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화 (9/16)

왕홀에 심긴 씨



 

본도 세일산이 열 살이고 야베스 세일산이 여덟 살이던 봄이 있었다. 왕비는 재치 있는 선물을 받았다며 사렙탄의 아침을 깨웠다. 제 침대에 놓인 인형을 내려다보며 사렙탄은 눈을 끔벅거렸다. 금색 가발을 씌우고 새파란 유리 눈알을 끼워 넣은 관절 인형은 잠결에 제 아들로 착각할 만큼 야베스와 닮아 있었다.

수도 내의 소문을 통해 막내 아이가 동화 속 왕자님처럼 그려지는 것을, 왕비는 재밌게 여겼다. 인형을 안고 미소 짓는 왕비를, 사렙탄 역시 즐겁게 바라보았다.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왕자는 흔히 동화 속 주인공이었다. 수도 밖으로만 나가도 대다수 국민들이 왕족들은 전부 금발에 푸른 눈이라고 믿었다.

전혀 신빙성 없는 믿음은 아니었다. 그들이 아는, 탄신 삼백 일을 넘기고 성벽 너머로 처음 모습 보이던 왕자의 모습이 하나같이 금발에 푸른 눈이기 때문이었다.

사렙탄 세일산만 해도 갓난아기 시절에는 금발에 푸른 눈을 타고났었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가 그렇고 그의 첫째 아들이 그렇듯이, 자라면서도 그 모습을 유지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세일산 왕가에 금발 유전자가 있기는 하였지만, 배냇머리가 빠지고 나면 갈색 머리가 자라곤 했다.

그런데 둘째 아들인 야베스 세일산은 달랐다. 그는 날 적처럼 밝은 금발과 새파란 푸른 눈동자를 유지했고, 어딜 가건 이목을 받았다. 어린 나이에도 야베스는 시선을 즐길 줄을 알았다. 저도 제 모습이 동화나 설화 속 왕자들과 같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었다.

몇 해 지나지 않아 사렙탄은 ‘왕자 인형’을 찍어 내어 파는 일을 금지시켰다. 그 인형에 둘째 왕자의 이름이 붙어 민가에 굴러다닌다면, 왕족의 위엄에 해가 된다는 판단에서였다.

회의장에 둘러앉은 귀족들의 면면을 훑는 일만큼 사렙탄을 우울하게 하는 것도 없었다. 꾀를 지닌 여우, 눈치 없는 토끼, 토끼인 척하는 뱀, 그리고 우직한 곰…… 사렙탄의 눈에 비치는 신하들은 그런 모습이었다.

“이미 찍어 낸 인형이 수백일 텐데, 군대를 풀어 회수하라 명하심이 어떨까요.”

‘여우’가 말했다. 그러자 왕의 눈에 잘 들고픈 ‘토끼’가 깊은 생각 없이 그 말에 동의했고, ‘토끼인 척하는 뱀’도 혀를 날름거리며 그 의견에 힘을 실었다.

사렙탄의 미간에 깊은 홈이 파일 때쯤,

“그랬다가는 초조하고 좀스러운 인상만 남길 겁니다.”

‘곰’이 말했다.

“유난스럽게 압박할 만큼 큰 사안이 아닙니다. 어린아이들의 장난감 인형일 뿐이지 않습니까. 왕의 말씀만 하달하고, 민가의 아이들이 가진 것은 그냥 두어야 맞습니다.”

비아탄 아멕의 발언에 모두가 그를, 그리고 사렙탄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약속이라도 한 듯이 움직이는 눈짓이었다. 사렙탄이 보일 답이라고는 고개를 끄덕이는 게 전부였다.

회의를 마치며 일어서는 길에, 몇몇 귀족이 비아탄의 옆으로 붙어 섰다. 그러고는 인사를 전하는 척,

“폐하께선 경의 말만 들으시는군요.”

칭찬인지 경고인지 모를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남들이 무어라 말하건 ‘곰’은 ‘곰’이었다. 눈치 싸움에 둔감한 듯 구는 것이 그의 최대 장점이었다.

“내내 기분이 좋지 않아 보이십니다.”

그가 신경 쓰는 인물은 제 주군인 사렙탄 세일산뿐이었다.

뒤로 다가서며 묻는 말에 사렙탄은 어깨에 힘을 풀었다. 그러고는 소리 없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비아탄의 말이 맞았다. 왕자 인형에 대한 가벼운 해프닝을 되새기면 되새길수록, 사렙탄은 기분이 상했다. 제 아들이 동화 속 왕자와 같지 않음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었다.

사렙탄에게 있어 그의 막내 자식은 티끌 없이 밝은, 정신도 몸도 건강한, 매일매일이 환희로 둘러싸인 멋진 왕자가 아니었다.

“저와 형님이 어디가 어떻게, 얼마나 다르다고 그러십니까?”

이제 막 십 대에 접어들었을 뿐인데, 둘째 왕자는 세일산 왕가의 가장 침침한 모서리였다.

“제가 늦게 태어난 것이 잘못인가요?”

야베스 세일산은, 왕을 알현하는 방법을 깨우친 네 살 시절부터 하루가 멀다 하고 사렙탄을 찾았다. 명료한 답이 정해져 있되 그 답을 말로 꺼내긴 어려운 질문을 입술에 매단 채였다.

그럴 적에 가라앉은 목소리는 울적했고 시퍼런 두 눈에는 까만 그림자가 드리운 채였다. 야베스 본인은 모르겠지만, 그의 우울한 얼굴은 사렙탄 세일산이 매일 밤마다 떠올리는 제 아들의 모습이었다.

“왜 형님에게만 말을 주셨어요, 아버지?”

“왜 형님만 제왕학 수업을 듣고, 전 바보처럼 놀아야 하나요?”

“왜 형님의 침실만 본궁으로 옮긴 거예요, 아버지?”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 아닌 건가요?”

고개를 털며 사렙탄은 울적한 생각들로부터 벗어나고자 했다.

“내일은 무얼 하나, 비아탄.”

주군께서 읊조리자 그의 충직한 곰이 제 시간은 늘 당신 것임을 알려 왔다.

“그래, 그럼 사냥을 가지. 말을 타고 활을 쏘면 이 기분도 잊힐 테니.”

무엇이건 마음에 들지 않고, 대륙의 천지 자리에서도 당장에 해결해 낼 수 없는 고민이 생길 때마다 그는 사냥을 떠났다. 왕의 오른팔인 비아탄 아멕만이 그의 우울을 이해했고 그의 옆자리를 질문 없이 지켰다.

그와 말을 타며 작은 숲을 종횡하기를 사렙탄은 즐겼다.

“이래서 내가 자네를 곰처럼 생각하는 거야.”

몇 시간이고 곁을 지키는 비아탄을 향해, 사렙탄이 말했다. 그는 과연 곰이었다. 주군께서 절벽 앞에서 오래도록 시간을 보내더라도 군소리 하나 없었다.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머물면서도 사렙탄은, 결단코 절벽 아래를 내려다보지 않았다. 그럴 적에 그는, 절벽 밑에 아직도 제 동생의 시신이 있을 거라 믿는 사람 같았다.

열두 살이 된 기점으로 야베스는 더는 사렙탄을 함부로 찾지 않았다. 감기가 폐병으로 번져 세상을 떠난 어머니가 못내 충격이라 투정을 그친 것일 수도 있었고, 이제는 철이 들 나이인지라 자연스레 변한 것일 수도 있었다.

열두 살의 야베스 세일산은 태도도 외모도 귀엽기 짝이 없었다. 그가 저를 찾지 않으니, 오히려 사렙탄이 먼저 불러다 앉혀 두고 말을 나눌 때가 많았다. 사렙탄이 건넨 과자며 선물을 받을 때마다 야베스는 새파란 눈을 똘망똘망하게 뜬 채,

“폐하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그럴싸한 말까지 선보였다.

그렇게 반년간을 어떠한 투정도 무얼 달라는 요구도 없이 얌전하던 야베스가, 불쑥 사렙탄을 찾은 날이 있었다. 폐하께 알현을 청한다며 찾아와서는 붉은 카펫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이었다.

날씬한 소년의 무릎이 맥을 잃은 듯 풀쩍 주저앉았다.

“폐하. 형님께서 제 어금니를 가져갔어요.”

그러고는 얼굴을 보여 주었다. 눈 밑의 살갗이 벌겋게 헐어 버린 것이, 몇 시간이고 울다 온 얼굴이었다.

본도와 야베스가 주먹다짐까지 하며 다투었단 소식에 사렙탄은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형제가 자라면서 다툼 정도는 일상적인 거라지만, 열다섯 살의 본도 세일산과 열두 살의 야베스 세일산은 주먹의 크기부터 달랐다.

본도의 경우 동생에게 팔뚝을 꼬집히고 무릎을 차였지만, 그의 주먹에 맞은 야베스는 어금니가 부러졌고 코피를 흘렸다.

머리 꼭대기까지 화가 난 사렙탄이 본도 세일산을 호출했다. 자초지종을 들어 보면 다툼의 원흉은 야베스에게 있었다. 본도가 드로인을 시켜 주문한 귀한 새를, 야베스가 중도에 채 가서는 날개를 부러뜨렸단 말이었다.

시녀들이 상자에 넣고 손수건에 감싸 가져온 새를 사렙탄이 받아 보았다. 충격을 못 이겨 죽은 새는 깃이 검정색이었고 초점 잃은 눈은 금색이었다. 사렙탄이 보기에도 귀하고 예뻐 보이긴 하였으나 그뿐이었다.

“암만 귀한 새래도 네 동생보다 귀하더냐?”

첫째 왕자가 그 새를 그림을 통해 보고는, 첫사랑을 닮은 모습이라 종의 이름을 찾아다가 몇 달을 기다려 받은 줄은 그 누구도 몰랐다.

“동생이 실수로 새를 죽였다고, 주먹을 휘두르는 게 제왕의 노릇이냐?”

사렙탄이 꾸중하자 본도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두 형제 중 보다 감정적이고 예민한 쪽은 야베스 세일산이었는데, 그날만큼은 달랐다. 본도 세일산은 제 분을 감추지 못해 눈에 띄게 씩씩대고 있었다.

“실수가 아니라 일부러 죽인 겁니다. 실수로 떨어뜨린다고 새가 낙사하나요?”

언성을 높이며 본도가 외쳤다. 제 말에 크게 반박하는 첫째 아들을, 사렙탄은 낯설게 내려다보았다.

다시금 상자를 살피며, 그는 시녀의 손수건을 치워 보았다. 새의 시체 옆에 야베스의 어금니가 들어 있었다.

“본도.”

사렙탄이 낮게 읊조렸다.

“네 동생의 빠진 이를, 네가 여기 넣었느냐?”

그러자 본도 세일산이 이를 악물었다.

“예, 제가 넣었습니다. 죽은 새의 넋을 기려 주려고, 같이 넣었습니다. 같이 넣어 묻을 겁니다.”

어린 형제의 다툼이었다. 대륙의 왕좌에 앉은 사렙탄 세일산 인생에는 이보다 더 큰, 국경과 전장을 넘나드는 문제가 많았다. 그러나 어떤 문제들도 이날의 어리숙한 다툼만큼 어렵진 않았었다.

사렙탄이 내린 처벌은 다음과 같았다.

“두 사람 모두 각자의 방으로 돌아가 반성을 하고, 한 주 뒤에 다시금 알현을 청하라.”

무얼 잘못했으며 어떻게 사과할 것인가를 스스로 생각하란 말이었다.

두 왕자가 알현실을 떠나간 뒤, 비아탄은 주군의 결정이 틀리지 않았다며 말해 왔다. 자식을 가르침에 있어 무조건 옳은 정답이란 없다는 위로와 함께였다. 그런들, 사렙탄의 착잡한 마음이 씻기진 않았다.

뜻밖에 야베스 세일산은 한 주는커녕 하루가 지나기도 전에 사렙탄을 찾았다. 이번에 왕자의 발이 닿은 곳은 알현실이 아닌 왕의 침실이었다. 왕비의 자리가 텅 빈 넓은 침대에 앉은 사렙탄에게로, 그는 쭈뼛거리며 다가와 섰다.

“아버지.”

그리고 소곤거렸다.

“제 어금니를 다시 받아 갈 수 있을까요?”

아리송한 부탁이었다. 이마에 주름을 만든 채, 사렙탄은 어린 아들을 바라보았다. 잠옷 차림으로 제 침실을 찾아든 아이에게 매몰차게 굴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그 이는 네 형이 새와 함께 묻겠다 하지 않았느냐.”

사렙탄이 답했다. 오후 알현에 비해 한층 누그러진 음성이었다.

“네가 죽인 새를 기리는 데에 쓰일 테니 아쉬워하지 말거라. 너에겐 더 튼튼한 이가 날 테니.”

그러자 열두 살의 왕자가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었다. 새파란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야베스는 오늘 일을 뼈저리게 후회한다 고해 왔다. 형에게 대들고 아버지의 심기를 상하게 한 일은 전부 제 잘못이라고도 속삭였다.

“그러니 제 빠진 이를 간직하고 싶습니다. 오늘 일을 기억하고, 다시는 이런 일이 없게끔 경계하기 위해서, 제가 갖고 싶어요.”

그가 거짓말을 한다고는, 사렙탄은 생각지 않았다. 그에게 어떤 의도나 수작이 있을 거라고도 의심하지 않았다. 부러져 빠진 유치 하나를 갖겠다고 무릎을 꿇을 이유가 없기 때문이었다. 적어도 사렙탄이 생각할 적에는 그랬다.

“내가 이를 돌려주면, 너는 무얼 하겠느냐? 네 형에게 찾아가 잘못을 고하고 사과하겠느냐?”

새를 담은 상자를 찾아다 꺼내며, 사렙탄이 물었다.

“네, 지금 당장 찾아가 사과를 하고, 잘못도 빌겠어요.”

야베스가 재깍 답했다.

어린 아들이 제 잘못을 반성할 줄 알고 용서를 빌 줄도 안다는 것에 사렙탄은 만족했다. 그래서 그의 머리를 만져 주고, 그의 손안에 부러진 어금니를 건네주었다. 작고 하얀 이를 받아 가며 야베스는 고개 숙였다.

그날 보았던 야베스의 얼굴과 오늘의, 다 자란 그의 얼굴이 사렙탄에게는 다르게 느껴지지 않았다. 내년이면 야베스의 나이가 스물넷이었다. 그러나 사렙탄의 눈에 야베스 세일산은 여전히 형님의 것을 질투하는 열두 살의 소년이었다.

“형님과 제가, 무엇이 그렇게 다릅니까?”

입술에 매단 질문에도 변함이 없었다.

“형님이 배운 것을 저도 배웠고, 형님이 만난 이들 모두를 저도 만났습니다. 저는 형님처럼 말을 타고, 형님처럼 검을 다루고, 형님이 좋아하던…… 그래도 못 가진 여자를 아내로 뒀단 말입니다.”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들려오는 말소리에, 사렙탄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인상을 찡그렸다. 제 아들이 도대체 무슨 면목으로 아사야를 거론하는지, 그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

해의 말일 연회는 왕성의 정기 행사 가운데 가장 화려하고 중대한 자리였다. 그런 행사 도중에 제 아내를 데리고 자리를 뜨더니, 홀로 돌아온 것이 야베스 세일산이었다.

그녀의 행방을 묻는 귀족들에겐 몸이 좋지 않아 침실로 돌아갔다고 했지만, 비아탄의 보고를 받아 사렙탄은 드래곤이 하늘로 올랐음을 알았다. 엎친 데 덮친다더니, 가디엘 아졸마저 굳은 얼굴로 무엇도 먹거나 마시지 않고 머무르다 일찍 자리를 떠나 버렸다.

연회장을 벗어나는 젊은 공작의 뒤를 비아탄이 잠시 따랐다. 짧은 대화 후 사렙탄의 곁으로 돌아온 비아탄은, 불편한 얼굴로 주먹을 쥔 채 서 있기만 했다. 주군께서 직접 어찌 된 일이냐 물은 뒤에야 그는 어색하게 대답했다.

“야베스 왕자님께서 공주님과…… 다투는 것을 가디엘 경이 본 모양입니다. 자신이 직접 동생을 내보냈다, 그렇게 말하더군요. 연회장으로 돌아왔다간 경사를 망칠 것 같으니, 멀리 떠나 있으라고 타일렀답니다.”

그에 사렙탄은 크게 실망했다. 아사야 세일산을 향한 실망은 아니었다. 연회를 망칠 정도로 상태가 좋지 못했다니 울었다는 의미인데, 어린 아내를 울도록 몰아붙이고 그 모습을 그녀의 오빠에게 보인 아들에 대한 실망이었다.

‘도대체 부부싸움을 어찌 했기에 그 여린 애를 울려?’

왕위계승자를 공언하면 생산성 없는 소모전이 그칠 줄로 알았다. 본도 세일산도 야베스 세일산도, 각자가 제자리를 찾아갈 것이라 기대했던 사렙탄이었다. 제 둘째 아들이 질투 많고 어리숙한 줄은 알았지만, 행사 당일을 망칠 정도로 멍청한 줄은 몰랐었다.

성격이 예민한 만큼이나 머리가 영민하고 생각이 깊은 줄 알았건만, 도대체 무어가 문제인가 싶었다.

그에 대해 잘잘못을 따지고자 부른 자리에서,

“아사야를 생각하세요, 아버지.”

야베스는 제 입으로 아사야의 이름을 논했다.

“형님께서 왕좌에 오른 뒤에도 그녀를 가만둘까요? 왕성 내에 벌써 소문이 파다합니다. 본도 세일산이 왕좌에 오르자마자 제 형제의 아내부터 빼앗을 거라고…….”

야베스의 변명을 묵묵히 듣던 사렙탄의 표정에 금이 갔다. 온화하던 얼굴은 망가졌고 왕좌를 쥔 손은 주먹으로 꽉 말렸다.

“감히, 그따위 모함을 입에 담느냐.”

왕성 내의 소문은 늘 많았고 대체로 허튼 것들이었다. 본도 세일산이 제 형제의 아내를 연모한다는 소문이야 사렙탄 세일산 역시 알았다. 여러 해 전, 공작성으로 보냈다가 거절당한 마차와 선물들이 있었으니 그런 소문이 떠도는 것도 놀랄 일은 아니었다.

그러한 소문이 만든 복도를 걷고 쌓인 눈총으로 높아진 의자에 앉는 이가 왕족이었다.

“왕자가 되어 가벼운 소문 몇 마디에 마음이 흔들리더냐?”

꾸중하며 묻는 말에, 야베스 세일산이 꽉 쥔 주먹을 움찔거렸다.

“가벼운 소문 따위가 아닙니다. 형님께서는, 친척들이 모인 자리에서도 제 아내에게 대놓고 관심을 보였습니다. 나젤탄의 왕녀와 결혼한 뒤에도 오히려 아사야를 더…….”

“야베스 세일산!”

참다못해 사렙탄이 윽박을 내질렀다. 그제야 야베스가 입을 다물고 고개를 들었다. 눈썹 아래로 그림자가 진 채였다. 그렇게 우울한 얼굴을 보일 때마다, 그의 푸른 눈동자만큼은 푸른 불씨처럼 형형했다.

도리 없이, 사렙탄은 다 큰 아들의 얼굴에서 열두 살 시절의 소년을 떠올렸다. 그 소년이 망가뜨린 새 역시 떠올렸다. 손수건에 감싼 채 싸늘하게 식어 있던 검은 새와, 그 옆에 놓인 어금니가 있었다.

그날 밤, 부러진 어금니를 돌려준 것이 실수였음을 사렙탄은 이제야 알았다. 잘못을 저질렀을 땐 그에 따른 대가를 치르게 해야 했다. 무엇 하나를 잃어 보아야 아쉬운 줄을 아는 것이 인간인데, 야베스 세일산은 여태껏 제 잘못에 값을 치른 일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어릴 적엔 사렙탄의 관용에 의해서였고, 자란 후에는, 그가 벌인 잘못에 값을 물자니 왕가의 명예가 흔들리도록 공론화될 사건이기 때문이었다.

형의 새를 죽인 일은 시작에 불과했다. 열세 살 때는 신관의 고양이를 훔치더니, 호수에 빠뜨려 반사 상태를 만들어 돌려주었다. 손을 벌벌 떠는 늙은 신관을 데려다가 자초지종을 물었더니, 개인 의뢰를 받아 주지 않자 왕자님께서 앙심을 품었다고 했다.

“비밀 금고에 걸 자물쇠를 달라고 하셨는데…… 그것이 마법사 협회의 재산인지라, 들어 드릴 수 없다 했더니 제 고양이를…….”

팔다리를 후들거리며 우는 마법사를, 사렙탄이 애써 달랬다. 이번에야말로 크게 혼쭐을 낼 생각으로 야베스를 불렀지만, 일이라는 게 생각처럼 풀려 주질 않았다.

“금고 안에 어머니의 유품을 보관하려 그랬어요. 중요한 거니까 특별한 자물쇠를 달라고 했는데, 그 신관이 콧방귀를 뀌기에 화가 나서……. 고양이가 호수로 뛰어들 줄은 정말 몰랐어요.”

