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
학생이 규정에 따라 소정의
교과 과정을 마침
쏟아지는 물줄기가 젖은 돌 틈에 부딪혀 튀어 올랐다. 수면에는 끊임없이 파문이 일고, 파문을 따라 흘러넘친 물방울이 다시 아래로 쏟아져 새로운 파문을 일으킨다. 더운 여름날이었다. 분수에서 쏟아지는 물소리만이 더위를 식혀 주는 여름의 한가운데. 겨울의 끝자락에는 온통 푸른 그림자에 잠기던 장미 정원은 이제 바뀐 해의 방향을 따라 쏟아지는 태양 빛을 온전히 맞았다.
숨이 막힐 정도로 짙은 장미 향이 안뜰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삭막하기만 했던 그곳에는 이제 엷은 분홍빛과 검붉은 색, 그리고 새 신부의 베일처럼 흰빛으로 물든 장미가 만개했다. 언젠가 딜라일라가 상상했던 모습 그대로, 눈이 부신 여름날이 그곳에 있었다.
딜라일라는 바람이 불어오는 벤치에 앉았다. 기숙사 안뜰 가장 깊숙한 곳에 숨겨진 장미 정원의 입구가 바로 보이는 자리. 머리 위로 드리운 나뭇잎이 한들한들 그림자를 흔들었다. 그 사이로 쏟아지는 햇볕은 새하얀 한낮의 빛이 아닌 농익은 금빛. 바람이 불어오는 만큼 시간이 흘러가면 이내 짙은 노란색으로, 그리고 붉은빛으로 짙어지다가 어느 순간 어둠 너머로 가라앉을 것이다.
딜라일라는 마지막으로 기숙사의 새하얀 석벽 위로 기울어지는 햇볕의 각도를, 드리우는 그림자와 차오르는 향기를 자신의 안에 담았다.
오늘은 셰 상브르 아카데미의 31회 졸업식이었다.
에릭과 하루를 온전히 전부 보낸 그날 오후부터는 비가 내렸다. 비는 깊어 가는 여름을 한층 더 생생하게 빛나게 하려는 것처럼 너무 세지도 않게, 또 너무 약하지도 않게 내렸다. 바람도 없이 일직선으로 떨어져 내리는 빗방울이 대지를 적시고 허공을 수놓았다. 졸업을 앞둔 학생들은 졸업식 날에도 비가 내리면 어쩌느냐고 걱정하기도 했지만, 거짓말처럼 어제 아침에 비는 그쳤다.
비도 내리지 않는데 자신의 방에서 보내는 밤은 지루했고, 하지만 금세 지나갔다. 아침은 어김없이 찾아왔고, 딜라일라는 마지막으로 제복을 차려입고 본관 홀에 섰다.
식은 빠르게 끝났다. 졸업식 전부터 미리 짐을 모두 정리해 두었던 졸업생들은 제각기 자신의 졸업을 지켜봐 준 가족, 혹은 친구들과 함께 학교를 떠났다. 누군가는 떠나기 전에 눈물을 흘렸고 누군가는 시원스럽게 웃었다. 딜라일라는 울음을 터뜨린 친구를 위로하고 친구들과 함께 웃으며 이별을 준비했다. 그리고 모두를 먼저 떠나보낸 딜라일라는, 떠나기 위해서 홀로 남았다.
길었던 소녀 시절을 이 장미 정원에 두고 떠나기로 마음먹은 것은 어제 저녁이었다. 문득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바람에 일렁이는 꽃 무리를 보고 난 뒤에 즉흥적으로 정했다. 셰 상브르가 자랑하는 행정 교양학부 수석, 만인에게 사랑받는 딜라일라 에리카를 두고 가야만 하는 곳은 저곳이어야 한다는, 막연한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막상 그 곳에 앉아 있자 자신이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 뒤늦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딜라일라는 셰 상브르 아카데미에서 6년을 보냈다. 행정 교양학부의 여학생들과 가장 친하게 지냈고, 그 외에도 여학생 대부분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사실 대부분의 셰 상브르 학생들과 나쁘지 않은 사이였다. 누군가는 그녀를 찬양했고, 누군가는 그녀를 사랑했다.
마치 이십 년이 조금 넘는 그녀의 짧은 인생 내내 그래 왔듯이, 당연하게도 사랑받았다. 내리쬐는 봄볕처럼 욕조에 가득 찬 따스한 물처럼 미지근하고 보드라운 것들이 그녀를 둘러싸고 있었다. 손을 뻗을 필요도 없이 흐릿한 사랑은 늘 그녀의 손안에 있었다.
그런 딜라일라가 처음으로 제 손으로 붙든 사람을 찾아가기 위해서는, 늘 이곳을 지나야 했다. 언제나 남에게 들킬까 마음 졸이면서 어둠에 물든 안뜰을 지나쳤다. 여름이 다가올 때부터는 어둠에 잠긴 장미 정원에 가득 핀 꽃향기를 맡을 여력도 없이, 단지 에릭을 만나야 한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서 그저 지나치기에 바빴다.
그러나 가끔은, 그곳에 멈춰 서곤 했다.
바람이 부드러워서. 향기가 따스해서. 달빛이 시원해서. 별빛이 차가워서. 또는 에릭이 얄미워서 혼자 씩씩거리며 짜증을 내느라고. 에릭이 진이 다 빠지도록 괴롭혀 놓아서, 잠깐 쉬어 가느라고.
에릭에게서 멀어지기 싫어서 괜히 그 자리에 서서 서성인 적도 있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밝아지는 하늘을 보고 후다닥 뛰어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곤 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졸업할 때까지 들키지 않은 것도 신기할 노릇이었다. 열심히 어둠에 몸을 숨기긴 했지만, 혹여나 누군가 창밖을 내다보기라도 했다면 단번에 들켰을 것이다. 매번 타고 오르던 낡은 사다리를 어둠이 내리지 않은 환한 낮의 안뜰에서 가만히 올려다보고 있으면서 딜라일라는 뒤늦게 그런 생각을 했다.
“하긴…….”
그런 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어떻게든 에릭을 만나야 한다는 생각만으로 가득 차서, 주위를 둘러볼 여력이 없었다.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은 것은 정말이지 천운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오늘까지. 이제 더는 천운도 필요 없었다.
언젠가의 저녁처럼, 장미 정원 위로 아름다운 석양이 지고 있었다. 신화처럼 장엄하던 그 겨울의 주홍빛 석양이 아닌, 동화처럼 부드러운 빛이 목화솜처럼 뭉친 구름에 분홍빛 물을 들였다. 분홍빛 하늘 아래로 짙은 금빛이 한 꺼풀 덧씌워져서, 마치 금을 녹여 뽑아낸 실로 짜낸 베일을 덮어쓴 것 같다.
공기마저 햇살이 엮어 만든 금빛 베일을 뒤집어썼다. 여름 저녁은 분홍빛과 금빛으로 반짝였고, 장미는 선명한 붉은색과 흰색으로 피어났다. 녹색 이파리가 비친 분수대의 수면에는 끊임없이 새파란 파문이 일었다. 높다랗게 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간간이 튀어 올랐다.
비가 그치고 한결 더 깊어진 여름밤, 그러니까 어젯밤에 딜라일라는 에릭의 방을 찾았다. 하지만 그녀는 그의 방문을 두드리는 대신 문틈으로 종이 한 장을 끼워 넣었다. 마치 에릭이 딜라일라를 피해 실험실로 숨어들었던 때처럼. 다른 점이라면 그 방문 안에는 분명 에릭이 있었고, 딜라일라는 그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은 채 부리나케 등을 돌려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제 그녀에게 남은 일은, 기다리는 것이었다.
그림자가 조금씩 길어졌다. 기다림의 시간은 느린 듯하면서도 빠르게 흘러간다. 아니, 그것을 느리고 빠르게 느끼는 것은 순전히 사람의 감상일 뿐이다. 시간은 언제나 그 자리에서 누구도 배신하지 않고 평등하게, 그리고 일정하게 흘러가고 있다. 손을 내밀어 붙잡으려 해도 붙잡히지 않고, 빨리 떠나보내려 해도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
이별의 순간은 그렇게 찾아왔다.
공기 중에 온통 금분이 떠다니는 것처럼 짙은 저녁놀이 그녀를 감싸 안았을 때, 그가 장미 정원의 입구에 나타났다. 멀리 기우는 주홍빛 그림자 아래에서 햇볕의 한가운데로 걸어오는 신형이 조금씩 커다랗게 자라났다.
에릭은 제복 차림이었다. 딜라일라가 입은 것과 꼭 같은 푸른 재킷이 그의 어깨를 감쌌다. 이 계절에는 더울 법도 한데 그 안에는 빈틈없이 셔츠에 조끼까지 챙겨 입었을 것이다. 연회색 바지는 언젠가 보았던 것처럼 조금 짧아서, 그가 걸으면 발목이 슬쩍 드러났다. 졸업식에는 졸업생은 물론 재학생들도 모두 제복을 입고 참석해야 하니까, 그가 제복을 입은 것은 사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마지막 순간에 그와 같은 모양의 옷을 입고 있다는 것이 조금 기뻤다. 딜라일라의 마지막 제복에는 에릭과 함께한 새로운 추억이 하나 깃들 테니까.
다시 꺼내 볼 수는 없겠지만.
딜라일라는 벤치에서 일어섰다. 한 발짝 한 발짝, 그녀에게 다가오는 에릭의 발걸음에 맞추어 그녀가 발을 옮겼다. 그가 세 걸음을 걸을 때 한 걸음. 두 걸음을 걸을 때 한 걸음. 일부러 걸음의 속도를 늦추었다. 그녀에게 다가오는 에릭의 모습을 조금 더 보고 싶어서.
그렇게 그들은 장미 정원의 한가운데, 분수대의 바로 앞에서 마주 섰다.
“누나.”
“에릭.”
에릭이 손에 쥐고 있던 작은 종잇조각을 들어 올렸다. 재킷의 안주머니에라도 넣어 뒀던 듯, 반으로 접힌 자국이 있는 그 종이 위에는 익숙한 글씨가 쓰여 있었다. 날렵하고 아름다운 딜라일라의 필체가 편지라고 부르기도 부끄러울 만큼 몇 자 되지도 않는 짧은 말을 종이 위에 그리고 있었다.
[졸업식 끝나고 장미 정원에서 기다릴게.]
어젯밤 그녀가 에릭의 방문 틈으로 밀어 넣었던 그 종이를 굳이 챙겨 온 에릭을 올려다보자, 눈이 부신 탓인지 그가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말했다.
“이것만 넣어 두고 가 버렸어요, 왜.”
“일찍 자야 되니까?”
