 개의 은화를 포함한 열댓 개의 동전이 들어 있었다. 어중이떠중이 용병들이 한 푼 두 푼 모아 건넨 돈이었다.

‘별일이군.’

언제부터 인간들의 오지랖이 이렇게 넓었나 생각하며, 가브리엘은 느릿느릿 말을 움직였다.

여행객들의 허브 역할을 하는 아나트에 있어 가을은 그야말로 풍성한 계절이었다. 곳곳으로 향하는 물자들이 일시적으로 모였다 흩어지는 중심지답게 도시 장터는 볼거리로 넘쳐났다. 가판대를 대여하여 길게는 한 달, 짧게는 이틀씩 무얼 판매하는 장수들이 갖가지 물건들을 내놓고 팔기에 바빴다.

붐비는 거리에 접어들자 가브리엘은 말에서 내리고 가방은 제 어깨에 걸쳤다. 한 손에 푸르르 콧소리를 내는 말의 고삐를 쥔 채 그는 좋은 물건을 찾고 값을 흥정하기 바쁜 인간들을 개미 떼 구경하듯 살폈다.

그러던 차에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상아색 레이스 여러 줄을 커튼처럼 걸어 놓은 가판대였다. 전시용 판매대 위에 펠트를 엮어 만든 작은 인형들이 나란히 세워져 있었다. 물건이 그의 취향이냐 하면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러나 부드럽고 작은 인형을 좋아할 어린 인간 하나를 그는 알았다.

“여우다.”

시선을 돌리면 가브리엘은 가판대를 향해 허리를 깊게 숙인 아사야를 볼 수 있었다.

“빨간 여우네. 귀여워라.”

검정 물감으로 칠한 나무 단추를 눈으로 꿴 여우 인형은 커다란 꼬리로 몸의 무게를 지탱하며 앉은 채였다. 가슴과 꼬리 끝은 하얗고 몸은 온통 붉은 오렌지 빛깔이었다.

작고 통통한 인형을 바라보며 가브리엘은 아사야를 떠올렸다. 그녀로 말할 것 같으면 유모를 졸라 손수건에도, 담요에도, 양말에도 붉은 실 여우를 수놓던 어린 아가씨였다. 여우 인형을 선물로 받는다면 분명 기뻐할 것이었다.

“내가 아직도 어린앤 줄 알아, 가브리엘은.”

입술을 삐죽이며 투정하면서도 웃는 기색은 감추질 못하는, 말간 얼굴이 눈에 선했다.

“이봐.”

가판대 너머에 앉은 인간을 향해 그가 말했다.

“이 인형을 사고 싶은데, 말과 교환할 수 있나?”

“네?”

그러자 가게 주인이 당황해 자리에서 일어섰다. 갈색 머리를 땋아 내리고, 밑단을 주름잡은 면치마를 걸친 젊은 여자였다. 제가 만든 인형과 레이스 천을 살펴보는 손님은 많았지만 대체로 주부와 하녀들, 부모의 손을 잡은 아이들이었다. 그처럼 덩치가 크고 무뚝뚝한 남자가 물건을 찾기로는 처음이었다.

리스 몇 닢이면 살 인형을, 제법 좋아 보이는 말과 교환하자는 것 또한 이상했다. 그녀의 입장에서야 제 물건을 운반할 당나귀도 없어 오늘 같은 장날에만 대여해서 쓰는 처지니, 말을 얻게 된다면 그보다 좋을 순 없었다. 그래도 이상한 것은 이상한 것이었다.

“왜…… 굳이 말을 인형이랑 바꾸려 하세요?”

궁금증을 참지 못하여 가게 주인이 물었다. 그사이 가브리엘은 벌써 말의 등에 엮었던 짐을 전부 풀고, 고삐를 그녀의 가판대 다리에 묶어 버렸다. 황당할 만큼 좋은 조건을 제시하고는 일말의 흥정도 없이 그는 여우 인형을 챙겼다. 그러고는 떠나 버렸다.

괴상한 손님이 사라진 자리에 남은 말이 푸르르 고개를 저었다. 기뻐해도 되는 것인지 헷갈리는 통에, 가판대의 젊은 주인은 말의 갈기를 조심스레 만졌다.

말고삐를 쥐던 손에 붉은 여우 인형을 들고서, 가브리엘은 한결 가벼워진 발걸음을 움직였다.

그러나 여유도 잠시였다. 도심 시내로 들어서자마자 그는 길을 잃었다. 화려한 천막과 색색의 간판들, 호객 행위가 그를 둘러쌌다.

“왕녀님께서 즐겨 드시던 디저트를 팔아요!”

“나젤탄에서 가장 맛있는 맥주, 동나기 전에 드시러 오세요!”

과연 가을은 축제의 계절이었다. 제 팔뚝을 붙잡고 전단지를 뿌려 대는 인간들을, 가브리엘은 벌레 내쫓듯 헤치며 걸었다. 지겨울 정도로 많은 인파를 맞닥뜨리니, 제 자식의 흔적을 어떻게 찾으면 좋을까 막막하기 짝이 없었다.

그런 용의 발목을,

“아사야 공주님을 뵈러 오십시오.”

멀찍이 들리는 목소리가 붙들었다. 일순 가브리엘은 제 귀가 잘못된 줄 착각했다. 그러나 ‘아사야 공주’라는 단어를 다른 무엇과 헷갈리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자석에 이끌리는 철가루처럼 그는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걸었다.

화가가 그려 놓은 간판이 가장 먼저 보였다. 붉은 꽃을 든 백의의 여인이 허리를 꼰 자세로 선 그림이었다. 아래에는 화려하게 끝을 배배 꼬고 비틀어 놓은 글씨로 〈태양의 재림〉이라 쓰여 있었다. 어리둥절한 채 몇 초를 흘려보낸 뒤에야, 가브리엘은 그것이 연극의 제목임을 알았다.

“자리가 동나기 직전입니다, 직전!”

챙이 넓은 모자를 쓴 남자가 불쑥 가브리엘의 시야를 가로막았다. 검은 수염 끝을 왁스로 다듬어 달팽이처럼 말아 올린 남자는 극단의 직원이었다. 행인들 하나하나가 잠정적 손님인 법이었다. 티켓 홍보 담당자로서, 그는 극장 앞에서 걸음을 멈춘 가브리엘을 놓치지 않았다.

“아사야 공주님께서 직접 출연하는 연극입니다. 새로이 태어나신 공주님을 직접 뵐, 두 번은 없을 기회!”

그의 입에서 나온 단어 하나하나가 가브리엘을 뒤흔들고 쥐어짰다. 쿵, 쿵, 쿵…… 가브리엘은 거대한 발소리와 다름없는 자신의 심장 소리를 들었다. 전신의 피가 뜨겁게 끓어올랐다가, 한순간 얼음장처럼 굳는 듯했다.

“그게 무슨 소리지?”

가브리엘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큰 손을 뻗어 그는 남자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새로이 태어난 아사야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성난 손님의 손힘에 당황하며 극단 직원은 애매하게 미소 지었다. 그는 번지르르한 재킷 안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는 티켓 한 장을 꺼냈다. 가브리엘의 보라색 눈동자가 제 눈앞에 흔들거리는 티켓 종이를 따라 움직였다.

“요 티켓을 구입하시면…… 아사야 공주님을 뵐 수 있지요. 연극 시작이 임박하여, 단돈 천 리스에 팝니다. 거기에 천 리스를 더 얹으시면 가장 좋은 자리로 내어 드리지요.”

천 리스라는 말은 물론 거짓이었다. 〈태양의 재림〉은 몇 해 전부터 유행해 온 극인 데다 큰 극단에서도 자주 벌이는 연극이었다. 작년부터 티켓 가격이 하향평준화되어 오백 리스를 넘지 않았다.

검은 모자를 쓴 직원은 가슴을 펴고 ‘단돈 이천 리스’라 속삭였다. 홍보 문구에 혹해서는, 눈을 벌겋게 뜨고 달려드는 손님이 외지인임을 알아보고 던진 말이었다.

비싼 값을 따지거나 흥정하는 일 없이, 가브리엘은 주머니에 든 동전 전부를 그에게 건네주었다. 십 분 뒤면 폐지가 될 티켓을 이천 리스에 판매한 직원은 기쁜 기색을 감추지 못하며 크게 웃었다.

“자, 자. 어서 들어가십시오. 곧 연극이 시작합니다!”

어수룩한 여행객을 속여 기쁜 마음으로, 그는 가브리엘을 객석 중앙 자리로 안내했다.

가브리엘은 인간들 틈새에 몸을 숙이고 앉아 붉은 막이 내려간 무대 위를 바라보았다. 그럴 적에 그의 두 손바닥은 불처럼 뜨거웠다. 눈을 깜빡이는 법은 물론이며 숨을 쉬는 방법마저 잊어버렸다. 텅 빈 무대를 노려보며, 새로이 태어난 공주라는 이의 정체를 확인하겠노란 의구심과 미룰 수 없는 기대감에 잔뜩 부풀 뿐이었다.

무대를 가린 막이 걷히고 환한 조명이 비치자, 관객들의 웅성거림이 한 번에 멈췄다. 물감으로 그려 놓은 무대의 배경은 왕성이었다. 각기 다른 옷을 입은 왕과 왕자들, 귀족들이 각자의 노래를 섞어 부름으로써 극이 시작되었다.

노랫소리가 변하기 전까지만 해도 가브리엘은 이 극이 언제, 어디를 배경으로 한 것인지 눈치채지 못했다. 그 자신이 등장할 것임도 예상치 못한 바였다. 까마귀와 악마를 섞은 모양새의 너저분한 탈을 바라보면서도 가브리엘은 어떤 감흥도 느끼지를 못했다.

“그 이름도 추악한 발락! 재앙의 이름, 폐허와 죽음의 냄새!”

배우들이 노래하는 소리 역시 가브리엘을 상처 입히지 못했다. 인간의 역사에 악당으로 기록되기가 익숙한 그였다. 눈 하나 꿈쩍 않고서 그는, 그들이 재해석한 과거의 기록을 구경했다.

이리저리 검은 탈이 날뛸 때마다 관객들이 좌에서, 우에서 비명을 지르며 웃어 댔다.

