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사야의 열쇠
본도 세일산의 이름이 계보에 올랐다. 세일산가의 계보는 보편적인 족보와는 그 쓰임이 달랐다. 계보에 이름을 올린다 함은 대륙의 주인이 될 이름을 확정 짓는 일이었다. 왕좌에 오를 이의 이름만이 계보에 새겨졌다. 때문에 사렙탄 세일산의 이름 옆에는 죽은 동생의 이름이 없었고, 본도 세일산의 이름 옆에도 야베스 세일산의 이름이 없었다.
정식적인 왕위계승자로서 이미 사렙탄 세일산이 공언한 바 있으며, 새로이 왕이 될 입장으로 블란테와 함께 나젤탄으로 떠난 본도였다. 그의 이름을 계보에 올림은 당연지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염려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새어 나왔다. 본도 세일산의 자격이며 사렙탄 세일산의 결정력에는 물론 문제가 없었다. 문제는, 지난해에 쌓인 숙설이 아직 남은 시기라는 부분이었다.
고위 신관들은 계보에 이름을 적어 신전에 옮기는 날을 몹시 중요하게 여겼다. 그날은 새로운 왕의 시작을 신께 알리는 시발점이라, 그 주에 불미스러운 일이나 장례가 없어야 함은 물론이며 달의 위치와 모양, 바람의 방향과 세기까지도 고려할 대상이었다.
그런 탓에,
“얼었던 흙이 녹지도 않았고, 젖은 길이 마르지도 않았는데 계보를 올리라니…….”
척박한 겨울의 서리는 고위 신관의 예민한 성격을 마구잡이로 들쑤셔 놓았다.
“신전 안팎의 눈은 전부 치웠습니다.”
어린 종이 그의 눈치를 슬금슬금 살폈다. 두 팔 위엔 자색 천으로 곱게 감싼 계보가 들린 채였다. 근 사십 년 만에 새 잉크를 적신 계보는 지나간 세월만큼이나 낡았는데, 수많은 손을 거쳐 닳은 자국마저 세일산의 인장에 남으니 중후한 멋으로 변모했다.
‘쯧’, 고위 신관이 큰 소리로 혀를 찼다.
“신전 주변의 눈만 치우면 무얼 하느냐? 왕성 안의 길마저 아직 얼어 있어. 여기 오는 길에만 두 번은 더 나자빠질 뻔했다.”
늙은 신관이 투정하는 소리를 어린 종은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심각한 얼굴로, 소년은 제 생애를 스무 번 곱해도 따라잡을 수 없게 오래된 계보를 노려보았다.
그러고는 번쩍 고개를 들었다.
“저, 그럼 마법사의 힘을 빌리면 어떨까요?”
종이 외치자,
“마법사?”
고위 신관의 눈가에 주름이 파였다.
“네, 에드레이 남작님이요! 병영의 하인들이 그러는데, 그분이 데려온 말 덕분에 마구간에 훈기가 넘친답니다. 불처럼 뜨거운 적마라던데요. 그쪽으로만 가면 따듯하다 못해 여름처럼 덥대요. 달리는 속도는 또 쏜살마냥 빠르다 하니, 길을 녹이는 것쯤 대수롭지도 않을 겁니다. 그러니 남작님께 부탁드리면은…….”
작은 머리로 생각할 적엔 좋은 계획 같았다.
어린 종이 신나게 주절대는 소리를,
“바보 같은 놈.”
고위 신관의 핀잔이 틀어막았다.
“어디 가서도 그런 소리는 말아, 알겠느냐? 네가 멍청하게 흘린 소리를 공격적으로 받아들일 귀가 왕성 안에 숱해!”
예배당까지 울리도록 큰소리 내어 그는 어린 종을 꾸중했다. 갑자기 혼쭐이 난 소년은 얼굴을 벌겋게 붉히고 고개를 푹 숙였다.
“죄, 죄송합니다.”
소년이 울먹였다. 금방이라도 귀한 계보에 눈물을 떨굴 것 같았다. 재빨리 사죄하며 벌벌 기긴 하지만, 그는 제가 무얼 잘못했는지는 조금도 모르는 눈치였다.
작은 소년을 울게 두자니 기분이 좋지 않아, 신관이 목소리를 누그러뜨렸다.
“그 마법사의 주인 때문에 이 사달이 난 게 아니냐.”
“주인이라니……. 아, 아사야 공주님 때문에요?”
“쉿.”
나이를 먹으니 어째서인지, 젊을 적보다 후회가 많아졌다. 백색 수염을 쓰다듬으며 신관은 고개를 내저었다. 혓바닥이 가볍고 제 처지를 모르는 소년에게 굳이 정치를 알려 줄 이유가 없었다.
특히나 폼 에드레이며 공주에 대해서는 말을 삼가는 게 좋았다.
“우리가 할 일은 폐하의 뜻대로 계보를 올리는 것뿐이다. 어디 가서 또 쓸데없는 소리를 했다가는, 그땐 내 마법으로 너를 쥐어 팰 거야.”
“신관님께서 그런 말씀을 하셔도 됩니까…….”
“그렇다면 어쩔 거냐. 내 신성력이 널 꾸중하길 허락한다는데.”
구부정하던 허리를 곧게 펴고, 고위 신관은 예배당의 기둥을 지났다. 침묵하며, 어린 종은 신관께서 백색 신단 위에 계보를 올리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이어 신관은 무어라 오래된 술식을 외었다.
“내 말, 기억하느냐.”
수염이 가슴팍에 닿도록 고개 숙인 채 고위 신관이 속삭였다. 혹여 신관께서 저를 이 자리의 증인으로 세우시는가 하고 소년이 눈을 반짝였다. 그러자 신관이 말했다.
“어디 가서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라.”
“……알겠다고요.”
어린 종이 입술을 삐죽거렸다.
예배당의 작은 창을 통해 스민 겨울 볕이 계보 위로 비껴 흘렀다.
서기는 사렙탄 세일산의 명을 받들어 계보를 완성했으며, 많은 귀족들 가운데 그 누구도 성급하다느니 말을 함부로 꺼내지 않았다. 덕분에 오늘, 고위 신관은 본도 세일산의 이름이 쓰인 계보를 신께 올렸다.
그들 가운데 누구도 ‘시기적으로 너무 이르다’고 사렙탄의 결정을 만류하지 않았다. 그들 모두가 작금의 이례적인 자리매김이 지닌 의미를 알기 때문이었다.
고위 신관의 말이 맞았다. 아사야 세일산이 문제였다. 애초에 일반적인 상황이어서는, 아사야 세일산은 오늘날까지 왕성에 살아서는 안 됐다. 왕위계승자가 정해진 판국에 야베스 세일산은 진작 제 아내와 함께 왕성을 떠났어야 했다.
그러나 사렙탄 세일산은 둘째 부부의 출가를 명령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떠나 살 영토를 내어 주지 않았으며 신하들 중 누가 야베스의 사람인지 그 분간조차 미뤄 놓았다.
사렙탄 세일산이 그의 둘째 아들에게 끝없이 아량을 베풀어 온 것을 귀족들은 알았다. 선왕부터 세일산 왕가를 모시던 몇몇 이들은 그 원인이 오래전에 잃은 이복동생 때문임도 짐작했으며, 그 덕분에 야베스 세일산이 국왕의 아픈 손가락으로 자리매김한 것 역시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그러나 둘째 왕자에 대한 애정이란 것이 첫째에게 왕좌를 물려주고도 떠나보내지 않을 수준인 줄은 몰랐었다.
오히려 그는 하루가 멀다 하고 둘째 부부를 찾았다. 정확히는 아사야의 안부를 묻고 그녀의 인사를 받길 원했다.
사렙탄 세일산의 일생에 아사야는 ‘불쑥 얻은 두 번째 선물’이었다. 첫 번째 선물이 베데르 아졸임은 말해 입 아픈 문제였다. 아사야 세일산은 압화를 끼운 초대장으로 그를 기쁘게 하는 며느리였고, 드래곤을 길들여 대륙의 명예를 한층 높인 공주였으며, 그의 말년에 손주를 안겨다 줄 은인이었다.
베데르 아졸의 손주가 곧 제 손주라는 사실은 사렙탄의 이성을 마비시켜 놓기 충분했다.
“자네와 내가 한 아이의 할아버지가 되는 거야. 언젠가는 자네의 손주가 내 자리를 물려받는 모습을 보고 싶단 말일세.”
십 년 전까지만 해도 사렙탄은 그렇게 소망했었다. 꿈같은 이야기를 진심으로 전할 때마다 베데르는 고개를 저으며 넌더리를 내곤 했다.
“저는 본도 왕자님을 사위로 볼 생각이 없대도요.”
전 대륙을 통틀어 그만이, 사렙탄의 낯에 대고 그런 농담을 할 수 있었다. 매정한 베데르의 태도에 서운함을 느끼면서도 사렙탄은 그를 핀잔하거나 벌하지 않았다.
“내가 어찌 자네를 이기겠나.”
그 시절에는 몰랐지만, 돌이켜 보면 사렙탄은 베데르의 그런 성격을 좋아했다.
사렙탄 세일산의 이름이 절대적인 군주로서 자리매김한 뒤에도 베데르 아졸은 여전히 그의 친우였다. 사실상 ‘왕’이란 가장 유명한 외톨이나 다름없었다. 사렙탄에게는 친우라 부를 이가 베데르뿐이었다. 열아홉 시절에 나누던 농담을 수염 거뭇한 마흔이 되어서도 꺼내는 친구가, 대륙 안에 그뿐이었다.
그러니,
‘베데르와 나의 손주.’
사렙탄은 아기를 가진 아사야를 성 밖으로 내보낼 수 없었다. 제 목에 칼이 들어온대도 안 될 일이었다.
그들 부부의 거처를 옮기길 포기한 뒤 사렙탄은 차선책을 선택했다. 본도 세일산의 이름을 계보에 올리는 것이었다. 신관들이 입술을 삐죽대건 귀족들이 눈알을 굴려 대건 그들 반응 따위는 알 바가 아니었다.
사렙탄에게 있어 계보는 수단에 불과했다. 누구에게는 신성한 기록이며 다른 누구에겐 피를 묻혀서라도 이름 올리고픈 자리였으나, 사렙탄에겐 입마개에 지나지 않았다. 야베스 세일산이 그의 아들로서, 아사야 세일산이 그의 공주로서 왕성에 머무르게 하면서도, 왕위계승자는 변함없음을 공표하여 신하들의 불만을 틀어막는 식이었다.
둘째 부부를 향한 사렙탄의 애정은 이따금 애처롭기까지 했다. 평생 품었던 희망을 좌절당한 야베스 세일산이며, 어린 생명을 품은 아사야 세일산에게 사렙탄은 기이하다 싶을 만치 신경을 쏟았다. 어제는 그들 부부의 침실에 심신안정에 도움이 된다는 꽃을 다섯 바구니 보냈으며 오늘은 알현실로 이어지는 복도 열 군데에 소파를 놓았다.
“공주님께서 발이 부어 거동이 힘드시다니, 신경 써 주신 거지요.”
부기를 앉히는 데에 효능이 좋다는 약을 건네며 시녀장이 말했다. 왕께서 보내온 선물을 확인하며 아사야는 볼을 붉혔다.
“뒤뚱거리며 걷는 모습을 보셨나 봐요.”
공주의 속삭임에 시녀장은 크게 미소 지었다.
아사야 세일산은 왕실의 규칙을 뒤흔들기로 전례 없는 인물이었다. 만일 야베스 세일산의 아내가 그녀 외의 다른 여자였더라면 오늘과 같이 복잡한 눈치싸움도 없었으리라. 그러나 권력의 발치에서 줄다리기하며 하루하루를 버티는 시녀장조차, 문제의 원인인 아사야를 미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시녀장을 비롯한 대다수 하인들은 그녀를 사랑했다. 왕성에서의 생활을 반백 년 넘게 한 하인마저 입 모아 말하기를, 아사야 세일산과 같이 상냥한 왕족은 여태껏 없었다.
그녀는 제 수발을 드는 이들은 물론이며 제 말을 챙기는 마구간지기의 이름까지 외웠다. 축제일 저녁이면 시녀들을 여럿 엮어 일부러 시내로 심부름을 보냈다. 유라와 사라의 생일날이면, 파티셰에게 작은 케이크를 구워 달라 은밀히 주문했다.
그렇게 다정한 아사야를 며느리로 두었으니, 왕께서 어떤 친절을 베푸시건 하인들은 놀라지 않았다. 왕궁 복도에 놓인 소파 역시 유난스레 생각할 게 아니었다. 알현실로 향하는 길에도 공주께서 힘들다면 앉아 쉬어야 하는 법이었다.
“배가 무거우면 걸음이 바뀌는 게 당연하지요. 작은 새처럼 기척을 내시니, 귀여워 그러시는 거예요.”
시녀장이 말했다. 그 소리를 아첨으로 들었는지 아사야의 홍조가 귀까지 번졌다.
“폐하께 감사하다고 인사를 전해 주세요. 아침마다 꼭 문안을 드리러 가겠다고도요.”
“예, 공주님. 폐하께서 아주 기뻐하실 겁니다.”
미소로 시녀장을 돌려보낸 뒤, 아사야는 선물꾸러미와 함께 쿠션에 등을 파묻었다. 한숨이 아주 길게 빠져나왔다.
아사야 세일산은 모순의 극치였다. 그녀는 아름다운 공주로 평화로운 여생을 만끽하는 일만이 남은 양 웃고 있었다. 그러나 마음 안으로는 닥쳐올 전쟁에 대비하며 무기를 찾기 바빴다.
선물로 만든 산에 둘러싸인 그녀의 머릿속엔 흙먼지가 가득했다. 그 흙먼지의 근원지를 쫓으면, 제 오빠와 그의 기사단이 말을 달리고 있었다. 먼저 국경에 말을 대고, 본도 부부의 마차를 기다리기 위하여…….
한때는 제 거짓말 때문에 시녀가 꾸지람을 들을까 봐 맨발로 공작성을 달렸던 아사야였다. 그러나 오늘, 왕성 안에 그녀보다 거짓말에 능한 이가 없었다.
그녀는 알았다, 오늘의 숱한 친절과 애정들은 신기루임을. 왕자의 아이를 품은 천진한 공주란 사기꾼에 불과함을. 몇 달인지 몇 주인지 모를 시간 끝에 제 아이가 태어나는 날, 저는 웃고 저들은 울 것이란 것도.
쿠션 속으로 깊게 등을 기대며 아사야는 있는 힘껏 숨을 내쉬었다. 폐를 채운 공기를 전부 뺄 기세였다. 그런들 크게 부푼 배가 가라앉진 않았다.
두 손으로 아사야는 제 배꼽을 만져 보았다. 옴폭 들어갔던 배꼽이 이제는 평평하게 느껴졌다.
두 다리를 길게 뻗고 발가락을 까딱거려도, 제 종아리는 배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이제 아사야는 선 채로는 제 발가락을 만질 수 없었다.
‘너무 빨리 커지고 있어.’
쌍둥이를 임신한 것이라던 신관의 오진이 다행으로 느껴졌다. 그러나 그 말 뒤에 숨을 날도 길지 않을 것이었다. 한 주 사이 아사야의 배 속 아이는 무럭무럭 자랐고, 엄마의 피부를 아리게 할 정도로 몸집을 키워 나갔다.
실크로 만든 쿠션 위로 아사야의 등과 엉덩이가 주르륵 미끄러졌다. 두 발을 길게 뻗은 채 반쯤 누워 버린 것이었다. 한숨 쉬며 뒤척이는 공주님을 유라와 사라가 챙겼다. 두 시녀의 도움을 받아 아사야는 자리에 반듯하게 앉았다.
“드로인을 불러 새 쿠션을 주문할까요?”
아사야의 손을 주무르고 지압하며 사라가 물었다.
“아냐. 폐하께서 주신 것을 멋대로 바꿀 수는 없지.”
아사야는 지나치게 매끄러운 쿠션에 다시금 등을 붙였다.
사렙탄을 생각하면 그녀도 마음이 좋지 않았다. 저를 아끼며 믿는 왕을 속이는 일은 베데르의 딸로서 해선 안 될 짓이었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사렙탄의 총애가 반드시 필요했다. 그 총애에 기대어 왕성 안에 살아야만 했다.
왕성 안에 그녀가 불러다 놓은 마법사가 있었고, 아버지의 이름을 딴 성이 있었으며, 그 속에서 똬리를 튼 채 저를 기다리는 검은 드래곤이 있었으므로.
왕성 밖으로 쫓겨 나갈 마음 따위는 추호에도 없었다. 아사야 세일산이 원하는 것은 누구에게 밀려 떠나는 일이 아니었다. 제 의지로, 제 계획대로 가브리엘의 손을 잡고 도주하는 일이었다.
“조금 더…… 스커트가 큰 드레스는 없을까?”
그러기 위해서는, 비이상적으로 커 가는 배를 감추는 일이 급선무였다.
공주의 말에 사라는 거울 앞에 걸었던 옷을 내렸다. 주름 장식이 적고 매끄러운 일자형 드레스는 ‘스커트가 큰’ 디자인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었다.
유라와 사라는 함께 방을 떠났다가, 새 드레스와 함께 돌아왔다. 그럴 적에 시녀들은 네잎클로버를 찾은 아이처럼 환한 얼굴이었다. 그들은 스커트 주름이 풍성하고 크면서도 내의에 코르셋이 없어 무겁지 않은 옷을 찾았다.
“완벽해.”
공주께서 그렇게 칭찬하시니, 시녀들의 발이 허공에 동동 뜨는 듯했다.
아사야의 외출 준비 시간은 임신 전후로 크게 달라졌다. 보통은 처녀인 시절 치장에 더욱 힘쓴다지만, 아사야의 경우 반대였다. 시녀들은 가진 솜씨를 총동원하여 그녀의 드레스에 매달렸다.
앞치마 안에 반짇고리를 넣은 채 그들은 아사야의 스커트 바깥 자락을 양방향으로 걷어 올려 꿰매었다. 그렇게 공주님의 골반 양쪽에 커브를 만들었고 그 주름을 최대한 풍성하고 크게 잡았다.
부를 과시하기 위해 화려한 드레스를 차려입는, 최근 귀족가 유행에 동참하려는 의도는 없었다. 필요만이 있을 따름이었다. 최대한 풍성한 디자인의 드레스를 차려입어야, 아사야는 달수에 비해 커진 배를 감출 수 있었다.
유라와 사라가 드레스 소매 주름을 만지는 동안 아사야는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요즘은 제 드레스를 치장하는 동안에도 똑바로 서 있기가 힘들었다. 그런 공주를 위해 시녀들은 거울 자리 앞으로 카우치를 옮겨 놓았다.
저를 위해 마련된 자리에 걸터앉아, 아사야는 드레스 위로 부푼 배를 쓰다듬었다. 스커트 주름을 잡는 중이니 그러지 마시라며 유라가 달래던 것도 보름 전까지의 일이었다. 이제 시녀들은 공주께서 언제 부푼 배를 문지르며 미소를 띠시건, 그녀의 시간을 방해하지 않았다.
‘아가야, 답답하진 않니?’
아사야의 마음 안에 부쩍, 전하지 못할 문장이 늘었다.
‘곧 봄이 올 거란다. 날씨가 따듯해지고 나면, 너도 이 세상을 좋아하게 될 거야.’
그녀는 평화롭고 행복한 인사말을 떠올리길 좋아했다.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고 마음 안에 삼키면, 그 말들이 제 아이에게 전해질 것만 같았다.
한편으로는 왜 이렇게 빨리 커지는 거냐며 염려하던 마음까지 전해지진 않았을까 걱정스러웠다.
‘불안하게 만들어서 미안해.’
더 환영받고 더 사랑받을 수 있었던 아이였다. 반드시 그렇게 되게끔, 아사야는 그렇게 만들 것이었다. 왕성이 아닌 먼 땅, 자유의 국가 나젤탄에서 그녀는 이 아이를 낳을 것이었다. 그녀의 아이는 충격적인 스캔들의 주인공이 아닌, 사랑과 축복의 산물로 탄생할 것이었다.
‘조금만 참아 주렴.’
마음 깊이, 아사야가 속삭였다.
‘조금만 더 나랑 같이 있어 주어.’
출산을 최대한 미루고자 소망하는 어머니는 이 땅에 그녀뿐일 것이었다.
배 속 아이와 함께하는 아사야의 대화를 가로막은 이는 그녀의 유모였다. 어깨를 주무르는 엠마오의 손길에 아사야가 눈을 떴다.
“에드레이 남작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엠마오가 전했다.
“폼이?”
두 눈을 깜빡이며 아사야는 창밖의 해를 살폈다. 그녀가 베데르 성을 찾기까지 세 시간도 채 남지 않은 때였다.
요즘, 아사야는 매일 오후마다 베데르 성을 찾았다. 그런 그녀를 만류하던 유일한 인물인 야베스 세일산조차 어쩔 도리 없는 주문을, 아사야는 알았다.
‘베데르 성에서 아버지의 품을 느끼고 싶어요. 태교를 위해서라도요.’
오늘도 다름없이 아사야는 제 드래곤과 마법사를 만날 예정이었다. 반나절도 안 되는 시간을 기다리지 못하여 폼이 먼저 제 침실을 찾은 데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었다.
아사야는 제 마법사를 응접실로 데려갔다. 블란테가 떠난 뒤 그녀의 응접실은 부쩍 쓸쓸해졌다. 지난주에는 아사야 혼자 앉아 이새의 쿠키를 먹었고, 나흘 전에는 임신한 며느리를 보러 들른 사렙탄을 맞이했었다. 그 자리에, 오늘은 폼이 앉았다.
붉은 팔의 마법사를 처음 만난 날이 떠올라 아사야는 웃음 지었다.
“폼.”
낡아빠진 후드와 독두꺼비 가죽신 대신 폼은 단정한 차림새였다. 면도날로 깎았나 싶게 삐죽거리던 머리칼도 여느 신사처럼 정돈된 모습이었다.
에드레이 남작 앞에 찻잔을 내밀며 아사야가 말했다.
“이렇게 급히 나를 찾을 때엔 좋은 소식이건 나쁜 소식이건 일이 생긴 거겠지요. 나쁜 소식이라면 부디, 나와 내 아이가 놀라지 않게 천천히 전해 줘요.”
아사야의 침착한 속삭임에,
“제가 해냈어요, 공주님!”
폼이 대뜸 소리쳤다. 그녀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겼단 생각에 벅찬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마법사였다.
“마도구의 결박마법을, 오늘 거꾸로 풀어냈어요. 어떤 결함도 없는 술식이라 생각했었지만, 그건 그저 어린 마법사의 자만에 지나지 않았던 거예요.”
그렇게 말하는 그녀는 ‘어린 마법사의 자만’을 깔보며 그보다 진보한 제 실력에 심취한 모습이었다. 기쁜 소식에 설렌 나머지 아사야는 폼의, 보기 드물게 으스대는 태도를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다만 물었다.
“그럼, 마도구 열쇠를 만들기까진 얼마나 걸릴까요?”
그러자 폼의 마른 얼굴 위로 커다란 경악이 피어올랐다. 제가 들은 말을 믿을 수 없다는 듯, 폼은 장갑 낀 제 두 손을 한데 뭉친 채 작게 발을 굴렀다.
“공주님……. 결박마법을 풀어내기까지, 약속드린 일정보다 늦어진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그건 그만큼, 제가 고안해 낸 마법이 완벽에 가까웠기 때문이에요…….”
머리의 무게가 커지기라도 한 것처럼 폼이 고개를 푹 숙였다. 속상한 듯한 태도를 이해할 수 없어 아사야는 어리둥절해졌다. 제 질문의 어디가 잘못된 것인지, 최연소 고위 마법사의 드높은 자긍심을 모르는 아사야로서는 추측할 길 없었다.
“해체 술식을 알아낸 이상, 마도구 열쇠를 만들기는 제게 침 뱉기보다, 아니, 숨쉬기보다 쉬운 일이에요. 기한 따위는 필요하지 않단 말씀이에요.”
제 실력을 증명하기 위해 폼은 재빨리 가져온 선물을 꺼내 들었다. 그녀의 손에 대뜸 들린 물건은 뜻밖에 단검이었다.
엠마오의 어깨가 저절로 꿈질거렸다. 은제 검집에 단단히 채워진 상태이긴 하나, 아무튼 간 검은 검이었다. 아무리 고위 마법사래도 아사야의 낯에 대고 단검을 겨눠서는 안 됐다. 그런 불상사는 엠마오의 사전에 기록될 수 없었다.
