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화 (11/16)

발락의 현신



 

“그런데 말예요.”

음험한 정보라도 나누는 양 조심스럽게 꺼낸 목소리가 점심의 응접실을 채웠다. 상체를 테이블 앞으로 길게 뻗은 채, 두 눈을 가늘게 뜬 이는 블란테 세일산이었다.

그녀가 속삭였다.

“비아탄 경께서는 대체 뭐가 문제래요?”

자극적인 호기심을 가득 담은 질문이었다. 그에 아사야가 두 눈을 크게 떴다. 잘 닦은 오리 알처럼 고운 빛깔 드레스를 차려입은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공주였다.

예쁜 얼굴에 천진난만한 미소를 띠며, 아사야가 되물었다.

“비아탄 경이 왜요?”

“아직 혼인하지 않았다고 들었거든요. 남색을 하는 게 아니냐는 소문도 있던데…… 사실인가 해서요.”

첫째 왕자에게 시집온 지 3주를 갓 넘긴 블란테였다. 왕성을 둘러싼 소문의 사실 여부를 가려낼 기초적인 정보조차도, 그녀에겐 없었다. 몇 마디, 도움이 될 만한 소식을 알려 줄 끄나풀조차 하나 없었다.

본도 세일산은 다정한 남편이긴 하였지만 과묵한 탓에 그녀를 외롭게 했다. 그녀가 야베스 세일산의 태도며 아사야 세일산의 성격에 대해 말할 때마다 얼굴을 굳힌 채 입을 다물기 바쁜 본도였다.

내심 블란테는 그를 조개처럼 생각했다. 속에 부드러운 면을 감춘 건 사실이나 약간의 자극에도 입을 딱 닫아 버리니, 그 모양이 꼭 조개 같았다. 어떨 때는, 펄펄 끓는 물에다 그를 집어넣어 끓여 버리고 싶을 정도였다. 그러면 입이 열리고 말도 많아질까 싶어서였다.

하물며 제 수발을 드는 시녀들조차 모조리 새 사람인지라 편하지가 않은 블란테였다. 나젤탄을 비롯한 타국에 비하여 대륙이 압도적 강국인 것은 사실이나, 왕가에 시집온 왕녀에게조차 모국의 하녀를 동거취하길 허락하지 않으니 깡패가 따로 없었다.

그 점을 문제 삼아 폐하께 한마디 말씀이라도 전할 수 없겠냐 물었을 때 본도 세일산은,

“공주도 데려온 사람이라곤 늙은 유모 하나뿐이고, 왕성의 시녀들과 아주 잘 지내.”

아사야 세일산의 경우를 툭 던져 놓곤 입을 다물었다. 그런데 당신은 왜 투정하느냐는 투명한 핀잔이었다. 난데없는 비교에 블란테는 붉어진 볼을 감추지 못했다.

이곳 수도로부터 말을 타고 나흘, 배로 바다를 건너길 이틀, 육지에서 다시 사흘은 더 이동해야 도착하는 왕성이 그녀의 고향이었다. 나젤탄의 시녀들은 왕성의 시녀들과는 쓰는 언어부터가 달랐다.

반면 ‘공주’께서는 명성 높은 대륙의 공작가 아가씨였다. 왕성에서 마차를 타고 한 시간이면 도달하는 거리에 펼쳐진 거대한 부지와 높은 성이 그녀의 고향이었다. 그녀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왕가와 혼인을 맺기로 예정된 집안 출신이었고, 저는 왕위계승 후보에서 탈락한 뒤 정치를 위한 도구로 넘겨진 왕녀였다.

그런 제가 그녀에게, 감히 비교 대상이나 되냐는 말이었다.

그 때문에 결혼식 이후 보름간 블란테는 우울감과 싸워야 했다. 그 ‘공주’께서 먼저 다과회 초대장을 보내오기 전까지는 그랬다.

나젤탄어로 쓰인, 저만을 위한 초대장을 받은 순간 블란테는 직감했다. 제게 어떤 궁금증이 고개를 들 때마다, 제가 기대며 찾을 이는 아사야 세일산뿐이라는 것을.

“나보단 공주께서 왕성 소문에 더 빠삭하시잖아요.”

그리하여, 오늘의 주제는 비아탄 아멕의 비혼 사유였다. 전쟁 영웅이라 부지도 넓게 받았겠다, 은퇴 자금도 두둑하고 인기도 하늘을 찌르겠다, 이제는 제 영토에 머무르며 성을 꾸릴 시기이건만, 은퇴는커녕 결혼도 하지 않고 사렙탄의 곁을 지키니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나젤탄에선 없는 경우인지라 신기해서 그래요.”

혹여 허튼 소문이나 좇는 한심한 여자로 볼까 싶어, 민망함에 덧붙인 말이었다. 그런 블란테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아사야는 미소를 지으며 응했다.

“저 역시 그럴싸한 추측이라고 생각이 되는데…….”

아사야가 소곤거렸고,

“되는데?”

블란테의 상체가 앞으로 기울었다.

“……비아탄 경이 남색가는 아닐 거라 생각해요. 만일 비아탄 경에게 남자 애인이 있었더라면, 폐하께서 국법을 고쳐서라도 혼인하게 해 주셨을 테니까요.”

아사야의 농담에, 블란테는 실소했다. 얼굴 마주하며 말을 섞을 때마다 아사야는 의외의 면모를 거듭 보여 주었다. 오늘 담소를 나누며 보니, 그녀는 은근한 장난꾸러기였다.

장난기로는 블란테도 어디서건 져 본 역사가 없었다.

“어쩌면 폐하께서 경의 남자 애인인 건 아닐까요?”

한 손으로 입가를 가린 채 블란테가 소곤거렸다. 그러자 아사야는 작은 비명을 지르더니, 웃음을 터뜨렸다. 조그만 손으로 테이블을 치며 웃는 얼굴에 블란테는 몹시 만족했다. 어째서 누구를 좋아하게 되면 웃게 하고 싶어지는 건지 미스터리였다.

한참을 웃어 댄 끝에, 아사야가 얼굴을 발갛게 붉혔다.

“아. 아닐 거예요. 그런 건…….”

손등을 붙여 뺨의 열기를 가라앉히며 아사야가 말했다.

“하지만, 비아탄 경이 비혼인 이유가 폐하 때문이냐 하면…… 신빙성 있는 이야기인걸요. 경은 오래도록 폐하의 곁을 지키는 충신이고, 폐하께서도 비아탄 경을 신뢰하시니까요.”

손을 들어, 아사야가 시녀를 불렀다. 식어 버린 차를 데워 오라는 신호였다. 공주의 말 잘 듣는 어린 시녀가 쪼르르 다가와서는 미지근해진 찻주전자를 챙겼다. 시녀가 차를 데우는 일이, 오늘만 세 번째였다.

블란테가 슬그머니 미소 지었다. 찻주전자를 몇 번 데우느냐가 그날 모임의 점수라 해도 무방하기 때문이었다.

즐거운 자리일수록, 여인들은 차를 마시기를 최대한 미루곤 했다. 입고 벗는 데에 적어도 한 시간이 걸리는 드레스 차림으로, 누구 하나 화장실로 향했다가는 다과회는 거기에서 끝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성공적인 만남일수록 차를 마시지 않고, 거듭 데워 오게만 시키는 일이 잦았다.

