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팔의 마법사
어린 시절의 기억들은 죄다 눈앞에 떠다니는 아지랑이의 모습으로 덮여 있었다. 그녀는 특별한 소녀였다. 그 아지랑이의 이름이 ‘마나’인 것을 알기도 전에, 소녀는 그 힘을 움직이고 숫자로 적어 풀어냈다. 그녀는 천재였다.
그러나 고위 신관의 허락 없이 마법을 배우는 것은 불법 행위였고, 그녀는 감히 신관을 찾을 수조차 없는 천한 출신을 타고났다.
곰팡이 핀 장작더미 옆에 쪼그리고 앉아 독학으로 익힌 마법은 그녀에게 마녀라는 오명을 안겼다. 가족들의 외면을 받으며 그녀는 고향을 떠났다.
박해받는 모든 마법사를 품어 준다는 변두리의 섬, 마법사의 땅만이 고아 마녀를 받아 주었다. 그 땅에서 소녀는 ‘폼’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폼’이라 불리는 마법사, 그게 그녀였다. 이외의 성씨, 고향, 부모는 지워진 지 오래였다. 이내 ‘폼’은, 대륙 내에 유일한 여성 고위 마법사의 이름이 됐다.
이십 대 초반을 지나기 전에 폼은 이미 비공식적으로 최연소 신관이었다. 마나의 흐름을 조작하고 마법식을 풀어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신성력을 발휘하는 방식까지 깨우친 덕이었다.
“왕성의 신관들이 고지식하기 짝이 없어. 최연소 신관 자리를 네가 꿰찼다는 걸 어찌 받아들일지 알 수가 없으니…… 네 이름을 적어 올리는 일은 조금 미루는 게 좋겠구나.”
늙은 마법사들이 그렇게 입을 모았다. 폼은 그들 뜻에 순종했다. 그녀에게는 논란이 될 정도로 빼어난 명성이나 특출한 명예가 중요하지 않았다. 제 머릿속에 넘쳐흐르는 호기심을 지식으로 바꾸는 일만이 중요했다.
폼이 스물일곱 살의 귀재로서 새로운 마법식 창안에 힘을 쓰던 때, 마법사의 땅에 공문이 전달되었다. 청색 올빼미가 물어 온 공문은 대륙의 수도에 위치한 마법사 협회에서 보내온 것이었다.
내용은 짧고 명료했다.
전국적으로 마물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음. 수년 이내에 전쟁이 일어날 조짐을 확인하였음. 새로운 마도구 창안을 연구할 마법사를 모집하는바. 귀족이 아닌 기사로서의, 베데르 아졸의 명을 하달함.
여타 귀족들은커녕 왕실에서 부른다 하여도 걸음하지 않을 것이 마법사의 땅을 지키는 인간들이었다. 마법사의 땅이란, 세상으로부터 외면을 받고 때론 병자 혹은 범죄자로 취급되며 밀려 나온 이들이 최종적으로 도달하는 장소였다.
귀족이고 기사이고를 떠나 마법사의 땅 주민들을 움직일 수 있는 이름은 몇 되지 않았다. 최소한, 마법사 학교와 협회를 창설하고 차별 없이 전폭적인 지지를 퍼부어 온 위인은 되어야 했다. 베데르 아졸이 그런 남자였다.
스무 명의 마법사들이 짐을 챙겼다. 베데르 아졸을 경애하여 그와 함께 일하기 위하여, 그들은 마차에 올랐다. 폼도 그들 중 하나였다.
마법사의 땅을 벗어나자마자 폼은, 잊고 있던 세상을 만났다. 마법사와 용병들, 기사들이 함께 이동하는 보름간 폼은 그들과 같은 마차를 타고, 같이 야영을 했다. 그러는 내내 그녀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눈총에 시달려야 했다.
마녀.
그 취급이 더는 낯설지 않았다.
마법사의 상아탑이라 불리는 협회에 도착한 뒤에도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협회 연구소 내에도 여자는 있었지만, 청소를 하고 심부름을 하는 하녀가 대다수였다. 직급이 있는 이는 폼 이외엔 두 명으로, 한 명은 서기였고 한 명은 늙은 학자였다.
훗날 찾아올 시련에 대비하여 저도 참전을 하겠노라 선 이는 폼뿐이었다. 혹자는 그녀를 두고, 베데르 경의 대업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했다.
오죽했으면, 베데르 공작이 듣는 앞에서도 그녀를 “마녀”라 부르는 기사가 있었다.
기사들 사이에서는 들어 본 적 없을 호칭에 공작의 시선이 힐끔 폼을 향했다. 그와 같은 사람을 폼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는 짙은 눈썹에 착해 보이는 갈색 눈동자를 가진, 턱을 덮는 수염마저 놀랍도록 잘 어울리는 미남자였다.
높다란 자리에서 떨어지는 시선에 폼은 몸을 움츠렸다. 그와 비교하자면, 고위 마법사인 그녀조차도 책장 사이에 틀어박혀 살아온 말라깽이 마법사일 뿐이었다.
기사들의 틈에 섞여 이질감을 없애고자 폼은 길던 머리칼을 삭발한 상태였다. 걸친 로브는 품이 넉넉했고 말라빠진 두 다리엔 가죽 바지를 입은 채였다. 그럼에도 그녀는 남자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혹여 영웅 베데르가 여자 마법사를 원치 않을까 싶어, 폼은 그의 눈빛을 살폈다.
그러자 베데르가 말했다.
“마녀든 범법자든 상관치 않네. 내게 필요한 건 유능한 마법사일 뿐이야.”
이어서 그는 회의를 시작했다. 짧은 대화에 불과했으나 그날 이후 폼을 마녀라 부르는 목소리는 눈에 띄게 줄었다.
첫 번째 회의를 마친 뒤에 마법사의 땅으로 떠난 마법사가 둘, 학자가 셋이었다. 그들이 떠난 자리에 ‘공작의 계획은 실현 불가능하며 허황됐다’는 지적만이 남았다.
드래곤의 심핵을 박살내는 마도구. 그 거창한 기획은 그저 소설로만 남게 되는 듯했다.
“운 좋게 심핵을 부순다고 해도 아주 잠시뿐입니다. 수 초도 지나지 않아 회복되고 말 겁니다. 드래곤의 자생 능력을 망치자면 심핵을 아예 가루로 만들어야 하는데, 그게…….”
“지금의 기술으로는…… 고작해야 작은 금이나 하나 낼까요.”
그러니 완벽한 승리는 보장할 수 없단 소리였다.
회의실 테이블 중앙에 놓인 기획안을, 폼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녀는 회의실의 누구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은 말을 꾸렸다.
“심핵을 가루로 만들 필요는 없어요. 작은 금이면 충분해요…….”
가느다란 목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집중됐다. 손목을 덮는 기다란 로브를 만지작거리며 폼이 소곤거렸다.
“그 금 밖으로 마력을 빼내면 돼요.”
‘허’, 누군가 헛웃음을 쳤다. 기사의 무시에 마법사들의 눈초리는 매서워졌다. 고위 마법사와 기사들의 기 싸움으로 방 안의 공기가 변했다. 금방이라도 서로 간에 언성을 높일 것만 같았다.
침묵을 깨는 말소리는,
“그렇게만 된다면, 이 대륙에 두 번 다시 전쟁은 일어나지 않겠군.”
베데르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 생각을 계획으로 실행시킬 수 있나?”
그가 물었다. 폼이 소리 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옆자리의 늙은 마법사가 그녀의 팔뚝을 툭 건드렸다.
“네.”
어색한 표정을 고치며 폼은 목소리를 내야 했다.
“만들 수 있어요. 일주일만 주시면 돼요.”
회의를 마치며 폼은 가져온 노트를 찢어 베데르에게 건넸다. 20분 만에 간단히 그려 놓은 설계도와 수식, 텅 빈 마석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재료를 적은 종이였다.
베데르는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는 폼을 바라보더니, 받은 종이를 폼에게 돌려주었다. 대신에 그는 자신의 서명이 담긴 수표 한 장과 심부름꾼 두 명을 폼에게 붙였다. 수표에 적힌 금액은 ‘1아몬’이었다.
‘아몬이 뭐지?’
폼은 그 종이를 오래도록 노려보았다. 그녀가 아는 가장 큰 돈의 단위는 세실이었다. 70세실이면 수도 안에 부부가 살 집을 지을 수 있었다.
1아몬이 1,000세실을 뜻하는 단위인 것은, 재료를 사겠다고 장터에 나가서야 알았다.
베데르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아 폼은 날개 붙은 사람처럼 움직였다. 일주일 만에 만들겠노라 말했으니 일주일 만에 해내야만 했다.
7일간 열 시간쯤 잔 것 같았다. 피마저 시커메진 사람처럼 피부 빛이 컴컴해지고 입에는 포션을 문 채, 폼은 설계를 완성시켰다.
다음 회의 날 테이블 위에 올린 작품은 단순한 설계도가 아니었다. 설계도를 바탕으로 만들어 낸 모조 마도구였다.
가죽 주머니를 열어 폼은 트롤의 심장을 꺼내 놓았다. 지독한 냄새에 학자들이 헛기침을 했다. 트롤의 피가 묻은 손으로 폼은 테이블 위에 마법진을 그리고, 그 중앙에 마도구를 놓았다. 마도구를 개방시키고 트롤의 심장에 남은 마력을 흡수하기까지 세 시간이 걸렸다.
조용하고 느리지만 힘 있는 성공이었다. 젊은 여자 마법사가, 여태껏 세상에 존재하지 않던 마법진과 도구를 창안해 낸 것이었다. 기쁜 마음에 폼은 팔짝거리며 제자리에서 뛰어올랐다. 세 시간을 함께 기다린 마법사들과 기사들, 베데르 아졸 역시 뛸 듯이 기뻐했다.
그의 팔이 폼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수고했네! 수고했어.”
그러고는 폼의 등을, 여느 기사들을 격려할 때처럼 소리 나게 두들겼다.
그게 시작이었다. 아름다운 공작부인, 엘라 아졸을 잃고 십 년이 넘는 세월을 수절한 채 지낸다는 영웅 베데르를 폼은 좋아하게 됐다. 가망 없는 짝사랑이었다.
짝사랑, 그 정도의 애정이 폼에게는 적당했다. 폼이 원한 것은 엘라 아졸이라는 아리따운 아가씨의 빈자리를 꿰차는 일이 아니었다. 폼이 원한 것은 마음을 다해 누군가를 좋아하고 그 일 자체로 기쁨을 얻는, 아주 작고 사소한 애정이었다.
수년간 베데르는 그런 폼의 마음을 몰랐다. 폼이 내색하지 않았고 내색하는 방법도 몰랐기 때문이었다.
상아탑에 지내면서 폼은 스물여덟이 되었고 스물아홉이 되었다. 혹자는 폼을 두고 연구에 미친 여자라고 했다. 트롤의 심장을 쥐어짜 내는 저런 여자를 누가 데려가겠느냐고도 했다. 그러나 미혼의 마녀로 지내면서 그녀는 행복했다. 평생을 살면서 처음 느껴 보는 행복이었다. 그래서 무서울 정도였다.
심장이 뛰는 긴장감과 설렘, 매일 이른 아침 멋대로 반짝 깨는 잠, 그를 볼 때면 조절할 수 없는 미소가 폼의 일상을 채웠다. 그때는 그게 무언지도 몰랐다. 제가 행복한 줄도 몰랐다.
폭설이 내린 이듬해에, 베데르 아졸의 짐작처럼 대륙의 마물들이 한꺼번에 움직이기 시작했다. 2차 마물 전쟁이 발발한 것이었다.
사렙탄 세일산은 베데르를 지휘관으로 내세웠고, 마법사들은 블랙 드래곤을 이기는 것으로 이미 검증을 마친 마도구를 챙겨 들었다.
영웅 베데르를 좇아, 폼 역시 전쟁에 참여했다. 베데르의 옆에 붙어 다니며 그의 막사에서 함께 회의할 적에 폼은 제가 여자인 것이 그렇게나 거슬리는 일임을 처음 알았다.
전쟁터의 눈짓들은 상아탑에서 겪은 시선과는 차원이 달랐다. 영웅 베데르는 살아 있는 성인이었고, 폼은 그런 영웅의 막사를 한밤중에 드나드는 여자였다.
주제를 모르고 감히 베데르 경의 옆자리를 넘보는, 마녀. 오가는 눈짓과 모함들에 때론 따가웠고 때론 아렸다. 그러나 폼은 개의치 않았다. 그녀 역시 베데르를 존경하고 사랑하는 참전병 중 하나일 뿐이었다. 영웅의 큰 뜻을 이루며 역사에 이름을 새기리라, 그렇게 다짐했다.
전쟁의 열기는, 그러나 매서웠다. 거듭 승리를 거머쥐면서도 병사의 수는 계속해서 줄어들었다. 북부 산악지대에서는 완전한 압승을 거두었음에도 병에 걸린 병사와 마법사가 줄을 지었다. 하루에만 혼절하는 치료술사가 수십 명이었다.
그리고 복병이 등장했다. 기다렸다는 듯 인간들을 내리깔아 보는, 레드 드래곤의 시뻘건 눈동자를 폼은 잊지 못했다.
에돔.
그 마물이 토하는 기염에 마을 하나가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병사의 수가 절반으로 줄었다. 남은 절반의 절반은 병에 걸렸고, 모든 이들이 심각한 우울 증세를 보였다. 하룻밤 사이, 두 명의 기사가 유서를 남겨 두곤 자결했고, 수십 명이 탈영했다.
패배는 이미 예정된 격이었다. 잿더미 위에 선 마법사들마저 하나둘 떠나가기 시작했다. 몇 년을 매진하여 만든 마도구도 쓸모가 없었다. 레드 드래곤의 비늘을 뜯어내려 다가갈 수조차 없었으므로.
무기력한 빈자리들을 둘러보며, 폼은 홀로 남았다.
레드 드래곤과 그를 따르는 마물들의 기세는 끔찍할 정도로 좋아졌다. 기다렸다는 듯 그들은 최전방의 기사들을 집어삼키려 달려들었다. 녹아내린 철물이 덕지덕지 엉겨 붙은 성벽 위에, 베데르가 섰다.
방패를 내려놓고 그는 검을 쥐었다. 기사들이 그의 손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어딜 다치셨나요?”
놀란 폼이 다가가 물었다. 그러나 기사들로부턴 돌아오는 답이 없었다. 베데르의 손아귀에서 검이 빠져나가지 않도록 아주 단단히 묶을 뿐이었다.
날아드는 레드 드래곤의 화염에 옷 안이 후덥지근해졌다. 계획을 묻고자 폼이 두어 번 더 질문하자, 베데르는 그녀를 데려가 인적 드문 복도에 세웠다. 그러고는 제 유품을 전했다.
“자네를 여기까지 오게 해서 미안하네.”
그가 말했다.
“이런 일을 부탁해서 미안해.”
이어 그는 검을 묶지 않은 손을 폼의 뺨에 붙였다. 그제야 폼은 베데르의 뜻을 알아차렸다. 그의 몸을 둘러싼 비범한 마나들이 피부 위에서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베데르의 입술이 폼의 이마에 닿았다. 짧고 조촐한 입맞춤이었다.
그제야 폼은 자신의 짝사랑이 끝났음을 알았다. 베데르 아졸이 떠나기 직전에서야.
“내 딸에게 전해 줄 수 있겠나?”
