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굴 안의 강아지
아졸 공작가의 성안으로 전례 없는 비명이 울려 퍼졌다. 전쟁 영웅으로서 서민들로부터 존경받는 유일무이한 귀족, 베데르 아졸의 둘째 아이가 태어나는 날이었다. 그러나 그의 부인, 엘라 아졸의 출산은 아홉 시간째 진전이 없었다.
공작부인의 비명 소리는 화려하기 짝이 없는 아졸 성을 불행으로 물들여 놓았다. 치료 마법에 도가 텄다는 고위 신관이 셋이나 모였음에도 출산을 돕는 마법 따윈 누구도 쓸 줄을 몰랐다.
아이를 낳는 일을 죄 여자의 일로 맡겨 둔 채 외면해 온 결과가 이것이었다. 대륙 내 신관들의 기댈 기둥이자 비빌 언덕인 국민적 영웅의 아내가 둘째를 낳다 죽게 만드는 것.
전신을 침대에 늘어뜨린 모습으로 움직이지 않는 엘라 아졸을 두고 그 누구도 사망 시각 따위를 내뱉지 못했다. 침실에 모인 이들 모두가 공작의 눈치를 살피기 바빴다.
절망에 젖은 채 공작은 입도 벙긋하지 않았다. 숨이 끊긴 것은 아내인데 왜인지 그에게 주마등이 스치는 듯했다. 그의 인생을 물들인 부귀와 영광, 행복과 사랑이 한꺼번에 촛불처럼 꺼져 버리는 양 느껴졌다. 침대 위에 늘어진 채 말없이, 사랑하는 아내는 식은땀에 젖은 상태로 죽어 있었다.
뒤통수로 컴컴한 그림자가 드리우는 듯했다.
“뭣들 하는 거예요!”
그때 유모가 소리쳤다. 공작부인의 스물여섯 해 생애를 내내 돌봐 온 오십 대의 유모, 엠마오였다.
치유사도 아니며 신관도 아닌 유모는, 깨끗한 물이 든 양동이와 삶은 수건을 내려놓더니 침대를 향해 달려들었다. 놀란 신관이 그녀를 가로막았지만 분노한 유모는 마법사보다 강인했다.
“아기까지 죽게 할 셈이에요?”
엠마오는 끓인 물에 씻은 손으로 공작부인에게 다가갔다. 그러고는 탄식했다. 머리부터 보여야 할 아기가 배 속에서 뒤집혔는지 쪼글쪼글하고 작은 종아리 두 개만 겨우 비추고 있었다.
작고 보드라운 종아리를 쥐고 유모는 아기를 빼냈다.
“딸…… 딸이에요, 공작님.”
엠마오가 속닥거렸다.
신관들이 허둥지둥하며 그녀에게 다가섰는데, 그들이 마법식을 구술하는 것보단 유모의 가위가 빨랐다. 그녀는 재빨리 아기의 탯줄을 끊어냈고, 아기가 울지도, 눈을 뜨지도, 숨을 쉬지도 않는 것을 알았다.
유모는 조그맣고 죄 없는 것의 등을 손바닥으로 두들겼다.
“울어, 울어야지, 아가.”
토닥, 토닥, 유모의 손바닥 소리만이 방 안을 울렸다. 공작의 정신을 깨운 것도 그 소리였다. 그는 유모에게로 다가가더니 그녀의 품 안에서 핏덩이처럼 작은 아기를 받아 들었다.
그가 떨리는 손으로 탁 소리가 나게 등을 때리자,
“응애애!”
아기가 왈칵 울음을 터뜨렸다. 세상에서 가장 서럽고 듣기 좋은 소리였다.
우는 아기의 얼굴을 공작은 무어에 홀린 사람처럼 내려다보았다. 서글프고 연약한 아기의 눈동자는 제 엄마처럼 샛노랗게 반짝거렸다.
“아가.”
작은 아기를 품에 꼭 끌어안고서 그는 넋 나간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대륙에서 가장 부귀한 공작, 베데르 아졸이었다. 젊을 적 그는 전쟁조차 무너뜨리지 못했던 영웅이었다. 이십 년 전 마물들이 날뛰고 언데드 대란이 벌어지던 시절, ‘공작님’이 아닌 ‘베데르 경’으로 불리며 나라를 지켜 내기를 매일같이 했었다.
그런 영웅의 무릎이 허물어졌다.
카펫 위에 두 무릎을 꿇고서 그는 갓난아기를 껴안았다. 눈물이 베데르의 두 뺨을 축축하게 적셔 놓았다.
“네 이름은 아사야다, 아사야 아졸. 내 딸…… 내 보물…….”
슬픔을 억누르며 유모는 엘라 아졸의 시신 위로 하얀 이불을 덮어 주었다. 그러고는 벌어진 문틈 새를 바라보았다.
문고리를 쥐고서, 공작을 빼닮은 고동색 머리칼에 갈색 눈동자를 가진 소년이 반듯한 얼굴을 찡그리고 있었다. 제 엄마가 죽은 것을 그제야 안 첫째 아들, 가디엘 아졸이었다.
“도련…….”
유모가 무어라 그를 부르기도 전에, 소년은 몸을 돌리더니 달아나 버렸다.
.*. *. *. *. *. *.
베데르 아졸의 보물, 아사야 아졸은 아주 약했다. 타고나길 마른 아사야는 다른 아기들에 비해 머리도 손도, 발도 작았다.
아기는 종일 잠만 잤고 젖먹이 유모의 가슴에도 반응을 않았다. 간간이 울기는 하였지만 평범한 아기들처럼 배가 고프거나 기저귀가 더러워져서는 아니었다. 아기는 아플 때에만 울었고, 그 소리마저 맥이 없었다.
신관들은 그녀를 두고 백 일을 넘기지 못할 거라 말했다가, 한 살이 되지 못할 거라 말했다가, 세 살이 고비일 것이라고도 말했다. 가까이 귀를 기울여야 들리도록 숨소리조차 작은 아이이니, 그들이 거짓말을 한 것은 분명 아니었다. 그러나 아사야 아졸은 생존했다.
아사야를 살아남게 한 가장 큰 공신은 베데르 아졸이었다. 그는 딸의 건강을 지켜 내기 위해 거의 미친 사람처럼 굴었다. 공작가 성 내부에 신관이 머무를 방을 따로 마련해 두고는, 그들에게 거금을 퍼부으며 딸을 위해 매일매일 비싼 치료술을 행하게 했다.
“베데르 경의 딸이 절대 죽지 않게 해.”
고위신관조차 베데르의 명령에는 순순히 따랐다.
“경의 기부금으로 마법사 협회가 굴러가고 있단 걸 잊지 말라고.”
덕분에, 신관들은 신성력을 너무 쏟은 탓에 빈혈이 날 지경으로 종일 아사야에게 매달렸다. 오죽하면 어린 아기의 몸 밖으로 신관들의 마나가 흘러넘칠 지경이었다.
잔병이란 잔병은 죄 걸리고야 마는 미성숙한 아사야는 네 살이 된 뒤에야 제대로 걸을 수 있게 됐다. 유모가 받쳐주지 않아도, 손잡이를 쥐지 않아도 아이가 두 발로 똑바로 걷게 된 뒤에야 신관들도 한시름 내려놓았다.
베데르 아졸은 전쟁 영웅 시절을 깨끗하게 잊어먹은 듯했다. 아사야를 돌보는 일은 그의 기쁨이자 일상이었고, 떠난 아내를 추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이리 오렴, 아사야. 아빠한테로 와.”
아사야와 함께일 때면 그는 모든 명찰을 내려놓은 듯 행복한 딸 바보일 뿐이었다.
그런 베데르의 정성을 하늘이 알기라도 했는지, 아사야는 제 엄마를 쏙 빼닮은 모습으로 자라났다. 혹자는 아버지를 닮은 구석이 너무 없지 않으냐고도 말했지만 베데르에겐 통하지 않는 투정이었다.
그의 눈에 제 딸은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아이였다. 젖살이 붙은 뺨은 통통하니 발그스름했고 두 눈동자는 정교하게 세공한 호박석을 박은 듯했다. 통통한 입술 끝은 어린 새의 부리처럼 도드라졌다.
“꼭 네 엄마의 유년기 모습 같구나…….”
그리움을 담아 베데르가 속삭일 때면, 아사야는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작은 의문을 가졌다.
‘왜 아빠는 날 볼 때마다 행복하면서도 슬퍼 보이지?’
죽음, 그리고 이별이란 그 시절 아사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상실이었다. 다만 어린 마음으로도 그에게 알 수 없는 상처가 있음을 느꼈다.
“엄마는 어떻게 생겼어?”
그래서, 아사야는 오빠에게 그 답을 구하고자 했다. 어린 아사야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가디엘 아졸은 한숨 쉬었다.
“그만 놀고 들어가자니까, 아샤.”
“나 아샤 아닌데. 아사야인데.”
“너도 날 가디라고 마음대로 부르잖아.”
정원 풀밭에 앉아, 아사야는 꽃물이 든 치맛자락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고집스레 가디엘을 올려다보았다. 누이의 얼굴을 마주 보며 가디엘은 마른침을 꿀꺽 넘겼다.
아사야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을 이가 공작성 어디에도 없었다. 부귀와 영광을 거머쥔 베데르 아졸이 그녀를 사랑하는데 누가 그 애정을 거역하겠는가.
만약 아사야가 날개 달린 유니콘을 갖고 싶다고 말한다면, 아버지께서는 금지된 흑마법을 써서라도 세이렌과 유니콘을 결합시킬 것이었다. 아사야가 이제는 갖기 싫어졌다고 변덕을 부린대도 그것은 그녀가 아닌, 마법을 부린 자의 죄이리라.
아사야 아졸은 어여쁘고 어린 공작가 아가씨였고, 꽃처럼 사랑받는 것만이 하루 일과였으므로.
가디엘은 제 상상이 꽤 그럴싸하다고 생각했다. 다섯 살 생일 선물로 말 한 마리를 선물받은 아사야였다. 두 마리면 선박 한 채를 살 수 있다는 값비싼 백마였다. 아사야는 말은커녕 망아지도 타 본 적이 없는데도, 아버지는 ‘숙녀에게 말 하나는 있어야 한다’며 기꺼이 그 값을 지불했다.
제가 다섯 살일 적에 가디엘은 단검을 선물받았었다. 영웅 베데르의 전설과 기사단의 명예를 이어받아야 한다는 설교와 함께였다. 덕분에, 아사야가 침대에 누워 감기를 앓는 동안 가디엘은 한겨울에도 검술 선생 앞에서 목검을 휘둘러야 했다.
‘이건 차별이야.’
가디엘이 생각했고,
“응? 가디.”
아사야의 손이 그 생각을 끊어 놓았다. 가디엘은 제 옷소매를 쥔 누이를 내려다보았다.
“우리 엄마는 어떻게 생겼어?”
엄마의 얼굴을 알려 주기 전까지 아사야는 계속해서 같은 질문을 해 올 것이었다. 엄만 어떻게 생겼어, 어떤 사람이었어, 지금은 어디에 있어…….
‘우리 엄마는 죽었고, 너 때문이야.’
그런 대답을 했다가는 아버지에게 내쫓길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질문 세례를 피하기 위해, 가디엘은 손거울을 꺼냈다. 그러고는 아사야에게 비춰 주었다.
작은 거울을 통해 아사야는 유모가 양 갈래로 땋아 준 까만 머리칼과 창백하게 느껴질 정도로 하얀 이마, 붉은 기가 도는 뺨과 샛노란 눈동자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미소 지었다.
“고마워, 가디.”
대답 없이, 가디엘은 아사야의 땋은 머리끝을 붓처럼 쥐고는 살짝 당겼다. 약간의 투정이 담긴 손길이었다. 그러자 아사야의 몸이 기우뚱거렸고 얼굴에는 해사한 웃음이 올라왔다.
하얀 아랫니를 드러내며 아사야가 꺄르륵 웃었다. 그 웃음 앞에선 가디엘도 별수 없이 입꼬리를 씰룩거렸다.
“바보.”
가디엘이 속삭였다. ‘바보’가 나쁜 말인 것을 알면서도 아사야는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누구도 저에게 장난치거나 시비를 걸어오지 않아서, 아사야는 가디엘이 부리는 심술을 반가워했고 좋아했다.
소녀는 양손으로 땋은 제 머리끝을 잡고는 오빠의 목을 간질이기 시작했다.
“바보는 가디지.”
“내가 왜 바보야, 네가 바보지.”
“몰라! 가디가 바보야.”
부드러운 머리칼 끝을 무기처럼 꼭 쥐고 달려드는 누이를 피하며 가디엘은 정원을 빙글빙글 돌았다. 아사야의 뜀박질은 거북이처럼 느릿느릿했고 두 팔에는 힘이 없었다. 누이가 걸어오는 간지럼 공격을 피하기란 가디엘에겐 아주 쉬운 일이었다.
아사야가 숨을 헐떡이기 시작할 때에서야 장난이 멈췄다.
“헥, 헤엑…….”
“아샤, 왜 그래?”
여섯 살의 아사야는, 신체 건강한 열 살 가디엘이 이해할 수 없을 만큼 약했다.
“아사야. 아가, 어딨니?”
남매의 아버지, 베데르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가디엘의 얼굴이 석상처럼 얼어붙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아사야는 잔디 위에 넘어지듯이 엎어졌다. 그러고는 가파른 숨을 마치 오래 달린 개처럼 ‘헥’, ‘헥’ 힘겹게 내쉬었다.
가디엘은 누이 앞에 재빠르게 다가갔다. 그리고 억지로 그녀를 일으키려 애썼다. 가디엘의 길쭉한 팔에 비 맞은 가을 잎처럼 매달린 채 아사야는 기침을 해 댔다.
“그만! 그만해, 아샤.”
가디엘이 외쳤다.
“기침하지 마, 잠깐만 참아 봐. 응?”
이내, 아버지의 발걸음이 남매가 노닐던 정원까지 닿았다. 콜록거리는 아사야를 보자마자 그는 한달음에 남매에게로 다가왔다. 베데르의 그림자는 무척 커서, 놀란 가디엘의 얼굴을 까맣게 뒤덮었다.
“뭐 하는 짓이냐, 가디엘!”
베데르가 소리쳤다.
“네 누이에겐 날이 아직 차가우니까, 바람이 불면 나오지 말라고 몇 번을 말했어?”
딸에게 그는 기댈 나무이자 봄처럼 따듯한 아빠였지만, 아들에겐 달랐다. 가디엘에게 그는 시커멓고 거대한 먹구름이었고, 그의 꾸중은 매서운 천둥과도 같았다.
“그, 그게 아니라, 아샤가 먼저…….”
변명하는 소년의 입을,
“조용!”
베데르의 고함이 가로막았다.
이내, 베데르는 가디엘에겐 꾸중하는 관심조차 주지 않았다. 놀란 아사야의 기침 소리가 커졌기 때문이었다.
“아사야, 아가. 괜찮니?”
밭은 숨을 내쉬는 아사야를 조심스레 안아 들고서, 베데르는 전전긍긍했다. 색색대는 숨소리로 미루어 보아 천식이 온 것 같았다. 한 손에 번쩍 들리도록 자그마한 딸이었다. 여린 아이가 고통스럽게 기침하는 것을, 베데르는 두고 보지 못했다.
멀리서 엠마오가,
“아가씨!”
소리치며 달려왔다.
“아이고, 어쩜 좋아, 숨쉬기가 불편하신가 봐요!”
두 사람은 기침하는 아사야를 애지중지하며 신관을 찾아 돌아섰다. 꾸중을 들은 가디엘에겐 변명할 새도 주어지지 않았다.
아버지와 누이가 떠난 정원에 혼자 남아 가디엘은 얼굴을 시뻘겋게 붉혔다.
노란 꽃이 폈다고, 창문을 통해 바라만 보는 게 아니라 실제로 꽃을 만져 보고 싶다던 건 아사야였다. 안 된다고 두 번이나 말렸지만 세 번째 부탁해 올 때엔 가디엘도 어쩔 수 없었다.
어린 마음에 그도 세상에서 제일 예쁜 누이와 놀고 싶었다. 꽃만 보고 다시 돌아갈 생각이었다. 아주 잠깐, 반 시간도 안 되는 시간 함께 놀았을 뿐이었다.
억울하고 분한 마음에 가디엘은 노랗게 핀 꽃을 짓밟아 버렸다. 소년의 체중에 짓눌려 녹색 줄기가 팍 접혔고 꽃잎은 힘을 못 쓰고 뭉개졌다. 화단을 망가뜨린 뒤에야 가디엘은 화들짝 놀라 발을 떼어 냈다.
망가진 꽃을 허겁지겁 꺾어 손에 숨기고서, 가디엘은 정원을 떠났다.
.*. *. *. *. *. *.
베데르 공작에게는 일 년에 한 번, 기대와 실망이 교차하는 날이 있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 아사야 아졸의 생일이었다.
매해마다 그는 아사야의 생일 연회를 열어 주기 위하여 기대를 품었지만, 그때마다 신관들과 치료사들은 걱정 어린 얼굴로 이런저런 반대를 하고 나섰다. 겨우 고쳐 놓은 공작 아가씨의 천 식이 다시 도질까 염려한 것이었다.
“글쎄요? 올해는 가능하지 않겠어요?”
엠마오의 생각만이 그들과 달랐다.
“요즘은 밤마다 동화책을 서너 권씩 읽어 드리는걸요. 이번 환절기에는 기침 한번 않으셨고요, 아가씨는 많이 건강해졌어요.”
유모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다만, 딸 바보 베데르의 걱정을 덜어 낼 수준은 아니었다.
“사람들 앞에 나서기엔 아직 많이 약하다잖나.”
공작의 의견이 그러하니 엠마오도 더는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 그저 미소를 지으며, 덜 마른 그림이 담긴 캔버스를 펼쳐 보일 뿐이었다.
“아가씨께서 온종일 그렸어요.”
그림을 본 순간 베데르는 작은 탄식을 뱉었다. 삐뚤빼뚤 어색하게나마 물감을 묻혀 그려 낸 유화에는 4인 가족이 담겨 있었다. 아홉 살 아사야와 열세 살의 가디엘, 무척 커서 구름에 머리가 닿는 아빠, 그 옆엔 웃는 얼굴의 엄마가 그려졌다.
“엘라를 어떻게…….”
말끝을 흐리며 베데르가 묻자,
“거울을 보고 그리셨나 봐요. 꼭 닮았단 이야길 들었는지…….”
유모가 답했다.