그런 아들을 어떻게 혼내야 좋을까 고민하기도 전에, 늙은 마법사가 일을 쳤다. 죽은 고양이를 되살리겠다며 금지된 흑마법에 손을 댄 것이었다. 마법사는 고위 신관 자리를 박탈당하고 쫓겨났고, 사렙탄은 그 일을 유야무야 덮어야 했다.

야베스가 벌이는 문제는, 잘못된 시계가 그러듯 결코 저절로 고쳐지질 않았다. 열여섯이 된 해에 그는 제 구두에 잿물을 튀긴 하인의 머리를 잿물 양동이에 넣어 화상을 입게 만들었다.

블랙 드래곤을 선물받은 뒤에도 짓궂은 성질은 그치질 않았다. 드래곤을 길들이라는 명령을 내리며 그는 경비대원 여럿을 철문 안에 밀어 넣었다. 몇 차례, 찌꺼기처럼 남은 사체 일부를 실은 수레가 성밖으로 빠져나갔다.

비아탄이 보내는 경고의 눈짓들이 있긴 하였으나 그뿐이었다. 사렙탄은 그 일들을 모르는 척 눈 감았다. 그러면 착각하기가 좀 더 쉬웠다. 자신이 제 아들을 혼내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혼내지 않는 것이라고 말이었다.

그 결과가 오늘, 사렙탄 세일산 앞에 놓였다. 제 망토 밑에 숨어 벌인 짓들을 모르는 줄로 착각한 채, 야베스 세일산은 떳떳한 표정이었다.

이제 와 본도를 향한 소문에 대해 거론하는 야베스를 보자니 사렙탄은 숨이 막혔다. 야베스의 인생을 망치고도 남을 법한 사건들을, 한마디라도 새어 나가지 않게 막아 준 것이 사렙탄 세일산, 그 자신이었다.

진심으로 사랑하는 이가 생겼노라, 그녀를 위해 헌신하고, 저 역시 더 나은 남자가 되고 싶어졌노라, 그렇게 말하며 떠났던 날 야베스는 아사야 아졸에게 청혼을 했다. 그녀가 보내온 승낙 편지를 들고 자랑하듯 보여 주던 것을 사렙탄은 기억했다.

나이를 먹으면 변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사랑에 빠지면 변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본도 세일산과 그의 입지를 못 박아 알려 주면 변할 것이라 생각했으나, 그렇지 않았다.

마침내 사렙탄이 입을 열었다.

“본도는 너와 다르다, 야베스. 네 형님과 너는 달라.”

그리고 미루어 왔던, 오래된 질문에 대한 답을 꺼냈다.

“본도는 왕이 될 운명을 타고났지만, 너는 그렇지 않다. 너는…….”

고개를 숙이며 사렙탄은 이마를 짚었다. 관자놀이로 지끈지끈한 통증이 올라왔다. 당장에 손을 뻗어 야베스의 턱을 쥐고 벌리면, 어금니 자리가 아직도 비어 있을 것 같았다.

“왜…… 제가 무어가 얼마나 다릅니까. 왜 저는 안 되는 겁니까? 아버지, 이러실 거면…… 왜 저를 형님과 똑같이 키우셨습니까?”

야베스의 언성이 알현실을 울렸다. 붉은 카펫 중앙에 선 아들을 향해, 사렙탄이 외쳤다.

“네가 불쌍해서 그랬다.”

순 충동적인, 그러나 진심 어린 답변이었다.

본도 세일산을 보면, 사렙탄은 젊은 날의 스스로를 보았다. 그러나 야베스 세일산을 볼 때면, 사렙탄은 돌연 죽어 버린 동생의 모습을 보고는 했다. 아버지께서 명하셨으니 새를 잡아 오겠다며 떠나던 어린 동생도, 밝은 금발 머리칼을 갖고 있었다.

“다녀올게요, 형님.”

그의 뒤를 따르던 왕실 기사가 칼을 찬 것을 보고도, 사렙탄은 그를 말리지 않았다. 그저 손을 흔들며 어린 동생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외면한 게 전부였다.

그 샛노란 뒤통수를 다시 볼 일은 없었다. 나이를 먹고 어른이 되었더라면 그의 머리색도 짙어졌을까, 사렙탄은 늘 그것이 궁금했다.

“왕위 탈락자의 인생이 모두 그런 거다. 누가 절벽에서 밀쳐 죽여도 수사할 일 없는 네가, 나는 불쌍했다.”

말미에, 사렙탄은 목소리를 떨었다. 그런 아버지를, 야베스는 우두커니 선 채로 올려다보았다. 아버지의 몸을 앉히고 제가 언제고 우러러보던 왕좌 역시 그의 눈에 들어찼다.

한참 동안을 두 부자는 어떤 말도 나누지 않고 서로를 바라만 보았다. 사렙탄은 제 상념을 정리하기 바빴고 야베스 세일산은, 받은 충격을 감추고자 감정을 마른침 넘기듯 삼켰다.

“……알겠습니다, 폐하.”

그러고는 제 아버지, 대륙의 왕 앞에 허리를 깊게 숙였다.

“심려 끼쳐 죄송합니다. ……아사야는 곧 돌아올 겁니다. 금세 화해할 테니 걱정 마십시오.”

제 어디가 이상하다는 것쯤 야베스 세일산도 알았다. 그는 분노를 느끼다가도 침착해지고는 했고, 무척 기쁘고 행복하다가도 덜컥 가라앉고는 했다.

형님과 함께 어머니의 품에 안겨 칭얼대던 것이 그가 기억하는 가장 어릴 적의 일이었다. 그때에 느낀 불쾌감이 난생처음 느낀 감정이었다. 누군가의 품에 둘이 안긴 불안정한 느낌, 어머니의 팔이 누구를 더 세게 안아 주는지 살피던 불만족스러운 감각…… 그 기억이 그의 영혼에 남아 응어리진 듯했다.

“형님께도…… 제대로 인사드리겠습니다.”

거짓말은 세상에서 가장 쉬웠다. 실망한 것을 감추는 것도, 상처 입은 자존심을 접어 두는 일도, 야베스에게는 조금도 어렵지가 않았다.

아버지께서 저를 형님과 동등하게 아끼며 사랑한다고 믿었지만, 틀렸다. 야베스는 배신감에 떨리는 턱을 감추고자 목을 숙였다. 아버지에게 있어 그는 오래전 죽은 약골 동생을 대신하는 모조품에 불과한 것이었다.

‘언젠가 알게 되실 겁니다, 저와 형님이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걸.’

꽉 말린 주먹을 다른 손으로 감싸 가리며, 야베스는 깊이 허리 숙였다.

‘당신께서 제게 준 상처를 형님도 똑같이 받을 겁니다.’

그렇게 원망할 적에 마도구나 구슬 따위는 필요치 않았다. 갖은 상념과 해묵은 악의가 뒤섞인 다짐은 이미 주술처럼, 반드시 그대로 이루어질 일처럼 생각됐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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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만에 왕성으로 돌아온 제 아내를 마주할 적에 야베스 세일산은 침착했다. 왕궁으로 돌아오는 모습을 창문 밖으로 내려다볼 때에는 작은 불씨가 타닥타닥 심장을 그을리는 소리를 냈지만 그뿐이었다. 긴장한 얼굴로 제 안색을 살피는 노란 눈동자를 본 순간 분노는 사그라들고 그 자리를 알 수 없는 감정이 채웠다.

‘이 성안에, 제대로 된 내 것이라고는 너뿐이야.’

몇 초간 아사야의 마른 목을 바라보다가, 그는 그녀를 어찌 대해야 좋을까를 결정했다. 지난날 제 행동을 사과하고, 그녀의 기분을 달래어 주며, 두 번 다시 그러지 않겠노라 맹세하는 것이었다.

그럴 적에 그는 진심이었다. 두 번 다시, 제 것인 여자에게 흠을 내는 실수는 벌이지 않을 것이었다.

“전부 내 잘못이야, 아사야. 폐하의 선언이 당신 탓도 아닌데 말이야.”

본도 세일산이 왕위계승자로 공언된 일에 아사야의 잘못은 조금도 없었다. 그저 제가 그보다 늦게 태어난 것이 잘못이었으며, 그 이유로 저를 밀쳐 내는 아버지의 잘못이었으며, 기세등등해져 저를 무시하는 본도 세일산의 잘못이었다.

‘내 것.’

부드럽게 굴고자 노력하며, 야베스는 아사야의 치마 위를 만졌다. 작고 동그란 두 무릎을 움켜쥐자 아사야 세일산의 몸이 눈에 띄게 움츠러드는 것이 느껴졌다.

‘나를 왕으로 추켜세울 사람은 반으로 줄겠지만…… 너는 다르지.’

야베스 세일산이 미소 지었다.

‘너를 왕비로 만들고자 나설 사람이 머릿수를 채울 거야.’

생각과는 다른 말이,

“몸은 괜찮은 거지? 신관을 불러다 줄까.”

입 밖으로 술술 나왔다.

그렇게 물을 적에 야베스는 저의 착한 아내가 언제나처럼 순종적으로 고개 끄덕이기를 기대했다. 왕자로부터 사과를 받은 것만으로도 마음이 풀어지고, 남편이 자세를 낮추며 저를 달래 주니 아내로서 그녀에게는 더는 화낼 빌미가 없었다. 멋대로 외박을 하고 돌아온 잘못마저 이미 눈감아 준 그였다.

그러나 야베스 세일산이 보통의 다정한 남편이 아닌 것처럼, 아사야 세일산 역시 보통의 순종적인 아내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가 가면을 벗었는데 저는 연기를 이어 나갈 이유가, 아사야에겐 없었다.

“아니요, 괜찮지 않아요.”

아사야 세일산이 답했다.

“이제는…… 당신을 못 믿겠어요.”

그녀의 여린 손이 왕자의 단단한 손을 제 치마 위에서 밀어냈다. 생각해 본 적 없던 반응에, 야베스는 쉽게 손을 거뒀다.

균열이 생긴 그의 미소를 바라보며, 아사야가 입을 열었다.

“난 나를 함부로 잡아끌고, 위협하는 남자와 결혼하지 않았어요. 나는…… 날 아껴 주겠다고, 사랑한다고 맹세한 왕자와 결혼했어요. 지금 당신은 내가 몰랐던, 한 번도 만나 본 적 없는 사람 같아요.”

“그게 무슨 소리야?”

야베스의 미간이 퍽 구겨졌다. 웃는 낯을 유지하고자 노력했지만 그의 표정은 이미 망가진 채였다.

그의 눈에 비친 제가 어떤 사람인지, 아사야는 알았다. 감수성이 예민한 아가씨, 상처를 입었다고 찡찡거리는 어린 아내, 쉽게 넘어가면 될 일을 물고 늘어지는 귀찮은 여자…… 그런 역할을 연기할 이유라면, 아사야에게 있었다.

“날 좋아하나요? 내가 알고 싶은 건…… 그것뿐이에요.”

눈썹을 끌어 내리고 입술을 삐죽거리며, 아사야가 속삭였다.

“당신이 날 사랑한다는 증명을 받고 싶어요.”

그러자 야베스의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고개를 돌려 창가를 바라보며 그는 잠시간 웃음을 참으려 애썼다.

‘여자란 참 뻔하고 웃겨.’

힘을 주며 연설을 늘어놓기에, 뭐 대단한 계획이라도 세운 줄로 알았건만 아니었다. 아사야 세일산은 결국 어린 여자였다. 아직 소녀티를 벗지 못하고 사랑 운운하는 아내를 두고, 잠시나마 긴장했던 스스로가 우스웠다.

야베스가 굽혔던 무릎을 펴고 일어섰다. 그러고는 토라진 채 침대에 앉은 아사야의 정수리와 동그란 이마를 내려다봤다.

“그래, 무얼 줄까.”

가뿐한 목소리로 그가 답했다.

“내가 어떻게 하면 증명이 되겠어?”

그러자 아사야의 눈짓이 힐끔 그를 흘겨보았다가, 다시금 바닥으로 떨어졌다. 시무룩한 어린 개처럼 그녀는 어깨를 추욱 늘어뜨렸다.

“우리가 정말로 부부라면, 우리 사이에 비밀은 없어야 해요.”

“그래, 맞는 말이야. 전적으로 동의해.”

웃는 낯으로, 야베스는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천 송이 장미이건 금사로 지은 드레스이건 세상에서 가장 알이 큰 보석 반지이건, 어린 아내의 마음을 풀어 주고자 무엇이건 줄 생각이었다. 그것으로 아사야의 기분을 풀어 주면서도 왕성을 오가는 소문에 얹을 미담을 만들고, 아버지의 호의도 살 생각이었다.

그러나 아사야 세일산이 내건 조건은 비싸고 귀한 무엇이 아니었다.

“당신의 금고.”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려 뻗은 야베스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그곳에 출입할 권한을 저에게도 주세요.”

뻗었던 손을 느릿하게 걷으며, 야베스는 어린 아내의 얼굴을 내려다봤다. 발간 입술에 발그레한 두 뺨을 가진, 아사야 세일산은 늘 그렇듯 예쁘고 고왔다. 웃을 때면 사방으로 빛이 드는 듯 착각이 일 정도로 화창했지만, 토라진 듯 입을 다물고 있자 세상 누구보다도 차가운 미녀였다.

“금고 속 무어가 갖고 싶어서 그래?”

야베스가 물었다.

“……그런 거라면 말만 해. 무엇이건 꺼내 줄 테니.”

아사야의 입술이 단단히 닫혔다. 입 안이 바싹 마르고 속이 타기 시작했다. 그의 말마따나, ‘무엇이건’ 말을 하는 것으로 받을 수 있다면 백 번이고 천 번이고 소리쳐 말할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말을 덜컥 믿을 정도로 그녀는 바보가 아니었다. 이제 아사야는 야베스 세일산이 어떤 남자인지 알았다. 그는 단 한번도 제 것을 누구와 나눠 본 적 없는 남자였다. 그의 것인 마도구를 원하는 줄을 안다면, 두 번 다시 아사야의 손이 닿을 수 없게 그것을 감춰 버릴 것이었다.

때문에,

“내 마음을 의심하는 건가요?”

아사야는 언성을 높였다.

“내가 무얼 훔치고 싶어서, 그럴 욕심에 이러는 것 같은가요? 어떻게 화해를 원하는 내 마음을 곡해할 수가 있어요?”

토라진 척 연기하는 일은 그를 존경하고 원하는 척 미소 짓는 것보다 훨씬 쉬웠다. 그렇게 소리치고는 엠마오의 이름을 부르고, 목욕을 하고 싶다며 빠져나가면 그만이었다.

멍한 얼굴로 침실 중앙에 선 둘째 왕자를 힐끔거리며, 엠마오와 시녀들이 아사야를 챙겼다.

왕자비가 따듯한 물에 몸을 데우고, 머리칼을 빗고 돌아온 뒤에도 야베스는 침실을 지키고 앉은 채였다. 그날 오후, 그는 어느 때보다 골똘한 얼굴로 조용했다. 아사야 세일산이 내건 ‘화해의 조건’이니 ‘사랑에 대한 증명’을 곱씹느라 바쁜 것이었다.

종일 저를 뒤따르는 눈짓을 느끼면서, 아사야는 시집을 읽었고 편지를 쓰는 시늉했다.

투정하는 연기를 하더라도 그 선에서 그쳐야 했다. 야베스 세일산의 곁을 떠나거나 공작성으로 돌아가는 짓까지는 벌여선 안 됐다. 야베스 세일산을 답답하게 하자면 그의 곁에서, 그의 말을 듣지 않고 그에게 웃어 주지 않고 그의 심기를 거스르면서도 그의 눈에 밟혀야 했다.

제 옆자리에 싫은 존재가 머무는 고통을, 상대의 눈치를 살피며 신경을 기울여야 하는 짜증스러운 피로감을, 그도 맛보아야 했다.

저녁이 되어도 아사야는 그의 외투를 벗겨 주지 않았다. 제가 마실 물 한 잔을 협탁에 놓고, 〈사랑의 이름〉이란 제목이 수로 놓인 시집을 머리맡에 둔 채 먼저 침대에 누웠다. 종일 말도 않고 돌아누운 아사야를, 야베스는 아주 빤히 지켜보았다.

표정이며 눈치로 보아 그는 화가 난 것 같진 않았다. 금고문을 지키는 콘클라베의 정체를 아는지, 의심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단지 누군가의 기분을 풀어 주어야 하는 일이 낯선 모양이었다.

늦은 밤이 되도록 아사야는 잠든 척을 하며 야베스 세일산이 어떤 식으로건 반응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그는 잠깐의 외출 뒤 돌아와서는 아사야의 옆자리에 풀썩 누웠다. 그녀를 깨우지도, 또 한번 사과를 해 보려 시도하지도 않았다.

콘클라베를 여는 주문을 알아내기가 쉬울 것이라고는 기대한 적 없던 아사야였다. 야베스 세일산은 비밀 많고 자존심이 비대한 남자인 만큼이나 그만의 사적인 공간에 누구의 발길도 허용하지 않을 게 당연했다.

그러나 알던 사실이라 해서 그에 따른 실망감까지 상쇄되진 않았다.

‘나를 사랑하지 않아. 나를 아끼지도 않고, 조금도 좋아하지 않는 거야.’

베개에 머리를 기대고 돌아누운 채, 아사야는 뜬눈으로 어둠 안을 바라보았다.

야베스 세일산이 원하노라 바라고, 사랑한다 고백하며 아끼겠노라 약속하던 이는 자신이 아니었다. 그가 원한 이는 본도 세일산이 탐내던 여자였고, 사랑하는 것은 베데르 아졸의 딸이 갖는 상징이었으며, 아끼는 것은 그녀의 외모와 젊음뿐이었다. 그런 여자를 가졌다는 소유권과 그 여자를 통제한다는 만족감이었다.

야베스 세일산의 손이 제 허리를 더듬는 것을 느끼며 아사야는 눈을 감았다. 차가운 뱀처럼 느껴지는 손길을 애써 무시하며 그녀는 가브리엘을 떠올렸다. 그가 저를 만지던 방식을, 아끼며 사랑하던 눈짓을 기억했다.

차라리 가브리엘이 사람이었더라면, 그녀는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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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뜨자 나무로 된 직각 창틀이 보였다. 볕이 따사롭게 스며들었고 팔목을 스치는 이불의 감촉에 솜털이 오소소 일어났다.

일어났니, 아가야……. 다정한 말을 하며 아버지가 방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진흙이 엉겨 붙은 부츠와 꿰맨 자국이 도드라진 바지, 진회색 셔츠를 입은 아버지를 올려다보며 아사야는 제가 꿈을 꾸고 있음을 알았다.

네, 일어났어요……. 미소로 대답하자 애플파이 냄새가 집 안을 채웠다. 아버지는 아사야를 잠꾸러기 막내라 부르며 일으켜 세웠다. 창밖으로 펼쳐진 포도밭 앞에서, 오빠가 개를 훈련시키고 있었다.

네 사람은 한 테이블에 둘러앉아 맛있는 파이와 커피, 구운 빵을 나눠 먹었다.

오빠는 봄과 가을이면 농사를 도왔고 여름과 겨울이면 용병 일을 하러 떠났다. 그의 목에 손수건을 묶어 주며 아사야는 궂은일은 삼가라며 투정했다. 지인의 소개라고 몸값을 낮추지 말고 일당을 더 높게 받아야 한다고 잔소리도 얹었다. 그러자 오빠의 손이 그녀의 머리를 마구잡이로 헝클였다.

이번에는 네 마음에 들 법한 귀여운 망아지를 사 오겠다며 오빠는 떠났다. 어머니와 서로의 허리를 껴안고 선 채 아사야가 그를 배웅했다.

가을 내내 아사야는 농장 일을 도왔다. 어머니에게선 배울 것이 많았다. 그녀와 함께 아사야는 농장 옆 창고에서 포도주를 담그고, 집 안에서는 잼을 만들었다. 누구에게 자랑할 재산도, 이렇다 할 명성도 없이 무던한 삶이었다.

스무 살이 된 해 아사야의 가장 큰 고민은 밤마다 농장 닭들을 못살게 구는 여우였다.

멀리, 국경에서 분란이 일어나자 오빠는 용병 일을 그만두었다. 지금 참전하면 큰 보수를 받고 영웅이 될 수 있다는데도 그는 싸움에는 관심이 없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그의 손에는 고삐가 들려 있었고 두 마리 말이 다그닥다그닥 소리를 냈다.

망아지를 데려온다더니 다 큰 말을 가져오면 어떡해? 소리치며, 아사야가 그에게로 달려갔다. 언덕길을 뛰어 내려오는 누이를 그가 와락 껴안았다. 4인 가족이 한 계절을 꾸릴 돈을 벌어 온 것만으로도 아버지는 오빠를 자랑스러워했다. 그날 저녁 집안에는 훈기가 넘쳤다.

국경의 분란은 얼마 못 가 사그라들었다. 전쟁에 참전했던 청년 서너 명이 여기저기 성치 못하게 다친 채로 돌아왔다. 어머니와 함께 약재를 나르면서, 아사야는 팔을 다친 이가 제 오빠가 아니란 것에 안도했다.