“크흠.”
공주의 늙은 유모가 부러 기침 소리를 냈다. 슬그머니 그녀의 눈치를 살피다가, 폼은 시선을 피해 버렸다. 엠마오의 눈은 금방이라도 ‘위험하게 무슨 짓이에요’ 소리를 칠 기세로 타오르고 있었다.
‘이게 열쇠라고?’
아사야의 흥미는 그러나, 칼집으로 저를 겨눈 마법사에 있지 않았다. 그녀의 관심사는 오로지, 가브리엘의 마도구를 여는 일에 있었다.
길쭉한 은제 단점을 받아, 아사야는 검의 손잡이를 움켜쥐고 당겨 보았다. 검집에서 뽑아내면 어딘가 다를까 싶어서였다. 그러자 날렵하게 다듬어진 검날에 그녀 자신의 얼굴이 비쳤다.
세련된 디자인의 예쁜 물건이란 점을 제하면 ‘마도구의 열쇠’란 것은 여느 단검과 다를 바 없어 보였다.
“정말 이걸로 마도구를 해체할 수 있어요?”
아사야가 물었고,
“네.”
폼이 즉답했다.
“검날을 찔러 넣기만 하면 마도구는 아주 쉽게 열릴 거예요. 그 물건을 단단히 지키는 건 외부적인 재질이 아니라, 그 속에 걸린 결박마법이니까요.”
아사야의 안색이 환해졌다.
임신 소식을 알린 이후 숱한 선물을 받은 그녀였다. 온 대륙의 귀하다는 보석이며 드레스와 구두는 물론이며, 왕성 복도에 그녀만을 위한 소파 자리가 만들어질 지경이었다.
그러나 오늘 폼의 선물과 비교하자면 그 모든 것들은 사라져도 좋았다. 블란테가 안겨 준 정령새조차 마도구 열쇠를 이길 순 없었다. 같은 새 열 마리를 받는다 해도 아사야는 이처럼 기쁠 수 없을 터였다.
“이제…… 줄 수 있는 거죠, 가브리엘에게…… 자유를.”
아사야가 속삭였다. 벅찬 기쁨을 확인받고자 하는 질문에, 폼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도구를 해체하기만 한다면, 그 속에 든 마석을 개방하는 건 쉬운 일이에요.”
천천히, 폼은 공주를 따라 짓던 미소를 지웠다. 그리고 말했다.
“하지만 공주님, 마석을 개방하는 일은 반드시 저에게 맡겨 주셔야 해요. 함부로 균열을 냈다가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누구도 모르니까요.”
뒷말은 저를 달래려는 거짓임을 아사야는 알았다. 마석을 함부로 파괴했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날지 누구보다 잘 아는 폼이었다. 결연한 기색마저 묻은 얼굴로 폼은 아사야 세일산을 걱정하고 있었다. 영웅 베데르처럼, 그의 딸이 드래곤의 마력에 휩싸여 생명력을 잃어버릴까 그것을 걱정하는 것이었다.
“걱정하지 말아요, 폼.”
은제 단검을 두 손으로 감싸 쥔 채, 아사야는 미소 지었다.
“난 아버지가 아닌걸…….”
그리고 중얼거렸다. 자조적인 겸손과 베데르를 향한 그리움이 함께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
폼은 그런 아사야의 속삭임에 고개를 끄덕일 수도, 무어라 대꾸할 수도 없었다. 영웅 베데르도 공주 아사야도 아닌, 두 사람을 모두 모신 마법사인 제 눈으로 보기에 그들 부녀는 마치 동일인물처럼 느껴지는 탓이었다.
아사야를 둘러싼 마나가 날로 견고하게 그녀를 품고 있었다. 이제 아사야를 바라볼 적에 폼은 그녀의 아름다운 외모가 아닌, 온화하기 짝이 없는 강인한 마나에 감탄했다. 폼의 눈을 통하여 본 아사야 세일산은 몹시도 오묘해서, 그 어떤 화가조차 그려 내지 못할 모습이었다.
어떤 여자들은 임신을 하고 생명을 품음으로써 제가 지닌 불씨를 잃고는 했다. 배 속 태아에게 가진 마나를 나무 진액처럼 흘려보내 제 힘을 잃어버리는 식이었다. 그러나 아사야와 같이, 다른 어떤 여자들은 제 몸에 품은 생명에 힘입어 더욱 강해졌다.
그 강함이란 물질적인 완력도 아니요, 마법적인 능력도 합리적인 지능도 아니었다. 그녀 이전에는 세상에 없던 생명을 창조하는 과정에서, 그 힘은 새로운 마나로 분출되어 갑주처럼 육신을 감쌌다.
아사야의 등에서부터 어깨를 거쳐 아랫배를 휘감은 마나를, 폼 에드레이조차 지수 따위로 수치화할 수 없었다. 배 안으로 밀려드는 마나를 느끼기라도 하는 것처럼 아사야가 팔을 내려 그 결 사이로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두툼한 드레스로 덮은 배 위에 놓인 두 손을 폼은 멍하니 바라보았다.
마치 아사야의 마나에 형체가 있어, 그 존재와 손깍지를 낀 듯한 모습이었다.
그녀 이전에 폼 에드레이는, 갑주처럼 마나로 몸을 감싼 이를 단 한 명 만난 적이 있었다. 폼의 성씨가 ‘마녀’이고 신분이 천출 고아이던 시절 베데르 아졸이 그랬었다.
불가능한 일임을 알면서도 폼은, 베데르의 영혼이 제 딸을 껴안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럴 리 없지.’
망상에서 애써 벗어나자 이제는 아사야 세일산이라는 여인 자체가 영웅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
그 순간 폼은 제 선택을 난생처음 후회했다. 아사야의 부름에 응답하여 왕성에 온 것에 대한 후회였다. 두 번 다시는 영웅을 사랑하지 않겠노라 다짐하고 마음 안에 단단한 댐을 세웠건만, 아사야 세일산은 그녀의 벽을 손가락으로 무너뜨리는 사람이었다.
“아무도 고마워하지 않아요…….”
평온한 침묵을 부수며 폼이 속삭였다. 이 방을 둘러싼 온화한 공기가, 부드러운 차의 향기와 아사야의 눈빛이, 그녀 앞에 본디 제 것이었던 것처럼 놓인 검의 존재가 폼의 이성을 마비시키기라도 한 것 같았다.
“모두가 잊어버렸어요, 베데르 경께서 이 땅을 구하셨단 것을요…….”
말끝을 흐리며 폼은 살짝 울먹거렸다.
마법사가 저를 보며 무얼 느꼈는지 알지 못해 아사야는 놀랐지만, 그뿐이었다. 제 마법사가 언제나 죽은 영웅을 그리워함을 모르는 아사야가 아니었다.
이따금 평소보다 일찍 베데르 성을 찾을 때면, 폼은 복도 밖까지 늘어뜨린 서류와 책과 마법진 위에 쓰러져 죽은 사람처럼 잠들어 있곤 했다. 아사야가 이름을 불러 깨우려 하면,
“오셨어요, 베데르 경…….”
틀린 이름으로 공주를 부르곤 그 사실을 눈치채지도 못했었다.
그런 폼을, 아사야는 미워하지 않았다. 한 방향으로 누구도 따라잡지 못할 천재인 나머지 다른 갈래의 일들에 둔하고 무지한 마법사였다. 그녀가 제 아버지에게 어떤 순정을 품건, 그 마음까지는 제가 참견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됐다. 이따금은, 아사야는 그 마음이 고마웠다.
폼의 말이 맞았다. 세간은 영웅 베데르의 희생을 잊었다. 끔찍했던 전쟁의 참사를 기억하고 희생된 군인들을 기리는 추모 의식이 매년 왕성에서 열리기는 하였지만 그뿐이었다.
베데르 아졸이 40년, 어쩌면 50년도 더 남았을지 모를 여생을 내버리고 에돔의 등 위로 달려든 게 7년 전 일이었다. 잿더미가 되어 관에 누워 돌아온 것이, 멀어 봐야 7년 전 일이었다.
‘베데르의 딸’로서 아사야는 제 아버지를 잊은 이들의 두 눈을 매일매일 마주했다. 평화의 시대는 먹구름이 갠 마른 날이라, 한때는 경외감과 위로, 존경 어린 눈길을 보내오던 이들은 지나간 빗물처럼 사라지고 없었다. 일상을 살기 바쁜 사람들에게 전쟁이란 지나간 일에 불과했다. 수도의 몇몇 귀족들은 ‘올해도 추모 의식을 치르실 것이냐’며 ‘지겹지도 않냐’는 말을 서슴없이 내뱉었다.
7년 전과 같이 아사야를 통하여 영웅 베데르를 보고, 존경하고 경애하며 그를 그리워하는 이는 그녀 곁에 폼 에드레이뿐이었다.
그래서, 아사야는 폼을 좋아했다. 가끔은 폼이 영원히 베데르 성에서 살았으면 싶었다. 평생 제 아버지를 그리워하고 아껴 주었으면, 그가 얻은 것과 잃은 것을 기억해 주었으면 바랄 때도 있었다. 아사야에게 폼은 제 실의에 공감해 줄 동지였다.
그리고 폼에게 있어 아사야는,
“그런 말은 부디 넣어 둬, 폼.”
그녀의 연약한 면을 이해하고 만져 줄 주인이었다.
“누구의 고마움을 받기 위해 그러신 게 아니야.”
베데르의 딸이 고개를 내저었다. 미소 짓는 두 뺨에 옅은 홍조를 띠운 채였다.
“응당 그래야 하기에 그러셨을 뿐이야. 어릴 적엔 나도 아버지의 선택을 원망했었지만 이젠 그러지 않기로 했어. 이제는…… 이해했어. 아버지께는 다른 선택권이 없었다는 걸.”
폼은 입을 꾹 다물었다. 말라빠진 아래턱에 호두 같은 뼈가 도드라졌다. 이 이상은, 베데르의 이름을 입에 올리기가 어려웠다. 한마디라도 더 그에 대한 말을 들었다가는 울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대신에 폼은 나중 일을 매듭짓고자 했다.
“꼭이에요, 공주님. 마도구를 개방하시거든…… 꼭 마석을 제게 가져오셔야 해요.”
마법사의 고집스러운 요청에 아사야가 웃음을 터뜨렸다.
“알았어, 알았어. 좀 전에도 말했잖아.”
“세 번은 말씀드리지 않을게요. 반드시 저에게 가져오시겠다고, 저와 약조해 주신다면요.”
“그래, 약조해.”
밝게 웃으며 아사야가 손을 뻗었다. 공주의 여린 손이 제 손등을 만지는데, 폼은 그것을 느낄 수가 없었다. 흉이 진 손과 팔일랑 두꺼운 가죽 장갑으로 가려 놓은 탓이었다.
목소리를 가다듬은 뒤, 폼은 두 번째 선물을 내밀었다.
“그리고, 이건…… 제가 드리는 것은 아니고, 전해 달라 부탁받은 선물이에요.”
테이블 위로 미끄러지듯 다가와 제 앞에 놓인 선물을, 아사야는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선물’이란 물건은 포장되어 있지 않았으며, 그 외관은 구운 과자를 담던 상자였다.
“이게 뭐야?”
아사야가 물었다.
“공주님 외에 저에게 심부름을 시킬 인물이, 또 누가 있겠어요?”
폼은 어깨만 으쓱거렸다. 아사야 외에 그녀에게 심부름을 시킬 ‘인물’은, 왕성 안에 없었다. 그럴 만한 드래곤이 하나 있을 뿐이었다.
아사야는 작은 상자를 제 무릎에 올려놓았다. 날개 달린 개가 그려진 종이 상자에서는 아직도 쿠키의 버터 향기가 났다. 상자의 뚜껑을 열자 그러나, 속에 든 것은 쿠키가 아니었다. 쿠키보다 단단하고 무거우면서 크기는 훨씬 작은, 귀걸이 한 쪽이었다.
“…….”
가만히, 아사야는 눈앞의 풍경을 감상했다. 풍성한 제 드레스에 올려진 쿠키 상자, 그 속에 놓인 녹색 귀걸이를, 시선으로 그리며 마음 안에 새겼다. 그린 사파이어를 중앙에 박아 넣고, 물결무늬로 세공한 금테를 두른 귀걸이였다. 지난해의 말일, 아사야의 귓불을 죄던 무거운 귀걸이였다. 검은 용의 목을 껴안고 망루 위로 날아오를 때, 바람을 견디지 못하고 빠져나간 귀걸이였다.
‘이걸…… 어떻게 찾았을까.’
고개를 숙인 채 아사야는 두 눈을 감았다. 그날, 탄식하듯 흘린 저의 울음소리를 가브리엘이 들었던 게 틀림없었다. 저는 귀걸이를 잃어버렸단 사실조차 잊었는데 가브리엘은 아닌 모양이었다. 그 때문에 제가 속상하고 슬펐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작은 귀걸이 한 짝을 찾는 가브리엘의 모습을, 아사야는 상상했다. 눈비에 젖은 망루와 성벽 곳곳을 살피고, 유리정원의 천장과 풀잎, 높이 솟은 나무 근처를 두리번거리는 그의 모습이 눈앞에 선했다.
가브리엘의 애정은 언제나 이상했다. 그것은 아사야를 웃음 짓게 만들었고 동시에 눈물 적시게 만들었다.
천천히 아사야는 상자 안을 마저 살폈다. 사파이어 귀걸이 아래에는 반으로 접힌 쪽지가 놓여 있었다.
반듯하게 접힌 쪽지를 쓰다듬는 아사야를, 폼이 조심스럽게 살폈다. 공주님의 시간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마법사가 할 일은 하나였다. 그녀는 최대한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응접실을 떠났다.
폼 에드레이에게는 가족도 하수인도, 그녀의 수발을 들거나 짐을 옮겨 주는 하인 하나 없음에도,
“에드레이 남작님!”
누군가 그녀의 뒤를 쫓았다.
헐떡거리며 달려오는 이의 정체는 다름 아닌, 아사야의 늙은 유모였다. 엠마오의 다급한 외침에 폼이 발을 멈춰 세웠다. 그러자 엠마오는 보는 이가 두려울 정도로 빠른 속도로 다가왔다.
목까지 붉어진 채 헐레벌떡 제 앞에 멈추는 그녀를, 폼은 망연하게 바라보았다.
“호, 혹시, 좀 전에…… 공주님께 단검을 겨눠서 화가 나신 거라면…….”
그것은 저의 실수였으니 미안하다고 사과하고자, 폼이 입을 열었다. 자신이 ‘에드레이 남작’임을 쉽게 잊어버리는 그녀였다.
그런 마법사의 두 손을 엠마오가 덥석 움켜쥐었다. 꼴이 우스워지도록 헐레벌떡 폼을 쫓아온 이유는 그녀에게 화를 내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이렇게 간청드릴게요.”
오히려 엠마오는 그녀 앞에 무릎을 꿇었다.
“네?”
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오랜 시간 공작부인을, 그리고 아사야를 돌보며 엠마오에겐 그들 모녀가 제 자존심이었다. 삼십 년 전에는 엘라 나자렛을 지키기 위해서 그녀에겐 못 할 일이 없었었다. 나중에는 엘라 아졸을 지키기 위해서 못 할 일이 없었고, 그 뒤에는 아사야 아졸을, 오늘은 아사야 세일산을 지키기 위해, 엠마오는 못 할 짓이 없었다.
필요하다면, 젊은 마법사 앞에 초라하고 약해 보이는 늙은 얼굴을 들이밀며 애원이라도 할 수 있었다.
“우리 아가씨를 좀 도와주세요. 아가씨 비밀을 지켜 주시고, 아가씨의 아기도, 아가씨의 몸도 부디 지켜 주세요.”
폼은 그런 엠마오의 애원이 직격으로 먹혀드는 사람이었다. 놀란 마법사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을 엠마오는 얼른 알아차렸다. 늙은 유모는 폼 에드레이의 손을 제 두 손으로 꽉 쥐고 매달렸다.
“우리 아가씨는 어머니를 빼닮았어요, 가을이면 감기에 걸리고 잠버릇으로 이불을 밀어내고, 강아지와 새를 좋아하고 발바닥 살이 여린 것까지 똑같아요.”
엠마오가 말했다. 벌써 준비해 온 문장인 양 속사포였다.
“아기를 가지고서 먹고 싶다며 찾는 음식까지 똑같아요. 공작부인께서도 쿠키와 꿀을 넣은 우유를 드시고 싶어 하셨는데…… 이새의 쿠키만 찾으셨는데.”
숨이 벅차, 엠마오의 말이 일시 끊겼다. 유모가 헐떡거리는 동안 폼은 의아한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봤다. 도대체 공주님의 유모가 왜 제게 무릎을 꿇는지 그 이유를 폼은 알 수 없었다.
마법사의 의구심을,
“부인께서는 아가씨를 낳다가 돌아가셨어요.”
엠마오가 풀어냈다.
“……세간에는 독감에 걸려 죽었다고 알렸지만 거짓말이에요. 공작부인께서는…… 아사야 아가씨를 낳다가 돌아가셨어요. 우리 아가씨는…… 공작부인보다 훨씬 약한 분이세요. 저는 아가씨께서 잘못되실까 봐…….”
놀란 입을 빠끔거릴 뿐 폼은 무어라 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녀는 물론이며 마법사의 탑에서 지낼 적에 아졸가의 기사들조차, 공작부인은 아사야를 출산한 다음 달에 독감을 앓다가 죽은 줄로 알고 있었다.
공작부인의 사망 사유를 감춘 이유야 뻔했다. 제 어머니를 죽이고 태어났다는 꼬리표를 제 딸에게 붙일 베데르가 아니었다. 불운하게 태어난 여자아이는 시집을 갈 때에도 천대받기 마련이었다. 제 딸이 그런 대접을 받게 두느니 베데르 아졸은, 아내의 장례를 한 달이고 두 달이고 미룰 남자였다.
“이렇게…… 부탁드릴게요.”
얼어붙은 폼의 손을, 엠마오가 다시 한 번 붙들었다.
“모시는 아가씨를 두 번 잃을 순 없어요. 우리 아가씨…… 우리 아가씨 좀 지켜 주세요.”
그 악력이 어찌나 강한지 에돔의 마력을 품은 손으로도 떨칠 수 없을 정도였다.
“엠마오. 그 부탁은 못 들은 걸로 하겠어요.”
폼이 대꾸했다. 두 팔을 어렵사리 뻗어, 그녀가 엠마오의 팔뚝을 쥐고 일으켰다.
“……벌써 오래전에, 아사야 아가씨의 평화와 안전을 부탁받은 바 있어요. 같은 부탁을, 얌체처럼 두 번 받을 순 없는 노릇이지요.”
벌겋게 달아올랐던 엠마오의 안색이 그제야 차분해졌다. 가느다란 숨을 코로 뱉으며, 엠마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치마 앞이 죄 구겨진 채였다.
“염려하시는 만일의 사태가 일어나더라도…… 걱정하지 마세요.”
치마의 구김을 폼이 직접 펼쳐 주었다. 그리고 덧붙였다.
“이렇게 든든한 유모가 있으니 공주님께선 안전하실 거예요.”
그제야 엠마오의 얼굴에 편안한 미소가 떠올랐다. 마음 깊이 안도하며 그녀는 ‘마법사님만 믿겠다’며 폼에게 큰 부담을 안겨 주었으며,
“두 번 다신 우리 아가씨께 무기를 겨누지 마세요.”
흉흉한 경고 역시 잊지 않고 남겨 주었다.
엠마오의 배웅을 받아 베데르 성으로 돌아온 뒤, 폼은 유리 정원의 그네에 몸을 앉혔다. 가져간 물건들은 전부 전해 주어 두 팔이 가벼웠다. 그러나 오늘 본 것과 들은 것들로 인해 그녀의 마음 안은 나설 때보다 무거워진 상태였다.
대륙 안에 영웅의 이름은 많았지만 그 누구도 베데르 아졸과 같이 기록된 바 없었다. 베데르 아졸과 같이 기록되길 원할 이 역시 없었다. 끔찍한 불길에 휩싸여 재가 되길 소망하는 이가 어디 있겠느냔 말이었다. 세상을 전혀 모르는, 아주 철부지 소년들이나 그런 꿈을 꿀 것이었다.
그러나 베데르 아졸의 딸은 그를 이해하며 그의 결정이 불가피한 것이라 단언했다.
‘응당 그래야 하기에 그리 했다고…….’
그날의, 지옥이 가깝다고 생각될 정도로 후덥지근하던 공기, 녹아내린 쇠가 흐르다 말고 굳어 버린 망가진 성벽, 흉곽을 죄는 지저분한 갑주와 병사들의 살이 타는 냄새가 진동하던 전쟁터에 아사야 아졸이 서 있었더라면, 그녀 역시 제 아버지와 같은 결정을 내렸을 터였다.
베데르 아졸은 죽기 전까지 제 딸을 걱정하며 그녀의 행복과 평안을 바랐지만 그가 물려준 성정이 그렇지 못했다. 아사야 아졸은 제 아버지와 두렵도록 닮은 존재였다.
베데르 아졸은 큰일을 앞에 두고 저를 걱정하는 측근에게 어떤 계획도 알려 주지 않았었다. 그 점마저 아사야는 그와 똑 닮았다.
그러나 베데르 아졸의 경우, 그 자신의 희생을 염두에 두어 그리했었다. 그러니 오늘 아사야의 경우와는 달랐다. 그녀는 제 연인에게 힘을 돌려주고 이 왕성을 떠나 먼 땅 나젤탄에서 행복한 삶을 찾을 것이었으므로.
그러니 아사야의 경우는 제 아버지와 달랐고, 달라야만 했다.
‘공주님,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시는 거예요?’
사람의 마음을 읽어 내는 재주가 없음에, 폼은 처음으로 스스로를 무능한 마법사라 느꼈다.
자조적인 시간은 그러나 길지 않았다. 드래곤의 발소리가 터벅거리며 성문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공주께서 받은 선물을 좋아하더냐는 질문 역시 폼에게로 닥쳐오고 있었다.
“아주, 아주 좋아하셨으니 걱정 마세요!”
가브리엘이 목소리를 내기도 전에 대답하며, 폼은 그네에서 몸을 일으켰다.
.*. *. *. *. *. *.
높다랗게 선 벽 앞에, 공주의 구두가 멈췄다. 아치형 천장을 받치는 폭넓은 기둥도 그녀의 풍성한 드레스를 전부 가리진 못했다. 턱 끝을 들고 허리를 곧게 편 채 청동 부조와 금박을 입힌 벽화 앞에 아사야 세일산이 섰다. 그녀의 뒷모습을 시녀들이 살폈다.
공주님께서 금방이라도 신화 속 장면으로 흡수될 것 같다고, 사라가 소곤거렸다. 유라는 슬그머니 사라에게로 몸을 기울이고는,
“쉿. 조용히 해.”
더 작게 속삭였다. 그러면서도 사라의 말에 동의했다.
아사야의, 검은 꽃봉오리처럼 둥그렇게 틀어 올린 머리칼 위에는 태양과 별과 달이 반짝였고 가느다란 팔 언저리에는 물과 땅을 묘사하는 보석들이 즐비했다. 멈춰 선 채 움직이지 않는 공주님 역시 반짝이는 보석들을 감상 중일 것이라고, 유라는 추측했다.
그러나 틀렸다. 아사야의 시선은 오롯이, 빛나는 벽화 속에 청동 조각으로 새겨진 죄인들과 그 중심의 콘클라베에 있었다.
가벼운 손짓으로 아사야는 시녀들을 세 발짝 뒤로 물렸다. 사라는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피크닉 가자고 하셨으면서…….’
공주님의 말을 철석같이 믿고 바구니와 담요까지 챙겨 온 그녀였다. 공주님께서 직접 두 팔에 여러 권의 책을 들고 계시기에, 볕 아래서 독서하길 원하시나 보다 생각했었다.
반면 유라의 경우 차분했다. 애초에 임산부인 공주님께서 해가 짧고 공기가 찬 날 피크닉을 떠날 리가 없었다.
‘여기에 온 것을 아무도 모르셨으면 하셨나 봐.’
아랫입술을 오리처럼 내민 사라의 팔뚝을 잡고, 유라는 서너 걸음 뒤로 물러섰다.
