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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logue (11/14)

Epilogue

셰 상브르 아카데미는 그 화려한 명성에 걸맞게 자랑스러운 인재들을 배출했지만, 어느 아카데미나 그렇듯이 개중에서도 특출 난 이들이 여럿 있었다. 이름 높은 건축가와 마법 공학자, 유명한 예술가, 대단한 정치가와 행정관들이 이름을 알리며 셰 상브르의 이름을 드높였다.

그러한 대단한 졸업생들 가운데서도 유달리 이름 높은 이들이 두 명 있었다. 한 명은 딜라일라 에리카, 다른 한 명은 에릭 브라이어였다.

딜라일라 에리카는 셰 상브르 아카데미의 세력가들이 주로 입학하는 행정 교양학부를 졸업했다. 그녀는 입학과 동시에 거머쥐었던 학년 수석 타이틀을 졸업 학년이 될 때까지 단 한 번도 놓치지 않은 천재이자, 그 사랑스러운 외모와 쾌활한 성격으로 남녀를 불문하고 인기와 동경을 얻었던 소녀였다. 교수와 학생을 불문하고 그녀를 좋아하지 않는 이가 드물었다고, 그녀와 같은 시기에 셰 상브르에 재학했던 이들은 말한다.

당시 그녀의 인기는 교내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내무부 최고 위원으로 권력을 잡은 로드릭 에리카와 처녀 적부터 그 아름다운 외모와 우아한 태도로 만인의 사랑을 받았던 마가렛 에리카의 딸로 태어난 그녀는 당시 내무부의 권력을 이어 줄 가교로서 주목받았다. 그런 딜라일라 에리카를 부인으로 맞아들이고 싶어 하는 이들은 왕국 내에 넘쳐났다. 그녀는 명실상부 왕국 내 고위층의 사교계에서 최고의 인기인이었다.

그러나 딜라일라 에리카는 셰 상브르 아카데미를 졸업한 후 기대와는 다른 행보를 보였다. 그녀의 어머니처럼 사교계를 휘어잡고 권력가의 남자와 결혼해 새로운 권력가의 중심을 이끌어 나가리라고 기대했던 사람들을 비웃기라도 하는 것처럼, 딜라일라 에리카는 셰 상브르를 졸업한 후 일 년이 넘도록 두문불출하며 사교계에는 얼굴을 내밀지 않았다. 당시 차기 권력의 향방을 가리는 일로 주목받던 그녀의 결혼 역시 없었다.

그러나 가장 놀라운 일은 그 후에 일어났다. 딜라일라 에리카는 여성최초로 내무관 시험에 응시해 합격했다. 그녀의 영민한 머리와 성실한 노력으로 얻은 결과였지만, 당시에는 그녀의 합격에 의견이 분분히 갈렸다. 여성이 어떻게 내무부의 일에 참여할 수 있겠냐는 불신과, 딜라일라 에리카가 아버지인 로드릭 에리카의 비호로 불공정한 합격을 얻어 낸 것이 아니냐는 비난이 쏟아졌다.

딜라일라 에리카의 행보를 두고 당시에 분분한 의견이 오고 갔다. 여성의 본분을 잊고 감히 남성의 자리를 위협하는 그녀를 비난하는 의견과, 이제까지 뛰어난 능력을 가졌음에도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그 능력을 썩히게 만들었던 사회적 분위기를 반성해야 한다는 의견이 때로 격렬하고, 때로 조용히 충돌하곤 했다.

사랑스러운 외모와 인맥, 권력, 영민한 머리까지. 많은 것을 타고난 딜라일라 에리카의 남다른 행보는 여러모로 주목 받았고, 그녀는 상당히 많은 비판과 비난을 감수해야만 했다.

“……그랬어요?”

“어…… 나중에 알았어. 그땐 그냥 눈앞에 닥친 일이 바빠서 몰랐는데.”

“오딜이 뭐라고 안 했어요?”

“원래 남다르게 멋진 여자는 잡다한 개소리를 듣는 법이라던데.”

그러나 딜라일라 에리카는 수많은 불신과 비난, 그리고 엄연히 내무관 시험을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내무관이 아닌 내무관 보좌로 배정한 내무부의 이해 못 할 인사마저 받아들였다. 다행히 그 후로도 꾸준한 노력으로 몇몇 실적을 거둔 그녀는 당당히 정식 내무관이 되었다.

