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그리워하거나 좋아하는 마음
“멍청한 새끼.”
오딜은 에릭을 보자마자 다짜고짜 욕부터 했다.
“모자란 새끼.”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욕을 해 댄 오딜이 에릭의 맞은편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에릭은 테이블 가득 펼쳐 놓은 종이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에릭의 눈빛에 온도가 있었더라면 저 종이 무더기가 불타 버릴지도 모르겠다. 오딜은 그런 생각을 하며 그중 하나를 휙 집어 들었다.
“너, 내 본업이 뭐였는지 까먹은 건 아니지?”
“작가.”
“그래, 작가님은 바쁘시단다.”
“마감 끝났잖아.”
재수 없는 새끼……. 세 번째로 욕설을 중얼거린 오딜이 집어 든 종이를 슬슬 훑어보기 시작했다. 종이 위에는 오랜만에 보는 온갖 마법 수식과 부연 설명, 가설, 반박 따위가 줄줄이 쓰여 있었다. 이런 종이가 테이블 위를 가득 메울 정도로 쌓여 있었으니 저걸 다 읽고 나면 머리에 쥐가 날지도 모른다. 물론, 오딜과 에릭이 아닌 다른 누군가였다면.
브라이어 남매는 어려서부터 동화책 읽듯이 마법 공학 책을 읽으며 자란 이들이었으니 그깟 것 좀 읽는다고 머리에 쥐가 나진 않을 것이다.
“내가 마침 한가한 건 맞는데…… 이제 와서 네 연구를 도와 달라고?”
“누나가 제일 잘하잖아.”
“뭘.”
“마법 공학.”
그렇다곤 해도, 에릭에게 이런 소리를 들을 때마다 오딜은 막연히 서러워지곤 했다.
에릭 브라이어가 누구인가. 요즘 들어 에릭을 두고 사람들은 차세대 마법 공학자는커녕 전에도 후에도 다시없을 천재라고 일컫고는 했다. 물론 이전에도 셰 상브르에서 한 손에 꼽히는 천재이자 기대주이긴 했지만, 지금은 아예 차원이 달랐다.
일 년 전 여름. 그 여름 이후로 에릭은 전보다 더 연구에 매달리기 시작했다. 그 전에도 물론 제정신은 아니었지만, 한층 더 미친 사람 같았다.
이전에는 소소하게 마법 등 따위나 만들고 놀던 그가 고형 마법 약의 제조와 상용화, 비용 절감 대책에 관한 논문 같은 대단하기 짝이 없는 걸 발표하더니, 그 후로도 자잘한 마법 물품의 특허를 몇 개나 출원해 댔다. 학기 중이나 휴가 중이나 연구에만 미친 듯이 매달리며 에릭은 차근차근 명성을 쌓았다.
이제 그는 아카데미를 졸업하기도 전에 마법 공학계가 낳은 불세출의 천재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다.
어느 정도냐 하면, 비록 곁가지긴 해도 신귀족으로 불리는 이들 중 몇몇이 에릭에게 관심을 보이며 접촉을 해 올 정도로. 어차피 그가 개발한 물건으로 벌어들일 돈이 탐이 나서 그런 것이겠지만. 어쨌든 그 콧대 높은 신귀족 무리들이 에릭에게 관심을 쏟을 정도로 그는 순식간에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다.
그런 천재가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을 두고 ‘누나가 제일 잘한다’는 이야기를 하는데, 어떻게 서러워지지 않을 수가 있단 말인가.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의 능력이 에릭에 비해 떨어지지 않았다는 걸. 하지만 어쩌겠는가? 브라이어 남작은 에릭을 죽도록 미워하는 주제에 오딜이 마법 공학에 몰두하는 것을 탐탁찮아 하기까지 하는 재수 없는 아버지였다. 어쩌면 눈치 없는 아들로도 모자라 딸마저 그 자신을 뛰어넘을까 봐 덜덜 떨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지.
어쨌든 현 세대 최고의 천재라는 남동생에게 그런 소리까지 들었는데 누나가 되어서 발을 쏙 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오딜은 제가 생각하기에도 퍽 제멋대로인 성정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직접 키우다시피 한 남동생이 처음으로 한 부탁까지 내팽개치지는 못했다.
“……그래서, 뭘 하려고?”
“동력.”
그래도 일단 좀 때려 주고 싶긴 했다. 부탁을 한다는 새끼가 말하는 꼬라지가 저게 뭐람.
“길게 말해라.”
“마법을 기반으로 한 동력 기관을 만들려고.”
종이를 눈으로 훑어 내리던 오딜이 삐죽 시선을 들었다. 에릭은 여전히 종이 위에 눈길을 처박은 채로 입술만 빠끔빠끔 움직여서 대단하기 짝이 없는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마법 기반 동력 기관이 지금까지 없었다는 게 이상해서.”
“…….”
“만들어 보려고.”
오딜이 이마를 짚었다. 머리가 아파 왔다. 손에 쥐고 있던 종이는 아무렇게나 내던지고 오딜이 관자놀이를 꾹꾹 눌러 댔다. 그러거나 말거나 에릭은 새 종이를 꺼내더니 잉크가 채 먹지도 않은 만년필로 뭔가를 휘갈겨 쓰기 시작했다. 그 꼴을 지켜보며 한참 동안 이마를 짚고 있던 오딜이 결국 다시 입을 열었다.
“에릭 브라이어.”
“왜.”
“너, 그게 얼마나 엄청난 소리인지는 알고 있냐?”
“응.”
에릭이 걱정 따위는 눈곱만큼도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대단한 소리를 하면서 저렇게 긴장감도 뭣도 없는 목소리로 말할 수 있는 것도 재주였다. 그의 표정마저 마법으로 움직이는 장난감 따위나 만들겠다는 거나 다름없어 보일 정도로 태연했다.
“마법 보수주의 꼰대들이 어떻게 생각할지도 알고?”
“어.”
“그거 실제로 만들면, 세상이 한 번 뒤집힐 것도 알고?”
“응.”
다 알면서 하겠다는 소리였다. 오딜이 끙 소리를 내며 자신의 머리칼을 헤집었다. 그녀의 손에 감겨 오는 부드러운 머리칼은 불행하게도 에릭과 똑같은 캐러멜 빛이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저런 놈이 자신의 남동생인 게 오딜의 인생에서 가장 큰 불운이었다. 제대로 울지도 못하던 갓난아기이던 시절에 귀여워했던 것이 한이다. 그때부터 잔뜩 괴롭혔어야 했는데.
“미치겠다, 진짜…….”
오딜은 다 커 버린 남동생의 머리칼을 차마 쥐어뜯지는 못하고, 대신 그와 닮은 자신의 머리칼을 마구잡이로 헤집어 댔다. 아무리 해도 그건 너무 대단한 짓이었다.
마법 기반 동력 기관이 지금까지 없었던 이유는, 단순히 그것을 만들기가 어렵기만 해서가 아니었다.
마법은 이제 신화가 아닌 공학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법 공학이 일상에 가까워지지 못하고 대단하신 분들이나 겨우 접할 수 있는 것은, 사회와 그 사회로부터 비롯된 마법 공학계 내부의 분위기 때문이었다.
신분제가 철폐된 지도 오래라지만, 여전히 남아 있는 암묵적인 계급의 수혜를 보고 있는 윗분들은 자신들이 누리고 있는 것을 다른 이들에게 공유할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마법 공학은 절대적으로 아래로 향하지 않도록 발달해 왔다. 온전히 거대하고 압도적인 것을 유지하기 위해서만. 그들의 체제를 공고히 하기 위해서만 마법은 발전했다.
마법 보수주의자라고 불리는 이들이 마법 공학계에서 목소리를 키울 수 있었던 것도 그 덕분이었다. 그들은 마법을 활용해 일상을 돌보거나 사소한 생활에 영향을 끼치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해 댔다. 마법에서 비롯된 힘은 온전히 마법을 위해서만 사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오딜이 보기엔 당연히 개소리였다. 아마 그 노친네들도 자기들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를 것이다. 그냥 윗분들한테 혹시나 밉보일까 봐 눈이 벌게져서 하는 소리들이겠지.
어쨌든 에릭이 마법 등을 만들고도 업적을 제대로 인정받기는커녕 학계의 절반쯤에게는 외면 받았던 것도, 그 뒤에 그가 발표한 고형 마법 약의 개발로는 단번에 그 천재성을 인정받은 것도 전부 그 마법 보수주의 때문이었다.
에릭이 말한 ‘마법 기반의 동력 기관’은 마법 보수주의를 완전히 배반하는 일이고, 동시에 그 개발만으로도 이 지지부진하게 굳어진 사회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올 혁신이 될 것이다. 한때 그와 같은 혁신이 될 것이라 기대 받았던 증기 기관은 그 비효율성과 혁신을 거부한 높으신 분들의 압박으로 실패했다지만…….