“발락.”

그때, 어린 여자의 목소리가 무대 위를 울렸다. 얼굴을 굳힌 채 가브리엘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배우는 검은 머리를 길게 늘어뜨렸으며, 얼굴은 불투명한 베일로 가린 채였다.

검은 치마를 두른 하인들이 그녀를 ‘공주님’이라 불렀다. 그녀는 아사야 공주였다.

무대의 중앙에 선 채 배우가 연기를 시작했다. 왕가를 사랑하며 대륙의 안위를 염려하는 그녀의 독백을, 가브리엘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냈다. 그의 두 눈은 멀찍이 보이는 배우의 이목구비를 살피기에 바빴다. 그러나 베일과 장식 탓에 그 얼굴을 확인하기란 쉽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무대 위의 ‘아사야’는 노래를 부르고 춤을 췄다. 이리저리 팔을 휘저으며 나풀대던 끝에 그녀는 검은 상자로 꾸며진 마도구 앞에 도착했다. 공주가 마도구를 열고 마석을 높이 들자 조명의 빛이 밝아지며 화사한 음악이 흘러나왔다.

그러나 흉악하고 포악한 발락은 악당이었다. 힘을 되찾은 발락은 공주의 어깨를 밀쳐 넘어뜨리고는 커다란 기계 날개를 흔들어 펼쳤다.

“약속과 다르잖아, 발락!”

힘없이 바닥에 넘어진 채, 공주가 외쳤다.

“너에게 힘을 돌려주었으니 이제 이 나라를 지켜 주어야지. 반역자 야베스를 무찌르고 위대한 가디엘을 도와야지, 그게 우리의 계약이었잖아.”

무릎을 꿇고 애원하는 공주를 향해, 까마귀 얼굴처럼 만들어진 드래곤의 입이 쩍 벌어졌다.

“순진한 공주 같으니라고! 힘을 되찾았으니 더는 네 곁에 머무를 가치가 없다. 네가 아끼는 이 왕성을 부숴 버리고 절망만을 남겨 두겠노라.”

기계 날개가 퍼덕거릴 때마다 검은 천막이 무대 뒤편의 밝은 그림을 가렸다. 초급 마법사들이 뿜어낸 어두운 연기가 솟아오르자 관객들은 몸을 떨었다.

어두워진 무대 위에 공주가 홀로 남기도 잠시, 금발 가발을 뒤집어쓴 왕자가 뛰어나왔다. 성이 난 듯 발을 구르는 그의 연기는 맡은 역할을 우스꽝스럽게 망가뜨리기 위해 열심이었다.

“바보 같은 아사야 공주! 대륙의 안주인이 될 기회를 저버리고, 나를 배신하다니!”

소리치며, 왕자가 가짜 검을 뽑아 들었다. 무대 아래에 숨은 악단이 북을 치자 관객들은 불안한 듯 웅성거렸다. 연극에 몰입한 몇몇 사람들은 안 된다는 둥 그러지 말라며 배우에게 말을 걸기까지 했다.

관객의 반응을 충분히 끌어올린 뒤에, 무대 위의 왕자가 공주에게 검을 휘둘렀다.

빨간 손수건을 드레스 밖으로 뽑아내며 아사야는 자리에서 비틀거리더니, 힘없이 주저앉았다. 물감이 그녀의 드레스와 입가를 적시며 흘러나왔다.

“왕자님. 이 모든 게 당신과 왕국을 위한 일임을 어찌 몰라주시나요?”

가느다란 목소리를 내며 애원할 적에, 공주는 연약하고 아름다운 성녀였다.

“부디 이러지 마시어요, 우리의 소중한 아이까지 죽이려 하시다니요.”

그녀의 손이 왕자를 향해 뻗어 올랐다가,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관객들이 탄성을 내질렀다. 몇몇은 눈물마저 훔치는 통에 훌쩍대는 소리가 객석을 어지럽혔다.

그때, 놀란 비명소리가 가브리엘의 귀에 닿았다. 고개를 돌려 그는 객석 뒤편에서부터 몸부림치듯 움직이는 까만 탈을 볼 수 있었다. 발락의 탈이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어린 관객들을 놀라게 하고 있었다.

“이 세상을 무너뜨리고 너희 모두를 죽이리라!”

탈 속의 남자가 소리 질렀고,

“그렇게 둘 순 없다!”

무대에 선 기사들이 그 대사를 받아쳤다.

이어지는 전쟁의 장면들은 사회자의 내레이션과 판자에 그려 놓은 군사 그림으로 연출되었다. 비아탄 아멕과 기사들이 힘든 사투를 이었고, 재킷의 팔 한쪽을 묶어 놓은 영웅 가디엘과 붉은 장갑을 낀 마법사가 재앙을 종식시켰다. 세 사람이 드래곤의 탈을 밟고 선 것을 끝으로 장면이 변했다.

무대 중앙으로 조명 빛이 집중되자 밝은 빛을 받으며 새로운 배우가 걸어 나왔다. 관객들의 박수 소리가 천둥처럼 요란하게 울렸다. 높은 인기를 자랑하며 그녀는 흰 털실을 길게 풀어 짠 가발을 덮어쓴 채 머리에는 왕관을, 팔에는 왕홀을 쥐고 있었다.

재킷 팔을 묶은 영웅과 붉은 장갑을 낀 마법사가 그녀의 양측에 섰다. 마련된 왕좌 앞에서 그녀는 객석을 향해 외쳤다.

“세일산의 유일한 직계 생존자가 내 배 속에 있으니, 이 아이의 자리에 내 몸을 앉힐 것이오.”

외침 끝에, 그녀는 거대한 왕좌 위에 허리를 뻗고 앉았다. 그러고는 팔을 휘둘러 왕홀 끝의 상아가 바닥과 부딪쳐 탕 소리를 내게 했다. 대륙의 새로운 주인, 나젤탄의 백마, 블란테 세일산을 향해 관객들이 ‘폐하’, ‘폐하’ 외쳐 댔다.

사회사의 내레이션이 그 어느 때보다 더 큰 소리로 울려왔다.

“대륙년이 그치고, 블란테 세일산의 섭정 시대가 왔다. 세일산의 해가 밝았다!”

환호하는 관객들의 사이에 앉아 가브리엘이 얼굴을 굳혔다. ‘세일산 해. 20’의 의미를 그는 그제야 알았다. ‘보기보다 나이가 있는 모양’이라던 용병대장의 말 또한 이해가 되었다. 무대 위의 모든 것이 이십 년 전 일이었다. 고통에 몸부림을 치며 몸을 회복하기까지, 벌써 이십 년의 세월을 허비한 것이었다.

그 사실을 알고 나니 가브리엘은 무대 위의 장면들에 집중할 수 없었다. 교수대에 매달린 반역자 야베스도, 볼품없이 죽어 가는 패배자 발락도 그에겐 중요치 않은 장면일 뿐이었다.

아사야와 저의 아이가 나젤탄으로 건너온 것이 이십 년 전 일이라는 것이 중요했다. 그가 찾은 유일한 단서 또한 그토록 낡은 것임이 중요했다. 아나트에서 그 아이를 찾을 가능성이 바닥으로 추락하였음이 중요했다.

또한 무대 위의 아사야 공주가, 정말로 새로이 태어난 제 연인인가 그것만이 중요했다.

키가 크고 팔다리가 긴 배우들이 꽃으로 둘러싸인 유리관을 옮겨 놓았다. 어느새 연극의 마지막 장면, 아사야 공주의 아름다운 장례식이었다.

‘거짓말.’

가브리엘은 제 주먹에 턱을 괴고 두 눈을 가늘게 떴다. 맥이 절로 빠졌다. 꽃과 큐빅 보석, 찬양가와 가짜 비둘기로 꾸민 무대 속 장례식은 형편없이 조악했다. 사실과는 크게 다른 연출인 탓이었다.

유리관 안에 누워 고개 숙인 공주의 까만 머리카락을, 가브리엘은 노려보았다. 무대 위의 저 여자가 아사야일 리 없었다. 가브리엘의 의구심이 그렇게 말했다. 아사야라면 진실을 알 터였다. 아사야는 야베스 왕자의 안위 따위는 염려하지 않았다. 그에게 복종할 뿐인 나약한 아내도, 천진한 성녀도 아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가브리엘은 무대 위의 공주를 아사야라 믿고 싶었다. 잠깐이나마 품었던 재회를 향한 기대감을 배신당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움이 그의 이성을 망쳐 놓았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제가 나젤탄으로 올 것을 알고 아사야가 이야기를 꾸린 건 아닐까, 자신의 죽음을 더 나은 시나리오로 각색하여 무대 위에 올린 것은 아닐까……. 동화를 좋아하던 아사야라면 아름답게 가꾼 연극을 좋아할 것이었다. 그것이 사실무근의 엉터리 연기에 지나지 않는다 해도 그랬다.

어느덧 연극은 막을 내렸다. 붉은 커튼이 내려오기 시작하자 객석에 불이 켜졌다.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치기 바쁜 관객들을 피해, 가브리엘은 공연장 밖으로 뛰어나갔다.

이내 가브리엘은 극단 대기실로 향하는 복도를 발견했다. 극장 안을 헤매며 이리저리 두리번거린 결과였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그는 저들끼리 웃고, 대화하며 오가는 배우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살폈다. 행렬의 끝에 검은 장발을 늘어뜨린 연기자가 걸어오고 있었다. 머리칼에 엉킨 꽃 장식을 떼어 내며 그녀는 옆자리에 선 배우를 보고 있었다.

불쑥 가브리엘이 팔을 뻗었다. 그의 큰 손은 독수리의 발톱처럼 그녀의 팔뚝을 낚아채어 당겼다. 놀란 연기자가 새된 비명을 내지르며 넘어지다시피 그를 향해 끌려왔다.

두 눈을 크게 뜬 그녀의 얼굴을 가브리엘이 살폈다. 눈이 크기는 하였으나 그 색은 노랑이 아닌 황갈색이었다. 코끝이 뾰족하긴 하였으나 콧대의 모양이 기억과는 달랐다. 붉게 칠한 입술의 윤곽은 자세히 보니 얄팍했다.

‘아사야가 아니야.’

