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브리엘의 방
오전에서 점심으로 해가 지날 무렵에 드로인이 도착했다. 공작 깃으로 장식한 갈색 모자에 세련된 망토를 두른, 세상 누구보다 유행에 민감한 남자였다. ‘드로인’이란 그의 이름은 아니며 왕성을 오가는 유일한 방문 상인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주문받은 물건을 한아름 실은 참나무 수레 역시 언제고 그와 함께 등장했다. 오늘 전달할 물량은 수레를 채우고도 넘쳐서, 그의 조수가 짐꾼이 되어 함께였다. 상품의 도착지는 다름 아닌 둘째 왕자 부부의 침실이었다.
드로인이 허리 숙여 제 새로운 고객에게 예를 갖췄다.
“제가 너무 일찍 와 버렸군요, 송구합니다.”
드로인이 말했다. 1분도 늦지 않고 제시간에 도착했음을 모르고 하는 말은 아니었다. 둘째 왕자비가 거울 앞에 앉은 채인 데다 시녀들이 그녀의 머리를 빗어 내리고 있어서였다.
“준비를 마치실 때까지 천천히 기다리겠습니다.”
거울을 통해 그와 눈을 마주치며 아사야는 미소 지었다.
“드로인이 골라 온 물건이니 확인할 필요가 없단 걸 알아요. 두고 가세요.”
아사야가 말했다. 둘째 왕자비가 제 남편과 달리 관대하고 털털한 여인이란 것에 드로인은 놀랐다. 그에게 있어 왕실의 여인이란 외모도, 출신 집안도, 피부의 색깔도 중요치 않았다.
얼마나 까탈스러운 고객인가?
그것만이 중요했다.
물건을 확인도 않고서 두고 가라는 손님은 드로인 인생 처음이었다. 그는 반가운 기색을 감추지 못하며 유모가 손짓하는 방 한편에 상품을 내리기 시작했다. 둘째 왕자의 주문을 받아 상품을 가져올 때마다, 두 번은 기본이고 심한 경우 일곱 번도 물건을 반품, 회수, 교체해 온 그였다.
베데르 아졸의 여식, 아사야 세일산이 자필로 적어 보낸 주문서를 받았을 적엔 얼마나 가슴 졸였는지 몰랐다. 그녀의 주문서에는 구체적인 상품명이 없었다. 물건의 질과 용도만이 쓰여 있을 뿐이었다.
주문서에 맞추어 물건을 고를 적에 드로인은 시험을 받는 기분이었다.
‘겉은 부드럽고 속은 두꺼운 대형 카펫’으로는 밑면에 사암두꺼비 가죽을 덧댄 큰뿔염소 털 카펫을 골랐다. ‘소가 앉아도 꺼지지 않게 푹신한 쿠션’은 요정이 짠 은사로 겉을 짜낸 쿠션을 어렵사리 구하고, 속은 아울베어의 깃털로 채웠다. ‘보급형 서적의 16배 크기로 제작한 〈모험록〉 전권’은 말할 것도 없었다.
하나같이, 주문 취소나 환불을 겪었다가는 패가망신할 금액의 상품이었다.
안도의 기색을 못 감추며 드로인은 아주 활짝 웃어 보였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자주 불러 주세요, 공주님.”
기쁜 마음에 그는 구매를 권유하기 위해 가져온 향수를 선물로 바치고야 말았다. 정령수를 섞어 제조한 고가의 코롱이었다. 아사야 세일산은 모르겠지만, 드로인이 제 상품을 돈 한 푼 받지 않고 선물하는 일은 전례 없는 경우였다.
귀한 선물을 내려다보며 정작 아사야는 심드렁했다.
“고마워요.”
그녀는 그가 저를 ‘공주’라 부른 것만을 신경 썼다. 왕성을 오가는 드로인이 그 호칭을 쓴다는 것은, 최소한 왕성 내부인들 모두가 둘째 왕자비를 공주라 부르라는 지침을 받았다는 의미였다.
‘소문이 정말 빠른 곳이네.’
지난날 용의 철문 앞에 선 이들 가운데 누구의 입이 그렇게 가벼웠을까, 생각하며 아사야는 거울 안을 바라보았다. 왕자비의 두 시녀, 사라와 유라가 각자 다른 귀걸이를 그녀의 귓가에 대고 있었다.
아사야는 눈을 가늘게 떴다.
“오른쪽…….”
사라의 주근깨가 설렘으로 붉어졌고,
“아니야, 왼쪽으로 부탁해.”
유라의 보조개가 화사하게 패었다.
시녀들의 희비가 교차하는 때, 날인받은 영수증을 꺼내 놓던 드로인의 낯이 어둑해졌다. 야베스 세일산이 들어선 것이었다.
훈훈하기 짝이 없던 침실의 공기가 삽시간에 묵직해졌다. 그는 거울 앞에 앉은 제 어린 신부를 바라본 뒤 갖가지 상품들을 내려다보았다. 퍼런 시선에 드로인은 다소 위축되었다. 혈통 고귀하신 분들이야 으레 돈 만지는 장사치를 추잡하다 여긴다지만 야베스 세일산은 그 정도가 과한 왕자님이셨다.
왕자의 발끝이 툭, 순백색 벽지가 든 바구니를 건드렸다.
“침실을 전부 뜯어고칠 생각이야?”
어린 아내를 향해 야베스가 물었다. 드로인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왕자의 입에서 당장에 반품 명령이 떨어질 것 같아서였다.
그러나 아사야는 침착했다. 드로인을 맞이하던 때처럼 온화한 얼굴로 그녀는 미소 지었다.
“오찬 모임은 어떠셨어요?”
조심스럽게, 유라가 왕자비의 귀에 귀걸이를 걸어 주었다. 불만스런 표정을 감추지 않는 야베스를, 아사야는 거울을 통해 살폈다. 그리고 말했다.
“우리 침실에 쓸 물건이 아니에요. 드래곤의 방을 꾸며 주려 해요.”
상품을 챙겨 온 드로인조차 몰랐던 사실이었다. 야베스가 무어라 지적하기 전에 아사야는 설명을 이어 나갔다.
“너무 텅 빈 공간이던걸요. 방으로 꾸며 주면 미관이 좋아질 거예요.”
“그 마물을 챙겨 주겠다고? 왕가의 돈을 들여서?”
“그럼 누구의 돈을 들이나요? 왕가의 드래곤인데요.”
금방이라도 부부싸움으로 번질 듯, 누구 하나 지질 않는 대화였다. 드로인은 물론이며 시녀들조차 초조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뭔가 착각하는 모양인데, 그놈은 주인에게 충성하는 개도 아니고 귀염성 있는 고양이도 아니야. 거대한 마물 덩어리지. 마물에게 방 따위는 필요치 않아.”
드로인의 낯이 삽시간에 우울해졌다.
“하여간 여자들은…… 쓸데없이 감정적이군.”
바구니에 실린 설탕절임 레몬을 깔아보며 야베스가 말했다. 아사야는 제 옷소매를 고쳐 주는 엠마오의 꿈틀거리는 손길을 느낄 수 있었다.
미소를 잃지 않으려 애쓰며, 아사야는 떨리는 입꼬리를 올렸다.
야베스 세일산을 다루는 방법을 익히기 위해 밤낮 가리지 않고 고민해 온 그녀였다. 첫째 왕자인 본도 세일산은 물론이며 사렙탄 세일산조차도 야베스를 꾸중으로 훈육한 경우가 없다 했다. 제 아버지로부터도 반박을 들어 본 적 없는 왕자가, 어린 아내의 말대꾸를 용인할 리 없었다.
그런 왕자에게는,
“맞아요. 여자라 그런가 봐요.”
반박이 아닌 회유가 어울렸다.
“숙녀들은 새를 키울 때에도 새장을 꾸며 주는 법이지요. 칼과 방패를 다루는 사내들은 이해하지 못할 거예요. 저는 뭔가를 돌보고 꾸며 주고 싶어요. 그런 일에 기쁨을 느낀답니다. 어쩌면 이런 게 모성애라는 걸까요?”
화자인 제가 듣기에도 말 같잖은 소리였다. 다른 누군가 그런 말을 했더라면 아사야는 배를 잡고 웃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남자들이란, 여자를 머나먼 오지의 유니콘처럼 생각하는 존재였다. 아내를 소유물이자 재산으로 취급하는 동시에, 어머니와 모성애란 속성은 올려치지 못해 안달이었다. 야베스 세일산 역시 다르지 않았다.
그의 표정이 누그러진 것을 확인하며 아사야는 어깨에 줬던 힘을 풀었다.
“……둘째 왕자비가 예물을 시커먼 굴 안에 넣어 두고 방치하더라 하면, 사람들은 왕자가 아내에게 존중받지 못한다 여길 거예요.”
당신 체면을 위한 것이라는 양 꾸며 말하자, 야베스의 탐탁잖은 표정이 가셨다.
어린 아내의 말을 되새기며 그는 상품들을 다시 한번 훑어보았다. 칠푼이가 보더라도 귀하고 비싼 물건임을 알아볼 것이었다. 제 체면을 위해서라면 그 정도 국고를 쓴다는 게 반가운 왕자였다.
“그래, 그렇게 해.”
마침내 허락이 떨어졌다. 아사야는 마음 깊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드로인은 날인을 마친 영수증을 내려놓고 급히 자리를 떴다.
치장을 마치고 일어서려는 아사야에게, 야베스는 넓은 걸음걸이로 다가왔다. 그가 허리를 숙이며 입을 맞추려 하자 아사야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버렸다.
삽시간에 속이 더워졌다. 목구멍에서,
‘싫어요…….’
한마디가 울렁거렸다.
그러나 야베스를 밀치는 대신에,
“벌써 입술을 발랐어요.”
아사야는 미소 지었다.
“그래서?”
“……종일 화장을 묻히고 다니시게요?”
그러자 야베스의 눈이 뚫어져라 제 아내를 내려다봤다.
그의 깔보는 눈길에 익숙해지기가 아사야에게는 죽도록 힘겨운 일이었다. 이십 년간 봐 온 가디엘의 눈동자도 그리 다정치는 않았지만, 아사야의 오빠로서 그에게는 최소한의 선이라는 게 있었다. 최소한 가디엘은 그녀를 아랫것으로 보거나 괄시하지 않았다. 벽 너머의 장식용 인형을 대하는 양 밀어내긴 하였지만 그뿐이었다.
그가 단 한 번도 그녀를 만지지 않는 식으로 고통을 안겨 주었더라면 야베스는 반대였다. 그는 잠깐의 틈도 참지 못하고 아사야의 육신이 제 것임을 확신받고 싶어 했다.
마른침을 넘기며, 아사야는 그를 향해 볼을 내밀었다.
“키스는 뺨에 받을게요.”
야베스가 당장 시녀들과 엠마오를 쫓아내고 저를 혼낼까 봐 아사야의 뺨은 상기됐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야베스는 사람의 표정을 제대로 읽어 내지 못했다. 그는 아사야의 붉어진 얼굴을 수치심이 아닌 수줍음으로 생각했다.
야베스의 입술이 아내의 볼에 닿았다. 도장을 찍는 양 꽉 뭉개는 입맞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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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초부터 그림자는 그의 힘이었다. 어둠을 품고 어둠과 공생하며 어둠으로서 힘을 기르던 존재, 블랙 드래곤이 바로 그였다.
그러나 가브리엘이라는 고상한 이름으로 불린 후부터 모든 것이 달라졌다. 그를 건재하게 하던 모든 마력을 상실함과 동시에, 어둠은 그의 친구가 아니게 됐다.
갑작스러운 무기력감과 끔찍한 고통에 몸부림치던 날, 그는 제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인지할 수 없었다. 기나긴 동면을 깨우는 알람은 증오스럽게도 무례했다.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깊게, 더 깊게, 광산을 파헤치고 들어오던 인간들의 발이 마침내 그의 터전에 닿았다.
‘멍청한 개미들이란.’
칼과 방패를 든 머저리 무리를 깔아보며 그는 거대한 몸을 일으켰다. 그는 어둠 숲의 주인이자 창조자였다. 광물이 넘쳐흐르는 검은 산을 만든 것이 그였다.
인간들은 늘 그런 식이었다. 드래곤이 꾸린 터전을 욕심내다 학살을 당하고도, 백 년도 지나지 않아 새로운 전쟁을 걸어오고는 했다.
겁도 없이 들이닥친 기사들은 한입 거리도 안 되어 보였다.
그래서 얕본 것이 잘못이었다. 용이 동면하는 사이 인간들은 끔찍한 도구를 창조해 냈다. 날카로운 창끝이 그의 등 껍데기를 파고들었고 대포가 그의 허리를 부쉈다. 온몸이 작살나는 순간에도 그는 자신이 패배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빌어먹을 마도구가 개방되기 전까지는 그랬다.
온몸의 마력이 피와 함께 빠져나감을 느끼자마자 그는 제 그림자를 도려냈다. 수천 년을 살며 기른 덩치도 힘도 한 올 고민 없이 즉시 내버렸다. 본능적인 움직임이었다.
기사단이 제 그림자를 향해 창을 던질 때, 그는 인간들이 파 놓은 땅굴을 타고 재빨리 빠져나갔다. 그게 블랙 드래곤이었다. 블랙 드래곤은 세상 그 어떤 존재보다도 생존을 우선시했다. 단 한 번도 신이라 불린 적 없는, 기껏해야 악마로 취급받아 온 존재로서 그에겐 미련을 품을 긍지가 없었다.
날아, 최대한 멀리 떠날 생각이었다. 터전은 다시 재건하면 그만이었고 힘은 다시 기르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상처 입은 날개는 퍼덕일 때마다 한 뼘씩 뜯겨 나갔고 시뻘건 피가 비처럼 쏟아졌다.
이내 그의 몸은 추락하기 시작했다.
결과는 처참했다. 구름에 닿지도 못하고 태양을 올려다보는 채 그의 몸은 빠르게 바닥을 향해 꺼졌다. 짧은 순간 그는 근방의 가장 온전한 숲을 향해 방향을 틀었다. 평생 뿌리를 박아 온 터전으로는 이제 돌아갈 수 없었다. 그는 인간들이 가장 마지막으로 수색할 구역, 영웅이라 칭송받는 개미의 사유지에 침입했다.
비늘 밖으로 뿜어져나가는 마력을 붙잡지 못하고 그는 바위산에 몸을 부딪쳤다. 그의 몸에서 빠져나간 뜨거운 어둠이 바위를 뚫고 땅덩어리를 시커멓게 녹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제 마력이 만들어낸 동굴 안에 처박혀 의식을 잃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는 죽어 가고 있었다. 제 발가락에 짓눌려 죽던 인간들이 그를 그렇게 상처 입혔다. 모든 힘을 잃은 몸은 무거운 짐짝처럼 느껴졌고 끊이지 않는 고통 탓에 눈도 제대로 뜰 수 없었다. 분노와 모멸감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멍멍아?”
그때, 어리숙한 목소리가 동굴 안을 찾아들었다.
시커먼 허공을 향해 손을 더듬거리며 걸어오는 이는 작은 인간 새끼였다. 유복해 보이는 옷차림에 뽀얀 뺨을 가진 어린 인간은 그가 보기에도 사랑스러웠다. 누군가의 애정과 주저 없는 보살핌을 받으며 행복하게 자란 게 틀림없었다.
그래서 그는 그것을, 죽여 버리고 싶었다. 짓밟아 뭉개고 가차 없이 부러뜨리고 싶었다.
그를 공격한 혐오스런 인간들이 제 시체를 발견할 적에, 그들이 사랑하는 아이가 용의 잇새에 씹힌 몰골을 보았으면 했다. 죽기 전에 어떠한 증오라도 표출해야만 시커멓게 그을린 속이 풀릴 듯했다.
그러나 그에겐 발톱 하나 움직일 힘도 없었다. 고작해야 다친 근육을 꿈틀거리며 돌바닥에 머리를 처박는 게 전부였다.
이내 어린 인간이 마물의 존재를 느낀 듯 작은 숨을 들이켰다. 제자리에서 혼자 넘어지는 모습은 아둔해 보이기까지 했다. 제멋대로 들어온 어린 인간은 제멋대로 달아나버렸다.
다시금 홀로 남았을 때, 거대한 절망의 먹구름이 그를 감쌌다. 이제 새끼는 제 부모를 불러올 것이었다. 제가 괄시하며 개미라 부르던 버러지들에 의해 죽임을 당할 적에는, 제 머리를 짓밟고 오른 기사들이 횃불을 들고 낄낄거리리라.
제 말로를 받아들이며 그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러나,
“야……, 약…….”
어린 인간은 부모 없이 홀로였다.
“약을…… 가져왔어…….”
두 팔 가득 상자와 의약품을 끌어안은 채였다.
겁에 질린 아이의 뺨은 이미 눈물로 축축했다. 금방이라도 오줌을 싸며 달아날 표정을 한 채 그 아이는 용의 날개를 오르기 시작했다. 그 무게가 깃털처럼 가볍게만 느껴졌다. 조그만 인간 새끼가 대체 무슨 용기로 제 등을 오르는 것인지 드래곤은 이해할 수 없었다.
힘겨운 등반 끝에 조그만 인간이 용의 상처를 들여다보았다. 그러고는 악마라 불린 마물, 머리를 꺾어 횃대에 내걸고 성수로 정화하는 벽화로나마 신화에 남겨진 존재를 치료하기 시작했다.
‘가브리엘.’
그 어리고 나약한 인간은 수천 년을 이름 없이 살아온 악마에게 이름을 붙여 주었다. 놀랍도록 고귀하며 부드러운 이름이었다. 그리고 매일 밤마다 그 이름을 부름으로써 이전에 그가 어떤 악마였는가를 잊어버리게 만들었다.
‘내가 태양을 바라보며 어떻게 추락했는지, 네가 알았더라면 웃었을 거야.’
제 머리맡에 앉아 홀로 수다 떠는 인간을 바라보며, 그는 자조했다.
‘내가 널 죽이려 했다는 걸 안다면, 넌 나를 친구라 부르지 않겠지.’
소녀는 그에게 화관을 씌워 주었고 그의 붕대를 갈아 주었다. 그의 상처가 완전히 아문 뒤에도 발걸음을 멈추지 않고 그의 새벽을 채워 주었다.
‘내가 널 얼마나 기다리는지 안다면, 너는 웃어 줄까 아니면 눈물을 흘릴까…….’
물끄러미, 소녀의 태양처럼 환한 눈동자가 그를 비췄다.
“가브리엘, 무슨 생각해?”
그녀가 꾸며 놓은 방 안에 앉아 그는 작은 인간을 내려다봤다. 열 살이던 소녀가 스무 살이 되었고, 어린 아가씨는 왕자비가 되었다.
“밤중에 비가 왔었는데 시끄럽지는 않았어?”
그리고 또다시 혼잣말을 시작했다. 어린 인간을 바라보며 가브리엘은 웃음 지었다.
“또 한숨 쉰다.”
그의 웃음소리를 한숨이라 착각하며, 아사야 세일산이 고개를 뻗었다. 보라색 눈을 내리감으며 드래곤은 더운 숨을 삼켰다. 어린 인간과 함께할 때만큼 그에게 기쁘고 절망적인 때가 없었다. 보여 주고 싶었다, 그녀가 부르는 것처럼, 가브리엘이라는 이름이 어울리는 제 모습을.
아사야의 보드라운 입술이 드래곤의 단단한 주둥이에 키스를 남겼다. 달콤한 만큼 야속한 입맞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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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엔 조찬 모임이 있었다. 사렙탄이 사냥을 떠나 자리를 비운 대신에, 두 왕자를 비롯하여 왕가의 인척들이 함께하는 자리였다.
“누구보다 아름다워 보여야 해.”
야베스가 충고했다.
왕자의 입맛을 맞추기 위해 사라와 유라는 오전부터 무겁고 화려한 드레스 세 벌을 옮겨 놓았다. 엠마오의 조언에 따라 아사야는 순백색의 드레스 위에 연홍색 로브를 걸쳤다.
엠마오의 앞에서 아사야는 제자리에서 한 바퀴 돌아 보였다.
“너무 유치하진 않아?”
“너무 어여뻐서 탈이지요. 누가 우리 아가씨 아니랄까 봐.”
새하얀 백합 무늬 수가 놓인 드레스는 새 신부 이미지에 걸맞았다. 연홍색 로브는 허리 기장이 짧았는데, 매사 차분하고 조금은 우울한 듯한 왕자비에게 발랄함을 더해 주었다.
알이 큰 진주 귀걸이까지 착용하자 아사야도 마음이 편안해졌다.
