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화 (6/16)

베데르 성의 실종자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나 들었어요.”

블란테 세일산이 꺼낸 말이었다.

“본도 왕자님의 첫사랑이셨다고요.”

아사야는 쥐고 있던 찻잔을 아주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그럼에도 별수 없이, 받침과 잔 바닥이 부딪치는 소리를 냈다.

첫째 왕자비, 본도 세일산의 아내, 블란테 세일산과 친분을 쌓으면서도 아사야는 이 질문이 닥쳐올 날을 긴장해 왔다. 언젠가는 꺼낼 화두겠거니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이렇게 이를 줄은 몰랐었다.

‘아직 뭐라고 얘기할지 못 정했는데…….’

찻잔과 디저트가 놓인 테이블에서 시작된 어색한 기류가 응접실 전체로 번져 나갔다.

“뭐…….”

입꼬리를 올리며, 아사야가 답했다.

“누군들 첫사랑이 제가 아니겠어요?”

돌발적으로 튀어나온 명랑한 대답이었다. 또한 즉시 후회되는 대답이었다.

손을 올려 아사야는 제 입을 가렸다. 블란테를 제대로 볼 엄두도 나지 않아 고개도 푹 숙였다. 제멋대로 오만한 답을 해 놓고 귀 끝까지 발갛게 붉히는 아사야를 구경하며, 블란테는 차를 홀짝거렸다.

그러고는 웃었다.

“풉.”

그녀의 찻잔은 더 큰 소리를 내며 컵받침에 놓였다.

테라스 밖으로 뛰어내려서라도 이 상황에서 탈출하고픈 아사야를 앞에 두고, 블란테는 한참을 더 웃어 댔다. 저를 비웃는 게 아님을 알았지만 아사야는 부끄러웠다.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아사야가 ‘제발 그만 웃어요’ 하고 빌기 직전에서야, 블란테는 웃음을 멈췄다.

“하긴. 공주께서 별수 있는 문제가 아니잖아요?”

눈물까지 고인 눈가를 닦아 내며 그녀가 말했다.

“대륙에서 가장 아름다운 분이신데.”

오래도록 아사야를 따라다니는 수식어였다. 아사야 또한 알고는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면전에 대놓고 짚어 말하는 상대는 블란테가 처음이었다. 아사야의 얼굴은 홍당무처럼 붉어졌다.

둘째 왕자비의 수줍은 반응이 재밌다는 듯, 블란테는 농담을 그치지 않았다.

“제가 보기엔 틀린 말이에요.”

“…….”

“나젤탄의 사방을 돌아다니면서도 공주처럼 아름다운 사람은 본 적이 없어요.”

“…….”

“대륙이 아니라,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로 고쳐 명명해야 옳겠어요.”

아사야의 마른 몸이 의자 밑으로 가라앉고, 우단 장갑을 낀 두 손이 얼굴을 완전히 가린 뒤에야 블란테는 농담을 멈췄다.

네다섯의 과외 선생을 두고 예절이며 화법을 학습해 온 아사야였지만, 나젤탄의 왕녀를 따라잡기엔 역부족이었다. 오늘처럼 다과회를 꾸린 날이면 아사야는 볼을 붉히며 그녀의 말솜씨에 휩쓸리기가 일상이었고, 대화를 이끄는 건 블란테의 몫이었다.

아사야를 가장 수줍게 만드는 것은 블란테의, 아주 귀여운 것을 본다는 양 언니 같은 태도였다. 아사야에게는 저를 그렇게 내려다볼 어머니도, 자매도 없었다. 블란테의 애정 어린 장난기엔 도무지 면역이 생기질 않았다.

그렇게 농담을 늘어놓다가도,

“그런데도 야베스 왕자님과 결혼하신 것을 보면 두 분 모습이 참 예뻐요.”

온화한 미소를 짓는 첫째 왕자비였다.

“……연애라는 게, 우리 같은 여자들에겐 어려운 일이잖아요. 서로 간에 좋아서 하는 결혼은 더더욱 기적이죠.”

그러니 둘째 왕자 부부의 모습이 얼마나 특별하고 어여쁜지, 블란테는 말을 이어 나갔다. 듣기 좋은 칭찬이었다. 그 칭찬에 아사야의 말문은 턱 닫혀 버렸다. 얼굴에 걸친 미소는 대번에 어색해졌다.

블란테 세일산이 알고 세상이 아는 둘째 왕자 부부의 이야기는 죄 거짓이었다.

아사야에게 있어 야베스 세일산과의 결혼은 떠밀리듯 결정내린 차악책이었다. 더 나쁜 내일에 대한 염려로 인한 성급한 선택이었다. 제게 주어진 선택권은 그뿐이라는 착각이 낳은 실수였다.

가디엘이 드래곤을 둘째 왕자에게 보내지만 않았더라도 아사야는 그와 엮일 일이 없었다. 공작가 자택을 채운 허무한 외로움이 없었더라면 아사야는 결혼을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조심성 많은 본도 세일산이 조금이라도 더 용기를 냈더라면, 아사야는 그의 아내일 수 있었다.

그러나 아사야는 둘째 왕자비였다. 결혼 전 제 사정에 대하여 누구에게도 떠벌려선 안 됐다.

상대가 본도 세일산의 아내인 블란테라면 더더욱 그랬다.

‘본도 왕자님의 첫사랑.’

블란테라고 농담처럼 꺼내기가 쉽진 않을 주어였다. 불편한 화두를 쉬운 척 입에 올리면서 그녀가 원한 것은 사실 확인과 안심일 것이었다. 어떤 오해가 생겨 서로 간에 친분을 갈라놓지 않게끔 미연에 방지하려는 고마운 시도였다.

그런 블란테에게 야베스와의 결혼 생활에 대해 말할 순 없었다. 아사야에게 그녀는 ‘사교’를 통해 처음으로 사귄 친구였다.

때문에 아사야는 사실을 말하지도, 거짓말을 꾸리지도 않기로 결정했다. 그저 웃는 얼굴로 ‘하하’, 작은 웃음을 흘리면 그만이었다.

아사야의 웃음을 수줍음으로 생각하여 블란테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말했다.

“내 첫사랑도 공주였을 거예요.”

이 또한 농담인가 하고, 아사야는 두 눈을 깜빡거렸다.

“……남자로 태어나셨더라면요?”

아사야가 물었고,

“아뇨.”

블란테가 주위를 둘러보는 시늉했다. 훔쳐듣는 이가 없나 살피는 동작이었다. 왕자비들의 응접실에 듣는 귀라고는 그녀들의 시녀 서넛뿐이었고, 그마저도 입을 꾹 다물고 목을 숙인 채였다.

아사야를 향해 상체를 기울이며, 블란테가 속삭였다.

“2년만 일찍 만났더라면요. 공작가로 향한 예물 마차는 내가 보낸 것이었을 거예요.”

그 말에 아사야의 귀는 또 한 번 새빨개졌다. 짐짓 심각하던 블란테의 얼굴에 또다시 웃음꽃이 폈다.

“공주께선 정말로 농담에 면역이 없으시네요!”

웃음으로 들썩거리는 그녀의 어깨에 구름 같은 머리칼이 흔들거렸다.

서로 다른 외모와 성격을 지닌 두 왕자비는 무척 잘 어울렸다. 블란테 세일산이 조금은 외로운 사람임은 아사야만이 알았다.

그녀가 이따금,

“나와 나젤탄어로 대화해 주겠어요?”

요청해 올 때면 아사야는,

“왕녀님을 뵙습니다.”

기꺼이 외국어 솜씨를 뽐냈다.

단 한 가지, 블란테에게는 아사야가 공감할 수 없는 화제가 있었다. 왕녀가 떠나온 나젤탄의 왕성에 남은 왕자, 블란테의 남동생, 테오도르 화이트에 대한 이야기였다.

형제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면서도 블란테의 말투와 표정에서는 그에 대한 애정이라곤 단 한 점도 느껴지지 않았다. 화이트의 성을 갖고 태어난 어린 왕자는 탄생과 동시에, 누이의 미래를 바꾸어 버렸다.

“내 권리를 훔쳐 간 거예요.”

블란테는 그런 말을 썼다.

“그 어린 아이는 제 누나가 떠나듯이 시집을 갔단 걸 기억도 못 하겠죠? 나젤탄의 왕좌가 한때는 내 자리일 수 있었단 것도…….”

그렇게 말하며 쓴웃음을 지어 보이는, 세일산의 왕자비였다.

아사야는 그녀를 무어라 위로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어렵사리 블란테의 손을 잡아 주는 게 전부였다. 테이블 위로 서로의 손을 맞잡은 때 두 왕자비는 공감대를 형성한 양 보였다.

사실은 아니었다. 남매 관계에 있어서만큼은, 아사야는 블란테와 달랐다. 블란테 화이트는 뒷전으로 밀려난 누나였지만 아사야 아졸은, 부모의 애정을 독차지한 동생이었다.

“……이해해요, 블란테의 마음.”

아사야는 형편없는 거짓말쟁이였다.


 

.*. *. *. *. *. *.


 

거짓말을 했다는 죄책감 때문인지, 아사야는 오후 내내 두통에 시달렸다. 머리가 무거웠고 속도 편치 않았다.

침실로 돌아와 그녀는 상자를 하나 찾았다. 장신구에 가까운 은제 잠금장치가 달린 회갈색의 작은 상자였다. 뚜껑을 개방하면 오르골이 울려 나오는 감성적인 상자 속에는, 가디엘에게 적다 만 편지들이 쌓여 있었다.

글을 읽지 못하는 사라와 유라가, 어떤 내용인 줄도 모르는 채 버리지 않고 모아 둔 편지들이었다.

‘정다운 말들이 쓰인 줄로 생각했겠지…….’

아사야 역시 부디 그랬으면 바랐었다. 전쟁터로 떠난 가디엘을 기다릴 적에는, 언젠가 그와 제가 나란히 앉아 서로의 어깨를 다독이며, 평범하게 그리고 편안하게 외로움을 달래기를 기대했었다.

그러나 아졸가 남매의 관계는 틀어진 지 오래였다. 이제는 다정한 안부 한 줄조차 적기 민망하게 됐다.

용기 내어 문장을 꾸려 보내 봐야 무소용이었다. 가디엘로부터는 단 한 통의 답장조차 돌아오질 않았다. 제가 보낸 편지를 읽기는 했는지도 알 수 없었다. 몇 번이고 편지에 적어 부탁한, 정원의 노란 꽃잎 하나 보내온 적 없었다.

굳이 편지를 하지 않아도, 제가 어떻게 지내는지 그는 알 것이었다. 세일산 왕가의 이쁨받는 며느리는 이미 유명인사였으므로. 연회 날 드래곤을 날려 보낸 것도 알 것이며, 한 번은 드래곤을 타고 날아올랐다는 소식도, 아버지의 이름을 딴 성을 선물받은 줄도, 어쩌면 나젤탄에서 온 왕녀와 친구가 된 것도 알 것이었다.

그러나 아사야는, 가디엘 아졸이 어떻게 지내는지 상세한 소식을 들을 길이 없었다.

‘답답해…….’

구겨진 종이가 흐트러진 침대 위에 덩그러니 앉아 아사야는 시간을 보냈다. 정답도 끝도 없는 생각을 떨치며 일어서기까진 한참이 걸렸다.

“죄송해요, 공주님…….”

모아 둔 편지가 잘못된 줄만 알고, 유라와 사라가 발을 동동 굴렀다.

“공주님 글씨가 어여뻐서, 멋진 시나 예쁜 글귀가 적힌 줄로만 알았어요…….”

화가가 그려 넣은 테두리가 화려한 편지지는 비싼 것이고, 공주님께서 쓰신 글은 그보다 더 귀한 것이라 믿는 시녀들에겐 아무런 죄가 없었다. 저를 선망할 뿐인 순진한 소녀들을 향해 아사야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냐, 괜찮아.”

그러자 사라가 고개를 깊이 숙이며 다가와, 상자와 널브러진 편지들을 끌어모아 품에 안았다.

“원하신다면 당장 버릴게요, 눈에 안 띄게 할게요.”

사라의 길쭉한 팔에 안긴 종이들은 많기도 했다. 여러 소식과 상념들, 약간의 투정들을 꾹꾹 눌러 담은 편지는 여백보다 글씨가 많아 언뜻 진회색으로 보였다.

저조차도 버리지 못하고 마음에 담아 둔 말들이었다. 그 무거운 것들을 시녀에게 버리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뭐라 답해야 좋을지 알 수 없어, 아사야는 했던 말만 반복했다.

“아냐, 괜찮아…….”

전하지 못한 편지들은 다시금 상자 속에 갇혔다.


 

.*. *. *. *. *. *.


 

슬픈 아사야를 위로해 줄 유일한 이가 왕성 내에 있다는 건 기적 같은 일이었다. 아사야는 그 작은 기쁨에 몸을 기대고자 했다.

아버지의 이름을 단 성에 도착하자 경비대원 넷이 보였다. 용의 철문을 지나 베데르 성으로 가브리엘을 옮기면서, 드래곤을 지키는 경비대의 수가 늘었다. 오늘 같은 오후에는 그 수가 넷이었고, 해가 지고 밤이 되면 두 명의 경비대원이 번갈아 성의 입구를 지켰다.

“공주님.”

그들의 묵례를 받으며 아사야는 유리 정원을 지났다.

그녀가 성문을 열고 들어설 때면 엠마오와 시녀들은 정원에 남았다. 처음에는 왕자비와 떨어지는 일을 어색하게 여기던 세 사람도, 정원 안에 예쁜 새 다섯 마리와 흔들 그네를 놓자마자 투정을 멈췄다.

등 뒤로, 아사야는 성문을 단단히 닫았다.

두툼한 카펫 위에 엎드린 채 가브리엘은 책을 읽고 있었다. 드래곤의 모습으로도 읽을 수 있게끔 드로인을 시켜 크게 제작한 물건이었다.

책 속의 글씨를 읽겠다고 숙인 머리와 책장을 넘기는 발톱을 보자니, 아사야는 그제야 웃음이 났다.

“가브리엘.”

천천히 다가가, 아사야는 용의 검은 날개에 몸을 기댔다.

오늘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떤 소식을 전해 줄지 궁금해할 그녀만의 용이었다. 블란테의 동생이며 답 없는 편지에 대해 말하기보다 아사야는, 듣기 좋은 이야기를 꾸리기로 마음먹었다.

“가브리엘, 블란테 기억해? 나젤탄에서 온 왕녀님.”

질문에, 가브리엘은 그저 눈만 끔벅거렸다. 누구인지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아사야는 제 드래곤의 시력이 아주 나쁜 것은 아닌지 의심했다.

“아름다운 은발 머리에, 피부가 창백하고…… 키가 엄청 큰 구름 같은 분 말이야.”

그제야 가브리엘이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연회 날 선박 위에서 본 흐리멍덩하고 길쭉한 여자가 기억이 나는 듯도, 아닌 듯도 했다.

“어여쁘고 눈에 띄는 분인데 어떻게 기억을 못 해?”

아사야가 물었다.

가브리엘은 콧김을 ‘흥’, 소리 나게 뿜었다. 애초에 인간들은 죄 그저 그런 외형을 지닌 탓에 또렷이 구분하기가 어려웠다.

아사야와 함께일 적에 주변인들은 더더욱 분간이 어려웠다. 연회 날 아사야가 입었던 자주색 드레스와 귀에 매단 진주 귀걸이까지 아주 또렷이 기억이 나는데, 그 외의 인물들은 지나가다 본 잡초처럼 떠올리기가 애매했다.

“네 기억력이 조금 의심스러워지네, 가브리엘.”

드래곤의 속도 모르는 채 아사야가 말했다.

“…….”

묘한 표정을 짓는 드래곤의 날개에 기대어 앉아, 아사야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녀가 오늘 준비한 이야기는 나젤탄에 관한 소식이었다.

우울한 듯한 눈동자에 무료하다는 표정을 짓는 조용한 왕자비. 만인이 그렇게 알고 있는 아사야 세일산을 가브리엘만이 몰랐다.

가브리엘이 아는 아사야라는 여자는 어린 인간이었고, 세상에서 가장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표정이 풍부한 수다쟁이였다.

드래곤과 단둘이 동굴에서, 지하 감옥에서, 베데르 성 안에서 함께일 적에 아사야는 그저 아사야였다. 아사야 아졸도, 아사야 세일산도 아니었다. 그 누구의 딸도, 누이도, 아내도 아닌 순간, 아사야에겐 지저귀는 새처럼 끝도 없이 종알거리는 능력이 생겼다.

“나젤탄어를 배우면서도 가는 길은 전혀 몰랐었어. 바다를 건너기가 험하다고만 알고 있었지. ……그런데 지난여름에, 우회하지 않고도 곧장 향하는 뱃길이 뚫렸대.”

일부는 블란테에게 전해 듣고, 일부는 책을 통해 읽은 이야기였다.

“아졸가 기사단이 세이렌 둥지를 처리했다나 봐. 가디엘의 지휘로 속전속결이었다지 뭐야.”

저도 모르게, 아사야는 제가 알아낸 이야기를 마치 가디엘이 알려 준 것인 양 꾸며 전했다. 그것만으로도 기분이 나아졌다.

가브리엘은 눈을 크게 뜬 채 깜빡이질 않았다. 새로운 이야기에 몹시 집중한 기색이었다.

“내년 봄이면 새 항구를 개방할 거야. 가브리엘은 배를 타고 여행간 적 없지?”

드래곤의 콧잔등을 손끝으로 건드리며, 아사야가 물었다. 여행이라면 저 역시 떠나 본 적 없는 왕자비였다.

“항구 이름은 화이트 왕가의 성을 따서 지을 거랬어. ……마차를 타고 서쪽으로, 사막 도시가 나올 때까지 향하면 한나절이래. 그곳에서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면…… 큰 바위로 둘러싸인 해안가가 나오는데, 그곳이 나젤탄이야.”