그 방에 다시 들어서면, 마지막으로 함께 보낸 선물 같은 하루가 멀어져 버릴 것 같아서 그랬다는 바보 같은 말은 꿀꺽 삼켰다. 대신 꺼내 놓은 말이 변명이라는 사실 정도는 눈치 없는 에릭이라도 알아챘을 테지만, 어쩔 수 없었다.
“오늘 졸업식이잖아. 일찍 일어나야 했단 말이야.”
“그래도…….”
“들어갔으면 안 보냈을 거면서.”
기가 막히기라도 한 것인지 입을 꾹 다물고 딜라일라를 내려다보는 에릭의 시선을 받으면서 그녀가 웃었다. 언제나처럼. 하지만 그녀가 만들어 낼 수 있는 가장 예쁜 미소를 얼굴 위에 그려 내는 일은, 오늘따라 조금 힘들었다. 당겨 올려진 입꼬리가 파르르 떨리는 것을 본 에릭이 손을 뻗었다.
긴장한 뺨에 닿는 손끝이 단단했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섬세하고 부드럽게 움직이는 마디진 손이 그녀의 뺨을 감쌌다가 다시 떨어져 나갔다.
그의 손이 닿았던 뺨에서부터 빠르게 딜라일라의 표정이 무너져 내렸다. 수면에 퍼져 나가는 파문처럼 일렁이는 슬픔이 한차례 지나가고 난 뒤에, 딜라일라는 다시 애써 웃었다.
“여기서 인사하고 싶었어.”
“…….”
“전에 기억나? 네가 여기서…….”
“약을 전해 줬죠.”
그녀가 웃는 동안에도 풀리지 않던 에릭의 얼굴이 결국 무너졌다. 금빛 눈동자가 저무는 태양처럼 스르르 녹아내리는 모습은, 언제 보아도 정말 예뻤다. 딜라일라는 꼼꼼하게 그것을 눈에 담으며 조금 더 즐거운 목소리를 냈다.
“그때 내가 얼마나 놀랐는 줄 알아?”
“제자리에서 폴짝폴짝 뛰었잖아요. 토끼처럼.”
“어떻게 안 그래. 진짜 너무 대단하고…… 또 너무 멋있어서. 그래서 감당이 안 됐단 말이야.”
딜라일라는 그때를 재현하는 것처럼 제자리에서 폴짝 뛰어 보였다. 그러다 중심을 잃어버리고 비틀거리는 그녀의 어깨를 에릭이 붙잡았다. 얼떨결에 반쯤 안긴 딜라일라가 푹 그의 품에 몸을 기댔다.
“전에도 이랬던 적 있는 것 같은데. 에릭 네 방에서. 네가 내 뒤에 서 있었고…….”
“누나가 뒷걸음질 치다가 제 발을 밟았고요.”
“맞아, 그랬지.”
에릭의 허리를 꼭 껴안았다가 놓아준 딜라일라가 뒤로 한 발짝을 뗐다. 그들이 나누고 있는 지난날과 달리 에릭은 그녀의 앞에 서 있었기 때문에, 뒷걸음질을 치자 그만큼 멀어졌다. 그러고 보면 에릭은 딜라일라의 앞에 서 있었던 때보다 뒤에 서 있었던 때가 더 많았던 것 같다.
“내가 뒤에서 안아서 붙잡은 적도 있었는데.”
“아…….”
“안 놔줄 거라고, 막.”
졸졸 흐르는 물소리가 별안간 그들 사이를 가로질렀다. 에릭이 입을 다물었기 때문이었다. 딜라일라는 눈썹을 찡긋거리다가, 에릭이 어쩌면 수줍어하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날, 에릭은 고백을 했으니까.
“그때, 내가 대답 못 하고 울어 버려서…… 놀랐어?”
“……아뇨.”
누나는 처음 찾아온 날부터 울었잖아요.
조금 늦게 나온 대답에 뒤이어 흘러나온 이야기는 정말로, 정말로 깜짝 놀랄 만큼 오래전에 있었던 일처럼 여겨졌다. 그때로부터 일 년도 지나지 않았는데 어째서일까. 일 년도 안 되는 동안 그들 사이에 너무 많은 일이 있어서 그랬을까?
딜라일라와 에릭은 그대로 그들 사이에 있었던 이야기들을 함께 하나하나 떠올렸다. 때로는 에릭이 입을 꾹 다물기도 했고, 가끔은 딜라일라가 손을 들어 더운 뺨을 가리기도 했다. 어쨌든 그들은 그 짧은 시간 사이에 서로에게 부끄러운 모습도 보였고, 남들에게는 보이지 않은 것도 많이 드러냈다. 그래서 함께 나눌 이야기가 너무, 너무 많았다. 어떻게 그 사이에 이렇게나 많은 일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하지만 이야기에는 결국 끝이 찾아와야만 하는 법이고, 시간은 그들을 기다려 주지 않는다.
분홍색 구름이 천천히 보랏빛으로 물들었다. 온 세상을 뒤덮은 금빛 햇살의 베일이 희미하게 걷히고, 그 대신 지평선에서부터 밀물처럼 푸른 어둠이 차올랐다. 머리 위에는 아직까지 아름다운 석양이 자리했지만, 발치에는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밤과 낮의 경계에 서 있던 그들에게 서서히 밤이 찾아왔다.
그들이 추억을 쌓아 왔던 일 년간 그렇게나 기다렸던 밤이 찾아오는 순간이 이렇게 야속할 줄은 몰랐다. 제자리에서 몇 번을 돌고 돌던 그들은 결국 이야기의 끝을 맺어야 하는 순간을 맞이했다.
“내가 매번 어떻게 찾아갔는지, 아직 모르지?”
“…….”
“알려 줄게, 저기 보여? 내 방은 저기 삼 층인데…….”
“알아요.”
뚝. 딜라일라의 목소리가 끊어졌다. 자그만 손가락을 길게 펴서 여자 기숙사 쪽을 가리키고 있던 그녀가 천천히 손을 내렸다. 아래로 툭 떨궈지기 전에 에릭이 그 손을 붙잡았다.
“알아요. 누나가 얼마나 힘들게 나를 찾아왔는지.”
“모를 줄, 알았는데.”
잡힌 손이 떨렸다. 딜라일라는 그의 손아귀에서 자신의 손을 빼내려고 했다. 하지만 에릭의 손에서 힘이 풀리지 않았다. 언제나 그녀를 부드럽게 감아쥐던 손이었다. 그녀가 당기면 당기는 대로, 밀면 미는 대로 끌려다니던 에릭의 손이 이번만큼은 그녀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얼마 전까지는 몰랐는데…… 이제 알아요.”
왜 그 말이 사랑한다는 고백처럼 들리는 것일까.
딜라일라의 눈가에 눈물이 차올랐다. 내내 애써 웃고 있던 그녀의 얼굴이 와글와글 구겨졌다. 몇 번이나 뺨에 힘을 주고 입술을 말아 올리려 했지만, 도저히 웃어지지 않았다. 반쯤 어둠에 잠긴 장미 정원의 풍경이 흐릿하게 일그러졌다. 어둠이 아니라 물속에 잠긴 것처럼 일렁이는 풍경이…….
아, 안 돼.
“항상…… 항상 내가 찾아갔으니까.”
참으려고 했던 말이 결국에는 딜라일라의 입 밖으로 터져 나오고 말았다. 햇볕에 데워진 뺨 위로 미지근한 눈물이 도르륵 굴러 턱 끝에 맺혔다. 딜라일라는 그것을 닦아 낼 여력이 없었다. 제멋대로 움직이는 입술조차 막지 못하고 있는데, 손을 들어 눈물을 닦을 수 있을 리가. 에릭은 여전히 그녀의 손을 꽉 붙들고 있었다. 딜라일라는 결국 그의 손을 힘주어 맞잡았다.
“그러니까 다음에는.”
매달리듯이.
“다음에는 에릭 네가 날 찾아와 주면 안 될까……?”
“하지만.”
“기다릴게.”
손가락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딜라일라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힘이 너무 들어가서 부들부들 떨리는 것 같기도 했다. 아니, 어쩌면 떨고 있는 것은 에릭일지도 모른다. 그의 손에도 힘이 잔뜩 들어가 있으니까. 커다란 손의 마디마디가 하얗게 질릴 정도로.
“기다릴 테니까…….”
결국 딜라일라는 눈물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마지막 석양빛에 반짝이는 눈물을 따라 뺨 위로 젖은 길이 생기고, 일렁이던 눈앞이 순간 맑아졌다. 맑아진 시야에는 온통 금빛이 가득했다.
어둠에 잠기면서도 태양처럼 빛나는 에릭의 눈동자. 이제 흐려지고 있는 햇살을 묶어 둔 듯이 반짝이는 캐러멜 빛 머리카락.
다시 눈물이 차올랐다. 금빛으로 일렁이는 시야에 푸른빛이 가득 찼다. 그녀를 끌어안은 품에서는 언제나처럼 서늘한 풀잎 향기가 났다.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기다리지 마요.”
“……흐, 읏.”
에릭의 팔이 그녀의 어깨를 휘감았다. 숨이 막힐 정도로 세게 휘감긴 무게가 반가워서, 딜라일라는 그를 마주 안을 수밖에 없었다.
“기다리는 건 너무 어렵고 힘든 일이니까.”
“흑, 흐으…….”
“그냥, 그냥 있어요.”
울음 말고는 아무것도 토해 내지 못하는 그녀에게 에릭이 가쁘게 속삭였다. 내내 짧기만 하던 그의 말이 조금씩 조금씩 길어지는 게 얼마나 기뻤는지 그는 알까. 항상 그녀가 먼저 손을 뻗었지만, 먼저 말을 걸었지만, 그래도 매번 착실하게 대답을 돌려줄 때마다 얼마나 행복했는지 알까.
먼저 붙잡아야 했던 것 따위는 아무 문제도 없었다. 에릭은 언제나, 언제나 그랬듯이 충실하게 그녀에게 답을 돌려주었으니까. 막무가내로 떼를 써도 장난을 쳐도 절대 그녀를 무시하지 않았으니까. 도망치려고 하다가도 끝내는 그녀에게 돌아오니까.
“찾아갈게요.”
그리고 끝내 그를 놓아주지 못하고 욕심을 내 붙잡는 그녀에게, 힘들고 가망 없는 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이렇게 속삭여 주잖아.
“찾아갈 테니까…… 그때까지, 그냥 있어요.”
“흑, 으응.”
“울지 말고…….”
찾아갈게요. 내가 갈게요. 기다리지 말고, 울지 말고 있어요.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울지 말고. 좋아하는 책도 읽고, 차도 마시고. 울지 말고. 찾아갈 테니까…….