한번 실패했던 혁신이 성공해 버리면 어떻게 될까? 증기 기관이 개발되었던 때와 달리 신분제마저 없어진 지금, 마법 동력 따위가 성공해 버리면. 그걸 개발한 에릭은 어떻게 될까?
위로 올라가기 위해 뭐든 동원할 준비가 되어 있는 치들은 어떻게든 에릭이 만들어 낸 마법 동력 기관을 제 것으로 만들고 싶어 할 테고, 그 꼴을 곱게 내버려 둘 리가 없는 윗분들도 에릭에게 관심을 보일 것이다. 어쩌면 내각 정부로부터 빼앗긴 권력을 되찾아 오고 싶은 왕실이 명분을 앞세워 에릭을 제 편으로 끌어들이려고 할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그 개발 하나만으로도 에릭은 폭풍의 핵에 서게 될 거라는 뜻이었다. 에릭은 지금 단번에 지금보다도 더 엄청난 명성을 얻겠지만, 그 명성만큼 누군가의 분노도 사게 될 자리에 제 발로 찾아가 서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권력이나 명성 따위에는 털끝만큼도 욕심이 없던 남동생이 그런 소리를 하는데, 어떻게 그 친누나인 오딜이 머리가 아파지지 않을 수 있겠냐는 말이다. 그런 소리를 하면서도 무심하기 짝이 없는 표정으로 연구 가설이나 세우고 있는 놈인데.
“다 알면서 왜 저러지? 멍청한 것도 아닌데. 아니지. 쟤는 늘 멍청했어…….”
여전히 제 머리칼을 움켜쥐고 끙끙대고 있던 오딜이 결국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곧장 에릭과 눈을 마주쳤다. 지금껏 내내 종이에만 붙박여 있던, 그녀와 꼭 닮은 금빛 시선이 올곧게 오딜을 향하고 있었다.
“아니까 하는 거야.”
오딜은 난생 처음으로, 자신의 무심하기 짝이 없는 남동생의 얼굴이 욕망으로 들끓고 있는 모습을 보고 말았다.
“그 정도는 해야지.”
“…….”
“그 정도는 대단해져야지.”
오딜의 맥이 탁 풀렸다.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자신의 도움까지 얻어 가며 그렇게나 대단한 짓을 하겠다고 나서는가 싶었더니.
그 정도는 대단해져야지, 하는 말 뒤에 이어진 그의 마음은 차마 소리가 되어 나오지 않았지만, 오딜은 이해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에릭의 눈동자에 어렴풋이, 그녀도 알고 있는 사랑스러운 분홍빛이 비치는 것 같았다. 아니, 분홍빛이 아니라 붉은빛이었다. 석양처럼 강렬한 빛이 그의 눈 안에 들어 있었다.
그의 남동생은 지금 제가 사랑하는 사람의 곁에 가기 위해서 사회 변혁을 일으킬 법한 대단한 물건을 만들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래, 하자. 해.”
길게 한숨을 내쉰 오딜이 결국 내던졌던 종잇조각을 다시 손에 쥐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말도 안 되는 짓이었다. 그런데, 그걸 차마 하지 말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에릭이 불쑥 그녀의 앞에 종이 뭉치를 내밀었다. 테이블 위에 펼쳐진 것보다도 먼저 구상해 둔 연구 개요인 듯했다. 오딜은 그것을 받아 들고 팔락팔락 넘겨 보며 물었다.
“그래서 이걸 언제까지…….”
오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뚝 잘라 낸 에릭이 여상하게 말했다.
“졸업할 때까지.”
“……일 년 남았네.”
“어.”
“나는 간다. 혼자서 잘해 봐라.”
아무래도 그녀의 남동생은 제대로 미쳐 있는 것 같았다. 오딜은 테이블 위에 종이 뭉치를 탁 소리 나게 내려놓고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공동 연구라는 건, 아무리 천재건 어떻건 간에 제정신인 사람과 하는 것이다. 얼핏 보기에도 이삼 년은 잡아먹을 연구를 일 년 동안 끝내버리겠다는 미친놈과 함께 연구를 할 수는 없었다. 오딜은 본업으로 돌아가서 글이나 쓰면서 사랑에 미친 남동생을 열심히 응원하기로 했다.
“가끔 보여 주기나 해.”
“응.”
에릭의 방문을 나서기 전에 그렇게 덧붙이고 만 것은, 그를 키우다시피 한 누나로서 보일 수 있는 최소한의 정이었다. 물론 에릭의 연구가 막히거나 하면 어쩔 수 없이 조금 도와주기는 하겠지만……. 그 정도야 평생 인간 같지도 않게 말간 얼굴을 하고 살 것 같던 남동생이 연애 좀 하겠다는데 도와주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
하지만 저 미친 짓에 동참할 수는 없다. 일 년이 말인가? 사랑에 미쳤으면 스케일이나 좀 작게 할 것이지.
* * *
똑똑똑똑, 네 번의 노크 소리가 들리자 딜라일라는 자리에서 일어나 직접 문을 열었다. 에리카 가족들이 지내는 수도 저택의 응접실로 그녀의 손님이 방문하는 일은 오랜만이었다. 딜라일라는 문을 열고, 그 너머에서 쏟아진 캐러멜 빛 머리칼과 따스한 눈동자를 가진 사람을 마주 보고 수줍게 웃었다.
“디디!”
“오딜.”
“오랜만이네요. 그렇죠?”
“그러게요.”
남부 별장지에서 함께 차를 마시곤 했던 겨울 이후로 오딜의 얼굴을 마주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잠깐 끊어질 뻔했던 인연은 마가렛이 딜라일라의 약을 구하기 위해 오딜에게 연락을 넣었던 이후로 잔잔하게 이어졌다. 감사 인사에 답이 오고, 답신에 답신을 보내다 보니 딜라일라와 오딜은 꾸준히 편지를 주고받게 되었다.
자주 편지를 주고받긴 했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직접 얼굴을 마주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가끔 때로 딜라일라는 견딜 수 없이 오딜을 만나고 싶다가도, 막상 그녀를 초대하는 말은 꺼내지 못한 채 잡다한 이야기만을 가득 쓴 편지를 보내곤 했다. 결국 그들은 가까이 있든 멀리 있든 편지로만 대화를 나누는 펜팔 친구가 됐다.
“우리 디디, 오랜만에 봐도 귀여워.”
“오딜…….”
“좀 예뻐진 것 같기도 하고.”
그렇게 이 년이 넘도록 얼굴이라곤 보지도 못한 채로 편지로 대화를 나누던 사이였으니 어색해질 법도 했다. 하지만 오딜은 특유의 거침없고 유쾌한 태도로 딜라일라의 어색함 따위는 싹 날려 버렸다. 반갑게 그녀의 어깨를 끌어안고 토닥인 오딜을 소파에 앉힌 그녀가 사용인에게 준비해 뒀던 차를 내오길 부탁했다.
“이 차, 맛있네요.”
“오딜 취향일 것 같았어요. 나중에 돌아갈 때 좀 챙겨 줄게요.”
“그냥 뭔지만 알려 줘요. 내가 살게.”
“구하기 힘든 거라……. 저도 이번에 선물로 들어와서 처음 마셔 본걸요.”
“그럼 뭐, 줘요. 오랜만에 만난 기념 선물로 받아 갈게요.”
언제나 그랬듯이 함께 차를 나눠 마시면서 그들은 그동안 있었던 일이나 최근에 읽은 책 따위에 대한 이야기들을 나눴다. 편지로 이미 한 번 나누었던 화제가 다시 떠오르는 일도 있었지만, 직접 얼굴을 맞대고 나누는 또 다른 재미가 있었다.
오딜의 말은 언제나 그랬듯이 딜라일라가 생각지도 못한 곳으로 튀어 나갔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곤 해서, 딜라일라는 여전히 흥미로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거나 소리 내 웃었다. 수많은 이야기가 뒤섞이고 흩어졌다가 다시 엉키며 테이블 위를 떠다녔다.
하지만 딜라일라와 오딜은 에릭의 이름만은 꺼내지 않았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그래서, 디디.”
“응?”
차를 새로 끓여 오겠다는 딜라일라에게 손을 저어 보인 오딜이 다 식어 버린 찻물을 호로록 들이켜 목을 축였다.
그간 성사되지 못했던 만남이 이루어진 것은 딜라일라의 간략한 편지 때문이었다. 그 예쁜 글씨가 흔들릴 정도로 기나긴 편지를 쓰곤 하던 그녀가, 이번만큼은 딱 한 장의 편지를 보냈었다.
비록 편지로라도 이 년이 넘도록 인연을 이어 왔던 친구가 꼭 얼굴을 보고 하고 싶은 말이 있으니 만나고 싶다는 편지를 보냈는데 오딜이 찾아오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하고 싶은 이야기라는 게 뭐예요?”
오딜은 상류층 자제들의 돌려 말하는 화법 같은 것은 모르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직설적인 물음에도 딜라일라는 눈썹을 찌푸리거나 불편한 기색 없이 수줍게 웃었다. 그녀의 볼이 조금 발갛게 달아오른 것도 같았다.