수다를 떨며 아사야는 상상 속의 배에 올라탔다. 저와 가브리엘, 단둘이 떠나는 여행이었다.

망상 안에서 아사야는 챙이 넓은 밀짚모자를 썼다. 태어나 한 번도 밀짚모자를 써 본 일이 없어서, 아사야는 그 감촉까지는 상상하지 못했다. 두 팔과 어깨가 드러나는 시원한 원피스도 입을 것이었다. 몸을 훤히 드러낸다고 흉을 볼 시선들도, 상상 안엔 없었다.

가브리엘에게는 항해 모자를 씌워 주고 싶었다. 가브리엘의 무심하고 잘생긴 얼굴은 뱃사람이라기보다 배를 가진 소유주 같았지만, 아사야는 밀짚모자만큼이나 항해 모자를 궁금해 했다.

누구보다 키가 큰 가브리엘에게 금색 줄이 달린 항해 모자를 씌우면, 아주 멀리에서도 그가 잘 보일 것이었다. 그러면 여행을 떠나면서도 서로를 잃어버릴 걱정이 없었다.

파도를 가르는 배가 흔들릴 때면 가브리엘을 꽉 껴안고 소리도 질러 보고, 번갈아 손을 잡고 남색 바다를 들여다보고 싶었다.

“모두들 나젤탄을 자유의 나라라고 불러, 가브리엘.”

그렇게 여행지에 도착하면 서로만을 각자의 짐처럼 소중히 챙기면 그만이었다.

“그곳에선 드래곤 사냥이 금지되어 있어. 아주 오래전에…… 블란테의 할머니의, 고조할머니의 아버지 격 되는 조상님이 하프 드래곤이었대.”

쉴 새 없이 종알거리는 아사야의 목소리를 따라, 용의 고개가 슬그머니 기울어졌다.

“너에게도 그곳은 자유 국가일 거야. 드래곤을 신성시하고 숭배하는 곳이니까.”

가브리엘의 시선이 제 앞발로 향했다. 두툼하고 거대한 발은 암흑물질처럼 시커먼 비늘로 덮여 있었다. 그런 발로는 나젤탄으로 향하는 배에 오르기 어려웠다.

사막 도시를 지나 항구까지 가는 길이 한나절, 배를 타고 나젤탄에 도착하기까지 다시 사흘. 완전히 불가능한 이야기였다. 가브리엘의 상상은 거기에서 그쳤다.

인간에 비해 드래곤의 상상력은 궁핍했다. 상상 속에서도 그는 제 모자란 마력의 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지금의 폴리모프 능력으로는 당장 왕성 밖까지도 사람의 모습으로 걸어 나갈 수 없었다.

즐거운 듯 수다를 늘어놓는 아사야의 옆얼굴을, 드래곤이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곳에서도 그렇게 살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너랑 나랑……, 아무 걱정도 근심도 없이.”

천천히 안겨 오는 아사야의 몸을, 가브리엘의 단단한 손이 감쌌다. 그녀를 안아 주려 폴리모프한 것이었다. 그제도, 어제도 무리하게 모습을 바꾼 탓에 마력이 턱없이 모자랐다. 그래도 가브리엘은 고집을 부렸다.

그 탓에 완벽히 변하지 못한 눈동자가 파충류의 것처럼 번들거렸다.

아사야는 그 점을 지적하지 않았다. 가브리엘의 단단한 손에 허리를 맡긴 채, 그의 어깨에 이마를 기댈 뿐이었다.

아사야가 작게 미소 지었다.

“나에겐 네가 천공섬이야, 가브리엘. 너에게…… 내가 나젤탄이었으면 좋겠어.”

비유를 이해하기까지, 가브리엘에게는 몇 초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아.’

이내 가브리엘은 그 문장을 마음에 들어 했다. 입술 끝이 절로 말려 올라갔다.

나에게 너는 이미 그렇다…… 그렇게 답해 주기 위해 가브리엘이 입을 열었다. 그러나 아사야는 미소 지은 표정 그대로 까무룩 잠들어 버렸다.

오늘따라 지치고 아파 보이는 어린 인간을, 가브리엘은 조심스럽게 안아 들었다. 그러고는 카펫의 가장 푹신한 자리로 가 그녀를 내려놓았다. 제가 쓰기엔 지나치게 보드라운 쿠션 위에 머리를 내려 주자 아사야의 숨결이 고요해졌다.

그녀의 귓가에 왼손을 딛고, 가브리엘은 앉은 채로 허리를 바짝 숙였다. 잠든 아사야의 이마에 코끝을 대고, 그는 그녀의 살 내음을 들이마셨다.

이어서 까맣고 길게 뻗은 속눈썹을 바라보다가, 새근새근 작은 숨이 빠져나오는 코끝에 제 코 끝을 가져다 댔다. 거칠게 굴지 않으려 가브리엘은 가진 인내심을 죄 끌어다 썼다.

폴리모프를 한 몸뚱이와 열 개의 손가락, 사람의 목을 가누기가 어렵진 않았지만, 잠든 아사야를 깨우지 않는 일엔 많은 신경을 기울여야 했다.

즐거운 이야기를 조잘거리던 입술 위를, 가브리엘의 보라색 눈동자가 빤히 들여다보았다. 아주 느린 속도로 목을 숙이며 그는 제 얼굴의 각도를 살짝 바꿨다.

가브리엘이 아사야의 입술에 제 입술을 문질렀다.

보드랍고 폭신한 입술에 제 입을 붙인 채 가브리엘은 눈을 끔벅거렸다. 새액 새액, 아사야가 뿜어내는 약한 숨 때문에 인중이 간지러웠다. 이어 두세 번, 가브리엘은 연이어 아사야의 입술에 제 입을 붙였다.

입맞춤. 가브리엘은 그 표현이 마음에 들었다. 아사야와의 입맞춤은, 인간이 지어낸 행위들 중 가장 좋은 일이었다.


 

.*. *. *. *. *. *.


 

잠결에서 깨어났을 때 아사야의 옆자리엔 거대한 드래곤이 누워 있었다. 어느새 그녀의 몸은 푹신한 카펫 위에 뉘어져 있었고, 머리는 쿠션이 받치는 채였다. 졸린 손으로 가만히, 아사야는 드래곤의 콧잔등을 쓰다듬었다. 가브리엘은 보라색 눈을 크게 뜬 채 아사야를 바라보고 있었다.

느릿느릿 목을 뻗어, 아사야는 가브리엘의 코 위에 입을 맞췄다. 가브리엘이 보여 준 반응은 뜻밖이었다. 고개를 뒤로 빼내면서 아사야의 키스를 피한 것이었다.

이내 시선이 아사야의 잠을 깨웠다.

‘우리만 있는 게 아니구나.’

얼음물을 끼얹은 듯 불쑥 정신이 들어 아사야는 몸을 틀었다. 성의 높다란 샹들리에 불빛을 받으며 선, 야베스 세일산이 보였다.

금발 머리칼은 빛을 받아 백색처럼 보였고 푸른 눈동자는 음영이 져 보다 짙었다. 그가 아사야를, 그리고 가브리엘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언제 오셨어요?”

당황한 기색을 감추려 애쓰며, 아사야는 흐트러진 머리칼을 어깨 한쪽으로 쓸어 모았다.

“내가 들어오면 안 되는 곳인가?”

야베스가 반문했다.

그의 목소리를 들으니 남아 있던 잠기운마저 화들짝 달아나는 듯했다. 아사야는 살짝 이를 악물었다.

손님이 오거든 누구이건 들이지 말고, 먼저 문을 두드리고 말을 먼저 전하라 일러둔 채였다. 그러나 경비대원은 왕자비의 말보다는 야베스의 지시를 따른 모양이었다.

구겨진 드레스를 정리하며 아사야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대로 가브리엘과 함께 밤을 보내고 싶었지만 안 될 일이었다.

무엇보다도, 아사야는 야베스 세일산이 가브리엘에게로 다가오지 않았으면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제가 먼저 그에게 다가가야 했다.

‘언제부터 보고 있었던 거지?’

마음이 어지러웠다.

“깨우시지 그러셨어요. ……제 모습이 단정하지 못한데.”

아사야가 조심스레 속삭이자,

“부부 사이에 그런 것을 따질 필요가 없지.”

야베스가 대꾸했다. 잠든 모습을 보았다는 것은, 깨어난 뒤 제가 드래곤의 코에 입 맞춘 것도 보았다는 의미였다. 아사야는 다소 불안해졌다. 입맞춤이야 작은 애정 표현에 불과하였지만 야베스 세일산이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알 수 없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야베스는 크게 동요한 기색이 아니었다. 다만 손짓으로 아사야를 불러 제 가까이 서게 할 뿐이었다. 그의 손짓에 아사야는 순종적으로 다가가 섰다.

야베스의 손이 아사야의 가느다란 턱 아래에 닿았다. 그가 제게 키스하려는 것을 알고, 아사야는 고개를 숙였다.

“가브리엘이 보잖아요.”

아사야가 속삭였다. 그러자 야베스가 피식 실소를 흘렸다. 눈치를 보아 화가 난 것 같진 않았다. 드래곤의 눈치를 살피는 말이 우습다는 기색이었다.

“뭐 어때. 사람도 아닌걸.”

“가브리엘은…….”

재빨리 아사야는 주어를 바꿨다. ‘가브리엘’이 아닌 ‘드래곤’으로 부르는 게 나았다. 적어도 야베스 앞에서는 그래야 안전할 성싶었다. 제게 있어 가브리엘이 중한 것을 모르는 왕자가 아니었으나, 그 애정의 깊이까지 드러낼 필요는 없었다.

“드래곤은 사람보다 똑똑하대요.”

아사야가 대꾸하자,

“당신 강아지를 아주 높게 평가하는군.”

야베스가 즉답했다. 이어, 그의 손이 아사야의 드레스 스커트에 달라붙었다. 그가 제 치맛자락을 말아 쥐는 것을 알고, 아사야는 비명을 지를 뻔했다. 놀란 몸이 제자리에서 살짝 튀었다.

“강아지 앞이라 해도 이상한걸요.”

연이은 거절에 야베스의 미소가 흐려졌다. 이내 그는 아사야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샹들리에 빛이 번들대는 아사야의 눈은 태양 같았다. 샛노란 눈빛은 그저 반짝댈 뿐이어서, 담긴 감정을 읽기가 어려웠다.

“아버지의 성에서 이러고 싶지 않아요.”

아사야가 말했다. 남편의 화를 돋우지 않고자 덧붙인 변명이었다. 야베스 역시 그 뜻을 알았다.

‘싫어? 싫다고…….’

불쑥 솟으려던 성질이 입천장까지 닿았다가, 푹 고꾸라졌다. 눈썹을 찡그린 채 야베스 세일산은 입을 열었다가, 다물었다. 그리고 알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혔다.

그게 실망감이란 걸 받아들이기까진 몇 초의 시간이 더 필요했다.

‘내가 만지는 게 싫다고? 이미 안긴 몸인 주제에.’

여러 의문이 왕자의 머리를 채웠다. 아사야 세일산은 드래곤을 볼모로 제게 구속된 게 아닌가…… 과연 이 여자가 나를 사랑하기나 할까? 답은 이미 알고 있었다.

아사야 세일산은 그를 사랑하기는커녕 좋아하지조차 않았다.

감정 따위가 무슨 의미냐고 생각한 날도 있었다. 돌이켜 보면 경솔한 시절이었다. 형님께서도 가지지 못한 여자를 제 침대에 눕혔으니, 이제 그녀의 환심은 얻을 필요가 없다고 오판했다. 아사야의 이름 뒤에 제 성씨를 붙였고 처녀를 빼앗았고 그 사실이 공공연하니, 감정 따위가 어찌 되었건 제 여자라 생각했다.

그러나 아니었다. 그런 방식으로는, 그는 아사야를 제 여자로 가질 수는 있되 그 자신이 아사야의 남자가 될 수는 없었다. 아사야에게 있어 그는 드래곤을 볼모 삼아 그녀를 가둔 악당에 불과했다.

아마도 평생 그럴 것이었다, 아사야가 그를 진심으로 사랑해 주지 않는 한은.

“나가지.”

화를 내고 밀어붙이는 대신 야베스는 손을 거뒀다.

“당신을 데리러 여기까지 왔으니.”

안심하며 아사야는 그와 함께 성문을 지났다. 보통의 부부 관계라고는 믿을 수 없게 낯선 두 사람의 뒷모습을, 드래곤의 눈이 좇았다.

잠깐이나마 그를 돌아본 이는 아사야가 아니었다. 야베스 세일산의 시선이 짧은 순간 검은 용에게 닿았다가, 떨어졌다. 그러고는 홀로 실소했다.

‘귀여운 목줄이라도 선물해야 되겠어.’

시커먼 마물 따위가 제 경쟁 상대가 될 수 있다고는 생각지도 않는 왕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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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야와 왕자가 사라진 자리에 가브리엘은 덩그러니 남았다. 눈 하나 꿈쩍하지 않고 드래곤은 돌처럼 굳은 채, 제 비늘 위에 닿던 아사야의 감촉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샹들리에 불을 끄고 성문을 잠그고자, 경비대원이 들어섰다. 왕자비의 부탁을 무시하고 왕자에게 성문을 열어 준 남자였다. 얼마의 돈을 받았는지 주머니가 두둑했고 걸을 때마다 짤랑짤랑 소리가 났다.

그는 힐끔 드래곤을 바라보았다가 서슬 퍼런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치자 어깨를 떨었다.

“하, 빌어먹을 도마뱀 눈깔…….”

가시처럼 끝이 일어난 드래곤의 비늘을 무시하며, 그는 혀를 찼다.

“언제 봐도 꺼림칙하다니까.”

하여간 공주님은 취향도 특이해…… 혼잣말을 하며 그는 멀찍이 섰다.

속을 알 수 없는 거대한 마물을 매일 봐야 한다는 건 끔찍했지만, 베데르 성을 지키는 업무 자체는 누구나가 꿈꾸는 공직이었다. 갓 완공된 성문 앞이니 환경도 쾌적했으며 오가는 이도 많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대륙에서 제일 예쁜 여자의 얼굴을 매일 볼 수 있어 좋았다. 아사야 세일산은 만인의 신기루 같은 여자였다.

‘못 오를 나무라고 훔쳐보지 말란 법은 없지.’

특히나 오늘은 돈도 벌고 둘째 왕자의 호감도 샀으니, 이런 게 호시절인가 싶었다. 왕자비는 착한 여자이니 남편에게 성문을 열어 줬다고 저를 혼내지 않을 것이었다. 불러다 꾸중을 한다 해도 그에겐 오히려 좋은 일이었다.

‘공주랑 대화했다고 다들 부러워하겠지.’

그러니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흥얼거리며 복도의 촛불부터 불어 끄는 그의 뒤로,

똑똑.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떠났던 왕자님께서 돌아오셨나, 생각하며 경비대원은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성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어떠한 인기척도 없었다.

노크 소리는 밖에서 들려온 게 아니었다.

드래곤의 날카로운 꼬리 끝이,

똑똑.

문을 두들기고 있었다.

경비대원의 시선이 느릿느릿 가브리엘의 꼬리에서 시커먼 몸뚱이로 향했다. 고개를 멀리 돌릴 필요도 없었다. 쩍 벌어진 거대한 입이 그의 얼굴 앞에 있었다.

목구멍 안은 칠흑처럼 컴컴했고 날카로운 이빨이 칼날처럼 빛났다.

“악…….”

비명을 지를 새도 없었다. 검은 용의 입 안으로, 경비대원의 머리통과 왼쪽 어깨가 들어갔다. 나뭇가지 부러지는 소리를 내며 그의 몸이 꺾였다.

꿀꺽.

세 입에 나누어, 가브리엘은 그를 삼켰다.

그날 밤, 베데르 성을 밝힌 샹들리에는 꺼지지 않았다.


 

.*. *. *. *. *. *.


 

블란테가 추천해 준 책이 벌써 네 권째였고, 아사야가 완독한 책도 네 권째였다. 개중 하나는 나젤탄어로 쓰인 경제학 서적으로, 첫째 왕자비께서 제 것을 직접 빌려준 책이었다.

어려운 내용에 외국어로 쓰인 책인지라, 옆에다 사전 하나를 낀 채로 어렵사리 읽어 내린 아침이었다. 책의 두 번째 목차에 메모지를 끼워 넣은 뒤 아사야는 기지개를 길게 켰다. 그때까지는 이 책이 오늘의 가장 큰 난제이리라 의심치 않았다.

왕실 기사단장, 페드릭이 저를 찾기 전까지는 그랬다.

도서관에서 걸어 나오는 아사야의 앞을 가로막을 적에, 그는 무뚝뚝한 얼굴이었다. 예를 갖춰 인사하기는 하였으나 그 태도는 살갑지도, 그렇다고 차갑지도 않았다.

“몇 가지 여쭐 것이 있습니다.”

그런 말을 대뜸 내뱉는 기사였다. 두꺼운 책을 나누어 안아 든 유라와 사라가 그 불경한 태도를 매섭게 쏘아보았다.

그 순간 아사야는 오늘 하루가 힘겨울 것임을 직감했다. 경험에 따르면 아사야의 직감은 틀린 적이 없었다. 누구이건 남자가 제 앞을 가로막고 설 적에는, 나쁜 일이 생기곤 했었다.

바람이 차가우니 한동안 외출은 삼가시란 명입니다, 아가씨께선 대련장에 출입하실 수 없습니다, 방으로 돌아가십시오…… 싫은 말을 꺼내던 굵은 목소리들이 메아리처럼 울렸다.

뒤이어 페드릭이 들려준 이야기는 그러나 뜻밖이었다. 지난 한 주간 성내에서 벌써 세 명의 실종자가 발생했단 말이었다.

“하나는 경비대 잡일을 돕는 심부름꾼이지만, 둘은 베데르 성을 지키는 경비대원입니다. 세 사람 모두 공무를 보던 중 왕성 안에서 실종되었습니다.”