작은 캔버스를 두 손으로 소중히 받아 들고서 베데르는 한참 말을 아꼈다. 감동에 빠진 그를 바라보며 엠마오는 내심 뿌듯했다.
아사야가 태어나고 한동안은, 베데르 공작이 제 딸을 미워하진 않을까 걱정했던 엠마오였다. 평생을 모시던 엘라 아가씨를 스물여섯 해째에 떠나보낸 그녀에게, 아사야는 선물이었다. 제 엄마를 어찌나 꼭 닮았는지, 아가씨께서 죽자마자 다시 태어난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그런 아이이니 제 아버지에게 사랑받고 건강히 자랐으면 바랐다. 아사야는 모자람 없이, 엘라 아가씨가 못 살았던 시간만큼 살아야만 했다. 젊은 나이에 일찍 떠나는 사고 따위는 겪지 말아야 했다. 평생을 아주 부귀하고 느긋하게, 제 보살핌으로 편안히 보냈으면 하고 바랐다.
그러기 위해선 베데르 공작의 사랑이 필수였다. 엄마를 죽이고 난 아이라는 불운한 취급을 받거나 미움을 얻어서는 안 됐다.
때문에 엠마오는 기회가 날 때마다 베데르 공작에게 한 가지 사실을 각인시켰다.
“공작부인께서 남긴 소중한 보물이지요, 우리 아가씨는.”
유모의 말에 동의하는 듯 베데르 공작은 고개를 깊이 끄덕였다. 그러고는 물감의 기름이 마르는 대로 액자를 구해다가 제 서재에 걸어 두라는 지시를 남겼다.
유모는 제 계획이 성공했음을 알고 더 큰 미소를 지었다. 밖으로 나가 놀고 싶다던 아사야 아가씨를 달래어 붓붓마다 물감을 찍어 준 보람이 있었다.
“아.”
그러다 문득, 그녀는 공작성에 다가올 기념일이 아사야의 생일뿐만은 아님을 기억해 냈다.
“아가씨의 생일연은 별수 없는 거라지만, 그다음 달에는 가디엘 도련님의 생일이 있잖아요? 그때면 아가씨의 천식도 좋아지지 않을까요.”
공작은 제 아들의 생일을 그제야 기억해 낸 사람처럼 보였다. 그는 대륙년의 해와 달이 쓰인 달력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사야가 서운하게 생각할 거야. 가디엘의 생일도 올해는 챙기지 않도록 하지.”
엘라 아가씨가 살아 계셨더라면 그러지 않았을 거란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엠마오는 조용히 고개 숙였다. 베데르 공작은 단호한 사람이었고 이곳 아졸 성과 영지의 주인이었다. 유모로서 엠마오는 그에게 딸이 그린 그림을 보여 줄 순 있었지만, 성내 행사의 개최를 두고 참견할 자격은 없었다.
더는 의견을 내지 않고, 엠마오는 조용히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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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살을 기점으로 아사야는 더는 아프지 않았다. 기침이 그치고 웃는 날이 많아진 것은 그보다 훨씬 전의 일이었지만, 신관들이 판단 내린 ‘완치’는 열 살 무렵이었다.
마침내 또래 아이들처럼 산책하고, 잠시간은 뛸 수 있는 체력이 되자 아사야는 봄날 어린 노루처럼 발랄해졌다. 매일같이 정원을 뛰어놀고 엠마오와 어린 사냥개를 데리고 피크닉을 갔다. 다섯 살 때 선물받은 말에게 여물을 주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사야의 외출은 한 시간이라는 터무니없이 짧은 제한 시간을 갖고 있었다. 아사야가 바깥 공기를 쬐고 바람에 호흡기를 노출시키는 일을, 베데르 공작은 위태롭게 생각하는 듯했다.
“습관적으로 그러시는 거예요.”
책 한 권을 다 읽기도 전에 피크닉을 그만둬야 할 시간이 되자, 엠마오가 말했다.
“다 아가씨를 아끼고 사랑하셔서 그러시는 거니 밉다 생각하면 안 돼요. 아셨죠?”
“응.”
아사야는 그에 대해 어떤 투정도 하지 않았다. 제 아버지가 저를 위하느라 매우 바쁘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아졸 공작성에서는 대대적인 공사가 벌어지고 있었다. 공작성의 파사드를 받치는 격인 정원을 아름다운 꽃과 새로운 나무로 채워 넣는 일도 10년 만의 일이었고, 연회장 공사로 따지자면 거의 처음 있는 일이었다. 모두 아사야의 생일연을 위해서였다.
열 번째 생일에 첫 생일연을 벌이게 되었으니 모든 것이 완벽해야만 한다고, 베데르는 말했다. 아사야의 생일을 축하함은 물론이고, 한편으로는 사교계에 첫 발도장을 찍는 자리였다. 그러니 이번 연회는 세상 무엇보다 세련되고 아름다워야 했다.
아사야의 생일까지는 아직 아홉 달도 넘게 남았는데 말이었다.
“기대돼. 그렇지?”
공작가 기사단의 훈련장 뒤뜰, 그늘이 마련된 자리에 앉아 아사야가 말했다. 원피스 치맛자락을 짐을 꾸리듯 끌어모아 무릎 위에 올리고, 두 손으로 턱을 괸 채였다.
“내 생일날 말이야. 나랑 모르는 사이인 사람들이 오는 거잖아. 신기하고 조금 이상해. 가디는 나한테 선물 줄 거지?”
종알종알 이어지는 누이의 수다에 가디엘이 미간을 찡그렸다. 그는 나무 인형을 향해 휘두르던 검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이거 진검인 건 알고 거기 앉은 거지? 잘못하면 다친다, 너.”
가디엘이 경고하자,
“가디가 잘못할 리가 없잖아?”
아사야는 웃어 보였다.
“말이나 못하면.”
두 발짝 움직여, 가디엘은 제가 검을 놓친다 해도 아사야에게 튕겨 나가지 않을 거리에 섰다.
가디엘에게 있어 아사야는 복잡하게 예쁜 존재였다. 인정하고 싶지 않으면서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게 제 누이의 사랑스러움이었다. 눈에 안 보이면 미워 죽겠는데, 눈에 보이면 예쁘고 귀여운 식이었다.
성안에서만 살아 세상 물정을 모르는 아사야는 바보 같으면서도, 벌써 수학을 배우고 바다 건너 국가의 외국어로 인사하는 것을 보면 똑똑했다. 아버지와 유모, 하인들에게 이쁨만 받고 살아 제가 신인 줄 착각하는 것 같으면서도, 사소한 칭찬 하나에도 두 볼을 발갛게 붉혔다.
세상천지 귀한 것들이 다 제 선물인데, 사냥개가 낳은 강아지 하나가 없어진 걸 알고 오후 내내 찾아 헤매기도 했다.
“그러지 말구, 가디. 여기가 아니면 가디랑 놀 수가 없는걸.”
아사야가 투정했다.
“노는 게 아니야, 연습하는 거야. 검을 들 줄 알아야 자기 자신을 지키는 거랬어. 나 자신을 지킬 줄 알아야 소중한 사람들도 지키는 거고.”
누이 앞에서 다소 우쭐해져, 가디엘은 아버지에게 배운 철칙을 줄줄 읊었다. 그러자 아사야의 금색 눈이 보석처럼 반짝거렸다. 두 뺨을 누르던 손을 떼어 내고서 아사야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럼 나도 연습할래!”
‘워, 워’ 소리 내며 가디엘은 그녀로부터 다시 세 발짝 떨어졌다.
“넌 안 돼. 넌 여자잖아. 그리고 아주 약하잖아.”
연이은 부정에 아사야는 당황한 듯 서성거렸다. 아사야가 한 발짝 다가가자 가디엘은 다시 두 발짝 멀어졌다. 남매 사이 거리는 퍽 멀어졌고 공기 역시 서먹해졌다.
“그럼 나는 나 못 지켜?”
잔뜩 시무룩해져 아사야가 물었고, 가디엘은 그녀로부터 몸을 돌렸다. 아사야의 반짝거리는, 순진하고 죄 없는 얼굴로부터 멀리 설수록 가디엘은 냉정해졌다.
“넌 아버지가 지켜 줄 거야. 아버지가 자리를 비우실 때엔 내가 지킬 거고. 그게 아버지가 바라시는 거니까.”
“가디…….”
“이제 들어가 봐.”
힘이 들어간 어깨를 이리저리 흔들면서, 가디엘은 완전히 돌아섰다.
아사야는 차가워진 오빠를 한참 더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버지가 정한 외출 제한 시간이 임박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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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데르 공작의 노력 덕분에 아사야 아졸의 열 번째 생일은 대륙에서 가장 호화로운 생일 연회로 기록될 수준이었다. 왕녀의 생일이래도 그렇게 화려한 연회장과 손님들로 성을 가득 채울 순 없을 것이었다.
전설적인 영웅인 베데르 아졸이 공식으로 손님을 초대하기로는, 16년 전 그의 결혼식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제 영지와 성안에 다른 손님을 초대하거나 들이지 않는 것은, 저를 버팀목처럼 믿고 지지하는 세일산 왕가에 대한 충성의 맹세였다.
전쟁이 종식된 이후 긴 시간 동안 세간은 베데르 아졸이 누구의 편에 설 것인가를 눈여겨 지켜봐 왔다. 그러나 답은 늘 같았다. 대륙에서 가장 부귀한 공작인 동시에 그는 따듯한 영주였고, 왕가의 손을 꽉 쥔 충신이었다.
덕분에 아사야의 생일 연회에는 세일산 국왕 내외와 왕자들까지 참석했다.
정작 아사야는 그 소식을 듣고는 창백하게 질려 버렸다. 우발적이고 어린 충동에 휩싸여 그녀는 도망쳐 숨기를 선택했다.
평생을 살아가며 만난 이라고는 성 안팎을 오가는 하인들과 가족뿐인 아사야였다. 개중 말을 섞고 친분을 나눈 이는 아버지, 가디엘, 엠마오, 그리고 집사장과 자신의 백마와 기사단의 사냥개가 전부였다. 그런 아사야에게 생일 연회는 절대로 선물처럼 생각되지 않았다.
‘무서워.’
다행인 것은, 아사야의 보폭이 아주 좁으며 그녀가 갈 수 있는 공간이 한정됐단 부분이었다. ‘도망쳐 숨기 좋은 장소’로 아사야는 제 정원과 기사단 훈련장을 잇는 뒤뜰의 미로 수풀을 선택했다.
그러고는 미로 수풀의 시작 지점에 가 풀잎 위에 손수건을 깔고, 그 위에 쪼그려 앉았다. 연회가 끝날 때까지 그렇게 버틸 생각이었다.
기사단이 나누는 대화를 엿들은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아주 영악하고 큰 놈인데, 도무지 어디로 가 버린 건지 찾을 수가 있어야지…….”
투덜거리는 목소리가 낮고 굵직하게 들려왔다. 놀라 주춤거리며 아사야는 손수건의 위치를 수풀 안쪽으로 옮겼다.
“누구에게 보고했나?”
“아니요, 미쳤습니까? 오늘 연회로 다들 기대하고 있는 데다가, 베데르 경께서 처음으로 성문을 여셨는데 이런 날 그런 이야길 보고했다가는…….”
풀잎 사이를 손가락으로 벌려, 아사야는 작은 구멍을 만들었다. 그러고는 컴컴한 어둠 안에 선 두 남자를 살폈다. 한 명은 뒷짐을 진 채 고개를 숙인 채였고, 다른 한 명은 키가 큰 데다 익숙한 얼굴이었다.
아버지의 서재로 자주 찾아오던 단장이었다.
“그 드래곤이 살아있을 확률은 얼마나 되지?”
“거의 전무하다고 봐야죠, 등딱지를 아주 묵사발을 냈는걸요. 심핵까지 손상시켰을 겁니다. 그런데 그 거대한 괴물이 시체도 보이지 않으니 문제 아닙니까?”
“모를 일이지, 까만 놈이었다며. 블랙 드래곤은 죽으면 시체도 남지 않으니까…….”
그들 얼굴은 익숙할지언정 대화는 낯설기 짝이 없었다. 아사야는 기사들이 담배를 태우며 나누는 대화의 반절도 이해하질 못했다. 그들이 무언가 죽었기를 바라고 있단 것 자체가 어색하고 두렵기만 했다.
“그리고, 그…… 마도구 말입니다. 정말로 효력이 있어요.”
“쉿.”
문득, 기사 단장이 목소리를 내리깔았다. 제가 숨은 것을 알았나 하고 아사야는 목을 좀 더 움츠렸다. 그러나 단장은 담배를 지져 끄고는, 연회장으로 향하는 통로만을 한 번 살폈다.
“그래, 이 일은 나중에 따로 보고드리자고. 오늘은 함구하도록.”
대화를 마치며 두 남자는 떠나 버렸다. 바람에 실려 오는 희미한 담배 냄새를 맡으며 아사야는 콩닥거리는 가슴을 손으로 내리눌렀다.
몇 분 뒤 엠마오가 헐레벌떡 아사야를 찾았는데, 그때쯤엔 더는 도망쳐 숨을 생각이 들지 않았다. 또 도망쳐 숨었다가는 더 무서운 이야기를 듣게 될지도 몰랐다.
“아휴, 정말. 아직 공작님께서 모르시니 망정이지요!”
유모의 손에 이끌려 아사야는 얌전히 연회장으로 향했다.
그리고 곧장, 아사야는 순순히 잡혀간 것을 후회했다. 연회장에 도착하고 아버지의 곁에 서자마자 정신없는 사건들이 휙휙 지나쳤다. 수많은 사람들의 수많은 눈동자가 아사야를 향했고, 누군가는 말을 걸었고 누군가는 질문을 던졌으며 누군가는 그저 ‘예쁘다’며 감탄하기 바빴다.
연회장을 채운 사람들은 많았다. 그러나 베데르의 발걸음이 향하는 곳은 분명했다. 아사야의 손을 잡고서, 그는 가장 먼저 왕가 부부를 찾았다.
“제 딸, 아사야 아졸입니다.”
영웅 베데르를 오른팔 삼아 대륙을 평정한 왕, 사렙탄 세일산은 누구보다 편안한 얼굴이었다. 그와 베데르의 관계는 대외적으론 상하로 이루어져 있었으나, 사적으로는 친우에 가까웠다.
사렙탄 세일산의 눈에 오늘날의 베데르는 신기하고 재밌는 존재였다. 마술을 부릴 줄 알던 강력한 언데드의 머리를 베어다가 제 발밑에 바치던 영웅이, 그때에 비할 수 없게 자랑스러운 얼굴로 제 딸을 소개하고 있었다.
과연 아사야 아졸은 아름다웠다. 제 엄마를 닮았단 소문을 듣기는 하였지만, 기대한 것 이상이었다. 어떤 의미에서 아사야는 아이답지 않았다. 수줍음 많고 긴장한 듯 보이는 표정은 어린아이의 것이었지만, 얼굴을 보면 이미 완성된 존재처럼 생각됐다.
“이쪽은 제 아들, 가디엘 아졸입니다.”
딸아이에 이어 베데르는 가디엘을 소개했다. 긴장한 얼굴로 가디엘은 예의를 갖추어 사렙탄 앞에 허리를 숙였다.
그러나 사렙탄의 관심은 고개 숙인 가디엘을 지나쳐 아사야에게 다가가 꽂혔다.
“내 드디어 자네 딸을 만나는군. 대륙에서 가장 귀하다는 보물이라지.”
왕의 농담에 아사야의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가, 이내 하얗게 질려 버렸다. 그 말이 칭찬인지 비아냥인지 알 수 없어 열 살 소녀는 혼란스럽기만 했다. 커다란 금색 눈을 이리저리 굴리다, 아사야는 아버지의 연회복 뒤로 숨어 버렸다.
사렙탄이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그가 크게 웃자 근방의 귀족들이 힐끔힐끔 시선을 던졌다.
“아사야.”
사렙탄이 말했다.
“너는 내 친우의 딸이다. 네가 나를 두려워할 일은 결단코 없을 거야.”
왕가와 아졸 공작가의 친분이 그들 대에서 끊이지 않을 것이란 완강한 약속이었다. 베데르가 그 앞에 고개를 살짝 끄덕였고, 아사야도 제 아버지를 따라 고개 숙였다.
이어 사렙탄은 그녀에게 제 아들들을 만나 보지 않겠냐고 물었다. 아사야에겐 거부권이 없었고 거절할 마음도 없었다.
동화책에서나 보던 ‘왕자님’이 사렙탄의 뒤로 다가와 섰다. 세일산 왕가에는 두 아들이 있었고, 그들은 가디엘과 아사야만큼이나 생김새가 달랐다.
열여섯 살인 첫째 왕자, 본도 세일산은 머리색이 짙었고 눈동자는 사렙탄과 같이 짙은 남색이었다. 아사야의 눈에 그는 벌써 어른처럼 보였다. 본도는 제 허리쯤에 키가 닿는 어린 아사야를 향해 기꺼이 허리를 숙였고, 예의를 갖춰 ‘아가씨’로 그녀를 대우하긴 했지만 귀여워하는 기색은 감추질 못했다.
둘째 왕자 야베스 세일산은 그보다는 세 살 어린, 열세 살 소년이었다. 그를 보자마자 아사야는 ‘진짜 왕자님’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가 동화책에 그려진 왕자 삽화처럼 금발 머리에 푸른 눈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야베스 세일산은 ‘왕자처럼’ 행동하지는 않았다. 본도와 달리 그는 말수가 적었고 표정조차 없었다. 한참 동안 아사야의 얼굴만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그녀의 손을 가져가 그 위에 입을 맞춘 게 전부였다.
아사야는 목을 움츠리지 않으려 노력하며 둘째 왕자가 저에게 인사하게끔 내버려 두었다.
“간지러워요.”
손가락을 움찔거리며 아사야가 속삭이자 첫째 왕자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게 공작가의 딸로서 아사야가 기억하는, 가장 화려하고 완벽한 저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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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회가 끝난 밤 아사야는 방으로 돌아가자마자 침대 위에 뻗어 버렸다.
베개에 머리를 기댄 채 반쯤 잠에 빠져든 아가씨의 드레스를 엠마오가 벗겼다. 유모가 얼굴과 손과 발을 닦아 줄 즈음 아사야는 눈을 감고 새근거리고 있었다. 얌전히 잠든 얼굴을 바라보다 엠마오는 어린 이마에 작은 입맞춤을 남기고, 조용히 침실을 떠났다.
“푹 주무세요, 천사 같은 아가씨.”
방문이 닫히는 소리를 듣자마자 아사야는 눈을 반짝 떴다.