“이 정도면 됐어.”
젊고 활동적인 아가씨에게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왕자비를 모시는 시녀들이야, 잠옷 바람으로 누워만 계셔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우시다며 찬양하기 바빴지만 아사야의 생각은 달랐다. 그저 예쁘기만 한 존재여서는 장식장의 인형과도 다름이 없었다. 새로이 만나는 인척들에게 그녀는, 제가 어떠한 성격의 사람인지 보여 주고 싶었다.
그러나 신경 써 차려입고 나간 조찬 자리에서 아사야는 말 한마디 제대로 벙긋할 수 없었다. 그녀에게 사람들이 무어라 질문을 걸어올 때마다, 야베스가 대변인이라도 되는 양 답을 꾸리기 때문이었다.
“공주님, 왕성에서 살아 보니 어때요?”
“아주 즐거이 잘 지냅니다. 드로인도 벌써 세 번이나 오갔죠.”
왕의 인척들은 둘째 왕자가 아내를 대신하여 답하는 일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심지어는,
“야베스 왕자님께서 공주님을 참 예뻐하시네요.”
그것을 애정이라 여기며 칭찬하기까지 했다.
덕분에 아사야의 시선은 천천히, 이런저런 말을 늘어놓는 왕족들에게서 멀어졌다. 테이블에 놓인 잘 구워 낸 빵과 이쁘장한 그릇들, 꽃잎을 띄운 찻잔을 내려다볼 뿐이었다.
제가 참여하지 않아도 대화는 술술 풀렸고 분위기는 몹시 화기애애했다.
‘차라리 가브리엘에게 혼잣말이라도 하고 싶어.’
저 없이 즐거운 이들에게 둘러싸이자 외로움을 넘어서 불쾌해졌다. 아사야는 조찬 모임에 따라온 것 자체를 후회했다.
야베스가 아름답게 꾸미라는 명령만을 하고, 인척들의 이름이며 성향을 소개하지 않은 이유도 알 것 같았다. 어차피 그들은, 야베스 세일산을 통하지 않고는 개별적으로 아사야에게 연락할 사람들이 아니었다.
오늘 모임도 애초에 제가 낄 자리는 아니었을 것이었다. 국왕이 어린 며느리를 공주라고 부른다니, 명목상 ‘둘째 왕자 내외’로 묶어 초대한 게 분명했다.
그러다 문득 아사야는 남색 눈동자와 시선을 마주쳤다. 누구도 저를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는 와중에 본도 세일산만이 달랐다. 그는 시무룩한 아사야의 모습을 걱정스러운 양 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부드러운 눈썹은 끌어 내린 채였고 두 손은 테이블 위 디저트 접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입맛에 맞지 않아요?”
본도 세일산이 물었다. 그러자 수다를 떨던 인척들이 말을 멈추고 그에게, 그리고 그의 맞은편에 앉은 아사야에게 집중했다.
“아…….”
아사야는 습관적으로 미소 지었다.
“복숭아를 먹으면 두드러기가 나서요. 신관들 말로는 선천적인 알레르기래요.”
둘째 왕자비의 대답에 왕자들의 사촌 형제가 종을 흔들어 댔다. 공주에게 알레르기가 있는 줄도 모르고 디저트를 준비한 주방장이 누구냐는 꾸지람과 함께였다.
하인들이 허둥지둥, 아사야의 앞에 놓인 접시를 가져갔다.
제 아내를 위하는 양, 야베스 세일산이 직접 담아 준 복숭아 타르트가 올라간 접시였다.
“……당신도 참.”
야베스가 말했다.
“그런 중요한 걸 내게 말 안 하면 어떡해?”
그의 손이 아사야의 어깨에 닿았다.
“앞으론 그러지 마.”
아사야는 제 얼굴 가까이 다가오는 그의 시퍼런 눈동자를 피할 수 없었다. 놀란 눈으로 마주 볼 뿐이었다. 코가 닿도록 가까워진 뒤에야, 야베스가 속삭였다.
“그러다 심하게 아프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
아사야는 단숨에 얼어붙었다. 그리고 겁을 먹었다. 자존심이 상할 정도로 빠른 굴복이었다. 입을 열어 아사야는 무어라, 남들이 듣기에 좋고 야베스가 더는 화내지 않을 말들을 늘어놓았다. 당신께서 걱정하실까 봐 그랬다, 별로 배가 고프지 않아서 괜찮았다, 그러니까…….
‘나 좀 놔주세요.’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최악의 조찬이었다.
.*. *. *. *. *. *.
모임이 끝나고 인사를 주거니 받거니 하는 시간조차 고문처럼 느껴졌다. 구경꾼이 사라진 후에 돌변할 남편을 생각하느라 아사야는 오가는 안부에 집중할 수 없었다. 그나마 본도 세일산의 인사가 기억에 남았다.
“다음 모임은 다를 거예요. 부디 치즈에는 알레르기가 없었으면 좋겠네요.”
그의 말에 아사야는 부드럽게 고개를 저었다.
싫은 순간은 필연적으로 오는 법이었다. 본도마저 자리를 떠나자, 야베스는 제 아내를 복도 벽면에 밀어붙였다.
“인척들 앞에서 이따위 실수를 해?”
그리고 읊조렸다. 저를 향해 으르렁대는 야베스를, 아사야는 넋 나간 사람처럼 올려다보았다. 누군가에 의해 폭력적으로 다뤄지고, 면박을 받고, 무능력자로 다뤄지는 일이 그녀의 정신을 쏙 빼놓았다.
꽉 잡혔던 어깨가 아직도 저렸고 새벽부터 굶은 배는 주렸다. 로브에 어울리는 것으로 골라 신은 구두는 새끼발가락이 없는 사람이 신어야만 편할 성싶었다.
“형님과 낄낄대는 모습도 두 번 다신 보이지 마.”
“그런 게 아니라…….”
“‘그런 게 아니라’. 뭐?”
이내 아사야는 당황했다. 야베스의 얼굴은 붉었고 두 손은 영원히 놓지 않을 것처럼 아사야의 팔뚝을 쥐고 있었다. 그는 질투하고 있었고 제 감정을 감추지를 못했다.
저와 같은 상상을 해 본 게 분명했다, 아사야 세일산이 오늘, 그가 아닌 본도의 옆자리에 앉은 모습을.
“……그런 게 아니에요.”
적어도 아사야는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 그녀에게 필요한 건 남편이 아니었다. 본도 세일산의 옆자리에 앉는 상상을 하긴 했지만, 야베스와는 다른 방식이었다. 아사야는 본도가 제 오빠였으면 하고 바랐다. 저에게 관심 많고 다정한, 늘 원해 왔던 그런 형제였으면 했다.
한참 눈싸움을 하던 끝에, 야베스가 잡은 손을 놓았다. 아사야는 그의 손아귀에 조였던 팔뚝부터 손가락 끝까지 저릿저릿 피가 통하는 것을 느꼈다.
“그럼, 저는…….”
아사야가 입을 열었다.
“저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데요? 그냥 조용히, 아무 말도 않고, 웃고만 있어야 하나요?”
상한 감정을 추스르며 겨우 뱉은 질문이었다. 뜻밖에 야베스는 두 눈을 크게 뜨고는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그래, 그래야지.”
속 편한 대꾸가 불쑥 튀어나왔다.
“그게 당신 잘하는 거잖아. 당신 잘하는 거, 하면 되는 거야.”
저를 벽으로 밀착시키며 달라붙는 야베스는 아사야에겐 큰 위협이었다. 그는 체구 작고 마른 여자에게 장정의 남성이 재앙처럼 닥쳐올 수 있음을 전혀 모르는 듯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린 아내를 밀쳐놓고도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웃을 순 없었다.
“아버지에게 예쁨받으며 얌전히 지내. 그거면 돼.”
야베스의 그림자가 아사야의 하얀 드레스는 물론이며 정수리까지 뒤덮었다.
“형님께서도 올해가 가기 전에 결혼식을 올릴 거야. 나젤탄의 왕녀와 혼담이 오가고 있어.”
몰랐던 소식이었다. 그 소식을 알려 주는 이가 야베스 세일산이란 것만으로도 아사야는 불안했다. 그 일에 대비하여 남편이 제게 기대하는 바가 있는 듯했다.
나젤탄은 바위로 뒤덮인 자연 성벽을 가졌기로 유명한 섬나라였다. 겉으로 보면 차갑고 서늘하게만 보이지만, 내부로 진입하면 사계절이 봄이었다. 겨울이 없는 땅, 일 년 내내 꽃이 피는 초원, 끝없는 자유와 종전의 나라.
그토록 평화롭고 부유한 국가에는 왕위 세습 교육을 마친 왕녀가 있었다. 최초의 여왕이 될 여자다…… 그 소문이 오래전에 바다를 건넜다.
왕비가 느지막한 나이에 아들을 낳기 전까지는 말이었다.
왕위계승자의 자리에서 단박에 밀려난 왕녀에게 남은 운명의 갈랫길은 한정적이었다. 여왕이 될 기회는 눈 녹듯 사라졌지만 그녀는 여전히 유능한 인재였으며 이름 날린 왕녀였다. 왕비 후보로 그녀보다 적절한 여자는 없었다.
그녀와 결혼하는 남자가 왕이 될 남자라는 암시는 아사야 역시 아는 사실이었다. 그런 왕녀를 본도 세일산에게 연결해 줄 적에는, 국왕으로서 사렙탄 세일산이 품은 뜻이 분명했다.
“당신 할머니 오시는군.”
아사야에게서 한 발 멀어지며 야베스가 중얼거렸다.
그의 멸칭이 향하는 복도 끝에 엠마오가 있었다. 얼굴이 붉어진 채 종종걸음으로 다가올 적에 사라와 유라도 함께였다. 허둥지둥 왕자비를 모시러 온 유모와 시녀들을 버려둔 채 야베스는 먼저 자리를 떠 버렸다.
‘떠나고 싶어.’
약한 생각이 불쑥 고개를 들었다.
‘첫째 왕자님이 왕관을 쓰기 전에 입지를 다져 놓지 않으면, 어찌 될지 모르는 거잖아.’
왕이 된 뒤에도 제 남자 형제를 성안에 남겨 두는 사례는 몇 없었다. 본도 세일산이 왕좌에 오른다면 아사야는 야베스 세일산과 함께 망명길에 오를 수도 있었다. 쫓겨나듯 나라를 떠야 할 때에 패배자의 아내가 제 것이라며 드래곤을 챙겨 갈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최악의 상황을 상상하면서도, 아사야의 머릿속에는 가브리엘뿐이었다.
‘아니야.’
아사야는 고개를 내저었다. 본도 세일산은 친절했고 다정한 사람이었다. 오늘도 제 상태를 바라보며 염려 섞인 질문부터 하지 않았던가. 제 친동생과 아내를 해외로 떠나보낼 남자처럼은 생각되지 않았다.
그러나 한편으로 아사야는 불안했다.
‘야베스도 처음엔 좋은 사람이었으니까.’
왕성에 온 뒤로 매일매일이 다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하루가 1년 같았고 한 시간은 한 달 같았다. 매일 아침이 달랐고 저녁이면 또 달랐다. 서로 다른 사건들이 아사야 앞에 피할 수 없는 빗물처럼 떨어지고 있었다.
“아가씨. 괜찮으세요?”
엠마오가 조심스레 물었다. 저를 부축해 주려는 유모의 손을, 아사야는 부드럽게 맞잡아 쥐었다.
“괜찮아.”
아사야 세일산도, 언제까지고 손을 놓고 사는 어린 아가씨일 수는 없었다. 성밖의 소식을 궁금해 하며 죽은 아버지의 품을 파고드는 일은 그만둬야 했다. 가브리엘을 만나는 것에만 만족하며 눈도 귀도 덮은 채 지내서는 안 됐다. 그래서는 어떤 방식으로건 곯게 될 것이었다.
그녀는 가브리엘을 만날 시간만을 생각하며 끔찍한 나날을 견딜 것이었고, 가브리엘은 그녀가 찾아오기만을 기다리며 어둠 안을 헤맬 것이었다.
가브리엘은 기색하지 않았지만, 아사야는 그의 온몸이 제 기억에 비해 단단하고 거칠어진 것을 알았다. 경비대원에게 물었을 때 돌아온 답은 뜻밖이었다.
“벽에 몸을 찧고 다녔다는데 그래서가 아닐까요?”
왜 그런 것을 물으시냐는 듯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그가 설명했다.
“감옥 안에서 쿵쿵거리면서 돌아다닌 게…… 좀 됐다죠, 아마. 처음 데려오고 몇 년간은 그랬을 겁니다.”
그 이야기를 들을 당시에는 아사야도 영문을 몰랐었다. 용의 철문을 열고 들어가, 벽지를 바를 준비를 마친 거친 돌벽을 제대로 훑어보기 전까지는 그랬다.
그리고 아사야는 깨달았다. 어둠이 가브리엘을 질식하게 만들었음을.
벽의 사면, 가브리엘의 넓은 보폭이 닿는 군데군데에 벽돌이 헤지고 곁이 벗겨진 자국이 깊게 남아 있었다. 누구도 찾지 않고 누구도 불을 밝히지 않는 거대한 감옥 안에서 가브리엘은 빛 한 줄기도, 공기의 흐름도, 심지어는 시간도 느끼지 못하고 갇혀 살았다. 그 기간이 자그마치 6년이었다.
그 시간을, 아사야가 사랑하는 드래곤은 어둠의 끝을 찾아 돌아다니며 거친 벽돌에 제 이마와 등, 날개를 부딪치며 견뎠다.
지금이라고 아주 달라졌을까? 컴컴한 방을 꾸며 주고, 매일같이 방문하여 나란히 앉아 소식을 나누니까, 그것으로 가브리엘이 행복할까? 그것으로 저도 행복할 수 있는 걸까? 질문에 아사야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건 행복이 아니었고, 사랑도 아니었으며, 사랑하는 존재를 지켜 주는 것 역시 아니었다. 무언가를 가졌으면 그것을 지킬 힘도 있어야 하는 법이었다.
언제고 저를 지켜 줄 것이라던 아버지도 이젠 없었고, 그의 빈자리를 채워 주리라 맹세하던 가디엘은 이젠 저와 성씨부터 달랐다.
아사야는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엠마오의 손은 풍파를 겪어 거친 데에 반해, 그녀의 손은 여리기 짝이 없었다. 목검 한번 잡아 보지 않은 하얀 손은 칼을 휘두르기는커녕 태양 볕에 쬐기는 했나 싶을 정도로 하얗고 곱기만 했다.
“넌 안 돼.”
언젠가 가디엘에게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넌 여자잖아. 그리고 아주 약하잖아.”
작은 손을 주먹으로 말아 쥐고서 아사야는 환한 복도를 가로질렀다.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움직여야 할 때였다. 야베스 세일산을 위해서는 결단코 아니었다. 가브리엘을 위해서였으며, 아사야 세일산, 그녀 자신을 위해서였다.
제 손으로 지켜본 것도 제 힘으로 이룬 일도 없이, 어느 왕자의 트로피로 기록되는 삶은 살지 않을 것이었다.
‘가브리엘.’
아사야는 다짐했다.
‘너에게 자유를 주겠어.’
창문을 타고 떨어진 햇빛이 그녀의 치맛자락에 떨어졌다.
‘널 날게 하겠어.’
그날 밤 아사야 세일산은 편지를 적었다. 발신인은 답장을 주는 일이 없는 가디엘 아졸이 아니었다. 같은 왕성 아래에 가장 높은 이, 사렙탄 세일산이었다.
.*. *. *. *. *. *.
힐끔, 비아탄 아멕은 제 군주의 옆얼굴을 훔쳐보았다. 활을 차고 말을 몰며 사렙탄 세일산은 늘 그렇듯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날씨가 참 좋군.”
그와 단둘이 떠나는 사냥은 언제고 사냥인지 산책인지 헷갈릴 때가 많았다. 떠나는 새를 보면서도 그는 화살을 꺼내지 않았다. 비아탄도 가까스로 이길 수준의 명사수임에도, 왕은 짐승을 쏘는 데엔 흥미가 없었다. 이따금 입가에 피를 묻힌 늑대를 잡는 게 전부였다.
덕분에 두 남자의 사냥은 심심하기 짝이 없었다. 왕성에서 멀리 떨어진 곳까지 말을 데리고 나가 깨끗한 개울물에 목을 축이게 하고, 멋없이 시간을 보내다 돌아오는 식이었다.
평소 같았더라면 비아탄 역시 일상의 피로를 내려놓는 시간에 동참했을 것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달랐다. 왕자비가 드래곤을 길들였다는 소문이 이미 성내에 파다했다.
소문이 사렙탄의 귀에 와전되어 흘러 들어가기 전에 비아탄은 제가 직접 말하기를 선택했다.
“……본 중에 신기한 광경이더군요.”
아사야 세일산과 드래곤의 이야기를 들려주자, 사렙탄은 말의 고삐를 느슨하게 잡았다.
“그사이 자네만 몰래 보고 왔구먼. 흠…….”
사렙탄의 표정은 심드렁했다. 그는 며느리가 드래곤을 길들이더란 소식에는 놀라질 않고, 비아탄이 저 몰래 아사야를 만났다는 사실에만 집중했다.
비아탄은 그의 못마땅한 눈총을 감내하기로 했다. 그녀가 용의 철문을 열기 위해 저를 호출한 일은 말하지 않기로 했다. 그런 소란한 문제까지 신경 쓸 정도로 여유로운 왕이 아니었다.
“……공주님께선 여전하셨습니다. 외모는 돌아가신 공작부인을 빼닮았는데…… 표정은 그게 아닙니다.”
“그게 아니면?”
왕의 오른팔이자 왕성의 검으로서, 비아탄은 누구보다도 사렙탄 세일산을 잘 알았다. 그가 무어에 미련을 품고 무어에 마음이 흔들리며 무어에 정을 붙이는지, 비아탄은 전부 알았다.
“베데르 경을 다시 보는 것 같습니다. 드래곤을 두려워하지도 피하지도 않는 모습을 보면.”
오전마다 그는 경비대원의 보고를 받고 있었다. 이름은 톰이며 검은 머리칼 군데군데에 흰 털이 뻗은 남자로, 드래곤과 왕자비의 만남, 그리고 공주라는 호칭에 대해 소문을 퍼뜨린 주범이었다.
왕가의 이야기를 나불거린 죄를 물어 그의 혀를 자르는 대신 비아탄은 그를 제 끄나풀로 붙여 놓았다. 덕분에 받는 소식이 제법 많았다.
톰에 의하면 왕자비는 매일 아침, 그리고 오후마다 드래곤을 찾는다고 했다. 둘째 왕자와 같이 오는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다. 나이 든 유모와 시녀들이나 함께한다 했다.
“저희는 겁이 나 죽겠는데, 공주님께선 불도 밝히지 않은 방에 서슴없이 드나드십니다.”
톰이 혀를 내둘렀었다.
심지어는 드래곤의 품에 안기기도 하며, 거대한 머리통을 쓰다듬고 귓가에 무어라 속삭이기까지 한다고 했다.
얼마 전에는 왕자비의 명령에 따라 부드러운 카펫과 밝은 조명까지 들여놓은 채였다. 태양빛을 뿜는 도구는 고위 신관의 마법이 걸린 아주 귀한 조명이었다.
‘태양빛을 뿜는 도구?’
비아탄은 허탈한 한숨을 터뜨렸었다. 그 도구가 무언지 톰에게 설명을 들을 필요도 없었다. 왕께서 작은며느리가 정원을 가꾸길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겨울에도 실내 정원을 꾸밀 수 있게 선물한 예물이었다. 그 비싼 조명이 드래곤을 위해 놓였다.
“그 드래곤 말이야.”
사렙탄의 음성에, 비아탄은 고개를 바짝 들었다.
“내 듣기로는, 공주가 먼저 제게 달라 그랬다지?”
“아닙니다.”
질문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비아탄이 대답했다.
“야베스 왕자님께서 먼저 제의하신 일로 압니다. 공주님께서 본래 드래곤에 관심이 많으시단 걸 아셨던 거지요.”
“야베스 그 녀석이, 그런 일을 어떻게 알고?”
“오래전부터 유명한 이야깁니다. 기사단 말단조차 알 겁니다. 베데르 경께서 전장을 누비시는 내내 그 이야기만 수십 번은 하셨으니까요.”
‘베데르 아졸’, 그 이름 하나면 모든 문제가 순탄히 풀렸다. 살아서도 죽어서도 매한가지였다.