뒤이어 나올 말이 무언지 알고서 아사야는 표정을 굳혔다.

“……혹시 블랙 드래곤과 관련된 일인지, 공주님께서 아시는 바가 없으십니까?”

드래곤이 인간을 잡아먹은 게 아니냐, 그렇게 묻는 소리였다.

“페드릭 경.”

아사야가 고개를 내저었다. 반사적인 반응이었다.

실종된 이가 세 명이건 서른 명이건 간에 가브리엘이 저지른 짓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적어도 아사야가 생각할 적에 가브리엘은 아닐 것이었고 아니어야만 했다.

남들이 보기에 가브리엘이 ‘그럴 수는 있는’ 존재임은 저도 알았다. 그렇더라도, 가브리엘에게는 그럴 이유가 없었다.

“가브리엘은 나의 말을 듣는 나의 드래곤이에요. 가브리엘을 의심하는 건 나를 의심하는 일이에요.”

시체가 발견된 것도 아니며 핏자국이건 무어건 증거 하나 보이질 않으면서 다짜고짜 의심이라니, 아사야에게 그 주장은 허무맹랑한 모함이었다.

만에 하나 범인이 가브리엘이라면 어떡해야 하나, 그런 고민 한 점 들지 않았다. 아사야는 그를 믿었다. 그는 이유 없이 사람을 잡아먹는 끔찍한 마물이 아니었다.

만에 하나 가브리엘이 경비대원을 잡아먹었다고 하더라도, 거기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었다.

아사야라고 바보는 아니었다. 그는 경비대원들이 힐끔힐끔 보내오는 눈짓들을 알았다. 그들이 아닌 가브리엘에게 보여 주기 위해, 때론 저 스스로를 가꾸는 일이 즐거워 드레스를 차려입은 날마다 저를 위아래로 훑어보는 시선들이 빤했다.

만일 가브리엘이 그들 중 하나를 죽여 버렸다고 해도, 그럴 만한 시시비비가 필히 있을 것이었다.

아사야는 얼굴을 단단히 굳혔다.

“그러니 다시 말해 보세요. 지금 나를 의심하는 건가요?”

그러자 페드릭이 왼손을 제 허리춤에 올렸다. 검집이 달린 벨트를 만지작대는 손길에 아사야의 기분은 더욱 상했다.

머뭇거리며 그는 둘째 왕자비의 눈치를 넌지시 살폈다. 그러고는 말했다.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 의심을 없애고자 확인하려는 겁니다. 예민하게 반응하실 일은 아닙니다.”

아사야의 목이 턱 막히는 듯했다. 꼭 제 반응이 감정적이며 잘못되었단 소리 같았다. 뒤이어 페드릭은 그녀의 숨까지 턱 막아 놓았다.

“베데르 성과 용의 철문 열쇠를 며칠간 왕실 기사단에게 맡겨 주시겠습니까?”

그러자 불쑥,

‘어떻게 감히 내게 그런 말을 하지?’

그런 생각이 아사야를 사로잡았다.

뒤이어 그녀는 스스로의 생각에 화들짝 놀랐다. 가디엘의 명령으로 제 외출을 가로막던 아졸가의 기사들 앞에서도 이렇게 화난 적이 없었다. 용의 철문을 가로막던 경비대원을 마주하면서도 화가 나진 않았었다.

그런데 오늘은, 왕실 기사단장인 페드릭이 그럴 법한 요청을 해 오는데도,

‘감히 나에게…….’

울분이 솟았다.

이내 아사야는 깨달았다. 오늘이 되기 전까지 그녀에게는 ‘나’가 없었다. 아버지, 가디엘, 야베스, 또 수많은 타인만이 있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달랐다. 오늘, 아사야에겐 아버지의 이름을 딴 성이 있었다. 나이 든 유모와 어린 시녀 둘이라지만 제 뒤를 따르는 제 편이 있었다. 새로운 친구이자 친절한 선생인 블란테가 있었고, 누구도 아닌 아사야, 저에게 기대 주고 저를 지켜 주는 가브리엘이 있었다. 그렇게 아사야에게 ‘나’가 생겼다.

그러자 기묘한 흐름이 아사야의 심장을 채웠다. 화가 나는 동시에, 화를 낼 줄 아는 스스로가 자랑스러워 기분이 좋았다. 오늘날에서야, 그녀에게도 그녀 자신이라는 존재가 중요해졌다.

“페드릭 경.”

울렁거리는 가슴을 억누르며, 아사야가 입을 열었다. 그 순간 머릿속에 떠오른 적절한 답이 두셋 있었다.

영웅 베데르의 딸에게 그런 요구를 하다니, 혹은 야베스 세일산의 아내에게 감히 그런 말을…… 혹은 폐하께서 나를 공주라 부르시건만 경께서 함부로…….

복잡한 머리보다 혓바닥이 빨랐다.

“내가 경의 부하로 보이나?”

아사야의 자세는 귀족 아가씨의 예절에 한 점 어긋남 없었다. 허리는 꼿꼿이 세웠고 쭉 뻗은 목은 곧았다.

귀족 아가씨라면 기사님의 얼굴을 똑바로 노려봐선 안 됐다. 그러나 아사야는, 두 눈을 치켜뜸으로써 그 틀에서 벗어났다. 곱게 지어야 할 미소가 사라진 얼굴을 찡그리기까지 했다.

여름날 해바라기 같던 얼굴이 대번에 서늘해졌다. 페드릭의 두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며, 아사야가 말했다.

“대답해.”

그러자 마법 같은 일이 일어났다. 아사야의 고개가 올라간 대신 페드릭의 고개가 내려간 것이었다. 두 눈을 내리깔며 그는 허리춤에 올린 손을 내렸다.

“아닙니다, 공주님. ……실례를 범했습니다.”

그가 사과했다. 제가 가진 열쇠로 문 하나 열지 못하게 가로막아, 비아탄 아멕까지 불러내게 한 왕실 기사단장의 패배였다.

벅차고 당황스러운 순간이었다. 그러나 아사야는 ‘괜찮아요’ 하고 그를 달래 주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화를 내서 미안해요’ 하고 오히려 제가 사과를 해야 할 것 같았다.

그의 기분을 풀어 줄 다정한 미소와 예의 차린 말들을 참아내기가 어려웠다. 그래도 아사야는 해냈다. 입을 꽉 다물고 무표정을 애써 고수하며, 아사야는 인사 없이 그를 떠났다.

아사야의 인생을 조종해 온 가장 큰 거짓말은 따로 있었다.

왕자와 결혼하는 것이 여인으로서 최고의 축복이라는 동화책, 본도 세일산으로부터 도착한 편지를 감춘 가디엘, 저를 사랑하며 평생 아껴 주겠다던 야베스의 거짓말도, 그 거짓말에 비하면 새 발의 피였다.

최악의 거짓말은 ‘착한 것이 좋은 것’이란 말이었다.

아사야 아졸은 착하게 굴었을 뿐인데 아졸 성에 갇혀 살았다. 착하게 지냈을 뿐인데 외로워졌다. 착하게 순종했을 뿐인데 아사야 세일산이 됐다. 착하게 굴어 봐야 그녀를 제외한 다른 모든 이들이 좋을 뿐이었다.

때론 남에게 착한 만큼 스스로를 생각해야 했다. 아사야 자신에게 좋은 일들은 착하기를 포기한 때에 생겼다.

그렇게 명료한 진실을 아사야는 스무 살이 되어서야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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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이 지나기가 무섭게 비아탄 아멕을 찾은 방문객이 있었다. 문간에 선 채 어색한 표정을 지어 보이는 페드릭 바벨을, 비아탄은 힐끔 살폈다. 그러고는 아끼는 검의 날을 마저 헝겊으로 문질러 닦았다.

“비아탄 경.”

고개를 숙이며, 페드릭이 인사했다.

천지의 머리이신 사렙탄 세일산을 제외한다면, 페드릭 바벨에겐 상관이 없어야 했다. 보편적으로 왕실 기사단장은 ‘왕의 오른팔’이었고, 왕에게 충성하며 그 누구의 명도 따르지 않아야 했다. 그러나 오늘날 이 대륙 안에, 사렙탄의 오른팔은 비아탄 아멕이었다.

스무 해 전 기사로서 이름을 알리고 명예를 거머쥔 전쟁 영웅이 둘 있되, 베데르 아졸과 비아탄 아멕이었다. 베데르 아졸은 왕실 정치에서 완전히 손을 떼 버리고 자신의 영지에 틀어박혔지만, 비아탄 아멕은 정반대였다. 그는 사렙탄 세일산의 옆자리에 머무르며 망가진 대륙을 고쳐 놓는 일에 앞장섰다. 절대자인 왕명에 영웅의 지지가 뒤따르니 사렙탄 세일산에겐 두려울 것이 없었다. 그렇게, 비아탄 아멕은 왕실 기사단장직을 내려놓은 뒤에도 페드릭의 상관이었다.

왕의 오른팔 되시는 비아탄 아멕을, 페드릭이 먼저 찾는 일은 아주 드물었다. 가장 최근에 직접 찾은 일이, 용의 철문 앞에서 아사야 세일산과 실랑이하던 때이니 오늘은 몇 달 만의 방문이었다.

“공주님께서 베데르 성을 살펴보길 원치 않으셔서 조사가 힘듭니다.”

비아탄은 약간의 데자뷔를 느꼈다. 오늘 페드릭이 가져온 용건도 지난 일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묵묵히, 비아탄은 헝겊에 묻은 먼지를 털어 냈다. 그리고 답했다.

“성문을 개방한 지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았다. 왕실 기사단이 사건 조사를 하겠다고 드나드는 일을 허락하실 리 만무하지.”

냉정한 대꾸에 페드릭의 발뒤꿈치가 들썩거렸다.

‘왕자비에게 기사단의 요청이 무시를 당했는데, 경께서는 억울하지도 않습니까?’

그런 항의를 담은 동작이었다.

하지만 비아탄은 여느 기사들과는, 특히나 페드릭과는 종류가 다른 남자였다. 그는 여자의 거절이 남자의 거절보다 유별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고, 누구의 거절에건 상처 입지 않는 단단한 자존심을 갖고 있었다. 그러니 페드릭의 항의를 이해하기는커녕 그의 울화에 공감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끝내 페드릭은 제가 먼저 내뱉기에 수치스러운 요청을 꺼냈다.

“비아탄 경께서 나서 주실 순 없으시겠습니까? ……공주님께서도 경의 말씀이라면 들어주실 겁니다.”

그에, 비아탄은 다소 의아해졌다.

바벨 가문의 장남인 페드릭은 출신이며 실력, 외모 하나 빠짐이 없어 언제고 의기양양한 기사였다. 왕명에 따라 일의 수습을 함께하고자 비아탄을 찾은 적은 있었지만, 제가 맡은 일을 누구에게 완전히 일임하는 경우는 없었다.

그런 그의 기가 꺾인 연유가 궁금했다.

‘공주께서 자네 뺨이라도 후려치시던가?’

만에 하나 그렇다면 겉으로는 심각한 시늉을 하고 속으로는 웃을 일이었다.

궁금한 것을 묻는 대신, 비아탄은 무표정한 얼굴로 알았다는 답만을 들려주었다. 그렇잖아도 실종된 경비대원 중 하나에 관심이 가던 참이었다. 머리는 희끗희끗하고 얼굴엔 그을린 자국이 남은, 경비대원의 이름이 톰이었다.

제 나름대로는 ‘비아탄 경의 정보원’이라는 그럴싸한 임무를 맡아 드래곤과 둘째 왕자비의 상태를 살피던 놈이기도 했다.

야베스 왕자와 아사야 세일산의 사이가 좋아 보이지 않는다거나, 공주님께서 우울한 얼굴로 찾아와 베데르 성 안에서 드래곤과 오래도록 시간을 보냈다거나, 그 외에도 새로운 소식이 생길 적마다 그는 비아탄을 찾았다.

‘정보를 팔던 것을 들켰나?’

눈을 가늘게 뜬 채 비아탄은 헝겊을 내려놓고 검을 눕혔다.

생각에 잠겨, 그는 제 까칠한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검을 다루느라 굳은살이 박인 그의 손가락은 몹시 거칠고 지문이 뭉개진 채라, 제 뺨을 만지면서도 남의 것 같은 감촉을 안겨 줬다.

‘……들켰다면, 누구에게?’

비아탄의 머릿속에 세 가지 경우의 수가 떠올랐다.

첫째로 의심해 볼 이는 아사야 세일산이었다. 저를 향한 경비대원의 감시를, 그녀가 알아채는 일은 시간문제였다. 그러나 아사야는, 다짜고짜 실종을 시키는 방식으로 일을 처리할 성격은 아니었다.

만약 톰이 감시자임을 알아챘더라도 그녀는 누구의 명령을 따르는가를 먼저 따져 그를 타이르고, 직접 저를 찾아올 사람이었다.

둘째로 아사야 세일산의 유모와 시녀들을 고려해야 했다. 아사야 본인보다도 그녀의 안위를 걱정하며 따르는 이들이니, 수상한 경비대원을 의심쩍게 생각했을 수 있었다.

그런들, 유모도 시녀들도 아사야 세일산에게 가장 먼저 보고를 했을 테니 다시 원점이었다.

유모도 시녀들도 아닌, 왕자비의 검은 드래곤이 범인일 가능성도 있기는 했다.

‘가브리엘.’

여섯 해 전, 어떠한 이름으로도 불리지 않던 시절 드래곤에게는 이미 경비대원을 죽인 경험이 있었다.

그러나 당장은, 비아탄은 그 생각엔 힘을 싣지 않았다.

‘드래곤을 길들이겠다’는 명목으로 무기를 든 경비대원을 드래곤과 함께 가둔 이는 따로 있었다.

세 번째 경우의 수, 야베스 세일산이었다.

그는 제 머리 위에 있는 존재라곤 절대자이신 아버지뿐이며, 사람 목숨 보기를 돌같이 하는 왕자였다. 이전에도 그를 따르던 경비대원 네 명이 실종된 일이 있었다. 그는 모른다며 잡아떼었지만, 비아탄은 시체 네 구가 성벽 남쪽의 지하통로를 지나간 것을 이미 알았다.

“그 시신이 어찌나 처참하게 찢겼는지, 수레에서 손가락인지 발가락인지 모를 것이 떨어지지 뭡니까? 다리 밑으로 흘러 들어간 고것을 여직 못 찾았습죠.”

당시 정보원의 말을 되짚어 보면, 야베스 세일산은 이번 사건의 범인으로 가장 그럴싸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왜?’

동시에 적절한 동기를 찾을 수 없는 인물이기도 했다.

본격적인 수색에 앞서, 비아탄은 아사야를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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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아탄이 방문했을 때 아사야는 가벼운 드레스와 부드러운 남색 로브로 몸을 감싼 채였다. 빗어 내린 머리칼은 찰랑거렸고 몸에서는 비누 향기가 풍겼다. 목욕을 마친 지 얼마 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갑작스레 찾아와 송구합니다. 잠시 후에 다시 뵐 테니 시간을 내어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고개를 숙이며 비아탄이 묻자,

“그럴 것 없어요.”

아사야가 답했다.

“유라. 경을 응접실로 모셔 줘. ……옷을 갖춰 입고 따라갈 테니, 잠시 기다려 주세요.”

그녀는 왕의 오른팔에게 기꺼이 시간을 내어 주었다. 상냥하신 왕자비로부터는 페드릭이 시무룩해진 이유를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의아함이 가중된 채 비아탄은 응접실 자리에 앉아 시간을 보냈다. 기다림은 길지 않았다. 제 얼굴과 몸을 힐끔힐끔 훔쳐보는 시녀의 시선이 불편해지기 직전에, 아사야가 응접실로 찾아들었다.

가타부타 말 돌릴 것 없이 비아탄은, 그녀에게 이제까지의 일에 대하여 알려 주었다. 경비대원 둘과 심부름꾼 한 명이 연이어 실종되었고 제가 직접 수사를 시작하게 되었다는 명료한 설명이었다.

“그러니 몇 가지 여쭙겠습니다.”

비아탄의 말에, 아사야는 시녀를 시켜 따듯한 차를 내어 오게 했다.

비아탄이 확인코자 원한 것은 아사야 세일산이 범인이냐 아니냐가 아니었다. 그녀가 제가 붙인 정보원을 알아챘나, 그뿐이었다.

대화 내내 비아탄은 실종자 ‘톰’을 강조하여 말했다. 그러나 아사야의 표정에는 미동조차 없었다. 실종된 경비대원의 이름만으로는 그가 누구인지 구분하지 못하는 기색이었다.

두 눈을 둥그렇게 뜬 채 그녀는 잠시간 생각에 잠긴 듯하더니, 이내 사과했다.

“도움이 못 되어 경에겐 미안해요.”

비아탄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닙니다. 갑작스러운 대화에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어 비아탄은 목소리를 살짝 가다듬었다. 실종된 이들 중 하나가 제가 붙인 정보원임을 고백하고, 사과할 생각이었다. 아졸가의 아가씨에게 왕성은 위험한 곳이라 생각했습니다…… 첫 문장은 그 정도면 적당하지 싶었다.

비아탄이 입을 연 순간,

“한 가지…… 여쭐 게 있어요.”

아사야가 물었다.

“나 이외에 다른 용의자가 있나요?”

뜻밖의 질문이었다. 비아탄은 그녀의 표정을 눈여겨 살폈다. 금색 눈에는 호기심인지 두려움인지 모를 감정이 실려 있었다.

추운지, 두 손은 따듯한 찻잔을 감싼 채였다. 비아탄은 아사야의 여린 손을 관찰했다. 손가락은 가느다랗고 손톱이 둥근 손은 새하얬다. 누구를 죽이기는커녕 때려 본 일도 없을 것이 뻔했다.

