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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2 (13/14)

외전 2

밀월

우유와 신문을 배달하는 배달꾼들의 목소리가 왁자하고, 덜컹이는 짐마차와 바삐 자신의 일자리를 찾아가는 이들의 걸음이 시간을 재촉하는 아침.

그러나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린 딜라일라의 귓가에는 적막한 숲을 휩쓰는 초여름의 산들바람 소리뿐이었다. 지금 그녀는 수도나 번화가와는 완전히 동떨어진 곳에 있었으니까. 딜라일라는 졸린 눈을 끔뻑거리며 이곳에 도착하기까지의 여정을 떠올렸다.

남부 해안가 별장지에서 마차를 타고 꼬박 하루를 달리면, 도심과는 동떨어진 평화롭고 소박한 농가가 산발적으로 흩어진 평지가 나온다. 거기에서 다시 마차를 타고 야트막한 언덕을 조금 올라가면 옹기종기 모인 단풍나무 숲 사이로 앙증맞은 이 층 저택이 빼꼼히 고개를 내밀고 서 있었다.

에리카가가 소유한 그 저택은, 별다른 이름도 없이 그저 단풍나무 저택이라고 불렸다.

신혼여행지로 이곳을 고른 것은 순전히 딜라일라의 선택이었다. 휴일이면 제 방에 콕 틀어박혀 나오지 않는 종류의 사람이었던 그녀는 신혼여행지에서도 굳이 바깥을 돌아다니며 부산을 떨고 싶지 않았다. 사람이 많은 휴양지에서는 제대로 쉬지도 못할 것 같기도 하고. 그렇다고 해서 정말로 아무 곳이나 골라 틀어박혀 있기도 싫었다. 어쨌든 결혼 후 처음으로 함께 떠나는 여행인데, 그래서야 기분이 나겠느냔 말이다.

아무튼 막연히 풍경이 아름답고 한적한 곳이면 좋겠다는 정도의 생각을 줄곧 하고 있던 차에, 마가렛이 단풍나무 저택의 이야기를 꺼냈던 것이 결정적이었다. 그때 즈음 마가렛은 딜라일라의 결혼 준비를 하며 사랑하는 딸의 어린 시절에 있었던 추억을 하루가 멀다 하고 입 밖으로 꺼내 늘어놓는 습관이 들어 있었다.

“어렸을 때 단풍 보러 갔던 마을 기억나니?”

여느 때와 같이 시작된 마가렛의 추억 여행에서, 딜라일라도 어렴풋이 어렸을 적의 기억을 떠올렸다. 한적하고 조용한 시골 숲 속에 서 있던 예쁜 저택에서 낮잠을 잤던 것 따위를 곰곰히 되짚어 보던 딜라일라는 그 자리에서 신혼여행지를 결정하고 말았다. 에릭이야 늘 그랬듯이 딜라일라의 말에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었다.

그리하여 결혼식이 끝난 뒤에 딜라일라와 에릭은 곧장 마차를 타고 단풍나무 저택으로 향했다. 사람들에게 치이며 잔뜩 지친 딜라일라는 마차에서부터 꾸벅꾸벅 졸아 댔고, 에릭은 그런 딜라일라를 무릎 위에 눕혀 재웠다. 졸다 깨다를 반복하다 보니 딜라일라는 어느새 단풍나무 저택의 침실에 누워 있었다.

그리고 그다음에……. 거기까지 생각한 딜라일라가 뺨을 빨갛게 물들이고 눈을 꾹 감았다.

에릭은 분명 피곤한 딜라일라를 배려해 주는 듯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딜라일라가 반쯤 기절하듯 잠들 때까지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결혼식 전날 그녀에게 했던 말이 새삼스럽게 귓가에 들리는 것 같았다.

“푹 자야 버틸 수 있지.”

그가 말한 버텨야 하는 일이 결혼식 얘기가 아니라는 것만은 분명했다. 어젯밤 딜라일라는 버티지 못하고 지쳐 나가떨어졌지 않은가?