마지막 마도구를 개방하기 위해 남은, 마지막 마법사에게 베데르가 말했다. 전장을 누비며, 조개를 줍는 소년처럼 젬 드래곤의 비늘을 주워 모으던 그의 모습을 폼은 기억했다.
“내가 지킬게요, 베데르 경…….”
폼이 말했다.
“경의 유언도, 경의 따님도, 제가 지켜 드리겠어요. 어떤 일이 생긴다 해도 아졸 가문의 편에 서겠어요.”
“대륙에서 가장 잘난 마법사가 내 편이라.”
그러자 베데르가 웃어 보였다.
“마음이 든든하군.”
그를 경애하면서도 폼은 그를 알 수 없었다. 죽으러 달려드는 순간마저도 그는 영웅이며 인간을 초월한 존재였다. 집으로 돌아가 딸을 만나고 싶다더니, 저에게 달려와 눈물을 묻혀 댈 것이라며 아사야의 이름을 지겹도록 말해 놓고는, 그는 망설임 없이 출전했다.
불길이 베데르의 몸을 감쌌다.
레드 드래곤의 낙하와 함께 그의 불탄 시신 역시 바닥으로 추락했다. 죽어서도 그의 손에는 검의 손잡이가 붙어 있었다. 날카로운 검날은 레드 드래곤의 심핵에 꽂힌 채였다.
마도구를 개방하자 뜨거운 불길이 텅 빈 마석 안으로 흡수되었다.
기사들이 불길을 잠재우기 바쁜 와중에 폼은 베데르에게로 달려들었다. 그의 몸을 휘감던 마나가 떠난 것을 알면서도, 폼은 이성적이지 못했다.
치유 마법을 써 보려 술식을 아무렇게나 외쳐 대며, 폼이 두 팔을 뻗었다. 그의 시커먼 시신을 끌어안고 마력을 방출해 냈다. 그러나 숨이 끊긴 베데르의 시신은 조금도 낫질 않았다. 뼛속까지 피어오른 화염으로 그녀의 두 팔과 어깨에 심한 화상을 입힐 뿐이었다.
뜨거움을 못 견뎌 폼이 그를 놓쳤다. 마법사의 품에서 빠져나가는 순간 영웅 베데르가 있던 자리엔 회색 잿더미만이 남았다.
베데르의 숭고한 희생은 전쟁의 판도를 바꿔 놓았다. 기가 꺾인 레드 드래곤이 도주하는 것에 군인들은 흥분했고, 왕성에서 보내온 후발대가 그 열기를 이어받았다.
텅 빈 눈으로 폼은 막사에 남았다. 불길에 휘감겨 밤마다 타들어 가는 소리를 내는 두 팔을 혼자서 치료해 가며, 폼은 가디엘 아졸을 기다렸다. 베데르의 아들에게 그의 유언과 유품을 전하고자 했다.
“아사야 아졸을 만나고 싶어요. 베데르 경의 유언을 지키며 아가씨의 마법사로 일하고 싶어요.”
화상 입은 손을 떨며 전달할 적에, 가디엘은 그녀를 내려다봤다. 소년의 눈에 담긴 슬픔과 분노를 읽고 폼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내 누이에게 접근할 생각 마.”
젊은 지휘관, 가디엘 아졸. 제2의 베데르라고, 모두가 그렇게 부르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폼의 눈에, 그처럼 베데르와 다른 인물이 없었다.
어떻게 두 다리를 뻗고 선 것인지 믿을 수 없을 만큼 무거운 마나가 절망처럼 가디엘의 등을 내리누르고 있었다. 제 세상을 뒤틀어 놓은 전장에 선 젊은 지휘관의 기세는 차갑다 못해 매서웠다.
“당신 같은 여자와 내 아버지가 간통했단 사실을 알면 쓰러질 애야.”
전장에서 와전된 이야기에 무어라 변명을 해 보려다가, 폼은 입을 다물었다.
가디엘에게 소문을 전한 혓바닥은 아졸가 기사들의 것이었다. 그에게 폼은 오밤중에도 제 아버지의 막사를 드나들었다는 마녀였다. 그런 마녀의 입에서 기사의 충정을 모함하는 말까지 나온다면, 가디엘은 그녀를 용서치 않을 것이었다.
베데르 경의 아들에게 죽임을 당할 수도 있겠다는, 원초적인 두려움에 폼은 얼어붙었다.
“두 번 다신 우리 남매 눈에 띄지 마.”
전쟁은 승리로 막을 내렸지만, 폼을 위한 승리는 그 자리에 없었다. 아졸 공작의 영지에서 그녀는 추방당했다.
전장을 누비던 영광도 기쁨도 잊힌 지 오래였다. 세상은 영웅 베데르를 추모하고 젊은 지휘관을 칭송했다. 그러나 누구도, 마도구를 설계해 낸 여성 마법사는 기억하지 못했다.
몇 번이고 공작 영지의 성문 밖에서 가디엘 아졸과 아사야 아졸을 만나기를 청해 보았다. 그러나 헛수고였다. 그녀는 베데르의 영광을 해치려 드는 거머리 같은 취급을 받았다.
마법사의 땅으로 돌아갈 마음도 없었다. 그 땅에 처박혀 세상을 잊고 살기에는 너무 늦은 때였다.
베데르의 명을 담은 서신이 마법사의 땅에 찾아왔던 것처럼, 언젠가 제 도움을 바라는 편지가 도착하기를 폼은 꿈꿨다. 그래서 마녀라 불리는 몸으로 작은 마을에 정착했다. 부부가 살 만큼 큰 집은 필요하지 않았다. 스무 권의 책과 작은 화로, 나무로 만든 침대면 충분했다.
그곳에서 다친 환자들을 치료하며, 폼은 치료술사로서 일했다. 마법을 쓰지 않고 가만있자니 좀이 쑤시고, 노동하지 않자니 팔의 화상이 펄펄 끓는 탓에 강제로라도 부지런해야 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그녀는 밤을 새워 가며 불치병을 연구했고, 치료제 개발에 힘썼다.
그 외의 시간 동안은 제 팔 안에 심긴 레드 드래곤의 불씨를 옮길 방법을 찾았다.
수십 번의 실패 끝에 그녀는 어린 말의 몸에 불의 마나를 집어넣는 일에 성공했다. 드래곤의 마력을 지닌 붉은 말을 완성시킨 것이었다. 그러나 멋진 성과는 더욱이 외로운 나날만을 가져왔다. 괴물을 만들어 내는 마법사라며 마을의 어르신들이 수군대기 시작한 것이었다.
‘안락한 생활도 이제 끝이구나.’
폼은 절망했다. 왕성에서 보내온 서신을 받기 전까지는 그러했다.
찬 바람이 낙엽을 쓸고 지나는 차가운 밤, 마녀의 집에 전령이 도착했다. 공주께서 왕성으로의 호출을 명하신다 하는 소환장과 함께였다.
“왕가에 공주께서 태어나셨나요?”
세상 소식과 멀리 떨어져 살다 보니, 폼은 세일산 왕가에 공주가 있는 줄도 몰랐었다. 그사이 왕께서 재혼이라도 했나, 어쩌다 딸을 얻었나 싶었다. 만에 하나 그렇게 공주가 태어났대도 나이가 대여섯 살일 텐데, 무얼 알고 저를 찾나 싶었다.
“공주라 함은 둘째 왕자비를 말씀드리는 겁니다. 아사야 세일산께서 당신을 찾으신단 말입니다.”
차가운 목소리로 전령이 말했다.
‘아사야’, 하고 폼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귀에 딱지가 앉도록 익숙한 이름이었다. 노란 눈동자를 지닌 천사 같은 아이, 너무 약한 나머지 바람에도 시들까 겁이 나는 요정, 드래곤을 좋아하는 괴짜 같은 소녀.
폼은 전령이 내민 소환장을 받아 들었다.
“아사야 아졸…….”
시뻘건 화상으로 뒤덮인 손으로 소환장을 움켜쥔 채, 폼이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아사야 세일산의 인장 위에 입을 맞췄다.
그제야 눈물이 났다.
.*. *. *. *. *. *.
마차 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마법사의 잠을 깨웠다. 부스스한 얼굴을 손바닥으로 문질러 잠기운을 쫓으며, 폼이 마차 문을 열었다.
세일산 왕가의 깃발이 높다랗게 걸린 왕성에 도착한 것이었다.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폼은 멀리 동떨어진 채 코를 푸르르 떠는 제 말부터 달랬다. 외딴 마을을 벗어난 게 마음에 들지 않는 듯 그녀의 적마는 흥분을 감추지를 못했다.
“쉬, 쉬이……. 괜찮아. 아마도…… 아마 괜찮겠지.”
마법사가 적마와 불안감을 나누는 사이, 서너 명의 하인들과 두 명의 어린 시녀가 그녀에게 다가왔다.
“어서 오세요, 마법사님.”
그렇게 저를 부르며 허리 숙이는 이들을 향해, 폼은 세상에서 가장 어색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짐을 들어 주겠다는 하인의 손길은 거절했다. 공주의 소환을 받은 고위 마법사로서 그녀가 가져온 짐이라고는 오래된 종잇장이 덕지덕지 붙은 노트 세 권과 마법서 두 권, 여벌 옷 다섯 장이 전부였다.
폼이 고개를 내저으며 뒤로 물러서자, 시녀들이 하인들을 돌려보냈다.
그제야 폼은 찬물을 끼얹은 듯 퍼뜩 정신을 차렸다.
‘내 꼬락서니 좀 봐…….’
그나마 깨끗한 것으로 챙겨 입기는 하였지만 폼의 행색은 하인보다 못했다.
시녀들조차 그 사실을 의식한 듯 폼의 발치를 힐긋거렸다. 독 두꺼비 가죽을 꿰어 만든 구두에 숯검정이 번져 있었다.
낡은 가방을 껴안은 채 폼은 꼬깃꼬깃한 로브 소매를 움켜쥐었다.
“오시는 길이 고단하진 않으셨나요?”
주근깨 많은 시녀가 말했다. 저를 보며 해 온 질문에도 폼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고는 반 박자 늦게 고개를 내저었다.
소심한 마법사가 말을 아끼자, 시녀는 혼자서도 씩씩하게 대화를 이어 나갔다.
“아사야 공주님께선 응접실에 계십니다. 먼저 여독을 풀길 원하시거든 방으로 안내하라 하셨습니다.”
“방이요?”
폼의 눈이 둥그렇게 커졌다. 짧은 머리칼 덕에 둥글게 드러난 두상하며 커다란 눈동자까지, 고위 마법사라기보다 겁 많은 강아지 같은 그녀였다.
“저한테 방이 있나요? ……왕성에요?”
떨리는 목소리로 폼이 묻자,
“예.”
시녀가 재깍 답했다.
“마법사님께선 베데르 성의 첫 손님이십니다.”
귀족들은 물론이며 전 국민이 모두 아는, 전설의 ‘베데르 성’도 난생처음 들어 보는 폼이었다. 잔뜩 놀라고 당황한 채 폼은 시녀의 뒤를 쫓았다.
손님이 저보다 앞서 걸으려 다가올 때마다 사라와 유라는 발걸음을 보다 빨리했다. 시녀 된 도리로 안내받는 손님보다 뒤처져선 안 되는데, 폼이라는 마법사는 너무 빨랐다. 축지 마법이라도 쓴 게 아닐까 의심될 정도였다.
“고, 공주님이 절 기다리고 계시다고요?”
기어코 시녀들의 틈새를 비집고 나란히 걸으며, 폼이 물었다.
덕분에 사라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공주님의 설명으로는 ‘매우 귀한 손님’이며 ‘신경 써 맞이해야 할 고위 마법사’라 하였는데, 직접 만나 보니 폼이라는 여자는 부엌데기 하녀보다도 소심하고 위축된 여자였다.
“……그럼 당장 가서 뵙는 게 순서가 아닐까요? 제가 어떻게…… 베데르 경의 따님을 기다리게 할 수는…….”
사라와 유라는 서로의 얼굴을 훑어본 다음, 폼을 물끄러미 올려다봤다. 그제야 폼은 결정권이 제게 있음을 되새겼다.
손님 된 도리로 폼이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공주님께 데려다주세요.”
꼬질꼬질한 행색의 괴짜 같은 손님을, 시녀들은 공주의 응접실로 안내했다.
두 소녀가 응접실 문을 연 순간, 폼은 제 결정을 후회했다. 김이 오르는 찻잔을 두고 창가에 앉은 아사야 세일산 앞에서 그녀는 길가의 나뭇가지가 된 기분이었다.
‘안 돼…….’
비현실적인 감각이 폼을 에워쌌다. 그런 공포는 난생처음 느껴 보았다. 아사야 세일산이 제 초라한 행색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폼의 숨이 조였다.
심장이 난폭하게 뛰어 댔다. 베데르의 딸, 아사야는 눈이 부시게 아름다웠다. 엘프가 아닌 인간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지경이었다. 세계수가 공을 들여 빚은 듯한 작품, 그것이 아사야 세일산의 첫인상이었다.
“고, 공주님을…….”
폼이 허리를 깊이 숙였다. 심장에 붙은 불이 순식간에 뺨으로 번졌다. 두 볼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공주님을 뵙습니다…….”
떨리는 손으로, 폼은 제 얼굴을 가린 로브를 걷었다. 아사야의 눈동자가 손님에게로 향했다. 여신들이 서로 갖겠다며 경쟁하던 황금 사과를 두 눈에 박아 넣은, 별 같은 눈길이었다.
그렇게 반짝이는 눈동자가 고작 저를 담는 것을, 폼은 견딜 수가 없었다. 시골 소년처럼 삐죽삐죽 짧은 머리칼과 깡마른 목, 화상 흉터로 뒤덮여 시뻘건 손이 창피했다.
폼은 제 심장이 퍼레지는 것을 느꼈다.
만인의 시선을 앗아 가는 발간 입술을 열어, 아사야가 말했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이 많았어요.”
그 목소리에 폼은 온 마음을 빼앗겼다. 제 심장 안의 어지러운 피가 아사야를 향해 쭉 쏠리는 기분이었다. 차분하고 조곤조곤한 음성은 밤새도록 듣고 싶을 만치 좋았다. 또박또박한 말소리에 상냥한 성정이 묻어났다.
붉어진 눈으로 폼이 그녀에게로 주춤주춤 다가갔다. 아사야의 맞은편 자리의 화려한 의자를, 시녀가 빼내 주었다. 제 초라한 몸을 공주 앞에 감히 앉히고 싶지 않았지만, 폼으로선 힘이 없었다. 두 다리가 바들바들 떨려 주저앉기 직전이었다.
“가디는 내게…… 절대로 당신을 만나지 말라 그러더군요.”
아사야가 말했다.
‘가디’라는 애칭이 가디엘 아졸을 뜻함을 알고, 폼이 고개를 푹 숙였다. 낯선 향이 나는 찻잔이며 입에 넣기 황송하게 예쁜 디저트가 그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아버지와 간통한 여자라고요.”
뒤이은 말에 폼의 어깨가 파드득 떨렸다. 화살에 맞은 새처럼 몸을 떨며 폼은 울먹였다.
“베…… 베데르 경의 명예에 누를 끼칠 마음은 추호도 없습니다. 전…… 저는 그런 것은……. 저는 아무것도 욕심내지 않아요, 믿어 주세요.”
베데르의 딸마저 저를 마녀라고 몰아붙인다면, 폼은 더는 살 수 없었다.