“공주님께선 용의자가 아니십니다. 그저 참고할 만한 내용을 알고 계실까 하여 찾은 것뿐이니 오해는 말아 주십시오.”

비아탄이 답했다. 무척 정중한 태도였다.

“……이외의 의심 가는 이가 누구인지는 설명해 드리기 어렵습니다. 송구합니다.”

기사가 말을 마치자 아사야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경께서 사과하실 일은 아니다, 수사가 잘 풀리셨으면 한다…… 그런 무난한 대답이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대화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아사야는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비아탄의 눈에 그녀는 여전히 침착한 듯 보였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사실은 한계였다. 아사야는 불안한 나머지 더는 미소를 지어 보일 수 없었다.

응접실을 달아나듯 떠나야만 했다.

‘경이 의심한다는 이외의 인물이…… 가브리엘이면 어쩌지?’

오전과는 사뭇 다른 긴장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기사단장의 난데없는 방문까지는 그러려니 하였지만, 일을 다루는 이가 비아탄이라면 그 무게가 확연히 달랐다.

왕의 오른팔이 직접 수사하는 일이니 왕께서 수사하는 일과도 다름없었다.

‘단순한 실종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어. 마치…… 누가 죽이기라도 했단 것처럼.’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이치였다. 성안에서 일하고 성안에서 살던 이들이 셋이나 연이어 사라졌으니, 큰 해를 입었거나 살해당했다는 가정을 염두에 두는 게 자연스러웠다. 그러나 그 용의 선상에, 가브리엘이 올라서는 안 됐다.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즉시 베데르 성으로 향하려다, 아사야는 발걸음을 늦췄다. 면담을 가진 직후 드래곤을 찾았다가는 비아탄의 의심만 더 살 것 같았다. 가브리엘이 의심받는 일만큼은 최대한 피하고 싶었다.

‘누구를 해쳤다는 의혹만으로도 위험한데 실종이라니……, 다시 지하 감옥으로 돌려보내라고 명이라도 떨어지면…….’

오후 내내 아사야는 애꿎은 산책로를 빙빙 돌았다. 우울한 얼굴로 이리저리 서성거리는 왕자비의 뒤를, 엠마오와 시녀들이 따랐다.

불안을 감추지 못하는 아사야의 앞을,

“아가씨.”

엠마오가 가로막았다.

그녀는 두 손으로 어린 왕자비의 어깨를 감쌌다. 그제야 아사야가 걸음을 멈췄다. 홀로 늘어놓던 불안한 생각들도 우뚝 그쳤다.

왕자비가 되고 공주라 불린 뒤에도 아사야는 엠마오에게 그저 ‘아가씨’였다. 저를 오래도록 봐 오면서도 제 비밀을 캐낸 일 없는 유모를, 아사야는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엠마오.”

그리고 속삭였다.

“만약 내가 어떤…… 나쁜 짓을 저지른다면, 벌을 받아 마땅한 아주 나쁜 짓이라면…… 엠마오는 어떻게 하겠어?”

어찌해야 좋을까 답을 얻고자 물은 말이었다. 대번에, 엠마오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이마 위의 주름은 더욱 깊어졌고 입술 사이로 작은 탄식이 새어 나왔다. 놀란 듯한 유모를 달래고자, 아사야는 그녀의 손을 제 어깨에서 내렸다.

그러고는 두 손으로 맞잡아 꼭 쥐었다.

“그냥 가정이 그렇다는 거야. ……만약에, 아주 만약에 그렇다면 말이야.”

덧붙인 말에 안심한 듯, 엠마오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답했다.

“만약에, 아주 만약에…… 그렇다면…… 저는 누구도 알 수 없게 아가씨의 잘못을 감출 거예요.”

망설임 없이 단호한 대답이었다. 또한 아사야가 원했던 답이었다.

“정말로 큰 잘못이라 해도? 그래서 모두가 범인을 찾는다고 해도?”

아가씨께서 연이어 묻자,

“그렇다면 더더욱 아가씨를 지키겠어요.”

유모가 목소리에 힘을 실었다.

방황을 멈추고, 아사야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석양이 지는 늦은 오후였다. 가브리엘과 약속한 시간, 매일같이 베데르 성을 자주 찾던 때였다.

항상 방문하던 시간이니 지금은 드래곤을 만난다 해서 누구의 의심을 살 걱정이 없었다.

아사야는 제 늙은 유모를 힘껏 끌어안았다.

“고마워, 엠마오.”

이내 둘째 왕자비가 베데르 성으로 향했다.


 

.*. *. *. *. *. *.


 

베데르 성의 문이 조용히 열렸다. 늘 그렇듯 유모와 시녀들을 유리 정원에 남겨 둔 채 아사야는 홀로 성안으로 들어섰다.

거대한 드래곤이 카펫 위에 모습을 보일 거라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았다. 성내는 텅 비어 있었고 그녀의 검은 드래곤은 어디에도 없었다.

당황한 채 아사야는 등 뒤로 문을 닫았다. 가브리엘이 머물던 카펫 자리 위에 거대한 책들이 놓여 있었다. 수십 번은 읽은 것처럼, 두꺼운 가죽 표지가 용의 발톱 자국으로 해진 채였다.

가만히, 아사야는 성내를 회오리 모양으로 감싼 원형 계단을 올려다보았다. 소리 내어 가브리엘을 부르는 대신에 아사야는 계단을 올랐다.

그녀는 어쩌면 제 드래곤이 망루에 올랐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비가 오는 날이면 그곳에서 날개를 적시던 가브리엘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망루까지 오를 필요가 없었다. 가브리엘은 벽이 높은 2층 통로에 서 있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남자인 채였다.

“…….”

저도 모르게 아사야는 숨소리를 죽였다.

아사야가 온 것도 모를 지경으로 가브리엘은 집중한 채였다. 벌거벗은 몸은 군살 하나 없이 근육질로 덮여 있어, 성인을 그려 놓은 회벽 속의 인물 같았다. 그는 색유리를 통과하며 스며든 빛 아래에 손을 대고 있었다.

그의 손바닥 위로 성인의 뺨을 붉힌 유리의 빛 조각이 닿았다가, 흩어졌다.

색색의 빛 조각에 두 손을 댄 채 이리저리 움직이는 가브리엘을, 아사야는 가만히 바라보았다. 천천히 손을 들고 제 피부를 덮는 빛을 구경하는 가브리엘은 호기심 많고 심심해 보였다. 눈이 부신지 고개를 갸웃거리기도 했다.

키는 저보다 12델랑(약 30cm)은 더 크고, 여느 기사단도 따라잡지 못할 체구의 근육질 남자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사야는 그를 아이처럼 보았다.

가브리엘의 훤히 드러난 왼쪽 어깨에는 길게 찢긴 흉터가 남아 있었다. 찔린 자국이 허옇게 변색된 채였다. 열 살의 아사야가 붕대를 감아 주었던 날개 자리였다.

이내 아사야는, 이제껏 가브리엘이 저에게 맨몸을 보여 주지 않은 이유를 알아챘다. 어깨의 상처는 시작에 불과한 것이었다.

단단한 근육이 깎아 놓은 돌처럼 붙은 등허리가 온통 흉터 범벅이었다. 신께서 번개를 쥐고 내리찍은 듯 거대한 흉터가 그의 척추를 타고 흘러내렸다. 보는 것만으로도 치열한 상처의 고통이 느껴지는 듯했다.

도드라진 날개 뼈와 벌어진 어깨 밑으로 이어지는 허리와 골반은 흉곽에 비해 좁고 늘씬했다. 아사야의 매끈한 허리와 달리 가브리엘의 옆구리는 덩어리진 근육 선으로 굴곡진 형태였다.

그 밑으로 상체에 비해 좁게 느껴지는 엉덩이가 보였다.

아사야는 제게 없는 딱딱한 근육질 허리와 엉덩이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리고 화들짝 놀랐다. 그가 벽화를 향해 돌아 걷는 순간 다리 사이로 비친 남성 때문이었다.

“꺅!”

놀라 소리를 내며 아사야는 후다닥 몸을 돌렸다. 난간을 꼭 쥔 손에 땀이 찼다.

“가, 가브리엘, 나 왔어!”

애꿎은 바닥을 노려보며 아사야가 말했다. 놀란 탓에 목소리가 커졌다. 부끄러움에 얼굴이 타오르듯 붉어졌다.

당황한 듯 서성거리는 가브리엘의 발소리가 터벅터벅 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손이 아사야의 어깨에 닿았다. 흠칫 몸을 웅크리며 아사야는 조심스레 고개를 돌렸다. 가까이서 저를 내려다보는 가브리엘의 얼굴이 보였다. 검은 바지를 입은 채였다.

“아사야.”

가브리엘의 하체에 집중하지 않으려 아사야는 안간힘을 썼다. 어색한 기색을 감춰 보려 미소를 짓고, 그의 팔을 잡았다가, 놓았다가, 머뭇거렸다.

“응, 저…… 나 왔어.”

그러고는 했던 말만 반복했다.

아사야가 어디에 손을 둬야 좋을까 몰라 고민하는 사이, 가브리엘이 그녀의 손을 감싸 쥐었다.

“손이 차다.”

그가 말했다.

“추워?”

아사야는 고개를 내저었다. 전혀 춥지 않았다. 오히려 뒷목으로 오르는 열기가 뜨거워 땀이 날 지경이었다.

“……그 모습일 줄은 몰랐어.”

아사야가 속삭였다. 그러자 가브리엘이 고개 숙여 자신의 몸을 내려다봤다. 이내 그는 계단을 성큼성큼 밟아 내려갔다. 두꺼운 장식장 아래 서랍 속에, 아사야가 가져다 놓은 셔츠가 몇 벌 있었다.

처음엔 단추를 뜯어 버리는 실수가 잦았지만, 이젠 옷을 입고 벗는 행위에 익숙해진 가브리엘이었다. 팔을 꿰어 넣고 제 몸에 딱 맞는 상의 단추를 잠글 적에 그는 여느 인간처럼 행동했다.

옷을 갖춰 입고 돌아서자 아사야가 보였다.

가브리엘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늘, 그의 어린 인간은 어제와 달랐다.

어제는 짧은 비행을 할까 했는데 날씨가 궂다며 속상해하던 아사야였다. 오늘은 제 등에 타길 원할 줄 알았건만 아니었다. 무언가 큰 근심이 생긴 표정이었다.

“……너에게 물을 게 있어, 가브리엘.”

아사야가 말했다.

“사실대로 말하겠다고 약속해 줘.”

가브리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말하지 않더라도, 그에겐 그녀에게 할 거짓말이 없었다.

아직 알려 주지 않은 일이 있을 뿐이었다.

“이 성을 관리하는 경비대원 둘이 실종됐어. 심부름꾼 하나도 사라졌대. ……이 일들이 너와 관련되어 있어?”

아사야가 물었다.

그녀의 질문에 가브리엘은 놀라지 않았고 당황하지도 않았다. 보라색 눈을 두 번 깜빡이며 아사야의 표정을 살피다가,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해쳤단 말이야?”

아사야의 언성이 높아졌다. 제 가슴께에 오는 키의 어린 인간을 내려다보며, 가브리엘이 또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아사야의 얼굴은 어느 때보다 심각해졌다.

“그들을 어떻게 했어?”

그녀가 물었다.

가브리엘은 몇 초간 대답을 미뤘다. 그가 머뭇거린 이유는 아사야에게 있었다. 그녀는 즉답을 들려줬다간 쓰러질 사람처럼 휘청대고 있었다.

“죽였어.”

어린 인간의 앞으로 다가가, 가브리엘은 그녀의 팔뚝을 잡아 주었다. 넘어지지 않게끔 받쳐 세운 것이었다.

아사야는 입을 꽉 다물었다. 그러지 않으면 입술과 턱이 떨려, 멀쩡한 표정을 지을 수가 없었다. 처음엔 황당했다가, 나중에는 분했다. 복잡한 감정의 원인은 ‘가브리엘이 사람을 죽였다’는 사실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러한 사실을, 저마저 몰랐다는 충격 때문이었다.

“시체는…….”

심란한 와중에도, 아사야는 증거가 남을 것을 걱정했다.

“시체는 어떻게 했어?”

아사야의 질문에 가브리엘은 처음으로 침묵했다. 입을 다물고 선 드래곤의 보라색 눈동자를, 아사야는 올려다보았다.

가브리엘은 쥐고 있던 아사야의 팔뚝을 엄지로 쓰다듬었다. 제가 사실을 말하면, 아사야가 어떻게 받아들일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그는 ‘사실대로 말하기로’ 이미 약속한 채였다.

“……잡아먹었어, 내가.”

가브리엘이 답했다.

그러자 아사야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비아탄의 질문을 받을 적에 이미, 제 드래곤이 인간을 해쳤을 수도 있다고 가정해 본 아사야였다. 또 그럴 경우엔 제가 그를 지키겠노라 찾아온 그녀였다.

그러나 아사야를 채운 감정은 이성이 세운 계획과는 다르게 흘러갔다. 일순 아사야는 분노를 느꼈다. 믿기지 않을 정도로 크게 화가 났다.

“어떻게…… 어떻게 내게 그런 사실을 감출 수가 있어, 가브리엘!”

아사야는 가브리엘의 팔을 때렸다. 그래도 가브리엘은 꿈쩍도 않았다. 아사야의 팔뚝을 쥔 채 망연히 서 있을 뿐이었다.

연유를 모르겠다는 듯 둔한 반응에도 화가 났다. 아사야는 저를 잡은 가브리엘의 손을 억지로 떼어 냈다. 그러고는 드래곤으로부터 두 발 뒤로 물러섰다.

이해하기 힘든 수준의 분노였다. 어떻게 표출해야 좋을지 알 수 없는 감정이었다.

문득 가슴이 답답해 왔다.

‘나를 속이다니…….’

아사야는 지겨웠다. 누군가 저를 속이고, 기만하여, 저는 뒤늦게 바보로 남는 일이 지겨웠다. 세상 모든 남자가 그러더라도 가브리엘만큼은 아닐 거라 믿었었다. 그 믿음을 배신당한 기분이었다.

그마저 제가 모르는 비밀을 감췄다니 혼란스러웠다. 제 드래곤이 언제부터 사람을 먹었는지, 왜 그런 짓을 벌인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화난 아사야를 내려다보며, 가브리엘은 놀란 눈이었다. 거부당한 두 손을 아직도 허공에 뻗은 채였다.

아사야는 이내 후회했다.

“너한테 화가 난 게 아니야…….”

신음하듯, 아사야가 속삭였다.

“……아니, 너에게 화가 났어. 하지만…… 너 때문만은 아니야.”

손을 들어 아사야는 제 입가를 닦아 냈다. 감정을 정리하여 제대로 된 문장으로 꾸리기가 힘들었다.

스무 살. 스무 해를 사는 동안 그녀를 할퀸 거짓말이 너무 많았다.

“세상이 다 나를 속이는데…… 너마저 그런다면 난 견딜 수 없어. 너까지 내게 비밀이 있다니…….”

빈혈을 느껴 아사야는 또 한 번 비틀거렸다. 어린 인간이 넘어질까 봐, 가브리엘이 불쑥 손을 뻗었다. 아사야는 그의 손을 또 한 번 밀쳐 냈다.

“너 스스로를 위험하게 만들 수 있는 일이잖아!”

뒤이어, 아사야의 작은 손이 가브리엘의 어깨를 때렸다. 원망과 걱정, 배신감과 울분이 섞인 손길이었다.

“왜 그런 거야, 가브리엘? 대체 왜 그랬어?”

그리고,

“나젤탄에 가자며.”

가브리엘이 대답했다.

“뭐?”

아사야가 되묻자,

“……나젤탄.”

가브리엘이 말했다. 이내 그의 시선이 아사야를 지나, 바닥으로 향했다. 두 눈을 내리깐 채 가브리엘은 아사야의 기분을 이해해 보려 애를 먹고 있었다.

‘나젤탄’, 세 글자가 아사야를 꽁꽁 얼려 놓았다. 손발이 묶인 사람처럼 아사야는 움직일 수 없게 됐다. 호흡까지 일시 멈춘 아사야를 향해, 가브리엘이 말했다.

“마력을 모으려고 그들을 잡아먹었어. ……사막 마을을 지나고 배를 타려면 나흘은 폴리모프를 해야 하니까.”

가브리엘에게, 아사야를 제외한 인간들은 여전히 개미 같은 존재였다. 굳이 먹을 이유도 없었지만 필요하다면 먹지 못할 이유 역시 없었다.

그에겐 자유로이 폴리모프를 할 마력조차 없었기에, 인간을 잡아먹고 그 목숨을 흡수해 마력을 채우자는 목적이 생겼다. 인간 하나를 죽여 얻는 마력이란 알량하기 짝이 없는 수준이었지만 그것이라도 길러야 했다. 아사야가 들려주었던, 즐거운 여행을 위한 경비처럼 생각됐다.

그 일 때문에 아사야가 화를 낼 줄은 몰랐다.

‘……내가 인간을 먹어서 화가 났나 보다.’

가브리엘은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처음으로, 어린 인간의 감정을 따라잡기가 힘들고 벅차게 생각됐다.

“미안해.”

드래곤이 사과했다. 그 짧은 문장에 아사야의 무릎이 허물렸다. 카펫 위에, 그녀는 드레스를 구기며 주저앉았다.

당황한 가브리엘의 손이 다시 아사야의 어깨를 잡아 쥐었다. 이번에 아사야는 그의 손을 쳐내지 못했다.

“그건…… 함께 떠나면 어떨까 가정한 것뿐이잖아.”

아픈 새처럼 가느다란 목소리가 가까스로 빠져나왔다.

가브리엘은 그녀가 왜 슬퍼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아사야의 말을 기억했고, 그렇게 떠나 보고 싶다는 말을 이뤄 주고 싶었을 뿐이었다. 아사야가 안다면 좋아할 것이라 생각했다. 슬픈 듯 몸을 떨 줄은 몰랐었다.