겁나고 설렜던 생일날의 기분이 가시지 않은 채였다. 심장이 콩닥콩닥 뛰는 걸 보면 그랬다.
벌떡 일어나, 아사야는 침대 밑으로 머리를 숙였다. 침대 귀퉁이에 숨겨 둔 가죽 장화가 있었다. 장화 안에 두 발을 집어넣은 뒤엔 옷장으로 달려가 도톰한 안감을 덧댄 망토도 꺼내 걸쳤다. 항상 엠마오가 묶어 주었지만, 사실 아사야도 직접 리본끈을 묶을 줄 알았다.
그리고 아사야는 성의 중앙 복도로 통하는 복도로 숨어 들어갔다. 어둠이 컴컴하게 깔린 복도에서 아사야는 여분용 램프를 챙겨 들었다. 성냥은 소녀의 망토 속주머니에서 나왔다. 혹여 갑자기 천식이 올 때를 대비하자며 엠마오가 만들어 준, 약을 넣는 용도의 속주머니였다.
그러면 모든 준비는 끝났다. 아버지의 과보호에서 벗어나, 소녀 자신만의 모험을 떠날 준비.
중앙 복도를 지나, 뒤뜰로 빠져나가, 연마장의 기다란 담을 따라 걸어가면 창살 울타리가 나왔다. 아사야는 그 사이로 가느다란 몸을 빼내는 것으로 탈출에 성공했다. 오늘은 하인들 전부가 연회장을 정리하느라 바빴기에 모든 것이 평소보다 수월했다.
공작성의 바깥 숲에 진입하자마자 아사야는 왼손에 꼭 쥔 램프에 불을 붙였다. 그러자 소녀의 품 안을 불빛이 밝혔고 숨통에는 바람이 스몄다.
‘좀 살 것 같아.’
답답하고 숨이 조일 때마다 몰래 벌이던 일탈이었다. 아사야에게 ‘일탈’이라 함은 아졸 성의 뒤편, 정돈되지 않은 숲길까지 산책을 나갔다가 얌전히 돌아가는 게 전부였다. 그러나 아버지의 그림자를 벗어난 적 없는 소녀에게는 밤중의 산책조차 대단한 모험이자 신비한 취미였다.
밤이 되면, 어른들이 보기엔 별것 아닐 수풀 더미도 그녀에게는 무시무시한 괴물처럼 보이고는 했다. 아사야는 그것들이 주는 공포를 뚫고 마음대로 돌아다니다가, 제 힘으로 침실로 돌아가기를 즐겼다.
그런데 열 번째 생일날은 무언가 달랐고 특별했다. 경비대도 모르는 숲길로 들어간 것까지는 여느 때와 같았지만, 그날은 밤바람 안에 소리가 있었다. 쉬익대는 숨소리 같기도 했고, 끓는 듯 성내는 것 같기도 했다.
아사야는 램프를 꽉 쥐었다. 그리고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늙고 시든 나무를 넝쿨 줄기가 사신처럼 칭칭 휘감고 있었다.
무시하고 방으로 돌아갈까 고민할 즈음 또 한 번 그 소리가 들려왔다. 착각인가 생각하기엔 지나치게 분명한, 무언가 아파 앓는 소리였다.
그때, 아사야의 머릿속에 무언가 떠올랐다. 작년 가을에 사냥개가 낳은 강아지 하나가 사라졌던 일이었다.
‘혹시 그 강아지일지도 몰라! 길을 잃었나 봐.’
그렇게 생각하니 불쑥 용기가 솟구쳤다. 아사야는 흙바닥에 떨어진 나무 작대기를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치렁치렁 늘어진 넝쿨을 커튼처럼 걷어 내며 나아갔다.
몇 분인지 모를 시간을 소리를 쫓아 걷다 보니, 앓는 소리가 보다 분명해졌다.
‘어딜 다쳤나 봐.’
고통스러운 듯 씨근덕거리는 숨소리는 아사야의 귀에 다친 개가 끙끙대는 것처럼 들렸다.
“멍멍아?”
아사야가 소리쳤다. 그러자 숨소리가 뚝 끊겼다. 바람이 아사야의 까만 머리칼과 동그란 이마를 쓸고 지나갔다.
자리에 멈춰선 채 아사야는 흔들리는 램프 불빛을 제 머리 위로 들어 보였다. 소녀의 앞에 시커먼 동굴이 괴물의 주둥이 같은 입구를 벌리고 있었다.
꿀꺽, 아사야는 마른 침을 삼켰다. 소녀에겐 두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하나, 울면서 침실로 돌아가서 공포에 떨며 잠드는 일. 둘, 다친 강아지를 확인하고 멋지게 모험을 이어 가는 일.
아사야는 두 눈을 똑바로 뜨고서 동굴 가까이 팔을 내밀어 보았다. 그래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나도 할 수 있어.’
이제 어둠은 두렵지 않았다. 저 어둠 안에 다친 개가 있다고 생각하니 오히려 안쓰러운 마음이 더 크게 자라났다. 램프를 목숨줄처럼 꼭 쥐고서 아사야는 한 발, 두 발 동굴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러나 동굴 내부는 아사야가 상상한 토끼굴 따위가 아니었다. 걸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동굴은 그 깊이를 키워 나갔고, 군데군데 물이 고여 있어 찰박거리는 소리를 냈다. 넝쿨 식물들조차 볕이 들지 않는 깊이가 되자 모습을 감췄다.
동굴 안으로 깊이 더 깊이 나아가면서 아사야는 높다란 동굴 천장에 비친 제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무언가를 깨달았다. 이렇게 깊고 큰 동굴의 바깥으로, 개의 숨소리가 과연 빠져나올 수 있었을까? 당장 아사야가 비명을 지른다 해도 그 소리가 바깥에 닿을지 의문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소름이 쫙 끼쳤다. 갑자기 차가운 땀이 목덜미로 흘렀고 떨리는 손으로 쥔 램프는 달그락거리기 시작했다.
등을 돌려 달아날까 머뭇거리는 그 순간, 아사야의 그림자 끝에서 무언가 거칠게 움직였다. 그것은 개라고 생각하기엔 믿을 수 없게 거대한 어둠 덩어리였다.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아사야는 눈물을 흘려 댔다. 씨근덕대는 숨소리는 이제 아사야의 코앞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다리에 힘이 풀려 아사야는 한차례 주저앉았다가, 엉금엉금 뒤로 기다가 부리나케 달아났다.
쏜살처럼 내달려 성벽까지 돌아왔을 때 아사야는 엉망진창으로 지저분해져 있었다. 엠마오가 보았더라면 비명을 질렀을 것이었다. 머리칼엔 흙 알갱이가 묻었고 가죽 장화는 진흙 범벅이었으며, 어깨엔 넝쿨이 달라붙은 데다 종아리를 도깨비 풀이 찌르고 있었다.
학학거리며 아사야는 어깨에 붙은 넝쿨을 털어 냈다. 아졸 성의 높다란 성벽을 밝혀 오는 등불에 기대어 보니, 사신의 손아귀처럼 시커멓게 느껴지던 넝쿨에는 연두색 풀잎이 붙어 있었다.
그 풀잎을 바라보다 아사야는 고개를 들었다. 동굴 안을 헤맬 적엔 벌써 동이 텄을 것만 같았는데, 밤의 어둠은 건재했고 아졸가 아가씨가 사라진 것을 누구도 알지 못했다.
‘바보 같아.’
터덜터덜 발을 움직이며 아사야는 창살 울타리 안으로 몸을 쏙 집어넣었다.
‘가디였으면 도망 안 쳤을 텐데. 멋진 기사님이었으면 도망 안 쳤을 거야…….’
기껏 동굴 안으로 들어가 놓곤, 소리의 정체가 무언지 확인도 하기 전에 도망쳤다. 울음까지 터뜨려 버린 스스로가, 어린 마음에 한심하고 못나게 생각됐다.
‘분명 누가 다친 것 같았는데……. 아플 때 혼자 있으면 안 되는데…… 무서울 텐데.’
고개를 들고, 아사야는 아졸 성을 올려다보았다. 이 화려하고 견고한 성이 공작가 아가씨의 집이요 학교이며, 식당이었고 놀이터였다. 아사야는 제 인생이 이곳에서 시작되고 이곳에서 끝날 거라 생각했었다. 기침과 열로 아파 침대에 누워 있을 적에는, 그랬었다.
문득 어떤 생각이 아사야를 움직이게 했다. 인형으로 치자면 등 뒤의 태엽을 힘껏 네 바퀴는 돌린 것 같았다. 아사야는 연마장을 가로질러 달려가, 기사단의 의무실로 숨어들었다. 그러고는 선반에 놓인 붕대와 약품들을 되는대로 훔치기 시작했다.
성내의 기사들은 지난달부터 덩치가 줄어든 모습이었다. 육십 명을 제하고는 전원 어딘가로 징집된 상태였다. 덕분에 공작 아가씨는 도둑질을 들킬 염려를 할 필요가 없었다.
두 팔 안에 안을 수 있는 만큼 최대로 약을 챙겨 들고서, 아사야는 다시 철창 울타리를 지났다. 이번에는 어디로 향할까 헤맬 필요가 없었다. 넝쿨 줄기 사이를 아사야는 능숙하게 지나쳤다.
장화가 만들어 낸 작은 발자국이 동굴로 향했다. 컴컴한 동굴 속을 램프 불빛이 일부 밝혔다. 아사야는 동굴 안으로 발을 뻗었다.
‘하나, 둘, 셋…….’
한 발짝 두 발짝 셈하며 걸어 나가자 동굴의 깊이를 가늠하기가 조금은 쉬워졌다.
‘서른, 서른하나, 서른둘…… 마흔…… 마흔하나.’
조금 전에 소녀가 나자빠졌던 바닥에 희미한 흔적이 남아 있었다. 조심조심, 아사야는 바닥에 램프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컴컴한 동굴 벽을 바라봤다.
그때, 동굴 벽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시커먼 돌벽이라 생각한 것은, 그 거대한 마물의 등짝이었다.
끓어오르는 듯한 신음성이 더운 바람처럼 아사야의 얼굴로 훅 끼쳤다. 두 눈을 크게 뜬 채 아사야는 가져온 붕대를 떨어뜨렸다. 동그란 붕대는 하얀 끈을 늘어뜨리며 어둠을 향해 돌돌 굴러갔다. 그러고는 무어에 툭, 부딪히며 멈췄다.
마물이 그 기척에 움직이기 시작했다. 천천히 뒤를 도는 마물의 몸을 아사야는 홀린 듯이 올려다봤다. 너무 컴컴하고 어두운 바람에, 아사야는 마물의 형체를 똑바로 분간할 수가 없었다. 다만, 반사된 램프 불빛으로 형형하게 빛나는 눈동자만큼은 또렷했다.
“야……, 약…….”
신음하듯이 아사야가 말했다.
“약을…… 가져왔어…….”
친숙하고 다정한 목소리를 내면 상대도 저를 해치지 않으리라, 순진한 아가씨는 그렇게 믿었다. 젖은 숨을 헐떡거리며 억누르고, 아사야는 가져온 약품들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기사님들이 칼에 베였을 때 바르는 걸 본 적이 있어……. 이걸 바르면 피가 멎는 거야. 신관들이 만든 건데…… 너, 너한테 발라 줄게.”
설명한 것 그대로, 아사야는 고급 치료제가 든 상자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커다란 눈동자 앞에 두 손을 뻗어 상자를 보여 주었다. 눈동자는 느릿하게 한 번 깜빡일 뿐, 답을 주지 않았다.
‘그 존재’가 저를 해치지 않을 것이라고, 아사야는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시커먼 마물은 귀여운 강아지는 아니었지만, 그렇다 해서 아사야를 실망시키진 못했다. 오히려 아사야의 심장은 꽃다발을 받을 때처럼 크게 콩닥거렸고 얼굴은 호숫가에서 유모를 따돌리던 때처럼 발갛게 달아올랐다.
“네가 많이 아플 거 같아서…… 몰래 나온 거야.”
답이 돌아오지 않는 대화를 하며 아사야는 어둠을 향해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그리고 램프를 들어, 상대의 상처를 살피고자 했다.
그 즉시 아사야는 슬픈 신음을 흘렸다. ‘그 존재’는 아사야를 해치지 않는 게 아니었다. 해치려 해도, 해칠 수 없는 상태였다.
마물의 그림자로 착각했던 덩어리는 반쯤 너덜거리며 뜯겨 나간 날개였다. 길고 굵은 목으로 이어지는 등에는 횅하니 비늘이 없었다. 대신 커다랗게 파여 장기를 드러낸 상처와 흥건한 피가 고여 있을 뿐이었다.
기절할 것처럼 멍해지는 정신을, 아사야는 겨우 바로잡았다. 그리고 어렴풋이 깨달았다. 눈앞의 마물은 미로 정원에서 훔쳐 들었던, 기사들이 나누던 대화 속 드래곤이었다. 그러나 전설 속의 존재라고는 믿을 수 없게 나약해진 상태였다.
상처에 닿기 위해 아사야는 팔을 쭉 뻗었다. 그러나 소녀는 너무 작았고, 팔은 아직 짧았다.
“미안해. 실례할게.”
결국 아사야는 드래곤의 멀쩡한 쪽 날개 위로 기어 올라갔다. 고통스러운 듯 드래곤은 씨근덕대는 숨소리를 냈지만, 아사야의 체중 때문은 아닌 듯했다.
약을 발라 주고 조심조심 반창고를 붙여 주려던 생각에서 벗어나 아사야는 지혈용 마법 가루가 든 상자를 든 손을 드래곤의 상처 위로 뻗었다. 그러고는 기사들마저 ‘귀한 것’이라며 미세한 분말 하나까지도 아껴 쓰던 가루를 상처 위에 전부 뿌려 버렸다.
그러자 드래곤이 어깻죽지를 비틀며 괴로운 신음성을 냈다. 온 동굴이 진동하기 시작했고 아사야가 매달려 있던 날개도 크게 흔들렸다.
비명 소리도 내지 못하고 아사야는 그로부터 굴러떨어졌다. 흙바닥에 몸을 부딪치자마자 아사야는 기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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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눈을 떴을 땐 얼마의 시간이 지난 뒤였다. 아사야는 흠칫 몸을 떨며 희미한 램프 불빛을 바라봤다. 숨결이 아사야의 뺨에 닿아 있었다. 꺼져가는 램프 불빛이 드래곤의 윤곽을 희미하게 비추고 있었다. 아사야는 드래곤의 날개가 제 배 위를 덮고 있음을 알았다.
조그만 인간이 상체를 일으키자, 드래곤은 목을 숙여 소녀의 몸을 살폈다. 놀라 기절했을 뿐 아사야에겐 크게 생채기가 없었다.
‘날 걱정하는 건가?’
조심조심, 아사야는 작은 손을 뻗었다. 드래곤은 소녀의 손이 제 콧잔등을 만지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 감촉이 신기하고 이상해 아사야는 눈을 찡그렸다. 촉감은 딱딱한 돌이나 조개 같으면서도, 온도는 뜨끈하고 미지근했다.
“나…… 나 괜찮아.”
아사야가 속삭였다.
그러자 따끈한 콧김이 아사야의 턱에 닿았다. 아사야는 비틀거리며 일어나, 드래곤의 상처에 다시 등불을 비춰 보았다. 그리고 감탄했다.
신관들이 연구해 낸 마법 가루라더니 사실인 모양이었다. 가루약은 단단히 굳은 채 상처 위에 들러붙어 있었다. 뜯긴 살점과 끔찍하게 아파 보이던 빨간 조각들 위로 새살이 돋아 있었다. 출혈도 멎은 채였다.
자리에서 일어나 아사야는 뜯긴 날개 위에도 마찬가지로 약을 뿌려 주었다. 가루약이 이젠 남지 않아서, 고무마개가 달린 연고라도 되는대로 마구 발라 주어야 했다.
이번에는 드래곤도 몸부림치지 않았다. 그저 자그만 소녀가 낑낑거리며 붕대를 감아 대는 것을 물끄러미 구경했다.
아사야가 가져온 붕대는 터무니없이 짧고 드래곤의 날갯죽지는 사람 키만큼 넓어서, 고작 두 바퀴를 감자 동이 나 버렸다. 약을 발라 주고 붕대를 쓴 것만으로 아사야는 숨을 헐떡대기 바빴다.
조금 남은 붕대의 끄트머리를 리본 모양으로 묶으며 아사야는 만족했다.
“나…… 내일 또 올게.”
아사야가 속삭였다. 병문안을 오겠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드래곤이 ‘병문안’이라는 단어를 아는지 알 수 없어 관두었다.
“여기 꼭 있어야 해. ……내일은 맛있는 걸 가져올게.”
램프를 챙겨 들고 아사야는 드래곤으로부터 뒤로, 뒤로 물러났다. 성을 몰래 빠져나온 걸 들키지 않으려면 당장 침실로 뛰어가야 했지만, 어쩐지 발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꼭이야. 여기서 기다려야 해. 약속한 거야, 응?”
그러나 드래곤은 말이 없었다. 대답을 듣지 못한 채 아사야는 아졸 성으로 돌아갔다. 다시 침실에 도착해 더러워진 망토를 벗을 때쯤엔 동이 트기 시작했다.
드래곤이 약속을 지키며 기다렸는지, 아사야는 알 수 없었다. 약속을 어긴 것은 오히려 아사야였다. 이튿날 점심부터 아사야는 열이 올라 침대에서 일어날 수 없었다. 지독한 몸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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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데르는 제 딸의 몸살이 연회 때문인 줄 믿었다. 평생 사귄 사람이라곤 가족과 하인들, 몇몇 기사단원뿐인 어린 아사야였다. 그런 아이가 지난날엔 많은 사람들을 한꺼번에 만났고 두 시간 넘게 인사하고 다녔으니, 다리가 퉁퉁 붓고 열이 끓을 만도 하다는 믿음이었다.
사실, 아사야는 아버지가 생각하는 것처럼 약하지 않았다.
아사야가 몸살을 앓는 이유는 어젯밤 두 시간이 넘게 숲을 헤치고 헤매 다녔기 때문이었고, 다친 드래곤을 발견하고 마물의 날갯죽지에 매달려 보았기 때문이었으며, 그 불쌍한 드래곤을 치료해 줬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번 몸살이 아사야는 싫지 않았다. 이번만큼은 아무 이유 없이, 그저 벌을 받는 기분으로 아프지 않아도 됐다.
문제는 소녀의 전신을 감싼 저릿저릿한 몸살 기운이 이틀 내리 가시질 않는단 점이었다. 미열까지 웃돌아 머릿속이 멍했고 생각은 뚝뚝 끊겼다.
