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5/16)

공주와 용의 오후



 

아사야 세일산의 존재감이 확고해지매 그녀의 행보를 집중하는 눈이 많아졌다.

달처럼 환하고 꽃처럼 아름다운 얼굴에 심심한 표정을 지어 보이던, 얌전한 아가씨는 온데간데없었다. 아사야 아졸을 다룰 적에 그녀의 외모와 몸매, 옷차림과 귀걸이에 대해 말하던 이들도 이젠 변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일을 벌이는 거지?”

귀족들은 아사야의 머릿속을 열어 볼 수 없어 답답해했다. 그들에게 있어 아사야 세일산은 누구의 편인지 아리송한 강적이었다.

사렙탄 세일산 앞에 배를 내민 개나 다름없는 신하들은 왕의 총애를 독차지하는 아사야 세일산을 어찌 대해야 좋을지 몰라 했다.

본도 세일산을 따르는 부하들에게 아사야 세일산은 모순적인 존재였다. 어떤 날 그녀는 야베스 세일산의 아내로서 남편의 명성을 올려 주는 듯했다. 그러나 하루 만에 행동을 바꿔, 왕이 하사한 성은 제 아버지의 것으로 만들었으며 블란테 세일산과 절친한 교류를 쌓았다.

야베스 세일산의 뒤로 은밀히 힘을 넣는 이들에게도 아사야 세일산은 달달한 꽃이다가도 쓴 독침이었다. 부부로서 그녀와 함께할 적에 둘째 왕자가 힘을 얻을 것은 분명했다. 그러나 아사야 세일산의 행동은 단순히 ‘내조’로 보기에 지나치다는 평이 많았다.

아사야 세일산을 혼란에 빠지게 한 왕성의 흐름이, 이제는 그녀와 함께 흘러가고 있었다.

귀족들이 그녀를 어찌 다룰까 갈피를 잡기도 전에 아사야는 공사를 시작했다. 국왕께서 친히 헌사하신 ‘베데르 성’의 근방에 공사를 위한 장비들과 마법사를 위한 작은 텐트가 설치되었다.

언제나, 아군보다는 적이 빠른 법이었다. 몇몇 귀족들은 베데르 성을 눈엣가시로 여겼고, 둘째 왕자비가 시작한 공사를 공격의 기회로 삼았다.

“왕께서 하사하신 성을 함부로 보수하다니요. 처벌받아 마땅한 일이 아닙니까.”

그렇게 항의하는 목소리가 있었고,

사렙탄 세일산께서 친히 하사하신 성을 윤허 없이 보수하는 둘째 왕자비의 몰지각에 대한 견벌 촉구

구구절절한 서류 더미가 있었다.

사렙탄 세일산을 칭송하는 방식으로 아사야 세일산을 공격하는 서류들의 수신인은 분명했다. 대륙의 왕, 사렙탄이었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뜬 채, 마음에 드는 문장이라곤 단 한 줄도 없는 서류를 내려놓았다.

“공주는 성의 어디가 마음에 안 든다더냐?”

그러고는 대뜸 물었다.

왕의 눈총에, 비아탄 아멕은 자세를 고쳐 앉았다.

왕의 집무실은 ‘국고 정산의 달’인 시월이면 가장 붐볐다. 사렙탄 세일산과 그의 오른팔인 비아탄 아멕, 정산 서류 금고를 관리하는 문맹 벙어리 하인 둘만이 드나드는 이의 전부였지만, 산처럼 밀려드는 서류의 존재감은 그들보다 강했다.

언제나 그러했지만, 왕의 집무실에 들어설 때면 비아탄 아멕은 단순한 기사가 아니었다. 집무실 한편에는 벌써 그를 위해 마련된 소파가 있었고, 그가 점검해야 할 공문이 있었다.

읽던 종이를 내려놓으며 비아탄은 목소리를 가다듬는 척 생각을 빨리했다. 사렙탄이 무어에 대해 질문하는지 알아채기란 어렵지 않았다.

이번 가을에 접어들어 가장 큼직한 지출은 둘째 왕자비에게 하사하신 성의 공사 비용이었다. 둘째로는 블란테 화이트를 블란테 세일산으로 들이는 과정에서 보낸 예물의 비용으로 ‘베데르 성 공사 비용’에서 마법사 한 명 분의 급여를 제한 값이었다.