기사 집안의 명예가 얼마나 고지식하며 까탈스러운 것인지 폼도 알았다. 전장에 떠도는 소문만큼 악질적인 것이 없단 것도 알았다. 그렇기에 그녀는 저를 혐오하던 가디엘 아졸의 눈짓을 이해했다.
세상에는 이해할 수 없더라도 인정은 해야 하는 윤리들이 있었다.
그 윤리를 지키기 위하여 폼은 단 한 번도, 그 누구의 앞에서도 베데르의 이름을 입에 올린 적 없었다. 지난날의 영광은 한여름 날의 꿈처럼 묻었다.
그런 마법사에게,
“상관없어요.”
베데르의 딸이 말했다.
“폼. 내가 찾은 이는 ‘영웅 베데르와 어떤 관계였던 여자’가 아니에요. 마도구를 설계한 고위 마법사죠. 그게 당신인 걸 알아내기가 무척 어렵더군요.”
한순간에 폼은 무기력해졌다. 그녀는 제 몸의 떨림조차 억누르지 못했다. 어떠한 큰 그리움, 미약한 감격, 기쁜 놀라움이 그녀를 떨게 만들었다.
만인이 존경하고 제가 사랑했던 영웅 베데르의 죽음을 목격한 폼이었다. 전 국민이 그것을 숭고한 희생이라 칭했지만 폼에게 그것은 자살이었다. 남겨질 이들의 고통을 염두에 두지 않은, 명예만을 위한 자살.
베데르 아졸이 제 두 팔에 안겼었다. 그의 육신이 뜨거운 고통과 함께 잿더미가 된 순간, 폼은 그와 함께 제 일부 역시 떨어져 나갔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죽어 버린 제 영혼의 일부는 영원히 회복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 땅 위에, 베데르의 기척이 남아 있었다.
“마녀든 범법자든 상관치 않네. 내게 필요한 건 유능한 마법사일 뿐이야.”
아사야 세일산의 눈을 본 순간 폼은 데자뷔를 느꼈다. 그 옛날, 베데르 아졸을 처음 마주하던 감각이 폼을 끌어안았다.
폼의 두 눈에, 베데르의 현신이라 불릴 자식은 가디엘 아졸이 아니었다.
“내 아버지는…… 완벽하지 않은 사람이었어요.”
그와 쏙 빼닮은 마나로 전신을 빛내며, 아사야가 말했다.
“그분께서 노력하신 모든 일이, 아주 좋지만은 않았어요.”
공주의 말에 당황하면서도 폼은 그녀에게 공감해 버리고야 말았다. 베데르 아졸은 폼의 인생에 가장 아름다운 기억이자 동시에 가장 잔인한 상처였다.
“……그걸 인정하는 데에 나도 오랜 시간이 걸렸어요. 가디로서는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더 힘들 거예요. 그러니, 내 오빠를 너무 미워하지 말아 주세요. 추방령에 대해서는 내가 대신 사과할게요.”
‘미안해요’, 아사야가 속삭였다.
모순된 순간에 폼은 샌드위치 속 햄처럼 갇혀 버렸다. 그 누구도 해 주지 않던 사과를, 결단코 제게 잘못한 것 없는 이가 대신했다.
“폼이 내 아버지와 어떤 관계였든지…… 그 책임을 물을 생각은 없어요. 난 당신에 대해 전혀 모르니까요.”
울렁거리는 속을 억누르며 폼은 아사야를 바라보았다.
스물한 살의 해를 얼마 남기지 않은 아사야 세일산은 폼보다 열 살은 더 어렸고 작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폼은 그녀에게서 위안을 얻고야 말았다. 그녀 앞에 어린아이는 오히려 자신인 듯했다.
티 없이 희고 깨끗한 손을, 아사야가 뻗었다. 그녀의 따듯한 손이 제 차갑고 시뻘건 손등을 쥔 순간 폼은 팔을 떨었다.
“하지만 이제는 알아 가야 되겠어요.”
화상 흉터로 우둘투둘한 손을, 아사야가 소중히 감싸 쥐었다.
“그러니 답해 주세요.”
베데르의 딸이 말했다.
“내 드래곤의 마도구를 찾고 개방시켜 줄 수 있나요?”
폼에게는 아사야 세일산의 존재 자체가 반칙처럼 느껴졌다. 그런 손길, 그런 눈빛으로 그렇게 말해 오면 누구라도 그녀의 제안에 거절할 수 없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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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사님의 목욕을 돕겠어요.”
열의를 빛내며 시녀들이 말했다. 두 소녀가 달라붙어 로브를 벗겨 내는 통에 폼은 정신이 조금도 없었다. 살면서 누군가 탈의를 도와주는 것도, 제가 씻는 내내 말동무가 되어 주는 일도 처음이었다.
알몸을 보이기 부끄러움에도 폼은 시녀들의 도움을 거절하지 못했다. 어린 소녀들이 들려주는 이야기 모두가 그녀에겐 새로운 정보이기 때문이었다.
폼이 치료술사 일을 하며 숨어 지내는 동안 세상은 많이도 변해 있었다.
영웅 베데르에게 헌정된 성에 드래곤이 살고 있음을 알고, 폼은 기절할 뻔했다. 베데르의 따님께서 그 드래곤을 타고 날기까지 했단 소식에 심장이 발밑으로 떨어지는 듯했다.
수도의 어린아이조차 아는 얘기를 폼만이 몰랐다.
“드래곤을…… 길들이셨단 말이에요? 베데르 경의 따님께서?”
“네, 그게 바로 우리 공주님이시지요.”
시녀들이 그 사실을 자랑스레 읊조렸다.
“그뿐만이 아니에요. 그 드래곤은…….”
주근깨 많은 시녀, 사라가 입을 열자,
“쉿.”
유라가 경고하듯 속닥거렸다.
“그만 말해. 마법사님께서 피로해하시잖아.”
이내 두 시녀들은 마법사의 깡마른 등을 부드러운 수건으로 닦아 주는 데에 전념했다. 덕분에 폼은 충격과 상념에 잠겨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다.
폼에게 드래곤은 해치워야 할 마물에 불과했다. 2차 마물 대전이 벌어지기 전까지만 해도, 그녀에게 드래곤의 심핵이란 파괴해야 할 실험체였다. 이 세계에 ‘죄 없는 마물’ 따윈 없었다.
‘존재 자체로, 악.’
그것이 드래곤이었다.
수천 년의 세월을 이어 온 역사가 그렇게 외치고 있었다. 광산과 화산, 하다못해 심해 깊숙이 똬리를 틀고 누운 드래곤들은 궁극의 악당이자 재앙이었다. 언제 갑자기 터질지 모르는 지진, 용암, 해일 같은 존재, 자연이 낳은 재해…… 그것이 드래곤이었다.
베데르 아졸은 그가 지키고 그의 자식들이 살아갈 대륙에서 드래곤을 완전히 몰아내기를 원했다. 그의 소원대로, 폼은 마도구를 개발했었다. 그렇게 전쟁이 벌어졌고 승리했다.
그런 드래곤을, 베데르의 딸이 보듬었다.
“공주님께서 신경 써 주문하신 옷이에요.”
시녀의 목소리가 폼의 넋을 붙들었다.
기쁜 듯 허리끈을 묶어 주는 어린 손을 폼은 멍하니 내려다봤다. 부드럽고 하얀 셔츠와 말끔한 우단 바지가 공주님의 손님, 남성처럼 바지 착장을 고집한다는 괴짜, 고위 마법사에게 지급됐다.
그러나 폼에게는 그 친절에 감탄할 여유가 없었다.
‘설마…… 아닐 거야, 공주님의 드래곤이…… 그는 아니겠지.’
불안한 죄의식을 안은 폼을, 시녀는 베데르 성으로 안내했다.
아름다운 유리 정원 안에 아사야 세일산이 있었다. 인공적으로 구축해 낸 작은 생태계 숲에, 요정처럼 선 아사야를 마주하며 폼은 뻣뻣하게 얼어붙었다.
이내 두 시녀가 성의 문을 활짝 열었다.
그 순간 폼은 작게 탄식했다. 아니기를, 부디 아니기를 바랐지만 그녀의 예상은 어긋나지 않았다.
성문 안에 몸을 둥글게 말고 누운 드래곤은 검정색이었다. 박살난 심핵과 빼앗긴 마력으로 인해 몸집이 집채만 하게 줄어든 전설의 마물, 블랙 드래곤이었다. 별 없는 밤처럼 시커먼 비늘과 보라색 눈동자를 가진 마물을, 폼은 이미 알았다.
마도구를 시험하기 위하여 그의 동면을 깨운 것이 베데르의 기사들이었다. 그의 심핵을 파괴한 것이 폼의 동료들이었다. 그의 마력을 빼앗은 것이 다름 아닌 폼, 그녀 자신이었다.
“가브리엘.”
아사야가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와 제 이름을 알아듣고, 드래곤이 고개를 들었다.
“아…….”
폼은 탄식을 감추지 못했다. 베데르의 딸이, 제 아버지의 기사들이 해치고 제가 망쳐 놓은 짐승에게로 가뿐히 다가갔다. 그리고 두 팔을 높이 들었다. 그러자 가브리엘이라 불린 드래곤이 그녀의 팔 위에 턱을 기댔다.
가브리엘의 큼직한 머리를 껴안으며, 아사야가 미소 지었다. 그녀의 보드라운 입술이, 상처 입고 나약해진 드래곤의 볼에 닿았다.
의심할 것 없이 애정 어린 모습이었다.
“오늘 손님이 왔어.”
가브리엘의 귓가에 뺨을 비비며 아사야가 말했다. 그제야 드래곤의 보라색 눈동자가 붉은 팔의 마법사를 담았다.
이내 폼은 깨달았다. 아사야 세일산의 소환을 받은 것은 그녀 자신의 숙명이었다.
아사야가 그녀에게 건넨 것은 어떠한 부탁이나 요청 따위가 아니었다. 그녀 자신의 실수를 바로잡을 기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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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성의 소문은 쏜살처럼 빨랐다. ‘소문’의 가장 고약한 점을 묻는다면 누구나가 입을 모아, ‘그 소문의 주체만이 정정할 수 없음’을 꼽을 것이었다.
대체로 소문의 주어는 뻔했다. 제 이름 뒤에 세일산의 성씨를 붙인 여인들이었다.
왕성의 주된 이목은 소문을 따라 이리저리 옮겨갔다. 여름이 지날 때까지만 해도 둘째 왕자와 사랑에 빠진 아사야 세일산이 화두에 올랐다. 가을 즈음에는 그녀의 드래곤이 화제였다가, 뒤이어 블란테 세일산과 첫째 왕자의 결혼 생활에 관한 뜬소문이 돌았다.
오늘, 소문의 주어는 다시 아사야 세일산이었다.
그녀가 불러들인 비밀스러운 손님이 베데르 성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그 손님이 머리가 짧고 바지를 입는 탓에, 혹자는 남자라고 주장했으며 누군가는 다른 명칭으로 그 손님을 불렀다.
마녀. 직위에 비하여 명성이 없는 여자. 붉은 팔의 마법사.
‘드래곤을 길들인 공주.’
그것만으로도 아사야의 입지는 확고했다. 야베스 세일산의 아내가 지닌 확고한 입지는, 누군가에겐 위협이었다.
귀족 사회의 정치란 그렇게 흘러갔다. 내게 위협이 되는 존재의 약점은 곧 무기였다.
베데르의 딸을 공격할 기회는 그리 흔치 않았으므로, 오늘처럼 그녀의 행동이 모호한 때만큼 시기적절한 때도 없었다. 대다수 귀족들이 혈안이 되어 무기를 챙겨 들었다.
아사야 세일산에게 직접적으로 가해지는 위해는 없었다. 다만 그리되도록 왕의 등을 떠미는 말과 글들이 있을 뿐이었다.
태양이 높은 자리를 찾아가는 점심, 두 하인이 아사야를 찾았다. 하나는 외모가 멀끔하고 말투가 반듯한 남자였고, 다른 하나는 입을 꾹 다문 작은 소년이었다. 두 사람 모두가 사렙탄 세일산의 전령이었다.
“왕께서 뵙기를 원하시니 알현을 청하십시오.”
개중 키 큰 하인이 말했다.
읽던 시집을 얼굴 밑으로 내리며, 아사야가 그들을 잠깐 살폈다. 왕께서 뵙기를 원하신다는 전언은 자주 들어 온 공주였다. 그러나 곧바로 호출하지 않으시고, 알현을 청하란 경우는 처음이었다.
예를 갖추고 절차를 밟길 원하심에는 이유가 있을 터였다. 오늘 만남이 제게 편치만은 못할 거란 경고였다.
아사야는 못다 읽은 시집의 책장을 넘겼다. 여유로운 척 행세하며 생각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전령들이 왕의 집무실로 돌아갈 적에는, 공주의 반응까지 보고할 게 분명했다.
“폐하께서 직접?”
시집을 비스듬히 들어 제 얼굴이 보이게 한 뒤, 아사야는 미소 지었다. 언뜻 그 얼굴은 반가운 소식을 들은 사람처럼 보였다.
“알았어, 곧장 뵙겠다고 전해 줘요.”
그러자 하인이 그녀의 안색을 힐끔 살피더니 허리를 숙이고는 뒷걸음질로 물러났다. 그러던 중 둘 중 키가 작고 말수가 없던 하인이, 사라의 손을 스치듯 잡았다.
하인들이 빠져나간 방의 문을 유라가 닫았다. 편안한 기색으로 시를 읽는 시늉하다가, 아사야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미사여구가 가득 실린 시집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엠마오, 나 드레스를…… 아니, 아니야…….”
아사야는 창가로 다가가 섰다. 겨울을 알리던 찬비가 그친 하늘은 푸르고 높기만 했다. 이마를 매만지며 갈등하는 왕자비를, 두 시녀가 불안한 듯 올려다보았다.
서성거리는 아사야의 곁으로, 사라가 조심스레 다가갔다.
“공주님.”
그러곤 제 손에 쥐어진 쪽지를 내밀었다.
“좀 전에, 생벙어리가 이걸 제게 주고 갔어요.”
시녀의 말에 아사야의 눈이 커졌다.
“생벙어리라니?”
“키가 작고 수염 없는 하인 말이에요. 병자도 아닌데 말을 전혀 못 한대서 그렇게들 불러요.”
아사야가 쪽지를 받아 들었다. 빳빳하게 각을 지켜 두 번 접힌 쪽지를 펼치자, 안에 쓰인 글씨는 뜻밖에 나젤탄어였다.
전일 폐하께서 보고를 받으신바,
가디엘 경의 왕성 출입과 공주의 도서관 이용 기록을 확인하심.
마도구 조사와 마법사의 기거를 허용하지 아니할 예정.
쪽지 속에는 아사야가 품은 의문의 모든 답이 있었다. 폐하께서 무얼, 어디까지 알고 저를 부르신 것인가 하는 문제의 답이었다. 정답은, ‘모두 다’였다.
‘그러니 거짓 핑계나 변명은 하지 않는 게 낫겠어…….’
이내 아사야에게 새로운 의문이 생겼다.
‘왜 생벙어리라는 하인이 나에게 정보를 주지?’
말을 못 하는 하인이라고 글도 못 쓰란 법은 없었다. 그러나 그 글이 나젤탄어라면 상황이 달랐다. 나젤탄어를 적은 쪽지를 공주에게 건네자면 수준 높은 교육을 마쳐야 하였으며, 공주가 그것을 읽을 수 있음을 알고 있어야 했다.