결국 침대를 벗어나지 못한 채 주말을 보내야 했다.
오전에는 아버지와 그가 부른 신관들이 아사야의 침실에 다녀갔다. 아사야는 치료 마법을 행할 줄 아는 신관들을 데리고 동굴로 가고만 싶었다. 그들이 치료해 준다면 동굴 속의 아픈 드래곤도 금세 나을 것이었다.
오후에는 유모, 엠마오가 책을 읽어 주었다. 아사야는 엠마오와 함께 책 스무 권을 들고 동굴로 갈까 생각했다. 그러면 드래곤이 치료를 받는 동안 이야기를 들으며 즐거울 수 있을 것이었다.
그 뒤에 아사야는 말끔히 나은 드래곤에게 제일 아끼는 하늘색 리본을 묶어 줄 것이었다. 그게 아니면, 드래곤의 눈 색처럼 예쁜 보라색 리본도 괜찮을 것 같았다. 여차하면 두 개 다 묶어 줄 수도 있었다. 행복한 고민이었다.
“어머……. 웃으면서 주무시네.”
입꼬리를 올린 채 즐거운 듯 잠든 아사야를 내려다보며, 엠마오는 물잔이 든 접시를 협탁에 올렸다.
사흘이 지난 뒤에야 아사야의 몸살이 나았다. 날씬하던 몸은 그사이 조금 말랐고, 베데르의 근심도 그만큼 커졌다. 딸을 위해 그는 직접 식사를 들고 찾아왔다. 메뉴는 고기가 물렁해질 때까지 끓인 수프와 부드러운 빵이었다.
“기분은 좀 어떠니.”
침대에 걸터 앉으며 베데르가 물었다. 아사야는 졸린 눈으로 그를 살폈다. 진고동색 머리칼은 바람을 맞았는지 흐트러져 있었고, 상의는 외출할 적에나 받쳐 입던 셔츠였다.
시선을 내려 아사야는 침대 밑 카펫을 밟고 있는 아버지의 신발까지 확인했다. 말을 타고 멀리 다녀올 때나 신던 가죽 부츠였다. 부츠의 코가 각졌고 옆면 박음질이 특이해서 기억하고 있었다.
“아빠. 어디 다녀오셨어요?”
아사야가 물었다. 손을 뻗어 베데르는 아사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리고 작은 아사야의 얼굴이 그의 큰 손 하나에 가려졌다. 손길을 따라 좌우로 흔들리는 얼굴은 발그레하니 귀여웠다.
“걱정할 것 없다, 아사야.”
베데르가 말했다.
“자, 식사하자.”
그러나 그의 언질 때문에, 아사야는 어떤 일이건 제가 걱정해야 할 일이 생겼음을 알았다.
‘혹시 그 드래곤을 찾아낸 건 아닐까?’
초조해져 아사야는 시선을 내리깔았다. 만에 하나 아버지께서 동굴로 모험을 간 것에 대해, 그리고 기사단 약품을 훔친 것에 대해, 또 다친 마물을 치료해 준 것에 대해 추궁해 온다면 아사야는 거짓말을 할 자신이 없었다.
“아가.”
그러나 베데르는 조금도 화나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다정하게 손을 뻗어 아사야의 조그만 두 손을 감싸쥐었다.
“식욕이 없어도 먹어야 해.”
“아……, 네, 아빠.”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수프를 휘휘 저어 식힌 다음, 베데르는 직접 수프를 떠다 불어 식혔다. 그러고는 아사야에게 내밀었다. 그가 저를 의심하지 않고, 드래곤에 대해서도 모른다는 생각에 아사야의 낯이 밝아졌다. 외출은 아무래도 다른 용무로 다녀온 듯했다.
한 술 두 술 베데르가 떠 주는 대로 수프를 받아먹으면서, 아사야는 동굴에 대해 생각했다. 그리고 그 속에 숨은 아픈 드래곤을 떠올렸다.
‘그 드래곤도 지금쯤 배가 고프겠지?’
수프를 남겨 가져가면 어떨까 생각했지만, 식사를 남기는 모습을 보였다간 아버지께서 한 주간 더 외출 금지령을 내릴지도 몰랐다. 조금이라도 빨리 건강한 모습을 보여야 했다. 그래야 밤중에도 몰래 산책할 수 있고, 드래곤을 만나러 동굴로도 갈 수 있었다.
드래곤이 상처가 더 심해졌다거나 굶주렸다거나 하는 이유로 죽지만은 않았길 바라며, 아사야는 아버지가 수프에 찍어 건넨 빵까지 깨끗하게 먹어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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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아사야는 침대 위에 뜬눈으로 누워 있었다. 아플 때면 한밤중에도 엠마오나 아버지께서 상태를 살피러 오곤 했다. 서너 살 즈음엔 자다가도 갑자기 숨을 못 쉬는 일이 잦았기에, 사달이 나지 않게끔 아사야를 번갈아 살피는 게 어른들의 습관이었다.
밤 열한 시가 지난 뒤에야 아사야는, 오늘 밤 누구도 제 침실을 찾아오지 않을 것이라 확신할 수 있었다. 낮잠을 길게 자 두었더니 졸리지도 않았고, 끓던 열도 식었으니 몸 상태도 좋았다.
‘출발하자.’
동굴 속의 드래곤을 만나러 가기에 적절한 순간이었다.
이번에 아사야는 연병장으로 이어지는 뒤뜰이 아닌, 1층 주방으로 먼저 향했다. 어깨에는 소풍용 피크닉 바구니를 메고 손에는 램프를 든 채였다. 걸음걸이는 생쥐처럼 조심스럽고 반딧불처럼 재빨라야 했다. 하녀들을 깨웠다간 야단이 날 것이었다.
나쁜 짓도 처음만 어렵다더니, 도둑질도 그런 모양이었다. 포슬포슬한 빵과 레몬청이 든 유리병을 훔치면서 아사야는 기쁘기까지 했다.
‘아프니까 많이, 많이 먹어야 해.’
아사야는 드래곤의 식성을 몰랐기에, 제 눈에 맛있어 보이는 것이라면 뭐든지 바구니에 집어넣었다.
무거운 바구니를 어깨에 걸치고 움직이자니 걸음걸이가 느릿느릿했다. 창살 울타리 사이를 지날 적엔 바구니의 가로 너비가 걸리는 바람에, 훔친 음식들을 먼저 통과시킨 다음, 바구니를 울타리 위로 던져서 넘겨야만 했다.
그렇게 한아름 훔친 음식을 들고 걷다 보니 익숙한 넝쿨과 시커먼 동굴이 나왔다. 고작 며칠 만에 보는 것인데 동굴은 더 어둡고 음산해진 듯 차가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살금살금 동굴 안으로 기어 들어가길 마흔 걸음째에, 아사야는 멈춰 섰다. 그러고는 무거운 바구니를 내려놓았다. 세상에서 가장 컴컴하고 음침한 피크닉 장소에 도착한 것이었다. 이제, 저와 함께 할 드래곤만 찾으면 됐다.
램프를 머리 위로 들고서, 아사야는 어둠 안으로 한 발 두 발 다가갔다.
“나…… 나 왔어.”
아사야가 속삭였다. 그리고 숨소리가 돌아오길 기다렸다. 소녀가 눈을 열 번 껌벅거리고 어둠 안을 둘러보는 동안에도 드래곤의 대답 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아직 여기 있어?”
아사야가 다시 외쳤다. 여전히 답은 없었다.
허탈한 마음에 아사야는 동굴 바닥에 쓰러지듯 앉아 버렸다. 잠옷 원피스에 흙을 묻혔다간 몰래 빠져나온 것을 들킬 수도 있었지만, 그런 염려를 할 여유 따위는 없었다. 드래곤이 사라졌단 것이 그저 슬펐다. 서운하다 못해 억울하기까지 했다.
‘늦게 오고 싶어서 늦은 게 아닌데…….’
그대로, 아사야는 돌바닥에 엎드려 버렸다. 그리고 몸을 옹송그렸다. 혹시 제 치료가 잘못되어서 드래곤이 죽어 버린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유모가 읽어 주었던 동화책에 의하면 블랙 드래곤은 세상에서 가장 똑똑하고 또 생명력이 질기다고 했었다. 아주 영악하고 나쁘다고도, 그래서 골칫거리라고도 했었다. 동화 속에 등장한 악당 드래곤은, 영웅이 저를 부상 입히면 그림자를 잘라 냈다. 햇볕에 강하게 내리쬔 그림자가 짧아지듯이, 블랙 드래곤도 약해질수록 몸체를 줄이는 것이었다.
동굴 속의 드래곤도 그렇게 작아지고 작아지다가, 죽어서 소멸해 버린 건 아닐까.
“제발…….”
볼썽사납게 아사야는 훌쩍이기 시작했다. 음식을 챙겨 왔는데, 사흘 늦었다는 이유로 드래곤이 죽어 버렸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혹시 죽지 않았더래도 저를 기다리지 않고 떠나 버렸단 의미이니 그것 또한 슬프게 느껴졌다.
“멍멍아…….”
그때, 따듯한 바람이 훅 하고 아사야를 향해 불어왔다. 놀란 아사야는 허겁지겁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맨눈으로는 어디에서 누가 저를 보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램프를 빨리 챙겨 들려다 아사야는 그 불에 델 뻔했다. 떨리는 손으로 램프를 들고 비추어 보자, 저 멀리 깊은 어둠 속에서 저를 응시하는 보라색 눈동자가 보였다.
“바보야!”
아사야는 소리를 질러 버렸다.
“왜 빨리 안 나왔어, 가 버린 줄 알았잖아……. 죽은 줄 알았단 말이야!”
제자리에 앉은 채 공작가의 따님께서 두 발을 동동 굴렀다. 착하고 얌전한, 순종적이고 연약한 아사야 아졸에겐 철부지 시절이란 게 없었다. 누구에게 그렇게 화를 내기로는 난생처음 있는 일이었다.
아사야가 소리를 지르건 못되게 ‘바보’라는 말을 쓰건 말건, 드래곤의 눈동자는 크게 미동이 없었다. 그저 부엉이처럼 끔벅거리면서, 멀찍한 동굴 입구를 훔쳐볼 뿐이었다.
“너…… 내가 누굴 데려왔을까 봐 숨어 있었구나.”
어릴지언정 아사야는 바보가 아니었다. 그제야, 저를 공격한 기사단 연마장과 가까운 숲에 숨은 드래곤의 처지가 이해됐다.
불쑥 솟았던 화가 사르르 녹아내렸다.
“난 그런 줄도 모르고…….”
치료 마법을 쓸 줄 아는 신관이나 엠마오를 데려왔다가는 큰일이 날 뻔했다. 아사야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그 생각들을 떨쳐 버렸다. 누가 본다면 드래곤은 죽은 목숨이었다. 그는 제대로 날 수도 없고, 크게 움직이지도 못하는 상태였다.
“날 기다렸어?”
아사야가 물었다. 여전히 드래곤은 답이 없었다.
“미안해. 몸살이 걸려서 눕는 바람에 여기로 올 수가 없었어. 내가 많이 건강했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
소녀가 종알거리는 동안 드래곤은 그저 눈만 끔벅거렸다. 속을 알 수 없는 까만 얼굴은, 그래도 며칠 전보다는 나아 보였다. 그가 괴로운 짐승처럼 찡그리지 않는 것만으로도 아사야는 희망을 느꼈다.
“그래도 나는 약속은 꼭 지켜.”
비밀 주문을 외는 양 아사야가 속삭였다.
“늦었지만 널 보려고 왔어.”
어둠 안에서도 소녀의 볼은 발그레하니 분홍색이었다.
이어 아사야는 종일 상상했던 즐거운 일을 해냈다. 저 없이 굶고 있었을 드래곤에게 맛있는 식사를 대접하는 일이었다.
가져온 바구니를 끌어다 소녀는 맛나게 구워 낸 빵을 먼저 꺼냈다.
혹시라도 드래곤이 빵이나 잼 따위는 먹지 않고, 말이나 양, 개나 돼지를 잡아먹고 싶어 하면 어쩌나 걱정했던 아사야였다. 그러나 뜻밖에 드래곤은 대뜸 입을 벌리더니 빨간 혀와 날카로운 이빨을 보여 주었다. 깜짝 놀라 아사야는 얼어붙어 있다가, 쩍 벌어진 마물의 입 앞에 가져온 빵을 내밀었다.
“맛있…….”
아사야가 묻기도 전에 드래곤은 빵 덩어리를 꿀꺽 삼켜 버렸다. 맛이라는 걸 볼 시간이나 있었을까 의문이었다.
“…….”
묵묵히, 아사야는 가져온 빵 전부를 드래곤에게 먹여 주었다. 아버지께서 저에게 수프를 떠먹여주실 때 이런 기분이었을까 생각하니 웃음이 났다.
다시 바구니를 뒤적여 아사야는 유리병을 들었다.
“그리고 이건 레몬청인데, 꿀을 넣고 절인 거야. 아플 때 꿀을 먹으면 입맛이 돌아. 달달하고 맛있을 거야. 입 벌려 봐.”
엠마오의 칭찬에 의하면 아사야는 또래 아이들치고 말을 아주 잘하는 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아사야가 하는 제안을 거절하는 하녀는 이제껏 없었다. 그 언변에 드래곤에게 먹힌 것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가 소녀 앞에 입을 벌려 주기는 했다.
머뭇거리며, 아사야는 드래곤의 벌어진 주둥이 사이로 팔을 넣었다.
“내 손은 먹으면 안 돼…….”
그러고는 가져온 레몬청 한 통을 그대로 쏟아 넣었다. 아사야의 손가락도, 드래곤의 혓바닥도 끈적끈적해졌다.
꿀꺽, 드래곤의 목울대가 유연하게 움직였다.
그런데 그의 반응이 이상했다. 눈을 가늘게 뜨고서 아사야를 바라보았는데, 그 눈길이 이상하게 노려보는 것 같았다.
달콤한 꿀을 먹여 주었는데 왜 저를 원망하나 의심스러워하며 아사야는 제 손가락에 묻은 레몬청을 핥았다. 그러고는 화들짝 놀라 제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셔!’
레몬 덩어리를 껍질째로 씹어 먹은 맛이었다.
‘어떡해, 너무 셔!’
그대로, 소녀는 동굴 밖으로 달려 나갔다.
갑자기 사라져 버린 작은 손님의 흔적들을 바라보면서, 드래곤은 어둠 안에서 킁킁거렸다. 몇 분인가 지난 뒤에 아사야는 다시 돌아왔다. 빈 유리병에 시냇물을 한가득 담아 온 것이었다.
“미안해! 목마르지? 이거 마셔.”
같은 행동을 아사야는 서너 번 반복했다. 그제야 갈증을 해소한 드래곤의 몸짓이 편안해졌다. 아사야는 헛웃음을 흘리며 드래곤의 얼굴을 힐끔힐끔 바라봤다.
“너 꼭 강아지 같아.”
감정이 없는 것 같으면서도, 아주 풍부하게 숨어 있는 것 같기도 하단 의미였다. 드래곤이 그 말을 알아들었는지는 미지수였다.
마지막으로 아사야는 거대하고 까만 드래곤의 상처를 살펴보았다. 이제 저를 믿는 것인지 혹은 만만하니 경계하지 않는 것인지, 드래곤은 아사야가 제 주위를 뛰어다니며 이리저리 둘러보게끔 내버려 두었다.
램프를 들고 불빛 아래에 비추어 보니 여물어 가는 살점이 보였다. 그리고 드래곤의 중심에 박힌 시뻘겋고 둥근 모양의 박살난 구슬 또한 보였다. 깨진 구슬처럼 갈라진 파편들이 군데군데 박힌 채 희미한 빛을 내고 있었다.
기억을 되돌려 아사야는 담배 냄새를 풍기던 기사들을 생각했다. 그리고 그들 대화 또한 떠올려 보았다.
“그 드래곤이 살아 있을 확률은 얼마나 되지?”
“거의 전무하다고 봐야죠, 등딱지를 아주 묵사발을 냈는걸요. 심핵까지 손상시켰을 겁니다. 그런데 그 큰 놈이 시체도 보이지 않으니 문제 아닙니까?”
제 눈앞에 놓인 것이 그 ‘심핵’임을 추측하기란 어렵지 않았다. 드래곤의 심장, 드래곤의 생명. 그 중대한 심핵이 설탕 과자처럼 갈라지고 부서져 있었다.
만일 같은 상처가 제 심장을 좀먹었더라면 아사야는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었다. 비명을 지르게 아프고 눈물이 나게 서러워서 엉엉 울고 쓰러졌을 것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드래곤이 가여웠다. 침묵하는 그의 고통이 꼭 제 것인 양, 마음 안이 아려 왔다.
‘정말…… 어떻게 살아서 여기에 숨었을까?’
아사야는 제 팔뚝을 끌어안으며, 드래곤의 눈동자를 바라봤다.
“많이 아프지……. 여기가 안 나아서 못 나가는 거야?”
여전히 드래곤은 말이 없었다.
“이 동굴엔 아무것도 없는데 왜 여기 왔어…… 혹시, 혼자 조용히 죽으려고…… 그러려고 여기까지 들어온 거야?”
또다시 침묵이었다. 어둠인지 드래곤의 몸체인지 모를 까만 것을 바라보며 아사야는 슬퍼졌다.
“그럼 지금도…… 그런 생각하니? 혼자 조용히…….”
그 순간 드래곤이 움직였다. 입을 열어 그렇다 아니다 대답해 주진 않았으나, 그의 커다란 코끝이 아사야의 밋밋한 배를 툭, 찌르듯이 건드렸다. 작은 움직임에 아사야는 크게 휘청거렸다. 넘어지지 않기 위해 드래곤의 머리를 껴안아야만 했다.
비틀거리던 두 발을 제대로 딛고서 아사야는 눈을 크게 뜨고 깜빡거렸다. 블랙 드래곤의 머리가 제 품 안에 있었다. 어떤 메시지라도 건네는 듯이, 조금도 거칠거나 아프지 않게.
아사야는 미소 지었다.
“네 심핵이 나을 때까지, 내가 옆에서 지켜 줄게. 매일 맛난 걸 가져다주고 물도 떠다 줄게. ……걱정하지 마. 아픈 게 얼마나 힘든지 나는 잘 알아.”
천천히, 아사야는 작은 손을 뻗었다.
“우리 포옹할까?”
어둠보다 더 짙은 까만 날개가 소녀의 작은 손에 잡혔다. 그 거대한 날갯죽지 아래로 아사야는 제 몸을 밀어넣듯이 파고들었다.
