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일산의 예물
가디엘 아졸의 명성은 제 아버지의 전성기에 빗대어 모자람이 없었다. 그는 스물네 살의 젊은 공작이었고 외팔의 기사였다. 전쟁터에 갓 발을 들이던 때 설렘과 긴장이 묻어나던 어리숙한 얼굴은 이젠, 아졸가 기사들이나 어렴풋이 기억할 뿐이었다.
무표정한 눈빛은 생전 베데르와 똑같았고, 키와 덩치는 아버지를 넘어선 지 오래였다. 바위처럼 벌어진 어깨며 단단한 턱은 단단한 인상을 자아냈다.
젊을 적 베데르가 그러했듯이 가디엘 역시 이목구비가 또렷하고 반듯했다. 영지 내의 여인들은 물론이며 몇몇 귀족 여식들까지 연모하게 만들 수준이었다.
세상 무엇으로도 기를 꺾을 수 없는, 영웅 기질을 타고난 남자. 사람들은 가디엘을 그렇게 평가했다. 베데르와 그 아들의 일대기는 그렇게 소설로 쓰였고 노래로 극으로 만들어졌다.
전설적 영웅 베데르의 장애 아들. 그렇게 불리지 않기 위해 가디엘이 몇 날 며칠을 몸부림쳤는지, 피땀 묻은 노력은 아사야만이 알았다.
고삐를 쥐지 않고도 승마하기 위해 몇 번이고 말에서 떨어져 굴렀는지, 왼손으로 길들인 검을 오른손으로 휘두르기 위해 찢어진 살점이며 흘린 피가 얼마인지.
열아홉, 스물, 스물하나…… 매해마다 가디엘의 어깨는 부러졌고 손과 팔은 찢긴 상처로 뒤덮였다.
말에서 떨어져 기절한 스무 살의 가디엘을 발견하고 아사야는 혼절할 뻔도 했었다. 울면서 치료사를 찾은 일도 여러 번이었다. 자칫 무모해 보이기까지 하는 가디엘의 훈련을 지켜보느라 아사야는 두 눈을 발갛게 붉혀야 했다.
고위 신관들의 치료 마법이 없었더라면 지금쯤 가디엘은 언데드처럼 흉터투성이일 것이었다. 그 점을 감사히 생각해 아사야는 계절마다 신관들에게 비싼 값을 치르며 구한 서적들을 선물했다.
어른이 되어 가며 아사야는 많은 것을 배웠다.
“두 팔이 성하셨더라면 부군만큼 훌륭한 기사였을 텐데요.”
이를테면 어떤 이들은 친근함의 표현과 무례한 언사를 분간치 못한다는 점.
흰 수염을 늘어뜨린 고위 신관을, 아사야는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가디엘은 그에게 밀려드는 혼담을 전부 거절한 상태였고, 성내에는 안주인이 없었다. 그러니 선을 지키지 못하는 하수인을 관리하는 것은 아사야의 몫이었다.
“노예들도 제 주인을 비교하진 않을 텐데요, 그 식구가 듣는 앞에서는요.”
그리고 아사야는 알게 되었다. 제 무표정이 가디엘의 것만큼 위협적이지는 못해도, 누구를 얼어붙게 만들기엔 충분하단 것을.
“조금 전 실언은 못 들은 셈 치겠어요. 오늘 전 귀가 그리 밝지 않아요, 그렇게 하죠.”
늙은 신관 앞에 아사야는 더 이상 싹싹하고 해맑던 어린 아가씨가 아니었다.
“두 번째 관용은 없을 거예요.”
돌아서는 아사야의 차가운 뒷모습을, 신관은 당혹스레 바라보았다.
스물두 살이 되어서야 가디엘은, 열여덟, 아직 두 팔이 건재하던 과거의 자신을 따라잡았다. 그제야 아사야도 울지 않고 오빠를 마주 볼 수 있었다. 영지 근방의 토벌마다 지휘관으로 출전하는 가디엘을 배웅하면서 아사야는 제 하나뿐인 가족을 기다림으로 계절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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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가디엘은 아버지의 영광이 시작되었던 자리, 검술 대회의 참가자들을 평가하는 입장이 됐다. 제 신체적 장애가 어떠한 걸림돌도 될 수 없음을 증명해 낸 결과였다.
아졸 공작가를 위해 마련된 자리는 세일산 왕족 일가와 함께였다. 바닥에는 붉은 카펫이 깔렸고 밝은 장막이 따가운 볕을 가리고 있었다. 사렙탄 세일산이 중앙에 자리했고 왕자들이 그들 옆에, 아졸가 남매는 맨 앞줄에 자리했다.
사렙탄 세일산이 그의 첫째 아들과 나누는 말소리를 들으면서, 가디엘은 대회 현장을 내려다보았다. 사실 그의 관심은 제 옆자리의 누이에게 꽂혀 있었다. 근방의 모든 이들이 그러하듯이 말이었다.
왼쪽 어깨로 쓸어내린 칠흑 같은 머리칼은 아사야의 흰 피부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 두 뺨은 꽃물을 들인 양 발그레했고 노란 눈동자는 볕을 받아 반짝였다. 진녹색 드레스는 너무 화려하지도, 그렇다고 부족하지도 않게 날씬한 몸매를 감싸고 있었다. 대륙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명성과 기대를 저버리려야 그럴 수 없는 외모였다.
가디엘의 뜻대로 그의 누이는 대외적인 자리에 한 번도 발을 들여놓은 일이 없었다.
사렙탄 세일산은 가디엘과 그의 누이에게 무엇이건 해 주지 못해 안달이었다. 특히나 몸이 상해 외출하지 않고서 청소년기를 보낸 아사야에게 더욱이 그랬다. 누이의 생일날, 그리고 그녀가 앓아누웠다는 소식을 은근슬쩍 흘릴 때마다 사렙탄은 직접 고른 선물들을 아졸 성에 보내오고는 했다.
그건 국왕이 해 올 수 있는 가장 직설적인 사과였다. 네 아버지를 전쟁터에 내보내고 죽게 만들어 미안하다는.
매해 사렙탄이 선물을 보내오면, 아사야는 감사의 인사를 담은 편지를 적었다. 모든 교류는 가디엘이 지켜보는 가운데 이루어졌다.
그가 아사야 아졸을 며느릿감으로 생각하고 있단 소문은 벌써 사교계에선 유명했고, 가디엘은 그 소문이 사실임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욱이 이날을 고대해 왔다.
국왕이 아버지를 처음 만났던 자리. 6년 만에 다시금 주최된 대회 현장이었다. 사렙탄 세일산에게 누이를 인사시키기 가장 적절한 자리였다.
“올해 후보들은 여느 해보다 더 쟁쟁한 것 같군.”
사렙탄이 말했다. 오늘 그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제 초대에 응하여 가디엘은 물론이며 아사야까지 왕가와 함께 앉았으니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었다. 친우의 귀한 여식이 대회를 구경할 정도로 건강해졌다니 기쁜 소식이었다.
그의 말마따나 결승이 결정되기 직전 대회 현장의 공기는 어느 때보다 열렬했다.
그러나 기사들이 검을 나누는 내내 아사야는 전투의 현장을 제대로 바라보질 않았다. 시선을 내리깔고서 제 손이나 바라볼 뿐이었다. 새하얀 면장갑으로 감싼 손은 가느다랗고 좁았고, 손가락은 길쭉하게 뻗어 있었다.
“공작 아가씨께선 기사들의 대련 따위엔 관심이 없는 모양입니다.”
불쑥, 나이 든 목소리가 아사야에게 다가왔다. 눈길을 돌려 아사야는 그들의 대각선 자리에 앉은 남자를 바라보았다.
가디엘이 의자에 등을 기대며 아사야에게 제 고개를 기울였다. 그리고 귓속말했다.
“길론드 후작.”
귀띔에 아사야는 잠깐 제 오빠를 보았다가, 뒷자리의 기척을 조심스레 살폈다. 사렙탄이 반쯤 못마땅한 듯, 반쯤은 호기심이 동한 얼굴로 두 남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젊은 공작과 그 누이를 바라보며 길론드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여자가 보기엔 다소 ‘그런’ 광경이지요, 이해합니다.”
그리고 말했다.
“기사도 정신이란 게…… 여기 남자들이나 열광하는 것이지, 곱게 자란 아가씨께서 보기엔 잔인한 싸움이지 않습니까.”
아사야는 고개를 아주 느릿하게, 살짝 움직여 그를 바라봤다. 공작 아가씨의 시선을 받자 그는 더욱 자신감이 붙은 목소리를 냈다. 아버지와 오빠를 따라온 여식들이 차를 마시는 자리가 있으니 그곳으로 안내해주겠단 말이었다. 호의처럼 베푸는 소리에는 아사야 아졸에게 제 여식을 소개하려는 의도가 다분했다.
그의 예상대로 이 자리가 불편하던 차였더라면, 아사야는 자리에서 일어났을지도 몰랐다. 제 입으로 불평하지 않고도 피 튀는 자리를 피해 차와 쿠키가 있는 따듯한 방으로 들어갈 기회였다.
그러나 아사야 아졸은 그의 제안에는 조금도 집중하지 않았다.
아사야는 대답 없이 몇 초간 그를 바라보았다. 목소리를 들려주지 않고 시선만을 던지는 침묵은 몇 초일지라도 일순 길게 느껴졌다. 후작의 얼굴에 당혹감이 피어오를 즈음에야, 아사야가 입을 열었다.
“아…….”
그리고 입을 열었다.
“죄송해요. 제게 시비를 걸어오시는 줄 착각했네요, 그러실 리 없으신데.”
공손히 고개 숙이는 공작 아가씨를 바라보는 길론드의 이마에 주름이 생겼다. 순식간에 그는 스무 살 공작 아가씨에게 시비를 거는 무례한 늙은이가 되어 버렸다.
“이것참…… 마음이 상하셨습니까? 그럴 의도는 없었는데.”
“길론드 경을 탓할 마음은 없으니 오해는 말아 주세요. 의도 없는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다면 그건 제 잘못이지요.”
그에 길론드의 얼굴은 근육을 찌푸려 만든 주름으로 가득 찼다.
계급으론 저보다 높은 공작이라곤 하나, 아사야 아졸은 십 년 전 생일 연회 이후로는 사교계에 얼굴 한번 보이지 않은 어린 여자였다. 그런 그녀가 제 존재를 돌부리에 빗댔단 사실이 도무지 믿기지 않는 눈치였다.
뒤이어 아사야는 장갑을 낀 손을 들더니 제 입술을 가로막았다. 그러고는 시선을 굴려 주변을 둘러보았다. 가디엘은 물론이며 사렙탄 세일산과 왕자들까지 그들 대화를 지켜보고 있었다.
부끄러운 듯 아사야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러고는 ‘어쩌면 좋아’, 그 나이대의 여느 아가씨들과 같이 소곤거렸다.
“죄송합니다, 길론드 ‘님’……. 후작께선 기사가 아니신데 경을 붙여 부르고야 말았네요. 제가 많이 서툴러요. 아졸 성에서만 살고 바깥 경험이 부족해 그래요, 저의 식구 모두가 전쟁터를 누비던 기사들이지요.”
그러니 그녀가 기사도를 이해하지 못할 리 없었다. 검을 맞대는 대련 따위를 두려워할 이유도 없었다.
충분한 메시지가 담긴 말에 길론드는 별수 없이 입을 다물었다. 그러곤 여유로운 양 억지 미소를 지으며, 그럼 대회를 즐기시길 바란다는 인사말을 남긴 뒤 자리를 떠났다.
후작의 빈자리를 내려다보며 가디엘은 자세를 살짝 고쳤다. 아사야의 두 눈은 다시금 심심해졌다. 능구렁이 같은 후작을 말로써 서너 대는 쥐어 패 놓고는, 심심하고 우울한 표정을 짓는 게 그의 누이였다.
등 뒤에서 피식 새는 숨소리가 들려왔다. 사렙탄이 참았던 웃음을 터뜨리는 소리였다. 그는 애써 제 수염을 만지는 척, 터진 웃음을 감추려 노력했다.
“제 아비를 빼닮았어. 남매가…… 젊을 적 베데르랑 어쩜 그리 똑같은지.”
왕께서 제 오른팔이라 불리는 기사에게 머리를 기울이며 속삭이는 말이, 가디엘의 귓가에 아주 잘 들렸다.
그에 가디엘의 어깨는 가뿐해졌다. 혹여 폐하께서 아사야의 성격을 두고 되바라졌다며 밀어내진 않을까 염려하던 것이 싹 가셨다.
대신에 그는 아사야에게 제 없는 쪽 팔을 살짝 기댔다.
“오늘 네게 선물을 주러 온 것인데, 선물은 네가 나에게 주는구나.”
가디엘이 말했다. 오빠의 친밀한 접촉에 놀란 듯 어깨를 움찔거리다가, 아사야는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아주 작은 소리로 되물었다.
“선물?”
간만에 미소 지으며, 가디엘은 다시 허리를 펴고 앉았다. 아사야는 속 모를 가디엘의 옆얼굴을 바라보며 눈을 깜빡거렸다.
이내 터져 나오는 박수 소리가 이목을 앗아 갔다.
흥분한 듯 자리에서 일어선 관중들이 보였다. 환호성과 박수, 무어라 외치는 소리들이 지진처럼 울려 경기장을 채웠다.
저도 모르게 아사야는 뒷자리에 앉은 왕가 내외를 돌아보았다. 사렙탄은 경기장을 내려다보며 미소를 짓고 있었고, 본도 왕자 역시 매한가지였다.
아사야와 눈이 마주친 이는 야베스 왕자뿐이었다. 그녀가 고개를 돌리기 전부터, 야베스 세일산은 그녀의 뒤통수만 바라보고 있었다.
아사야의 샛노란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치자 야베스는 놀란 듯 몸을 굳혔다. 몸의 근육이 어찌나 뻣뻣해졌는지 옷 위로도 티가 날 수준이었다. 그의 밝은 금발 머리칼과 파란 눈을 마주한 순간 아사야는, 오래 전의 생일날을 기억해 냈다.
“아.”
그러고는 무어라 인사를 하려 입을 열었다가, 다물었다. 말을 걸기에 무안할 정도로, 야베스 세일산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것이었다.
이제껏 아사야를 향해 추파를 던지거나 애정을 드러낸 남자가 적지 않았다. 심지어는 몇몇 여인들조차 그랬다. 그러나 야베스 세일산만큼 그 감정을 못 감추는 이는 여태 없었다.
그의 반응에 오히려 제가 놀라, 아사야는 얼른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그리고 경기장 가운데에 선 커다란 마물을 바라봤다.
그 순간 아사야의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었다.
블랙 드래곤이었다.
대륙에 남은 마지막 한 마리, 시커먼 비늘과 보라색 눈을 가진 마물.
집채만 한 몸을 푸르르 떨며, 드래곤이 경기장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목덜미엔 거대한 쇠사슬이 감겼고 두 발에 묶인 족쇄가 서로 부딪치며 묵직한 소음을 냈다. 몸을 죈 사슬들이 무거워 걷기조차 힘겨워 보였다. 그런 드래곤을 경계하느라 양방향엔 작살 대포가 대기 중이었다.
아사야의 온 마음이 경악으로 가득 찼다.