시녀들의 그림자가 제 발치에서 떨어지자, 아사야가 입을 열었다.
“네 자식의 행방을 알려 줄 테니, 내게 문을 열어 주어.”
유라나 사라에겐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였다. 그녀가 왼 주문에 반응할 이는 하나뿐이었다. 청동을 깎아 묘사한 밧줄에 목이 죈, 교형 죄인의 반조였다.
‘철컹’, 둔한 소리를 내며 반조가 고개를 앞으로 내밀었다. 그러자 벽인 척 위장하고 있던 청동문의 이음매가 드러났다.
주문에 복종하며 움직이는 콘클라베였다. 이제 아사야가 할 일이라고는 그의 머리를 쥐고 비트는 것뿐이었다. 그러면 금고 문이 열릴 것이었고 가브리엘의 힘을 삼킨 마도구가 눈앞에 드러날 것이었다.
그러나 아사야는 콘클라베의 머리를 쥐지도, 비틀지도 않았다. 그녀의 왼손은 책을 안아 든 채, 오른손은 제 부른 배를 다정히 감싼 채 움직이지 않았다. 차분히, 그녀는 콘클라베의 두 눈이 저를 바라보길 기다렸다.
마침내 콘클라베의 멍한 눈이 아사야를 향했다. 황동으로 빚어진 반조는 표정이 없었으나 아사야는 그 속에 갇힌 영혼이 제 모습을 살핌을 느낄 수 있었다. 외관으로 살필 적에 아사야 세일산이라는 여자는,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임신한 배를 내민 어린 공주에 지나지 않을 터였다.
콘클라베는 그런 공주님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죄인의 얼굴은 거칠고 못난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었으며 그의 목은, 기나긴 세월을 거쳐 수없이 꺾인 끝에 색이 바랬다.
어여쁜 공주님과 자물쇠에 갇힌 죄인이 서로를 마주 봤다. 누군가 보았더라면, 서로 대척점에 선 존재라고 그들을 평가했을 터였다.
아사야가 입을 열었다.
“문헌을 찾아 조사해 보니 네 아내는 세 아이를 낳았더구나.”
조곤조곤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그에, 콘클라베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끔찍하리만치 긴 세월 동안 수십의 주인을 모신 그였다. ‘그가 그들을 모셨다’기보단 ‘그들이 그를 거쳐 갔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이었다. 그를 소유했던 주인 중 누구 하나도, ‘네 자식의 행방을 알려 주겠다’ 주문을 욀 뿐이지 그 말을 책임진 일 없었다. 그들은 콘클라베 속에 갇힌 죄인 따위에겐 관심 한 올 주지 않았다. 콘클라베 너머에 보관된 금은보화의 값만을 따질 뿐이었다.
콘클라베가 입술을 벌렸다. 내 아이들이 어디로 갔으며 어떤 삶을 살았느냐고, 살인자의 자식이라고 저처럼 죽임당하진 않았느냐고, 부디 알려 달라 외치고자 했다. 그러나 꺽꺽대는 신음만이 새어 나올 뿐 그에겐 목소리가 없었다. 빠끔거리는 조각의 입 속에는 이와 혀와 목구멍 대신 꽉 막힌 황동만이 존재했다.
아사야의 노란 눈이 가만히, 절박함에 구겨진 그의 낯을 내려다보았다.
“세 아이 중 둘은 인어로 태어났어. 당신을 콘클라베로 만든 이후에 인어 사냥은 전면 금지되어 왕족만이 할 수 있었다더군. 왕족이 잡아들인 마물은 문서상에 기록하는 게 방침이라 찾아보았는데, 그들 중 어린 인어는 단 하나도 없었어.”
그제야 콘클라베는 공주의 품에 들린 책의 용도를 알았다. 두 권의 책과 닳은 종이들은 전부, 그를 위하여 찾아온 ‘증거’였다. 아사야 세일산은 수백 년의 세월을 견딘 콘클라베가 처음 만난 사람이었다. 그의 아이들이 어디로 흘러가 어떻게 살았는지를, 자신이 왼 주문과 같이 알려 주고자 하는 이는 아사야가 처음이었다.
아사야는 책장 속에 끼워 둔 종이를 펼쳐 콘클라베의 황동 눈앞에 내밀었다. 그녀의 말이 맞았다. 인어의 종류와 나이, 마릿수 따위가 적힌 닳아빠진 종이 위에, 어린 인어의 기록은 없었다.
“그러니 너의 두 아이는 땅을 벗어나 먼 바다로 떠났을 거야.”
황동 눈이 오래된 기록을 훑어 내렸다. 그리움을 지나 집착마저 어린 눈길이었다. 닳다 못해 회색이 된 종이를 노려보던 시선이 아사야의 얼굴을 두 번째 살폈다. 전과 달리 그의 눈동자는 빠르게 움직였으며 입술은 벌어진 채 끝없이 빠끔거렸다.
“세 아이 중 하나는 사람으로 태어나 두 다리가 있었지. 그 아이는 마물에 관심 많은 귀족이 데려갔다나 봐.”
아사야가 가져온 책을 펼쳤다. 속에 끼워 둔 메모와 책갈피가 어찌나 많은지, 표지가 제대로 덮이지도 않을 지경이었다.
“백작가의 방계였지만, 그래도 엄연히 귀족인지라 그가 천민을 입양한 일은 당시에는 충격적인 사건이었지. 그래서 호외까지 돌렸고…… 덕분에 조사하기가 수월했어.”
상황의 예외성을 기록의 형태가 보여 주고 있었다. 당시 귀족 사회에서 입양이란 아들이 없는 집안에서 친척의 자식을 데려오는 경우가 전부였다. 때문에 문서에 남길 적에, 입양된 자식의 생부와 양부의 성씨가 같았다.
마땅히 기록할 생부의 집안이 없는 경우는 그해를 통틀어 단 한 건뿐이었다.
아사야의 검지 끝이 그 공란을 짚었다. 콘클라베는 소리 없이 그 자리를 바라봤다. 그의 이름이 실렸어야 하는 자리였다.
빈자리 옆에 쓰인 이름을 본 뒤에야, 그는 제 자식이 딸이었음을 알았다.
“11년 뒤에 그 집안에서 딸을 왕가에 시집보냈는데, 상대는 왕의 조카였어. 권력 싸움에서 벗어나 그는 제 영지에서 꽤 행복하게 살았다나 봐. 엄청난 애처가였고 아내는 물과 수영을 좋아했대. 부지 내에 마법사를 들여 인공 호수를 건설한 기록이 있어.”
아사야가 두 번째 책을 들고 뒤적였다. 콘클라베가 입을 벌린 채 제 고개를 있는 힘껏 길게 뻗었다.
“내 마법사가 가져온 서적에 그 마법진이 남아 있었어. 그 사례도 함께 실려 있고……. 자.”
붉은 잉크로 표시된 페이지를 활짝 펼치자 펜과 잉크로 그려 놓은 작은 삽화가, 닳디닳은 양피지 책의 왼편 구석에 있었다. 사각 프레임은 검은 숲으로 그려졌고 지붕이 뾰족한 성이 보였다. 그 안에 마법진을 그리는 마법사의 대열이 개미처럼 조그맣게, 커다란 호수가 푸른 잉크로 잔잔하게 묘사되어 있었다.
“네 딸이 헤엄치던 호수야.”
아사야가 속삭였다.
“후손을 보았다거나 명예를 거머쥐었다는 기록은 없어. 병을 얻었다거나 정치에 휘말렸다는 기록 역시 없어. 그러니…… 평화로운 인생을 살았을 거야.”
콘클라베의 황동 눈동자에 검은 삽화가 비쳤다. 넋이 빠진 사람처럼 가만히, 그는 삽화 속 호수에 빠져들었다. 그는 호수에서 헤엄치는 딸의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숲의 해에 몸을 말렸을 딸의 모습은 어째서인지, 결혼을 하고 남편을 두었다는 설명에도 불구하고 네 살 아이처럼 자그마했다.
그 딸이 죽은 해를, 아사야는 알려 주지 않았다. 대륙이 갈라지고 몇몇 땅덩어리가 섬나라로 갈라지기도 전의 해묵은 기록이었다. 그 기록을 감춤으로써 아사야는 콘클라베의 머릿속에 그의 딸이 아직 살아 헤엄치도록 내버려 두었다.
몇 분이고 멈춘 채 삽화를 바라보던 콘클라베가 두 눈을 한 번 깜빡였다. 흘러나오는 눈물도 이렇다 할 미소도 없이 그는 전과 같은 얼굴이었다.
그러나 아사야는 알았다. 적어도 그의 눈에 비친 제 모습은 전과 같지 않을 것이었다. 그녀는 예쁜 공주, 왕자의 아이를 밴 아내가 아닌, 콘클라베를 여는 주문에 책임을 다한 첫 번째 주인이었다.
그런 자격으로, 아사야가 말했다.
“사흘 뒤면 나의 오빠가 지휘하는 기사단이 국경에 닿을 거야. 닷새 뒤에는 첫째 왕자 부부를 태운 마차가 그들과 마주할 테고.”
그 순간 아사야는 콘클라베에게 목소리가 없음을 다행으로 생각했다. 덕분에 그에게는 못 할 이야기가 없었다. 누구의 귀에 잘못 흘러 들어갔다간 가디엘은 물론이며 제 신변마저 위태로울 이야기조차 전하기에 두려움이 없었다.
“……그 날 오전에, 나의 남편은 폐하를 모시고 사냥에 떠날 거야.”
야베스 세일산의 계획을 알아내기란 그의 아내인 아사야 세일산조차 쉽지 않았다. 왕좌를 향한 그의 갈증이 어느 정도인지 그 감정의 크기조차, 해의 말일 연회에서 제대로 맞닥뜨린 아사야였다.
때문에 그녀는 다짐했다. 야베스 세일산의 발자국을 허둥지둥 쫓는 일은 그만두겠노라는 다짐으로 첫 해를 보았었다.
야베스 세일산의 기분을 추측하며 그의 비위를 맞춰 온 나날들에 어떠한 의미도 없느냐면 그렇지 않았다. 덕분에 아사야는 야베스라는 남자에 대하여 속속들이 알았다. 그의 잠자리 습관이며 걸음걸이, 식성과 입버릇을 알았으며, 지난 한 해를 지나며 단 한 번도 사렙탄의 사냥에 함께한 적 없단 것을 알았고, 닷새 후, 시일에 맞춰 사냥에 나설 적에 그가 노리는 것이 새나 토끼가 아님을 알았다.
본도 왕자 부부가 나젤탄으로 떠난 이후 사렙탄 세일산은 보다 자주 사냥에 나섰다. 비아탄 아멕과 함께 숲으로 떠나는 그를 배웅할 때마다 야베스는 심기가 상한 채였다.
‘동생이 죽은 자리를 또 내려다보러 가시는군.’
그렇게 빈정거리기도 부지기수였다.
그러던 그가 언제부터인가, 웃는 얼굴로 사렙탄의 사냥을 배웅하기 시작했다. 인내와 연기로 이루어진 몇 차례의 배웅은 계획을 완성하기 위한 초석에 지나지 않았다. ‘동생이 죽은 자리를 또 내려다보러’ 떠나는 아버지를 향해, 그는 어떤 선망이라도 품은 아들처럼 미소 지었다.
그럴 적에 그가 엿본 것은, 사렙탄의 오래된 슬픔이나 미련이 아닐 것이었다. 그가 엿본 것은, 제 아버지를 몰아낼 기회일 것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야베스 세일산이 아버지를 쫓아 사냥 약속을 잡을 리가 없었다. 본도 부부를 태운 마차가 공작가의 기사단을 맞닥뜨릴 날에 맞추어서라면, 더더욱 그랬다.
닷새 후 오후가 되면 국왕 없이 왕좌가 빌 것이었다. 주에 한 번씩 찾던 절벽으로 사렙탄은 추락할 것이었다. 야베스 세일산은 그것을 사고라 진술하리라. 제 말에 설득력이 없다 싶으면, 아버지께서 자살하셨다고 말하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왕위를 계승할 아들까지 정하신 뒤엔 더욱이 슬픔에 좀먹힌 모습이셨다. 죽은 동생을 그리워하며 주에 한 번 절벽을 찾으시던 아버지다. 그 슬픔을 견디지 못해 투신하셨다.’
예정된 왕위계승자인 본도 왕자가 도착하기 전까지 그는 섭정의 자격으로 왕좌에 앉을 터였다. 그러나 본도 세일산을 태운 마차는 수도로 돌아올 수 없었다. 그의 부고를 알리는 호외가 더 빠를 게 분명했다.
본도 세일산의 죽음을 어떻게 기록하느냐, 그 결정권이 야베스 세일산의 손에 들어갈 것이었다. 그는 가디엘 아졸과 기사단 전체를 반역자로 치부하며 영원히 정계에서 몰아낼 수도, 모실 왕을 직접 선택한 킹 메이커라 선언하며 곁에 둘 수도 있었다.
그렇게만 된다면, 야베스 세일산은 모든 것을 손에 쥘 것이었다. 아사야 세일산의 완전한 복종에 이르기까지, 그가 원하는 모든 것을.
그의 완벽한 그림 속에서 가디엘 아졸은 아사야를 협박하기 위한 볼모였다. 제 누이의 안전을 약속받기 위해 가디엘은 일평생 야베스 세일산의 주먹에 잡힌 채 휘둘릴 것이었다.
‘그렇게 뻔한 앞을…… 가디가 내다보지 못했을 리 없어.’
아사야는 입술을 짓씹었다.
남매간에 해묵은 감정이 눈을 흐리게 만들었대도, 가디엘은 야베스의 꼭두각시가 될 지경으로 바보가 아니었다. 제 아버지의 이름이 지닌 힘과 그것이 주는 압박감을 알고 ‘베데르의 아들’이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명확히 분간해 온 공작이었다.
그런 그가 제 피와 살이나 다름없는 기사단을 끌고 출정한 이유는 분명했다. 아사야 세일산이 이미, 가디엘 아졸을 협박하는 볼모이기 때문이었다.
눈을 감고 아사야는 잠시간 몸을 떨었다. 콘클라베의 동공 없는 눈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뿐이었다.
그에게 입이 없어 저를 재촉할 수 없음에 아사야는 고마움마저 느꼈다. 당장 그녀에게는 저 자신을 정돈할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볼모가 아니야.’
그렇게 되뇌며,
‘나는 약하지 않아. 나는 볼모가 아니야. 나는 인형이 아니야, 나는 꼭두각시가 아니야.’
아사야는 마음 안의 그녀 자신을 제가 있어야 할 위치로 돌려놓았다.
마침내 아사야가 입을 열었다.
“닷새 후에, 내 남편이 왕성을 떠나자마자…… 나는 이곳을 찾을 거야.”
기회를 엿본 이는 야베스 세일산만이 아니었다. 그와 한 침대에 눕고 그의 팔에 머리를 기대며, 아사야 세일산은 저에게 올 기회만을 기다려 왔다. 그가 사렙탄 세일산과 함께 자리를 비우기를, 왕성 내 ‘사건’에 대처할 결정권자가 없는 마비 상태가 다가오기를, 가브리엘과 함께 실종되기에 가장 적절한 날이 밝기를…….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이 당신 뒤에 있어.”
속삭이며, 아사야는 콘클라베의 두 눈에 비친 제 모습을 보았다.
“내가 사랑하는 이의 모든 것이 당신 뒤에 있어. 그와 내가 빼앗긴, 그 모든 게 당신 뒤에 있어.”
공주가 말하는 ‘사랑하는 이’가 왕자가 아님을 바보라도 알 것이었다. 야베스의 이름을 말할 적에 아사야는 단 한 번도, 지금과 같이 애정에 겨워 목소리를 떨어 본 일 없었다. 절박함에 두 눈을 구겨 본 적도, 그리움에 마음이 벅찬 적도, 그와의 미래를 생각하며 설렌 적도 없었다.
“……나는 그에게 모든 힘을 돌려줄 생각이야. 그가 자유를 쥐고 달아날 수 있도록. 나약해진 채 내 곁에서 죽음을 맞이할 일 없도록.”
아사야의 마음은 처음부터 한 존재로 가득 차 있었다. 가끔은 그 무게가 너무 커 무릎이 후들거렸고 그 색이 너무 짙어 눈앞의 다른 남자는 보이지도 않았다.
그 애정이 너무 커, 아사야의 저울을 망가뜨렸다. 그녀 자신이 지닌 모든 것과 가브리엘의 행복 중 무엇이 더 중한지 비교할 때마다, 저울은 가브리엘을 향해 기운 채 꿈쩍도 않았다.
“그러자면 당신의 도움이 필요해. 당신이 나만을 주인으로 모시고, 나 이외의 누구에게도 이 문을 열어 주어선 안 돼. 반드시 그렇게 해 주어야 해. ……부탁할게.”
부푼 배를 감싸 안고서 한 걸음, 아사야는 콘클라베에게 다가섰다.
“탐무즈.”
그러고는 돌려주었다, 죄인의 신분으로 그가 오래전에 잃어버렸던 이름을. 먼 옛날, 그가 사랑했던 인어에게 처음으로 알려 주고 그녀가 처음으로 뱉은 말과 같이.
“탐무즈…….”
공주가 떠난 복도 끝에 콘클라베는 다시 홀로 남았다.
그는 오늘의 요일도, 창문 밖의 계절도, 제 존재의 이유도 모름으로써 어제와 같았다. 자식의 행방을 알고 제 이름을 돌려받았더라도 달라진 건 없었다. 허공에 뜬 먼지만이 함께할 뿐인, 그는 말 없는 자물쇠였다.
동공 없는 눈을 들어 탐무즈는 눈앞에 뜬 먼지들을 바라보았다. 창가로 스민 볕을 받은 먼지들이, 호수에 비친 별처럼 춤추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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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이의 이름이 나와 같을 순 없어, 가브리엘.”
아사야가 말했다. 손에는 폼 에드레이가 전하고 가브리엘이 적은 쪽지를 든 채였다. 쪽지에는 두 단어가 쓰여 있었고, 첫 번째는 ‘아사야’였다.
아이의 이름을 지어 달라는 그녀의 부탁에, 가브리엘이 밤을 새우며 고민한 결과였다.
“내 이름도 아사야고 내 아이의 이름도 아사야가 된다면, 네가 저 멀리서 ‘아사야’ 하고 불렀을 때 그 상황이 얼마나 웃기겠어?”
아사야가 물었다.
가브리엘은 하마터면 그 질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대꾸할 뻔했다. 그러나 아사야의 살짝 내려간 눈썹과 둥그렇게 웅크린 입술이, 질문의 의도가 신문에 있지 않고 그저 가벼운 핀잔임을 알려 주고 있었다.
때문에 가브리엘은 ‘좀 헷갈리긴 하겠지만 그렇게 웃긴 일은 아닌 것 같다’는 둔한 답을 않아도 됐다. 대신에 그는 아기의 이름을 ‘아사야’로 지은 것에 대해 변명했다.
“내가 아는 이름 중 가장 예쁜 이름이야.”
그러자 아사야는 코를 찡그리며 웃었다. 말수 적은 가브리엘에게는 신기한 마법이 있었다. 그가 전하는 몇 안 되는 말이 언제나, 아사야의 하루에 있어 가장 듣기 좋은 말로 남는 식이었다.
제 이름이 가장 예쁘다는 이유로 제 아이의 이름도 ‘아사야’로 짓겠다는 가브리엘이, 아사야의 심장을 마구잡이로 간질여 놓았다.
“정말로 듣기 좋은 칭찬이지만, 그렇다고 아이 이름을 아사야로 할 순 없어.”
어렵게 이성을 붙잡으며, 아사야가 말했다.
실망한 듯 어깨를 내리며 가브리엘이 돌아섰다. 유리정원의 침대에 앉는 그를 쫓으며 아사야가 덧붙였다.
“게다가, 딸인지 아들인지도 모르잖아.”
아사야는 드래곤의 옆자리에 풀썩, 전보다 아기 하나만큼 무거워진 몸을 앉혔다. 가브리엘의 눈이 습관적으로 그녀의 배와 허리, 앉은 자리를 살폈다.
“그래서.”
아사야의 등 뒤로 쿠션 하나를 받쳐 주며 가브리엘이 말했다. 뱉은 말은 ‘그래서’, 짧은 한마디가 전부였다. 그래도 아사야는 그의 말을 이해했다.
“그래, ‘그래서’ 여기 남자아이 이름도 적어 주었다, 그지? ……가브리엘.”
‘가브리엘’. 그가 적은 두 번째 이름이 그것이었다.
“가브리엘이라는 이름도 예쁜 이름이라고 생각했어?”
‘아사야’와 ‘가브리엘’이 나란히 적힌 쪽지를 내밀며 아사야가 물었다. 그러자 가브리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때면, 아사야에게 그는 강력한 자석이었다. 두 팔을 벌리고 그의 품에 달려들어, 와락 껴안지 않기 위해 아사야는 안간힘을 써야 했다.
대신에 그녀는 ‘큼큼’ 소리 내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그 이름을 지은 사람이 나라는 건 알고 있지?”
가브리엘은 대답 없이 눈썹을 찡그렸다. 가브리엘에게 있어 그의 어린 인간은 백과사전이나 다름없었다. 그녀의 말은 언제나 옳았다.
오늘처럼 작은 언쟁이 생길 때마다, 가브리엘은 아사야가 하는 맞는 말들을 소리 없이 들었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수긍하는 것뿐이었다. 동그란 배를 가진 아사야에게 가브리엘은 어떤 볼멘소리도 내지 못했다. 찡그린 눈썹으로나마 소심한 반항을 표할 따름이었다.
“아기에게 네 이름을 붙이는 것도 마찬가지로 곤란해. 내가 저 멀리서 ‘가브리엘’ 하고 부르면, 그게 널 부르는 건지 아기를 부르는 건지 어떻게 알겠어?”
엉덩이를 뒤척거리며 아사야가 물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배가 커지고, 몸이 무거워지는 탓에 편한 자세를 찾는 일은 언제나 그녀의 숙제였다.
“다르잖아.”
뜻밖에 가브리엘이 대꾸했다.
“응?”
아사야가 두 눈을 깜빡거리자,
“난 아기 아빠가 아니니까 괜찮잖아.”
가브리엘이 단언했다.
그러자 잠시간, 유리정원이 조용해졌다. 입술을 가진 두 존재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침묵하기 때문이었다.
잠잠해진 공기를 깨려는 것처럼, 나무 위의 새들이 지저귀기 시작했다.
“안 괜찮아, 가브리엘.”
아사야가 말했다. 새 소리에 묻힐 지경으로 작게 낸 음성이었다. 그녀의 목소리를 귀에 담고자 가브리엘이 상체를 가까이 기울였다.
미소가 사라진 아사야의 얼굴은 전보다 더 또렷해 보였다. 크게 뜬 눈과 작고 높은 코, 굳은 입술에서는 어째선지 슬픔마저 묻어났다.
“……이 아이랑 너랑 나랑, 셋이 영원히 함께 살 거니까. 그러니까…… 안 괜찮아, 가브리엘. 네 이름과 같아서는 안 돼. 내 이름과 같아선 안 되는 것처럼. 똑같은 문제야.”
“그래.”
가브리엘이 얼른 답했다. 그에게는 스쳐 지나가는 언쟁에서 이기는 것보다는, 아사야의 표정이 한시라도 빨리 밝아지는 게 중요하기 때문이었다.
“그래, 네 말이 옳아.”
한 번 더 덧붙여 패배를 선언하자 어린 인간의 입술 끝이 움찔거렸다. 축축해진 시선을 떨구며 침묵하기도 잠깐이었다. 천천히, 아사야의 낯에 다정한 미소가 돌아왔다.
작은 손이 다가와 제 이마를 만지는 것을 가브리엘이 가만히 받았다.
“세 번째로 예쁜 이름으로 지어 주면 어떨까? 떠오르는 이름은 없어?”
“없어.”
“……잠깐 고민하는 시늉이라도 해 주는 게 어때?”
숨결이 섞일 정도로 가까이 서로를 들여다보며, 그들은 다시 침묵했다. 이번에, 침묵은 새가 울어야 할 만큼 나쁘지 않았다. 숨결을 나누는 침묵은 오히려 아사야를 편안하게 했다. 가브리엘의 곁에 머무를 때에 선물처럼 찾아오는 침묵은 휴식이었다.