두 경우 모두 왕께서 지시하시어 왕께서 쓰신 돈이니 누구라도 함부로 왈가왈부할 일이 아니었다. 단, 그렇게 값나가는 베데르 성을 왕이 아닌 다른 이가 보수 공사한다면 말이 달랐다.

왕께서 반드시 보아야 할 서류와 그렇지 않은 서류들-대체로 투정 섞인 상소문으로 사사로운 것들이었다-을 분류할 적에 비아탄도 글을 읽어 알았다.

‘사렙탄 세일산께서 친히 하사하신 성을…… 어쩌고저쩌고…… 견벌 촉구.’

비아탄은 대강이나마 그 서류의 이름을 기억해 냈다.

“겉으로 보기에 대공사로 보여 착각들을 한 모양입니다.”

그리고 답했다. 등허리는 다시금 소파에 기댄 채였다.

“성 내부가 아니라 밖을 고치는 중입니다.”

믿는 기사가 아무렇지도 않다는 양 그렇게 설명하니, 사렙탄의 두 눈은 가늘어졌다. 그는 서류를 황단나무 책상에 내려놓고는 손가락으로 툭, 툭 소리가 나게 두들겼다.

“그러니까, 무어가 마음에 안 들어서 공사를 하느냔 말이야?”

왕이 채근하자,

“곧 겨울이지 않습니까.”

비아탄이 즉답했다.

“폐하께서는 공주님에게 태양 조명을 선물한 본인이십니다.”

비아탄의 설명은 늘 3할이 모자랐다. 힌트를 담긴 했되 애매한 대꾸에 사렙탄은 다시 한번 서류를 읽어 보았다.

이미 넓은 정원에 온실을 만들겠노라는 빌미로 값비싼 유리 공사가 이루어지고 있으니……, 혈세 낭비와 국고 탕진을 중재해 달라…….

그리고 서류의 뒷장을 넘겨 상세한 결제 내역을 확인했다. 드로인이 서명한 영수증에 쓰인 자재의 이름은 ‘백단 장막 유리’였다.

장막 유리란 가공이 덜 되어 불투명한 유리를 뜻했다. 백단이라 하면 개중에도 색이 희고 균일한 상품을 뜻했다. 영수증에 적힌 금액은 870세실 6리스였다.

장막 유리를 백단으로 구한 것치고 싼값이었고, 왕궁에 세울 온실 정원을 위한 공사비치고는 터무니없이 싼값이었다. 그 외에는 리스의 단위까지 기재한 영수증이 없을 지경이었다.

대개 왕의 승인을 요청하는 결재안은 세실을 아랫단위로 두고, 그 윗 단위인 아몬을 주 단위로 썼다.

“제가 가꿀게요. 아버지께서 아끼시던 꽃으로…… 꾸미고 가꾸고 위로하겠어요.”

아사야의 천사 같던 소곤거림도 기억났다.

“나를 우습게 여기는 게로군.”

사렙탄이 낮게 읊조렸다. 비아탄이 조심스럽게 주군의 낯을 살폈다. 그는 손에 쥔 서류 위에 ‘불허’ 도장을 쾅 소리가 나도록 찍어 내렸다.

“크리스탈 유리창으로 도배해도 시원치 않겠구먼……. 날더러, 제 아버지 넋을 기리겠단 공주에게 온실도 못 만들게 하란 말이냐?”

비아탄은 다시 손에 쥔 공고문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러고는 점잖고 편안한 척 목소리를 냈다.

“노여워 마십시오. 공주님도 이젠 왕가의 일원이 된 거지요.”

여차하면 ‘알뜰하신 공주께서 공사 인력도 마법사 협회를 불러다 쓰셨다더라’ 덧붙일 요량이었지만, 그럴 필요까지는 없어 보였다.

“따지기 좋아하는 이들은, 공주님이 무얼 하건 꼬투리를 잡아 공격해 댈 겁니다.”

말은 거기서 그쳐야 했다. 그러니 폐하께서 지켜 주시라는 첨언 따위는 안 붙이는 게 좋았다. 약간의 방향을 잡아 놓고는 손을 떼어야, 은근한 방향잡이로서 오래갈 수 있었다.