사렙탄은 더는 질문을 않았고 그의 말도 푸르르 떨던 호흡을 멈췄다. 전진하던 말을 멈춰 세운 채 사렙탄 세일산은 쓸쓸한 사람처럼 고개를 치켜들었다. 굵은 턱선을 따라 깔끔히 정리한 수염이 희끗희끗했다.
“베데르가 오늘 여기에 있었어야 하는 건데.”
이내 그는 혀를 찼다.
“아니다! 베데르 그 자식이 여기 있건 없건 내 알 바가 아니야.”
“폐하.”
“왜 본도도 아니고 야베스냐고 칼을 차고 뛰어 들어왔을 것을.”
그에, 비아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렇지 않다고, 둘째 왕자님께서도 훌륭하시다 말해야 좋을 타이밍이었지만, 어째서인지 그런 거짓말은 하기가 어려웠다. 솔직히 저도 그런 모습밖엔 상상되지 않아서였다.
문득 오래전 생일연의 밤이 떠올랐다. 평생 연회라고는 승전을 알리는 축제밖에 모르던, 그마저도 맥주 두어 잔이면 흥이 꺼지던 베데르 아졸이, 딸 바보가 되어서는 열었던 그 연회의 밤.
사렙탄은 그를 두고 ‘미친 자식’이라 했다. 이쁜 딸을 낳더니 멀쩡하던 놈이 돌아 버린 게 아니냐며, 내 생일연도 안 오던 매정한 자식이 제 딸 생일연에 왕을 오라 가라 한다며 욕을 했다. 그러면서도 막상 친우의 어린 딸을 만나니 흐뭇해 웃기 바쁜 왕이었다.
당시 아사야 아졸의 나이가 열 살이었다.
“우리 왕자와 자네 딸이 참 잘 어울리지 않나.”
대외적인 인사를 마친 뒤에 테라스 커튼에 숨듯이 기대어 사렙탄이 물었다. 그에 베데르는 싫은 기색을 놀라울 정도로 크게 냈다.
“아사야는 아직 열 살입니다, 폐하!”
그의 펄쩍 뛰는 모습에 사렙탄은 몹시 즐거워했다. 오랜 세월을 함께했음에도 그들은 친구이기 이전에 왕과 신하였다. 베데르의 감정적인 모습일랑 본 기억이 적은 사렙탄이었다. 차가운 목검 같던 남자가, 제 딸아이에 관해서만 유별나게 도드라지니 그 모습이 우습고 재밌었다.
“세월이 얼마나 빠른데 편한 소리를 하나. 저 아이가 열여섯이 되고 스물이 되는 게 금방일 걸세.”
“그렇다 해도 벌써부터 혼사를 논하고 싶진 않습니다.”
사렙탄은 콧방귀를 뀌었다.
“왜. 자네 보기엔 본도 왕자가 못 미더운가?”
질문에, 베데르는 두 어깨에 주었던 힘을 풀었다.
“폐하가 아니시라면 제가 누구와 사돈지간을 맺겠습니까?”
“그래서, 날 봐서 못난 아들과 결혼 정도는 시켜 주시겠다?”
그러자,
“봐서 결혼시킬 정도의 인물이나 되십니까?”
대륙의 지배자에게 그 누구도 하지 못할 농담이 베데르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당황한 비아탄은 망을 보며 선 자세 그대로 얼어붙었다. 사렙탄도 눈을 둥그렇게 떴다. 그러나 이내, 그는 킬킬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이마가 벌게지고 침이 튈 정도로 큰 폭소였다. 베데르 역시 제 말에 제가 웃긴지 웃어 대기 시작했다.
국왕과 영웅은 서로의 잔에 잔을 부딪쳤다.
국왕에게 인사하고, 영웅 베데르에겐 인지도를 쌓아 보려고 혈안이 된 귀족들도 그들을 못 찾았다. 그러나 어린 아사야는 달랐다. 그녀는 졸린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풀린 눈으로 비틀비틀 아버지를 찾아왔다.
아사야가 손을 뻗기도 전에, 베데르는 넓은 품에 자그맣고 날씬한 아이를 끌어안았다.
“왔니, 내 보물.”
조는 딸아이를 껴안고 좌우로 느릿느릿 흔들 적에 그는 몹시 행복해 보였다.
그런 베데르가 살아 있었더라면, 둘째 왕자는 아사야 아졸에게 어떤 수작도 부리지 못했으리라.
“그놈을 내가 너무 제멋대로 키웠어.”
사렙탄이 중얼거렸다. 그제야 비아탄은 고개를 작게 내저었다.
“아닙니다.”
기사가 부정하자,
“아니기는!”
사렙탄이 앓는 소리를 냈다.
말은 괘씸하다는 둥 욕을 하면서도 둘째 왕자를 사랑하는 왕이었다. 첫째냐 둘째냐에 관계없는 내리사랑은 좋게 볼 일이었지만, 왕가에선 그 사정이 달랐다. 아들이냐 딸이냐, 첫째냐 막내냐 하는 문제는 왕의 자식들에겐 생득적인 순위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왕께서 큰며느리로 점찍은 여자에게 둘째 왕자가 프러포즈를 하는 것은 그 자체로 반역죄를 물을 일이었다.
그러나 야베스 세일산에게는 어떠한 실질적인 처벌도 내려지지 않았다. 비아탄의 눈에 그런 주군의 관대함은, 제가 갖지 못한 부모 노릇을 해 보려는 잘못된 욕심으로밖엔 보이지 않았다.
첫째 왕자로 태어난 사렙탄 세일산에겐 배다른 동생이 넷 있었다. 사렙탄의 경우 선왕이 사랑한 첫 번째 왕비가 낳은 자식이었고, 나머지 형제는 정치적 목적으로 볼모 삼아 데려온 두 번째 왕비가 낳은 자식들이었다. 그러니 그 차별이 몹시도 대단하여, 그들 중 여자 형제는 일찍이 시집을 갔고 남자 형제는 열 살이 되던 해에 망명을 떠났다.
그러나 막내 왕자의 경우 왕비의 고집으로 열두 살이 될 때까지 성안에서 버텼다. 당시 열여섯 살이던 사렙탄이 다른 형제들은 얼굴도 기억 못 하면서도, 막내만큼은 자주 마주치며 가까이 지낸 것도 그 덕이었다. 그를 볼 때면 형님, 형님 하며 졸래졸래 뒤를 따르던 막내는 추운 겨울날 새벽, 취미에도 없던 사냥을 나섰다가 실족사 했다.
사렙탄 세일산은 선왕처럼 매몰차지 못했다. 아내를 잃은 뒤 첩 하나 들이지 않는 것이며, 계절마다 막냇동생을 기억하며 사냥터를 찾는 것만 봐도 그랬다. 그런 왕의 인품을 비아탄은 존경했다. 동시에 그런 왕에게 바람을 잡아 줄 깃대가 반드시 필요함을 알았다.
“공주님께서 많이 외로우신 모양입니다.”
날짐승을 찾는 척, 주위를 살피며 비아탄이 말했다.
“그런 마물이라도 찾아다 아버지의 흔적을 느끼시는 걸 보면 말입니다.”
그러자 사렙탄이 제 턱의 짧은 흰 수염을 쓰다듬었다. 고민에 잠겼다는 증거였다. 그는 말의 안장 위에서 허리를 몇 번 들썩거렸다. 그리고 말했다.
“공주가 나를 용서하겠나?”
예상했던 질문임에도, 비아탄은 놀란 척 눈을 크게 떴다.
“……폐하.”
“제 아비를 전쟁터에 보내 주검으로 만들어 놓고, 아버지 자리를 채우려 들면 나를 원망하지 않겠나? 주제넘는 인간이라고 속으로 비웃을 게야.”
왕의 근심 어린 눈동자는 십 년은 더 나이 들어 보였고 바싹 마른 입술은 초조하기 짝이 없었다. 제 오른팔에게만, 그리고 베데르에게만 보이던 약한 면모였다.
비아탄은 고개를 내저었다.
“공주님은 베데르 경의 따님이십니다. 바다 건너에서 등을 돌리고서라도 폐하를 비웃을 집안이 아닙니다.”
그래도 사렙탄의 근심은 끝나지를 않았다. 아사야 세일산이 저를 원망치 않을 거란 소식에 그는 오히려 더욱 초조한 듯 보였다. 끄응 앓는 신음까지 흘렸다.
“그 애를…… 어떻게 대해야 좋을지 전혀 모르겠군.”
영웅 베데르를 팔불출로 만든 것으로도 모자라 사렙탄 세일산을 초조함에 떨게 하다니, 아사야는 과연 무엇이건 해낼 여자가 분명했다.
그 명랑한 왕자비는, 사냥을 마치고 돌아온 왕에게 초대장을 보냈다.
화요일 오찬에 함께해 주실 멋진 신사를 찾습니다.
입장 조건: 초대장 지참
반듯한 글씨로 또박또박 적은 초대장은 순백색으로 염색한 빳빳한 종이였고 반으로 접혀 있었다. 초대장 겉면에는 압화한 패랭이꽃이 붙어 있었다.
그 편지를 받아 들고서 사렙탄은 기쁘고 들뜬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베데르의 농담을 들은 날처럼 킬킬대며 웃었다.
“이것 좀 보게, 비아탄. 이 깜찍한 꽃 좀 봐.”
왕자들에게선 눈 씻고도 찾아볼 수 없던 애교심이었다.
비아탄조차 몹시 놀라 적절한 호응을 할 기회를 놓쳤다. 아사야 세일산의 어디에서 그런 새침한 계획이 떠오른 건지 의문이었다.
.*. *. *. *. *. *.
“그래. 짐에게 원하는 건 없고?”
사렙탄이 말했다. 왕자비의 오찬 자리에 앉자마자 하는 소리였다. 비아탄은 제 이마를 짚고 싶은 것을 억지로 참았다.
응접실 한편에 선 채로 지켜볼 적에, 아사야의 준비는 대단했다. 테이블 위에 차려진 음식들은 모조리 왕께서 즐겨 드시는 것들이었고, 응접실 역시 가구와 카펫을 교체하여 봄날처럼 꾸민 모습이었다.
특이점이 하나 있다면 아사야의 연두색 드레스였다. 보라색 안료가 시장에 풀린 뒤로 녹색은 유행의 축에도 끼지 못하는 실정이었다. 그런데도 철 지난 드레스를 선택한 데엔 이유가 있었다. 십 년 전 왕께서 생일연에서 마주했던, 열 살 소녀 아사야 아졸을 되새기는 것.
사렙탄은 뻔한 속셈을 못 읽도록 둔한 왕이 아니었다. 아사야의 얕은수를 알기에 그는 어린 며느리를 귀엽게 생각했다.
덕분에,
“무어든 말만 하거라.”
기분 좋은 제안을 내놓는 것이었다.
왕께서 대뜸 선물을 주겠노라 하실 줄은 몰랐는지, 아사야는 놀란 얼굴이었다. 아주 잠시간, 그녀는 사렙탄의 뒤에 선 비아탄을 바라봤다. 두 눈이 마주친 순간 비아탄은 움찔했다.
과연 연두색 드레스는 효과가 좋았다. 아사야 세일산이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해야 할 성인임을 알면서도 비아탄은 그녀를 도와주고 싶어졌다. 왕께서 베풀기를 원하실 적엔 그 기회를 잡으라고 알려 주고 싶었다. 작게라도 고개를 끄덕여 신호를 주고픈 것을 억지로 참아야 했다.
잠시간 아사야는 우물쭈물했다. 비아탄은 물론이며 그녀의 뒤에 선 시녀들조차 왕자비의 답을 기대하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제 드레스 치마 주름을 손으로 만져 펼치길 몇 초, 아사야는 고개를 내저었다.
“어쩌면 좋을까요, 폐하……. 저는 지금으로도 충분한걸요.”
미소를 띠우며 하는 말이었다. 사렙탄의 눈이 가늘어졌다.
“충분하긴 무어가!”
탐탁잖은 기색을 여과 없이 드러내는 왕이었다.
그 순간만큼은 며느리가 아들놈의 반만 닮았으면 좋겠단 생각이 들었다. 야베스 세일산은 제 형, 본도에게 아버지께서 무얼 주었다더라 소식이 들릴 때마다 시기를 감추질 못했다.
절대자인 아버지에게 기대기로는 본도 세일산도 다르지 않았다. 착한 첫째마저 그를 찾을 적에는 원하는 게 있었다. 그가 총애하고 누구보다 믿는 오른팔, 비아탄 아멕조차 말년을 보낼 넓고 풍족한 영지를 받아 간 채였다.
하물며 저에게 초대장을 보내고 오찬을 차려 놓은 예쁜 며느리가 ‘바라는 게 없다’니, 사렙탄으로서는 이 상황이 분할 지경이었다.
“무어든 말해 보래도.”
체통을 내려놓고 그는, 저보다 서른 살은 어린 아사야를 조르기 시작했다. 뒷짐을 진 비아탄이 큼큼 헛기침 소리를 냈지만 소용없었다.
“식사나 하자고 날 부른 건 아니지 않으냐?”
사렙탄이 채근했다. 그러자 아사야는 당혹스러운 듯 제 입가를 닦아 냈다. 비아탄은 내심 그녀의 붉은 입술이 화장이 아니었음에 놀랐다.
“……어제 왕가 인척분들과 다함께 조찬 모임을 가졌어요. 폐하께서는 사냥에 다녀오셨다고 들었어요.”
아사야가 속삭였다. 조곤조곤한 목소리였다.
“해서?”
그게 무슨 상관이냐는 양 사렙탄이 물었고,
“해서…… 혹여 마음이 쓸쓸하실까 봐…….”
아사야가 내놓은 답은 뜻밖이었다.
그에 사렙탄은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언제 찡그렸냐는 양 미간은 활짝 펴졌고, 그 옛날 어린 왕비를 반하게 만든 환한 웃음이 드러났다. 아끼는 작은며느리의 입에서 나온 예쁜 말이 그의 마음에 쏙쏙 들어와 박혔다.
애당초 사냥이란, 주는 것 없이 바라는 것 많은 친척들과의 조찬 모임이 싫어서 핑계거리로 만든 일정이었다. 그런 사정을 전혀 모르는 채 제게 마음 쓰는 스무 살의 공주라니. 왕의 눈에 천사처럼 보일 수밖에 없었다.
왕께서 웃음을 감추지 못한 채 빤히 바라보자, 아사야는 고개를 숙이며 다시금 예를 갖췄다.
“나를 빚쟁이로 만들 생각이냐?”
불쑥, 사렙탄이 말했다.
“예?”
당황한 채 아사야는 샛노란 눈만 끔뻑거렸다. 신경 써 차린 식사를 내버려 둔 채 사렙탄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가 손짓하자 하인이 기다렸다는 듯 망토를 가져와 왕의 어깨에 걸쳤다.
아사야가 그를 따라 일어섰다. 갈증으로 목이 탔고 발가락이 저린 채였다.
불퉁한 얼굴로 사렙탄은 예쁜 며느리를 내려다보았다.
“네게 무얼 주어 보답할 길은 없다. 그렇게 가로막아 놓고는 일방적으로 맛있는 식사를 대접하는 게, 빚을 지우는 게 아니고 무어냐.”
그러고는 망설임 없이 돌아섰다. 놀란 아사야는 구두 소리를 또각거리며 그의 뒤를 몇 걸음 쫓았다. 생각보다 빨랐다. 적어도 서너 번은 더 정성을 들여야 기회가 올 줄로 알았지만……
“이, 있어요, 폐하. 받고픈 것이요.”
이렇게나 당장이라니, 아사야에겐 좋은 일이었다.
“그러니 노여워 마세요.”
작은며느리를 내려다보며 사렙탄은 마지못한다는 듯 몸을 돌렸다. 눈치껏, 하인들이 열었던 문을 닫았다. 턱을 들고 두 눈은 가늘게 뜬 채 사렙탄이 말했다.
“그래, 그럴 테지. 너도 받고픈 게 있을 게야.”
그리고 물었다.
“무얼 줄까.”
값비싼 목걸이, 더 크고 넓은 방, 화려한 드레스, 저만을 그려 낼 고급 화가…… 사렙탄은 그런 것을 예상했다. 아사야 세일산 역시, 보통의 ‘이쁨받는 며느리’가 왕에게 요구하기 좋은 목록을 알았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한 번 받으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아사야가 원하는 건 단발적인 소비가 아니었다.
저에게 힘이 되어 줄 집. 가브리엘이 해를 볼 수 있는 방. 야베스의 손을 쳐낼 방패. 아사야는 그런 것을 원했다.
“화단이요.”
흑단 같은 머리칼을 어깨 위로 흘리고, 놀란 탓에 두 뺨은 발갛게 붉힌 채 아사야가 말했다.
“화단?”
사렙탄은 제가 들은 말을 이해할 수 없다는 눈치였다. 모든 것이 아사야의 예상대로였다. 기쁜 기색을 감추며 아사야는 그저 초조할 뿐인 어린 소녀를 연기했다.
“꽃을…… 심고 꾸밀 수 있는 화단이…… 있으면 좋겠어요.”
“허……, 그래. 꽃을 좋아한다 했었지.”
“예, 폐하.”
잠시간 생각하는 듯하다 사렙탄은,
“알았다.”
짧은 답을 남겼다. 그러고는 방을 떠났다. 예를 차릴 새도 없이 떠나는 왕을 바라볼 적에 비아탄이 작게 귀띔했다.
“사실, 어찌 되었건 가셨을 시간입니다. 회의가 있어 조찬은 무립니다. 공주님의 얼굴만 보러 들르신 것이니까요.”
왕의 기사와 하인들마저 그를 따라 떠난 뒤 응접실에는 아사야와 엠마오, 그리고 두 명의 시녀가 남았다. 천천히 테이블 자리로 돌아가 아사야는 식기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말했다.
“우리끼리 식사할까?”
왕자비의 말씀에 시녀들은 입을 떡 벌렸다. 식은땀이 묻은 손을 치맛단에 문지르며 엠마오는 혀를 내둘렀다.
“꼴랑 화단이 뭐예요, 아가씨!”
“꼴랑 화단이라니, 엠마오.”
화내는 유모를 앞에 두고, 아사야는 레몬 잎을 띄운 에이드를 들이켰다. 갈증이 풀리니 ‘하아’, 속 편한 소리가 절로 났다. 왕자비의 태평한 모습에 사라와 유라까지 말을 거들었다.
“그런 건 폐하가 아니어도 누구나가 줄 수 있는 거잖아요.”
시녀들의 투정에,
“아니야.”
아사야는 단언했다.
“폐하께서만 주실 수 있어.”
아사야는 영웅 베데르의 딸이며 대륙의 왕 사렙탄의 며느리였다. 공주라 부를 정도로 아끼는 며느리에게 화단을 주자면 정원이 있어야 했다. 그러나 정원이라 함은 필시 어느 성의 부속품이었다. 세상 어느 왕도, ‘공주’에게 남의 정원을 가꾸기를 요구하지 않을 것이었다.
긍지 높은 사렙탄이라면 더했다. 아사야 세일산이 어느 누구의 정원사 노릇을 하게 두느니 왕홀에 제 이마를 찧을 왕이었다.
그러니 사렙탄 세일산이 아사야 세일산에게 ‘직접 꾸릴 화단’을 줄 적에는, 그녀의 것인 성이 함께여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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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성에 연회가 열렸다. 사렙탄이 띄운 배를 화려한 연회장으로 꾸며 놓기까지 꼬박 사흘이 걸렸다. 신관과 마법사들은 화려한 폭죽을 준비했다. 경비대원들은 왕성의 자랑인, 대륙의 마지막 드래곤을 강철 케이지에 밀어 넣었다.
정성을 쏟은 만큼이나 멀리에서 찾아든 손님은 거물이었다.
나젤탄의 왕녀, 첫째 왕자비가 될 여자, 블란테 화이트가 대륙의 성벽을 넘었다.
왕녀를 맞이하고자 치장하는 것은 비단 연회장뿐만은 아니었다. 새벽 일찍 아사야는 눈을 떴고, 드로인에게 선물받은 코롱으로 손목을 적셨다. 유라와 사라, 엠마오도 누구 못지않게 바빴다.
드레스는 짙은 자주색으로 선택했다. 2차 마물 전쟁이 끝난 이후 자주색은, 영웅 베데르와 아졸 가문의 상징이었다. 아버지를 추모하기 위해 자색 깃대를 내걸었던 왕께서 오늘, 첫째 왕자비가 될 왕녀를 맞이하며 저와 제 가문을 잊지 않도록 맞춤 제작한 옷이었다.