사실을 확인하자마자 가브리엘은 손을 놓았다. 봉변을 당한 배우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아사야의 이름을 달고 그녀를 흉내 낸 연기자를 가브리엘은 빤히 내려다보았다. 그러고는 돌아섰다.

등 뒤로, 팔이 부러졌다며 고함치는 소리가 들렸다. 극단의 단원들이 허둥지둥 달려와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사람 팔을 부러뜨려 놓고, 그냥 가는 법이 어디 있소?”

단원들이 소리를 쳤다. 그제야 가브리엘의 미간에 금이 생겼다. 인간의 거짓말에 속았다는 모멸감과 결국 새로이 태어난 아사야는 없다는 실망감으로 인해 그는 기분이 좋지 못했다.

성화를 눌러 담으며 가브리엘이 대꾸했다.

“엄살 부리지 말라고 해. 난 얼굴을 확인했을 뿐이야.”

그러자 단원들은 황당하다는 듯 입을 벌렸다. 와중에 누군가 경비원을 불러놓았다.

“어깨가 빠졌단 말이오! 얼굴을 확인한다고 사람 어깨가 부러져?”

사방에서 외치는 말에 가브리엘의 눈썹이 삐딱해졌다. 그러나 그마저 잠시였다. 눈길을 던져 살펴보니, 제대로 걷지 못하고 웅크린 모양새가 정말로 뼈가 부러진 사람 같긴 한 것이었다. 그의 힘이 이전과 같지 않으니, 멋대로 쥐고 당긴 여자의 팔이 부러졌대도 있음직한 일이었다.

‘개미.’

마도구에 힘을 앗기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가브리엘에게 그들은 개미에 지나지 않았었다. 한낱 벌레, 손가락으로 짓뭉개면 피를 흘리며 죽어 버리는 나약한 존재. 그런 개미가 오늘 그를 속였고 아사야의 이름을 팔아 돈을 벌었다. 그런 주제에, 팔이 부러졌네 어깨가 빠졌네 투정함은 순전히 배부른 소리였다. 죽지 않고 목숨 부지한 것만으로도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쏘아붙이고 일을 키울 순 없었다. 그랬다가는 아사야가 좋아하지 않을 것이었다.

침묵 끝에 가브리엘이 말했다.

“미안하게 됐군. 고의로 그런 것은 아니야.”

그렇게 말할 적에 그의 음성이며 표정에서는 어떠한 감정도 묻어나질 않았다. 제가 먼저 사과를 했으니 이제 해결된 것이겠거니 생각하며 가브리엘은 발을 뻗었다. 그러나 그의 덤덤한 태도는 단원들을 더욱 화나게 할 뿐이었다.

“내일도 무대에 서야 하는 배우를 폭행해 놓고 도망칠 셈이오? 파렴치한 같으니라고!”

언성을 높이고 얼굴 붉히는 개미들의 면면을 훑어볼 적에 가브리엘은 심드렁했다.

“어차피 저 배우는 필요 없는 사람이야. 내일부터라도 엉터리 연극을 고쳐 놓을 수 있게 됐으니 잘됐군.”

“그게 무슨 소리요?”

“등장하는 장면마다 순 엉터리 날조더군. 아사야는…….”

불길에 휩싸여 죽었으며 시체 따위는 남지 않았다…… 그렇게 답하고자 입을 열자마자 가브리엘은 얼어붙었다. 보라색 눈동자를 크게 뜨고 아랫니가 보이도록 입을 벌린 채 석상처럼 멈춘 것이었다. 단단한 무어에 크게 부딪히기라도 한 사람처럼 넋을 놓기를 잠깐, 가브리엘은 무엇이 두려워 도망치는 사람처럼 돌아섰다. 그러고는 저를 둘러싼 인파를 뚫고 극장을 떠났다.

폭행범이 도주하자 그를 잡아 보겠다며 성난 남자들이 뒤따랐으나, 그들 중 누구도 가브리엘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했다. 끈질기게 뒤를 쫓던 경비원마저 얼마 못 가 길바닥에 나가떨어졌다.

다시 혼자가 되어 가브리엘은 멍하니 길을 걸었다.

그의 곁에 남은 것이라고는 당장에 쓸모없는 것뿐이었다. 그 자신의 비늘 조각은 지나간 상처와 해묵은 분노의 흔적에 불과했으며 젬 드래곤의 비늘은 돌려줄 이를 찾지 못했다. 펠트로 만든 여우 인형도 마찬가지였다.

어차피 받을 이 없는 물건을 왜 선물이랍시고 챙겨 든 것인지 그는 스스로를 이해할 수 없었다. 아사야의 죽음이야 공공연히 아는 사실인데 어째서 입 밖으로 내어 말할 수 없는 것인지 그 이유 역시 불가해의 영역이었다.

가브리엘은 그 감각이 싫었다. 제 감정의 골은 날로 깊어지고 복잡해지는데, 그 기분을 표현할 말을 알려 줄 유일한 이는 그의 곁에 없었다.

무언지 그 이름도 알 수 없는 감정의 우물에 잠긴 채 가브리엘은 아나트를 헤맸다. 제 감정을 표현할 말 대신, 그는 싫은 사실 하나를 알아냈다. 대륙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 환생한 아사야 공주가 직접 출연한다는 연극이 그가 본 것 외에도 숱한 것이었다.

알고 보니 ‘환생한 아사야 공주’란 장사치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벌이는 사기극의 재료였다. 사람들은 그 말을 반쯤 믿고 반은 비웃으며 친근하게 대했다. 가브리엘이 그랬던 것처럼, 아사야를 만날 생각에 혈안이 되어 비싼 값을 지불하는 인간은 어디에도 없었다. 리스 몇 닢을 건네고 티켓을 사는 인간들 또한 즐거운 태도였다.

“어디, 배우가 얼마나 예쁘길래 그런 소릴 하는지 얼굴이나 보자고.”

줄지어 선 극장들을 바라보며 가브리엘은 애먼 두통을 느꼈다. 돈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 아사야의 이름을 들먹이는 모든 이들을 향해 그는 깊은 혐오감을 느꼈다.

그러면서도 별수 없이, 가브리엘은 아사야의 이름이 쓰인 모든 티켓을 구매했다. 그래야만 했다. 그렇게 해서, 무대 위에 오른 배우가 아사야의 환생이 아니라는 것을 제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 했다.

몸매를 가꾼 여인들의 실루엣은 대체로 엇비슷했다. 덕분에 관객들이 무대 위를 올려다볼 적엔, 얇은 베일 한 장과 화려한 장신구에 속아 제 눈앞의 배우가 진짜 아사야 공주는 아닐까 속는 것이었다.

그러나 똑같은 내용의 똑같이 조악한 연극을 몇 번 관람하건, 가브리엘에겐 실망감만이 남았다. 자신이 아사야 공주의 환생이라 주장하는 배우들 중 그 누구도 아사야가 아니었다.

가브리엘이 마지막으로 들른 광장의 야외무대에서는 그 경우가 살짝 달랐다. 드레스를 입고 무대 위에 선 여인 역시 스스로를 ‘아사야 공주’라 소개하였으나, 특정 장면을 연기하진 않았다.

“저는 대륙의 공주, 아사야 세일산입니다. 나젤탄의 수도에서 태어나 대륙으로 향하는 길에, 이렇게 순회공연하며 인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대신에 그녀는 짧은 모놀로그를 선보였다. 이 땅에 새로 태어난 경험담을 말하며 손을 떨고, 미소를 짓고, 눈물을 흘려 대는 식이었다. 그런 그녀는 아나트에 머무르는 ‘아사야 공주’들 가운데 가장 많은 수의 추종자를 지니고 있었다.

“진짜 공주님이 틀림없어.”

무대 위를 올려다보며 군중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그녀야말로 아사야 공주의 환생이라고, 그렇지 않고서야 지난 역사와 남들이 모르는 사실들을 어떻게 알겠느냐고…… 그러나 가브리엘의 눈으로 볼 적에, 그녀는 다른 여인에 비해 조금 더 연기력이 좋은 사기꾼에 불과했다.

“다음 달이면 저의 고향에 도착하겠지요.”

‘아사야 공주’가 말했다. 두 손을 가슴 위에 포개어 올린 채였다.

“가장 먼저 공작성으로 돌아가 가디엘을 만날 생각이에요. 여태껏 많은 모리배들이 가디엘을 찾아가 자신이 아사야 공주라며 그를 괴롭혔다죠……, 그 생각을 하면 너무나 슬퍼요. 가디엘은 언제나 제게 진솔했던 오빠인데, 그런 그를 속이다니요.”

슬픈 듯 속삭이는 말에 일부 관중들은 매료된 듯 보였다. 무대 위로 꽃송이를 던지고 아사야의 이름을 외쳐 가며 응원의 뜻을 전하는 무리는 존재감이 확고했다. 그들 반응만을 살핀다면, 무대에 선 여인은 실제 아사야 공주의 환생처럼 보였다.

“가디엘이 여전히 저를 아끼고 기다려 줄 것이라 믿어요. 만난다면, 필시 나를 알아볼 거예요.”

눈물 어린 사연과 심성 착한 고백이 줄을 잇는 끝에,

“뻔뻔하기 짝이 없군.”

날 선 음성이 섞여 들었다.

“멋대로 지어낸 망상을 사실이라도 되는 양 늘어놓는 저의가 뭐지?”

소리치지 않아도, 가브리엘의 목소리는 무대 위에 닿았다. 이상할 정도로 낮고 뚜렷한 음성에 군중들은 물론이며 무대 위의 여인조차 당황한 기색이었다. 그것도 잠시였다. 이미 겪어 본 일이라는 양, 그녀는 가느다란 목을 곧게 뻗었다.

“환생을…… 믿지 않는 불신론자는 어디에나 있죠.”

그 순간 후회가 가브리엘의 속을 채웠다. 나젤탄으로 내려온 일이 잘못이었다. 천공섬을 떠나지 말았어야 했다. 이 땅에 내려와 그가 맞닥뜨린 모든 사실이 그저 실망스럽기 짝이 없었다. 속임수와 거짓말로 점철된 아나트 또한 매한가지였다.

“제 얼굴을 보세요.”