그런데 에릭은 어디 있지. 눈을 꾹 감고 데구르르 침대 위에서 한 바퀴를 굴렀던 딜라일라가 문득 옆자리가 허전하다는 것을 깨닫고 반짝 눈을 떴다. 끙끙대며 상체를 일으키자 얇은 여름 이불이 사르륵 떨어져 내렸다. 그 아래 덮여 있던 몸은 밤새 닦아 주기라도 했는지 보송보송했다. 열린 커튼 사이로 쏟아져 들어온 늦은 오전의 햇살이 딜라일라의 하얀 피부 위에 반짝이는 선을 그렸다.

어차피 닦아 줄 거면 옷도 입혀 주지. 툴툴거리며 제 몸을 내려다보았던 딜라일라가 기겁하며 다시 이불을 당겨 몸을 가렸다. 얼핏 보기에도 쇄골 즈음부터 갈빗대를 지나 옆구리에 이르기까지, 그녀의 몸 위에는 붉은 순흔이 가득했다.

“아…….”

윗가슴 언저리, 아주 새빨갛게 물든 자국을 손으로 꾹 눌러 보자 아릿한 신음이 잇새로 샜다. 묘한 감각이었다. 멍이 들었다가 나아가고 있는 자리를 누른 것처럼, 아픈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딜라일라가 이불을 걷어 내고 자신의 몸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유달리 빨갛게 물든 곳을 괜스레 꼭꼭 눌러 볼 때마다 묘한 기분이 들었다. 한참 동안이나 제 몸에 새겨진 에릭의 흔적을 하나하나 더듬어 가던 딜라일라는 낮은 웃음소리가 귓가에 닿을 때까지도 그녀를 지켜보고 서 있던 에릭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다.

“신기해요?”

“어, 어……?”

반짝 고개를 들어 올린 딜라일라의 얼굴이 빨갰다. 귀 끝까지 더워지는 감각에 딜라일라가 다시 휙 이불을 뒤집어썼다. 붙잡혔다가, 내던져졌다가, 다시 붙잡힌 불쌍한 이불만 가련하게 바스락거리며 구겨졌다. 새하얀 이불 너머에서 달각달각 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가만히 듣고 있던 딜라일라가 슬쩍 이불 밖으로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햇살 쏟아지는 침실에, 언제 가져다 둔 것인지 모를 테이블 위로 소담한 아침 식사가 담긴 접시가 하나씩 놓였다. 푹신한 팬케이크와 산뜻한 샐러드, 배를 갈라 치즈를 끼워 넣은 크루아상과 마멀레이드. 바삭하게 구운 베이컨과 소시지, 반숙 달걀 따위가 제각기 자리를 차지하고 매력적인 자태를 뽐냈다. 트롤리에서 접시들을 테이블 위로 음식을 옮기는 에릭의 손이 바빴다.

잘생겼어.

에릭은 왜 아침에 봐도 잘생겼지?

에릭은 편안한 바지와 얇은 셔츠를 입은 위로 실내용 가운을 걸쳐 입고 있었다. 익숙한 차림새이기도 하고, 익숙하지 않은 차림새이기도 했다. 그의 널찍한 어깨를 차마 전부 감싸 안지 못한 짙은 녹색 가운이 그가 움직일 때마다 사락사락 천이 스치는 소리를 냈다. 딜라일라가 설핏 미간을 찌푸렸다. 왜 저런 색도 잘 어울리는 거야? 난 안 어울리는데.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에릭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하나도 놓치지 않고 눈에 담아내던 딜라일라는, 그가 다시 그녀에게 시선을 돌릴 기색을 눈치채자마자 다시 이불속으로 쏙 숨었다. 저벅저벅, 침대 가로 걸어오는 걸음 소리에 맞춰 심장이 쿵쿵 뛰었다. 왜 새삼스레 부끄럼을 타는지. 스스로도 이해 못 할 정도로 온몸이 더웠다.

“많이 피곤해요?”

끼익, 매트리스가 한쪽으로 푹 꺼졌다. 딜라일라는 여전히 이불 속에 얼굴을 숨기고 그의 손을 따라 드리워지는 그림자의 흔적을 눈으로 좇았다.

“다시 자더라도 아침은 먹고 자요.”