“아사야.”

가브리엘이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를 마주 보고 주저앉은 채, 아사야가 울먹거렸다.

“정말 떠나자는 말이 아니었어……. 진짜로 같이 가자는 말이 아니었어. 상상만으로도 좋아서, 내가 멋대로 떠든 거잖아…….”

아사야의 눈썹이 서글픈 짐승처럼 내려갔다. 언제나 웃기 바쁜 두 눈도 축축해졌다. 까만 속눈썹에 눈물방울이 맺혔다. 가브리엘은 손을 뻗어 제 엄지 끝에 그녀의 눈물을 묻혔다.

“가브리엘…….”

이내 그의 귓가에 쉼 없이 이야기를 들려주던 아사야가 조용해졌다. 무어라 할 말을 찾지 못해, 그녀의 고개가 아래를 향했다.

“아사야.”

가브리엘이 속삭였다. 그는 어린 인간의 기분을 풀어 주고 싶었다.

“미안해. 네가 떠나고 싶어 하는 줄 알았어.”

그래서 사과했다.

짧은 흐느낌을 끝으로 아사야는 울음을 그쳤다. 젖은 얼굴을 들고 그녀는 가브리엘을 마주 봤다. 가느다랗고 서글픈 작은 인간을 달래고자, 가브리엘은 그녀의 볼을 연신 닦고 있었다.

거대한 덩치에 날카로운 외모로 두려움을 주는 존재, 그러나 한편으론 갇힌 신세에 어린 아이 같은 가브리엘을 아사야는 바라보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이 대륙 안에, 그녀에게는 지켜야 할 것이 많았다. 이곳이 그녀의 고향이고 겪어 본 세계의 전부였다. 나젤탄으로 떠나자던 이야기는 상상력이 키운 막연한 소망에 불과했다. 모든 걸 버리고 떠날 기회가 온다고 해도 아사야에겐 당장에 그럴 용기가 없었다.

그러나 가브리엘은 달랐다. 그에게는 나젤탄으로 떠나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가브리엘.”

아사야가 손을 들자 가브리엘은 그녀를 만지던 제 손을 거뒀다. 또 한 번 아사야가 저를 밀어낼 것이라 생각한 모양이었다.

입술을 깨물며 아사야는 가브리엘의 품 안으로 다가갔다. 무릎으로 걸어 가까이 붙자, 가브리엘의 표정이 조금은 느슨해졌다.

“이곳에서…… 지내는 것이 여전히 지옥 같아?”

그의 셔츠 깃을 만져 주며, 아사야가 물었다.

“이 성에서 나를 만나고…… 네가 원하는 모습으로 나와 대화하고. 그것으로는…….”

작은 인간의 떨리는 음성을 가브리엘은 덤덤히 들었다.

“이대로 나와 지내 달라는 건 이기적인 부탁일까?”

늘 그렇듯, 가브리엘은 답을 오래 미루지 않았다. 그는 다시금 축축해진 아사야의 뺨을 닦아 주었다. 뺨에서 밀려난 눈물이 가브리엘의 엄지에 묻었다.

“부탁하지 않아도 돼.”

그리고 속삭였다.

“나는 널 떠나지 않아.”

그는 그녀의 검은 용이었다.

이내 가브리엘의 검지 끝이 그녀의 입술을 건드렸다. 아랫입술을 짓씹지 못하게 막으려는 손길이었다.

“울지 마.”

그리고 속삭였다.

“내가 미안해.”

가브리엘을 용이 아닌 남자로 바라본 날, 아사야는 그 남자에게 사과를 받았다.


 

.*. *. *. *. *. *.


 

7일 전, 가브리엘은 경비대원을 먹었다.

동전 소리를 짤랑거리며 걷던 그 남자로 말하자면, 야베스에게 돈을 받고 아사야의 명령을 어긴 인간이었다.

제 날개에 몸을 기대고 잠든 아사야를 지켜보는 때 가브리엘의 청력은 보통의 인간을 훨씬 웃돌았다. 그는 성문 밖에서 지저귀는 새의 소리를 들었고 비바람이 쐐애액 멀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야베스 세일산의 발소리와 말소리, 경비대원이 돈을 받고 감사하다며 인사하는 소리 역시 들었다.

그래서 가브리엘은 그 남자를 먹었다. 자신과 아사야를 위험에 노출시켰으니 그래야 마땅하다 싶었다.

그러고는 바로 후회했다. 베데르 성 안에서 인간을 먹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었다. 성으로 들어올 적에 경비대원을 본 목격자가 있을 수도 있었다. 안으로 들어갔던 이가 밖으로 돌아오지 않는 것을 수상쩍게 여길 수도 있었다.

다행히도 목격자 따위는 나타나지 않았다. 또한 불행하게도 가브리엘은 갈증을 느꼈다.

죽지만 않을 수준으로 목이 마르던 중에 물 한 방울을 혀에 축인 느낌이었다. 그는 팔과 다리가 박살난 전사였고, 미각을 잃은 요리사였으며, 눈먼 화가였다.

누구이건 무작정 집어삼켜 천 명이건 만 명이건 먹고 싶었다. 그렇게 마력을 채워 다시금 힘을 얻고 싶었다. 자유를 향한 욕구가 짐승처럼 피어올랐다.

그러나 가브리엘은 단순한 짐승이 아니었으며 바보 또한 아니었다. 온 대륙의 생명을 죄 꺼뜨리고 힘을 흡수하더라도 그는 생득적으로 가졌던 힘을 돌려받을 수 없었다.

그래도,

‘손 잡을 수 있어서 좋다…….’

아사야를 미소 짓게 할 순 있었다.

더는 폴리모프가 풀릴까 염려하며 온 근육을 긴장시키지 않아도 됐다. 며칠간 상태를 지켜보다가, 가브리엘은 성 밖으로 나가 보았다. 사람의 모습을 하자 모든 게 쉬워졌다.

후문을 열고 나가 유리 정원 밖에 서자마자 그는 어린 시녀와 마주쳤다. 주근깨가 많은 여자로 아사야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던 꼬마 인간이었다.

아사야가 왔나 하고 가브리엘은 꼬마 인간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시녀는 혼자였다. 오른손에 새장 하나를 든 채였다. 새장 속에 작은 새 두 마리가 들어 있었다.

유리 정원에 새로운 새를 풀어놓을 모양이었다.

정원 문 앞에 새장을 내려놓으며, 시녀가 가브리엘을 가로막았다.

“길을 잃으셨나요? 이곳은 출입 금지 구역이에요.”

하더니, 그녀가 저를 모셨다. 아사야가 준 것으로 차려입은 복장 때문인지 왕가의 사람이라 생각한 모양이었다.

제 얼굴을 힐끔거리며 시녀는 손님들이 모여 있다는 회의장으로 안내해 줬다. 얼굴이 뻘게져서 숨을 거칠게 쉬는 것이 아픈 사람 같았다. 아사야를 따라다니는 시녀가 아파서는 안 됐다.

옮길 병인가 하고 가브리엘이 허리를 숙여 얼굴을 확인하려 하자, 시녀는 치맛자락을 쥐며 고개를 피했다. 행동거지가 사랑에 빠진 모양새였다. 둔한 가브리엘조차 알아볼 지경이었다.

드래곤일 적 제 모습을 흉물스러운 괴물처럼 경계하던 시녀였다. 가브리엘은 작게 실소했다. 껍데기를 인간으로 둔갑한 것만으로도 호의적인 눈길을 받게 된 것이 내심 우스웠다.

회의장 앞까지 바래다준 뒤에야 시녀가 돌아갔다. 가브리엘은 근방을 둘러보며 왔던 길을 거꾸로 걸었다. 만난 이는 시녀 하나와, 마찬가지로 힐끔거리며 저를 지나치는 하인 두 명뿐이었다.

베데르 성으로 가는 길에 그는 익숙한 뒤통수를 보았다. 흰머리가 희끗희끗한 경비대원이었다.

매일 아사야를 감시하며 훔쳐보는 남자를, 가브리엘은 알아보았다.

“길 좀 묻지.”

가브리엘은 그렇게 그를 불러 세웠다. 그리고 제2 도서관으로 안내를 부탁했다. 아사야에게 들어, 그곳이 ‘종일 조용하고 방문객이라곤 저와 블란테뿐인 곳’임을 알기 때문이었다.

도서관으로 향하는 텅 빈 복도에서 가브리엘은 그를 먹었다.

경비대 갑주가 주인을 잃고 떨어졌다. 가브리엘은 그것을 주워 입었다. 검이 달린 벨트도 허리에 채웠다. 그렇게 시선을 피해 돌아가는 길에, 가브리엘은 세 번째 인간을 먹었다.

처음 보는 심부름꾼이었는데, 그를 먹은 것은 충동적인 선택이었다. 그는 조금 전 만났던 시녀와 언쟁하고 있었다.

그들이 길을 가로막고 있어 가브리엘은 눈을 좁혔다. 시녀의 손에 들린 새장이 빈 것을 보면, 유리 정원에 새를 풀어 주고 돌아오는 길 같았다. 시녀는 ‘분명 돈을 지불했다’는 말을 반복했고 남자는 ‘그런 돈은 받은 기억이 없다’며 발뺌했다.

화가 난 어린 시녀가 그를 한참 노려보다가, 고개를 내젓더니 돌아섰다.

“됐어요, 날강도 같으니라고……. 난 당신이랑 이럴 시간 없어요.”

시녀가 그렇게 말했다.

가브리엘은 남자도 사라지길 기다렸다. 그런데 그는 잠시간 씩씩거리다가, 주위를 둘러보더니 시녀가 떠난 방향을 뒤쫓아 갔다.

장애물이 사라졌으니 베데르 성으로 돌아가려다, 가브리엘은 멈춰 섰다. 얼굴 빨간 시녀는 아사야의 부하였다. 아사야의 부하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곤란했다. 아사야가 곤란해질 것이었다.

그래서 가브리엘은 남자를 쫓아갔다. 어깨를 잡아 세우자, 그는 가브리엘의 복장을 보곤 경비대원으로 착각했다. 대뜸 ‘오해’라고 변명하는 남자를 가브리엘은 인적 드문 길목으로 끌고 갔다.

그리고 잡아먹었다.


 

.*. *. *. *. *. *.


 

“……그렇게 셋이 전부야.”

가브리엘이 말을 마쳤다.

아사야는 몽롱해졌다. 거짓 한 점 없는 가브리엘의 이야기는 무척 간단하고 쉽게 들려서, 현실성이 없다고 생각됐다. ‘그래서 잡아먹었다’, 그게 설명의 전부였다.

아사야는 애써 얼굴을 굳혔다. 경과가 어찌 되었건 사람이 죽은 일이었다. 생명의 존엄성을 생각하여 그녀는 한 명의 사람으로서, 또한 왕자비로서 그들의 죽음을 심각하게 다뤄야 했다.

제 드래곤이 저를 위해서 벌인 일이었음에 호감을 느껴선 안 될 일이었다.

“그놈들을 죽였다고 네가 슬퍼할 줄은 몰랐어.”

가브리엘이 중얼거렸다.

“그것 때문이 아니야.”

아사야가 고개를 내저었다.

“너에게 미안해서…… 그래서 슬펐던 거야. 내가…… 내 생각만 하기 바빴어. 나에게는 지금이 너무 좋아서, 너에게도 그런 줄 알았어.”

가느다란 목소리로 그녀가 속삭였다.

아사야가 그랬던 것처럼, 가브리엘이 무릎으로 기어 그녀 앞에 바짝 다가왔다. 그가 제 뺨을 확인할 수 있게 아사야는 고개를 들었다. 가브리엘은 무척 심각한 얼굴로 아사야의 눈가에 눈물이 고였는지 확인했다.

“나도 지금이 좋아, 아사야.”

눈물이 마른 대신 붉어진 아사야의 뺨을, 드래곤의 큰 손이 보듬었다.

가브리엘의 단단한 손바닥에 뺨을 기대며, 아사야가 입꼬리를 올렸다. 기쁠 때면 하얀 아랫니가 드러나도록 웃곤 했었지만 오늘의 미소는 달랐다.

작고 약한 인간이 저를 측은해하고 있음을 알고, 가브리엘은 동요했다.

“하지만 최상은 아니잖아.”

떨리는 보라색 눈동자를 마주하며 아사야가 속삭였고,

“……나도 지금이 좋아.”

가브리엘이 같은 말을 반복했다.

“너를 좋아하니까, 내게도 지금이 좋아.”

단단한 대답이었다. 그 말에 아사야는 웃어 버렸다. 슬픈 와중에도, 그녀는 가브리엘이 좋았다. 딱딱하다 못해 조금은 두려움까지 주었던 잘생긴 얼굴이 그 순간만큼은 예쁘고 귀엽게 느껴졌다.

목을 뻗어, 아사야는 가브리엘의 입술을 쫓았다. 그러나 입맞춤은 실패로 돌아갔다. 가브리엘이 얼굴을 피한 것이었다.

뻣뻣해진 용의 얼굴을, 아사야의 부드러운 손이 감쌌다.

“난 네가 두렵지 않아.”

사람을 집어삼킨 입술에 그녀의 손끝이 닿았다. 아사야의 작은 손짓을 이기지 못해 가브리엘의 고개가 느릿느릿 움직였다.

아사야의 입맞춤에.

“너를 좋아해.”

기분 좋은 속삭임이 섞였다.

오늘 아사야는 평소와 달랐다. 울다가, 화를 내다가, 웃어 가며 가브리엘을 밀었다가 당기던 입술이었다. 그런 입술에 고백이 담기자 가브리엘은 광포하게 뛰는 심장을 참아 내지 못했다.

그의 뜨거운 숨이 아사야의 코끝에 훅 끼쳤다. 용이 얼굴을 붉힌 것을 알고 아사야는 조심조심 제 입술을 떼어 냈다.

“나까지 잡아먹진 않을 거지?”

그리고 농담했다.

짓궂은 말에 가브리엘이 투정할 줄로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그는 큼직한 손을 뻗어 아사야의 작은 머리통을 움켜쥐었다. 홱, 그가 끄는 방향으로 아사야의 고개가 끌려갔다. 가브리엘의 전신이 아사야를 덮쳤다.

제 입술을 핥고, 빨아 대는 감촉에 아사야의 허리에 힘이 들어갔다. 보드라운 카펫 위에 넘어진 채 정신이 조금도 없었다. 입천장으로 밀고 들어오는 혀의 감촉에 등줄기가 뜨거워졌고, 제 무릎 사이에 놓인 가브리엘의 허벅지를 느끼자 가슴이 홧홧해졌다.

“응…….”

가브리엘의 입술이 그녀의 뺨에, 아래턱에, 목덜미에 닿았다. 이내 그는 아사야의 가슴에 고개를 묻었다. 팔과 다리, 허리가 마른 것에 반해 가슴만큼은 보드라운 살결이 통통했다.

드레스 옷깃 위로 드러난 윗가슴에 가브리엘이 코를 박았다. 그러고는 힘껏 숨을 들이마셨다. 아사야의 살 내음으로 폐부를 채울 기세였다.

“가브리엘…….”

흥분한 채 제 품을 파고드는 남자의 머리를, 아사야가 두 팔로 끌어안았다. 그녀의 손끝에 가브리엘의 뒷목과 어깨가 닿았다. 울퉁불퉁한 흉터 역시 만져 볼 수 있었다.

그녀가 제 흉터의 깊이를 가늠하는 것을 알고, 가브리엘이 몸을 움찔거렸다. 아사야는 그의 머리칼에 입을 맞췄다. 그를 안은 팔에는 더욱 힘껏 애정을 실었다. 그러자 가브리엘의 단단한 두 팔이 나무뿌리처럼 아사야의 허리 밑으로 파고 들어왔다.

서로가 상대를 제 품 안에 붙이기 바빴다.

그의 체중에 짓눌리고 상체에 덮인 채, 아사야는 제 몸이 퍼즐 조각 같다고 생각했다. 스스로가, 가브리엘의 품에 꼭 맞게 만들어진 조각 같았다.

행복했다. 마음 깊이 행복했고 팔과 다리가 편안했다. 그 안온한 감각이 어찌나 낯선지 무서울 정도였다. 그래서 숨이 벅찼다.

긴 달리기를 마친 사람처럼 아사야는 작게 헐떡거렸다. 제 두 눈에 찬 눈물을 가브리엘이 어떻게 생각할까, 걱정될 정도로 감정이 북받쳤다.

그가 제 울상을 볼 수 없게, 아사야는 가브리엘의 어깨에 제 얼굴을 숨겼다.

“널 완전히 치료할 거야.”

젖은 목소리로, 아사야가 속삭였다.

“널 가둔 마도구를 찾아내겠어.”

가브리엘로부터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아사야의 머리칼에 코를 묻은 채 그는 씨근덕대는 숨을 참고 있었다.

작은 인간을 끌어안은 품이 보다 뜨끈해졌다.


 

.*. *. *. *. *. *.


 

오전에 비아탄 아멕은 근위병의 신고를 받았다. 왕성의 검, 비아탄이 직접 찾아가자 근위병은 허리를 곧게 세운 채 긴장한 기색이었다.

“사라진 심부름꾼이라면 제가 본 적이 있습니다. 닷새 전, 대사궁전 옆을 지나가다가 보았는데…… 인상착의로 보아 그가 분명합니다. 어떤…… 경비대원과 함께였습니다.”

근위병의 증언이 그러했다.

또 다른 신고에 의하면 닷새 전, 시녀 하나가 심부름꾼을 찾았다고 했다. 공주님을 모시는 어린 시녀였다며, 하인들 역시 긴장한 채 증언했다.

“공주님? 아사야 공주님을 말하는 건가?”

비아탄이 묻자,

“네, 공주님을 졸졸 따라다니는 시녀 중 하나였습니다.”

하인들이 굽신거리며 말을 덧붙였다.