그렇게 소리치는 여인 역시 가브리엘에겐 개미들 중 하나였다. 죽은 아사야의 이름을 사기극에 올리고 그녀의 비극을 이용해 돈을 벌고자 하는, 추악한 개미가 그를 바라보았다.

“내가 아사야 공주예요. 머리도, 눈도, 코도 입술도 똑같아요.”

개미가 말했다. 마침내 가브리엘은 넘치는 화를 삼키지 못해 분출해 냈다.

“너는 아사야가 아니야.”

이기적인 개미 떼거지와 아사야는 섞일 수 없는 존재였다. 개미 따위와 비교하기엔 너무나 아까운 존재였다. 공주라 불리며 남들 앞에 설 적에는 얌전히 어깨를 내리고 허리를 세우기 바빴지만 그와 둘이 있을 적에는, 아사야는 드레스 스커트를 구기며 드래곤의 발등 위를 노니는 소녀였다.

해맑은 미소를 걸칠 적엔 열 살 아이 같고 불퉁한 표정을 지을 적엔 스무 살 장난꾸러기인 아사야였다. 머리칼은 그저 검고 길 뿐만 아니라 결이 부드럽고 단정해 밤의 커튼 같았다. 호박처럼 샛노랗던 눈동자는 태양처럼 저를 비추었고 동공만이 까맸다. 어두운 곳에 숨어들 때면 까만 동공이 커짐에 따라, 그녀의 눈 안에서만 일식이 일어나는 듯했다.

따듯하고 온화한 목소리는 얼마나 듣기 좋던지,

“너는 아사야가 아니야…….”

작은 속삭임에도 귀 기울이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저를 보는 시선을 알아채며 가브리엘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무대 위의 사기꾼을 향하던 군중의 면면이 죄 그를 향한 채였다. 하나같이, 두 눈은 휘둥그레졌고 입은 벌어졌으며 팔다리를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 하는 어중이떠중이들이었다.

그와 비슷하게 맹추 같은 얼굴들을 가브리엘은 본 기억이 있었다. 선박을 꾸며 열린 연회의 날, 아사야를 좇던 인간들의 표정이 그러했었다.

“고, 공주님…….”

개중 누군가 외쳤다.

“아사야 공주님이다, 진짜 공주님이야!”

그러고는 무어라 탄성을 내지르고 자리에서 몸을 떨며 그를 우러러보는 것이었다.

손을 들어 가브리엘은 제 뺨을 매만졌다. 그러자 까만 머리칼이 흑단처럼 기다랗게 허리에 닿았다. 당황한 탓에 그는 광장에서 몸을 피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걷는 그의 뒤를 군중들이 냄새를 맡은 개처럼 쫓았다.

가까이 향수 가게가 하나 있되 전면의 창이 유리였다. 그 속에 비친 제 모습을, 가브리엘은 하마터면 쫓을 뻔했다. 그는 아사야 세일산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생각만 하였을 뿐 폴리모프로 구현하지 않았건만, 강한 상념이 그 자신의 모습을 바꾸어 놓은 것이었다.

폴리모프를 해제하고자 애를 쓰고 주먹을 쥐었으나 헛수고였다. 유리창에 비친 아사야의 모습을 바라보면서는, 그는 상념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대신에 그는 인파를 뚫고 달아나길 택했다.

“공주님!”

그런 가브리엘을 ‘진짜 아사야 공주’로 착각하고서 사람들은 그를 쫓으려다가, 멈추어 서서는 길바닥에 엎드리며 절을 하기에 이르렀다. 볼을 붉히며 바닥에 엎드리는 인간들 틈새를 내달리며, 가브리엘은 끔찍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정신없이 달린 끝에 그는 숲길에 접어들었다. 멀리 정찰대가 자리를 비운 천막 하나가 보일 뿐 주위에는 그 누구도 없었다. 무성한 풀이 해를 좇아 사방으로 손바닥을 뻗을 따름이었다.

가브리엘은 터덜터덜 나무뿌리를 밟으며 걸었다. 본디 제 것이던 마력이건만 한차례 빼앗겼다 되찾고 나니 제어하기가 쉽지 않았다. 머릿속의 상념을 밀어내기 또한 어려운 일이었다. 아사야의 흔적을 보기 위해 그는 지금도, 작아진 그 자신의 발을 보며 걷고 있었다.

하염없이 움직인 끝에 그의 시선에 물길이 닿았다. 듬성듬성 나무를 얹어 표시해 둔 길에서 벗어난 덕에 만난 호수였다. 다가가, 그는 커다란 옷을 넝마처럼 늘어뜨린 작은 몸을 앉혔다. 그리고 떨리는 허리를 숙였다.

맑은 호숫가 물길 안에 그의 모습이 비쳤다. 정확히는, 그리운 모습으로 변모한 얼굴이었다.

‘아사야.’

물길 속에 비친 얼굴을 그는 그렇게밖엔 설명할 수 없었다. 어린 인간에 관한 기억이라면 모든 게 바로 어제의 일처럼 뚜렷했다. 가브리엘은 그녀의 목소리, 억양, 노래를 할 적에 숨을 들이쉬는 습관은 물론이며 부드러운 눈썹의 모양이며 코의 높이, 심지어는 속눈썹의 개수까지 기억했다.

단 한 번도, 그 무엇도 잊은 일이 없었다. 사소한 무엇 하나 흐려진바 없었다. 그렇기에, 호수 속에 비친 얼굴은 아사야였다.

두 눈을 감고 가브리엘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납작한 바위에 몸을 기댄 채 그는 엉망진창으로 솟구치는 숨과 마력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수풀 너머에서 정령들이 그를 살피고 있었다. 긴 머리칼을 파도처럼 늘어뜨린 운디네가 물 위로 제 머리칼을 걷어 올렸다. 그러자 호수 물이 잔잔해졌다.

가브리엘은 바위 위에 제 몸을 납작 엎드렸다. 그러고는 목을 뻗어, 흔들림 없이 거울처럼 빛나는 호수에 얼굴을 비추었다. 그러자 물속의 아사야가 마치 그의 곁에 머무는 것 같았다. 눈이 마주친 순간 미소를 짓자 아사야가 그를 따라 미소 지었다.

그렇게 한참간, 호수를 바라보며 그는 착각에 잠겼다. 아사야가 제 곁에 있는 양 행복한 착각이었다. 불완전한 행복이, 그로 하여금 제 이성을 속이게 했다.

바위 위에 머무르는 아름다운 손님을, 운디네가 홀린 양 바라보았다. 그의 시간을 방해하지 않으려 애쓰며 물의 정령은 아사야의 얼굴을 감상하는 구경꾼이었다.

그런 운디네의 노력을 꺼뜨리며 가브리엘은 호숫가 안으로 거친 손을 집어넣었다. 그가 손을 대자마자 아사야의 모습은 순식간에 흩어져 버렸다. 그는 물속에 제 팔뚝까지 집어넣고는 이리저리 휘저으며 아사야를 찾아내려 애썼다. 광기 어린 모습에 정령들이 놀라 그를 바라보다가, 이내 물속으로 달아났다.

홀로 남아 가브리엘은 다시금 호수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 속에는 엉망진창으로 얼굴을 찌푸린 남자만이 존재했다. 바위 위에 엎드린 채 그는 분인지 슬픔인지를 한참이나 삭였다.

가브리엘이 겨우 슬픔을 떨치며 일어서려 할 때, 멀찍이 나무 아래에 앉은 이가 그를 따라 기립했다.

그리고 말했다.

“이봐요.”

일순 가브리엘은 그 또한 아사야 공주를 흉내 내는 사기꾼 중 하나인가 착각했으나, 그렇지 않았다. 아사야를 빼닮은 얼굴을 갖긴 했되 그녀는 소년처럼 짧은 머리칼을 달고 있었으며, 진갈색 바짓단은 제 치수에 맞지 않게 큰 것을 벨트로 조이고 밑단은 접어 올려 박음질한 모습이었다.

나무 그림자에 가려 흐릿하게 보이는 턱을, 가브리엘이 노려보았다. 그러자 그녀는 잠시간 머뭇거리다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수상쩍어 보일 줄은 알지만, 물어볼 말이 있어 기다렸어요.”

그러고는 소리 없이 입술을 달싹거리며 눈알만 굴려 댔다. 적당한 단어를 솎아 보려는 듯한 동작이었다.

마침내 그녀가 건넨 질문은,

“혹시 내가 누구인지 아세요?”

가브리엘이 그녀에게 묻고자 했던 말과 똑같았다.

저를 향해 서너 걸음 다가오는 그녀를, 가브리엘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질문에 대한 답이라면 갖고 있었다. 눈앞에 선 낯선 인간이 누구인가를 그는 십분 알았다. 까만 머리칼과 황금색 눈동자, 반듯하게 선 코와 두툼한 입술은 제 엄마를 닮은 여인이었다. 그러나 입체적인 눈썹 뼈와 눈썹 결의 각진 모양새, 짙은 피부와 다부진 턱은 제 아빠를 빼닮아 가브리엘과 같았다.

“오랜만이군…….”

신음하듯이, 가브리엘이 말했다.

“너를 다시 볼 날을 기다렸었다.”

그러자 여인이 다소 벅찬 듯, 한편으로는 어리둥절한 듯 복합적인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고는 길쭉한 손을 들어 제 이마를 매만지고 흐트러진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이름이 있나?”

가브리엘이 묻자,

“엘라 나자렛.”

엘라가 즉답했다. 그러면서 엘라는 그가 왜 ‘이름이 무어냐’가 아니라 ‘있느냐’고 묻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누구에게나 이름은 있는 법이며 그녀에게도 당연히 할머니가 주신 이름이 있었다.

엘라는 제 짧은 대꾸가 가브리엘의 낡은 근심을 덜어 냈음을 알지 못했다.

“그래……, 이름이 있구나…….”

가브리엘이 혼잣말했다.

‘엘라 나자렛’. 귀에 익은 이름이었다. 아사야를 낳다 죽었다던, 어머니의 이름이 엘라 아졸이었다. 나자렛은 그녀의 처녀 시절 성씨였다.