그 횟수가 세 번을 넘어감은 무척 좋은 신호였다. 찻주전자를 들고 사라지는 시녀의 뒷모습을, 블란테는 웃으며 바라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난 가끔, 그런 관계가 부럽더라고요.”

“응?”

“폐하와 비아탄 경처럼, 서로 신뢰하며 충성을 맹세한 관계 말이에요. 내게 겟슈를 바친 남자는 많았지만 실체 없는 상징일 뿐이었어요.”

아사야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녀 역시 적지 않은 수의 겟슈를 받았지만, 그로 인해 얻은 제 사람일랑 하나 없었다.

‘겟슈’라 함은 전사에게 주어지는 서약을 뜻했다. 대륙이 갈라지고 섬들이 쪼개지기 이전에는, 국민 대다수가 전사였으며 모두가 자신만의 징크스를 갖고 있었다. ‘붉은 망토를 걸치면 불운해진다’, ‘서쪽에 침을 뱉으면 가족을 잃는다’, ‘개고기를 먹으면 안 된다’는 식이었다.

전쟁이 잦던 시기에는 징크스도 승리를 위한 도구로 쓰였다. 방법은 간단했다. 징크스에 ‘서약’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그 서약을 지킨 이들을 진정한 전사로 인정하는 식이었다. 서약을 지키는 한 그들은 전사였으며, 진정한 전사에게 패배란 없었다.

서약의 문화는 시대를 거치며 다른 형태로 바뀌었다. 서약을 새겨 넣은 겟슈의 유무로, 용병과 기사를 구분 짓는 식이었다. 귀족 출신의 기사들은 서약식을 올리며 자신만의 겟슈를 받았으나 천출 용병들은 싸움꾼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겟슈라 함은 기사도의 상징이었고, 자신의 겟슈를 누구에게 바치는 일은 평생 충성하겠노란 맹세였다.

그러나 평화의 시대에 이르러, 겟슈는 로맨스의 도구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블란테의 말이 맞았다. 오늘날, 왕가와 귀족가의 여식에게 바쳐진 겟슈의 수는 미모에 매겨진 점수이자 인기의 척도였다. 블란테에게 겟슈를 바친 기사들 중 영원히 그녀에게 충성할 남자 따윈 없었다.

그녀 말마따나, 예쁘게 포장된 겟슈는 ‘실체 없는 상징’에 불과한 것이었다.

“저도 그랬어요, 블란테…….”

아사야가 속삭였다.

“공작 성에 지낼 적엔 만나는 모든 이가 훌륭한 기사였지만, 난 검을 들어 본 적도 없는 어린 아가씨였죠.”

아사야의 금색 눈동자가 잠시간 창가를 향했다. 창문 밖을 흐르는 구름이 그녀의 시선을 가져갔다. 어쩌다 한 번이라도 저를 봐줄까, 목을 매며 아사야를 연모하는 남자들이 보았더라면 저 구름을 질투했으리라.

“멋진 기사들이…… 난 언제나 부러웠어요.”

그렇게 속삭일 적에 아사야는 쓸쓸하고 가느다란 가을 나무 같았다.

짧은 순간 블란테는 이상한 생각을 했다. 어쩌면 아사야 세일산도, 저와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아름다운 외모에 완벽한 몸매, 흠 하나 없는 피부와 다정한 성격을 지닌 아사야 세일산도 밤이면 외로움에 내일을 걱정하고, 가끔은 그저 슬퍼 이불 속에 숨을지도 몰랐다.

‘바보 같은 착각이네.’

자조하며, 블란테가 눈길을 돌렸다. 그러자 아사야의 금색 눈동자가 그녀를 우두커니 살폈다. 그녀가 언제부터 저를 보고 있었는지 알지 못해, 블란테는 화들짝 놀랐다.

두 눈을 깜빡이지도, 미소를 짓지도 않고 멈춘 채로 아사야가 말했다.

“이제 일어나요, 블란테.”

“아.”

블란테 세일산이 눈을 떴다. 흔들리는 마차 밖으로 구름과 나무와 말들이 지나고 있었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 블란테는 제 맞은편에 앉아 팔짱을 낀 본도 세일산을 보았다. 가져온 책들은 전부 읽어 버린 탓에 무료해진 듯, 그는 눈을 감고 있었다. 나젤탄으로 향할 적에 그랬듯이 대륙으로 돌아갈 적에도 따분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왕자였다. 벌써 지루함에 몸서리를 치는 걸 보면, 왕위에 오른 뒤에는 두 번 다시 나젤탄으로 가지 않을 게 뻔했다.

한참 그를 바라보다 블란테는 제 옆자리를 살폈다. 개인적으로 받아 온 몇 가지 선물과 편지들이 쌓여 있을 뿐, 꿈에도 본 그 무엇도 그녀의 곁엔 없었다.

‘이상해…….’

제 이마를 짚은 뒤에야 블란테는 자신이 땀 흘리고 있음을 알았다. 차게 식은 땀방울이 손바닥에 묻어났다. 손수건으로 볼과 목을 문지르며, 블란테는 마차의 옆문에 난 작은 창문을 열었다.

“잠깐 멈춰 주세요. 속이 좋지 않아서요.”

왕자비의 외침에, 기사가 말을 가까이 몰았다. 창문 밖에서 기웃거리며 그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했다. 벌써 몇 차례고 마차를 멈춰 세운 바 있었으나, 그 이유가 블란테 세일산인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어서였다.

몸종들조차 넌더리를 내는 이동 시간 내내 블란테는 근육통 한번 앓은 적 없었다. 나젤탄에 머물 적에 국경 수비까지 떠난 바 있다더니 사실인 모양이었다. 그녀는 기사들만큼이나 기운이 좋았다. 마차 안이 답답하다며 뛰어나와서는, 말을 타고 근방을 둘러볼 정도였다.

“어디가 많이 아프십니까?”

그런 블란테를 알기에 기사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이십 분만 더 말을 달리면 국경입니다.”

마차를 세우고 쉬기까지 금방이니 참아 볼 수 없겠냐는 질문이었다. 매정하게 오인할 수 있는 말이었지만, 블란테는 그를 이해했다.

지금 마차를 세우고 쉬자면 모든 기사와 몸종들이 말에서 몸과 짐을 내려야 했다. 기사단의 머릿수만 서른 명이 넘었고 시녀가 넷, 마법사가 하나, 몸종이 열 명이었다. 거기에 타고 온 말과 나젤탄에서 받아 온 말을 합하면 그 수가 만만찮았다.

마흔다섯의 인원이 다 함께 멈추어 누구는 물과 빵을 먹고, 누구는 짐을 정리하고, 누구는 말에게 풀을 먹이며 ‘잠깐’ 쉰다면 재정비하여 출발하기까지 시간이 만만찮게 걸릴 것이었다.

그러니 어지간해서는, 조금 아프더라도 참고 이동하는 게 맞았다.

“나도 알아요, 아는데…….”

이마를 찡그리며, 블란테는 마차 벽에 몸을 기댔다. 알싸한 차의 향기가 거듭 그녀의 코를 찔렀다. 세 번은 더 데운 탓에 색이 진해진 깊은 차의 향기였다.

“잠시 바람을 쐐야 하겠어요…….”

“알겠습니다. 길잡이를 불러 세울 테니, 잠시만 참아 주십시오.”