그와 재회하기만을 기다려왔지만 이런 방식으로는 아니었다. 차라리 아사야는 저 드래곤을 모른다고 믿고 싶었다. 제가 알던 이가 아니라고 착각하고 싶었다. 그녀가 기억하는 드래곤은 저렇지 않았다.
아사야의 기억 속 드래곤은, 농담을 들으면 콧김으로 한숨을 쉬었다. 붕대를 갈아 줄 때면 날개를 쭉 뻗고 자는 체를 했다. 소설책을 읽어 주면 집중하는 양 눈을 끔벅거렸었다.
창을 쥐고 말을 탄 기사가 드래곤의 주변을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흙먼지가 이는 가운데 드래곤은 끓는 듯 그르렁거리기 시작했다. 공격성을 잃어버린 채 온몸의 비늘을 삐죽삐죽 세운 용을 놀리는 듯, 기사는 창으로 그를 위협하며 움직였다.
드래곤이 날카로운 창끝을 피하기 위해 속박된 몸을 비틀 때마다, 몇몇 이들은 박수를 치고 환호했고 몇몇 이들은 낄낄대며 웃었다.
비늘 위로 도드라지도록 깊은 흉터와 상처들을 지닌 채 드래곤은 투견처럼, 성난 황소처럼 다뤄지고 있었다. 터무니없이 작아 보이는 케이지 밖으로 나오는 때라고는 오늘, 대회장을 가득 메운 관객들의 구경거리가 되는 순간뿐이었다.
입술을 떨며 아사야는 작게 신음했다.
“가브리엘…….”
가디엘이 그녀의 옆얼굴을 힐끔 살폈다.
쇼를 마치며 대여섯의 기사들이 드래곤의 목 밑에 날카로운 창을 댔다. 큰 함성을 번갈아 내지르며 그들이 반 발짝씩 다가서면, 드래곤은 죽지 않기 위해 그만큼 뒤로 물러서야 했다. 금방이라도 창날이 그의 비늘을 뚫을 듯 위험천만한 광경이었다.
한참 내몰린 끝에 검은 용의 몸이 비좁은 케이지 속에 숨어들자, 어린 기사가 케이지 철문을 닫았다.
케이지 속에 처박힌 채 질질 끌려가는 드래곤을 바라보느라 아사야는 제 오빠가 자리를 비우는 줄도 몰랐다. 심장이 지끈거리고 사방이 빙글빙글 도는 듯 어지러웠다. 울지 않기 위해 드레스 자락을 있는 힘껏 쥐어야만 했다.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그녀의 옆자리엔 가디엘이 아닌, 야베스 세일산이 앉아 있었다. 놀란 아사야를 바라보며 그는 조심스레 그녀의 장갑 낀 손을 가져가 손등 위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 말했다.
“아가씨께서 오실 줄을 알았더라면 음유시인이라도 불러 둘 걸 그랬습니다.”
두 눈을 크게 뜬 채 아사야는 야베스를 바라만 보았다.
“그 드래곤은 둘째 왕자님께 선물로 보내 드릴 거다.”
6년 전 가디엘이 그렇게 말했었다. 단 한 번도, 아사야는 그 말을 잊은 적이 없었다.
“아니요…….”
목이 메어 아사야는 목소리를 바로 낼 수 없었다. 무어라 말하려 입을 열었다가, 다시금 다물기를 서너 번은 반복했다. 야베스의 파란 눈이 그녀의 입술을 뚫어져라 지켜보고 있었다.
노력한 끝에 아사야는 적당한 답을 찾아냈다.
“드래곤을 본 것으로도 충분해요.”
그러자 야베스의 몸이 그녀에게로 기울어졌다. 제 오빠만큼이나 장성인 남자의 그림자에 아사야의 치맛자락이 묻혔다.
“더 가까이서 보게 해 드릴까요?”
야베스가 소곤거렸다.
“만나게 해 드릴 테니, 따라오시겠어요?”
제안에 대한 답을 듣지 않고 그는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빈 옆자리를 바라보며 아사야는 제 두 손을 꽉 맞잡았다.
머뭇거림은 길지 않았다. 야베스를 따라 자리를 떠나는 아사야의 뒷모습을, 사렙탄이 유심히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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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에서 가장 강한 기사를 알아내고자 결승 대결이 한창이었다. 그만큼이나, 관중들의 환호성과 발 구르는 소리도 천둥과 지진처럼 크게 울렸다.
경비대의 엄호를 받으며 도착한 대기실은 관중석의 계단 아래에 위치해 있었다. 덕분에 쿵, 쿵, 쿵…… 발소리와 진동이 더욱 크게 들려왔다.
보통의 남자였더라면 결코 그런 곳으로, 제가 연모하는 아가씨를 데려오지 않을 것이었다.
그러나 야베스 세일산은 보통의 남자가 아니었고, 아사야 아졸 역시 보통의 아가씨는 아니었다. 그는 이 거대한 대륙의 둘째 왕자였고 아사야 아졸은, 꽃다발과 연극보다는 드래곤을 원하는 아가씨였다.
대기실 안으로 발을 들이며 야베스는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애초에 피와 진흙으로 뒤덮인 무기들이 굴러다니던, 격투가들의 대기실이었다. 흙먼지와 땀냄새로 뒤범벅인 너저분한 대기실은 공작가 아가씨를 모시기엔 최악의 공간이었다. 이곳으로 아사야를 데려올 순 없단 생각에 그는 대회가 있기 몇 시간 전에 미리 하인들을 시켜 이 공간을 청소하고 다듬어 놓길 지시했다.
충직한 하인들은 그의 지시를 따랐다. 지저분한 무기들을 치우고 흙바닥엔 카펫을 깔았다. 테이블과 의자를 놓아 앉을 자리도 만들었으며 조명과 꽃으로 횅한 공간을 급하게나마 꾸며 놓았다. 하다못해 벽돌 무늬가 고스란히 드러난 벽에는 봄 축제를 알리는 포스터까지 구해다 붙여 놓았다.
그래도 야베스의 마음에 들진 못했다.
‘엉망진창이군.’
카펫의 붉은색은 그의 연심을 천박하게 드러내는 듯해 별로였다. 테이블은 홍차와 쿠키가 어울릴 서쪽 장막의 디자인인데 의자는 항구의 술집에서나 볼 법한 나무 의자이니 그 배치도 끔찍했다. 노란 꽃은 미모의 아사야 앞에 가져다 놓기에 부끄러울 수준이었고 그런 공간을 환히 비추는 조명은 하등 도움이 되질 않았다.
한 철 지난 봄 축제의 포스터는 더욱이 최악이었다.
공간을 꾸며 놓길 명령할 적에 부족하지 않을 금화를 지급한 야베스였다. 천출 하인들이 큰 돈에 겁을 먹어 금화 하나조차 제대로 못 쓸 것이라곤 짐작하질 못했다.
그러니 아사야의 표정을 살필 용기도 나지 않았다. 뻣뻣한 얼굴로 야베스는 하인들을 향해 물러가란 손짓을 보였다. 받은 금화가 고스란히 든 가죽 주머니를 움켜쥔 채, 하인들은 경비대와 함께 대기실을 빠져나갔다.
마음 같아선 아사야를 다시금 아버지가 있는 상석에 되돌려 놓고 다음을 기약하고 싶었지만, 그럴 여유가 되지 않았다. 십 년 만에 공석에 모습을 드러낸 아사야 아졸은 그에게는 요정이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오늘을 놓치면 또 언제 그녀와 단둘이 마주할 기회가 날지 미지수였다.
“……미안합니다. 지저분한 곳에 모시게 돼서.”
사과하며, 야베스는 데이트 자리랍시고 보이기에 부끄럽기 짝이 없는 의자를 움직였다. 그가 자리를 내어 주어도 아사야는 앉질 않았다. 그것이 나무 의자여서, 디자인이 격에 떨어져서, 드레스를 구기기 싫어서, 그런 이유에선 아니었다.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아사야는 가만히 그를, 그리고 천장에 닿도록 거대한 케이지를 가린 천막을 번갈아 바라볼 뿐이었다.
그녀가 원하는 게 무언지 야베스는 알았다. 가디엘 아졸로부터 충분한 귀띔을 받아 둔 상태였으므로,
‘꽃다발보단 드래곤에 흥미가 있는 아가씨라고…….’
알긴 알았지만, 아직도 믿기진 않는 소개였다.
정말로 아사야 아졸이 드래곤을, 그것도 화려한 보석으로 뒤덮인 젬 드래곤이나 투명하고 아름다운 화이트 드래곤도, 뜨거운 불을 뿜어내는 위용의 레드 드래곤도 아닌, 그저 시커멓고 우울할 뿐인 블랙 드래곤을 원할까?
이 계획이 과연 먹혀들까…… 야베스는 확신하지 못했다.
그러나 망설임은 길지 않았다. 케이지 속의 마물은 아사야 아졸에 대하여 그가 지닌, 유일하게 값어치 있는 힌트였으므로.
케이지 앞으로 다가가, 야베스는 직접 천막을 움켜쥐곤 한 번에 걷어 냈다.
그리고 그는 아사야를 돌아보았다. 정면만을 바라보는 아사야의 옆얼굴이 달처럼 환했다. 두 눈은 태양처럼 샛노랗게 반짝거렸다.
하지만 드래곤의 모습을 확인한 직후 아사야는 야베스의 기대처럼 웃어 주지 않았다.
야베스의 블랙 드래곤은 늘 그렇듯, 대회장에서 얻은 상처와 스트레스를 삭이려는 듯 케이지 가장 구석에 거대한 몸을 처박은 채였다. 이쪽에서 볼 수 있는 것이라고는 놈의 거대한 등과 구겨진 날개, 날카로운 꼬리뿐이었다.
드래곤은 야베스와 아사야를 향해서는 머리를 보여 주지도 않았다.
아사야는 얼굴을 찡그리며 제 드레스 자락을 움켜쥐었다. 드래곤의 모습이 기대와 많이 달랐던 모양이었다. 아사야의 작은 반응에도 야베스의 심장은 바늘에 찔린 듯 따끔거렸고 위장은 울렁대기 시작했다.
“너무…… 아파 보여요.”
아사야의 얼굴과 몸매는 숙녀가 다 되었지만 목소리만큼은 아니었다. 아직 어린 티가 묻어나는, 아침 새의 그것처럼 가느다란 목소리였다. 듣기엔 무척 좋았지만, 감정을 숨기기엔 좋지 않았다.
몹시 속상해진 음성으로 아사야가 말했다.
“잠시만 꺼내 줄 수 없나요? 케이지가 너무 좁아요.”
공작 아가씨께서 드래곤을 좋아한다고는 들었지만, 강아지로 생각하는 줄은 몰랐던 야베스였다. 내심 그는 아사야 아졸이 보기보다 철이 없다 생각했다. 영리한 아가씨로 생각했건만 드래곤을 동정할 정도로 순진한 줄은 몰랐었다.
‘뭐 그런 점도…… 귀엽군.’
헛기침을 하며 야베스는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더 큰 케이지를 써서는 왕성으로 옮겨가기 어렵습니다. 녀석이 너무 큰 거죠.”
그가 대꾸하자 아사야는 실망한 듯 다시금 케이지로 시선을 옮겼다.
“이름은…… 뭐라 부르시나요?”
아사야가 물었고,
“그런 건 없어요.”
야베스가 즉답했다.
“드래곤이라 부르면 됐죠. 이제 이 대륙에 녀석 외엔 드래곤이 없으니 그리 불러도 충분하니까요.”
“온 세상 사람이 다 죽는다고 왕자님의 이름이 사라지는 건 아니잖아요.”
아사야가 대꾸했다. 냉정하고 빠른 대답이었다.
야베스의 눈이 커졌다. 왕의 직계 아들로서 그는 생득적인 권력자였다. 단연코 그는 동갑내기 스물셋의 청년들과는 달랐다. 누구나가 저를 향해 고개를 조아리고 저를 위해 무엇이건 기꺼이 바치는 것에 익숙한 스물셋은, 대륙 내에 그의 형 본도 세일산과 그 자신뿐이리라.
제 말을 꼬집어 쓴소리를 내놓을 수 있는 여자는 어머니가 유일한 줄 알며 살아온 왕자였다. 그러나 아니었다. 아사야 아졸은 그가 만나 본 어느 집안의 여식과도 달랐다.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않는 야베스를, 아사야는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그녀의 관심은 철창 속의 드래곤을 향해 있었다. 그들이 말을 나누어도 아랑곳 않고 구석에 머리를 처박고 씩씩대는 거대한 짐승에게 말이었다.
아사야가 제 발이라도 밟을 수 있는 여자임을 야베스는 직감했다. 만에 하나 그리한다 하더라도, 그녀를 미워할 수 없을 거란 사실 역시 깨달았다.
“이름을 불러 주었으면 좋겠어요.”
제 감정이 상했는지 여부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그를 살피지도 않고 아사야가 말했다. 야베스는 그녀의 무심한 태도에 제 심장이 세차게 뛰는 것을 느꼈다.
“……정 그러시다면 아가씨께서 붙여 주시겠습니까?”
야베스가 물었다.
아사야는 그제야 드래곤에게서 눈을 떼고 그를 바라봤다.
그녀에게 용의 이름을 지을 기회이건 어떤 물질적인 선물이건 주어 시선을 받을 수만 있다면 제 모든 걸 줄 수 있노라, 야베스는 생각했다. 당장이라도 드래곤을 선물하고 제 뺨에 작은 키스라도 받고 싶었다.
왕자는 그 충동을 살짝 눌러놓았다. 아끼지도 않는 드래곤은 그에게 있어 시커먼 마물 덩어리에 불과했다. 아사야 아졸에게 백 번이고 천 번이고 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럴 적에는, 더 큰 보답을 받아야 했다.
그가 나중의 계획을 생각하는 동안 아사야는 도톰한 입술을 살짝거리며 머뭇거렸다. 드래곤의 이름을 고민 중인 모양이었다. 캐시, 애니, 샬롯 따위의 너무 귀여운 이름은 짓지 말았으면…… 야베스는 그런 생각을 했다. 그녀가 부른 이름으로 저도 제 용을 불러야 할 테니 말이었다.
계획에 따라서는, 그 시간이 남은 평생이 될 수도 있었다.
“가브리엘…….”
마침내 아사야가 드래곤의 이름을 말했다. 아주 작고 떨리는 목소리였다. 야베스는 한쪽 눈썹을 올린 채 긴장 역력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두 어깨에 힘이 들어가고 가느다란 목을 빳빳하게 세운 채, 아사야는 아랫입술을 빨간 혀로 살짝 축였다. 긴장을 풀어 보려는 시도 같았으나 야베스의 눈에는 처음 본 춘화처럼 야하고 충격적으로 느껴졌다.
또 한 번, 아사야는 힘을 주어 목소리를 냈다.
“가브리엘.”
이번에 그녀의 음성은 케이지 구석의 드래곤에게 가닿은 듯했다.
그러자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가브리엘’, 부름을 알아듣기라도 한 양 드래곤이 눈에 띄게 몸을 떨더니, 흙바닥에 처박고 있던 고개를 든 것이었다.
목덜미에 무거운 사슬이 남긴 자국과 기사의 창에 찔린 상처를 달고서, 드래곤은 케이지 너머의 두 인간을 바라보았다. 용의 보라색 눈동자는 놀란 사람의 것처럼 커졌고 어깻죽지의 비늘은 바람을 맞은 양 떨리며 소리를 냈다.