‘쯧’, 사렙탄이 혀를 찼다.

“비아탄. 자네는 너무 무심해.”

아사야 세일산을 언급하는 서류들은 죄 책상 아래로 쓸려 내려갔다.


 

.*. *. *. *. *. *.


 

완공된 유리 정원은, 최고의 모습은 아니었다. 백색 장막 유리를 주자재로 사용해 지출을 아낀 결과였다.

아사야가 직접 꾸린 정원 내부만큼은 무척 아름다웠다. 그녀는 넓은 정원의 외곽을 숲처럼, 성과 가까운 안쪽은 숲으로 둘러싸인 휴식 장소로 꾸몄다.

휴식 장소에는 커튼으로 감싼 순백색 침대를 놓는 과감한 선택을 했다. 새로 심은 나무들과 넓은 잎을 가진 풀의 줄기들이 뜬금없이 놓인 백색 침구를 끌어안는 모양새였다.

작은 새장이 천장에 걸렸고 높은 자리에 태양 조명이 놓였다. 가장 밝은 자리에는 샛노란 온시디움이 꽃을 피웠다. 나비와 청설모가 숨어든 온실은 왕성 안의 풍경이라곤 믿을 수 없게 독립적인 공간이었다.

그래 봐야 밖에서 보면 거대한 유리 덩어리다, 그런 비판을 아사야는 꿈쩍 없이 무시했다. 불투명한 창이 성의 뜰을 가로막은 모양새라 불편하단 말 역시 개의치 않았다.

불투명하고 거대한 유리 덩어리.

아사야가 원한 그대로의 정원이었다.

가브리엘이 마음껏 오갈 수 있는 자연, 누구의 시선도 투과할 수 없고 어떠한 압력도 뚫고 들어올 수 없는 그들만의 숲.

“…….”

무뚝뚝한 얼굴로 우두커니 선 가브리엘의 앞에서, 아사야는 두 팔을 활짝 펼쳐 보였다. 제가 만들어 낸 작은 숲을 보라는 자랑스러운 동작이었다.

정작 가브리엘의 반응은 떨떠름했다. 밖에서 안이 비치지 않는다는 말을 믿지 못해, 폴리모프를 하는 것에만 한 시간이 걸린 그였다.

아사야의 선물이라 별수 없이 입은 바지와 벨벳 셔츠도 불편하기만 했다.

‘너무 부드러워…….’

투정하는 대신 그는 입을 다문 채 이리저리 서성거렸다.

가죽 부츠에 발을 집어넣는 것까지는, 암만 아사야의 부탁이래도 들어주지 못한 드래곤이었다. 저보다 약한 짐승의 가죽으로 지은 신발에 굳이 두 발을 가둘 이유가 없었다. 특히나 발등을 조이는 답답한 감각은 소름 끼치고 기괴하다고 생각됐다.

맨발로 잔디를 밟으며, 그는 하룻밤 사이 마법으로 심긴 나무 기둥을 손바닥으로 매만졌다.

“마음에 들어?”

편안함이 오히려 어색한 가브리엘에게, 아사야는 충분한 시간을 줄 수 없었다.

“응? 가브리엘.”

때문에 ‘아주 마음에 들어’라는 대답이 돌아올 때까지 채근하고, 또 졸라 댔다.

가브리엘은 사람의 모습으로 아사야와 마주하기에 제약이 있는 남자였다. 나흘에 한 번, 상태가 좋을 때에는 기적적으로 이틀에 연이어 얼굴을 보여 주었고, 그마저도 삼십 분을 못 넘겼다.

가장 오래되고 가장 좋아하는 친구임에도 아사야는 가브리엘의 외모에 적응하지 못했다. 사나흘을 지나 다시 들을 때마다 새것 같은,

“그래.”

묵직한 목소리도 여전히 낯설었다.

“마음에 들어.”

마침내 가브리엘은 경계심이 들 정도로 따듯하고 온화한 정원의 중앙으로 걸어왔다. 아사야는 이미 백색 침대에 누운 채였다. 웃는 얼굴로, 아사야가 제 옆자리를 두들겼다.

이내 가브리엘은 궁금해졌다.