“음…… 오딜.”
“네.”
“오딜은 내 편이 되어 줄 거죠?”
다짜고짜 자신의 편이 되어 주겠냐는 알쏭달쏭한 물음에 오딜이 미간을 슬쩍 찌푸렸다. 탐탁찮아서가 아니라, 무슨 말이 나올지 알 수 없어서였다.
“들어 봐야 알겠죠?”
“음, 사실 오딜은 내 편 해 줄 거라고 생각하긴 하는데…… 그냥 물어봤어요.”
맥없는 소리를 하면서 배시시 웃는 딜라일라의 얼굴을 보면서 오딜이 결국 구겼던 미간을 폈다. 자신의 편이 되어 줄 거라고 생각하고 있다니.
물론 오딜은 대부분의 경우에, 그러니까 그의 남동생인 에릭이 딜라일라 때문에 미친놈이 되어 버린 경우를 포함해서 대부분의 일에 딜라일라의 친구로 남아 있을 정도로는 그녀를 좋아했다. 세상의 어느 누가 저 사랑스러운 아가씨를 좋아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외모는 둘째 치고서라도 딜라일라는 웃으며 다른 사람의 말에 귀 기울일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런 친구는 얻기 어려운 법이지.
그러니까 오딜은 정말로 대부분의 경우에 딜라일라의 편이 되어 주기는 할 것이다. 에릭처럼 갑자기 미쳐서 사회 변혁을 일으킬 건데 같이하지 않겠냐는 이야기만 아니라면야…….
“나, 내무관이 되려고요.”
그리고 조금 부끄러운 듯 귀까지 빨갛게 물들인 사랑스러운 얼굴로 수줍은 웃음을 지으며 딜라일라가 꺼내 놓은 이야기는 딱 그런 이야기였다.
“콜록, 콜록!”
“어, 어? 오딜? 잘못 삼켰어요? 물 줄까요?”
마침 찻잔에 남은 차를 홀라당 들이켜고 있던 오딜은 거하게 사레가 들려서 한참 동안 기침을 해야 했다. 딜라일라가 사용인을 불러 차가운 물이 가득 담긴 잔을 전해 줄 때까지도 오딜은 좀처럼 진정하지 못하고 밭은기침만 뱉어 냈다. 피라도 토할 것처럼 따끔거리는 목에 찬물을 부어 넣고 진정한 오딜은, 그러나 그 후에도 한동안 입을 열지 못했다.
“……그러니까, 디디. 내무관이 되겠다고요?”
“네.”
저렇게 무심하고 당당하게 네, 하고 대답하는 건 또 어디서 배웠담…….
아니, 저 꼴은 아무래도 오딜에게는 익숙한 모양새였다. 휴가 내내 제 방에 처박혀 연구만 해 대던 그녀의 돌아 버린 남동생이 매양 하던 것과 꼭 닮은 투의 대답이었다. 오딜은 어쩐지 머리가 아파 오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내무관 중에 여자가 없었던 건 알죠?”
“네에.”
그래도 그 덩치만 크고 모자란 새끼보단 역시 디디가 훨씬 더 귀엽긴 하군. 나는 에릭보다는 디디 편이다. 오딜은 속으로 쓸데없는 생각을 잠깐 했다가 다음 말을 뱉었다.
“일하는 여자가 어떤 취급을 받는지도 알고요?”
“그럼요.”
“다른 여자도 아니고 디디가, 딜라일라 에리카가 내무관이 되면 어떤 소리를 들을 줄도 알고요?”
“어떻게 모르겠어요?”
수줍고 부끄러운 얼굴을 하고 있으면서, 딜라일라의 목소리는 너무 담백했다. 담백하다 못해 조금 즐겁기까지 한 투였다. 누가 보면 지난 시즌 오페라 홀에서 상연된 오페레타에 관한 얘기 따위나 하는 중인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결국 오딜은 덮쳐 오는 익숙한 두통에 이마를 짚었다. 분명 얼마 전에도 이런 기분을 느낀 적이 있었다. 그러니까, 여름휴가를 맞아 저택으로 돌아온 그녀의 남동생이 오랜만에 오딜에게 연구를 도와 달라고 징징거리길래 이야기라도 들어 볼까 해서 갔더니, 대뜸 그 동생이 마법 동력 기관 따위를 만들겠다고 선언했던 때와 꼭 같은 두통이었다.
“다 알면서 하겠다고요?”
신귀족들 사이에서 여성에게 주어진 가장 큰 성공은 정략결혼을 통해 가문의 세를 굳건히 하고 집안을 잘 이끄는 것이었다. 사실 그것 외에는 선택지가 없었다. 시대가 바뀌어도 여성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언제나 남성에게 주어진 것보다 적었다. 여성의 일은 집안을 다스리고 수호하는 것. 오딜이 고루하기 짝이 없다고 취급하는 생각이었으나 사회적 통념이라는 것은 쉽사리 무너지지 않았다.
그래서 신귀족 사이에서 일하는 여성이란 실패한 자로 여겨지기 마련이었다. 결혼에도, 집안을 이끄는 것에도 실패한 여성들이나 하루하루 먹을 빵을 위해 전전긍긍하며 일하는 것이라고. 하물며 그런 여성들조차 까딱해 봐야 가정 교사쯤으로밖에나 일하지 않았다. 여성이 남자들의 영역에서 함부로 그들과 뒤섞여 일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그런데 신귀족 중에서도 그 권력의 정점에 가장 가깝다는 내무부 최고 위원의 딸이 직접 내무관이 되겠다니.
물론 그녀는 얼마든지 그럴 수 있었다. 내무부의 권력을 대물림해 온 에리카가의 유일한 자식인 데다, 학창 시절부터 장래가 기대되는 대단한 천재로 이름을 알리지 않았던가? 입학부터 졸업까지 수석을 지켜 낼 정도로 똑똑하고 비상한 머리를 가진 이가 내무관이 되는 시험을 치르는 것쯤이야 일도 아닐 것이다.
사실 누구나 시험을 치르고 합격하면 될 수 있는 내무관이 아니라 위원 보좌부터 시작해서 차기 위원이 되는 것을 노리는 쪽이 더 당연할지도 몰랐다. 그렇게 하면 에리카가 휘어잡아 온 내무부는 금세 그녀의 손아귀에 넘어오게 될 테고, 차기 최고 위원의 자리를 손에 쥐는 것은 시간문제이리라.
그녀가 ‘그녀’가 아니라 ‘그’이기만 했더라면, 분명 그랬을 것이다.
“아니, 애초에 가능하긴 해요?”
여성의 사회 진출은 위로 갈수록 용납 받지 않는다. 기형적인 일이었다. 교육받지 못한 이들은 역설적으로 생계를 위해 일자리를 찾아 나서고, 양질의 교육을 듬뿍 받은 이들은 되레 저택에 틀어박혀 집안의 일을 보는 데에 그친다. 물론 보통 집안을 돌보는 일도 쉽지만은 않을진대 대단한 가문의 안주인들이 겪는 고충도 보통 일은 아니겠으나, 그들이 받은 수많은 교육이 아까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런 일이 당연하게 일어나고 있는 이유는 여성에 대한 굳은 통념 때문이었다. 뛰어난 여성일수록 성공적인 결혼을 하고 집안을 훌륭하게 이끌어 나가는 것이 당연하다는, 그런 통념. 오딜이 빌어먹게 싫어하는, 하지만 차마 뛰어넘을 수는 없었던 통념.
그 때문에 수많은, 교육 받은 여성들은 교육을 받아야만 할 수 있는 직업을 가지려 하지 않는다. 그것은 남자들의 영역이니까.
말하자면 딜라일라는 지금 그런 남자들의 영역에 최초로 발을 들이겠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런 것이, 가능할 리가 없는데. 애초에 내무관이 되는 시험을 여자가 치를 수는 있던가?
“사실, 시험에는 벌써 통과했어요…….”
그런 오딜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전히 사랑스러운 미소를 띤 연분홍색 입술이 오물거리며 말을 뱉어 냈다. 관자놀이를 꾹꾹 눌러 대느라 고개를 숙였던 오딜이 번뜩 시선을 치켜들었다.
“그게 돼요?”
“일차적으로 서면 시험을 보는데, 그때는 출신을 보면 안 된다는 조항이 있어서 이름을 가린대요. 그런데 여자가 시험을 치르면 안 된다는 조항은 없어서…… 일단 시험을 치렀더니 합격해 버렸어요.”
“그럼, 그다음에는.”
“면접을 치르긴 해야 하는데, 아시잖아요? 제 아버지가 누구인지.”
저도 모르게 멍청하게 벌어졌던 오딜의 입술 새로 탄식 같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통념만으로 굴러가던 탓이라고 할지, 덕분이라고 할지. 여자가 시험을 치르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던 이들의 허를 찌르고 최초로 시험을 통과한 여성이, 내무부 최고 위원의 딸이 되어 버린 것이다.