느릿느릿 손을 움직이며 아사야는 가브리엘의 이마를, 관자놀이와 눈썹 끝을, 부드러운 눈 밑 살을 만졌다. 가브리엘은 제 피부에 닿는 손금 하나하나를 느끼는 것처럼 집중한 얼굴이었다.
그의 반듯한 이마에 아사야의 둥근 이마가 닿았다. 그 움직임을 키스로 착각한 듯 가브리엘이 입술을 달싹거렸다.
“가브리엘. 나를 사랑해?”
입맞춤을 기다리는 검은 용을 알면서, 아사야는 그의 코에 제 코끝만 문질러 댔다. 그러면 가브리엘의 달아오른 숨을 더 가까이서 느낄 수 있었다. 인중에 닿는 숨결이 뜨거웠다.
“그래.”
가브리엘이 답했다. 두 눈은 아사야의 입술에, 달려들어 잡아먹기라도 할 것처럼 고정한 채였다.
그러나 그의 어린 인간은 짧은 답으로는 만족하지 못했다. 짧은 답으로는, 기다리던 키스를 건네주질 않았다. 간식을 기다리는 개처럼 가브리엘은 성급해졌다.
“사랑해, 아사야.”
흥분을 감추지 못해 헐떡거리며, 가브리엘이 속삭였다.
“사랑해.”
두어 번 더,
“사랑해…….”
같은 고백을 들은 뒤에야 아사야의 입술이 가브리엘의 아랫입술에 닿았다. 부드럽고 말랑한 감촉에 가브리엘이 입을 벌렸다. 기대에 차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는 순간, 아사야는 가브리엘을 배신했다. 그녀는 두 손으로 가브리엘을 밀었다.
이마를 찡그린 채 가브리엘이 다시금 달려들자 아사야는 또 한 번 그의 어깨를 쥐고, 밀었다. 화난 사람처럼 얼굴을 붉힐 뿐, 가브리엘은 그녀의 손에 쉽게 밀렸다. 아기를 가진 아사야는 가브리엘 앞에 무적이나 다름없었다. 그녀가 이기길 원한다면, 가브리엘은 패배해야만 했다.
그의 등이 침대 헤드에 닿자 어린 인간은 그의 몸 위로 올라탔다.
“아사야.”
독촉하듯 부르는 소리를 못 들은 척 아사야는 가브리엘의 허벅지에 앉았다. 기다렸다는 듯 가브리엘이 손을 뻗었다. 아사야의 여린 허리와 등이 그의 손바닥에 들어왔다.
저를 탐미하듯 쓰다듬는 그의 손등을, 아사야가 양손으로 감쌌다. 그리고 제 배 위로 옮겨 놓았다.
“가브리엘, 내가 너를 속이더라도…… 날 용서해 줄 거야?”
아사야가 물었다.
어린 인간의, 그녀보다 어린 존재로 채워진 배를 만지며 가브리엘은 두 눈을 크게 떴다. 많은 의문을 담은 보라색 눈동자에 아사야의 오묘한 표정이 담겼다.
사람들이 흔히, ‘신에 맹세코 진실만을 말하겠다’ 선언할 때 가브리엘은 그 문장 속 신이었다. 그는 거짓말을 한 적 없었고 사기와 낭설을 즐겨 본 일 없었다. 더군다나 듣는 이가 아사야라면, 그는 거짓을 말하느니 침묵할 존재였다.
때문에 아사야는 가브리엘의 닫힌 입을 바라봐야 했다. 제 침묵에 상처받을 이유가 아사야에겐 없으리라, 그는 믿었다. 아사야는 옳은 말만 하는 존재였고 그의 작은 백과사전이었으므로. 그를 속이고 그의 용서를 소망하는 일 따위는 처음부터 없어야 했다.
그러나 아사야의 빨간 혀 밑에는 이미 진실이 감춰져 있었다.
가브리엘의 손등을 힘주어 눌러, 아사야는 그가 제 부른 배를 꽉 쥐게 했다. 당황한 듯 가브리엘이 손끝을 움찔거렸다.
“하루면 어떨 것 같아?”
다시, 아사야가 물었다.
“하루만, 딱 하루만 내가 너를 속인다면, 그러면 용서해 줄 수 있어? 오늘 거짓말을 하더라도, 내일이면 사실을 전부 고백한다면…… 그럼 어떨 것 같아?”
가브리엘이 한쪽 눈썹을 들어 보였다. 달라진 가정은 그를 짧은 고민에 빠뜨렸다.
생각에 잠겨, 가브리엘은 아사야의 동그란 배를 쓰다듬었다. 그의 눈에 스무 살의 아사야 세일산도 아직 어린 인간인데, 어린 인간의 배에 그보다 더 어린 생명이 들어찬 게 신기하고 이상하게 생각됐다.
자그맣고 날씬한 몸은 그대로인데 배만 동그랗게 부푼 아사야였다. 신기하고 이상하고, 사랑스러운 아사야에게 가브리엘의 벽은 녹아 버렸다.
“그래.”
둥근 배를 내밀고 뒤뚱뒤뚱 걷는 아사야라면, 하루 정도는 그를 속여도 괜찮았다.
“나를 속여도 용서할게.”
가브리엘이 대답했고,
“정말?”
아사야의 얼굴 위에 꽃처럼 웃음이 폈다.
신난 아이처럼, 아사야가 그의 품으로 달려들었다. 배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거의 넘어지는 듯한 동작이었다. 가브리엘의 두 팔이 재빨리 그녀의 어깨를 끌어안고 제 품 안에 붙였다.
그의 커다란 몸 위에, 아사야가 모로 누웠다. 제 이마를 그의 어깨에 기댔으며 그가 제 머리에 입 맞추기를 허락했다.
“하루만……, 하루만 내게 속아 주면 돼……. 하루만 더 이렇게 있자.”
어린 인간이 속삭이는 말을, 가브리엘이 마음 안에 담았다. 이따금 아사야가 꺼낸 말들은 어려운 시 같았다. 이해하기 어려운 속삭임을 가브리엘은 마음 안에 담았다가, 아사야를 기다리는 시간 내내 곱씹으며 해석해 보곤 했었다.
“하루만 더 나를 사랑하고 참아 줘, 난 그거면 돼.”
가브리엘의 팔에 어린아이처럼 몸을 기대며, 아사야가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의 강인한 두 팔과 부드러운 손길, 가을처럼 서늘한 제 피부를 여름처럼 데워 주는 체온을 만끽했다.
“사랑해…….”
제 드래곤의 뺨을 두 손으로 감싼 채, 아사야는 약속했던 입맞춤을 건넸다.
그러자 가브리엘이 안달 난 듯 그녀의 잇새로 제 혀를 집어넣었다. 아사야의 입술이 오르골처럼 열렸고, 야트막한 신음이 노래처럼 흘러나왔다.
“으응.”
뜨거운 혀가 아사야의 입천장을 훑고, 앞니를 쓸고 윗입술을 빨았다. 애정 넘치는 키스를 받으며 아사야는 그의 뒷목을 쓰다듬어 주었다. 달아오른 연인의 콧김이 아사야의 인중을 간질였다.
아사야가 작게 웃음을 터뜨리자 가브리엘은 그 소리에 흥분한 듯했다. 그는 타는 듯한 눈동자로 어린 인간을 담다가, 이내 고개를 숙였다. 공주의 가슴에 얼굴을 묻기 위해서였다.
“가브리엘…….”
산달이 다가올수록 배와 함께 커져만 가는 아사야의 가슴을, 가브리엘은 좋아했다. 고개를 묻고 허리를 안으면 희미하게 배어 나오는 젖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보다 짙어진 아사야의 체취를 맡을 때면 그는 스스로를 신성한 것을 욕망하는 악마처럼 느꼈다.
아이처럼 제 가슴에 얼굴을 묻는 가브리엘을 위해 아사야는 드레스 스커트를 말아 쥐었다. 봉긋하게 부푼 배 위까지 옷자락을 끌어 올리자, 허락의 신호를 알고 가브리엘이 얼굴을 들었다. 그러고는 모습을 드러낸 말랑하고 여린 허벅지를 내려다봤다.
볕을 쬔 일이 없어 그저 하얗기만 한, 부드러운 피부 위에 가브리엘이 제 허벅지를 걸치듯 맞댔다. 흥분하고 발기한 몸으로 그녀의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을 적에 그는 이상하게도 슬픈 얼굴이었다.
지난해의 마지막 날까지만 해도, 그의 두꺼운 허벅다리가 그녀의 허리둘레와 비슷했었다. 세게 안으면 부러질까 두려울 지경으로 가냘프던 나신을 가브리엘은 기억했다. 그러나 이제는 달랐다. 아사야는 여전히 그의 여리고 어린 인간이나, 더는 홀몸이 아니었다. 잘록하던 배 위가 이제는 동그랗게 솟아 있었다.
“가브리엘.”
머뭇거리는 가브리엘의 뺨을 아사야의 손바닥이 감쌌다.
“내 연인은 너뿐이야.”
그러고는 그가 듣기 원하는 말을 건네주었다.
“내가 사랑하는 남자는 오직 너뿐이야, 가브리엘……. 네가 나의 용이 되어 준 것처럼 나는 너만의 어린 인간이야. 난 네 거야, 가브리엘.”
그러자 죄수처럼 구속되고 짐승처럼 속박당한 가여운 괴물이 인상을 찌푸렸다. 애정을 갈구하고 사랑을 확인받고자 안달 낸 것을, 아사야에게 죄 들키고야 만 것이었다.
“아사야.”
속상한 듯 그가 중얼거렸고,
“사랑해.”
아사야가 마주 속삭였다.
“사랑해, 가브리엘……. 대답을 들려줘.”
그러자 가브리엘이 허리를 깊이 숙였다. 아주 천한 하인처럼 그는 공주의 다리 사이에 납작하게 엎드리고는 흰 레이스가 붙은 속옷을 뜯어내듯 끌어 내렸다. 임신을 하고 배가 산처럼 부푼 와중에도 아사야를 감싼 속옷이 화려하고 뻣뻣한 것에 화가 난 눈치였다.
“가브리엘.”
아사야가 또 한 번 대답을 독촉하자,
“사랑해.”
가브리엘은 화난 소년처럼 불쑥 대꾸했다.
“사랑해, 아사야.”
그리고 공주의 가장 은밀하고 여린 부위에 얼굴을 처박았다. 발갛고 축축한 아사야의 성기에 그는 제 코와 입술을 마구잡이로 문질러 댔다. 가브리엘의 혀가 밑을 핥는 감촉에 아사야는 화들짝 놀랐다.
“가브리엘!”
그러나 그를 세게 밀어낼 수도 반항할 수도 없었다. 고개를 숙여도 부푼 배 때문에 가브리엘의 모습이 보이질 않았다. 무거운 배를 닻처럼 느끼면서 아사야가 허벅지를 오므리자 그 살결이 가브리엘의 귀에 닿았다.
“뭐, 뭐 하는 거야?”
다리를 달달 떨며 두려워하는 아사야를 위해 가브리엘이 두 손을 뻗었다. 아사야의 동그란 밑 배에 손바닥을 대고 쓰다듬으면서, 혓바닥으로는 그녀의 밑을 핥았다. 예민한 살결이 금세 붉어졌고 움찔움찔 떨려 왔다.
“아…….”
온몸에 힘이 빠지는 통에 아사야는 허리를 바로 세우지 못했다. 쿠션 더미 위에 파묻힌 채 그녀는 유리정원의 둥근 천장을 올려다봤다. 평생 상상조차 해 본 적 없던 애정을 받는 순간 정신이 멍했다.
쪽, 쪽, 입 맞추는 소리가 아사야의 귀를 간질였다. 가브리엘은 그녀의 밑에 대고 거듭 키스를 퍼부었다. 흥분한 탓에 공주가 속옷을 적시지 않게끔, 축축하게 묻어나는 액 또한 달콤한 주스라도 된다는 양 빨고 핥아 댔다.
“아, 응……, 가브리엘.”
발가락을 오므리며 아사야가 신음하자,
“사랑해.”
가브리엘이 그녀의 여린 살 위에 코끝을 문질렀다.
“사랑해, 아사야…….”
마침내 아사야는 검은 용에게 함락당했다. 공주의 몸을 감싼 화려한 드레스도 가브리엘에게는 포장지에 불과했다. 예쁘게 겉을 감싼 종이보다는 그 속에 든 사탕을 좋아하듯이, 가브리엘은 아사야의 감춰진 몸을 너무나 좋아하고 또 잘 알았다. 그녀가 모르는 모습까지도 발굴하듯 찾아내고야 마는 식이었다.
아기를 품느라 아사야는 제 몸을 제대로 가누질 못했다. 키스를 퍼붓고 애무한 것만으로도 거칠게 숨을 헐떡대기 바빴다. 귀하고도 약한 연인이라 가브리엘은 인내했다. 제 성기를 함부로 쑤셔 넣었다가는 아사야나 그녀의 배 속 아기가 다칠 게 뻔했다.
얼굴을 발갛게 붉힌 채 할딱대는 아사야의 밑에 입을 맞추며, 그는 자위만으로 사정했다. 어린 인간도 저도 기뻤으니 그것으로 관계를 맺은 셈이라고 생각했다.
“아, 가브리엘…….”
들뜬 한숨을 섞어 아사야가 속삭였다.
“너 때문에 못 살겠어.”
귀여운 투정이었다.
그 목소리에 금세 기분이 좋아져 가브리엘은 작게 웃었다. 약해 빠진 속옷도 제대로 입혀 주고 드레스 스커트 또한 능숙하게 정리해 주었다. 그러고는 아사야의 어깨에 제 얼굴을 살짝 묻었다. 무거운 체중에 혹여 배가 눌릴까 봐 한 손으로 몸을 지탱하고 가볍게 기대는 동작이었다.
가브리엘의 사소한 동작 하나하나가 아사야의 가슴을 뛰게 했다. 그럴 때면 가브리엘은 마물도 짐승도 죄수도 아니었다. 그저 사랑스럽고 귀여운 그녀의 연인이었다.
‘영원히 네 옆에 머무르고 싶어……. 우리만의 집이 있다면 좋을 텐데. 당장 그 집으로 가고 싶어. 그리고 평생토록 떠나지 않을 거야…….’
가브리엘의 머리를 끌어안고 그의 정수리에 입 맞추면서, 아사야는 두 눈을 꽉 감았다. 끓는 애정은 신음처럼 삼켰다.
그러자 흐르는 감정을 느낄 줄 아는 존재처럼 가브리엘이 고개를 들었다. 그가 놀란 듯 커진 눈으로 저를 바라보자 아사야는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고는 가브리엘의 시선에 오직 제 눈동자만 들어차게끔 이마를 맞댔다.
제 사랑을 그가 고스란히 느끼기를, 제가 감춘 사실이 드러날 때 그를 속인 거짓말을 용서해 주기를, 아사야는 소리 없이 애원했다.
‘하루만……, 하루만 지나면…… 이제 내 세상엔 오직 너뿐이야.’
기다림이 오늘처럼 힘겨운 적도 없었다. 고작 하루가 지나가기를, 내일이 오기를 기다리는 것뿐인데 아사야는 숨이 막혔다. 설렘으로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고 긴장이 되어 손금 안에 땀이 묻었다.
내일이었다. 내일이면 야베스 세일산이 사렙탄과 함께 왕성을 비울 것이었다. 본도 부부의 마차 행렬이 국경을 넘을 것이며, 가디엘의 기사단이 그들을 가로막을 것이었다.
그러나 내일이면, 생벙어리 하인에게 전달한 쪽지가 비아탄 아멕의 손에 들어갈 것이었다. 가브리엘의 마도구가 열릴 것이며, 폼의 손안에서 마석이 개방될 것이었다. 폼을 태운 적마가 국경에 닿을 때면 왕성 안에는 공주도 용도 없을 것이었다.
내일이면 아사야는 가브리엘과 함께 떠날 것이었다. 더는 비밀도, 눈물도 없을 것이었다.
.*. *. *. *. *. *.
새해의 첫날을 기준으로 여덟 번째 주는 대륙의 국경일이었다. ‘태양의 방’이라 불리는 그 주에는 비가 내리지 않고 태양이 가장 밝았다. 그 주는 제사나 기도, 약속과 계약을 하기 좋은 구간이어서, 몇몇 귀족들은 달력의 한 줄을 노란 물감으로 칠해 두기도 했다.
또한 ‘태양의 방’은, 본도 세일산의 계보를 올리기에 가장 적시라며 신관들이 입을 모아 추천한 시기였었다. 그러나 사렙탄 세일산의 명으로 계보는 일찍이 신당에 올라갔으며, 오늘 수도에는 눈비가 내렸다.
몇십, 몇백의 해를 거쳐 기록되기를 ‘태양의 방’은 꺼진 일이 없었다. 오늘 내리는 겨울비는 그만큼이나 전례 없는 경우였다. 학자들은 달력을 펼쳐 놓고는 지나간 1년의 일수 계산이 잘못되진 않았나 연구하기 바빴고, 신관들은 예배당에 모여들었다. 신전의 어린 종들이 함께 모여 부르는 노랫소리가 왕자 부부의 내실 앞까지 울려 왔다.
메아리처럼 들려오는 노랫소리에 맞추어, 사라는 젖은 대리석 바닥을 발끝으로 두들겼다. 시녀의 구두 앞코를 적시며 빗물이 원형으로 튀었다. 고개를 들어, 사라가 하늘을 살폈다. 약속된 바 없는 먹구름이 왕성의 꼭대기를 가려 놓았다.
축축한 새벽 공기 때문에 제가 빗속에 서 있는 것인지 얼음물에 잠긴 것인지도 분간할 수 없게 추운 날이었다. 구두와 치맛자락을 적셔 가며, 시녀가 뜰 앞까지 나온 데에는 모두 이유가 있었다. 초조하게 발을 구르며, 그녀는 왕의 하인을 기다렸다.
왕의 내실에서 일하는 하인은 보통의 하인과는 급이 달랐다. 하수인의 세계에서는 제 주인의 격이 저 자신의 격이었다. 하인의 주인은 곧 대륙의 주인이신 사렙탄 세일산이었다. 그가 피우다 버린 담배조차 공손히 주워야 하는 게 왕성의 하인이었다. 하물며 그를 모시는 하인에게도, 사라는 허리를 숙이고 안내를 자처해야 했다.
“오셨군요.”
비싼 모자와 번듯한 구두를 신은 하인을 향해, 사라는 두어 발짝 다가섰다.
초조한 기다림으로 애간장이 다 타 버린 사라였다. 조마조마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그녀를 하인은 이상하다는 듯 흘겨보았다. 그러고는 챙 위에 비가 묻은 모자를 벗어 탈탈 털었다.
“왕자님께서 기다리고 계세요.”
제 사정을 모르고 늦장 부리는 하인을, 사라가 재촉했다. 그리고 내실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좁은 보폭으로 빨리 걷는 내내 구두코에서 빗방울이 쏘아져 나왔다.
“폐하께서 무어라 전하시던가요? 오늘 사냥이 취소된 것은 아니겠지요?”
궁금증을 참지 못해 사라가 물었다. 그러나 왕의 하인은 가져온 전언을 시녀에게 알려 주지 않았다. 무표정한 얼굴로 저를 무시하는 하인을, 사라는 아주 길게 노려보았다.
숨을 고른 뒤 사라가 내실 문을 열었다. 그 즉시 하인의 허리가 직각으로 접혔다. 넙죽 인사를 올린 것이었다. 그의 정수리 앞에 야베스 세일산이 서 있었다.
“폐하께서 무어라 하시더냐.”
야베스 세일산이 물었다. 조금 전 시녀가 건넨 것과 같은 질문이었다. 그러자 하인은 깊이 고개를 숙이고서 유감을 전했다.
“비와 눈이 동시에 내려 사냥터의 흙과 돌도 모두 젖어 버렸습니다. 길이 망가져 말을 타기에는 무리한 날씨라 하십니다.”
고개를 조아리며 하인이 말했다. 그에 야베스는 입을 다물었다. 상체에는 가벼운 갑주를 입었고 허리에는 두꺼운 가죽 띠를 두른 채였다. 사냥 준비를 완벽하게 마친 왕자임을, 하인조차 알아보았다.
때문에 하인은 제 얼굴이 보이지 않을 지경으로 머리를 숙였다.
“난데없는 눈비로 인해 폐하께서도 심기가 크게 상하셨습니다. 하지만…… 날씨에 무슨 의도가 있겠습니까.”
에둘러 표현한 하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만큼, 야베스는 어린 왕자가 아니었다. 어쩔 방도가 없으니 받아들이시라는 권유임을 아는 것이었다. 또한 그는 제 아버지께서 크게 상심하셨으리라곤 믿지 않았다. 저와의 약속이 취소되었다고 ‘크게 상하실’ 지경으로 마음 여린 사렙탄이 아니었다.
“오전 사냥이 무마되었으니 무얼 하신다더냐?”
야베스가 물었다.
“뜰 밖으로 활이라도 당기러 가신다더냐.”
덧붙인 말에 약간의 질책이 묻어났다. 벌써 대체할 일정을 잡는 것은 약속이 취소되어 심기가 상한 인물이 할 일은 아니었다.
하인을 당황하게 한 요인이 야베스의 말속에 있었다. 그의 추측이 맞았다. 빗물로 차게 젖은 창밖을 보자마자, 사렙탄은 두 가지 명령을 내렸다. 첫째는 야베스 세일산에게 오늘 사냥이 취소되었음을 알리라는 것이었고, 둘째는 저 혼자 활이라도 쏠 것이니 새를 준비하란 말이었다.
잠깐의 침묵 끝에,
“가까운 시일 내에 새로이 약속을 정하자는 폐하의 말씀입니다.”
하인이 답했다.
제 질문에 대한 답은 없었으나, 야베스는 그 뜻을 알아차렸다.
대화는 그렇게 끝났다. 야베스는 어떤 대답도 인사도 않음으로써 하인을 그 자리에 세워 놓았다. 왕자의 침묵이 몹시 길기에, 하인은 벌을 선 아이처럼 엉거주춤 서 있어야 했다. 깊게 숙인 허리를 세울 수도 없었고 조아린 머리를 들 수도 없었다.
잠시간 눈치를 보다, 그는 내실 벽난로 자리에 선 시녀들과 왕자비를 살폈다. 왕자께서 저를 놓아 주지 않으시니, 그를 대신해 인사 한마디라도 건네주십사 기대를 실은 눈짓이 아사야를 향했다.
그러나 이상했다. 하인과 눈을 마주치면서도 아사야는 눈썹 하나 꿈쩍 않았다. 평소 같았더라면 아랫사람 편을 들어 도와주었을 공주인데, 당장은 충격이라도 받은 사람처럼 멍한 얼굴이었다.
내실의 분위기가 심상찮음에 하인은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렸다. 그렇게 몇 분인지 모를 시간이 지난 후에야,
“나가 봐.”
야베스가 말했다.
하인은 벽을 향해 돌아선 왕자의 뒷모습과, 아픈 사람처럼 몽롱한 공주님을 번갈아 살피고는 엉거주춤 침실을 떠났다.
사렙탄의 하인이 사라진 뒤에야 야베스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차려입은 허리띠를 그는 거친 손으로 잡아당겼다. 분에 찬 나머지 매듭이 쉽게 풀리지를 않았다.
야베스는 목구멍 깊이 욕설을 삼켰다. 틀어진 계획에 대한 분노와 아버지를 향한 혼란스러운 마음이 그를 어지럽혀 놓았다. 그는 왕을 죽일 기회가 박살났단 사실보다도, 아버지께서 약속을 쉽게 취소했단 것에 더욱 분노했다. 어차피 그를 살해할 생각이건만, 그가 저를 바람맞혔다고 속이 상하다니 이상한 일이었다.
‘제길…….’
매듭을 뜯어낼 기색으로 당기다 말고 그는 소파 자리를 노려보았다. 독촉하는 시선을 받은 뒤에야 그의 아내가 느릿느릿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편의 환복을 돕고자 다가오는 몸은 작았고 배는 동글었다.
배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뒤뚱거리는 아사야를 보자 야베스의 분노도 서서히 가라앉았다. 그녀의 배 속에서 무럭무럭 자라나는 제 자식을 생각하면, 그는 어깨가 가벼워지고 기분이 들뜨곤 했다. 그에게 있어 아사야는 완벽한 아내였다. 안정을 취해야 한다는 이유로 잠자리를 갖지 못하는 점만 제외하면 그랬다.
