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3
행복
다각 다각, 덜컹!
다각 다각 다각…….
달리는 말발굽 소리와 이따금 마차 바퀴가 자갈을 튕겨 내는 소리가 마차 벽을 울렸다. 하지만 그 네모진 벽 안쪽은 완전히 정적이었다. 내쉬는 숨결마저 소리 없이 마차 바닥으로 가라앉아서, 마주 앉은 발치가 무거웠다.
덜컹!
길 위에 채 정리되지 못한 커다란 돌덩이라도 있었던 것인지, 마차가 한 번 크게 튀어 올랐다. 차체가 크게 흔들리며 마부는 물론이고 그 안에 앉은 이들 역시 위협적인 흔들림을 겪었다. 에릭은 마차 천장에 머리를 쿵 찧는 데서 그쳤지만, 딜라일라는 허공으로 반쯤 떠올랐다가 떨어지는 통에 마차 바닥에 구를 뻔했다.
“…….”
“…….”
하지만 둘 중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딜라일라는 금세 자세를 고쳐 얌전히 시트 위에 앉았고, 에릭은 저도 모르게 그녀에게 뻗었던 손으로 제 정수리나 털어 댔다. 그러고 나서는 다시 정적이었다. 짙게 내리깔린 한숨만이 흔들리는 마차 바닥 위를 데굴데굴 굴렀다.
마침내 마차가 멈춰 섰을 때, 딜라일라도 에릭도 내심은 안도했다. 둘 다 입을 꾹 다물고 눈도 마주치지 않는 상대와 마주 앉아 마음이 편할 수는 없었다. 그 상대방이 사랑해 마지않는 남편과 부인이라면 더욱더.
“디디!”
마차 문이 열리기도 전에 마차 밖에서 딜라일라를 외쳐 부르는 경쾌한 목소리가 마침내 정적을 깼다. 그렇게 부르면 안 된다니까? 엄마는 디디한테 디디라고 하면서! 나는 돼! 마차 너머에서 모녀가 투닥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사이 마침내 문이 열렸다. 에릭이 마차에서 내리기도 전에 도도도 달려 들어온 조그만 인영이 그의 품에 폭 파묻혔다.
“에릭, 안녕.”
“어.”
“디디는요?”
에릭의 품에 안긴 마르그리트가 낑낑대는 사이, 에릭은 그 애를 달랑 든 채로 마차에서 내려섰다. 딜라일라는 에릭의 어깨 너머에서 빼꼼 고개를 내민 더티 블론드의 꼬마 아이에게 살랑살랑 손을 흔들어 주었다.
“안녕, 매기.”
“오랜만이에요, 디디!”
에릭의 품에 들려서도 온몸으로 파닥파닥 인사를 건네는 아이의 목소리가 밝았다. 오랜만에 딜라일라를 만난 것이 상당히 기쁜 듯했다.
오딜과 필립의 딸인 마르그리트 샤니는 반짝거리는 분홍빛 머리카락을 가진 제 외숙모를 유달리 좋아했다. 그 애가 매일같이 보는 사람이라곤 시니컬한 오딜과 무뚝뚝한 에릭이 전부였으니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외숙모를 좋아하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가끔밖에는 만나지 못해도 만나면 하루 종일 다정하게 놀아 주고 안아 주는 딜라일라 외숙모는 마르그리트의 눈에 천사나 다름없었다.
그런 딜라일라를 몇 달 만에 만나는 것이니 저렇게 신이 난 것도 당연했다. 딜라일라도 오랜만에 만난 마르그리트가 반가웠다. 에릭과 싸우지만 않았더라도, 마차가 멈춰 서자마자 창을 열고 마르그리트에게 인사부터 했을 것이다.
“디디.”
“오랜만이에요, 오딜.”
에릭이 마르그리트를 땅에 내려놓고 손을 내밀기도 전에, 딜라일라가 마차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에릭은 딜라일라를 슥 바라보았다가 다시 고개를 돌리며 내려놓으려던 마르그리트를 다시 안아 올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딜라일라는 오딜과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내려 줘요, 에릭. 나 디디한테 갈래.”