가브리엘은 그 이름이 꽤 멋지다고 생각했다. 제 어머니의 이름을 제 딸이 물려받았음을 안다면 아사야가 기뻐할 게 분명했다. ‘아사야’도 아니고 ‘가브리엘’도 아니니 헷갈릴 일이 없어서 다행이라고, 우리의 아이가 엘라여서 너무나 다행스럽고 기쁘다며 웃었을 것이었다.

침묵하는 가브리엘의 얼굴을 엘라는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둘 사이에는 어떠한 미심쩍은 기류 한 올 없었다. 서로를 만난 순간 제 혈육임을 알아봤기 때문이었다. 두 눈이 멀지 않은 이상에야 모를 수가 없었다. 가브리엘에겐 엘라가, 엘라에게는 가브리엘이, 저 자신의 절반을 가져다 섞어 빚은 듯한 존재였다.

“숲의 해는 도시보다 빨리 져요.”

과묵한 가브리엘을 대신해, 엘라가 말했다.

“조금만 더 걸으면 내 집이에요. 따라와요.”

그러고는 가져온 바구니를 들고 앞장섰다. 가브리엘이 군말 없이 제 짐을 챙겨 그녀를 뒤따랐다.

삐뚜름하게 자란 나뭇가지를 쳐내며 엘라는 묵묵히 걸었다. 그런 그녀의 뒤로 낯선 남자가 걷고 있었다.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발락’, 할머니가 전해 준 이야기에 따르면 ‘가브리엘’, 그녀만이 쓸 수 있는 호칭으로 ‘아버지’였다.

엘라가 아버지를 알아보는 방식은 다소 독특했다. 그저, 본능이었다. 시선을 마주한 순간 그녀는 자신이 그라는 숙주로부터 파생되어 나온 갈래임을 알았다. 그는 전설 속의 발락이었고, 그녀는 반쪽짜리 드래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라의 마음 안엔 의심쩍은 모퉁이가 하나 있었다. 그녀로서는 오랜 시간을 홀로 품어온 의심이었다. 아무리 부모라 할지라도 제 자식과 처음 만나는 순간이 있을진대, 어째서 기억 속의 ‘엄마’가 아픈 미소를 지으며,

“우리…… 다시 만날 날을 어찌나 기다렸는지…….”

그런 말을 속삭였는가 하는 의문이었다.

심지어는 눈앞에 선 ‘아빠’ 역시 저를 보며 오랜만이라 인사하니 이상한 일이었다.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예요?”

아주 어릴 적에 아나타로 흘러 들어온 뒤로, 이사는커녕 여행 한번 다녀 본 적 없는 엘라였다. 그런 그녀에게는 호기심을 충족시켜 줄 선생이 없었고 읽을 책 또한 가짓수가 많지 않았다. 때문에 엘라는 누구에게 묻고픈 말이 떠오를 때마다 물음표 하나씩을 마음 안에 간직했다.

마침내 아버지를 마주한 오늘, 그녀로서는 꺼낼 질문이 수백 개쯤 됐다.

“왜…… 날 보며 오랜만이라고 인사한 거죠?”

그리고 그 질문이 첫 번째였다.

숨결 하나 흔들림 없이 그녀를 따라 숲을 걸으며, 가브리엘이 답했다.

“너를 만난 일이 있어.”

엘라는 마른침을 삼켰다. 가브리엘의 목소리는 그녀가 만나 본 이 가운데 가장 무뚝뚝했다. 음절 하나하나를 끊어 말하더라도 그처럼 무신경하게 들리진 않을 것이었다.

“아사야와 나는 꿈속에서, 이미 너를 만났었다. ……너는 일국의 공주로 태어났고 밝은 봄 내내 아사야가 너를 품었었다. 지루할 정도로 평온한 꿈이었지.”

엘라는 노란 눈동자를 굴려 몇 초 더 그를 응시했다. 보다 상세한 설명을 요구하는 눈짓이었다. 그러나 가브리엘에게는 그 이상 꺼내 줄 말이 없었다.

때문에 침묵이 왔다. 닳은 나무뿌리를 밟는 내내, 그들 부녀 사이에는 어떠한 대화도 오가지 않았다.

과묵한 발락과 반쪽짜리 드래곤은 인간의 모습으로, 마을이 아닌 깊은 숲을 향해 걸었다.

오늘 엘라를 만나 천만다행이라고, 가브리엘은 생각했다. 홀로 아나트를 수색했더라면 이렇게 깊은 숲으로 찾아오기까지 몇 달은 더 걸렸을 게 뻔했다.

그렇게 20분쯤 지났을까, 돌로 지은 울타리가 수풀 사이로 드러났다. 무릎까지 오는 키의 담 너머에는 집이 한 채 있었다. 외벽 한 면에 담쟁이덩굴이 팔을 늘어뜨린 회색 집은 다락방을 지닌 작은 건물이었다.

엘라의 작은 집은 아나트에서 가장 조용하고 인적 드문 공간이었다. 현관문에는 안에서 거는 걸쇠가 달려 있을 뿐 별도의 잠금장치가 필요 없었다. 외벽은 비가 새지 않을 수준으로 마감했을 뿐 울타리 밖의 발소리마저 전달되어 들리도록 얇았다. 오가는 이 하나 없으니, 그래도 사는 데에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마당에선 직접 심은 토마토가 자라고 있었다. 뒤뜰에는 오래되어 보이는 무덤 하나와 화분이 여럿 모여 있었다. 며칠 전에 갈아 준 듯한 꽃이, 무덤 앞의 화병에 꽂혀 있었다.

“할머니. 나 왔어.”

엘라가 말했다. 조약돌을 쌓아 올린 무덤에게 건넨 인사였다.

“오늘은 손님이 있어.”

그녀가 가브리엘을 돌아보았다. 빤히 바라보는 눈길이, ‘나처럼 인사해 달라’ 말해 오고 있었다. 그러나 가브리엘은 무뚝뚝한 얼굴로 화병을 내려다볼 뿐 인사 따윈 하지 않았다. 엘라는 다소 성질이 난 듯 한쪽 눈썹을 올리고는, 발소리를 크게 내며 제집으로 들어갔다.

그녀가 열어 둔 문을 통해 가브리엘은 실내로 들어섰다. 현관에서부터 벽난로가 놓인 거실이 보이고, 거실과 부엌이 크게 분간 없이 이어진 형태였다. 나무문 두 개가 짧은 복도 옆으로 붙어 있었다.

엘라가 부엌 테이블에 바구니를 내려놓는 동안 가브리엘은 거실 소파로 가 몸을 앉혔다.

“식사는 했나요?”

우유에 재운 고기와 밀가루를 꺼내며 엘라가 물었다.

“아니.”

짧게 대꾸한 뒤 가브리엘은 소파에 가로로 누웠다. 그의 길고 굵은 다리가 소파 팔걸이 밖으로 삐져나왔다.

‘이상한 남자야.’

엘라는 생각했다.

‘내 아버지가 이렇게까지 이상한, 미친 남자일 줄은 몰랐는데…….’

볼일을 보러 마을에 들를 때마다 공터의 연극 포스터를 훑는 일은 엘라의 오랜 숙제였다. 자신이 아사야 세일산이라 주장하는 여자들 때문이었다.

아사야로 불리기를 바라는 가짜 공주들은 십여 년 전 처음으로 등장했었다. 대륙에서부터 건너온 전보가 그 원인이었다. 먼 수도는 물론이며 이곳 마을의 게시판에도 ‘아졸 경의 수색 전단’이 붙었다.

흑주술로 인하여 반역자 야베스 세일산이 죽지 않고 살아 있음은 누구나가 아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같은 주술에 의하여, 이미 죽은 아사야 공주가 살아 돌아올 것임은 그 즈음에 처음 퍼진 소문이었다.

만에 하나 소문이 사실이 아니라면, ‘킹 메이커’로 알려진 대륙의 영웅, 가디엘 아졸이 실의에 미쳐 버렸다고밖엔 설명할 수 없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째서 그가 아졸가의 말과 사람을 보내어 ‘환생한 아사야 세일산’을 찾느냐는 말이었다.

다시 태어난 아사야 공주를 찾는 이는 가디엘뿐만이 아니었다. 대륙의 주인, 블란테 세일산 역시 돌아올 공주를 기다리는 성명문을 읽었다. 스스로가 ‘아사야 세일산’임을 입증하기만 한다면 아졸가의 화려한 부귀를 얻고 영웅의 누이가 됨은 물론이며, 대륙의 공주로서 총애받는 생애를 살 수 있었다.

정해진 보상이 그러하니, 대륙은 물론이며 나젤탄의 사기꾼들마저 자신이 아사야 공주라고 달려듦은 물론이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십 년이 지난 오늘까지 그 누구도 아사야 공주의 환생이라 인정받지 못했다. 대륙의 왕성으로 걸어 들어간 여인들은 하나같이 거짓이 들통나, 걷지 못하는 몸이 되어 수레에 실려 나와야 했다.

할머니의 유언에 따라 단 한 번도 나젤탄을 떠난 일이 없었기에, 엘라는 사기꾼 잡배들의 생김이 얼마나 제 엄마와 닮았는지 알지 못했다. 그래도 이 마을의 게시판에나마 걸리는 연극 포스터를 살필 수는 있었다.

그러자니 도심으로 외출하는 날마다 실망이었다. 기억 속의 엄마와 같은 여자는 단 한 번도 본 일이 없었다. 눈과 코와 입이 달렸음이 유일한 공통점인 인간들만 즐비했다.

오늘의 소란을 목격한 것도 우연은 아니었다. 장터에서 고기값을 흥정하던 중에 ‘아사야 공주님께서 돌아오셨다’는 외침을 듣고 얼마나 설렜는지 몰랐다. 마을의 인간들에게 아사야 공주란 연극의 주인공이자 노래 소재로 삼기 좋은 전설의 미인일지 몰라도, 엘라에게는 꿈에서나 만날 수 있는 엄마였다.

‘진짜 아사야 공주님.’

그 말에 혹한 탓에 엘라는 거스름돈을 받는 것도 잊고 내달렸다. 저를 멀리 떠나보냈다는 엄마가 드디어 저를 찾으러, 이곳까지 온 것일까 싶었다.