포옹이라기보다는, 작은 쥐가 겁도 없이 고양이의 배 밑으로 들어간 것에 가까웠다. 그래도 아사야는 만족스러웠다. 비늘로 뒤덮인 드래곤의 가죽은 단단하면서도 묘하게 부드러웠고, 뜨거운 심장 소리가 천둥처럼 퉁, 퉁, 퉁 울려 왔다.
“내 이름은 아사야 아졸이야.”
아사야가 속삭였다.
“내가 너를 부를 수 있게…… 이름을 짓는 건 어떨까?”
드래곤은 여전히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사야가 가진 수많은 재능 중에는 ‘혼잣말하기’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가브리엘.”
속닥거리며 아사야는 금색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몸살이 걸려 앓던 침대에서 내내 고민한 이름이었다. 공작가의 어린 아가씨는 드래곤이 제가 지어 준 이름을 싫어할 수도 있다는 고민 따위는 하지 않았다. 그게 아사야가 지닌 특권이었고, 천성이었다.
“네 이름은 가브리엘이야.”
그날 밤, 아사야는 가브리엘과 친구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열 살이 되어서야 만든, 그녀 인생 첫 친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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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속 동굴은 아사야의 비밀 기지가 되었다. 그곳에는 소녀의 피크닉 바구니가 있었고, 램프와 여분 초와 성냥, 그리고 간식 상자까지 생겨났다.
깊은 밤마다 아사야는 아끼는 책을 한 권씩 가져왔다. 램프 불빛으로 책장을 비추어 가며, 아사야가 책을 읽어 주면 가브리엘은 뜻 모를 얼굴로 소녀를 구경하곤 했다. 아사야는 커다란 드래곤이 보라색 눈을 빛내며 물끄러미 저를 바라보는 것을 좋아했다.
가브리엘의 상처에 새 연고를 발라 주면서,
“네가 계속 여기 있었으면 좋겠어. 상처가 다 낫고 건강해질 때까지, 계속…….”
고백할 정도였다.
“난 친구가 없거든.”
그렇게 말을 덧붙여도 가브리엘에게선 돌아오는 답이 없었다.
가브리엘에겐 저 외에 다른 친구가 있었을까? 아사야는 가브리엘을 닮은 까만 드래곤들이 초원 위를 뛰어노는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그럼 그 친구들과 가브리엘은 어떤 대화를 나눴을까? 어떤 주제를 좋아했고 어떤 관심사를 공유했을까? 제가 읽어 주는 동화책이나, 들려주는 일상적인 수다보다 훨씬 재밌고 멋진 대화를 나누지 않았을까?
“저기, 가브리엘……. 책을 읽었는데 드래곤은 바다 위의 땅이 갈라지기도 전에 태어난 존재들이라서, 다른 섬나라들이 아직 대륙에 붙어 있을 때부터 하늘을 날았대. 그래서 드래곤은 폴리모프도 할 줄 알고 말도 잘하고, 인간들보다 훨씬 똑똑하대.”
드래곤에 대해 알아갈수록 아사야는 가브리엘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게 되었다.
“그런데 넌 왜 사람으로 변신하지 않고 말도 하지 않아? 나랑 대화하고 놀고 싶지 않은 거야?”
슬픈 목소리로 물어도 돌아오는 답은 여전히 없었다. 몇 초간의 침묵을 견디지 못하고 다시 입을 여는 쪽은 아사야였다.
“미안해……. 따지려던 건 아니었어.”
그러고는 드래곤의 굵고 단단한 목을 껴안았다. 그렇게 하면 제 얼굴을 감추면서도, 가브리엘과 붙어 있을 수 있었다.
이튿날에 아사야의 서운했던 감정은 일부 해소됐다. 화해의 선물로 직접 꽃을 엮어 만든 화관을 가져다준 게 그 증거였다. 반듯하게 각이 진 가브리엘의 머리와 보라색 꽃을 묶은 화관은 잘 어울렸다.
가브리엘의 양처럼 둥글고 뾰족한 뿔 위에 화관을 올려놓고, 아사야는 제자리에서 팔짝거렸다.
“잘 어울려!”
기쁜 듯 꺄르륵 웃어 대는 어린 인간을 앞에 두고, 드래곤은 한숨 쉬었다. 그의 콧김에 아사야의 머리칼이 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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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단 의무실에서 귀한 약품이 사라진 것을, 치료사는 금세 눈치챘다. 치료사의 신고에 집사는 몹시 예민해졌다. 기사단 의무실뿐만 아니라 주방에서도 빵과 간식거리들이 사라졌다는 신고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물건이 없어진 것이 확실해지자 집사는 좀도둑을 잡겠노라 선언했다. 요즘처럼 안팎으로 소란한 시국에 성안에 도둑을 둘 순 없는 노릇이었다.
집사와 경비대에 추리를 시작하고 한나절 만에 범인이 잡혔다. 하나뿐인 용의자는 다름 아닌 부엌데기 하인이었다. 천출에 가난뱅이이니 범행 의도가 확실하다며 엠마오가 이야기를 전해 줬을 때 아사야는 기절할 것처럼 큰 현기증을 느꼈다.
“기사단 의무실의 값비싼 약품도 그 애가 팔아 치운 게 틀림없어요.”
아사야의 담요에 여우 무늬 수를 놓아 주면서, 엠마오가 말했다.
“그…… 그중에 뭐가 비싼 약품인지 걔가 어떻게 알았겠어?”
떨리는 목소리로 아사야가 되물었다. 그러자 ‘흥’ 하며 엠마오는 콧김을 내뿜었다.
“아가씨, 신관이 만든 마법 치료제가 얼마나 귀한 건데요. 아가씨께서 아프실 때에나 두 스푼 타 드리는 약이라구요.”
그래서 내가 훔친 거라고, 말할 수가 없어 아사야는 소리 없이 입만 벙긋거렸다. 범인을 생각하니 괘씸하다는 듯 엠마오는 더욱 빠른 속도로 담요에 바늘을 콕콕 찔렀다. 순식간에 여우 꼬리가 완성되었다.
“게다가 그 부엌데기가 주방 뒷문 열쇠를 갖고 있었다네요? 밤중에 문을 따고 숨어들어서 음식들을 훔친 게 틀림없어요.”
“버, 버…… 범인이 성안에 있었을 수도…… 있잖아.”
긴장으로 말을 더듬거리며 아사야가 소곤거렸다.
“성안에 숨어 있다가…… 주방으로 내려갔더라면 열쇠 같은 건 필요 없지. 안 그래?”
“아가씨.”
그러자 엠마오는 놀란 얼굴로, 담요와 실타래를 내려놓았다. 소중한 아가씨께서 범행을 저질렀으리라곤 생각하지 못하고, 이 집안사람들 중 누구를 의심하는 줄로 착각한 것이었다.
단단한 목소리로, 엠마오가 말했다.
“이 성안에 머무르는 하인들은 모두가 가족이나 다름없어요. 누구를 속이는 짓 따위는 하지도 않고, 그럴 이유도 없지요.”
아사야의 귀에 그녀의 목소리는 기사의 맹세처럼 들렸다.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공작님의 자산에 손을 대는 나쁜 짓은 벌이지 않을 거예요.”
안심하라는 듯 덧붙인 말에 아사야는 더욱 사색이 됐다. ‘공작님의 자산에 손을 대는 나쁜 짓’을 이미 벌인 아사야였다. 저 때문에 결백한 부엌데기 하녀가 벌을 받는다니 믿기지가 않았다.
엠마오는 오늘 저녁 집사가 직접 하녀의 방을 수색할 것이라며, ‘도둑질 사건’이 끝날 때까지 틈틈이 소식을 알려 드리겠노라 약속했다.
“수색?”
누군가 들이닥쳐 방을 수색한다니, 아사야에게는 끔찍한 형벌처럼 들렸다.
“수색을 해서 사, 사라진 물건이 발견되지 않으면…… 그 애도 벌을 받진 않겠지?”
“어머, 그럼 더 큰일이죠! 벌써 어디에 팔아넘겼단 의미잖아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아사야는 이불보를 꽉 쥐었다. 엠마오는 범인이 제대로 처벌받을 수 있게 내려가 목소리를 내야 되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아사야의 창백한 이마에 작은 키스를 남겼다.
여우 수가 놓인 예쁜 담요를 안아 들고, 아사야는 제 침대로 돌아갔다. 따듯하게 데워진 자리에 앉자 모든 일이 멀게만 느껴졌다. 의식적으로 아사야는 그 일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어쩌면 괜찮을지도 모르잖아.’
부엌데기 하녀를 처벌한다 해도, 집사 할아버지는 연민이 많고 착한 사람이었다. 운이 좋으면 약간의 꾸중으로 끝내 줄지도 몰랐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집사 할아버지는 아졸 공작가에 평생을 몸담은 가족이었다.
‘아버지 재산에 손을 댔는데…… 천출 하녀를 가만둘 리가 없어.’
자리에서 일어나, 아사야는 보드라운 슬리퍼에 발을 넣었다. 남에게 죄를 덮어씌운 입장에선 자신을 편안하게 하는 모든 것이 따끔하고 쓰라리게 느껴졌다.
천출 하녀가 쫓겨나거나 매질을 당하고 감옥으로 보내지기 전에 아사야는 빨리 움직여야 했다. 후다닥 계단을 타고 내려가면서 아사야는 슬리퍼 두 짝을 난간 밖으로 떨궈 버렸다.
헉헉거리며 달려간 하녀 숙소에는 벌써 경비병 하나와 집사, 그리고 엠마오가 서 있었다. 부엌데기 하녀를 방 밖으로 끌어내는 모습을 보자마자, 아사야는 더는 고민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내가 그랬어!”
아사야가 소리쳤다.
“내가 그런 거니까 그 애는 놔줘요!”
공작 아가씨의 큰소리에 방 안에 숨어 있던 하녀들까지 얼굴을 힐끔 내밀었다. 갑작스레 저에게 향해 오는 수많은 시선들에 아사야는 식은땀을 삐질 흘렸다. 그 순간, 경비대에게 어깨를 잡힌 부엌데기 하녀와 눈이 마주쳤다.
우악스러운 손길이 하녀의 깡마른 어깨를 쥐고 있었다. 아무리 용의자라고는 하나 아사야는 제 또래의 어린 여자아이를 그렇게 다루는 어른의 존재를 믿을 수가 없었다.
재빨리 경비대에게 다가가 아사야는 그의 팔을 손으로 찰싹 쳤다. 경비대는 얼른 부엌데기를 놔주었다. 열 살 꼬마 아가씨의 손이 아파서가 아니라, 그 아가씨의 아버지 되는 이를 생각해서였다.
엠마오가 놀란 얼굴로 둘 사이를 가로질렀다.
“아가씨,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치료 가루랑 음식 훔친 거, 다 내가 그런 거야. 이렇게 소란이 날 줄 몰랐어.”
망설임 없이 아사야는 모든 범행을 자백했다.
“아가씨께서 왜 그런 짓을…… 어디에 쓰셨는데요?”
그러나 이어지는 질문에 대한 답은 생각해 놓지 못했다. 집사와 엠마오의 눈총을 맞으며 아사야는 입을 벙긋거렸다.
“내…….”
내 드래곤에게 전부 갖다 바쳤다. 그렇게 말할 순 없었다.
“내 몸에 뿌렸어.”
마침내 입 밖으로 나온 변명이 그것이었다.
“그럼 이제 안 아플 거 같아서…….”
말끝을 흐리며 아사야는 제 원피스 치맛자락을 꽉 쥐었다. 그리고 고개를 푹 숙였다. 제 핑계를 누구도 믿어 주지 않을 것 같았다.
“오, 아가씨…….”
뜻밖에, 엠마오와 집사는 안쓰러운 신음을 흘렸다. 그들은 더는 부엌데기 하녀에게 관심이 없었다. 맨발로 정원을 가로질러 달려온 아가씨를 안아 들고 보듬기에 바빴다.
큰 꾸중을 걱정했던 아사야는 저를 애처로이 다루는 식구들에게 둘러싸였다.
“가여운 우리 아가씨…….”
엠마오의 품에 안겨 등을 다독이는 손길을 받으면서, 아사야는 두 눈을 깜빡거렸다. 범행을 자백하면 손과 발이 떨릴 줄로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마음이 가뿐했고 기분은 좋아지기까지 했다.
그리고,
‘가브리엘한테 이 이야기 해 줘야지.’
드래곤에게 해 줄 말이 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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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물 전쟁이 다시금 발발하느냐를 놓고 어지러운 시국이었다. 수도 외 산간지역에서는 벌써부터 오크와 트롤들이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작은 마을의 민간인들은 대피하기 바빴고, 용병들의 몸값은 껑충 뛰었다.
전쟁 영웅인 베데르 아졸 역시 가만있진 않았다. 작금의 평화가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고는 믿지 않았던 그였다. 마법사 협회에 어마어마한 투자금을 지원해 온 것도 그 이유에서였다. 어떤 방식으로건 마물들은 다시 창궐할 테고, 그 우두머리에는 드래곤이 설 것이었다.
드래곤을 제압하는 마도구를 개발해 낸 것도 그 이유에서였다.
“그럼, 전쟁이 다시 일어날 수도 있단 말이에요?”
부엌데기 하녀를 지켜 낸 뒤로 아사야는 성안 곳곳을 보다 자유롭게 오갈 수 있었다. 어쩌면 하인들이 그녀를 좀 더 편안하게 생각하고, 조금은 안쓰럽게 여기는 것도 같았다.
배가 고픈데 샌드위치를 만들어 줄 수 있느냐고 물으려 내려간 주방에서 아사야는 하인들이 나누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드래곤, 마도구, 전쟁…… 아주 멀게만 느껴지던 단어들이 이제는 친숙했다.
“쉬, 허튼소리 말고 일들 해.”
공작 아가씨의 눈치를 살피며 주방장이 소리쳤다. 이내 그는 삶은 게살을 푸짐하게 넣은 샌드위치를 종이에 싸 아사야에게 건네주었다. 아사야는 가져온 피크닉 바구니에 샌드위치를 넣었다.
“우유도 한 잔 드릴까요?”
“응. 병에 넣어 줄 수 있어?”
“물론이지요.”
공작 아가씨께서 피크닉을 가실 건가 보다, 생각하며 주방장은 우유를 따듯하게 데운 유리병에 따랐다. 그 아가씨께서 암흑 동굴 속 드래곤에게 줄 먹이를 구하고 있음은 누구도 몰랐다.
근래 들어 아사야는 어떤 사고도 치지 않고 조용했고, 책을 많이 읽었다. 식욕도 왕성해졌으며, 팔다리도 튼튼해졌고 잠도 아주 푹 잘 잤다. 엠마오가 베데르 공작에게 보고한 내용으로는 그랬다.
사실 아사야는 매일 밤 드래곤을 찾아가는 대형 사고를 치고 있었다. 책을 많이 읽는 것은 그 드래곤에 대해 더 많이 알기 위해서였다. 받아 간 음식들은 전부 드래곤의 먹이였다. 잠을 잘 자는 척 곯아떨어진 연기를 하면, 좀 더 이른 저녁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다.
마도구에 대한 기밀 서적을 품에 안고서, 아사야는 아버지의 서재 벽난로 앞에 앉았다. 대다수의 페이지들은 고대 언어로 쓰여 있어 혼자 힘으로는 읽을 수 없었다. 그러나 서적 중간중간에 엮인 서류들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아버지께서 지불한 어마어마한 투자 금액은 뛰어넘고, 아사야는 마도구에 대한 설명에 집중했다.
‘마도구, 인공 마석…….’
따지자면, 드래곤은 가장 원초적인 마법사였다. 그들 심장부, 심핵은 오래되고 강력한 마력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마력을 이용해 자유자재로 몸집을 키우고, 불과 얼음, 때론 전기와 암흑을 무기처럼 다루니 그야말로 타고난 마법사인 셈이었다.
그런 드래곤의 심핵을 완전히 박살내는 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지만, 그 심핵에 약간의 금을 내고 마력을 흡수시키는 일은 가능했다. 그러기 위해 개발한 것이 마도구였다.
신관들은 마도구 내에 인공 마석을 만들어 넣었다. 드래곤의 심핵과 최대한 닮은 구조이되, 그들을 해칠 도구였다. 마도구를 이용해 드래곤의 마력을 모두 인공 마석에 흡수시키고 나면, 고대의 신이라 불리던 드래곤들도 그저 커다란 도마뱀 마물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대다수 힘을 잃어버렸고, 일부는 몸집이 줄어들었다.
실험 보고서를 읽으며 아사야는 발개진 눈을 느릿하게 깜빡거렸다.
‘블랙 드래곤.’
유모가 읽어 주었던 소설도 생각났다. 약해질수록 몸집이 줄어드는 어둠 속성 드래곤은 블랙 드래곤이 유일했다. 혹시 지금의 가브리엘도 그렇게 당해 버린 건 아닐까…… 아사야는 실험 보고서를 두 번, 세 번 다시 읽어 내렸다.
‘본래는 훨씬 더 컸다는 걸까. 더 크고, 아주 강했던 걸까?’
아사야에겐 모든 소식이 그저 속상하게만 들렸다. 어쩌면 그녀는 대륙 안에서, 전쟁이 일어나지 않기를 가장 바라는 사람이었다. 아버지와 공작성의 기사단원들이 무사했으면 바랐고, 제 친구인 가브리엘에게도 어떤 해가 끼치지 않기를 바랐다.
기묘한 줄다리기 속에서 계절이 지나고 해가 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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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마물 전쟁이 발발한 것은 아사야의 열한 살 생일을 얼마 남기지 않은 때의 일이었다. 20년 전 1차 전쟁과 다른 점이 있다면, 드래곤과의 싸움이 이제는 사냥에 가깝게 되었단 것이었다. 전투이던 것이 사냥이 된 것엔 단연 마도구의 완성이 한몫했다.
가장 먼저 청소당한 것은 와이번이었다. 강철 같던 비늘이 창과 화살에 쉬이 뚫리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군인들은 겁이 없어졌다.
방어력을 잃어버린 젬 드래곤은 값비싼 보물 덩어리로 전락했고 설산을 누비던 화이트 드래곤은 냉기를 뿜지 못하게 됐다. 힘을 죄다 봉인당한 몇몇 드래곤들은 대륙을 떠나려다 가로막혀 사냥당했다.
군인과 용병들로부터 달아나는 뒤꽁무니에 더 이상 신성함이란 없었다. 드래곤이 신으로 추앙받던 시대의 역사를 알기보단, 드래곤의 고기 맛을 아는 인간들이 더 많은 시대였다.