불쑥, 그가 손을 뻗었다. 순간 아사야는 저도 모르게 눈가를 움찔거렸다. 긴장한 기색을 알아채지 못한 듯, 야베스의 손이 아사야의 윗배를 쓰다듬었다.
“쌍둥이라더니, 배가 부쩍 커진 것 같군.”
그리고 속삭였다.
“아이가 둘이나 들었다면 그중 하나는 아들이겠지.”
제 뺨 가까이 다가온 야베스의 입술을 아사야는 피하지 않았다. 고개를 숙인 채 그녀는 왕자의 허리띠 매듭을 푸는 데에 집중했다. 손길이 엉성하고 굼뜬 탓에 허리띠를 풀기까지 한참이 걸렸다.
그제야 야베스의 눈길이 의아해졌다. 그는 아사야의 떨리는 손길과 창백한 안색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내가 사냥을 떠나기만을 기다린 사람 같군.”
날 선 목소리였다. 아사야는 떨리는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나보다 당신이 더 실망한 기색이야……, 안 그래?”
그의 말이 사실이었다. 야베스 세일산의 계획이 망가짐은, 아사야 세일산의 실패를 뜻했다. 그가 왕성을 떠나지 않아서는, 그녀는 무엇도 할 수가 없었다. 오늘 실패가 갖는 의미는 아사야에게 보다 컸다.
야베스 세일산이야 두 번째 기회를 노리면 그만이었다. 국경에서 벌어질 반역의 소식이 왕성으로 오기까지는 며칠의 여유가 있으므로.
그러나 아사야는 달랐다. 그녀에게는 며칠의 여유는커녕 몇 시간의 여유조차 없었다. 오후 내로 본도 부부를 태운 배가 항구에 닿을 것이었다. 그의 숨통을 끊어 놓는 즉시 제 오빠는 평생 반역자, 혹은 꼭두각시 신세로 살아갈 터였다.
때문에 야베스의 말이 맞았다. 아사야는 야베스 세일산이 자리를 비우기만을 기다렸으며, 그보다 곱절은 더 실망했다.
뿐만이 아니었다. 아사야는 그를 증오했다. 가디엘과 아졸가 기사단을 생사의 기로에 몰아붙여 놓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제 배를 쓰다듬는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염치없이 아들을 바라는 그의 입이 미웠고, 살갑지 못한 제 태도를 지적하는 그의 곁을 어떻게든 떠나고 싶었다.
내일이면, 그녀는 항구에 있어야 했다. 모레면, 배를 타고 이 대륙을 떠나야 했다. 사흘 뒤면, 가브리엘의 손을 잡고 나젤탄의 해변을 걸어야 했다……. 백 번이고 천 번이고 상상한 끝에 아사야는 제 발가락에 닿는 모래의 감촉까지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 그녀는 야베스 세일산의 아내였다. 그의 갑주를 벗겨 주며 그의 비위를 맞추고, 그의 눈치를 살피며,
“날씨 때문이에요.”
얌전한 변명을 내놓아야 했다.
“……비가 내려서 속상해서 그래요. 오늘 예배당에서 기도를 올리기로 했거든요. 아기가 무사히 태어나게 해 달라고…….”
제 시선을 피하는 아사야를 쫓아, 야베스가 고개를 깊이 숙였다. 그의 입술이 아사야의 왼쪽 뺨에 닿았다. 두 눈을 내리깔고 아사야는 숨을 참았다. 그의 코에서 빠져나온 공기가 제 폐로 들어오는 것조차 견딜 수 없어서였다.
뻔한 속셈을 모르는 척 웃어야 하는데 잘 되질 않았다. 목구멍에 모래 한 줌이 턱 끼인 듯했다. 하나뿐인 혈육과 제 가문의 운명이 비틀리는 시점에, 웃는 것밖에 할 수 없는 스스로가 혐오스럽게 느껴졌다. 어린 아내를 연기하고자 입을 열고 무엇이건 듣기 좋은 소리를 내야 하는데,
“…….”
아사야의 잇새로는 작은 숨결 하나 빠져나오질 않았다. 얼굴을 붉힌 채 멈추어 있는 공주를 도운 것은, 다름 아닌 어린 시녀였다.
“공주님께서 거동하기 힘드신가 봅니다.”
불쑥, 작고 억센 손이 아사야의 어깨를 감쌌다. 열일곱 살 소녀의 팔에 안기듯 기대며 아사야는 한 발 뒤로 물러났다. 야베스 세일산의 시선이 닿자 유라는 두 뺨을 시뻘겋게 붉혔지만, 꼭 쥔 공주의 팔을 놓진 않았다.
미치지 않고서야, 왕족 간의 대화에 함부로 끼어드는 시녀는 없었다. 그러니 똑똑한 유라는 알았다. 저는 미친 시녀였다.
그런 그녀의 곁에는 그보다 훨씬 미쳐 버린 사라가 있었다.
“공주님께서 드시기엔 갑주가 너무 무겁습니다!”
큰 소리로 외치다시피 하며 다가와, 사라가 손을 거들었다. 제 갑주를 풀어내며 두 팔로 받아 드는 시녀를, 야베스는 탐탁잖게 바라봤다.
여느 시녀였더라면 당장에 뺨을 치고 내쫓을 일이었다. 그러나 아사야의 시녀를 꾸중하는 일은 경우가 달랐다. 공주를 모시는 두 시녀는 그녀가 받은 예물의 일종이되, 야베스가 아닌 사렙탄이 준 자산이었다. 그들 시녀의 뺨을 치는 일은, 왕께서 아사야에게 쓴 편지를 가로채 찢는 일과 같았다. 하고자 한다면 그리할 순 있지만, 굳이 그러기에는 뒤끝이 번거로웠다.
입을 다물고 무표정한 얼굴로 야베스는 어린 시녀들의 면면을 훑어보았다. 그의 갑주를 보물처럼 안아 든 채, 두 시녀는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야베스의 눈썹이 삐뚜름해졌다. 창백한 얼굴로 덜덜 떠는 꼴들이, 왕가의 법도를 알고서 나대는 것 같진 않았다.
“내가 몸이 아파 그래요.”
천천히, 아사야의 여린 얼굴이 그의 시야를 가로막았다.
“오늘따라 몸살 기운이 있다고…… 말했더니 신경이 쓰였나 봐요.”
소곤거리며 아사야는 두 손으로 배를 감쌌다. 야베스의 주의를 돌리려는 동작이었다.
그런 공주님의 마른 뒷모습을, 유라와 사라가 올려다보았다. 긴장한 탓에 두 손이 벌벌 떨렸다. 품에 안은 갑주의 앞뒷면이 덜그럭덜그럭 소리를 낼 지경이었다.
“몸이 그리 약해서 어떻게 아이를 낳겠어? 출산일에는 신관을 다섯 명은 불러야겠군.”
야베스가 쥔 책망의 화살이 자연스레 아사야를 향했다. 그저 미소 지을 뿐, 아사야는 달리 변명하지 않았다.
야베스 세일산은, 몸살 기운이 있다는 아사야의 말보다는 뒤바뀐 왕의 일정에 관심이 많은 남자였다. 사렙탄 세일산의 우선순위가 곧 그의 우선순위이기 때문이었다. 평소 같았더라면 세일산 왕가의 뒤틀린 관계도가 아사야에겐 불행이었을 테지만, 오늘은 달랐다.
아사야는 저를 침실에 남겨 두고 떠나는 야베스의 무관심에 고마움마저 느꼈다.
“후…….”
긴 숨을 뱉으며, 그녀는 소파에 넘어지듯 주저앉았다. 유라와 사라가 무릎으로 기어 그녀 앞까지 다가왔다. 그러고는 정신없이, 만삭 공주님의 팔과 다리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공주님, 괜찮으세요?”
아사야의 안색은 희다 못해 푸르스름한 빛깔이었다. 언제고 잘 익은 열매처럼 붉던 입술도 빛을 잃어버렸다.
“공주님…….”
파랗게 질린 아사야의 손을, 유라와 사라가 열심히 누르며 주물렀다. 고개를 숙인 채 아사야는 잠시간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놀란 시녀들을 진정시키려 해도, 입술이 떨어지질 않았다. 처음 느끼는 통증으로 아랫배 전체가 얼얼한 탓이었다.
‘아파…….’
애정 그 자체인 아이였다. 그런 아이를 품은 지, 저만이 아는 일수로 50일째였다. 커 가는 속도가 범상치 않음은 알았지만 설마하니 벌써 진통이 올 줄은 몰랐던 아사야였다.
고개를 들자 제 팔과 다리에 매달린 시녀들이 보였다. 아사야를 주인으로 모시며, 지난해에도 키가 자라고 젖살이 빠지도록 어린 시녀들이었다. 본디 계획대로라면 아사야는 그녀들을 베데르 성에 숨겨 두려 했다. 왕성의 혼란이 가라앉기까지 사나흘만 숨어 지낸다면 큰 탈은 없으리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아사야의 계획은 첫 단추부터 잘못됐다. 오늘 눈비가 쏟아져선 안 됐다. 야베스 세일산이 왕성에 있어서는 안 됐다. 갑작스러운 진통이 찾아와서도 안 됐다.
최소한 아사야는 배 속 아이를 원망하고 싶진 않았다.
“유라, 사라. 왕자님 앞에서 그런 식으로 나서서는 안 됐어.”
대신에 그녀는 시녀들을 원망했다.
“오늘 두 사람의 언행에…… 난 크게 실망했어.”
공주님의 꾸중에 두 시녀의 눈이 커졌다. 유라는 입을 벌리고서 무어라 대답도 하지 못했고, 사라는 온 세상이 무너지기라도 한 듯 멍한 얼굴이었다.
“……내겐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기야. 이런 때에 버릇없는 시녀들을 곁에 둘 순 없어.”
아사야가 말했다. 공주님의 입에서 나오리라고는 꿈에도 예상치 못한 소리에, 두 시녀가 바닥에 아주 납작 엎드렸다. 그러고는 아사야의 가느다란 발목을 쥐고 매달리기 시작했다.
“고, 공주님……, 공주님, 잘못했어요.”
흐느끼는 두 소녀를 내려다보며 아사야는 이를 악물었다. 똑똑한 유라도 천진난만한 사라도, 아사야에겐 지켜야 할 가족이었다. 죄 없이 어리고 성실한 아이들을, 어찌 될지 모를 제 운명에 매달아 둘 순 없었다.
“엠마오!”
떨지 않으려 애쓰며, 아사야가 소리쳤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하인들이 드나드는 작은 문이 열렸다. 공주님의 유모가 등장하자 두 시녀는 더더욱 절박해졌다. 사라는 울음을 터뜨렸고 유라는 아사야의 종아리를 껴안고 매달렸다.
“엠마오, 금고 안의 상자를 가져와.”
아사야의 명령에 엠마오가 재빨리 움직였다. 울며불며 잘못을 비는 두 시녀의 모습에 당황하긴 하였으나, 엠마오는 무엇도 묻지 않고 협탁 금고를 열었다. 아사야의 작은 금고 속에는 그보다 더욱 작은 상자가 들어 있었다.
유모가 전한 상자를 받고 아사야는 숨을 골랐다. 상자 속에는 아버지께서 본인 대신 보내온 가죽 주머니와, 제 사람들의 고용 서류가 들어 있었다. 아사야는 개중 왕실의 인장이 찍힌 종이 두 장을 꺼냈다.
“이걸 들고 왕성에서 떠나 주었으면 해. 너희들의 경솔한 혀를 이제 못 믿겠으니까.”
시녀들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눈물 콧물로 범벅이 된 얼굴들을, 아사야는 힘겹게 마주했다. 눈앞의 서류를 받으면서도 시녀들은 그게 무언지 읽을 줄도 몰랐다.
“아졸가 영지로 가. 성문 앞에서 가로막히거든 집사를 불러다 이 종이를 내밀고, 아사야 세일산이 보냈다고 말해. 그쪽에서 알아서 너희들을 처벌할 테니.”
“공주님…….”
똑똑한 유라조차도 글자 앞에선 까막눈 소녀에 불과했다. 공주께서 제게 자유를 주는 줄도 모르고, 유라가 소리 내어 울었다. 어린 사라는 유라를 따라 서럽게 울어 댔다.
“공주님! 저희들은 정말 공주님을 위해서 그런 거예요. 제발, 제발 용서해 주세요. 저희에겐 공주님밖에 없어요, 공주님을 사랑해서 그런 거란 말이에요.”
“잘못했어요, 제가 잘못했어요, 공주님……. 다신 그러지 않을게요!”
아사야를 대신하여 엠마오가 두 시녀를 힘겹게 떼어 냈다.
입을 다문 채 아사야는 고개를 돌렸다. 유모가 곁에 있어 어찌나 다행인지 몰랐다. 그녀가 없었더라면 눈물을 참아 내지도, 시녀들을 속이지도 못했을 것이었다.
바닥을 기며 우는 시녀들이 그렇게 쫓겨났다. 아졸 성으로 향할 경비 몇 푼과 무어라 쓰였는지 알 수 없는 종이 한 장씩을 안겨 주고 쫓아내는데도, 두 시녀는 잘못했다며 빌기 바빴다.
엠마오는 안면이 익은 경비대원에게 소녀들을 넘겼다. 성밖으로 조용히 내보내라는 말과 은화 두 닢이 함께였다.
유모가 다시 내실로 돌아왔을 때, 아사야는 소파에서 미끄러져 바닥에 앉아 있었다.
“아가씨.”
달려가, 엠마오가 그녀를 부축했다. 자리에서 힘겹게 일어서며, 아사야가 쓴웃음을 지었다.
“저 바보 같은 쿠션을 진작 바꿨어야 하는 건데…….”
미끄러운 실크 쿠션을, 그녀 대신 엠마오가 던져 버렸다. 그녀에게 아사야는 무엇도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시녀들을 매몰차게 내보낸 것에 대해서도 변명할 필요가 없었다.
엠마오의 손이 아사야의 배를 만졌다. 그리고 속삭였다.
“알아요, 진통이 오신 게지요.”
오래전에, 아사야는 제 유모가 마법사는 아닐까 의심했었다. 평범한 유모인 척 위장하고 내 마음을 읽는 마법사, 내가 무얼 못 먹고 무얼 좋아하고, 또 언제 어디가 아픈지 전부 다 아는 위대한 마법사…… 옛 생각에 잠겨 웃는 아사야를 향해, 엠마오가 오만상을 찡그렸다.
“지금 웃음이 나오세요? 가여운 내 아가씨……, 식은땀 좀 봐. 지금도 많이 아파요?”
“아니……. 조금 전에 아렸던 게 전부야.”
엠마오의 걱정과 달리 아사야는 괜찮았다. 적어도 아직은 그랬다. 그녀가 시녀들을 내보내기로 다짐한 이유는 진통 때문만은 아니었다.
“엠마오.”
작은 소리로, 아사야가 속삭였다.
“나…… 치마가 다 젖었어.”
두꺼운 겨울 드레스를 입어 다행이었다. 양수가 터진 것을 감출 수 있어서였다.
“우선 폼을 불러 줘. 급한 대로 콘클라베를 열고 마석이라도 빼내야지……. 그리고…… 그리고 계획대로 폼을 가디엘에게 보내고, 아……, 정령새가 먼저 도착해야 하는데, 가디보다 먼저…….”
횡설수설하며 아사야가 숨을 헐떡거렸다. 괜히 미소 짓고, 침착한 척 중얼대는 속임수에 엠마오는 속지 않았다. 그녀는 누구보다도 제 아가씨에 대해 잘 아는 유모였다. 놀란 만큼, 아픈 만큼 말이 많아지는 건 아사야의 오랜 습관이었다.
그러면 아픔이 가실 때까지, 놀란 흥분이 진정될 때까지, 엠마오는 주름진 손으로 아사야의 등을 쓸어내리곤 했다. 오래도록 일한 탓에 손금이 흐려지고, 어린 아가씨가 한 개 두 개 셈하던 주름이 수없이 많아진 뒤에도, 엠마오는 늘 같았다.
유모의 손이 아사야의 등허리와 팔과 어깨를 쓸어내리고 주물러 댔다. 손길을 받으며 아사야는 절박한 아이처럼, 아버지의 흔적이 묻은 가죽 주머니를 쥐고 있었다.
거칠어진 숨이 진정되기까지 긴 시간은 필요치 않았다. 서늘해졌던 손가락에 약간의 쥐가 나며 힘이 돌아왔다.
천천히, 아사야는 제 상황을 객관적으로 살폈다.
‘왕자님이 다정하지 않은 건 참 행운이지.’
그리고 실소했다. 야베스 세일산이 곁에 없다는 것만으로도, 아사야에겐 희망이었다.
‘가브리엘이 같이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드래곤이 곁에 없단 것만은 그러나 슬프고 서운했다. 가브리엘이라면, 태어날 아이가 제 씨인 줄도 모르면서 아사야를 껴안고 달랬을 터였다.
“괜찮아. 나 괜찮아…….”
아사야가 혼잣말했다.
“생각보다 나쁘지 않아.”
자기 위안 삼아 꺼낸 말에는 어느 정도의 진심이 섞여 있었다. 양수가 터지고 진통이 오면 세상이 무너지고 아주 끔찍할 줄로만 생각했는데, 의외로 그렇지만도 않았다. 속옷과 내의가 젖었고 배가 낯선 방식으로 당겼다. 그뿐이었다.
다시 진통이 오기 전에 부릴 수 있는 여유는 짧을 것이었다. 그 생각에 아사야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녀에겐 시간을 낭비할 새가 없었다.
“엠마오, 나를 도와줘. ……아기를 낳는 일에 신관 다섯 명은 필요하지 않아, 그렇지?”
아사야가 물었다. 엠마오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결의에 찬 유모를 따라 아사야는 침실을 떠났다. 부부 침실에서 아사야가 챙겨야 할 것이라고는 손안에 쥔 가죽 주머니 하나가 전부였다.
두 사람은 좁은 터널처럼 뚫린 복도로 걸어 들어갔다. 시녀들과 유모만이 오가는 어두운 길이었다. 그 길을 따라가다 나오는 두 번째 방이, 엠마오의 작은 침실이었다.
왕성의 보물이라 불리는 공주의 몸이, 유모가 쓰는 나무 침대에 눕혀졌다. 그녀를 숨겨 두고 엠마오는 잠시 제 방을 떠났다. 혼자 남겨진 아사야는 사각형의 낮은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아기를 낳는 상상이라면 셀 수 없이 해 본 그녀였다. 악몽을 꿀 때마다 아사야는 야베스 세일산이 보는 앞에서 아기를 낳곤 했었다. 나젤탄으로 떠나는 배에서 아기를 낳다가 파도에 휩쓸려 잃어버리는 꿈도 꾼 적이 있었다.
그 덕분인지 지금의 상황은 그녀에게 있어 비극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온통 엠마오의 물건들과 엠마오의 체취로 둘러싸인 방이라면, 아기를 낳기에 충분히 좋은 장소라고 생각됐다.
‘큰일이야.’
욱신거리는 배를 둥글게 쓰다듬으며, 아사야는 생각했다.
‘우리 아이를 몰래 낳은 걸 알면 가브리엘이 완전 토라질 텐데.’
제게서 등 돌리는 가브리엘의 모습을 상상하자 이상하게도 웃음이 났다. 결단코 일어나지 않을 일임을 알기 때문이었다.
생각에 잠긴 아사야의 정신을, 엠마오가 다시 깨웠다. ‘아가씨’, 그리고 ‘공주님’, 부르는 소리에 아사야가 눈을 떴다. 잠깐 사이 기절했던 모양이었다. 그녀의 등 뒤를 구긴 솜이불이 받치고 있었고, 배 위로는 폼이 손을 대고 있었다.
엠마오가 가져온 끓인 물 양동이가 침대 아래서 김을 뿜어냈다. 오늘 새벽 처음으로 본 창문처럼 뿌옇게 흐려지는 정신을, 아사야는 가까스로 붙잡았다.
“걱정 마세요, 공주님.”
폼이 말했다.
“모두 괜찮을 거예요. 공주님도, 아기도…….”
저를 깨우기는커녕 깊은 잠으로, 아득히 멀리 보내는 듯한 목소리였다.
‘왜 그렇게 말하는 거야, 폼?’
따듯한 물수건이 피부에 닿는 감촉을 느끼며 아사야는 잠들었다. 그리고 꿈을 꿨다. 그녀의 꿈속에는 야베스 세일산이 없었고 그 배경 또한 흔들리는 배 위가 아니었다. 꿈속에서, 그녀 곁엔 검은 드래곤이 있었고 그 배경은 컴컴한 동굴 속이었다.
열한 살 소녀인 아사야는 가을 잠옷을 입고 있었다. 가을 잠옷은 당시 아사야가 가장 좋아하던 옷으로, 도톰하고 부드러운 천으로 지은 원피스였다. 가져온 담요를 공처럼 돌돌 말아, 아사야는 제 원피스 안에 집어넣고는 배가 불룩 나오게 했다.
“진짜야. 배가 이따만 하다니까?”
좌우로 뒤뚱뒤뚱 걸으며 아사야는 가브리엘의 머리 주변을 배회했다. 동굴 속의 드래곤을 찾을 때마다 그녀는 새로운 이야깃거리를 찾기에 바빴고, 그해 가을 최고의 관심사는 주방보조 하녀의 임신이었다.
열한 살 아사야는 진통이 무언지, 양수는 또 무언지 그런 것은 전혀 몰랐다. 그렇기에 치마 안에 넣었던 담요를 다시 꺼내서는,
“아기 나왔다!”
소리를 쳤다.
소녀의 목소리가 동굴 안에서 밖으로, 다시 안으로 메아리를 치며 울렸다. 두 손으로 제 입술을 막고서 아사야는 외침 소리가 멈출 때까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웃음을 터뜨렸다.
“자, 가브리엘. 아기 안아 줘.”
또 다른 메아리를 만들지 않기 위해, 아사야가 소곤거리며 말했다. 그러자 가브리엘은 긴 한숨을 내쉬더니, 담요 꾸러미가 아닌 아사야의 볼에 콧김을 세게 불었다. 드래곤이 뿜어낸 후끈한 콧김에 아사야의 머리카락이 흔들거렸다.
“나 말고, 아기 말이야.”
아사야가 꺄르륵 웃음을 터뜨렸다.
“나 말고 아기를 보라니까.”
그리고,
“아가씨…….”
사각형의 천장이 아사야를 반겼다.
천천히 목을 돌려, 아사야는 우는 얼굴의 유모를 살폈다. 짧은 꿈에서 깨어난 뒤 가장 먼저 느낀 것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허전함이었다. 오십 일 동안 품었을 뿐인 아기의 빈자리는, 제 몸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듯 크게 느껴졌다.
모든 장기가 사라진 양 텅 빈 것처럼 느껴지는 그녀의 배 위에, 붉은 팔의 마법사가 두 손을 대고 있었다. 탈진해 버린 몸에 불어넣는 온기를 느끼며, 아사야가 눈을 움직였다.
바로 옆자리에 앉은 엠마오의 옆얼굴이 보였다. 아사야의 손을 두 손으로 감싸 쥔 채 엠마오는 눈물을 묻혀 대고 있었다.
“아기…….”
아사야가 속삭였다.
“아기는?”
그러나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폼은 치유 마법을 걸기 바빴고, 엠마오는 아사야의 손등에 입을 맞추어 댔다. 유모가 왜 내 말을 무시할까 아사야는 생각했고, 이내 제 목소리가 벌레 기는 소리만큼 작음을 깨달았다.
“엠마오…….”
손가락을 꿈틀거리며, 아사야가 다시 말했다.
“아기는?”
엠마오의 어깨가 펄쩍 움직였다. 아사야가 잠에서 깬 것을 그제야 알아챈 눈치였다. 그녀는 허둥지둥하며 아사야의 이마와 얼굴을 닦아 주며, 정신이 드셨냐, 어디 아프신 곳은 없냐, 잘 보이고 잘 들리시냐 질문 세례를 쏟아 냈다.
땀이 묻은 눈꺼풀을 끔벅거리며 아사야는 엠마오의 얼굴에 비친, 희미한 미소를 읽어 냈다. 그녀를 따라 입을 벌리고 웃자 엠마오가 흐느끼는 듯한 숨소리를 냈다.