분란의 종식을 알리며 수도에서는 축제가 열렸다. 왕성이며 수도의 일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아사야의 마을에도 축제의 열기가 번졌다. 공원에서는 음유시인이 아이들을 몰고 다니며 노래했고 술집마다 공짜 맥주를 나눠 주었다.

언덕 위를 오르면 왕성에서 터뜨리는 폭죽을 볼 수 있단 소식에, 아사야는 피크닉 바구니를 챙겼다.

오빠가 길들인 개와 함께 언덕을 오른 밤, 아사야는 수상쩍은 남자를 만났다. 두 사람의 만남은 로맨스 소설처럼 이루어졌다. 개의 목줄을 놓친 아사야가 넘어져 구르려는 것을, 낯선 남자가 붙잡으려다 제 품에 껴안는 식이었다.

그의 다부진 몸에 안기는 순간 아사야의 심장이 콩닥거렸다. 제 코 앞까지 다가온 그의 얼굴을, 아사야는 홀린 듯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 역시 꾸밈없이 순수한 아사야를 보며 설렌 기색이었다.

천천히 포옹을 푼 뒤 그가 말없이 잔디 위에 손수건을 깔아 주었다. 아사야는 그의 손수건 위에 앉으며 초대에 응했다. 그녀가 가져온 신선한 샌드위치를 나눠 먹으면서, 두 사람은 불꽃놀이를 구경했다.

멀리서 악단의 연주 소리와 신이 난 사람들이 합창하는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아사야의 손을 잡았고, 아사야는 머뭇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몇 분간 두 사람은 대화 없이 춤을 췄다. 달빛이 아사야의 붉은 뺨을 비췄다.

축제의 열기가 식어 내리고 포도주가 맛있어지는 겨울이 됐다. 아사야는 지난밤의 만남을 잊지 못하고 그리움에 잠겼다. 타지에서 잠시 들렀을 뿐인 손님을 사랑하게 되어 그녀는 병이 났다. 포도밭 댁 막내딸이 상사병에 걸렸단 소식이 마을 전체에 퍼졌다.

영지 근방을 탐방하던 기사가 그 소문을 들었다. 기사는 모시는 귀족에게 소문을 전달했고, 귀족은 소문 안의 남자가 누구인지 알아차렸다. 먼 타국에서 교류를 위하여 수도에 방문한 왕자에게, 귀족이 말을 전했다. 그러자 그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머나먼 나라에서 떠나온 그는, 이름 모를 첫사랑을 다시 만나기 위해 작은 마을의 포도밭을 찾았다. 저를 알아보고는 검은 말 위에서 뛰어내리는 그를, 아사야도 알아보았다. 앞치마 가득 담고 있던 포도 알갱이를 떨어뜨리며 아사야는 그에게로 내달렸다.

비틀거리며 달리다 제 속도를 주체 못해 아사야는 잔디 위로 고꾸라졌다. 넘어지는 그녀를 받쳐 주려다 그도 엉겁결에 아사야와 함께 나뒹굴었다. 아사야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고 그는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아사야의 아래에 깔린 채, 그는 제 이름을 가브리엘이라 밝혔다. 아사야도 제 이름과 보잘것없는 성씨를 알려 주었다. 설렘으로 심장이 차오르도록 떨리는 사랑이 두 사람을 행복하게 했다.

아사야는 그를 저녁 식사에 초대했다. 그날 밤, 귀족의 딸이 아니며 내세울 명성도 없는, 평범한 집안의 순박한 여자일 뿐인 아사야에게 그가 청혼했다.

사랑해, 아사야. 내 진심을 다해서…… 그가 무릎을 꿇자 아사야는 뛸 듯이 기뻤다.

아버지와 어머니, 오빠의 축복을 받으며 아사야는 그와 혼인했다. 오가는 환호성과 미소 속에 아사야는 몹시도 행복했다. 그는 저를 진심으로 아꼈고 저 역시 그를 누구보다 사랑했다.

그는 머나먼 제 나라로 아사야를 데려갔다. 그의 나라는 백성의 수도 적고 동떨어진 작은 섬이었지만, 따듯한 꽃이 사방을 감싼 채 하늘 위에 떠 있었다. 그 이름이 천공섬이었다.

가브리엘과의 첫날밤은 눈물이 날 정도로 좋았다. 그들은 신혼을 오로지 침실에서만 보냈다.

봄이면 아사야는 가브리엘의 손을 잡고 꽃밭을 걸었다. 그는 말수가 적었지만 농담을 하면 재치가 있었다. 그를 너무 좋아한 나머지 아사야는 그가 한숨만 쉬어도 웃음이 났다.

여름이 되어 그들은 바닷가 마을로 여행을 떠났다. 가브리엘은 아사야에게 수영을 알려 주었다. 치맛자락을 소금물에 적신 채, 아사야는 해가 질 때까지 예쁜 조개를 주웠다.

가을에는 아기가 생겼다. 아사야가 그 소식을 알려 줬을 때, 가브리엘은 그녀의 배에 고개를 묻고 엉엉 울었다. 너무 행복하면 눈물이 난다는 사실을 아사야는 처음 알았다.

겨울 내내 가브리엘이 그녀를 돌봤다. 여느 부부가 그러듯이 그들도 가끔은 말다툼을 했는데, 절대적으로 아사야가 승리했다. 가브리엘이 무어라 맞는 말을 늘어놓으면 아사야는 입술을 내밀고,

“그래서, 뭐.”

제 동그란 배도 함께 내밀었다.

“나 지금 우리 아기 손가락 만드느라 바쁘거든?”

그러면 가브리엘은 그녀에게 찍소리도 못 하고 패배했다. 그가 손발을 주물러 주다 허벅지를 간질일 때까지 아사야는 킥킥거리며 웃기 바빴다.

행복하고 유복한 봄이 왔을 때 아사야는 아기를 낳았다. 가브리엘처럼 피부가 짙은 아기는 태양처럼 노란 눈동자를 갖고 있었다. 그와 저를 반반 섞어 놓은 듯한, 아름답고 건강한 딸이었다.

사랑스러운 아기를 껴안고서 아사야는 가브리엘의 침대 위로 올라갔다. 활짝 웃는 얼굴로 그가 품을 내어 주었다. 그렇게, 그들은 세상 무엇 하나 부러울 것 없이 행복해졌다.

눈을 뜨자 아치형의 화려한 창틀이 보였다. 어슴푸레한 밤기운을 헤치며 동이 트고 있었다. 아사야는 제 두 뺨과 베갯잇이 젖은 것을 알았다. 제가 울고 있음을 알기까지는 시간이 한참 더 걸렸다.

느릿느릿 몸을 일으켜, 아사야는 저를 껴안은 남자를 돌아보았다. 그는 대륙의 둘째 왕자인 야베스 세일산이었고 그녀는 그 소유의 왕자비였다.

눈물을 닦을 생각도 못 하고서 아사야는 침대 밖으로 둔한 몸을 빼냈다. 인기척을 듣고 들어온 유라가 실내화를 가져와 신겨 주었다. 놀란 눈으로 제 얼굴을 살피는 유라를 남겨 둔 채, 아사야는 비틀거리며 침실 밖으로 빠져나갔다.

밤과 새벽 사이의 왕성은 낮에 비해 고요했다. 잠옷 차림에 가운 한 장 걸친 채로 아사야는 베데르 성으로 향했다. 유리정원의 문을 밀어 열자 정원의 중앙에 놓인 침대가, 그리고 그곳에 앉은 남자가 보였다.

두 발을 풀잎 위에 내려놓은 채 가브리엘이 울고 있었다.

떨군 눈물로 발등을 적시며 그들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무슨 꿈을 꾸었기에 우느냐고는 누구도 묻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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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가로 스미는 공기가 서늘한 오후, 아사야는 졸린 듯 나른한 표정이었다. 걸음이 온화하다 못해 느릿느릿한 공주의 뒤를 유모와 시녀 하나가 따랐다. 거북이처럼 느린 것으로도 모자라 구두 소리가 나지 않을 정도로 조용히 움직이는 아사야 세일산을, 오가는 귀족들이 힐긋거리며 지나쳤다.

제 주인을 살피는 귀족들의 뒤통수를 유라가 노려보았다. 한껏 차려입고 뒤에는 선물을 든 하인을 꼬리처럼 붙인 채 걷는 귀족들은 하나같이 초면이었다. 둘째 왕자비께서 생활하는 건물로는 한번도 찾아온 적 없다는 뜻이었다. 본도 세일산을 지지하고 야베스 세일산과는 친하지 않은 귀족임에 틀림없음을, 시녀조차 추측할 수 있었다.

‘아무리 그렇대도, 왕성에서 공주를 마주쳤는데 인사 없이 지나치다니!’

유라의 입술이 삐죽거렸다. 눈을 굴려, 유라는 제 주인의 뒷모습을 훔쳐보았다. 아사야는 귀족들이 제 걸음걸이며 태도를 살피는 줄도 모르는 눈치였다. 요즘따라, 그녀는 이상했다.

‘소문이 사실인 걸까?’

이내 유라는 근심으로 가득 찼다.

‘블란테 님께서 정말 우리 공주님을 괴롭히시는 거야?’

지금 당장만 해도 아사야는 블란테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내달이면 30일간, 첫째 왕자와 함께 나젤탄으로 여정을 다녀올 블란테였다. 본도 세일산이 왕위계승자로 공언됨에 따라 왕비가 될 그녀를 찾는 이가 많았다. 그러나 정작 블란테가 가장 자주 찾는 이는 아사야 세일산이었다.

여러 귀족들이 그 만남의 이유를 추측하기 바빴다.

“하루가 멀다 하고 응접실로 불러 대는데, 목적이 뭐겠어요?”

제왕학을 배우고 왕좌를 바라보며 살았던 블란테 세일산이었다. 폐기된 꿈을 뒤로한 채 대륙으로 시집을 올 적에는, 왕좌를 소망한 욕심 많은 여자가 과연 좋은 신붓감이겠냐며 입방아에 오르내렸다.

당장에 세일산 왕가의 직계는 둘이며 비교 대상이라곤 둘째 왕자와 한창 신혼이던 아사야 세일산뿐이었다. 결과는 블란테 세일산의 패배였다. 블란테의 무엇이 못나서는 아니었다. 아사야의 무엇이건 잘나서였다. 아사야 세일산을 옆에 두고 비교 우위를 매긴다면, 살아남을 여자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런 블란테가 이제는 왕비가 될 몸이었다. 여태껏 왕의 총애를 등에 업고 기세등등하던 아사야 세일산은 내리막길에 놓였다. 왕성 안에 제 아버지의 이름을 딴 성이 있다지만 그뿐이었다. 역사는 그녀의 이름을 천덕꾸러기 공주처럼 기록할 것이었다.

예비 왕비께서 전복된 상황을 십분 즐기시는 게 틀림없다고, 귀족들은 수군거렸다. 둘째 왕자비를 제 응접실에 자주 부름으로써 서열을 정리하는 게 아니겠느냔 말이었다.

그러나 소문이 사실이라면,

“잠깐 기다려요, 아사야.”

예비 왕비께서 천덕꾸러기 신세의 공주를 쫓아 나올 이유가 없었다.

넓은 보폭으로 성큼성큼 다가오는 블란테를 향해 아사야가 몸을 돌렸다. 제 머리칼과 같은 은색 망토를 걸친 탓에 블란테의 곱슬대는 머리칼이 망토와 합쳐진 양 보였다. 가볍게 무릎을 굽혔다 서며, 아사야는 샛노란 드레스의 치맛자락을 살짝 집었다.

“벌써 가 버렸을 줄 알았는데, 아직 여기 있었군요.”

숨을 고르며, 블란테가 말했다. 밝은 음성이 복도로 또박또박 퍼졌다.

“제가 무얼 잊었나요?”

의아한 듯 아사야가 물었다. 그러자 블란테는 고개를 내저으며, 가져온 상자를 아사야에게 내밀었다.

“내가 잊은 게 있어 그래요, 이걸 줬어야 했는데……. 별건 아니고, 드로인을 시켜 주문했던 과자예요. 얼마 전에 쿠키가 먹고 싶다 그랬잖아요.”

“아…….”

놀란 눈으로, 아사야는 단단히 닫힌 고급 상자를 받았다.

“고마워요…….”

지나가듯 꺼낸 말을 기억하고 챙겨준 것도 고마웠지만, 직접 주문한 과자라는 말엔 감동까지 받았다. 왕실 파티셰를 부려도 될 것을, 맛있다는 가게를 수소문하여 사다 준 것이었다.

“잘 먹을게요, 정말 고마워요.”

받은 상자를 시녀나 유모가 들게 넘기질 않고, 아사야는 제 두 팔로 끌어안았다. 과자가 든 상자를 안고서 볼 붉히는 그녀를, 블란테는 웃으며 바라보았다.

“정말, 당신을 두고 나젤탄으로 떠날 걱정이 벌써 태산이랍니다. 이렇게 착하셔서 어째요?”

“착하다는 건, 이렇게 간식까지 챙겨 주는 블란테에게 어울리는 말이죠.”

이어 두 왕자비는 무어라 서로를 칭찬하는 방식으로 못다 한 수다를 늘어놓았다. 사이좋은 왕자비들은 두 번째 인사를 주고받은 뒤에야 돌아섰다. 과자 상자를 안고 걷는 아사야를 지켜보다, 블란테가 잡은 것은 유라의 손이었다.

“네 주인을 잘 보살펴야 해. 요즘 기운이 없으시니 걱정이 되네.”

그러고는 속삭였다.

“사소한 문제라도 생겨 네 주인이 곤란해 보인다면, 내게 알려 줘.”

무어라 대답하기 위해 유라가 고개를 들었을 때, 블란테 세일산은 이미 돌아선 후였다. 그녀가 쥐었던 손바닥 안에 반짝이는 머리핀 하나가 남아 있었다.

유라는 제 손에 쥐어진 비싼 물건과 블란테의 뒷모습을 번갈아 살피다가, 모퉁이에 선 귀족들을 보았다. 가던 길을 멈춘 채 그들은 힐긋거리며 두 왕자비를 살피고 있었다.

머리핀을 앞치마 주머니에 집어넣으며, 유라는 안도했다.

‘그럼 그렇지.’

그녀들이 서로를 미워한다는 것은 무지한 소문에 불과했다.

유라가 보기에는 오히려, 블란테 세일산은 마치 제가 그렇듯이 공주님을 좋아하는 것 같았다. 생각에 거기에 닿자 유라는 어깨를 움츠렸다. 감히 나젤탄의 왕녀이자 대륙의 왕자비이신 분과 하찮은 시녀인 제가 닮았다고 생각하다니, 수치심이 절로 들었다.

그러나 만에 하나 유라가 그 생각을 입 밖으로 냈더라도, 블란테는 화를 내지 않았을 것이었다. 유라의 생각이 옳기 때문이었다. 블란테는 아사야를 좋아했다.

대륙의 왕성에 도착하여 블란테가 느낀 것은, 저를 보는 사람들의 무례함이었다. 천지에 저보다 높은 이가 제 아버지뿐인 본도 세일산은 말로만 부드럽지 행동은 무뚝뚝한 남자였다. 귀족들은 콧대가 어찌나 높은지 나젤탄의 왕녀조차도 그들에겐 구경거리에 불과했다.

그들은 그녀를 아사야와 비교하며, 아사야에 비해 ‘덩치가 크다’고 했다. 나젤탄에 머물 적에는 ‘키가 크고 늘씬하다’는 말을 들으며 살았는데 말이었다. ‘군주로서의 자질’이던 성격도 ‘나서길 좋아한다’는 말로 폄하당했다.

그러면서 전하기를, 아사야 세일산은 꽃처럼 아리따운 외모에 태도는 얌전하고, 성격은 사랑스러운 데다 다정한 여자라 했다. 붙임성이 얼마나 좋은지 야베스 세일산의 마음을 뺏은 걸로도 모자라 사렙탄이 그녀를 ‘공주’라 부르며, 대륙의 마지막 드래곤조차 길들였단 것이었다.

그런 비교를 겪으며 아사야를 마주할 적에, 블란테는 독해지리라 먹었던 마음이 와르르 무너지는 것을 느꼈었다. 연회장으로 꾸민 갑판 위에서 바닷바람을 맞으며 선 아사야의 모습을 보자마자 블란테는,

‘졌다.’

그렇게 생각했다.

한번 만나면 두 번 다신 잊을 수 없는 여자라더니 소문이 사실이었다. 곧은 자세로 선 아사야는 세상 누구보다 아름다웠다. 부러질 듯 작고 예쁜 몸은 감정 없는 작품 같았고, 무표정한 얼굴은 도도한 여신 같았다. 사렙탄 세일산의 며느리가 되어 평생 저런 여자와 비교당하며 살아야 한다니, 블란테는 제 마음이 끔찍한 나락으로 추락하는 것을 느꼈다.

그때, 아사야가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해처럼 빛나는 눈동자에 저를 담으며, 그녀는 일직선으로 걸어오더니 악수를 청했다.

살면서 나뭇가지 하나라도 꺾어 보았을까 의심스럽게 예쁜 손이었다.

“만나 뵙게 되어 반가워요, 블란테 왕녀님.”

블란테는 무엇에 홀린 사람처럼 아사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좀 전의 도도한 여신은 어디로 갔나 몰랐다. 가까이서 바라본 아사야는 머리가 작고 체구도 가녀린, 어린 소녀였다. 조그만 얼굴로 아사야가 활짝 웃었다. 이가 보이게 미소 짓는 아사야는 맑고 귀여웠다.

아사야의 발간 입술에서 나오는 말들에 모두가 집중하고 있었다. 그녀가 ‘예쁘다’고 말한 평범한 바다는 명관이 됐고, ‘맛있다’며 칭찬한 평범한 디저트에 귀족가의 여식들이 손을 뻗었다. 그런 입술로 아사야가 칭하기를, 블란테는 ‘세상 어느 여자보다 많이 배운 왕녀님’이었다.

“사람도, 검도 잘 다루신다고…… 그래서 만나 뵙길 얼마나 고대했는지 몰라요.”

그 미소와 환대가 블란테를 제자리로 돌려놓았다. 마침내 그녀는 대륙의 귀족들 틈에서 겉도는 외지인에서, 연회장의 중심에 선 나젤탄의 왕녀로 돌아갈 수 있었다.

대륙의 왕으로부터 ‘공주’라 불리며 미소 짓는 아사야 세일산은 수줍고 행복한 소녀였다. 왕과 왕자를 향하던 미소가 블란테에게도 주어졌다. 그날, 블란테에게 있어 그녀의 미소는 흔한 가식과는 달랐다. 그 미소가 블란테 화이트를 블란테 세일산으로 자리매김하게 만들었다.

‘내게 그래 놓고, 당신이 가여워져선 안 되죠.’

느린 속도로 멀어지는 아사야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블란테는 몸을 돌렸다.


 

.*. *. *. *. *. *.


 

공주께서 오시기 전에 방의 한기를 쫓고자, 사라는 벽난로 속 장작을 쑤시고 있었다. 작은 불씨가 만족스럽게 타오르는 것을 확인할 즈음 침실의 문이 열렸다. 불쏘시개를 내려놓으며 사라가 후다닥 자리에서 일어섰다.

“과자를 받아 왔어. 같이 먹겠어?”

아사야가 물었다. 온화하고 상냥한 목소리였다. 두 손을 앞치마에 문질러 닦으며, 사라는 그녀의 옆으로 얼른 다가갔다. 그리고 보드라운 케이프의 리본 끈을 풀어 주었다.

‘기분이 좋아 보이시네. 다행이야.’

이래서, 사라는 제 주인께서 첫째 왕자비를 만나는 날을 좋아했다. 블란테를 만날 때면 아사야는 언제나 갈 때보다 돌아올 때 표정이 밝고는 했다.

베데르 성을 방문할 때와는 조금 달랐다. 베데르 성으로 향하실 적에도 공주께서는 표정이 밝고 행복해 보이셨지만, 반대로 돌아오실 때에는 조금 더 드래곤의 곁에 머무르고 싶으신지 안색이 울적하고 눈동자가 축축하곤 했다.

‘어쩌면 야베스 왕자님과 아직 냉전 중이셔서 그런 걸지도 몰라.’

작은 머리를 굴려 이리저리 추측하면서 사라는 벗겨 낸 케이프를 제 팔에 걸쳤다.

“평소보다 더 마르신 것 같아요, 공주님. 차를 준비할까요?”

시녀가 물었다.

“아니야. 왠지 차는 끌리지 않네.”

답하며, 아사야가 창가 자리로 가 섰다. 간밤에 내린 눈이 정원 위에 소복하게 쌓여 있었다. 정원사가 깎아 놓은 나무도 눈으로 뒤덮여, 키 큰 눈사람처럼 보였다.

환한 풍경을 바라보며 말이 없는 아사야를 향해 사라가 한 발 다가서자 유라가 그녀의 팔을 살짝 붙들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작게 내저었다. 바다를 건너온 잎이라며 첫째 왕자비가 내놓은, 귀한 차에도 입을 대지 않던 공주님이었다.

“감기 기운이 있으신가 봐요. ……그럼, 우유를 가져올까요?”

기운 없는 아사야의 뒷모습을 살피다, 사라가 물었다.

“응. 그게 좋겠어. 꿀을 넣고 데워서 따듯하게…….”