“이거, 왜 내 이야기만 나와? 에릭 네 이야기는 없어?”

“여기부터는 제 이야기인데요.”

에릭 브라이어는 조금 다른 축에 속했다.

그는 현재까지 뛰어난 마법 공학자들을 배출하기로 유명한 셰 상브르 아카데미의 마법 공학부 출신이다. 그 역시 입학과 동시에 학년 수석을 차지하고 졸업까지 수석을 놓치지 않은 수재였다. 그러나 그는 다소 무뚝뚝한 성격과 지나치게 타인을 앞서가는 뛰어난 재능 탓에 시기를 받으며 다소 외로운 아카데미 시절을 영위했다고 한다.

“외로웠어?”

“누나가 없었으니까, 그랬을지도요.”

“……요망한 에릭 브라이어.”

“그게 뭐예요?”

“그런 게 있어.”

그러나 그는 고작 3학년이 되었을 때에 마력을 획기적으로 아낄 수 있는 마법 등 회로에 대한 특허를 출원해 공로를 인정받았다. 그때까지 실질적으로 사용이 불가능하다고 알려졌던 마법 등이 지금처럼 상용화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개발해 낸 마법 등 회로 덕분이다. 이를 통해 다소 혁신적인 마법 공학적 재능을 보여 준 그는 그때부터 알음알음 주목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에릭 브라이어는 당대 가장 뛰어나다고 알려진 마법 공학자인 동시에 세간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괴짜였던 아버지의 아들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단승 작위를 받기는 했지만 그 외에는 달리 가진 것이 없었다. 브라이어의 핏줄에는 오래된 권력도 드높은 지위도, 하다못해 많은 재산조차 따르지 않았다. 그리하여 에릭 브라이어는 그 천재성에 비하면 상당히 부족한 지원을 받으며 성장했다.

그러나 그는 아카데미를 졸업하기도 전에 고형 마법 약의 개발과 그 상용화, 비용 절감에 대한 논문을 연이어 발표하였으며, 그 외에도 일상용 마법 물품을 여럿 개발하였다.

무엇보다도 그가 개발한 것 중 가장 큰 업적은 마법 동력 기관이다. 셰 상브르 아카데미의 졸업 학년이 된 후로 연구 개발을 멈췄던 에릭 브라이어는 아카데미를 졸업한 직후 돌연 마법 동력 기관에 대한 연구를 발표해 사회에 일대 파란을 일으켰다. 혹자는 이미 일전에 한 번 실패한 적 있었던 증기 기관처럼 마법 동력 기관의 실패를 점쳤다.

“이제 그만 읽어요.”

“왜?”

“다 알면서.”

그리고 초기 마법 동력 기관은 그 예상대로 실패했다. 그러나 실패한 연구일지언정 뛰어난 가능성을 보여 주었던 그의 연구는 다른 이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마법 공학계에는 동력 기관에 대한 연구가 유행처럼 번졌고, 그 선두에 선 에릭 브라이어는 여러 유명 인사들로부터 지원을 제안 받았다. 그러나 그는 금전적 지원을 모두 거절하고…….

“진짜, 그만.”

“어, 왜!”

에릭이 딜라일라의 손에서 휙 신문을 빼앗아 들었다. 딜라일라가 다시 그의 손에 들린 종이를 채 오기도 전에 그가 침대에서 불쑥 일어났다. 성큼성큼 걸어 침실을 빠져나가는 그의 뒤를 쫓아 딜라일라가 종종걸음을 쳤다. 앞서 걸어가는 에릭의 귓바퀴가 발갰다.

테라스에 마련된 티 테이블 위에 신문을 구겨 던져 놓는 에릭의 뒤에 딜라일라가 달라붙었다. 에릭이 빙글 뒤로 돌아 그녀의 몸을 제 품 안으로 숨기듯이 구겨 넣었다.

“누가 보면 어쩌려고요.”

“어차피 내일 결혼하는데, 뭐.”

“그래도 안 돼요.”

“그럼 들어오라고 하지 말았어야지.”

배시시 웃는 딜라일라의 말간 얼굴 위로 에릭의 한숨이 쏟아졌다. 날이 갈수록 그는 한숨이 늘었다. 딜라일라의 장난기가 늘었다는 것과 같은 말이었다.