아사야는 풀잎에 둘러싸인 제 모습이 어떤지 알고 있을까? 웃을 때면 저마저 두려움을 느낄 정도로 어여쁘고, 어떤 불행도 안 겪어 본 인간처럼 해맑다는 걸 알기는 할까……. 그런 질문을 꺼낼 말솜씨가 검은 용에겐 없었다.

“…….”

긴 문장을 내뱉는 대신, 가브리엘은 그녀의 옆자리에 묵직한 몸을 앉혔다.

폴리모프를 한 채로도 그의 몸은 단단하고 크고 무거운 편이었다. 아사야가 마련한 푹신한 침대 매트가 그를 향해 기울었다. 덕분에, 드러누운 아사야의 몸이 가브리엘에게로 흘러내렸다.

“하하.”

그게 재미있다는 양 아사야가 웃음을 터뜨렸다. 열 번 중의 아홉 번은, 가브리엘은 그런 아사야의 웃음을 이해할 수 없었다.

수다는 아사야의 몫이었다. 그녀는 그날의 하루 일과 전부를 가브리엘에게 알려 주었다. 가브리엘이 느끼기에, 제 역할은 ‘말없이 귀만 내놓은 시커먼 덩어리’ 정도였다.

이따금,

“그래?”

혹은,

“으음.”

대답 소리를 들려주는 게 전부였다.

“가브리엘은 나한테 할 이야기 없어?”

드래곤의 침묵이 불만스러운 듯, 아사야가 눈을 좁힐 때도 있었다.

“오늘은 뭘 했는지, 기분이 어떤지, 그런 것들.”

가브리엘은 물끄러미, 제 허벅다리에 목을 기댄 인간의 얼굴을 내려다봤다. 아사야의 얼굴은 그의 주먹만 한 크기였고 가늘게 뜬 눈은 속눈썹이 길고 예쁠 뿐이어서 조금도 위협적이지 않았다.

그래도 가브리엘은 고민했다.

“……하나 있어.”

불쑥, 드래곤이 할 말을 찾았다.

“응?”

아사야가 눈을 반짝였다.

가브리엘은 모르는 듯했지만, 아사야는 언제나 그의 발음이 특이하고 듣기 좋다고 생각했다. 가브리엘이 들려주는 이야기라면 단어 사전을 읽는 것이래도 하루 종일 듣고 싶었다.

“네 시녀들.”

가브리엘이 찾은 주어는 그러나 뜻밖이었다.

“나를 아주 미워해.”

들려주는 이야기 역시 상상 밖의 화제였다.

“공주님을 독차지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야.”

그것으로 가브리엘이 말을 마쳤다. 멍한 얼굴로 그의 단단한 턱을 올려다보다가, 아사야는 상체를 일으켰다. 가브리엘은 늘 그렇듯 진지한 얼굴로 그녀를 마주 보고 있었다.

‘음’,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아사야가 입을 열었다. 솟구치는 광대를 내려 보려 애썼지만 물거품이었다.

“그러지 말라고 해 줄까? 내 드래곤 노려보지 말라고 해 줘?”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아사야가 답하자,

“그래.”

가브리엘이 그녀를 따라 웃었다. 저도 제 말이 우스운 기색이었다.

아사야는 큭큭 소리를 내며 어깨를 들썩거렸다. 덩치는 집채만 하고 생김새는 포악한 내 드래곤을 노려보지 말라고, 어린 유라와 사라를 달래는 일을 상상만 해도 재밌었다.

“알았어, 우리 강아지.”

그 말을 끝으로 아사야는 폭소했다. 침대 위로 넘어가도록 웃어 대며, 아사야는 두어 번은 더 ‘덩치만 큰 강아지’라며 가브리엘을 귀여워했다. 종지에는 한참을 웃어 댄 탓에 숨결이 가팔라 왔다.

그녀를 따라, 가브리엘이 천천히 몸을 눕혔다. 침대에 모로 누운 채 그들은 서로의 웃음기 어린 얼굴을 마주 봤다.

그제야 아사야는 깨달았다. 가브리엘의 웃는 얼굴을 처음 보았음을.

“알았어…….”

가만히, 아사야는 그를 향해 고개를 기울였다. 미소 짓는 가브리엘의 보라색 눈동자는 부드러웠고 검은 속눈썹이 눈매를 진하게 만들었다. 웃음을 참느라 살짝 찡그린 코끝은 어울리지 않게 개구쟁이 같았다.