그제야 공주께서 웃어 보였다. 들뜬 마음에 사라와 유라는 쏜살처럼 움직였다. 두 시녀가 종종거리며 다과상을 차리는 동안, 아사야는 창문 밖을 오가는 작은 새를 바라보며 멈춰 있었다.

의도치 않게 아사야는 시녀들의 노력을 헛수고로 만들었다. 단 우유를 한 모금 마시기는 하였지만 그뿐, 설탕이 뿌려지고 꽃무늬로 구워 낸 고급 과자는 조금도 건드리지 않은 것이었다. 아리송한 얼굴로 주인을 바라보며, 사라와 유라는 괜스레 움츠러들었다.

“이제 됐어. 치워 줘.”

혹여 다과를 차릴 적에 무얼 실수했나, 고민하며 유라가 과자를 치웠다. 그런 의심을 알기라도 했는지, 아사야는 고급 과자 하나씩을 두 시녀에게 쥐여 주었다. 주인에게서 과자를 선물받은 시녀에게, 잘못이 있을 리 만무했다.

그럼 도대체 뭐가 문제일까…… 고민만 할 뿐 입 밖으로 질문을 꺼내진 못하는 유라를 대신할 이가, 단 한 명 있었다.

“식욕이 없으세요, 아가씨? 쿠키를 드시고 싶어 하셨다면서요.”

공주님의 유모였다.

“엠마오.”

늙은 유모의 손이 어깨를 감싸자, 아사야가 두 눈을 편안히 내리깔았다. 저에게 몸을 맡긴 아가씨의 목덜미를 엠마오가 꾹꾹 눌러 주물렀다.

“사실은…… 이새가 만든 쿠키가 먹고 싶은 거였거든.”

유모의 손길에 마음이 풀린 듯 아사야가 소곤거렸다. 왕성의 시녀들은 공주께서 무어에 대해 말하는지 몰랐지만 엠마오는 알았다.

‘이새’는 아졸 공작성에서만 사십 년째 일하는 요리사였다. 실력 있는 요리사들이 으레 그렇듯이, 그에게도 그만의 특별한 비법 쿠키가 있었다.

이새는 반죽을 굽기 전에 중앙을 스푼으로 눌러 둥근 홈을 내고, 다 구워 낸 뒤에는 파인 자리에 잼을 얹었다. 그러고는 잼 위에 설탕을 잔뜩 뿌리고, 불에 살짝 구워 두툼한 설탕이 유리막처럼 투명하고 단단해지게 만들었다.

그렇게 만들어 낸 쿠키는 모양도 크기도 조금씩 달랐지만, 맛만큼은 한결같이 좋았다. 단단히 굳은 설탕이 사탕처럼 바삭하고, 쿠키 속과 딸기잼은 부드럽고 따듯했다.

“그런 거라면 별수 없네요.”

이새의 비법 쿠키는 이새만이 만들 수 있는 것이라, 왕성 파티셰가 흉내를 낸다 해도 그 맛까지 따라잡진 못할 터였다.

“공작성에서 보내온 편지가 있으니, 답신으로 쿠키를 보내 달라 하시면 어떻겠어요?”

아사야의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리며, 엠마오가 말했다.

왕성으로 시집온 이후, 꾸준히 편지를 적던 아사야였다. 수신인은 언제고 가디엘 아졸이었다. 지난 한 달간 보낸 편지만 네 통이 넘는 것을, 엠마오는 알았다. 그러나 젊은 공작으로부터는 돌아오는 답이 없었다.

아졸가의 남매가 아직 어리고 작던 시절, 얼마나 잘 어울리며 정원을 누볐는지 기억하는 유모였다. 베데르 경이 떠난 뒤 갈라진 남매의 사이가 안타깝기도, 애석하기도 했다. 어린 아사야가 아버지에 이어 오빠의 품을 떠나 공작성을 그리워하는 것이 안쓰러웠다.

그런 아가씨께서 하염없이 기다리던 답신이 오늘에야 도착했다. 가디엘 아졸이 적어 보낸, 아졸가의 인장이 찍힌 편지였다. 그러니 아가씨께서 기뻐할 것이라고, 유모는 굳게 믿었다.

그러나 뜻밖에, 아사야는 그저 차분한 얼굴을 보여 줄 뿐 반응이 없었다. 편지가 어디에 있냐, 당장 꺼내 달라, 유모가 기대한 말은 일언반구 없었다.

세상에 단 하나 남은 혈육, 제 오빠에 대한 그녀의 감정은 무척 복잡하고 오래된 것이어서, 어린 시녀들은 물론이며 엠마오조차도 정확히 읽어 내지 못할 때가 많았다.

“쉬고 싶어.”

한층 가라앉은 얼굴로 아사야가 말했다. 그녀의 마르고 작은 턱을, 엠마오가 근심 어린 얼굴로 살폈다.

“낮잠이라도 주무시겠어요?”

유모가 묻자,

“베데르 성으로 갈래.”

아사야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시녀들이 새 망토를 가져다 둘러 주는 동안 엠마오는 사랑하는 아가씨의 뒷모습을 바라만 보았다. 멍해진 듯 보이는 늙은 유모를, 사라가 의아한 듯 힐끔거렸다.

느릿하게 흐르는 오후의 시간, 엠마오의 마음 안에선 앨범이 벌컥 떨어졌다. 기억에 책장이 있다면 가장 깊은 자리에 꽂아 두고는 두 번은 꺼내 보지 않던 앨범이었다. 그 첫 페이지에, 다가올 죽음을 모르는 채 부른 배를 쓰다듬던 엘라 아졸이 있었다.

배 속의 아이가 가디엘의 남동생이 될지, 여동생이 될지 궁금해하며 웃던 공작부인의 모습이 유모의 눈에 선했다. 창가에 앉아 그녀는 아기에게 입힐 옷을 직접 만들곤 했다. 나무 수틀과 학가위 옆에는 늘, 꿀을 탄 우유 한 잔이 식어 가고 있었다.

저는 결혼 한번 않았고 아이를 가져 본 적도 없지만 엠마오는 임신에 대해 잘 알았다. 정확히는, 임신한 공작부인에 대해 잘 알았었다. 가디엘을 뱄을 때도, 둘째 아사야를 가졌을 때도, 엘라 아졸은 좋아하던 차를 더는 즐기지 않으며 우유를 찾는 것으로 변화의 신호를 보내왔다. 체온은 평소보다 뜨끈하며 어깨는 나른해진 게 꼭 감기에 걸린 사람 같았다. 자고 난 뒤에는 뺨이 어린아이 젖살처럼 살짝 부었으며, 손목과 발목은 가늘어졌다.

그리고,

“이새를 좀 불러와 봐, 쿠키를 만들어 달라 해.”

식사는 걸러 놓고 쿠키로 속을 채우고는 했었다.

떠난 공작부인을 추억하며 생각에 잠긴 유모를, 시녀들에 이어 아사야마저 물끄러미 바라봤다. 이내 아사야는 작은 웃음을 흘렸다.

“엠마오.”

공주가 부르자,

“네, 아가씨?”

유모의 어깨가 화들짝 제자리에서 튀듯이 움직였다. 놀란 유모의 모습이 재밌었는지, 어린 시녀와 함께 아사야는 웃음을 터뜨렸다. 어느새 노란 망토로 몸을 감싸고 외출 준비를 마친 채였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가씨.”

“가자. 응?”

해처럼 웃으며 아사야가 손짓하자, 엠마오가 그녀의 뒤를 쫓았다. 베데르 성으로 향하는 짧은 외출에도 유모가 뒤따라야 안심이 되는 아사야였다.

폼과 드래곤에게 나누어 줄 것이라며 과자 상자를 챙긴 아사야의 어린 손을, 엠마오는 마음에 새겼다.


 

.*. *. *. *. *. *.


 

아사야 세일산의 많은 것이, 아주 조금씩 달라졌다. 그녀를 모르는 이들은 그럴 수 있다 여기겠지만, 눈여겨 살피며 돌보는 이들은 알아채고 의심할 정도였다.

가장 먼저 집중력이 흐려지고 잠이 많아졌다. 그녀는 시를 읽다가도 졸았고, 삼십 분이면 깨던 낮잠을 세 시간까지도 즐겼다. 식욕 역시 들쭉날쭉했다. 식사를 자주 걸러 엠마오의 걱정을 사다가도, 무어 꽂힌 음식이 생기면 폭식을 했다.

없던 변덕이 생긴 것도 같았다. 지난주에는, 드로인이 몇 번을 추천해도 관심 없다며 외면했던 말린 과일을 두 통이나 구입했다. 그러고는 닷새 만에 전부 먹었다. 어제는 전개가 뻔해서 재미없다며 혹평을 남긴 소설을 앉은 자리에서 끝까지 읽어 내리며 울기까지 했다.

변화는 그녀의 행동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몇 주 만에 아랫배가 동그랗게 나왔다. 가느다란 목과 손과 발, 허벅지와 엉덩이는 날씬한 상태 그대로였다. 그러니 살이 찐 것은 아니었다.

그녀의 동그란 배는 단순한 살이 아니었다. 살이 찐 것이라면 그렇게, 속에 무어가 든 것처럼 모양이 탄탄할 수 없었다. 문외한이 보았더라도 아사야 세일산이 임신을 했음을 알아챌 것이었다.

왕좌의 주인이 자리바꿈하는 새해에 붙일 연호를 정하느라 왕성의 분위기는 들떠 있었다. 소란하고 설렌 기운이 가득한 중에 엠마오와 시녀들만이 차분했다. 서로 간에 눈짓을 나누면서, 그들은 삼총사처럼 다닥다닥 붙어 다녔다. 아사야의 변화를 구체적으로 인지한 지인은 그들이 전부였다.

유모와 시녀들이 아는 사실이 한 가지 더 있었다. 임신 초기에는 배의 크기가 거의 자라지 않고 감정의 변화가 많을 때인데, 아사야는 그렇지 않단 점이었다. 책을 보며 훌쩍이는 시간이 있긴 하였으나 아사야의 감정은 대체로 평온했다. 대신에 배가 커지는 속도가 일반적이지 않았다.

‘아랫배가 조금 나오셨나?’

생각한 것이 지난주인데,

‘다른 내의가 필요하겠어.’

고작 한 주 사이 그 크기가 눈에 띄게 달라져 있었다.

그러나 그들 중 누구도 소리 내어 그 사실을 지적하지 않았다. 지적은커녕 ‘임신’이라는 상황 자체를 소리 내어 말한 적이 없었다. 엠마오는 바깥바람이 차고 아직 눈이 녹지 않았다는 이유를 들어 두꺼운 드레스와 망토를 준비했고, 시녀들은 공주님의 코르셋을 일부러 빼먹었다.

왕자비의 임신은 단연 축복할 일이었다. 더군다나 요즘과 같이, 왕좌의 주인이 본도 세일산으로 정해지며 야베스 세일산의 관계가 좋지 못한 때에는, 아사야의 임신은 남편에게 힘을 실어 주고 그들 부부를 향한 왕의 애정을 돌려받을 기회였다.

그러나 엠마오와 유라, 심지어는 눈치 없이 둔한 사라조차도 공주의 변화를 모르는 척 묵인했다. 그들이 정치적인 상황에 대해 몰라서는 아니었다. 정치적인 상황을 떠나, 둘째 왕자 부부의 침실 상황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었다.

그들 부부의 이불을 치우고 빨래하는 것도, 체액이 묻은 아사야의 몸을 씻겨 주고 주무르는 것도, 몸살이 올랐다며 피로해하는 그녀의 다리를 주무르는 것도 전부 유모와 시녀들의 몫이었다. 그러니 그들은 둘째 왕자 부부가 언제 마지막으로 잠자리를 가졌는지 알았다.

세일산 왕가의 둘째 부부는 냉전 중이었다. 대외적인 자리에서야 사이에 문제가 없다는 양 서로 붙어 다녔지만, 침실로만 돌아오면 눈에 띄게 싸늘해졌다. 일방적으로, 아사야가 그랬다. 그녀가 ‘사랑의 증명’으로 요구한 금고의 출입 권한을, 야베스 세일산이 쉽게 내주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그들이 관계를 가진 일은 냉전 이전이었다. 유모와 시녀들이 알기로 아사야의 몸에 변화가 생긴 요 근래는커녕 두 달 전도, 세 달 전도 아니었다. 야베스 세일산이 마지막으로 아사야를 안은 것은 벌써 네 달 전의 일이었다.

그러므로 둘째 왕자비의 배 속에 든 아기는 야베스 세일산의 자식이 아니었다. 그의 씨일 일말의 가능성조차 없었다.

묵인하는 여자들의 혀 밑에는 감춰진 진실이 있었다.

단 한 번도 아사야에게 소리 내어 묻거나 사실 확인을 한 바 없었으나, 유모와 시녀들은 이미 제가 모시는 공주께서 마음에 담은 이를 알았다. 그가 단순히 크고 못된 마물이 아니라는 것도, 소설에 쓰인 것과 같이 포악한 악마와도 거리가 멀다는 것도, 공주께서 베데르 성의 문을 닫고 걸어 들어가며 이름 부를 때마다 터벅터벅 걷는 발소리와 낮고 조용한 말소리로 응해 오는 남자임도 알았다.

무거운 비밀을 감춘 유라와 사라를 안심하게 만드는 것은, 엠마오의 조심성이었다. 공주께서 사라졌다 돌아오신 해의 첫날, 엠마오는 시녀들을 시켜 아가씨께서 입었던 옷과 드레스를 전부 태워 버리라 지시했다.

“후에 누군가 잘못을 따지거든, 내가 책임을 질 테니 시키는 대로 해 줘.”

그렇게 아리송한 말과 함께였다.

그때는, 유라와 사라는 엠마오가 미쳤나 보다 생각했었다. 내의까지 풀물이 든 드레스가 무슨 죄인가 싶었다. 깨끗이 빨래하면 될 것을, 귀한 옷을 태우는 게 아깝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 와 생각해 보니 엠마오가 옳았다.

‘공주님께서…… 용의 아기를 가지신 거야.’

유라가 살필 적엔 그 사실을, 공주께서도 아심은 틀림없었다. 제 몸에 생긴 노골적인 변화를, 모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옷을 입고 벗을 때마다 거울 속의 제 모습을 바라보며, 부푼 배 위를 만져 보던 아사야 세일산을 유라는 기억했다.

‘그럼 드래곤도 알고 있을까?’

궁금증에 유라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라의 목격담을 들어 그 드래곤이 ‘엄청나게 키 크고 잘생긴 남자’임은 알았지만, 그의 성격까지는 유추해 낼 수 없는 유라였다. 심부름으로 베데르 성을 오가며 마주칠 때 살피기로는, 그 시커멓고 거대한 드래곤에게는 달리 어떠한 감정의 변화도 없어 보였다.

음식과 물이 든 바구니를 들고 오가는 시녀를 한번 바라볼 뿐, 공주님이 아니라는 걸 알고 나면 감흥 없다는 듯 고개를 돌리는 게 전부였다.

‘그도 알고 있겠지. 공주님께서 말하셨을 테니까…….’

도리 없이 어린 소녀인지라, 유라는 내심 공주와 검은 용의 로맨스를 소설 속 장면처럼 상상했다. 왕자가 아니라 제 아기를 가졌음을 안다면, 시커먼 검은 용이 사람의 모습으로 공주님을 안아 주었으리라. 뛸 듯이 기뻐하며 한편으로는 자격지심에 빠졌을지도 몰랐다. 그는 왕자도 공주님의 남편도 아니며, 대륙의 명물처럼 남겨진 블랙 드래곤이니 말이었다.

베데르 성은 왕성과는 다른 멋으로 아름다운 곳이었다. 내색은 않았지만 유라는 그 성을 오가며 심부름하기를 좋아했다. 그렇게 성대한 성이 공주님과 그의 아지트임을 알고 나니 그 공간이 더욱 멋지고 특별하게 생각되었다.

공주께서 그녀의 검은 용에게 임신 사실을 알리기는커녕 그를 슬프게 한 줄은, 유라는 꿈에도 몰랐다.


 

.*. *. *. *. *. *.


 

제 몸 안에 작은 생명이 움텄음을 알자마자, 아사야는 그 소식을 가브리엘에게 전하고자 했다. 그 누구보다도 가브리엘이 먼저 알았으면 했고, 그와 제 사이에 생긴 아이를 고대하며 기뻐하고, 간만에 활짝 웃어 주었으면 했다.

그의 아기를 왕자의 자식인 양 품는 일은 필히 힘이 들 테지만, 그래도 걱정보다는 기쁨이 큰 아사야였다. 홀쭉하던 아랫배가 밋밋해지다가, 둥그스름한 형태를 갖추며 부풀기 시작하자 그 기쁨은 걱정을 전부 지울 정도로 커졌다.

엄마가 되는 일은 상상해 본 적도 없었지만, 제 배 속의 아이가 가브리엘의 피를 물려받았다 생각하니 들뜨고 행복했다. 그가 보내고 제가 품은 사랑의 결실이었다. 싫을 수가 없었다. 오히려 아사야는 벌써부터 제 아이를 사랑할 준비를 마쳤다.

하루라도 빨리 태어나 얼굴을 보여 주고 목소리를 들려주었으면 바랐다. 성별은 어떻고 눈 색은 어떻고 성격은 누구를 닮았을까 궁금했다. 그녀의 작은 몸에 갓 자리 잡은 콩알만 한 생명체는, 아사야에게 선물이었다.

한달음에 달려간 베데르 성문 앞에서, 아사야는 마법사를 만났다. 두 팔 가득 짐을 안은, 폼 에드레이였다. 마법 도구와 재료가 한 아름이고 바지 밑단이 불에 그을린 양 회색인 것을 보니 적마를 타고 다녀오는 길인 모양이었다.

“폼. 가브리엘은 망루에 있나요?”

설렌 얼굴로 묻는 아사야를 향해 폼은 두 눈을 휘둥그레 떠 보였다. 사람을 살필 적에 그녀의 눈동자는 상대의 얼굴 생김보다는 그의 주위에 머물렀다. 폼의 시야를 모르는 이들은 그녀의 눈짓을 ‘맹하다’느니 ‘초점이 없다’며 나쁘게 말했지만, 아사야는 달랐다.

“공주님…….”

한 아름 껴안았던 귀한 도구들을 와르르 떨구는 폼을 본 순간 아사야는 알았다. 폼 에드레이는 그녀의 주위에 떠다니는 마나를 직시하고 있었다.

‘티가 나나 봐.’

놀란 폼의 시선을 마주하며 아사야는 작게 웃어 보였다. 그러고는 마법사가 떨어뜨린 양피지와 무언지 모를 액체가 든 유리병을 대신하여 집어 주었다. 그제야 폼이 허둥지둥하며 제 물건들을 함께 주웠다.

“……가브리엘은, 뭘 하고 있나요?”

또 한번, 아사야가 물었다. 그러자 폼이 이상한 반응을 보여 주었다. 무얼 말하고 싶어 죽겠다는 듯 입술을 달싹이면서도, 목소리를 내지는 못하고 끙끙거리는 것이었다.

목이 마른 말처럼 숨을 몰아쉬는 폼을, 아사야가 두 팔 뻗어 진정시켰다.

“폼?”

그러자 마법사가 불쑥,

“안 돼요.”

외쳤다.

“공주님, 안 돼요. 가브리엘에게 말하지 말아요, 절대로 알리시면 안 돼요.”

느닷없는 반응에 아사야는 크게 당황했다. 제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제 상태를 한눈에 꿰뚫어 보도록 유능한 마법사는, 무어에 겁이 나고 곤혹스러운 양 안달을 내고 있었다. 심지어는, 단 한 번도 무례하게 군 적 없이 조심성 많은 손으로 아사야의 앞을 가로막기까지 했다.

“폼. 무얼 말하지 말란 거예요?”

아사야가 묻자,

“공주님의…… 배 속 아기.”

폼이 답했다.

“그 아기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알려선 안 돼요.”

마법사의 눈에는 보였다. 아사야 세일산의 몸을 감싼 마나의 결이 달랐고, 날숨을 타고 빠져나오는 호흡의 색이 달랐다. 그녀의 심장에 뭉쳐 있던 강인한 열기가, 흉곽 아래로 흘러가 배에 고이는 것 또한 선명했다.

어머니가 될 아사야의 배에 뭉친 열기는 아직 조약돌처럼 작을 뿐이지만, 조만간에 크게 자라날 게 분명했다. 그 안에 움튼 차갑고 검은 마나가 그 존재의 근원을 알리고 있었다.

“그렇게 겁내지 않아도 괜찮아요.”

제자리에서 불안한 듯 떠는 폼을, 아사야가 잡아끌었다. 다정한 공주는 겁에 질린 마법사를, 정원의 그네 자리로 데려가 앉혔다.

처음으로 폼은 아사야 세일산 앞에서 나태해졌다. 저보다 존귀하신 공주께서 서서 제 어깨를 쓰다듬는데, 저는 그네에 앉아 힘 빠진 다리를 떠는 것이었다. 그 상황이 몹시도 잘못된 불충임은 알았지만 그녀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가브리엘을 믿어요, 폼. 나도 가브리엘이 어떤 반응을 보여 줄까 걱정이 되긴 하지만…… 겁낼 정도로 큰 탈은 없을 거예요. 오히려 기뻐할 거라고 생각되는걸.”