기사가 발을 구르자, 말이 급히 달렸다. 그로부터 몇 분 지나지 않아, 열의 중앙에 선 본도 부부의 마차가 천천히 멈췄다.

다행스럽게도, 본도 세일산을 비롯하여 누구 하나도 휴식 시간을 싫어하지 않았다. 대륙의 서쪽 끄트머리 숲은 정령이 많고 공기가 맑기로 유명한 명소였다. 발길이 적게 닿는 숲에 꽃과 풀이 많고 경관이 아름답기는 당연지사였다.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블란테는 길에서 벗어나 수풀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원정을 오가는 한 달 사이 그녀와 말을 튼 기사 하나가 엄호를 해 드리겠다며 뒤꽁무니에 따라 붙었다.

“괜찮아요, 발을 좀 씻고 싶어 그래요.”

블란테가 거절하자, 그는 아쉬움이 남은 기색으로 말했다.

“그러면 여기에서 기다리겠습니다. 대신 망을 봐 드리죠.”

누구에게 발등 피부를 좀 보인다고 별 탈은 없을 거라고, 대답하려다가 블란테는 입을 다물었다. 상기된 얼굴에 설렌 미소를 띤 눈을 보자니, 망을 보겠다는 말은 핑계에 불과함이 뻔했다. 그의 눈동자와 밝은 두 뺨이 보내는 호감을 모르는 척하며, 블란테는 숲을 향해 걸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발을 적실 법한 물이 드러났다. 블란테는 그것을 호수라 불러야 할지 바다라 불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절반은 나무로, 다른 절반은 모래로 테두리를 두른 물길의 중앙에서 바다와 호수가 만났다.

“와…….”

서로 다른 물들이 섞이지 않고 머무르는 경계는 장관이었다. 넓은 호수의 물은 녹색을 띤 채 잔잔했고, 푸르고 화려한 바다의 파도가 거칠게 쳐 와도 그와 섞이질 않았다. 나무 사이로 펼쳐진 바다를 바라보자니 숨통이 확 트였다.

가죽신에서 발을 빼내어 호숫물에 담그자 시원한 감촉이 정신을 깨웠다. 잠깐의 휴식을 만끽하며 블란테는 경계를 늦췄다. 어깨는 느릿해졌고 땋아 놓은 머리칼 사이로 바람이 스몄다.

물길 안을 들여다보며 허리 숙인 그녀의 뒤로 날렵한 그림자가 날아들었다.

고개를 번쩍 들고 몸을 돌려, 블란테는 저를 향해 달려든 존재를 맞닥뜨렸다. 불청객의 정체는 다름 아닌, 그녀의 희고 창백한 정령새였다.

품속으로 뛰어든 새에게 밀려 블란테는 넘어질 뻔했다. 첨벙거리며 비틀댄 끝에 두툼한 바지 밑단이 흠뻑 젖었다.

“하하…….”

정령새의 반가운 부리를 쓰다듬으며, 블란테가 웃었다.

“한 달 내내 널 얼마나 기다렸는지 아니.”

나젤탄에 머무르는 내내 침실 창문을 열어 둔 블란테였다. 제 친구가 언제쯤 새를 날려 보낼까, 저녁이면 기대하고 아침이면 실망하는 날들이었다. 내내 편지를 기다릴 적엔 작은 소식 하나 보내 주질 않더니, 왕성으로 돌아오는 길에 편지를 받게 하다니 아사야도 참 이상했다.

“내 친구가 너를 굶겨 죽인 줄로 알았지 뭐야.”

투정하듯 말하며, 블란테는 정령새의 머리깃을 쓰다듬었다. 그러면서도 즐거운 기색은 감춰지질 않았다. 왕성으로 돌아가거든, 미루고 미루다 새를 날린 지각쟁이 발신인을 놀려 줄 생각이었다.

기분 좋은 콧노래를 부르며, 블란테는 새의 다리를 살폈다. 왼쪽 발에 묶은 쪽지가 예상외로 얇았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블란테는 쪽지를 펼쳤다. 그리고, 그녀는 멈춰 버렸다.

시간이 그녀를 남겨 놓고 제멋대로 흐르는 듯했다. 근육 하나 꿈쩍 않고 정지한 채 블란테는 갈색 눈동자만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아사야의 쪽지는 무척 짧았다. 보고 싶다는 말도, 맛난 차와 아기 신발을 가져와 달라는 장난 어린 문장도 없었다.

블란테, 나의 친구. 야베스 세일산이 반역을 일으키려 해요. 국경을 지나는 즉시 기사단이 당신 부부의 마차를 덮칠 거예요. 그들이 원하는 건 왕위계승자의 죽음이에요.

블란테, 나의 자매. 저들이 오늘을 사는 동안 나와 당신은 오지 않을 내일을 기다렸어요. 오늘 나는 깨달았어요. 우리가 기다리는 내일은 결코 오지 않아요. 내일이 되어도 우리는 나중만을 기대하겠죠.

만일 내가 기사라면, 평생 모시고픈 주인은 블란테 세일산 당신뿐이에요.

나의 친구, 나의 자매……. 나는 당신을 나의 주군이라 부르겠어요.

블란테의 갈색 눈이 혼란으로 가득 찼다. 다급히 적은 듯 갈겨쓴 글씨가 정말 아사야의 것이 맞나 의심했지만, 저를 친구이자 자매라 부를 이는 분명 아사야뿐이었다.

쪽지를 움켜쥐고서 블란테는 잠시간 몸을 떨었다. 구겨진 쪽지 속으로 사방의 모든 활력이 감겨 들어가는 듯했다. 호숫가의 공기가 주던 생기 넘치는 힘은 사라져 버렸고, 서늘한 추위와 오한이 그녀의 몸을 감쌌다.

가죽신에 젖은 발을 쑤셔 넣고, 블란테는 왔던 숲을 가로질러 달리기 시작했다. 이십 분만 더 가면 국경이라 했다. 조만간 기사단이 마차를 덮친다니, 그에 대비하여 본도 세일산을 지켜야 했다. 기사들에게 경고하여 대열을 바꾸고, 가던 길을 우회하며 공격을 피해야만 했다.

숲을 헤치며 내달리던 블란테의 걸음이 한 발, 두 발 비틀거리다 느려졌다. 달리던 힘을 못 이겨 터덜대던 끝에 그녀는 멈추어 섰다.

두 눈이 시뻘겋게 달아오르고 두 손이 약한 풀잎처럼 흔들렸다. 바람이 불어와 그녀의 흰 머리를 엉망으로 헝클였다.

매일 아침, 점심, 저녁으로 빗어 대도 빌어먹을 곱슬머리는 결코 차분하고 조신하게 가라앉지를 않았다. 제 성질머리를 닮아 이리저리 삐죽대며 뻗치는 것이라고, 오래전 누군가 말했었다. 누구인지 그 이름도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데, 그가 뱉은 문장은 블란테를 떠나지 않았다.

매일 아침 그 말을 곱씹으며 거울 앞에서 머리를 빗는 것이, 큰 키와 단단한 어깨와 귀염성 없는 얼굴과 낮은 목소리를, 그녀 자신을 미워하는 것이 블란테 세일산의 삶이었다.

‘나의 주군…….’

블란테는 입술을 짓씹었다. 그리고 아주 잠깐 흐느꼈으나 그 소리는 바람이 나무를 지나는 소리에 묻혀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았다.