푹, 그녀의 머리 위에 덮이는 손이 여름 이불 너머로 체온을 전해 왔다. 초여름 아침의 공기는 이불을 덮으면 딱 좋을 정도로 선선했고, 그 위로 닿아 오는 체온은 반가울 만큼 따뜻했다. 딜라일라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 발짝 늦게 이불 밖으로 눈을 빼꼼 내밀자 침대 가에 걸터앉아 그녀를 바라보고 있던 에릭의 시선이 곧장 그녀에게 부딪쳐 왔다.

“에릭.”

“네.”

곧장 돌아오는 짤막한 대답에 딜라일라가 배시시 웃었다.

“나, 옷 좀…….”

그녀를 따라 마주 웃은 에릭은, 그러나 딜라일라의 말을 말끔하게 무시했다.

“으?”

이불째로 딜라일라를 감싸 안고 번쩍 들어 올린 그가 저벅저벅 걸음을 걸을 때마다 곱슬거리며 흘러내린 딜라일라의 머리칼이 흔들렸다. 그녀를 의자에 답삭 내려놓은 에릭이 딜라일라의 어깨 위로 이불을 둘둘 감았다.

“내 옷은?”

“그러려면 지금 사용인을 불러야 하는데.”

“부르면 되지!”

“그러고 싶지 않아요.”

딜라일라의 몸을 이불로 꽁꽁 감싸는 에릭의 얼굴에는 희미한 웃음기가 맴돌았다. 딜라일라에게 이불을 다 둘러 준 그가 하얀 뺨에 쪽, 소리 내 입을 맞추고 속삭였다.

“단둘이 맞는 아침인데.”

“…….”

“다른 사람을, 꼭 불러야 해요?”

역시 에릭은 너무 잘생겼다. 목소리도 너무 좋아서 큰일이다. 이런 표정으로, 이런 목소리로 속삭이는데 어떻게 내 옷 내놓으라고 말할 수 있단 말인가? 요망한 에릭 브라이어. 나이 먹더니 더 요망해졌다.

“하, 하지만 이러면 내가 밥을 어떻게 먹어?”

딜라일라가 마지막 희망을 담아 몸을 꿈틀거렸다. 이불을 워낙 꼭꼭 동여매 놓은 탓에, 딜라일라가 할 수 있는 움직임이라곤 꿈틀거림이 전부였다. 어느새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앉아 꼼지락거리는 딜라일라를 보고 있는 에릭의 눈에서 샛노란 웃음이 뚝뚝 흘러 떨어졌다.

씨이……. 놀림당하고 있는 것을 알아도, 짜증이 나지 않아서 문제였다. 역시 에릭은 너무 잘생겼다. 심각하다. 이 정도면 문제가 있다. 잘생겼다뿐인가? 목소리도 좋고, 에릭의 몸에서는 늘 좋은 향기가 난다. 팔뚝이며 허벅지도 단단하고 피부도 매끄럽다. 에릭이 너무 잘생겨서 정말이지 큰일이었다.

자신의 눈뿐만 아니라 귀에도 코에도 콩깍지가 붙어 있다는 생각 같은 건 조금도 하지 못하는 딜라일라는 괜히 성난 고양이처럼 씩씩거리는 소리만 냈다. 그런 딜라일라의 입술 바로 앞에 에릭이 포크로 잘라 낸 팬케이크를 갖다 댔다. 당연하게도, 딜라일라는 받아먹었다. 짭조름한 팬케이크에 뿌려진 단풍나무 시럽이 달콤해서 순식간에 기분이 좋아졌다.

“맛있어요?”

“응.”

목 안으로 소리를 울리며 에릭이 웃었다. 딜라일라는 그새 풀리려는 기분을 다잡고 턱짓으로 샐러드 접시를 가리켰다.

“샐러드도 먹을래.”

“네.”

포크로 꼭꼭 찍어 입가에 대어 주는 샐러드를 앙 받아 물며 딜라일라가 샐쭉한 표정을 지었다. 우물우물 샐러드를 씹는 동안 에릭은 제 몫의 소시지를 썰어 입에 넣었다. 소시지를 씹는 에릭에게 딜라일라가 다시 턱짓을 해 보이고, 에릭은 그녀가 가리킨 것을 귀신같이 눈치채고 딜라일라에게 먹였다. 이상하고, 그러나 사랑스러운 아침 식사는 평화롭게 이어졌다.