그리고 멈춰 섰다.
우두커니 몸을 굳힌 채 가브리엘은 키가 자라고 젖살이 빠진, 이제는 어른 태가 나는 아사야 아졸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길쭉해진 몸, 많이 자란 머리칼, 여전히 동그란 이마와, 반듯하고 조금 짙은 듯한 눈썹, 기침이라도 하면 떨어질까 무서울 정도로 큰 눈, 코, 입술……
용의 눈동자는 매우 커서, 그가 무얼 관찰하고 있는지 아사야는 전부 느낄 수 있었다. 동시에, 아사야는 가브리엘이 저를 알아보았음을 느꼈다.
다시 가브리엘을 만난다면 슬퍼서 엉엉 울 것만 같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아사야는 온전한 기쁨과 안정만을 느꼈다.
‘그래, 가브리엘이 여기 있어. 너를 드디어 만났어…….’
느릿한 걸음으로 두 창살 사이에 서자 가브리엘이 고개를 서서히 기울였다. 성급해 보이도록 빠르지는 않게, 그렇다고 긴장한 것처럼 느리지도 않게, 아사야는 창살 사이로 팔을 내밀었다. 그러고는 드래곤의, 유독 여린 날갯죽지를 매만졌다.
십여 년 전 다친 상처로 인해 여전히 비늘 없이 횅한 자리였다. 오래전 작은 소녀이던 아사야가 약을 발라 주고 서툴게 붕대를 감아 주었던 그 자리였다.
“가브리엘. 네 이름은 가브리엘이야……. 만나서 반가워.”
신화와 소설들이 그렇게 말하듯이, 블랙 드래곤은 영악하기 짝이 없었다. 가브리엘은 아사야가 무얼 하고 있는지 곧장 알아차렸다. 아사야는 블랙 드래곤을 처음 만난 양 연기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야베스 세일산의 시선을 의식하는 듯했다.
때문에 가브리엘은 애를 써야 했다. 멍청하기 짝이 없게 헐거운 창살을 몸으로 부수고 달아나지 않기 위해서, 저를 보며 엉엉 울던 아사야 아졸의 이마에 제 이마를 대뜸 가져다 대지 않기 위해서.
가브리엘은 움직이지 않아야 했다. 그는 어리고 작은 인간을 그저 눈으로만 바라봐야 했다.
바위처럼 굳은 가브리엘을 향해 아사야는 애써 웃음 지었다. 상처 많은 블랙 드래곤은 한때 그녀의 유일한 친구이던 존재였다. 제가 수다를 조잘거릴 때면 꼭 한숨을 쉬는 것처럼 더운 콧김을 후 불어오던 가브리엘은 결단코 야생 마물 따위가 아니었다. 누군가를 해칠 힘은커녕 스스로를 지킬 마력도 잃어버린 가여운 용이었다.
‘그때보다 흉터가 더 늘었어.’
지은 죄도 없이, 제 친구가 철창 속에서 고통스러운 삶을 보내고 있다는 걸 아사야는 믿을 수가 없었다.
어린 인간이 제 상처들을 훑는 것을 알고 가브리엘이 몸을 움직였다. 피 흐르는 목덜미를 가리려는 작은 동작이었다.
그가 꿈틀거리는 순간이 야베스에겐 기회였다. 팔을 뻗어, 그는 아사야의 여린 어깨를 움켜쥐고는 그녀를 케이지 밖으로 떼어 냈다. 당황한 공작 아가씨가 비틀거리며 왕자의 품에 안겼다.
“그렇게 다가가면 위험합니다.”
“아, 하지만…….”
입을 열었다가, 아사야는 야베스의 콧대가 저와 몹시 가까운 걸 알았다. 얼른 고개를 숙이고 자리에 바로 서며, 아사야는 그가 저를 안은 팔을 풀어 주길 기다렸다.
“미안해요. 신기해서 그랬어요.”
그렇게 대꾸한 뒤에도 야베스는 잠시간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손아귀에 쏙 들어오게 마른 어깨와 보기보다 보드랍고 풍만한 몸매를 느끼면서, 야베스는 쉽게 팔을 풀질 못했다.
본능적으로 아사야는 그가 제 머리칼의 비누 냄새를 맡고 있음을 알았다.
“저…….”
아사야가 다시 입을 열자,
“죄송합니다. 저놈이 아가씨를 해치려는 줄 알고…….”
야베스가 뒤늦게 그녀를 놓아주었다.
“저, 그게…….”
공작 아가씨와 어느 정도의 거리를 유지해야 할까 고민하는 왕자를 향해, 아사야는 입을 열었다. 그러고는 야베스의 입장에서는 김이 빠지는 질문들을 늘어놓았다.
“드래곤은 어디에서 자나요? 왕자님과 함께 왕성으로 돌아가나요? 평소엔…… 뭘 먹고 지내나요?”
제가 왕자의 기대를 저버린 줄도 모르는 채 아사야가 물었다. 야베스는 눈에 띄게 어깨를 늘어뜨렸다.
‘정말 용을 좋아하는군…….’
그리고 천천히 대답했다.
“왕성에 녀석을 위한 지하실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꽤 넓고 큰 곳이죠. 식사도 제때에 맞춰 양이나 망아지를 잡아다 던져 주고요.”
“……그렇군요.”
그 순간 두 남녀는 서로 다른 생각을 품고 있었다. 야베스는 그녀가 제 포옹을 뿌리치진 않은 부분만을 생각했고, 아사야는,
‘양과 망아지라니…….’
눈동자를 조용히 가라앉혔다.
‘가브리엘이 구운 빵을 얼마나 잘 먹는데. 꿀이랑 수프는 또 어떻고…….’
그러나 그런 이야기를 꺼냈다가는 제가 가브리엘과 알던 사이임이 드러날 것이었다. 가디엘의 경고를 들어 아사야는 그 모습이 세간에 어떻게 비칠지 알고 있었다. 제 아버지와 오빠가 전장에서 목숨을 걸고 싸우던 때에 딸이 되어선 적군을 숨겨 주고 치료해 준 격이었다.
“집안의 명예를 실추시킬 일이지.”
저를 꾸중하던 가디엘의 차가운 목소리가 지금도 들려오는 듯했다. 아사야는 마른침을 꼴깍 넘겼다.
드래곤의 처지에 대한 불만을 꺼내는 대신, 그녀는 저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질문을 했다.
“다음에도 구경시켜 주실 수 있을까요?”
이번에, 그녀의 말은 야베스의 기대를 충족시켰다.
“……또 한 번 만나 보고 싶어요.”
케이지를 바라보며 아사야가 속삭였다. 그 모습에, 왕자의 얼굴은 다시금 붉게 달아올랐다.
조만간에 다시금 만남을 기약할 수 있다니 그로서는 거절할 이유 없이 기쁜 제안이었다. 더군다나 공작가 아가씨께서 먼저 요청을 해 오셨으니, 아버지 앞에 보일 좋은 명분이 생긴 셈이었다.
‘아졸 아가씨께서 만나길 원하시는 게, 본도 세일산이 아닌 야베스 세일산이라…….’
흡족한 미소를 감추기 위해 그는 온 얼굴에 힘을 줬다.
대기실을 빠져나가며 아사야는 등 뒤의 케이지를 돌아보았고, 야베스는 그녀의 얼굴을 훔쳐보았다. 어릴 적이나 지금이나 아사야는 말을 잃게 만들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녀가 꽃이라면 야베스는 그 꽃을 꺾어다가 제 화분에 꽂아 두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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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하늘의 높은 자리를 찾아가는 오전, 아졸가의 성문이 활짝 열렸다. 성대하게 꾸린 마차를 맞이하기 위해서였다.
하녀가 전해 온 소식을 들을 적에 아사야는 읽던 책을 내려놓고 창문 앞에 섰다. 서너 대 이어지는 마차 행렬의 끄트머리가 그녀의 방에서도 작게 보였다.
“폐하께서 선물을 보내오셨나 보다.”
아마 가디엘을 위한 것이리라, 아사야는 생각했다. 검술 대회를 성공적으로 마치기까지 가디엘의 공이 컸다고, 아졸가 기사들의 대화를 엿들은 적 있었다.
아사야는 평상복 드레스 어깨에 숄을 둘렀다. 공작성에 선물이나 손님이 도착하면 맞이하는 일은 아사야의 몫이었다.
그러나 성에서부터 보내온 선물의 발신인은 사렙탄 세일산이 아니었으며, 마차 안에는 비단 물건만이 실려 오지 않았다. 행렬의 가장 앞에 선 수려한 마차의 문이 열리고, 하인 둘이 다급히 그 아래에 무릎을 받치며 섰다.
호위 기사를 대동한 채 하인의 무릎을 밟으며 내리는 이는 야베스 세일산이었다.
그가 제 오빠를 만나러 왔나 보다 생각해, 아사야는 입을 열었다.
“왕자님, 가디엘은 지금…….”
한달음에 그녀 앞으로 다가서며 야베스가 말을 가로챘다.
“저는 아가씨를 만나러 온 겁니다.”
그러고는 몹시 정중한 태도로 그녀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저보다 머리 하나만큼은 큰 둘째 왕자의 눈높이가 아래로 내려가자, 아사야는 화들짝 놀랐다.
왕자를 일으키기 위해 아사야는 두 손을 뻗었다. 그녀의 작은 손은 야베스에 의해 허공에서 낚아채듯 붙잡혔다. 그가 제 보드라운 손등에 입을 맞출 때에서야, 아사야는 야베스의 모습이 검술 대회 날 보았던 것과 상이함을 알았다.
턱 위에는 긴장한 듯한 근육 선이 돋아 있었고, 금색 머리칼은 준수하고 반듯한 얼굴을 가리지 않게 말끔히 넘긴 채였다. 무엇보다 복장이 달랐다. 금사로 수놓은 재킷과 딱 맞는 바지, 검은 가죽으로 만든 구두에 이르기까지 전신이 가히 완벽했다.
그런 왕자의 빳빳한 재킷 안주머니에서 작은 상자가 나왔다. 한쪽 무릎을 꿇은 채 그가 상자를 열어 보였다. 빛을 받아 반짝거리는 보석 반지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틀에 넣고 찍어 낸 듯 뻔한 광경이었다. 이 현장이 시사하는 메시지는 오로지 하나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사야는 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지 짐작하지 못했다. 정확히는 짐작하지 않고자 했다.
‘아닐 거야.’
그런 생각이 불쑥 들었다.
“급작스러운 제안임을 알고 있지만, 기다릴 수 없어 찾아왔습니다.”
야베스가 입을 열었다. 아사야는 평생 단 두 번 만났을 뿐인 남자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열과 성을 다하여…… 아사야 아졸. 아가씨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흐트러짐 한 올 없는 목소리가 주변으로 울려 퍼졌다. 설렘과 긴장, 기대감으로 들어찬 야베스의 얼굴은 놀라고 당황한 아사야에 비해 자신만만했다.
“저를 위해, 아사야 세일산이 되어 주시겠습니까?”
표정만 보았더라면 제안을 하는 이와 받는 이가 반대여야 할 것이었다.
정밀하게 세공된 금강석 반지가 아사야의 네 번째 손가락에 끼워졌다. 보석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슬그머니 기울어지는 반지는, 아사야의 손가락 둘레에 놀랍도록 꼭 맞았다.
“…….”
당황해 말을 잇지 못하는 아사야를 앞에 두고서, 야베스는 제가 끼운 반지 위에 조심스레 입을 맞췄다.
“당장 대답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마음을 정하시는 대로, 서신을 보내 주세요.”
어떤 말씀을 주시건 겸허히 받아들이겠습니다……. 야베스가 덧붙이는 말이 환청처럼 아사야의 귓가에 맴돌았다. 무어라 답하지 못하고 멈추어 선 아사야를 남겨둔 채 왕자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야베스는 그렇게 떠났다. 그가 남기고 간 마차의 선물들이 예물임을, 아사야는 그제야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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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러포즈를 받았으니 뛸 듯이 기뻐야 했다. 아사야가 읽어 본 여러 소설 속의 여자들은 반드시 그랬었다. 금발에 푸른 눈, 왕자의 신분인 남자가 저를 연모하노라 고백하며 성에서 평생 함께 살자 말해 오면, 숙녀들은 기뻐서 함박웃음을 짓고서 고개를 끄덕이며,
“네, 좋아요.”
그렇게 대답해야 했다.
어쩌면 저는 아직 숙녀가 아닌가 보다, 아사야는 생각했다. 어쩌면 누구의 고백을 받고 사랑을 받을 준비가 안 된 것일지도 몰랐다. 그게 아니라면 누구를 받아들이고 사랑할 준비가 안 된 것일 수도 있었다.
복잡한 마음에 예물을 제대로 둘러보지도 못하고 올라온 침실에서 아사야는 유모의 무릎을 베고 누웠다. 눈을 감고서 침묵하는 아가씨의 머리를 유모는 작은 빗으로 느릿느릿 빗겨 주었다.
원하는 건 무엇이든 주겠다, 평생 행복하게 해 주겠노라…… 예물과 함께 실려 온 편지에는 그런 글귀들이 쓰여 있었다. 그러나 아사야에게는, 달콤한 제안들이 온통 성급하게만 느껴졌다.
“이제 스물이시니, 혼담이 오갈 때가 된 거지요.”
아가씨의 기나긴 침묵을 깨뜨리며 엠마오가 말했다. 아사야는 그녀의 무릎에서 벌떡 고개를 일으켰다.
“엠마오는, 내가 결혼하길 바라?”
“아가씨.”
제 눈에는 그저 여리고 착해 보이기만 하는 아가씨를 향해 엠마오가 느릿느릿 입을 열었다.
“엘라 아가씨께서 살아 계셨더라면 분명…….”
그런 엠마오의 말을,
“어머니 이야긴 이제 그만해.”
아사야는 날에 베인 사람처럼 황급히 끊어 놓았다.
“혼자 생각하게 해 줘, 지금은…….”
그러고는 창가를 향해 돌아서 앉았다. 대화를 원치 않는 아가씨를 위해 엠마오는 천천히 자리를 비켜 주었다.
그런들 홀로 남은 아사야의 머릿속에 어떤 좋은 생각이 떠오르진 않았다. 그녀의 머릿속은 그저 하얗게 질려 있었다. 어찌해야 좋을지 조금도 알 수 없었다. 그녀에겐 제 승낙으로 하여금 빚어질 일들과 거절로 하여금 빚어질 일들에 대한 힌트가 조금도 없기 때문이었다.
‘누가 좀 도와주었으면…….’
답답한 마음에 아사야는 침대 구석에 몸을 옹송그리고 누웠다.
‘어머니가 살아 계셨더라면…….’
늘 그랬으면, 바라던 것이 오늘은 더욱 강해졌다.
그럼 여느 숙녀들이 그러듯이 아사야도 엄마의 손을 잡고 기나긴 수다를 떨어 가며 혼사를 결정지었으리라. 그의 외모와 성격, 집안을 논하며 모녀가 함께 예물을 뒤적거릴 터였다. 그러다 웃음을 터뜨리고, 울기도 하고, 무엇이 만족스럽고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따져볼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에겐 어머니는 물론이며 아버지 역시 떠난 지 오래되었고, 남은 가족이라고는 가디엘뿐이었다.