소매 폭은 아주 넓고 길어 무릎에 닿을 정도였지만, 팔뚝과 가슴, 허리는 꽉 조이도록 디자인됐다. 풍성한 스커트는 아사야의 골반에서부터 좌우로 부드럽게 펼쳐졌고, 주름이 잡힌 라인마다 작은 보석을 꿰어 넣은 자수가 놓였다.
오전 내내 거울 앞에서, 왕자비와 시녀들은 떠날 줄을 몰랐다. 항상 이마를 가리던 옆머리까지 깔끔하게 틀어 올리자 동그란 두상이 잘 드러났다. 큼직하고 또렷하게 자기주장을 내세우는 이목구비에는 아주 약간의 화장만이 더해졌다. 늘씬하게 뻗은 목덜미는 우아한 백마 같아 어느 목걸이건 잘 어울렸다.
“정말 아리따우세요…….”
황홀한 듯한 얼굴로 유라가 속삭였다. 아사야는 웃음을 터뜨렸다. 공주의 시녀들은 어쩌면 왕자보다도 그녀를 예뻐했다.
“귀걸이는 바꿔야겠어.”
거울에 제 모습을 비추어 보며, 아사야가 말했다.
“그게 제일 화려하고 예쁜 것인데요?”
“멀리서 왕녀님이 오신 날이야, 오늘 내가 화려하고 예쁠 필요는 없으니까…….”
사라가 작은 진주알이 박힌 귀걸이를 꺼냈다.
“그럼, 이건 어떠세요?”
“좋아, 그걸로 부탁해.”
그녀들의 기분 좋은 시간을 흩트리는 이는 늘 그렇듯 같았다.
“아사야.”
방문 옆 기둥에 기대어 선 채, 그는 멀찍이서 아사야를 훑어보았다. 아사야는 야베스의 얼굴에 슬며시 피어오르는 미소를 훔쳐봤다. 제 아내가 아리따우니 흐뭇한 기색이었다.
그러나 이내, 그는 표정을 굳혔다. 훌쩍 다가와 아사야의 이마 옆면을 바라보며,
“당신 여기에 흉터가 있었어?”
묻는 것이었다.
손을 들어 아사야는 제 왼쪽 이마를 매만졌다. 흐릿하게 남은 흉터가 있기는 했다. 여태껏 옆머리를 내린 이유도 이 흉터 때문이었지만, 성장함에 따라 흉터의 크기가 줄어들고 색이 희미해지니 큰 탈로 생각되진 않았다.
“아, 이거…… 기억은 나지 않지만, 아주 어릴 적에 다쳤대요.”
아사야가 설명했다. 그래도 야베스의 관심은 여전했다. 그는 손을 올려 아사야의 이마 위를 만져 보았다.
‘이 사람이 나를 걱정할 줄도 아는구나.’
아사야는 생각했다. 왕께서 아사야 세일산을 위해 성을 짓길 명하시고, 착공에 들어간 뒤로 부쩍 다정해진 야베스였다. 제 아내 소유의 성이란 제 소유의 재산이나 다름이 없으니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을 터였다.
거울 너머로 야베스와 눈을 마주치며 아사야가 입을 열었다.
“이젠 아프지 않아요.”
그러나,
“머리를 내려서 가리는 게 좋겠어.”
야베스의 염려는 아사야가 예상한 것과 다른 내용이었다.
“나중에 고위 신관 하나를 불러다 주지. 그 정도 흉터는 지워 줄 수 있을 거야.”
야베스 세일산은 재주 많은 남자였다. 제 아버지가 용인하는 선을 이리저리 넘나들며 신부를 낚아챈 것으로도 그랬고, 상대의 기분을 도리 없이 상하게 만듦에 있어서도 둘째가면 서러울 지경이었다.
아사야는 몹시 당황했다. 갑작스럽게, 별것 아니라 여겼던 흉터가 저에게 난 하자처럼 생각됐다. 그가 저를 상품처럼 취급한다는 사실은 놀랍지도 않았다. 다만, 그에게 길들여진 듯 제 흉터가 그렇게 심한가 의심하는 스스로가 놀라웠다.
대답 없이, 아사야는 엠마오를 바라봤다. 엠마오는 두 눈을 내리깐 채 잠시간 머뭇거리다, 아사야의 틀어 올린 머리를 다시 풀어 주었다. 그러고는 아가씨의 기분이 풀릴 때까지 부드러운 빗질을 멈추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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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건너에서 온 손님께서 연회장에 도착했다. 곱슬거리는 은발 머리카락이 구름처럼 바람에 휘날리고, 갈색 눈동자와 잘빠진 턱이 특징인 여인이었다. 말을 타고 국경을 살필 적에 그녀의 머리칼이 백마의 갈기처럼 보인다 하여 ‘나젤탄의 백마’라는 별명을 가진 왕녀, 블란테 화이트였다.
야베스와 함께, 아사야는 국왕 내외의 좌측에 선 채 그녀의 모습을 훔쳐보았다. 화이트 드래곤이 폴리모프한 모습이래도 믿을 법한 모습에 가슴이 뛰었다.
왕녀를 바라보면서도 아사야는 가브리엘을 생각하고 있었다. 가브리엘이 폴리모프를 한다면 어떤 모습일지 상상하면서 그녀는 긴장을 풀었다.
그녀의 사랑스러운 드래곤은 벌써 배에 실려 있을 터였다. 내내 조심스레 다뤄 달라 부탁을 해 뒀으니, 오늘 가브리엘이 다칠 일은 없을 것이었다. 그 또한 아사야의 긴장을 푸는 데에 도움이 됐다.
블란테 왕녀가 사렙탄에 이어 본도 왕자와, 그리고 야베스 왕자와 인사를 마치니 아사야의 차례였다. 목을 꼿꼿이 세운 채 아사야는 한 발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자 근방의 시선이 삽시간에 변했다.
대외적인 자리에서 아사야는 가장 많은 시선과 관심을 받는 여자였다. 어떨 때엔 그 시선들이 바늘처럼 따갑고 불씨처럼 아프게 느껴지기도 했었다. 오늘, 둘째 왕자비와 왕녀를 둘러싼 시선은 호기심이었다. 대륙에서, 그리고 나젤탄에서 가장 유명한 두 여자의 기싸움을 궁금해하는 호기심.
그러나 당사자인 아사야의 생각은 남들과는 조금 달랐다. 남들이 원하는 장단에 맞추어, 한때 왕위계승자였던 왕녀와 라이벌이 되는 일은 바보짓이라 생각됐다. 어떤 방식으로 싸우게 되건, 경험도 적고 나이도 어린 제가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근방의 모든 이들이, 그리고 제 남편인 야베스 세일산이 기대하는 것과 달리, 아사야는 왕녀를 환영키로 결정했다.
저에게 어려운 만남이 왕녀라고 쉽진 않을 터였다. 서로 간에 고문이라면 애당초 시작하지 않는 게 가장 좋은 길이었다.
“만나 뵙게 되어 반가워요, 블란테 왕녀님.”
자색 스커트 자락을 쥐고 펼치며, 아사야는 예를 갖춰 무릎을 살짝 굽혔다.
“아사야 세일산입니다.”
그러자 블란테의 갈색 눈이 커졌다. 둘째 왕자비의 환대를 받을 줄은 몰랐다는 눈치였다. 시선을 올려 아사야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봤다. 온몸의 색소가 옅은 듯 갈색 눈동자 역시 맑은 사람이었다. 두 뺨과 아래턱에 희미한 주근깨가 꽃가루처럼 묻어 있었다.
“영웅 베데르 경의 따님이시군요.”
블란테가 말했다. 아사야는 내심, 그녀가 저를 ‘야베스 세일산의 아내’라고 부르지 않음에 감사했다.
“……무성한 소문들에 호기심만 쌓여 가던 참이었어요. 만나 뵈니, 소문이 전부 사실이었군요.”
왕녀의 말에 아사야는 흐릿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대륙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다…… 숱하게 그리 불리며 살았더니, 이제는 그 말이 칭찬으로 느껴지지도 않게 되었다. 새로이 만나는 모든 이들이 아사야의 눈과 코와 입을 떼어다 평가하기 바빴다.
아사야의 덤덤한 반응이 의아한 듯, 블란테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랑스럽고 다정한 분이라고 들었거든요. 블랙 드래곤을 길들일 정도의 인물이라고.”
“네?”
왕녀가 전한 말은 금시초문이었다. 아사야의 볼은 이내 발갛게 달아올랐다. 저에 대해 그런 소문이 도는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아사야는 손등으로 두 뺨의 열기를 감췄다.
“왕녀님에 대한 소문도 많이 들었어요.”
아사야가 속삭였다. 그에 블란테의 미소가 씁쓸해졌다.
“탈락한 계승자라고요?”
저에게만 들리게 작은 목소리로 왕녀가 물었고,
“아니요!”
아사야는 손사래를 쳤다.
“세상 어느 여자보다 가장 많이 배운 왕녀님이라고요. 사람도 검도 잘 다루신다고…… 그래서 만나 뵙길 얼마나 고대했는지 몰라요. 저는…….”
애써 미소 지으며 아사야는 부끄러운 진심을 덧붙였다.
“사람을 다루는 법도 검을 다루는 법도 배운 적이 없어서요.”
그러자 블란테가 두 팔을 활짝 벌렸다. 그 동작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뿐이었다.
잠깐 머뭇거리다, 아사야는 그녀 앞에 한 발 다가섰다. 블란테 화이트는 키가 아주 크고 팔도 다리도 길었다. 기사단의 평균키를 웃돌 수준이었다. 그녀 앞에 서자 아사야는 평소보다 더욱 작아 보였다. 64델링(약 160cm)의 신장이 40델링 드워프처럼 조그맣게 느껴졌다.
붉어지는 뺨을 감추며, 아사야는 블란테가 제안한 포옹에 응했다. 풍성한 스커트를 뭉개지 않으려니, 상체를 한껏 기울이며 블란테의 품에 기댄 모습이 됐다.
“…….”
포옹을 마치며 아사야가 뺨의 홍조를 손등으로 닦자, 블란테는 쾌활한 미소를 보여 주었다. 긴장했던 가슴을 쓸어내리며 아사야도 그녀를 따라 웃었다.
그러나 오늘, 아사야의 목적은 비단 왕녀에게만 있지 않았다. 화려하고 큰 배 위로 올라서자마자 아사야는 가브리엘을 먼저 찾았다. 그녀의 드래곤은 갑판의 아주 끄트머리에 앉아 있었다. 시커먼 케이지 속에 갇힌 채였다.
계획을 실행하기에 앞서 아사야는 가브리엘과 눈을 맞췄다. 멀리에서도 가브리엘은 아사야를 아주 잘 찾아냈다.
신비하게도 아사야의 검은 용은, 그녀를 알아보는 데에 그치지 않고 그녀의 얼굴과 차림새를 구경이라도 하는 것처럼 천천히 훑어보았다. 가브리엘이 제 드레스를 보는 것을 알고 아사야는 슬며시 미소 지었다. 그러고는 남들의 시선을 피해 살그머니 스커트 자락을 쥐고 아주 살짝 무릎을 굽혔다가 세웠다.
“안녕, 가브리엘.”
그러자 케이지 속에서 드래곤이 커다란 머리를 아주 내렸다가 들어 보였다.
“안녕.”
터져 나오는 웃음을 감추지 못해 아사야는 작게 헛기침을 했다.
그제야 용기가 났다. 가브리엘이 제게 있어 인생의 선물이듯이, 그녀는 가브리엘에게 작은 선물을 주고자 했다. 오늘, 드래곤을 바다 위의 배에 싣는 연회날만큼 좋은 기회는 두 번 다시 찾아오지 않을 터였다. 마른침을 넘긴 뒤 아사야는 한 발, 두 발, 사렙탄 세일산에게 다가갔다.
둘째 왕자비가 다가가자 왕과 대화중이던 본도 세일산이 살짝 자리를 내주었다. 본도 세일산과 왕녀, 그리고 왕비의 수다를 몇 마디 듣다가, 아사야는 적절한 기회를 잡아냈다.
“나젤탄에는 드래곤이 아주 적다고 들었어요.”
자연스레 말을 꺼내자, 왕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드래곤을 사냥하는 일도, 잡는 일도 없을 정도죠. 이 정도 거리에서 보는 일도 처음이에요.”
“그럼, 한 번도 드래곤을 본 적이 없으세요?”
“그럼요.”
블란테 왕녀의 고개가 가브리엘에게로 향했다. 케이지에 갇혀 바닷바람을 쐬는 가브리엘을 바라보다, 아사야는 사렙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블란테 왕녀님께, 왕성의 드래곤이 나는 모습을 보여 드리면 어떨까요?”
그러자 대화가 잠시 끊겼다. 왕에게 질문이 향했으니 누구도 끼어들지 않는 탓이었다.
야베스의 손이 살짝 아사야의 팔뚝에 닿았다. 그가 제 팔을 쥐려 하기에, 아사야는 두 손을 드레스 앞으로 모아 쥐며 슬그머니 손길을 피했다. 남편의 얼굴이 굳진 않을까 염려할 필요는 없었다. 아사야가 아는 중에, 야베스는 가장 연기에 능한 남자였으므로.
“……드래곤이 달아나지 않을 게 확실한 게냐?”
사렙탄이 물었다. 아사야를 향한 말은 아니었다. 야베스 세일산을 향한 질문이었다.
야베스의 얼굴에 뻔뻔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의 속이 부글부글 끓고 있음은 아사야만이 느낄 수 있었다.
왕가 인척들은 물론이며 갖은 귀족들, 나젤탄의 왕녀까지 함께하는 자리였다. 그런 연회장에서 제 아내가 드래곤을 날리자며 제안했는데, ‘나는 모르는 일’이라고 답했다간 낭패였다.
“물론입니다. 드래곤이…… 아사야를 얼마나 따르는지 모릅니다.”
야베스가 대답했고,
“공주야.”
사렙탄이 작은며느리를 향해 미소 지었다. 아사야는 얼른 고개를 조아렸다.
“그 드래곤은 네게 예물로 바친 물건이야. 네가 네 짐승을 산책시킨다는데, 짐에게 허락을 구할 것 없다.”
‘공주’라는 호칭하며 본 적 없이 다정한 말투에 왕녀의 눈이 커졌다. 블란테 화이트가 놀란 기색을 감추지 않자 야베스의 어깨가 조금 올라간 것도 같았다. 남편의 기를 살리기 위해 몇 마디 거들기보다는, 아사야는 제 드래곤의 케이지를 여는 쪽을 선택했다.
경비대원 네 사람이 들러붙어 당겨야만 열리도록 커다란 강철 케이지가 개방됐다. 몇몇 귀족들은 가까이 다가왔고 몇몇은 작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섰다. 아사야 세일산은, 그녀의 드래곤에게로 아주 가까이 다가갔다.
경비대원이 손을 떨며 아사야에게 열쇠를 쥐여 주었다. 가브리엘의 목을 옥죄는 결박 사슬을 푸는 열쇠였다.
손을 올려, 아사야는 가브리엘의 콧잔등을 쓰다듬었다.
“너를 풀어 줄게, 가브리엘.”
단단히 잠긴 자물쇠 안으로 큼직한 열쇠가 매끄럽게 들어갔다.
“많이 무거웠지…….”
열쇠가 매끄럽게 돌아가자 자물쇠와 함께 결박 마법이 풀렸다. 묵직한 쇠사슬이 쿵, 쿵,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갑판 위로 작은 진동이 일 지경이었다.
마침내 감옥에 갇히지도 않고 무엇으로 묶이지도 않은 채 가브리엘이 하늘 아래에 섰다. 웅성거림은 긴장감과 초조함, 그리고 기대감으로 인해 금세 잦아들었다. 근방의 모든 이들이 입을 다문 채 왕자비를 바라보고 있었다.
“모두에게 보여 주자, 너에게 날개가 있다는 걸.”
아사야 세일산은 블랙 드래곤의 시커먼 머리에 제 뺨을 기댔다. 마물이 입을 벌려 공격이라도 했다가는 목이 뜯길 것이었다. 비아탄 아멕을 비롯한 왕실 기사단이 검을 뽑긴 하였으나, 드래곤이 공격을 시작한다면 왕자비는 죽은 목숨이었다.
연약하기 짝이 없는 손으로 아사야는 가브리엘의 단단한 이마를 만졌다. 드래곤의 보라색 눈동자에 그녀의 미소가 담겼다.
“날아.”
아사야가 말했다. 그러자 몸통에 단단히 묻어 있던 시커먼 날개가 좌우로 펼쳐졌다. 그보다 완벽한 검정은 누구도 본 일이 없었다. 검은 날개를 펼치자 드래곤의 덩치는 서너 배는 더 커 보였다. 거대해진 그림자가 왕가의 손님들을 가렸다.
“다녀와, 가브리엘!”
천천히, 가브리엘의 두 발이 갑판 위에서 떨어졌다. 거대한 몸을 일으키는 비행은 거센 바람이 되어 아사야를 덮쳤다. 자색 드레스가 펄럭거리며 날렸다. 이마를 가린 머리칼도 걷혔다.
날갯짓을 연이을 때마다 가브리엘의 몸은 가벼워졌고 그를 가두던 강철 케이지는 작아졌다. 파란 하늘과 태양을 가리도록 높게 날아올라, 가브리엘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지상의 모든 이를 향해 조소했다. 마도구를 써 전쟁에서 이겨 놓고는, 그와는 관계도 없이 진작 죽어 가던 드래곤을 가둬 놓고 상징처럼 쓰는 왕가하며, 멍청하게 눈앞에서 드래곤을 날려 보낸 기사들, 겉을 치장하고 꾸민다는 이유만으로 자신들이 과거의 인간에 비해 우월하다 착각하는 귀족들. 그리고 바보처럼, 제 손에 쥔 유일한 카드인 저를 풀어 준 아사야…….
가브리엘은 태양을 올려다봤다. 그리고 알았다, 자유를 되찾을 둘도 없는 기회가 주어졌음을.
힘차게 날개를 흔들 때마다 가브리엘의 몸은 위로, 위로 떠올랐다. 시원한 바닷바람이 그의 날갯죽지를 훑고 지났다. 묵직하게 저를 억압하던 결박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순간, 검은 용에겐 중력이 사라진 듯했다.
푸른 하늘을 가로지르며 가브리엘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새파란 캔버스에 화가가 실수로 찍어 놓은 검은 물감 자국처럼, 세상의 모든 색으로부터 동떨어진 블랙 드래곤을 누구나가 올려다보고 있었다. 누군가는 환성을 내질렀고 누군가는 두려운 듯 찡그린 표정이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아사야 세일산만이 가브리엘의 눈에 또렷했다. 그녀를 제외한 모든 인간은 손으로 문질러 흩트려 놓은 것처럼 흐릿했다.
구름에 닿기 직전으로 높은 하늘에 뜬 채로도 가브리엘은 아사야의 눈과 코와 입을 볼 수 있었다. 아름다운 자주색 드레스는 입고 태어났다 해도 믿을 수준으로 잘 어울렸다. 바람이 쓸고 지난 이마는 차가운 시냇물에서 건져낸 조약돌처럼 희고 둥글었다. 가브리엘은 그 이마를 알았다.
웃는 것보다 우는 것을 더 많이 본 금색 눈동자도 알았다.
매일 밤마다 수다를 떨고도 또 새로운 이야기를 조잘거리던 말 많은 입술도 알았다.
가브리엘은, 아사야를 알았다. 그녀는 가브리엘이 알고 가브리엘을 아는 유일한 인간이었다.
‘그래서?’
가브리엘은 고개를 쳐들었다.
‘그게 내 탓인가?’
주저 없이, 그는 구름 사이로 파고 들어갔다. 그저 새하얗게 빛날 뿐인 구역에 진입하자 어마어마한 대륙의 땅덩어리도, 왕이 띄운 배도, 저를 가두던 감옥도, 그리고 아사야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이를 악문 채 드래곤은 끓는 듯한 신음성을 흘렸다.
‘도대체 내가 왜 너에게로 돌아가야 해?’
매 순간 아사야를 친근하게 여기면서도, 가브리엘은 아사야에 대해 몰랐다.
저보다 몸무게만 서른 배는 더 나갈, 시커멓고 큰 드래곤의 주둥이에 함부로 손을 가져다 대는 어린 아사야의 행동은 멍청하다고 생각됐다. 저로부터 제 몸을 지켜 낼 무기도 방패도 없는 주제에 아사야는 불쑥 가브리엘의 날개 밑으로 들어오곤 했다.