잠깐의 시간이 지난 뒤에, 그녀는 눈물을 닦고 고개를 들었다. 수풀 밖으로 나서자 웃는 얼굴로 저를 반기는 기사가 보였다.

“속은 좀 괜찮으십니까?”

묻는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인 뒤 블란테는 마차 대열로 돌아갔다. 그녀의 관심을 끌어 보려 기사가 주머니를 뒤적이더니, 흰 종이로 감싼 사탕을 꺼냈다. 먹으면 기분이 나아지실 거라는 해맑은 말과 함께였다.

미소를 지으며 사탕을 받긴 하였지만 블란테는 그것을 입에 넣지 않았다. 그녀의 기분을 나아지게 하자면, 달콤한 사탕 하나로는 한참 모자랐다. 그녀가 오래도록 갈구해 온 것에 비하자면, 사탕 하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재정비를 마친 기사와 말들이 대열을 맞추며 섰다. 조금만 더 가면 국경이니 힘들어도 기운을 내주십사, 눈치를 살피며 길잡이가 앞장섰다.

미소 짓는 얼굴로 블란테는 마차에 올랐다. 그녀를 잠깐 살필 뿐 본도 세일산은 달리 말이 없었다. 그가 입을 다물기에, 블란테 역시 어떠한 말도 꺼낼 이유가 없었다.

재킷 안에 감춘 쪽지는 그 자리에서, 블란테의 뛰는 심장을 감추어 주었다.


 

.*. *. *. *. *. *.


 

멀찍이, 국경을 넘는 마차 행렬이 내려다보였다. 언덕 위에 진을 치고 아래를 노려보는 가디엘 아졸의 눈은 독수리처럼 밝았다. 손을 들어, 그는 기사단에 신호를 줬다. 군인처럼 열을 이루고 잠복한 기사들이 각자 검과 방패를 챙겼다. 왕위계승자를 실은 마차가 덫 안으로 기어 들어오는 차였다.

그때 가디엘은 비릿한 열기를 느끼며 고개 돌렸다. 뺨의 솜털이 삐죽 서는 감각은 그만이 아는 것이었다. 그 이외에는, 몸을 돌려 뒤를 살피는 기사가 없었다. 두 눈을 크게 뜬 채 가디엘이 몇 발짝 뒤를 향해 걷자 부하들은 그제야 주위를 살폈다.

가디엘이 기다린 것과 같이, 뻘건 불씨가 지휘 처소 앞으로 달려들었다. 삽시간에 기사단을 파고든 열기의 정체는 폼 에드레이의 창조물, 에돔의 마력으로 기른 적마였다.

벌겋게 타오르는 말의 번개 같은 등장에 기사들이 검을 잡았다. 손을 들어, 가디엘이 그들 행동을 저지했다. 말에서 내리는 이가 폼 에드레이 혼자라면 검을 뽑고 경계할 법했지만, 아사야의 늙은 유모가 함께일 때엔 이야기가 달랐다.

“엠마오.”

눈썹을 구기며 가디엘이 그녀 앞에 다가섰다. 두꺼운 후드를 뒤집어쓴 엠마오는 가엾게도, 먼 거리를 빨리 날아온 후유증으로 인해 비틀대고 있었다.

더는 손님이 없는 줄을 알면서도 가디엘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아사야와 함께 있질 않는 유모의 모습만큼 낯선 것이 그에겐 없었다.

“가디엘 경.”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엠마오가 후드 밑의 두 팔을 빼냈다. 그녀의 손에 들린 자그마한 포대를, 가디엘은 당황한 표정으로 내려다봤다. 무뚝뚝한 그의 턱에 힘줄이 생겼다.

“…….”

말없이, 그는 포대를 노려볼 뿐 받아 안질 않았다. 외팔의 기사인 그로서는 아기가 든 포대를 편히 안을 방도가 없었다. 다만 엠마오의 품에 든 것을, 천천히 걷어 살필 뿐이었다.

“도대체…….”

가디엘이 낮게 신음했다.

“도대체 무슨…… 무슨 일이지?”

포대 속에 든 것은 커다란 알도, 뿔과 날개가 달린 괴물도, 끔찍한 생김새의 마물도 아니었다. 짙은 색 피부에 샛노란 눈동자, 까만 머리칼과 촘촘한 속눈썹을 지닌, 그것은 천사처럼 예쁜 아기였다.

어여쁜 아이의 어머니가 아사야라는 점은 부정할 길 없이 명확했다. 그러나 그 아버지가 야베스 세일산일 수는 없었다. 그럴 가능성이라곤 일말의 흔적으로도 남아 있질 않았다.

“아사야는 어디에 있어?”

가디엘이 외쳤다. 큰 소리에, 갓난아기의 뺨이 살짝 움직였다. 눈을 뜬 채 울지도, 웃지도 않는 자그마한 얼굴을 바라보며 가디엘이 신음했다.

“이 아이는…… 이 아이는 누구의 자식이지? 어디로 데려가는 거야.”

엠마오가 조용히, 주름진 입술을 짓씹었다. 아기를 감싼 작은 포대에 눈물을 떨구며 그녀는 작금의 상황을 설명코자 했다. 그러나 목소리가 젖고 몸이 떨리는 탓에 쉽지가 않았다.

“아가씨께서 제게 아기를 맡기셨어요. 이 아이를 데리고 멀리, 떠나라고…….”

후드를 열어, 엠마오는 제 품 안에 단단히 묶은 가죽 주머니를 보여 주었다. 가디엘의 두 눈이 황망한 듯 멍해졌다.

그가 알던 모든 사실이 뒤틀리는 순간이었다. 베데르 아졸의 손주, 아사야의 아이, 왕가의 피를 물려받은 자손을 왕좌에 앉히고자 이곳까지 말을 달린 그였다. 야베스 세일산이 부리는 속셈을 뻔히 알았지만, 알면서도 속을 수밖에 없는 상황도 있는 거라 생각했었다. 아사야의 내일을 위해서, 어린 조카의 안녕을 위해서 그랬다.

그러나 눈앞에 놓인 작은 아이는 베데르 아졸의 손주이자 아사야의 아이일지언정, 왕가의 피는 단 한 방울도 물려받지 않았다.

“아사야는?”

두 눈을 부릅뜨고서 가디엘이 물었다.

“아사야는 어디에 있지?”

그녀의 드레스 허리를 훔쳐보던 본도 세일산의 눈빛이, 무릎 꿇은 그 자신을 괄시하던 야베스의 얼굴이, 그 앞에 무기력하게 쓰러져 있던 누이의 마른 몸이 순서대로 떠올랐다.

주먹 쥔 손을 덜덜 떨며, 그는 길을 잃어버렸다. 제자리에서 휘청대는 지휘관을, 기사단이 굳은 얼굴로 올려다보고 있었다. 어찌할 바, 발 디딜 길조차 모르게 된 그를 붙잡은 것은 다름 아닌 붉은 팔의 마법사였다.

“가디엘 경.”

차갑게 느껴질 만치 가라앉은 얼굴로, 폼 에드레이가 그와 눈을 맞추었다.

“……오래전 전쟁터에서, 베데르 경께서는 저를 아사야 아가씨께 보냈어요. 전 그분께 따님의 안전과 행복을 약속드렸죠. 하지만 그 어느 때보다 보호가 필요한 때에, 공주님께선 저를 당신에게 보냈어요.”