아사야가 말했다. 그러자 폼은 제가 보인 난해한 반응의 이유를 설명했다.

“그를 못 믿어서가 아니에요. 너무 잘 알기 때문이에요.”

또박또박 외치는 말에, 아사야가 두 눈을 크게 떴다. 공주께서 유리정원의 닫힌 문을 살피자, 폼은 목소리를 낮췄다.

“공주님, 가브리엘은 강인한 존재이고, 공주님을 사랑하고 있어요. 하지만…….”

“하지만?”

“……하지만, 그는 블랙 드래곤이에요. 블랙 드래곤은 새끼는커녕 반려도 쉽게 두지 않아요. 무리 생활을 하는 경우도 거의 없고, 몇백, 몇천 년을 무리 없이 혼자 살다가 사라지는 경우가 태반이에요. ……하지만 한번 반려를 갖고 무리를 꾸리게 되면 그 가정에 충실하죠.”

마법사의 설명에 아사야는 더욱 아리송해졌다.

“가브리엘이 나를 반려로 생각한다면 그건 기쁜 일이야. 내 삶에 가브리엘보다 더 큰 축복은 없었어.”

그녀의 작은 손이 절로 제 아랫배를 감쌌다. 두툼한 겨울 드레스 위로는 티가 나지 않았지만, 두 손을 가져다 올리면 부드럽게 오른 배의 윤곽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애를 갖기 전까지는 그랬지.”

부드러운 미소가 오른 아사야의 얼굴에 행복이 묻어났다. 마도구 개방을 향한 갈망도, 벽처럼 입을 다문 야베스 세일산으로 인한 고민도, 왕좌의 주인이 결정됨에 따라 흔들리는 입지도 아사야의 기쁨을 막지는 못했다.

“공주님.”

그런 아사야 세일산을 위해서 폼은 싫은 말을 전해야 했다.

“……무얼 파괴하고, 망가뜨리고, 잿더미로 만드는 것이 블랙 드래곤의 습성이에요. 가브리엘을 욕하려는 게 아니에요, 그의 마력과 능력에 대해 말씀드리는 거예요.”

나쁜 소식을 전하면서도 마법사는 차분해야 했다. 어디까지나, ‘사실’은 ‘사실’에 불과했다. 그 사실이 좋고 싫고는 듣는 이가 판가름할 일이었다.

“공주님께서 가진 아기가 제 자식인 걸 안다면, 가브리엘은 지금과 같지 못할 거예요. 그는 야베스 세일산을 죽일 거예요.”

그러나 폼 에드레이는 제 목소리가 과연 감정 없이 차분한가 확신할 수 없었다. 아사야의 미소에 금이 가고 해맑던 얼굴에 서리가 앉는 것을 바라보면서, 완벽하게 객관적이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공주님께 이렇게 만류의 말을 전하는 저 역시 죽일 거예요.”

“폼, 아니야, 가브리엘은…….”

놀란 아사야의 목소리가 섞여 들었다.

“가브리엘은.”

아사야의 마음을 단단히 굳히기 위해, 폼은 그녀의 말을 채 갔다.

“……공주님과 그, 그리고 배 속 아기 사이에 존재하는 모든 걸 용납하지 못할 거예요. 공주님과 가까운 모든 이를 질투하고 그것들을 전부 밀어내려 할 거예요. 본능이 이성을 이기게 되면…… 가브리엘은 우리가 알던 이가 아니게 될 거예요.”

‘그는 그럴 수 있는 존재였으니까요’, 속삭임 같은 소리가 덧붙여졌다. 아사야는 그 문장이 과거형인 이유를 알았다. 현재의 가브리엘은 ‘그럴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인공 마석에 가둘 수 있는 한도 내의 힘을 전부 잃어버린 상태였다. 본능이 이끄는 대로 살생을 저지른다면, 그의 목숨 역시 보장할 수 없게 될 터였다.

“한때 그의 이름이 발락이었어요. 발락은 에돔과 같이 신이라 불리던 존재였죠. 그런 존재에게 제 습성에 저항해야 하는 무기력만큼 고통스러운 게 없을 거예요.”

느릿느릿 아사야가 발을 움직였다. 풀밭 위에 주저앉지 않기 위해서였다. 비틀거리는 공주의 어깨를, 이제는 마법사가 부축했다. 그러고는 그네 왼편 자리에 앉혀 주었다.

“공주님.”

아사야의 앞에, 폼이 무릎을 쪼그리며 앉았다. 삽시간에 시무룩해진 공주의 얼굴을 보자니, 제 마음이 타들어 가는 듯 아렸다. 베데르 경을 닮아 강직하며 심기 굳던 아사야 세일산도 사실은 어리숙한 스무 살이었다. 가브리엘의 존재와 그를 향한 사랑이 아사야를 강해지게 만들었지만, 한편으로는 그것만큼 그녀를 아프게 하는 것이 없었다.

서늘해진 아사야의 두 손을, 폼이 조심스레 감싸 쥐었다.

“공주님께서도 사실은, 알고 계시잖아요.”

지난해 서로를 처음 만날 적에, 아사야가 폼을 달랬듯이 오늘은 폼이 그녀를 달래었다.

“그래도…… 알려 주고 싶었어, 가브리엘에게…….”

속상한 얼굴을 보이며 아사야가 속삭였다.

모든 게 완벽하게 술술 풀리리라곤 기대하지 않았다. 당장은 걱정거리가 더 많단 것도 알았다. 그래도 이 왕성 안에 가브리엘을 순전히 기쁘게 할 소식이 하나쯤은 있다는 게 좋았다. 그에게 전해 줄 이야깃거리가 생길 때마다 아사야의 심장은 빨리 뛰었고, 설렘은 그녀에게 생기를 안겨 주었다.

그러나 그녀는 여느 귀족가 아가씨가 아니었다. 그녀는 왕자의 아내였고, 왕성의 공주였다. 들뜬 행복만으로 움직이기에는 그녀의 어깨에 걸린 것이 많았다.

때가 오면 아사야 세일산은 야베스 세일산에게 제 몸에 생긴 변화를 고백해야 했다. 제가 품은 씨가 그의 것인 양 위장하고, 그를 속이며 그의 기쁜 얼굴을 마주해야 했다. 그 순간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아사야는 목구멍에 큰 돌이 박히는 듯했다.

벌써 사랑에 빠져 버린 그녀 배 속의 아이는 그녀가 품은 거짓 가운데 가장 무겁고 컸다. 야베스 세일산의 예민하고 폭력적인 손아귀를 피해 미꾸라지처럼 헤엄칠 나중 일을 생각하자니 너무도 벅차, 사소한 근심 따위는 무감각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래서 기쁨이 고팠다. 오늘, 이 순간에만 만끽할 수 있는 달콤한 기쁨을 가브리엘과 나누고 싶었다. 그에게 입 맞추고 그의 입맞춤을 받으며, 제 미소가 잠시라도 전염되었으면 바랐다.

“가브리엘이 안다면 기뻐했을 텐데…….”

원한 것은 그뿐이었다.

고개 숙인 아사야의 뺨을 따라 검은 머리칼이 흘러내렸다. 이미 풀 죽은 그녀에게 아픈 소리를 더 늘어놓을 정도로, 폼은 매정한 마법사는 되지 못했다.

“……제가 더 노력할게요.”

다만 맹세했다.

“공주님의 거짓말이 길어지지 않게끔, 연구에 더욱 전념할게요. 마도구의 결박 마법을 하루라도 빨리 풀어내겠어요.”

맹세의 끝에,

“그러니 부디 울지 마세요.”

부탁의 말이 매달렸다.

“네? 공주님.”

저를 감싸는 붉은 손을, 아사야는 가만히 내려다봤다. 마침내, 그녀는 두 눈을 질끈 감아 고였던 눈물을 떨쳐 냈다. 그러고는 두 뺨을 닦아 내며 안색을 밝혔다.

“그래도…… 가브리엘에게 먼저 말하고 싶어. 내가 어머니가 될 거란 소식은.”

그네 자리에 앉아 하염없이 우울감에 젖을 정도로, 아사야에겐 시간이 많지 않았다.

“같이 가겠어? 좋은 소식을 알려 줘야지……. 내 배 속에 왕자님의 아기가 들었다고.”

자리에서 일어서며 아사야가 말했다.

잠시간 말없이, 폼은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꽃이 피듯 금세 지은 미소가 보기 좋게 예뻤다. 몇 번이고 가짜 웃음을 지은 끝에 아사야 세일산은 연기를 익혔다. 괜찮은 척, 기쁘고 즐거운 척, 아무런 걱정이 없이 유복한 척 웃기란 왕성의 여인이 갖춰야 할 덕목이었다.

“두 분의 시간, 방해하지 않을게요.”

한 발짝, 뒤로 물러서며 폼이 인사했다.


 

.*. *. *. *. *. *.


 

왕자의 아이를 가졌다는 아사야의 고백에, 가브리엘은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어린 인간이 제 손을 끌어다 자신의 배 위에 올리는 것을 물끄러미 지켜볼 뿐이었다.

침묵하는 가브리엘의 표정을 읽기란 아사야에게도 힘든 일이었다. 그는 화가 난 것 같지도, 슬픈 것 같지도, 질투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두 눈은 아사야의 아랫배에 고정시킨 채 근육의 작은 움직임 하나 없이 멈춰 있을 뿐이었다.

제 감정은 감추고 상대의 기분을 훔쳐보기란 더 어리고 더 여린 아사야에게 불리한 싸움이었다. 석상처럼 몸을 굳힌 그가 감춘 감정이 무언지 알 수 없어 아사야는 답답해졌다. 한편으로는 걱정이 되어 미칠 것만 같았다.

‘가브리엘이 나를 미워하게 되면 어떡하지? 날 싫어하고, 내 배 속의 아기를 증오하게 되면 어떡하지?’

불안감이 커질수록 그녀는 가브리엘의 손을 더욱 세게 잡았다. 움켜쥐고 꼬집듯이 제 손가락을 쥔 어린 인간을, 가브리엘은 보라색 눈동자에 천천히 담았다.

“가브리엘. 내가…… 널 실망시켰어?”

떨리는 목소리로, 아사야가 물었다.

“아니.”

그러자 그녀의 용이 즉답했다.

“넌 절대로 날 실망시키지 않아.”

그의 낮은 목소리에는 단단한 힘이 실려 있었다. 짧은 대답 하나에도 마음이 풀렸고 불안감이 녹아 사라졌다.

아사야는 그가 제게 언제나 진실만을 전함을 알았다. 그가 실망하지 않았노라 말할 때면, 그 말을 믿는 것이 제가 할 일이었다.

아주 천천히, 가브리엘이 손을 움직였다. 그가 손가락을 넓게 펴자 드레스의 풍성한 주름이 넓게 펼쳐졌다. 두툼한 옷에 감췄던 아사야의 아랫배도 동그란 윤곽을 드러냈다. 어린 인간의 작은 몸에 자리한, 아주 작은 생명이 가브리엘의 손바닥 아래에 있었다.

그대로 한참 동안 그는 아사야의 배에 손을 올린 채 멈춰 있었다. 그가 제 심장 소리를 듣던 것처럼 태아의 박동을 느끼고 싶어 하는 것을, 아사야는 알아차렸다. 그래서 두 팔을 뒤로 디딘 채 배를 내밀고 기다리기를 택했다.

말 없는 시간이 고요하게 흘렀다. 가브리엘이 집중한 고양이처럼 제 배를 만지는 동안, 아사야는 그의 얼굴을 관찰할 수 있어 좋았다. 그의 곧은 눈썹이며 몰입한 눈동자, 돌을 깎은 것처럼 딱딱해 보이는 콧대와 꽉 다물린 입술을, 아사야는 구경했다.

폼은 가브리엘을 발락이라 불렀고 그의 습성이 파괴라고 말했지만, 아사야의 생각은 달랐다. 무슨 일이 있어도 가브리엘은 저를, 그리고 제 배 속의 아기를 해치지 않을, 그녀만의 드래곤이었다.

‘네 아이야, 가브리엘.’

입꼬리를 움찔거리며, 아사야는 마음으로 외쳤다.

‘우리 아기야. 너랑 내가 만든 아기.’

왕성에서 지내며 느는 것은 연기뿐만은 아닌 듯했다. 원하는 상황을 상상하는 솜씨 역시 좋아짐에 틀림없었다. 아사야는 진실을 안 가브리엘이 뛸 듯이 기뻐하는 모습을, 행복에 겨워 웃는 소리를, 저를 단단히 껴안으며 포옹하는 온도를 상상했다.

그리고 화들짝 놀랐다. 그녀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가브리엘이 불쑥 두 팔을 뻗은 것이었다. 아사야의 상체를 포옹할 적에 그의 품은 넓었고 그 온도는 따듯했다.

“대신…… 부탁이 있어.”

아사야의 뺨 옆에 제 고개를 가져다 대며, 가브리엘이 속삭였다.

“부탁?”

놀란 입을 벌리며 아사야가 되물었다. 제 심장이 콩닥거리는 소리가 메아리처럼 들려왔다.

“부디 널 닮은 아기를 낳아 줘.”

가브리엘의 부탁은 그게 전부였다. 그 말을 끝으로, 그는 강한 포옹만을 아사야에게 주었다. 어떤 미움도, 증오도, 질투도 없었다.

울컥, 아사야는 흉곽 안에서부터 벅차오르는 감정을 느꼈다. 눈시울이 벌겋게 붉어졌고 두 손이 약하게 떨려 왔다. 울먹거리며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자, 가브리엘의 포옹은 더욱 강해졌다. 그가 저를 어제와 같이 제 품 안에 욱여넣을 것처럼 세게 안아 주는 것에 아사야는 안심했다.

눈물을 찔끔 흘리고 나니 실소가 나왔다. 맥없는 웃음을 터뜨리며 아사야가 말했다.

“아기 얼굴이라는 게…… 내 마음대로 만들 수 있는 게 아니야.”

허탈하게 빠져나오는 소리에 가브리엘이 고개를 움직였다. 그의 뺨이 아사야의 뺨에 닿았다.

서로 얼굴을 포개어 맞댄 것이 아사야는 좋았다. 서로 간에 애정을 나누면서도 제 표정을 감출 수 있었고, 그의 표정을 읽어 내려 의심하지 않아도 됐다. 어쩌면 가브리엘 역시 그녀와 같이 안도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아기가…… 나를 닮았으면 좋겠어?”

“그래.”

“왜?”

“그래야 사랑스러울 테니까.”

이내 가브리엘은 당황했다. 어린 인간의 기분을 달래어 주려 건넨 말인데, 눈물이 그의 뺨에 묻는 탓이었다. 울먹임으로 아사야의 가슴이 들썩이기 시작했고 흘린 눈물이 그녀와 맞붙인 가브리엘의 볼을 타고 흘렀다.

아사야는 가브리엘 평생의 미스터리였다. 웃게 할 생각이 없을 때엔 저를 보며 웃었고, 울릴 마음이 아니었는데 울어 버리곤 했다. 별똥별처럼 제멋대로 움직이는 아사야를, 가브리엘은 어찌할 바 모르게 됐다.

“가브리엘.”

당황한 가브리엘의 굵은 목을, 아사야의 두 팔이 감싸 안았다. 그의 품에 매달리듯이 안기며 아사야는 젖은 목소리를 가느다랗게 냈다.

“나는 온종일 네 생각만 해.”

제 귀와 뺨을 적시는 소곤거림을, 가브리엘이 가만히 들었다.

“어디에서든, 뭘 하고 있든, 누구와 함께 있든…… 나는 네 생각만 해. 내 머릿속에 오직 너뿐이야. 너뿐이야, 가브리엘…….”

아사야의 두 팔이 오늘처럼 강하게 느껴지던 날이, 가브리엘에겐 없었다. 가느다란 팔에 가진 힘을 전부 싣기라도 한 것처럼 강한 포옹이었다. 저를 놓치면 멀리 추락이라도 할 사람처럼 매달리는 그녀의 등 위에, 가브리엘은 어색하게 손을 올렸다.

그러고는 책에서 읽은 것처럼 한 번, 두 번, 토닥였다.

‘아기가 너를 닮았으면 좋겠어, 가브리엘.’

전하지 못한 속삭임이,

‘그래야 사랑스러울 테니까…….’

공주의 가슴 안에 사무쳤다.


 

.*. *. *. *. *. *.


 

밤이 깊도록 눈도, 비도 내리지 않았다. 건조한 겨울의 공기는 맑았고 하늘에는 높은 별과 달이 반짝였다.

가브리엘을 찾기 위해 폼은 헤맬 필요가 없었다. 아사야 세일산이 돌아간 뒤 몇 시간 동안, 가브리엘은 시커먼 드래곤의 모습으로 망루에 머물렀다. 누군가 그곳에 설치해 놓은 거대한 석상이라도 된 것 같았다.

자정이 되도록 찬 바람을 쐬며 비늘을 굳히는 그를 말릴 이는 달리 없었다. 베데르 성에 머무르는 손님은 그 외엔 단 한 사람, 폼 에드레이뿐이었으므로.

“그만 들어오세요.”

두툼한 담요로 몸을 두르고서 폼은 묵직한 문 옆에 기대어 섰다. 심란한 듯 굳은 드래곤을 움직이기 위해 필요한 주문을, 마법사는 알고 있었다.

“드래곤이 밤새도록 망루를 지켰단 걸 알면, 공주께서 걱정하실 거예요.”

그렇게 덧붙이자 가브리엘이 목을 움직였다. 고개를 돌려 저를 보는 시커먼 머리는 밤의 어둠과 닮아 있어, 폼의 눈으로 볼 때엔 그림자 속에서 보라색 눈동자만이 빛나는 듯했다. 소리 없는 눈동자를 바라보며 폼은 쓴웃음을 지었다.

“가브리엘.”

괜찮냐고 묻고 싶었지만 입이 열리지 않았다. 팔짱을 끼듯이 담요를 감싸 쥔 채 폼은 그를 올려다보았다.

“폼.”

가브리엘이 입을 열었다.

“너는 보았지, 아사야가 품은 아이……. 정말로 왕자의 자식인가?”

밤의 공기처럼 차가워진 목소리였다.

잠시 동안 폼은 어떤 말도 꺼낼 수 없었다. 제 두 팔에 끔찍이 서린 레드 드래곤의 마력조차 분출한 뒤에야 겨우 알아보던 가브리엘이었다. 그 자신의 마나조차 읽어 내지 못해 마도구가 성안에, 바로 그의 곁에 머무는 줄도 모르고 6년을 갇혀 지낸 드래곤이었다.

시력도 후각도 촉각도 잃어버린 그에게는 무감각한 세계만이 남았다. 믿을 것이라고는 아사야의 말뿐이었고, 그마저도 믿기 어려울 때엔 그의 말마따나 ‘작은 개미’에 지나지 않는 폼 에드레이의 말이라도 들어야 했다.

신, 재앙, 악마라 불리던 힘을 잃어버린 고통을 폼은 짐작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가 느낄 무기력함에 대해서라면,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때문에 그를 속이는 일이 힘겨웠다.

폼이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네. 야베스 왕자님과 비슷한 마나가 흐르더군요.”

그녀는 형편없는 거짓말쟁이였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가브리엘은 인간의 거짓말을 구분할 줄 몰랐다.

십여 분은 더 찬 공기를 쐰 뒤에야, 드래곤이 성안으로 돌아왔다. 차갑게 식은 비늘에서 냉기가 뿜어져 나오는 듯했다. 폼은 애석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며 그의 등에 제 담요를 덮어 주었다. 커다란 드래곤의 몸을 가리기에는 보잘것없이 작아 보이는 담요였지만, 가브리엘은 거부하지 않았다.

“저……, 가브리엘.”

한 번 더, 폼이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고는 눈치를 살피며 입술을 달싹거렸다. 마법사가 차마 묻지 못하는 말에 가브리엘은 낮은 목소리를 내어 대꾸했다.

“아무래도 상관없어.”

무거운 발을 움직여 검은 용은 몸을 돌렸다.

그의 속을 찢어 놓는 것은 질투 따위의 조촐한 감정이 아니었다. 그의 잠을 쫓아내고 그의 밤을 망치는 것은 아사야에 대한 걱정과 애정이었다.

컴컴한 동굴 안으로 눈물 흘리며 걸어 들어오던, 유리병 가득 물을 떠다 건네어 주던, 작은 다람쥐처럼 어렸던 아사야였다. 팔 안에는 천공섬과 용에 관한 책을 보물처럼 안고 다녔었다. 모험하길 좋아하며 드래곤의 등딱지 위를 곧잘 올랐었다. 금발의 왕자님이 등장하는 동화 따위는 읽는 일이 없었다.

천진난만하던 어린 인간. 그게 가브리엘의 아사야였다. 그런 아사야가 원한 적 없는 남자의 자식을 가졌다고 생각하니, 가브리엘은 제 위장이 뒤틀리고 뼈가 휘는 것만 같았다.

그러니 ‘아무래도 상관없다’, 그렇게 무심한 답이 가브리엘의 진심이었다.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의 어린 인간이 누구의 아기를 갖고 누구의 곁에 눕건, 그는 상관치 않아야 했다. 그에게 아사야는 아사야 아졸이건 아사야 세일산이건, 언제고 어린 인간이었다.