하지만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결혼식 전날 그의 방으로 찾아올 줄은…….

“노크하자마자 열어 줬으면서.”

“…….”

“들어가도 되냐고 묻기도 전에 들어오라고 했으면서.”

사실 조금 예상했다. 예상, 혹은 기대. 무엇이든. 딜라일라와 같은 저택에서 밤을 보내게 되면서 어떻게 그런 기대를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딜라일라 에리카의 화려한 전적을 누구보다 가장 잘 알고 있는 에릭이 예상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녀는 아카데미 시절부터 그의 방에 숨어들던 사람이니까.

그리고 내일은 그 딜라일라 에리카와 에릭 브라이어의 결혼식이 있는 날이었다. 결혼식은 하얀 모래사장 위로 파도가 부서지는 아름다운 모래사장을 뒤로하고 거행될 예정이었다.

딜라일라의 고집이었고, 에릭은 따랐다. 남부 해안가는 겨울에 온난할 뿐만 아니라 여름에도 그럭저럭 덥지 않은 편이었으므로 식을 올리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때문에 그들은 결혼식 전부터 에리카 집안의 남부 별장에 내려와 있었다. 그들의 결혼식에 참석하려는 이들로 조그만 해안가 마을이 북적였다. 상점가는 에릭과 딜라일라의 결혼식으로 겨울도 아닌데 때 아닌 호황을 맞았다.

그동안은 정신이 없어 같은 저택에서 지내면서도 얼굴 한번을 제대로 보질 못했다. 눈이 돌아갈 것처럼 바쁜 결혼식 준비도 모두 끝이 나고, 마침내 식을 올리기 전날이 되어서야 에릭과 딜라일라는 한숨 돌릴 수 있게 됐다.

그런 밤에, 딜라일라가 에릭을 찾아오지 않을 리가 없지. 그래도 어디서 났는지 모를 신문 조각을 굳이 챙겨서 왔을 줄은 몰랐다.

“이런 걸 들고 왔을 줄 알았으면, 안 열어 줬을 텐데.”

“거짓말.”

배시시 웃는 딜라일라의 머리 위로 다시 한번 한숨이 쏟아졌다. 물론 그렇지만. 거짓말이긴 하지만.

“저게 재미있어요?”

“우리 결혼이 신문에 났잖아. 신기하지 않아? 우리 얘기가 무슨 소설처럼…….”

“소설은 오딜이 쓰는 게 소설이고.”

“어차피 다른 사람들이 떠드는 건 눈곱만큼도 신경 안 쓰면서.”

그의 품에 푹 파묻힌 딜라일라가 종알대는 것을 듣던 에릭이 딜라일라를 번쩍 안아 올렸다. 물론 다른 이들이 에릭에 대해서 떠들어 대는 소리를 이제 와 신경 쓰지는 않지만, 그래도 이런 것을 누가 보게 되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에릭의 신상에는 분명 큰일이 날 것이다. 그를 노려보는 로드릭 에리카의 눈빛이 얼마나 매서운지, 딜라일라는 모른다.

“진짜…… 누나가 이럴 거라고 누가 생각하겠어요.”

“넌 했잖아.”

“겪었으니까요.”

그녀를 안아 든 채로 다시 침실로 걸어가는 동안에도 딜라일라는 즐겁기만 한 얼굴이었다. 오랜만에 하는 일탈이 퍽 재미있는 모양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녀의 부모님이 바로 아래층에서 잠들지도 못하고 딸의 결혼을 생각하고 있을 텐데.

딜라일라를 침대 위에 내려놓자 푹신한 침구 위로 매끄러운 분홍빛 머리카락이 구불구불 늘어졌다. 에릭은 그녀의 뺨에 달라붙은 머리칼을 떼어 넘겨주며 세 번째로 한숨을 쉬었다.

“그렇다고 이런 짓을 해도 되는 건 아닌데.”

“바보 에릭, 사실은 좋으면서.”

“아, 진짜.”

딜라일라가 에릭의 목에 팔을 감아 당겼다. 불쑥 쏟아지는 그의 입술을 장난스레 피해 낸 그녀가 에릭의 턱에 쪽 소리 내어 입을 맞췄다.