그런 가디엘은 아사야가 이 성을 떠났으면 바라는 눈치였다. 둘째 왕자가 다녀간 것을 알자마자 그는, 야베스 세일산과 혼인하는 것이 최선의 선택인 양 누이의 귓가에 바람을 불어넣었다.
‘이 청혼을 거절하면 가디엘은 나를 더 미워하겠지.’
아사야는 짐작했다.
그의 명령에 따르느라 제 말조차 마음껏 타지 못하는 나날들이 이어질 것이었다. 지금껏 그래 왔듯이 연회 참석이며 외출 하나하나를 가디엘에게 허락받아야 할 것이며 밤이면 꿈속에서나 자유로이 모험을 떠나리라.
그렇게 하루 이틀, 한 달, 몇 년이 지나면, 결국 상대가 누가 되었건 결혼해야 하는 게 귀족가 아가씨의 운명이었다. 그때가 되면 상대는 왕자가 아닐 것이었다.
가디엘이 정해 준 집안의 정해 준 남자와 정략결혼을 하는 것.
그것이 제 앞에 준비된 유일한 운명인 양 생각됐다.
‘아니야…….’
아사야는 생각을 고쳤다.
‘그때까지 내가 살 수는 있을까? 답답하고 외로워서 어떻게 견디지…….’
적어도 야베스 세일산은 이 나라의 왕자였다. 아사야는 그의 상냥하던 태도와 다정한 말씨를 기억했고, 그가 저를 사랑하고 있음을 알았다. 기꺼이 연심을 고백하고 망설임 없는 청혼을 해 온 용기만 보아도 그랬다.
한편으로는 국왕, 사렙탄 세일산의 가족이 되는 것이 아사야는 싫지 않았다. 그는 영웅 베데르의 죽음에 책임감을 느끼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 누구도 아버지를 대신할 순 없었지만, 그러고자 시도하며 아사야의 쓸쓸한 생일을 달래던 이는 사렙탄이 유일했다.
그리고 가브리엘이 있었다.
‘가브리엘, 내 드래곤…….’
아사야는 제 마음 한편을 열어 동굴 속의 드래곤을 바라보았다. 제 말에 대답도 않고 저를 위해 웃어 주지도 않는 거대한 마물. 그 마물이야말로 아사야를 외롭지 않게 하는 유일한 존재였다. 아사야가 웃을 때면 한숨 같은 콧김을 뿜고, 장난을 걸어 댈 때면 비늘을 푸르르 떨기도 하며, 울며 창살에 매달릴 때면……
“아사…….”
아사야는 그의 눈을 기억했다.
크고 또렷한 보라색 눈. 지하 감옥에서 보았던 애처로운 눈…… 그런 눈을 보았기 때문에 아사야는 야베스 세일산의 청혼에 흔들렸고, 또한 흔들리지 않았다. 아사야가 봐온 이들 중 어느 누구도, 심지어는 야베스 세일산조차 가브리엘과 같은 눈으로 저를 보진 않았다.
“아사야.”
눈물이 아사야의 콧대를 타고 가로로 흘러내렸다.
콧잔등에 출렁이며 고이는 눈물을 아사야는 소리 없이 닦아 냈다. 케이지에 갇혀 씩씩거리던 가브리엘의 모습이 뇌리에서 잊히질 않았다.
“그 용 말이야, 네 강아지인지 뭔지.”
아사야의 네 번째 손가락에 벌써 자리한 청혼 반지를 구경하면서, 가디엘이 말했었다.
“드래곤을 갖고 싶으면, 왕자에게 달라고 해. 예물로 말이야.”
야베스의 예물.
지금으로서는 그것만이, 가브리엘을 돌려받을 유일한 기회였다.
사무치는 외로움에 아사야는 어깨를 움츠렸다. 그렇게 쓸쓸한 날들을 남편의 존재와 가브리엘의 애정이 달래 주리라고, 아사야는 의심 없이 믿었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세간이 일 분 일 초를 길다 생각하며 공작가 아가씨의 대답을 기대하고 있었다. 성내를 뒤덮은 웅성거림과 시선들을 따갑게 느끼면서, 아사야는 이틀이 지난 후 청혼에 대한 답을 내놓았다.
저 아사야 아졸은 야베스 왕자님의 청혼을 감사히 받아들여, 아사야 세일산이 될 준비가 되었습니다.
글귀를 적으며 아사야는 두 번이나 펜촉을 뭉갰다. 짧은 문장을 똑바로 적기가 이상하게 힘들었다. 금테를 두른 고급스러운 종이를 세 번째 펼친 뒤에야 제대로 된 서신이 완성되었다.
누군가 물어 온다면, 아사야는 이 혼인이 제 선택이라 대답할 수 있었다. 그러나 거울을 마주 보며 정말로 그러고 싶으냐고 스스로에게 묻는다면, 꿈에서라도 고개를 끄덕일 수 없었다.
가디엘이 보내오는 은근한 압박과 아버지가 없는 성이 주는 컴컴한 외로움으로부터, 아사야는 떠밀리는 모래알처럼 휩쓸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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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성으로 서신이 보내진 뒤로 아사야가 통제할 수 있는 일은 무엇도 없게 됐다.
사렙탄 세일산은 아사야를 며느리로 삼게 된 일에 큰 기쁨을 표하며 성대한 예물을 실은 마차를 이어 보내왔다. 3주 내로 식을 준비할 테니 아무 걱정도 하지 말고, 아사야 아졸로서의 나날을 갈무리하란 전언과 함께였다.
“예물은 이미…… 받은 줄로 알았는데요.”
밀려드는 마차를 멍하니 바라보며 아사야가 말했다.
그러자 백색 마차에서 짐을 내리던 기사가 그녀 앞으로 다가와 섰다. 허리를 깊게 숙여 인사하는 기사의 얼굴을 아사야는 느릿느릿 알아보았다. 2차 마물 전쟁 당시 왕실 기사단을 이끌었던 지휘관, 오늘날 왕의 오른팔이라 불리는 기사, 비아탄 아멕이었다.
단순히 예물 마차를 배달하기 위해 걸음하기엔 거물인 남자였다.
당황해, 아사야는 고개를 숙이며 공손한 인사를 건넸다. 짙은 갈색 수염을 짧게 정리한 턱을 올리며 비아탄이 웃어 보였다.
“이거…… 아가씨께서 저를 알아보실 줄은 몰랐습니다.”
굵직한 목소리에 기분 좋은 웃음이 묻어났다. 놀랐던 마음을 진정시키며 아사야는 그를 따라 미소 지었다.
“아멕 경을 못 알아볼 리 없지요, 송구합니다.”
“아닙니다.”
손사래를 치며 비아탄은 아주 살짝 허리를 숙였다. 저를 올려다보느라 빳빳해진 아사야의 고개를 배려한 동작이었다. 그가 친절한 사람임을 아사야는 알아차렸다.
“이 예물은 폐하께서 직접 보내오신 선물입니다. 중요한 물품들을 아무렇게나 보낼 수는 없지요. 인사도 건네 드릴 겸, 직접 뵙게 되었습니다.”
“아…….”
비아탄의 설명에 아사야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비아탄은 눈치 빠른 기사였다. 그는 아사야가 제 말을, 그리고 당장의 상황을 깊이 이해하진 못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이를테면, 어째서 예물 마차가 두 번에 나뉘어 온 것인가 하는.
한쪽 눈썹을 올리며 비아탄이 말했다.
“야베스 왕자님의 예물은 왕자님 개인의 독단적인 선물이었습니다. 아가씨를 위하는 폐하의 진심을 전하기엔 턱없이 모자랐지요.”
짐짓 무례하게까지 들리는 말이었다. 아무리 왕의 오른팔이라 불리는 남자라 할지라도, 왕자의 예물을 그렇게 평가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아사야는 그런 무례함엔 면역이 없는 아가씨였다.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아사야를 내려다보며 비아탄이 하얀 이를 보였다.
“……라고 말씀하시더군요. 폐하께서.”
전언을 마치며 그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긴장이 턱 풀리는 듯해 아사야는 저도 모르게 그를 따라 웃었다.
“아멕 경.”
허탈한 웃음 소리 끝에,
“저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아사야가 말했다.
비아탄은 급작스레 붉어지는 공작 아가씨의 눈시울을 놀라 바라보았다.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질문에 아사야 역시 그만큼이나 놀란 채였다.
아사야는 황급히 제 입술을 가렸다.
“아니에요…….”
아사야가 고개를 작게 내저었다.
“실언을 했네요. 신경 쓰지 마세요.”
그러나 비아탄은 진중한 얼굴이었다. 가만히 선 채로 그는 아사야의 불안한 얼굴과 화려하기 짝이 없는 아졸가의 성, 줄지어 밀려드는 예물 마차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말했다.
“베데르 경께서는 훌륭한 기사셨습니다.”
묵직해진 목소리에 아사야는 고개를 들었다. 축축해진 호박색 눈동자를 내려다보며, 비아탄은 더는 웃지 않았다.
“그에게 제 목숨을 두 번이나 빚졌습니다. 한 번은 가까스로 갚아 드렸습니다만, 남은 한 번의 빚은 영원히 갚지 못하게 됐지요.”
까칠한 턱과 장난기 많은 눈썹에 가려진 갈색 눈을, 아사야는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울먹이는 아가씨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비아탄은 주먹을 쥐어 제 왼쪽 가슴 위에 붙였다.
“필요하다면 그 빚을 아가씨께 갚겠습니다.”
기사가 맹세했다.
아사야 아졸이 곧 왕자비가 될 여인이 아니었더라면, 비아탄은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췄을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으로서는, 제 심장을 건 맹세만으로도 아사야를 달래기엔 충분한 듯했다.
아사야의 낯빛에서 우울감이 조금이나마 가시자 비아탄은 기사로서의 보람을 느꼈다. 다시금 밝은 미소가 찾아들었다.
“성안에 폐하께서 계시고 제가 있으니, 염려하지 마십시오.”
그 말을 끝으로 비아탄은 말에 올랐다.
기사를 배웅하고자 아사야는 몇 발짝 그를 따라 걸었다. 아가씨께서 말동무를 원하심을 알고, 비아탄은 아주 느릿하게 말을 몰며 아사야와 몇 마디 인사를 더 나누었다.
“다음에 뵐 적에는 제 앞에, 공작가 아가씨가 아닌 왕자비께서 계시겠군요.”
비아탄이 말했고,
“아직은 아닌걸요.”
아사야는 최대한 겸손한 답을 골랐다. 그러자 비아탄은 공작성의 높다란 문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시간의 흐름에는 여유가 없습니다. 우리를 멀리 몰아내지 않는 대신, 기다려 주지도 않죠. 베데르 경께서 그리 말하시더군요, 왕성의 시간은 두 배로 빨리 흐른다고요. 그런 분주함이 싫다고 하셨습니다.”
그 말이 에둘러 건넨 주의임을 알면서도, 아사야는 작은 미소만 지어 보였다. 아버지께서 살아 계셨더라면 이 결혼을 반대했을까요……. 질문이 목 위까지 차올랐다가 사그라들었다. 이제는 돌이킬 수 없게 된 일을 두고 선택의 잘잘못을 따지기란 무의미하다고 생각됐다.
“걱정해 주어 고마워요, 아멕 경.”
아사야의 대답은 간결했다. 순진하고 착한 답은 비아탄의 마음에 피어오른 걱정에 장작이 됐다.
“비아탄이라 부르셔도 됩니다.”
“다음에는…… 그럴게요.”
마침내 기사의 말이 공작성의 문에 다다랐다. 올 때에 비해 짐을 덜었음에도 불구하고 비아탄 아멕의 어깨는 보다 무거워진 채였다.
왕족이라 함은 만인의 머리 위에 선 존재였다. 몇몇 평민들은 아직도 왕족의 몸에는 금색 피가 흐른다고 착각을 할 정도였다. 귀족 사회에서야 겸손과 착한 마음이 장점이 될 테지만, 왕족은 달랐다. 왕성에 침실을 얻어 왕자비로 살 여자라면 겸손할 필요가 없었고 마냥 착해서도 안 됐다.
귀족가에 도는 말에 의하면 비아탄 아멕은 ‘왕족보다 왕족을 잘 아는 기사’였다. 평생을 몸 바쳐 사렙탄 세일산을 보필하며 익히기로, 왕성안에선 걸음이 향한 방향 하나, 한숨을 쉰 타이밍 하나가 치명적인 결함이 되어 돌아오곤 했다.
‘이렇게 여린 아가씨가 견딜 수나 있을까…….’
생각에 잠긴 듯 침묵하는 비아탄을 올려다보며,
“그런데…….”
아사야가 말했다.
“예물이 조금 모자라요.”
아가씨의 말에 비아탄은 심장이 떨어지게 놀라고야 말았다. 그의 주군, 이 대륙의 왕, 사렙탄 세일산이 보내온 예물은 마차 열 개에 싣고도 모자라 기사단의 말들을 대동할 수준이었다.
부귀한 공작가의 여식이래도 그런 성의를 두고 ‘모자라다’는 표현을 쓸 순 없었다.
“정확히 무어가 모자랍니까?”
조심스럽게, 비아탄이 되물었다.
“정확히, 한 마리가 모자라요.”
성문을 넘지 않고 멈춰 선 채 아사야가 말했다. 비아탄의 말은 느릿느릿 그녀를 지나쳤다.
“그렇게 말씀드리면, 야베스 왕자님께서 알아채실 거예요.”
아리송한 전언을 품고서, 기사는 아졸 성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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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졸가 성은 그 어느 때보다 조용한 밤을 맞이했다.
공작부인이 별세했을 때 울음소리로 그 자리를 메웠고, 영웅 베드로의 사망 소식에 화단을 가꾸며 슬픔을 삭이던, 언제까지고 성안에만 머무를 것 같던 아졸가의 꽃, 아사야 아졸이 왕성으로 떠나기 전 마지막 밤이었다.
축복을 전하면서도 집사와 하인들은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기사단조차 공작 영애께서 덜컥 떠나실 줄 몰랐다며 고개 숙였다. 모두에게 아사야는 조용한 인사를 전했다.
가디엘의 차례는 아주 마지막이었다. 말을 타고 긴 산책을 떠났다가 늦은 밤에 돌아온 그를 만나기 위해 아사야는 아버지의 서재로 찾아갔다.
노크를 해도 방 안에서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평소 같았더라면 외면에 그렇구나 응했겠지만 오늘만큼은 착한 누이조차 그럴 수 없었다. 오늘이 지나면 또 언제 가디엘과 단둘이 대화할 수 있을까 몰랐다.
“가디.”
서재 문은 다행히 잠겨 있지 않았다. 문을 열자마자 아사야는, 승마하던 차림새 그대로 의자에 앉은 가디엘을 바라보았다. 짧은 머리칼은 바람을 맞은 듯 날려 있었고 재킷은 벗어 던져둔 채였다.
외출용 흰 셔츠와 가죽 구두까지 아사야는 느릿느릿 살폈다. 가디엘의 모든 모습에서 아버지의 그림자가 묻어나는 듯했다.