멍청한 면접관들은 이도 저도 못 하고 발만 굴렀을 것이다. 시험 따위를 치르며 공정한 척하지만 엄연히 위계가 존재하는 굳어진 사회에서, 저들이 거역하기에는 너무 커다란 권력을 등에 업은 이레귤러가 나왔으니까.
제대로 질문도 못 하고 주지도 않은 눈치를 보며 통과시킬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어쩌면 대단한 집의 아가씨가 장난삼아 저지른 짓이 아닐까, 혹은 어린 딸이 제멋대로 저지른 짓에 화가 난 그녀의 아버지가 끊어 내 주지 않을까 하는 자기 위안 따위나 하는 정도였겠지.
“좀 치사한 방법이긴 하지만, 그래도 어쩌겠어요. 제가 아버지 이름을 대면서 절 합격시키라고 협박한 것도 아닌데요.”
하지만 조금 뻔뻔하게까지 들리는 말을 여상하게 꺼내 놓는 딜라일라의 얼굴에는, 비록 부드러운 미소가 걸려 있을지언정 장난기 따위는 눈곱만큼도 없었다.
“어쩌다가 나의 사랑스러운 디디가 이렇게까지 멋진 여자가 되어 버렸지…….”
잔 안에 반쯤 남아 있던 찬물을 훌쩍 들이켠 오딜이 한숨처럼 내뱉었다. 오딜이 생각에 빠진 사이 새로 끓여 온 차를 가져온 딜라일라가 웃으며 찻잔에 따뜻한 차를 따랐다. 몽글몽글 피어오르는 하얀 김 사이로 싸늘한 차향이 퍼져 나갔다. 딜라일라와 처음으로 함께 마셨던 차였다. 로즈마리의 서늘하고 산뜻한 향기가 순식간에 응접실 안을 가득 채웠다.
“멋지다고 해 줘서 고마워요.”
“어떻게 안 그래요? 나야 입으로는 매일 여자가 어쩌고 사회가 어쩌고 하지만, 아무것도 못 하고 있는 사람인데. 디디가 나보다 낫네요.”
“에이, 아니에요. 오딜은 진짜 멋진걸요. 저야 다 아버지 덕에 멋있는 척 좀 하는 거고요.”
“…….”
“그리고 제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도, 어쩌면 오딜 덕분이니까.”
하얗게 피어오르는 김 사이로 살풋 웃는 딜라일라의 얼굴을 보면서, 오딜은 조금 아연해졌다. 정말로 딜라일라는 그사이 어른이 다 되어 버린 것 같았다. 언제까지고 사랑스러운 소녀처럼 웃을 것만 같던 얼굴이 의연하게 굳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의연한 얼굴에는 조금 지친 기색이 묻어 있었다.
“음, 아버님…… 에리카 최고 위원님께서는 뭐라고 하세요?”
“당연히 화내셨죠.”
제 몫의 찻잔을 들고 향을 음미하고 있던 딜라일라가 여상하게 대꾸했다.
“그거 괜찮은 거예요?”
“우리 집은 엄마가 왕이거든요. 다행히 엄마가 제 편을 들어줘서 괜찮아요. 아버지는 절대 도와주지 않겠다고 하시긴 하셨지만, 원래는 아버지 이름도 빌리고 싶지 않았는걸요.”
“하지만, 디디.”
“정말 괜찮아요.”
비록 똑 부러진 데가 있더라도, 언제나 다른 사람에게 한 수 접어 주며 눈치를 보던 딜라일라가 전에 없이 단호하게 말을 끊었다. 하지만 오딜은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간 주고받은 수많은 편지에서, 그 이전에 지금처럼 차를 나누며 함께했던 이야기들 사이에서 오딜은 절절히 통감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딜라일라가 얼마나 자신의 가족을, 부모님을 사랑하는지.
그건 부모에게 딱히 애정이랄 만한 것이 없는 오딜로서는 신기할 정도로 굳은 애정이었기 때문에 인상적이었고, 그래서 딜라일라를 걱정할 수밖에 없었다.
“언제까지고 로드릭 에리카의 딸로만 살 수는 없는 법이잖아요.”
그러나 이어진 딜라일라의 목소리에는 의심할 여지 없이 단단한 의지가 배어 있었다. 오딜로 하여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게 하는, 그런 의지가. 이제는 흐릿해진 하얀 김 너머로, 눈을 접어 웃을 때면 연한 하늘빛으로 흐려지곤 하던 딜라일라의 호수 같은 눈동자가 새파랗게 반짝이고 있었다.
“그리고 난 마가렛 에리카의 딸이기도 한걸요. 엄마는 내 편이니까 괜찮아요.”
산뜻하게 덧붙인 딜라일라가 홀짝 차를 들이마셨다. 홀짝홀짝 차를 들이켜는 딜라일라의 뒤를 따라 찻잔을 들어 올린 오딜은, 불현듯 수증기에 섞여 선명하게 끼쳐 오는 싸늘한 풀잎 향기를 맡았다.
“그리고 나는 오딜의 친구이기도 하잖아요. 그렇죠?”
그리고 어쩌면 딜라일라는, 그저 이와 닮은 향기를 가진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일 뿐인지도 모른다. 여성의 지위나 사회적 통념 따위는 안중에도 없을 정도로, 자신의 행동이 불러올 여파 따위는 신경도 쓰지 못할 만큼.
오딜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홀짝 차를 들이켰다. 로즈마리 특유의 산뜻한 향과 어렴풋이 달콤한 뒷맛이 그녀의 입 안을 가득 채웠다. 그 맛을 입 안으로 곱씹으며 오딜은 짧은 상념에 빠져들었다.
닮은 데라곤 하나도 없는 줄만 알았던 이들이 이렇게 꼭 닮은 마음을 가지게 되는 것이 가능할까?
오딜은 로맨스 소설을 쓰는 작가지만, 자신이 쓰는 소설 같은 사랑이 실재하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사람은 누구나 비슷한 듯 다른 삶을 살아간다. 비슷한 인생의 궤적을 그리며 살아도 전혀 다른 마음을 갖게 된다. 그건 사람이 제각기 다른 개체이기 때문에 일어나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에릭과 딜라일라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았다. 한 사람은 날 때부터 사랑받았고, 다른 한 사람은 어려서부터 사랑보다 미움을 익숙하게 여기며 자랐다. 그런 둘이 만나서, 이제는 전혀 다른 방향일지언정 세상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려 하고 있었다. 물론 사소하게는 전혀 다르겠지만, 적어도 그들이 지금 하는 행동만은 꼭 닮아 있었다.
사랑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다. 그건 정말로 소설 같은 일이어서…… 오딜은 조금 감상적인 기분이 되고 말았다.
“천생연분이네…….”
그 감상적인 기분의 끝에 오딜이 할 수 있는 말은 고작 이런 말뿐이었지만.
“어……?”
“아무것도 아니에요.”
홀짝 찻물을 들이켠 오딜이 말을 삼켰다. 딜라일라는 그런 오딜을 보면서 빙그레 웃더니, 그래서 내 편 해 줄 거예요? 해 줄 거죠? 따위의 말을 하면서 오딜을 조르기 시작했다. 결국 오딜은 차 맛을 제대로 음미하지도 못하고 딜라일라에게 두 손을 들고 말았다.
뭐, 어려운 일도 아니지 않은가. 응원만이라면 해 주는 것도 괜찮았다. 아니, 좋았다. 못난 동생이 세상을 뒤집겠다고 벌이는 일에도 보내는 응원을, 사랑스러운 친구에게 보내지 못할 것도 없으니까.
‘그리고 어쩌면 그 친구가 내 못난 동생을 데려갈지도 모르겠고…….’
그렇게 생각하니까 조금 아깝긴 하다. 물론 에릭이 아니라 딜라일라 쪽이.
그래도 뭐 어쩌겠는가. 저들이 좋다는데. 일 년이나 만나지 못했으면서, 그동안 세상을 다 뒤집어서라도 상대방의 옆자리를 낚아챌 생각만 할 정도로 좋다는데.
“혹시 최고 위원님이 집에서 쫓아내면, 시내에 호텔 잡아 줄게요.”
“괜찮아요. 그러면 아버지한테 선물 받은 드레스랑 보석 팔아서 방 구할 거예요.”
“세상에, 디디. 정말 디디 맞아요? 껍데기만 같고 속은 다른 사람인 거 아니에요?”
그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오딜과 딜라일라는 한참을 더 웃고 떠들었다. 다시 끓여 온 로즈마리 차가 다 식어 버리고, 헤어질 시간이 되어 딜라일라가 오딜에게 약속했던 찻잎을 통째로 쥐여 주는 동안에도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그렇게 웃는 얼굴을 보면 꼭 예전의 딜라일라와 다를 것도 없어서, 오딜은 자신의 사랑스러운 친구를 응원할 수밖에 없었다. 딜라일라의 배웅을 받으며 저택을 돌아 나온 오딜은 얼핏 선물 받은 찻잎을 조금 나누어 에릭의 기숙사로 보내 볼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 자식이 제가 보낸 걸 제대로 받을지는 모르겠지만, 찻잎은 좀 오래 둬도 상하는 것도 아니니까 괜찮겠지.