조각조각 쪼개진 말이 그녀의 어깨 위로 떨어져 내렸다. 처음에는 어색하기 짝이 없게 그녀를 안아 달래 주던 손은 익숙하게 그녀의 등을 토닥이지도 못하고, 다시는 놓지 않을 것처럼 세게 끌어안았다. 그의 팔에서 힘이 풀려 나갈 때마다 다시 눈물이 흘렀다. 그래서 에릭은 그녀를 놓아주지도 못하고 계속해서 그녀를 안고 있었다. 어둠이 내리고, 딜라일라의 젖은 헐떡임이 잦아들 때까지.
그러나 그의 팔이 풀려 나가자 숨이 다시 차올랐다.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다시 흘러내렸다. 뺨이 온통 다 젖어 있었다. 에릭이 입은 푸른 제복 재킷의 가슴팍도.
포옹 대신 키스가 그녀의 울음을 막았다. 채 막지 못해 새어 나오는 것은, 그가 받아 삼켰다. 어둠 속으로 숨결이 잦아들고 눈물이 녹아내렸다. 이제 사위에는 그녀의 눈물을 반짝이게 할 빛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또 밤이 다 되고 나서야 키스해 주고.”
결국 그녀가 눈물을 그치고, 다 막혀 가는 것 같은 목소리를 짜내 뱉어 낸 말에 허탈한 웃음소리 비슷한 것이 돌아왔다. 너무 많이 울어서, 이제는 울 힘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차라리 웃었다.
“다시 찾아오면 그때는 햇살 밑에서 입 맞춰 줘.”
“네.”
정말로 그가 찾아올 거라는 기대는, 사실 하지 않지만. 기다리지 말라고도 했지만. 그래도 그렇게 말해 준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언젠가 에릭은 정말로 단단하고 멋진 어른이 되어서 그녀의 앞에 나타날 테니까. 어떤 식으로든.
“그럴게요.”
그러니까 마지막에는 웃었다. 할 수 있는 한 가장 예쁘게.
“그럼 그때까지.”
딜라일라가 뒤로 한 발짝을 내디뎠다. 에릭이 한 발짝만큼 멀어졌다. 한 발짝 더 멀어지자, 에릭이 움찔 발을 뗐다. 하지만 그가 다시 그녀에게 다가오기 전에 딜라일라는 홱 등을 돌렸다. 완전히 어두워진 장미 정원에는 은은한 달빛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어렴풋하고 흐릿하게 멀어지는 풍경 사이로 향기와 소리만이 선명했다.
영원히 이 풍경을 잊지 못할 거야.
“안녕.”
딜라일라는 한 발짝, 한 발짝앞으로 발을 내디뎠다. 뒤에서 그녀를 쫓아오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딜라일라는 장미 정원의 입구에 다다라서야 뒤를 돌아보았다.
달빛 내린 장미 정원의 오래된 분수대 앞에 서 있는 에릭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흐릿하게 일렁이는 것 같아서, 딜라일라는 몇 번이나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다시 등을 돌려 정원을 완전히 빠져나갔다.
그녀는 달리고, 달렸다. 아카데미의 입구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 마차까지 쉬지 않고 달렸다. 눈물에 젖어 헐떡이던 숨이 다 말라 버릴 때까지, 뒤를 쫓아오는 것으로부터 도망치는 사람처럼 달렸다. 그녀를 쫓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으나, 그러지 않으면 발이 붙들리고 말 것 같았다. 마침내 그녀는 마차에 뛰어들어 가쁜 숨을 다 고르기도 전에 마차 벽을 두드렸다. 바퀴가 자갈을 튕겨 내며 구르기 시작했다.
푹신한 쿠션 위에 주저앉은 그녀가 창밖을 내다보았다. 빠르게 멀어지는 풍경 저 너머에 누군가의 그림자가 어렴풋이 비치는 것 같았다. 훌쩍 키가 크고, 널찍하고 단단한 그림자. 이제 딜라일라에게는 익숙한, 그리고 앞으로는 보지 못할 그림자. 어쩌면 지금이 그를 볼 수 있는 마지막 순간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딜라일라는 마차를 멈춰 세우지 않았다. 언제나 멀어지려 하는 것은 에릭이었고 그보다 더 빨리 달려가 붙드는 것은 딜라일라의 몫이었지만, 이제는 그럴 수 없었다.
그러니까 언젠가는 네가 나에게 달려와서, 네 눈동자처럼 화려한 금빛 태양 아래에서 키스를 해 주는 상상을 할게.
그때까지, 안녕.
* * *
달려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붙잡으려면 붙잡을 수 있었다. 하지만 에릭은 그녀의 뒤를 쫓으면서도 끝까지 그녀를 붙잡지는 않았다. 지금은 그녀를 붙잡아도 끝내는 떠나보내야만 하니까. 그것을 알아서, 그녀가 달리고 있으니까. 그는 결국 멀어지는 마차의 뒷모습을 보면서 멈춰 섰다.
마차 바퀴가 구르며 자갈을 튕겨 내는 소리가 멀어지고, 멀어지고, 또 멀어져서. 끝내는 들리지 않게 될 때까지 그는 그 자리에 망연히 서 있었다.
사위가 적막으로 물들고, 어둠이 그를 감쌌다. 어디선가 벌레가 울고 새가 날갯짓했다. 달빛이 시원하고 별빛이 차가웠다. 더운 낮에는 좀처럼 불지 않던 바람이 어둠을 타고 흘러들었다. 에릭은 등을 돌려 마차가 달려나간 반대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마법 등이 꺼진 본관을 지나고, 햇빛이 아닌 달빛이 들어찬 갈래 길을 지났다. 달려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걸음은 느려서, 그의 발걸음이 닿은 곳마다 에릭의 마음이 툭툭 떨어졌다. 저 멀리 포플러 나무 숲에 가려진 기숙사의 하얀 석벽이 보일 때에도 그는 피처럼 눈물처럼 마음을 떨어뜨리며 걸었다.
쏴아아…… 불어오는 바람에 무거운 이파리가 휩쓸리는 소리가 났다. 그는 불현듯 달빛 내린 포플러 나무 숲을 돌아보았다가, 기숙사로 걸어 들어갔다. 재학생도 졸업생도 모두 떠난 기숙사에 에릭은 홀로 떠나지 않은 마지막 학생이었다. 이제 그의 방으로 돌아가서, 그도 짐을 챙겨 떠나야 했다.
본관 옆, 외부 통로를 지나 남자 기숙사로 들어서자 발걸음 소리가 벽에 부딪쳐 메아리를 울렸다. 겹치고 겹쳐서 끝내 복도 전체를 울리는 공허한 소리의 파문을 뚫고 그는 계속해서 걸었다. 계단을 올라, 이 층 복도의 끝까지 그는 멈추지 않았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등불을 켜 둔 채로 나갔던 탓에 눈부시도록 환하게 밝은 방 안의 풍경이 그에게 닥쳐왔다. 그는 그 풍경 속으로 들어섰다. 그의 등 뒤에서 문이 닫혔다.
소리도 없이 눈물이 툭 떨어졌다.
밤이 그곳에 있었다.
그녀와 함께했던 수많은 밤이 있었다. 끝내 사랑한다고 말하지 못했어도, 그녀를 사랑했던 수많은 밤이. 끝까지 제대로 눈치도 채지 못했으면서 사랑받았던 밤이 있었다.
텅 빈 테이블이 있었다. 덩그러니 놓인 마법 포트가 있었다. 찻물이 들어 이제는 붉은빛이 감도는 하얀 자기 찻잔이, 텅 비어 버린 찻잎 캔이 있었다. 어질러진 적이 없었던 것처럼 차곡차곡 한쪽에 정리된 책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침대 머리맡에 쌓여 있는, 그가 꺼낸 적이 없는 소설책이. 침대 곁 카펫에 쏟아졌던 찻물의 얼룩이.
전부 그녀를 사랑했던 밤이었다. 방 안 가득히 찬 공기도, 향기도, 주름진 침대 시트와 등불의 빛도. 어느 것 하나 그녀와 함께 보낸 밤의 흔적이 아닌 것이 없었다.
더 이상 걸음을 옮기지도, 그 자리에 주저앉지도 못한 에릭은 제 방 문에 기대서서 움직일 줄을 몰랐다. 그가 손끝이라도 움직이면 그녀와 함께 보냈던 그 밤이, 수많은 밤들이, 흔적들이 전부 먼지로 변해 흩어져 버릴 것 같았다. 오래된 석상처럼 굳어진 채로, 그는 눈물만 떨어뜨렸다.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이 조각난 마음인 것 같았다. 그렇게 떨어지고 떨어져서, 끝내는 텅 빌 때까지 흘려 버리고 나면 나아질까.
그러나 아무리 눈물을 흘려도 마음은 비워지지 않았다. 가슴속에 꽉 찬 것이 자꾸만 울컥울컥 새어 나왔다. 미적지근하고 투명한 액체가 늘 그녀가 서서 그를 돌아보곤 하던 자리 위로 떨어져 동그란 얼룩을 그렸다.
끝내 에릭은 무엇 하나 챙기지도 못한 채로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제 방을 돌아 나왔다. 졸업식이 끝나고 나면 겨울보다도 더 긴 여름휴가가 있으니까. 그리고 졸업식은 끝이 났고, 그녀는 떠났다. 이제 그가 떠날 차례였다. 휴가 동안에는 그도 브라이어 저택으로 돌아가 있을 예정이었다. 물론 오딜의 손에 이끌려 또 어딘가로 가게 될지도 모르지만…….
결국 그는 이곳으로 돌아오게 될 것이다.
다시 돌아오면 그녀와 함께했던 짧은 여름은 끝나고, 가을이 찾아올 것이다. 그녀와 처음 만났던 때처럼, 밤이면 풀벌레가 울고 서늘한 바람에 씻긴 하늘이 파랗게 높은 가을이 찾아올 것이다. 하지만 딜라일라 에리카는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에릭은 정처 없이 걸었다. 텅 빈 교정은 끝 간 데 없이 적막하고 너무나도 어두워서, 마치 온 세상에 혼자 남겨진 것처럼 느껴졌다. 분명 전에도 이런 기분을 느낀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때는 딜라일라가, 그녀가 그를 찾아주었는데.
견딜 수가 없었다.
결국 교정을 벗어나 브라이어 저택으로 돌아가기 위한 마차를 탔을 때, 에릭의 양 뺨은 눈물이 말라붙은 흔적으로 엉망이 되어 있었다. 그는 그것을 닦아 낼 생각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창문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풍경을 향해 시선을 고정했다. 그러나 그의 시야에 담기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텅 빈 어둠뿐.
그 방에 두고 온 것이 모든 밤인 것 같았다 그녀와 함께 보냈던 여름인 것 같기도 했고, 그녀를 밀어내기에 바빴던 봄인 것 같기도 했다. 또는 그녀와 처음 입을 맞추었던 겨울이거나, 아니면 처음 만났던 가을이거나.
그리고 어쩌면, 그의 영혼 같기도 했다.