말없이 아사야가 두 팔을 뻗었다. 그러자 엠마오가 몸을 돌려, 둥그렇게 만 백색 포대를 아사야의 품에 안아 주었다. 머리끝부터 발가락까지 무엇 하나 보이지 않게 천으로 둘러놓은 포대는 가벼웠다. 여태껏 밤마다 제 배를 아프게 하고 걸음걸이마저 바꾸어 놓았다곤 믿을 수 없게 가벼운 포대 속에, 갓난아기가 있었다.
떨리는 손으로 천을 걷어 아사야는 그 속을 들여다보았다. 배 속에 품고 다니길 오십 일간, 어떤 모습일까 천 번 만 번 그려 본 아기였다. 혹여 사람이 아니라 커다란 알은 아닐까, 가브리엘처럼 뿔과 날개가 달리진 않았을까, 아예 드래곤인 모습이라 모두를 놀라게 하진 않을까…… 숱한 걱정들에 고개를 내저으며, 그녀의 작은 아기가 얼굴을 드러냈다.
포대 속의 아기를 바라보자마자, 아사야는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온몸의 체중이 날아갈 듯 가볍게 느껴졌다. 텅 빈 것만 같았던 배 속에 걷잡을 수 없는 애정이 꽃을 피웠다.
“오랜만이야.”
아사야가 속삭였다. 기쁨에 젖은 목소리였다.
“우리…… 다시 만날 날을 어찌나 기다렸는지…….”
그러고는 품 안의 아이에게 입을 맞췄다. 그녀가 건넨 인사말의 의미를, 폼도 엠마오도 알지 못했다.
기다려 온 아이와의 인사는 그렇게 마쳐야 했다. 마법사와 유모가 그랬던 것처럼, 아사야는 포대를 덮어 아기의 머리까지를 조심조심 감쌌다. 그 누구도 아기의 얼굴을 훔쳐볼 수 없게, 안전하게 가린 것이었다.
이내 공주는 유모의 품에 제 아이를 안겼다.
“엠마오.”
아사야와 눈을 마주치자마자 엠마오는 포대를 껴안은 채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역시 독심술을 할 줄 아는 게 틀림없다고, 아사야는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제 마음을 전부 읽은 것처럼,
“싫어요, 아가씨. 아무 말 마세요!”
대답부터 꺼낼 순 없는 노릇이었다.
“부탁할게, 엠마오. ……내 아이를 믿고 맡길 사람은 엠마오뿐이야. 이 아이를 데리고 멀리 달아나 줘.”
그러나 그녀의 애원도, 아사야의 결정을 막진 못했다. 어린 시녀들을 떠나보내길 도운 것을, 엠마오는 후회했다. 아가씨께서 저마저 멀리 보내실 거라고는 꿈에도 예상치 못한 그녀였다. 죽는 날까지 저는 아가씨의 곁을 지키고, 아가씨의 내일을 위하여 기도하리라 생각했었다.
“아가씨를 두고 저는 어디로도 안 가요, 못 간다고요!”
“엠마오.”
울며 소리치는 유모의 헝클어진 머리칼을, 아사야가 만졌다. 모르던 사이 백발이 더 많아져서는, 멀리서 보면 회색처럼 보이는 머리였다. 그녀의 옆머리를 손으로 빗어 귀 뒤로 넘기며, 아사야는 억지로 미소 지었다.
유모를 속일 마음은 없었다. 제 거짓말에 속아 줄 정도로, 저를 모르는 엠마오가 아니었다.
“나에게 해 줬던 말, 기억해?”
그래서 아사야는 그녀를 협박해야 했다.
“내가 잘못을 저지르고 모두가 날 찾으려 한다 해도 내 편이 되어 줄 거랬잖아. ……나를 지켜 줄 거라고, 꽁꽁 숨겨 줄 거라고. 기억해? 내게…… 그렇게 약속했던 것.”
베데르 성의 경비대원이 실종되었던 때, 두 사람은 그런 대화를 나누었었다. 정원을 헤매며 불안에 떠는 아사야를 달래며 유모가 내건 맹세가 있었다.
“기억해요, 아가씨…….”
떨리는 목소리로 엠마오가 대답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저를 배신하지 않는 유모를, 아사야는 알았다. 거짓이라면 제게 말하지 않고, 저와의 약속이라면 목숨을 걸어서라도 지킬, 저를 사랑하고 아껴 주며 평생을 함께 지낸 유모였다.
“내 아이에게 그렇게 해 줘. 내게 그렇게 해 주었듯이…… 이 아이에게 그렇게 해 줘.”
웃는 얼굴로 속삭이는 아사야를, 엠마오는 유령이라도 보는 사람처럼 멍하니 응시했다. 그녀의 볼을 적신 눈물을 아사야의 고운 손이 훔쳐 냈다.
“우리 계획을 기억하지? 계획대로 움직이면 돼. 알았지?”
“아가씨, 아가씨…….”
“사막 도시를 지나서…… 항구로 가는 거야. 백색 항구로 가면 허브로 통하는 배편이 있을 거야. 나젤탄으로 가는 배에 오르기만 하면, 그때부턴 정말 자유야.”
그렇게 말할 적에 아사야는 제 발바닥에 닿는 모래를 느꼈다. 발가락 사이사이를 차갑게 스미는 파도라는 것도, 너무나 많이 상상해 본 끝에 이미 아는 것만 같았다.
‘그러니까, 괜찮아…….’
저는 상상 속에서 지겨울 정도로 많이 거닐어 본 해변이었다. 그러니 정말로 가닿지 못하더라도, 괜찮았다. 평생 저를 돌봐 온 엠마오와 울지도 않고 침묵 속에 태어난 아기에게, 그 해변을 걸을 자격이 있었다.
때문에 아사야는 엠마오의 손을 쥐었다. 제 아이에게 처음으로 물려주려 했던 선물을, 아사야는 유모에게 안겨 주었다.
엠마오의 손에 들린 물건을 보자마자 폼이 작은 신음을 흘렸다. 작고 무거운 그 선물은, 베데르 아졸이 품에 지니고 다니던 가죽 주머니였다. 에돔의 불길이 휩쓴 전쟁터를 누빌 적에 그는 젬 드래곤의 비늘을 주워 모았었다. 제 딸아이가 저를 닮아 괴짜여서 드래곤에 관심이 많다고, 돌아가 품에 안겨 준다면 제 늦은 귀환을 용서해 줄 것이라고도, 제 딸이 갖고 그녀의 손주에게도 물려주었으면 좋겠다고…… 그렇게 전한 유품이었다.
두 눈 가득 눈물을 실은 채 엠마오는 꿈쩍도 하질 못했다. 넘실대는 눈물을 파도 삼아 바라보며, 아사야는 두 팔을 넓게 벌렸다. 그리고 아주 어린 시절에 그리했듯이 유모를 와락 껴안았다.
“고마워, 엠마오.”
엠마오의 귓가에 사랑하는 아가씨의 숨결이,
“고마워, 엄마…….”
아지랑이처럼 묻었다.
우는 유모의 볼과 포대로 감싼 아기의 이마에 입을 맞춘 뒤, 아사야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아사야 세일산에게 무척 중요한 날이었다. 오늘은 제 아이의 생일이었으며, 아사야로서는 평생을 살아오며 받은 것을 죄 끌어모아도 빗댈 수 없는 원망을 받는 날이었다. 특히나 폼 에드레이를 밀어 보낼 적에 받은 원망은 엠마오가 흘린 눈물의 몇 배는 되는 것 같았다.
“시간이 없어요, 폼. 지금 당장 출발해야 해.”
그제야 폼은 아사야의 계획을 알아차렸다. 일이 순탄치 못하게 되더라도, ‘계획대로 하는 것’이 곧 그녀의 숨겨진 계획이었다. 기존의 계획대로라면 폼 에드레이는 가디엘 아졸의 반역을 막기 위해 적마를 달려야 했다.
“엠마오를 함께 데려가 줘요.”
아사야가 말했다.
그 순간 폼은, 마법사로서 그녀 자신의 실력을 힐난했다. 기절한 아사야를 치료하지 않고, 납치해서 도망쳐야 했다는 후회가 뒤늦게 고개를 쳐들었다.
오늘을 기다리며 준비해 둔 마법이 있어 아사야의 출산엔 채 삼십 분도 걸리질 않았고, 회복 마법을 완벽하게 걸어 버린 끝에 아사야는 상처 하나 없이 맨정신이었다. 그런 그녀의 고집을, 폼은 이길 수 없었다.
“공주님께선 어떻게 하시고요?”
엉망진창으로 떨리는 목소리로,
“이, 이런 상황에 공주님을 두고 갈 수 없어요.”
폼이 말했다. 지독한 데자뷔가 목을 조르는 탓에, 그녀의 눈은 붉어졌고 두 뺨은 희게 질렸다.
“내 말대로 해, 폼 에드레이.”
그러나 아사야 세일산은 더는, 부드럽고 연약한 공주가 아니었다. 그녀의 피부 위로 아지랑이 같은 마나가 피어올랐다.
“곧 전쟁이 일어날 테니……, 영웅은 전장에 있어야 해.”
그녀의 말은 부탁이 아닌 명령이었다.
이어 아사야는 제 두 손을 폼의 뺨에 붙였다. 무어에 홀린 사람처럼 폼은 입을 벌린 채 움직이지 못했다. 아사야의 부드러운 입술이 제 이마에 닿는 감각을 폼은 가만히 받아들였다.
“여기까지 불러들여서 미안해.”
아사야가 속삭였다.
“이런 일을 부탁해서 미안해.”
짧은 인사를 끝으로 아사야는 방을 떠났다. 폼은 그녀에게 어떤 말도 건네지를 못했다. 그저, 그녀의 황금색 눈동자에 비쳤던 제 모습을 기억한 게 전부였다.
그리고 폼은 깨달았다. 영원한 짝사랑이 제 운명임을.
.*. *. *. *. *. *.
베데르 성의 문을 열 적에, 아사야는 잠시간 애를 먹었다. 단단히 잠긴 성문이 열쇠의 말을 듣지 않는 탓이었다. 비에 젖은 문짝에 이마를 기대며 아사야는 잠시간 그를 달래야만 했다.
“열어 주세요.”
그렇게 소곤거리면서,
“열어 주세요, 아버지. 나를…… 들여보내 주셔야 해요.”
차갑게 식은 성문을 쓰다듬고 끌어안았다.
“보내…… 주셔야 해요, 이제.”
커다란 벽 앞에 두 팔과 몸을 붙인 것을 누구도 포옹으로 인정해 주지 않겠지만, 적어도 아사야는 그렇게 믿었다. 또한 제 아버지께서 저의 포옹을 받아 주었다고, 믿을 수밖에 없었다. 부드러운 소리를 내며 성의 문이 열렸으므로.
한차례, 아사야는 흐트러진 머리를 손으로 넘기고 구겨진 드레스를 펼치며 제 상태를 정비했다. 경비대원의 눈을 속이기 위해 속치마에 집어넣은 쿠션 역시, 끌어 올려 아랫배에 붙어 있게 했다.
그리고 성문을 열자마자,
“……가브리엘.”
아사야는 드래곤과 눈을 마주쳤다.
계단에 앉은 채 그는 사람의 모습이었다. 몸에는 셔츠와 바지를 입고 있었고, 그렇게나 싫어하던 신발에 두 발을 꿰어 넣은 채였다. 남들 눈을 피해, 아사야의 손을 잡고, 둘이 떠나는 날임을 기억하고 기다린 것이었다.
앞뒤 사정을 모르는 채 저를 보는 보라색 눈동자를 향해 아사야는 웃음을 터뜨렸다. 비가 온다 해서 가브리엘이 망루에 올랐으면 어떻게 하나, 먼 계단을 어떻게 뛰어가나, 고민했던 탓이었다.
“날 기다리고 있었구나…….”
한 발, 두 발 그에게로 다가서며 아사야는 웃는 표정을 유지하고자 노력했다.
“어쩌지. 우리 계획이…… 조금 달라졌어.”
하지만 잘되진 않았다. 특히나 가브리엘의 눈동자가 저를 걱정하는 듯 다정하게 들여다볼 때면, 아사야로서는 얼굴을 굳히며 울먹일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상황이 어떻게 되어 가는 것이냐고, 너는 괜찮은 것이냐고 묻고자, 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거짓을 꾸리기 힘든 질문을 받기 전에, 아사야는 가브리엘의 허리를 있는 힘껏 끌어안았다. 그리고 그의 어깨에 이마를 묻었다.
“계획이, 잘못되어서…… 네 마도구를 열 수 없게 됐어. 너도 알겠지만, 그러면 너와 나는…… 대륙을 벗어나지도 못할 거야.”
말의 사이사이에 흐느낌이 묻어났다. 목소리를 떨게 하는 죄책감을 미안함으로 이해했는지, 가브리엘의 손이 다정하게 그녀의 등을 감쌌다.
“천공섬에서 네가 그랬잖아, 나…… 혼자라도 떠나서 멀리 가서 살라고. 포기할 것은 포기하고, 자유로워지라고…… 행복해지라고 그랬었잖아.”
아사야가 말했다. 뜨문뜨문 끊겼다가 이어지는 목소리를, 가브리엘은 가만히 듣기만 했다.
“가브리엘. 네 말대로 할게. 너를 여기에 두고 내가 떠나면, 떠나서…… 완전히 자유로워지면…… 그러면 어떨 것 같아?”
굶주린 개를 고기로 꼬드기는 격이었다. 혼란스러운 듯 눈동자를 흔들고 미간을 찡그리면서도, 가브리엘은 아사야가 던져 놓은 미끼를 피하지 못했다. 제 마력을 되찾기를 포기하더라도, 영원히 나약해진 채 살다 시들어 죽는 한이 있어도, 그는 아사야의 자유를 원했다. 그녀의 해방이 제 소원이 되어 버린 지 오래였다.
그래서, 가브리엘은 작은 피라미처럼 그녀의 그물망 안으로 흘러 들어갔다. 아사야가 슬픈 미소와 함께 ‘혼자라도 자유로워지고 싶다’고 말한다면, 가브리엘이 할 수 있는 답은 하나뿐이었다.
“좋아.”
이상하게도, 그가 긍정하자 아사야의 두 눈은 더욱 붉어졌다. 그렁그렁 눈물을 매단 눈동자에, 그녀는 가브리엘의 얼굴을 담았다.
“좋아? 정말로?”
젖은 숨을 내뱉으며 아사야가 되물었고,
“그래.”
가브리엘이 답했다.
“그렇게 해. 더는 이곳에 갇혀 살지 마, ……너는 그러지 않아도 돼.”
입술 끝을 올리며, 아사야는 제 드래곤을 있는 힘껏 껴안았다. 어린 인간이 훌쩍임을 멈출 때까지 가브리엘도 포옹에 동참했다.
두 팔 벌려 안을 때면 그는 아사야의 마른 체구를 아쉽게 느끼고는 했다. 조금이라도 더 그녀로 제 품을 채우고 싶은데 그러기에 아사야는 너무 작았다. 늘 아사야의 포옹이 그리운 이유가, 아마도 그래서일 거라고 가브리엘은 추측했다.
“아사야.”
그리고 말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 줘. 아기는 어디로 갔어?”
낮은 목소리로, 작게 물을 적에 가브리엘의 커다란 손바닥이 그녀의 아랫배를 누르고 있었다. 정확히는, 아랫배에 넣어 둔 쿠션을 납작하게 매만지고 있었다.
세상 모두에게 통해도 가브리엘은 속지 않을 방법인 것을, 아사야는 알았다. 벌써 십 년 전에 담요로 선보였던 연극을 그가 잊었을 리 없었다.
아사야는 두 눈을 꾹 감았다. 뜨거운 눈물이 그녀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가브리엘의 셔츠에 얼굴을 묻으며 그녀는 더운 숨을 달싹거렸다.
그에게 거짓말을 한 일을, 아사야는 후회했다. 여섯 달이나 남았다고 하지 말걸, 더 많이, 더 자주 독촉할걸, 그래서 아기 이름을 대충이라도 얼른 짓게 만들걸…… 후회가 아사야를 울게 했다. 그랬더라면, 헤어지는 순간 제 아이에게 그 이름을 불러 줄 수 있었으리라.
그러나 이제 그녀는 더욱 큰 거짓말을 가브리엘에게 전해야 했다. 절대로 용서받지 못할, 끔찍하고 못된 거짓말로 제 연인을 속이고 떠나보내야 했다.
“가브리엘, 부탁이 있어…….”
눈물 젖은 아사야의 두 뺨을, 가브리엘이 큰 손으로 닦아 주었다. 방울져 흘러내린 눈물이 그의 엄지를 흠뻑 적시고도 남았다.
저를 두고 달아나겠다고 말했는데, 가브리엘은 서운한 눈치라곤 보이지를 않았다. 다만 그는, 벌써부터 아사야를 그리워하고 있었다. 우는 그녀를 걱정했고 납작해진 배 속에 든 아기의 행방을 염려했으며,
“무엇이든 해 줄게. 울지 마, 아사야.”
다정하게 속삭였다.
입술을 짓씹으며 아사야는 숨을 골랐다. 숱한 생각과 감정들이 넘쳐흐르는 탓에 제대로 목소리를 내기가 어려웠다.
“가브리엘, 네가 미끼가 되어 줘야 해.”
그러나 눈물을 못 그칠지언정, 아사야는 해야 할 말을 모르지는 않았다.
더 이상 아사야는 거짓말에 소질이 없던 순진한 아가씨가 아니었다. 거짓말과 연기는 어느덧 아사야의 일상이었다. 세일산의 성씨를 달고 살아남고자 버둥거린 끝에 그녀는 왕을 속였고 왕자를 속였으며, 이제는 제 연인을 속여야 했다.
“내가…… 너를 두고 떠나는 이유가 있어, 가브리엘. 더 지체했다가는, 나도 우리 아이도 죽임을 당할 게 분명해. 그래서…….”
‘우리 아이’.
간단한 말이 가브리엘의 이성을 마비시켰다. 그 말의 뜻이 무언지 이해하긴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긴 시간을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제 것으로 여긴 적 없는 두 단어를 받아들이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우리 아이?”
앵무새처럼,
“우리 아이…….”
가브리엘이 아사야의 말을 반복했다. 그의 손이 아사야의 배 위에 다시 놓였다. 납작해진 배를 보듬는 손길에 깊은 애정이 실렸다.
아사야는 가브리엘의 커진 눈동자에 비친 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의 보라색 눈동자를 거울처럼 들여다볼 때만큼, 그녀 스스로가 어여쁘게 느껴진 일이 없었다. 가브리엘의 눈에 비친 그녀는 남들이 흔히 말하는 ‘아름다운 여자’가 아니었다. 가브리엘의 눈에 비칠 적에 그녀는, 사랑스럽고 귀여운 어린 인간, 작고 어여쁜 연인이었다.
“우리 아이.”
가브리엘이 또 한 번 속삭였다. 아사야는 그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화하는 것을 기적처럼 올려다보았다. 두 눈 가득 눈물이 넘실거렸다가, 미간을 찡그렸다가, 입술 끝을 올리며 그는 웃었다. 희고 가지런한 이에 환한 기쁨이 걸렸다. 복잡한 감정을 거침없이 드러내는 그의 얼굴은 아사야의 눈에 예뻤고, 바보 같았으며 사랑스러웠다.
그런 가브리엘에 대하여 아사야는 속속들이 알았다. 제가 어떤 말을 해야 그가 속을지, 무엇이 그를 움직이게 하고 살아가게 하는지 모를 수가 없었다. 이토록 숨김없이, 저를 향한 애정을 드러내는 가브리엘이었다.
“나…… 아기랑 같이 왕성을 빠져나가려고 해. 그러려면 네가 먼저 출발해야 해. 왕성의 온 경비대가 너에게 집중해야 해. ……나를 위해 그래 줄 수 있어?”
‘나를 위해’, 그 말 하나면 충분했다.
‘아사야를 위해’, 가브리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말의 망설임조차 없는, 확신에 찬 동작이었다. 어린 인간과 제 아이를 위해서라면, 발락이라 불리던 검은 짐승은 못 할 일이 없었다. 미끼가 되어 창을 맞고 사냥을 당해야 한대도, 그럴 만한 가치가 있었다.
그 끝없는 애정으로 인해 아사야는 통증을 느꼈다. 그를 버려두고 떠나는 척 연기하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타오르고 폐가 구겨지는 듯했다. 바보처럼 그러겠노라, 약속하는 가브리엘이 미웠다. 너를 버리고 간다는데 대체 뭐가 좋으냐고 소리를 치고 화를 내고 싶었다.
“그럼 날아가, 멀리…….”
대신에 아사야는 그를 속였다.
“최대한 멀리 날아, 서쪽으로 가. 사막 도시가 나올 때까지 날아가면 돼. 알지? 나젤탄으로 가는 길……. 나젤탄을 향해서 계속해서 나는 거야……. 최대한 오래, 더 멀리 떠나. 절대로 누구에게도 잡히지 말아 줘.”
이제 그들에게 ‘나젤탄’이란 마치 고향과 같은 단어였다. 그들이 사제였더라면 나젤탄은 천국 즈음 되었으리라. 그곳으로 함께 떠나는 여행을, 가브리엘은 기대했었다. 꿈결처럼 속삭이는 아사야의 말에 귀 기울이며, 눈을 감고 없는 상상력을 동원한 적도 여러 번이었다.
“알았어, 아사야.”
가브리엘이 대답했다.
적어도 그 방향으로 날아 볼 수 있게 되었으니,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운이 좋아 오래도록 붙잡히지 않는다면 그는 바다 위를 날 수 있을지도 몰랐다. 힘을 빼앗기기 전에는 단 한 번도 굳이 바다를 보러 간 일이 없었지만 요즘은 달랐다. 해변을 꿈꾸고 파도를 선망하는 아사야의 곁에 있다 보니 저에게도 그녀의 소망이 옮은 게 분명했다.
“최대한 오래, 더 멀리 날 거야. 네 말대로 그럴 테니 울지 마.”
아사야의 작은 얼굴을, 가브리엘이 제 두 손으로 감쌌다. 하여간에 그의 어린 인간은 눈물이 너무 많았고, 마음이 너무 약했다. 그로서는 소원을 이루고, 그녀는 자유로워지며, 그들 사이 아이는 행복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 조금도 나쁘지 않았다.
“괜찮아, 아사야.”
고개 숙여, 가브리엘이 아사야의 콧대에 제 코끝을 맞댔다. 그녀의 젖은 숨이 간지럽게 느껴졌다.
“가브리엘, 언젠가…… 다시 너를 만날 거야. 우리…… 다시 만나는 거야, 약속해.”
아사야가 속삭였다. 그러고는 가브리엘의 손을 가져가, 그의 새끼손가락에 제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예전에도 아사야는 같은 약속을 내건 바 있었다. 다시 너를 만나리라고, 너를 되찾겠다고…… 어리고 절박하던 모습을 떠올리며 가브리엘은 애써 입꼬리를 올려 보였다.
“사랑해, 가브리엘.”
아사야의 부드러운 입술이 가브리엘의 턱과 뺨과 콧등에, 그리고 입술에 닿았다. 제 흔적이 영원히 지워지지 않길 바라는 사람처럼 그녀는 오래도록 입술을 내리누르다가, 어렵게 떼어 냈다.
가만히 아사야의 두 눈을 바라볼 뿐 가브리엘은 대답하지 않았다. 사랑해, 아사야……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문장이 혓바닥 위를 맴돌았지만 내뱉을 수 없었다. 제가 그렇게 고백하면, 마음 약한 어린 인간이 저를 버리지 못할 것만 같았다. 그녀가 자유를 찾아 떠나겠다던 말을 무르고 저를 위해 무얼 희생할까 봐, 그것이 걱정됐다.
굳게 입을 닫은 채, 가브리엘이 마지막으로 보인 동작은 아사야의 머리칼을 넘겨 주는 것뿐이었다. 그것을 끝으로 그는 인사도 없이 돌아섰다. 계단을 밟아 망루로 통하는 문을 열었으며, 저를 올려다보고 있을 어린 인간을 살피지 않고 걸어 나갔다.
그제야 분한 듯 더운 숨이 그의 코 밖으로 빠져나왔다. 사실 싫었다. 할 수만 있다면 저를 버리고 가지 말라고, 아사야의 무릎을 쥐고 매달리고 싶었다. 너를 보지 않고는 단 하루도 견딜 수 없을 것이라고, 부디 곁에 남아 달라고 빌고만 싶었다.