그런데 진짜 천생연분 아닌가? 사랑하는 스케일 좀 보라지. 나중에 사랑싸움이라도 하면 하늘이 무너지는 거 아닐까 모르겠다.
그러니까 하늘이 무너지지 않게, 꼭 다시 만나서 평생 예쁜 사랑이나 했으면 좋겠다.
그들을 멈춰 세운 것도 사랑이었으나, 사랑이 다시 그들에게 발을 내딛게 했다.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길로.
* * *
내무부 제3관의 앞뜰은 셰 상브르 기숙사의 안뜰과 닮은 모양새였다. 가장 최근에 지어진 제3관의 건축 최종 담당자가 셰 상브르 출신이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면 순식간에 그래서 그렇구나, 하고 납득 할 수 있을 정도로.
곳곳에 놓인 벤치, 푸른 상록수들, 높다란 담장처럼 정원을 둘러싼 포플러 나무들과 그 사이를 장식하는 관목과 화초들. 셰 상브르의 기숙사보다는 단연 새것에 가까운 하얀 석벽이 둘러싼 건물 앞에는 그런 것들이 펼쳐져 있었다.
가장 백미는 정원 가장 안쪽에 자리 잡은 장미 정원이었다. 아무래도 건축 최종 담당자는 셰 상브르 기숙사 안뜰의 장미 정원을 상당히 좋아했던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보다 훨씬 더 장대하고 널찍하게 펼쳐진 장미 정원을 통과하지 않고서는 제3관의 건물을 드나들지 않을 수 없게 짓지는 않았을 테니까.
그래서 딜라일라는 출근할 때나 퇴근할 때, 심지어는 점심을 먹기 위해 건물을 나설 때마다 끊임없이 그 장미 정원을 보아야 했다. 딜라일라의 소녀 시절을 두고 온 그곳을 꼭 닮은 정원을 매일같이 보는 일은 조금…… 아니, 사실은 꽤 많이 복잡한 기분이 들게 했다.
여름이면 한가득 피어나는 색색의 장미, 돌벽을 타고 기어오르는 가시 돋친 덩굴과 자그만 분수까지. 너무 많은 것이 닮아 있었다. 그것을 볼 때마다 그녀는 그 여름날 자신이 두고 온 것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어쩌면 에릭도 가끔 그 장미 정원을 보면서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할까?
쓸데없는 생각이었다. 딜라일라는 발걸음을 서둘러 제3관 안으로 들어갔다. 겉모양은 셰 상브르의 기숙사와 꼭 닮았다지만, 건물 내부는 당연하게도 전혀 다른 구조로 지어져 있었다. 회의실과 응접실, 내무관들의 개인 집무실과 내무관 보좌들이 업무를 보는 사무실이 하얀 석벽 안쪽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딜라일라는 내무관 보좌들의 사무실로 향했다.
내무관 시험에 합격했던 때로부터 일 년, 그리고 그녀를 어찌해야 할지 몰라 전전긍긍하던 이들이 결국 정식 내무관이 아닌 내무관 보좌라는 이름으로 그녀를 내무부 3관으로 출근하게 한 지도 벌써 반년이 넘게 지났다.
처음 출근을 시작하고 한 달 가까이 딜라일라는 아무 일도 맡지 못하고 멍청하게 자리에 앉아서 시간을 죽였다. 소일거리라도 있으면 좋을 텐데, 그녀가 뭐라도 하려 하면 사방에서 시선이 쏟아졌다. 평가하고, 단정 짓고, 무시하는 시선들. 그 시선의 무게가 어깨에 얹히면 때로 숨을 쉬기도 어려웠다. 딜라일라로서는 처음으로 다른 이들에게 마냥 사랑받지 못하는 한 달이었다.
그 한 달이 지난 뒤에 딜라일라는 결단을 내렸다. 이대로는 아무것도 안 된다. 그때부터 딜라일라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적극성과 사교성을 이끌어 내서 일을 찾아 다녔다.
누군가에게 먼저 다가가 말을 걸고, 도울 일은 없는지 묻고, 눈치껏 할 수 있는 일을 했다. 언제나 잘되지는 않았고, 가끔은 생각보다 훨씬 더 잘 풀렸다. 그렇게 몇 개월이 지나고 난 뒤, 딜라일라는 ‘최초로 내무관 시험을 통과한 여성다운 유능함’을 인정받았다.
적당한 시기와 과도한 관심도 동시에 얻었지만, 그런 것에 지칠 때면 마가렛과 오딜에게 조언을 받고는 했다. 물론 마가렛은 ‘사랑스러운 내 딸, 너는 똑똑하잖니. 마음만 먹으면 너는 뭐든 할 수 있을 거란다.’ 하고 응원해 주었고, 오딜은 ‘그 멍청한 새끼들의 눈알을 뽑아 버리고 디디가 대신 일을 처리해요.’라고 했다. 어느 쪽이든 맥 빠진 딜라일라를 웃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그러나 여전히 딜라일라의 마음 가장 깊은 곳에는 그 여름의 장미 정원이 있었다.
그 가을 셰 상브르 기숙사 안뜰에서 울던 풀벌레 소리가 있었고, 그 겨울 남부 별장지 상점가에서 보았던 반짝이는 빛이 있었다. 그 봄의 찬란하던 햇살이 있었다. 그리고 다시 한 바퀴를 돌아온 여름이 그녀의 마음속에서 졸졸 쏟아지는 물소리와 함께 꽃을 피웠다.
“에리카 양, 혹시 내 업무를 좀 도와줄 수 있겠나?”
“그럼요! 마침 핸슨 씨께서 맡기셨던 일을 끝낸 참이에요.”
“그거 다행이군. 그럼 이쪽으로 잠깐 와 보게. 봐야 할 서류를 전달해 줄 테니.”
에릭과 함께 보냈던, 꼭 한 번씩이었던 네 개의 계절을 가슴속에 묻어 두고, 딜라일라는 일에 집중하기로 했다. 이제야 제대로 일이라고 할 만한 것들이 그녀의 손에 들어오고 있었다. 어느 것 하나라도 실수할 수는 없었다. 아카데미 시절에도 해 본 적 없을 정도로 무섭게 집중해서 서류를 읽고 업무를 보다 보면 시간은 그녀의 어깨 위에 피곤함을 남기고 훌쩍 달아났다.
그렇게 바쁜 하루를 보내고 난 뒤에 딜라일라는 지친 몸을 이끌고 퇴근길로 나섰다. 오늘도 제3관에서 일하는 내무관과 보좌들 중 그녀의 퇴근이 가장 늦고 말았다.
정문을 나선 그녀는 눈앞에 펼쳐진 장미 정원을 보면서 희미하게 탄식 같은 웃음을 뱉어냈다.
석양이 지고 있었다. 신화처럼 장엄하고 동화처럼 달콤한 금빛 햇살이 거미줄처럼 허공을 가로지르고, 그 사이로 떠도는 공기는 안온하고 느긋했다. 곧 찾아올 어둠 따위는 끼어들 틈도 없을 것처럼 세상 모든 것이 따뜻한 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반년이 넘게 출근하면서 매일같이 보아 온 정원이었으니, 딜라일라도 이제는 마냥 그 정원을 보면서 상념에 사로잡히지는 않을 수 있게 됐다.
하지만 역시 이렇게 아름다운 여름날에, 이렇게 아름다운 석양이 지고 있는데 어떻게 떠올리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그 정원에 만개했던 여름 장미와, 분수대에서 쏟아지는 물줄기의 소리. 저 멀리 흩어지는 포플러 잎새가 바람결에 흩어지는 소리를.
가느다란 물줄기가 몇 겹이나 겹쳐 쏟아지는 소리가 들렸다. 쏴아아……. 여름 저녁의 산들바람이 포플러 잎새를 한바탕 휩쓸고 지나가는 소리가 먼 곳에서 이는 파도 소리처럼 밀려왔다. 가슴속에 담아 둔 추억의 한 자락인지, 혹은 실제로 그녀의 귓가에 닿아 오는 소리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딜라일라는 눈을 쪼이는 햇살에 괜히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일순간 너무 밝은 빛이 눈을 찔러 들어서, 눈앞이 깜깜해졌다.
눈앞이 까맣게 멀어지자 다른 감각이 날카롭게 곤두섰다. 귀를 찌르는 소리. 피부를 간지럽히는 바람과 햇살. 그리고…… 향기.
좀처럼 시야가 돌아오지 않는 눈을 꼭 감아 버린 딜라일라가 숨을 골랐다. 숨을 삼키고, 내쉬고. 삼키고, 다시 내쉬고. 수런거리는 가슴을 꼭 잡아 누르던 그녀가 다시 눈을 떴을 때.