다른 점이라면 아버지의 앞에는 열 살이 채 안 된 어린 자신이 있었지만, 가디엘의 앞에는 술잔이 놓였다는 부분이었다.
“내일이면 나는 떠날 거야, 가디.”
향수에 빠지지 않으려 애쓰면서, 아사야는 최대한 단정한 목소리를 냈다.
“이 성은 우리들의 집이니까, 가디가 잘 지켜 줘. 늘 건강하고…….”
“네가 내 걱정을 다 하는군.”
술에 취한 가디엘은 그렇지 않은 때보다 아사야에게 친절했다. 그래 봐야 그녀의 말을 무시하지 않고 제때 대답을 들려주는 것뿐이었지만, 아사야는 그 정도의 반응에도 만족하곤 했었다.
이젠 그런 날들도 등 뒤로 넘겨 보내야 했다.
“당연히 걱정하지, 가디는 내 유일한 가족인데.”
작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아사야가 말했다.
“아마 나는 평생 가디를 걱정할 거야. 모두가 가디는 괜찮다고, 영웅이라도 말해도…… 나는 평생 그럴 거야.”
단 한 번도, 아사야는 제 오빠에게 거짓말을 한 적 없었다. 그런 누이를 알기에 가디엘도 그녀에게 완전히 매몰차지는 못했다.
물끄러미 아사야를 바라볼 적에 가디엘의 몸은 왼편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횅한 소매 한 짝이 의자 팔걸이에 걸린 채 흔들거렸다. 내일이면 떠나는 누이를 위해 가주로서, 그리고 오빠로서 무얼 해야 할지 그는 골몰했다.
아버지였더라면 그녀를 안아 주고 사랑한다 말했으리라. 아사야 역시 제 오빠에게 그렇게 친밀한 인사를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러기에는, 가디엘에겐 팔 하나가 없었고 사랑이라는 단어는 입 밖에 내 본 적도 없었다.
그래도 도의상으로나마 인사말을 꾸려 내야만 했다. 수많은 단어들이 그의 머릿속에 차올랐다가 흩어지기를 반복했다. 무어라 말하려 입을 열었다가 다물기를 한참,
“넌 괜찮을 거야.”
힘겹게 가디엘이 말했다.
“넌 젊고 아름다우니까. 모두가 널 사랑할 테니 괜찮을 거야.”
그에, 아사야의 미소가 희미해졌다.
“가디 말이 다 맞았으면 좋겠어.”
소망을 담은 말도 환청처럼 머무르다 흩어져 버렸다. 가디엘은 제가 누이를 실망시켰음을 알았다.
“술은 그만 마셔, 가디엘 경에게 감히 이런 말을 하는 유일한 사람은 내일이면 왕성으로 떠나니까.”
말을 마치고, 아사야는 돌아섰다. 언제고 작아 보이던 누이의 어깨는 오늘따라 더욱 좁게 느껴졌고 동그란 이마와 얼굴은 거듭 유년기를 연상케 했다.
가디엘은 유리잔에 남은 한 모금의 술을 마저 입 안에 털어 넣었다.
“……짐은.”
그리고 말했다.
“짐은 다 챙겼어?”
누이를 바라보지 않고서 묻는 말이었다. 아사야는 문간에 선 채 가디엘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무뚝뚝한 가디엘의 얼굴에는 여전히 이렇다 할 표정이 없었다.
“엠마오를 데려갈 거야. ……나는 그거면 돼.”
소리 없이, 아사야는 서재 문을 닫았다.
복도에서 이 방의 참나무 문을 바라볼 때면 방 안에 아버지가 계실 것만 같은 착각이 일곤 했었지만 이젠 아니었다. 이제 아사야는 참나무 문을 바라볼 때, 문 너머에서 가디엘이 웃고 있을지 울고 있을지 그것만을 궁금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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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왕자의 결혼식 당일에는 날씨가 무척 좋았다. 신전에서는 혼기가 찬 첫째 왕자보다 먼저 둘째를 결혼시키는 것에 하늘이 노여워할 것이라 말했지만 죄 허튼소리였다. 왕성의 하늘은 그 어느 때보다도 푸른빛이었다.
모든 것이 풍성하며 큰 결혼식의 날, 정작 식의 주인공인 아사야는 무얼 구경할 겨를조차 없었다. 드레스를 입는 것부터가 전쟁의 시작이었다.
‘후…….’
심호흡을 하며 아사야는, 저를 둘러싼 시녀 여섯 명과 눈앞에 펼쳐진 드레스를 바라보았다.
어깨 살갗은 물론이며 목둘레까지 비침 없이 감춘 드레스는 일자형으로, 우아하면서 고와 보이는 백색이었다. 아사야의 몸매에 정확히 맞추기 위하여 허리 옆면은 아직 재봉되지 않은 채였다.
속옷의 끈을 아주 단단히 조인 채 아사야는 드레스를 걸쳤다. 그러고는 몸을 곧게 펴고 서야만 했다. 재봉사들이 그녀의 살갗에 바늘이 닿지 않는 한도 내에서, 최대한 옷을 당겨 꿰매었다. 그렇게 허리를 바짝 죈 드레스가 완성되었다.
“아름다우세요.”
재봉사와 시녀들이 속삭였다. 만족스러운 미소들이 아사야에게 시사하는 바는 이랬다.
‘오늘 뭘 먹거나 마실 생각은 추호도 마세요.’
손목을 덮는 새하얀 소매를 정리하자마자, 시녀들은 풍성한 로브를 가져왔다. 예비 왕자비를 더욱 화려하게 꾸밀 포장지였다. 폭이 넓고 기다란 로브 소매는 땅에 끌릴 정도였고 전면에 수놓인 금사는 움직임에 따라 파도처럼 빛을 내며 일렁거렸다.
백색 드레스 위에 금빛 로브를 걸치고, 두 옷이 한 벌인 양 보석이 촘촘히 박힌 단단한 벨트로 앞을 조이고 나면, 다음은 머리를 다듬을 시간이었다.
“우선 틀어 올려요, 그 뒤에 얼굴을 꾸며 드리고…… 베일에 머리칼을 엮어 땋을 거예요.”
시녀들이 우르르, 왕자비의 머리칼에 매달렸다.
아사야가 믿을 이라고는 저와 함께 떠나온 유모, 엠마오뿐이었다. 아가씨의 긴장을 달래기 위해 엠마오는 아사야의 보드라운 손바닥을 누르며 안마를 해 주었다. 그마저도 긴 장갑을 끼기 전까지의 일이었다.
머리와 얼굴을 치장하는 데에만 다시 수 시간이 걸렸다.
가디엘의 팔짱을 낀 채 식장으로 걸어 들어갈 때에 아사야는 이미 녹초나 다름없었다. 꽉 죈 속옷 때문에 숨을 쉬기가 불편했다. 두꺼운 베일 탓에 앞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베일 밖으로 들리는 소리와 보이는 실루엣으로 미루어, 아주 많은 사람들이 제 주위를 둘러싼 것은 알았다.
‘안 보이는 게 차라리 다행일지도 몰라.’
꼿꼿이 허리를 세운 채 아사야는 야베스 세일산의 인영 앞에 멈추어 섰다. 오빠의 팔을 놓고 남편 될 남자에게로 넘어가려 할 때, 묘하고 짧은 머뭇거림이 아사야의 발목을 잡았다.
가디엘이 그녀의 팔뚝을 쥐고 놓아주지 않아서였다.
“…….”
당황한 채 아사야는 시선만을 움직여 가디엘의 얼굴을 살피려 했다. 희뿌연 윤곽이 언뜻 어린 날 보았던 아버지의 얼굴 같았다.
머뭇거림은 그러나 길지 않았다. 야베스가 손을 뻗어 오자 가디엘은 천천히 누이를 놓아주었다. 아사야의 팔뚝에, 저를 꼭 쥐던 오빠의 손아귀 온도가 희미하게 남았다.
아사야에게 혼인의 기억은 온통 하얗기만 했다. 찬란하고 반짝이는 모든 것들이 흰 베일 너머에만 존재했다. 무어라 질문을 받고 서약의 맹세를 읊조리기는 하였지만, 모든 감탄과 약속의 말들조차 남의 것 같았다.
제게 키스하기 위해 다가오는 야베스의 얼굴 역시 낯설기 그지없었다.
‘괜찮아.’
눈을 감고 왕자님의 입맞춤을 받으며 아사야는 생각했다.
‘괜찮아야 해.’
공식적으로, 그녀의 인생은 아사야 세일산으로서의 첫 페이지에 접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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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미한 하루를 마치면서 정신을 차렸을 땐 어두운 창문이 보였다. 사각형의 프레임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아사야는 두 눈을 깜빡거렸다.
‘몇 시지?’
말하기 민망한 부위들이 지끈거리며 아려 왔고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누군가 제 관자놀이를 무거운 추로 꽉 짓누르는 것 같았다.
“괜찮아.”
조용한 침묵을 낮은 목소리가 부쉈다. 제 잠자리에 다른 이가 있는 것이 낯설어 아사야는 화들짝 놀랐다. 고개를 돌리자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고 앉은 야베스가 보였다.
어깨와 맨가슴을 드러낸 채 그는 알몸이었다.
“아…….”
다급히 시선을 피하며, 아사야는 이불을 끌어당겨 제 몸을 가렸다.
그제야 부부 침실이 눈에 들어왔다. 컴컴한 어둠 속에서도 벽면 장식들은 반짝이고 있었다. 벽면의 꺼져 가는 벽난로와 빳빳한 벨벳 질감의 소파, 소파 위에 널브러진 드레스 로브, 밝은 색 카펫, 그리고 제 몸을 눕힌 침대에 이르기까지 아사야는 찬찬히 눈을 굴렸다.
붉은 커튼을 기둥 사면에 묶은 침대는 2인용이라 치기에도 넓었다.
“초야를 치르며 기절하는 처녀가 하나둘이 아니라더군. 모두 용서할 테니, 걱정할 것 없어.”
야베스가 말했다. 무척 관용적인 태도였다. 그럴 적에 그의 말투가 달라져 있는 것을 아사야는 쉽게 눈치채지 못했다.
그저,
‘내가 기절했었구나…….’
깨닫는 게 전부였다.
식에 방문한 모든 이들에게 베푸는 마음으로, 사렙탄이 개최한 저녁 연회에 참석한 것도 기억났다. 야베스와 함께 부부 침실로 걸어와 답답한 드레스를 벗은 것도 기억났다. 결혼 서약에 종지부를 찍자던 말도, 뜨끈한 그의 손바닥도, 무거운 근육 밑에 짓눌려 옴짝달싹할 수 없던 것까지도 모두 기억했다.
눈처럼 하얗던 아사야의 목덜미와 어깨에 온통 발간 자국이 남아 있었다.
천천히, 아사야는 제 남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꾸밈없는 모습일 적에 그는 다른 사람 같았다. 늘 깔끔히 넘겨 두었던 금발 머리칼은 이마 위로 흩어져 있었고 얼굴에는 긴장 한 올 없었다.
소매 끝까지 단정하게 감싸던 옷가지도 없는 남자의 상체를, 아사야는 낯설게 훑어보았다. 그녀에 반해 야베스는 무척 여유롭고 편안한 모습이었다.
그는 기쁜 사람처럼 웃고 있었다.
“공작가에서의 생일 연회가 기억나는군.”
그리고 속삭였다.
“그날 이후 내내 너와 결혼해야 되겠다고 생각했었지. 돌아오는 마차 안에서 네 이야기를 끝도 없이 늘어놓더란 말이야……, 잘난 형님께서 말이야.”
그의 말을 이해하기 위해 아사야는 아픈 머리를 굴려야 했다. 초야를 치른 밤 제 남편이, 왜 갑자기 형님에 대해 말하기 시작하는지 그 심리를 조금도 추측할 수 없었다.
“넌 하늘이 내린 선물이야, 아사야. 본도 세일산을 바람맞힌 여자가 내 것이라니. 선물이고말고…….”
이어진 말에 아사야는 두 눈을 둥그렇게 떴다. 첫째 왕자를 바람맞히다니, 그런 기억이 아사야에겐 없었다. 야베스가 중얼대는 모든 말이 금시초문이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아사야가 되묻자 야베스는 한쪽 눈썹을 올려보였다. 삐딱한 표정을 지으며 그는 아사야의 놀란 얼굴을 구경하다가, 제 아내가 내숭을 부린다 생각했는지 실소했다.
“편지에도 답을 주지 않고 선물들은 모두 돌려보냈다지? 천하의 본도 세일산이 어찌나 우울해하던지, 네가 그 표정을 봤어야 하는 건데.”
‘그게 대체…… 무슨 말이야?’
본도 세일산으로부터 온 편지며 선물들은 물론이며, 아사야에게는 그가 저를 좋아했었다는 사실 자체가 날것이었다. 어렴풋이, 저를 볼 때면 웃음을 감추지 못하던 얼굴이 생각나는 것도 같았다…… 연회장에서 귀엽다는 양 내려다보던 얼굴도 기억났다.
그러자 복잡한 감정들이 해일처럼 밀려들기 시작했다. 가디엘을 향한 원망이 가장 먼저 고개를 들었다. 사렙탄이 보낸 생일 선물들을 전해 주지 않는 것은 알았지만, 왕자가 쓴 편지까지 빼돌릴 줄은 꿈에도 몰랐었다.
이어서 아주 잠깐은, 제 옆자리에 앉은 남자가 야베스 세일산이 아니라 본도 세일산일 수 있었단 사실에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그녀를 둘러싼 어느 누구도 그런 말은 아주 작고 티끌 같은 힌트로나마 전해 준 적 없었다.
다음으로는 사무치는 속상함에 얼굴이 발개졌다. 어찌 되었건 제 남편은 야베스 세일산이었다. 아사야에게는 제가 결혼한 상대가 첫째 왕자이냐 둘째 왕자이냐 하는 문제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새로운 가족이 되어 줄 남자가 저를 사랑하고 외롭게 두지 말았으면 바란 게 전부였다.
그러나 지금, 야베스에게 아사야라는 아내는 그저 트로피에 불과한 듯했다.
“부끄러워할 것 없어, 아사야. 도도한 것도 네 매력 중 하나였으니까. 이제부터 고쳐 나가면 그만이지.”
“…….”
그의 뻔뻔한 말에 아사야는 어떤 대꾸도 할 수 없었다.
‘내가 누구랑 결혼해 버린 거지?’
그녀는 야베스 세일산에 대하여 조금도 몰랐다. 그가 어떤 남자인지, 어떤 성격을 가졌으며 무엇을 추구하며 살아왔는지, 아주 약간의 사적인 정보조차 아사야에겐 없었다.
심지어는 즐거운 듯 웃는 얼굴조차 오늘 처음으로 마주하는 것이었다.
어제까지 그는 친절한 듯 보였지만 오늘은 아사야에게 반말을 쓰고 있었다. 상냥하고 진솔한 듯한 태도도 더는 보이지 않았다. 누군가 이전의 왕자를 뺏어 가 놓고 아주 나쁜 가짜를 옮겨다 둔 듯했다.
‘아니……, 사실 이제까지가 가짜였던 거라면?’
다소 혼미해진 어린 신부를 곁에 놓고,
“말투부터 바꾸는 게 좋겠군. 좀 더 알랑거려도 괜찮겠어, 나는 네 남편이니까.”
야베스가 말했다.