“심부름꾼을 왜 찾냐고 물었더니 뭐라더라……, 그…… 성밖으로 나가거든 사와 달라며 부탁한 물건이 있었다고 그랬습니다.”

눈을 좁히며 비아탄은 제 기억 속 시녀의 모습을 떠올려보았다. 공주께서 시간을 내어 주실 적에 저를 응접실로 안내한 시녀가 있었다. 그녀가 제 표정이며 행동을 유심히 살핀 것도 같았다.

고민할 것 없이, 비아탄은 시녀들을 찾아갔다. 어리고 작은 소녀들이 어찌나 바쁘게 쏘다니는지 두 번이나 길이 엇갈렸다. 마침내 두 시녀를 마주한 곳은 세탁방의 문 앞이었다.

시녀의 두 팔 위에 공주께서 걸치실 가운이 안겨 있었다.

“닷새 전, 물병방 심부름꾼을 만난 시녀가 둘 중 누구지?”

가타부타 설명할 것 없이 비아탄이 용건을 꺼냈다.

그러자 두 시녀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자매라기엔 서로 이목구비도, 머리색도 다른데, 행동거지만 보면 쌍둥이래도 믿을 성싶었다.

“저예요.”

그들 중, 사라라는 이름을 가진 소녀가 먼저 대답했다. 주근깨가 많고 볼이 붉은 시녀였다.

“잠시만요, 비아탄 경. 저, 저도 만났어요, 그 심부름꾼.”

사라에게 뒤질세라, 유라가 따라붙었다.

서로 어깨를 맞대며 ‘저예요’, ‘아니에요, 저예요’ 손을 들어 대는 시녀들을 비아탄은 허망한 얼굴로 내려다봤다.

“두 사람 다 심부름꾼을 만났다고?”

그가 묻자,

“그래요.”

두 시녀가 얼른 대답했다.

시녀들이 저를 놀리는 건가 비아탄은 잠시 생각했지만, 그런 눈치는 아니었다. 왕성 기사단원이 말을 걸어도 얼어붙는 게 시녀였다. 하물며 왕성의 가장 드높은 검, 국왕의 오른팔인 기사가 증인을 찾는데 장난질을 할 리가 없었다.

사라와 유라 역시, 비아탄 아멕을 대면한다는 것만으로 긴장한 기색이었다. 위증을 했다간 죄를 물어 혀가 잘릴 것임을 아는 것이었다.

약간의 의아함을 감추며 비아탄이 질문했다.

“심부름꾼을 만났을 때 혹, 경비대원이 함께 있지 않았나?”

그러자 두 시녀가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소녀들은 거의 동시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어떤 남자였지?”

“키가 작았어요.”

기사의 질문이 끝나기가 무섭게, 유라가 말했다.

“피부가 창백했고…… 깡마른 사람이었어요.”

사라 역시 말을 보탰다.

한쪽 눈썹을 끌어 올린 채 비아탄은 시녀들의 말을 받아 적었다.

“그게 전부인가?”

비아탄이 묻자,

“네, 딱히…….”

“눈에 띄는 외모는 아니었어요.”

시녀들이 더듬더듬 대답했다.

눈을 가늘게 뜬 채 비아탄은 사라와 유라의 얼굴을 훑어보았다. 사라는 바짝 긴장한 기색으로 볼이 붉었고, 유라의 경우 안색이 창백했다. 두 사람 모두 주먹을 꽉 쥔 탓에 손의 뼈대가 오른 상태였다.

가 봐도 좋다는 신호로, 비아탄이 손을 내저었다. 시녀들은 풀려나기만을 기다린 죄수들처럼 쪼르르 그에게서 달아났다.

치맛단을 펄럭거리며 종종걸음으로 멀어지는 두 사람을, 비아탄은 물끄러미 노려보았다.

‘이상하군.’

시녀들의 증언은, 근위병의 증언과 전혀 달랐다. 근위병의 말로 심부름꾼과 함께 있던 경비대원은, 체구가 크고 피부와 머리칼이 짙은 남자라 했다. 어깨가 떡 벌어진 데다 턱의 선이 굵어서 멀리에서도 눈에 띄더라며, 한 번 본 순간 잊기 어려운 외모를 가졌다고 했다.

키가 작다. 피부는 창백하다. 그리고 깡마른 사람. 시녀들의 증언은 그와 완전히 반대였다. 증언이 엇갈리거나 조금씩 다를 수야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정확하게 반대되는 것에는 그릇된 의도가 필시 있게 마련이었다.

둘째 왕자비의 시녀들이 무얼 감추고 있음은 의심할 여지 없이 분명했다.

‘누구를 위해서? 야베스 세일산을 위해서?’

그럴 가능성은 아주 낮았다. 왕성 내에서, 제 주인을 배신하도록 종용키 가장 어려운 게 시녀였다. 그것도 아직 어린, 첫 주인을 모시는 소녀들이라면 더욱이 어려웠다. 어린 시녀들은 오로지 제 주인을 위해 봉사하게 마련이었다.

비아탄의 입 밖으로 낮은 신음이 새어 나갔다.

두 시녀가 지킬 사람은 그녀들의 주인, 아사야 세일산뿐이었다.

눈썹을 찡그린 채 선 기사의 뒤로 하인이 다가왔다. 사렙탄 세일산의 호출 명령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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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현실에는 비아탄 아멕과, 그를 호출한 국왕뿐이었다.

비아탄의 경험에 따르면, 왕께서 저를 알현실로 부르실 적에는 반드시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 상하관계를 보다 매정하게 나누며 전할 말씀이 있다는 의미였다. 그를 알기에 비아탄은 걸음걸이부터 검을 쥔 채 멈춰 서는 동작까지 예절을 지켰다.

제 발치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는 기사를 사렙탄이 가만히 내려다봤다.

“……자네가 직접 수사를 한다더니.”

그리고 중얼거렸다.

“왜 둘째 부부의 침실을 드나든다는 소문이 들리는 게야?”

말의 뜻을 읽어 내기가 어렵진 않았다. 비아탄이 수사 중인 사건은 경비대원 둘과 심부름꾼 하나가 실종된 일 하나뿐이었다. ‘침실을 드나든다’는 말에는 과장이 섞여 있었는데, 그만큼 심기가 상하셨단 의미였다.

‘왜 둘째 부부를 건드리느냐’, 왕께서는 그것을 묻고 계셨다.

비아탄의 머릿속이 대번 어지러워졌다. 그의 수사의 방향과 방식에는 틀림이 없었다. 문제는, 모든 경황이 지목하는 배후마저 틀림이 없단 부분이었다.

‘아사야 세일산…….’

그 소식을 대뜸 주군께 전할 수는 없었다. 비단, 주군의 심기가 상할 것을 염려해서는 아니었다.

사렙탄 세일산은 대륙의 지존으로서 그 자신을 중심으로 모든 일을 해석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는 비아탄 아멕에 대해 잘 알았지만, 제 오른팔로 불리는 남자가 저 이외엔 무엇에도 충성하지 않으리라 쉽게 믿었다.

그러나 비아탄이, 당신을 지키는 데에 목숨을 걸겠노라 맹세한 이는 사렙탄뿐만이 아니었다.

“필요하다면 그 빚을 아가씨께 갚겠습니다.”

아사야 아졸이 세일산의 여자가 되기 전에, 비아탄은 그렇게 맹세했다.

기사 된 도리로 그는 그 맹세를 저버릴 수 없었다. 값비싼 예물을 실은 마차를 받으면서도 불안한 듯 서성거리던, 이제 저는 어쩌면 좋겠느냐며 눈물을 보이던 베데르의 딸에게는 도무지 그럴 수 없었다.

아사야 세일산에게 지금 제가 필요했고, 비아탄은 그녀에게 빚을 갚아야만 했다.

“폐하, 이번 일은…….”

부디 묻지 마시옵고 저의 책임으로 함구하여 주십시오. 그렇게 청하고자 비아탄이 입을 열었고,

“야베스 그놈이 벌인 짓이던가?”

사렙탄이 소리쳤다.

뜻밖의 말에 비아탄은 두 눈을 크게 떴다. 놀란 눈으로 올려다볼 적에 그의 현명하신 주군은 자리에 없었다. 사렙탄 세일산은 걱정 많고 화도 많은 아버지가 되어, 전전긍긍 왕좌를 긁고 있을 뿐이었다.

“폐하.”

주군의 심기를 읽어 보고자 비아탄이 그렇게 불렀다. 기사가 ‘폐하’ 하며 그 입지를 자각시키면, 사렙탄은 한마디는 더 말을 얹고는 했다.

“내 아들이, 또 바보 같은 실수를 저지른 게냐 물었어.”

살인은 ‘바보 같은 실수’가 아니었다. 살인은 중죄였다. 인간으로 태어나 신의 뜻을 배반하는 최대의 범죄가 살인이었다. 대륙 안에서 살인보다 큰 죄라고는 반역밖에 없었다.

“없던 일로 하게.”

그 죄를 덮자며, 사렙탄이 중얼거렸다.

“적당히 말을 꾸려, 없던 일로 해. ……자넨 내 오른팔이야. 내 오른팔로 내 아들의 뺨을 칠 순 없는 노릇이지.”

일방적으로 대화를 마치면서 사렙탄은 조바심이 난 표정이었다. 그 표정에 담긴 뜻을 비아탄은 꾸역꾸역 이해했다. 사렙탄의 곁을 오랜 세월 지킨 끝에 이제는 그의 본심을 외면하고 싶어도 모를 수가 없게 됐다. 관대한 애정을 받고 자라난 둘째 자식, 죽은 동생에게 못 해 준 것들을 대행인처럼 받아먹으며 몸집을 키운 아들, 야베스 세일산을, 사렙탄은 지키고자 했다.

없던 일로 이번 일을 덮자는 제안이, 비아탄이라고 무작정 싫은 건 아니었다. 아사야 세일산에게로 향하게 될 의혹을 종결시킬 수 있으니 그의 입장에서도 잘된 일이었다. 모든 죄를 암묵적으로 야베스 세일산의 것으로 두고, 깊이 묻어 둘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비아탄은 안심할 수 없었다.

입속이 바싹 마르는 듯했다. 정신이 아득하며 어지럼증까지 일었다. 사렙탄 세일산의 가장 가까운 수족이자 그를 모시는 기사로서, 이제껏 주군의 모든 걸 알고 있다 생각했건만 아니었다. 모든 게 착각이었다.

‘바보 같은 실수를, ‘또’ 벌였냐고?’

사렙탄 세일산은 이미 알고 있었다, 야베스 세일산이 용의 철문 안으로 경비대원들을 밀어 넣어 죽게 했던 일을. 그의 심기를 거슬렀다가 해를 입고 쫓겨난 목숨들을, 주검을 싣고 쥐구멍을 타고 빠져나가던 수레들을.

왕께서 아실 때가 아니다, 왕께서 아셔서 득 될 것이 없다…… 갖은 이유를 들어 비아탄이 함구한 사건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의 주군께서는 제 자식의 모든 것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러고도 포용을 하고 용서를 했다.

‘왕께서 혜안마저 잃어버리신 겁니까?’

비아탄으로서는 이보다 더 사렙탄 세일산이 미운 순간이 없었다. 언제고 관대하고 정 많은 모습이던, 제 존경과 충성을 바친 높다란 주군이었다.

그를 향해 비아탄은 소리를 치고 싶었다.

‘왕자님은 폐하의 아들이지, 죽은 동생이 아닙니다. 그는 정상이 아닙니다. 그걸 포용하고 감추는 게 아버지의 사랑입니까? 기회가 있을 때 고쳐 놓으셨어야지요.’

비아탄은 바닥을 딛은 주먹에 힘을 실었다. 왕좌를 향해 길게 뻗은 붉은 카펫 위에, 그의 주먹이 만든 주름이 졌다.

‘언제까지 그를 첫째 왕자와 똑같이 대하실 겁니까?’

본도 세일산을 따르는 수많은 신하들이, 같은 자리에 같은 표정으로 전한 말이었다.

‘왕좌의 주인이 정해지는 순간을 야베스 세일산이 이겨 낼 수 있다고 보십니까?’

사렙탄은 그들의 말을 무시했고 짓밟았다. 불충이라 일갈하고 알현실을 떠나도록 몰았다.

사렙탄의 눈에 본도 세일산은 아직 어렸고, 야베스 세일산은 더욱 어렸다. 그는 높은 계급에 앉은 왕으로서 낮은 서열의 왕자들을 보고 있지 않았다. 제가 가져 본 적 없던 아버지가 되어 제 아들들을 품고 있었다.

비아탄만큼은, 왕에게 신하들과 같은 말을 해선 안 됐다. 그의 결정에 적극적으로 반박하는 순간에는 비아탄 아멕이라도 ‘불충’ 딱지를 받고 나가떨어질 게 뻔했다.

“알겠습니다.”

목을 숙인 채 비아탄이 대답했다. 그는 왕좌에 앉은 사렙탄의 두 발을 길게, 아주 오래도록 노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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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야는 아침 일찍 잠에서 깼다. 요즘처럼 하루가 바쁜 때도 없었다.

오전에 블란테와 약속이 없고 야베스 역시 일찍 나서는 날이면, 그녀는 곧장 베데르 성으로 향했다. 잠을 자기는 하는 것인지 언제나 뜬 눈인 가브리엘과 유리 정원을 거닐고, 간단히 식사를 하면 점심이었다.

점심부터 오후까지 아사야는 책을 읽고 공부를 했다. 그녀는 비싼 값과 역사를 지닌 서적들의 보관소나 다름없는 도서관을, ‘책을 읽겠다’는 용도로 드나드는 유일한 방문객이었다.

도서관에서 빠져나올 때면 읽던 책들은 제자리에 돌려놓고, 달콤한 글귀를 실은 시집을 한 권 대여했다. 소설을 읽더라도 추리극을 좋아하는 아사야였다. 시집은 독서하기 위해서가 아닌,

“무슨 책을 그렇게 읽어?”

야베스의 질문에 대답하기 위한 핑곗거리였다.

“아……, 시집이에요. 예쁜 글귀가 많아서……, 저도 시를 적어 볼까 하고 빌렸어요.”

근래 들어 야베스 세일산은 아사야의 시간을 자주 훔쳤다. 저녁이 되면 아사야는 그의 요구대로 승마를 했다. 가끔은 정원을 거닐기만 했고, 어떤 날은 왕성 내에서 열린 대회를 함께 보았고, 저녁 식사는 필수로 같이했다.

그는 아사야의 순종적인 태도를 매우 기꺼워했다. 제 아내가 죽은 아버지의 이름을 딴 성에 처박혀 드래곤과 함께 쓰던 시간을 죄 독식하니 무얼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른 상태였다.

“이것 봐. 사람은 사람을 만나야 해. 부부끼리 시간을 보내니 좋잖아.”

야베스가 말했다. 그가 선물한 옷과 장신구로 전신을 치장한 채, 아사야는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웃는 얼굴이 늘 그렇듯 꽃 같았다.

‘시커먼 마물에게도 완전히 질린 모양이지.’

흡족한 얼굴로 야베스는 와인을 들이켰다.

벌써 보름째였다, 아사야 세일산이 가브리엘을 찾지 않게 된 것이.

이따금 베데르 성으로 향하는 것도 같았지만, 드래곤과 함께하기보단 유리 정원을 거닐기 위해서인 듯했다.

야베스의 눈에 아사야의 그런 모습이 몹시도 좋아 보였다.

심심함을 달래느라 시집이나 몇 권 읽고, 예쁜 글귀나 적어 가며, 형님의 아내와 적당히 잘 지내고 저녁마다 저를 기다리는…… 오늘의 아사야는 야베스 세일산이 원했던, 아내로서의 아사야였다.

동시에, 오늘의 아사야는 그 어느 때보다 바빴고 열정적이었다.

야베스 세일산이 야간 사냥을 떠난 아침은 아사야에게 둘도 없는 기회였다. 하루 종일 도서관에 처박혀 공부를 할 기회.

그나마 편한 드레스에 몸을 가리는 로브를 걸친 채 아사야는 도서관으로 향했다. 이제는 눈을 감고도 향할 수 있을 만치 익숙해진 복도를 지나면서,

“가브리엘은 요즘 어때?”

묻기가 일상이었다.

그리운 듯한 공주의 목소리에 사라는 대답을 상세하게 들려주었다. 말씀하신 대로 레몬청을 전해 주었고, 드로인이 가져온 대형 서적도 곧장 베데르 성에 옮겼단 말이었다.

“찾아갈 때마다 위치가 바뀌는 걸 보면 책도 읽는 것 같아요. 어제는 오후 내내 망루에 올라 있었어요.”

“망루에?”

“소나기가 내렸잖아요.”

아사야가 고개를 끄덕였다. 두 뺨에 작은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래, 비에 날개를 적셨겠구나…….”

어떤 연유에선지 아사야의 시녀들은 더는 드래곤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심부름을 반기는 눈치로 가브리엘을 자주 찾아 주니, 아사야로서는 안심이었다.

‘며칠만 더 참으면 돼. 의심이 지워질 때까지만…….’

왕성에서 발생한 실종 사건의 수사 권한이 페드릭에게 돌아간 것은 열흘 전의 일이었다. 유라가 얻어 온 정보에 의하면, 그는 이번 사건을 귀족가의 비리와 연관된 것으로 보고 있었다. 사라진 심부름꾼이 왕성을 드나들 적에 세금과 관련된 기밀 서류를 훔쳤단 의혹이었다.

한편에서는 실종 사건은 빌미일 뿐이며, 왕께서 눈엣가시 같던 신하를 찍어 누르려는 건 아니냐는 소문도 돌았다. 아사야로서는 아무래도 좋은 얘기들이었다.

‘빨리 수사가 종결되었으면…….’

그녀가 바라는 건 그뿐이었다. 가브리엘과 함께하는 오후가 그리웠고, 색유리를 투과한 빛을 신기해하던 그의 뒷모습이 그리웠다. 보고 싶은 마음에 병이 날 것 같았다.