“보고 싶어서.”

턱 끝에 이어 보란 듯 구겨져 있던 미간을 꾹꾹 눌러 대는 입술에 결국 에릭이 졌다. 그녀의 손이 희미하게 웃어 버린 에릭의 부드러운 캐러멜 빛 머리칼에 손을 넣어 흐트러뜨렸다. 그의 뒷목으로 타고 내려간 손끝이 불거진 척추 뼈를 슬슬 문지르다가 앞으로 떨어져 그의 목울대를 쓰다듬었다. 며칠간 그가 잠들었던 침대에서는 에릭의 살 향이 은은하게 배어 나왔다.

바로 눈앞에 있는 에릭의 말간 피부에 후, 숨결을 뱉어 낸 딜라일라가 그의 쇄골 즈음에 입술을 묻고 속닥거렸다.

“그래서 왔는데.”

“……내일, 볼 거잖아요.”

“그래도.”

그가 입고 있던 얇은 셔츠의 목깃을 잡아당기자, 에릭은 얼마든지 버틸 수 있으면서도 당기는 대로 그녀의 위로 무너졌다. 딜라일라가 그의 귓바퀴를 살짝 깨물자 에릭의 몸이 파르르 떨리는 것이 그대로 전해져 왔다. 딜라일라가 샐쭉 웃었다.

이렇게 깊은 밤에 남몰래 그의 방을 찾아온 것이 몇 년 만인지 모르겠다. 그런데도 어색하지 않은 것은 분명, 에릭이 그때처럼 그녀에게 문을 열어 주었기 때문이다. 노크 소리만 듣고도 딜라일라인 줄을 알고 문을 열어 줘서. 그리고 들어오라고 말해 줘서.

내내 바쁘게 준비를 할 때는 몰랐지만, 결혼식 전날이 닥쳐오자 온갖 생각이 많아졌던 딜라일라였다. 그래서 혹시나 하고 살금살금 어두운 복도를 걸어 남몰래 에릭을 찾아왔다.

노크를 하고 문이 열리는 순간, 환한 방 안의 불빛이 그녀가 선 어두운 복도 위로 네모지게 쏟아지는 순간. 그리고 에릭이 그녀에게 ‘들어와요.’라고 말하는 순간에, 딜라일라의 가슴속을 채우고 있던 상념은 모두 스르르 녹아 사라졌다.

아주 예전에도 너는 그렇게 익숙하게 나를 네 방 안으로 맞아들였지.

딜라일라는 조금 전 읽고 있던 신문 위에 줄줄이 나열되어 있던 그들의 지난날이 머릿속에서 되감기는 것을 느꼈다. 그때도 에릭은 딜라일라에게 그렇게 말했다. 들어와요. 꼭 그렇게만. 그렇게 말하면, 딜라일라는 홀린 듯이 그의 방 안으로 발을 들였다. 어두운 복도에서 환하게 밝은 그의 방 안으로. 어둠에서 빛으로.

언젠가 너는 내게 빛 아래에서만 살아온 사람 같아서 그늘 아래 살아온 저는 차마 손을 뻗지 못했다고 고백했지만, 그래도 딜라일라에게는 그가 처음부터 빛 같았다. 저녁 하늘을 불사르는 태양처럼, 깜빡일 때마다 눈꺼풀 아래로 잠겨 들었다가 다시 환하게 드러나는 금빛이었다.

그리고 지금도.

그녀를 껴안아 오는 에릭의 팔이, 자그만 몸을 옭아매는 무게가 반가웠다. 딜라일라는 에릭의 눈을 빤히 올려다보다가 마침내 그와 입술을 맞대었다. 하아, 달콤한 숨을 내뱉는 입술 틈을 벌리고 혀끝을 밀어 넣자 움찔 몸을 떤 에릭이 그녀의 키스를 조심스레 받아 삼켰다.

연약한 점막이 맞닿고 문질러지는 감촉에 몸이 달떴다. 살금살금 입 안에서 온도를 올리기 시작한 열감이 익숙하게 허리를 타고 내달렸다. 꼴깍, 목으로 넘어가는 타액마저 달았다.

“으응, 에릭.”