언어에 능통한 귀족 출신에 제 외국어 솜씨를 알고, 사렙탄 세일산에 관한 전일의 소식을 전해 줄 수 있는 이. 그런 이는 왕성 내에 한 사람뿐이었다.
‘비아탄 경…….’
받은 쪽지를, 아사야는 찻잔 속에 담갔다. 티스푼을 젓자 쪽지 속의 잉크가 뿌옇게 번졌다. 누구도 읽지 못하게 망친 것이었다.
“오전에 야베스 왕자님께서 오찬 모임을 가지셨다지?”
아사야가 묻자,
“네, 공주님.”
두 시녀가 얼른 다가와 섰다. 공주님이 내리시는 어떤 심부름이라도 해내겠다는 의지로 가득 찬 채였다.
“내게 드레스를 가져다줘. 왕자님의 옷과 같은 색이어야 해. 목이 긴 장갑과 말끔한 바지 정장도 한 벌 필요해.”
이어지는 명령을 사라와 유라는 꼼꼼히 머릿속에 집어넣었다.
사라보다 두 살 많은 유라는 언니로서 조금 더 똑똑했고 눈치가 빨랐다. 이를테면 사라가 유리 온실 앞에서 보았다는 ‘특이하게 잘생긴 남자’를 의심하고, 그의 정체가 무언지 추리해 낼 수준이었다.
유라에 비해 어리숙한 탓에 사라는 아는 것이 적었다. 덕분에 왕성을 오가는 심부름꾼에게 두 번이나 사기를 당했다. 폴리모프한 드래곤을 보고도 그저 잘생긴 남자와 대화했다며 신나 했다.
공주께서 속뜻이 빤한 명령을 내리셔도,
“저…… 장갑이랑 바지는 왜…….”
어리둥절한 얼굴로 되묻는 사라였다.
다행스러운 것은 아사야 세일산이라는 주인께서 무척 관대하며 상냥하단 부분이었다. 그녀는 시녀장처럼 매몰차지 않았고, 사라를 바보라고 부르거나 멍청한 개 취급하지 않았다.
“폼도 채비해야지.”
시녀를 꾸중하는 대신 아사야는 덧붙여 설명하길 택했다.
“사라, 네가 가서 모셔오도록 해. 폐하께 내 손님을 소개드려야 할 테니.”
마저 떨어진 명령에, 두 시녀의 발이 바빠졌다.
.*. *. *. *. *. *.
알현실 앞에 설 적에 폼은, 몸에 꼭 맞는 정장 바지와 각진 칼라가 달린 셔츠를 입고 있었다. 삐뚤빼뚤하던 것을 가위로 정리한 덕에 머리칼도 반듯했지만, 안색만큼은 도살장의 양처럼 푸른색이었다.
대륙의 왕을 만난다는 사실만으로도 폼은 오들오들 떨기 바빴다. 긴장하다 못해 겁을 집어먹은 마법사의 손을, 아사야가 붙잡았다. 그러고는 화상으로 뒤덮인 빨간 손에 장갑을 끼워 주었다.
폐하와 직접 대화할 필요는 없게 할 테니 염려는 마시라는 다정한 말도 뒤따랐다. 그러나 아사야의 곧은 음성은 폼의 왼쪽 귀로 들어갔다가 오른쪽 귀로 빠져나와 버렸다.
“네, 네…….”
그저 그렇게 중얼거리며, 폼은 공주의 뒤를 시녀처럼 쫓았다.
“폐하.”
높다란 문이 열리고 드러난 알현실은 화려하기 짝이 없었다. 돌벽보다 창이 많아 사방에서 햇볕이 쏟아졌고, 제가 곧 천지라는 듯 자리한 왕좌에는 사렙탄 세일산이 앉은 채였다.
예를 지키며 아사야가 그 앞에 걸어가 섰다. 그러고는 인사했다. 허리를 숙이며 드레스를 쥔 손을 우아하게 굽히는 것이 움직일 줄 아는 인형 같았다.
알현실 우측에 선 비아탄이 아주 작은 고갯짓을 보였다.
평소와 같았더라면 아사야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풀렸을 사렙탄이었다. 그러나 오늘, 그는 공주를 위해 웃어 주질 않았다. 아사야와 그녀의 뒤에 선, 누구인지 알 길 없는 깡마른 여자를 번갈아 훑어볼 뿐이었다.
한발 늦게 폼이 허리를 깊이 숙였다. 정수리가 바닥에 닿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다. 알현을 청한 아랫사람이 모두 인사를 마치자, 그제야 사렙탄이 입을 열었다.
“내게 무어, 전할 소식이 없더냐?”
그러자 아사야가 고개를 반짝 들었다. 일순, 비아탄의 안색이 나빠졌다.
편의를 봐준 대가로 제게 충성을 맹세한 하인이 있었고, 그 하인이 전한 쪽지가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아사야 세일산은 어떤 힌트도 받지 못한 사람처럼 맹한 얼굴이었다.
‘일이 잘못되었나.’
침묵하며, 비아탄은 아사야의 낯을 살폈다.
왕의 질문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처럼, 아사야의 얼굴에 당혹감이 번졌다. 조그마한 머리를 숙이며 그녀는 이리저리 시선만 굴렸다. 제 입지를 챙길 줄 알던 똑똑한 아가씨는 어디에도 없었다.
공주가 어떤 변명도 꺼내질 않자 사렙탄의 눈썹이 삐뚜름해졌다.
“……가디엘 아졸이 다녀갔단 말을 들었다. 맞느냐?”
왕께서 하문하셨다. 그러자 아사야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반짝거리는 눈동자를 아이처럼 빛내며, 이제야 문제가 무언지 알겠다는 양 대답했다.
“바쁜 중에 제게 책을 전해 주겠다며 다녀갔어요. 폐하를 알현할 새도 없이 떠난 걸로 알아요. 영지 북부에서 예티의 흔적이 발견되어 토벌대를 꾸렸다네요.”
또박또박 설명이 뒤따랐으나 사렙탄이 기대한 말과는 달랐다. 황당함을 감추지 못하며 사렙탄이 눈을 가늘게 떴다.
“공작이 인사하지 않고 떠나서, 내 그래서 화난 것으로 보이느냐?”
하문이 뒤따르자 아사야가 입을 벙긋거렸다. 그럼 무어가 문제냐는 듯 의문스러운 표정과 함께였다.
답답한 듯 사렙탄이 이어 말했다.
“네 오빠가 전한 서적이라는 게 마법 서적과 설계도라 들었다.”
“예, 맞습니다.”
아사야가 재깍 답했다.
“……네가 왕실 도서관을 드나들며 마도구를 조사한다 들었어. 모든 게 사실이냐? 네 예물. 그 물건 때문에 마도구를 파헤치고 있는 게야?”
‘그 물건’이란 가브리엘을 칭하는 소리였다. 왕께서 추궁하면 할수록 아사야는 뻔뻔한 고양이처럼 행동했다. 더욱이 무어가 문제인지 모르겠다는 양, 고개를 모로 갸웃거린 것이었다. 그리고 대꾸했다.
“네, 사실이에요.”
비아탄은 물론이며 사렙탄의 눈빛마저 흔들렸다.
저는 어떤 죄도 짓지 않았다는 양, 아사야는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그리고 이어 말했다.
“그뿐만이 아니에요, 폐하. 제가 마도구의 설계자를 찾았어요. 베데르 성에 손님으로 초대하여 방도 내주었어요.”
그저 하문을 하시니 대답을 해 드리겠단 태도였다. 반짝이는 눈동자며 주름 한 줄 지지 않은 말간 얼굴이, 심란한 왕을 올려다봤다.
“허…….”
사렙탄이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어여쁘고 똑똑하던 공주가 천둥벌거숭이인 양 해맑게 제 행실을 고하니, 어디부터 잘못을 지적해야 할까 골머리가 아려 왔다.
“어찌 그리 당당히 말할 수가 있어. 너도 알 게 아니냐, 드래곤이 얼마나 영악하고 포악한지를.”
“물론이에요.”
시계 초침처럼 빠른 아사야의 대답이,
“그러니 마법사를 곁에 두고 통제해야죠.”
마침내 본론으로 접어들었다.
이번에, 사렙탄은 따로 질문하지 않았다. 입을 다문 채 제가 들은 말을 받아들이기 바쁜 그였다.
여태껏 사실을 있는 그대로 고하던 아사야 세일산이었다. 그런 공주의 입에서 나온 마지막 문장은, 왕께서 보고를 받고 들어 온 의심과는 전혀 달랐다.
“폐하, 저는 도통…… 무엇 때문에 심기가 상하셨는지 알아채지 못하겠습니다. 제가 모르는 이야기가 더 있다면 알려 주시겠어요? 도대체 무슨 소문이 돌기에…… 이렇게 추문하시는 건지…….”
추궁을 받아 대답하는 아사야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반듯하게 뻗고 있던 고개 역시 서서히 내려갔다. 명랑하고 밝던 안색에 그림자가 졌다.
몇 초간 말을 아끼다가, 아사야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예, 제가 마도구에 대해 조사하였습니다. 설계도도 받아 들여다보았어요. 마도구의 통제가 얼마나 완벽한지 안심할 수 없어 그리하였어요.”
선명하고 곧은 눈썹이 비스듬해졌다. 맑고 강인하던 눈동자도 흐려진 듯 보였다.
“……마도구를 설계해 낸 마법사를 만나 뵈시면 기뻐하실 거라 생각했습니다. 오늘, 그래서 저를 뵙길 원하신 줄 알았어요. 해서 마법사를 데려온 것인데…….”
이내 아사야는 손을 들어 제 입가를 매만졌다. 그럴 적에 그녀는, 금방이라도 소설 속에서 튀어나온 인물 같았다. 아사야 세일산은 오명을 뒤집어쓰고, 제가 벌이지 않은 죄로 공격을 받아, 이리저리 휘청거리는 가여운 여주인공이었다.
“제가 너무 순진했군요.”
‘맙소사…….’
비아탄이 내심 탄식했다. 오늘 알현을 어떻게든 헤쳐 나가리라 믿었던 공주였다. 그런들 마녀를 내쫓고 도서관의 출입을 금하겠다던 사렙탄의 뜻을 거스를 순 없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가 틀렸다. 아사야 세일산은 비아탄 아멕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남자를 잘 다뤘다. 그것이 대륙의 왕이건 천지의 주인이건 관계없었다.
그가 저를 어떻게 보고 있으며 저로부터 무엇을 원하는지 읽어 내는 것. 그게 아사야 세일산의 생존 방식이었다.
“마도구를 설계한 게…… 저 여자란 말이냐?”
이제 왕의 관심사는 공주가 저지른 잘못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이름은 폼이에요. 마법사의 땅에서 떠나온 고위 신관이며, 참전 영웅이지요.”
그의 시선이 폼에게 닿자, 아사야는 기다렸다는 듯 그녀를 소개했다.
“폼은…… 마지막까지 전장에 남았던 마법사예요. 아버지의 임종을 자식 대신 지켜 준 동료였어요. 폐하께서 헌정하신 베데르 성에 모셔야 할 손님을 꼽으라면, 누구보다도 폼이 어울린다고 생각했어요.”
뱉는 말 사이사이에 드문드문, 입을 다물고 숨을 고르는 시간이 섞였다. 할 말을 꾸리기에 생각이 모자라서는 아니었다. 그래야 제 말에 감정을 싣기가, 그 감정을 호소하기가 수월하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그러면 아버지께서도…… 기뻐하실 것만 같아서…….”
이내 비아탄마저 헷갈리기 시작했다. 그조차 아사야의 설득에 휘청거렸다.
누가 보더라도 아사야에게는 죄가 없었다. 당장 사렙탄의 등을 떠민 신하들조차 이 자리에 섰더라면, 공주께서 정말로 아버지를 위해서, 역사에서 밀려난 마법사의 명예를 위해서, 드래곤을 완벽하게 통제하기 위해서 오늘 알현실에 선 것이라 믿을 터였다.
거짓된 소설을 알아내기란 쉬운 일이었다. 그러나 그 거짓이 단 한 줄로 압축되어 사실 속에 스며들 경우,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졌다.
“폐하의 은혜에 제가 너무 들떴었나 봐요. ……물의를 일으켜 송구합니다. 부디 용서하세요.”
마지막까지 아사야는 선량하고 어린 왕자비였다.
사렙탄이 작게 탄식했다. 답답한 마음에 먼저 뱉은 추궁이 창피하게 느껴졌다. 뜬소문을 듣고, 아사야 세일산이 철부지 공주인지라 제 드래곤의 마력을 돌려주려는 줄 알았다.
가디엘 아졸에게 서신을 보내 하문했을 때 결단코 그럴 리 없다는 확답을 받긴 하였다. 그러면서도 곁에서 종종대는 신하들의 말소리에 귀가 가려웠던 사렙탄이었다.
막상 얼굴을 마주하고 이야기를 들어 보면, 그녀만큼 설득력 있는 존재가 없었다. 사렙탄은 아사야의 이야기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아사야가 들려준 이야기는 또한 그가 듣기를 원했던 말이기도 했다.
‘베데르의 임종을 지킨 마법사라고…….’
그의 시선이 힐긋 폼에게로 향했다.
소년처럼 마른 몸에 길쭉한 팔다리를 가진 마법사는, 짧게 깎은 정수리가 보이도록 고개를 숙인 채였다. 잘못한 일 없이 숨기 바쁜 그 신세가 처량하게 내려다보였다.
“흠…….”
사렙탄의 귓불이 붉어졌다. 시답잖은 소리들에 잠깐이나마 현혹된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저도 선왕처럼 늙어 가는가 싶었다. 주름이 질 때마다 머릿속이 둔해지고, 누구의 말을 걸러야 할지 모르게 되어 가나 싶었다.
적어도 그가 느끼기에, 아사야 세일산으로부터 느껴지는 것이라곤 온전히 선의뿐이었다.
“공주야.”
주름진 손으로 제 이마를 짚으며 사렙탄이 말했다.
“괜찮으니 고개를 들어라.”
왕의 음성이 부쩍 상냥해졌다.
아사야는 제 건조한 눈 밑을 살짝 닦는 시늉했다. 묻어나는 것은 손바닥에 고인 식은땀뿐이었다. 말 한마디를 잘못 보탰다가는 사렙탄의 눈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도 있는 상태였다. 심장이 덜컹거리고 토기가 목구멍에까지 차올랐다.
“고개를 들래도.”
사렙탄이 덧붙여 말했다. 아사야는 탁한 목구멍으로 침을 넘기며 얼굴을 들었다. 긴장감으로 발개진 얼굴이 안쓰러운지, 사렙탄이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혹여나 하던 의심을 씻어 내려 홀가분한 마음으로 그가 말했다.
“그래, 직접 들여다보니 어떻더냐. 마도구에는 문제가 없더냐?”
왕께서 건넨 질문에 아사야의 두 눈이 커졌다. 저도 모르게 그녀는 비아탄을 힐끔 살폈다가, 다시 왕의 웃는 얼굴을 보았다가, ‘아’ 하고 입을 열었다.
마도구를 들여다보기는커녕 그 물건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모르는 채,
“아니요, 날만 잡아 두고는 아직…….”
아사야가 대답했다. 그럴싸한 문장으로 꾸려 답하자, 사렙탄은 제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그래, 그럴 만도 하지.”
그리고 중얼거렸다.
“야베스 그 녀석이, 애지중지 아주 박제를 해 뒀으니 말이야.”