남편이라는 자격을 꼬집는 말에는 틀린 부분이 없었다. 아사야는 이제 야베스의 아내였고, 그를 사랑하며 그에게 충실해야만 했으므로.
무어라 답할 말을 찾지 못해 아사야는 입을 다물었다.
언제 다시 만날지 모를 늙은 후작에게야 그 무례를 지적하는 일이 쉬웠었다. 그러나 야베스 세일산은, 후일 평생을 마주 보며 살아야 할 제 남편이며 가족이었다.
“알았어요.”
애써 덤덤한 척 아사야가 대답했다.
“대신에…… 주세요, 저에게 약속하신 것.”
누구를 대할 적에 차가워지는 방법을, 아사야는 일찍 배웠다. 저에게 무얼 해 주리라는 기대를 버리고, 저 역시 무얼 해 주겠다는 마음을 버리면 그만이었다.
어차피 그녀 역시 야베스 세일산을 사랑하지는 않았으므로, 눈물 흘리며 비운의 여주인공이 되어 줄 마음은 없었다.
저를 향한 사랑이며 진실된 애정은, 그에게 바란 것 중 서너 번째에나 속하던 것이었다. 가장 중대한 조건은 따로 있었다. 아사야를 위한 진실된 애정은, 그 첫째 조건이 충족시켜 줄 것이었다.
그러니 그 조건에 대하여,
“약속한 것?”
야베스 세일산이 금시초문이란 표정을 지어서는 결코 안 됐다.
“난 약속한 것 따위 없는데? 뭘 말하는 거지?”
그 반응에 아사야의 심장은 마침내 내려앉는 듯했다.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심장 소리가 퍽, 퍽, 둔하고 과격하게 울려 대기 시작했다. 살아오며 그렇게까지 놀란 일은 처음이었다.
“드래곤 말이에요!”
놀란 아사야의 언성이 커졌다.
“예물로…… 주시기로 하셨잖아요, 그렇게 말을…… 전달 드렸을 거예요, 비아탄 경께서…… 공작성에 찾아오셨을 때.”
“비아탄? 비아탄 아멕한테 그런 말을 했다고?”
놀란 아사야의 반응에도 야베스는 끄떡조차 하지 않았다. 덤덤하기 짝이 없는 반응에 아사야는 혼이 다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마음속에 혼란과 분노, 그리고 설움이 들어찼다.
그러면 도대체 무엇 때문에, 뭘 위해서 그와 결혼했단 말인가. 이제 아사야에게는 선택을 돌이킬 방법도, 과거로 돌아갈 길도 없었다.
울컥 눈물이 차올랐다. 울먹거리며 아사야는 입을 벙긋거렸다. 무어라 말을 하려다 다물기를 반복할 때 그 모습은 정원에서 숨 막혀하던 아픈 아이나 다름없었다. 이제 그녀에게는 기침을 멈추라고 달랠 오빠도 그녀를 안아 들고 달릴 아버지도 없는 채였다.
그리고,
“풉, 하하…….”
야베스 세일산이 웃기 시작했다.
“울지 마, 아사야. 그렇게 놀랄 것까진 없잖아.”
“뭐…….”
제 앞에서 폭소를 터뜨리는 야베스를, 아사야는 텅 빈 눈으로 바라보았다. 어린 아내의 반응에 아랑곳 않고 야베스는 목이 붉어지도록 웃어 댔다.
“뭐 하는…… 거예요? 왜…….”
쿵쾅대는 심장과 떨림의 여운으로 아사야는 간단한 문장조차 쉽게 뱉지 못했다. 그렇게 몸을 떠는 아사야에게, 야베스는 협탁에 두었던 목걸이를 쉽게 내밀었다.
“자.”
은사로 된 목걸이 줄 가운데에 묵직한 열쇠가 걸려 있었다.
“당신 예물을 내가 잊었을 리 없지. 장난친 거야, 귀엽게 구는 걸 보고 싶어서. 받아.”
떨리는 손을 내밀어 아사야는 그가 건넨 열쇠를 잡았다. 그래도 야베스는 끈을 완전히 놓지 않았다. 어느새 미소를 지운 얼굴로 그는 물끄러미, 아사야의 두 눈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
마른침을 넘기며 아사야는 입을 열었다.
“고마워요.”
그리고 인사했다. 그제야 야베스가 끈을 놓아주었다. 드래곤을 가둔 지하 감옥의 열쇠가 그녀의 손아귀에 들어왔다.
목걸이를 맨목에 걸고 아사야는 이불 안으로 들어가 천천히 돌아누웠다. 열쇠를 꽉 쥐어 주먹을 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제 등 뒤에 누운 야베스 세일산을 시작으로, 저를 둘러싼 모든 것을 향한 분노가 느릿느릿 치밀었다.
뜬눈으로 그녀는 사각 창문을 아주 길게 노려보았다. 더는 잠도 오지 않았고 피로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주 잘못된 남자와 결혼해 버렸다. 그 사실만큼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 *. *. *. *. *.
왕자비가 되어 맞이한 아침은 홀로였다. 답지 않게 아사야는 아주 늦잠을 잤고, 깨어났을 때 그녀의 남편은 이미 외출한 뒤였다. 폐하와 함께 두 왕자님들께선 사냥을 떠났다며 시녀들이 알려 주었다.
“곤히 주무시고 계셔서 깨우지 않았어요.”
주근깨 많은 시녀가 소곤거렸다. 그녀들에게 비친 제 모습이 어땠을지 아사야는 추측해 보았다. 야베스의 흔적이 남은 피부는 얼룩덜룩했고 이불보에도 피가 묻어 있었다.
시녀들에게 제 첫인상이 엉망진창이겠구나 생각하며, 아사야는 침대 위에 바로 앉았다. 하수인에게 알몸을 보이는 것에 익숙한 아가씨의 행동이었다. 시녀들은 얼른 내의를 가져와 건넸다. 프릴이 달린 예쁘장한 원피스였다.
아사야는 고개를 저었다.
“먼저 씻고 싶어.”
그러자 시녀들의 발걸음이 신속해졌다. 그들만큼이나, 엠마오도 바빴다.
햇수로만 27년을 아졸가 성에서 일해 온 엠마오는 놀랍도록 빨리 적응을 마친 채였다. 그녀는 둘째 왕자비의 수발을 맡은 시녀들의 이름을 벌써 꿰었다. 아사야가 무얼 좋아하고 무얼 싫어하는지, 무엇에 알레르기가 있고 몇 시에 차를 마시는지 모든 정보들을 일러 둔 상태였다.
덕분에 시녀들은 미리 준비해 둔 욕조와 데워 둔 물을 가져왔다. 얼마 기다리지 않고 아사야는 욕조에 몸을 담글 수 있었다.
‘조금 살 것 같아…….’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근 채 아사야는 느릿느릿 눈을 감았다.
이따금 엠마오는 놀라울 정도로 아사야의 마음을 잘 읽곤 했다. 늘 수다를 길게 늘어놓던 그녀가 오늘은 어떤 질문도 하질 않았다. 아사야가 가장 걱정했던, 왕자님과의 초야가 어땠느냐는 질문 역시 없었다.
“아가씨.”
대신에 엠마오는 필요한 보고를 올렸다.
“여쭈셨던…… 드래곤 일 말씀이에요.”
“가브리엘 말이야?”
“네.”
좋은 눈치를 발휘해 엠마오는 ‘드래곤’의 호칭을 ‘가브리엘’로 고쳤다. ‘가브리엘’이라는 이름으로 부르자니, 그 존재가 아가씨의 새로운 강아지라도 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가브리엘이 식사하기 전이라, 당장은 위험해서 방문이 어려우시다고 하네요.”
“…….”
“공복에 사나울 수도 있다고요.”
따듯한 목욕에 풀렸던 아사야의 마음이 다시금 답답해졌다. 욕조 팔걸이를 손가락으로 두들기며 아사야는 제가 들은 말을 이해하려 애썼다. 식사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가브리엘이 위험해지는 짐승이던가? 답은 ‘아니요’였다.
아무래도 왕성의 그 누구도 가브리엘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6년이나 데리고 있었으면서…….’
아가씨의 차가워진 어깨를, 엠마오는 따듯한 수건으로 감싸 주었다. 그녀의 안마에 몸을 맡기며 아사야는 애써 미소 지었다.
“그럼, 언제쯤 만날 수 있을까?”
“가브리엘을 식사시키고, 목줄을 채운 뒤에 알려 주겠다고 했어요.”
엠마오가 저를 위해 애썼으리란 건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아사야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 말을 받아들이려 했다. 그러나 넘치는 실망감까지 감출 수는 없었다.
왕자비의 신분으로 왕성에 와 처음으로 하고자 한 일이었다, 제 예물이자 저의 친구인 가브리엘을 만나는 것. 그것조차 제 마음대로 이뤄지지 않는다는 게 믿기지가 않았다. 이내, 아사야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구나 생각했다.
공작가의 아가씨이건 왕자비이건 같았다. 가브리엘을 만날 수 없어 애타는 마음도 여전했고 누군가의 허락을 기다리는 시간 역시 여전했다.
.*. *. *. *. *. *.
그렇게 텅 비어 버린 오전을, 아사야는 글을 적으며 보내고자 했다. 그녀의 편지를 받을 이는 가디엘 아졸이 유일했다. 이제는 서로 다른 성을 나눠 갖게 된 그녀의 오빠.
침실에는 마땅한 책상이 없어 아사야는 티 테이블에 팔을 받치고서 글을 써야 했다. 할 일을 찾고 있던 시녀가 얼른 다가와, 화가가 테두리를 그려 둔 편지지 위로 흩어지는 왕자비의 머리칼을 묶어 주었다.
아사야는 거침없이 첫 문장을 써 내렸다.
가디. 나의 결혼식 날 이상한 일이 있었지. 야베스 왕자에게 나를 넘겨주기 전에 아주 잠깐이지만, 네가 망설인 것 같았어. 내 착각이었을까? 가디, 사실은 나를 떠나보내고 싶지 않았던……
펜촉이 우뚝 멈췄다. 아사야는 인상을 헝클였다.
바보 같은 문장이었다, 가디엘은 언제고 제 누이를 떠나보내길 원했으니까.
제 희망사항에 불과한 글귀를 아사야는 구겨 버렸다. 그리고 두 번째 편지를 적어 나갔다.
가디, 왜 내게 본도 왕자님의 선물을 전해 주지 않았어?
그 질문에 가디엘이 답장해 올 가능성은 매우 낮았다. 아사야는 다시 편지를 구겼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가디는 내가 아는 이들 중 가장 바보야. 순진한 건 내가 아니라 오빠였어. 나는 아름답고 젊으니 괜찮을 거라며? 가디의 말처럼 내가 사랑만을 받고 자란 행복한 인간이라면 왜 이토록…….
또다시 값비싼 종이가 아사야의 손 안에서 구겨졌다. 네 번째 종이를 깔고 아사야는 한숨 쉬었다. 펜촉은 벌써 잉크로 축축했다.
가디, 우린 속았어. 야베스 세일산이 날 속인 것처럼 오빠도 속인 거야. 그는 가디가 생각하는 것처럼 날 사랑하지 않아. 어젯밤에 난 기절했어…….
머뭇거리다, 아사야는 다시 편지를 구겼다.
시녀들은 서로 간에 눈치를 살피며, 슬픈 사람처럼 창가에 선 왕자비를 지켜보았다.
아름답고 어린 주인님을 모시게 된 것에 오전까지 들떠 있던 그녀들이었다. 그러나 아사야 아졸, 이제는 아사야 세일산이 된 왕자비는 아름답기는 하였으나 마냥 어린 소녀처럼은 보이지 않았다.
느릿한 걸음으로 아사야는 다시 테이블 앞에 앉았다.
친애하는 나의 오빠에게.
그리고 느릿느릿 펜을 움직였다. 조금 전과 달리 그녀의 얼굴은 무표정해졌다. 끓는 듯 표정으로 드러나던 감정들도 삭인 지 오래였다.
우리의 성은 여전히 밝고 따듯하겠지? 다음 주면 매년 정원에 꽃씨를 뿌리던 날이야. 하인들이 귀띔했나 모르겠어.
성문 앞 화단에 아버지께서 좋아하시던 금작화를 심어 줘. 스파티움으로 울타리를 노랗게 물들여도 좋겠어.
가디. 아버지께서 어머니를 기억하셨듯이, 가디도 노란 꽃으로 날 기억해 주었으면 해. 떠났어도 그곳이 내 집이니까.
내 침대가 그립고 아버지의 서재가 그리워. 왕성에서 머무르는 나의 침실은……
또 한 번, 아사야는 손을 멈추었다.
나의 침실은 아주 넓고 화사한 방이야. 볕이 아주 잘 들어.
때로는 거짓말이 진실보다 나을 때가 있었다. 거짓말엔 힘이 들지 않았다. 거짓말엔 감정이 소모되지 않았다. 착한 거짓말은, 듣는 이를 상처 입힐 진실보다 백배 나았다. 적어도 아사야는 그렇게 믿었다.
9월에는 예쁘게 자란 꽃가지를 내게 보내 줘. 건강하길 바랄게.
집사 할아버지에게 안부를 전해 달란 추신을 끝으로, 아사야는 펜을 내려놓았다.
.*. *. *. *. *. *.
그리고 기다림의 시간이 이어졌다. 준비되는 대로 소식 전하겠다던 경비대로부터는 여전히 연락이 없었다. 엠마오가 세 번이나 경비대를 찾아갔지만, 기쁜 소식 없이 터덜터덜 돌아온 게 전부였다.
아사야가 머무르는 침실과 가브리엘을 가둬 놓은 지하 입구의 거리는 걸어서 20분은 소요되는 정도였다. 그 거리를 60대 초반의 유모가 네 번째 오갈 적에, 아사야도 별수 없이 화가 났다.
“드래곤이 아가씨를 해칠까 염려해서 그런다네요.”
땀이 묻은 옷깃을 손수건으로 닦아 내며 엠마오가 말했다.
“결박 마법을 써 줄 신관이 곧 도착할 거라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 봐요.”
아사야는 눈을 가늘게 떴다. 가브리엘을 만나는 일에 결박 마법 따위는 필요하지 않았다. 만에 하나 그가 누구를 해친다 해도, 그건 제가 아닐 것이었다. 사람들은 그 사실을 모르는 듯했다.
‘날 지키기 위해서라고?’
오전부터 지속된 기다림은 벌써 저녁을 맞이하고 있었다. 창밖으로 벌써 노을이 지고 있었다.
왕성에서의 첫날을 이렇게 허비할 순 없었다.
“외출을 해야 되겠어.”
아사야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녀를 따라, 지친 듯 납작한 쿠션이 깔린 카우치에 앉아 있던 시녀들도 엉덩이를 일으켰다.
“어딜 가시게요?”
“피크닉을 갈 거야, 다 같이. 준비해 줘.”
시녀들과 ‘다 같이’ 피크닉을 떠나는 귀족은 세상에 없는 법이었다. 주인이 피크닉을 떠난다면 시녀의 역할은 준비물을 옮긴 뒤에 조용히 빠지는 일이었다.
말씀하신 ‘다 같이’에 저희들도 포함되는 것이냐고 묻고 싶어 시녀들의 입술이 씰룩거렸다. 그러나 예의를 갖추기 위해 그녀들은 입을 다물고 빗과 외투를 들었다.