떨지 않으려 노력했으나 폼 에드레이의 목소리는 엉망진창이었다. 말라빠진 몸이 슬픔을 가누지 못해 흔들리고 있었고, 두 눈동자는 혼란한 듯 가디엘의 눈을 살피기 바빴다.

“가디엘 경. 그 의미를 모르시겠어요?”

지난 대전이 남긴 전설적인 영웅, 베데르의 아들이었다. 젊은 지휘관, 전장에 뜬 혜성이라 불리는 가디엘 아졸은 갓난아기의 얼굴을 보며 울고 있었다. 그를 설득하는 붉은 팔의 마법사 역시 얼굴이 상하고 심장이 망가진 채였다.

“‘영웅은 전장에 있어야 해……’, 공주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더군요.”

사시나무처럼 덜덜 떠는 두 사람을, 어린아이라도 영웅이라 부르진 않을 터였다. 가디엘은 그 자신을 영웅처럼 여겨 본 일 없었고, 폼 에드레이 또한 단 한 번도 그녀 스스로를 영웅이라 생각한 일 없었다.

“경께서는……, 누구의 이름으로 이 자리에 섰습니까?”

폼이 물었다. 그런 그녀는 컴플렉스로 점철된 외톨이 마법사였다.

입을 다문 채 가디엘이 대답을 미뤘다. 아버지의 유지를 이어받고자 발악해 온 외팔의 기사로서, 국경까지 떠밀려 온 그였다. 그러나 그런 이름으로는 전쟁터에 설 수 없었다. 그런 이름으로 살아서는 안 됐다.

검의 손잡이를 쥐던 그의 손이 서서히 느슨해졌다. 가디엘의 손바닥은 왕성의 여느 기사들보다 두꺼웠다. 겉으로 볼 적에 혈색이 두드러지지 않을 만치 딱딱한, 거북이 등딱지 같은 굳은살이 그의 피부에 박혀 있었다.

“엠마오.”

고개를 돌려, 가디엘은 늙은 유모를 바라봤다. 그리고 물었다.

“그 아이를 데리고 어디로 떠날 생각이지?”

“백색 항구를 통과해야 해요. 아가씨께서, 나젤탄으로 떠나라고 하셨어요. 국경을 지나 배에 올라야 해요…….”

“기사단의 마법사 둘을 데려가. 하나는 신관이니, 그의 자격이라면 이름 없는 아이도 문제없이 대륙을 떠날 수 있을 거야.”

오래된 갈림길에서 긴 시간을 멈추어 보낸 가디엘이었다. 더는 정체된 채 유령의 흔적을 좇을 수 없었다. 이제 그렇지 않겠노라고, 누이 앞에 다짐한 바 있었다.

젊은 지휘관의 호출을 받아 신관과 마법사가 지휘 처소에 들어섰다. 늙은 유모를 지키며 지금 당장 항구로 떠나기를 명령하자, 두 사람은 곤혹스러운 듯 눈을 끔벅거렸다. 그들이 염려하는 것은 그러나, 자신들의 안위가 아니었다.

“그럼, 경께서는…….”

그들은 자신들을 멀리 보낸 뒤에, 누가 가디엘 아졸의 뒤를 지킬 것인가를 걱정하고 있었다.

“경의 안위는 염려치 않으셔도 됩니다.”

불쑥, 가느다란 목소리가 그들을 가로막았다. 대뜸 등장해서는 지휘관을 지키겠다는 마른 여자를, 신관은 수상쩍게 노려보았다. 이내 두 남자는 가디엘을 바라보았다. 공작께서 무어라 만류해 주시기를 바라서였다.

그러나 만류하기는커녕, 가디엘은 늦기 전에 당장 떠나야 한다며 그들에게 계획을 일러 주었다. 늙은 유모와 아기가 바다를 건너 나젤탄에 당도하기까지 반드시 안전하게 지켜 내란 명령이었다.

곤혹스레 짐을 챙긴 마법사들의 옆으로, 폼이 적마를 불러 세웠다. 아주 오래간만에 멀리 달린 탓에 적마는 흥분을 감추지 못해 푸르르 고개를 떨어 댔다. 그런 적마의 등에, 폼은 늙은 유모를 태웠다.

“불에 데는 일은 없을 테니, 안심하세요.”

폼이 제 두 팔을 길게 감싼 장갑을 벗었다. 그 모습을, 마법사와 기사들이 놀란 듯 바라보았다. 베데르의 시신을 끌어안고 에돔의 열기를 맞은 팔이었다. 온통 시뻘겋게 달아오르고 살점 군데군데가 녹아내린 채 아문 팔은 이질적이기까지 했다.

말없이, 폼은 제 장갑을 유모의 팔에 끼워 주었다. 그제야 유모가 뜨거운 고삐를 움켜쥐었다. 품 안에는 갓난아기를 감싼 포대를 단단히 묶은 모습이었다.

유모와 마법사들을 떠나보내자마자 가디엘은 언덕 아래를 살폈다. 본도 세일산을 태운 마차가, 기사단이 점령한 자리 바로 밑으로 다가왔다.

신호를 보내, 가디엘은 그들 마차를 멈추어 세우게끔 했다. 진을 친 기사단을 그제야 발견하고, 행렬의 말들이 놀란 소리를 냈다. 마법사와 함께 내려가 본도 세일산과 말을 나눌 차례였다.

그러나,

“가디엘 경?”

폼 에드레이의 놀란 눈이 그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토끼처럼 벌겋게 뜬 눈을 따라, 가디엘이 고개를 돌렸다.

멀찍이 붉은 봉연 두 줄이 하늘을 가르며 뻗쳐 오고 있었다.

봉화를 태운 연기인지라 일직선으로 피어오르는 게 본디의 봉연인데, 왕성의 신관들이 피우는 봉연은 그와 달랐다. 그들이 부려 놓은 마법을 깃에 단 두 마리 와이번은 가로줄의 봉연을 그리고 있었다. 자색 깃의 중앙에 세일산 왕가의 문양이 펄럭거렸다.

두 줄의 봉연은 왕좌의 주인이 바뀌었음을, 붉은빛은 완강한 숙청을 의미했다. 저녁이면 수도에선 본도 세일산의 귀환을 반기는 축제가 열릴 예정이었다. 당장 왕성에서 봉연을 날린, 왕좌의 주인이 따로 있음을 누구나가 안다는 의미였다.

숙청의 대상이 누구인지 그 역시, 누구나가 알았다.

“말을 돌려…….”

신음하듯, 가디엘이 중얼거렸다.

야베스 세일산이었다, 왕좌에 앉아 봉연을 날릴 인물일랑 그뿐이었다. 새끼 악마처럼 속닥거리던 그의 계획이 실현되고 있었다. 제 아버지를 살해하였으니 남은 숙제는 제 형제, 본도 세일산뿐이었다.

가디엘 아졸과 그의 기사단을 국경으로 보내 놓고도 봉연을 날린 야베스였다. 그의 심중을 알아채기란 어렵지 않았다. 푸른 하늘을 가르는 와이번의 비명은 가디엘을 향한 경고였다. 예정대로 본도 세일산을 죽이지 않으면, 봉연을 따르고자 몰려올 군대를 상대해야 할 것이라는…… 그것은 추잡한 협박이었다.