그러니까 당연한 일이다. 영혼을 버려 두고 온 이가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것은.
달리는 마차 안에서 에릭은 지친 머리가 까무룩 정신을 놓아 버리려는 것을 애타게 붙들었다. 잠이 들지 않으면 그녀가 떠나간 오늘이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지만, 애초부터 이성 따위는 잃은 지 오래였다.
어젯밤에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 문틈으로 끼워진 쪽지를 발견했을 때 그는 황급히 문을 열었지만, 이미 복도는 텅 비어 있었다. 또 한 번, 위험한 길을 좇아 그에게 전하고 가 버린 마음은 그녀의 글씨처럼 단정하고 날렵하기 짝이 없어서, 그는 그것을 붙들고 밤을 까맣게 새웠다.
이윽고 찾아온 아침, 그는 사실 제복을 챙겨 입기까지는 했으나, 차마 졸업식에는 참석하지 못했다. 그가 떠나보낼 사람이라곤 딜라일라뿐이었으니 그깟 것에는 참석하지 못해도 상관없었다. 이제 와 후회가 들었다. 먼빛으로라도 그녀의 뒷모습을 지켜보았으면 좋았을 것이다. 그렇게 한 조각이라도 눈 안에 더 새겨 두었어야 했는데.
그는 방 안에 정물이나 그림처럼 가만히 앉아서 시간을 세었다. 마치 딜라일라가 찾아올 밤을 기다리던 때와 똑같이. 창 너머로 졸업생들이 인사를 나누는 왁자한 소리, 휴가를 맞이한 재학생들이 떠나는 소리가 전부 사라질 때까지.
끝내 더 이상 미루지 못할 때가 되어서야 그는 딜라일라를 찾아 장미 정원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딜라일라는, 언제나 그랬듯이 사랑스러웠고…….
끝을 예감한 사람답게 그들에게 있었던 과거를 되짚으며 웃다가, 끝내 울음을 터뜨렸지. 에릭은 차마 그녀를 따라 울 수도 없었다.
“항상…… 항상 내가 찾아갔으니까.”
그의 손안에서, 자그맣고 말랑한 손이 꼼지락거리던 감각이 선명했다. 아직도 그의 손안에 그녀의 손이 붙잡혀 있는 것처럼. 하지만 그의 손은 텅 빈 허공을 헤집을 뿐.
“다음에는 에릭 네가 날 찾아와 주면 안 될까……?”
그러나 허공을 헤집는 손끝에 기어코 딜라일라의 젖은 목소리가 걸렸다. 손에 잡힐 듯이 생생한 그녀의 목소리는 그의 손끝에 남아 있는 체온의 잔상으로 스며들어서, 서서히 에릭의 몸 전체로 휘돌았다.
“기다릴 테니까…….”
허겁지겁 그녀에게 기다리지 말라고 말했던 것은, 그녀를 기다리던 시간들이 그에게 고통이어서가 아니었다. 그 가을부터 여름까지, 딜라일라가 찾아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에릭은 늘 안절부절못했고 무엇 하나에도 집중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그래도 그녀가 찾아오는 것을 기다리는 것마저도 행복했다. 결국에는 다시 그녀가 와서, 그의 앞에서 언제나 그랬듯이 말갛게 웃어 주리라고 생각하면 복잡하게 뒤엉키는 머리와 무너진 이성마저 기꺼울 정도로 행복했다.
“찾아갈 테니까…… 그때까지, 그냥 있어요.”
그러니까 딜라일라도, 언젠가 그가 찾아가리라고 생각하면 조금은 덜 아플지도 몰라서.
찾아갈게요. 내가 갈게요. 기다리지 말고, 울지 말고 있어요.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울지 말고. 좋아하는 책도 읽고, 차도 마시고. 울지 말고. 찾아갈 테니까……. 조각난 말을 토해 내면서 그녀를 안을 수밖에 없었다. 품 안에서 북받쳐 오르는 울음으로 떨리던 어깨의 감촉이 그의 마음을 긁어내렸다.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 이미 떠나간 감촉을 곱씹는 동안 창밖으로는 밤이 다 새고, 새벽이 밝아 왔다. 어둠을 씻어 내고 물이 차오르는 것처럼 파르스름하고 투명한 빛이 천천히 스며들어서, 창문 틈으로 새어 들어왔다. 기절하듯 잠들었다 깨고, 그러면 다시 딜라일라의 뒷모습을 곱씹다가 까무룩 잠들기를 반복하던 에릭은 눈꺼풀 너머를 발갛게 붉히는 빛에 문득 정신을 차렸다.
“다시 찾아오면 그때는 햇살 밑에서 입 맞춰 줘.”
어둠에 잠겨 있던 마음에 마지막으로 찾아온 딜라일라의 목소리가 햇살처럼 떠올랐다.
딜라일라가 자신을 찾아와 달라고 한 일은, 분명 그녀 역시 어려울 거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쏟아지는 분홍빛 머리카락. 눈을 접어 웃을 때면 연한 하늘색으로 흐려지는 호수 빛 눈동자. 보드라운 피부와 통통한 뺨. 자주 붉어지는 귓바퀴와 말랑한 몸. 그에 비하면 턱없이 작고 동그란 어깨와 조그마한 손과 발. 종달새처럼 재잘대는 가느다란 목소리. 그에게 어느 날 기적처럼 찾아왔던 것. 딜라일라 에리카.
그녀를 만나기 이전에 에릭 브라이어에게 있었던 것은 그저 휩쓸리듯, 할 수 있는 것만을 손에 쥐고 나머지는 모두 놓아 보내며 살아온 생이었다. 그러나 딜라일라 에리카를 만났다. 그녀를 만나고 난 뒤부터 지금껏 손을 놓고 흘려보내던 것들이 에릭에게 물밀듯 닥쳐 들어왔다. 처음 겪는 사랑은 폭력적일 만큼 그를 몰아붙였다.
끝내 다시 떠나보내기로 했던 것은 그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어쩌면 어쩔 수 없다는 것조차 그저 말도 안 되는 변명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떠나보낼 생각만 하는 그를 두고 딜라일라는 다시 찾아와 달라 말했다. 어느 날 찾아와서는 그가 가진 적 없던 수많은 격정을 선물하고 대신 그의 마음을 가져가 버린 주인이.
언젠가 햇살 아래서 입 맞춰 달라고. 눈물에 잔뜩 젖은 뺨을 하고서, 어깨를 떨며 한참을 울다가도 끝내는 그렇게 말했다.
자신의 존재가 그녀에게 오점인 것만 같아서, 항상 손을 뻗기가 무서웠다. 먼저 찾아갈 수도 없었다. 그 때문에 그녀의 삶이 망쳐질까 봐. 쉬이 지워지지 않는 얼룩처럼 남을까 봐. 에릭의 손에 튀어 있던 잉크처럼, 그녀의 잠옷 가슴팍에 쏟아졌던 찻물처럼 물들어서 끝내는 버려지게 될까 봐.
다른 사람들의 눈앞에서 그녀와 나란히 설 때면 언제나 자신이 작아지는 기분이었다. 모두가 그를 두고 감히 그녀와 나란히 설 수 있는 주제가 되느냐고 비웃거나, 혹은 비난하리라고 생각했다. 흔들린 적 없었던 이성은 그녀의 곁에 설 때만큼은 쓸모가 없었다.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아도 자신은 그녀에게 한참이나 모자랐다. 그 이상을 감당하기에는 그는 너무 어렸다.
하지만…… 어떻게 종이 주인의 뜻을 거스를 수 있지? 마음을 통째로 가져가 버린 주인의 뜻을, 마음을 빼앗기고 그녀에게 종속되어 버린 그가 어떻게 거스를 수 있겠느냔 말이다.
덜컥, 마차가 멈추었다. 하룻밤을 꼬박 새워 달린 끝에 브라이어 저택의 앞에 도착한 것이다. 에릭은 이유 없이 조금 머뭇거리다가, 마차의 문으로 손을 뻗었다.
끼익……. 기름칠이 덜 된 마차의 문이 소리를 내며 열렸다. 그 너머에는 아침 햇살이 가득한 세상이 있었다.
그 세상으로 한 발을 내디뎠다. 석양빛과도 새벽빛과도 다른, 명백하게 그에게 내리꽂히는 햇빛은 눈부시도록 하얗게 반짝였다.
그녀가 그에게 준 세상이었다. 언제나 밤의 어둠과 푸른 그림자 아래에 숨어서 햇살 아래를 훔쳐보던 에릭 브라이어에게 손을 저어 보이던 딜라일라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환하고 반짝이는 것들 사이로 사라지던 그녀의 뒷모습을, 그는 여전히 잊지 않았다.
그러나 딜라일라는 말했다. 언젠가 그 햇살 아래로 찾아와서, 자신에게 입 맞추어 달라고.
그가 도착한 줄도 모르고 조용히 잠들어 있는 저택으로 들어선 에릭은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사실 그의 방은 침실이라기보다는 개인 연구실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어울릴 법한 공간이었다. 온갖 곳에 늘어진 실험 용구와 책 더미, 가득 쌓인 연구 용지와 잉크의 냄새가 났다. 침대는 그 사이에 곁다리로 끼워진 모양새였다.
침대 위에 털썩 몸을 누인 에릭이 눈을 감았다. 밤새 다 말라 버린 줄 알았던 눈물이 다시 한번 툭 떨어져 베개를 적셨다. 침구에서는 오랫동안 아무도 사용하지 않은 탓인지 마른 먼지 냄새가 났다. 그는 먼지가 날리는 것도 신경 쓰지 않고 대충 이불을 뒤집어썼다.
그녀가 명했으니 그가 따를 차례였다.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그렇게 해야만 했다. 그녀의 뒤를 쫓고 마침내 붙잡아 품에 안을 수 있을 만큼, 그는 자라야 했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역시 조금 힘들었다. 에릭은 몸을 둥글게 말고 젖은 눈을 몇 번 깜빡인 뒤에, 다시 내리감았다.
그녀가 빼앗아 간 마음이 비어 있는 자리에 바람이 들었다. 그 바람이 너무 차가워서, 그로 하여금 이불을 덮고 몸을 옹송그릴 수밖에 없게 했다. 여름인데도 겨울처럼 추웠다.
어쩌면 마음이 비워진 자리에 드는 바람을 사람들은 외로움이라고 부르는지도 모른다.
그 외로움이 결국에는 그를 성장시킬 테지만, 지금은 조금 견디기 힘드니까. 소년이 어른으로 자라기 위해서는, 조금의 휴식 정도는 필요할 테니까.
지금은, 조금 쉴게요. 정말로 조금만. 이 여름이 끝날 때까지만. 그러고 나면 꼭 어른이 되어서, 누구도 막아설 수 없을 만큼 단단하게 커 버린 어른이 되어서 다시 찾아갈 테니까…….