그리고 보았다. 인파에 둘러싸인 채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은 아사야 세일산을. 기억 속 미소를 짓던 그 얼굴과 분위기는 달랐지만, 이목구비는 필시 같았다.

그런 ‘엄마’가 사람들을 피해 달아나기 시작할 즈음엔 엘라도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눈치챘다. 내달리는 속도가 인간이라고는 믿을 수 없게 빠른 탓이었다. 엘라만이, 그것도 숨이 찰 지경으로 겨우 쫓을 수준이었다.

그리고 엘라는 보았다. 호수 속에 비친 제 얼굴을 웃으며 바라보던 ‘엄마’는 엘라가 아는 그녀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그리움에 미쳐 버린 이상한 남자라 말해야 옳았다. 나무 그늘에 앉아 그가 제 존재를 눈치채기를 기다리면서 엘라는 감탄했다. 폴리모프 솜씨가 어찌나 좋은지, 엘라조차도 그가 마법을 부렸음을 모를 수준이었다.

그 미친 남자는 물속에 비친 제 얼굴을 잡겠다고 호수를 헤집고 정령들을 겁먹게 했다. 아니었으면 바랐지만 그는 엘라의 아버지였다. 제가 상상해 온 것과는, 아주 많이 다른 아버지였다.

그런 아버지가 소파에 길게 누운 채 잠들어 있었다. 그의 정수리를 구경하며 서 있기도 잠깐, 엘라는 저녁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녀의 요리 솜씨는 좋지도 나쁘지도 않았다. 요리에 크게 소질은 없었으나, 할머니에게 배우고 익힌 실력이 있었고 받은 요리책이 있었다. 노트를 펼치면 셋째 장에는 우유에 재운 고기를 맛있게 튀기는 방법이 구불거리는 글씨로 쓰여 있었다. 그 책을 읽기 위해서라도 엘라는 대륙의 언어를 익혀야 했다.

“일어나요.”

그로부터 한참이 지난 뒤에야, 엘라가 가브리엘을 깨웠다. 식탁보가 보이지 않을 수준으로 많은 음식을 차려 둔 채였다.

엘라에게 있어 가브리엘은 난생처음 맞이한 손님이었다. 그 사실이 어색하고 반가운 탓에, 지나치게 많은 요리를 한 건 아닌가 후회스러웠다. 만일 누가 보았더라면 그가 오기만을 오래도록 기다린 자식이라 오해했을 터였다.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해 엘라는 허리를 곧게 펴고 찡그린 표정을 풀었다.

“일어나요!”

그리고 또박또박 큰 소리를 냈다. 그녀는 민망하거나 부끄러운 순간에도 그것을 기색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엠마오는 늘 엘라에게, 세상 만물을 손에 쥔 사람처럼 당당해야 한다고 가르쳤었다.

“네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뒷말은 늘 같았다.

엘라의 채근을 못 이겨 가브리엘은 마지못해 소파에서 벗어났다. 부엌 식탁 앞에 선 채 그는 몇 초간 넘치도록 많은 요리를 바라보았다. 달리, 엘라를 곤혹스럽게 만드는 말이나 질문은 없었다.

묘한 분위기 속에 느릿하게 시작된 식사는 그러나 엘라의 상상보다 격정적이었다. 포크를 들자마자, 가브리엘은 제 앞에 차려진 요리들을 가리지 않고 먹어 치우기 시작했다. 접시까지 씹을 기세로 그는 파스타 면과 두툼한 고기, 절인 야채를 제 입안에 쑤셔 넣었다.

엘라는 입을 벌린 채 그의 폭식을 지켜보았다. 요리의 가짓수도 양도 너무 많다고 생각해 민망했던 것이 우스울 정도였다.

“며칠 굶기라도 했어요?”

엘라가 물었다. 그러자 가브리엘은 씹던 턱을 멈추고는 눈을 끔벅였다. 자신의 마지막 식사가 언제였나 추리하며 기억을 더듬다가 그는 관두었다. 지나온 공복의 기간은 며칠 수준이 아니었다. 그는 엘라 나자렛이 스무 살이 될 때까지 돌바닥에 처박혀,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피와 눈물만 흘려 댄 남자였다.

창밖으로 노을빛이 사라질 무렵, 엘라 몫의 접시를 제한 모든 음식이 동났다. 램프를 꺼내 불을 밝힌 뒤 엘라는 예정에 없던 후식을 내어 주었다. 두 조각 먹고 남겨 둔 버터케이크와 썰어 놓은 치즈, 상자에 든 쿠키가 순서대로 식탁에 올랐다. 몇 달쯤 더 숙성하고 장터에 팔까 했던 포도주도 가브리엘의 목구멍 너머로 물처럼 흘러 들어갔다.

그들의 저녁 식사는 마침내, 창고 안에 남은 음식이 없게 되어서야 끝이 났다.

“이제 대화를 좀 나눠요.”

그가 남긴 케이크 한 조각을 제 접시에 덜어 가며, 엘라가 말했다.

“함께 어머니를 찾으러 갈 거죠?”

확신 어린 질문에 대한 가브리엘의 답은 그러나, 부정이었다.

“아니.”

뜻밖의 답에 엘라는 고개를 살짝 움츠렸다. 무딘 나무 포크의 끝이 케이크의 물렁한 시트를 갈라놓았다.

“그럼, 어쩔 계획인데요? 이 마을까지 오신 게 전부 우연은 아니죠? 나를 만나러 여기까지 온 거잖아요.”

“그래.”

“그리고요?”

“그리고, 무얼?”

“그리고 어떡할 계획이냐고요.”

“없어.”

속사포로 쏘아붙이는 엘라와 달리, 가브리엘의 답은 느릿하고 불분명했다.

“너를 찾으러 여기로 왔고 그렇게 했어. 이젠 계획이 없어.”

마지막 포도주를 길쭉한 컵에 따르며 그가 말했다.

“이제 무얼 해야 할지 모르겠어.”

엘라는 무어라 말하고자 입을 열었다가 다물기를 반복했다. 제 부모에 대하여 물을 때마다, 할머니가 알려 준 말들이 있었다. 어머니께선 제 입지를 이용하고 제 편을 꾸릴 줄도 아는 현명한 공주이자 영웅의 딸이었으나, 왕가의 재물로 취급되며 갇혀 지낸 드래곤의 경우 도통 무슨 생각을 하는 어떤 인물인지 알 길이 없더란 말이었다. 아사야 공주의 명령만을 듣고 그녀만을 따른 드래곤이었기에, 발락의 이름으로 재앙을 일으킬 것이라고는 꿈에도 몰랐다고 했다.

“공주님께서 계시지 않게 되어서, 길을 잃었던 걸지도 모르지요.”

제 짧은 머리칼을 다듬어 주며 속삭이던 엠마오의 말이, 어쩌면 정확했다. 식탁 건너편에 앉은 남자에게는 향할 행선지도 만날 지인도 행할 계획도 남지 않은 듯했다.

그런 가브리엘에게도 내일은 있을 터였다. 앞으로 무얼 해야 좋을지 그 갈래를 잡아 주고파, 엘라는 심문을 시작했다.

“어머니를 만나기 전에는, 무얼 하셨습니까?”

엘라가 묻자,

“잤어.”

가브리엘이 답했다.

“그럼 저를 찾으러 오기 전까지는, 무얼 하셨는데요?”

“……잤어.”

“아주 긴 시간을 살아온 드래곤이라면서요. 한때 신이라 불린 순혈 일족 중 하나라던데, 그 긴 시간을 살면서 잠만 잤습니까?”

가브리엘은 입을 다물었다. 동면기가 길었던 게 사실이긴 하나 일평생 잠만 잤다 말하기란 억지스러웠다. 그러나 오래된 기억을 들추어 알려 주느니, 일평생 잠이나 잔 게으름뱅이로 남는 게 나을 성싶었다.

가브리엘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 이전에도 그를 지칭하는 단어는 많았으나, 개중 제 자식이라는 아이에게 알려 주어 좋을 나이테는 단 한 줄도 없었다.

일방적인 침묵에 맞닥뜨리자 엘라의 인내심은 불쑥 바닥을 드러냈다.

“도대체 뭐예요?”

엘라가 외쳤다.

“그럼 내게 해 줄 말도, 나를 데려갈 곳도 어쩔 계획도 없는 거예요? 왜 날 찾아왔어요? 왜 이제까진 날 찾질 않았어요? 왜…….”

조용히, 가브리엘은 엘라를 지켜봤다. 짜증으로 시작된 질문 세례에 전부 답할 필요는 없었다. 예민하게 쏟아지는 투정은 언제고,

“왜 어머니를 두고 왕성을 떠났어요?”

가장 묻고픈 본론으로 끝을 맺게 마련이었다.

“왜 그랬어요?”

엘라가 물었다.

“왜…… 대체 왜 그랬어요?”

가브리엘이 들려줘야 할 답은 아주 짧고 간단했다. 네 어머니가 나를 속여서, 그녀의 거짓말 때문에 그랬다…… 그러나 가브리엘은 입을 굳게 다물었다. 엘라 나자렛에게 그런 답은 내놓을 수 없었다.

그는 아사야를 사랑했다. 아사야를 위해서라면 코앞에 놓인 자유는 물론이며 목숨을 버릴 각오마저 되어 있었다. 그땐 제 마음이 중요해서 저만이 그런 줄로 알았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아사야의 마음 또한 그와 같았다. 그녀 또한 그를 사랑했다. 그를 위해 목숨을 버릴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뿐이었다.

그런 아사야 세일산은 거짓말쟁이로 소개되어선 안 될 사람이었다. 때문에, 가브리엘은 침묵했다.

“정말…… 정말로 그런 거예요? 당신이 내 어머니를 버렸어요?”

엘라의 두 눈동자에 충격과 약간의 공포심, 뒤이어 증오가 피어올랐다. 아사야의 것을 쏙 빼닮은 금색 눈이 가브리엘을 끔찍한 죄인처럼 담았다.

“대답해 봐요, 정말 그런 거냐고요. 어머니가 죽던 날에…… 당신 마력만 되찾으면 그만이라고 약속을 어긴 거예요?”