이를 악문 채 가디엘이 등을 돌렸다. 그의 가문과 누이의 명예를 지키고자, 국경까지 그를 따른 기사들이 보였다. 두 눈을 크게 뜨고 입은 벌리고서 그들은 하늘을 쪼갠 붉은 줄을 바라보고 있었다. 가디엘은 그들의 이름은 물론이며 부모와 아내, 아이의 생일까지 전부 알았다. 그의 결정에 기사단의 목숨과 가족들의 운명이 걸려 있었다.

가디엘의 이성과 본능이 각자 활개 치며 심장을 두들겨 댔다. 당장 아사야의 안위가 염려되긴 하였으나 굳이 이곳에서 야베스 세일산에게 반기를 들 이유는 되지 못했다. 그래 봐야 왕성의 상황은 바꿀 수가 없었다. 목숨 부지하며 왕성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래야 상황을 살피고 다시금 일어설 기회도 있을 것이었다.

거기까지가 이성의 소리였다.

“말머리를 돌려라!”

소리치며, 가디엘이 고삐를 당겼다. 귀신처럼 깍깍대는 와이번의 비명이 귀청을 때리며 지났다. 가까운 영지의 성벽으로부터 벌써 문을 내리고 포를 다는 움직임이 보였다.

목과 이마에 핏대를 세운 채 세 번째,

“말을 돌려!”

가디엘이 외쳤다.

“본도 왕자 부부의 마차를 지켜, 왕성으로 향한다!”

그의 시선 끝에 까만 지평선이 보였다. 말벌 떼처럼 몰려든 군대가 자아낸 가로 선이, 초원을 가르며 빠른 속도로 밀려들고 있었다.

“폼!”

가디엘이 소리치자, 폼 에드레이의 손바닥이 바닥을 쳤다. 흙 위에 무릎을 대고 술식을 외며 그녀는 자신의 마나를 끌어다 방어 마법을 설계했다. 그녀를 뒤에 둔 채 가디엘이 열의 앞줄로 말을 달렸다.

그를 필두로 아졸가 기사단이 검을 뽑고 방패를 들었다.

이내 폭우가 쏟아졌다. 빗방울 대신 화살 세례로 쏟아지는 비가 하늘을 가르며 날아들었다. 왕명을 좇아 쏘아붙인 활촉은 기사단과 본도 세일산의 마차 행렬 위로 떨어졌다.

그 즉시 폼 에드레이가 두 팔을 위로 뻗었다. 그녀를 중심으로 가장 멀리 말을 달리는 기사의 발끝까지 뻗은 결계가 불쑥, 허공을 갈랐다. 수백 개의 화살이 결계 안에 떨어졌고 이외의 활촉은 붉은 벽에 가로막혀 나방처럼 그을렸다. 놀란 기사들이 고개를 올려 하늘을 본 순간, 밤이 찾아왔다.

‘밤이 됐다’라는 말 외에, 기사단은 사라진 해를 표현할 방도를 찾지 못했다. 창백하리만치 밝던 낮의 하늘과 연녹의 초원이 삽시간에 어두워졌다. 컴컴한 어둠이 닥치자 말들이 놀라 발을 굴렸다.

몇몇 기사들은 이것도 마법의 일환인가 하여 폼 에드레이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그녀는 두 눈을 크게 뜬 채 입을 벌리고 서 있을 뿐이었다.

제가 벌인 마법이 아닐지언정, 폼은 갑자기 찾아온 밤의 정체를 모르지 않았다.

낮에도, 그가 날아오르면 암흑이라.

기사단은 이내 사방에서 울려 퍼지던 함성마저 사라졌음을 알아차렸다. 창백해진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며 기사단은 거대한 위화감에 휩싸였다. 그들이 날린 화살 세례가 폼의 결계 밖에 떨어져 있었고, 그들이 타고 온 수천 마리 말들이 우왕좌왕하며 헤매고 있었다.

그러나 함성을 내지르던 병사들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

충격에 빠진 기사들은 말을 멈췄다. 소리를 냈다가는 저 역시 사라질 것이라는, 근거 없는 두려움이 그들을 침묵하게 했다. 사방이 고요한 와중에 쐐액, 쐐액 정체를 알 수 없는 바람 소리가 좌로, 우로 울려왔다.

그러던 차,

“악…….”

어린 기사가 작은 비명을 내질렀다. 어둠에 눈이 익숙해지자 그제야, 사라진 병사들의 흔적이 보인 것이었다. 그들은 죄 시커먼 그림자로, 바닥면에 붙어 이리저리 내달리고 있었다. 팔과 다리는 물론이며 몸을 잃어버린, 일만 개의 그림자가 사방으로 흩어지며 두려운 듯 발작을 해 댔다.

고개를 들어, 폼이 하늘을 살폈다. 두려움에 젖은 기사들이 마법사를 따라 턱을 들었다. 그제야, 그들은 해가 사라지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햇볕과 하늘과 지평선을 덮을 만치 거대한 용이, 그들 위를 날고 있었다.

“바…… 발락…….”

누군가 그의 이름을 외웠다. 쐐액 쐐액…… 바람을 찢는 소리와 함께 힘을 되찾은 재앙의 몸뚱이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시커멓고 거대한 존재의 그림자가 스치자, 발작하던 이들의 그림자가 흔적을 잃고 사라졌다.

일만 명의 그림자가 사라지고 일식이 찾아든다.

각기 다른 이름으로, 그러나 동일한 재앙으로 기록된 존재였다. 검은 날개로 봉연을 가르며 그는 울부짖고 있었다. 연인이 저를 속이고 배신하였음에 치를 떨고 비명을 지르며, 그는 왕성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땅의 주인이 바뀐다.

남은 예언은 한 줄뿐이었다.


 

.*. *. *. *. *. *.


 

본도 왕자의 마차 행렬은 쑥대밭이 됐다. 블란테 세일산은 좌로 나자빠진 마차 속을 굴렀다. 바깥에서 울리는 비명과 우박 소리를 들으며 그녀는 제 머리를 감싸고 몸을 옹송그렸다. 소리가 그치고 마차 안이 컴컴해진 뒤에야, 블란테는 콜록거리며 기침하는 본도의 이마를 만졌다. 붉고 푸른 깃을 단 화살 하나가 그의 흉곽 아래에 박혀 있었다.

식은땀에 젖은 본도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다가, 블란테는 뒤집힌 마차 안에 가로로 섰다. 이제는 천장이 되어 버린 문짝을 조심스레 밀어 열고 고개를 내밀자, 사방이 밤이었다.

뒤이어 붉은 마법진 밖에 놓인 말과 기사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들 머리와 등, 허리, 발과 손을 가리지 않고 쏟아진 화살로 인해 그녀는 어느 시신이 누구인지조차 알아볼 수 없었다.

더운 숨을 헐떡이며 블란테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마법진 안의 시녀와 시종들은 다행스럽게도 무사한 듯, 울먹이는 숨소리를 내고 있었다.

“사태가 진정될 때까지, 다들 밖으로 나오지 말고 자리를 지켜.”

블란테가 말했다. 작은 속삭임에 불과했으나 블란테는, 행렬의 모든 이들이 제 목소리를 들었으리라 확신했다. 그만큼이나 사방이 고요했다. 그토록 끔찍한 정적은 난생처음 겪어 보았다.

마차의 문을 닫고, 블란테는 고꾸라진 소파에 앉았다.

“기…… 기사들은?”