대화도 통하지 않는 존재를 친구라고 부르는 것도 그랬다. 제 나이, 과거, 성격, 하물며 목소리 하나 모르는 주제에 도대체 무어가 친구란 말인지 순진하기 짝이 없었다.
아니, 애당초 그녀는 저를 치료해 주어선 안 되었다. 순해 빠진 연민으로 약을 발라 준다 하더라도, 제가 회복된 줄을 알면서도 찾아와선 안 되었다. 언제 어떻게 저를 해칠 줄 알고, 기력을 회복한 드래곤에게 불쑥 손을 내민단 말인가. 어떤 바보라도 그런 짓은 않을 것이었다.
하물며,
“반드시 널 되찾을 거야, 나를 믿어…….”
그런 약속은 해서는 안 됐고,
“약속했잖아, 내가……. 다시 널 되찾겠다고.”
그깟 약속을 지키겠다고 야베스 세일산과 결혼해선 안 됐다.
고개를 털며 가브리엘은 구름 위를 날았다. 자유의 맛은 차갑고 서늘해서, 어둠 안에 오래도록 갇혀 지낸 비늘을 떨게 만들었다.
아사야라는 어린 인간으로부터 멀어질수록 그는 가브리엘이라는, 어울리지 않게 성스러운 이름과도 멀어졌다. 아사야 세일산이 없는 허공 위에서 그는 그저 마물이었다. 누구에게도 무어라 불릴 일 없고 불릴 이름 없는 시커멓고 거대한 드래곤에 지나지 않았다.
인간들이 두려워하며 ‘영악한’, ‘악마적인’, ‘비열한’ 존재라 불러 왔듯이, 그는 영리했다. 대륙의 왕성에 있어 제가 어떤 존재인지 그는 알았다. 그는 승리의 상징이며, 왕가의 강인한 심볼이었다. 세일산 일가는 마도구로 하여금 드래곤을 통제하고 애완동물처럼 취급했으며, 그 모습을 과시하길 원했다.
그런 드래곤이 타국 왕녀가 보는 앞에서 달아나 버린다면 그 꼴이 어떻게 될까? 늙은 왕은 변명할 말을 찾지 못할 것이며, 왕성의 명예는 땅에 처박힐 것이었다.
그리고 야베스 세일산은? 가브리엘은 미간을 찡그렸다.
어쩌면 가브리엘은 그 어떤 인간보다 야베스 세일산을 잘 알았다. 야베스 세일산은 가브리엘이 본 중 가장 비열하며 허접한 인간이었다.
왕족이라고, 개중에서도 생식기 튀어나온 남자라고 귀한 취급을 받고 자란 개미를 보기가 처음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빛이 쬐고 그림자가 생기는 최초의 순간부터 생존해 온 가브리엘이 보기에, 야베스 세일산은 독보적으로 최악이었다.
가브리엘이 처음 마주할 적에, 공작성에서 보내온 ‘선물’을 처음 열어 본 야베스 세일산의 나이가 열일곱이었다. 드래곤의 눈에 열네 살의 아사야와 그의 나이 차이는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성격의 차이는, 이따금 가브리엘을 곤혹스럽게, 때론 분노하게 했다.
그때부터 야베스 세일산은 자기 과시와 자기 연민을 양날의 검처럼 휘둘러 댔다. 남들보다 우월한 태생과 남들보다 많이 쥔 부귀를 자랑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첫째 왕자에 대한 열등감으로 똘똘 뭉친 둘째.
가브리엘이라고 그런 개미를 알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모르고 살기에는, 철문을 두드리며 저를 찾는 모습이 각막에 새겨진 듯 생생했다.
제 아버지, 제 형님, 또 무엇에 의해서건 그는 화가 난 상태였고 분풀이 대상을 찾고 있었다.
“열어.”
둘째 왕자의 명령에 용을 가둔 철문을 개방하는 경비대원의 얼굴이 컴컴했다. 드래곤이 빛을 향해 발을 뻗자 개중 하나는 쥐고 있던 창을 떨어뜨렸다. 야베스 세일산은 실수한 경비대원을 물끄러미 노려보다가,
“그 창으로 내 드래곤을 교육시켜. 제 주인도 알아보고 인사도 할 수 있게, 딱 그 정도면 되겠어.”
철문을 닫아 버렸다.
컴컴한 지하 밀실에 드래곤과 단둘이 남은 인간은 발작을 해 댔다. 문을 열어 달라며 소리를 질러 댔고 떨군 창을 집어 들고는 허공을 향해 휘둘러 댔다.
어둠에서 나고 자란 가브리엘조차 한참의 시간을 거쳐서야 익숙해진 암흑이었다. 보통의 남자가 몇 초간 눈을 끔벅거려 봐야, 앞을 읽을 수는 없었다. 눈먼 이처럼 어둠 안에 갇혀, 경비대원은 둘째 왕자의 명령에 따르겠다고 창을 들고 아무렇게나 어둠을 찔러 대기 시작했다.
그럴 때면 가브리엘이 쥔 선택지는 많지 않았다. 그가 벽을 향해 충돌하다 자살하길 기다리거나, 저를 찌르거나 공격할 수 없게 팔을 뜯어 먹어 버리거나.
솔직히 말해 가브리엘은 그 졸렬한 싸움이 아주 싫진 않았다. 그는 매우 화난 상태였고 눈물범벅이 되어 저를 바라보던 어린 인간을 기억했다. 제 힘을 앗아 간 존재들을 증오했고 저를 가둔 이들을 혐오했다. 어떤 방식으로건 분노를 해소할 길이 필요하던 차였다.
창을 쥐고 다가오는 인간을 무력화시키는 일은 정당하다고까지 생각됐다.
팔이 뜯기고 목을 씹혀 죽는 인간이 그 뒤로도 여럿이었다. 이내, 가브리엘은 지겨워졌다. 겁에 질려 창과 검을 쥐고 오줌을 지리는 경비대원을 죽인다 해도 그의 처지에는 변화가 없었다. 야베스 세일산의 삐딱한 스트레스만 풀어 줄 뿐이었다.
“제 주인을 알아보게 교육시켜.”
그렇게 싸움 아닌 싸움을 붙이면서도, 왕자가 직접 나서는 일은 없었다.
왕의 오른팔이라는 기사가 의심을 해 올 즈음에야 야베스의 놀이가 멈췄다. 기록으로는 세 명의 사상자가 남았지만 가브리엘이 기억하기로는 제 비늘을 창으로 찔러 대다 죽은 이가 그보단 많았다.
놀이를 그치면서 야베스 세일산의 걸음도 뚝 끊겼다. 제가 벌인 짓거리에 죄의식을 느껴서는 아닌 듯했다. 제 아들놈이 살인범이라는 소문이 아버지의 귀에 들어갈까 봐, 그뿐이었다.
처음에 가브리엘은 마침내 찾아온 고요를 만끽했다. 그러나 평화는 아주 잠시였다. 며칠인지 몇 달인지, 몇 년인지 모를 시간이 컴컴하게 흘렀고 그는 어둠이 제 편이 아님을 알았다. 돌벽에 몸을 찧어 가며 방향을 느끼고, 박살난 심핵에 쌓이는 티끌 같은 마력을 모으면서, 그는 제가 죽은 건지 산 건지도 모르는 채 생존했다.
최악의 남자와 결혼하는 대가로 저를 찾아왔을 적에, 다시 말해 왕의 오른팔이 ‘공주님’, 그렇게 불렀을 적에, 아사야에게선 피 냄새가 풍겼다. 가브리엘의 온 신경이 그의 어린 인간에게로 향했다. 가브리엘만이 그녀가 다쳐서 온 것을 알았다, 야베스 세일산과 초야를 치르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브리엘은 아사야의 선택을 완전히 비난하지 못했다. 아사야가 약속을 지키지 않았더라면, 그는 어둠 안에서 미친 채 죽어 갔으리라.
가브리엘이 고개를 들었다. 태양은 어느 때보다 찬란했고 하늘은 바다보다 푸르렀다.
그는 태양보다 낮고 구름보다 높은 곳에 위치한 선을 바라보았다. 손가락으로 구름을 문질러 길게 펼친 양 하얀 직선이었다. 큰 새와 드래곤만이 아는, 하늘과 하늘을 나누는 그 선은 아주 오래된 동화 속에나 천평선 따위의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그 선을 쫓아 날아가면 천공섬이 있었다.
오래전 작고 통통한 손으로 동화책 페이지를 넘겨 가며 아사야가 종알거리던, 바로 그 섬이었다.
조금만 더 날면 천공섬이 금방이었다. 그곳에 두 발을 대기만 하면, 더는 케이지에 갇히지 않아도 됐다. 개미들로부터 끔찍한 모멸을 겪을 일도 없었다. 투견 취급을 받으며 목을 옥죄고 살지 않을 수 있었다. 누구의 발도 닿지 않는 섬으로 가, 못다 잔 동면을 취하면 그만이었다.
긴 잠을 자고 깨어나면 대륙의 명성도 바뀌어 있을 터였다. 사방으로 흩어진 드래곤들도 언젠가는 모여들 것이었다. 늘 그렇듯, 누군가는 동족을 위한 세상을 건축하고 그럴싸한 명분을 바위에 새기리라.
가브리엘이 할 일은 따로 있지 않았다. 여태껏 그렇게 살아왔듯이, 동족이건 인간이건 외면한 채 방관자로서 비열한 삶을 이어 가면 그만이었다.
그렇게 되면,
‘아사야는?’
대륙의 자랑인 드래곤을 날려 보낸 그녀의 인생은 쑥대밭이 될 것이었다. 장식용 소품처럼 예쁨받는 인생도 끝이었다.
야베스 세일산이 가장 먼저 그녀를 원망하리라. 제 며느리랍시고 ‘공주’ 따위의 애칭을 붙인 왕도 등을 돌릴 것이었다. 어쩌면 그, 허여멀건 왕녀와 첫째 왕자의 혼사도 망가질 수 있었다. 심한 경우 그녀는 파혼을 당할 것이며 왕성으로부터 위로금을 받기는커녕 드래곤을 잃은 죗값을 지불해야 할 터였다. 종지에는 무뚝뚝한 외팔 기사가 있는 성으로 돌아갈 터였다.
그러면 아사야는 지독하게 외롭고 괴로워질 것이었다. 외로움에 지쳐 공작성의 숲을 다시 뒤질지도 몰랐다. 시커먼 동굴을 습관적으로 찾으며 헤매 다닐 터였다. 그녀를 반길 드래곤이 비겁한 동면을 취하는 동안에.
‘그래서?’
가브리엘의 잇새로 끓어오르는 신음성이 새어 나갔다.
‘그래서.’
느릿느릿, 그는 날개를 멈췄다. 넓고 푸른 하늘을 가르며 바람을 만끽하던 드래곤은 비행을 포기했다. 거대한 몸뚱어리는 고스란히, 제가 헤치며 오른 구름 속으로 추락했다.
백색 구름 밑으로 떨어져 나올 적에 그의 비늘은 축축해졌고 구름 몇 조각이 찢긴 솜털처럼 삐져나왔다.
그대로 남색의 바다로 낙하하다가 그는 날개를 펼치며 몸을 비틀었다. 멀찍이, 빌어먹을 배가 보였다. 폭죽을 실은 거대한 배는 왕성의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고 갑판의 끄트머리에 저를 마중 나온 여자가 보였다.
제 머리가 이상해진 게 틀림없다고, 가브리엘은 생각했다. 돌벽에 머리며 온몸을 찧어 댄 부작용이 분명했다. 미쳤다고밖에 말할 길이 없었다. 그녀 때문에 자유를 포기하다니. 다시 왕성의 개가 되겠다고 스스로 돌아가다니.
그러나 그로서는 방도가 없었다. 미소 지으며, 제 드래곤이 반드시 돌아올 것이라 의심 한 점 없이 믿는 아사야의 얼굴을 본 순간에는.
물살을 가르며 가브리엘은 낮게 날았다. 그가 두 날개를 펼치며 갑판 위로 오른 순간, 사방으로 바닷물이 파도처럼 퍼졌다. 연회장은 물바다가 되었고 아사야의 자주색 드레스도 흠뻑 젖었다.
물 범벅이 된 흑발을 쓸어 넘기며, 아사야가 웃음을 터뜨렸다.
“어서 와, 가브리엘.”
해처럼 노란 눈에 미소를 담고, 아사야가 말했다.
사방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드래곤을 길들인 왕자비. 인간들의 같잖은 역사에 길이 남을 한 줄이었다. 매우 만족스럽고 자랑스럽다는 양, 왕가 인척 모두가 박수를 치기 바빴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가브리엘은, 아사야의 배에 제 이마를 붙였다.
‘너 때문이야, 아사야 세일산.’
그리고 원망을 담아 작게 밀쳤다. 뒷걸음질 치며 비틀거리면서 아사야는 웃었다. 얄궂기 짝이 없게 보기 좋은 미소였다.
“고마워.”
저를 원망하는 드래곤의 이마에, 아사야는 입을 맞췄다. 태양보다 따듯하고 구름보다 폭신한 키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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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회가 끝나기가 무섭게 나젤탄에서 사절단을 보내왔다. 블란테 왕녀를 대신하여 찾아든 사절단은 대외적으로는 친교를, 사적으로는 왕녀와 본도 세일산의 혼사에 따른 계약들을 논하고자 성벽을 넘었다.
첫째 왕자의 결혼식 이야기로 왕성은 한동안 들뜬 듯 소란했다. 그 며칠간을 아사야는 침대에서 보냈다. 바닷물에 쫄딱 젖은 채 폭죽놀이 관람까지 마치느라 감기에 걸린 탓이었다.
열이 끓고 몸살이 난 아사야는 야베스와의 부부 침실이 아닌, 성의 안쪽에 위치한 침방에서 휴식을 취했다. 면역력이 떨어진 왕자비의 건강을 염려하여 엠마오와 시녀 둘, 신관만이 그녀의 방에 드나들 수 있었다.
이외의 인척들은 물론이며 야베스 세일산 역시 아사야를 볼 수 없었다. 왕자에게 감기가 옮아선 안 된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어두운 밤, 약에 취해 무거운 눈꺼풀을 들었을 때 아사야는 저를 보러 온 남자의 실루엣을 발견했다. 작은 두통으로 인해 꿈과 실제의 경계선이 흐릿해진 채, 아사야는 작게 미소 지었다.
‘가디…….’
아버지가 없는 공작성에서 지낼 적에도 아사야는 자주 아팠었다. 환절기마다 감기를 달고 앓아눕는 탓에 늦은 밤에도 신관들이 종종걸음으로 그녀의 침방을 찾았었다. 엠마오와 고위 신관들, 치료사들이 번갈아 가며 아사야의 방을 드나들었다.
그 무렵 아사야는 한 사람의 병문안만을 기다렸다. 한 가지 생각에만 사로잡혔다. 오늘은 제가 아프니까, 침대에서 일어날 수도 없고 엠마오의 말에 의하면 ‘안쓰러운 작은 아가씨’이니까, 저에게 매정해진 가디엘이 병문안을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
“바보. 그러게 찬 공기 쐬지 말라니까.”
그렇게 말하며 가디엘이 장난을 걸면, 모든 게 어린 날로 돌아갈 거라는 생각.
열 기운에 풀린 눈으로 아사야는 어두운 실루엣을 바라보았다. 그는 아사야의 미소에 당황한 듯 멈추어 있다 한 발 두 발 침대 가까이 다가왔다. 오빠의 얼굴을 제대로 보려 아사야는 두 눈에 힘을 주었지만, 그럴수록 달콤한 잠기운에 깊게, 깊게 빠져들 뿐이었다.
곤히 잠든 아사야의 얼굴을, 야베스 세일산이 내려다봤다.
잠든 아사야의 두 뺨은 열 기운에 붉었고 입가에는 희미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느릿느릿 손을 뻗어, 야베스는 아사야의 둥근 이마를 만져 보았다. 뜨끈한 체온과 식은땀이 그의 지문에 묻어났다.
“넌 참 이상해.”
땀에 젖은 검은 머리칼을 손끝으로 집어 들며 야베스가 말했다.
“왜 내 마음대로 되지를 않지?”
아사야의 머리맡에 앉아, 야베스는 한참 그녀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잠든 이의 얼굴을 노려볼 뿐인데 그녀의 이마며 콧대, 입술과 턱, 무엇 하나 그를 지겹게 하지 않았다. 하물며 그 조그만 입으로 내뱉는 난데없는 말들과 구두소리 또각거리며 발이 닿는 곳들, 희고 보드라운 손으로 벌이는 일들 역시 매일매일이 다르고 또 달랐다.
검지를 뻗어, 야베스는 잠든 아사야의 관자놀이를 살짝 눌렀다. 얼마의 시간을 들여 골몰하건 그는 제 아내의 머릿속에 든 생각을 알 수 없었다.
아픈 왕자비의 방을 찾은 이는 그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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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야 세일산이 미열마저 떨치고 일어섰을 때에는, 그녀의 많은 것이 변해 있었다. 내적인 무엇이 바뀐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녀를 둘러싼 외부적인 것들이 대거 자리바꿈했다.
가장 먼저 야베스 세일산이 달랐다. 깨어나거든 저를 힐난하리라 염려했던 남편은 연회 날의 일을 두고 일언반구 하질 않았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는 태연했다.
심지어는 이전보다 조금은 더 다정한 듯 굴기 시작했다.
“당신 감기가 일찍 나아 다행이야.”
점심에는 그와 함께 왕을 알현했다. 사렙탄 세일산 역시 제 아들과 같이 아사야를 보다 다정히 대했다. 그러나 그의 경우 정도가 지나치다 싶을 지경이었다.
“아가, 몸은 좀 어떻고?”
‘공주’라는 호칭은 황송하다 여기며 받아들일 수 있었으나 ‘아가’는 또 달랐다. 엠마오는 물론이며 베데르 아졸조차 제 딸을 그렇게 부르진 않았었다.
예상치 못한 부름에 아사야가 귀를 빨갛게 붉히자, 비아탄 아멕이 작게 헛기침했다. 기사가 주는 눈총에도 사렙탄은 털털한 웃음만 지어 보였다. 이내 그는 하인들 앞에 손을 휘저었다.
왕의 수신호에 하인들이 분주해졌다. 둘째 왕자비를 위해 마련된 선물들을 내올 적에 큰 상자가 하나, 작은 상자와 편지가 각각 하나였다. 놀란 눈치로 아사야는 사렙탄의 눈치를 살폈다. 혹여 나젤탄의 왕녀를 큰며느리로 들이기에 앞서 작은며느리의 성을 짓는 일이 부담스러워진 걸까 싶었다.
고개를 깊게 숙이며 아사야는 먼저 감사를 표했다. 그러자 사렙탄이 말했다.
“내게 감사할 것 없다.”
장갑을 낀 하인이 상자에 놓인 편지를 두 손으로 집어 왕자비에게 내밀었다.
“나젤탄에서 네게도 선물을 보냈더구나. 왕녀의 마음에 네가 쏙 든 모양이야. 언제 그렇게 친해졌느냐?”
사렙탄의 말에 아사야는 어리둥절해졌다. ‘언제 그렇게 친해졌느냐’니, 제가 물을 말이었다. 아사야로서는 블란테 왕녀와 ‘친해진’ 기억은 없었다.
아무래도 왕의 말이 옳았다. 모르긴 몰라도, 제가 왕녀의 마음에 쏙 들었음은 분명했다. 하인들이 개봉한 작은 상자에 든 에메랄드 귀걸이를 보면 그랬다. 반지며 귀걸이, 목이 아플 정도로 묵직한 목걸이에 이르기까지 가진 것이라곤 죄 장신구인 아사야를 놀라게 할 정도로 예쁜 물건이었다.
선물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하인들이 큰 상자를 개봉했을 때 아사야의 두 눈은 휘둥그레졌고, 사렙탄은 소리 내어 웃음을 터뜨렸으며, 야베스의 표정은 다소 난감해졌다.
상자 속에는 부드럽게 다듬질한 가죽 고삐가 달린 거대한 안장이 실려 있었다. 드래곤의 등에 채우는 용도였다.
“이게…….”
놀란 듯 아사야는 고개를 들었다. 당혹스러운 순간 그녀의 시선이 찾는 이는 제 남편도, 대륙의 왕도 아닌, 비아탄 아멕이었다. 왕자비의 시선에 비아탄은 수염난 턱을 움찔거리다가, 마침내 신호를 주고야 말았다.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주어진 선물을 받아들이시라는 힌트를, 군주가 아닌 공주에게 건넨 것이었다.
“어떻게 감사를 전해야 할지…….”