테이블 위를 가득 채웠던 접시가 텅텅 비었다. 대부분은 에릭의 입으로 들어갔고, 그래도 딜라일라는 배가 불렀다. 에릭은 상상 이상의 대식가였다.

“진짜 잘 먹는다.”

“머리를 쓰는 데는 힘이 드니까요.”

“흐응…….”

딜라일라가 신기해하거나 말거나, 말끔하게 식사를 마친 에릭이 자리에서 일어나 테이블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딜라일라는 여전히 이불에 꽁꽁 묶여 있었고, 에릭은 그녀가 손쓸 틈도 없이 재빠르게 접시를 트롤리 위에 쌓아 올렸다. 테이블 위를 정리한 후에는 딜라일라를 다시 안아 올렸다.

“안 무거워?”

“누나는…….”

“작다고 하지 마.”

“……가벼워요.”

딜라일라를 침대 위에 내려놓은 에릭이 딜라일라의 몸을 감싼 얇은 이불에 손을 대자, 딜라일라는 뒤늦게 이불 속 상태를 되새겼다. 셔츠며 바지에 가운까지 챙겨 입은 에릭과 달리 그녀는 맨몸이었다.

“잠깐 잠깐 잠깐!”

에릭이 갸우뚱 고개를 기울이며 손을 멈춘 사이, 딜라일라가 이불자락을 꼭 붙잡았다.

“나, 아직 피곤한데…….”

에릭의 고개가 조금 더 모로 기울어졌다. 허공에 멈춰 선 그의 손이 햇살에 하얗게 빛났다.

이, 이게 아닌가……? 어쨌든 몸을 감싼 천을 벗겨 내려고 하기에 무작정 그럴 거라 생각했는데. 정작 올려다본 에릭의 얼굴에는 흥분한 기색이라곤 없었다. 도리어 딜라일라의 얼굴에 빨간 홍조가 피었다.

“……아.”

에릭의 낮은 목소리가 뒤늦게 흘러나왔다. 조용한 가운데 울리는 그의 목소리가 딜라일라의 귓가에서 톡 터져서 가슴이 간지러웠다. 딜라일라는 다시 이불에 머리끝까지 파묻히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

“…….”

딜라일라는 눈을 꾹 감았다. 에릭이 웃기라도 하면 정말로 부끄러워서 견딜 수 없어질 것 같았다. 동그란 머리통 안에서 치열한 공방이 오갔다.

그러니까 우리는 지금 신혼여행 중이고, 에릭은 그저께 나한테 그렇게까지 말했잖아. 그런데 어제 내가 먼저 잠들어서 에릭은 만족 못 했을지도 모르니까. 아니, 아무리 그래도 이런 아침부터 에릭이 그럴 거라고 생각하다니. 정신 차려, 딜라일라 에리카. 아니 딜라일라 브라이어. 사실은 네 머릿속이 난잡한 거 아냐? 사실은 하고 싶었다든가…….

“목욕 물 데워 뒀어요.”

딜라일라가 자아를 성찰하다 못해 비난하기 시작했을 때 즈음에, 다행히 에릭이 그녀의 생각을 다른 방향으로 돌려 주었다. 그러지 않았더라면 딜라일라는 정말로 침대에 얼굴을 파묻어 버렸을지도 몰랐다.

“지금쯤이면 딱 맞게 식었을 것 같은데.”

“……응. 할래, 목욕.”

에릭은 그때서야 웃었다. 여전히 눈을 꼭 감고 있는 딜라일라의 어깨에서 사르르 천이 걷혀 나갔다. 맨몸이 된 딜라일라를 다시 안아 든 그가 저벅저벅 걸음을 옮겼다. 어째 오늘은 제 발로 걷는 일이 없는 날인 것 같다. 딜라일라가 한숨을 폭 내쉬었다.

침실에 딸린 욕실은 훌륭했다. 무엇보다도 널찍한 욕조가 있다는 점에서. 딜라일라가 잠든 사이 채워 둔 모양인지, 김이 폴폴 피어오르는 따끈한 물이 욕조 가득 넘실거렸다. 딜라일라를 욕조 가에 내려놓은 에릭이 가운을 벗어 두곤 셔츠 소매를 걷고 물에 손을 담갔다. 딜라일라는 괜히 그의 손짓을 따라 물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물은 딱 맞게 따스했다.