“안 돼.”
“왜요!”
“누나는 이제 너 못 안아 줘. 무거워서.”
마르그리트의 눈이 충격으로 커다랗게 벌어졌다. 그 조그만 애는 아직까지도 딜라일라의 품에 안겨서 얼러지던 때를 기억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딜라일라를 만나지 못한 반 년 새 자신이 쑥쑥 커 버렸다는 사실은 쏙 지워 버리고 말이다. 제 편한 것만 기억하는 것이 꼭 오딜을 닮았다는 생각을 하며 에릭이 내심 혀를 찼다.
“아냐, 안을 수 있어. 이리 와, 매기.”
딜라일라가 마르그리트를 향해 양팔을 벌리자, 마르그리트가 충격에 빠졌던 눈을 다시 반짝이며 팔을 흔들어 댔다. 품 안에서 파닥파닥 움직이는 아이의 몸이 감당하기 힘들 법도 한데 에릭은 꿈쩍도 하지 않고 오히려 마르그리트를 더 단단히 안았다.
“안 된다니까.”
“디디는 괜찮다고 하잖아. 왜 에릭이 뭐라고 해?”
“맞아. 왜 네가 뭐라고 해?”
“…….”
입을 꾹 다문 에릭은 끝까지 마르그리트를 딜라일라에게 넘겨주지 않았다. 대신 그는 커다란 보폭을 자랑이라도 하듯이 휙휙 걸어 저택 안으로 쑥 들어가 버렸다. 그 뒷모양을 바라보고 있던 오딜이 한쪽 눈썹을 슥 들어 올렸다. 곧장 저택 안에서 커다란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여기 아니야! 뒤뜰로 가야 돼! 엄마가 홍차랑 스콘이랑, 디디가 좋아하는 거 다 준비해 놨단 말이야!”
우렁찬 외침이 멎고 얼마 안 되어 에릭이 들어갔던 문으로 다시 돌아 나왔다. 오딜과 마르그리트가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결국 딜라일라도 소리를 내어 웃고 말았다. 마냥 무심한 얼굴을 하고 있는 에릭이었지만, 그의 널찍한 어깨가 머쓱하게 굽어져 있는 것을 보고 만 탓이었다.
바깥뜰을 돌아 뒤뜰로 향하는 동안에도 오딜과 마르그리트는 아주 익숙하게 에릭을 놀려 댔다. 오딜의 곁에서 걷고 있는 딜라일라가 계속 웃음을 흘리는 것이 기쁜지 에릭을 유치하게 찔러 대는 목소리에 잔뜩 신이 나 있었다.
“에릭은 바보래요.”
“세상에, 디디. 우리 애가 천재예요. 디디랑 나만 아는 비밀이었는데, 어떻게 눈치챘지?”
“매기는 바보가 아니니까!”
“맞아. 매기는 날 닮아서 똑똑하지.”
“에릭은 바보지만.”
유치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를 나누다가, 와르르 웃음을 터뜨리기를 반복하다 보니 어느새 그들은 뒤뜰에 준비된 티 테이블 앞에 도착해 있었다. 에릭은 그제야 마르그리트를 의자 위에 풀썩 내려놓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마르그리트는 신나게 웃느라 숨이 넘어갈 지경이었다. 제각기 의자를 빼 앉는 동안에 겨우 진정한 마르그리트가 눈물을 닦는 시늉을 해서, 딜라일라는 또 웃고 말았다.
“디디가 와서 어지간히 좋은가 봐요.”
“기뻐라. 나도 보고 싶었어, 매기.”