그로 인해 수많은 동족들과 정착지를 잃은 드래곤들이 마지막 전투를 걸어왔다. 선두에는 마도구의 영향을 받지 않기로 유일하며 포악한 용, 레드 드래곤이 섰다.
베데르 아졸이 국가의 부름을 받은 것도 그때였다. 그는 때를 기다려 온 사람처럼 떠날 채비를 했다. 기꺼이 마물 전쟁의 지휘자가 된 것이었다.
갑주를 차려입고 떠나기 전에 그는 아사야를 있는 힘껏 안아 주었다.
“아빠.”
떠나지 말았으면 하고 아사야는 그를 한 차례 불렀다가,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착한 딸의 역할을 잊지 않았다.
저를 내려놓고 떠나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아사야는 불안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제 아버지의 뒷모습을 바라보기로는 가디엘도 매한가지였다. 입을 굳게 다문 채였다.
자식 교육에 있어 평생을, 집안을 책임져야 할 아들은 엄격하게 대하면서도 사랑스럽고 연약한 딸에겐 사랑을 아끼지 않던 베데르였다. 떠날 적에도 그는 아사야에겐 긴 포옹과 사랑한다는 속삭임을 남겼고, 가디엘에겐 이 성을 지키며 기다리고 있으라는 명령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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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아사야는 밝은 체를 하며 가브리엘의 동굴에 앉았다. 피크닉 바구니를 내려놓고 이런저런 수다를 떨기도 한참이었다. 아사야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높았고 또 컸다.
“너도 천공섬에 날아가 봤니? 아주 나이 많은 마법사 드래곤이, 아주아주 옛날에, 하늘로 섬을 띄워 놓았대. 그 드래곤이 죽고 나서도 그 마력은 남아서 아직도 섬이 구름 속에 숨어 있대.”
가브리엘에게 들려줄 것이라고 기억해 둔 이야기를 늘어놓다가,
“구름을 만지는 기분은 어떤 걸까…….”
아사야는 말을 흐렸다.
소녀가 입을 다물자 동굴 안에는 영원할 것처럼 깊은 침묵만이 남았다. 애써 밝은 이야기만을 늘어놓던 목소리가 사라지자, 억지로 짓던 미소도 한풀 꺾였다.
“가브리엘.”
두 무릎으로 기듯이 움직여 아사야는 드래곤의 날개 가까이 다가갔다. 바닥에 누운 채 가브리엘이 왼편 날개를 펼쳐 주었다. 그의 날갯죽지 밑으로 기어 들어가, 아사야는 담요가 깔린 바닥에 몸을 눕혔다.
“아빠는 영웅이니까…… 건강하게 돌아올 수 있겠지?”
담요에 수놓인 여우 세 마리가 아사야를 바라보고 있었다.
대답 없이 가브리엘은 날개를 내려 작은 인간을 덮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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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터에서 새로운 소식이 도착하기까지 2년 9개월이 흘렀다. 베데르 아졸을 대신하여 기사단을 이끌 직계 후계자, 가디엘 아졸을 부르는 소환서였다. 아버지의 사망 소식을 남매는 그렇게 받아들였다.
베데르 아졸의 사망 소식으로 인해 전 대륙이 비통함으로 젖은 듯했다. 평생을 부유하게 산 공작이 죽는다 해서 비통함에 눈물을 흘릴 서민은 없었다. 하지만 베데르 아졸은 여느 귀족과는 달랐다. 그는 국가적인 영웅이었으며 살아 숨 쉬는 전설이었다.
2차 마물전쟁에 베데르 공작이 기사 자격으로 출전한다는 소식이 알려지자마자 광장에는 벽보가 붙었었다. 아졸 공작의 기사단 앞으로는 그들을 따르기를 자처하는 용병들이 줄을 지었었다.
그러나 오늘, 사람들은 베데르 경을 그린 벽보 아래에 꽃을 꺾어 놓았다.
그의 죽음을 기리기 위하여 왕성에서는 성의 외벽에 자색 깃대를 내걸었다. 자색은 가장 귀한 염료로, 왕의 인척이 사망할 때에만 쓰이던 상징적인 색이었다.
그러나 귀족들 가운데 그 누구도 국왕, 사렙탄 세일산의 명령에 군소리를 달지 못했다. 베데르 아졸은 죽음으로써 마물 전쟁의 흐름을 승리로 이끌었기 때문이었다.
베데르의 죽음은 사고나 실수에 그 원인이 있진 않았다. 그의 말로를 목격한 기사들은 ‘죽음’ 대신 ‘희생’이란 표현을 썼다. 속된 말로 자결했단 의미였다. 더 큰 비극을 막아 내기 위하여, 그는 레드 드래곤과 그 죽음을 함께했다.
작살과 대포, 독화살과 창에 이르기까지 쓸 수 있는 무기란 무기는 모두 시도해 보았지만, 레드 드래곤의 등딱지를 뜯어 놓기엔 역부족이었다. 대다수 무기들은 드래곤의 피부에 닿기도 전에 열기를 못 이겨 녹아 버렸다. 마물의 심핵을 깨놓을 수 없게 되니 마도구도 무용지물이었다.
“가까이 다가가기만 해도 갑주가 녹고 피부 위가 펄펄 끓는데…… 심핵에 닿았다간 죽어 버릴 게 분명해.”
의기양양하던 기사들도 절망에 잠겼다.
레드 드래곤도 그 사실을 아는지 날이 갈수록 날뛰기 시작했다. 그는 잔인하기 이를 데 없는 방식으로 대륙 최상단의 성벽을 무너뜨렸고 수천 명에 달하는 기사들을 몰살시켰다.
뜨거운 불길이 산을 타고 민가를 덮치자 전쟁은 재앙으로 번져 나갔다.
“이대로 뒀다가는 수도까지 불길이 뻗칠 겁니다.”
드래곤의 심핵을 부수려는 시도가 세 번째 실패했을 때에, 마지막으로 전쟁터에 남은 마법사는 그 모습조차 온전하지 못했다. 짧던 머리칼은 군데군데 그을렸고, 마력을 쥐어짜 낸 탓에 온몸이 비쩍 마른 채였다.
“베데르 경. 이번이 마지막이에요, 지금 막지 못하면 이젠 성벽을 버리고 도망쳐야 할 겁니다. 왕성에서도 지금쯤 대피령을 두고 회의가 한창일 거예요.”
군사들의 피부 위로 부글거리며 끓어오르는 화상은 마법으로도 치료되질 않았다. 레드 드래곤이 상처 입힌 모든 인간들이 같은 고통을 앓고 있었다.
불길의 원흉인 드래곤을 막아 내지 못한다면, 끔찍한 화상이 아졸 성까지 번져 갈지도 몰랐다.
“그렇게 둘 순 없어…….”
신음하듯, 베데르가 속삭였다.
잠시간 그는 마법사와 단둘이 짧은 대화를 나눴다. 사담을 마치고 회의실로 돌아올 즈음 그의 얼굴은 결의에 차 있었고 마법사의 눈가는 붉은색이었다.
“마도구를 개방해.”
베데르 아졸이 명령했다.
“저놈은 이 성벽을 지나갈 수 없어. 오늘, 이곳에서 죽을 거다.”
베데르가 그의 말과 함께 성벽 위로 전진하기 이전에, 그 누구도 그의 계획을 알지 못했다. 마지막 마법사만이 마도구를 개방한 채 떨리는 눈으로 그를 지켜볼 뿐이었다.
베데르는 레드 드래곤의 등짝 위로 직접 뛰어올랐다. 그러고는 망설임 없이 붉은 등딱지 안에 검을 박아 넣었다. 드래곤이 붉은 날개를 비틀며 큰 괴성을 내질렀다. 치솟는 열기에 휩싸인 채 베데르는 검날을 뽑았다. 그의 팔과 검이 아지랑이로 인해 휘어진 듯 보였다.
다시 한 번, 녹아내리기 직전의 검날이 심핵 위로 내리찍혔다.
갈라진 심핵에서 솟구쳐 나온 열기가 드래곤과 베데르를 한꺼번에 감쌌다. 한참이고 비명을 지르며 드래곤은 이리저리 날뛰어 댔다. 부질없는 발악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마물은 시뻘겋게 달아오른 마도구와 함께 바닥으로 추락했다. 기사들이 그를 포획하기 위해 작살을 쏘아 댔다. 마력을 잃어버린 드래곤의 날개에 작살 서너 개가 되는대로 박혔다. 피를 흘리며 드래곤은 비틀거리며 날아오르더니, 피를 쏟으며 달아나 버렸다.
기사들은 눈물을 흘리며 베데르의 시신을 찾아 헤맸다. 녹아내린 검날을 손에 쥔 채, 새카맣게 타 버린 인영이 멀지 않은 곳에서 발견되었다. 그의 시신은 드래곤의 심핵 조각과 함께 잿가루가 되어 국왕이 하사한 관에 담겼다.
남은 것은 전쟁을 마무리하는 일뿐이었다. 그를 대신해 군대를 통제하기 위해 가디엘 아졸이 수도를 떠났다.
열여덟 소년이 최전방의 지휘관으로 임명된 것에 군소리하는 이들도 없진 않았으나, 불평도 찰나에 불과했다. 어릴 적부터 잔혹하리만치 고된 훈련을 받으며 자란 가디엘은 여느 귀족 소년과는 달랐다. 나이를 알려 주지 않는다면 누구도 그를 소년이라 생각하지 않을 것이었다.
짙은 색의 짧은 머리칼과 감정을 읽기 힘든 무뚝뚝한 눈동자, 그는 베데르 아졸의 젊을 적을 꼭 빼닮은 존재였다.
아버지의 피를 이어받은 구석은 비단 외모만은 아니었다. 가디엘은 기대 이상으로 좋은 지휘관이 되어 전쟁의 후반을 이끌었다. 그러나 마을의 불씨가 사그라들고 드래곤의 시신을 정리할 즈음에는, 그마저도 무사하지는 못했다.
가디엘 아졸은 집으로 돌아왔다. 왼팔 한 짝을 잃은 채였다. 고위 신관의 마법으로도, 이미 절단된 신체를 회복시킬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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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가디엘을 마중하기 위해 뛰어나온 아사야는 순간 제 오빠를 알아보지 못했다. 비단 그의 신체적 변화 때문만은 아니었다. 떠날 적과 같은 눈, 코, 입이라고는 믿을 수 없게 가디엘은 다른 사람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사야의 머리칼을 건드리며 장난을 걸어오던 짓궂은 소년은 이제 없었다. 왕성에서 지급한 자색 깃대를 휘장처럼 달고 돌아온 그는, 매우 예민하고 편협한 인간처럼 보였다.
낯선 기분에 아사야는 다가가던 발걸음을 멈췄다.
“가디…….”
그렇게 속삭여 보았지만 가디엘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본능적으로, 아사야는 그가 저를 한심하게 생각하며 내려다보고 있음을 알았다.
그는 영웅의 아들이었고, 아버지의 복수에 성공한 지휘관이었다. 잃어버린 팔 한 짝은 그 사실을 조금 더 강하게 증명하는 양 보였다. 그에 비해 아사야는 공작성의 귀한 꽃에 불과했다.
가디엘은 하나뿐인 제 혈육을 남 보듯 바라보다가 말 등에서 뛰어내렸다. 그러고는 천천히 한 팔을 옆으로 벌렸다.
“오빠에게 인사도 안 해 줄 거니.”
피로감이 묻은 얼굴로 가디엘이 말했다. 한층 굵고 거칠어진 목소리였다.
아사야는 천천히 그에게 다가가, 그의 허리에 두 팔을 둘렀다. 두려운 만큼 강한 포옹이었다. 그는 남아 있는 한 손으로 아사야의 등을 꽉 쥐었다.
“아버지께서 지금의 나를 보시면 자랑스러워하실까, 아사야?”
가디엘이 물었다. 아사야는 그가 듣길 원하는 답을 이미 알고 있었다.
“분명 자랑스러워하셨을 거야, 가디.”
아사야가 속삭였다. 그러자 가디엘은 고통스러운 듯 눈썹을 찡그렸다.
“그래. 내 팔 하나와 너의 안전을 맞바꿨으니 잘했다고 하셨겠지. 네가 있는 이 수도를 지켜 냈으니까.”
“가디?”
놀란 아사야는 그의 품에서 벗어났다. 고개를 들어 오빠의 얼굴을 올려다볼 적에 아사야의 두 눈동자에는 큰 걱정과 약간의 공포가 뒤섞여 있었다.
혼란스러운 양 저를 바라보는 아사야의 금색 눈을 가디엘은 미워했다. 그녀가 어머니를 닮은 탓에, 가디엘은 이제 아사야를 지워 놓고는 어머니의 모습을 온전하게 상상할 수 없었다. 눈을 감고 어머니를 떠올리려 할 때면 어딘지 아사야와 섞여 버린 얼굴만이 떠올랐다.
“그게 다 무슨 소용이지?”
자조하듯이, 가디엘이 읊조렸다.
“마침내 아버지의 칭찬을 받을 수 있게 됐지만, 이제 그는 없잖아.”
속삭임이 슬픈 한숨처럼 무겁게 내려앉았다.
이어 그는 제 갑주 속으로 팔을 넣었다. 오른편에 매달린 가죽 주머니를 꺼내기까지 그 자세가 묘하게 엉거주춤했다. 외팔 생활에 적응하기에는 터무니없이 먼 길이 남아 있었다.
힘겹게 꺼낸 가죽 주머니를, 가디엘은 아사야에게 건넸다. 그것은 전쟁터에 마지막으로 남았던 마법사가 가디엘에게 전해 준 것이었다. 아버지의 유품이라면서, 그가 죽으러 가기 이전에 남긴 것이라 했다.
그의 딸, 아사야 아졸에게 말이었다.
“네게 줄 선물이라고 전해 달라 하셨다더군. 내 딸과 손주에게까지 물려줄 것이라고 말이야, 레드 드래곤의 심장부로 기어 올라가시기 직전에…… 죽으러 가시기 전에.”
들은 바를 고스란히 전하는 가디엘의 목소리엔 높낮이가 없었다.
그가 무심한 눈으로 내려다보는 동안 아사야는 가죽 주머니의 끈을 풀었다. 하얗고 부드러운 손은 고작 가죽 주머니의 무게도 버티지 못하고 떨리고 있었다. 정확히는 그 속에 묻은 애정과 그리움 때문이었다.
‘아빠…….’
주머니 속에 든 것은 다름 아닌, 젬 드래곤의 비늘 조각이었다. 보석처럼 반짝이는 그것들을 베데르는 전장에서 하나둘씩 주워다가 모아 놓았다. 집으로 돌아가거든 아사야에게 전해 줄 마음이었다.
“따님께서 책을 좋아하는데, 대다수가 드래곤과 관련된 거더라고 그러셨어요. 베데르 경 본인을 닮았는지 그런 것에 관심이 많으니까…… 예쁜 비늘을 가져다주고 싶으셨다고……, 좋아할 것 같아서 모으셨다고.”
울먹거리며 말을 전해 주던 신관의 얼굴을 떠올리며 가디엘은 입을 다물었다. 어찌나 세게 이를 악물었는지 빠드득 소리가 날 지경이었다.
이제 그는 지겨웠다. 아사야만을 사랑하는 아버지도, 그 사랑을 받을 조건이 존재 자체로 충분해 보이는 아사야도, 그들 관계에 번외처럼 붙어 있는 제 존재도. 모든 것이 끔찍하게 생각됐다.
“끝까지 네 생각밖에 하지 않으셨어.”
아사야가 흘린 눈물이 빛나는 비늘들 위로 후두둑 떨어졌다. 슬픔과 충격에 잠겨 멍해진 채 아사야는 제자리에서 비틀거렸다. 가디엘은 그런 누이를 잡아 주지 않았다. 늘 그러듯 엠마오가 호들갑을 떨며 달려올 뿐이었다.
아주 잠시간, 가디엘은 아사야의 전신을 훑어보았다. 전장에 나갔다 돌아온 사이 아사야는 좀 더 성숙해져 있었다. 젖살이 빠진 얼굴은 더는 통통하지 않았고 팔도 다리도 길어져 있었다.
아름답게 성장한 아사야를 보았더라면 아버지께서 기뻐하셨으리라, 가디엘은 생각했다. 아들의 팔이 잘렸건 말건 신경도 쓰지 않고 아사야에게 달려갔을지도 몰랐다.
‘그 꼴 안 봐도 되니 잘됐어.’
가디엘은 자조했다. 제 진심과는 다른 생각임을 알면서도 부정적인 감정들을 멈출 수가 없었다.
누이로부터 등을 돌려 그는 아졸 성안으로, 오래도록 자리를 비웠던 제 방으로 향했다.
아사야는 아버지가 지켜 내신 화려한 성벽을 텅 빈 눈으로 돌아보았다. 이젠 모든 것이 춥고 쓸쓸하게만 느껴졌다.
그날 이후 아사야의 삶은 전과 같지 않았다. 모든 것이 전쟁 이전과 그 후로 갈린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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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에는 열네 번째 생일이 다가왔다. 연회 따위는 물론 없었다. 몇몇 귀족들이 지난해를 기억하며 편지를 보내오긴 했지만 가디엘의 선에서 정리되었다. 아사야에게 생일날 저녁이란 그저, 가디엘과 단둘이 조용한 식사를 나누는 것에 불과했다.
방으로 돌아온 뒤에야 아사야는 침대 위에 쓰러졌다. 아버지를 그리워하며 울음을 터뜨리는 아사야를, 엠마오가 달랬다.
“아가씨의 생일을 기억하시고 왕성에서 선물을 보내왔어요. 마차 가득 싣고 오늘 새벽에 도착한 걸 제가 봤어요. 가디엘…… 공작님께 한번 여쭈어 보세요.”
‘공작님’, 이전에는 아버지를 부르던 호칭이 이제는 가디엘의 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베갯잇에 이마를 기대며 아사야는 좀 더 몸을 웅크렸다. 울컥 치밀었던 눈물은 금세 가라앉았다. 어떻게든, 아사야는 작금의 상황에 익숙해져야만 했다.
“가디가 내게 주지 않았다면 다 이유가 있겠지.”
어리고 나약할 뿐, 아사야는 바보가 아니었다.
“가디는 내가 즐거워하는 걸 보고 싶지 않은 거야…….”
유모는 그럴 리가 없다며 아사야를 달랬지만, 그녀 말은 틀린 것이었다. 가디엘은 아버지와 다른 가장이었다.