본도 세일산이 물었다. 고통스러운 숨을 컥컥대는 그의 몸을, 블란테가 조심스레 살폈다. 마차의 열린 창을 뚫고 들어온 화살은 그의 몸에 박히되, 심장과 폐부를 아슬아슬하게 비껴간 채였다. 상처가 덧나지 않게 수습하며 신관에게 보인다면, 목숨을 지켜 낼 수 있을 것이었다.

“걱정 마세요.”

헐떡거리며 호흡하는 그의 머리를, 블란테가 조심스레 끌어당겼다. 제 무릎을 베고 눕도록 다정하게 안아도 주었다. 안정을 찾은 듯, 본도 세일산이 거친 숨결을 서서히 정돈했다.

“본도. 나의 왕자님…….”

아주 작은 소리로 블란테가 소곤거렸다. 마차 안에는 그와 저밖에 누구도 없었지만, 큰 소리를 내었다가는 마차 밖의 누구이건 제 소리를 들을 것이었다.

“당신을 용서하겠어요. 당신의 무관심, 나를 밀어내던 손도, 다른 여자를 향하던 눈길도…… 전부 없던 일로 두겠어요.”

블란테는 그의 잘빠진 이마를 쓰다듬고 식은땀을 닦아 주었다. 흐트러진 머리칼을 정돈하자 고통에 물든 얼굴은 그럴싸한 비극의 주인공처럼 보였다.

아내의 위로에 안도한 듯 본도의 눈빛이 차분해졌다. 주변을 살필 정신이 드는지 그는 비틀린 마차와 구겨진 문짝, 블란테의 미소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를 깊이 들여다보며, 블란테가 말했다.

“이제 당신의 사랑을 필요로 하지 않으니까요.”

이내 그녀의 오른손이 본도의 뒷머리를 잡았고 왼손은 화살을 움켜쥐었다.

“당신의 아이를 가졌거든요.”

누구도 그의 신음을 들을 수 없게, 블란테는 제 가슴에 그의 얼굴이 묻히도록 끌어안았다. 그러고는 이미 박힌 화살을 힘껏 안으로 찔러 넣었다.

두 발을 이리저리 헛딛으며 본도 세일산이 펄쩍거렸으나, 그의 반항은 약한 발작에 지나지 않았다.

“…….”

소리 없이, 블란테는 그의 머리를 껴안고 침묵했다. 본도 세일산은 잠시간 팔과 다리를 버둥거리다, 마침내 맥을 잃고 늘어졌다.

셔츠가 축축해진 것을 느끼며 블란테는 그의 머리를 안은 포옹을 풀어 주었다. 그가 토한 피와 침, 눈물이 그녀의 가슴에 묻었다.

주머니를 뒤져, 블란테는 동그랗게 접힌 종이를 꺼냈다. 백색 포장지를 벗기자 그 속에 든 사탕이 모습을 드러냈다. 가느다란 숨이 약하게 삐져나오는 본도의 입술을 열고, 블란테는 그의 혓바닥 위에 달콤한 사탕을 올려 주었다.

본도 세일산의 숨이 완전히 꺼지도록 말없이, 블란테는 그를 제 가슴에 끌어안았다.


 

.*. *. *. *. *. *.


 

마녀와 반동분자의 처형식으로 왕성 앞이 소란했다. 처형식은 왕관을 얹은 뒤 야베스 세일산이 내린 첫 번째 명령이자 행사였다. 마녀라 함은 마물과 간통하고 왕실을 능욕한 아사야 세일산을, 반동분자란 그녀의 탈옥을 도우려던 비아탄 아멕과 그를 따르는 기사들을 욕되게 부르는 소리였다.

야베스 세일산에게 왕좌란, 오래도록 막연히 그려 온 자리였다. 그것은 사렙탄 세일산의 자리였으며, 본도 세일산이 앉아야 할 자리였고, 영원히 제 것이 될 수 없는 자리였다. 세 가지 이유만으로 그는 반역을 저질렀고, 그 이유들은 그가 왕좌에 앉자마자 사라져 버렸다.

꿈처럼, 소망처럼, 지난날 읽은 책처럼 그려 보았던 반역을 마침내 저지른 그였다. 그를 반역자로 행동케 만든 동력은 그러나 터무니없는 것이었다. 그에겐 대륙에 대한 애정도, 하고자 하는 정치도, 이기고자 하는 적국도 없었다. 오랜 시간 그는 반역이 제 아버지를 벌하고 형의 코를 눌러 버릴 복수라고 여겼지만, 정작 그를 움직인 힘은 아사야 세일산에 대한 배신감과 추잡한 패배의식에 불과했다.

아버지의 몸을 앉히던 자리에 제 몸을 앉히고, 그의 손이 닿던 팔걸이에 제 두 팔을 올린 채 그는, 가장 먼저 제 아내를 죽이고자 했다.

“화형을 시킬 것이다. 마녀들을 그렇게 처형한다지.”

젊고 충동적인 야베스 세일산을 어떻게 모셔야 할지, 신하들은 혼란스러운 눈동자만 이리저리 굴렸다. 그의 상처를 치료하던 마법사들조차 손가락을 움찔거렸다.

아사야 세일산이 당신을 왕좌에 앉힐 가장 큰 명분이라며 목소리를 낸 귀족은 반동분자로 내몰렸다. 그녀를 처형했다가는 다시 반역이 일어날 것이라며 경고한 신관 역시, 알현실 테라스 밖으로 몸을 던져야 했다.

복도에는 시신이 굴러다니고 모퉁이마다 비명이 울리는, 왕성은 끔찍한 오후를 맞이했다.

수도의 백성들은 저들이 모시던 왕이 죽었단 슬픔에 눈물을 흘렸는데, 그 충격을 수습하기도 전에 화형식 소식을 들었다. 누구나가 구경할 수 있게끔 성문이 활짝 열렸고 돌벽으로 지은 원형 탑 위에 장작이 쌓였다.

계단처럼 높이 쌓인 장작 위에 죄인이 끌어 올려진 순간 사람들은 비명을 내질렀다. ‘공주님’, 큰 소리로 부르는 이도 여럿 있었으며, 베데르의 딸이 무슨 죄를 지었느냐고 성내는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렸다.

화형대에 묶여 선 채 아사야는 그런 사람들의 면면을 내려다보았다. 자그만 얼굴들이 죄 걱정과 공포로 물들어 있었다. 이내 그녀는 고개를 높이 들었다.

제 목숨을 구걸하며 눈물 흘릴 마음 따위는 없었다. 야베스 세일산의 말이 맞았다. 그녀는 마녀였다. 집안의 여린 꽃이 되기를 거부하고 남편의 전시품이 되기를 거부하고, 다른 이를 사랑하여 그를 해방시킨 여자를 마녀라고 부른다면, 그녀는 마녀였다. 몇 번이고 그렇게 불리며 비난받아도 좋았다.

가브리엘을 떠나보내고 제 아이를 지켜 낸 행동을, 아사야는 죽는다 해도 후회하지 않았다.

“불을 붙여라.”

군중들의 웅성거림을 뚫고 야베스 세일산이 외쳤다. 테라스에 선 젊은 왕의 모습에 군중은 탄식을 흘렸다. 그의 두 뺨과 손이 벌건 피로 물든 탓이었다. 피의 주인이 누구인지 만천하가 알았다. 그러나 그 점을 짚어 비난하는 소리는 한마디도 새어 나오질 않았다. 그런 이들 모두가 반동분자로 내몰려 처형당하기 직전인 탓이었다.