딜라일라가 손을 뻗어 마르그리트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자 샐쭉 웃어 보이는 얼굴이 제법 자라 있었다. 딜라일라는 손에 감겨 오는 부드러운 더티 블론드를 몇 번 더 쓰다듬어 준 뒤에 마르그리트에게서 손을 뗐다. 숨이 넘어가도록 웃어 대던 아이는 거짓말처럼 새초롬한 얼굴로 티 컵을 들어 올렸다.
“무슨 차로 할래요?”
“으음…….”
“홍차요!”
“어차피 넌 홍차 못 마시잖니.”
딜라일라에게 던져진 질문을 쏙 채어 갔던 마르그리트가 뾰로통하게 입술을 내밀었다가, 딜라일라의 눈치를 보며 다시 어른스러운 얼굴을 했다. 오랜만에 만난 딜라일라에게 잘 보이고 싶은 티가 아이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줄줄 흘렀다. 딜라일라가 우유를 타 줄까? 하고 소곤소곤 속삭이자 기쁘게 고개를 끄덕였다가 또 응! 하고 소리 내 대답하는 마르그리트의 목소리는 뒤뜰에 가득한 햇살처럼 쨍쨍했다.
홍차를 우려내는 동안 딜라일라는 계속해서 마르그리트에게 소곤소곤 속삭였고, 그 모양을 보며 오딜이 흐뭇하게 웃는 광경이 연출되었다. 에릭은 여전히 입을 꾹 다물고 묵묵히 앉아서 차를 우렸다.
쪼르르. 찻잔에 맑은 찻물을 따라 준 에릭이 마르그리트 몫의 찻잔에는 아주 조금만 차를 채웠다. 아이가 눈치채기 전에 딜라일라가 그 위로 우유를 붓고, 거의 우유나 다름없는 연한 밀크 티를 마르그리트에게 내밀었다.
“설탕은요?”
“설탕 많이 먹으면 더 무거워져서 디디가 진짜로 못 안아 줄걸?”
“하나만 먹어야 돼. 알겠지?”
오딜의 놀림 섞인 만류의 뒤를 이어 딜라일라가 각설탕 하나를 집어 들자 마르그리트는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퐁당 설탕을 넣어 주자 그것을 유심히 바라보는 동그란 눈이 진지했다. 딜라일라는 제가 안아 주지 못하는 것이 그렇게나 중요한 일인가 싶어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뒤늦게 제 몫의 찻잔을 들었다.
“디디가 말하니까 듣네요. 워낙 단 걸 좋아해서 걱정이었는데.”
“아이 때는 단 음식이 세상에서 제일 좋죠, 뭐.”
한가로운 이야기를 나누며 차향을 들이마시자 저절로 마음이 편안해졌다. 오랜만에 갖는 여유였다. 딜라일라는 이 여유를 즐기기로 마음먹었다. 에릭은 뭐, 알아서 하라지. 콕콕 옆을 찔러 오는 에릭의 시선을 무시하고 딜라일라는 차를 한 모금 삼켰다.
“디디, 디디.”
“응?”
“딸기가 좋아요, 아니면 포도가 좋아요?”
“음, 못 고르겠는걸. 매기가 골라 줄래?”
스콘을 집어 들고 곰곰이 고민에 빠진 마르그리트의 머리꼭지에서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둥글둥글 회오리치고 있었다. 브라이어 핏줄은 다 이런가? 마르그리트가 고개를 갸웃거릴 때마다 머리칼이 보드랍게 흔들렸다. 가늘고 부드러운데도 불구하고 기름을 먹여 넘기지 않으면 좀처럼 정리가 되지 않는 머리칼은 아무래도 브라이어 집안의 유전인 것 같았다.
“그럼요, 디디. 디디는 크림이 먼저예요? 잼이 먼저예요?”
고개를 갸웃거리던 마르그리트가 생각지도 못한 질문을 하는 것을 듣고, 딜라일라는 또 웃음을 터뜨렸다.