그때까지, 안녕.
* * *
여름 내내 에릭은 넋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멍하니 시간을 흘려보냈다. 오딜이 언제나처럼 브라이어 남작의 눈살을 피해 어딘가로 그를 끌고 떠나려 했지만, 그것마저 거절했다. 그는 제 방에 틀어박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것도 듣지 않고, 아무것도 보지 않았다.
“에릭…… 멍청하고 모자란 동생아.”
“…….”
“연구도 때려치웠니?”
“…….”
“말을 말자…….”
때로 오딜이 그의 방을 찾아와서 말을 걸고, 짜증을 내다가 돌아가는 일도 있었다. 하지만 에릭은 묵묵부답으로 그녀를 돌려보냈다.
그저 기계처럼 지속해 나가는 일상이 반복되었다. 멍하니 시간을 보내고, 습관처럼 밥을 먹었다. 그러다가 석양이 지고 밤이 밀어 닥쳐오면 침대에 몸을 파묻었다. 밤이 깊고 새벽이 찾아와도 좀처럼 잠드는 법이 없었던 그는, 이제 밤이 찾아오기도 전에 잠으로 도망쳤다.
딜라일라와 함께했던 밤은 모조리 그 기숙사 방에 두고 왔으나, 그녀는 에릭에게서 나머지 밤조차 앗아 갔다. 그는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다. 아니, 준비를 하는 중이었다. 그녀 없이 보내야 하는 새로운 밤을 받아들일 준비를.
그리하여 그에게 남은 것은 수많은 날들 뿐이었다. 해가 떠 있고, 무의미하게 시간을 죽이는 날. 그 낮만큼은 그에게 온전했다. 딜라일라가 밤을 앗아 간 대신 그에게 선물한 낮이었다.
그래서 에릭은 햇살이 강한 오후면 때로 창문을 활짝 열어 놓고 창가에 앉아 햇살을 쪼이곤 했다.
유령처럼 숨을 죽이고 햇살을 맞는 에릭의 모습을 본 오딜은 그를 두고 떠나지도 못해 브라이어 저택에 남아 있었다. 때로 그의 방문 너머에서 오딜이 브라이어 남작과 싸우는 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하지만 에릭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의 생각은 조금 더 먼 곳에, 먼 미래에 향해 있었다.
몇 번인가 브라이어 남작을 마주치기도 했지만, 언제나처럼 서늘한 시기와 미묘한 증오를 뒤섞어 아들을 바라보는 제 아버지의 시선에도 에릭은 굳이 반응하지 않았다. 딜라일라로 인해 자신의 내면에 숨겨져 있던 많은 것을 자각하게 된 에릭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을 미워하는 부모를 향한 애정이 갑자기 생겨나는 것도 아니었다. 이전처럼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것은 아니었으나, 이전만큼도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그렇게 햇살만을 받아들이며 숨죽인 채 보낸 여름이 물러가기 직전이 되어서, 에릭은 다시 셰 상브르로 돌아가는 마차에 탔다.
한 달이 넘도록 긴 휴가를 끝내고 돌아온 셰 상브르에는 여름이 마지막 발악을 하는 것처럼 짙은 녹음을 피워 올리고 있었다. 무심코 진저리가 쳐질 정도로 푸른 나뭇잎들과 떨어지기 직전의 무르익은 꽃봉오리들이 제각기 강렬한 향기를 뿜어내며 그를 에워쌌다.
그래도 그는 괜찮았다.
죽은 듯이 조용히 보낸 여름은 그에게 마음의 안정을 가져다주었다. 무심하기만 하던 때와 겉모양만은 비슷했지만, 적어도 그 속은 완전히 달랐다. 그는 그 여름 동안 자신의 마음을 제대로 소화해 받아들였다. 그렇게 제 마음을 제대로 붙들고 돌아와 셰 상브르의 교정을 보자, 오히려 그는 더 안정된 기분을 느꼈다. 이제야 땅에 뿌리를 내린 식물처럼.
그는 돌아와야 할 곳으로 돌아왔다. 그런 기분이었다. 셰 상브르 아카데미는 그녀와 함께했던 네 개의 계절을 품은 장소이기도 했지만, 자신을 천천히 성장시켜 그녀의 곁으로 향하게 해 줄 장소이기도 했다.
보통 곧 있을 입학식에 참여한 뒤에 기숙사에 가서 미리 보내 둔 짐을 정리하곤 하기 때문에, 학생들은 전부 제복 차림이었다. 에릭 역시 그랬다. 새로 들어오는 학생들이야 아무래도 좋지만, 에릭은 그래도 입학식에 참석하기로 마음을 먹고 있었다. 그녀가 떠나간 졸업식에 참석하지 못한 대신이라고 생각하면, 조금 이상할까?
“오랜만이다!”
“아, 내 휴가 돌려줘. 왜 벌써 끝난 거야…….”
“남부라도 다녀왔냐? 얼굴이 탔잖아!”
“잘 지냈어?”
마차가 정차한 주위에는 휴가를 마치고 돌아와 친구들과 인사를 나누는 학생들이 만들어 내는 즐거운 소란이 가득했다. 한쪽 구석에서는 새로이 셰 상브르에 입학하는 신입생들이 쭈뼛거리며 모여 서서 저들끼리 새로운 친목을 다지며 눈치를 보고 있었다. 어느 쪽이든 그가 낄 곳은 없었기에, 에릭은 천천히 사람들의 무리를 벗어나 먼저 본관의 홀로 향하기 위해 발을 뗐다.
“저 자식은 오랜만에 봐도 재수가 없어…….”
“지난 학기에 뭐 대단한 거라도 할 것처럼 야간 실험 허가까지 받더니, 아직까지 아무것도 못 했다며?”
그를 탐탁찮게 여기는 목소리들이 당연하다는 듯 그의 뒷모습에 따라붙었다.
딜라일라가 있는 동안 남몰래 강도를 높여 왔던 그를 향한 미움은 그녀가 떠나간 뒤에도 여실히 남아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무심하게 그것들을 흘려 넘기는 에릭 역시 전과 다를 바 없이 그대로였다.
달라진 점은 에릭을 헐뜯는 이들을 못마땅하게 쳐다보는 사람이 조금 늘었다는 것. 그리고 그런 힐난의 눈길에 반발이라도 하는 것처럼 그를 헐뜯는 목소리들이 괜히 더 날카롭게 변했다는 것 정도.
에릭은 그 모든 것들을 조금 생경한 기분으로 받아들였다. 그를 헐뜯는 이들에게 향하는 시선은 물론이고, 날카롭게 그의 뒤통수를 찌르는 비난의 목소리조차도 어째서인지 낯설었다. 세상으로부터 차단되어 있던 귀가, 눈이, 촉각마저 새로이 열린 것 같았다.
“뭐, 뭐야?”
천천히 걸음을 옮기다 문득 발을 멈춰 세운 그의 행동에 남학생들의 목소리가 당황했다. 언제나 반응 한 조각 없이 묵묵히 그들을 무시하기만 하던 그가 내보낸 아주 조그만 반응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에릭은 다시 걸음을 옮기는 대신 뒤돌아섰다. 언제나 그의 뒤에 꽂히던 날카로운 시선을 정면으로 받아 내는 에릭의 표정은 분명 전과 같이 무심했다. 그러나 그 무심한 시선에는 분명 전과 다른 온도가 있었다. 아무런 무게도 감정도 없이 그저 유리 너머에 있는 풍경을 구경하듯 스쳐 가던 시선이, 이제는 분명하게 그의 눈앞에 있는 것들을 훑었다.
“우리가 뭐 틀린 말이라도 했냐?”
“이제 네 편 들어주던 에리카 선배님도 안 계시거든? 건방지게…….”
그를 비난하던 남학생들이 그러잖아도 커다랗던 목소리를 더 높였다. 어린아이가 막무가내로 떼를 쓰는 것처럼 악을 쓰는 목소리가 기어코 딜라일라의 이름마저 끄집어냈을 때까지, 반가운 인사와 어색한 수군거림으로 가득했던 소란마저 멎었다는 사실도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그만해.”
조용한 가운데 에릭의 목소리가 낮게 울려 퍼졌다. 그들처럼 크지도, 하지만 작지도 않은 목소리는 선명했다.
“지금까지는 상관없었지만, 앞으로도 참아 주지는 않을 거니까.”
“저, 뭐……!”
“재수 없는 새끼, 다시 말해 봐!”
“그만 좀 해!”
순식간에 얼굴을 벌겋게 붉힌 남학생들이 왁왁 소리를 지르기 시작하자, 결국 그들을 지켜보고 있던 다른 학생들 사이에서도 그들을 만류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뭐든 적당히 해야지, 꼴불견이야, 진짜.”
“그러니까, 브라이어가 잘생겨서 질투하는 거라니까…….”
“셰 상브르의 학생답게 처신하라고. 우리까지 망신시키지 말고!”
“에리카 선배님 이름까지 끌고 나올 일이야? 진짜 재수 없는 게 누군데.”
재빠르게 뒤집힌 상황에 당황한 남학생들이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는 중에도 그들은 분노에 찬 시선을 에릭에게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무시했다. 예전부터 무시하는 것만큼은 일가견이 있던 에릭이었다. 그는 다시 그들로부터 등을 돌리고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이익……!”
“와, 진짜 못났다…….”
“에리카 선배님한테 관심 못 받아서 저러는 거 아니야?”
“내가 다섯 살 때도 저렇게는 안 했겠다.”
혼란스러운 목소리들, 수군거림, 웅성대는 사람들. 그런 것들로부터 에릭은 말끔하게 멀어졌다. 그런 그의 뒤로 마냥 전과 같지만은 않은 시선들이 따라붙었다.
어쩐지 웃음이 날 것 같았다. 아마 딜라일라가 보았다면 눈을 둥그렇게 뜨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에릭의 편을 들어주었을지도 몰랐다. 혹은 에릭에게 달려와 잘했다고 말해 줄지도 모르지. 아니면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면서 지금까지 이런 말을 듣고 있었냐고, 왜 진작 말하지 않았냐고 말할까? 딜라일라는 그녀 때문에 에릭이 괴롭힘을 당할까 봐 걱정이 되어서 대뜸 찾아와 울었던 사람이니까.
아…… 진작에 이렇게 할걸 그랬다. 그들이 저를 미워하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그저 가만히 내버려 두기만 할 것이 아니라. 적어도 당신이 좋아해 준 만큼 나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미움받지 않을 권리가 있었을 텐데.
그렇죠, 누나.
입학식은 엄숙하게 치러졌다. 대부분의 행사를 얼렁뚱땅 짧게 넘겨버리는 셰 상브르 아카데미에서 그나마 가장 복잡한 절차를 거쳐 치러지는 것이 학생들의 졸업식과 입학식이었다. 축제의 개회식이나 폐회식 따위와 비교하면 훨씬 더 많은 식순이 차례차례 흘러가는 동안, 에릭은 그저 멍하니 상념에 빠져 있었다.