포옹. 그녀가 욕조에 몸을 담그자 흘러넘친 물이 에릭의 바짓단을 적셨다.

“후우.”

따뜻한 물이 몸을 감싸 안는 느낌이 좋았다. 알게 모르게 차가워져 있었던 발끝에 열이 오르며 찌릿찌릿한 감각이 발등을 타고 올랐다. 딜라일라는 만족스러운 한숨을 내쉬며 욕조 안에서 편안한 자세를 찾아 몸을 움직였다.

그러다 고개를 들어 올린 곳에는 여전히 에릭이 서 있었다.

투명한 물 위로 에릭의 시선이 뚝뚝 떨어졌다. 정확히는 그 물 아래로 비치는 희고 붉은 딜라일라의 몸 위로. 그의 시선은 물에 녹아들지도 않고 수면 아래로 떨어져 딜라일라의 피부 위에 끈적하게 달라붙었다. 딜라일라는 뒤늦게 자신이 조금 전 했던 생각이 착각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누나.”

“으, 응?”

“씻겨 줄까요?”

“어어?”

질문을 해 놓고는, 답도 듣기 전에 에릭이 욕조 가에 기대앉았다. 셔츠 소매를 대충 걷어 올린 팔뚝이 불쑥 물속에 잠겨 들었다. 그가 물을 휘젓자 흔들리는 물결을 따라 생긴 그림자가 딜라일라의 하얀 피부를 간지럽혔다. 손이 닿지도 않았는데 불쑥 체온이 높아졌다.

딜라일라의 무릎을 둥글게 쓰다듬은 손이 위로 미끄러졌다. 허벅지에는 닿지도 않고 움직였는데, 그의 움직임이 물결을 따라 딜라일라에게 와 닿았다. 가슴이 꾹 조여드는 것 같았다. 딜라일라의 팔꿈치를 톡 건드린 손끝이 팔뚝을 타고 올라 둥근 어깨쯤에 다다랐을 때는, 한숨이 터졌다.

“흐으…….”

그러나 에릭은 딜라일라를 간지럽게 자극하는 대신, 그녀의 둥근 어깨를 꾹 눌렀다.

“앗, 으!”

“아파요?”

“으응, 조금.”

어깨를 지나 목으로 미끄러졌던 손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치워 내고 본격적으로 그녀의 등을 문질렀다. 조금 아프다는 말에 착실하게 그의 손에서는 힘이 빠졌다. 내내 긴장해 뭉쳐 있던 근육이 그가 누르는 대로 녹아내렸다. 금방이라도 끈적해질 것 같던 분위기가 다시 나른하게 풀어졌다. 한들한들 흔들리는 물그림자를 따라 딜라일라의 심장이 느긋하게 부풀었다.

역시 아까는 내 착각이었나 봐. 딜라일라는 한가로이 물속에서 손장난을 치다가 팔뚝을 꾹 붙잡아 내리는 에릭의 손길에 얌전히 물속으로 손을 떨어뜨렸다.

“누나는.”

“응.”

“은근히 부끄럼을 안 타는 것 같아요.”

으응? 갸우뚱 기울어지는 고개를 바로 세운 그가 딜라일라의 척추를 따라 피부를 훑어 내렸다.

“가끔은 엄청 이상한 데서 부끄러워하면서.”

“우응…….”

“이런 건 아무 생각 없나 봐.”

그의 목소리가 딜라일라의 귓가에 스르르 미끄러졌다. 딜라일라는 눈을 깜빡이다가 다시 허리와 어깨를 꾹꾹 문지르는 손길에 흐으으, 이상한 소리를 내며 축 늘어졌다. 싹 달아났던 졸음이 다시 가만가만 그녀의 생각을 흐릿하게 녹여 냈다. 에릭이 쇄골 아래 옴폭 들어간 곳을 따라 엄지를 미끄러뜨렸다.