애써 덤덤한 척 시늉하며 아사야가 말을 흐렸다.
비아탄은 조용히 가슴을 쓸어내렸다. 블란테 왕녀가 직접 공수하여 보내온 선물에 누구보다도 기뻐하던 이가 사렙탄 세일산이었다. 총애하던 영웅의 목숨과 그 아들의 팔을 바쳐 이뤄 낸 종전과 평화를 사렙탄은 무엇보다 중시했다. 그런 그에게 있어 성안에 가두어 두었을 뿐인 드래곤은 언제고 골칫거리였다.
‘야베스 그놈이 길을 들인다고는 하는데, 말만 그럴 뿐이지.’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그는 드래곤의 소유주가 둘째 왕자인 점도, 드래곤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기사단도 아니꼽게 여겼다. 겉으로야 ‘대륙의 마지막 드래곤을 거느리는 왕성’이었지만 실상이 그렇지 않으니 탐탁잖을 따름이었다. 시커먼 지하 감옥에 처박아 둔 블랙 드래곤을 죽일 수도, 그렇다고 풀어 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 와중 영웅 베데르의 딸, 국왕의 둘째 며느리, 아사야 세일산이 기적처럼 그 골칫덩어리를 길들였다. 그러더니 한 달도 지나지 않아, 이제는 나젤탄의 왕녀가 보는 앞에서 재주까지 선보였다. 케이지를 개방하고 쇠사슬을 풀어내고, 어떠한 마법을 쓰지 않고도 드래곤이 왕성으로, 세일산의 성을 지닌 왕자비에게로 돌아온 것이었다.
‘보고 있나, 베데르?’
마물의 시커먼 날개를 두 팔 벌려 맞이하는 아사야를 바라보며 사렙탄이 그렇게 중얼거렸다.
‘영웅의 딸이 이제는 왕가의 보물이 됐어.’
거대한 파도로 연회장을 적시며, 블랙 드래곤이 아사야 세일산의 손에 콧잔등을 맡겼다.
그 소식이 사방에 퍼지니 사렙탄으로서는 그보다 기쁜 일이 없었다. 어떠한 수작도 물밑 공작도 벌이지 않고 왕성의 명예를 드높이기란, 타고난 정치가인 그로서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순수한 재능만으로 영광을 안겨 준 이가 그의 일생에 베데르 아졸밖엔 없었다.
그러나 오늘은 달랐다. 아사야 세일산은 마치 제 아버지가 그러했듯이 큰 영광을 사렙탄에게 안겨 주었다. 나젤탄은 물론이며 사방으로 소문이 퍼져 나갔다. 세일산 왕가가 완벽하게 드래곤을 길들였음을, 더 이상 드래곤과의 분쟁 따위는 없음을, 기나긴 전쟁은 정말로 종지부를 찍었음을…….
그렇게 귀한 보물이 오늘, 제 아들의 팔짱을 끼고 선 채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네가 길들인 너의 용이다.”
작은 왕자비가 무얼 묻고자 하는지 알고서 사렙탄이 먼저 입을 열었다.
“네 마음껏 타고 다녀도 좋아.”
그제야 사렙탄 세일산은 아사야의 미소를 보았다. 착한 왕자비는 언제고 그를 향해 미소를 지어 보였으나 이번에는 달랐다. 이번에야말로 베데르의 딸이 제 말로 인해 진심으로 기뻐하는구나, 사렙탄은 느꼈다.
환하게 미소 짓는 얼굴이 제 아버지를 쏙 빼닮은 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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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브리엘을 철문 밖으로 걷게 하고, 자유로이 날게 하는 날을 몇 번이고 상상해 온 아사야였다. 덕분에 가브리엘을 바다로 날려 보낸 뒤에도 침착할 수 있었다.
그러나 거대한 덩치의 가브리엘이 성의 화단을 가로질러 걸으며 거대한 꼬리를 휘적휘적 움직이는 모습은 어느 때보다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만일에 대비하여 기사단이 양측으로 붙어 따라 걷긴 하였으나 그뿐이었다. 용의 목을 조이던 쇠사슬도 가죽 목줄로 둔갑한 채였다.
가브리엘과 함께 정원을 걷는, 믿기지 않게 기쁜 순간, 아사야는 걱정했다.
‘혹시 아직 꿈결인 건 아닐까?’
어쩌면 감기를 못 떨치고 기절 중이라, 그저 기쁠 뿐인 꿈을 꾸는 중인지도 몰랐다.
멍하니 선 왕자비를 대신하여 경비대원이 드래곤의 등에 안장을 올렸다. 그 무게와 크기가 어마어마해서, 디딤이 될 사다리를 양방에서 타고 올라야만 했다. 목덜미 비늘을 곤두세운 가브리엘을, 아사야가 손짓으로 달랬다.
“걱정하지 마. 너랑 함께 날 수 있게, 왕녀님이 보내오신 거야.”
그렇게 말하면서도 아사야는 긴장감에 떨고 있었다. 평생 살며 타 본 것이라고는 거대한 외형에 푹신한 쿠션이 구비된 마차뿐인 그녀였다. 말이라면 있기는 하였지만, 그 귀하고 비싼 백마 위에 직접 오른 적은 없었다. 공작가의 아가씨께서는 승마 한번 해 본 경험이 없을 지경으로 어리숙하고 곱게 자랐다.
블란테 왕녀가 안장을, 그것도 드래곤에게 채울 안장을 선물할 적에는 그런 사정까지는 몰랐을 것이었다. 누가 예상이나 했을까, 공작가 아가씨께서 귀족의 기본 중의 하나인 승마조차 못하신다는 것을…… 그리 생각하니 아사야의 속에서, 작은 불씨가 일었다.
‘내가 하고 싶지 않아서 안 한 게 아니야.’
너는 약하니까, 너는 여자니까, 매일같이 아프니까, 찬 공기를 쐬면 안 되니까…… 그런 이유들이 아사야를 이토록 곱기만 한 꽃으로 만들었다.
‘나도 사실은, 하고 싶었어.’
마른침을 꼴깍 넘기며 아사야는 남몰래 주먹을 쥐었다. 그런 아사야의 작은 손을 가브리엘의 눈동자가 바라보고 있었다. 이내 아사야는 두 눈썹을 강아지처럼 내렸다.
‘그런데…… 아버지랑 가디엘 말이 다 맞으면 어쩌지?’
나젤탄의 왕녀가 안장을 선물했다고 해서 반드시 그 안장을 써야만 하는 건 아니었다. 실용성을 제쳐 두더라도 그 안장에는 이미 충분한 의미가 담겨 있었다. 굳이 가브리엘의 등에 타지 않아도, 두렵도록 넓게만 보이는 하늘로 비행하지 않아도, 아사야는 가브리엘의 주인이었고 누구도 그 사실을 부정할 순 없었다.
“공주님.”
비아탄의 목소리가 아사야의 생각을 끊어 놓았다.
“예? 아…….”
고개를 들어 아사야는 덩치에 꼭 맞는 안장을 단단히 채운 가브리엘을 바라봤다. 시커멓고 탄탄한 목과 등허리를 두르는 가죽은 짙은 갈색이었다. 두꺼운 고삐에서는 윤이 흘렀다.
용기를 내어, 아사야는 조심조심 사다리를 올랐다. 사실상 승마 바지라는 것을 차려입는 것조차 처음인 그녀였다. 허벅지와 엉덩이를 딱 맞게 조이는 바지의 감촉이 낯설어, 사다리 열두 칸을 오르는 데에만 한참의 시간이 걸렸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염려 어린 얼굴로, 비아탄이 물었다. 아사야는 처음으로 키 큰 기사를 위에서 내려다보았다.
“……사실 모르겠어요.”
비아탄에게는 마법 같은 힘이 하나 있었다. 그조차도 모르는 듯한 그 힘은 바로, 아사야로 하여금 솔직한 말을 끌어내는 것이었다. 성안에, 아사야가 진심 어린 불안을 드러낼 기사가 그뿐이었다.
왕자비의 말에 비아탄은 입을 다문 채 드래곤의 알 수 없는 눈동자를, 그리고 튼튼한 안장을 번갈아 살폈다.
“음…….”
아사야는 차라리 그가 ‘내키지 않으시거든 지금이라도 내려오시라’ 말하기를 바랐다. ‘사실 누구도 해 본 적이 없는 일인데, 공주님께서 하실 것 없다’고 말했으면 싶었다. 그렇게만 해 준다면 가브리엘의 등에 오르지 못하는 이유가 제가 겁쟁이어서가 아니라, ‘비아탄 경이 너무 걱정해서’라고 변명할 수 있었다.
마침내 비아탄이 입을 열었다.
“그만두신다 하셔도 이해합니다. 장정인 남자들도 못 할 일입니다.”
그런데 이상했다. 제가 듣기 바랐던 말을 해 준 비아탄 아멕에게, 아사야는 난데없이 불퉁해졌다.
“나는 남자가 아니에요.”
저조차도 몰랐던 불씨가 속에서 화르륵, 소리를 내며 타올랐다. 흉곽 안에서 빠르게 번져 가는 불씨가 아사야를 움직이게 만들었다. 후들거리는 다리로 올라선 사다리에서, 아사야는 훌쩍 뛰어내리다시피 하며 가브리엘의 등에 안착했다. 안장의 너비는 아사야의 엉덩이에 꼭 맞았다. 남자라면 좁아서 못 탈 자리였다.
경비대원들이 아사야의 신에 등자의 벨트를 묶어 고정시켰다. 왕자비께서 낙하하지 않도록 아주 단단히 장비를 마치자, 비아탄은 이마를 긁으며 두 걸음 뒤로 물러섰다.
“공주님. 신호를 드리면…….”
기사가 입을 열었고,
“가자, 가브리엘.”
아사야가 말했다.
“멀리 데려가 줘.”
그러자 드래곤이 날개를 펼쳤다. 시커멓고 거대한 날갯죽지에 지레 겁먹은 경비대원 두셋이 뒤로 나자빠졌다.
눈 깜짝할 사이에, 왕자비를 태운 드래곤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성내의 정원이나 두어 바퀴 비행할 줄 알았건만, 제 고삐를 아사야에게 맡긴 채 가브리엘은 날갯짓 서너 번으로 아주 높이 떠올랐다.
이내 아사야 세일산과 그녀의 드래곤은 성벽을 지나쳤다. 믿기지 않을 정도로 높이 나는 왕자비를, 비아탄은 입을 벌린 채 올려다보았다.
.*. *. *. *. *. *.
시원한 바람이 아사야의 두 뺨을 쓸었다. 찬 공기를 쐬는 것만으로도 아버지의 걱정을 사던 아가씨였다. 드래곤의 등을 타고 하늘을 나는 것을 알았더라면, 아버지께선 기함을 하셨으리라.
가브리엘의 날갯짓은 아사야를 제외한 모든 것을 밀어내는 듯했다. 근방의 공기, 세일산 왕가의 높다란 성, 대륙의 땅덩어리가 날갯짓 한 번에 더 멀리, 더 작게 밀려났다. 드래곤은 쏜살처럼 빠르게, 깃털처럼 유연하게 하늘을 가로질렀다.
멀찍이 내려다보이는 광경에 아사야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웅장한 왕성은 단면도를 펼친 것처럼 납작해 보였고 제가 출발한 승강장은 너무 작아 보이지도 않았다. 저 아래에 선 기사들에게도 아사야는 까만 점처럼 작게 보일 것이었다.
떨리는 손으로 아사야는 고삐 끈을 목숨줄인 양 붙잡아 쥐었다.
“헉…….”
아사야의 입에서 작은 신음이 나왔다.
그러자 그들을 덮치던 바람이 조금은 느릿해졌다. 가브리엘이 속도를 늦춘 것이었다. 같은 높이에서 그는 날개를 펼친 채 바람을 타고 수평으로 느긋하게 움직였다.
숨을 헐떡거리며 아사야는 고삐를 놓아 버렸다. 그러고는 납작하게 엎드려, 가브리엘의 목을 끌어안았다. 드래곤의 단단한 비늘의 온도는 서늘했고, 아사야는 그에 반해 부드럽고 따듯하기만 했다.
놀란 심장이 쿵쾅거리며 달음박질했다. 왕성이 그녀의 발아래에 있었다. 이보다 더 높이 날기란 아찔하기 짝이 없는 도전이었다.
누구도 그녀에게 모험을 요구하지 않았는데, 억지로 모험에 나서다니 이상한 일이었다.
‘아무도 나한테…… 이런 기대는 걸지 않았어.’
그러나 마음 한편으로는, 아사야는 그 사실이 늘 못마땅했다. 남편에게도, 가디엘에게도, 심지어는 아버지에게서도 그녀는 아내로서, 누이로서, 딸로서 어떤 모험도 허락받지 못했었다.
밑이 아닌 위를 올려다보기 위해, 아사야는 후들거리는 상체를 억지로 일으켰다. 그리고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아사야가 소리쳤다.
“더…… 더 높이 데려가 줘.”
신호를 기다렸다는 듯 가브리엘이 힘차게 날갯짓했다. 작게 비명을 지르며 아사야는 놓쳤던 고삐를 움켜쥐었다. 떨리는 마음에 흘린 눈물을 바람이 훔쳤다. 눈물방울을 떨구어 가며 아사야는 두 눈을 떴다.
그러자 온 세상이 백색이었다. 기분 좋게 차가운 물방울이 아사야의 옷깃을 적셨다. 그녀는 구름 속에 있었다.
“아…….”
작은 감탄성을 내뱉으며 아사야는 깊게 호흡했다. 단단히 막혀 있던 숨통이 확 트였다. 시원한 바람이 훅 하고 흉곽을 뚫고 지나는 듯했다. 물 위로 목을 뻗는 거북이처럼 아사야는 고개를 치켜들었다. 바람을 만끽하는 순간 두려움은 없었다. 난생처음 만끽하는 자유였다. 눈물이 났다.
“가브리엘……, 꺅!”
불쑥, 드래곤이 가볍게 몸을 흔들었다. 아사야는 고삐를 세게 움켜쥐며 놀란 비명을 내질렀다.
또 한 번 가브리엘이 좌측으로 몸을 기울이며 날개를 곧게 폈다. 그를 따라 아사야의 몸도 왼편으로 기울었다.
“꺄악!”
흰 구름을 헤치며 아사야의 상체가 이슬비를 맞은 것처럼 젖어 들었다. 되는대로 아사야는 소리를 질러 댔다. 놀란 비명에 이내 웃음이 섞였다.
“차가워, 가브리엘!”
웃음을 터뜨리며 소리를 칠 적에 아사야는 어린아이였다. 열 살 소녀처럼 눈물을 흘리고, 비명을 지르고 웃어 가며 아사야는 가브리엘의 목에 매달렸다.
눈 깜짝할 사이에 그들은 구름 위에 올랐다. 시야를 가득 채우던 대륙의 모습은 간데없었다. 푸른 하늘과 백색 구름만이 존재하는 세상이었다.
작은 이명에 아사야는 눈살을 찌푸렸다. 물 안에 잠긴 것처럼 귓속이 울렸고 호흡이 가팠다. 흔들거리는 아사야를 등에 태운 채 가브리엘은 구름이 만든 길, 천평선 위로 올랐다.
의식이 흐려지는 순간, 아사야의 눈앞에 익숙한 삽화의 풍경이 펼쳐졌다. 아버지의 서재를 드나들며 지겨워질 때까지 읽은 책 속에 그려진 삽화, 구름 위에 뜬 섬의 모습.
“너도 천공섬에 날아가 봤니?”
또박또박한 목소리의 환청이 들리는 듯했다. 어린 날, 아사야 아졸의 목소리였다.
“아주 나이 많은 마법사 드래곤이, 아주아주 옛날에, 하늘로 섬을 띄워 놓았대…….”
드래곤의 발이 땅덩어리에 닿는 순간, 아사야는 의식을 잃었다.
.*. *. *. *. *. *.
아주 잠깐의 시간이 흐른 듯했다. 그러나 근방의 풍경은 전혀 달랐다.
하얀 구름과 푸른 하늘, 가브리엘의 검은 뒷모습만을 기억하며 아사야가 눈을 떴다. 알갱이가 굵은 흙이 그녀의 승마 바지에 붙어 있었고 손바닥엔 풀이 닿았다.
“가브리엘…….”
멍하니, 아사야는 상체를 일으켰다. 우람한 밀림 숲이 그녀를 맞이했다. 멀리 지평선이 보였고, 거대한 바위산이 보였다. 하늘에서 언제 내려온 것인지 알지 못해 아사야는 어리둥절해졌다.
‘혹시 가브리엘이 길을 잃었나? ……왕성이 아니라 다른 곳에 내려 준 걸까?’
그러나 아사야가 읽은 책의 어디에도, 바위산을 중심으로 펼쳐진 연두색 밀림지대는 없었다. 기온은 껴입은 바지가 답답하게 느껴질 정도로 따뜻했고 근방의 나무들은 빽빽하기가 벽 같았다.
그녀가 알기로, 적어도 내륙 내에는 이러한 지대가 없었다.
비틀거리며 아사야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제 주변을 한 바퀴 돌며 훑어보았다. 겉이 벗겨진 백색 나무 기둥은 낯설기 짝이 없었고 굵은 흙을 뚫고 자란 꽃줄기는 강인한 생명력을 가진 양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짙은 분홍색의 꽃봉오리를 향해 아사야는 천천히 다가갔다.
‘처음 보는 꽃이야…….’
검지 끝으로 살짝 건드리자 꽃봉오리가 작게 폭발하는 양 활짝 벌어졌다. 꽃잎 속에 감춰져 있던 은색 꽃가루가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사방을 둘러싼 모든 것이 낯설었다. 아사야는 손끝에 묻은 꽃가루의, 제 발에 닿는 풀의, 근방에 즐비한 나무의 이름을 알 수 없었다. 완벽한 외지에 도착한 것이었다.
“가…… 가브리엘.”
드래곤의 흔적을 찾아 아사야는 근방을 두리번거렸다. 다행히, 거대한 드래곤의 발자국이 그녀 주변에 즐비했다. 기절한 저를 풀밭 위에 내려놓고 사방을 뱅뱅 돈 흔적이었다.
“가브리엘?”
드래곤이 가까이 있을 것으로 믿고, 아사야가 소리쳤다.
“어디 있어?”
갑작스레 구름 위로 오른 후유증으로 인해 빠졌던 힘도 차츰 돌아오는 듯했다. 오히려 아사야는 전보다 건강해진 기분이었다. 용의 큼직한 발자국을 따라 내달릴 적에, 이런 힘이 제게 있었던가 의문스러웠다.
발밑의 땅도 제 몸도 이상하게 가벼웠다. 호흡 역시 가뿐하기 짝이 없었다.
“가브리엘!”
한참을 달린 끝에 아사야는 드래곤의 안장을 찾았다. 가브리엘의 발자국도 거기서 뚝 끊겨 있었다. 그러나 가브리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고삐 풀린 안장만이 주인을 잃은 채 덩그러니 남겨져 있었다.
드래곤이 홀로 어떻게 안장을 풀어낸 것인지, 발자국은 어째서 간데없이 사라진 건지, 모든 것이 의문이었다.
당혹스러운 마음에 아사야는 고삐 줄을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더듬거리며 겉면을 쓸어 보았다. 그런들 사라진 드래곤이 나타나진 않았다.
주어진 힌트만으로는 어떤 가정도 떠올리기 어려웠다. 거대한 안장 위에 털썩 주저앉아 아사야는 깊은 숨을 들이쉬었다.
‘괜찮아, 침착해……. 침착하자.’
그렇게 불안감을 떨치길 한참, 그녀의 눈에 희미한 발자국이 들어왔다.
자리에서 일어나 아사야는 그 자국 위에 섰다. 드래곤의 발자국은 아니었다. 흙은 팬 모양도 크기도 달랐다. 길쭉하고 넓은 자국 위에 아사야는 제 발을 올려 보았다. 그녀의 부츠는 파인 자국에 비해 훨씬 작았다.
‘사람…… 사람 발자국이야.’
그 발자국은 꺾여 쓰러진 나무를 지나 수풀 너머로 이어졌다. 무엇에 홀린 사람처럼 아사야는 한 발, 두 발, 저보다 보폭이 넓은 이의 발자국에 제 발을 가져다 대며 따라 걷기 시작했다.
그렇게 흰 껍질을 한 나무와 분홍의 꽃과 연두색 넝쿨을 지나자 시야가 탁 트였다. 나무 한 그루 없이 넓은 초원에 노란 꽃이 가득 피어 있었다. 초원의 중간중간에 듬성듬성, 언덕이 솟아 있었다.