“알았어.”

그의 입술에, 그녀의 작은 입술이 포개졌다.

웃음소리는 더는 들리지 않았다. 심장이 뛰는 소리만이 세계를 부술 것처럼 광포하게, 쿵쾅쿵쾅 울렸다.


 

.*. *. *. *. *. *.


 

피크닉 바구니를 왼팔에 걸친 채, 아사야 세일산이 모습을 보였다. 두툼한 양털 망토와 보닛으로 몸을 감싼 채였다.

경비대원들이 황급히 베데르 성 파사드로 달려 나왔다. 지체 없이 유리 정원의 문을 열기 위해서였다. 시녀들이 든 우산이 있기는 하였지만, 왕자비께서는 겨울비 한 방울이라도 맞아서는 안 됐다.

바야흐로 겨울이었다. 북부는 벌써 흰 눈으로 뒤덮였고 수도의 비도 눈에 가깝게 차가웠다.

그러나 공주를 맞이하는 정원만큼은 온실이었다. 비 내리는 성문 밖까지 풀내음과 훈기가 훅 끼쳤다. 유리 한 장을 사이에 놓고 봄과 겨울이 엇갈렸다.

언제나 그러하듯이 아사야는 두 시녀와 유모를 정원에 남겨 두었다. 처음에는 공주께서 건네시는 샌드위치와 ‘편히 쉬고 있어’ 하는 명령이 어색하기만 하던 사라와 유라도 이젠 달랐다. 참치가 든 샌드위치를 기쁜 얼굴로 품은 채, 시녀들은 잔디 위에 조심스레 자리 잡았다.

램프의 밝은 빛이 내리쬐는 성안으로 들어선 아사야는 살금살금 움직였다. 비 오는 오후, 갑자기 베데르 성을 찾은 이유가 있었다.

‘망루에 있겠지?’

비를 맞길 좋아하는 드래곤을 알기 때문이었다.

군사 시설로서의 목적은 없고 그저 구색을 갖추느라 마련된 망루는 가브리엘의 테라스나 다름없었다. 빗방울에 날개를 적실 드래곤을 상상하며, 아사야는 소라처럼 둥근 계단을 올랐다.

베데르 성 안에는 그녀를 감시할 눈짓 하나 없으므로, 불편한 구두도 벗어 버렸다. 주인 잃은 구두 두 짝이 계단에 남았다. 맨발로 꼭대기 층까지 오르자 활짝 열린 문이 보였다.

조심스럽게, 아사야는 찬비에 적신 돌을 밟았다. 시원하고 매끄러운 감촉이 발바닥에 닿자 웃음이 났다.

가브리엘을 놀라게 하려던 계획은 이미 물거품이었다. 계단을 오른 것만으로도 숨이 차 헉헉거린 탓이었다. 살금살금 가까워오는 발소리를 들으며, 그는 진작 아사야를 기다리고 있었다.

비에 젖은 용의 비늘이 축축하게 번들거렸다.

“가브리엘.”

턱에 묶인 리본을 풀어 아사야는 보닛을 벗었다. 그러고는 차게 식은 망루 위를 걸었다.

드래곤이 검은 날개를 활짝 펼쳤다. 아사야의 머리 위를 천막처럼 가려 비를 막으며, 그가 거대한 머리를 움직였다. 다시 실내로 들어가라는 턱짓이었다.

뻔한 신호를 모르는 척하며 아사야는 살금살금 그에게로 다가갔다. 날개 아래로 다가가 두툼한 흉곽에 손바닥을 대자, 가브리엘이 한숨을 훅 내쉬었다. 이제 아사야는 그 소리가 용의 웃음소리임을 알았다.

시커먼 날개 아래에 몸을 웅크린 채, 아사야는 비를 향해 팔을 뻗었다. 차갑고 맑은 빗방울이 그녀의 손금 위로 떨어졌다.

“시원해.”

두 손을 그릇처럼 모은 채로 아사야는 빗물을 받았다. 손바닥에 조금 고인 물을 찰박 소리 나게 튕겨 내자, 가브리엘이 목을 깊이 숙였다. 드래곤의 젖은 콧잔등이 아사야의 배를 슬쩍 밀었다.