마법처럼 에릭 브라이어가 그녀의 눈앞에 나타났다.
물줄기를 쏟아 내는 분수대와 만개한 여름 장미들. 저 멀리 휩쓸리는 푸른 포플러 나무 숲. 하얀 석벽 위로 기울어지는 따스한 빛의 석양과 공기 중을 가득 채운 금빛 햇살. 그림처럼 아름다웠던 그날과 꼭 닮은 여름을 뒤로하고, 에릭이 서 있었다.
“어, 어……?”
순간 딜라일라는 자신이 그를 떠나보내던 날의 환상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했다.
푸른 재킷 안에 받쳐 입은 셔츠 깃이 하얗게 빛을 반사했다. 그날, 그녀의 졸업식 날과 똑같은 제복 차림이었다. 제복을 입고도 앞머리를 대충 흐트러뜨려 내린 것도 똑같았다.
어쩌면 키가 조금 컸을까? 엷은 회색빛의 바지 아래로 볼록 튀어나온 복숭아뼈가 드러나 있었다. 아니, 그때도 그랬던가……?
딜라일라의 눈앞에 펼쳐진 그 풍경에 그녀는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정말로 환상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생각이 뚝뚝 끊어졌다. 그렇게 눈을 깜빡이고만 서 있던 딜라일라의 눈에 환한 금빛이 비쳐 들었다.
다시 한번, 눈을 감았다 뜬 딜라일라는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에릭이 환상이나 착각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때와 다른 점이 꼭 하나 있었다. 다른 말도 없이 그저 묵묵히 내리깔리던 금빛 눈동자가 햇살처럼 녹아내렸다. 익숙하게, 하지만 조금은 낯설게 만큼 오랜만에.
에릭 브라이어가 딜라일라를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누나.”
목 안으로 울리는 듯한,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 미미하게 접혀 내려가는 눈꼬리와 하얗고 매끄러운 피부. 석상처럼 굳은 턱이 움직여 딜라일라를 불렀다. 좀처럼 듣지 못한, 지난 이 년간 들을 일이 없었던 호칭이었다.
“누나.”
“……에릭?”
입술을 움직이는 것이, 그 이름을 소리로 만들어 내는 움직임이 이상할 정도로 어색했다. 이 년간 불러 본 적 없는 이름을, 한 발 늦게 뱉어내는 딜라일라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네.”
“에릭 브라이어?”
“네.”
이 년간 들어 본 적 없던, 짧은 대답. 그러나 이 년 전에는 몇 번이고 들었던 대답. 한 마디뿐인 짧은 말이어도 늘 충실하게 딜라일라를 향해 돌아오던 대답이, 이번에도 어김없이 올곧게 딜라일라를 향해 돌아왔다.
언젠가 그가 찾아오면 반드시 웃으며 맞아 주겠다는 다짐이 무색하게 눈물이 흘렀다.
“울지 말고 있으라고 했는데…….”
딜라일라는 흘러나오는 눈물을 닦지도 못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에릭이 그녀에게 한 발짝 다가섰다. 그리고 또 한 발, 또 한 발짝.
그녀와 그의 사이에 딱 한 발짝만큼의 거리가 남았을 때, 딜라일라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에릭의 품에 뛰어들었다.
“응, 에릭. 흐으…….”
들썩이는 딜라일라의 어깨를 에릭이 살며시 감싸 안았다. 에릭의 품에서는 서늘하고 어렴풋이 달콤한 향기가 났다.
정말이지, 그 여름날과 똑같았다. 그의 향기, 안아 주는 팔의 무게, 체온. 젖은 뺨에 와 닿는 재킷의 감촉과 흩어지는 물소리, 석양. 전부 다.
하지만 이곳은 셰 상브르 아카데미 기숙사의 안뜰에 숨겨진 조그만 장미 정원이 아니었다. 딜라일라 에리카는 이제 내무부 제3관에서 일하는 내무관 보좌였고, 그녀가 입은 옷은 푸른 재킷과 연회색 스커트가 아닌 밋밋한 색의 출근용 투피스였다. 딜라일라는 갓 아카데미 졸업식을 치른 졸업생도 아니었고…….
“누나.”
“에, 흑. 에릭.”
“저, 졸업했어요.”
에릭 역시 그때와 같지 않았다.
술에 우는 딜라일라를 달랠 줄을 몰라 어색하게 등을 두드리던 그도, 그녀를 차마 붙잡지 못해 멀리 그늘에 숨어 있던 그도 아닌, 졸업식을 마치고 제복조차 갈아입지 않은 채로 곧장 딜라일라를 찾아 달려 온 에릭 브라이어가 거기 있었다. 딜라일라의 바로 앞에 서서 금빛 햇살을 한가득 맞으며 그녀를 안아 주고 있었다.
딜라일라가 그의 품으로 파고들자 낮은 웃음소리가 그녀의 어깨 위에서 부서졌다. 전보다 더 낮아지고, 더 짙어진 것 같은 목소리가 딜라일라의 귓가에 달라붙었다. 처음에는 오래전의 환상을 보고 있는 것처럼 꼭 같아 보이던 그는, 그때와는 분명 달랐다. 어쩐지 조금 여유로워진 것 같다. 목소리가, 태도가, 표정이…….
그는 정말로 자란 것이다. 지금 그녀의 눈앞에 서기 위해서.
“졸업식 끝나자마자 바로 왔는데, 너무 늦어서…… 혹시 누나가 가 버렸을까 봐 걱정했어요.”
그 사실이 너무 벅차서, 딜라일라는 몇 번이고 했던 다짐처럼 그를 웃으며 맞아 줄 수가 없었다.
“그런데 누나가 거짓말처럼 나타나서.”
“흑, 응…….”
“내가 때맞춰 찾아왔구나 생각했어요.”
고양이처럼 그의 품에 뺨을 비비던 딜라일라가 말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에릭은 정말, 정말 때맞춰 그녀를 찾아왔다. 석양이 아름답고, 바람이 부드러운. 싱그러운 장미 향이 일렁이는 아름다운 여름날. 다시 찾아온 그를, 도저히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날에.
“흐, 크흥! 으…….”
“……일단, 그만 울어요.”
품속에서 고개를 끄덕이는 딜라일라의 뒷머리를 가만가만 쓸어내리는 손은, 여전히 믿을 수 없을 만큼 섬세하고 부드럽게 움직였다. 어깨 위로 쏟아진 그녀의 분홍빛 머리칼을 쓰다듬고 딜라일라의 목덜미를 토닥이는 체온이 따뜻했다. 많이 달라진 것 같다가도, 울고 있는 딜라일라를 달래는 것만큼은 그때와 똑같았다.
딜라일라는 조금, 아주 조금 더 울었다. 오랜만에 그녀를 달래는 에릭의 손길을 느끼면서.
그리고 마침내 그녀가 눈물을 그치고, 그들은 다시 서로를 마주했다.
“많이 아팠다고, 들었어요.”
“어, 응…….”
왠지 모르게 에릭의 시선을 받는 것이 겸연쩍어서, 딜라일라는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하지만 아래로 떨어지는 시선 끝에 에릭의 푸른 재킷 위에 번진 눈물 자국이 걸려서 딜라일라는 시선을 피한 것이 무색하게 조금 더 겸연쩍어지고 말았다. 사실 에릭도 조금 겸연쩍어하고 있다는 사실은 딜라일라도 몰랐다.
“이제 괜찮아요?”
“으, 응. 이제 괜찮아. 다 나았어.”
“약은.”
“네가 보내 준 거……?”
“네.”
“잘 챙겨 먹었어. 전부 다. 고마워. 덕분에…….”
오랜만의 재회에 괜히 빙 둘러 가는 이야기를 하던 그들은, 잠깐 입을 다물었다가, 조금 웃었다.
“예전에도 이런 얘기 한 적 있는 것 같죠.”
“그러게.”
웃음이 번지고 난 뒤에야 에릭과 딜라일라는 다시 서로를 마주 보았다. 조금 더 짙어진 석양 가운데 서서 서로를 마주 보는 시선이 따뜻했다.
여름 호수처럼 새파란 딜라일라의 눈동자에 금빛 석양이 한가득 일렁였다. 에릭의 금빛 눈동자에는 파란 여름이 부서지고 있었다. 서로의 눈동자에 서로가 가득 담긴 모습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환상처럼 아름답고 꿈결처럼 신비로운 빛이 두 사람의 사이로 차올랐다. 호수에 비치는 한낮의 태양처럼 반짝이는 빛이.
동화처럼, 혹은 신화처럼 달콤하고 아름다운 석양이 기울고 있었다.
“이제 괜찮아요?”
“응? 이제 정말 괜찮다니까.”
“그거 말고.”