말랑말랑 녹아 버린 딜라일라를 에릭은 본격적으로 문질러 씻기기 시작했다. 목덜미부터 어깨, 등, 팔뚝 위를 오고 가는 그의 손길은 다정한 동시에 담백해서, 딜라일라는 아무 생각 없이 그의 손길을 받아들였다. 반쯤 졸기 시작한 탓도 있었다. 역시 결혼식에 이어 만 하루 동안 마차를 타고, 그다음에는 에릭에게 밤늦게까지 시달렸던 여파가 컸다.

“흣, 응.”

이따금 그의 손이 딜라일라의 가슴 위나 옆구리를 쓰다듬기도 했지만, 반응할 틈도 없이 금세 떨어져 나가곤 했다. 딜라일라는 깜빡깜빡 밀려오는 졸음과 종종 그 사이로 튀어 오르는 감각 사이에서 유영하는 의식을 간신히 붙들었다. 정말로 이대로 잠들어 버리면 어떡하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몰려드는 졸음에 자꾸만 눈이 감겼다.

그래서 딜라일라는 에릭의 손이 그녀의 말랑한 배 위를 지나 더 깊은 곳으로 잠겨 들 때도 그러려니 하고 말았다.

허벅지를 조물조물 주무르는 손에 발끝까지 피가 돌았다. 어느새 눈을 감아 버린 그녀의 허벅지 위를 오가던 손끝이 천천히 안쪽으로 기어 들어왔다.

“으응, 아…….”

다리 사이, 볼록 솟은 둔덕 위를 미끄러지는 손가락이 갈라진 틈새로 파고들었다. 몸을 닦아 낸 것만으로는 역부족이었던 것인지, 혹은 그사이 젖어 들기라도 한 것인지. 미끈거리는 점액이 문지르는 그의 손끝을 따라 욕조에 가득한 물에 풀려 나갔다. 살금살금 뻗어 온 다른 손이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

“흐, 앗!”

가슴을 쥐어 잡는 손에 딜라일라의 무겁던 눈꺼풀이 휙 들려 올라갔다. 하지만 그도 잠시, 다리 사이에서 밀려 올라오는 감각에 딜라일라는 다시 질끈 눈을 감아야 했다. 끈적하고 미끄러운 액체에 휘감긴 손끝이 예민한 부위를 간질였다. 부드럽게 가슴을 주무르는 손 안에 돌기가 스치며 찌르르 전류가 튀었다.

“잠, 에릭. 으……?”

딜라일라가 허리를 뒤틀자 물이 흘러넘쳤다. 이미 에릭의 셔츠는 축축하게 젖어 달라붙어 있었다. 등 뒤로 와 닿는 에릭의 셔츠 자락이 물에 잠겨 부드러워진 피부를 쓸어 냈다. 머리카락이 딜라일라의 가슴 위로도, 에릭의 손 위로도 어지럽게 퍼지고, 달라붙었다. 까슬거리고, 부드럽고. 따뜻하고, 선득하고. 뒤엉킨 감각이 딜라일라의 머릿속을 어지럽게 헤쳤다.

“앗, 흐, 아……!”

나른하고 맥없는 오르가슴을 맞은 딜라일라의 팔다리가 축 늘어졌다. 욕조 가에 앉아 그녀에게 상체를 잔뜩 기울이고 있던 에릭이 웃는 소리가 욕실 가득한 습기와 뒤섞여 울렸다. 그가 아예 팔을 쑥 집어넣어 딜라일라를 안아 올리더니, 걸터앉은 자신의 몸 위에 앉혔다. 에릭의 다리 위로 걸쳐진 딜라일라의 하얀 허벅지가 벌어졌다.

“에, 으응. 흐윽!”

곧장 젖은 손가락이 딜라일라의 몸속을 침범해 들어왔다. 한번 오르가슴을 맞은 몸속으로 찔러 들어오는 감각이 너무 선명했다. 그의 손 마디마디가 다 느껴지는 것 같았다. 뒤에서부터 단단히 허리를 감아 오는 팔이 아니었더라면 딜라일라는 그 선명한 감각에 허리를 뒤틀다 떨어져 버렸을지도 모른다.

질컥질컥 안쪽을 긁어내는 손마디를 따라 다리 사이에서 끈적한 액체가 흘러 나왔다. 묘하게 비릿한 냄새가 확 끼쳤다.