“아, 왜…….”

툭, 미는 힘에 못 이겨 아사야는 한 발짝 문을 향해 밀려났다.

“왜, 같이 비 맞자.”

투정해도 소용없었다. 무시무시한 덩치를 지닌 사나운 드래곤이 또 한 번, 코끝으로 아사야를 툭 밀쳤다. 웃음을 터뜨리며 아사야는 그의 머리를 감싸 안았다.

냉혹한 드래곤은 공주의 사랑스러움에도 지지를 않았다. 단단한 콧잔등의 위력을 발휘하며 그는, 제 머리를 껴안은 아사야를 그대로 밀었다. 아사야의 두 발이 순간 허공에 떴다가, 카펫이 깔린 실내로 옮겨졌다.

카펫 위에 젖은 발을 대며 휘청거리다가, 아사야는 용의 목을 껴안고서 나자빠졌다. 가브리엘의 그림자가 작은 인간의 몸을 덮었다.

품위 없이, 아사야는 바닥에 드러누웠다. 상체에 힘을 풀고 누워 버리자 가브리엘의 보라색 눈동자가 당황한 듯 그녀를 살폈다. 드레스 스커트가 풍성한 탓에 넘어진 엉덩이가 아프기는커녕 두 발이 허공에 뜰 지경이었다.

드래곤의 앞발 사이에 뻗은 제 다리를, 아사야는 힐끔 내려다봤다. 가브리엘의 상체가 그녀의 몸을 완전히 덮고 있었다.

“가브리엘, 바보.”

손바닥보다 커다란 용의 눈을 볼 적에 아사야는 그 속에 비친 저를 볼 수 있었다. 젖은 머리칼이 달라붙은 뺨에 홍조가 생겼다.

“……더 젖었잖아.”

묵직한 드래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아사야가 속삭였다. 머리칼과 턱, 드레스 가슴을 적신 채였다.

그제야 가브리엘이 물이 뚝뚝 떨어지는 거대한 몸을 비켰다. 드래곤이 개처럼 몸을 털자 빗방울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차가워!”

실소하며 아사야가 상체를 일으켰다.

이내 가브리엘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러곤 움직이지 않고 멈춰 버렸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미소만 짓다가, 아사야는 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미안…….”

검은 드래곤으로부터 등을 돌리며 아사야는 제 눈을 두 손으로 가렸다.

“이제 옷, 입어도 돼.”

그러자 그녀의 등 뒤에서 새는 듯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쿵, 쿵 걷던 용의 발소리가 줄어들더니, 저벅저벅 걷는 사람의 발소리로 변했다.

가느다랗게 실눈을 뜨고서, 아사야는 제 발 옆으로 번지는 그림자를 보았다. 키 큰 남자의 그림자가 범상찮게 일렁거렸다. 성인 남성의 크기로 줄어든 몸에 집어넣기 위해 기괴한 형태로 매달린 날개의 그림자가 그의 몸보다 커다랬다. 느릿느릿 경련하며 그의 몸 안으로 스며드는 날개가 천사의 것 같기도, 악마의 것 같기도 했다.

이내 가브리엘은 폴리모프를 마쳤다. 남은 것은 커다란 남자의, 보편적인 그림자뿐이었다. 그림자가 허리를 숙이고는 바지를 꿰어 입기 시작했다. 사람으로 변한 채로도 그는 머리를 흔들며 물기를 털어 냈다.

젖은 발을 부드러운 카펫에 문질러 닦아 내며, 아사야는 커다란 수건을 챙겨 들었다. 그리고 돌아서자 물방울을 뚝뚝 흘리는 가브리엘이 보였다.

“…….”

입술을 꾹 다문 채 아사야는 그의 잘빠진 턱을 올려다보았다. 비에 젖은 검은 머리칼이 그의 이마에 들러붙어 있었다. 까만 속눈썹에 빗물이 고였다가, 떨어졌다.

매일 보는데 매일같이 낯선 얼굴이었다. 젖은 채로 상체를 드러내고 있으니 더욱 어색했다.

큰 손으로 제 낯을 닦아 낸 뒤 가브리엘이 허공에 대고 손을 털었다. 빗방울이 후드득 바닥으로 떨어졌다.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알 수 없어져, 아사야는 이리저리 눈동자를 방황했다.