새로운 왕의 명령에 따르고자, 집행자가 머리를 조아리며 테라스에 올랐다. 그러고는 활시위를 당겼다. 기름 적신 천을 묶고 불을 붙인 활촉이, 처형대의 아사야를 향했다.

그러나 그는 한참을 머뭇거리며, 활시위를 쥔 팔을 덜덜 떨었다. 얼마의 금화를 준다 한들 베데르의 딸에게 불을 붙일 수는 없었다. 멀찍이 베데르 성의 꼭대기 탑에 뚫린 창 두 개가 마치 죽은 영웅의 눈인 양 지켜보는데, 감히 영웅의 딸을 죽일 용기가 나질 않았다.

마침내 그는 불붙은 활을 흙바닥에 꽂아 버렸다. 기대 반, 공포 반으로 집중되었던 이목이 탄식인지 야유인지 모를 소리와 함께 분산됐다.

왕성 기사가 휘두른 검이 집행자의 목을 쳤다. 시신 한 구를 치워 버린 뒤, 두 번째 집행인이 끌려 나와 자리에 섰다. 그 역시 불을 붙인 활촉을 겨누었으나 그뿐, 화형대를 쏘지 못했다.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세일산 왕가의 보물이라 불리던 공주님이었다.

“드래곤을 길들인 공주님을, 제가 감히 어떻게…….”

집행인의 외침에 사방이 소란해졌다. 그의 말이 옳으니 화형을 멈춰야 한다는 외침과, 간통죄를 저지른 마녀는 죽어야만 한다는 고함이 한데 뒤섞였다.

그러나 목젖 앞에 칼이 들어오자, 집행자의 혀는 얼어붙었고 전신은 물 먹은 듯 무거워졌다.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그는 뜨거운 화살을 다시 한 번 겨누었다. 아사야 세일산은 그를 바라보지 않았다. 두 눈을 감고 고개를 든 채, 저를 둘러싼 모든 외침들이 사그라들기를 기다릴 뿐이었다.

그때, 허공을 찢어 놓는 비명 소리가 울렸다. 거대한 소음에 집행인은 활을 떨구며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웅성거리던 군중들도 돌바닥에 몸을 숙이며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제 드래곤이 울부짖는 소리를, 아사야만이 알아보았다.

숱한 사람들 가운데 오직 그녀만이, 고개를 높이 들고 검은 드래곤의 도약을 바라보았다. 멀리 먹구름처럼, 하늘을 뚫고 닥쳐오는 밤처럼, 가브리엘이 오고 있었다.

“불을 붙여!”

야베스 세일산이 발악하듯 외쳤다. 그러나 집행인은 눈물을 흘리며 제 목숨을 빌기 바빴다.

들뜬 숨을 헐떡이며, 아사야는 저를 찾아 다가오는 그림자를 올려다보았다. 힘을 되찾은 가브리엘은 놀랍도록 거대했고 검은빛이었다. 야속하게 밝던 하늘이 시커먼 어둠으로 뒤덮였다. 드래곤의 그림자 안에서 편안을 되찾은 이는 오로지 아사야뿐이었다.

“가브리엘.”

그제야 눈물이 났다. 사실, 그녀는 괜찮지 않았다. 제 거짓말에 속은 가브리엘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 버려서, 괜찮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강한 포옹 한번 해 주지를 않아서, 사실은 슬펐다. 작은 입맞춤 하나, 사랑한다는 대답 하나가 너무나 고팠다.

“울지 마, 가브리엘.”

그가 제 목소리를 들고 있으리라 믿으며, 아사야가 속삭였다.

“난 약속은 반드시 지켜…….”

어린 날처럼 속삭이는 아사야의 젖은 얼굴을, 야베스의 두 눈이 노려보았다. 집행인이 놓친 활이 그의 팔에 들렸고 불씨 얹은 활촉이 아사야를 향했다. 분노로 숨을 헐떡거리며 야베스 세일산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저를 보지 않는 여자를 바라보며 울었다.

아사야를 향해 그는 두 가지 말을 뱉고 싶었다. 첫째는 원망과 저주의 말이었고 둘째는, 정말로 내가 너를 사랑한 적 없었냐는 질문이었다. 막상 입을 열었을 때, 그의 잇새로 나온 말은 허탈한 집착이었다.

“내 것이 아니라면, 누구의 것도 되어선 안 돼…….”

활시위를 당긴 검지를 놓자, 불씨가 화형대에 날아가 붙었다. 기름에 젖은 화형대는 삽시간에 불길에 휩싸였고, 아사야의 인영이 붉게 휘감겼다.

그러나 아사야는 어떤 비명도, 신음성도 흘리지를 않았다. 고통의 감각은 이미 그녀를 떠난 지 오래였다. 마지막 순간 아사야가 느낀 것은 그저, 제 몸을 끌어안는 그녀 자신의 그림자였다.

타오르는 고통으로부터 저를 밀어내는 가브리엘의 마력에 안겨, 아사야가 입을 열었다.

“꼭 다시 만나.”

그녀는 제 눈이 멀어 버렸음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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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떠, 아샤는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그녀 주위에는 어린아이들이 다닥다닥 붙어, 이불 한 장에 세 명씩 뭉쳐 잠들어 있었다. 아샤의 양옆에도 열 살이 안 된 아이 둘이 한창 꿈결이었다.

느릿느릿 상체를 일으키며 아샤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매만졌다. 제 이마와 눈두덩이, 코, 입술을 만지며 확인했다. 불길이 지난 자국 같은 건 없었다. 온몸이 매끈하고 촉촉했다. 그리고 작았다.

아샤는 짧고 자그마한 제 손가락 열 개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자리에서 느릿느릿 일어나 벽면에 걸린 사각 거울에 얼굴을 비추자 우울하고 큰 눈동자와 삐뚤빼뚤하게 잘린 검정색 머리칼을 늘어뜨린 어린아이가 보였다.

새벽 공기를 가슴 깊이 들이마시며, 아샤는 창문 앞에 가 섰다. 시설 건물을 지나 저 멀리, 나무가 자라지 않는 언덕 위에 검은 용의 갈빗대가 있었다. 네 개의 갈빗대와 꼬리뼈가 남은 자리를, 아샤는 미소 지으며 구경했다.

죽기 직전 용이 고개 뻗었을 방향을 향해 아이는 손가락을 뻗어 보았다. 창문 위에 스민 촉촉한 김 위에, 아이는 갈빗대를 따라 머리를 그려 주었다. 그리고 그 앞에는 긴 막대에 묶인 여자를 그렸다.

그림 속의 검은 용은 여자에게 주둥이를 대고 있었다. 시설의 다른 아이들은 아샤의 낙서를, ‘용이 사람을 먹는 중인 거야’ 하고 오해하곤 했지만, 아샤의 의도는 그와 정반대였다.

“아프지 말라고 뽀뽀해 준 거야, 베이거나 다칠 때만 그렇게 하는 거야. 알겠어?”

낙서 속 용은 불에 타 죽은 그녀에게 입 맞추고 있었다.

활짝 웃는 아샤의 뺨에 눈물이 젖었다. 작은 주먹으로 두 눈을 문질러 닦으며, 아샤는 창문 위의 낙서를 손바닥으로 지워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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