어젯밤 그가 딜라일라의 몸속에 쏟아 냈던 정액이, 다시 그녀의 다리 사이로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끈적거리는 체액이 에릭의 바지를 더럽히는데도 그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딜라일라를 제 몸 위에 앉힌 순간부터 이미 그의 옷은 어디 한 군데 빠짐없이 다 젖어 있었다.

“흣, 아윽. 아!”

“밤새도록 몸속에 담고 있었네요, 제 거.”

“에릭. 흐으……!”

“닦아 줄게요.”

욕조에 가득하던 물기가 아닌, 끈적거리는 체액이 그의 손과 딜라일라의 아래를 미끄럽게 적셨다. 그가 안쪽으로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가 다시 빼낼 때마다 쩍쩍 달라붙었다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끈적거리는 것이 정액 때문인지, 딜라일라의 체액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아마 둘 다였을 것이다.

안쪽을 긁어내는 손가락이 하나에서 둘로, 둘에서 셋으로 늘어났다. 그사이 그의 손가락을 적신 체액은 탁한 흰빛에서 점점 더 말갛게 변해 갔다. 그리고 마침내 투명해졌다.

“누나, 안쪽이 부드러워…….”

“흑, 아응……!”

귓가에 속삭이는 에릭의 목소리가 끈적거렸다. 끈적거리지 않는 곳이 없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물에 잠겨 졸고 있었는데.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안쪽을 눌러 벌리고 긁어내는 손길을 따라 생각이 다 긁혀 나가는 것 같았다. 하얗게 번지는 쾌락이 꾹꾹 뭉쳐 들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허전하게 비워졌다.

“으, 에릭?”

그가 다급하게 제 바지춤을 풀어 헤쳤다. 다 젖어 버린 천이 살갗에 자꾸만 달라붙어서, 그는 거의 천을 잡아 뜯어내다시피 했다. 끌러 내린 천 자락 너머로 벌겋게 피가 몰린 성기가 튀어나왔다. 딜라일라가 그것을 눈에 담을 틈도 없이, 그녀의 엉덩이에 단단한 것이 비벼졌다. 갈라진 틈새를 찾아 파고드는 움직임은 그답지 않게 거칠었다.

“흐윽, 아, 윽……!”

“아, 누나…… 진짜.”

“에릭, 으응!”

“진짜 좋아요…….”

딜라일라가 그의 배 위에 엉덩이를 맞붙이고서야 삽입이 멈췄다. 안쪽을 빠듯하게 채우는 감각은 몇 번을 겪어도 아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묘한 안정감이 딜라일라의 가슴속에 들어찼다. 어젯밤에도 겪었던 것을 다시 느끼고 있기 때문일까? 감각을 따라 마음이 찼다. 그녀의 목덜미 뒤에서 뿜어지는 에릭의 습한 숨결이 반가웠다.

“아직도, 누나 속이…… 다 풀려 있어서…….”

“읏, 흐윽.”

에릭이 뚝뚝 끊어지는 말을 토해 낼 때마다 그의 배가, 가슴이 들썩였다. 그녀의 몸속을 헤집고 밀려들어 온 것이 그때마다 움찔거렸다. 어쩐지 멍한 에릭의 목소리가 허공에 붕 떴다.

“누나가 진짜, 내 부인 같아.”

맥락 모를 말이 끊어졌다. 에릭은 말 대신 제 배 위에 올라앉은 딜라일라의 몸을 짓쳐 올렸다.

“아, 아……!”

“후, 윽…….”

콱, 안쪽으로 박혀 드는 감각이 거셌다. 딜라일라의 생각은 진작 다 날아가 버렸다. 그의 위에 올라앉은 몸이 위태롭게 흔들렸지만, 허리를 꽉 감아 붙든 팔은 그녀를 놓칠 기색이 없었다. 어깨 위로 감겨 온 손이 그녀의 가슴마저 붙들었다. 뒤에서 뻗어 온 팔들에 온몸이 결박된 것 같았다.