“자.”

결국은 고개를 숙이고 수건을 내밀었다.

그녀가 건넨 수건을 받아 가브리엘이 넓게 펼쳤다. 제 몸을 닦으라고 건넨 수건을, 그는 아사야의 어깨에 둘렀다. 제 뺨에 묻은 물방울을 닦아 내는 가브리엘을 보며 아사야는 웃음을 터뜨렸다.

“네 몸부터 닦아야지! 쫄딱 젖었잖아.”

그제야 가브리엘이 두 눈을 끔벅거렸다. 예리한 얼굴에 둔한 표정을 짓는 것이 우스워, 아사야가 실소했다. 어깨를 들썩거리며 웃는 아사야의 볼을 가브리엘이 마저 닦아 냈다. 젖은 머리칼에 매달린 빗방울을 털어 주려다, 그는 왕자비의 완벽한 머리 장식을 망쳐 버렸다.

“간지러워!”

틀어 올린 머리칼이 헝클어진 채 아사야가 외쳤다. 어린아이처럼 키득거리던 웃음이 더욱 커졌다. 까맣고 긴 머리칼이 그녀의 뺨과 어깨를 타고 흘러내렸다.

아랫니가 보이도록 활짝 웃는 아사야의 몸을, 가브리엘은 수건으로 둘러 끌어안았다.

“간지러워…….”

비에 젖은 가브리엘의 몸은 기분 좋게 서늘했다. 그의 매끈한 어깨에 볼을 기대며 아사야는 전신에 힘을 뺐다.

검은 날개 대신 커다란 수건으로 감싸 주는 품이 든든했다. 영원이라고 불리는 시간 내내 기대고 싶은 품이었다. 그러나 욕심을 부리는 대신, 아사야는 수건을 들어 가브리엘의 뺨을 닦아 주길 택했다.

“감기 걸리겠어.”

그러자 가브리엘의 단단한 뺨이 부드러워졌다. 보라색 눈동자를 가늘게 뜨며 그가 웃었다.

“감기?”

그리고 되물었다. 이상할 정도로 낯은 목소리였다. 제 걱정을 하는 게 우습다는 듯 웃는, 세상에서 가장 건방지고 튼튼한 남자를 아사야는 꼼꼼히 닦아 주었다.

“원래 감기는…… 방심한 날 걸리는 거야. 그런 것도 몰라?”

“모르지.”

“드래곤도 별거 아니네?”

“…….”

발뒤꿈치를 들고 종종거리는 아사야를 배려하며, 가브리엘이 다리를 벌리고 머리를 숙였다. 제 머리칼도 직접 말린 적 없는 손으로, 아사야는 그의 까만 머리칼을 털고, 윤기가 나도록 닦아 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기침소리가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작게 재채기를 한 뒤 아사야는 손바닥에 얼굴을 묻고는 ‘흠, 흠’ 목을 가다듬었다. 가브리엘의 눈이 그녀를 집요하게 좇았다.

“감기.”

가브리엘이 말했고,

“아니거든?”

아사야는 큰뿔염소 털 카펫 위로 자리를 옮겼다.

건조한 목을 침으로 축이며 웅크리는 아사야에게로, 가브리엘이 가까이 다가갔다. 그는 왕성에서 가장 귀한 여자로 취급되는 공주를 강아지처럼 다뤘다. 아사야의 팔 밑에 두 손을 집어넣고는 번쩍 들어 제 무릎 위로 옮겨 앉힌 것이었다.

놀란 바람에 아사야가 작게 비명을 질렀다. 그녀가 소리를 지르건 말건 가브리엘은 담요를 찾기 바빴다. 묵직한 팔이 보드랍고 두꺼운 담요와 함께 아사야를 감싸 안았다.

“방심하지 마.”

공주의 여린 어깨에 턱을 기대며, 가브리엘이 속삭였다.

그가 느끼기에 아사야의 몸은 너무 가느다랗고 마르고 조그마했다. 그런 주제에 눈은 어찌나 큰지, 감기에 걸려 기침이라도 세게 했다간 별처럼 떨어지지 않을까 무서울 정도였다.

드래곤의 근심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사야는 무릎을 모으고 몸을 웅크린 채 말이 없었다. 귀를 붉힌 채 얌전해진 그녀의 얼굴을 가브리엘이 빤히 바라보았다.