아사야는 폼의 시선이 조심스레 제 옆얼굴을 담는 것을 느꼈다. 배 앞으로 모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두 손을 꽉 붙든 채 아사야는 애써 입꼬리를 올렸다.
미소를 지으며 그저 고개를 끄덕일 적에 마음 안엔 혼란이 가득했다.
둘째 왕자와 결혼할 적에 필요한 예물은 전부 챙긴 줄로 알았건만 아니었다. 아직 받지 못한 제 것이 야베스 세일산의 손에 있었다.
.*. *. *. *. *. *.
베데르 성에 거주하는 드래곤과 마법사 사이에는 어떤 교류도 없었다.
드래곤은 붉은 카펫이 깔린 자리에 엎드린 채 책을 보거나, 이따금 망루에 올라 바람을 쐬며 하루를 보냈다. 마법사의 행동반경은 그보다 훨씬 협소했다. 그녀는 제게 배정된 침실에 틀어박혀 한 발짝도 나오질 않았다.
아사야 세일산이 주인이신 베데르 성에 제 침실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운 폼이었다. 공주에게 은혜를 갚고 영웅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폼의 침실은 난장판이 됐다.
푹신한 침대는 책과 서류로 뒤덮였고 화려한 창문틀엔 노트 조각이 덕지덕지 붙었다. 고급스런 카펫도 걷어버린 지 오래였다. 돌바닥 위엔 분필로 새긴 설계도와 수식만이 남았다.
“……를 실행하기까지 열의 수식, 이 수식을 검산하면……. 경우의 수는 서른여덟, 협회에서 내린 불가침 영역에 거슬리는 방식이 개중 열넷…….”
그런 폼의 침실은 베데르 성에서 가장 시끄러운 공간이었다.
이따금,
쿵, 쿵, ……쿵.
망루로 오르는 발소리를 들려줄지언정, 드래곤은 혼잣말은 않기 때문이었다.
폼은 분필을 쥔 손을 멈췄다. 우단 정장 바지 무릎이 분 자국으로 얼룩덜룩한 채였다. 문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집중하다가 그녀는 드래곤이 높이, 성벽 위를 오른 것을 알고 한숨 쉬었다.
“휴…….”
그러고는 적던 수식 위에 금을 그었다. 며칠 밤을 혼잣말로 새운 끝에 머리에선 김이 올랐고 목구멍은 칼칼해졌다.
공주님의 착한 시녀가 두고 간 물병을 집으려다, 폼은 손을 멈췄다. 마실 물도 먹을 빵도 동난 지 오래였다.
“필요한 것 있으시면 경비대원에게 부탁하시면 돼요! 그럼 하인을 불러 줄 거예요.”
사라의 말이 기억나긴 했다. 문제는, 블랙 드래곤이 버티고 있는 성의 중앙 공간을 지나갈 엄두가 나지 않는단 부분이었다.
그가 두려워서는 아니었다. 별수 없이 고개를 드는 미안한 감정 때문이었다.
‘마물……. 마물일 뿐인데, 드래곤은…….’
한편으론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폼은 알았다. 드래곤은 단순한 마물이 아니었다.
역사의 한 페이지에서는 전설적인 존재로 찬양을 받고, 그들을 모시는 교리를 지니기도 하였던, 드래곤은 품격을 지닌 종족이었다. 드래곤은 ‘그저 마물’이라 치부하려면 엘프도, 정령도, 인어도 마물이어야 했다.
대륙의 현 시대에 드래곤이 마물로서 취급되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드래곤은 엘프, 정령, 인어와 같이 인간에게 도움이 되거나 친숙한 존재가 아니었다. 그들은 위협이었고 재난이었다.
재앙의 씨가 되는 존재, 그를 처단하는 것이 정의이며 옳은 일이었다. 그렇기에 드래곤은 마물이었다. 마물이어야 했다.
‘마물…….’
그 마물의 눈치를 살피느라, 폼은 방문 앞에 바짝 붙어 섰다.
귀를 기울여도 드래곤의 발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어쩌면 유리 정원으로 나간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폼은 빈 물병을 챙겨 들었다. 그리고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터벅터벅 걷는 남자의 발소리와 함께였다.
베데르 성은 갖은 기술을 도입하여 건설해 낸 신축 건물이었다. 단연코 모든 방면에서 빼어났다. 방음 역시 훌륭하여 바깥의 소리가 안으로 스미지 않고 안의 소리 역시 밖으로 흘러나가지 않았다.
말인즉슨, 성내에 폼 이외의 다른 인간이 있단 뜻이었다.
“염려 말아요.”
폼은 아사야의 말을 기억해 냈다.
“가브리엘과 폼, 두 사람 외에는 경비대원도 마음대로 드나들 수 없는 곳이니까요.”
덕분에 마음이 서너 배 더 불안해졌다. 발소리가 2층을 지나 계단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베데르의 이름을 딴, 아사야 세일산의 성에 침입자가 있다…… 그리 생각하니 가만있을 수가 없었다.
폼이 문을 벌컥 열었다. 힘껏 주먹을 쥔 채였다. 화상으로 뒤덮인 그녀의 손바닥은 살이 여리고 피부 층이 얇았다. 손톱을 찌르는 것만으로도 살갗이 얼얼하게 찢어졌다.
생채기를 낸 두 손바닥을 내밀면서, 폼이 소리쳤다.
“무기를 내려놓고 투항하세요!”
그녀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간 불씨가 즉시 침입자를 향했다. 화살처럼 쏘아 보낸 불길을, 그가 돌아보았다.
그의 보라색 눈동자를 마주한 순간 폼은 작게 헐떡였다.
“헉…….”
마법사가 쏘아 보낸 불씨를, 그가 쳐 냈다. 짜증스러운 얼굴로 손을 휘두르자 불길이 그의 손안에 뭉쳐 바스라졌다.
두 눈을 크게 뜨고서 폼은 그와 그의 그림자를 번갈아 살폈다. 그의 피부는 말끔하였으나 시커먼 그림자는 그렇지 않았다. 사라진 불길이 그림자에 붙은 것이었다. 그마저 잠시간 바닥면에 붙은 채 일렁거리다, 이내 꺼졌다.
폼의 시선이 바닥에서 그의 발치로, 그리고 얼굴로 서서히 올라갔다.
“아…….”
민망함에 폼은 귀를 붉혔다.
무기로 생각하며 ‘내려놓고 투항하라’ 외친 것은 알고 보니 치아바타와 레몬청이 든 바구니였다. 침입자로 생각하며 제압하려 한 이의 정체는 드래곤이었다.
각자 무얼 하건 간섭하지도, 신경조차 쓰지 않고 지내온, 마법사와 드래곤이 그렇게 서로를 마주 봤다.
폼의 입장에서는 민망하기 짝이 없는 만남이었다.
“다…… 당신, 마력을 쓸 수 있군요.”
제 입에서 빠져나온 첫인사마저 형편없다 생각되었다. 그러나 ‘안녕하세요’ 하며 악수를 나누는 것보다도, 폼에게는 드래곤의 폴리모프 사실이 더 중요했다.
마법사의 호기심을 무시한 채 가브리엘은 계단을 마저 걸어 내려갔다.
“어느 정도죠? 얼마나 회복되었어요?”
그의 뒤를 쫓으며 폼이 물었다. 그녀가 쫓아오건 말건 가브리엘은 카펫 위에 자리를 잡고 바구니를 내려놓았다.
가브리엘은 바구니 속 음식들을 카펫 위에 꺼내 놓았다. 그의 어린 인간이 보여 주던 동작들을 모방하여 손수건이 먼저, 샌드위치가 그 위에, 바로 옆에는 책을 놓았다. 그리고 레몬청의 뚜껑을 돌려 열었다.
폼의 멍한 눈동자가 그를 관찰하고 있었다.
성가신 인간을 노려보며 가브리엘이 입을 열었다.
“네 도구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으니 염려할 것 없다.”
포악하기 짝이 없는 블랙 드래곤은 찾아볼 수 없었다. 폴리모프한 가브리엘은 너무나 사람다웠다. 자연스러운 행동과 따라오는 목소리를, 폼은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자연 회복된 게 아니라는 소리지.”
가브리엘이 덧붙여 말했다.
“…….”
입을 다문 채 폼은 그의 피부 위를 훑어보았다.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흑색 마나가 보이기는 하였지만 그뿐이었다.
그의 말이 맞았다. 폼의 마도구는 여전히 견고했고, 가브리엘은 빼앗긴 마력을 좀처럼 회복하지 못한 채였다.
드래곤은 편한 자세로 앉은 채 책을 집어 들었다. 그럴 적에 그의 셔츠와 바지는 깨끗했고 구김 하나 없었다. 오히려 뻣뻣하게 얼어붙은 채 누덕누덕한 차림인 쪽은 폼이었다.
저를 쳐다보지도 않는 그의 옆얼굴을, 폼은 조심스레 바라보았다.
“나도…… 어쩔 수 없었어요.”
느릿느릿, 폼이 입을 열었다.
“그땐 그렇게 생각했었죠……. 광산 아래에 터를 잡은 블랙 드래곤이 있다고 들었어요. 온 마을의 사람들이 당신을 피해 내쫓기고 있었고…….”
“나를 피해 내쫓겼다고?”
가브리엘이 코웃음을 쳤다.
“그게 네놈들의 문제야. 신의 사랑을 등에 업었다고 기고만장해져 날뛰는 꼴 하고는. 내가 지하에 자리를 잡기 전까지 그 땅에 광산 따위는 없었어.”
유려하게 쏟아지는 말소리가, 폼을 파묻어 놓았다.
“너희 개미들이 캐 가던 것이 나의 땀이고 나의 살이며 벗겨진 비늘이었다.”
‘개미’, 인간을 그렇게 표현하는 이는 그뿐이었다.
몰아치는 말에 폼으로서는, 정신을 차릴 새도 없었다. 가브리엘은 단순한 마물이 아님을 지나, 그녀 스스로를 천둥벌거숭이처럼 느끼게 하는 존재였다.
마음 같아서는 두 손을 모아 쥐고 제 방으로 도망갈 때였다. 보통의 인간이라면 그렇게 했을 터였다. 그러나 폼은 보통의 인간과는 조금 달랐다. 그녀를 살게 하는 것은 학구열이며, 낯선 것에 대한 호기심이었다.
“당신도…… 신을 믿나요?”
조심스레, 폼이 물었다.
그러자 가브리엘이 왼쪽 눈썹을 슬그머니 올렸다.
“아사야는 널 아주 천재로 믿고 있던데, 그렇지도 않군.”
그가 저를 성가셔하는 줄 알면서도, 폼은 그의 옆으로 조심조심 다가갔다. 카펫 자리에 슬그머니 무릎을 굽히자 가브리엘은 작은 콧김을 내쉬었다.
한숨까지 쉬니 그는 정말 사람 같았다. 그러나 눈동자는 무척이나 오래된 존재의 것이었다. 깊고 낮은 목소리도, 그런 목소리로 전하는 이야기 또한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우리의 땅, 우리의 바다, 우리의 산이야. 태초부터 우린 풀과 바람과 불과 물과 함께했어.”
조그만 아이에게 ‘엄마’라는 말을 가르치는 선생처럼, 가브리엘이 말했다.
“네놈들이 경애하는 신이 있다면 그게 우리라는 말이다. 네놈들이 죽이고 찢고 먹어 치운 고깃덩어리들 말이야.”
신전의 사제들이 들었더라면 얼굴이 벌게질 말이었다. 수도에서 하루만 벗어나도, 중대한 일을 신탁에 맡기는 이들이 수천, 수만이었다. 신을 보는 관점은 나라마다, 지역마다, 종족마다 달랐지만, 그들 중 누구도 가브리엘과 같이 말하진 않았다.
잠시간 머뭇거리다, 폼이 입을 열었다.
“마법사와 학자들은 어떻게든…… 이 세상이 만들어진 이치를 알아내고자 했죠. 나도 그들 중 하나였어요, 내 궁금증은 남들과는 조금 달랐지만…….”
폼에게도, 그녀만의 신이 있었다. 어떤 성별이며 어떤 모습일지는 떠올려 본 일이 없었다. 그녀에게 신이란, 힘들 때마다 ‘신이시여’ 하고는 마음 깊이 감춘 말을 되뇌는 존재였다.
“……왜 신께서 내 삶을 이렇게 만드셨을까, 나는 그게 궁금했어요.”
발간 손끝으로 제 바지의 무릎 주름을 만지작대는 것을, 가브리엘이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무런 의도도 없었던 거로군요.”
다친 손바닥을 제 옷깃에 문지르며, 폼은 머리를 깊이 숙였다. 그제야 마땅히 전해야 할 말을 할 용기가 났다.
“내가 실수했어요, 당신에게만은요.”
마법사가 사과했다.
“정말 미안해요.”
그러자 가브리엘은 치아바타를 감싼 종이 포장을 뜯었다. 그는 딱딱하게 구워 낸 빵을 입에 넣으며 책을 읽기 시작했다. 대화가 끝난 줄로 아는 눈치였다.
멀뚱멀뚱, 폼은 바보처럼 무릎을 꿇고 앉아 그를 바라만 봤다.
마법사가 제 방으로 사라지지 않고 버티기를 몇 분, 가브리엘은 그제야 이상을 눈치챈 듯 그녀를 흘겨보았다.
“어……, 보, 보통은 이런 경우에…… 사과를 받아 주거나, 받을 수 없다고 화를 내요.”
세상에서 가장 어색한 얼굴로 폼이 말했다.
“사과를 받아들이지.”
그러자 가브리엘이 즉답했다.
그에게 묻고픈 것도, 알려 줄 것도 많았지만 폼은 그럴 수 없었다. 가브리엘이 저를 쫓아내서는 아니었다. 갑작스럽게, 빵을 베어 물던 그의 입술이 시커멓게 갈라진 탓이었다.
“…….”
어떤 소리도 나지 않았지만 폼은 그가 신음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마법사의 기습을 쳐 내느라, 충분치 않은 마력을 분출한 부작용이었다. 삽시간에 가브리엘의 귀가 시커먼 비늘로 뒤덮였다.
삐죽삐죽, 날 선 검은 비늘이 뒷목에서 시작해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강제로 폴리모프를 해체당하기가 익숙한 듯 그는 놀란 눈치가 아니었다.
“너.”
반은 사람이며 반은 드래곤인 단계가 되어 가브리엘이 입을 열었다.
“그 팔…… 아직도 타고 있군.”
그제야 폼은 베데르 성의 방음이 출중한 이유를 알았다. 이제 드래곤의 목소리는 전과 같지 않았다. 벽을 긁는 듯 낮고, 사방을 때리는 메아리로 울리는 소리였다.
폼은 제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손톱으로 뭉개어 만든 생채기 밑에서 불씨가 일고 있었다. 매일 밤마다 치유와 봉인 마법을 걸어 제약해야 하는, 영원한 화상이 그녀의 팔에 있었다.
레드 드래곤이 죽은 뒤에도 그의 마력은 남아 있는 탓이었다. 마도구 속에 화염처럼 뭉친, 그 마석 안에 든 것은 레드 드래곤의 심핵이자 혼백이었다.
빼어난 마법사인 탓에 폼은 제 팔을 태우는 마력을 이용할 줄도 알았다.
“미안해요. 조금 전에는, 정말 침입자인 줄 알았어요…….”
그 화염을 다짜고짜 쏘아붙인 탓에, 폼이 두 번째 사과했다.
대답하는 대신 가브리엘은 목을 숙였다. 그의 손가락이 앞발이 되고 등을 찢으며 날개가 돋았다.