역시 그녀의 졸업식에도 참석했으면 좋았을 텐데. 그런 생각들을 하면서 그는 입학식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입학식이 끝나자 가장 먼저 신입생들이 교수의 인도를 받으며 홀을 빠져나갔다. 그들은 일단 학부별로 나뉘어 교정을 한 바퀴 돌며 안내를 받은 뒤에나 기숙사로 향할 것이다. 재학생들은 그사이 기숙사에 가서 자신의 방에 짐을 정리하면 된다. 신입생들은 졸업생이 떠나가고 비어 있는 방을 각각 배정받게 될 것이다.
그 방으로 돌아가는 에릭의 발걸음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았다. 아직 이른 오후였다. 머리 위에서 곧장 내리쬐는 햇살을 그대로 받으면서 에릭은 기숙사로 향했다.
마침내 그 방의 문 앞에 섰을 때, 그는 작게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문을 열었다. 누가 훔쳐보기라도 할세라 재빨리 방 안으로 발을 들이고, 등 뒤에서 문을 닫았다.
가장 먼저, 먼지 냄새가 났다. 한 달이 넘도록 아무도 들이지 않았던 방 안은 조금 서늘했고, 그가 떨어뜨리고 떠났던 눈물처럼 조용한 한 달 간의 부재가 바닥에 가라앉아 있었다.
그다음으로는 오래된 종이의 마른 냄새. 그리고 여름의 습기에 녹아 든 잉크의 싸늘한 냄새. 뚜껑 열린 티 캔에서 흩날리는 어렴풋한 차 향기.
부재 아래에 숨어 있던 것들이 하나둘 떠오르기 시작했다. 책장에 가지런히 꽂혀 있는 마법 공학 서적들. 한구석에 아무렇게나 밀어 치워져 있는 종이와 잉크, 만년필. 텅 빈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마법 포트. 침대 맡에 쌓여 있는 소설책. 구겨진 시트.
마지막으로 떠오른 것은, 꽃향기 같기도 하고 버터와 설탕이 타는 냄새 같기도 했다. 어렴풋이 달콤한 그녀의 향기가 아주, 아주 희미하게 났다.
마치 에릭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았다. 아니, 분명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햇살만이 가득한 여름을 보내는 동안 그녀와 함께 보냈던 밤은 이곳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전부 떠나간 그녀가 그에게 남겨 준 것들이었다. 손을 뻗어 붙잡을 수는 없어도 가슴속에 소중히 간직할 수는 있었다.
그리고 어쩌면, 그것들로 인해 성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에릭이 천천히 그 방 가운데로 걸어갔다. 괜스레 침실로 향해서 구겨져 있는 시트를 쓸어 보았다가, 침대 발치 즈음의 카펫에 남은 찻물 얼룩을 문질렀다. 옷장을 열어 보고, 책장에 꽂힌 책등을 하나하나 훑어보았다.
그리고 다시 응접실로 돌아 나와서 테이블 앞에 앉았다. 언젠가 그가 연구를 하고 있으면, 딜라일라가 종종거리며 침실에서 쫓아 나와 책 한 권을 뽑아 들고 맞은편에 앉곤 했던 그 테이블이었다. 그때와 달리 텅 비어 있는 테이블 앞에 앉아서 에릭은 물끄러미 어린 시절의 미완성품인 마법 포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종이를 펼치고, 만년필을 주워 들어 펜촉을 잉크병에 담갔다.
오랜만에 에릭은 밤을 새웠다. 딜라일라와 함께 그에게서 떠나갔던 밤은 사실 떠난 것이 아니라 이곳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으니, 그녀가 없는 밤을 받아들일 준비는 전부 끝났다.
에릭은 이제 딜라일라를 기다리지 않는다. 다시 찾아가기로 약속했으니까.
밤이 지나고, 파랗게 물들었던 어둠이 떠오르는 아침 햇살에 밀려 걷혀 나가기 시작했다. 늦여름의 찌르는 듯한 햇살이 훌쩍 높아진 하늘을 새파랗게 밝혔다. 여름 호수가 하늘에 매달려 반짝이듯, 환한 아침이 찾아왔다.
그는 마침내 새로운 날을 맞았다.
* * *
그날, 에릭을 그곳에 두고 떠나온 이후로 딜라일라는 수도 저택에 틀어박혔다. 처음에는 그동안 너무 지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쉬고 싶다는 핑계를 댔다. 얼핏 보기에 딜라일라는 꼭 그 말대로 보였기 때문에, 마가렛이나 로드릭조차 그녀를 건드리지 않았다.
딜라일라는 낮이면 춥지도 않은 날씨에 벽 난롯가에 놓인 안락의자에 앉아 담요 따위를 덮어쓰고 꾸벅꾸벅 졸았다. 그러다가도 그 모양을 본 마가렛이 안쓰럽게 잠깐 낮잠이라도 편하게 자라며 침실로 올려 보낼라 치면 괜찮다며 바스스 웃곤 했다. 그래서 마가렛이나 사용인들이 그녀를 내버려 두면 내버려 두는 대로, 다시 멍하니 앉아 있다가 졸기 시작했다.
영락없이 지쳐 있는 모양이었다. 본래도 체력이 좋지만은 않던 그녀가 아카데미에서 내내 수석 자리를 따낼 만큼 열심히 살았으니 그럴 법도 하다고, 그녀를 지켜보는 모두가 생각했다. 하지만 그 꼴이 일주일을 넘어 한 달 가까이 지속될 줄은 에리카 저택에서 지내는 이들 중 누구도 몰랐다.
“딜라일라, 얘.”
“으응…… 엄마?”
식은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담요를 꼭 붙들고 졸고 있는 딜라일라의 어깨를 흔들어 깨운 것은, 다시 마가렛이었다. 그녀 말고는 함부로 에리카 저택에서 가장 사랑받는 아가씨의 잠을 함부로 깨울 수 있는 사람도 없었다.
“어디 아프니?”
“……그런 거 아니에요.”
“그런데 이렇게 자꾸 잠만 자고……. 그러게 아카데미에서 그렇게까지 열심히 할 필요는 없다고 몇 번이나 말했는데.”
이마에 흘러내린 잔머리가 온통 식은땀에 젖어 그녀의 하얀 피부에 달라붙어 있었다.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땀을 닦아 주는 마가렛의 차가운 손끝을 딜라일라가 붙잡았다.
“그런 거 아니야, 정말로요. 그냥 좀 긴장이 풀려서…….”
“그게 그거지, 뭘. 아무튼 정신 좀 차리렴. 응? 식사라도 제대로 해야지.”
“응…….”
멍한 시선과 붕 뜬 목소리를 들으며 마가렛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자신과 꼭 닮은 앳된 얼굴이 식은땀에 젖어 힘없는 숨을 뱉어 내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조금, 아니 아주 많이 마음이 아팠다.
사실 그쯤이 되어서부터, 마가렛은 어쩌면 딜라일라가 잠으로 도망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마가렛은 딜라일라의 첫사랑을 짐작하고 있는 거의 유일한 사람이었고, 자연히 자신의 딸에게 졸업이 어떤 의미였는지도 어렴풋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지쳐서 쉬고 싶다는 딜라일라를 한동안은 쉬게 두자고 먼저 말했던 것도 마가렛이었다. 좋아하는 사람과 떨어지게 된 후로 곧장 결혼이나 약혼 같은 이야기를 듣기는 아무래도 괴로울 테니까.
하지만 이 정도로 아이가 힘없이 늘어질 줄은 몰랐다. 본래도 겨울 휴가 즈음이면 별장에 틀어박혀 벽난로의 열기나 쬐며 책을 읽다가 졸곤 하는 딜라일라였지만, 지금의 딜라일라는 그때와는 전혀 달랐다. 딜라일라는 그 좋아하는 책조차 펼쳐 보지 않았다. 그저 내내 꾸벅꾸벅 졸다가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는 것이 한 달 가까이 그녀가 하는 일의 전부였다.
이렇게까지 될 줄 알았으면 그런 말을 하지 말걸 그랬다고 후회하기도 했다. 하지만 몇 번을 생각해 봐도, 그때 마가렛이 딜라일라에게 할 수 있었던 말은 그것이 최선이었다. 자신의 딸이 아무리 그 남자애를 사랑한다고 해도, 결국에는 로드릭 에리카와 마가렛 에리카의 딸이 아닐 수는 없었다. 그 남자애가 브라이어 남작의 아들이 아닐 수 없듯이.
아무리 서로를 사랑하게 되었다고 해도, 그들이 겪을 일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딜라일라에게는 유하게 말하긴 했지만, 브라이어 남작의 아들에게만 비난이 향하지는 않을 것이다. 딜라일라에게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온갖 허섭스레기 같은 말들이 넘쳐나게 될 것이 뻔했다. 그리고 그것은 돌고 돌아 끝내는 서로의 귀에 들어가게 될 테고, 둘 모두가 상처 입고 말 것이다.
에릭 브라이어도 딜라일라도, 마가렛에게는 턱없이 어리게만 느껴지는 아이들이었다. 갓 성년을 넘긴 아이들에게 부모뻘인 어른으로서 너희는 서로 사랑하니까 가시밭길마저 사랑의 힘으로 이겨 내고 걸어 보라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사랑. 사랑이 뭐란 말인가. 사랑은 때로 아름답고 때로는 강렬한 무언가의 동기가 되기도 했지만, 그런 사랑도 결국에는 사람이 하는 일이었다. 사람은 언제나 환경에 흔들리게 마련이고, 사랑 역시 사람이 하는 일이었으니 환경에 휩쓸리면 어찌 될지 모르는 불확실한 감정이었다.
한 시대를 먼저 살아 본 어른이, 어떻게 그 불확실한 감정에 인생을 걸어 보라고 말할 수가 있겠는가. 심지어 사랑해 마지않는 딸에게.
“어쩌면 좋으니, 우리 딸…….”
하지만 이렇게까지 넋을 쏙 빼놓고 늘어진 딸의 모습을 지켜보는 일은, 어쩔 수 없이 힘들었다. 어느새 다시 까무룩 잠들어 버린 딜라일라의 목덜미를 손수건으로 꾹꾹 눌러 닦아 준 마가렛이 한숨을 쉬었다. 저렇게까지 힘들어하면서도 웃으며 괜찮다고만 말하는데, 어떻게 해 줄 수도 없고. 해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하루하루를 잠으로 흘려보내기만 하다가 병이라도 얻으면 어떡하나…….
하지만 사랑해 마지않는 어머니의 걱정조차도 온통 흩어진 정신을 붙잡지 못하고 졸음에 빠진 딜라일라에게는 닿지 않았다. 마가렛이 저녁을 먹으라며 다시 흔들어 깨웠을 때에야 그녀는 안락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잘 먹었습니다.”