에릭의 손이 딜라일라의 매끄러운 머리칼을 따라 그녀의 어깨 위를 스쳤다. 보드라운 목덜미를 쓰다듬는 손길에서는 따스한 애정이 묻어 나왔다.
“이제 없었던 일로 할 수도 없는데.”
뿌리치려면 얼마든지 뿌리칠 수도 있을 만큼 미약한 힘이 딜라일라의 뺨을 감싸 붙잡았다. 무심코 그를 올려다보려던 딜라일라의 얼굴이 그대로 멈췄다. 에릭은 그녀의 뺨을 붙잡은 채로 허리를 조금 숙였다. 그녀의 볼록한 이마 위에 그의 입술이 맞닿았다.
까슬하게 일어난 입술이 얇은 피부 위를 스치는 감촉에 딜라일라는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에릭이 입술을 맞붙인 채로 속삭였다.
“사랑도, 괜찮아요?”
질끈 감았던 딜라일라의 눈이 반짝 뜨였다. 하지만 에릭은 그녀의 눈을 마주 보지 않았다. 대신 딜라일라의 동그란 머리꼭지에 다시 입 맞추고, 그대로 입술을 움직였다.
“이제, 괜찮아요? 사랑도.”
“…….”
“그렇다고 말해 줘요…….”
스치는 입술이 간지러웠다. 하얗던 뺨에 순식간에 발갛게 열이 올랐다. 조금 전까지 여유롭게 웃던 그는 다 어디로 가 버렸는지, 묘하게 절박한 목소리로 속삭이는 에릭의 목소리가 딜라일라의 머리칼을 적시고 아래로 뚝뚝 흘러내렸다.
“누나.”
그녀를 부르는 말이, 목소리가, 에릭의 숨이 딜라일라의 마음에 스며들었다. 달아오른 뺨만큼이나 마음이 따끈따끈했다. 언젠가, 아주 오래전에 건넸던 말을 정반대로 되돌려 받으면서 행복하다면, 조금 이상할까?
“괜찮, 아요?
발밑이 둥실둥실 떠오르는 가운데 에릭의 목소리만이 딜라일라를 붙잡았다. 이 년 전보다 조금 더 낮은 에릭의 목소리는 도저히 그녀가 참아 낼 수 없을 만큼 사랑스러웠다. 당장이라도 고개를 끄덕이고, 에릭의 뺨을 붙잡고 그의 입술에 입 맞추고 싶었다.
딜라일라는, 그렇게 했다.
발뒤꿈치를 바짝 들고, 에릭의 턱을 붙잡아 당겼다. 그녀의 눈앞으로 떨어진 태양 같은 눈동자가 금빛으로 반짝이는 마음을 쏟아 냈다. 딜라일라는 그것을 받아 삼킬 듯 턱을 치켜들었다. 숨이 막힐 것 같은 정적이 잠깐 내려앉았다가, 따스한 바람에 휩쓸려 멀어졌다. 마지막으로 약속했던 것처럼 가장 짙은 금빛으로 반짝이고 있는 석양 아래서, 그들은 키스했다.
하늘마저 그들의 마음처럼 빨갛게 물들었다. 기울어진 햇살이 그들의 주변에 가득했다. 길게 늘어진 그림자가 입술을 겹쳤다. 맞닿은 그림자는 이내 원래 하나인 것처럼 꼭 달라붙었다. 마음 깊은 곳에 쌓아 두었던 막연한 그리움이 뒤섞이는 숨결에 녹아내렸다. 누구의 것인지도 모르게 뒤섞인 마음을 받아 마시자, 단맛이 났다.
입술이 떨어진 뒤에 딜라일라가 속삭였다.
“사랑하는 사람하고 결혼하는 게 내 꿈인데.”
“…….”
“지금은 어떻게 돼도 좋을 것 같아.”
무엇이건 좋으니, 네가 곁에 있어 주면 좋을 것 같아. 네 서늘한 향기도, 부드러운 캐러멜 빛 머리카락도. 까슬한 입술의 감촉이나, 태양처럼 녹아내리는 금빛 눈동자도. 낮은 목소리. 목 안으로 울리는 웃음소리. 뜨거운 숨결.
그리고 네 마음까지도 전부. 내 곁에 있어 줘.
“사랑해.”
에릭은 처음으로 그녀의 눈앞에서 눈물을 흘렸다.
* * *
다시 여름이 가고, 가을을 지나 기나긴 겨울의 끝에 봄이 왔다.
세상의 모든 반짝이는 것을 모아 둔 것 같은 봄이었다. 어깨 위에 샛노랗게 내려앉는 봄볕이나 산들산들 부는 건조한 바람에 흩날리는 꽃잎, 부드러운 향기와 잎새에 가시지 않은 이슬 같은 것만이 가득한, 봄.
수도 외곽에 자리한, 유난히 뜰이 넓고 조경이 아름다운 정원에 널찍하게 깔린 풀밭 위에 에릭과 딜라일라가 마주 섰다. 에릭은 새로 맞춘 연미복이 어색할 법도 한데 그저 무심하게 그것을 입고 서 있었다. 연한 하늘색 치맛자락에 풍성한 레이스가 달린 드레스를 입은 딜라일라가 오히려 어색해했다. 일 년이 넘도록 출퇴근용 투피스만 챙겨 입었더니 이젠 이런 옷이 불편하다고 중얼거리면서.
에릭은 그렇게 쑥스러워하는 딜라일라를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툭 뱉었다. 예뻐요, 하고. 딜라일라는 몇 번이나 들은 말에도 뺨을 발갛게 붉히면서 고마워. 하고 대답했다. 너도 멋있어. 그렇게 덧붙이는 그녀의 말에 에릭은 대답 대신 손을 잡았다.
딜라일라는 이제 그도 딜라일라의 칭찬에 무심한 얼굴 아래로 제법 쑥스러워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하지만 가끔 하듯 그를 놀리지는 않았다. 피로연장에는 사람들이 우글거렸고, 그들은 하나같이 에릭과 딜라일라를 흘끔거리고 있었다. 지금도 사실 그들은 끊임없이 쏟아지는 눈치 싸움이 지겨워 춤을 추겠다고 정원 한가운데로 도망친 참이었다.
자연의 모양을 흉내 내어 들꽃을 뽑아내지 않은 풀밭 위로 악단이 만들어 내는 소리가 봄볕처럼 퍼졌다. 날이 날이니 만큼 즐겁기만 한 멜로디의 연속이었다. 여염집 아가씨가 결혼을 하건 대단한 집안을 물려받을 외동 아드님이 결혼을 하건, 결혼식 피로연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이란 다 그런 모양이었다.
즐겁게 발을 움직이는 사람들 사이에서 손을 맞잡은 에릭과 딜라일라는, 빠르고 경쾌한 박자와는 완전히 따로 노는 느린 스텝을 밟았다. 연구에만 시간을 쏟아부은 에릭은 춤을 잘 몰랐고, 딜라일라는 춤을 추는 일에는 아무래도 영 소질이 없었다. 여전히.
하나, 둘, 셋. 두 사람이 바닥을 디딜 때마다 구둣발 아래에 사박사박 밟히는 풀잎이 축축한 향기를 뿜었다. 이따금씩 샛노랗게 핀 들꽃이 그들의 발이 움직일 때마다 한들거렸다. 딜라일라는 발밑에 시선을 붙박아 두고 있었다. 그런다고 이십 년이 넘게 못 추던 춤이 갑자기 잘 춰지는 것도 아니라는 건 그녀도 알았다.
딜라일라는 그냥, 한들거리는 샛노란 들꽃을 밟을까 봐 그러고 있었다. 푸른 잎은 몇 번을 밟아도 다시 자랄 테지만, 꽃잎은 뭉개지고 나면 솜뭉치처럼 예쁜 홀씨를 품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며.
그런 딜라일라의 동그란 머리꼭지를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던 에릭이 그녀의 양팔 아래에 손을 집어넣어 반짝 들어 올렸다.
“으앗……!”
반사적으로 바동거리는 발에 차일 걱정도 하지 않는지, 에릭은 달랑 들어 올린 딜라일라를 내려놓지 않았다. 결국 딜라일라가 힘 빠진 웃음을 지으며 그의 어깨 위에 손을 얹었을 때에야 그가 다시 조그만 몸을 내려놓았다. 구두 신은 그녀의 두 발이 그의 발 위에 얹히도록.
“계속 바닥만 볼 거예요?”
“……나 구두 신었는데.”
“저도 신었어요.”
구두 굽 때문에 아플 거라며 발을 쏙 빼내려는 딜라일라의 허리를 에릭이 감아 붙들고 다시 발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의 발등이 다칠까 발을 빼려다가도, 함부로 움직였다가는 그대로 중심을 잃고 넘어져버릴 것 같아서 딜라일라는 결국 그의 팔이나 붙들었다. 에릭은 그녀의 구둣발에 짓밟히는 발등이 아프지도 않은지 제자리에서 느긋하게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안 아파?”
“괜찮아요.”