아이는 정말 신기하다. 고작 몇 달 못 만난 사이에 쑥쑥 자라 있는 것도 그렇고. 마냥 조그맣고 어린 얼굴로 또박또박 제 할 말을 다 하고, 어른들이 으레 하는 행동을 똑같이 따라 하는 것도 신기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짤막하던 발음도 이제는 완전히 어른스러워져 있었다.
사람들은 막연히 아이들은 제멋대로에 말도 잘 못하고 쉽게 울음을 터뜨릴 거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아이들은 어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똑 부러지고 어른스러운 존재들이다. 그 조그만 머리통 안에서 바쁘게 오가는 치열한 생각들이 어떤 모양을 하고 있는지, 우리처럼 다 커 버린 어른들은 죽었다 깨도 생각하지 못할 테지. 딜라일라는 마르그리트를 보면서 매번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러니까, 딜라일라가 에릭과 꼭 닮은 아이를 키우고 싶어진 것도 당연했다. 그 애가 보드라운 갈색 머리칼이 부숭부숭 자란 머리통을 갸웃거리며 열심히 고민하는 모양은 또 얼마나 사랑스러울까?
“디디!”
“응?”
“아, 해요!”
마르그리트가 아, 하고 입을 벌려 보이는 모양을 따라 하자 입 안으로 작게 조각낸 스콘이 쏙 밀려들어 왔다. 가장 먼저 스콘에 잔뜩 얹어 놓은 크림의 묵직한 맛이 입 안에 퍼졌다가, 이내 턱이 다 얼얼해질 정도로 단 잼이 입 안을 가득 채웠다. 스콘이라기보다는 잼 덩어리에 가까운 맛이었다.
오물오물 입을 움직이며 입 안에 스콘을 넣어 준 마르그리트를 내려다보자, 아이의 손에 잼이 잔뜩 묻은 것이 눈에 들어왔다.
“딸기 잼도 포도 잼도 맛있으니까, 둘 다 발랐어요. 맛있죠?”
그렇게 당당하게 말하는 아이에게 너무 달다는 말을 할 수는 없었다. 딜라일라는 씩 웃으면서 냅킨을 쥐고 마르그리트의 손가락을 닦아 냈다.
불쑥 다가온 커다란 손이 딜라일라의 입가를 훔쳐 낸 것은, 그녀가 아이의 손을 다 닦아 주고 찻잔을 들어 올렸을 때였다.
“크림.”
“어…….”
“묻었어요.”
딜라일라의 입가에 묻어 있던 크림을 손끝으로 닦아 낸 그가 제 손가락을 입에 넣고 핥아 낸 뒤에 냅킨에 슥슥 문질렀다.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행동인 것을 알면서도, 딜라일라의 얼굴에 발간 홍조가 떠올랐다.
“…….”
하지만 딜라일라는 에릭에게 다른 말을 하는 대신 찻잔만 기울였다. 입 안으로 쏟아지는 쌉쌀한 찻물이 단맛을 말끔하게 씻어 냈다.
그 후로도 티 테이블 위의 공기는 비슷하게 흘러갔다. 딜라일라는 에릭을 무시하고, 마르그리트는 딜라일라에게 신이 나서 떠들고. 오딜은 흐뭇하거나 흥미로운 표정으로 눈앞에서 오고 가는 소리 없는 공방을 지켜보았다.
끝내 제 몫의 밀크 티를 다 마신 마르그리트가 보여 주고 싶은 게 있다며 딜라일라의 손을 잡고 쫄쫄 멀어졌을 때, 오딜이 에릭에게 툭 내뱉었다.
“싸웠냐?”
“…….”
“싸웠네.”
벌컥벌컥 찻잔에 반쯤 남아 있던 차를 한 번에 들이켠 오딜이 테이블 위에 탕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 서슬에 테이블 위에 나란히 자리하고 있던 다기며 접시들이 바르르 몸을 떨었다.
“뭔지 몰라도 네가 잘못했겠지.”
“……아닌데.”
“얼씨구.”