드러난 풍경에 감탄하며 발을 뻗다가 아사야는 우뚝 멈췄다. 그러고는 깨달았다. 그녀 눈앞에 펼쳐진 수많은 언덕들은 죄 내부가 텅 빈 조형물이었다. 넝쿨과 꽃줄기만이 제 형태를 유지하며 남아 있었고, 그 형태는 거대한 용이었다.
죽은 드래곤의 백골은 남지 않고, 사체를 뒤덮었던 식물만이 고스란히 자란 것이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언덕이 수십 개였다.
금방이라도 날개를 펴며 일어설 것 같은, 풀과 꽃으로 이루어진 드래곤의 형상을 아사야는 멍하니 바라봤다.
“…….”
두어 번 입을 달싹거릴 뿐 아사야는 움직이지 못했다. 평화롭기 짝이 없는 풍경은 짐짓 아름답기까지 했다. 슬프게 예쁜 묘지였다.
이내 그녀는 제가 어디에 왔는지도 기억해 냈다.
구름 위에 뜬 섬, 용의 고향, 용의 무덤. 천공섬이었다.
그러나 감탄을 할 여유가 아사야에겐 없었다. 그녀는 거대한 용의 조형 아래에 선, 낯선 남자를 발견했다. 본능적으로 아사야는 그가 제가 쫓아온 발자국의 주인임을 알았다.
시선을 느낄 줄 아는 존재처럼 남자가 불현듯 뒤를 돌아보았다. 멀리에서도 아사야는 그가 저를 발견했단 걸 깨달았다.
놀란 마음에 아사야는 두어 걸음 뒷걸음질 했다. 이 섬에 저와 가브리엘이 아닌 다른 이가 있다는 걸 믿을 수 없었고, 낯선 남자가 저에게로 다가오매 소름이 돋았다. 놀란 마음에 아사야는 뒤돌았다.
그러고는 왔던 길을 내달리기 시작했다.
“기다려!”
그가 외쳤다. 아사야가 들어 본 그 누구의 음성보다 낮은 목소리였다.
“아사야!”
그가 제 이름을 불렀다. 당황한 순간 아사야는 뒤를 돌아보았다가, 나무줄기에 걸려 넘어지고야 말았다. 그러나 생채기는 나지 않았다. 드넓은 초원의 풀잎들이 아사야의 몸을 받쳤다.
“누, 누구…….”
다행히도 그는 더 이상 아사야에게 다가오지 않았다. 그녀의 겁먹은 얼굴을 확인한 것이었다.
놀란 눈을 크게 뜬 채 아사야는 낯선 남자를 살폈다. 그는 피부색이 짙었고 머리칼은 그보다 더 짙은 시커먼 흑발이었다. 이마는 깎아 만든 석상들이 으레 그렇듯 뻣뻣한 직선이었다. 눈썹 뼈가 도드라진 탓에 음영이 눈두덩이 전체에 졌고, 콧대는 높고 길었다. 꽉 닫힌 입술은 윗입술은 가늘고 아랫입술은 두툼했다.
침묵하는 그의 뺨에 옴폭 팬 근육 선이 생겼다. 예리한 대나무 칼로 고심하여 한 번에 깎아낸 듯 딱딱한 턱이었다.
입을 열어,
“아사야.”
그가 말했다.
“도망가지 마.”
휘청거리는 다리를 일으키며, 아사야는 자리에 섰다. 그럼에도 그의 눈높이는 그녀보다 훨씬 위에 머물렀다. 그는 아사야가 봐 온 어느 기사보다 키가 컸다. 신장 74델랑(약 190cm)에 육박하는 비아탄 아멕보다 큰 것 같았다.
그런 남자를 눈앞에 두고 도망치지 않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혼자인 아사야에게는 무기도 방패도 없었다. 물론 그라고 해서 무기를 쥔 것은 아니었지만, 단단히 각이 진 어깨며 커다란 손을 보면 무기 따위 없이도 저 정도는 제압할 성싶었다.
살펴보면 무기만 없는 게 아니었다. 그는 신발도 신지 않은 채였다. 몸에는 셔츠와 바지를 걸치고는 있었지만 제 것이 아닌 듯 맞지 않는 크기였다.
두 벌 모두 심각하게 해진 탓에 빛깔을 알아보기도 힘든 수준이었다. 드래곤의 무덤을 뒤져 꺼내 입은 옷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니 두려움이 더욱 커졌다.
아사야가 한 발 뒤로 물러서자 그의 눈썹이 구겨졌다. 미간을 찡그리며 그는 두 발 그녀에게 다가왔다. 당황한 아사야는 두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러자 그가 세 걸음 그녀에게 다가왔다.
손을 들어, 아사야는 허공을 가로막는 시늉했다. 그러자 성큼성큼 다가오던 남자의 걸음이 멈췄다.
“…….”
그래도 눈을 마주치기엔 충분한 거리였다.
아사야는 남자의 까맣게 짙은 속눈썹과 그 속에 보석처럼 박힌 눈동자를 바라봤다. 짙은 보라색 눈동자 속에 제 모습이 반사되어 비쳤다.
아는 눈이었다.
“가브리엘……?”
놀란 숨을 들이켜며 아사야가 외쳤다.
“가브리엘……, 너야?”
그러자 친숙하면서 낯선 이가 한 번도 보여 준 적 없는 모습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들려준 적 없던 목소리로 답했다.
“그래.”
가브리엘이 그녀 앞에 섰다.
“마력이…… 다시 돌아온 거야?”
떨리는 목소리가 아사야의 입 밖으로 빠져나왔다.
“남은 잔해를 긁어모은 수준이지만, 폴리모프는 가능해.”
가브리엘이 답했다.
몇 번이고 상상해 온 풍경이었다. 그녀의 드래곤이 사람의 모습으로 폴리모프를 하고, 기다긴 혼잣말에 마침내 대답을 들려주는 일.
그러나 막상 사람의 모습인 가브리엘을 마주하자니, 아사야는 제대로 말을 꾸릴 수 없게 됐다. 이전의 편안한 감정들은 어디로 가 버린 건지 긴장이 되어 손바닥에 땀이 찼다. 심장이 떨려 쿵쾅거리는 박동소리가 제 귓가에 들리는 듯했다.
홧홧한 열기에 아사야는 더워졌다. 얼굴은 발갛게 달아올랐고 눈가엔 눈물이 맺혔다.
‘어떡해…….’
그녀의 가브리엘은 드래곤일 적에도, 사람일 적에도 걸음걸이가 빨랐다. 넓은 보폭으로 두 발짝 만에 그는 아사야의 코앞에 도달했다. 그러고는 그녀의 이마에 제 이마를 가져다 붙였다.
검은 용과 몇 번이고 해 온 동작이었다. 그러나 지금만큼은 가브리엘은 검은 용이 아니었다. 아사야가 만나 본 적 없는 얼굴을 지닌 사람이었고, 남자였다.
마음이 떨리는 것이 긴장감 때문인지 설렘 때문인지 아사야는 분간할 수 없었다. 난생처음 느끼는 감정에 어떤 이름을 붙여야 좋을까도 알지 못했다. 온 세상이 그와 저를 중심으로 일그러져 말려 들어가는 것 같았다.
울먹거리며 얼어붙은 아사야의 얼굴을, 가브리엘은 의아하다는 듯 눈동자에 담았다. 이내 그는 높은 콧대를 아사야의 콧잔등에 문질렀다. 두 입술이 무서울 정도로 가까웠다.
긴장한 손끝을 감추기 위해 아사야는 등 뒤로 제 두 손을 숨겨야 했다.
그리고 천천히, 가브리엘이 손을 들었다. 굳은살이 단단히 박인 손끝으로 그는 아사야의 축축한 눈가를 닦아 주었다.
붉어진 얼굴을 숙이며, 아사야가 말했다.
“내……, 내가 지어 준 이름……, 마음에 들어? 항상 그게 궁금했어.”
“아주 마음에 들어.”
가브리엘의 답은 무척 빨랐다.
“내가 계속 떠들어 대서…… 듣기 싫진 않았어?”
“아주 듣기 좋았어.”
“내가 널 친구라고 불렀을 때……, 너도 그렇게 생각했어?”
“그래, 그렇게 생각했어.”
벅찬 숨을 몰아쉬며 아사야는 입술을 떨었다. 그 표정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가브리엘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연회 날…… 나 때문에 돌아온 거야?”
마침내 아사야가 물었고,
“그래.”
가브리엘이 즉답했다.
“왜?”
가브리엘이 닦아 준 것이 무색하게, 아사야의 뺨이 눈물로 젖었다.
“왜 그랬어?”
울음을 터뜨리며, 아사야는 가브리엘의 단단한 가슴을 밀쳤다. 가브리엘의 눈이 커졌다.
제 입으로 돌아오라고 말한 왕자비였다. 그러나 아사야에겐 확신이 없었다. 하늘 위로 자유로이 날아오르는 가브리엘을 본 순간, 그가 저를 버리고 떠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었다.
저는 세간의 닻에 발목이 묶인 인간이었지만 가브리엘은 그렇지 않았다. 가브리엘에겐 피로 묶인 가족도, 지켜야 할 시녀들도, 계약으로 맺어진 배우자도 없었다.
갑판을 떠나 푸른 하늘을 가로지르는 가브리엘은 가볍고 자유로웠다. 그를 바라보며 아사야는 웃음 지었다. 만일 드래곤이 영원히 저를 떠난다 할지라도 원망하지 않으리라, 그런 다짐으로 지어 보인 미소였다.
구름 위를 오가는 드래곤에게 있어 저라는 존재가 닻이라고는,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왜 그랬어, 가브리엘. 그냥 날아가 버리지!”
원망 어린 아사야의 주먹이 가브리엘의 가슴과 어깨를 되는대로 밀쳤다.
“멀리 날아가 떠나 버리지…….”
그러나 그녀의 희고 조그만 손은 드래곤의 무엇도 상처 입히지 못했다. 허무할 정도로 약한 두 손을, 가브리엘이 만류했다.
아사야의 주먹은 가브리엘의 큰 손 안에 쉽게 붙들렸다.
“너도 날 보겠다고 멍청한 남자와 결혼했으니까.”
가브리엘이 말했다. 놀라울 정도로 듣기 좋은 목소리였다. 꿈을 꾸는 건 아닐까, 아사야는 떨리는 눈동자로 가브리엘을 바라보았다.
“아사야. 내게 기다림은 아무것도 아니야……. 내 삶에 남은 시간은 앞으로도 아주 많을 테니.”
그렇게, 드래곤이 맹세했다.
“내 시간은 네 거야, 우리의 약속이 지켜지는 한.”
그들 간에 약속이란 하나뿐이었다. 다시 너를 만나, 되찾을 것이란 약속. 아사야 아졸은 아사야 세일산이 됨으로써 그 약속을 지켰다. 가브리엘로부터 그 보답을 받을 것이라곤 생각한 적 없었다.
“다시…….”
아사야가 입을 벙긋거렸다.
“다시 불러 줄래? 내 이름…….”
반 발짝, 그녀는 가브리엘에게 다가갔다. 둘의 사이는 완전히 좁혀졌다. 팔을 올려 아사야는 가브리엘의, 낯설고도 친숙한 몸을 끌어안았다.
석상처럼 단단하고 나무처럼 흉터 많은 허리에 두 팔을 두르자, 제 것인지 그의 것인지 모를 심장 소리가 쿵쾅거리며 귀를 때렸다.
“아사야.”
그러자 완벽한 안정감이 아사야를 점령했다. 두 팔에 힘이 풀리고 숨결은 편안해졌다. 가브리엘의 넓은 품은 믿을 수 없게 탄탄하고 웃음이 나게 포근했다.
“가브리엘.”
아사야가 부르면,
“그래.”
그가 대답을 들려주었다.
“가브리엘.”
돌아오는 목소리가 좋아 아사야는 두어 번은 더,
“그래.”
그의 덤덤한 대꾸를 들었다.
어린아이처럼 기뻐하는 아사야의 어깨를 안아 주며 가브리엘은 눈을 감았다. 시간이 얼마 없었다. 등줄기 피부 위로 뜨거운 열기가 돋고 있었다. 변모한 피부 밑에서 검은 비늘이 꿈틀거렸다.
그가 지닌 마력으로는 이것이 고작이었다. 아사야에게 제 얼굴을 보여 주고, 목소리를 들려주고, 아주 잠깐 손을 잡는 것이.
그가 먼저 포옹을 풀었다. 가브리엘의 손에 두 손을 맡긴 채 아사야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제, 거칠 뿐인 큰 손을 소중한 양 꼭 쥐는 어린 인간을 가브리엘은 내려다봤다.
“아사야.”
조용히, 가브리엘이 목소리를 냈다.
“이제 돌아가자.”
침착한 척 행세하고 싶었으나 잘 되지 않았다. 멀쩡하던 목소리는 이내 끔찍하게 갈라졌다. 목구멍이 깊은 터널이라도 되어, 그것을 뚫고 올라오기라도 하는 소리였다.
입을 꽉 다문 채 가브리엘은 아사야의 눈빛을 살폈다. 아사야 역시 그의 변화를 알아차렸다. 그녀는 입을 열고 무어라 물으려다, 관두었다.
그저 고개를 두어 번 끄덕거릴 뿐이었다.
“괜찮아, 가브리엘.”
그러고는 놀랍도록 보드라운 손바닥을 가브리엘의 뺨에 가져다 댔다. 피부 위로 돋아나는 비늘 끝이 작은 바늘처럼 아사야의 손금을 건드렸다. 흰자위가 시커멓게 물든 채 가브리엘은 앓는 듯한 신음을 흘렸다.
눈동자를 시작으로 눈썹 뼈 위를 비늘이 뒤덮기 시작했다. 성치 못한 고개를 숙여 아사야의 눈길을 피하려 했으나, 좀처럼 잘 되지 않았다. 아사야의 두 손이 가브리엘의 뺨을 감싸고 놓지 않았다.
멀쩡한 모습으로, 평범한 친구처럼, 덤덤하게 함께 있고 싶었다. 그마저도 이룰 수 없는 희망인 듯했다.
절망에 잠긴 가브리엘의 뺨에 아사야의 입술이 닿았다. 주인에게 마음을 연 고슴도치처럼, 가브리엘의 비늘은 아사야를 해치지 않았다. 사람도 용도 아닌 채, 변치 않으려 버티는 이종족을 아사야가 달랬다.
“괜찮아, 돌아가자.”
낮은 신음을 내며 가브리엘이 그녀로부터 서너 발짝 떨어졌다.
‘이 무기력감에 적응할 날은 영원히 오지 않겠지.’
가브리엘은 이를 악물었다. 한순간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반항하길 포기하자 폴리모프는 제멋대로 풀렸다. 블랙 드래곤의 검은 날개가 까드득 까드득, 마귀 발자국 같은 소리를 내며 돋아났다.
아사야 아졸, 이제는 아사야 세일산이 된 여자가 만일 저를 특이한 괴물 정도로 취급했더라면, 그는 절대로 그녀 곁에 남지 않았을 것이었다.
그러나,
“이리 와.”
아사야는 시커먼 비늘로 뒤덮인 마물을 향해 두 팔을 뻗어 보였다.
그녀는 순진하고 어린 인간이었다. 정이 많고 다정한 여자였다. 아사야의 품으로 한 발 두 발 다가서며, 가브리엘은 스스로를 시커멓고 음산하기 이를 데 없는 악마처럼 여겼다.
드래곤의 커다란 머리를 아사야는 품에 안았다. 그녀의 손바닥이 어떤 위로라도 건네는 양 가브리엘의 콧잔등을 쓸었다. 사렙탄에게 받는 총애와 그녀의 입지를 이용할 생각도 수천 번은 해본 괴물에게, 지나친 친절이었다.
난생처음으로 가브리엘은 죄책감을 느꼈다.
마도구를 훔치기를 종용하고 제 마력을 돌려내게끔 구슬리면 어떨까 고민하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그를 가둔 하잘것없는 껍데기와 구속에서 벗어나, 떠나가 살기를 몇 번이고 꿈꿨었다.
이후 아사야에게 닥쳐올 불행을 모른 척할 수 있다면 말이었다.
그러나 블랙 드래곤의 악랄하고 음습한 마음으로도 도무지 그럴 수는 없었다. 그에게 있어 아사야 세일산은 여전히 아사야 아졸이었다.
아사야 아졸이라는 인간은 어린 소녀였다. 용감하고 정 많고 수다스러운 작은 새였다.
그는 아사야 아졸을 좋아했다. 애정이 그를 패배하게 만들었다. 그는 아사야를 이용할 수도, 배신할 수도 없었다.
가만히, 가브리엘은 아사야의 마른 배에 제 고개를 문질렀다.
보드라운 목소리로 아사야가 말했다.
“함께 돌아가자.”
그런 아사야와 함께일 적에 가브리엘에게 기꺼운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아사야 세일산의 일생을 무던히 지켜보는 일, 지켜 주는 일.
서로 간에 대화가 끊긴 순간 공교롭게도 그들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내가 지켜 줄게, 가브리엘.’
속이 빈 드래곤의 무덤들을, 아사야는 빤히 노려보았다.
‘누구도 널 다치게 할 수 없어.’
그녀에겐 권력이 필요했다, 그 어느 때보다 간절하게.
.*. *. *. *. *. *.
바야흐로 가을, 축복의 계절이었다.
본도 세일산은 블란테 화이트를 아내로 맞아 부부의 연을 이뤘다. 새로운 가족을 위하여 아사야는 블란테 세일산에게 백색 망아지를 선물했다. 그녀의 백마가 낳은 새끼 말이었다.
특별한 선물에는 두 가지 의미가 담겼다. 제 말의 새끼를 선물하니 가족의 연을 그렇게 깊게 이루자는 의미와, 블란테의 처녀적 별명인 ‘나젤탄의 백마’를 기억하겠노란 의미였다.
블란테는 아사야의 선물을 매우 마음에 들어 했다. 정식으로 첫째 왕자비가 되어 성내에 침실을 갖게 된 뒤에도, 그녀는 아사야를 자주 찾았다. 두 왕자비가 잦은 모임을 갖다 보니 응접실도 자연히 그들의 공간이 됐다.
귀족들은 그녀들의 친분을 위선으로 생각했다. 블란테 세일산에게는 ‘둘째 왕자비를 얕보는 거만한 여자’라는 꼬리표가 따라붙었다. 아사야 세일산에게 붙는 꼬리표도 만만치는 않았다.
‘왕께서 첫째 왕자비는 공주라 부르질 않으시니까, 제가 진짜 공주라도 되는 줄 아는 모양이지?’
‘저만 총애받는 줄 알고 주제넘기는.’
저를 스치는 눈빛들이 감춘 속내를, 아사야는 이제 알았다. 블란테 세일산과 친분을 쌓은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아사야에게는, 세상을 읽는 방법을 알려 줄 선생님이 필요했다.
남들이 무어라 질투하고 욕을 하건 간에, 아사야 세일산에게 선물할 성의 준공일은 빠르게 다가왔다. 실력 있는 고위 마법사들이 공사에 참여한 덕분이었다.
뾰족하던 뼈대에 돌이 얹어지고, 조각사들과 화가들이 오고 가기 시작할 무렵 그 성은 비단 건물이 아닌 예술 작품이었다. 완성된 성에 주인의 이름이 붙기만을 모두가 기대에 차 기다렸다.
그러나 사렙탄은 완공된 성을 보름은 더 썩혀 두었다. 보름의 시간 동안 아사야는 침착했고, 야베스 세일산은 어깨에 힘이 들어간 채 어느 때보다 기쁜 듯 보였다.
완공일 이후 16일이 지난 뒤에야, 사렙탄 세일산이 둘째 왕자비를 성내 도서관으로 호출했다. 도서관으로 통하는 계단을 오르면서 아사야는 비아탄 아멕의 호위를 받았다. 설명을 듣지 않아도 그녀는 오늘 폐하께서 제게 성을 선물하려 함을 알았다.
아름다운 성의 화려한 파사드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최적의 장소, 도서관 테라스에 자리 마련한 채 사렙탄은 심드렁한 얼굴이었다.
‘아주 비싸고 예쁜 것을 너무 일찍 주게 되는군. 바보짓이야, 바보짓.’
탐탁잖게 중얼거리던 주군을, 비아탄은 알았다.