그는 제 누이에겐 조금도 관심이 없었다. 아사야가 무얼 하는지, 무얼 먹고 누구를 만나는지, 제가 없는 시간 동안 누구에게 위로를 받으며 견뎠는지…… 밤마다 성 밖으로 나가 블랙 드래곤을 만나는지 어떤지.
눈물을 훔치고서 아사야는 자신만의 비밀 기지에 대해 생각했다. 우울하고 슬픈 감정도 가브리엘의 보라색 눈을 생각하면 금세 가라앉았다. 이제는 한껏 부드러워진 그 눈꺼풀 위에 입을 맞추고, 커다랗고 따듯한 날개를 덮고 잠시간 눈을 감고 있으면, 그럼 모든 것이 괜찮게 느껴졌다.
가브리엘이 곁에 있으니까. 그러니 괜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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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의 초입을 알리는 쌀쌀한 아침, 아사야는 소란스러운 기척에 잠에서 깼다. 벽난로에 장작을 집어넣던 하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왔다.
“좀 더 주무세요, 아가씨. 아직 이른 시간이에요.”
아사야는 커튼 걷힌 창문을 바라보았다. 하늘은 어슴푸레한 파란빛이었다. 게으른 아침 해가 느릿느릿 높은 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잠에서 깨기에는, 하녀의 말처럼 이른 시간이었다.
그러나 근방의 소란스러운 발소리는 오후 연마장을 연상케 했다.
“무슨 일이야?”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서 아사야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하녀가 급히 슬리퍼를 가져왔지만 신지 않았다. 맨발로 창가로 다가가 밖을 내려다보자 횃대를 들고 말을 탄 기사들의 실루엣이 자그맣게 보였다.
“무슨 일이냐니까.”
아사야가 다시 한 번 물었다.
“공작님께서 기사단원들과 급하게 토벌에 나가신다네요. 멀리 가시는 건 아니고, 뒤뜰 너머의 산을 조사하신다 하셨어요.”
아가씨께서 잠에서 깨 예민하시다고만 생각하며, 고개를 조아린 채 하녀가 말했다.
“산을?”
그러나 잠결에 부리는 짜증이라기엔 아사야의 반응은 충격에 가까웠다. 발그레하던 뺨이 순식간에 창백해졌고 졸음 묻은 눈동자는 겁에 질린 듯 또렷해졌다.
“산을…… 왜? 뭔갈 발견했대? 누굴 죽이러 가는 거야?”
“죽이다니요, 아가씨, 그런 표현은…….”
“무슨 일이냐고 묻잖아!”
어린 아가씨의 외침 소리에 그녀의 유모가 뛰어 들어왔다. 엠마오는 당황한 하녀를 향해 나가 보라는 수신호를 보내고, 따듯한 담요를 펼쳐 아사야의 어깨를 덮어 감쌌다.
“아가씨, 아침부터 왜 그러세요?”
“오빠가 토벌에 나간대잖아. 무슨……, 무슨 일이냐니까?”
그러자 엠마오는 ‘놀라지 말고 들으시라’더니, 설마 공작가 성 근방에 숨어들었으리라곤 예상치 못한 마물을 발견했다며 상황을 일러 주었다. 그러니 그 마물을 포획을 하겠단 말이었다.
“전쟁이 아니라 사냥이니 염려 마세요.”
그 말에 아사야는 쓰러질 것처럼 비틀거렸다. 성 근방의 숲속에 숨어든 마물이라니…… 아사야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존재는 단 하나였다.
선 채로, 그녀는 숨을 헐떡거렸다.
“그 마물이라는 게…… 드래곤이야?”
그러자 엠마오의 표정이 단단히 굳었다.
“저 하녀가 그러던가요? 드래곤이라고? 아가씨에게 그런 겁나는 소식을 알려주다니 혼쭐을 내야 되겠네요.”
강한 충격이 아사야의 머리를 내리치는 듯했다. 놀란 심장이 쿵쾅거리며 뛰기 시작했고 손발이 저리기 시작했다. 허둥지둥하며 아사야는 침대로 달려갔다. 그러고는 침대 밑에 숨겨 두었던 가죽 장화를 꺼내 신었다.
그대로 방 밖으로 뛰쳐나가려는 아가씨를, 엠마오가 붙들었다.
“아가씨!”
“이거 놔, 엠마오. 나……, 나 지금 가야 해.”
가브리엘에게 달려갈 생각이었다. 누가 가로막건 떨쳐 버리고 뛰어가고팠다. 가디엘과 기사들이 알아 버렸다고, 너를 잡으러 가고 있다고, 그러니 지금 당장 도망치라고 외치고만 싶었다.
그러나 아졸가 아가씨는 오십 대의 유모마저 뿌리칠 수 없게 약하고 어렸다.
“어딜 간단 말씀이세요? 사냥은 피크닉이나 장난이 아니에요. 아무리 약해진 드래곤이래도 아가씨를 해칠 수가 있다고요. 그러다 다치기라도 하시면 어쩌시려 그러세요!”
외치며, 엠마오는 아사야의 두 팔뚝을 단단히 잡았다. 유모의 손에서 벗어나기 위해 아사야는 발버둥을 쳤다. 걱정 어린 눈으로 엠마오가 전해 오는 이야기들은 모두 틀린 것이었다. 가브리엘을 모르고서 하는 소리였다.
“아무 해도 안 끼쳤잖아!”
아사야가 소리쳤다.
“착한 드래곤일 수도 있잖아. 전쟁 중인 상황도 아니잖아, 잡지 말라고 해……, 응? 사냥하지 말라고 해!”
아가씨가 울먹이기 시작하자 엠마오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유모는 그저 가여운 아가씨께서, 아버지를 잃은 것처럼 오빠를 잃을까 그 점을 걱정하는 줄로 알았다.
“가여운 우리 아가씨…….”
엠마오의 품에 안겨 아사야는 울음을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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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도구에 제 능력을 봉인당한 블랙 드래곤을 포획하기란, 울타리 밖으로 도망친 양을 잡는 것처럼 쉬웠다.
컴컴한 동굴 밖으로 울부짖는 드래곤을 끌어내면서 기사단은 쇠사슬과 날의 길이가 짧고 무딘 작살을 사용했다. 드래곤을 성한 상태로 포획하기 위한 가디엘의 선택이었다.
태양 아래 모습을 드러낸 블랙 드래곤은 장정인 기사 열 명이 쇠사슬을 쥐고 달려들어 겨우 끌어낼 크기였다. 거대한 머리통부터 날카롭고 기다란 꼬리에 이르기까지 전신이 완벽하게 시커먼 색이었다. 가까이서 바라보기 두려울 정도의 암흑이었다. 성난 눈동자만이 보랏빛이었다.
“그냥 죽여 버리기엔 아까워. 아주 상징적인 녀석이니까.”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해 사슬의 무게에도 비틀거리는 드래곤을 바라보며, 가디엘이 말했다. 이미 4년 전에 죽은 줄로 알았던 놈은, 마도구에 당하고도 살아남은 유일한 드래곤이자 이 대륙에 남은 마지막 드래곤이었다.
블랙 드래곤은 영악하기 짝이 없다더니 그 말이 맞았다. 등딱지를 뜯기고 심핵을 다치자마자 놈은 도마뱀이 꼬리를 끊듯이 제 그림자를 끊어 버리고 육체를 축소시켰다. 민간의 집채처럼 거대한 현재의 몸뚱이의 딱 스무 배. 본래는 그만큼이나 거대하고 끔찍하던 녀석이었다.
“이런 곳에 숨어들어 있었다니……. 등잔 밑이 어둡다고 딱 그 짝이야.”
가디엘은 동굴 내부를 서늘한 눈동자로 훑어보았다. 그러고는 두 눈을 크게 떴다. 깊숙한 동굴 내부에서 그는 누덕누덕해진 천 조각을 발견했다. 자세히 보니 사각형의 손수건이었다.
천천히 손을 뻗어 그것을 주워 들고, 가디엘은 부드러운 손수건의 겉면을 만졌다. 구석에 작은 꽃과 여우가 수놓아져 있었다. 같은 무늬의 여우 수를 놓을 줄 아는 유모를, 가디엘은 알았다. 그 유모를 꼬리처럼 달고 다니던 누이 역시 알았다.
“가디엘 경.”
램프를 쥔 기사들이 그의 뒤로 다가왔다. 가디엘은 화들짝 놀라, 손수건을 제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돌바닥에 하얗게 남은 작은 낙서의 흔적들도 짓밟아 뭉개 버렸다.
“누군가 저 드래곤을 치료하고 음식도 챙겨 준 것 같습니다.”
기사가 말했다.
“신관을 불러 살펴야 알겠지만, 흉터 너비며 깊이를 보면…… 놈은 자생할 수 없는 상태였을 겁니다. 상처가 아무는 데만 해도 꽤 긴 시간이 걸렸을 거고요.”
기사가 동굴 내부에 관심을 갖기 전에, 가디엘은 굴 밖으로 걸어 나갔다. 그의 뒤를 쫓으며 기사는 몇 마디의 보고를 더 이어 나갔으나, 젊은 영주의 귀에 들어가진 않았다.
마도구가 없었더라면 이 정도 거리에서 산 채로 올려다볼 수도 없을 존재, 고대에는 신이라 불렸던 이, 오늘날엔 그의 아버지를 죽이고 이 땅에서 씨를 잃은 일족, 대륙의 마지막 드래곤을 가디엘은 물끄러미 노려보았다.
‘내 누이가 널 살렸나?’
가디엘의 속 안에서 불길이 튀었다.
‘내 아버지와 내가 목숨을 걸고 싸울 적에. 내 누이가 너를 치료하고 살려 주었어?’
그리 묻고픈 것을 가디엘은 꾹 눌러 참았다. 대신에 그는 거대한 마물의 보라색 눈동자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읊조렸다.
“누구도 이 놈을 도와주지 않았어.”
단호한 목소리였다. 가디엘의 말에 공작가 기사들은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이 일은 누구에게도 누설해선 안 돼. 우리 영지와 성의 안팎에, 저 따위 마물을 도와줄 인간이 어떻게 있을 수 있겠나.”
이내 기사들은 젊은 성주가 사실을 말하는 게 아닌, ‘사실이 되어야 할 일’을 일러 주고 있음을 알았다. 아졸 공작의 영지 근방에 드래곤이 숨어 있었고 누군가 그를 치료해 주었다는 사실은, 영웅 베드로의 명예를 실추시킬 가능성이 다분했다.
“……알겠습니다. 염려 마십시오.”
허리를 곧게 편 채 기사단장이 말했다. 가디엘은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고는, 한 팔만을 이용해 제 말의 등에 올라탔다.
“놈은 공작성의 지하 감옥으로 끌고 간다.”
가디엘이 명령했다. 말을 타고 숲길을 나서는 젊은 영주의 뒤로, 기사단장이 제 말을 가까이 했다. 그러고는 물었다.
“앞으로 저 드래곤을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그러자 젊은 가주는 입을 다물었다. 멀찍이 보이는 아졸 성을 바라보며 그는 입술을 비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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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무니없이 좁은 지하 감옥에, 블랙 드래곤이 갇혔다.
전신에 묵직한 쇠사슬을 감아 놓고도 만족하지 못해, 기사단장은 신관들을 불러 포박 마법까지 겹겹이 걸어 그를 묶어 놓았다. 드래곤은 숨조차 깊이 쉴 수 없었고 한 걸음 발을 딛을 수도 없었다. 그가 벗어나려 버둥거릴 때마다 사슬 끝의 작살이 목덜미를 죄어 왔다.
작살의 무딘 날에 비늘이 벗겨지고 핏방울이 흐를 때에서야 드래곤은 몸부림을 멈췄다. 숨을 씩씩거리며 드래곤은 두 눈을 치켜떴다.
컴컴한 어둠이라면 이미 눈에 익숙했다. 그는 어둠에서 난 존재였고 어둠 그 자체였으므로. 그를 낯선 불안에 버둥거리게 만드는 것은 어둠 따위가 아니었다. 멀찍이, 그를 찾아 다가오는 발소리였다.
살폿살폿 작은 소리를 마물은 기억하고 있었다. 조그만 발소리가 나뭇잎을 헤치며 온 기척을 뿜어 가며 다가오는 매일 밤마다, 드래곤은 의심스러워했다. 어째서 큰 인간들이 그녀의 외출을 눈치채지 못하는지 생각할수록 미궁이었다.
그렇게나 짙은 살 냄새와 귀에 쏙쏙 박히는 발소리, 흥얼거리는 콧소리를 내는데 말이었다.
그러나 오늘, 그를 친구라 부르던 작은 인간은 콧소리를 내지 않았다. 그의 상태도 평소와는 달랐고, 열네 살 소녀의 상태 역시 평소와는 무척 달랐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비틀거리며 아사야는 감옥의 창살 가까이 다가왔다. 내내 근방을 서성거리며 기회를 노리다가, 경비대가 잠시 자리를 비운 새 숨어든 것이었다. 그럴 적에 소녀의 손에는 거친 벽돌이 들려 있었다.
“조금만…… 조금만 기다려, 내가 열어 줄게…….”
단단히 잠긴 감옥 문 앞에 쪼그려 앉는 어린 인간이 가브리엘의 눈동자에 담겼다. 차가운 자물쇠 위에 벽돌을 찧어 대며, 아사야는 애를 쓰기 시작했다. 벽돌을 쥔 손이 벌겋게 까질 정도로 노력했으나 허탈할 따름이었다. 지닌 힘이 약한 탓에 그녀의 동작은 벽돌을 ‘휘두른다’기보다 ‘떨어뜨린다’에 가까웠다.
제 힘으로는 자물쇠를 부술 수 없음을 알기까지 몇 분의 시간이 허비됐다. 울음을 참으려는 듯 끅끅거리는 소리를 내며 아사야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포기하고 돌아서는 줄로 알고 가브리엘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녀는 열쇠를 찾아 헤매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사야는 감옥의 횃대 옆 걸음쇠에 걸려 있던 열쇠꾸러미를 들고 달려왔다. 울상이던 얼굴에 떨리는 미소를 띤 채 그녀는 또 한 번 자물쇠 앞에 무릎을 꿇었다.
드래곤은 그녀의 이야기에 자주 등장하던 ‘바보 같은 오빠’, ‘가디’라는 남자가 열쇠를 챙겨 간 것을 알았다. 잘못된 열쇠를 끌어안고 희망에 찬 아사야를 바라보기란 가브리엘에게 힘든 일이었다. 기대하지 마, 포기해…… 그런 의미를 담아 한숨도 쉬어 보고 눈짓도 보냈으나 작은 인간은 드래곤의 신호를 보지 못했다. 떨리는 손으로 그녀는 끈질기게 자물쇠에 매달렸다.
개수로 열이 넘는 열쇠를 되는대로 집어넣고 돌려 보았지만 단단한 자물쇠는 열리지 않았다. 소녀의 곱상하고 보드랍던 손가락이 새빨갛게 달아오르고 군데군데 긁혔다.
모든 열쇠가 자물쇠와는 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아사야는 제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그러고는 감옥 가까이 엉금엉금 기듯이 다가와 창살을 쥐고 가까이 머리를 기댔다. 새카만 머리칼이 어깨 위로 흩어지고 희고 둥근 이마가 창살 사이에 자리했다.
발갛고 보송보송하던 뺨이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노란 눈동자에서 끝도 없이 눈물이 흘렀다.
“미안해…….”
아사야가 속삭였다. 일순 드래곤은 작은 인간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가 머리를 굴려 생각할 적에는, 작은 인간이 저에게 사과할 이유가 없었다.
“내 곁에 있어 달라고 해서 미안해.”
그러나 아사야는 사과했고,
“떠나지 말라고 부탁해서 미안해…….”
눈물 흘리며 용서를 빌었다.
“지키지도 못할 거면서…… 친구라고 불러서 미안해.”
이내 이사야의 몸은 슬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는 꽃처럼 무너졌다. 눈물 젖은 얼굴은 바닥을 향했고 창살을 쥐던 손은 서서히 아래로 미끄러졌다. 두 무릎처럼 전신을 무너뜨린 채 아사야는 같은 말만 반복했다.
“가브리엘, 미안해……. 미안해.”
어리고 서러운 흐느낌이 지하 감옥을 울렸다. 묵직하게 조이는 쇠사슬을 매달고서 가브리엘은 기듯이 몸을 움직였다. 결박당한 두 날개를 짐짝처럼 늘어뜨린 채, 드래곤은 창살 가까이 목을 뻗었다. 피부를 파고 들어오는 작살 탓에 움직임이 자유롭지 못했다.
어린 인간이 이상한 소리를 하거나 자책하며 우울해할 때마다 가브리엘은 그녀의 이마에 제 이마를 맞대고는 했었다. 이번에도 그렇게 하고 싶었다. 그에겐 별것 아닌 행동이 아사야에겐 의미 있는 일이 되었고, 우울감도 그렇게 쉽게 날려 보낼 수 있었다.
그러나 몸을 죈 사슬과 묵직한 결박 마법으로 인해 드래곤은 그녀에게 닿을 수 없었다.
흐느끼는 아사야의 실루엣은 금방이라도 파스스 부서질 듯 불안했다.
피크닉 바구니를 들고 찾아오던, 용감하고 해맑던 소녀는 이제 없었다. 그의 눈에 인간은 여전히 작고 연약했지만 전과는 달랐다. 아버지의 관과 함께 오빠가 돌아온 뒤부터 아사야는 눈에 띄게 우울해졌다.
천공섬을 꿈꾸며 동화를 좋아하던 어린아이는 오늘, 제 잘못을 사죄하며 무릎 꿇고 있었다.
“아사…….”
끓는 듯 낮은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울려 나왔다.
놀란 아사야는 두 눈을 크게 떴다. 그제야 제 잠옷 치마 위로 액체처럼 쏟아진 거대한 그림자가 보였다.
고개를 반짝 들자 그녀에게로 가까이 다가온 드래곤이 보였다. 사슬에 옥죄인 채 가브리엘은 아사야를 향해 최대한 목을 뻗고 있었다.
팽팽하게 당겨진 쇠사슬이 가느다란 비명 같은 소음을 냈다. 굵은 소음은 비단 쇠사슬에서만 나오는 건 아니었다. 입을 벌린 채 가브리엘이 힘겨운 숨소리를 냈다.
“가브리엘……?”
그가 어찌나 목울대에 힘을 주는지, 불쑥 솟은 근육의 윤곽이 비늘 위로 보일 지경이었다. 괴로운 듯 신음하며 드래곤은 남은 힘을 쥐어 짜냈다.
“아사야.”