포트에 남아 있던 차를 콸콸 따라 낸 오딜이 다시 벌컥벌컥 차를 마시며 에릭의 얼굴을 흘겼다. 원래도 저를 닮아 서늘한 인상이긴 하지만, 딜라일라의 앞에서만은 멍청하게 헤실헤실 풀어지던 얼굴이 꾸깃꾸깃 굳어져 있었다. 오딜이 코웃음을 쳤다.
“말해 봐. 왜 싸웠는데.”
“…….”
“말하기 싫으면 평생 그러고 살든지.”
오딜이 그렇게 말하면, 그녀의 멍청한 남동생은 결국 싸우게 된 이유를 토해 내게 되어 있었다. 저 자식은 디디한테 눈이 돌아서 이 왕국 정치판을 휘까닥 뒤집어 버리려고도 했던 놈이니까. 지가 저러고 디디한테 무시당하면서 며칠이나 버틸 수 있으려고.
아니나 다를까, 에릭은 꾸깃꾸깃한 얼굴에 꼭 어울리게 꾸깃꾸깃한 목소리로 부부 싸움의 전말을 털어놓았다. 짧게 요약된 에릭의 이야기를 들은 오딜은 다시 한번 코웃음을 쳤다.
“네가 잘못했네.”
에릭의 얼굴이 조금 더 꾸깃해졌다. 그가 미간을 찌푸릴 때마다 손가락으로 꼭꼭 눌러 주름을 펴 주던 딜라일라는 저 멀리서 마르그리트와 손을 잡고 화단을 구경하고 있었다. 종소리처럼 맑은 웃음소리가 이따금 바람결에 실려 왔다.
“애를 네가 낳냐? 디디가 낳지. 네가 뭔데 낳아라 마라야?”
“그게 문제라고.”
오딜은 에릭과 닮은 미간을 슬쩍 찌푸렸다가, 다시 벌컥벌컥 차를 들이켜곤 테이블 위에 찻잔을 탕 내리쳤다. 하얀 접시들이 또 한 번 위태롭게 흔들렸다.
“그래. 그게 문제긴 하지.”
오딜이 담백하게 인정했다. 정말로, 그게 문제이긴 했다.
아이를 낳는다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출산뿐만 아니라, 임신부터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입덧이 시작되었을 때 오딜은 지금까지 알고 있던 것과 전혀 다른 세상에 떨어진 것 같은 기분까지 느껴야 했다. 이전에는 아무렇지 않게 먹고 마셨던 것들이 같은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시궁창에 들어앉은 것처럼 구역질이 났다.
게다가 점점 배가 부풀어 오르면서 겪게 되는 수많은 불편과 고통은 또 어떤가. 임신은 흔히 숭고하고 아름다운 일 따위로 여겨지곤 하지만, 그 실상은 겪어 보지 않고서는 절대 알 수 없을 고통과 고난의 연속이었다. 거기에다 출산의 위험성까지 덧붙이면, 도대체 인간이 어떻게 지금까지 멸종하지 않고 번식하고 있는지가 신기할 지경이었다.
오딜은 마르그리트를 낳다가 반쯤 죽을 뻔했다. 필립은 오딜이 결혼하면서 연을 끊었던 브라이어 남작까지 호출하려 했다. 정말로 오딜이 죽는 줄만 알고.
그녀가 죽지 않고 몸을 회복할 수 있었던 것은 필립과 에릭, 딜라일라가 사색이 되어서는 그녀에게 그들의 재산과 권력을 털어 넣은 덕분이었다. 온갖 마법 약과 의술을 전부 쏟아부은 덕분에 오딜은 가까스로 살아났다. 그러고도 일 년이 넘도록 고생을 했다. 일자리를 오래 비울 수 없었던 필립과 딜라일라 대신 에릭이 그동안 오딜의 곁에 붙어 간호를 했다.
에릭이 딜라일라가 아이를 낳지 않기를 바라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누가 사랑하는 부인에게 그런 고생을 시키고 싶어 한단 말인가? 대가리 돈 새끼가 아니고서야.