개중 어린 시녀가 아사야의 머리를 아주 훌륭히 땋아 주었다. 틀어 올린 머리를 거울에 이리저리 비추어 보다가 아사야는 고개를 끄덕였다.
준비된 연두색 드레스는 호숫가 꽃밭에서 책을 읽는 영애의 것 같았다. 소매 폭은 짧았고 어깨와 스커트에 푹신한 주름이 잡혀 있었다. 지금은 세상을 뜬 왕비께서 병을 앓을 적에, 제 아들들의 부인을 위하여 미리 준비해 두었다는 드레스였다. 세련된 디자인은 아니었지만 ‘클래식은 영원하다’는 말을 믿는 아사야의 마음에는 쏙 들었다.
그러나 볼 위로 리본을 내린 보닛은 너무 어린아이의 것 같았다.
“모자는 쓰지 않을래. 예쁘게 땋은 머릴 망치고 싶지 않아.”
그러자 왕자비의 머리를 땋아 준 시녀가 볼을 발갛게 붉혔다.
피크닉 준비를 위해 떠났던 시녀도 빠른 걸음으로 돌아왔다. 바구니에는 왕자비가 주문한 소고기 샌드위치, 십자로 금을 낸 호밀빵, 유리병에 담은 우유가 들어 있었다.
오로지 유모와 시녀 셋만을 대동한 채 아사야는 피크닉을 떠났다. 그러나 도착지는, 아름답기로 왕성이 자랑하는 호수 정원의 흔들 그네가 아니었다.
아사야 세일산의 발이 닿은 곳은 드래곤을 가두어 놓은 지하 감옥의 강철문 앞이었다. 경비대원 두 명이 그 앞을 지키고 서 있었다.
“비켜 주세요.”
턱을 들고 아사야가 명령했다.
“내 예물을 보러 왔어요.”
갑작스레 닥쳐온 왕자비를 맞이하며 경비대는 쩔쩔매기 시작했다. 안전상의 문제라며 그들은 블랙 드래곤이 얼마나 포악하고 못된 종족인지를 설명했다.
엠마오가 벌써 네 번은 듣고 돌아온 말이었다.
아사야의 눈썹이 삐뚜름해졌다.
“지금 내 소유물에 대해 나에게 설명해 주는 건가요?”
보닛을 쓰지 않길 천만다행이었다. 그 귀염성 넘치는 모자를 쓰고 있었더라면 경비대는 그녀를 더욱 어리게 보고 ‘보호해 주겠다’며 더 큰 야단을 냈으리라.
“실례되는 질문인 줄은 알지만, 야베스 왕자님께서는 허락하신 일입니까?”
경비대원이 물었다.
“…….”
예의상의 미소를 지우며 아사야는 등을 곧게 폈다. 두 뺨이 화끈해지고 뱃속이 답답해 오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아사야 세일산이었고, 이전에 아사야 아졸이었다. 아버지께서는 아사야에게 비단, 공작성안에서 꽃처럼 사는 방법만을 알려 주진 않았다. 그는 누구이건 감히 제 딸에게 무례하게 행동할 것을 염려했고, 가장 빠른 대처법 역시 일러 주었다.
“책임자가 누구죠?”
아사야가 물었다.
경비대원들은 당황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기 바빴다.
“이, 이곳을 지키는 책임자는 저희들입니다.”
“감옥 말고, 당신을 책임지는 상사 말이에요.”
그제야 경비대원은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눈앞에 선, 꽃처럼 아름답고 여린 얼굴을 지닌 왕자비는 예쁘고 순진하기만 한 소녀가 아니었다.
“불러와요.”
두 번 말하지 않겠다는 듯, 아사야는 그들에게서 시선을 치웠다. 그러고는 단단히 닫힌 철문을 노려보았다.
왕자비가 앉지도 않고 선 채로 기다린다는 소식을 전달받고 경비대장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연마장에서 달아오른 몸에 이마에는 땀이 흐르는 채였다.
어깨 위로 더운 김을 뿜어내는 경비대장과, 피크닉 바구니를 든 시녀 무리의 만남은 매우 이질적이었다.
경비대장에게 아사야는 같은 요구를 했다. 제 예물을 보러 왔으니 감옥 문을 열라는 것이었다. 그러자 경비대장은 이제까지 아사야가 들어 온 이야기를 반복하기 시작했다.
“안전상의 이유로…….”
눈에 띄는 한숨으로 아사야는 그의 말을 끊어 놓았다. 그리고 읊조렸다.
“책임자 불러와요.”
그렇게 아사야는 십여 분을 더 기다렸다. 경비대장이 쩔쩔매며, 제 딴에는 위한답시고 푹신한 의자를 가져왔지만 아사야는 어떤 반응도 보여 주질 않았다. 꼿꼿이 허리를 세우고 선 채 버틸 뿐이었다.
그녀의 뒤에 선 시녀들도 이때쯤 상황을 파악한 듯했다. 혼란한 듯 고개를 숙인 채 얌전하던 모습들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늙은 유모와 나란히 선 채 시녀들은 죄 없는 경비대원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세 번째 기다림의 끝에, 말을 탄 남자가 도착했다. 은제 미늘갑주를 흉곽에 차고 날렵한 벨트를 허리에 두른 남자였다. 그는 얼른 말에서 내리더니 왕자비에게 달려왔다.
예를 갖춰 인사하는 기사의 정수리를 아사야는 가만히 바라보았다. 말끔한 외모에 준수한 미소를 지을 줄 아는 남자는 귀족 출신으로, 왕실 기사단 소속이었다.
이제야 말이 좀 통하겠구나 생각하며, 아사야가 입을 열었다.
“내 예물을 보려 하는데, 경비대의 모든 남자들이 날 가로막네요.”
그러자 기사가 답했다.
“야베스 왕자님께서도 알고 계신 일입니까?”
대답하는 대신, 아사야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한숨처럼 가느다란 목소리로 읊조렸다.
“책임자를 불러오세요…….”
이 싸움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아사야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제가 먼저 질 마음은 추호에도 없었다.
“왕실 기사단장이신 페드릭 경은 오후 내내 공무 수행 중으로 무척 바쁘십니다.”
기사의 단호한 목소리가 전하는 바는 이러했다.
‘왕자비의 명령일지라도 책임자를 호출하는 일은 여기까지입니다.’
두드러지는 메시지를 읽지 못할 정도로 아사야는 바보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는 명백한 거절을 흘려듣기로 결정 내렸다.
“왕자비의 호출을 받지 못할 정도로 바쁘다는 말인가요?”
아사야의 질문이 떨어지기 무섭게, 기사가 허리를 곧게 세웠다. 그에 비해 키도 체구도 작은 탓에 아사야는 그를 한참 올려다봐야만 했다.
“페드릭 경은 물론이며 왕실의 모든 기사들은 폐하의 명령만을 따릅니다. 함부로 호출을 하셨다가는 폐하에 대한 월권행위로 간주될 수도 있습니다.”
이내 지리멸렬하게만 느껴지던 모든 상황이 완성된 퍼즐처럼 척척 맞아떨어졌다. 경비대원이 네 번이나 유모를 바람맞힌 것에도, 드래곤의 소유자인 아사야 세일산에게 철문을 열어 주지 않는 데에도 이유가 있었다.
야베스 왕자와 결혼했고 정식으로 왕가의 가족이 되었다고 해도, 아사야 세일산은 아내로서 야베스의 소유물일 뿐이었다.
그러니 ‘아사야 세일산의 드래곤’은 여전히 ‘야베스 세일산의 드래곤’이었고, 그의 허락 없이는 홀로 만나 볼 수도 없는 것이었다. 야베스 세일산이 이 상황을 예측하지 못하지는 않았으리라.
아사야는 내면에서 소용돌이치는 자괴감을 받아들였다. 제가 지나치게 순진했다는 것도, 이런 상황을 내다볼 줄 모를 정도로 무지했다는 것도, 야베스 세일산을 잘못 알고 눈을 뜬 채로 사기를 당했다는 것도 모두 받아들였다.
그리고 말했다.
“경께서 내 걱정을 해 주실 건 없어요.”
왕자비의 말에 기사의 눈썹 위에 주름이 생겼다. 그의 삐딱한 표정은 그러나 아사야를 상처 입힐 만큼 강렬하지 못했다. 아사야는 남들이 생각하는 그대로의 어여쁘기만 한 어린 아가씨가 아니었다. 그 누구보다도 무관심과 괄시에 익숙한 외톨이였다.
그런 자격으로, 아사야가 명령했다.
“페드릭 경에게 말을 전해 주세요. 닫힌 철문의 책임자가 내 호출에 응답하고 문제를 해결해 줄 때까지, 나는 이 자리에 꼼짝 않고 서 있겠노라고. 상사에게 짧게 말을 전달할 신임 정도는, 받고 계시겠지요?”
그녀가 말을 마치기 무섭게 기사의 기세등등하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시녀들과 경비대원이 지켜보는 가운데 세일산의 왕자비가 그에게 노골적인 모욕을 준 셈이었다. 기사단장을 찾지 않고 일을 해결해 보려던 게으른 선택이, ‘그 정도 신임도 받지 못하는 부하’로 그 자신을 깎아내리게 만들었다.
제대로 된 대답조차 하지 못하고 주춤거리며 그는 뒤로 물러섰다. 도망치듯이 왕실 기사단장을 모시러 가는 그의 낯짝을 시녀들이 힐끔거렸다. 거의 보라색으로 질린 것이 곰팡이 핀 빵 같았다.
아사야가 속으로 긴 숨을 삼키고, 시녀들이 서로의 얼굴을 힐끔거리며 웃음을 참는 동안 네 번째 인물이 말을 타고 도착했다. 흉터 많은 적갈색 말에서 뛰어내린 그는 은제 미늘갑주나 날렵한 검 따위는 차고 있지 않았다. 대신에 말끔한 정장 차림이었다. 오후 공무를 보느라 바쁘기는커녕 저녁 연회에 참석할 준비에 한창이던 왕실 기사단의 단장, 페드릭 바벨이었다.
“기사단장인 저까지 호출을 하셨으니 제 선에서 끝내면 어떨까 합니다.”
앞뒤 설명을 나눌 겨를도 없이 그가 말했다.
부름에 응할 적에 제 부하에게 대략적인 상황이라 들어 알 테지만, 그건 모멸에 젖은 기사의 일방적인 입장에 불과했다. 저를 호출한 왕자비에게는 그녀가 처한 상황이나 입장에 관하여는 한 마디 질문조차 없었다.
아사야는 작금의 상황을 압축하여 설명할 단어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언제나 ‘이 상황’이 아사야를 절망하게 만들었다. 제가 엮인 제 일인데, 제 입장이나 의견을 묻는 이가 단 한 사람도 없는 경우 말이었다. 어릴 적엔 어리다는 이유로 아버지께서 그리했고, 다 큰 후엔 여자라는 이유로 가디엘이 그리했다.
페드릭의 검은 눈동자를 물끄러미 올려다보며 아사야는 골똘해졌다.
‘내가 여전히 아이인가? 왕자비인 내가, 기사단장에게 그저 여자인가?’
답은 ‘아니요’였다. 때문에, 아사야의 입 밖으로 나온 대꾸가 상냥할 이유도 없었다.
“경께서 무엇도 해결해 주지 않으셨는데, 무얼 어떻게 끝내란 말씀이세요?”
보초를 서는 경비에 이어 경비대장, 왕실 기사, 기사단장까지 불러다 놓고 보니 이상하게도, 아사야는 더 높은 직급의 인물을 마주할수록 더 차분해졌다. 흉곽이 터질 것처럼 커다랗게 부풀었던 긴장감이 물에 젖은 솜처럼 납작해지니 더는 못할 요청이 없었다.
“페드릭 경. 경의 상사를 불러다 주세요.”
왕자비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페드릭의 등 뒤에 선 기사의 낯빛이 변했다. 다시금 벌겋게 달아오른 것이었다. 그 자신이 수치심을 느껴서는 아니었다. ‘왕실 기사단장의 상사가 누구냐’는 질문이 언제고 페드릭 바벨의 아킬레스건임을 알기 때문이었다.
어리숙한 부하와 달리 페드릭은 표정을 감추는 일에 능했다. 망설임 없이 그가 대꾸했다.
“기사단장의 상관은 폐하이십니다. 그 누구라도 천지의 왕이신 폐하를 호출할 순 없습니다.”
“아니잖아요.”
아사야가 그의 말을 끊어 놓았다.
“비아탄 경이 있지 않나요?”
그러자 페드릭의 표정에 작은 금이 생겼다.
보통의 왕성이라면, 왕실기사단의 단장보다 높은 직급의 기사는 없어야 했다. 그러나 사렙탄이 통치하는 이 대륙의 사정은 달랐다. 페드릭 바벨이 왕실 기사단장의 자리에 오른 해부터 그 법칙이 바뀐 탓이었다.
왕자비의 요청에 맞아떨어지는 이가 한 사람, 있었다. 왕실 기사단장보다 높은 이, 왕의 오른팔, 왕성에서 가장 높은 작위와 완장을 찬 남자, 비아탄 아멕이었다.
그러나 비아탄 아멕으로 말할 것 같으면, 영웅 베데르의 서사에 반드시 등장하는 ‘왕실의 검’이었다. 그는 단순한 기사가 아니었고 국왕 이외에 누구의 하수인도 아니었다. 왕자비가 아니라 왕자의 부름이라도 거절할 수 있는 남자였다.
경비대원과 기사들은 왕자비께서 몹시도 철이 없다 생각했다. 내심으로는 건방지다는 생각까지 품고 있었다. 둘째 왕자와 결혼한 것이 무어 대수라고, 사렙탄의 오른팔인 비아탄 아멕의 이름을 거론하며 오라 가라 명령한단 말인가?
비아탄 경께서는 새파랗게 어린 아가씨의 호출에 응해 오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그럼 왕자비의 도도한 콧대는 납작해질 것이고 작금의 번잡스러운 상황도 종지부를 찍을 것이었다.
아사야의 생각은 그들과는 달랐다. 영웅 베데르 아졸의 딸인 그녀는, 제 아버지와 같이 참전 영웅인 비아탄 아멕의 고귀한 작위를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 비아탄을 상사로 인정하길 꺼려 하는 페드릭 바벨의 열등감이란, 아사야로서는 알 수 없는 것이었다. 또한 그녀는 비아탄 아멕이 반드시 제 호출에 응해 줄 것이라 믿었다.
다수의 예상을 깨부수고, 비아탄 아멕은 아사야의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 그는 보고를 받자마자 말을 달렸다. 이전에 호출받은 어느 누구보다도 빠른 속도로 ‘왕실의 검’이 용의 철문 앞에 내렸다.
그러곤 곧장 다가와 아사야 세일산 앞에 깊이 허리를 숙였다.
“공주님을 뵙습니다.”
부드러운 미소를 띤 채 비아탄 아멕이 인사했다.
그 호칭에 모두가 놀란 듯 눈을 굴렸다. 경비대원들과 경비대장, 왕실 기사단원과 부대장까지 우두커니 선 채였다.