이를 악물고 두 눈을 내리감으며 가브리엘은 서서히 폴리모프를 풀었다. 모습을 바꾸는 데에만 다시, 거친 숨을 골라야 하는 게 그의 처지였다. 때문에 그는 아사야를 따라 떠날 수 없었다.
‘멀리…… 미끼가 되어서 최대한 멀리.’
어린 인간을 위하여 가브리엘은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고자 했다. 검은 날개를 펼치자마자 그는 성난 숨을 뿜으며 돌바닥을 박찼다. 그리고 날아올랐다. 저 홀로 외출한 드래곤이 돌아오지 않는다면, 군인들이 금세 몰려들 것이었다.
가브리엘은 제 육신이 이미 아사야에게 길들여졌다고 생각했다. 안장도 차지 않고 등 위에 공주를 태우지도 않고 홀로 하늘을 날자니 어색한 탓이었다. 그 감각이, 가브리엘은 마음에 들었다. 아사야의 빈자리를 느끼는 한 그는 그녀를 기억할 수 있었다.
죽는 날까지 그런 방식으로나마 그녀를 기억한다면 그 삶 또한 나쁘지 않을 것이었다.
허공에 뜬 채 잠시간, 가브리엘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하늘에서 살펴서는 아사야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한 번만 더 안을걸.’
가브리엘의 후회는 오직 그뿐이었다.
.*. *. *. *. *. *.
왕성 안에 아사야 세일산의 발이 향할 곳은 한 군데뿐이었다. 텅 빈 복도를 가로질러 그녀는 야베스 세일산의 금고 앞에 도착했다. 문고리를 대신하여, 신화의 한 장면을 새겨 넣은 부조가 펼쳐졌다.
그녀가 손을 뻗기도 전에 콘클라베가 제 목을 돌출시키고는, 좌로 비틀었다. 둔탁한 소리를 내며 벽화가 반으로 갈렸다.
두 손과 어깨로 힘껏 밀어, 아사야는 금고 문을 열었다. 홀로 들어선 야베스의 금고는 전과 다른 분위기로 아사야를 맞이했다.
등 뒤로 닫히는 문소리는 더는 공포스럽지 않았으며, 아사야는 제가 원하는 모든 것이 이 안에 존재함을 알았다. 잘못된 선택으로 흘렸던 그녀의 혈흔이 이곳에 있었으며, 가브리엘이 앗긴 힘이 이곳에 있었다.
가장 먼저 아사야는 유리관 앞에 섰다. 그 속에 뜬 마도구가 그녀의 오랜 갈증을 알기라도 하는 듯, 시커먼 빛깔을 뽐내고 있었다. 가브리엘의 마력을 움켜쥐고 오래도록 놔주지 않는, 육면체의 덩어리 하나를 위해 먼 길을 돌아온 아사야였다.
떨리는 손으로, 아사야는 금고 안을 잠시 헤맸다. 마침내 그녀가 찾아낸 것은 금고의 구석 벽면을 장식하던 도끼였다. 손잡이에 붉은 보석이 박힌 묵직한 도끼를, 아사야의 두 손이 움켜쥐었다.
마도구 앞까지 도끼를 끌고 와, 아사야는 두 발을 단단히 딛고 섰다. 그러고는 유리관을 향해 있는 힘껏 휘둘렀다. 그녀의 드레스 팔뚝이 찢어지는 소리를 냈다.
거친 파열음과 함께 두꺼운 유리 위에 금이 생겼다. 안간힘을 쥐어짜낸 결과였다. 제 힘을 견디지 못하고 아사야는 바닥 위에 넘어졌다. 아름답게 주름 잡아 올렸던 드레스 스커트에 도끼날이 걸렸다.
두 눈을 부릅뜬 채, 아사야는 유리관의 금을 노려보았다. 조그맣게 파인 금이 그녀를 아주 못난 존재인 양 깔아 보는 듯했다.
헐떡거리며 아사야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널브러져 있을 시간이 없었다. 가진 힘을 짜내어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놓쳤던 도끼를 집어 들자, 날에 꼬였던 드레스의 올이 뜯기며 찢어지는 소리를 냈다. 첫 번째 시도 만에 아사야의 몰골은 엉망이 됐다.
‘상관없어.’
묵직한 도끼를 높이 쳐들며 아사야는 작은 비명을 질렀다. 도끼를 드는 것만으로 팔뚝이 덜덜 떨리는데 어디에서 그것을 휘두를 기운이 나는지 몰랐다.
두 번째로 도끼를 휘두르자, 유리관의 금이 번쩍거리며 사방으로 갈라졌다. 중력의 힘을 못 이겨 도끼날이 바닥에 처박혔다.
허리를 숙이고 아사야는 숨을 몰아쉬었다. 나뭇잎처럼 우후죽순 번진 금을 보자 기운이 솟았다. 무얼 망가뜨리며 힘을 얻기란 처음 겪는 일이었다.
세 번째 도끼를 휘두른 순간, 유리관은 마침내 얼음처럼 부서지며 박살났다. 사방으로 유리 파편이 흩어졌고 날카로운 소음을 냈다.
“헉……, 헉…….”
두 눈을 질끈 감고서 아사야는 작게 헐떡거렸다. 도끼를 놓으며 손을 펼치자, 힘준 탓에 창백해진 손바닥에 얼얼하게 쥐가 올랐다.
천천히, 아사야는 마도구를 바라보았다. 속에 품은 마력의 여파로 땅을 밀어내며, 그것은 허공에 떠 있었다.
마도구와 그녀 사이에 마침내 어떠한 장애물도 없었다.
폼에게서 받아 희망처럼 품고 다닌 단검을, 아사야는 뽑아 쥐었다. 그리고 제 눈높이에 뜬 마도구를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 깨달았다. 이 마도구는 그녀가 스물두 해 평생을 살며 파괴한 유일한 물건이 될 것이었다.
검을 쥐어 본 경험이 없어, 아사야는 어릴 적 기억을 더듬어야 했다. 애써 떠올린 동작은 유년기 가디엘이 목검을 잡던 것과 닮아 있었다. 날이 위를 향하게끔 오른손에 단단히 쥐고, 왼손으로는 오른손을 감싸는 식이었다.
어색하지만 힘주어 기합 소리를 내며, 아사야는 허공을 향해 단검을 휘둘렀다.
상상한 것과 달리 단검은 마도구 한 면에 쉽게 꽂혔다. 빨려 들어갔다고 믿어도 될 수준이었다. 몇 달을 기다려 온 순간이, 삽시간에 지나 버렸다.
폼 에드레이가 얼마나 훌륭한 마법사인가를, 아사야는 몸소 느꼈다. 시커먼 외곽에 백색 마법진을 드러내더니, 마도구는 천천히 벌어지기 시작했다. 여섯 방향으로 서서히, 납작한 면면이 떨어져 분리되더니 감춰 두었던 중앙 공간을 드러냈다. 그곳에 영원한 밤처럼 시커먼 돌이 있었다. 마도구의 파편은 죄 바닥으로 낙하했지만, 검은 돌만큼은 그 자리에 떠 있었다. 둥그렇고 작은 그것이, 아사야의 눈길을 앗아 갔다.
잠시간, 아사야는 숨을 멈췄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제 눈이 멀어 버릴 듯 검은 마석이었다. 한때 마석은 전쟁의 불씨를 꺼트린 군용 무기였으며, 가브리엘을 상처 입은 채 추락하게끔 종용한 악당이었으며, 반드시 저에게로 가져와 해체를 맡겨 달라며 폼 에드레이가 걱정 어린 조언을 쏟던 물건이었다.
제 손안의 단검을, 아사야는 힘껏 움켜쥐었다. 힘을 준 탓에 손바닥이 얼얼했고 팔뚝이 후들후들 떨렸다.
깊게 들이쉰 숨이 아사야의 흉곽 가득 찼다. 가브리엘에게 자유를 돌려주는 순간은 무척 달콤하고 설렐 것이라고 생각했던 아사야였다. 그러나 그의 몸뚱어리와 정확히 동일한 빛깔의 마석 앞에 선 순간, 아사야가 느낀 것은 두려움이었다.
‘아버지…….’
베데르 아졸을 태워 죽인 레드 드래곤의 마력이 불현듯 아사야의 머리를 채웠다. 우울한 얼굴의 기사들이 내려놓던 관의 소리가, 섬뜩하리만치 가볍던 것 또한 기억났다. 그의 장례를 치르는 순간까지도 가디엘은 그녀가 제 아버지의 시신을 바라보길 허락하지 않았다.
가디엘의 손에 밀려 뒤로, 뒤로 물러서던 당시에는 그저 서럽기만 하던 아사야였다. 아버지와의 마지막 인사조차 허락받지 못하는 이유를 그때는 몰랐지만, 이젠 알았다. 시신이라고 부를 만한 유해조차도 관 속에는 들어 있지 않은 것이었다.
기사들이 불충하여 영웅의 시신을 수습하지 않아서는 아니었다. 그들이 아무리 노력하며 찾아도, 수습할 시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가브리엘의 마석이 저를 해치지 않으리라고는, 아사야는 확신할 수 없었다. 그녀가 아는 것이라고는, 저 역시 제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죽을 각오를 해야 한다는 것뿐이었다.
제 아버지와는 정반대의 목적으로 아사야는 검을 쥐고 섰다. 드래곤을 죽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를 살게 하고 자유로이 날게 하겠노란 소망을 위해서였다.
손의 떨림이 멎기를 기다리고 싶었지만 불가능한 일이었다. 몇 분이 아닌 몇 시간을 기다린다 해도, 생사의 갈림길에서 아사야는 떨지 않을 수 없었다. 겁에 질려 울먹이고 달아나고 싶어 현실을 원망하면서도 저지르는 수밖에 선택지가 없었다.
그래서, 아사야는 해냈다. 그녀 앞에 주어진 유일한 길을, 마침내 걸었다. 온몸의 힘을 실은 단검으로, 마석의 중앙을 찌른 것이었다.
기괴한 파열음이 났다. 여름날 벌레 우는 소리처럼 ‘치르르’ 떨리는 괴음과 함께 마석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예리한 단검을 세게 쥔 채 아사야는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무언가 달라지길 기다렸다.
그러나 어떤 일도 벌어지질 않았다. 마석이 갈라졌다. 그게 전부였다. 그 외엔 어떤 변화도 없었다. 온몸이 불길에 휩싸여 타오르는 일도, 뼈도 살도 남기지 않고 부서지는 일도, 제 영혼이 박살나고 쪼개지는 고통도 없었다.
“아냐…….”
혼란스러워, 아사야는 제자리에서 비틀거렸다.
“아냐, 왜……. 뭐야?”
허둥지둥하며 아사야는 박살난 마석을 향해 손을 뻗었다. 한데 모아 쥐자, 허공에 떠 있던 조각들이 손안에 들어왔다. 그것들을 제 손바닥에 올리고는, 쓰다듬고 만져 댔으며 한 손에 쥐고 흔들어도 보았다. 검은 마석은 그러나 부서진 그대로 존재할 뿐이었다.
이 이상 어떤 방법을 써야 마석을 개방시킬 수 있는지, 아사야는 알지 못했다.
“내가 어떻게 해야 해?”
아사야가 소리쳤다. 그러나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제 발로 걸어 들어온 야베스의 금고 속에, 그녀는 덩그러니 혼자였다.
“내가 어떻게 해야 해…….”
실패가 아사야를 무너지게 만들었다. 제자리에 쓰러지듯이 주저앉은 채 아사야는 허탈한 숨을 내쉬었다. 벅차오르던 설렘도 기묘한 카타르시스도 사라진 그녀의 마음 안에는 늘 그렇듯, 가브리엘만이 남았다.
“제발, 부탁이야……. 어서…… 가브리엘에게 자유를 줘, 네 주인에게로 돌아가…….”
부서진 마석의 파편에 뺨을 기대며, 아사야는 애원하길 시작했다. 돌아가, 있던 곳으로 가, 가브리엘에게로 가, 너 때문에 가브리엘을 속였어, 너 때문에 가브리엘을 상처 입혔다고…… 몇 차례 속삭여도 변화는 없었다.
탄식하며, 아사야는 손안의 파편에 눈물을 묻혔고 더운 숨도 불어 보았다.
“제발, 제발 부탁이야……. 이럴 순 없어, 이럴 수는 없다고…….”
그때 거친 소음이 아사야의 정신을 사로잡았다. 바깥에서부터 들려오는 소음은 누군가의 발소리, 그리고 말소리였다. 무어라 성난 외침이 들려왔다.
숨을 죽이고서 아사야는 터져 나오는 울음을 억눌렀다. 부디 저 소음이, 저를 찾으러 온 악마가 내는 소리만은 아니기를 바랐다. 달리 효과 없는 소망이었다. 그 악마와 결혼한 것이 그녀 자신이었으므로.
‘쾅’, 큰 소음을 내며 닫힌 문이 흔들렸다. 놀란 나머지 아사야는 손에 쥔 마석을 죄 떨어뜨렸다. 낯선 소리를 내며 마석이 그녀의 그림자 위에 놓였다.
떨리는 다리를 움직여, 아사야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닫힌 문을 바라보았다. 바깥에서 무어라, 문을 여는 주문을 외는 음성과 소란한 기척이 스며들어 왔다. 네 자식의 행방을 알려 주마……, 네 자식의 행방을 알려 주겠다고…… 그러나 콘클라베는 끄떡도 않고 닫힌 채였다.
“탐무즈…….”
저와의 약속을, 그가 지켜 주고 있었다.
오만상을 헝클이며 아사야는 고개 숙였다.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간 순간 그녀는 내일의 일을 장담할 수 없었다. 저는 이제 어떻게 되는 것인지, 무엇을 해야 하고 할 수 있는지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다른 계획이나 번뜩이는 수 따위도, 여태껏 부려 온 한 가닥 재량조차 떠오르지 않았다.
절망과 슬픔 속에 아사야는 금고 안을 보았다.
“…….”
마네킹에 전시된 웨딩드레스가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옆에는 피 묻은 내의가 걸려 있었다. 마치 어제 흘린 피인 양, 아사야는 지난날의 통증을 생생하게 느꼈다. 바보처럼 거짓말에 속은 스스로를 책망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이젠 아니었다.
“난 잘못하지 않았어…….”
입을 다문 채 아사야는 이를 갈았다. 빠득거리는 소리와 함께 그녀의 근육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단검을 집어 들고, 아사야는 제 허리를 꽉 죄던 드레스 앞으로 다가갔다. 그러고는 검을 높이 쳐들었다. 날카로운 검날이 드레스의 가슴에 꽂혔다. 아사야가 두 팔을 크게 휘두르자 드레스의 가슴부터 어깨, 스커트가 엉망으로 찢겼다. 금사가 끊기고 올이 풀리며, 가느다란 실에 장식된 보석 알갱이가 모래처럼 떨어졌다.
숨을 몰아쉬며 아사야는 피 묻은 내의를 바라보았다. 단검을 움켜쥐고 그녀는 울먹거렸다. 이상한, 연민이 그녀의 속을 채웠다. 그 순간 아사야는 자기 자신이 불쌍했다.
이 인생이 제 것이 아니었더라면, 블란테나 엠마오, 사라나 유라, 하다못해 제가 모르는 어떤 여인의 삶이었더라면 아사야는 그녀를 동정했을 것이었다. 그 신세를 처참하다 말하고 인생을 안타깝게 여기며 어떻게든 돕고자 손을 뻗었으리라.
남이 아닌 아사야 자신을 위해서라고 못 할 이유는 없었다.
어떤 방식으로건, 그녀는 해방을 원했다.
단검의 검날이 피 묻은 속치마를 엉망으로 갈라놓았다. 지난날 그녀를 옭아매며 절망의 도가니로 밀어 넣던 장식들은 그저 옷가지에 지나지 않았다. 그것들을 해치고 망가뜨리기란 우스울 정도로 쉬웠다.
숨을 깊게 들이쉬며 아사야는 몸을 돌렸다. 이 금고 속에는 비단 그녀가 원하던 물건만 있지는 않았다. 그 외의 모든 것은 야베스 세일산이 아끼며 사랑하는 물건들이었다.
단검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 *. *. *. *. *.
주문을 외고 반조의 목을 꺾길 수차례, 야베스 세일산은 분노로 인해 목을 시뻘겋게 붉혔다. 마법으로 만든 물건에 고장이란 있을 수 없었다. 그의 콘클라베는 의도적으로, 그를 무시하며 버티고 있었다.
모순되게도 그의 금고를 잠근 콘클라베는, 금고 속 모든 물건의 값을 따져도 구할 수 없게 귀한 물건이었다. 그런 물건을 망치고 파괴할 이유가 야베스에겐 없었다. 그 물건이라는 것이, 주제를 모르고 저를 모욕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낼 줄 아는 소리라고는 죽음의 순간 마지막으로 흘린 신음성뿐인 콘클라베였다. 그의 목에 칼을 쑤셔 넣으며 야베스는 같은 소리를 또 한 번, 두 번, 세 번째 이어 들었다. 네 번째 칼을 찌르자 콘클라베의 목은 너덜너덜해졌고 왕자의 검날은 둔한 소리를 내며 두 동강이 났다.
망가진 검을 집어 던진 뒤, 야베스는 구둣발로 문짝을 걷어차는 동시에 칼집이 난 목을 비틀었다. 그러자 마침내, 콘클라베의 머리가 분리되고 목이 박살났다.
집념으로 뜯어낸 황동 머리를, 야베스가 던졌다. 깡,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반조의 머리가 돌바닥에 부딪혔다. 넋이 빠져나간 콘클라베는 입을 벌린 채, 본래 무엇도 깃든 적 없던 것인 양 거친 조각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금고 문의 이음매가 드러났다. 야베스 세일산이 두 쪽 문에 손바닥을 대고는, 밀어젖혔다.
그러자 그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제 아내의 뒷모습이었다. 헝클어진 머리칼이 허리까지 흘러내렸고 귀와 목에는 식은땀이 묻어나는 채, 그녀는 등을 돌리고 서 있었다. 그녀 외에, 모든 것이 무너지고 쓰러진 채 널브러져 있었다.
금고 사방에 유리 파편이 즐비했고 갈가리 찢겨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된 웨딩드레스는 천 조각에 지나지 않았다. 그가 아끼며 가두어 놓은 정령의 우리는 개방된 채 속이 비었다. 거장의 손을 거친 유화 작품은 캔버스 틀이 부러지고 천이 밟힌 채 흐물거렸다.
그 광경이 어떤, 달리는 말이라도 되는 양 야베스에게 닥쳐왔다. 충격이 그의 머리를 걷어차고 지나가 버렸다.
분노로 인해 야베스는 크게 몸을 떨었다.
“아사야 세일산.”
벌벌 떨리는 목구멍 안에서, 침착한 척 내뱉느라 쉰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너는…… 네가 무슨 짓을 저지르는지 모르는 거야. 감당할 수 없는 짓은 그만둬.”
말을 잇기 어려울 만큼 분노한 와중에도, 그의 눈은 재빠르게 움직였다. 아직 성한 물건들을 살피며 제가 입은 피해의 정도를 재기 바쁜 것이었다.
무너진 유리벽의 잔해로 인해 대다수 물건의 상태는 제대로 가늠하기 어려웠으나, 모로 쓰러진 장식장은 유리만이 갈라졌을 뿐, 그 속에 줄지은 마석과 작은 상자들이 아직 멀쩡했다.
그리고 천천히, 아사야가 몸을 돌렸다. 활짝 열린 문의 모양대로 사각형 빛이 그녀에게로 훅 끼쳤다. 그 순간 야베스 세일산은 아사야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는 제 눈앞에 선 여자가 제 아내가 맞기는 한가 의심했다.
아사야의 까만 머리칼이 엉망진창으로 풀린 채 이마 위로 헝클어져 있었다. 매일 아침 빗어 내리고 잘 때조차 어깨 위로 정돈하던 머리였다.
거친 숨을 고르느라 아사야가 상체를 들썩거렸다. 분노인지 슬픔인지 분간할 수 없는 감정이 뒤섞인 상태였다. 기분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일은 부끄러운 짓이라던, 공주는 어디에도 없었다.
전시된 인형처럼 치장이 완벽하던 드레스는 관절마다 올이 뜯기고 망가져 있었다. 늘 보송보송해 보는 이를 기분 좋게 하던 피부는 땀으로 흠뻑 젖고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들어 본 것 중 무거운 것이라고는 보석이 박힌 작은 가방이 전부이던, 보드라운 손안에는 도끼 손잡이가 들려 있었다.
“그거 내려놔, 아사야.”
야베스가 명령했다.
“전부…… 그만두고, 이리 나와.”
어리고 미숙한 아이를 달래는 듯한 말투였다.
기대하지 않으면 실망도 않을 수 있다던데, 틀린 말이었다. 기대하지 않고도, 아사야는 야베스 세일산에게 매번 실망했다. 그는 언제나 아사야를 좌절시키는 남자였다. 그녀가 무어에 소질이 있고 어떤 일을 해내건, 그는 그녀를 좌절시켜 납작하게 짓누를 것이었다.
도끼 손잡이를 쥔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손을 떨며, 아사야는 그것을 집어 들고자 했다. 그러나 야베스 세일산의, 창백하고 성난 눈이 저를 보는 순간 온몸에서 힘이 쭉 빠졌다.
“내게……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말아요…….”
떨리는 목소리로, 아사야가 속삭였다. 갑자기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제 사람들을 모두 안전하게, 각자 있어야 할 곳으로 떠나보낸 그녀였다. 적어도 저는,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해내었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그 결과가 성공이건 실패이건 더는 잃을 게 없었다.
그런데도 아사야는 무서웠다. 야베스 세일산이 저에게 그만두어라 명령하는 것이 무서웠고, 그가 다가와 저를 짓누르고 내리찍을 것이 무서웠다. 무기를 쥔 쪽은 오히려, 저인데도 그랬다.
고개를 푹 숙인 채, 아사야가 무어라 입을 벙긋거렸다. 그녀의 중얼거림을 듣지 못한 듯, 야베스 세일산이 한 번 더 손짓했다. 손에 쥔 것을 버리고, 제 옆으로 오라며 오른손을 까딱이는 식이었다.
그 손짓이 아사야를 미치게 만들었다.
“나는 할 수 없다고…… 바보 취급하지 말란 말이야!”
떨리는 두 팔로, 아사야는 도끼를 들고 쳐들었다. 그리고 야베스의 시선이 집착적으로 머무르던 장식장 위를 힘껏 내리쳤고. 그 순간 아사야는 처음으로, 그가 비명 비슷한 소리를 내는 것을 들었다.
숨을 헐떡거리며 아사야는 도끼를 내려놓았다. 깨진 장식장 밖으로, 박살난 상자 속에 있던 물건이 쏟아져 나왔다.
야베스 세일산의 유치 두 개가 아사야의 발치에 나뒹굴었다.
고개를 돌려 그를 본 순간, 아사야는 유리 파편 위로 나자빠졌다. 야베스의 손등에 뺨을 맞은 것이었다. 얼굴 반절이 불에 덴 듯 얼얼했다. 귓가를 울리는 이명을 들으면서, 아사야는 죽은 사람처럼 축 늘어졌다.
제가 저지른 짓에 놀란 듯 야베스는 손을 떨었다.
“아사야.”
그녀의 배 속에 아이가 든 것을 뒤늦게 기억해 낸 것이었다. 두 눈을 크게 뜨고서 그는 쓰러진 아사야의 뒤로 다가갔다. 천천히, 말라빠진 아내의 어깨를 잡고 몸을 돌렸다.
“너.”
놀란 숨이 짧게, 그의 코 밖으로 빠져나왔다.
“네 배…….”
맥없이 풀린 눈으로, 아사야는 야베스 세일산을 올려다보았다. 그가 이제야 저를 똑바로 본다는 것이 웃기고 슬펐다. 그래서 아사야는 웃었고, 울었다. 망가진 금고 안의 전리품들을 살피느라, 아내의 커다랗던 배가 움푹 들어간 것을 뒤늦게 눈치챈 남자였다.
“어떻게 된 거야? 너, 내…… 내 아이를 어쩐 거야?”
아사야는 그런 남자에게 제 인생을 맡기고 싶지 않았다. 그런 남자의 품에 안기고 싶지 않았으며 그런 남자의 옆자리에 매일 밤 눕고 싶지 않았다.
기침을 콜록거리며, 아사야가 입을 열었다.
“내 꼴을 봐요, 왕자님…….”