“내 멍청한 동생아.”
오딜이 한숨을 푹 쉬었다. 연달아 차를 쏟아부은 입 안이 까끌했다.
“그래도 그건 네가 일방적으로 안 된다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
“알면서 뻗대고 있어.”
뚱한 에릭의 얼굴을 보면서 오딜이 재차 한숨을 내쉬었다. 저 요령 없고 멍청한 남동생은 어째 나이가 들어도 나아지는 구석이 없었다.
아무리 걱정이 된다고 한들, 딜라일라가 아이를 낳고 싶다면 그 의견도 존중해 줘야 한다. 그 사실을 에릭이 모를 리가 없었다. 좀 멍청하긴 해도 에릭은 오딜이 키우고 가르친 거나 다름없는, 오딜의 남동생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딜라일라를 너무 사랑해서 반쯤 미친 새끼이기도 했다.
“너는 디디 닮은 딸 보고 싶지 않아?”
쿡 찌르는 듯한 말에 에릭이 더더욱 얼굴을 구겼다. 오딜은 이제 꾸깃꾸깃 구겨지다 못해 일그러진 에릭의 얼굴을 보고 픽 웃었다. 에릭은 저래 봬도 마르그리트를 엄청나게 귀여워했다. 아이를 내려놓을 틈도 없이 달랑달랑 안고 다녀서 마르그리트는 다른 아이들보다 걸음마도 한참 늦게 했다. 그런 에릭이 딜라일라와 자신의 아이가 싫을 리가 없었다.
그러니까 지금 에릭은 그냥 딜라일라를 잃을까 봐 겁을 내고 있는 거다. 오딜은 그렇게 생각하며 쿡쿡 에릭을 찔렀다. 그러고 입 꾹 다물고 있을 거면 차라도 한 잔 더 끓여 봐.
“겁쟁이 새끼.”
“욕 좀 그만해. 애도 낳아 놓고.”
“애 엄마 됐다고 내가 뭐 성모처럼 자애로워지기라도 할 줄 알았냐?”
툭, 툭. 새 포트에 찻잎을 털어 넣은 에릭이 마법 포트를 작동시켜 물을 끓였다. 오딜의 간호를 하던 때에 에릭이 틈틈이 짬을 내 미완성이던 것을 다시 제작한 후로 마법 포트는 수도 사람들에게 생활의 필수품이 되었다. 샤니 저택의 곳곳에 놓인 마법 포트는 무려 그 에릭의 수제품이었다.
포트에서 보글보글 물이 끓기 시작할 때까지도 에릭은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오딜은 한가롭게 딜라일라와 마르그리트가 언제쯤 화단 구경을 끝내고 테이블로 돌아올까 타이밍을 재고 있었다.
“만약에…… 누나가 아이를 낳다가, 잘못되면. 그래서 누나가 죽고 아이가 살면.”
보글보글 물이 끓는 소리 사이로 나지막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원래도 낮은 목소리가 바닥까지 가라앉았다. 자칫하면 듣지 못할 정도로 작은 목소리가 그의 성대를 긁어내며 꾸역꾸역 토해졌다.
“내가 그 애를 사랑할 수 있을까?”
오딜은 난데없이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그녀가 멍하게 눈을 끔뻑이는 사이 물이 다 끓었다. 에릭은 티 포트에 부글부글 끓는 물을 말없이 부어 넣었다. 뿌옇게 김이 피어올라 시야가 흐려졌다가, 불어오는 바람에 뒤늦게 선명해졌다. 오딜이 손가락을 까딱까딱 움직여 테이블 위를 두드렸다.
에릭은 부모에게 제대로 된 사랑을 받지 못했다. 브라이어 남작 부인은 에릭을 낳다가 죽었고, 부인이 죽은 뒤로 브라이어 남작은 갓난아기였던 에릭을 대충 구한 유모와 몇 안 되는 사용인의 손에 맡겨 놓고 방치했다. 그는 에릭의 머리가 좀 굵어지고 나서부터는 에릭을 티 나게 싫어하기까지 했다.