엘라의 질문에 가브리엘은 긍정도 부정도 하질 않았다. 제 침묵이 그녀로 하여금 어떤 생각을 들게 할지 충분히 짐작했다. 그러나 엘라 나자렛이 저를 어떤 악당으로 바라보건 그러는 편이, 아사야의 이름에 거짓말쟁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것보단 나았다.

속을 채우던 포만감은 눈 녹듯이 사라졌다. 잠시나마 머무르던 훈기마저 그를 떠났다. 침묵하는 그의 얼굴을 엘라는 무척 길게 노려보았다.

지독하리만치 감정 없는 얼굴로 가브리엘은 엘라의 눈길을 맞았다. 그녀에게 낯설고도 친숙한 존재로서, 그는 마치 영원을 산 바위처럼 무표정했다.

“그날 죽은 게 당신이었어야 했어.”

엘라가 말했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그녀는 부엌을 떠나 버렸다. 발소리를 쿵쿵거리며 구석방으로 뛰어간 것이었다. 가브리엘은 성난 딸을 쫓지 않았다. 그녀의 말에 상처 또한 받지 않았다. 그 역시, 그 말에 동의하기 때문이었다.

홀로 남아 그는 남은 포도주 한 잔을 마저 삼켰다.


 

.*. *. *. *. *. *.


 

이튿날 엘라 나자렛이 눈을 떴을 때, 그녀의 집 거실은 텅 비어 있었다. 가브리엘이라는 이름을 가진 키 큰 남자는 어디에도 없었다.

어제의 일이 모두 꿈은 아니었을까 의심하며 엘라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텅 빈 창고와 구겨진 소파 자리, 제 속을 채운 원망 어린 마음이 그가 다녀갔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흐트러진 소파 쿠션을 정리하다가 엘라는 분노를 느꼈다. 어젯밤 성난 채 억지로 잠을 취한 것은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어제의 성화는 밤새 그녀의 골 안에서 싹을 틔워, 깊은 증오로 그 모습을 달리했다.

‘가브리엘.’

그의 모든 것이 밉고 싫었다.

엠마오를 잃고 작은 집에 홀로 남아, 언젠가 저를 찾아올 것이라는 부모를 기약도 없이 기다려 온 엘라였다. 숲의 어둠과 친해지고 바람 소리를 노래 삼아 외로움을 견딜 적에는, 부모와의 재회를 상상하는 것만이 유일한 낙이었다. 그토록 기다려 온 순간을, 가브리엘은 엉망으로 망쳐 놓았다.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가…… 정말 사실이었다고?’

그가 머리를 대고 자던 쿠션을, 엘라는 바닥에 던져 버렸다.

‘어린 공주님인 어머니를 배신하고, 죽게 버려둔 저열한 남자가 내 아버지란 말이냐고…….’

그녀로서는 그런 남자를 아버지로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끔찍한 짓을 저지른 주제에, 도대체 무엇을 기대하고 저를 찾아온 것인지 이해조차 되질 않았다. 그래 놓고는 인사도 없이 제 집을 떠나다니,

“인사도 없이 떠나다니…….”

엘라가 중얼거렸다.

텅 빈 거실을 바라보다가 그녀는 갑작스러운 충동에 휩싸였다. 그가 도대체 언제 나갔는지는 알 수 없으나 지금 달려간다면 그를 붙잡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그녀를 움직이게 했다.

문밖으로 뛰쳐나가며 엘라는 이리저리 뒤섞여 끓는 감정으로 숨을 씩씩거렸다. 제멋대로, 아무런 계획도 없이 그가 저를 찾아왔으니, 저 역시 어쩔 계획 하나 없이 그를 붙잡을 자격이 있었다.

아니다, 엘라는 그와 같지 않았다. 그녀에게는 계획이 있었다. 지금 제 가슴을 채운 원망의 말을 그의 낯짝에 쏟아 내고, 멀쩡하게 잘생긴 턱에 주먹을 갈길 셈이었다. 어머니를 배신하고 죽게 버려둔 죗값을 물어, 이자가 바로 그 연극 속의 추악한 드래곤이라고 밝히고만 싶었다.

제 몸에 흠집을 내어 그에게서 물려받은 저열한 피 절반을 뽑아내고, 그 피를 죄 그의 얼굴에 끼얹을 셈이었다.

숲을 가로질러 내달리길 한참, 엘라는 문득 걸음을 멈춰 세웠다.

할머니는 언제나 그녀에게, 그녀의 어떤 점이 인간과 같으며 어떤 점이 인간과 다른지를 설명하곤 했었다. 어릴 적엔 제 다름을 꼬치꼬치 지적하는 할머니가 미웠으나 어느 순간 엘라는 그 의도를 알아차렸다.

제 다름이 잘못된바가 아니라 자연스러운 것임을 그녀 스스로 받아들이고, 훗날 인간들 사회에 홀로 남을 적에 제 다름을 모난 모양으로 드러내지 않는 것. 그것이 할머니의 가르침이었다.

그러나 인간이라고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숲 안에서, 엘라가 이용할 것은 저만이 지닌 본성뿐이었다. 기민한 육감이 엘라의 몸을 스쳤다. 그녀가 찾는 것은 그녀 자신의 체취였다. 저 자신의, 무어라 다른 말로 표현할 길 없는 오라를 추적하다 보면 저에게 그것을 물려준 남자를 찾을 수 있었다.

그의 방향을 읽어 낸 직후 엘라의 걸음은 급속도로 느려졌다. 그가 제 집을 떠나 무엇을 하고 있는지 그녀는 확인하고 싶지 않아졌다. 제 예상과 같은 모습으로 같은 행동을 하고 있더라면, 엘라는 가브리엘에게 화를 낼 수 없었다. 그의 얼굴을 때릴 수도, 원망하며 욕을 할 수도, 당신 자식인 게 싫다고 폭언을 쏟을 수도 없었다.

하지만 싫은 예감은 언제고 맞게 마련이었다. 엠마오의 죽음을 이틀 전부터 눈치챘듯이, 엘라의 직감은 오늘도 옳았다.

그녀의 이상한 아버지는 호숫가 바위 위에 납작 엎드린 채 물속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어머니의 모습으로 폴리모프를 하고 실체 없는 환영을 바라보며 알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런 표정일랑 엘라는 살아오며 지어 본 일이 없었다. 그런 표정을 짓는 사람 역시 만나 본 일 없었다. 행복하고 다정한 듯, 슬프고 싫은 듯이, 그 자신을 기쁘게 하며 동시에 고문하는 사람처럼 그는 호수에 비친 아사야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호숫가에 앉은 운디네가 그런 그를 훔쳐보기 바빴다. 제 움직임이 파도가 되어 그의 환상을 흩트릴까 긴장한 채, 운디네는 미소 짓고 있었다.

그에 대해 도대체 무얼 안다고, 정령은 사랑에 빠진 얼굴이었다. 그 얼굴이 엘라를 화나게 했다. 약해 빠진 정령 따위가 그에 대해 알 턱이 없었다. 행동은 이상하고 식성은 게걸스러운 데다 과거가 추악한 저 남자는, 어머니를 죽게 한 배신자였으며 그런 그녀를 호수에 비추어 바라보는 초라한 존재였다.

그는 인간 남자를 수없이 홀리고 눈물에 빠뜨려 죽여 버리는 운디네 따위가 알 존재가 아니었으며, 예쁜 눈과 젖가슴으로 꼬드길 남자 또한 아니었다.

그는 엘라 나자렛의 아버지였다.

“꺼져!”

엘라가 소리쳤다.

“꺼져 버리란 말이야!”

그녀의 주먹이 날린 매서운 돌이 운디네의 머리를 때렸다. 틀어 올린 정령의 머리칼이 쏟아져 내리자 잔잔하던 호수 위에 회오리가 일었다. 허둥지둥 도망치는 운디네를 향해 엘라는 죽어라 소리를 지르며 돌을 던졌다.

성난 엘라를 돌아볼 적에 가브리엘은 그 자신의 모습이었다. 길었던 상념을 그의 자식이 부숴 놓은 것이었다.

엎드린 채 까맣게 꺼진 눈으로 저를 보는 아버지를 향해, 엘라는 달려들었다. 그의 배 위에 올라타다시피 하며 그녀는 가브리엘의 멱살을 거칠게 움켜쥐었다. 그리고 소리쳤다.

“왜 날 찾아온 거야!”

힘껏 당기고 흔들어도 그뿐, 가브리엘의 몸은 바위라도 된 것처럼 미동이 없었다. 그저 제 멱을 쥐고 성내는 아이의 얼굴을 빤한 눈동자로 지켜볼 뿐이었다.

그의 그런 태도가 엘라를 울적하게 했다. 그는 제 피부 밖에 있는 모든 것들이 조금도 중요하지 않다는 듯 굴고 있었다. 제 딸인 엘라의 질문에도 답을 주질 않았고, 그녀를 찾아온 것조차 최소한의 의무 때문인 듯 보였다.

“왜 날 실망하게 해? 왜 어머니가 아니라 당신이야? ……왜 이런 모습을 보이는 거야?”

백이 넘는 물음표가 엘라의 머릿속에 있었다. 개중 가브리엘이 마침표를 들려준 질문은 단 하나도 없었다. 엘라는 그의 심드렁한 표정에 질려 버렸다.

씩씩거리며, 그녀는 가브리엘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인간으로 보이는 외형은 그의 성질과 닮은 모습으로 유지하는 것일 뿐 실체가 아닌지라, 그의 얼굴은 여전히 멀끔하기만 했다. 보라색 눈동자는 짙은 속눈썹으로 인해 우울해 보였으나, 입체감 있는 이마와 코는 잘빠진 생김새를 자랑했으며 단단한 턱은 강인한 사람처럼 그를 포장했다.

겉만 보아서는, 엘라 나자렛은 죽는 한이 있어도 그의 심중을 읽을 수가 없었다.

허탈한 한숨을 담아 엘라가 물었다.

“왜 내게 아무런 변명조차 하지 않아?”

이번에도 침묵만이 돌아오겠거니 짐작하고 건넨 질문이었다.

“그러자면…… 아사야를 이해해야 하니까.”

뜻밖에, 가브리엘은 답을 들려주었다.

“내게 왜 그런 것인지 아사야의 마음을 이해해야…… 너에게 지난 일들을 설명할 수 있어.”