하얗던 이에 피가 고여, 잇새가 온통 빨갰다.
“‘대륙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 지금 내 모습이 그렇게 보이나요? ……당신에겐 나를 가질 자격이 없어요. 난 한 번도 당신 것이었던 적이 없어……. 당신에겐 어떤 여자도, 자식도 어울리지 않아.”
놀란 듯 굳은 야베스의 손에서 서서히 힘이 빠져나갔다. 제 것인 줄 알았던 자식이 사라진 것과 아내가 저를 사랑하지 않는 것, 그가 둘 중 무엇에 더 충격을 받았는지 아사야는 알고 싶지 않았다.
바닥을 기어 그에게서 달아나는 것이 우선이었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질 않아, 아사야는 느린 속도로 야베스의 발치에서 벗어났다. 금고 구석을 향해 기는 그녀의 드레스를, 울분으로 붉어진 손아귀가 움켜쥐었다.
“악!”
끌려가지 않으려 버틴 끝에, 아사야는 유리 조각에 손바닥을 베이고야 말았다. 깊이 베인 손바닥에서 피가 왈칵 새어 나왔다. 엎어진 채, 아사야는 몸을 가만히 웅크렸다. 그녀가 반항을 멈춘 줄로 알고, 야베스가 맨바닥에 침을 뱉었다.
그 순간 아사야는 상체를 최대한 웅크리고 두 손을 모은 채였다. 손바닥 안에는 줄을 달아 목에 걸고 다니던 흑구슬이 숨어 있었다.
“……가브리엘과 다시 만나게 해 주세요, 그와 내게 영원한 이별은 없게…….”
절박한 기도가,
“영원한 이별은 없게 해 주세요, 영원한 이별이 없게…….”
쉼 없이 새어 나왔다.
야베스의 두 눈에 불똥이 튀었다. 그에게 있어 아사야 세일산은, 어디까지 분노할 수 있나 그 자신을 시험하는 도구 같았다. 손을 뻗어, 그는 아사야의 머리채를 움켜쥐었다. 비명을 지르면서도 아사야는 주문을 마쳤다.
그가 구슬을 빼앗아 쥐자 목걸이 줄이 팽팽해졌다. 아사야의 턱 밑에 그 줄이 단단히 걸렸다.
“컥……, 허억…….”
목이 조여 바둥대는 아사야를 무시한 채, 그는 타오르는 눈동자로 흑구슬을 살폈다. 흠뻑 적신 그녀의 피가, 삽시간에 구슬 안으로 흡수되었다. 그러고는 사라졌다.
이루어진 것이었다, 지난날 그 자신이 빌었던 소원처럼.
“…….”
제가 선물한 물건에 대고 마물과의 재회를 소원으로 빈, 그녀를 이해할 수 없었다. 도대체 왜 그 드래곤에 집착하는 것이냐고, 묻고자 입을 열었다가 그는 우두커니 멈췄다.
굳이 지목하여 집요하게 받아 내던 ‘예물’이, 그의 위신을 핑계 삼아 꾸며 놓던 드래곤의 방이, 매일같이 들락날락대며 제 곁에서보다 많은 시간을 보내던 베데르 성이, 반나절 만에 납작해진 아사야의 배가, 순서대로 그의 머릿속을 스쳐 지났다.
“‘애정의 증표’라고?”
분을 이기지 못해 떨리는 목소리로, 그가 물었다.
“애정에 증표가 필요하니까…… 금고에 출입하게 해 달라고…….”
그제야, 그의 눈앞에 아사야 세일산이 똑바로 보였다. 그에게 속아 결혼한 여자, 예물을 얻기 위해 그의 비위를 맞추던 여자, 애초에 드래곤에게만 관심이 있던 여자, 그를 증오하며 두려워하고, 그가 아닌 마물을 더 원하는 여자…….
참지 못해, 야베스 세일산이 소리를 내질렀다.
“왜 내가 아닌 거야?”
그런 여자는, 야베스 세일산이 알던 그의 아내가 아니었다. 아사야 세일산은 그를 사랑하지 않았다. 단 한 번도, 그를 원하여 살핀 적 없었다.
“왜 내가 아니라 그 더러운 드래곤이냐고!”
언제고 그의 분노는 엉뚱한 방향으로 표출되고는 했다. 그녀를 향한 증오를 품은 순간 야베스 세일산은, 쓰러진 아사야 위에 올라탔다. 그러고는 이미 넝마가 된 드레스를 뜯으려 했다. 다시 제 것 삼아, 제 여자로 취하고자 했다.
목을 죄는 목걸이 줄을 손으로 긁어 풀어내며, 아사야는 기침 소리를 내고 헐떡거렸다. 마른 팔과 작은 주먹으로 되는대로, 제 위에 앉은 남자를 때리고, 뿌리치며 긁어 댔다.
거친 반항과 함께 아사야가 외쳤다.
“싫어!”
악에 받쳐 지르는 소리였다.
발작하듯 그녀의 주먹이 야베스의 팔과 어깨와 턱을 쳤다. 얼굴을 비껴 맞고도 야베스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다만, 제 얼굴을 친 그녀를 믿을 수 없다는 듯 빤히 내려다볼 뿐이었다.
이를 악물고, 아사야가 소리쳤다.
“내가 죽는 한이 있어도, 다시 태어나 열 번을 당신과 결혼한다 해도, 나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을 거야.”
저를 깔보는 시퍼런 눈동자에 아사야는 부르르 떨었다. 발끝부터 머리 위로, 소름이 훅 올랐다.
“당신도 날 사랑하지 않을 테니까…….”
한 침대에서 일어나고, 잠들고, 다시 일어나는 매일매일을 반복하면서, 아사야는 하루에도 열 번씩 그의 눈을 마주했다. 그러나 단 한 번도, 그 눈동자를 통해 저를 향한 감정을 읽어 본 일 없었다.
“정말…… 모르는 거야? 야베스 세일산, 당신은 날 사랑하지 않는다고……. 난 당신에게 사랑받은 적이 없어.”
유린과 폭행만을 당했을 뿐이라고, 아사야는 조용히 덧붙였다. 그러자 야베스는 몇 초간, 고장 난 인형처럼 꿈쩍도 않았다. 그녀의 마른 배 위에 앉은 채 텅 빈 눈을 번들거리며, 그는 거친 숨을 내쉴 뿐이었다.
침묵을 부수며 갑자기, 그가 바닥을 향해 팔을 뻗었다. 그의 손이 붙잡아 쥐는 은색 단검을 아사야가 눈으로 좇았다. 그러나 빼앗아 쥐기에는 이미 늦은 뒤였다.
날카로운 단검을 움켜쥐고 그가 두 팔을 높이 들었다. 일순 아사야는 제가 찢어 놓은 웨딩드레스를 떠올렸다. 그 모양과 같이, 그가 휘두른 칼날이 제 가슴을 찌르고 갈라놓을 것이었다.
눈을 질끈 감고서 아사야는 이를 악물었다. 그러자 신음성이 낮게 울렸는데 그녀 자신의 소리는 아니었다. 뜨거운 액체가 뺨에 튀었으나 그 역시 그녀의 피가 아니었다.
떨림을 감추지 못하고 아사야가 눈을 떴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화려한 깃대였다. 빨강과 진남색 물감으로 칠해진 깃대가, 화살 끝에 묶여 있었다. 이어 제 위에 올라탄 야베스 세일산의 몸이 보였다. 천천히, 그는 화살이 몸에 꽂힌 채 뒤로 쓰러졌다.
찢어진 손바닥으로 바닥을 디디며, 아사야는 그의 다리 밑에서 엉금엉금 기며 벗어났다. 고개를 들어 문을 본 순간에는 사렙탄 세일산과 시선이 마주쳤다. 시뻘겋게 달아오른 두 눈을 충격으로 부릅뜨고서, 그는 아사야를 보고 있었다.
드레스가 찢기고 고통 어린 얼굴로 울고 있는, 아사야 세일산은 베데르의 딸이었다. 손과 팔에 피를 흘리며 기는 그녀는 왕성의 공주였다.
“…….”
사렙탄의 놀란 얼굴이 분노로 인해 시뻘겠다. 달아오른 피부 탓에 백색 수염이 더욱 희게 보였다.
충격받은 이는 사렙탄뿐만이 아니었다. 그의 어깨 너머에 선, 비아탄 아멕의 얼굴에는 비통함마저 묻어났다.
‘생벙어리 하인…….’
‘비아탄 경에게 전하라’며 건넸던 쪽지를, 아사야는 기억해 냈다. 왕과 왕자가 사냥터에 도착할 시간으로 짐작해 정오를 지나거든 보이라고 말한 것을 하인이 기억하고 지킨 모양이었다.
세게 당긴 여운으로 아직 떨리는 활시위에, 사렙탄은 두 번째 화살을 끼워 넣었다. 그의 팔이 활줄과 함께 팽팽하게 당겼다. 화살촉이 겨누는 방향엔 그의 아들이 엎어져 있었다. 흉곽 아래에, 사렙탄이 쏘아 보낸 첫 번째 화살이 박힌 채였다.
야베스의 목구멍에서 물이 끓는 듯한 신음이 새어 나왔다. 비스듬한 활촉 끝이 그의 폐부를 찌르고 있었다. 고통에 꿈틀거리면서도 그는 고개를 들어 사렙탄을 바라봤다.
“너를 그냥 두지 말았어야 했어……. 기회가 있을 때 너를, 진작 벌하고 쫓아내야 했어.”
활촉을 야베스의 이마 중앙을 겨누고서, 사렙탄이 말했다.
거대한 대륙의 왕이며 천지의 주인이라 불리며 칭송받고 살아온 만큼이나, 거둔 명예도 이룬 업적도 숱한 왕이었다. 그러나 오늘, 이 순간만큼 허무한 때가 그의 생애에 없었다. 지금, 그의 가슴 안에는 거대한 절망과 일말의 부끄러움만이 자리했다.
“야베스 세일산…….”
그 이름을 부르며 사렙탄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게 내 과오의 이름이다, 야베스. 너는…… 넌 나의 실패야.”
그러자 그의 과오가 무릎을 꿇어 보였다. 그의 실패가 눈물을 흘리며, 피 흘리는 상처를 내어 보였다. 허리를 억지로 곧게 세운 채 야베스는 느릿느릿, 무릎으로 걷다시피 하며 제 아버지에게로 다가왔다.
“폐하.”
그리고 애원했다.
“폐하, 저를 이해해 주셔야 합니다……, 모든 게 오해예요, 결단코 제 진심이 아닙니다. 아사야가……, 아사야 세일산이 간통죄를 저질렀단 말입니다!”
눈물과 침을, 그리고 피를 튀겨 가며 그가 외쳤다.
사렙탄의 눈이 일순 아사야의 마른 몸을 좇았다. 금고 방의 구석까지 기어가, 전신을 옹송그린 아사야는 가느다랗고 작아 보였다. 조그만 머리를 벽면에 기댄 채 그녀는 바닥의 유리 파편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틀 전 아침 문안을 전할 때만 해도 맑던 두 눈이 눈물에 젖어 몽롱했다. 찢어진 치마를 움켜쥔 두 손에서는 아직도 피가 흘렀다.
그런 아사야는 사렙탄의 사람 중 하나였다. 왕성의 모든 이들이 그의 사람이고 왕성에서 벌어진 모든 만남이 그의 귀로 흘러 들어가듯이, 아사야의 일거수일투족을 알기란 그에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공주의 생활은 안쓰러운 마음이 들 지경으로 잠잠하고 심심했다. 이렇다 할 사생활도 만나는 사람도 없어, 오죽하면 친구라고 자주 찾는 게 제 라이벌인 블란테 세일산이었다.
시간 날 때마다 제 아버지의 이름을 딴 성을 찾아가 죽은 이를 기억하듯이 그 정원을 가꾸고, 낮잠을 즐기고, 시녀들에게 그네를 태우는 공주였다. 그런 아이가 간통죄를 저지르다니 그처럼 근거 없는 모함일랑 난생처음 듣는 소리였다.
잠시나마 흔들렸던 사렙탄의 눈빛이, 다시금 매섭게 달아올랐다.
“내 앞에서, 네가 그따위 모함을 하며 저 애에게 칼을 겨눈단 말이냐? 베데르의 딸에게, 왕성의 공주에게…….”
활시위에 걸린 사렙탄의 손가락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두 눈을 부릅뜬 채 그는 제 아들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폐하, 제발…….”
무릎으로 기며, 야베스 세일산이 보다 가까이 사렙탄에게로 다가갔다. 왕성 안의 여느 기사보다 활을 잘 쏘는 사렙탄을 그의 아들이 모를 리가 없었다. 그는 한번 겨누었다면 상대가 금고 안에서 반항을 하건, 당장 일어나 복도를 질주하건 머리 중앙을 정확히 맞출 명사수였다.
그러니 그의 화살을 피하려거든, 멀리 도망쳐서는 안 됐다. 애초에 활시위를 당길 수 없게 가로막아야 했다.
“아버지, 제발…….”
눈물 흘리며 왕을 올려다보는 야베스 세일산의 입술이,
“살려 주세요.”
애원했다.
“살려 주세요, 아버지……. 아사야가 아이를 흘렸습니다, 그래서 잠시…… 잠시 저 역시 제정신이 아니었어요, 충격에 미쳐 그랬습니다. 제발, 제발 살려 주세요. 저를 벌하셔도 좋지만 제발…… 아버지의 손에 죽게 하지 마십시오, 부디…….”
낮게 신음하며 사렙탄은 팔을 떨었다. 그의 등 뒤에서, 비아탄 아멕이 무어라 저지하는 소리를 냈다. 그러나 사렙탄은 분노하였으며, 실망했다. 변함없이 제 모습 그대로인 야베스 세일산을 향한 분노였으며, 끝내 제 아들을 제대로 벌하지 못하는 그 자신을 향한 실망이었다.
사렙탄이 활줄을 놓았다. 그러나 그는 제 아들의 머리를 쏘지 않았다. 퉁겨 나간 화살이 허공에 잠시 떴다가, 바닥에 떨어진 게 전부였다.
“물러서십시오, 폐하!”
비아탄이 그를 향해 소리를 쳤고,
“야베스.”
사렙탄은 입을 열었다. 울며 애원하는 아들을 달래어 주려, 그에게 다른 처벌을 내리고자 벌린 입술이었다. 그러나 그의 입술 밖으로는 어떤 소리도 빠져나오지 않았다. 목구멍이 드러나게 입을 벌린 채, 그는 가느다란 숨을 천천히 내쉬었다. 한발 늦게, 나약한 신음성이 그의 입가를 타고 흘렀다.
야베스 세일산이 뻗은 단검의 손잡이가 그의 목젖 앞에 놓였다. 날렵한 검날 끝은 그의 목구멍을 관통하고 뒷목의 살을 뚫은 채였다.
두 눈을 시뻘겋게 붉히며 사렙탄은 제 아들의 얼굴을 내려다봤다. 정해 둔 거짓말과 몇 가지 표정 연기, 일의 순서를 전부 잊은 순간 야베스 세일산은 민낯을 드러냈다. 그럴 적에 그는 볼 위에 눈물 두 줄을 만들었을 뿐 무표정한 낯이었다. 궁금하시거든 가까이 보시라는 양, 제 얼굴을 아버지의 고개 앞에 내밀기까지 했다. 제 아버지를 마주하기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솔직한 순간이었다.
고통에 찬 숨이 사렙탄의 코나 입이 아닌, 목에 뚫린 구멍을 통해 식식거리며 새어 나왔다. 허공에 뜬 손을 떨기를 한참, 사렙탄 세일산의 몸이 무너졌다. 그의 두 무릎이 가장 먼저 땅에 닿았고, 두 팔이 어떻게든 기립해 보려 아들의 허리를 안았다. 제 아버지의 목에 단검을 쑤셔 넣은 것과 같은 방식으로, 야베스는 박아 넣었던 검을 뽑았다.
분수처럼 많은 피를 쏟으며 사렙탄의 몸이 바닥에 엎어졌다. 대륙의 왕, 천지의 주인이 제 아들의 망가진 전리품들에 둘러싸여 가슴을 펄쩍거렸다. 뭍으로 건져 낸 생선처럼 움직이던 것도 잠시였다. 수 초 만에, 그의 몸이 모든 동작을 멈추었다.
“아버지!”
문득 야베스가 외쳤다.
“아버지…….”
제 아버지의 피를 시뻘겋게 뒤집어쓴 채 야베스는 두 손을 내렸다. 그러고는 왕의 어깨와 가슴 위를 마구잡이로 더듬었다. 발작하듯 정처 없는 움직임이었다. 제 아들의 손이 가슴을 짓누르는 동안, 사렙탄은 눈을 홉뜨고 입을 쩍 벌리고서 움직이지 않았다.
자신의 계획이 일부 성공하였음을 야베스는 느꼈다. 어찌 되었건, 왕좌를 비워 내긴 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 사실에 기뻐해야 할지, 짜증을 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웃는 것도 찡그린 것도 아닌 미묘한 표정으로, 상처 입은 몸을 일으킬 따름이었다.
“검을 내려놓고 물러서라, 야베스 세일산.”
비아탄 아멕이 소리쳤다. 목덜미에 벌겋게 열이 오르고, 두 눈이 충격으로 젖은 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왕실의 법도를 따르는 기사였다. 숨이 끊긴 주군의 시체를 끌어안기보다는, 사태를 정돈하고 반역자를 잡아들이는 게 먼저였다.
비아탄의 외침대로, 야베스 세일산이 손에 쥔 검을 내려놓았다. 마도구를 해체한 하나뿐인 열쇠, 세련된 은제 장식을 왕의 피로 적신 단검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피에 젖은 손바닥을 가만히 들어 보이며 야베스는 저를 향해 검을 겨눈 비아탄 아멕을, 그의 뒤에 줄지어 선 왕실의 기사들을 바라보았다. 하나같이 검을 뽑아 들고 다가올 전투에 준비하기 바빴다.
눈앞에 펼쳐진 낯선 상황이 야베스에겐 조금도 놀랍지가 않았다. 왕성을 집으로 여기고 왕자로 살아오며 단 한 번도, 비아탄 아멕이라는 국민 영웅을 제 편으로 여겨 본 일이 없기 때문이었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야베스가 만나온 그는 차라리, 아버지의 총애를 쓸어 담는 자루였으며 제 잘못들을 일러바치는 고자질쟁이였다.
비아탄 아멕은 평생 야베스의 편이 될 수 없었다.
그러나,
“비아탄 경. 경께서는 왕의 오른팔이 아니십니까?”
그에게 제 입지를 빼앗기고 거둔 명예도, 받은 총애도 없이 허송세월하는 페드릭 바벨이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심장이 멈췄는데 팔이 살아 움직임은 불충이지요.”
페드릭의 예리한 검날이, 비아탄 아멕의 턱 밑에 놓였다. 몸을 굳힌 채 비아탄은 페드릭의 낯짝을 가만히 노려보았다. 왕실의 기사단장이라는 자가 기사도를 저버린 연유를,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길어 봐야 3년이었다. 왕실에서는 3년쯤 더 머무르다가, 본도 세일산의 즉위와 함께 수도를 떠날 비아탄이었다. 고작 3년의 세월을 기다리지 못해 반역을 저지르는 기사의 사고방식을, 비아탄으로서는 납득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페드릭 바벨에게는 앞으로의 3년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지나간 9년의 세월이었다.
천천히, 비아탄은 자신의 검날이 바닥을 향하도록 팔을 내렸다. 페드릭 바벨의 뒤에 선 기사들 역시 잘못된 충성을 맹세한 게 틀림없었다. 반역을 바로잡고 왕실의 규율을 지키기 위해 앞장서야 할 이들이 죄, 반역자의 뒤를 지키느라 바빴다.
비아탄 아멕의 목이 날아가기 일보 직전이었다. 질투로 두 눈을 벌겋게 붉힌 채 페드릭은 야베스 세일산의 명령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충분히 흥미로운 모습이었으나, 야베스는 고개를 돌려 제 아내를 먼저 살폈다.
누군가 구겨 던지기라도 한 것처럼, 아사야는 벽면 구석에 널브러져 있었다. 고개는 푹 숙였고 손과 발끝에는 움직임이 전혀 없었다.
호기심 많은 짐승처럼 고개를 갸웃거리며, 야베스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어떤 발악을 하건 아사야 세일산은 제 것이었다. 제 오빠의 목숨을 구걸하며 평생 네발로 기며 살아도 탐탁잖은 여자였다. 깨어난다면 가장 먼저 무어라 애원할까 그것이 궁금했다.
일순 그의 왼발에 구슬 조각이 차이고는 날아갔다. 야베스가 눈을 좁혔다. 그러고는 바닥에 놓인 투명한 조각들을 살폈다. 여러 갈래로 박살난 구슬은 그러나, 그의 머리 안에 없던 물건이었다. 텅 빈 유리구슬 따위를 금고 안에 모셔 둔 기억이 없는 것이었다.
갈라진 조각을 내려다보다 야베스는 난잡하게 흩어진 유리 파편들을, 그리고 마도구를 발견했다. 입구를 사방으로 벌린 마도구 속에는 있어야 할 것이 없었다. 검은 용의 그림자처럼, 끊임없는 밤처럼, 영원한 암흑의 빛깔로 시커멓게 그을린 끔찍하고도 귀한 마석이, 방 안 어디에도 보이질 않았다.
제 발에 차인 유리구슬이 본디 그 마석이었음을 알아채기까진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다만 야베스 세일산이 알 수 없는 것은, 마석을 떠난 마력이 어디로 갔느냐 하는 문제였다.
“……아사야.”
한 발, 그녀에게로 다가서려다 야베스는 걸음을 주춤거렸다. 빛 없이 어두운 그늘에 쓰러진 아사야 세일산의 그림자가 비이상적으로 시커멨다. 그녀는 의식을 잃은 듯 꿈쩍을 않는데, 그림자만은 팔과 발을 구르며 일렁대고 있었다.
“무슨…… 무슨 짓을 저지른 거야?”
외치며, 야베스 세일산이 그녀에게로 달려들었다. 그러나 그의 손은 아사야의 어깨를 움켜쥐지 못했다. 아사야의 어깨를 움켜쥔 것은, 벌떡 일어선 그녀 자신의 그림자였다.
시커먼 손에 잡혀 쓰러진 몸을 일으킬 적에, 아사야는 거친 숨을 뱉어 냈다. 검은빛이 그녀가 뱉은 숨을 타고 허공으로 빠져나왔다가, 그녀의 코와 입 안으로 다시금 스며들었다.
컴컴한 어둠에 안겨 일어선 순간, 아사야는 자신이 실패하지 않았음을 알았다. 가브리엘의 마력은 이미 구속을 벗어난 지 오래였다. 그의 어둠은 아사야의 그림자를 통해 그녀와 발을 맞대고 서 있었다. 쓰러진 그녀의 손바닥에 달라붙고 다리와 허리, 어깨를 타고 올랐으며, 장기와 피와 살을 채우며 그녀의 품에 안기고 동시에 그녀를 안고 있었다.
“…….”
소리 없이, 아사야가 입을 벌렸다. 두 눈을 크게 떴을 때 그녀의 태양 같던 눈동자는 시커먼 빛깔이었다. 그림자의 꼭두각시처럼 일어선 아사야의 발끝이, 중력에서 벗어난 존재처럼 허공에 떴다. 바닥에서 완전히 떨어진 그녀의 그림자 역시 괴팍한 신음성을 내며 허공에 섰다.
아사야가 두 팔을 넓게 벌렸다. 그녀를 따라 두 팔 벌린 그림자의 형체가 검은 새처럼 변모했다.
이내 아사야의 눈과 코와 입 밖으로 검은 마력이 터져 나왔다. 괴물 같은 소리를 내며 그림자의 크기가 불처럼 번지며 커졌다. 더는 커질 수 없을 거라 생각될 만큼 커지더니, 사각형의 방 안을 완전히 채웠고 그 속은 완전한 어둠이었다.
눈이 멀어 버린 줄로 착각한 기사들이 비명을 내질렀다. 거대한 그림자가 꼬리를 휘두르자 왕성의 벽이 무너졌다. 쓰러진 이들 여럿의 몸이 허공으로 튕겨져 나갔다.
산 생물처럼 꿈틀거리는 암흑을, 왕성 안팎의 하인들이 멍하니 올려다봤다. 곧이어 짐승처럼 울부짖는 소리와 함께 어둠이 사방으로 터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