‘상관없어.’

언제, 어디에서건 그는 아사야의 곁을 지킬 것이었다.


 

.*. *. *. *. *. *.


 

대륙의 왕성에 희소식이 생겼다. 야베스 세일산의 아름다운 아내, 왕성의 보물, 아사야 세일산이 아기를 가진 것이었다.

임신 넉 달째는 되어서야 그 소식을 세간에 알린 것을 두고 귀족들은 혀를 내둘러 댔다. 배 속 태아가 완전히 자리를 잡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발표한 게 아니냐며, 입이 근질거려 어떻게 참았느냐, 야베스 세일산도 그 아내도 참으로 독하다는 말이었다.

그러나 실상은 소문과는 상이했다. 아사야 세일산이 긴장 속에 그녀의 배가 드레스로 감춰지지 않을 정도로 커지기를 기다린 것은 맞았다. 그러나 그 시간은 고작 3주에 불과했다. 그녀의 배 속 아기는 보통의 태아와는 성장 속도부터가 달라서, 4주 차에 접어들었을 뿐인데 넉 달은 된 것처럼 보였다.

야베스 세일산도 아사야의 거짓말을 비껴갈 순 없었다. 매일 한 침대에 눕는 그를 속이는 일은, 아사야에게 가장 무거운 숙제이기도 했다. 그러나 어렵지는 않았다. 상처 입은 아내인 양 가장하는 것이 시작이었다.

“우리…… 이런 냉전은 그만둬요. 마음이 아파 더는 못 하겠어요. 당신이 날 사랑하는지 알 수 없어 두려웠을 뿐이에요.”

듣기 좋은 말을 속삭이며 그의 손을 제 부른 배 위에 올려 두면 그만이었다.

야베스 세일산이 뛸 듯이 기뻐한 것이야 당연지사였다. 애써 웃음 짓는 아사야를 껴안으며, 그는 그녀와 혼인하던 당일보다 크게 웃었다. 그러고는 제 이마를 짚으며 허둥지둥했다.

“그래서 토라졌던 거야, 아사야?”

아사야는 그에게 있어 제 존재가 일종의 승격을 받았음을 알 수 있었다. ‘그의 여자’이던 이름표에 ‘그의 아이를 가진 여자’라는 수식이 더해진 순간이었다. 야베스 세일산은 그녀를 향했던 일말의 의심과 불만족스럽던 감정을 털어 낸 듯 보였다.

“맙소사. 무엇이건 내가 사과하지. 진심이야, 아사야. ……아니, 어떻게 이런 소식을, 그렇게 꿈쩍도 않고 감출 수가 있지? 당신은 내 보물이야. 신께서 주신 선물이지.”

속사포처럼 말을 늘어놓으며 그는 흰 이가 드러나게 웃어 보였다. 제 배 위에 닿는 그의 손바닥을 내려다보며 아사야는 소금을 삼킨 것처럼 씁쓸해졌다. 이 기쁨이 그의 것이 아니라 가브리엘의 것이어야 했다는 슬픈 아쉬움과, 유일한 선택지라고는 하나 모두를 속여야 한다는 압박감 때문이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아사야가 직접 나서서 제 거짓말을 퍼뜨릴 필요는 없었다. 신관을 불러다 아사야의 임신 사실을 확실히 하자마자 야베스 세일산이 움직였기 때문이었다. 가장 먼저 그는 사렙탄 세일산에게 알현을 요청했으며 가까운 귀족에게 말을 흘렸다.

아사야 세일산의 복중에 아기가 있었다더라, 그래서 지나간 해의 말일 연회 날 둘째 부부의 행보가 감정적이었다…… 퍼뜨린 소문은 당연지사 비아탄 아멕의 귀에, 그리고 사렙탄 세일산에게로 흘러 들어갔다.

“야베스 왕자님께서 알현을 청하십니다.”

그런 소문을 듣고도 제 아들을 쳐 낼 정도로 사렙탄은 매정하지 못했다. 그는 알현실이 아닌 제 집무실로 야베스를 불러다 앉혔다. 떠도는 소문이 사실임을 조용히 확인받기 위해서였다.

“폐하께 가장 먼저 말씀드렸어야 했는데, 제가 불충을 범했습니다.”

아사야의 상태를 묻는 사렙탄 앞에 야베스가 고개를 깊이 숙였다.

“사실은…… 지난 연회 날 소식을 전할 계획이었습니다. 그런데 본도 형님의 즉위가 결정되고 나니, 저희 부부는 설 자리가 없다 생각되어서…… 불안한 나머지 소란을 범했습니다.”

술술 뻗어 나오는 말의 갈퀴에 사렙탄은 단단히 붙들렸다. 그가 가장 아끼며 총애하는 며느리, 왕성의 작은 공주 아사야 세일산이었다. 베데르의 딸이 제 손주를 가졌다는 소식은 사렙탄의 이성을 흐려 놓기 충분했다.

기쁜 나머지 그는 눈시울을 적셨다. 그러고는 지나간 과오는 오늘을 기점으로 묻어 두고 지나겠노라 선언했다.

“어찌 나를 박한 아버지로 만드는 게냐? 너희 부부가 설 자리가, 왕성 안에 왜 없겠느냐. 내 아들인 너도, 왕가의 보물인 공주도 불안을 느낄 이유가 조금도 없다.”

사렙탄 세일산의 공언하에 둘째 왕자비의 임신 소식이 축복으로 전해졌다.

야베스 세일산은 저로부터 등 돌렸던 귀족들로부터 새삼스럽게 안부를 묻는 편지를 받았다. 본도 세일산을 따르며 그의 등을 밀어 주던 후작마저 야베스 세일산을 찾지 않을 수 없었다. 첫째 왕자가 왕위계승자라고는 하나 그것은 내일의 일이었다. 오늘날 대륙의 주인이신 사렙탄의 총애가 향하는 길이 뚜렷한데, 넋을 놓고 있다가는 내일은커녕 오늘의 입지도 잃게 십상이었다.

‘본도 세일산에겐 아직 자식이 없잖아. 제 아내와 사이가 좋지 못하단 소문까지 떠돌지 않아?’

‘아사야 세일산이 아들을 낳기라도 하면 어쩔 셈이지? 둘째 왕자도 어렵사리 밀어내신 폐하이신데…… 베데르 아졸의 손주까지 후보에서 탈락시킬 수 있을까?’

불안한 수군거림이 왕성을 채웠다.

대번에 변해 버린 흐름 안에 우두커니 선 비아탄 아멕이 있었다. 왕성을 오가는 걸음과 표정들이 향하는 방향이 달라진 것이, 무시하기 어려울 수준이었다. 이 변화가 득이 될지 실이 될지 왕의 오른팔조차 장담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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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로인의 걸음에 힘이 실렸다. 그의 표정 역시 눈에 띄게 밝아졌으며, 어깨는 수많은 배달품을 지고도 날아갈 듯 가벼웠다. 상품을 싣는 수레의 수를 늘려야 할까 고민될 정도로 왕성을 오가는 물건이 많은 때였다. 귀하고 비싼 상품들은 하나같이 아사야 세일산을 향했다.

개중 아사야 본인이 주문한 물건은 하나뿐이었다. 그마저도 드래곤에게 주기 위해 크게 제작한 소설책의 하권이었다. 그녀 자신을 치장하기 위한 물건이라면, 주문할 필요가 없었다. 새로 구매하기는커녕 있는 것을 팔아야 할 정도로 많은 선물이 아사야 세일산에게 바쳐진 탓이었다.

“이건 길론드 후작께서 보내신 선물입니다. 마고일 산을 건너온 광물을 드워프가 세공한 것으로…….”

어렵사리 구해 온 비싼 상품을 설명하자니 드로인은 열기가 넘쳤다. 목이 쉬는 줄도 모르는 채 언성을 높이는 그를 향해 아사야는 애매한 미소만 지어 보였다.

피로한 듯 보이는 아사야를 대신하여, 엠마오가 ‘크흠, 큼’, 목 가다듬는 소리를 냈다. 그제야 드로인이 말을 멈추고는 두 눈을 둥그렇게 떴다. 귀한 보석이 알알이 박힌 티아라를 보여 드릴 참인데, 공주께서 지루해 보이시니 이상한 일이었다.

“그런 것 말고, 아졸 공작님이 보내신 선물은 없나요?”

엠마오가 물었다. 드로인은 ‘그런 것’이라며 폄하당한 보석을 애지중지 상자 속에 돌려놓았다. 그러고는 웃어 보였다. 경험 많은 상인답게 가짜 웃음을 걸치기가 재빨랐지만, 곤혹스러운 기색이 묻어남에는 달리 수가 없었다.

“있기는…… 합니다만, 그것이…… 주문받은 상품은 아니며 하인을 통해 전달하신…… 바구니입니다.”

벨벳 상자를 내려놓고 그가 가볍게 손가락을 퉁겼다. 그러자 멀찍이서 선물꾸러미를 정리하던 하인이 후다닥, 금박 액자에 담긴 초상화 뒤편을 살폈다. 하인이 찾아다 가져온 것은 드로인의 말마따나 바구니였다. 황갈색의 작은 바구니를 아사야가 알아보았다.

왕성의 여인에게 있어 임신은, 제 집안에 전할 수 있는 최고의 희소식이었다. 아사야 세일산의 처가는 후작도, 백작도 아닌 공작으로, 대륙의 귀족들 가운데 가장 부유하며 강한 기사단을 가진 명예로운 집안이었다.

그런 집안에서 선물이라며 보내온 것이 고작 피크닉 바구니라는 사실에 드로인은 제 뺨이 다 화끈대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조촐한 선물을 어찌 전해야 좋을까 몰라, 그는 초조하게 아사야를 살폈다.

하인이 드로인에게 바구니를 전했고, 드로인이 그것을 엠마오에게 건넸다. 그제야 유모의 손을 통해 아사야가 바구니를 받았다. 그녀는 바구니 위를 덮은 흰색의 민무늬 스카프를 걷어 속을 살폈다.

빨간 잼이 발린 쿠키와 레몬청이 든 유리병 하나, 그리고 중고품으로 보이는 손수건이 내용물의 전부였다. 낡은 것을 달군 철로 눌러 다려 놓은 손수건에는 오렌지색 여우가 수놓인 채였다.

“…….”

한참을 말없이 아사야는 바구니 안을 들여다보았다. 드로인은 공주의 입에서 나올 말을 상상해 보았다. 공작가의 홀대에 속이 상하셨을 테니 어쩌면 그 바구니는 다시 돌려보내거나 처분하길 원하실지도 몰랐다.

그러나 아사야의 눈에 조그만 바구니는 제가 소녀 시절 팔에 걸고 다니던 피크닉 바구니였고, 빨간 잼이 발린 쿠키는 이새의 작품이었으며 레몬청은 가브리엘에게 가져다 먹이던 간식이요, 낡아빠진 손수건은 검은 동굴 안에서 잃어버린 물건이었다.

‘가디가…… 찾았구나, 이 손수건……. 계속 가지고 있었구나.’

한참을 침묵한 끝에 아사야가 입을 열었다.

“이것만 받고, 나머지 선물은 전부 돌려보내.”

“예, 공주님. 그것만 받으시고 나머지는……, 예?”

습관적으로 허리를 조아리다가, 드로인이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러고는 예의도 장사도 잊고 바보처럼 입을 벌리고 섰다.

암만 왕성의 공주라 해도 이토록 많은 재물을 별다른 걸림돌 없이 한꺼번에 취하기란 흔히 있는 기회가 아니었다. 그런데 죄 돌려보내라니, 그리고 바구니 하나를 갖겠다니, 드로인은 아사야 세일산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도 고객의 선택을 존중하는 것이 상인의 미덕이었다. 활화산의 용암처럼 치솟는 질문을 마른 침과 함께 삼켜 가며, 드로인은 풀어놓은 상품들을 다시 수레에 실었다.

그사이 공주께서는 유모를 불러다 그녀의 귀에 무어라 귓속말을 했다.

올 때에 비해 책 한 권과 바구니 하나만큼의 무게를 덜고, 환불 절차가 가져올 두통을 얹은 수레를, 드로인과 하인들이 질질 끌었다. 복도로 털레털레 빠져나가는 그의 뒤를 엠마오가 종종걸음으로 쫓았다.

“가시는 길에, 공작성에 들러 말을 전해 주시겠어요?”

나이 든 유모가 복도를 가로막고 묻자, 드로인의 눈빛이 흐려졌다.

“저는 왕성을 오가는 상인이지 말단 심부름꾼이 아닙니다.”

한숨 섞인 대꾸에 엠마오는 당황하지 않았다. 그녀는 꽉 찬 참나무 수레 위를 아주 빤히 바라보았다. 유모의 시선을 따라 드로인의 고개도 빙그르르 움직였다.

“마지막에 보여 주신 티아라.”

최상단에 놓인 벨벳 상자를 지적하며, 엠마오가 말했다.

“마고일 산을 건너온 상품이라죠? 환불을 하시려거든, 다시 마고일이 들끓는 산을 건너보내야 할 테고…… 그러자면 운송을 도울 용병까지 고용하셔야 할 텐데, 길론드 후작께서 그 값까지 순순히 지불을 하실까요?”

그녀가 외는 말의 음절 하나하나가, 드로인의 심장을 푹푹 쑤시며 지났다. 길론드 후작은 전형적인 강약약강의 남자였다. 한편으로는 졸부만이 짠돌이는 아님을 증명하는 존재이기도 했다. 수백 년의 전통을 지닌 가문의 가주이면서도 그는, 하수인에게 쓸 돈이라면 지불일을 미뤄 가면서까지 아끼기로 악명 높았다.

이대로 티아라를 싣고 돌아가 환불을 진행한다면 그는 제가 냈던 돈은 선뜻 받겠지만, 상품을 돌려보내는 절차에서 발생하는 비용은 눈에 흙이 들어간다 해도 내주지 않을 터였다. 도리어 네가 말을 잘못 전하여 공주의 심기를 상하게 한 게 아니냐는 적반하장 식의 모욕을 줄지도 몰랐다.

드로인의 어깨가 수직 하강했다. 물먹은 솜처럼 눅눅해진 얼굴로, 그는 엠마오를 바라보았다.

“제가 어쩌면 되겠습니까?”

“다음 주에 다시 방문하시거든, 공주님께서 그 티아라를 구매하실 겁니다. 전언에 대한 답은 가져오지 않으셔도 돼요. 그저, 말만 전하세요.”

한 발짝, 엠마오는 드로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고는 복도를 오가는 시녀들은 물론이며 수레 뒤의 하인들에게도 들리지 않을 만큼 작게 목소리를 냈다.

“‘그날, 사과할 상대를 잘못 선택한 거야.’ ……그렇게만 전해도 이해할 거라십니다.”

말을 마친 뒤 유모는 왔던 것과 같이 종종걸음으로 사라졌다. 들은 말을 몇 번이고 속으로 되뇌면서, 드로인은 수레를 끌었다.


 

.*. *. *. *. *. *.


 

“이건 반칙이에요, 아사야.”

벌컥 문을 열자마자, 블란테 세일산이 외쳤다. 아사야는 제 앞에 놓인 잔 속의 차가 진동으로 떨리는 것을 바라보았다.

뒤이어 저에게로 향하는 놀란 눈을 보며 블란테는 탄식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금색 눈을 토끼처럼 크게 뜬 아사야는 당장이라도 필요치 않은 사과를 할 것처럼 당황한 얼굴이었다.

그러나 블란테가 ‘반칙’이라 외칠 적에 함구한 말은, 아사야를 라이벌처럼 여기며 경계하는 의미는 아니었다. 임신으로 하여금 사렙탄 세일산의 총애며 귀족들의 관심을 가져간 일을 지적하는 말은 더더욱 아니었다.

단지,

“아기를 가진 당신 곁을 내가 지킬 수 없다니요?”

친구로서의 투정에 불과했다.

“나의 우정을 시험에 들게 하지 말아요, 제발!”

덧붙여 외칠 적에 블란테는 연극배우 같았다. 과장된 말투와 절망하는 몸짓을 바라보며, 아사야는 뒤늦게 웃음을 터뜨렸다. 조그맣고 하얀 얼굴 위에 어린아이 같은 함박웃음이 떠오르는 것을 볼 때면 블란테는 마음이 뿌듯해졌다. 백 번은 농담할 기운이 불끈불끈 샘솟았다.

그렇게 귀여운 친구를 두고 떠나는 블란테의 마음이 어떠한지, 아사야는 조금도 모르는 게 틀림없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속 편한 얼굴로 꿀을 탄 차를 홀짝거릴 순 없는 노릇이었다.

“한 달 뒤면 돌아올 거잖아요, 블란테.”

아사야가 말했다. 그 느긋한 태도에, 블란테는 속이 답답해졌다. 풀썩, 그녀는 아사야의 맞은편 자리에 몸을 앉혔다. 그러고는 테이블 가득 차려 놓은 다과와 빵을 노려보았다.

“아기를 가지면, 외로울 때에 가장 힘들다고 들었단 말이에요.”

심란한 얼굴로 블란테가 속삭였다. 그 말에 아사야는 큰 눈을 더욱 크게 떴다가 이내 간지럼을 타는 사람처럼 웃었다.

“블란테처럼 좋은 친구가 있어서 난 정말 기뻐요.”

미소 하나만으로, 아사야는 세상에서 가장 유복한 소녀였다. 웃는 얼굴이 예쁘다는 건 축복이면서도 저주였다. 세상 누구의 마음이건 빼앗을 수 있어 축복이지만, 세상 누구이건 그녀가 행복하기만 할 것이라고 편견부터 품을 테니 저주인 셈이었다.

당장에 블란테만 해도 그랬다. 벌건 손자국을 남긴 팔을 달고 멍하니 앉던 아사야의 모습을 알면서도, 블란테는 당장에 그때의 애처롭던 아사야를 회상하기 어려웠다. 눈앞에 앉아 말갛게 웃는 아가씨를 보자니 저도 웃음만 날 뿐이었다.

“정말…… 당신을 어떻게 이기겠어요.”

허탈한 듯 중얼거리자 아사야가 말을 보탰다.

“칭찬 고마워요, 블란테.”

“……칭찬 아니거든요.”

서로 얼굴을 바라보며 눈을 흘기다가, 먼저 두 손을 든 것은 블란테였다. 항복 신호를 보내면서 블란테는 손가락을 퉁겼다. ‘딱’, 소리가 울리기 무섭게 첫째 왕자비를 모시는 시녀가 등장했다. 손에는 천으로 뒤덮은 무얼 든 채였다.

“당신에게 줄 선물을 가져왔어요. ……물론 그 무엇도 내 빈자리를 대신할 순 없겠지만요.”

시녀가 가져온 선물의 둥그스름한 윤곽을, 아사야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겉으로 보아서는 속에 든 것이 무언지 조금도 유추할 수가 없었다.

“걷어 봐요.”

자신만만한 얼굴로 블란테가 속삭였다.

“귀족들이 가져다 바친 선물 전부를 거절하신 공주님인 거, 벌써 알아요. 아무리 도도하신 공주님이라도 내 선물까지 퇴짜 놓을 순 없을 거예요.”

블란테의 말이 길어질수록 아사야의 볼도 붉어졌다.

“도도해서가 아니에요. 누가 내 편이고 누구는 그렇지 않은지 몰라서…… 전부 똑같이 거절한 것뿐이에요.”

아사야의 수줍은 고백에 블란테의 속이 씁쓸해졌다. 누가 제 편이고 누구는 본도 왕자의 편인지를, 야베스 세일산이 그녀에게 알려 주지 않았음을 알아챈 탓이었다.

애써 웃으며 블란테가 외쳤다.

“그렇다면 더더욱, 내 선물은 받아 주겠네요.”

난 당신의 편이니까…… 블란테 세일산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저를 향한 그녀의 호의가 기쁘면서도 믿을 수 없게 크다고 생각되어, 아사야의 마음은 더워졌다.

두 손을 조심스레 뻗어 아사야는 선물을 덮은 흰 천을 잡았다. 그리고 한번에 당겨 내어 벗겼다. 천 아래에 감춰져 있던 것은 다름 아닌 둥근 모양의 새장이었다.

아졸 공작성에서 보내온 바구니가 비어 있지 않았듯이, 블란테가 건넨 새장 역시 속을 채운 모습이었다. 아사야로서는 난생처음 보는, 염색된 천보다 밝은 깃을 가진 백색의 새 한 마리가 창백한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

“새를 무척 좋아해서 유리정원에도 열댓 마리를 가져다 놓았다죠? 이 녀석은 내가 길들인 전령새예요.”

“전령새?”

전령새라면 군대의 명령부터 훈령에 이르기까지, 중대한 소식을 누설 없이 멀리 전달하기 위해 쓰이는 새를 뜻했다. 덩치는 올빼미보다 크고 머리는 앵무새보다 좋아야만 먼 거리를 날려 보내도 도망치는 일 없이 제 주인을 찾을 수 있었다.

그렇게나 간편하고 유명한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아사야는 전령새를 보는 일이 처음이었다. 전령새를 길들이는 것이 몹시 고된 작업인 탓에 실제로 부리는 경우가 거의 없기 때문이었다.

