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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1/16)

프롤로그



 

기다림으로 9년이 흘렀다. 태어난 순간부터 시작된 기다림이니 소녀의 나이가 딱 그만큼, 아홉 살이었다.

아홉 살 소녀가 하루를 시작하는 방식은 이러했다. 물끄러미 천장을 올려다보며 촉촉하고 시력 좋은 눈을 깜빡거리다가, 직사각형인 천장 모서리 곳곳을 바라보는 것.

밤의 어둠이 완전히 개기 전 새벽은 흐릿했다. 어떠한 장식도 없는 단조로운 조명도 불이 꺼진 채였다. 이 시간대엔 운이 좋으면, 평소엔 보지 못했던 고양이 무늬 얼룩을 발견할 수도 있었다. 그렇게 멍하니 시간을 보내다 보면 잠기운이 꿈결과 함께 달아나곤 했다.

소녀의 주위에는 꼭 그녀만큼 어린 아이들이 다닥다닥 달라붙어 있었다. 가을밤은 추웠고 아이들에겐 난로 대신 서로의 체온이 지급됐다. 이불 한 장에 세 명씩, 뭉쳐 잠든 아이들이 이 방에만 열둘이었다. 한창 꿈결인 아이들을 깨우지 않기 위해 소녀는 살금살금 움직여야 했다.

느릿느릿 상체를 일으키며 소녀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매만졌다. 제 이마와 눈두덩이, 코, 입술을 만지기를, 다친 자국이 없나 확인하는 손길이었다. 소녀의 얼굴은 매끈하고 촉촉한 피부로 감싸져 있었고 어여쁘기만 했다.

소녀는 짧고 자그마한 제 손가락 열 개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자리에서 느릿느릿 일어나 벽면에 걸린 사각 거울에 얼굴을 비추면 익숙하면서 낯선 얼굴이 보였다. 우울감에 잠긴 커다란 눈동자와 검정색 머리칼을 늘어뜨린 어린 아이.

소녀가 숨긴 우울감은 시설의 원장님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은밀했다. 모두, 화려하게 또렷한 이목구비와 샛노란 눈동자 덕분이었다. 보석처럼 반짝거리는 노란 눈은 새카맣고 촘촘한 속눈썹으로 감싸여 있었고, 대부분의 어른들은 그 안에 어떤 감정이 숨어 있는지 관찰해 내지 못했다.

이따금 고아원의 막내 아이가 그녀 옆을 기웃거리며,

“언니야, 왜 그래?”

걱정할 따름이었다.

제 허리를 껴안고 잠든 막내의 손가락을 조심조심 떼어 낸 뒤, 소녀는 생쥐처럼 움직였다. 고아원 건물 밖으로 빠져나가는 몸짓은 암살자가 와도 못 이길 수준이었다. 누구도 깨우지 않고 바깥으로 향하기가 소녀에겐 어렵지 않았다. 발에는 밑창이 닳은 가죽신을 신고 손에는 얼기설기 올이 뜯긴 담요 한 장을 쥐고서, 소녀는 아침 산책에 나섰다.

목적지는 늘 같았다. 멀찍이 언덕 너머로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이 마을의 가장 유명한 유산.

드래곤의 오래된 갈빗대가 거대한 지붕처럼 하늘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크기는 소녀가 머무르는, 오십 명의 아이들을 수용한 시설의 서너 배는 되었다. 높이는 그보다 훨씬 높아서, 뼈대 위를 오르려다 떨어져 팔이 부러진 소년들이 해마다 속출했다.

소녀의 관심사는 그 거대한 갈빗대를 기어오르는 데 있지 않았다. 소녀는, 그 갈비뼈 안에 머무르길 좋아했다.

거대하고 웅장한 뼈대는 가까이 다가가 바라보면 허물어진 건축물의 일부 같기도 했다. 넝쿨 식물들이 다닥다닥 들러붙어 갈빗대와 함께 화석이 되어 가고 있었다. 원형으로 길게 뻗은 뼈대와 뼈대의 틈새가 소녀의 출입문이었다.

큼직하게 뻗은 척추뼈의 그림자 밑으로 소녀는 느릿느릿 걸어 들어갔다. 표지가 닳고 구겨진 책들이 미리 와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 왔어. 기다렸지?”

들어줄 이 없는 인사를 하며 소녀는 제자리에 담요를 깔고 앉았다. 그곳은 그녀만의 안식처였다. 커다란 갈빗대가 만들어 낸 그늘 아래서 책을 읽고 앉아 있노라면 크고 강인한 존재가 저를 안아 주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어른들의 생각은 달랐다.

“흉물스럽고 끔찍하잖니.”

시설 원장님의 이야기가 그랬다.

대륙의 왕성을 제 그림자 아래에 집어삼켰던 마물, 블랙 드래곤의 뼈대를 부숴 보고자 군대는 오래도록 노력했었다. 다이아몬드 가루를 붙인 끌도 써 보았고 새로운 마도구를 창안해 내기도 했더랬다.

벌써 한 세기 전의 이야기지만, 갖은 노력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음은 오늘날의 소녀조차 쉽게 알 수 있었다. 드래곤의 뼈대는 여전히 이 자리에 존재했고, 그 옛날 거인들이 굴리던 바위보다 커다랗고 영웅이 휘두르던 검날보다 단단했다.

죽은 드래곤의 육신은 그 마력을 잃어버려 흩날리는 봄바람에도 마모되기 마련이라는데, 왜 블랙 드래곤의 뼈대만이 멀쩡히 자리를 지키는 것인가는 오래된 미스터리였다.

이유 불문하고 덕분에, 그 자리는 소녀만의 보금자리이자 약속 장소였다. 갓난아기인 채 고아원에 버려지고 걸음마를 뗀 순간부터, 소녀는 이 자리를 좋아했다. 검은 용의 갈빗대 아래에 몸을 기대고 앉아 있자면 슬픔도 외로움도 눈처럼 녹아내렸다.

그렇게 9년을 기다렸다. 그러나, 약속한 이에게 제가 지운 인내의 시간에 비하자면 9년은 터무니없이 짧은 것이었다.

그들 약속의 이야기는 백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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