입술이 떨어져 나가는 것을 붙들고 애타는 목소리를 냈다. 그새 붉어진 뺨에 쪽, 맞닿은 감촉에 뺨이 당겨졌다. 에릭의 손이 그녀의 어깨를 타고 아래로 내려가는 것이 너무 느려서 짜증이 날 것 같았다.

“빨리…….”

하지만 딜라일라가 재촉의 말을 뱉어 내자마자, 에릭의 손이 뚝 멈췄다. 딜라일라를 잡아먹을 듯 번득이던 금빛 눈동자가 그의 눈꺼풀 아래로 다시 깊이 잠겨 들었다. 꾹, 눈을 내리감은 그가 후 숨을 뱉었다. 그 숨결이 피부 위를 훑어 내는 것만으로도 예민해진 피부가 간지러워서 딜라일라가 허리를 뒤틀었다.

“안 돼요.”

하지만 에릭은 불시에 그녀의 위에서 도망쳤다. 그녀의 위가 아닌 옆쪽으로 몸을 눕힌 에릭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딜라일라가 불만을 가득 담아 뺨을 부풀렸다.

“또?”

그 여름, 아카데미에서 헤어진 후로 한 번도 하지 못했다. 단 한 번도!

딜라일라는 나름대로 열심히 에릭을 유혹했지만, 에릭은 그녀의 유혹에 넘어올 것처럼 굴다가도 도중에 멈춰 버리곤 했다. 그리고 꼭 안 돼요, 하고 말했다. 왜냐고 물어봐도 다른 대답도 없이 입을 꾹 다물고 안 된다는 말만 했다.

대체 왜 안 돼? 한 번도 안 해 본 것도 아니면서. 혼전 순결을 따지기에는 벌써 다 해 놓고, 왜 이제는 안 돼? 종알종알 따지고 드는 딜라일라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달래는 에릭은 끝까지 안 된다고만 했고, 딜라일라는 불만으로 퉁퉁 부은 뺨을 하고 있다가 에릭의 다정한 키스에 다시 스르르 풀어지는 것이다.

그런 반복이었다. 딜라일라를 도닥이는 에릭이 그녀에게 부푼 하반신을 들키지 않기 위해 허리를 멀찍이 떼어 놓거나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으려 버티는 귀여운 짓을 하지만 않았더라면, 딜라일라도 참지 않았을 것이다. 적어도 자신만 하고 싶어 하는 건 아니라는 걸 알았으니까. 사실은 에릭이 그녀를 걱정해서 그런다는 걸 딜라일라도 아니까.

“내일이 결혼식이잖아요.”

“그게 왜.”

그래도 딜라일라의 목소리가 뚜하게 가라앉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어쨌든 이렇게 애써 유혹하는데 연인이 넘어오지 않는 게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지금 하면, 누나 내일 못 일어날 텐데.”

“…….”

“결혼식에서 신부가 못 걸으면 어떻게 하려고.”

오리처럼 불쑥 내민 입술에 담백한 키스가 쪽 맞닿았다가 순식간에 떨어져 나갔다. 딜라일라는 에릭의 말이 곧장 해석되지 않아서, 머릿속으로 그 뜻을 곱씹느라고 그를 붙잡지도 못했다.

“뭐, 뭐라고……?”

“그러니까 그렇게 아쉬운 표정 하지 마요.”

구겨진 시트 위에 흩어진 딜라일라의 머리칼을 슥슥 빗겨 주는 에릭의 손길은 여전히 커다랗고 마디진 손에 어울리지 않게 섬세했다. 그리고 왠지 조금, 은근하게 느껴졌다. 그가 만지고 있는 것은 감각이라곤 없는 머리카락일 뿐인데. 머리칼이 사락사락 스치는 소리가 어쩐지 끈적하고, 부드럽게 당겨지는 머리꼭지가 성감대라도 된 것처럼 두근거렸다.

자연스레 그 손이 한때 어떻게 그녀를 만졌는지, 그리고 그가 어떻게 그녀와 몸을 겹쳤는지, 그런 것들이 딜라일라의 머릿속에서 되감겼다. 그녀의 피부를 누르고, 쓰다듬고, 빨아 당기던 손과 입술. 그리고 벅차게 쳐올리는 몸. 딜라일라의 몸속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꽉 채워 오던…….

“으, 으응.”