전령새는 머리가 좋으면서도 도도해서, 한두 달 길을 들여서는 상대를 주인이라 여기지 않았다. 최소한 2년간은 저만을 따르게끔 직접 보살피며 공을 들여야 했다.

그러니 블란테가 제가 길들인 전령새라며 그 새를 보여 줄 적에는, ‘나젤탄에 있을 적부터 돌봐 온 새’라는 의미가 숨어 있었다.

“그렇게 귀한 걸 받을 수는 없어요.”

아사야의 고개가 세차게 흔들렸다. 두 손마저 앞으로 내밀고는 흔들며 부정을 전하기 바빴다. 거절을 강하게 표하는 아사야를 두고도 블란테는 당황한 기색 하나 없었다. 이럴 줄 알았다는 반응이었다.

“영원히 가지라고 주는 게 아니니 고마워 말아요.”

억지로 새를 안겨 주는 대신 블란테는 우회로를 택했다.

“내일이면 나는 나젤탄으로 떠나요. 임신한 여인에게 4주는 그리 짧은 시간이 아니에요, 아사야. 4주는, 무슨 일이건 일어날 수 있는 시간이지요.”

“블란테. 하지만…….”

“새를 가지라고 강요하지 않을게요. 떠나 있는 동안 나에게 전해야 할 소식이 생기거든, 무엇이든 새에게 묶어 날려 보내 달란 말이에요.”

블란테가 그리 말하니 아사야도 더는 고집부리지 않았다.

“……블란테의 새는 내가 잘 돌볼게요. 걱정하지 말아요.”

“내가 새가 걱정되어 이러는 것 같아요?”

뜨겁던 차가 미지근하게 가라앉을 때까지, 두 왕자비는 서로의 손을 만지며 수다를 나눴다. 테이블을 떠나기 전에 블란테는 아사야의 어깨를 가볍게 안았다가 놓아주었다.

그녀가 남긴 새와 함께 남아, 아사야는 식어 버린 차를 홀짝였다.

‘블란테의 말이 맞아.’

그녀에게 4주는, 무슨 일이건 일어날 수 있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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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접실 문 앞에서 블란테는 눈에 익은 시녀를 만났다. 한 주 전 블란테를 찾아와서는,

“블란테 님께서 떠나신다면 공주님께서 많이 외로워하실 거예요, 편지할 주소라도 알려 주시면 도움이 될 것 같아요.”

소식 전했던 어린 시녀, 유라였다.

덕분에 블란테는 아사야에게 자신의 전령새를 선물했다. 시녀의 말처럼 ‘편지할 주소’를 알려 주기에는, 대륙의 왕성에서 보낸 편지가 항구 허브를 거치고 바다를 건너 나젤탄의 왕성에 도착하기까지 걸리는 시간이 5주는 족히 넘기 때문이었다.

“내가 없는 동안에 내 친구를 잘 부탁할게.”

소식을 전해 준 값에 수고비를 얹어, 블란테가 은제 브로치를 꺼냈다. 복도를 지키는 두 시녀의 손에 하나씩 건네줄 생각이었다. 그러나 뜻밖에 시녀들은 놀란 얼굴로 블란테의 손을 무척 정중히 밀어냈다.

“저, 저희는, 이런 건 받을 수 없어요.”

말을 더듬으며, 주근깨 많은 어린 시녀가 속삭였다.

“무얼 받겠다고 기다린 게 아니에요. 이것도……, 돌려 드리고자 감히 길을 막은 거예요. 무례를 용서하세요.”

유라 역시 제 치마 주머니에 숨겨 두었던 머리핀을 꺼냈다. 그러고는 두 손으로 블란테의 드레스 소매를 조심조심 잡아당기더니, 그녀의 손바닥 안에 받은 것을 돌려주었다.

“공주님을 모시는 건 제 일인걸요, 이렇게 비싼 걸 그 대가로 받을 수는 없어요.”

‘부디 용서하세요…….’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소곤거리며 유라가 허리를 깊이 숙였다. 그녀 옆의 어린 시녀 역시 덩달아 허리를 직각으로 푹 숙여 보였다.

블란테가 작게 웃었다.

“두 사람이 이러는 걸 아사야가 본다면, 제 시녀를 내가 혼낸 줄 알고 오해할 거야.”

왕자비의 지적에 유라의 빨간 얼굴이 창백해졌다. 놀란 듯 어깨를 움찔거리며 유라는, 응접실의 아사야가 혹여라도 밖을 살피고 있나 힐끔거렸다.

“그, 그런 의도는 아니었어요…….”

키가 큰 탓에, 블란테는 어린 시녀들을 마주할 때면 본의 아니게 내리깔아 보곤 했다. 덕분에 오해를 사는 일 역시 잦았으며 오늘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겁을 먹은 듯 놀란 유라와 사라가 서로 어깨를 맞붙인 채 그녀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두 사람, 이름이 뭐지?”

굳이 오해를 풀기보다, 블란테는 제 호기심을 충족시키길 선택했다.

“저는 유라이고, 이 애는 사라예요.”

“그래.”

대화는 그게 전부였다. 시녀가 거절한 브로치는 두 번 권하지 않고, 블란테는 가뿐히 떠났다.

‘걱정을 좀 덜어도 괜찮겠군.’

아사야에게 그녀의 편인 사람들이 있으니 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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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령새의 창백한 깃은 아사야의 빗질을 받아 털 달린 토끼 엉덩이처럼 복슬거렸다. 깃이 가느다랗고 풍성한 등줄기를, 아사야의 손이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과연 전령새는 똑똑했다. 희고 큰 새는 제가 처한 상황을 아는 눈짓이었다. 블란테가 저를 아사야에게 준 것을 알고, 그녀가 제 주인에게로 저를 날릴 때까지 얌전하게 기다리는 것이었다.

“착하기도 하지.”

하얀 새의 꼬리깃을 쓰다듬는 손을, 야베스의 푸른 눈이 살폈다. 침실 문 앞에 선 채로 2분은 족히 지난 듯한데, 아사야는 둔해진 것인지 그의 시선을 못 느끼는 눈치였다.

“이젠 새를, 침실에서 키우기로 한 건가?”

불쑥 끼어든 목소리에 아사야의 몸이 제자리에서 화들짝 뛰었다. 놀란 순간 그녀의 두 손은 저도 모르게 부푼 배를 향했다. 배를 감싸 쥐고 놀란 아내의 눈을 마주하며, 야베스는 다소 머쓱해졌다.

“……한참 보는데도 눈치를 못 채더군.”

변명인지 사과인지 모를 말을 하자, 아사야의 시선이 그를 떠났다.

“블란테가 주고 간 선물이에요.”

꼭 저처럼 놀란 전령새의 부리를 만지며, 아사야가 말했다.

‘블란테’라며 친숙하게 부르는 이름에 야베스의 심기가 삐딱해졌다. 저는 제 형님이자 라이벌인 본도 세일산을 이겨 보겠노라며 바쁜데, 아사야는 그렇지 않은 게 아니꼬웠다. 그가 하루에도 수많은 모임에 참석하고 그의 사람과 제 사람을 판가름하는 동안, 아사야는 대부분의 시간을 베데르 성에서 보냈고 그렇지 않을 때엔 블란테 세일산과 어울렸다.

그러더니 이제는 블란테가 키우다 버리기라도 한 건지 다 큰 새를 ‘선물’이라며 소개하는 아사야였다.

“가끔 보면, 그 여자가 당신 친구인지 내 라이벌인지 모르겠어. 당신이 나보다 그 여자를 더 좋아하는 것 같거든.”

스쳐 가는 듯한 말로 야베스가 속삭였다. 아사야가 듣기에 그보다 더 바보 같은 말이 없었다. 아사야로서는 그보다 더 좋아하는 것이, 블란테 외에도 셀 수 없이 많았다. 그보다는 가브리엘이 좋았고 엠마오가 좋았으며, 유라와 사라가 좋았다. 가까운 이를 떠나 시장을 오가는 어느 누구를 붙잡아 세운다 해도 그보다는 좋을 것이었다.

아사야가 대답 없이 새의 깃을 만지기만 하자 야베스가 먼저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어느 새엔가 그는, 아사야 세일산의 머리 위에 선 포식자인 양 굴던 여유를 잃어버린 지 오래였다. 여전히 그는 아사야의 남편이며 아사야는 아내로서 그의 소유지만, 아기를 밴 아사야 앞에 발톱을 드러내고 성난 이를 보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왕성의 흐름을 비롯하여 돌변한 그의 태도를 마주할 때면 아사야는 속이 시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씁쓸해졌다. 야베스 세일산을 비롯해 왕성을 채운 대다수의 사람들이, 아사야 자신보다도 그녀 배 속의 아기를 더욱 위하며 사랑하는 듯했다.

오늘 야베스의 말이 아사야의 불만을 더욱 강화시켰다. 1월 한 달간 꾸준히 연기하며, 그의 금고에 출입할 권한을 달라 열 번도 더 말한 아사야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외면을 택했던 야베스였다.

그런 그가 제 아내의 배 속에 아기가 생겼음을 알고는 사흘 만에,

“그래, 알았어.”

먼저 입을 여는 것이었다.

“내 금고에 마음껏 출입하고 싶거든 그렇게 해. 금고 문 앞으로 가 이렇게 말하면 돼. ‘네 자식의 행방을 알려 주겠노라.’ 그리고 문고리를 돌리면 그만이야.”

콘클라베를 여는 주문을 듣고도 아사야는 기쁘지 않았다. 그저 아리송했다. 전설적인 마법이 걸려 있다는 자물쇠치고 그 주문이 단순한 문장인 게 이상했다.

“이해가…… 안 돼요.”

“주술이 걸린 자물쇠라 그래. 당신은 모르는 게 당연하지.”

눈썹을 웅크린 아사야를 야베스가 웃으며 바라봤다. 오래된 주술 도구인 콘클라베의 존재나 의미 따위를 그녀가 알 리 없다고 믿는 눈치였다.

“제 말은 그게 아니라, 그 주술을…… 여는 주문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의미예요.”

“당신은 주문만 외면 돼. 임산부가 듣기엔 무서운 이야기니 굳이 묻지 마.”

야베스 세일산의 심드렁한 대꾸에 아사야는 삽시간에 민망해졌다. 자존심만 깎아 먹을 뿐인 대화를 잇기보다는, 아사야는 제 배 위를 쓰다듬길 택했다.

‘너 때문이 아니니까 신경 쓸 것 없어, 아가야.’

그러고는 손가락이나 생겼을까 모를 아기에게 말을 걸었다.

임산부여서가 아니라, 제가 그 누구였더라도 야베스는 그만이 아는 정보를 쉽게 알려 주지 않았을 것이었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괜스레 어깨가 내려가고 주눅이 들었다.

그런 아사야의 처진 분위기를 다르게 해석했는지,

“걱정하지 마.”

야베스가 말했다.

“주문은 주문일 뿐이야. 자물쇠에 대고 진짜 자식의 행방이니 뭐니 하는 것들을 알려 줄 필요는 없어.”

그가 무얼 기다리는지 알기에 아사야는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작게 미소를 지으며 감사를 표하자 야베스의 얼굴에서도 못마땅한 기색이 가셨다.

“이제 날 없는 사람 취급하지 마.”

그가 말했다.

“나는 당신이 원했던 것을 주었어. 당신도 내가 원하는 것을 안겨 줄 테니 말이야.”

그 말에 아사야는 어떤 대답을 꾸려야 할지 알지 못했다. 머리 안에 떠오르는 답변이라고는 하나같이, 소리 내어 말할 수 없는 진실들에 불과했다.

‘당신이 원하는 그 무엇도 나는 주지 않을 거야.’

착한 미소를 띤 얼굴로 아사야는 전령새를 새장 안에 집어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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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내내 가브리엘은 어깨가 무거웠다. 관자놀이에서는 지끈거리는 두통마저 느껴졌다. 어지간해선 부담감을 느끼지 않는 드래곤을, 당장은 묵직한 중압감이 짓누르고 있었다. 어린 인간이 건넨 성대한 부탁 때문이었다.

“아기 이름을 지어 줬으면 해, 가브리엘.”

그제보다 어제, 어제보다 오늘 더 커진 것 같은 부른 배를 내밀고서 아사야가 속삭였다. 아사야의 말간 얼굴과 동그란 배를 번갈아 살피다가 가브리엘이 물었다.

“내가 지은 이름을, 왕자가 쓰려 할까.”

그러자 아사야의 눈썹에 힘이 들어갔다. 큼직한 두 눈은 전보다 더 또렷해졌고 목소리는 화난 사람처럼 딱딱해졌다.

“내가 품고 내가 낳을, 내 자식이야. 누구의 허락 같은 건 필요 없어. 엄마가 부르는 게 아기의 이름이어야지.”

아사야의 주장이 그렇게 강경하니 가브리엘도 머리를 굴려야 했다. 적당히, 부르기에도 듣기에도 좋고 아사야와 잘 어울리는 이름을 지어내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그것만큼 가브리엘에게 어려운 일도 없었다.

그 자신을 칭하는 이름도 없이, 누구의 이름을 부를 일도 없이 거의 평생을 살아온 가브리엘이었다. 이따금 인간들에게 무어라 불릴 때면 그 이름이 발락, 악마, 폐허, 죽음 따위였다. 그런 그에게 어린 인간의 배 속에 든 아기의 이름을 짓는 일은 고된 임무였다. 그 자신의 이름조차 어린 인간이 지어 줬는데 말이었다.

“인간 이름은 지어 본 적이 없어.”

고민 끝에 가브리엘이 말하자,

“그래도, 나를 위해서 시도해 줄 수 있지?”

아사야는 그의 말문을 곧장 막아 놓았다. 그렇게 듣고 보면 그녀의 말이 맞았다.

가브리엘은 책을 펼쳤다. 그 속에 든, 인물이나 물건, 지역의 명칭을 전부 훑어 적당한 이름을 찾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눈에 들어오는 단어들은 너무 딱딱하거나, 맥이 없거나, 뜻이 나쁘거나 발음이 나쁘거나 했다. 그의 어린 인간이 낳을 아이에게 어울리는 이름은 어디에도 없었다.

한차례 실망을 겪고 가브리엘이 눈썹을 찡그렸다. 그리고 말했다.

“딸인지 아들인지도 모르잖아, 아사야.”

검은 용의 투정을,

“성별이 뭐가 중요해?”

아사야는 심드렁하니 받아쳤다.

“꼭 네가 지어 줬으면 좋겠단 말이야. 곰곰이 생각해 봐. 응?”

어린 인간의 말대로, 가브리엘은 ‘곰곰이 생각’에 빠졌다. 눈을 감고 적당한 이름을 떠올리려 노력한 것이었다.

그러나 어떤 아이가 태어나 어떤 이름을 갖게 될지 상상을 해 보려 해도 쉽지 않았다. 귀를 닫고는 아사야의 노랫소리를 들을 수 없듯이, 가브리엘은 당장 눈앞에 보이지 않고 만난 적도 없는 아이의 모습은 떠올릴 수가 없었다.

‘…….’

궁핍한 상상력이 그의 강점이었다. 다치거나 아플 것, 되돌아올 죗값을 떠올릴 수조차 없으니 그는 겁이 없었고 어떤 일이건 벌일 적에 주저한 순간이 없었다.

제게도 상상력이 있었으면 바란 것은 아사야를 만난 뒤의 일이었다.

어린 인간과 헤어져 지하 감옥을 헤매는 동안 가브리엘은, 눈을 감으면 아사야의 모습이 보이기를 바랐다. 귀를 닫고도 기억 속의 노랫소리를 되새기고 싶었고, 잠을 자면 꿈에 아사야가 나왔으면 희망했다. 그러나 소리 소문 없이 지나간 6년의 시간 동안 가브리엘은 단 한 번도 꿈을 꾸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이상하군.’

바로 한 달 전 그를 찾아온 꿈이 있었다. 눈물이 나도록 당혹스럽게 장황하며 구체적인 꿈 안에는, 아사야가 있었고 그 자신이 있었으며 처음 보는 풍경들과 처음 만난 어린 아기가 있었다.

‘아기.’

꿈속에서 보았던 아사야와 그 자신의 아기를 떠올리면서, 가브리엘은 다시 책을 펼쳤다.

“잘 부탁할게, 가브리엘.”

책의 첫 페이지부터 뚫어 버릴 듯이 노려보는 가브리엘을 보며 아사야가 미소 지었다. ‘아직 여섯 달이나 남았으니 괜찮다’는 격려의 말도 가뿐히 덧붙였다.

‘여섯 달이나…… 남았을까?’

그런 아사야를, 폼은 염려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런 마법사의 시선을 느끼기라도 한 것처럼 아사야가 그녀를 마주 봤다. 책을 들여다보기 바쁜 드래곤을 사이에 놓고, 공주와 마법사는 맥없는 미소를 나눴다.

분위기를 바꾸어 보려 폼은, 자신의 연구에 생긴 진전을 풀어 설명했다. 마도구 속에 걸어 둔 그녀 자신의 결박 마법에서 어떤 약점을 발견해 냈는지, 또 그 부분을 파고들어 마법을 해체하자면 어떤 수식이 필요한지…… 홍수 철 연못처럼 불어나는 폼의 말을, 아사야는 멍하니 좇았다.

“아.”

그리고 문득 외쳤다.

“나도 알아냈어요, 콘클라베를 여는 주문.”

아사야가 안겨 준 소식에 폼이 놀란 눈을 했다. 드디어 왕자가 입을 열었냐며, 가까이 다가와 무릎으로 앉기까지 했다. 고개를 끄덕이며 아사야는 야베스에게서 들은 말을 고스란히 전했다.

“‘네 자식의 행방을 알려 주겠노라’, 그렇게 말하면 문이 열릴 거랬어요. 주문치고는 조금 이상한 것도 같은데…… 나를 놀리거나 속인 건 아닐까 모르겠어. 이젠…… 그가 무슨 말을 하건 전부 수상쩍게 생각되어서.”

반신반의하는 아사야를 따라 폼이 같은 주문을 입 안으로 두세 번 외웠다.

“자식의 행방을 알려 주겠노라……, 자식의 행방을…….”

그리고 고개를 반짝 들었다. ‘아’, 짧은 감탄사가 마법사의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저, 들어 본 적 있어요. 어떤 콘클라베인지 이제 알겠네요. 그 주문이 정확하다면, 떡갈나무 교형을 당한 죄인의 콘클라베일 거예요.”

이어 폼은 콘클라베 주문의 출처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아사야는 그녀의 이야기에 집중했다.

“한 인어와 지속적으로 교제하며 바닷가에 살던 등대지기가 있었는데, 어부들이 그 인어를 잡아다 구워 먹은 걸 알고는 그들을 도륙해 상어 먹이로 던져 줬대요. 보통, 콘클라베를 여는 주문은 죄인이 죽기 전 마지막으로 들었던 말이에요. ‘네 자식의 행방을 알려 주겠노라’……, 이건 떡갈나무에 그를 매달아 교수할 적에 집행인이 마지막으로 건넨 말이에요. 진짜 행방을 알려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죽는 순간에 죄인이 저에게 자식이 있다는 걸 알고 더욱 절망하기를 의도해 건넨 말이죠. 콘클라베 주문의 대다수가 이런 식이에요. 죄인을 능욕하고 영혼을 욕되게 만드는 문장이죠.”

제가 예상한 ‘죄인’과는 다른 이야기에 아사야는 어찌할 바 모르게 되었다. 환생할 수도, 평온을 취할 수도 없게 사물 안에 갇힐 수준의 범죄라면, 이보다는 더 끔찍하리라 예상했던 아사야였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죠?”

아사야가 물었다.

“아내를 살해한 이들에게 남편이 복수하는 것은 합당한 일이잖아요.”

“당시에는 그렇지가 않았어요. 이종족과의 혼인 자체가 불가했으니, 사람들이 보기엔 죽은 인어도 그의 아내는 아니었던 거죠. 벌써 육백 년 전 이야기니까…… 지금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어요.”

“육백……. 그럼, 그 영혼이 콘클라베에 갇혀 지낸 세월이 육백 년도 더 됐단 말인가요?”

충격에 질려 버린 아사야의 앞으로 불쑥, 가브리엘이 머리를 들었다.

“태교에 정말 좋은 이야기겠어, 그거.”

그리고 지적했다. 폼은 머쓱해진 듯 뒷목을 만졌고, 아사야는 구두를 벗은 발을 쭉 뻗어 가브리엘의 무릎을 콕 건드렸다.

“아직 아기 이름도 못 지어 준 드래곤께서는 조용히 하세요.”

농담으로 대꾸하자 가브리엘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보라색 눈을 가늘게 뜨며 그는 입을 꾹 다물었다.

“……드래곤에게 인간 이름을 지어 달라고 부탁한 네가 나빠.”

“아무렇게나 지어도 좋대도. 네가 지어 준 거라면 전부 다 좋아, 가브리엘.”

“네가 그렇게 말하니까 더 힘들어.”

“힘들어?”