엉덩이 아래에서 움직이는 그의 몸이 단단했다. 익숙지 않은 자세에 그녀의 허리가 자꾸만 앞으로 굽어졌다. 하지만 붙잡아 당기는 손이 그것을 저지했다. 그녀는 자꾸만 뒤로, 뒤로 넘어갔다. 뒤통수에 젖은 셔츠가 문질러졌다. 움직일 때마다 꿈틀거리는 근육이 그녀의 등 뒤에 맞닿았다.

거세게 그녀의 엉덩이를 치받아 올리던 움직임은, 얼마 지나지 않아 멈췄다. 꾹꾹 안쪽을 밀어내던 성기가 움찔움찔 맥동했다. 그때마다 몸속에서 뜨끈한 것이 퍼져 나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하아.”

그녀를 꽉 안아 오는 팔에 숨이 다 막혔다. 에릭이 그녀의 머리꼭지에 자꾸만 입술을 문질러 대서, 딜라일라는 그가 어리광을 피우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겨우 그의 몸이 만든 결박이 조금 풀어졌을 때 딜라일라는 후우 길게 숨을 내쉬었다. 다시 숨을 들이마시자, 부푸는 가슴 위로 슬금슬금 기어가던 손가락이 뚝 떨어져 내렸다.

“에릭. 아으응…….”

그가 딜라일라의 허리를 양손으로 붙들어 올리자, 아래를 가득 채웠던 것이 빠져나가는 감각에 잠깐 눈앞이 하얗게 멀어졌다. 딜라일라의 다리 사이에서 하얀 정액이 뚝 떨어졌다.

후들거리는 다리로 욕실 바닥을 짚고 서서 돌아본 에릭은, 어쩐지 낭패한 얼굴이었다. 이렇게 갑자기 몸을 맞출 생각은 없었던 걸까?

그렇게 생각하니 에릭이 또 조금 귀여웠다. 그녀의 등 뒤에서 속삭이던 맥락 없이 멍한 목소리가 떠올라서 딜라일라는 낭패한 얼굴의 에릭을 앞에 두고 웃어 버릴 뻔했다. 사랑하는 남자가 자신을 향한 욕망을 못 견디고 토해 내는 일이, 귀엽게 느껴질 줄은 몰랐다.

딜라일라는 조금 웃음을 참으며 비틀대다가, 일부러 에릭의 무릎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번에는 에릭을 마주 바라보고서.

“닦아 준다더니.”

“…….”

“목욕물도 다 식었는데.”

그의 목에 팔을 감고 바짝 당겨 안자 엉망으로 젖은 그의 가슴팍이 눈앞에 불쑥 다가왔다. 딜라일라는 그 위에 살그머니 머리를 기댔다. 쿵쿵 날뛰는 심장 소리가 귓가에 와 닿았다. 딜라일라는 그 위에다 대고 아주 조그맣게 속삭였다.

“그렇게 좋았어?”

“……네.”

“그런데 에릭.”

이런 말을 속삭이고 만 것은, 아마도 에릭과 비슷한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그가 사랑스러워서. 좋아서. 떨어지는 것이 아쉬워서. 귀여운 그의 얼굴을 보자 견딜 수 없이 욕망이 불쑥 치밀어서.

“나는 아직인데.”

“…….”

“혼자 좋고 끝낼 거야?”

에릭의 손이 그녀의 엉덩이를 꽉 움켜쥐었다. 딜라일라는 그대로 일어서는 에릭에게서 떨어지지 않으려 목에 감은 팔에 힘을 줘 매달렸다. 받쳐 안은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가 있는 것이 느껴져셔 딜라일라는 결국 소리 내 웃고 말았다. 혹은 그녀의 아래 어디쯤에 또 딱딱하게 부푼 것이 비벼지고 있어서. 앙다문 입술 끝이 바르르 떨리는 것을 보고 말아서. 아무튼, 그게 다 사랑스러워서.

그녀를 달랑 들어 올린 채로 저벅저벅 욕실을 걸어 나간 에릭은 곧장 침대 위에 그녀를 내려놓았다. 젖은 옷을 뜯어내며 그녀의 위로 덮쳐드는 무게를 딜라일라는 반갑게 받아 안았다.

그리고 딜라일라는 괜히 그를 자극한 결과로, 하루 종일 침실 밖으로는 한 발짝도 나가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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