느릿느릿하되 명확한 답변이었다.

“그런데 그러고 싶지 않아.”

그에, 엘라의 두 눈이 커졌다. 아버지의 멱살을 쥔 손에 절로 힘이 빠졌다.

가브리엘은 시시각각 변하는 그녀의 표정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화를 내고 성질을 부릴 때엔 제 자식이 맞긴 하다는 생각이 들건만, 놀라고 당황하며 순해질 적에는 그 얼굴에 아사야가 묻어 있었다.

“그럼 내 말에, 그렇다 아니다 그것만 대답해 줘요.”

엘라가 말했다. 여전히 제 아버지의 허리 위에 올라탄 채였다. 칼만 안 들었지 협박이라도 하는 태도였다.

“당신께서 어머니를 배신한 게 아닌 거죠?”

가까스로 솎아낸 질문을 엘라가 꺼냈다.

“그래.”

가브리엘이 대답했다.

“……어머니께 거짓을 말하거나, 어머니를 두고 떠나 버리거나, 어머니를…… 이용하고 저버린 추악한 드래곤이…… 당신은 아닌 거죠.”

두 번째 질문 역시,

“그래.”

답하기에 어려움이 없었다.

그러자 엘라의 안색이 바뀌었다. 화로 인해 시뻘겋게 붉어졌던 얼굴이 차분해진 뒤에 그녀는 슬픈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리고 물었다.

“어머니를 사랑했어요?”

“그래.”

어두운 동굴 속으로 걸어 들어오며 울던 아사야를 가브리엘은 기억했다. 스물일곱 해 전의 그날 이후 단 한 번도, 그는 아사야를 잊은 적이 없었다. 아사야와 함께 있을 때 그러했듯이 떨어진 시간을 보내는 동안에도 가브리엘의 머릿속엔 언제나 저의 어린 인간뿐이었다.

배신감에 몸부림치고 슬픔에 비명을 내지르기도 이십 년을 하고 보니 더는 원망이 남지 않았다. 어린 인간을 떠올릴 적에 가브리엘이 지닐 수 있는 감정은 짙은 그리움과 끓는 애정이 전부였다. 그래서 가브리엘은 아사야를 생각했다. 그녀를 떠올릴 때에 그는 살아 있는 느낌이었다. 그녀를 상상할 때면 기분이 좋았다.

가브리엘은 울지 않았다. 눈물로 그의 옷깃을 적신 이는 엘라 나자렛이었다.

제 목덜미에 고개를 묻고 우는 엘라를, 가브리엘은 내버려 두었다. 그녀의 짧은 머리칼이 턱과 목에 닿아 가려웠지만 참을 만했다.

‘네 말이 맞아.’

가브리엘은 홀로 생각했다.

‘널 찾아온 게 내가 아니라 아사야였더라면 좋았을 거야. 이럴 때 널 어떻게 달래 줘야 하는지, 아사야는 알았겠지. 아사야가 죽지 않았더라면……, 다시 태어나 돌아온다면…….’

그제야 가브리엘의 삶에 목표가 생겼다. 다른 이들이 갖는 것처럼 성대한 인생의 목표 따위는 아니었다. 그 자신을 위한 장래의 소망 역시 아니었다. 그보다는, 죽지 않고 움직이기 위한 최소한의 동력에 가까웠다.

그 목표의 내용인즉 오래전 유리 정원에 앉아 아사야와 나누었던 꿈을, 그녀가 돌아오거든 보여 주고자 하는 것이었다. 손 뻗으면 닿을 수 있어 더욱 애타게 느껴졌던 천공섬에 나라가 있고, 그들 몸을 누일 방에 따듯한 침대와 난로가 있으며, 그 땅에 그녀를 웃게 할 아이가 있게 하자는 목표였다.

“날 줄은 알아?”

가브리엘이 물었다.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는 얼굴로 엘라가 고개를 들고 그를 내려다보았다. 이내 그녀는 가브리엘의 몸 위에서 비켜야만 했다. 가브리엘이 그녀를 밀치자 그녀의 강인한 몸은 나무를 향해 퉁겨지다시피 나가떨어졌다.

나무뿌리에 엉덩방아를 찧으며 엘라는 수 초간 정신을 잃었다. 잠깐이나마 제가 의식을 잃었단 것에 그녀는 당황한 채 눈을 떴다. 아픔이나 원망보다는 충격이 컸다. 엠마오가 치마폭에 감싸며 정성으로 길렀다 한들 그녀의 본능은 별수 없이 드래곤에 가까웠다. 제 아버지가 저를 팽개쳤다는 상처보다는, 그녀 자신보다 강한 이는 처음 맞닥뜨린 승부욕이 더욱 컸다.

번뜩거리며 눈을 부라리는 엘라를 내려다보며, 가브리엘이 말했다.

“미안하게 됐군.”

곤혹스러운 기색이 묻은 시시한 사과였다.

“그냥 일으키려 한 것인데, 퉁겨 나갈 줄은 몰랐어.”

안 붙이느니만 못한 변명도 뒤따랐다.

“내가 함께 떠나자고 하면, 이 땅을 떠나겠어?”

가브리엘이 물었다. 엉덩이가 지끈거리며 아픈 탓에 엘라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면서도 고개를 끄덕이길 잊지 않았다.

“그럼 일어나.”

가브리엘이 말했다. 대단히 명령조였다.

지저분해진 바지 밑단을 털어 내며, 엘라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렇게 무뚝뚝하고 거칠고 이상한 아버지를, 공주라던 어머니가 어째서 사랑한 것인가는 앞으로 긴 시간 그녀와 함께할 새로운 의문이었다.

“날 줄은 아나?”

가브리엘이 물었다. 두 번째 같은 질문을 하는 그를 향한 엘라의 눈썹이 삐뚜름해졌다.

“날 줄 안다고 하면, 어디로 갈 건데요?”

그녀가 되묻자,

“천공섬.”

가브리엘이 기계처럼 즉답했다.

하늘에 뜬 섬의 신화에 대해서라면 엘라도 알았기에, 굳이 거기가 어디냐 되물을 필요가 없었다. 엠마오가 구부정한 허리만큼이나 오래된 목소리로 들려주던 잠자리 이야기가 있었다. 엘라와 같이 그 신화를 좋아하는 어린 아가씨를 생각하며, 엠마오는 그리운 듯 젖은 목소리를 내곤 했었다.

“천공섬에 가면…… 누가 있는데요?”

“없어, 아직은.”

그 말의 뜻을 이해할 수 없어 엘라는 무어라 대답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그곳에서 기다려야 해. 돌아온다면, 너를 보고 싶어 할 테니까.”

주어 없는 문장을 가브리엘은 설명이랍시고 늘어놓았다. 세상의 어떤 스무 살배기 여인도 그처럼 불친절하고 애매한 답만 들려주는 남자를 따라가진 않을 것이었다.

그러나 엘라 나자렛은 여느 스무 살배기 여인이 아니었다. 이 마을에 머물러라, 집을 두고 떠나지 말아라, 누구도 너를 의심하지 않게 행동해라, 보통의 인간처럼 조용히 지내거라……. 엠마오가 남긴 유언이 구구절절 길었다. 그 유언을 어길 날만을 기다려 온 엘라 나자렛은 이미 오래전에 떠날 채비를 마쳤다.

가브리엘이 날개를 펼쳤다.

‘또 한바탕, 마을에서 소란이 일겠어.’

엘라는 생각했다. 이번엔 또 무어라고 말들을 지어낼까, 대재앙의 조짐이 나젤탄에 나타났다…… 그렇게 요란한 소문을 내며 거짓 연극을 올려 댈까. 내심 조소하며 엘라는 제 아버지의 실체를 지켜보았다. 그가 콧김을 따라 거멓게 새어 나오도록 짙은 마력을 뿜어내는 것을, 시커멓고 거대한 날개를 털어 내며 느릿하게 펼치는 것을, 비행할 준비를 마치는 것을 엘라는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를 악물었다.

아버지의 실체는 인간들이 노래하던 발락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그의 육신에 까마귀 부리처럼 뾰족한 가시 따윈 없었고 전신의 윤곽이 크고 분명했다. 그 밖에는, 온통 흉터뿐이었다.

드래곤의 위용을 상징한다는 뿔은 한쪽 끝이 부러진 채 벌건 상아를 드러내고 있었다. 거대한 날개에는 그 크기만큼 숱한 화살 구멍이 뚫려 있었다. 옆구리 살점 일부는 깊이 파여 있었으며 전신의 군데군데에 비늘이 뽑힌 빈자리가 땜빵처럼 남았다. 두 동강이 났던 허리에는 누군가 표시해 둔 절취선 같은 흉터가 아주 길고 두꺼웠다.

온몸이 너덜너덜한 넝마였다.

그가 기지개를 길게 켜자 목둘레에 남은 흉터가 아주 길게 늘어났다. 놀란 얼굴로 저를 올려다보는 엘라의 얼굴을 향해, 그는 콧김을 내쉬었다.

그제야 엘라 나자렛이 날개를 펼쳤다. 그녀의 날개는 가브리엘의 것에 비해 놀랍도록 작았으나, 생채기 하나 없이 탄탄하고 굵었다. 실체를 드러내고 금색 눈을 끔벅이면서 그녀는 어색하게 기지개를 켜고 작은 몸을 뒤뚱뒤뚱 움직였다.

‘날 줄은 아냐’는 가브리엘의 질문에 황당하다는 듯 찡그리기는 하였으나 사실, 그녀는 이십 년 평생을 살며 제 날개를 흔들어 본 적이 없었다.

어정쩡하게 선 새끼 드래곤을 내려다보며 가브리엘도 그 사실을 눈치챈 듯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눈으로 보고 따르라는 양 제 날개를 천천히 펼치고 흔들어 댈 이유가 없었다.

엘라는 제 머리가 까만 비늘로 뒤덮인 것을 행운으로 생각했다.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비늘이 가려 주니 천만다행이었다. 양처럼 둥그런 뿔을 황소처럼 흔들며, 그녀는 제 아버지를 따라 움직였다.

시커멓고 거대한 날개 두 쌍이 운디네의 호수를 흔들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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