“더 먹지 않고?”
“응, 배가 안 고파요.”
내내 꾸벅꾸벅 존 탓에 멍한 정신으로는 식사도 제대로 넘어가지 않았다. 저녁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제 방으로 올라온 딜라일라는 얌전히 잘 준비를 했다.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은 뒤에 침대에 몸을 눕히기까지도 딜라일라는 그저 기계적으로 움직일 뿐이었다.
그녀는 기다리는 것조차 허락받지 못했다.
밤은 언제나처럼 그녀를 찾아왔다. 딜라일라는 다시 멍하니 흔들리는 정신을 쏟아지는 잠에 맡겼다.
“흣, 윽. 하아……!”
하지만 그도 잠깐뿐이었다. 얇고 보드라운 여름용 이불을 손마디가 하얗게 질릴 정도로 한껏 구겨 쥐고, 딜라일라는 눈을 떴다.
그녀가 낮 내내 꾸벅꾸벅 졸아 대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딜라일라는 아카데미를 떠나 수도 저택으로 온 뒤로 좀처럼 제대로 자지 못했다.
아무리 피곤하고 졸려도 잠든 뒤 얼마 안 되어 깨어났다. 그럴 때면 어지러운 꿈의 잔상들이 딜라일라의 눈앞을 깜빡깜빡 흘러 다녔다. 친숙하게 그녀를 부르는 목소리들, 색이 짙은 꽃다발. 무거운 보석이 매달린 목걸이. 사락거리는 천의 감촉. 때로는 손에 잡힐 듯이 생생하고, 때로는 기억조차 제대로 나지 않을 정도로 흐릿한 감각과 풍경이 밭은 숨을 뱉어 내는 딜라일라를 괴롭혔다.
뒤섞인 꿈의 가운데서 늘상 선명하게 떠오르는 것은, 그녀를 화들짝 놀라 깨어나게 만드는 시선이었다.
딜라일라에게 쏟아지는 애정 어린 시선. 달콤한 사랑을 속삭이는 시선. 동경과 기대가 섞인 시선들. 그런 시선이 딜라일라의 어깨 위에 차곡차곡 쌓여서, 그녀는 꿈속에서도 짓눌려 버릴 것 같은 무게를 느끼며 허덕이곤 했다. 괴로워서 소리를 지르려고 입을 벌려도 목구멍이 꽉 틀어 막힌 것처럼 아무 소리도 낼 수가 없었다. 울고 싶어도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꿈속에서 딜라일라의 얼굴은 가면이라도 뒤집어쓴 것처럼 늘 웃고 있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딜라일라를 짓누르는 애정과 동경과 기대가 떨어져 나가고 겨우 그녀가 숨을 쉬며 안도하면, 짊어지고 있던 무게가 가볍게 느껴질 정도로 날카로운 비난의 시선이 그녀에게 꽂혔다. 언젠가 에릭의 방에서 잠들었다가 꾸었던 꿈처럼.
그 날카로운 시선의 끝에 몸이 꿰일 것 같은 공포가 찾아오고, 온몸에 소름이 돋아 오르면, 순식간에 그녀를 찌르는 시선이 다시 바뀌었다. 여전히 뾰족하게, 하지만 그저 한 사람의 것으로.
금빛 눈동자가 소리 없는 비난으로 그녀를 꿰뚫고 나면 딜라일라는 번쩍 눈을 떴다.
“하, 아…….”
매일 그런 꿈을 꿨다. 에릭 브라이어의 금빛으로 번쩍이는 눈동자가 그녀를 말없이 질책하는 꿈을. 그렇게 깨고 나면 딜라일라는 차마 다시 잠들지도 못했다. 애를 써서 잠을 자 보았자 다시 같은 꿈을 꾸고 깨어나게 될 것을, 딜라일라는 수도 저택에서 지내기 시작한 지 일주일도 못 되어 깨달았다.
식은땀으로 흥건한 몸을 일으켜서 창문을 열면, 여름밤의 뜨끈한 공기가 방 안으로 흘러들었다. 딜라일라는 그 밤공기를 맞으면서 가만히 시간을 셌다. 에릭을 만날 밤을 기다리던 때처럼, 이번에는 밤이 그녀를 떠나가기를.
늘 그렇게 밤을 새웠으니낮에는 꾸벅꾸벅 졸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환한 대낮에 안락의자에 몸을 묻고 졸고 있으면 푹 자지 못하는 대신 꿈을 꾸지 않았다. 다른 일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지만, 적어도 그냥 있을 수는 있었다. 그냥, 그렇게 있을 수만 있었다.
아침이면 깨어나 친구들과 인사를 나누고 웃음이 멎지 않는 하루를 보내던 딜라일라는 그렇게 낮을 잃었다. 그녀에게 남은 것은 시간을 세어 가며 흘려보내는 밤뿐이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났다. 그사이 몇 번인가 딜라일라를 이끌고 가벼운 외출을 했던 마가렛은 딜라일라가 햇살에 현기증을 일으켜 쓰러진 후로는 그녀에게 외출조차 권하지 못했다.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하는 딜라일라는 나날이 야위고 무기력해졌다. 의사가 불려 와도 서서히 말라 가듯 기력을 소진하는 딜라일라를 단번에 일으켜 세울 수는 없었다. 결국에는 마법 약까지 동원되었지만, 딜라일라는 크리스털 병 안에서 찰랑이는 마법 약을 반도 삼키지 못하고 토해 냈다. 그나마 토해 내기 전에 흡수된 약간의 마법 약이 효력을 발휘하지 않았더라면 딜라일라는 여름이 끝나기도 전에 침대에서만 생활하게 되었을지도 몰랐다.
마가렛과 로드릭이 방 안에 틀어박혀 시체처럼 지내는 딜라일라를 어쩌지도 못해서 발을 동동 구르는 동안, 가을이 찾아왔다.
에리카가의 수도 저택 담장 너머로도 들려올 만큼 떠들썩하게, 에릭의 고형 마법 약 개발 소식이 들려왔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딜라일라는 에릭이 고형 마법 약 제조 논문을 발표한 것을 모르고 있었다. 저택에 콕 틀어박혀 나서지도 않고 신문조차 제대로 읽지 않던 그녀로서는 에릭이 세상을 뒤집어엎었대도 알 방법이 없었다.
그러나 어느 날. 여느 때처럼 먹는 둥 마는 둥 간소한 식사를 마친 딜라일라의 손에 마가렛이 동그란 사탕 형태의 마법 약을 내밀었다.
딜라일라는 마가렛의 손 위에 놓여 있는 동그랗고 반투명한 사탕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형태만 봐서는 그것이 무엇인지 모를 거라 짐작한 마가렛이 딜라일라에게 다정하게 속삭이며 그녀의 가느다란 손 위에 마법 약을 올려 주었다.
“최근에 새로 개발되었다는 마법 약이야. 사탕 같지? 신기하지 않니. 액체가 아니니까 삼키기는 어렵겠지만…… 딜라일라?”
언젠가 부서지고 말 것처럼 말라 가기만 하는 딜라일라를 대하는 그녀의 목소리는 갈수록 어린아이를 대하듯 다정해지기만 했다. 그리고 그다음 순간, 그간 힘없이 바스스 웃기만 하던 창백한 딜라일라의 얼굴 위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흑, 으…….”
돌연 울기 시작한 딜라일라를 보고 마가렛은 직감했다. 혹여나 에릭의 이름을 듣게 되면 지금보다 더 상태가 나빠질까 봐 일부러 그녀에게 에릭 브라이어의 이름은 쏙 빼놓고 약을 건넸던 마가렛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영특한 딸은, 이 신기한 형태의 마법 약을 만든 이가 누구인지 벌써 알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어, 엄마. 흐윽…….”
“……그래, 우리 딸.”
“에, 에릭이. 흣.”
“그래.”
“만들었, 어요?”
“브라이어 군이 새로 개발했대. 네 아빠가 개발 소식을 듣고 어떻게 구할 방법이 없을까 하기에, 내가 브라이어 양에게 연락해서 받아 왔어.”
“흐으…… 에릭이…….”
“그래.”
“흑. 흐, 읏…….”
마른 손 위에서 데구르르 구르는 마법 약을 꼭 쥐고, 딜라일라가 울음을 터뜨렸다. 그동안 어떻게 혼자서 참아 냈을까 싶을 정도로 거친 숨소리와 울음소리가 점점 더 무겁게 가라앉기만 하던 에리카 저택의 적막을 찢어 냈다. 마가렛은 서럽게 흔들리는 딜라일라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우는 딸을 달래 본 것이 몇 년 만이었던가. 딜라일라는 어릴 때부터 착하고 예쁜 아이였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예쁜 짓만 골라서 했다. 주변 사람들은 모두 아이가 예쁜 데다 순하기까지 해서 좋겠다고 했지만, 가끔 마가렛은 불안해하곤 했다. 그녀의 예쁜 딸이 웃는 얼굴 아래로 너무 많은 것을 숨기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해서.
성년을 맞이한 뒤로는 어쩔 수 없이 납득했다. 딜라일라가 너무 착한 아이여서, 부모에게 좋은 모습만 보여 주고 싶은 것이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하루하루 말라 가면서도 끝까지 부모에게는 창백한 뺨을 당겨 웃어 보이는 딸을 보면서, 어느 부모가 속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니 차라리 잘됐다. 마가렛은 필사적으로 입술을 깨물며 눈물을 흘리고 있는 딜라일라의 어깨를 꽉 껴안았다.
“우리 딸, 많이 속상했어?”
“흑, 으…… 엄, 에릭이. 흐읏!”
“참지 마. 울어도 돼. 괜찮아.”
울어도 돼. 그 한마디를 기다렸던 것처럼 딜라일라는 서럽게 소리 높여 울기 시작했다.
그 여름을 맞이하며 에릭이 다 된 거나 다름없는 연구를 내팽개쳤던 것을 알고 있었다. 언제나 연구와 관련된 메모로 가득하던 테이블이 말끔하게 비워진 것을 보면서 딜라일라가 어떻게 생각했던가. 그녀가 떠나고 나면 어차피 돌아올 일이라고, 그러니까 괜찮다고 합리화했던가?
정말로 그녀가 떠난 뒤로 에릭은 원래대로 돌아갔다. 셰 상브르가 낳은 두 명의 천재 중 하나로 손꼽히던 에릭 브라이어로.
그 사실이 슬펐다. 하지만 동시에 기뻤다. 마지막으로 그녀가 그에게 남겨 두었던 말에, 분명 에릭은 대답했다. 언젠가 찾아가겠다고. 어쩌면 지금 그는, 약속했던 것처럼 그녀를 찾아오기 위해 애를 쓰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 노력이 동그랗게 뭉쳐져 그녀의 손에 쥐여 있었다.