아내는 남편의 성과 직위를 따르므로 공작과 결혼한 여자의 작위는 공작이 되고, 왕자와 결혼한 여자의 작위는 공주가 맞았다. 남편이 지닌 작위를 여성형으로 바꾸어 나눠 쓸 뿐이니 아사야에게 붙은 공주라는 호칭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문서상으로 기록할 때에나 그럴 뿐이지 실제로 입에 담는 일은 거의 없었다. 공작과 결혼한 여자는 공작이 아닌 공작부인이었고, 왕자와 결혼한 여자는 왕자비라 불려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아탄 아멕은 아사야 세일산을 공주라고 불렀다. 그가 그녀를 공주라 부른다면, 그의 하사들인 기사단 모두가 그녀를 공주라 불러야 했다.
단순한 경비대원들은 아직 영문을 몰라 하는 눈치였지만, 셈이 빠른 왕실 기사들은 벌써 그 뜻을 알았다. 비아탄 아멕은 사렙탄 세일산의 오른팔이요 그림자였다. 그가 아사야 세일산을 공주라 부른다는 것은, 폐하께서 그녀를 공주라 부른다는 의미였다.
각별하며 도드라지는 대우에 아사야는 속눈썹 하나 꿈질하지 않았다. 그저,
“비아탄 경.”
도도한 손짓으로 그의 인사를 받아들일 뿐이었다.
기나긴 기다림에 지칠 대로 지친 채로도 아사야의 똑똑한 머리는 여전했다. 비아탄이 굳이 저를 공주라 부르며 치켜세우는데, 제가 놀란 기색을 비춰서는 안 됐다. 그의 장단에 맞추기 위해서라도 아사야는 무표정을 고수해야 했다.
긴장한 기색을 감추려 노력하며 아사야가 입을 열었다.
“경마저 저를 실망시키진 않아 주셨으면 해요.”
“무슨 일인지 설명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비아탄의 대꾸는 재빨랐다. 제 키에 비해 작은 아사야를 내려다보지 않으려 슬그머니 허리를 숙이는 것 역시 여전했다.
그와는 두 번째 만남에 불과했지만 아사야는 그가 저를 도와줄지도 모른다 생각했다. 제 아버지에게 목숨을 빚졌다 하지 않았던가. 결혼식을 기점으로 그녀의 남편마저 태도를 바꾸어 버렸지만, 기사도를 아는 비아탄 아멕만큼은 제 기대를 저버리지 않길 바랐다.
“나는 내 예물을 보러 왔어요.”
‘예물’이라는 말에 비아탄은 벌써 상황을 파악한 듯했다. 고개를 들어 그는 철문을 바라봤다.
아졸 공작성을 떠나던 때 아사야의 메시지를 전달한 장본인이 그였다. 둘째 왕자에게 ‘그 한 마리’가 도대체 무어인지 물었을 때, 그것이 드래곤임을 알고는 적잖이 놀랐었다.
결혼 예물로 블랙 드래곤을 갖고 싶어 하던 아가씨를 잊기란 힘든 법이었다.
“그리고, 경의 부하 되는 모든 이들이 나를 가로막는군요.”
왕자비의 말에 그는 우두커니 선 부하들의 면면을 훑어보았다. 흉곽에는 갑주를 두르고 허리엔 칼을 찼지만 그뿐이었다. 아사야에게 어떤 도움도 제공하지 않으니 그들은 가로막힌 벽이나 다름없었다.
비아탄 아멕의 얼굴이 삽시간에 딱딱해졌다. 능구렁이처럼 짓고 있던 미소도 사라진 지 오래였다.
“당장 열쇠를 가져와, 공주님께 문을 열어 드려라.”
단단한 목소리로 그가 명령했다. 그러나 그의 명령에 몸을 움직인 것은 경비대원도, 왕실 소속 기사도 아니었다.
“비아탄 경.”
제 목걸이 줄에 매달린 열쇠를 꺼내 보이는 건 아사야였다.
비아탄의 얼굴은 이제 시커멓게 내려앉았다.
“대신해서 열어 드릴 필요도 없었군요.”
“그래요.”
부하들의 면면을 하나둘 훑어보며 그가 손짓했다. 그러자 경비대원과 기사들이 철문을 가로막던 몸을 양쪽으로 비켰다.
아사야는 짙은 회색의 차가운 철문 앞에 섰다. 커다랗게 뚫린 구멍에 열쇠를 넣고 돌리기까지 10초도 걸리지 않았다. 마침내, 또 그렇게 간단하게, 감옥 문이 묵직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만일에 대비하느라 군인들의 목덜미가 뻣뻣해졌다. 비아탄의 손 역시 언제든 검을 뽑을 수 있게 허리춤에 머물렀다. 경비대원이 철고리에 달린 램프에 불을 붙이자 사방이 주홍빛으로 환해졌다.
가장 먼저 문가에 묶인 양 두 마리가 보였다. 아사야는 지쳐 보이는 흰 양들을 내려다봤다. 가브리엘에게 먹이겠다던 ‘식사’였다. 그들이 메에 울음소리를 냈다.
시녀에게서 바구니를 받아 들고서 아사야는 어둠 속을 향해 한 발 두 발 다가갔다. 겁 없는 왕자비를 쫓느라 경비대원들은 손발을 덜덜 떨며 다음 램프에, 또 다음 램프에 불을 밝혔다.
마도구에 의해 마력을 흡수당한 상태라곤 하나, 드래곤은 여전히 크고 거대한 이빨을 갖고 있었다. 어둠 안의 존재에 대하여 조금의 두려움도 없는 이는 아사야 세일산뿐이었다.
그리고 아사야는 실망했다. 지난날 야베스에게 전해 듣기로는 성안에 드래곤을 위한 특별한 장소가 마련된 양 생각되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열두 개의 램프에 모두 불을 밝히자 드러난 내부에는 작은 창문 하나 없었다.
아사야가 종일 들어오고 싶어 했던 드래곤의 공간은, 조금의 볕도 들지 않는 컴컴하고 거대한 사각형 방에 불과했다.
“…….”
가만히, 아사야는 흙과 검댕이 묻은 거친 돌벽을 훑어보았다.
이내 코끝이 시큰하게 아려 왔다. 목울대에 힘이 들어가고 눈물이 차올랐다. 굶어 죽지 않게 양이나 묶어 뒀을 뿐인, 빛 한 점 없는 암흑 공간의 모서리에 가브리엘이 있었다.
등을 돌린 채 움직이지 않는 가브리엘은 방문자가 누구인지에 대한 기대조차 없는 듯했다.
마른침을 꼴깍 넘긴 뒤, 아사야는 겨우 목소리를 냈다.
“멍멍아.”
제가 들은 단어를 이해하지 못해 기사단원들이 인상을 찌푸렸다. 시녀들은 물론이며 엠마오조차 눈을 둥그렇게 떴다. 아사야의 부름을 똑바로 알아들은 이는 시커먼 드래곤뿐이었다.
“멍멍아?”
다친 개가 있는 줄로 알고 저를 찾아내던 어린 인간을 드래곤은 기억했다.
가브리엘의 머리가 천천히 움직였다. 거대한 목을 돌려 가브리엘은 눈앞에 선 작은 인간을 바라봤다.
땋아 올린 머리, 미소 짓는 얼굴, 연녹색 드레스, 그녀의 손에 들린 피크닉 바구니가 순차적으로 그의 보라색 눈동자에 비쳤다.
“나 왔어.”
느릿느릿, 드래곤의 시커먼 목이 왕자비에게 뻗어 왔다.
놀란 얼굴로 기사들이 검을 움켜쥐자 비아탄은 그들에게로 팔을 뻗었다. 두 눈을 크게 뜬 채 왕자비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비아탄이 낮게 속삭였다.
“방해하지 마.”
마침내, 사납기 짝이 없던 블랙 드래곤의 코끝이 아사야의 배에 닿았다. 푹신한 치맛자락이 기분 좋게 뭉개졌다. 작은 웃음을 터뜨리며 아사야는 가브리엘의 콧잔등을 쓰다듬었다. 새카맣고 단단한 콧잔등의 감촉과 온도는 제가 기억하던 그대로였다.
“잠깐 둘이 있게 해 주시겠어요?”
뒤도 돌아보지 않고서 아사야가 말했다.
비아탄 아멕은 눈앞의 광경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좋을지 몰라 고민에 빠졌다. 기사들이며 시녀들은 기적이라도 본다는 반응이었지만, 그의 사전에 ‘기적’ 같은 건 없었다.
영물이라 불릴 지경으로 영리하고, 악마라고 불릴 정도로 사악한 게 블랙 드래곤이었다. 둘째 왕자의 소유물로서 왕성에 가둔 지가 햇수로 6년이었다.
6년간, 소리 소문 없이 치운 경비대원의 시체만 세 구였다. 달마다 먹이를 집어넣는 경비대원조차 가까이 다가가질 못해 고역을 치렀다. 그런 드래곤이 생전 처음 보는 어린 여자를 곱게 따를 리가 만무했다.
‘본래부터 가디엘 아졸의 물건이 아니었던 거야…….’
비아탄의 입 안이 씁쓸해졌다. 사렙탄 세일산의 오른팔로 살아남자면 검만 잘 써서는 안 됐다. 국왕이 농담처럼 하는 말처럼 ‘큰 그림을 볼 줄 알아야’ 했다.
‘누이의 용을 가져다 바친 거로군.’
비아탄이 고개 숙였다.
“……알겠습니다, 공주님.”
이내 그는 부하들과 시녀들은 전부 물렸다.
그리고 철문이 닫혔다. 가브리엘과 단둘이, 완벽한 밀실에 남아 아사야는 활짝 미소 지었다. 그러나 그녀가 뛸 듯이 기뻐하며 바라본 순간, 가브리엘은 보라색 눈동자에 알 수 없는 감정들과 충격을 담은 채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쿵. 드래곤의 발이 성급하게 바닥을 찼다.
“가브리엘?”
아사야를 외면하며 가브리엘은 쿵, 쿵, 커다란 몸을 움직이며 사각 공간을 돌기 시작했다. 아사야는 몇 발짝씩 뛰어가며 그를 쫓았다. 그녀의 드래곤은 혼란스럽고 화난 듯했다.
씨근덕거리며 빠져나오는 숨소리는 슬픈 것도 같았다.
“가브리엘, 왜 그래…….”
손을 뻗어, 아사야는 드래곤의 거대한 날개를 쓰다듬었다. 그녀를 뿌리치는 대신 가브리엘은 다시 등을 돌렸다. 아사야는 용의 고개를 따라 그의 큰 몸을 잰걸음으로 돌았다.
“가브리엘!”
일방적으로 아사야에게 불리한 게임이었다. 그녀를 외면하기 위해 가브리엘은 그저 몸을 돌리고, 목을 빼면 그만이었지만, 아사야는 달랐다. 아사야는 커다란 드래곤의 몸을 빙빙 돌아 달려야만 했다.
“얼굴 좀 보여 줘. 널 만나러 왔잖아.”
금세 숨이 찼다. 헐떡거리며 아사야는, 힘을 주어 두 팔을 뻗었다. 그러고는 다시 저를 피하려는 드래곤의 머리를 있는 힘껏 끌어당겼다.
“날 봐. 왜 화내는 거야?”
그제야 드래곤이 그녀와 눈을 맞췄다. 복잡한 감정이 담긴 보라색 눈동자는 어느 때보다 깊고 어두워 보였다.
서로의 눈동자를 바라보길 한참, 가브리엘이 입을 열었다.
“……그러지 말았어야지.”
갑작스레 들려오는 목소리에 아사야의 눈이 커졌다.
드래곤의 목소리를 듣는 일이 처음은 아니었다. 헤어지던 날 지하 감옥 안에서, 가브리엘은 아사야의 이름을 불러 주었었다. 크게 절망한 탓에 제가 잘못 들은 소리는 아니었을까 의심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 목소리를 잊은 적은 없었다.
오늘, 가브리엘이 들려주는 목소리는 전과 달랐다. 그 음성은 짐승이 인간의 말을 흉내 내는 수준이 아니었다. 매우 또렷하며 인지 있는 발음이었다.
“날…… 보러 오지 말았어야지.”
끓는 듯한 목소리는 무척 낮았다.
가브리엘이 무얼 책망하고 있는지 아사야는 알았다. 저를 소유한 이, 야베스 세일산과 결혼한 일을 두고 그는 분노와 슬픔, 어쩌면 배신감마저 느끼는 것 같았다.
무어라 답해야 좋을지 몰라 아사야가 머뭇거리자,
“왜…….”
가브리엘이 남은 숨을 쥐어 짜냈다. 그러나 음성은 거기에서 그쳤다. 뒤이은 말을 내뱉지 못하고 가브리엘은 그르렁거리는 듯 앓는 소리를 흘렸다.
두어 번, 벽을 긁는 듯한 숨소리를 내쉬며 가브리엘은 목의 근육을 꿈틀거렸다. 심장을 파괴당하고 힘을 빼앗기며 처참해진 결과였다. 6년의 세월을 견디며 회복시킨 마력은 그가 희망하는 수준에 미치지도 못했다.
그를 대신하여 아사야가 입을 열었다.
“약속했으니까.”
그리고 말했다.
“약속했잖아, 내가……. 다시 널 되찾겠다고. 맹세했잖아, 눈물로.”
그녀의 대꾸에 드래곤의 무거운 머리가 천천히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절망한 듯 보이는 동작이었다.
두 손을 뻗어, 아사야는 용의 거대한 머리를 최대한 끌어안았다.
“나 괜찮아. 왕자비가 됐는걸. 모두가 내 결혼을 축하했어……, 축하받는 결혼이었어. 내가 선택한 거야. 가브리엘. 그러니까…….”
횡설수설하며 아사야는 거짓말을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가브리엘은 그녀의 결혼을 만류하고 그녀의 선택을 저지하는 처음이자 마지막 존재였다.
그래서 아사야는 그를 좋아했다. 그녀의 드래곤은 그녀가 만나 온 어떤 인간보다도 인간적으로 생각됐다. 가브리엘은 조용했지만 다정했고, 거대했지만 부드러웠으며, 날카로운 이를 가졌지만 그녀를 상처 입힌 적 없었다.
그런 사람이 그녀 곁엔 없었다.
“이제 널 언제든 만날 수 있어. 우리, 언제든지……, 언제든지 함께할 수 있어.”
“…….”
“가브리엘…….”
흔히 해 왔던, 그래서 그리웠던 혼잣말로 아사야가 말했다.
“이제 혼자가 아니야.”
그리고 이상한 감각이 아사야를 감쌌다. 그 어느 때보다 확신에 찬 목소리가 제 것이 맞기는 한가 싶었다.
“이제 다칠 일 없을 거야. 누구도 널 해치지 못해, 누구도…….”
누구를 향한 것일지 모를, 흩어진 감정들을 우두커니 느끼며 아사야는 혼잣말했다.
“누가 널 데려가고 우릴 해치려 한다면…… 나도 가만있지는 않겠어.”
조용히, 가브리엘이 그녀의 얼굴 앞으로 머리를 숙였다. 아사야는 저의 검은 용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무기력한 건 지긋지긋해.”
그러자 가브리엘이 천천히 목을 빼내더니, 큼직한 머리를 느릿느릿 움직여 제 주둥이를 아사야의 이마에 붙였다.
그가 제 이마에 키스해 준 것을 알고 아사야는 웃음을 터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