참지 못하고, 아사야는 웃기 시작했다. 덩치는 제 두 배이고 나이는 몇 번을 곱해도 따라잡을 수 없이 연상인 가브리엘이 이렇게 아이처럼 굴 때마다 아사야는 웃음이 났다. 그가 귀엽게 느껴졌고 심장 안에 병이 난 것처럼 간지러운 불씨가 번졌다.

“네가 지어 줘……, 응?”

몇 달 뒤면 가브리엘도 알게 될 것이었다. 그의 마력을 전부 되찾고, 저와 함께 멀리 떠난 뒤에는, 그가 지어 준 이름이 누구의 이름인지를 알고 그 이름을 아끼게 될 것이었다. 둘이 아닌 셋이 되어 정착할 땅과 몸 눕힐 집, 함께 나눌 저녁을 차릴 때면 그도 제 거짓말을 용서하고 제 진심을 이해하게 될 것이었다.

‘그러니까, 그때까지만…….’

조용히, 아사야는 제 배 위를 쓰다듬었다. 그녀의 배 속 아기는 성급하다 싶게 빠른 속도로 믿기지 않게 많이 자라 있었다.

‘그때까지만 기다려 줘, 아가야. 조금만 더 참아 줘.’

그러나 아사야에게는 텔레파시를 보내는 능력은 없었다. 그녀 배 속의 아기에게도 성장을 멈출 방법은 없었다.

열흘 즈음 지났을 무렵 아사야의 배의 크기는 신관이 눈치챌 정도로 커져서, 모르는 이들로부터 쌍둥이를 임신했기에 배가 큰 것이라는 오진을 받아야 했다.


 

.*. *. *. *. *. *.


 

블란테나 사렙탄 세일산은 물론이며 일면식 없는 귀족들보다도, 비아탄 아멕이며 왕실 기사단장보다도 늦어 축하 행렬의 가장 마지막에 선 남자가 왕성을 찾았다.

“축하 말씀을 직접 전하러 오셨답니다.”

가디엘 아졸의 방문을 알리며 사라가 무릎을 살짝 숙였다. 자리에서 일어나 아사야는 거울 너머에 비치는 제 모습을 바라보았다. 세간에 알리기로는 여섯 달 즈음, 제가 알기로는 두 달이 채 안 된 부푼 배를 가진 임산부가 거울 안에 서 있었다.

“응접실로 모실까요?”

카펫을 밟고 선 아사야의 맨발 앞에 슬리퍼를 내려 주며, 엠마오가 물었다. 문을 열면 곧장 만날 수 있는 오빠가 두려워서 그를 응접실까지 보낼 정도로 아사야는 겁쟁이가 아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날, 사과할 상대를 잘못 선택한 거야.”

제가 보낸 전언을 그가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불확실한 질문에 손이 차가워졌다.

느릿느릿 걸어, 아사야는 소파 자리에 몸을 앉혔다. 그를 환영하지 않는 듯한 인상을 주고 싶진 않았지만, 배를 불룩 내밀고 엉거주춤한 자세로 가디엘을 맞이하는 일은 더욱 싫었다. 고작해야 두 달이었다. 두 달간 못 본 사이 제가 얼마나 변했는지 가디엘에게 각인시키고 싶지 않았다.

“…….”

차분히 그리고 분주하게 아사야는 손을 움직였다. 길게 늘어뜨린 머리칼을 빗어 정리했고, 구겨진 임부복 치마도 넓게 펼쳐 무릎 사이가 평평하게 했다. 그러고는 긴 날숨과 들숨을 반복해 쉬었다.

“이제 됐어.”

아사야가 말했다.

“들어오라 해.”

그러자 침실 문이 열렸다.

소파에 앉아 등을 돌린 채로도, 아사야는 열린 문을 지나 걸어 들어오는 가디엘의 기척을 느낄 수 있었다.

본의 아니게 한숨이 났다. 가디엘 아졸은 어떠한 경계도 눈총도 받지 않고 둘째 왕자 부부의 침실을 드나들 수 있는, 유일무이한 남자였다. 그러나 이 장소에 발을 들이기란 오늘이 처음이었고 어쩌면 마지막이 될 수도 있었다.

불안함을 주먹 안에 모아 감추려 노력하는 아사야 앞에, 가디엘이 걸어와 섰다. 그의 표정도 눈짓도 아닌 망토의 색만을, 아사야는 짧게 살폈다. 그리고 말했다.

“엠마오. 잠시 자리 좀 비켜 주겠어?”

그러자 유모와 시녀들이 침실 밖으로 빠져나가 문을 닫았다. 소리 없이 조용한 퇴장이었다.

이내 완벽한 침묵이 남매를 감쌌다. 서로 간에 무어라 말을 하건 뇌리에 똑똑히 새겨질, 방해꾼 하나 없이 온전하기로 7년 만에 처음 있는 자리였다.

“가디.”

먼저 대화의 운을 떼어 보려 아사야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놀랐다. 한참을 응답 없이 망설인 끝에 찾아온 가디엘 아졸은, 누이 앞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너무 놀라면 오히려 침착해진다더니 딱 그 꼴이었다. 심장이 떨어지게 놀란 나머지 아사야는 얼굴을 굳히고서 그를 바라만 보았다. 제가 앉은 소파 팔걸이와 비슷한 높이에 그의 숙인 머리가 머물렀다.

“미안해, 아사야.”

가디엘이 말했다.

“……이러려던 게 아니었어. 널…… 이렇게 만들 생각은 없었어. 내가 잘못한 거야, 내가…… 열등감으로 네 인생을 망쳐 놓았어. 내 모자람으로 널 불행하게 만들었어.”

이것으로 충분하다고, 아사야는 생각했다. 그로부터 사과를 받고는 싶었지만 그를 절망시키고 싶진 않았다. 저를 향해 무릎을 꿇고 잘못을 비는 목소리라면 듣고 싶지 않았다.

그를 달래어 일으키고 싶었다. 가브리엘에게 말한 것과 같이 ‘이제는 내가 가디를 지킬 입장’임을 알려 주고, 마음에 오래도록 담아 둔 이야기를 전부 꺼내고 싶었다.

그러나 아사야는 그를 달래긴커녕 무어라 문장을 꾸릴 수도, 그의 이름을 힘주어 부를 수도 없었다. 긴장인지 당혹감인지 모를 것으로 얼어붙은 아사야의 몸은 제 의지가 아닌 순전한 충동으로 움직였다.

“만져 볼래, 가디?”

소리 내 물으며 아사야는 가디엘의 손을 잡았다. 그러고는 제 부푼 배 위에 가져다 붙였다. 그럴 적에 아사야의 표정은 티끌 없이 해맑았고 목소리는 제 나이에 맞지 않게 어리게 들렸다. 침대에서 떨어진 바람에 무릎에 보라색 멍이 들었던 날, 아홉 살의 아사야가 건넨 소리가 그와 비슷했다.

그녀의 어린 두 손에, 가디엘의 하나 남은 손이 완전히 잡혔고 갇혔다. 그의 손바닥 아래에 누이가 품은 아기가 존재했다. 지금쯤, 신관들의 표현에 의하면 ‘엄마 배 속을 헤엄치고 있을’ 아기였다.

그 순간 남매가 서로의 얼굴을 마주 봤다. 하나같이 두 눈은 크게 뜨고, 입술을 멍하니 벌린 채였다.

“아샤…….”

늘씬하게 말랐던 소녀의 배는 온데간데없었다. 동그랗게 부푼 누이의 배를 만지며, 가디엘은 어느 누구도 보이지 않았던 반응을 보여 주었다. 폼도, 야베스 세일산도, 심지어는 가브리엘도 가디엘과 같이 반응하진 않았었다.

“내가 너에게 무슨 짓을 저지른 거지?”

이를 악물고 흐느낌을 삼키며, 가디엘 아졸은 울기 시작했다.

눈물이 그의 뺨을 타고 흘렀다. 하나 있는 손이라고는 아사야의 작은 손에 붙들려 그녀의 동그란 배에 얹어져 있었으므로 그에겐 눈물을 훔칠 방도가 없었다. 고개를 숙이며 울음을 억누르자 굵은 눈물방울이 후드득, 아사야의 치마를 적셨다.

“괜찮아.”

그 순간 아사야는 이상해졌다. 그녀는 1년하고도 조금 넘치는 시간 동안 저를 괄시하고 상처 입힌 야베스 세일산은 죽도록 미워하고 있으면서, 아주 어릴 적을 제외하고는 줄곧 저를 외면하고, 밀어내고, 떠나보내기 바빴던 가디엘 아졸을 쉽게 용서해 버렸다.

“괜찮아, 가디.”

꼭, 그와 제가 어제까지만 해도 사이좋은 남매였고 바로 몇 시간 전에 잠깐 싸운 것처럼 생각됐다. 그 착각이야말로 아사야가 무엇보다 원해 온 일이었다. 가족이기에, 남매이기에 서로를 미워하고 밀어내다가도, 덜컥 이해하고 용서하는 일.

“가디가 바보란 건 예전부터 알고 있었는걸.”

실소하며, 아사야가 말했다. 그럴 적에 그녀의 볼은 눈물 자국 하나 없이 깨끗했다.

“그래, 아샤…….”

목덜미까지 적신 쪽은 가디엘이었다.

“내가 바보였어.”

누이의 무릎 위에 제 고개를 숙이며 그가 고백했다.

“나였어, 네 이마에 흉터를 만든 거. 내가 널 떨어뜨렸어, 요람에서…….”

가디엘 아졸의 목구멍에 고여 있던 말들이,

“그냥, 잠든 네가 귀여워 보여서 안아 주려고 했던 거였는데, 실수로…….”

횡설수설 빠져나와 무릎 위로 쏟아졌다.

“정말 실수였어, 미안해. 흉을 남길 생각은 정말로 없었어.”

그런 가디엘의 고백이며 사과를 아사야는 이해할 수 없었다.

“무슨 소리야, 가디?”

제 이마에 흉터가 있다는 사실조차 잊고 살던 그녀였다. 흐릿하게 남은 흉터는 누군가 갑자기 언급할 때에서야, ‘그런 게 있었지’ 하고 떠올릴 정도로 사사로운 것이었다.

“흉터 같은 건, 그건 아무것도 아니야. 난 신경 쓰지도 않아.”

요람 속의 어린 누이를 떨어뜨린 일은 가디엘에게 있어 큰 굴레의 시발점이었다. 이마를 찢긴 아사야는 울기 시작했고 아버지는 그날 처음으로 가디엘의 뺨을 쳤다. 돌처럼 단단한 손에 맞고, 가디엘은 종잇장처럼 나자빠졌다. 네 누이를 지켜야지, 약한 아이를 함부로 건드리느냐며 성을 내는 소리가 먹먹한 귀를 울렸다.

그 일이 가디엘에게는 못내 충격이었다. 여자에게는 얼굴이 중요한데, 네가 흠을 내었다가 누이의 평생이 망가지면 어쩔 것이냐는 말에 그의 세계가 송두리째 흔들거렸다.

그 사건을 기점으로 남매의 아버지는 조심성 없는 가디엘의 손이 여린 딸을 순전히 다루는 꼴을 못 봤다.

그런데 스물한 살의 아사야가, 제 이마의 흉터를 두고 ‘아무것도 아니’라며 눈을 끔벅거렸다.

“세상에, 이깟 흉이 뭐라고 사과를 해……. 사람은 누구나 다치잖아. 자국이 좀 남았다고 해서 큰일이 나는 것도 아닌데.”

멍하니, 가디엘은 누이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아사야는 놀란 채였지만, 제 흉터의 원흉을 알아냈기 때문은 아니었다. 가디엘이 무척 오랜 시간을, 제가 아는 것보다 먼 과거에 머무르고 있었음에 아사야는 놀랐다.

그와 저의 책갈피는 서로 다른 페이지에 꽂혀 있었다. 아사야에게는 더 이상 제 인생의 도입부가 중요치 않았다. 그러나 가디엘의 책갈피는 맨 앞 장에 머물렀다.

아사야에게는 그녀 인생의 다음 챕터가 중요했다. 가브리엘과 폼이, 자유를 위하여 꾸민 계획이, 배 속의 아기가 있기 때문이었다. 내일을 생각하며 오늘을 살아가기 바쁜 그녀에게 더는, 어린 날 오빠를 향했던 갈망이 머물 자리가 없었다.

그래서 쉬웠다. 미련도 원망도 사라진 그녀의 마음에는 연민과 애정만이 남아 있었다. 아사야는 가디엘을 일으키기 위해 어떤 용서라도 할 수 있었다.

“가디에게 줄 선물이 있어.”

손을 뻗어 아사야는 협탁 위에 준비해 둔 가죽 주머니를 들었다. 그러고는 오래전 가디엘이 제 품에 안겨 주었듯이, 그의 손에 받은 것을 돌려주었다. 제 손안에 들어온 주머니의 무게를 느끼고 냄새를 맡으며, 가디엘은 그 속에 무엇이 들었는지 이미 알았다.

주머니를 열어 들여다볼 필요도 없었다. 어여쁜 아사야와는 어울리지 않게 거친 질감의 가죽 주머니는 영웅 베데르의 유품이었다. 속에는 젬 드래곤의 비늘 조각이 들어 있었다.

“가디가 받아 주었으면 해.”

아사야가 속삭였다.

“아버지를 따라 기사단을 지휘하고, 전쟁터를 누빈 사람은 가디니까…… 가질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

진작 이렇게 했어야 옳았다고, 아사야는 생각했다. 가디엘이 원하고 제가 가진 것을 그와 나누었더라면, 그들 남매 사이가 삐뚤어질 이유도 없앨 수 있었으리라 믿었다.

“아니.”

그러나 돌아온 답은 부정이었다.

“아니야, 아사야. 이건…… 아버지께서 너에게, 그리고 네 자식에게 물려주려던 유품이야.”

오래되어 닳은 가죽 주머니를 찢을 듯 세게 쥔 채, 가디엘이 아사야의 손에 건네주었다.

아주 어린 날부터 동강난 팔을 쥐고 비명을 지르던 순간까지, 그가 원한 것은 그의 누이가 줄 수 없었고 주어서도 안 됐다. 가디엘 아졸이 원하며 꿈꾼 것은 동생이 받은 애정이며 물건들을 뚝 떼어 제게 주는 것이 아니었다.

아사야가 받은 것에 훨씬 못 미치는 무엇이건 좋았다. 다만 아버지께서 제게 직접 안겨 주었으면 했다. 누이에게 하는 것처럼 애정을 담아, 네가 자랑스러우며 자식으로서 너를 아낀다고, 걱정하노라고, 죽으러 가는 순간에 너를 생각했었다고 알려 주었으면 했다.

“더는 욕심내고 싶지 않아. 더는…….”

이제 와 받아 내기에는 너무 늦은 것들이었다. 몇 년간 아버지의 행보를 따라 밟으며 그가 남긴 흔적들을 좇아왔지만, 이제는 한계였다. 가디엘은 완전히 지쳐 버렸다. 그가 받지 못하고 아사야는 가졌던 것을, 신기루처럼 좇으며 시기하는 일은 그만두고 싶었다.

애당초 아사야에게도 멋진 오아시스 따위는 없었다.

“미안해.”

젊은 가주가 제 이마를 누이의 손에 기댔다. 그의 정수리를 내려다보며 머리를 만져 주기가, 아사야는 이제 어색하지 않았다. 가디엘 아졸은 지친 기사였고 아사야 세일산은 왕가의 공주였으므로. 우는 오빠를 달래 주기에, 그녀는 자격이 충분했다.

“가디, 우리…….”

그를 향해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아사야가 속삭였다.

“이제 돌아가자. 예전처럼, 응?”

“예전처럼…….”

산을 떠도는 메아리처럼 가디엘이 누이의 말을 따라 읊었다.

“내가 원하는 건 그것뿐이야. 전처럼, 가디와 내가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가는 거…….”

그의 머리를 안아 주고 싶었지만, 둥그렇게 부푼 배가 단단해 허리를 굽힐 수가 없었다. 대신에 아사야는 가디엘을 힘껏 당겨 일으켜 세워 주었다. 한참 동안 무릎을 꿇고 버틴 탓인지 그는 살짝 비틀거렸다.

언제고 아사야는 강자에게는 강했고 약자에게는 약했다. 그녀에게 있어 가디엘은 그 경계를 넘나드는 존재였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제 어떤 말이나 행동으로도 돌려세울 수 없는 벽 같던 그가, 오늘은 어리숙한 상처를 지닌 그녀의 오빠였다.

“그래, 아사야.”

두 무릎에 힘을 줘 바로 서며, 그가 말했다.

“돌아가야지……, 있어야 할 자리로.”

배웅을 하겠다며 따라나서는 아사야를, 가디엘은 미소로 떨어뜨렸다. 그의 웃는 낯을 몇 년 만에 본 탓에 아사야는 그 미소가 어떤 감정을 담고 있는지 읽어 낼 수 없었다.

둘째 왕자 부부의 침실을 떠나 멀어지는 가디엘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아사야는 엠마오를 불렀다. 공작성에 달리 무슨 일이 있지는 않았는지, 가디엘을 따라가 살펴 달라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엠마오가 허둥지둥 쫓을 즈음 가디엘 아졸은 벌써 왕성을 벗어난 후였다. 아사야 세일산의 유일한 혈육이자 오빠로서, 제자리로 돌아가기 위해 그에게는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아사야의 자식까지 왕위 계승 탈락자로 살게 할 셈인가?”

저를 몰아붙이던 야베스 세일산의 목소리가, 아직도 귓불에 달라붙은 듯했다.

“폐하께서 그러시더군. 누가 절벽에서 밀쳐 죽여도 수사할 일 없는 것이 탈락자의 삶이라고. 베데르 경의 손주를 그렇게 둘 수는 없지. 안 그래?”

야베스 세일산이라면 증오스럽기 짝이 없고 끔찍이도 싫었지만, 가디엘은 그의 말을 완전히 부인할 수 없었다. 아사야의 배 속에 영웅 베데르의 손주가, 야베스 세일산의 자식이, 그 자신의 조카가 움트고 있었다.

저지른 잘못을 보상하기 위해서라도 가디엘은 제 누이의 인생을 걸맞은 위치에 돌려놓아야만 했다. 아사야가 낳고 품을 아이에게 선물을 주지는 못할망정, 그 인생을 탈락자의 것으로 전락시킨 채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가디엘 아졸의 이름을 걸고 내게 충성을 맹세했잖나. 불충을 택하겠다면 어디 두고 보지, 본도 세일산이 왕좌에 오르는 대로, 당신의 누이, 내 아내는 그의 장난감이 될 거야.”

주먹을 콱 말아 고삐를 움켜쥐고, 가디엘은 말을 거칠게 몰았다.

그 역시 알았다. 해의 말일 연회 날, 본도 세일산은 블란테의 옆자리에 앉은 뒤에도 제 누이를 살피기를 멈추지 못했었다. 그 시선이 노골적으로 몇 번이고 오가는 것을, 가디엘이 느꼈고 몇몇 귀족들마저 힐끔대며 수군거렸다.

누이의 배 속에 악마 새끼 같은 야베스 세일산의 씨가 심긴 것만으로도 몸서리치게 끔찍한 가디엘이었다. 그의 손에 닿게끔 누이를 끌어내린 것이 가디엘, 그 자신임은 형용할 수 없이 추잡스러운 진실이었다. 그러나 그 무엇도, 무방비한 상태의 누이가 본도 세일산의 패물이 되는 일보다 나쁠 수는 없었다.

공작성에 도달하자마자 그는 시간을 한번 확인하고는 기사단 전원을 집결시켰다. 그러고는 거짓 없이, 모든 계획을 상세히 알려 주었다.

“본도 세일산은 수도로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그의 존재가 나의 누이와 그녀 배 속의 아이를 위협하고 있음을 안 이상, 더는 두고 볼 수 없어. 나는 아사야 세일산을 왕비의 자리에 앉힐 생각이다.”

그러자면 그는 야베스 세일산을 왕좌에 앉혀야 했다.

“따르고자 하는 자는 말에 오르고, 떠나고자 하는 자는 떠나도 좋다.”

젊은 지휘관이 말을 마친 직후, 기사단은 미동도 없이 멈추어 있었다. 그러나 동결은 아주 잠시였다. 아졸가의 기사단 전원이 말에 올랐다. 영웅 베데르를 모시고 외팔의 가디엘을 따르는 기사단은 군대와도 다름없었다. 군인의 사전에 불충이란 없는 단어였다. 그들은 가디엘 아졸이 불명예스러운 죽음을 맞이하는 모습도, 아사야 세일산이 위협을 받는 꼴도 두고 볼 수 없었다.

반역이란, 실패한 전쟁에나 붙는 이름이었다. 아졸가의 기사단은 절대로 실패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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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새벽, 아졸가 기사단이 전원 국경을 향해 말을 달렸다…..… 헐레벌떡 뛰어 들어온 엠마오가 전한 소식이었다. 울렁거리는 속을 부여잡으며 아사야는 창가에 기대어 섰다. 그러고는 창틀을 탁자 삼아 급히 편지를 적었다.

흐린 해가 겨울 하늘을 밝히는 아침, 전령새가 창문을 떠났다. 발목에는 편지 한 장을 묶은 채였다.

백색의 전령새가 찾는 이는 단 한 사람, 바다를 건너 국경으로 돌아올, 블란테 세일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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