성을 주기가 아까워서는 아니었다. 바다 건너 나라에서 도착한 첫째 왕자비와도 잘 지내는 모습에 사렙탄이 아사야 세일산을 어찌나 예뻐하는지 몰랐다. 다만 왕께서는, 더 이상 받아 낼 선물이 없게 되면 어여쁜 ‘공주’가 저를 찾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고 귀여운 초대장을 열 장은 더 받았어야 하는 건데.’
주군께서 한참이나 심기 불편하신 탓에, 비아탄은 최악의 보름을 보내야 했다. 그러다 보니 그마저도, 완공된 성이 아사야 세일산의 소유로 넘어가는 오늘을 고대해 왔다.
무표정한 낯으로 성벽을 바라보는 왕의 옆으로, 아사야가 다가갔다.
“폐하.”
감동 어린 눈동자로 아사야는 아름다운 성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넓은 정원에는 꽃과 나무를 심을 자리만이 남아 있었다. 주인의 손길을 기다리는, 바로 그 ‘화단’이 발치에 내려다보였다.
기쁜 듯한 며느리로부터 사렙탄은 뻔한 인사말을 기대했다. 그의 아들 본도나 야베스, 조카딸들이 으레 그러듯이 정말 너무 감사하다며 유난스레 절을 올리고, 잊지 않겠노라 맹세를 하고는, 돌아서선 선물에 질릴 때까지는 왕을 찾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
그러나 한참 동안 기척만 내고 서 있을 뿐, 아사야로부턴 어떤 말도 들려오지 않았다. 의아하고 답답한 마음에 사렙탄은 제 옆자리를 홱 돌아보았다. 그러고는 눈에 띄게 놀랐다.
그가 아끼며 공주라 부르는 작은며느리는, 드레스 자락이 구겨지도록 테라스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공주야!”
놀란 사렙탄의 목소리는 거의 성난 사람의 것 같았다.
“도대체 왜……, 왜 우느냐?”
왕을 향해 무릎 꿇고 앉은 채 아사야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금색 눈동자 가득 눈물이 파도처럼 넘실거렸다. 기뻐할 줄 알았건만 아사야는 어느 때보다 슬픈 얼굴을 보여 주었다.
사렙탄의 입에서 절로 탄식이 흘러나왔다.
“왜 우느냐 물었다.”
왕이 두 번째 하문하자, 아사야가 떨리는 입술을 열었다. 둘째 왕자비의 입 밖으로 나온 말은 매우 뜻밖이었다.
“부탁이 있습니다, 폐하…….”
두 손을 공손히 모으고 고개를 숙이고서 아사야가 말했다.
“저 성을 영웅 베데르에게 헌정해 주세요.”
아사야 세일산이 던진 돌에, 잔잔하던 물살이 울렁거렸다.
아사야의 입에서 나온 ‘베데르’라는 이름의 파급력은 어느 때보다 컸다. 사렙탄 세일산의 눈앞이 컴컴해질 지경이었다.
친우를 그리워하며 그의 죽음에 책임을 느끼면서도 그는, 제 며느리이자 친우의 딸인 아사야에게 그 일을 언급한 적 없었다.
사렙탄 세일산이 비단 비열한 겁쟁이여서는 아니었다. 사렙탄 세일산이, 왕이기 때문이었다.
지상에 대적할 것 하나 없는 대륙의 왕이란 그런 자리였다. 무엇에 미안하더라도 미안하다 말해서는 안 됐고, 무엇에 슬프더라도 슬프다고 말해서는 안 됐다. 그의 입 밖으로 빠져나가는 작은 문장 하나하나가 결국은 정치였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왕은 누구에게 사과해선 안 됐다. 듣는 이가 제 슬하의 인척이건 귀족이건 왕의 사과는 예민한 문제였다.
정치적으로, 사과는 제 패배를 인정하는 행위였다.
사렙탄 세일산이 입 밖으로 ‘베데르의 죽음에 사과한다’ 말한다면 정치적으로, 그 말은 ‘베데르 아졸을 죽게 만든 전쟁의 책임을 지겠노라’는 메시지였다.
승리한 전쟁의 책임을 짊어질 왕은 어디에도 없었다. 영광이야 그의 몫이지만, 죽은 이의 넋두리는 그들을 잃은 가족들의 몫이었다.
“공주…….”
사렙탄의 컴컴해진 시야에는 아사야만이 보였다. 두 손을 모으고 선 채 고개 숙인 비아탄 아멕도, 테라스 너머 펼쳐진 아름다운 성도, 형편없이 떨리는 제 손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부탁드립니다, 폐하.”
베데르의 딸이 흘린 눈물만이 비칠 뿐이었다.
후드득, 곱게 모은 두 손 위로 떨어지는 눈물방울이 굵었다. 어린 병아리처럼 눈물을 떨구는 아사야는 그 순간만큼은 사렙탄의 며느리가 아니었다. 베데르의 딸, 아사야 아졸이었다.
사렙탄 세일산이 염려했던 아사야의 반응은 이렇지 않았었다. 베데르에 대한 그리움과 그 딸에 대한 미안함으로 심기가 복잡하던 때에, 사렙탄이 가장 염려한 것은 ‘베데르의 딸이 저를 원망하는 일’이었다.
그로서는 그 원망을 풀어 줄 수 없었다. 대륙의 왕으로서 그는 죽은 영웅의 딸에게, 말로써 사과를 전할 수 없으므로.
“일어나라.”
그러나 아사야가 무릎을 꿇고 부탁을 해 가며 요청해 온 것은 왕의 사과가 아니었다. 그 사실이 사렙탄의 머릿속을 백짓장으로 만들어 놓았다. 제 예측을 벗어난 아사야로 인해 그는 당황하며 크게 흔들렸다.
“일어서!”
사렙탄이 외쳤다. 이내 그는 바닥에 닿은 아사야의 무릎을 견디지 못해 두 팔을 뻗었다. 비아탄이 움찔 놀라며 만류하여도 소용없었다.
허둥지둥하며 왕의 손이 아사야의 어깨에 닿았다. 그는 억지로 아사야를 일으켜 세우려 쥐고 당겼다. 지켜야 할 체통 따위는 잊은 지 오래였다.
“네가 왜 내게 무릎을 꿇는단 말이냐! 네가, 네가 왜…….”
“폐하.”
눈을 붉히며 언성을 키우는 주군의 어깨를, 비아탄이 조심스레 잡아 쥐었다.
비아탄 아멕은 누구보다 사렙탄 세일산에 대해 잘 알았다. 그만큼 주군을 위하고, 아끼며, 동시에 객관적으로 읽어 내리는 이는 없을 것이었다.
비아탄은 사렙탄 세일산의 죄책감을 알았다. 왕으로서 사렙탄은 군사적으로, 그리고 정치적으로 옳은 판단을 내렸으나, 친우로서 베데르 아졸을 사지로 내몰았다.
“폐하께선 틀리지 않으셨습니다.”
비아탄은 그런 말로써 주군을 위로했었다.
“대륙을 지키고자 최선의 선택을 하신 겁니다. 왕좌가 그런 자리가 아닙니까. 내리시는 모든 판단이 늘 도덕적일 순 없는 일입니다.”
그런들, 사렙탄의 죄의식이 씻기진 않았다.
아사야 세일산은 그런 죄의식이 낳은 최대의 수혜자였다. 베데르의 딸이라는 이유로, 그녀에게 미안하다 말할 수 없음에 사렙탄은 아사야를 아꼈다.
그 애정이 베데르의 그림자에 기인한 것임을 알기에 비아탄은 내심, 그 그림자가 흐릿해진 뒤의 일을 걱정했다.
아사야 세일산의 입지는 현재가 최대라고 생각됐다. 언젠가 왕께서는 죽은 영웅을 추모하길 그만두실 것이었고, 그러면 영웅의 딸도 평범한 왕족 여인 중 하나가 될 것이었다. 왕위계승 서열 둘째 줄에 앉은 남편을 가진 작은며느리가 되어, 왕에게서 잊힐 것이었다.
그러나 오늘, 비아탄은 제 걱정이 헛되었음을 깨달았다.
“공주야…….”
아사야 세일산은 오늘 베데르의 그림자에서 벗어났다. 사렙탄 세일산의 두 무릎이 그녀를 따라 차가운 테라스 바닥에 떨어졌다.
어린 며느리를 일으키기를 포기하고, 왕은 그녀를 제 품에 끌어안았다.
“어찌 네가…… 네가 내게 그런 부탁을 해.”
주군의 눈물을 보고도 비아탄은 왕께서 울고 계심을 믿을 수 없었다.
“폐하.”
아사야의 여린 손이 왕의 어깨를 감쌌다.
“부디 저 성을…… 영웅 베데르에게 헌정하여 주세요. 그것으로 모두 마쳐요. 저를 보실 때마다 아버지를 그리워하시는 일도, 슬픔에 잠기는 일도 그만두세요.”
이내 그녀는 떨리는 왕의 등을 토닥이기 시작했다.
“제가 가꿀게요. 아버지께서 아끼시던 꽃으로…… 꾸미고 가꾸고 위로하겠어요.”
아사야의 말은 사렙탄에게 기적처럼 다가왔다. 사과하지 않고도 그는 용서를 받았다.
아사야는 먼저 눈물을 떨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고는 힘 빠진 왕의 손을 잡고 그를 일으켜 세워 주었다. 비틀거리며 사렙탄은, 저보다 머리 하나는 더 작은 아사야를 바라보았다.
“왕께서는 무릎을 아끼세요.”
천사처럼 어여쁜 목소리로 아사야가 속삭였다.
“……공주야.”
사렙탄이 그렇게 부르자,
“예, 폐하.”
눈물 젖은 얼굴로 웃어 보이는 아사야였다.
눈앞의 광경에 당황한 순간에도 비아탄은, 누군가 이 현장을 목격하고 있진 않은지 근방을 살폈다. 몸에 밴 습관이었다. 다행스럽게도 그들 주위에는 누구도 없었다. 텅 빈 성의 열린 창문만이 마치 뜬 눈처럼 커다랗게 보일 뿐이었다.
‘베데르 경, 도대체…… 보고 계십니까?’
두 손을 주먹으로 말아 쥔 채 비아탄은 불 꺼진 창문을 바라보았다.
‘따님께서 경과 똑같으십니다.’
전장에서 가디엘 아졸을 보았을 적에 비아탄은, 그만큼 베데르와 닮은 자식은 없을 줄로 알았었다. 그러나 아니었다.
아사야는 베데르의 현신이라 해도 믿길 정도로 그와 닮은 성품을 갖고 있었다. 약점을 알고 협박하는 방식이 아니라, 그것을 품고 위로하는 방식으로 왕을 대하는 모습을 보면.
이제 사렙탄 세일산에게 그의 며느리는 죽은 베데르의 딸이 아니었다. 그가 아끼며 사랑하는 어린 공주였다.
가을 밤, 왕성 내에 베데르의 이름을 딴 성이 생겼다. 성문의 열쇠는 자색 상자에 담겨 둘째 왕자비에게 전해졌다.
사렙탄 세일산의 왕명으로, 아사야 아졸에게 전함.
처녀적 이름으로 받은 선물로, 오롯이 그녀만의 성이었다.
.*. *. *. *. *. *.
영웅 베데르에게 헌정된 성의 이름과 성주가 발표된 순간, 모든 이들이 야베스 세일산의 반응만을 궁금해했다.
아사야 역시 그의 반응을 걱정했다. 그러나 걱정만을 하며 주저앉길 원하지는 않았다. 누구의 심기도 거스르지 않고서는 스스로를 지켜 낼 수 없음을, 이젠 알았다. 제가 엎어 놓은 물을 주워 담을 마음 또한 없었다.
왕의 선물이 도착하자마자 아사야는 빠르게 움직였다. 어떤 수작과 만류가 끼어들기 전에, 성주로서 성의 문을 열고 선물을 개봉해야 했다. ‘베데르 성’의 이름을 공식적으로 각인시킬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러기에 앞서 그녀는 용의 철문으로 먼저 향했다.
“엠마오.”
유모와 두 시녀는,
“세 사람은 성문 앞에 가 있어요.”
저와는 다른 경로로 보내 두었다. 만일 야베스의 전언을 든 하인이 찾아들거든, 길을 엇갈리게 만들 생각이었다.
남편의 부름을 받자면, 아내로서 아사야는 그가 있는 곳 어디로든 즉시 향해야만 했다. 그러나 그에 앞서, 천민 남자인 하인이 하수인을 거치지 않고 불쑥 왕가의 여인에게 말을 걸 순 없는 법이었다. 만에 하나 야베스 세일산이 사람을 보낸대도, 그는 유모와 시녀에게로 한 번은 헛걸음을 해야만 했다.
“알겠어요, 아가씨.”
유라와 사라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잠시간 서성거렸지만, 엠마오의 경우 눈치도 빨랐고 걸음도 빨랐다. 어린 시녀 둘을 끌고 그녀는 베데르 성으로 앞섰다.
아사야의 구두는 즉시 용의 철문으로 향했다. 시녀도 없이 걷는 왕자비를 왕실 기사 두 사람이 힐끔거리며 스쳐 지났다. 그러고는 몇 초 뒤에,
“어디로 향하십니까? 호위해 드리겠습니다.”
공주의 뒤로 따라붙었다.
철문 앞에 당도할 적에 아사야의 손에는 열쇠가 둘 있었다. 하나는 가브리엘을 가둔 철문을 여는 열쇠요, 야베스 세일산에게 받은 예물이었다. 다른 하나는 베데르 성을 여는 열쇠요, 사렙탄 세일산에게 받은 선물이었다.
왕성은 그 어느 곳보다 소문이 빠른 곳이었다. 특히나, 정보와 눈치가 있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하수인들은 그들만의 공동사회를 구축해 낸 지 오래였다.
“문을 열어라!”
아사야 세일산이 쥔 열쇠의 무게를 알고 길을 터 준 기사들처럼, 하인들의 움직임 역시 재빨랐다.
블랙 드래곤을 가둔 암흑 공간의 문이 열렸다. 지난날 아사야를 반나절간 기다리게 만든, 철옹성처럼 단단하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러나 오늘, 달라진 것은 하인들의 태도만은 아니었다.
오늘 아사야는 전날과 달랐다. 그녀는 자물쇠에 꽂힌 열쇠를 거두지 않았다. 두 번 다시 쓸 일이 없기 때문이었다.
“가브리엘.”
그녀는 지하 감옥 안으로 들어가지도 않았다.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제 드래곤의 이름을 부를 뿐이었다.
“이리 와.”
아사야 세일산이 말했다.
자신에게 말을 거는 유일한 인간의 목소리를 좇아, 가브리엘이 철문 사이로 모습을 드러냈다. 어둠을 뚫고 드러난 그의 모습은 암흑 덩어리처럼 짙었다. 빛이 드는 공간에 놓이는 것만으로도 이질감이 들게 하는 존재였다.
무거운 철문이 여닫힐 때마다 긁어 놓은 시커먼 스크래치 앞에 드래곤의 두 발이 멈췄다. 습관적인 동작이었다.
“가브리엘.”
두 발짝, 아사야는 철문으로부터 멀어졌다.
“이리 와.”
그리고 두 번째 손짓했다.
드래곤의 시커먼 발이 족쇄도 없이, 거친 문턱 앞에서 머뭇거렸다. 보라색 눈으로 양방향에 선 기사와 경비대원들을 살피는 가브리엘을, 아사야는 터질 것처럼 떨리는 가슴으로 지켜보았다.
“족쇄는 채우지 않을 거야.”
제 드래곤이 무얼 기다리는지 알고서, 아사야가 속삭였다.
“그냥, 나와 함께 걸어.”
그러자 용의 검은 발이 움직였다. 족쇄도 사슬도 어떠한 결박도 없이, 가브리엘의 발이 문턱을 넘었다.
벅차오르는 순간 아사야는 울지 않았다. 다만 두 번째 열쇠를 사용하고자 앞서 걸을 뿐이었다.
가브리엘과 함께 아사야는 넓은 정원만이 미완성인 성문 앞에 도착했다. 엠마오와 두 시녀들, 그리고 열댓 명의 기사들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성주로서 성문 앞에 도달해, 아사야는 왕에게 받은 열쇠를 사용했다. 완공된 지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은 성벽에서는 새 건물의 냄새가 났다. 이제 이 공간을, 아사야는 제 것으로 꾸밀 것이었다.
온전히 제 것으로 가득 채운 그녀 자신의 성 안에서, 제 드래곤이 지내도록 할 것이었다.
“가브리엘.”
커다란 문을 활짝 개방시킨 채, 아사야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속삭였다.
“네 방이야.”
너와 내가 함께 지낼 방. 너를 지키고 네가 몸 기댈 집. 늘 주고 싶었던 선물.
드래곤의 검은 몸뚱어리가 웅장한 발소리를 내며, 베데르의 이름을 딴 성 안으로 들어섰다. 그 순간 아사야만이 그의 감정을 읽었다.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아사야?’
황당한 듯한 가브리엘의 보라색 눈을 바라보며, 아사야는 활짝 웃었다.
.*. *. *. *. *. *.
베데르 성을 드래곤의 방으로 만든 오후, 야베스 세일산이 보낸 전언이 도착했다. 그의 아내 아사야 세일산에게 떨어진 호출 명령이었다.
그간 아사야는 마음의 각오를 다진 채였다. 어떤 해를 입게 되더라도 그녀에게 있어, 가브리엘에게 방을 선물한 기쁨을 앗아 갈 순 없었다. 묵묵한 침묵으로, 엠마오와 시녀들의 걱정 어린 눈짓을 받아 가며 아사야는 부부 침실에 도착했다.
그리고 이상한 일이 생겨났다.
당장에 화를 내리라 예상했던 야베스 세일산은 뜻밖의 반응을 보였다. 그는 잘 차려진 저녁 테이블에 아사야를 앉혔다. 복숭아 타르트 따위는 없었다. 아사야가 좋아하는, 속을 가득 채우는 수프와 달짝지근한 소스를 얹은 요리들이 테이블 위에 즐비했다.
미소와 함께, 야베스 세일산이 잔을 건넸다. 짙은 향이 나는 포도주를 가득 채운 잔이었다.
“가디엘 아졸도 이럴 줄은 몰랐을 거야.”
야베스가 말했다.
“당신에게 이런 재주가 있는 줄은.”
그의 입에서 나온 오빠의 이름에 아사야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러곤 큰 눈으로, 그의 웃는 낯을 바라보았다. 아리송한 야베스의 속내를 읽어 보려는 시도였다.
아사야 세일산의 앞에는 낯선 남자가 있었지만, 야베스 세일산 앞에는 아사야 아졸이 있었다. 처녀적 그녀를 본 순간 느꼈던 감정이 곱절이 되어 돌아온 순간, 그는 분노보다 큰 기쁨을 느꼈다.
내 발을 밟더라도 미워할 수 없는 여자.
아사야 아졸이라는 공작가 아가씨는 그랬었다.
대륙 안에 둘도 없이 아름답고 도도한 여자. 그 여자는, 야베스 세일산과 혼인을 하고 부부로서 한배를 탔음에도 제멋대로 노를 저어 갔다.
얌전한 얼굴과 착한 말투에 속아 내가 눈이 멀었었다고, 야베스는 인정했다. 그녀에게 화가 나기보단 스스로가 우습게 생각됐다. 제 아버지께서 기십 년 만에 지은 성을 죽은 베데르에게 헌정했단 소식을 듣고는, 한참 웃음을 터뜨린 그였다.
제 이름 뒤에 붙은 ‘세일산’을 세상에서 가장 무색하게 여기는 여자가 그의 아내였다.
“‘국왕의 사랑을 받아다 줄 다리’라더니……, 틀린 소리지.”
야베스가 중얼거렸다.
이내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아사야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의 발과 고개가 가까워 올수록 아사야는 어깨를 움츠렸다. 거리에 비례하여 그녀의 작은 체구는 더욱이 줄어들었다.
겁을 내고 오그라붙는 모습을 보면 야베스는 아사야가 우스웠다. 저를 두려워하는 순간 그녀는 제 장식장에 놓인 예쁜 인형이 분명했다.
‘그런데 왜 말을 안 듣지?’
야베스는 고개를 슬그머니 기울였다. 오늘 그의 눈앞에 앉은 여자는 순종적인 인형이 아니었다. 제 아버지를 주무르는 마법 같은 여자였다.
“나를 왕좌로 데려가 줄 다리야, 당신은.”
그 순간 아사야는, 이미 알던 사실을 한 번 더 곱씹어야 했다.
“사랑해, 아사야.”
그녀는 자신이 어떤 남자와 결혼한 건지 조금도 알지 못했다.
시야를 흐려 놓는 안개가, 열린 창을 타고 부부 사이에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