폼은 입술을 짓씹었다. 신체를 변화시키는 마법은 통제 가능할 적에는 편안했지만, 그렇지 못하여 강제로 변이될 적엔 고통스러운 법이었다. 그 아픔이 피부의 겉과 속이 뒤집히는 수준으로 끔찍해 너무 어리거나 나이 든 마법사들은 폴리모프를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에돔……, 그렇게 불리던 드래곤이었으니까요. 밤에도 그가 날아오르면 낮처럼 밝았어요. 서기들은 그 밤을 백야라고 기록했죠.”
고통으로부터 그를 조금이나마 벗어나게 하고자, 폼이 말했다.
“당신의 이름은 뭐죠?”
마법사가 묻자,
“가브리엘.”
용이 즉답했다.
“그렇게 불리기 이전에는…… 인간들이 당신을 뭐라고 불렀어요?”
그것이 마지막 질문이었다.
“발락.”
짧은 대답을 마친 뒤 가브리엘은 거대한 본연의 몸으로 돌아갔다. 카펫 자리에 네 발을 딛고 한숨을 쉬며, 그는 마법사로부터 고개를 돌렸다. 읽던 책은 이미 찢기고 뭉개진 뒤였다.
두 눈을 크게 뜬 채 폼은 그의 검은 꼬리를 바라보았다.
‘발락…….’
그 이름을 모르는 학자가 대륙에 없을 것이었다. 서기들은 두려움에 고정된 명칭을 붙이기를 원치 않았다. 수백 권의 책 속에 그는 다른 이름으로 쓰였다. 그는 악마, 멸하는 자, 황폐화, 증오의 그림자였다.
역사서, 신화, 전설, 소설. 형태는 달랐지만 담긴 글의 내용은 늘 같았다.
발락의 잠을 깨우면 천공이 검게 물들고 일만 개의 목숨이 꺼지고 땅의 주인이 바뀐다.
낮에도, 그가 날아오르면 암흑이라.
기나긴 동면에 들기 이전에, 그는 일식이었다.
‘베데르 경…….’
시커먼 마나를 기침처럼 토하며 가브리엘이 비늘 덮인 몸을 떨었다. 흉곽이 크게 부풀었다가 꺼졌다. 마지막으로 그는 힐긋, 성문을 살폈다. 그 시선의 의미를 폼은 쉽게 알아챘다. 혹 아사야가 거기에 있어, 앓는 제 모습을 보진 않았을까 살피는 것이었다.
사람의 모습을 유지하려 남은 마력을 깎아 쓰며, 아사야 세일산이 오기만을 기다리는, 그는 발락이었다.
‘우리가 무슨 짓을 저지른 거죠?’
폼은 작은 신음을 삼켰다.
.*. *. *. *. *. *.
아사야의 머리를 빗겨 주면서도, 어린 시녀들은 마음에 품은 걱정을 감출 줄을 몰랐다. ‘공주님께 쓸데없는 소리 말라’며 엠마오가 몇 번이고 덧붙인 당부도 무용지물이었다. 저들끼리 전전긍긍하며 눈짓을 나누다가, 결국 사라가 입을 열었다.
“폐하를…… 찾아뵈어야 하지 않겠어요?”
조마조마한 목소리였다. 아사야는 거울을 통해 제 옆머리를 빗는 사라를 힐긋 보았고, 엠마오가 한숨을 쉬었다. 달그락, 소리를 내며 유모가 귀걸이를 골랐다.
“왜?”
작게 실소하며, 아사야가 되물었다.
“그야, 이전의 알현이 그렇게 끝났으니까…….”
사라는 말미를 흐려 놓았다. 사렙탄 세일산과 아사야의 관계가 어찌 되건 간에, 그런 것은 시녀가 간섭할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제 주인의 일에 간섭하지 않는 시녀란 세상에 없는 법이었다. 주인의 입지가 곧 시녀들의 입지였고, 주인에게 벌어지는 사고가 곧 시녀들의 사고였다.
때문에 더는 왕께서 찾지 않으시고 저도 먼저 왕을 찾지 않는 공주님의 근황이 시녀들의 근심이었다. 폐하께서는 대륙의 절대자이신데, 그런 분과 공주님 사이의 관계가 서먹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폐하의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하겠지. 두 왕자님께서도 그렇게 하실 거고, 비아탄 경이라도 그렇게 하실 거야.”
걱정 많은 시녀들을 바라보며, 아사야는 거울 안을 들여다봤다. 엠마오가 금줄이 길게 늘어진 것과 문양이 세공된 작은 루비 귀걸이를 좌우로 들어 보였다.
“……그러니까 난 그러지 않으려고.”
말을 마치며, 아사야가 손짓으로 귀걸이를 골랐다. 선택받은 귀걸이는 금줄이 늘어진 화려한 물건이었다.
공주께서 착용하시는 귀걸이만 보아도, 엠마오는 그날의 일정을 알아차렸다. 드래곤을 만나고 느지막한 오후를 보내는 날이면 아사야는 최대한 조그맣고 편한 보석을 걸치곤 했었다.
“오늘은 베데르 성에 방문하지 않으시려고요?”
아가씨의 목에 목걸이를 걸어 주며, 엠마오가 물었다.
“응.”
아니나 다를까 유모의 예상이 맞았다.
“오늘은 해야 할 일이 있어.”
장밋빛 수가 놓인 로브까지 어깨에 걸친 후에, 아사야는 거울 안의 그녀 자신을 바라보았다. 언제나처럼 티 없는 도자기 인형 같은 모습이었다.
제 옆얼굴을 흘겨보며, 아사야는 야베스 세일산의 반응을 상상해 보았다.
‘아주 마음에 들어 하겠어…….’
화려하고 아름다운 모습이니 함께 왕성 내실 복도를 느릿느릿 걷길 원할 것이었다. 그의 금고가 있다는 방으로 향하면서는 데이트를 하는 연인 같은 분위기를 낼 것이었다. 새로 잡아들인 희귀한 정령을 그렇게 전시하듯이, 그는 저라는 여자를 한껏 뽐낼 것이었다. 사방에서 이목이 집중되는 것을 즐길 것이었다.
아사야의 상상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악단이 있네.”
그녀와 내실 복도를 걸을 적에, 야베스 세일산은 느릿하다 못해 중도에 멈춰 서기까지 했다. 그러고는 정원의 악단이 그들을 향해 곡을 연주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러나 단 한 가지, 아사야의 예상에 틀린 점이 있었다. 야베스가 제 아내를 데려간 장소는 ‘금고가 있는 방’이 아니었다.
아치형의 기둥 아래에 높다랗게 선 벽 앞에, 둘째 왕자 부부가 도착했다.
고개를 올려 아사야는 제 앞을 가로막은 두꺼운 벽을 바라봤다. 금박을 입힌 청동 부조가 신화 속 한 장면을 보여 주었다.
지상에는 궁창과 거룩한 별과 태양이, 지하에는 물로 된 심연과 땅의 기둥이, 그 중심에는 죄를 진 이와 그를 벌하는 인간들이 새겨져 있었다.
의문스러운 얼굴로 아사야가 돌아보자 야베스가 말없이 웃음 지었다.
어린 아내를 가르치기를 좋아하는 남자였다. 그가 바라는 대로,
“……금고가 어디에 숨어 있단 거예요?”
아사야가 물었다.
그제야 야베스 세일산이 손을 뻗었다. 크고 딱딱한 손으로 그가 부조의 중앙, 툭 튀어나온 조각의 머리를 쥐고 비틀었다. 그러자 작은 조각의 머리가 고통스러운 듯 신음 소리를 냈다.
살아 있는 조각이 내는 소리에 아사야의 어깨가 움찔 튀었다. 이내, 조각의 목이 신화 속 참수의 장면과 같이 모로 꺾였다.
그러자 벽인 줄로 알았던 청동문이 갈라지는 소리를 내며 벌어졌다. 두 눈을 크게 뜬 채, 아사야는 드러난 사각 공간을 바라보았다. 그 속에 금고는 없었다. 그 공간 자체가 야베스 세일산의 금고였다.
야베스가 손가락질한 곳에 기다란 유리관이 세워져 있었다. 벽과 바닥을 잇는 직선의 유리관은 기둥에 가까웠고 눈을 흐리게 뜨고 보면 외곽선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투명했다. 텅 빈 유리 기둥의 중앙에 마도구가 떠 있었다.
블랙 드래곤의 마력을 흡수한 마도구를, 아사야는 단번엔 알아보질 못했다. 설계도로 보아 알던 그림과는 몹시 다른 탓이었다.
가브리엘의 심핵을 갈라놓고 속에 든 마력-혹은 영혼, 그의 힘, 세월-을 집어삼킨 마도구는 그저, 검정이었다.
검정색의 역삼각형 덩어리였다.
마도구가 놓인 자리에 손을 대면 그것을 쥐는 것이 아니라, 암흑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았다.
‘여기에…… 가둔 거야, 가브리엘의 마력을…….’
그 순간 아사야는 가브리엘을 향해 연민을 느끼지 않았다. 그럴 새도 없이 그녀는 유리관 너머의 장식장과 진열대를 바라보았다. 뻣뻣한 마네킹에 걸린 웨딩드레스가 그녀의 시선을 앗아 갔다.
아사야는 그 옷을 알아보았다. 혼인을 올리며 입었던 웨딩드레스를 잊는 여자는 없을 것이었다. 마치 헤어졌던 친구를 만난 기분이었다.
저 옷을 입고 아사야는 야베스 세일산의 여자가 됐다. 그와 초야를 보냈으며, 드레스 속치마에 피를 묻혔다.
야베스 세일산은 그 모든 것을 보관해 두었다. 아사야 세일산이 걸쳤던 불투명한 베일, 금수가 놓인 화려한 로브와 드레스, 갈색으로 변질된 피가 묻은 속치마까지, 모든 것이 그 자리에 박제되어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순간 아사야는 두 눈이 끓어오르고 가슴이 찢기는 듯 분노와 아픔을 느꼈다. 그에게 제 처음을 내준 사실은 때론 싫고 때론 슬플지언정 그녀를 아프게 하진 않았었다. 아사야를 아프게 한 것은 처녀가 아니게 된 초야가 아닌, 그날 흘린 피를 대단한 것처럼 진열해 둔 행위 자체였다.
그래서 아사야는 연민을 느끼지 않았다. 가브리엘에게 연민을 느낄 입장이 못 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녀는 오히려 냉정해졌다. 머릿속이 대번에 차가워졌다.
야베스 세일산에게는 그녀 역시 제 금고에 보관할 전리품에 불과했다.
“이대로 당신을 둔 채 문을 닫으면 완벽하겠어.”
그런 농담을, 둘째 왕자가 쉽게 뱉었다. 느릿하게 등을 돌려, 아사야는 금고 앞에 선 야베스 세일산을 바라보았다. 바깥에서 스미는 빛을 등으로 받을 적에 그의 얼굴은 컴컴하게 가려져 보였다.
차라리 그편이 나았다. 그의 표정이 보이지 않아야 아사야의 마음이 편했다.
“그런 농담은 하지 말아요.”
그편이 연기하기에 수월했다.
습관적으로 미소 지으며 아사야는 금고 속을 둘러보는 시늉했다. 마도구를 꺼내 달라는 말은 금물이었다. 야베스 세일산을 상대로는 절대로 곧장 본론으로 들어가선 안 됐다.
예물로 드래곤을 요구했을 적에 그의 반응을 생각해 보면 그랬다. 제가 먼저 부탁을 하고 들면 그는 그것을 약점으로 잡고 저를 놀릴 것이었다.
“왕자님의 보물들, 소개해 주세요.”
아사야가 속삭였다.
아내의 요청에 야베스는 흔쾌히 제 보물들을 소개해 주었다. 진열장을 채운 물건들에는 먼지 한 올 앉아 있질 않았다. 값비싼 것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것도 있었다.
이를테면 그늘 면에 반듯하게 세워진 유화는 값을 매길 수조차 없이 귀한 것이었지만, 어릴 적 본도 세일산과 다투다가 깨져 버린 유치의 조각은 보물이라기엔 다소 애매한 구석이 있었다.
아사야를 놀라게 한 것은, 드래곤의 마도구 이외에도 그가 수집한 마석이 제법 많다는 부분이었다.
가디엘 아졸이 블랙 드래곤을 보낼 적에 기쁘게 받아들인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야베스 세일산이 받아들인 선물은 블랙 드래곤이 아니라, 블랙 드래곤의 마력을 가둔 마도구였던 모양이었다.
‘꼭…… 내가 아니라 내 드레스를 아끼는 것처럼…….’
거기에 생각이 닿자 아사야는 작게 실소했다.
남들은 검은 용을 아끼는 공주를 두고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라 수군거렸지만 죄 틀린 말이었다. 아사야에게 있어 가브리엘만큼이나 저와 닮은 존재가 없었다. 야베스 세일산의 금고에 제 처녀가 있었고 가브리엘의 마석이 있었다. 알몸이 되고 나약해진 채 정작 서로 사랑하는 것들은, 처녀가 아닌 저와 강자가 아닌 가브리엘이었다.
아사야의 미소를 다르게 해석한 듯, 야베스는 더욱 즐거운 양 진열품을 소개했다. 그러던 중 그의 발이 멈춘 자리가 있었다. 붉은 융단 쿠션 위에 놓인 두 개의 흑구슬 앞이었다.
“영원한 헤어짐을 막아 내는 물건이야. 상대가 누구이건, 기도한 자와 반드시 재회하게 된다지.”
이어서 그는 흑색 구슬 중 하나를 아사야의 손에 건네주었다.
“십여 년쯤 전인가? 신전의 늙은 마법사가 이 구슬을 만들었지. 키우던 고양이가 죽어 버려서 그랬던가……, 그런 하찮은 이유에서였어.”
야베스가 속삭였고,
“……전 그럴 만한 일이라고 생각되는걸요.”
아사야가 대꾸했다. ‘당신에겐 그렇겠지’, 하고 야베스는 아사야의 어깨를 가볍게 두 번 두들겼다.
아사야를 당황하게 만든 것은 구슬에 걸린 사연 따위가 아니었다. 야베스 세일산이 그녀에게 단검을 쥐여 주며, 흑구슬의 사용 방법을 알려 줬기 때문이었다.
“직접 상처를 내어 피를 적시는 거야. 그리고 소원을 빌어, ‘내 남편과 영원한 헤어짐은 없게 해 달라’, 그런 듣기 좋은 말로.”
그럴 적에 야베스는 즐거운 듯 웃고 있었다. 그러나 아사야는 볼 수 있었다. 왕자의 푸른 눈이 어느 때보다 면밀히, 그녀의 반응을 살피고 있었다.
마법사를 데려온 것에 이어 사렙탄 세일산을 알현한 것을, 남편으로서 야베스 세일산이 모를 리 없었다. 그의 귓등을 간질이는 못된 소문들이 있었다. 그의 아내인 아사야 세일산이, 제 남편보다 용을 좋아하는 특이한 성벽을 가졌단 소문이었다.
“자.”
아사야의 손에 칼과 구슬이 들어왔다. 그의 심기를 거스르고 싶진 않았지만, 아사야는 몰아치는 거부감을 밀어내지 못했다.
흑마법에 반드시 후환이 따른다는 것은 어린아이라도 아는 사실이었다. 단순히 야베스 세일산의 기분을 풀어 주자고, 그가 원하는 대로 소원을 빌 수는 없었다.
“저…… 저는 이런 건…….”