표현할 길 없는 애정을 꾹 눌러 삼키며, 아사야는 도서관의 문을 열었다.

여섯 권의 책과 수십 장의 설계도를 펼쳐 둔 채, 유라가 그녀를 올려다봤다. 벽난로 앞의 사각 카펫이 온통 종이투성이였다.

달님을 그리며 사랑에 눈물짓는 시구는 단 한 줄도 없었다. 2차 마물 전쟁에 참여한 마법사 명단과 그들이 풀어 적은 술식들, 마물의 심핵과 마력에 대한 연구서들, 또 그것을 해독하기 위한 자료만이 있을 뿐이었다.

“엠마오는, 아직 멀었어?”

아사야는 낮은 테이블 자리 위에 시집을 내려놓았다.

“네. 새벽 일찍 떠나셨는데, 아직…….”

유라의 대답에 아사야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벌써 한 시간은 전에 도착했을 줄로 알았는데 의외였다.

엠마오가 맡은 일은 하나뿐이었다. 마차를 타고 아졸 공작가에 방문하여, 아사야의 이름을 대고 도서관의 책을 빌려오는 일이었다. 아졸 공작가가 왕성에서 멀지 않은데,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니 이상한 일이었다.

아사야의 의아함이 그친 것은 오전이 다 지난 점심의 일이었다. 예정된 시간보다 세 시간은 늦어서야 엠마오가 돌아왔다.

아가씨께서 부탁하신, 마도구와 관련된 서류뭉치를 품에 안은 채였다.

“잘 다녀왔어, 엠마오?”

로브에 달린 후드를 걷는 유모를 보며, 아사야가 웃음 지었다.

“공작성은 어때? 가디엘은 잘 지내?”

그러나 엠마오는 대답 대신 반쯤 열고 선 문을 천천히 마저 젖혔다. 유모의 등 뒤에, 동행인이 있었다.

놀란 마음에 아사야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드레스 스커트에 놓여 있던 종이들이 소리 없이 카펫 위로 떨어졌다.

누구보다 친숙하면서 누구보다 낯선 방문객이 아사야를 마주 봤다. 누이의 편지에 답을 주지 않던 매정한 오빠, 가디엘 아졸이 모자를 벗었다.

“가디.”

그 순간 원망보다 반가움이 앞서는 것을 아사야는 막지 못했다. 몇 년도 아니며 몇 달 만에 만날 뿐인데, 가디엘의 시간은 저보다 빨리 흐른 듯했다. 고동색 머리칼은 그 색이 짙어져 겨울나무 같았고, 몰랐던 수염이 턱을 덮고 있었다.

수염의 색깔이며 반듯하게 다듬은 모양이 기억 속 아버지와 흡사했다.

아사야의 입꼬리가 저도 모르게 올라갔다. 오랜만에 만난 혈육이 반가웠고 그가 저를 찾아온 게 기뻤다. 아사야는 어린 날처럼 그에게로 달려가려 했다.

가디엘이 매정한 소리를 내지 않았더라면 그랬을 것이었다.

“마도구를 연구하고 있다는 게 사실이야?”

그러나 가디엘에게는 제 누이와 다정한 안부를 물을 마음이 없었다.

그가 본론부터 꺼내

놓자 아사야도 설렘으로 찼던 마음을 내리눌렀다. 갑자기 찬물을 맞고 잠에서 깬 기분이었다.

“응. 사실이야.”

그리고 대답했다.

“가브리엘에게 마력을 돌려주고 싶어. 사람이 빼앗았으니 사람이 돌려줄 수도 있을 거라 생각했어.”

거짓말은 섞지 않았다. 저는 전쟁이 다가오는 줄도 몰랐던 어린 아이였지만, 가디엘은 다르기 때문이었다. 아버지의 대를 이어 전장에 설 적에 그는 젊은 지휘관이었다.

아사야는 그가 저에게 한 점의 힌트라도 건네주길 바랐다.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그 짐승이 네게 어떤 생각을 주입시킨 거지?”

아사야는 엠마오에게 조용한 눈짓을 보냈다. 아가씨의 의중을 알고 엠마오는 급히 도서관의 문을 닫았다.

“……가브리엘은 내게 무엇도 주입한 적이 없어, 가디. 마도구를 개방하는 방법을 알고 싶어. 마도구의 설계자를 만나고 싶어. 전부, 순전히 나의 생각이야.”

차가워진 손으로 드레스에 진 주름을 펼치며, 아사야가 말했다. 그러자 가디엘은 뜻밖의 반응을 보여 주었다.

수많은 책과 서류들로 둘러싸인 누이를 바라볼 적에, 그는 어느 때보다 화가 난 얼굴이었다. 이내 아사야의 마음에 의문이 들어찼다. 가디엘은 단 한 번도, 누이가 무얼 배우는 일에 있어 부정하거나 방해한 적 없었다.

“가디…….”

그가 왜 화를 내는 것인지, 무슨 이유로 엠마오를 쫓아 왕성까지 찾아온 것인지, 아사야에겐 모든 것이 의문이었다.

아사야는 짧게 숨을 들이쉬었다. 남색 망토로 어깨를 덮은 가디엘은 그녀의 기억보다 더 크고 단단해 보였다. 아사야는 그런 오빠의 모습을 알았다. 가주의 자리에 오른 이후 가디엘은, 제가 어떤 말을 하건 변치 않을 벽처럼 느껴지곤 했었다.

“마도구를 개방하는 방법을 알고 싶어, 가디.”

아사야의 목소리가 또박또박 울려 나왔다. 그러니 아는 바가 있다면 도와 달라는 요청이었다.

“방법 따위는 없어, 아사야.”

그러나 가디엘에게는 아사야의 모험에 동참할 마음이 추호도 없었다. 드래곤을 무찌르고 전쟁을 승리로 이끈 기사단이 그의 기사단이었고, 그 과정에서 희생된 아버지와 팔 한 짝이 그의 것이었다.

그렇게 되뇔 적에 가디엘은 한 가지 아주 분명한 사실을 잊고는 했다. 제가 잃어버린 팔이 아사야에겐 제 오빠의 팔이며, 제가 잃어버린 아버지가 그녀에게도 아픈 기억임을.

“마도구는 선물상자 따위가 아니야. 그건 무기야. 네 손에 들어갈 수도, 네가 다룰 수도 없는 무기라고.”

참전 기사로서 읊조릴 적에 가디엘의 눈에 아사야는 전쟁도, 고통도 모르는 어린 여자였다. 그녀에게라면 가디엘은 마도구는커녕 단검 하나 쥐여 줄 수 없었다.

“넌 꽃밭에서 보호받으며 자라 조금도 모르겠지만, 전쟁을 겪은 이들에게 드래곤은 존재 자체로 지옥이야.”

가디엘이 말했다. 두껍고 질긴 망토 속 허리춤에는 검을 찬 채였다. 그는 왕성에 출입하면서 검을 지닐 수 있는 몇 안 되는 외부인이었다.

그런 그의 갈색 눈에 담긴 제 모습에 아사야는 주눅 들었다. 먼지 한 올 묻지 않은 고급 로브와 부드러운 드레스를 걸친, 그녀는 그저 예쁜 공주님이었다. 그녀에겐 무기가 없었고 그걸 휘두를 힘도 실력도 없었다.

그래도 그녀에겐 드래곤이 있었다.

“……가브리엘은 전쟁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어. 민간인을 해친 적도 없고……, 마도구를 실험하는 과정에서 희생당했을 뿐이야.”

아사야가 말했다.

“가디도 알잖아, 가브리엘은…….”

그런 누이의 말을,

“알지, 네 극진한 보호를 받으면서 살아남은 놈인 걸.”

가디엘이 끊어 놓았다.

“그 역겨운 짐승을 네가 타고 놀았단 것만으로도 구역질이 나더군.”

빈정거림이 담긴 목소리였다. 그런 그 앞에서 아사야는 어리숙하게도 조금은 기쁘고야 말았다. 내 소식을 듣긴 했구나…… 그런 생각이 먼저 들었다.

‘내 이야기, 그래도 아는구나…….’

아사야의 기세가 누그러지자 가디엘의 표정 역시 조금은 부드러워졌다. 베데르 아졸이, 그리고 그의 뒤를 이어 가디엘 아졸이 전쟁터를 누비는 동안 아사야는 가브리엘과 함께였었다.

동굴 속에 남은 흔적들을 지운 것이 가디엘 자신이니, 그들의 이야기를 훔쳐본 유일한 이도 그뿐이었다. 세상 물정이라곤 모르던, 아사야는 열네 살 소녀였다. 그런 그녀에게 화를 낼 마음은 없었다.

가디엘은 누이를 회유해 보려 입을 열었다.

“아사야. 폐하께서 너를 총애하시고 왕자께서도 너를 극진히 돌보고 있잖아. 그것으로 만족하도록 해.”

“……어떻게 알아?”

그러자 뜻밖에 되물음이 돌아왔다.

“내가 충분히 잘 지내고 있는지. 내가 행복한지, 불행하진 않은지…… 가디는 어떻게 알고 확신해?”

‘어떻게 아느냐’니 의문스러운 질문이었다. 세일산의 여자가 된 이후 아사야의 매일매일이 유복하고 행복한 것은 공작가의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었다. 오죽하면 아가씨께서 자주 드시던 것이라며 공작가 요리사가 만들어 보낸 간식들이 되돌아올 지경이었다.

집이 생각나실 때마다 꺼내 드시라며 상자에 담아 보낸 쿠키들은 단 하나도 건드리지 않은 채였고, 그 위에는 아사야와 야베스 세일산의 편지가 각각 놓였다.

아사야는 공작가의 정원을 꾸며 달라는 말과 몇 가지 옛날이야기를 적어 보냈으며, 야베스 세일산은 제 아내의 집은 이제 왕성이니 외부의 음식은 불필요하다는 매정한 인사를 남겼다. 그 때문에 요리사를 비롯해 하인들은 몇 주간 침울하기 짝이 없었다.

이후에도 아사야는 자주 편지를 보냈다. 세일산의 인이 찍힌 편지를 든 전령이 공작가로 올 때마다 선물을 실은 마차가 함께였다. 상자에 넣은 쿠키 따위는 없고 죄 값나가고 귀한 것들뿐이었다.

그런 아사야의 편지는, 야베스 세일산이 보탠 선물과 함께하며 곤란한 그림을 만들어 냈다. 아졸 공작가는 왕가에 충성을 바치고 왕가를 위해 존재하는 영웅의 집안이었다. 왕가에 딸을 시집보냈다 하여 그 값으로 물질적인 것을 요구하는 일가가 결코 아니었다.

이제 선물은 보내지 말아 주십사 말을 전하며 마차를 돌려보내기도 부지기수였다. 그럴 적에 야베스 세일산은 제 아내가 종일 시무룩해하니 거절은 삼가 달라는 말이나 남겨 놓았다.

‘사랑에 미쳐도 분수껏 미쳐야지.’

억지로 받은 선물들은 모조리 공작 성의 창고에 처박혔다.

야베스 세일산과 왕자비가 얼마나 행복한지 노래하는 음유시인이 광장마다 서넛인 수준이었다. 아사야 세일산은 베데르의 딸, 아름다운 여인, 사랑받는 왕실의 보물이었다.

그렇게 예쁨만 받으며 살다 보니 똑똑하던 누이도 철부지가 되어 버렸나 싶었다.

“가진 것에 만족하는 법도 배워 두는 게 좋을 거야.”

가디엘이 말했다.

“네 손아귀에 이미 열쇠가 두 개야. 그거면 됐잖아.”

그와 제 사이의 무엇이 언제부터 잘못된 것인지, 아사야는 알 수 없었다.

가디엘이 말하는 열쇠가 무언지는 알았다. 하나는 용의 철문을 열었던 열쇠로 야베스 세일산에게서 받은 결혼 예물이었다. 다른 하나는 베데르 성을 여는 열쇠로 사렙탄 세일산께서 하사하신 선물이었다.

어째서 갑자기 열쇠 이야기를 꺼내는 걸까, 그 이유를 읽어 보려 아사야는 눈을 크게 떴다.

“열쇠…….”

그리고 중얼거렸다.

“열쇠로 여는 거야? 마도구.”

그러자 가디엘의 표정이 대번에 굳었다. 제가 정답을 알아냈다는 사실을 깨닫자 아사야는 내심 기뻤다. 가브리엘에게 힘을, 잃어버린 자유를 돌려줄 기회가 마침내 찾아온 듯했다.

“그렇지? ……누군가는 그걸 설계하고 만들어 낸 거잖아. 그게 누군지 가디는 알지? 만난 적도 있어?”

입을 다문 가디엘에게로 아사야가 두 발짝 다가갔다. 그러자 가디엘이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습관적인 동작이었다.

“나는 아버지께서 잠근 문 하나를 열고자 할 뿐이야, 가디. 그 속에 죄 없이 갇힌 것을 꺼내 주려는 거야, 그렇게 생각해 줄 순 없겠어?”

아사야가 속삭였다.

“부디 내게 알려 줘. 마도구를 설계한 사람이 누구야? 지금 어디에 있어?”

작은 슬픔과 어지러운 분노가 가디엘의 속을 채웠다. 만난 적이라면, 있었다. 마도구의 설계자는 다름 아닌, 아버지의 유품을 제게 건네준 마법사였으므로. 짧게 밀어 버린 머리칼에 둥그런 눈, 시뻘건 팔을 가진 끔찍한 여자였다.

‘마녀’, 전쟁터에서 그녀는 그렇게 불렸다.

“네가 그 마법사를 만날 일은 없을 거야.”

가디엘이 단언했다.

“허락할 수 없어.”

가디엘의 입에서 불허가 떨어졌다. 그에게, 그가 꼭 빼닮은 아버지에게서 듣기로, 아사야에게 그만큼 무기력한 말이 없었다.

“……그건 내가 판단할 일이야.”

그러나 오늘, 아사야는 아사야 아졸이 아니었다. 더는 아졸가에 속하지 않은 왕자비였다. 가디엘은 물론이며 베데르 아졸이 살아 있다 해도 그녀의 행동을 저지하고 ‘불허’할 자격은 없었다.

“내가 생각하고, 내가 결정할 일이야.”

아사야가 단언했다. 그러자 가디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사야가 내내 두려워했던, 만나기를 미루어 왔던 순간이 마침내 닥쳐왔다. 세상에 남은 단 하나의 혈육, ‘집’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이, 자신의 오빠로부터 막을 수 없는 미움을 받게 되는 순간.

“아버지와 간통한 여자에게 뭘 부탁하겠단 거지? 아사야 세일산.”

가디엘 아졸의 목소리가 아사야를 얼려놓았다.

“널 지키겠다고 숨긴 것들을 굳이 파헤치는 이유가 뭐야?”

한순간에 아사야는 바보 천치가 되어 버렸다. 어렵지 않은 문장인데도, 그녀는 가디엘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꿈에서조차 아사야는 ‘아버지’와 ‘간통’이라는 단어를 연결 짓지 못할 것이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완전한 남자였다. 국민적인 영웅이며, 언제고 다정한 버팀목이며, 불길로부터 대륙을 살리며 고귀하신 목숨마저 희생한 기사였다.

그런 아버지께선 죽는 날까지 부인만을 사랑했다. 재혼은커녕 첩 하나 들인 일이 없었다. 적어도 아사야가 알던 아버지는 그랬다.

“나…… 날 언제까지…… 언제까지 바보로 놔둘 셈이야?”

가디엘은 아버지께서 아사야만을 사랑했노라 믿는 듯했지만, 아사야가 느끼기엔 달랐다. 아졸 성에서 꽃처럼, 보석처럼, 인형처럼 사는 내내 아사야는 외톨이였다. 아버지와 가디엘의 사이에 그녀가 끼어들 틈 따위는 결코 없었다.

그들은 같은 숙명을 지니고 같은 삶을 걷는 기사들이었고, 아사야는 언젠가 아졸가를 떠나 살 누군가의 여자일 뿐이었다.

그 따돌림이란 아버지께서 별이 되고, 아사야가 왕자비가 된 뒤에도 한결같았다. 아사야에게는 죽은 아버지의 위대한 업적 중의 하나인 마도구에 대해 연구할 자격조차 없었다. 맞춤법도 모르는 시녀 둘과 늙은 유모의 힘을 모아, 시를 읽는 척 도서관에 숨어드는 게 고작이었다.

“나더러…… 영영 바보로 살란 말이야?”

아사야가 말했다. 힘을 실어 소리치고 싶었지만 입 밖으로 나온 목소리는 형편없이 가느다랬다.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지내면…… 그러면 내가 행복할 것 같아? 가디. 그런 건 보호가 아니야……. 난 그런 보호는 필요 없어.”

기침 한번 하는 날이면 종일 침실에 갇혀 지내야 하는 보호라면, 아사야는 원치 않았다. 호숫가로 피크닉을 떠나도 한 시간이면 돌아와야 하는 보호 역시 불필요했다. 열 살이 되도록 아졸 성 밖으로 외출 한번 해 보지 못한 보호는 아사야를 외톨이로 만들었다.

아사야는 열두 살 먹은 백마를 가졌지만 그 말을 타는 법을 몰랐다. 전통 있는 기사 가문의 딸이지만 검을 쥐는 법도 몰랐다.

그런 보호가 그녀를 순진한 피해자로 만들었다.

“대체 무엇으로부터 날 보호하겠단 거야?”

아사야가 물었고,

“사실들.”

가디엘이 즉답했다.

아사야는 답답해졌다. 저는 가디엘을 볼 때 그리움과 정겨움을 먼저 느껴, 북받치는 감정들에 대화가 어려운데 그는 그렇지 않은 듯했다. 그간 그가 절 보고 싶어는 했을까 아사야는 확신할 수 없었다.

“무슨 사실?”

아사야가 작게 발을 굴렀다. 화난 아이 같은 동작은 그녀를 세일산 왕가의 공주가 아닌 어린 누이처럼 보이게 했다.