“그래도…….”
“누나는 작잖아요.”
팔을 붙잡고 있던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딜라일라는 에릭의 팔을 아프게 꼬집으려고 끙끙거렸지만, 자리에 맞춰 연미복을 빼입은 그의 팔을 꼬집기는 쉽지 않았다. 딜라일라는 몇 번 손을 움찔거린 후에 말끔하게 포기했다. 입지 않은 피부여도 몸이 워낙 단단해서 잘 꼬집히지도 않는데, 옷까지 겹겹이 입은 위로 아프게 꼬집을 수 있을 리가 없지.
“네가 큰 거야.”
“가볍다는 뜻인데.”
“그게 그거지!”
파드득 성질을 부리는 딜라일라를 내려다보면서 에릭이 웃었다. 에릭은 날이 가면 갈수록 자주 웃었다. 예전에는 딜라일라가 자신을 좋아하는 줄도 모를 정도로 무심하던 얼굴이 이제는 그녀를 마주할 때마다 매양 웃고 있었다. 딜라일라가 그의 무뚝뚝한 표정을 다 까먹어 버릴 정도로.
그녀의 허리에 감겨 있던 에릭의 팔에 힘이 꽉 들어갔다. 헉, 숨을 들이쉬기가 무섭게 그가 딜라일라를 다시 들어 올렸다. 꽃다발이라도 드는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그녀의 허리를 잡아 올린 그가 제자리에서 한 바퀴를 빙 돌았다. 팔랑팔랑 흩날리는 연하늘색 치맛자락이 그 궤적을 따라 둥글게 흩날렸다.
와아……! 멀찍이 사람들이 모여 앉은 테이블 언저리에서 큰 소리가 터져 나왔다. 한 바퀴를 돌아 다시 에릭의 발등 위에 안착한 딜라일라가 휙 뒤를 돌아 눈치를 보았다.
“오딜이 나와서 그래요.”
습관처럼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는 딜라일라의 귓가에 속삭여 준 에릭이 안심하라는 듯 그녀의 등을 톡톡 두드렸다. 그제야 딜라일라가 참았던 숨을 포옥 내쉬었다. 딜라일라가 사람들의 시선을 상당히 신경 쓴다는 것을, 에릭은 그녀를 다시 만난 후에야 알았다. 단둘일 때가 아니면 항상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있던 그녀만을 볼 수 있었던 아카데미 시절에는 알지 못했던 사실이었다.
“으응…….”
“정말로.”
가만가만 제자리에서 움직이는 에릭을 올려다보던 딜라일라가 뚱하게 입술을 내밀었다. 어째 에릭은 날이 갈수록 뻔뻔해지는 것 같다. 아니, 원래도 좀 그랬던가……? 기억을 더듬어 보던 딜라일라가 에릭의 품에 폭 기대자 그의 움직임이 뚝 멎었다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금세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분명 전보다는 조금 뻣뻣했다.
그는 이제 그녀와 함께 있는 모습을 다른 사람들이 본다고 해서 불안해하지 않았다. 하지만 연인인 티를 내는 것만은 아직도 조금 꺼려하는 것 같았다. 말로 하지는 않았지만, 딜라일라가 느끼기로는 그랬다. 그래서 그녀는 에릭이 얄미워질 때면 일부러 더 그에게 꼭 달라붙곤 했다.
아무리 뻔뻔해져 봤댔자, 에릭은 에릭이다. 딜라일라보다 두 살 어린 귀여운 연인.
내친김에 그를 더 놀려 줄 마음을 먹은 딜라일라가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파묻은 채로 옹알옹알 입술을 움직였다.
“오딜한테 가자.”
“…….”
“인사해야지, 오늘의 주인공인데.”
이번에는 에릭의 꾹 다물린 입술이 조금 뚜하게 튀어나왔다. 딜라일라는 그 모양을 올려다보면서 터져 나올 것 같은 웃음을 꾹 눌러 참았다.
“싫어?”
“……네.”
“그래도 가야 돼.”
딜라일라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올려다보자, 에릭은 별수 없이 옅게 웃었다. 둘은 춤이라고 부르기도 어려운 움직임을 그만두고 풀밭 위를 걸었다. 손을 꼭 붙잡고, 흔들리는 샛노란 들꽃을 밟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이 다닥다닥 붙은 결혼식 드레스를 벗어 던지고 따뜻한 다홍색 드레스로 갈아입은 오딜이 환하게 웃으며 에릭과 딜라일라를 맞았다. 오늘로 남편이 된 사람이 그녀와 팔짱을 끼고 선 꼴을 본 에릭의 눈이 한층 더 뚱하게 흐려졌다.
“디디!”
“오딜, 결혼 정말로 축하해요!”
“그 말만 몇 번째예요? 이제 지겨워. 다른 말로 바꿔 줘요.”
“음, 그럼…… 샤니 씨가 30년 후에도 지금처럼 잘생겼기를 기도할게요.”
“지금보다 더 잘생겨지라고 해야지!”
유쾌한 목소리로 깔깔 웃음을 터뜨리는 오딜을 따라 딜라일라가 쿡쿡 웃었다. 오딜의 곁에 선 필립 샤니는 반짝이는 금발을 멋들어지게 쓸어 넘긴 얼굴이 조금 얼빠져 보일 정도로 환하게 웃고 있었다. 언젠가 그녀에게 커다란 꽃다발을 내밀었던 날에 딜라일라의 앞에서 보였던, 빈틈없이 자아도취에 빠진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에리카 양.”
“에리카 내무관님이라고 부르라고 했죠?”
“아…… 제가 말실수를 했습니다. 에리카 내무관님, 축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괜찮아요. 샤니 씨도 앞으로 행복하길 바랄게요.”
딜라일라가 한때 가짜 왕자님 같다고 생각했던 필립 샤니의 얼굴은, 이제 왕자님처럼 멋지게 웃지 않았다. 하지만 정말로 행복해 보였다. 그런 필립 샤니의 옆에 선 오딜이 와락 웃음을 터뜨려도 거리끼는 기색도 없이 마냥 풀어진 얼굴만 하고 있는 모양을 보자, 딜라일라는 새삼스레 안심했다.
“대체 일이 어떻게 된 거예요? 갑자기 결혼이라뇨!”
처음 오딜이 그 필립 샤니와 결혼할 것 같다는 말을 폭탄처럼 내던졌을 때, 딜라일라는 얼굴이 새파랗게 보일 정도로 창백하게 질려서는 그녀답지 않게 오딜을 달달 볶았다. 그런 딜라일라를 보면서도 오딜은 낄낄 웃다가 “잘생겼잖아요. 얼굴 하나만큼은 쓸 만하던데? 아, 정력도 꽤나…….” 같은 소리나 해서 사랑스러운 친구의 복장을 터지게 했다.
딜라일라가 그 정도였으니, 에릭이 제 친누나의 갑작스러운 결혼을 못마땅해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에릭은 딜라일라도 놀랄 만큼 긴 말을 쏟아 내며 오딜의 결혼을 만류하고, 급기야 오딜과 필립 샤니를 한데 뭉쳐서 비난하기까지 했다. 물론 오딜은 에릭의 모처럼 긴 말을 처음부터 끝까지 싹 무시했다.
“나, 임신했는데.”
그리고 마침내 기나긴 에릭의 분노와 딜라일라의 걱정이 조금 잦아들었을 때쯤에 두 번째 폭탄을 던졌다.
“안 그래도 된다고 했는데 굳이 책임을 지겠다니 어쩌니 하잖아. 한번 살아 보고 아니다 싶으면 뱉지 뭐.”
과연 작가라고 해야 할지, 고작 몇 문장으로 딜라일라와 에릭 두 명의 정신을 동시에 탈탈 털어 버린 오딜이 새뜻하게 웃는 것을 보면서 그들이 뭐라고 할 수 있었겠는가. 어차피 오딜은 에릭과 딜라일라가 뭐라고 하든 본인이 하겠다고 결정한 일은 끝내 할 사람이었다.
딜라일라는 결국 오딜의 갑작스러운 결혼을 축하하며 물심양면으로 결혼 준비를 도왔고, 에릭은 결혼식이 가까이 다가올수록 부루퉁하게 입을 꾹 다물고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딜라일라는 그런 에릭을 보면서 남몰래 웃곤 했다.
사실 에릭에게는 말하지 않았지만, 오딜이 딜라일라와 남몰래 속닥거리며 털어놓았던 이야기가 있었다.
“필립이 미친 사람처럼 날 쫓아다녔다니까요. 그 잘난 금발이 다 망가질 만큼 비에 흠뻑 젖어서는 집안도 재산도 다 버릴 테니까 자기 좀 받아 달라고 펑펑 우는데, 한 10년쯤 전에 쓴 유치한 로맨스 소설 주인공인 줄 알았지 뭐예요.”
“……그래서요?”
“집안은 버려도 재산은 버리지 말고 다 챙겨서 오면 받아 주겠다고 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