고개를 내저으며 아사야는 받은 단검을 돌려주려 했다. 그러자 야베스 세일산의 손이 아사야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작년까지만 해도 나는 이 구슬을 쓸 일이 없을 줄 알았어.”
그가 속삭였다.
“이미 죽어 버린 고양이를 만나겠다고 흑마법에 손을 댄 마법사도 이해할 수 없었지. ……그런데 이제는 달라.”
야베스의 손에 옥죄여 아사야는 단검을 놓을 수 없었다. 그의 손이 커다란 매듭처럼, 아사야의 손을 덮고 있었다.
“이제는 네가 있잖아. 그렇지?”
단검을 쥔 채 아사야는 어깨를 떨었다. 억지로 손을 움직여, 그는 아사야의 손바닥에 검날을 가져다 붙였다. 생채기를 내려는 시도에는 말이 없었다. 손을 으스러뜨릴 듯 강한 악력과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저를 꿰뚫어 보는 집착만이 있을 뿐이었다.
“싫어요!”
온 힘을 다해, 아사야는 어깨를 비틀어 댔다. 혹여 실수라도 했다가는 제 손가락이 잘릴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피를 보는 일이 겁이 나고 무서웠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두려운 것은, 진실로 흑구슬에 주술이 걸려 있어 야베스 세일산과 영원히 이별하지 못하게 되는 일이었다.
공포에 질려 아사야는 어린 토끼처럼 두 다리를 바들거렸다. 제 손으로 과일 한번 깎아 본 적 없는 여린 손이었다. 검을 쥐는 일마저도 난생처음이었다.
놀란 나머지 아사야는 제자리에 주저앉고야 말았다.
“헉…….”
왕자의 손아귀에서 아사야의 손바닥이 가까스로 벗어났다. 넘어지다시피 엉덩방아를 찧은 어린 신부를, 야베스가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떨어진 단검이 아사야의 옆에 놓였다.
날카로운 쇠붙이를 그가 집어 들었다.
나자빠진 채 그를 올려다보며 아사야는 거칠어진 숨을 몰아쉬었다. 당장이라도 그가 단검을 휘둘러, 제게 상처를 낼 것 같았다.
“하여간 겁 많은 아가씨 같으니라고.”
웃으며, 야베스는 단검을 움켜쥐었다.
“내가 대신해 빌어 줄 테니 걱정할 것 없어.”
그러고는 왼손으로 쥔 검의 날을 오른손으로 감싸 쥐었다. 그는 제 육신에 상처를 내기를 쉽게 해냈다. 찢어진 손바닥에서 떨어진 피가, 아사야의 치마에 묻었다.
구슬을 움켜쥔 채 그는 혼잣말을 하듯 기도를 마쳤다. 내 신부와 영원한 헤어짐은 없게 하소서…… 그런 문장이 메아리처럼 아사야의 귓가에 맴돌았다.
뻘건 피를 흡수하며 구슬은 색이 변하는 듯하다, 설탕과자처럼 부서졌다. 그리고 그의 손안에서 사라져 버렸다.
“효력이 있을지 없을지는, 지켜봐야 알겠지.”
그가 속삭였다. 그 말이 이상하게 협박처럼 들렸다. 아사야는 입을 다문 채 시선을 내렸다.
단검을 바닥에 내려놓으며 야베스가 그녀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이어 그는 아사야의 구겨진 드레스 스커트를 슬쩍 들췄다.
아사야의 백색 속치마에 왕자가 제 피를 닦았다.
그 동작이 암시하는 것이 무언지, 아사야는 알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제가 멍청했더라면 이 상황을 속 편히 넘길 수 있었을 텐데…… 그런 생각마저 들었다.
야베스 세일산이 제 웨딩드레스를 보관한 것은 왕자님의 은혜이며, 강압적인 주술을 걸어 헤어지지 않겠노라 맹세한 것은 로맨틱한 일이며, 신부의 치마에 혈흔을 남기는 것 또한 짓궂은 애정 표현으로 넘길 수 있을지도 몰랐다.
끝으로 그가 아사야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창백해진 얼굴을 숙이며 아사야는 그의 입맞춤을 순종적으로 받아들였다.
“…….”
견디기 힘든, 뜨거운 감정들이 아사야의 가슴속에 응어리졌다.
별수 없이 겁을 먹은 스스로에 대한 자괴감, 저를 초라하게 만드는 왕자에 대한 증오심, 공포스러운 상황이 남긴 두려움의 잔재들…… 그것들이 시커멓게 뭉치더니 분노가 됐다. 누군가 불화살을 쏘아 제 심장에 박은 게 아닌가 싶었다.
그래도 기색을 비춰선 안 됐다. 아사야는 짝을 잃은 구슬을 집어 들었다. 아직 성한 검은 구슬을, 그녀는 제 목덜미에 가져다 댔다.
“……이러면 어떨까요?”
그리고 소곤거렸다.
“제가 이 구슬로…… 목걸이를 만들어 걸고 다니는 거예요.”
“목걸이?”
그러자 아내의 반응을 살피던 야베스의 표정이 변했다. 흥미로운 듯, 그는 손에 쥔 단검을 지팡이처럼 바닥에 디뎠다. 예리한 칼날 끝이 대리석 바닥에 닿은 채 아슬아슬하게 그의 자세를 지탱했다.
고개를 뻗어 제 목덜미를 노려보는 왕자의 시선을, 아사야는 피하지 않았다.
다만 속삭였다.
“같이 약속했다는 의미예요. 저 또한 당신과 헤어지고 싶지 않으니까요.”
그럴 적에 아사야는 연기자였다. 그녀가 맡은 평생의 배역은, 순진하게 들뜬 왕자의 여자였다.
“그래, 꼭 그렇게 해.”
마침내 야베스의 낯에 웃음기가 돌았다. 그를 따라 아사야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고 두 손을 높이 뻗었다.
“일으켜 세워 주지 않으실 건가요, 나의 왕자님?”
아사야는 그가 기대하고 원하는 것처럼 행동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녀 자신이 그의 소중한 전리품임에 기쁜 척 웃었다. 소름이 끼치고 닭살이 돋도록 싫은 남자에게 제 몸을 맡겼다.
나란히 마주 서자 숨결이 닿도록 가까웠다. 달아나고 싶은 감정을 억누르며 아사야는 왕자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야베스 세일산의 어깨에 턱을 올린 채, 아사야는 두 눈을 바로 떴다. 차가워진 이성에 냉혹한 감성이 뒤섞였다.
‘당신이 알지도 못하는 새, 내게 주게 될 거야. 가브리엘의 자유를…….’
그녀가 원치 않아도 관심을 퍼붓고 바란 적 없는 애정을 밀어 넣던 야베스 세일산이었다. 그런 왕자의 마음을 훔쳐 내기가, 아사야에게는 조금도 어렵지 않을 것이었다.
“좋아해요.”
붉은 입술로 그렇게 속삭일 적에,
‘언젠가 당신 마음에도 피가 날 거야.’
그런 속삭임이 가슴속에 메아리쳤다.
‘죽고 싶어도 그러지 못할 만큼 아플 거야.’
아사야의 마음 안에 사무치는 증오를 모르는 채 야베스 세일산은 웃음 지었다.
그는 물론이며 아사야 세일산조차도, 제 속삭임이 저주가 되고 예언이 될 것임은 알지 못했다.
.*. *. *. *. *. *.
이튿날 오전, 베데르 성으로 전령이 도착했다. 왕실의 검, 비아탄 아멕이 직접 방문하여 찾은 이는 공주도, 공주의 드래곤도 아닌 붉은 팔의 마법사였다.
검과 완장을 차고서 저를 부르는 기사 앞에 폼이 어색하게 다가가 섰다.
시뻘건 흉으로 덮인 팔을 몇 초간 바라보다, 비아탄이 입을 열었다.
“사렙탄 세일산의 말씀을 대신하여 전합니다.”
그 앞에 폼이 허리를 깊게 숙였다. 당장 짐을 챙겨 떠나라는 명령을 염려하는 마법사에게, 비아탄이 또박또박 말을 읊었다.
“고위 마법사 폼을 아사야 세일산의 하수자로 인정하는바. 그녀가 왕성 내에 기거하는 것을 공식적으로 허가한다.”
왕실의 가장 높은 검이신 비아탄 아멕이 읊는 소리였다. 그러나 폼은 그 말을 곧장 받아들이질 못했다. 그 말을 믿을 수조차 없었다. 당장이라도 ‘진짜인 줄 알았냐’며 저를 조롱하는 다른 기사들이 우르르 뛰어 들어올 것만 같았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눈치를 살피는 폼을 향해, 비아탄은 무심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또한 2차 마물 전쟁 당시 국경을 비호한 그녀의 행적을 높이 평가하여 칭찬하는바.”
폼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참전 영웅인 기사들과 동등하게 남작으로 작위를 하사한다. 곡물의 땅, 에드레이를 영토 삼아 그 이름을 폼 에드레이로 명명한다.”
꿈이 아니었다. 그녀의 망상이 자아낸 못된 기사들은 어디에도 없었다. 세일산의 인장이 찍힌 은제 패와 작은 서신이, 마지막으로 폼의 앞에 건네졌다.
빨간 손을 뻗어 폼은 그 서신을 받아 들었다. ‘폼 에드레이’, 제 것이었던 적 없는 성씨가 붙은 이름이 그녀에게 주어졌다. 놀란 나머지, 폼은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았다.
좋아하는 것인지 슬퍼하는 것인지 알 길이 없는 마법사였다. 그녀에게는, 비아탄은 더 이상 전할 말이 없었다.
그저 어깨를 으쓱이며,
“아사야 공주님께서 오시거든 꼭 알려 주십시오.”
신신당부할 따름이었다.
오늘 전령을 압축하자면 ‘미안해’였다.
너를 추궁한 일은 왕인 나의 실수였다, 미안하게 생각하니 그만 마음을 풀고, 전처럼 굴어 달라. 조찬 모임 초대장과 압화를 보내 주고, 계절이 변했다며 시를 적어 주고, 예쁜 글귀를 수놓은 손수건을 자랑해 달라…… 왕이 며느리에게 소곤거리는 사사로운 감정이 공문 안에 담겼다.
그날부로 폼은 더 이상 천출의 마녀가 아니었다. 그녀는 아사야 세일산의 사람이자 영지를 갖춘 남작이었다.
폼의 인생을 뒤바꾸는 것이, 대륙의 왕으로서 사렙탄 세일산이 며느리에게 전하는 사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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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실로 돌아온 공주님의 안색이 좋지 못했다.
침실 문이 닫히자마자 아사야는 구두에서 발을 빼냈다. 야베스 세일산의 눈높이에 시선을 맞추고, 그와 함께 설 때 잘 어울리는 한 쌍으로 보이고자 조그만 발을 욱여넣은 구두 굽이 높기도 했다.
카펫 위를 나뒹구는 구두 두 짝을 유라가 집어 들었다. 화려한 드레스를 벗겨 주기 위해 사라 역시 그녀 뒤로 따라붙었다. 그러나 시녀의 손이 드레스 스커트에 닿자마자, 아사야는 고개를 내저었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도 좋아.”
난데없는 명령에 두 시녀가 눈을 크게 떴다.
공주의 환복을 도와드린 뒤엔 욕조 물을 받아 드리고, 목욕 수발을 마친 뒤엔 머리도 빗겨 드려야 했다. 저녁이면 추위를 많이 타는 공주의 발에 따듯한 실내화도 신겨 드리지 못한 채 숙소로 돌아갈 순 없는 노릇이었다.
“저…… 공주님. 폼 님께서 전하신 편지도 있고…….”
유라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지만,
“알았으니, 나가 줘.”
아사야는 단답했다.
상냥하던 공주님의 차가운 대꾸에 시녀들은 고개를 깊이 숙였다. 그럴 적에 유라와 사라는 서로의 눈치를 살피며 아사야를 걱정하기 바빴다.
왕자님과 오붓한 시간을 보내고 돌아오실 적에는 기쁘고 행복해야 할 왕자비이신데, 아사야는 어느 때보다 더 우울해 보였다.
협탁 위에 서신을 내려놓고 두 시녀가 자리를 비웠다. 그들을 대신해 유모만이 공주 곁에 남았다.
말없이, 엠마오가 드레스 끈을 풀기 시작했다. 뒷덜미부터 허리까지 척추를 따라 매듭지은 끈을 푸는 데엔 시간이 한참 걸렸다.
침대 모서리에 걸터앉아 아사야는 서신을 열어 보았다.
폼의 글씨는 좋게 봐도 반듯하다곤 해 줄 수 없게 악필이었다. 삐뚤빼뚤한 글씨에 감동을 담아, 그녀는 제 이름에 성씨가 붙어 폼 에드레이가 되었음을 알려 왔다. 에드레이 남작으로서 적은 첫 편지가 아사야에게 바쳐졌다.
아버지의 곁을 지킨 마법사가 인정받는 날. 아사야가 원하며 기다려 온 순간이었다. 진심 어린 축하를 전해야 할 때였다. 그러나 기분이라는 게 그렇게 간단히 움직이질 않았다.
편지의 뒷장에는 추신을 빙자한 본론이 담겨 있었다.
가브리엘의 협조를 받아 성립되는 공식 네 가지를 짜내었어요. 몇 달의 시간이 걸릴까 확신할 순 없지만, 반드시 열쇠를 만들어 드리겠어요. 내가 만든 자물쇠이니 내가 열게끔 해 드리겠어요.
잔뜩 기합이 들어간 문장들이, 읽는 즉시 허공으로 흩어졌다.
‘열쇠’, 그 단어가 있던 자리를 아사야는 손끝으로 만져 보았다. 가브리엘의 마도구를 여는 열쇠. 당장은 그것만이 희망으로 생각됐다.
곧이어 엠마오가 놀란 신음성을 냈다. 아사야의 몸을 감싼 드레스를 벗기고, 어린 시녀들을 내보낸 이유를 알게 된 것이었다. 피를 문질러 닦은 손자국이 백색 속치마에 선명했다.
“세상에, 아가씨…….”
눈썹을 찡그리며 엠마오는 다급히 아사야의 무릎 앞에 몸을 숙였다. 성인이 된 뒤에도 엠마오에게 아사야는 아직 어린애였다. 넘어진 아이를 살피듯이 그녀는 아사야의 종아리를 만졌다. 새하얀 피부 위에는 어떤 생채기도 없었다.
치마를 구기며 일어나, 엠마오는 아사야의 전신을 조심스레 살폈다. 야베스가 잡았던 손등 위에 붉은 손자국이 남아 있었다. 발개진 피부를 노려보다가, 엠마오는 공주를 꽉 끌어안았다. 주름진 손이 걱정과 화로 인해 부들부들 떨렸다.
“어쩜 좋아, 내 아가씨…….”
어린 시절처럼, 아사야는 유모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나이 먹은 유모는 전에 비해 체구가 줄어든 듯했다. 그런 엠마오의 품에 안겨 아사야는 잠깐 응석을 부렸다.
이어 엠마오는 아사야의 귓불을 무겁게 하는 치렁치렁한 귀걸이를 빼냈다. 습관적으로 그녀의 손이 목걸이 줄로 향했다.
손을 들어, 아사야가 그 동작을 저지했다.
“이건 끼고 있어야 해. ……선물받은 거야.”
속삭임에, 엠마오가 목걸이를 다시 살폈다. 가느다란 금제 목걸이 가운데에, 없던 장식이 붙어 있었다. 반달 모양 고리로 감싸 연결한 장식은 귀한 보석도, 멋진 탄생석도 아니었다. 시커멓고 윤기 없는 흑구슬이었다.