오딜도 썩 좋은 취급을 받으며 자라지는 않았지만, 에릭에게 아버지 따위는 없는 게 나은 수준이었다. 오딜은 가끔 자신이 어린 에릭을 미워했던 것을 곱씹으며 짧은 상념에 잠기곤 했다. 어쨌든 오딜도 그때는 어렸으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과거를 곱씹고 또 곱씹다 보면, 결국 브라이어 남작에게로 원망이 되돌아갔다. 돼먹지 못한 새끼. 속으로 제 아버지에게 상스러운 욕을 짓씹으며 오딜이 부득부득 이를 갈았다. 그 새끼가 조금만 제대로 된 부모이기만 했더라도, 저 자식이 저딴 생각은 하지 않았을 거 아닌가.
오딜이 결혼을 결심했을 때, 모두가 놀랐다. 하지만 그녀가 결혼을 결심한 것은 어떤 충동이나 치기 때문이 아니었다. 심지어는 필립 샤니의 그 예쁜 얼굴 때문도 아니었다.
오딜은 오래전부터 아이를 키우고 싶었다. 자신과 에릭이 받지 못했던 부모의 사랑을 물려주고 싶어서. 그들은 분명 제대로 된 부모의 밑에서 자라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제대로 된 부모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고 싶어서.
오딜 브라이어도, 에릭 브라이어도.
바람만 썰렁하게 부는 가운데 다 우려진 차를 걸러 내는 에릭의 손길이 단정했다. 오딜이 하는 모양을 보고 처음 따라 하기 시작했던 때는 엉성하기 짝이 없던 움직임이 이제는 그녀보다 훨씬 더 우아했다. 아마 반복되는 실험에 익숙해져서이기도 하겠지만, 딜라일라의 우아한 행동거지를 보면서 무의식적으로 닮아 간 것일지도 모른다.
그 모양을 빤히 바라보던 오딜이 제 앞에 놓인 찻잔을 들었다. 서늘한 풀잎의 향기가 복잡하던 머릿속을 닦아 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에릭이 차를 끓이는 풍경이 자연스러워진 것이 언제부터였던가. 에릭 브라이어가 뭔가를 욕심내고, 또 걱정하는 꼴을 보게 된 것은 또 언제부터였던가. 무심하고 뚱한 표정만 짓던 그가, 가끔은 오딜의 앞에서도 웃어 보이기 시작했던 것은 또 언제부터였던가?
“넌 디디를 만났잖아.”
생각도 하기 전에 말이 먼저 토해져 나갔다. 오딜은 홀짝 찻물을 삼켰다. 뜨거운 물이 목으로 넘어가며 시원한 향기와 어렴풋이 단맛을 입 안에 남겼다.
“너, 이제 마냥 멍청하고 아는 것 없던 에릭 브라이어 아니잖아.”
“…….”
“디디한테 많이 배웠잖아.”
사랑하는 법을.
오딜은 어쩌면 낯간지러울 수도 있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툭툭 던져 놓고는 씩 웃었다. 가끔은 어렵게 머리 굴려 가며 생각만 하기보다 입 밖으로 꺼내 놓는 것이 나을 때가 있다. 그리고 지금이 꼭 그런 때였다. 뱉어 놓고 보니 아주 딱 맞는 말이었다.
“그러니까 넌 그런 짓 못 해.”
홀짝홀짝 들이켜는 차가 아주 맛있었다. 에릭은 갈수록 차를 끓이는 실력이 는다. 찻집 차려도 되겠네. 늙으면 찻집이나 차리라고 해야지.
그가 차를 끓이는 실력이 느는 것도 전부 다 딜라일라 때문이었다. 딜라일라가 피곤한 날에, 오랜만에 시간이 여유로운 날에, 또는 이유 없이 우울한 날에 에릭이 딜라일라에게 차를 끓여 주곤 한다는 사실을 오딜도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에릭이 끓인 차 맛만큼이나, 그가 딜라일라를 사랑하는 방법 역시 나날이 훌륭해져 가고 있었다.