그가 손을 들어 이마의 체온을 잴 때에서야,

“감기 아니래도……...”

아사야가 소곤거렸다.

자주 하던 투정을 들려주자 가브리엘은 안심한 눈짓이었다. 포옹을 풀려는 느릿한 그의 팔을, 아사야가 붙잡았다.

“…..…그래도 추우니까.”

그러고는 제 허리에 둘렀다.

큼직한 담요로 서로를 포장한 채 그들은 나른한 오후를 즐겼다. 아사야가 가져온 샌드위치는 꺼내는 족족 가브리엘의 뱃속으로 들어갔다. 식욕에 끝이 없는 드래곤이 신기한 듯 아사야가 그를 놀렸다.

“먹는 만큼 살쪘으면 벌써 지붕도 뚫었겠어. 보수 공사를 세 번은 더 했을 거야.”

그러고는 저는 조그만 수플레 한 조각이나 입에 넣는 것이었다. 가브리엘이 코웃음을 쳤다.

“그렇게 조금 먹으니까 키가 안 자라지.”

드래곤의 지적에 아사야가 입을 벙긋거렸다. 말문이 막힌 순간 아사야는 가브리엘의 팔뚝을 살짝 때렸다. 그래봐야 돌처럼 단단한 근육에 부딪힌 탓에 제 주먹만 아플 뿐이었다.

“내가 뭐 어때서?”

아사야가 소리쳤다.

“쪼그맣잖아.”

“네가 너무 큰 거야.”

아사야가 그의 두꺼운 손목에 제 손목을 대보았다. 가브리엘의 체구에 빗대자니 제 몸이 ‘쪼그맣다’는 말을 부정할 수 없게 됐다. 입술을 삐죽거리며 투정하는 아사야를, 가브리엘이 웃는 얼굴로 내려다봤다.

빗소리가 창을 때리는 소리를 들으며 아사야는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풍성한 드레스가 쿠션처럼 구겨진 줄도 모르고 떠드는 수다였다. 역사를 공부하는 중이라며 그녀가 들려준 신화 몇 가지를, 가브리엘이 드물게도 정정해야 했다.

“인간들이란…...….”

그들 입맛대로 고쳐 놓은 이야기를 군데군데 지적하는 사이 몸이 말랐다. 아사야의 머리칼은 어제처럼 보송보송해졌고, 가브리엘의 살결도 사막 바위처럼 건조해졌다.

그래도 아사야는 가브리엘의 품을 떠나지 않았다. 가져온 책을 펼쳐 지적받은 부분 위에 작은 메모를 남기는 게 전부였다.

그녀가 그려 놓은 낙서를 ‘고양이’라 불렀다가, 가브리엘은 눈총을 받아야 했다. 설마하니 시커먼 동그라미에 세모 두 개를 그어 놓은 것이 제 초상화인 줄은 몰랐던 그였다.

“엠마오는 나더러 화가를 해도 되겠다고 그랬는데…...….”

“……으음.”

인간들의 우정이란, 가브리엘에게는 아직 이해하기 어려운 주제였다.

태양 조명의 밝은 빛이 그치지 않는 유리 정원은 왕성에서 가장 따듯한 장소였다. 그런 온실이 감싼 베데르 성은 왕성에서 두 번째로 따듯한 곳이었다. 그러니 암만 찬비를 맞았다 한들 아사야가 추울 리는 없었다.

가브리엘은 그 점을 지적하지 않기로 했다. 아사야와 함께일 때면 종종, 그는 연기자였다. 아는 사실도 모르는 척하며 둔한 드래곤 흉내를 내는 것이었다.

이를테면 아사야의 보드랍게 부푼 가슴 밑에서 심장이 쿵쿵대는 것을, 달아오른 귀가 불에 탈 것처럼 새빨개진 것을, 그녀가 제 어깨에 얼굴을 감출 때면 그 표정이 수줍은 것을, 진득한 애정이 샘물처럼 솟는 것을, 그는 모르는 척했다.

“아직 추워?”

그렇게 묻자,

“응.”

아사야가 그의 어깨에 얼굴을 감췄다.

그래서, 가브리엘은 비를 좋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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