본능적으로 엠마오는 목을 움츠렸다. 왕자라는 사람이 제 비에게 준 선물이라곤 믿을 수 없게 불경한 기운이 넘치는 물건이었다. 당장 빼앗아다 먼 바다에 던져 버리고만 싶었다.
엠마오가 무어라 잔소리를 늘어놓으려는 때에,
“공주님.”
시녀들이 문을 두드렸다.
“블란테 세일산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예정되지 않은 방문에 아사야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약속된 바 없으니 준비된 차는커녕 제대로 된 차림도 아닌 채였다. 피 묻은 내의 차림새로는 블란테는커녕 여느 하인도 만날 수가 없었다.
당장은 만날 수가 없으니 돌려보내라 말하려다, 아사야는 멈췄다. 그녀는 블란테 세일산을 알았다. 급히 전할 말이 있지 않고서야, 느닷없이 침실로 저를 만나러 올 블란테가 아니었다.
로브를 둘러 어깨를 가리며 아사야가 말했다.
“들어오시라고 해.”
그러자 블란테 세일산이 들어섰다. 벌컥 열린 문을 전부 젖히기도 전이었다.
급할 걸음으로 다가올 적에 그녀는 몹시 성난 사람처럼 보였다. 머리칼처럼 창백한 빛깔이라 흐릿한 눈썹을 찡그리고, 목덜미에는 뼈대가 선 채였다.
무어라 아사야에게 말을 전하려 입을 열었다가, 블란테는 정지했다. 아사야 역시 그녀의 화난 얼굴을 보며 움직이지 않았다.
두 여자가 서로의 몰골을 가만히 응시했다. 침묵하며 선 왕자비들을 두고 엠마오가 조용히 침실을 빠져나갔다.
소리 없이 문이 닫혔다.
먼저 입을 연 쪽은 블란테였다.
“당신이 미워서 화를 내러 온 것인데, 이러고 있으면 어떡해요?”
저보다 높은 블란테의 눈을 올려다보며, 아사야는 쓴웃음을 지었다. 블란테의 시선이 아사야의 손목으로 향했다. 발갛게 부은 손등이 민망해 아사야는 로브의 허리끈을 만지작거렸다.
“블란테, 그거 모르죠? 세상에는 나를 미워하는 사람이 정말 많아요.”
아사야가 말했다. 농담처럼 웃음 섞인 소리였다. 그러나 블란테는 웃지 않았다.
“……아뇨, 난 아니에요.”
흰 손을 들어 그녀는 제 이마를 문질렀다. 고개를 숙인 채 마른세수하는 블란테의 얼굴을 아사야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오늘, 일진이 사나운 이가 왕성에 저 혼자만은 아닌 듯했다.
“얼굴을 보니 알겠어요, 날 화나게 만든 원흉이 당신은 아니라는 걸.”
블란테가 속삭였다. 무어라 답해야 할까 몰라 아사야는 말을 아꼈다.
제 편이라는 귀족들을 만나고 돌아온 오후, 본도 세일산은 취해 있었다. 사렙탄 세일산이며 그 형제와 달리 본도는 술에 약했다. 분위기를 띄우자며 마신 와인 두어 잔에 표정이 부드러워진 채 그는 침실에 드러누웠다.
그가 만나고 온 귀족들이 내건 조건이며 정보들이 있을 것이었다. 자세한 설명을 듣고자 블란테는 본도의 옆으로 가, 그의 외투를 벗겨 주고 머리를 만져 주었다.
그러자 그가 블란테의 드레스 치마를 제 쪽으로 끌어당기더니 고개를 그녀의 가슴에 묻었다. 평소의 무뚝뚝한 본도 세일산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태도였다. 애정이 실린 듯 부드러운 애무도 이어졌다.
제 가슴과 허리를 그의 손에 내맡기며 블란테는 얼굴을 새빨갛게 붉혔다. 목석같기만 하던 남편이 처음으로 다정하게 저를 안으니 당혹스러우면서 한편으론 좋았다. 사랑 없이 맺어진 부부라곤 하나 대다수 왕족들이 그러듯이, 본도의 마음도 아내인 저를 향해 천천히 열리나 보다 생각했다.
대륙으로 시집온 이후 처음 받는 다정한 손길이었다. 블란테의 마음 역시 평소와 달리 말랑하게 흐트러졌다. 그녀를 침대에 눕힐 때 본도는 반쯤 눈을 감은 채였다. 망설임 없이 그는 제 아내의 속치마 밑으로 기어들어 갔다.
그때쯤 블란테의 심장은 너무 세차게 뛰어 대서, 제 마음 안에 드는 의심 한 조각조차 알아채지 못할 지경이었다. 나와 결혼한 대륙의 왕자님은 이렇게 다정한 사람이 아니라는 의심 한 조각. 그것을 미뤄 놓고 그에게 몸을 내맡긴 대가는 가혹했다.
블란테의 길쭉한 다리를 감춘 풍성한 치마를 본도 세일산이 위로 걷어붙였다. 그러고는 그녀의 속옷을 옆으로 젖혀 놓고 관계를 맺으려 달려들었다. 드레스 치마에 얼굴이 가려진 채 블란테는 허둥지둥했다. 당장에 그가 저를 안고 싶다면 그럴 수야 있겠지만, 서로 간에 시선도 마주하지 않고서는 싫어서였다.
무어라 그를 달래기 위해 블란테가 제 얼굴을 가린 치마를 치우며 올려다볼 적에, 본도 세일산은 따듯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기쁜 듯 눈을 가늘게 뜨고 웃으며,
‘아사야.’
그가 잠꼬대했다.
블란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온몸의 피가 거꾸로 솟았다가 발아래로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매일 밤 한 이불을 덮고 눕는 남편의 입에서 새어 나온 이름이었다. 그 이름이 블란테를 화나게 했다. 제 실수를 깨닫고 놀란 표정을 짓던 본도 세일산이, 블란테를 화나게 한 원흉이었다.
제 배 밑에 깔려 다리를 벌린 여자가 아사야 세일산이 아니라는 것에, 그는 일순 실망한 눈치였다.
소리 없이 치마를 정리하고 일어설 때, 블란테의 심장이 부글부글 끓었다. 얼굴은 빨갛게 달아올랐고 머릿속은 파랗게 질렸다. 그의 목을 조르고만 싶었다. 기쁜 환상을 부숴서 죄송하게 되었다고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그러게 야베스 세일산처럼 계략이라도 펼치지 그랬느냐고 훈수를 두고 싶었다.
제 동생의 아내가 된 아사야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여전히 ‘내 것일 수 있었던 여자’로 품을 거라면,
‘나와 결혼하지 말았어야죠.’
그렇게 미운 말을 쏘아붙이고 싶었다.
그러나 블란테는 본도에게 그럴 수가 없었다. 그녀의 성이 ‘세일산’이 된 지금, 그는 대륙의 첫째 왕자였으며 블란테는 그의 아내였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고작해야 환복을 도울 시녀를 부르는 수준이었다.
그래서, 블란테는 아사야를 찾아왔다. 우습게도 그녀는 본도 세일산보다는 아사야 세일산과 더 친했다. 본도 세일산보다 아사야 세일산을 편하게 생각했고, 좋아했다. 그런 친구의 얼굴을 보고 제 속에서 끓어넘치는 감정을 몇 마디라도 전하면 제 기분이 나아질까 싶었다.
황당한 착각이었다.
“꼴이 그게 뭐예요?”
허탈하게 물으며, 블란테가 손을 뻗었다. 그러고는 아사야의 헝클어진 옆머리를 귀 뒤로 넘겨주었다.
저에게 죄가 없는 것처럼, 아사야 세일산에게도 죄가 없었다.
‘대륙의 모든 남자가 연모하는 여자.’
그 별명도 죄목으로 보기는 어려웠다. 죄를 지은 이에게는 그것이 돈이건, 식욕이건, 성욕이건 하다못해 분풀이일지라도, 제가 바라서 갈취한 무엇이 있게 마련이었다.
그러나 아사야 세일산은 달랐다. 본도 세일산을 비롯해 어떤 남자의 연모를 받았다 해서, 그녀에게 득 된 것이 하등 없었다.
블란테의 분노는 삽시간에 연민으로 변했다. 대륙의 왕자가 그러듯이 수많은 남자들이 술에 취해 아사야의 이름을 부르고 추한 욕망을 품을 터였다. 침대에서는 더러운 망상을 품고 술집에서는 농담거리, 안줏거리 삼을 것이었다. 거기에 생각이 닿자 아사야 세일산의 모든 것이 가엾고 처절하게 생각되었다. 아마도 이 땅 안에 감히 그녀를 동정하는 이는 저뿐일 것이었다.
“차를 내어 오라 할까요?”
아사야가 물었다. 늘 그렇듯 품격 있고 고상한 태도였다. 속치마에 피를 묻히고 손목은 시뻘겋게 달아오른 채 잘도 태연했다.
“달콤한 디저트가 모든 걸 해결해 주진 않죠.”
그녀 역시 저와 같은 연기자임을 알고, 블란테가 답했다.
“그럼…… 어떻게 도와드릴까요?”
그렇게 묻는 아사야의 눈을, 블란테가 빤히 바라보았다. 그녀의 황금색 눈동자는 제 갈색 눈과 달랐고, 윤기 넘치는 비단 같은 흑발은 제 구불대는 은발과 달랐다.
그래도 처한 입장으로는 서로 다를 게 없다고 생각됐다.
무얼 요구하는 대신 블란테가 두 팔을 넓게 뻗었다. 큰 키에 풍성한 은발 머리칼을 늘어뜨리고 있자니 그녀의 품은 구름처럼 보였다. 구름을 뚫고 날아 본 적 있는 몸으로서 아사야가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블란테의 포옹은 구름보다 나았다.
서로 껴안은 채 두 왕자비가 소파에 넘어지듯 앉았다. 블란테의 팔에 갇힌 채 아사야는 그녀의 어깨에 관자놀이를 기댔다. 풍성한 드레스 스커트가 서로 포개졌다.
“수수께끼를 하나 내줄게요.”
블란테가 말했다.
“내가 무얼 기대하며 살고 있게요? 맞혀 봐요.”
질문에, 아사야는 대답하지 않았다. 어떤 대답을 원하고 묻는 말이 아님을 알기 때문이었다. 다만 아사야는 제 오른발을 블란테의 종아리 위에 걸쳤다.
“본도 왕자님께서 왕위를 이어받고, 나는 그의 어여쁜 아들을 낳는 거예요.”
블란테가 속삭였다.
“그리고 남편이 죽기를 기다리는 거죠.”
뒷말은 나젤탄어였다. 어느 때보다 작고, 어느 때보다 분명한 목소리였다.
“공주께서도 아시겠지만…….”
그런 블란테의 말을,
“아사야.”
아사야가 끊어 놓았다.
“아사야라고 부르세요, 블란테.”
“……아사야.”
그리고 잠깐 침묵이 왔다. 아사야는 제 이마를 간질이는 블란테의 곱슬머리를 손가락으로 빗겨 주었다.
“아사야, 당신도 알겠지만, 화이트 왕족은 드래곤의 혼혈이에요. 내 육신에도 용의 피가 흐른다는 건, 나의 수명이 본도 왕자님보다 배로 길단 의미지요.”
말의 중간에 블란테가 마른침을 넘기며 뻣뻣해진 목을 축였다.
“나는 오래 살며 기다릴 거예요. 그가 내 품 안에서 늙어 죽고, 내 아들이 왕좌에 오르면, ……그때는 내게도 기회가 올 테죠. 힘을 쥐고 내 땅을 지킬 기회가 말이에요.”
한때 나젤탄의 왕위 계승자였던 왕자비의 말에,
“……그건 너무 나중의 일이잖아요.”
아사야가 말했다.
고개를 숙여, 블란테가 제 턱 아래에 이마를 둔 아사야를 내려다봤다. 노란 눈을 크게 뜬 채, 깜빡임 하나 없이 아사야가 그녀를 들여다봤다.
“왜 우린 나중만을 기다려야 하는 거죠? 나는 언제나 준비가 되어 있는데……, 모두가 내게 기다리라고만 하네요.”
“공주께서 마친 준비란 무엇이죠?”
블란테가 묻자,
“자유로울 준비…….”
아사야가 소곤거렸다.
언제고 빛나던 노란 눈동자가 일순 흐려졌다.
“내 소망은 늘 하나예요. 아주 간단한, 작은 소망.”
꿈을 꾸는 사람처럼, 아사야가 속삭였다.
“가브리엘의 손을 잡고, 그와 함께…… 먼 곳으로 떠나는 거예요. 그는 더 이상 아프지 않고, 나는 더 이상 슬프지 않고, 내일에 대한 기대만이 가득한 채로…….”
엠마오에게조차 말해 본 적 없는 진심이었다.
“그렇게 멀리 떠나서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으려 해요.”
비밀을 전하면서도 아사야는 조금도 불안하지 않았다. 서로 간에 말이 새어 나갈 구멍이 없음을 이미 알기 때문이었다.
블란테가 비밀을 지켜 줄 것이란 건, 그녀의 눈동자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밝은 갈색 눈동자가 놀라고 당황한 듯하다가, 이내 부드러운 연민을 담았다.
왕자비가 된 뒤에도 왕좌에 앉을 날을 기다리는 블란테였다. 그녀 앞에서 아사야는 천덕꾸러기가 된 기분이었다. 바라는 것이 고작 ‘도망치는 것’이라니 스스로가 나약하다 생각됐다.
“……블란테의 소망에 비하자면 허황된 꿈이지요.”
민망함에, 아사야가 덧붙였다.
“그렇지 않아요.”
그래도 블란테는 그녀를 비웃지 않았다. 진지한 얼굴로 물끄러미, 비밀 덩어리의 둘째 왕자비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이내 블란테의 입술이 열렸다.
짧은 머뭇거림 끝에 그녀는 제가 품은 비밀을 꺼내 놓았다.
“이번 해의 마지막 날, 성대한 연회가 열릴 거예요. 모두에게 중요한 날이니 아사야도 미리 알아 두세요.”
몰랐던 소식에 아사야의 눈이 커졌다. 본도 세일산이 오늘 알려 준, 그와 사렙탄 세일산, 그리고 극히 일부의 신하들만이 아는 정보였다.
“그날 폐하께서 왕위 계승자를 지목하실 테니까요.”
그 소식을, 블란테는 야베스 세일산의 아내에게 직접 전했다.
“연회가 끝나고 새해의 첫 태양이 뜨는 날, 나와 본도 왕자님은 나젤탄을 방문할 예정이에요. ……대륙의 새로운 국왕 부부 내외로서 말이에요.”
입을 다문 채 아사야는 블란테의 두 눈을 번갈아 살폈다. 고개가 가까운 탓에 그녀의 눈동자는 좌우로 요동치는 듯 보였다.
손을 올려, 블란테는 제 어깨에 기대느라 구겨진 아사야의 로브를 펼쳐 주었다.
“당신에겐 슬픈 소식일 테니 유감이에요.”
블란테가 속삭이자,
“그래요, 아주 슬프네요.”
아사야가 답했다.
“블란테와 새해를 함께할 수 없다니 말이에요…….”
그러나 블란테 세일산이 작게 실소했다. 끝으로, 그녀는 아사야의 부드러운 볼에 입을 맞췄다.
겨울 해가 기울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