정말로 그랬다간 내일 못 일어날지도 모르겠다. 딜라일라는 이번만큼은 말끔하게 포기하기로 했다. 다른 때면 몰라도, 오늘은 안 되겠다. 응, 안 되겠어. 에릭 말이 맞아.

그녀의 곁에 모로 누워 있던 에릭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거리는 딜라일라를 보고 낮게 웃었다.

그녀는 모른다. 그녀와 손끝이 닿을 때마다 불꽃이 튀는 것처럼 온 신경이 다 타 버리는 것 같다는 것도, 얕은 키스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발밑이 무너지는 것처럼 눈앞이 아득하게 멀어진다는 것도.

지금 이 순간에도 그녀를 안고 싶어서 바르르 떨리는 손끝을 애써 말아 쥐고 참아 내고 있다는 것도.

“그러니까 얼른 가서 자요.”

“어, 어……?”

“푹 자야 버틸 수 있지.”

뭘, 뭘 버텨……? 결혼식 얘기지? 응……? 정작 먼저 유혹해 놓고는 에릭이 던지는 말마다 눈동자를 떨며 되묻는 딜라일라를 에릭은 웃으며 방 밖으로 내몰았다. 딜라일라로부터 도망치는 것은 이제 그만뒀지만, 지금은 좀 도망쳐야 할 때다. 에릭이 아니라 딜라일라가.

딜라일라를 어두운 복도에 내어 놓고 그녀의 눈앞에서 탁, 문을 닫아 버린 에릭이 아직까지도 떨리는 손을 바짓단에 툭툭 털어 냈다. 잠시간 조용하던 방문 너머에서 뒤늦게 사뿐사뿐 가벼운 발소리가 멀어지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그가 제 침대 위에 풀썩 몸을 눕혔다.

딜라일라가 굳이 가져온 구겨진 신문 조각에 새겨져 있던 문자들이 점점이 떠올랐다. 이제는 오래된 기억이었다. 여전히 잊을 수 없는 그들의 가을과 겨울, 봄과 여름의 절반. 다른 것들은 모두 괜찮아도, 사랑이 괜찮지 않았던 나날들.

그로부터 몇 번의 계절을 지나 에릭과 딜라일라는 다시 여름의 초입에 섰다. 여름의 한가운데서 헤어졌던 탓에 못다 한 여름이 다시 시작되는 날에. 그들은 영원은 약속하지 못하더라도 평생을 약속하기 위해서 햇살 아래 나란히 선다. 그림자라곤 질 틈도 없이 하얀 모래톱 위에, 그녀에게 꼭 어울리는 아름답고 반짝이는 것들만을 잔뜩 모아 놓고서.

그녀의 곁에 나란히 서서 햇살을 맞으며 함께 웃는 날들이 그에게 얼마나 눈이 부신지, 딜라일라는 알까?

딜라일라를 다시 만난 후로 가끔 에릭은 좀처럼 잠들지 못하고 밤을 하얗게 새우곤 했다. 혹시나 잠들었다가 깨어나면, 그에게 주어진 눈부신 날들이 전부 꿈이 되어 흩어져 버릴까 봐. 괜한 불안이 턱 끝까지 찰랑찰랑 차오를 때면 숨이 쉬어지지 않아서 혼자 눈물로 토해 낸 밤도 있었다.

하지만 그도 오늘이 마지막이었다. 내일부터는 딜라일라와 함께 잠들 수 있을 테니까…….

에릭이 흡, 숨을 들이쉬었다.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바보처럼 혼자 우는 대신 눈물을 꾹 눌러 삼키고 잠을 청하는 쪽을 선택했다. 딜라일라에게 푹 자라고 말해 놓고는 제가 퀭한 얼굴로 식장에 서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눈을 감자 반짝이는 잔상들이 그의 눈꺼풀 안쪽에 내려앉은 까만 밤 가운데를 떠돌았다. 꼭 은하수처럼. 별처럼 반짝이는 수많은 내일이 그의 마음속으로 쏟아져서 푸른 그림자를 몰아냈다. 마지막 남은 그림자마저도 내일이면, 내일이면 그녀의 손에 전부 걷혀 나갈 테니까.

그러니까, 이제는 정말 괜찮았다. 사랑도.

[괜찮아, 사랑만 빼고] 본편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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