그런 에릭이 이제 와서 행복을 붙잡기를 망설일 필요는, 더는 없었다.
“그러니까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마.”
“……그러네.”
“아니, 그리고 네가 마법 공학자면 마법 공학자답게 문제가 일어난 이후를 상정하지 말고,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찾아야지. 이거 완전 헛배웠어. 천재도 별거 없구만.”
“그래. 그러네.”
에릭의 대답이 먹먹해서, 오딜은 괜히 에릭을 타박했다. 거기에다 대고 에릭은 또 그렇다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 꼴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오딜은 저까지 다 먹먹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나이 들면 눈물이 많아져서 탈이야.
“엄마!”
“오딜? 왜 그래요, 둘이 싸웠어요?”
다행히 오딜이 주책맞게 눈물을 흘리기 전에 마르그리트와 딜라일라가 자리로 돌아왔다. 얼마나 오랫동안 꽃을 붙들고 있었던 것인지, 그들에게서 달콤한 우유 냄새와 함께 풀잎과 들꽃 냄새가 물씬 풍겼다. 걱정 어린 딜라일라의 얼굴을 말끄러미 바라보던 오딜이 비죽이 입꼬리를 당겨 올렸다.
“싸우긴 뭘 싸워요. 그리고 싸우면 내가 이겨.”
당연하게 승리 선언부터 해 놓은 오딜은, 삐죽한 웃음을 지우지 않은 채로 덧붙였다.
“싸운 건 에릭하고 디디겠죠.”
“어…….”
“디디랑 에릭이랑 싸웠어요?”
눈을 동그랗게 뜬 마르그리트가 휙휙 고개를 돌리며 에릭과 딜라일라를 번갈아 돌아보았다. 딜라일라는 묘하게 부끄러워지고 말았다. 아이 앞에서 다 큰 어른들이 싸웠다는 이야기를 하다니, 오딜도 참……. 에릭도 그녀와 비슷한 기분인지 묘하게 시선을 빗겨 내리고 테이블만 뚫어져라 쳐다봤다.
둘을 번갈아 돌아보던 마르그리트가 척척 걸어가 에릭의 손을 붙들었다. 에릭은 습관처럼 아이가 이끄는 대로 발걸음을 옮겼다.
“손잡고 화해해!”
에릭과 딜라일라를 마주 세워 놓은 마르그리트가 뿌듯하게 외쳤다. 덕분에 와르르 다시 한번 웃음이 터지고, 아이만 영문 모를 얼굴로 재차 화해를 종용했다. 결국 에릭과 딜라일라는 마르그리트의 눈앞에서 악수를 하고, 서로에게 ‘미안해’와 ‘사랑해’를 속삭였다. 반쯤은 아이에게 고마워하면서.
결국 딜라일라와 에릭을 포옹까지 시키고 난 뒤에야 만족스럽게 자리에 앉은 마르그리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딜라일라가 웃었다.
정말로, 아이는 신기하다. 어른들은 상상도 못 할 만큼 순수한 방식으로 생각하고 행동한다. 그리고 가끔은 그것이 어렵고 복잡하게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정답에 가깝다.
그날, 돌아가는 마차 안에서 에릭과 딜라일라는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딜라일라는 조금 울었고, 에릭은 딜라일라의 손을 꼭 마주 잡고 다시 한번 사랑한다고 속삭였다.
그로부터 이 년이 지난 후, 딜라일라의 분홍빛 머리칼과 에릭의 금빛 눈동자를 꼭 빼닮은 아이가 태어났다. 에릭과 딜라일라는 며칠간의 상의 끝에 그 아이의 이름을 펠리시타라고 지었다.
행복이라는 뜻을 담아.
[괜찮아, 사랑만 빼고] 외전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