그러고는 무어라 입을 벙긋거렸으나 그르렁거리는 소리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창살 사이로 두 팔을 힘껏 뻗어 아사야는 가브리엘의 콧잔등을 만지려 했다. 팔의 길이가 모자라자 아예 어깨를 감옥 안으로 집어넣었다. 힘겨운 소리를 내며 애쓴 끝에 아사야의 손바닥이 가브리엘의 콧잔등에 닿았다. 마침내 소녀의 여린 손이 용의 콧등을 쓰다듬었다.
“가브리엘.”
심장이 떨리고 전신이 쓰라리기 시작했다. 몸을 아리게 만들 정도로 큰 감정이 아사야를 휘감았다. 열네 살 소녀는 그 전율을 어떤 단어로 설명해야 좋을지 알지 못했다. 그저 가브리엘이 저에게 그런 존재임을 알았다. 설명할 수 없는 관계,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을 주는 존재.
“괜찮아……. 이해했어, 네 말……. 다 괜찮아…….”
아사야가 속삭였다. 가브리엘이 저를 미워하지 않는다는 것, 여태껏 제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있었다는 것, 제 이름을 알고 불러 주고 싶어 한단 것, 그 모든 게 위안이 됐다.
눈썹을 찡그리며 아사야는 입꼬리를 올렸다. 하얀 아랫니를 드러내며 웃는 순간 소녀는 태양처럼 환했다.
가브리엘이 또 한 번, 무어라 말하고자 입을 여는 순간,
“아가씨!”
놀란 경비대의 외침이 그들을 갈라놓았다.
창살에서 떨어지지 않으려 아사야는 두 다리를 버둥거리며 버텼으나 역부족이었다. 가디엘의 명령을 듣고 그에게 복종하는 이들은 더는 아사야에게 다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포악하기로 소문난 블랙 드래곤으로부터 공작의 누이를 억지로 떼어 놓았다.
“이거 놔!”
제 허리를 쥐고 뜯어내듯 당기는 손길에 아사야는 맥없이 질질 끌려갔다. 놀란 드래곤이 그녀를 따라 몸을 꿈틀거리며 거친 숨소리를 냈다.
“놔줘, 놔 달란 말이야!”
아사야가 소리쳤다. 그러나 경비대는 그녀의 외침을 무시한 채 여린 팔뚝을 쥐고 당기기 바빴다. 공작님께 보고드려야 한다, 위험한 곳이니 계셔서는 안 된다, 당장 나가셔야 한다…… 그들이 말했으나 아사야의 귀에는 들리질 않았다.
감옥 안에서 울부짖는 드래곤을 향해 아사야가 소리쳤다.
“가브리엘!”
경비대는 아가씨께서 이제 미쳐 버렸나 보다 생각했다.
“약속할게, 널 죽게 하지 않을 거야!”
그녀는 시커먼 마물 덩어리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반드시 널 되찾을 거야, 나를 믿어……. 날 기다려 줘.”
천사처럼 희고 깨끗하던 두 손과 치맛자락이 흙 범벅이 된 채, 아사야 아졸은 가브리엘과 이별했다.
그로부터 6년이 지난 뒤에야 재회할 수 있을 것이라고는 둘 중 누구도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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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이 나간 게 아닐까 의심되는 공작 아가씨를, 경비대원은 젊은 가주의 서재로 데려갔다. 몇 발짝 지날 때마다 아사야가 발버둥을 치긴 했지만, 경비대원이 힘을 쓸 이유는 없었다. 오히려 그들은 실수로 공작 아가씨를 다치게 하진 않을까 염려해야 했다.
놀랍도록 가느다랗고 보드라운 팔을 쥐고 억지로 성안에 도착하자, 그제야 아사야는 버둥거림을 멈췄다. 그러고는 원망 가득한 눈동자로 경비대원 두 사람을 노려보았다.
“어디로 가는 거죠?”
두 남자 사이에서 인질처럼 걸으며 아사야가 물었다. 경비대원 중 얼굴이 상기된 한 남자가 헛기침을 한차례 했다. 그리고 말했다.
“공작님의 서재로 갈 겁니다.”
“아버지의 서재 말이에요?”
아사야가 되물었고,
“가디엘 경의 서재 말입니다.”
그가 말을 고쳐 놓았다.
그렇게, 아사야는 아버지의 서재였던 오빠의 공간에 도착했다. 베데르가 아끼며 모아 둔 책들과 문서들, 단단한 금고와 시험 단계의 마도구들이 정리된 공간이었다. 아버지의 모든 흔적들은 그대로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달라진 점이라고는 유년기 아사야가 그렸던 그림 액자가 사라졌단 것뿐이었다.
“들어와.”
가디엘이 말했다. 액자가 사라지고 텅 빈 벽을 바라보며 아사야는 천천히 서재 카펫을 밟았다.
복도로 물러서 서재 문을 닫으면서 두 경비대원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공유했다.
“정말 예쁘기는 해. 그렇지?”
상기된 표정을 감출 줄 모르던 남자가 말했고,
“그럼 뭘 해.”
다른 한 명은 고개를 내저었다.
“완전히 미치셨나 봐. 그 마물 덩어리랑 대화를 하시질 않나……, 가디엘 경의 말씀대로야.”
“하나뿐인 누이가 저렇게 연약하니 경께서도 힘드시겠지.”
복도를 가로질러 걸으며 두 남자는 혀를 쯧쯧 찼다. 아름다운 공작 아가씨께서 아버지를 잃은 슬픔에 마음을 다쳤다더니 그 말이 옳았다. 가디엘이 경고한 것처럼 두 남자는 오늘 일을 함구하기로 맹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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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디엘 아졸에게, 그의 누이는 기대했던 반응 이상의 것을 보여 주었다. 아졸가의 가주, 아버지의 자리에 앉은 가디엘에게로 아사야는 망설임 없이 달려갔다. 그러고는 가디엘의 다리 앞에 무릎을 꿇었다. 오빠의 허리를 껴안으며 매달리기 위해서였다.
“제발, 가디. 부탁이야.”
애처로운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어린 티를 벗지 못한 아사야의 음성은 슬픈 새처럼 듣기 좋았다.
오른손을 움직여 가디엘은 제 허리에 감긴 아사야의 손을 떼어 냈다. 내심으로는, 아사야의 순진함이 놀랍기까지 했다. 싫어하는 기색을 감추지도 않고 밀어내는데, 그런 가디엘을 아직도 친근한 오빠처럼 대하는 아사야였다.
열네 살 귀족 아가씨께서 가주에게 무릎을 꿇고 매달릴 적에는, 철없는 사랑이나 터무니없이 비싼 보석이나 바라야 했다.
그러나 아사야의 부탁은 달랐다.
“그 드래곤을 죽이지 말아 줘.”
그녀의 부탁에 가디엘은 놀라지 않았다. 짐작했던 내용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이름은 가브리엘이야. 가브리엘은 다른 드래곤들과 달라, 가디. 가브리엘은 내 친구란 말이야.”
‘아니’, 그렇게 쏘아붙이고픈 마음에 가디엘은 목울대를 꿈틀거렸다. 아니, 아사야. 그 드래곤은 네 친구도 아니며 가브리엘 따위의 고급진 이름을 달 수 없는 존재야. 도대체 얼마나 천진난만하고 멍청하면, 아버지를 죽인 종족을 친구 삼아 소꿉놀이나 할 수가 있는 거냐……. 한껏 소리치고 화내고픈 마음을 억누르는 데엔 많은 시간이 걸렸다.
미래. 가디엘은 그것을 보기로 했다.
더 나중의 일, 더 큰 일. 아사야가 볼 수 없는 것들을.
“그래.”
불쑥, 가디엘이 답했다.
“그게 네 소원이라면 오빠가 들어줘야지. 너는 내 하나뿐인 혈육이며 누이야……. 내가 어떻게 네 친구를 죽이겠니.”
무뚝뚝한 얼굴로 가디엘은 다정한 목소리를 냈다. 그의 말에 아사야는 작은 미소를 지었다. 꾸중을 모면한 강아지처럼 귀여운 얼굴이었다.
“그 드래곤은 둘째 왕자님께 선물로 보내 드릴 거다.”
가디엘이 덧붙여 말했다.
“왕자님께선 마물이며 마석에 관심이 많으시니, 마지막 드래곤을 해치지 않을 거다. 그게 그놈을 살릴 유일한 길이야.”
놀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아사야는 입을 벌렸다. 그러나 무어라 말을 해야 좋을지 알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아사야의 흐트러진 앞머리를, 가디엘은 손을 뻗어 정리해 주었다. 그녀의 이마 왼편에는 아기 때에 생긴 일자형의 흉터가 있었다. 옆머리를 부드럽게 내려, 아주 어릴 적부터 가리고 다녀온 작은 흉터.
그것만이 아사야에게 존재하는 유일한 결함이었다. 팔 하나가 없는 기사인 가디엘과는 달랐다.
당황한 아사야가 뒤늦게 던져 오는 질문들에 대꾸하지 않고서, 가디엘은 엠마오를 불렀다. 복도에서 안절부절못하며 아가씨를 기다리던 엠마오가 한달음에 달려 들어왔다.
“데려가, 푹 쉬게 해. 오늘 종일 정신이 없을 테니.”
진이 빠진 아사야는 엠마오의 품에 안겨 서재 밖으로 사라졌다.
누이가 얼마간은 소란을 피울 수도 있겠다고 가디엘은 생각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당장의 며칠 동안 아사야가 보일 반응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먼 내일이 중요했다.
가디엘은 사렙탄 세일산의 표정을 기억했다. 그가 자색 깃대를 달고 아버지의 관을 지고 귀환했을 적에, 승전의 소식을 알리고자 왕성으로 향했을 적에.
“베데르, 내 자네에게 줄 수 있는 모든 걸 이미 주어 버렸어…….”
사렙탄은 슬픔에 젖어 있었다.
평생의 충신인 베데르 아졸을 죽음으로 내몰았단 사실에 사렙탄은, 귀환한 가디엘 아졸의 성치 못한 팔을 똑바로 바라보지도 못했었다.
“자네 자식들에게 더 높은 작위라도 내리고 싶건만…….”
신음하듯 중얼거리던 말을 가디엘은 기억했다. 사렙탄은 결국 원하는 보상을 아졸 남매에게 내릴 것이었다, 그들을 왕가의 친인척으로 만듦으로써.
사렙탄이 내릴 보상 자체는, 가디엘은 싫지 않았다. 왕의 자손과 혼인하는 것은 기사에게 있어 가장 큰 포상이었다. 가디엘의 입장에선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아버지 역시 그들 남매가 충성의 역사를 이어 가길 원하실 터였다.
문제가 있다면, 사렙탄에겐 딸이 없단 것이었다.
왕비가 공주를 낳았더라면 왕가와 혼인하는 영광은 필히 가디엘의 몫이었으리라. 그러나 세일산의 성을 가진 왕의 자손은 본도 세일산과 야베스 세일산, 두 왕자들뿐이었다. 사렙탄 세일산이 원하는 건 아사야 아졸이라는 며느리였다.
그의 친우 베데르 아졸이 사랑해 마지않던 꽃. 아졸 성의 보물…… 그 보물을 지켜 주는 것만이 사렙탄 말년의 목표이리라.
대륙을 평정한 왕, 사렙탄 세일산은 첫째 왕자 본도 세일산과 아사야 아졸을 혼인시킬 것이었다. 본도 세일산은 합당한 왕위계승자였다. 그러니 의심의 여지없이, 아사야는 이 나라의 왕비가 될 것이었다.
가디엘은 그 미래를 먼눈으로 바라보았다. 아버지의 영광을 좇겠노라고, 그에게 인정받는 아들이 되겠노라고 목숨을 바친 끝에 평생의 장애를 얻은 그였다.
‘아니……, 그렇게 둘 순 없지.’
남은 일생마저 제 여동생의 발치에 고개 숙인 채 살고 싶지 않았다. 아버지께서 매정히 떠나 버린 내일마저 아사야가 제 머리 꼭대기 위에 서는 것은 두고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가디엘은 야베스 세일산을 선택했다. 그에게선 벌써 몇 번이고, 누이와 단둘이 만나게 해 달라는 청을 받았었다. 아사야의 첫 생일 연회, 그녀가 열 살 꼬맹이인 시절부터 말이었다.
‘도대체 아사야를 사랑하지 않는 남자가 없군.’
주먹을 움켜쥔 채 가디엘은 서재 탁상을 노려보았다.
공작가의 왕자비. ‘둘째 왕자비’.
공작가의 명예를 지키고 위엄을 유지시키기로는 그 정도로도 충분했다. 어느 쪽이건 국왕은 성대한 지참금을 지불할 것이며 아사야 아졸은 행복한 일생을 살 것이었다. 4년 내내 그녀를 짝사랑한 야베스 세일산이니 필히 좋은 남편이 될 터였다.
남은 의문은 하나뿐이었다.
‘아무리 순진하대도, 아사야가 고작 마물 때문에 둘째 왕자를 선택할까…….’
그 의문을, 아사야는 금세 풀어 주었다.
.*. *. *. *. *. *.
드래곤을 쇠사슬로 묶고 케이지에 넣어 왕성에 보내 버렸단 소식을 듣고 아사야는 기침하기 시작했다. 다 나은 줄 알았던 천식이 재발한 것이었다.
“아가씨께 무슨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신관들이 탄식했다. 가디엘은 열 오른 아사야의 붉은 얼굴을 내려다봤다.
누이가 매일 밤마다 베개에 고개를 묻고 울다 지쳐 잠드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엠마오는 하루가 멀다 하고 가디엘에게 ‘가여운 아가씨’ 이야기를 보고했으므로.
“꼭 다섯 살 시절로 돌아가 버린 것 같아요. 이젠 베데르 경께서도 안 계시는데, 어쩜 좋아요.”
아사야에 대해서라면 언제든 과장을 즐겨 하던 엠마오였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엠마오의 말이 옳았다. 아사야는 다섯 살 시절로 돌아가 버렸다. 정원에서 잠깐 놀이를 했다고 숨을 못 쉬던 연약한 어린아이로.
“가디엘 경?”
신관들의 부름에 가디엘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대꾸했다.
“아버지가 죽고 이제는, 기르던 강아지도 잃어버렸으니 상심이 클 테지.”
“강아지라고요?”
“그래.”
제가 그렇게 말해 놓고 가디엘은 코웃음을 쳤다. 꽤나 그럴싸한 비유가 아닌가. 사람을 집어삼키고 어둠을 부리는 끔찍한 드래곤마저, 아사야에게는 키우던 강아지와 같다는 게 기가 막혔다.
‘넌 절대로 변하지 않는군.’
잠든 아사야를 침실에 둔 채 가디엘은 조용히 등을 돌렸다. 불안한 얼굴의 신관들이 어물쩍거리며 젊은 가주의 눈치를 살폈다. 아사야가 아플 때마다 아버지께서 지겨울 정도로 마주했을 얼굴들이었다.
그러나 엠마오의 말처럼, 이제 아버지는 없었다.
차가우리만치 서늘한 얼굴로 가디엘이 입을 열었다.
“아버지께서 마법사 협회에 그 많은 투자를 퍼부은 것은, 당신들이 내 누이의 병을 말끔히 고친 줄로 믿으셨기 때문이야.”
세간은 가디엘 아졸이 그의 아버지, 베데르 아졸을 빼닮았다 말했다. 그러나 그들의 직접적인 하수인들은 다른 생각을 했다. 베데르 아졸을 닮긴 했되 가디엘은 결코 그와 같지 않았다.
“어떤 제휴이건 신뢰를 기반으로 해야지. 안 그런가?”
신관들은 젊은 가주의 고압적인 태도에서 약간의 위협마저 느꼈다. 한 올의 신뢰감조차 없는 눈빛으로, 그는 고위 신관의 얼굴을 돈벌레를 보는 양 노려보았다.
모멸감에 고위 신관은 헛기침을 했고, 젊은 치료사는 붉어진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그런들 가디엘 아졸 앞에 무어라 대거리할 말은 마땅히 없었다. 마법사 협회의 주된 존재 의의였던 전쟁은 종식되었고, 전쟁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운 마법사는 홀연히 협회를 떠난 상태였다.
그러니 가디엘의 말이 맞았다. 오늘날 그가 협회에의 투자를 유지하는 이유는 제 누이의 건강을 위한 치료비 명목일 뿐이었다.
“또 한 번 내 누이가 기침하는 날에는 협회와의 모든 제휴를 중단할 거다. 내년 봄에는 말을 탈 수 있을 정도로, 말끔히 고쳐 놓아. 저 아이는 이 집안의 보물이니까.”
그렇게 엄포를 놓고 가디엘은 아사야의 침실을 떠났다.
밤의 어둠이 깔리는 복도로 걸어나오자 저택 곳곳에 선 하녀들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아사야 또래의 하녀들이 둘씩 모여 램프 불을 밝히고 있었다. 하나둘 켜지는 불빛을 향하던 가디엘의 시선은 이내 그 자신의 그림자로 돌아왔다. 고개 숙인 채 그는 제 마음 안에 사무치는 음습한 감정들을 묵인했다.
아사야가 나쁜 것이었다. 천사 같던 어머니를 죽게 만들고, 아버지의 애정을 독차지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도 사랑받고, 매일같이 행복하기만 한 아사야가 나빴다. 아사야는 축복받은 존재였고 보물이자 꽃이었으므로…….
그러니 그녀에게서 몇 가지 기회를 빼앗아 갈 자격이 저에게도 있었다.
‘아니…….’
있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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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이 된 영웅, 베데르 아졸의 이름을 오래전 세상에 알리게 했던, 왕실 주최 검술 대회로 온 대륙이 또다시 떠들썩했다. 2차 마물 전쟁이 그친 이후 수년간 왕실에서는 대회를 삼가는 눈치였다. 본디 대륙에서 가장 큰 대회가 열리는 날이던 6월은 그렇게 6년간, 영웅을 기리며 애도하는 날이 되었다.
그러나 올해는 달랐다. 왕실에서는 공개적으로 기사들의 실력을 겨루는 검술 대회를 재주최하겠노라 선언했다. 덕분에 온 대륙의 기사는 물론이며 용병들마저 각기 무기를 들고 수도로 몰려들었다.
올해 대회의 볼거리는 비단 누구의 검이 더 빠르고 날카로운가는 아니었다. 베데르 아졸의 영웅담의 출발지인 대회를 재건하는 일에는 그의 아들인 가디엘 아졸의 관용이 뒷받침되었고, 그와 그의 누이가 사렙탄 왕가와 함께 대회를 관전한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대륙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 스무 살의 아사야 아졸을 대외적으로 구경할 기회를, 누구도 놓치고 싶지 않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