“내게 비밀로 할 일이 도대체 뭐가 있어?”

몰아붙이듯 외치는 말에 가디엘의 목소리가 드물게 커졌다.

“네 출생부터 모든 것이 비밀이었어!”

충동적으로 그가 외쳤다.

“어머니가 널 낳다 죽은 것부터가 비밀이었다고…….”

그러고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누이 앞에서 그는 저 자신을 잃어버렸다. 아버지의 빈자리를 완전하게 메꿔 낸 젊은 공작, 언제고 침착함을 잃지 않는 지휘관, 가디엘 아졸을, 그는 잃어버렸다.

제멋대로 쏘아붙인 소리가 남매의 귓가에 맴돌았다. 가디엘을 대신하며, 슬픈 신음을 흘린 이는 엠마오였다.

이제 누이가 울음을 터뜨리리라 생각하며 가디엘은 아사야를 살폈다. 그러나 그의 어린 누이는 울지 않았다. 어떤 감정을 느껴야 좋을까도 알지 못하는 상태였다.

그저 목이 턱 막혔다.

“엄마는 어떻게 생겼어?”

아사야의 머릿속에 그녀 자신이 맴돌았다. 가디엘의 소매를 잡고 살금살금 정원으로 내려간 날이 있었다. 어릴 적에 그녀는 ‘엄마’라는 관심사를 잊어먹을 때까지 집요하게, 같은 질문을 반복하고는 했었다.

“응? 가디.”

그러면 가디엘이 손거울을 보여 줬었다. 소년의 주머니에 넣고 다니기엔 어울리지 않게 예쁜 수가 놓인 아주 작고 둥그런 손거울이었다.

“…….”

아사야는 울지 않았다. 그저 물끄러미 그 옛날 손거울을 들고 다니던 오빠를 바라보았다.

말 없는 남매를 쫓아 뛰어올 아버지는 이제 없었다.

갑작스럽게, 아사야는 블란테를 생각했다. 어린 남동생, 테오도르 화이트를 원망하던 블란테의 목소리가 오늘날 아사야의 가슴을 후벼 팠다.

블란테의 원망을 들을 적에 아사야는, 왕좌를 가로챈 그녀의 동생보다야 제가 낫다고 생각했었다.

저는 가디엘에게서 어머니를 앗아 간 줄도 모르고서…… 허무한 착각이었다.

‘적어도 나젤탄의 왕자는, 블란테에게서 어머니까지 빼앗진 않았잖아…….’

그런 생각을 하는 스스로를 아사야는 용서할 수 없었다.

불쑥, 억울하고 슬퍼졌다. 남매 사이에 생긴 어떤 일에도 아사야의 책임은 없었다. 저는 그저 열 살의 어린아이였었고, 다섯 살의 아픈 동생이었고, 너무 약하게 태어난 작은 아기였었다.

객관적으로 생각해 보려, 스스로를 탓하지 않아 보려 애를 쓰면서도 아사야는 별수 없이 주저앉았다.

도서관의 낮은 의자가 무너진 아사야의 몸을 받쳤다.

‘공주님’, 하며 시녀들이 저를 일으키려는 것도 같았다. 그러나 아사야에게 가닿지는 못했다. 저를 채운 모든 것들이 저 멀리, 아주 먼 세계에서 개별적으로 떠다니는 듯했다.

아사야라고 성녀는 아니었다. 신처럼 완전할 수 없었고 감정으로부터 자유로웠던 적 없었다. 저와 놀아 주지 않고 매번 밀어내는 가디엘이 미웠고, 저를 외면하고 가두어만 놓는 가디엘이 미웠으며, 가브리엘을 둘째 왕자에게 보내 버린 가디엘이 미웠다. 미워했었다.

그러나 아사야가 지닌 미움은, 가디엘의 ‘미안해’ 한마디면 봄날 눈처럼 녹아내릴 미움이었다.

차라리 가디엘도 그런 이유에서 저를 미워했으면 싶었다. 다른 이유를 말해 주었으면 했다.

응석이나 부리던 어리숙한 성격이 싫어서, 매일 기침 섞어 콜록거리던 목소리가 미워서, 매일 디저트를 혼자 정해 버려서 밉다고 말했으면 했다. 그가 싫어하는 걸 알면서도 고양이 밥을 챙겨 줘서, 그래서 밉다고 했으면 싶었다.

그러면 사과라도 할 수 있었다.

왕성에서 공주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자신만의 성과 유리 정원을 구축해 놓고도, 아사야는 아사야 아졸이었다. 가디엘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그녀는 나약해졌고 상처 입었으며 불안해졌다.

이외의 모든 타인들은, 야베스 세일산조차 그녀의 방패 너머에 있었지만 가디엘은 달랐다. 가디엘은 아사야의 가장 여린 살이었다. 스치듯 할퀴는 말에도 피가 나게 아팠다.

가디엘이 왜 저를 미워하는지, 어째서 이토록 화를 내며 찾아왔는지 그 이유조차 모르는 채 아사야는 그를 믿었다. 바보처럼 제 계획을 말했고 의심하지 않았다. 마력이며 마도구며, 이해해 주진 않더라도 저를 도와줄 유일한 내 편이라 생각했다.

그가 저를 미워하더라도 그는 제 가족이니까. 아사야는 그 사실을 잊은 적이 없었다.

‘난 왜 이렇게 순진하지?’

태어난 이래 저를 처음으로 속인 이가 가디엘이었다. 그런데도 아사야는 그가 좋았다. 언제나 그와의 시간들이 그리웠다. 아무것도 모르고 바보로 살던, 어린 시절이 그리웠다.

그 시간들이 가디엘에게 지옥인 줄은 몰랐었다.

마침내 아사야가 입을 열었다.

“얼굴이…… 많이 상했어.”

작은 속삭임이 흘러나오는 입술을, 가디엘이 내려다봤다.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누이의 얼굴은 창백했다. 피부는 여전히 백옥 같았고 두 눈동자에는 작은 우울이 담겨 있었다.

“건강 좀 챙겨. 요즘도 밤마다 술을 마시는 건 아니지? ……수염도, 잘 어울리긴 하지만…… 가디 턱에는 매끈한 게 더 어울려.”

멍한 목소리가 그렇게 새어 나왔다.

이를 악문 채 가디엘은 어린 누이를 내려다봤다. 그의 눈에 제 누이는 여전히 꽃 같았다. 세상에서 가장 예쁘고 상냥한 여자가 그의 누이였다. 그 사실이 언제는 퍽 자랑스러웠었다.

빛을 받아 반짝거리던 눈동자가 오늘은 컴컴해졌다.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었다.

‘일부러 널 상처 입히려던 건 아니야.’

그렇게 말해 보려, 가디엘이 입을 열었다. 그리고 다물었다. 어디에선가 아버지께서 남매에게로 달려올 것 같았다. 어리고 연약한 아사야를 품에 안고, 저에겐 크게 호통을 칠 것 같았다.

사렙탄 세일산과 야베스의 부족함 없는 애정을 받으며 그의 누이는 이미 행복했다. 아졸 성에 제 침실이 남아 있단 사실도 아마 잊었으리라.

“……유라, 사라. 공작님을 배웅해 드려.”

침묵하는 가디엘로부터 고개를 돌리며 아사야가 말했다. 공주를 지키는 어린 시녀의 안내를 받아 가디엘은 떠났다.

제가 이렇게까지 말했으니 마법사를 찾는 일은 그만두리라, 그는 그렇게 판단 내렸다. 그가 아는 누이는 나약하고 어리숙한 꼬마였으므로.

시녀들과 가디엘이 떠난 자리에 아사야는 홀로 남았다. 사물처럼 덩그러니 놓인 아사야를 엠마오가 품에 끌어안았다. 힘 빠진 손으로 아사야는 그녀를 밀어냈다.

“아가씨…….”

알고 있었느냐고는, 묻지 않았다. 물을 필요가 없는 질문이었다. 아사야를 제외한 모든 이들, 죽은 아버지와 유모, 가디엘과 집사, 심지어는 하인들조차 그 사실을 알 것이었다. 아사야가 어떻게 태어났는지, 그녀가 그토록 궁금해했던 ‘엄마’가 어떻게 죽었는지.

이내 아사야는 초라해졌다.

‘내가 뭘…… 뭘 배우겠다고.’

쌓아 둔 책과 서류들이 눈에 들어왔다. 어려운 마법진과 용어들을 해독해 가며 풀어 적은 글자들도 보였다. 목적을 갖고 공부를 하고, 머리를 쥐어짜 내던 지난 한 주간의 시간이 머릿속을 스쳐 지났다.

그 시간 동안 아사야는 즐거웠었다. 마침내 저에게, 제가 해내야 할 숙제와 지킬 것이 생겼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 모든 노력이 저를 비웃는 것 같았다. 갖은 사물과 주위의 공기들마저 저를 손가락질하는 것 같았다.

왈칵 눈물이 났다. 이로 입술을 짓누르며 아사야는 흐느낌을 억눌렀다.

가디엘 아졸이 배웅을 거절하여 왕자비의 시녀들은 일찍 돌아왔다. 도서관 문을 조심스레 밀어 열며 시녀들은 머뭇거렸다. 저를 향한 눈짓들을 알아채고서, 아사야는 황급히 뺨을 닦았다.

눈물방울이 손등을 타고 밀려났다.

“……야베스 왕자님께서 공주님을 찾으십니다.”

사라가 말했다. 아사야는 애써 한숨을 억눌렀다. 왕자비의 창백한 뺨을, 시녀들이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고 덧붙였다.

“공주님께서 이미 베데르 성으로 향하셨고 저희와는 길이 엇갈렸다고 전달하겠습니다.”

깊이 고개 숙인 시녀들을 아사야는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비틀거리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두 다리가 후들거리는 것을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늙은 유모의 손이 조심스레 아가씨의 어깨를 받쳤다.

“……고마워.”

유모와 시녀들에게 뒷정리를 맡긴 채 아사야는 도서관을 빠져나갔다.


 

.*. *. *. *. *. *.


 

어떤 정신으로 베데르 성에 도착한 건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아사야는 가브리엘의 품에 안겨 있었다. 처음에 가브리엘은 드래곤이었다가, 나중에는 그녀의 눈물을 닦아 주려 사람으로 변한 채였다.

아사야는 무기력한 시절 사귄 저의 첫 친구, 제가 원하여 입술을 부빈 유일한 남자의 품에 안겨 말없이 울었다. 그러다가도 수많은 말을 횡설수설 이어 갔다.

두서없이 중얼거리는 그 말에는 울음소리와 한탄, 원망과 자기혐오가 엉망진창으로 뒤섞여 있었다. 공작가의 아가씨로서, 베데르의 딸로서, 둘째 왕자비로서 뱉어서는 안 될 투정이 아무렇게나 뭉쳐 있었다.

가브리엘로부터는 ‘응’, ‘그래’ 하는 대답 하나 없었다. 침묵하며 그는, 아사야가 눈물을 완전히 그치기만을 기다렸다.

제 안에 있는 줄도 몰랐던 감정을 쏟아 낸 뒤 아사야는 가벼워졌다. 그녀를 둘러싼 모든 것이 그대로인데, 눈물로 머릿속이 텅 빈 듯했다.

가브리엘이 그제야 입을 열었다.

“육 년 전에, 네가 나를 멍멍이라 불렀었지. ……내가 개가 아닌 것을 알면서도.”

그의 손이 아사야의 이마를 닦아 냈다. 울다 지친 아사야의 이마에는 발간 열 기운이 올라 있었다. 따듯하고 둥근 살 위에 가브리엘이 입을 맞췄다.

“내 눈에, 오히려 강아지는 너야. 아사야.”

그리고 말했다.

“네 목에 죈 목줄들을 봐. 울 정도로 그게 싫잖아."

그 누구로부터도 들을 줄 몰랐던 지적이었다. 그런 말을, 특히나 가브리엘을 통하여 들을 줄은 꿈에도 몰랐었다. 무어라 말해야 좋을까 몰라 아사야는 소리 없이 입술만 달싹거렸다.

“……하지만 너도 알잖아, 아사야."

젖은 눈을 깜빡대는 어린 인간을, 가브리엘은 힘껏 끌어안았다. 아사야의 작은 몸이 으스러질까 걱정될 정도로 강한 포옹이었다.

그는 아사야 세일산을 동정하지 않았다.

“네가 개가 아니라는 걸.”

다만 사랑하고 있었다.

가브리엘의 손이 닿는 제 드레스 스커트를, 아사야는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가브리엘은 그녀의 옷자락을 털어 내고 있었다. 더는 숲을 헤매어 오지 않는데, 램프와 훔친 빵을 들고 찾아온 것이 아닌데, 그 옛날 넝쿨을 지날 적에 묻혀 오던 흙가루를 털어 내는 듯한 동작이었다.

이내 아사야는 깨달았다. 가브리엘에게 그녀는 언제나 어린 인간이었다. 연고와 빵, 손수건과 담요를 들고, 그저 기쁜 마음에 모험을 찾던 소녀였다.

추억이 아사야를 끌어당겼다. 벗어날 수 없이 강한 힘에 아사야는 이끌렸다. 그 시절을 떠올리면 슬프면서도 그리웠다. 가만히, 가까이서 함께하면 그만이던 날들이었다.

가브리엘도 저도 그때와 다를 바 없었다. 함께하면 그만인 날들이었다.

‘아니…….’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찾으려면 찾아갈 수 있는 곳에 그가 있는데, 이제는 그것만으론 만족할 수 없었다. 그를 곁에 두고도 만날 수 없던 지난 며칠은 지옥이나 다름없었다. 가브리엘이 안전하고, 배부르고, 따듯하게 제 곁에 머무르는데도 아사야는 애가 탔다.

매일 끼니를 함께하고 그의 옆에서 잠들고 싶은데, 침실로 돌아와 만나는 이는 전혀 다른 남자였다. 제 손을 잡고 허리를 끌어당기는 손도 다른 이의 것이었다.

야베스 세일산은 아사야에게 그런 남자였다. 가브리엘이 아닌 다른 남자. 가브리엘을 이용해 저를 취한 남자. 그것뿐이었다.

세상은 언제나 아사야를 속였다. 남들 말처럼 되는 일은 단 하나도 없었다. 남들 말처럼 쉽지가 않았다. 왕자를 사랑하는 것도,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도 어렵고 끔찍하기만 했다.

야베스 세일산도 가디엘 아졸도, 심지어는 엠마오조차 아사야 세일산에게 취미가 있어 그것이 드래곤을 길들이는 일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아사야에게 가브리엘은 취미 따위가 아니었다.

취미가 아니니 질릴 리가 없었다. 그만둘 수도 없었다.

가브리엘로 인해 제 어디가 고장난 것 같았다.

한두 군데만 이상한 게 아니었다. 종일 보고 싶어 머릿속이 어지럽고 심장이 쿵쿵 뛰어 댔다. 가끔은 속이 울렁거렸고 손발이 홧홧하게 달아오르는 듯했다.

이제는 제가 미친 건 아닌가 싶었다. 몇 달 만에 만난 가디엘에게 아픈 말을 듣고, 그녀는 열 살 소녀 시절로 돌아가 버렸다. 열 살 소녀가 된 아사야에게는 죽은 어머니도, 떠난 아버지도 필요하지 않았다. 아사야에게 필요한 것은 가브리엘뿐이었다.

그의 품에 묻은 제 눈물을, 아사야는 문질러 닦아 냈다.

“가브리엘…….”

아사야가 부르자,

“응.”

가브리엘이 대답했다.

그의 낮고 깊은 목소리는 저만이 아는 소리였다. 아사야는 그 소리를 좋아했다. 그의 말소리를 들으면 그의 손을 잡고 싶어졌다. 그래서 손을 잡았다.

손을 잡으면 끌어안고 싶었고 끌어안으면 입을 맞추고 싶었다. 그래서 입을 맞췄다.

“…….”

입을 맞추면 혀를 섞고 싶었고 혀를 섞으면, 제 몸도 마음도 전부 가브리엘에게 바치고 싶었다. 그에게 순정을 바치고 싶었다. 모든 걸 그와 처음 하고 싶었다. 연애부터 결혼에 이르기까지, 입맞춤과 관계에 이르기까지, 모든 처음을 줘 버리고 순전한 사랑을 나누고팠다.

이미 지나가 버린 처음을, 그렇게나 주고 싶었다.

“사랑해, 가브리엘.”

마침내 아사야가 말했다.

“사랑해.”

그녀의 드래곤조차 먼저 뱉지 못한 말이었다.

아사야는 더 이상 전과 같지 않았다. 그녀는 가디엘이 알던, 가장에게 굴복하며 그의 말만을 믿고 살던 어린 소녀가 아니었다. 그녀는 드래곤과 사랑에 빠진, 세상 무엇도 대체할 수 없는 여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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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 바람이 낙엽을 쓸고 지나는 차가운 밤, 마녀의 집에 전령이 도착했다. 공주께서 왕성으로의 호출을 명하신다 하는 소환장과 함께였다. 제 집 앞을 가로막은 마차 한 대를, 마녀라 불린 여자가 올려다봤다.

“왕가에 공주께서 태어나셨나요?”

마녀의 멍한 얼굴을, 전령은 미간을 찡그린 채 내려다봤다. 세상의 소식조차 모르는 채 깊은 숲에 박혀 지내는 여자를 공주께서 왜 찾으시는지 의문이었다.

“공주라 함은 둘째 왕자비를 말씀드리는 겁니다. 아사야 세일산께서 당신을 찾으신단 말입니다.”

차가운 목소리로 전령이 말했다.

‘아사야’, 하고 마녀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아사야 세일산’, 그러고는 전령이 내민 소환장을 받아 들었다.

“아사야……, 아사야 아졸…….”

시뻘건 화상으로 뒤덮인 손으로 소환장을 움켜쥔 채, 마녀가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아사야 세일산의 인장 위에 입을 맞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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