한참을 울다가, 울기도 지쳐 그녀의 목에서 히끅거리는 숨소리 말고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게 되었을 때 그녀는 손에 꼭 쥐고 있던 마법 약을 마른 입술 사이로 밀어 넣었다.
“으엑.”
맛없어.
오래전…… 반년도 더 전에 느꼈던 것과 똑같았다. 혀 위에서 데구르르 구르던 사탕의 표면이 스르르 녹아내리고, 그 안에서 퍼져 나온 눅진한 온기가 목으로 넘어갔다. 목을 타고 흘러내린 온기가 심장 즈음에 고였다가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다만 그때보다 조금 더 느리고, 부드럽고, 따뜻했다. 봄볕을 내리쪼이는 것 같은 온기가 차갑던 손끝을 데웠다. 마른 토양에 물을 적시듯, 천천히 피가 돌았다. 붓다 못해 말라 버린 눈가가 다시 촉촉하게 젖어 들었다. 딜라일라가 따뜻해진 손을 들어 제대로 닦아 내지도 못해 소금기가 남은 뺨을 문질렀다.
“엄마.”
소리를 질러 가며 울었던 딜라일라의 목소리는 쉬어 있었고, 거칠게 긁혀 나가는 듯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뒤섞였다. 하지만…… 실로 오랜만에 명료하게 개어 있었다.
“응, 우리 딸.”
“나, 좀 잘게요. 조금만 자고…….”
“그래.”
“다시 일어날게.”
“그래, 그러렴. 우리 딸…….”
딜라일라는 마가렛의 품에 안긴 채로 기절하듯 잠들었다.
그리고 사용인들의 도움을 받아 마가렛이 그녀를 침실로 옮긴 뒤에도, 그날 저녁이 다 새고 밤이 지난 후에도. 결국 다시 아침이 찾아오고 해가 하늘 높이 떠오를 때까지. 딜라일라는 죽은 듯이 잤다. 꿈도 꾸지 않고.
다시 깨어나서 부드러운 음식 위주로 구성된 식사를 하고, 다시 약을 먹고 잠이 들었다. 며칠을 잤다. 여름이 다 새고 가을의 끝자락에 올 때까지 못 잔 잠을 전부 벌충하듯이 그녀는 잤다.
그리고 마침내 일주일이 지났을 때, 딜라일라는 말끔한 정신으로 깨어났다.
깨어난 뒤로는 의사의 도움을 받아 그동안 말라 있었던 신체를 회복했다. 마법은 흔히 기적처럼 여겨지지만, 절대 만능은 아니었다. 에릭이 전한 마법 약은 사실 그녀의 마른 몸에 다시 움직일 수 있을 만큼의 기력만을 되돌려 주었다. 그 이후로는 온전히 그녀의 몫이었다.
그래. 그녀의 몫이었다. 살아가는 것은.
어느 정도 몸을 회복한 딜라일라는 그동안 읽지 않았던 신문이며 소식지를 긁어모았다. 그것을 모두 독파한 뒤에는, 매일 아침마다 새로운 신문을 종류별로 받아 보며 활자로 찍힌 에릭의 이름을 찾았다.
고형 마법 약의 개발 연구가 발표된 지 한 달이 채 지나기도 전에 에릭의 고형 마법 약의 상용화 연구가 발표되었다. 비용 절감 대책 연구 논문이 그 뒤를 이었다.
그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그 뒤로도 몇 개나 되는 마법 물품을 개발하고 특허를 출원했다. 몇몇은 외면당했으나 몇몇은 환영 받았다. 외면당해도, 환영 받아도 에릭의 이름은 화제가 되었다. 그렇게 에릭 브라이어의 이름 앞으로 명성이 차곡차곡 쌓이고 있었다.
온 세상이 에릭의 이름으로 시끄러웠다. 그동안 세상을 등지고 있었던 딜라일라를 부르듯이.
그동안 딜라일라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저 기사의 구원을 기다리는 가련한 공주님이라도 된 것처럼 멍하니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분명, 에릭은 기다리지 말라고 했는데.
“그냥, 그냥 있어요.”
에릭은 울고 있는 딜라일라에게 분명 그렇게 말했다. 그래서 그냥, 있었다. 그냥 있기만 했다.
“울지 말고…….”
울지도 않았다. 세 달이 넘도록 그렇게 했다. 그 여름이 다 떠나고 마침내 가을마저 막바지에 다다를 때까지. 딜라일라는 에릭이 했던 말을 잘 지켰다. 하지만…….
“찾아갈게요. 내가 갈게요. 기다리지 말고, 울지 말고 있어요.”
그의 말을 믿지는 않았다. 그러기가 어렵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울지 말고. 좋아하는 책도 읽고, 차도 마시고.”
그래서 끝까지 그의 말을 지킬 수는 없었다. 하지만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딜라일라가 에릭의 약속을 믿지 못하는 동안, 에릭은 약속을 지키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다. 끊임없이 그의 이름 앞에 쌓이는 명성이, 그가 해내는 연구가. 전부 그가 약속을 지키기 위해 해내고 있는 일들이었다. 그걸 모르고 있었던 것은 딜라일라였다.
“찾아갈 테니까…….”
신문 위에 가득 찍힌 에릭의 이름이 전부 그때 그가 했던 약속 같았다. 혹은 딜라일라에게 보내는 연서 같았다.
그리고 어쩌면, 사랑한다는 고백 같기도 했다.
이제 딜라일라는 믿을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으로 토해 내듯 했던 부탁에 되돌아오던 애타는 약속을, 속삭이던 목소리를, 그녀를 껴안아 오던 팔의 온기를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야 했다.
분명 에릭은 그녀를 다시 찾아올 것이다. 그리고 딜라일라가 마지막에 그에게 했던 말처럼, 언젠가 햇살 아래서 웃으며 그녀에게 입 맞춰 줄 테지.
그때까지 딜라일라는 그냥 있으면 될 것이다. 좋아하는 책을 읽고, 차를 마시고. 울지 않고. 적당히 좋아하는 일들로 일상을 꾸미면서. 그냥 그렇게 있다 보면, 시간은 착실히 흘러가겠지.
하지만…….
침실 한편에 가득 쌓아 놓은 신문을 들여다보고 있던 딜라일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마가렛도 로드릭도 더는 그녀의 건강을 걱정하지 않을 정도로는 회복되어 있었다. 딜라일라는 창문을 열고 따갑게 쏟아지는 가을볕을 방 안으로 들였다.
그리고 방 밖으로 나섰다.
“엄마, 엄마?”
계단을 내려가며 부르자 마가렛이 뒤뜰에서 달려 들어왔다. 무엇을 하고 있었던 것인지 몰라도, 언제나처럼 곱게 꾸민 마가렛의 품으로 딜라일라가 달려들어 폭 안겼다. 마가렛은 자신과 비슷한 체구의 딸이 품을 파고드는 것을 말리지도 않고 가만히 받아 안았다.
“왜 불렀어, 우리 딸.”
“뭐 하고 있었어요?”
“그냥, 차 마시고 있었지.”
“나도 마실래.”
“갑자기?”
“응.”
어리광을 피우듯 마가렛의 어깨에 뺨을 비빈 딜라일라가 그녀의 품에서 떨어져 나왔다. 그러고는 마가렛의 손을 잡고 환하게 웃으며 그녀를 마주 보았다.
“나, 할 말 있어요.”
“그럼 응접실로 차 준비하라고 할까?”
“응.”
한동안 보지 못했던 딸의 사랑스러운 애교에 마가렛이 기쁘게 웃으며 딜라일라의 손을 맞잡았다. 서로를 꼭 닮은 모녀는 손을 잡은 채로 사용인을 불러 차를 부탁한 뒤 함께 응접실을 향해 걸었다. 마가렛이 혹여나 강한 햇살에 딜라일라가 다시 쓰러지기라도 할까 봐 걱정하는 것을 알아서 딜라일라는 얌전히 마가렛의 손을 붙잡고 있었다.
응접실에 자리를 잡고, 하얀 테이블클로스가 깔린 테이블 위에 찻잔과 티 포트가 준비되는 것을 보면서 마가렛이 그녀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하지만 딜라일라는 고개를 저었다. 차가 전부 준비되면 이야기하겠다며. 그런 딜라일라를 보고 마가렛이 슬쩍 인상을 찌푸렸다가, 이내 웃어 버렸다.
“우리 딸이 무슨 얘기를 하려고 이러실까.”
둥그런 티 포트에 뜨거운 물이 쪼르르 부어지며 하얀 김이 피어올랐다. 뚜껑을 덮고 차가 우려지기를 기다리는 동안 마가렛이 다시 물었다. 딜라일라는 조금 눈치를 보는 모양으로 눈을 치켜떴다. 일부러 하는 모양새인 것을 알아서, 마가렛은 다시 웃었다.
“으응……. 엄마, 내 편 해 줄 거예요?”
“얼마나 대단한 이야기를 하려고 그러니?”
모래시계의 모래가 전부 떨어졌다. 우려진 찻물을 걸러내며 데워 둔 새 포트에 옮기고, 새 포트에 담긴 맑은 차를 다시 찻잔에 따르는 동안 짧은 정적이 흘렀다. 하지만 딜라일라가 뿌리 잘린 꽃처럼 말라 가던 때와는 달리 잔잔한 따스함이 그 사이를 메우고 있었다.
쪼르르. 제 몫의 찻잔에 향기로운 찻물이 차올랐다. 풍미가 짙으면서도 산뜻한 향기. 마가렛의 취향에도 딜라일라의 취향에도 꼭 맞는 차향이 둥실둥실 딜라일라를 감싸 안았다.
하얀 김이 피어오르는 찻잔을 들어 올리면서, 딜라일라는 생각했다.
딜라일라는 그녀가 로드릭 에리카와 마가렛 에리카의 딸이라는 이유로, 그리고 마가렛을 닮아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용모로 유명했다. 그러나 동시에 그녀는 셰 상브르에서 손에 꼽히는 천재이기도 했다. 딜라일라는 입학부터 졸업까지 수석을 놓치지 않을 정도로 영민한 머리를 가진 사람인 동시에, 매일 열성적으로 강의를 듣고 공부를 하는 노력가였다.
에릭이 허울뿐인 명예를 가진 브라이어 남작의 아들인 동시에 아카데미를 졸업하기도 전에 그 이름을 널리 알린 천재적인 마법 공학자인 것처럼. 딜라이라는 권력과 부, 심지어는 명성과 인기마저 얻은 로드릭 에리카와 마가렛 에리카의 딸인 동시에 셰 상브르 아카데미 행정 교양학부의 수석 졸업자였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권력, 부, 아름다운 용모와 인맥. 그런 것들 말고도 딜라일라가 가진 것이 있었다. 물론 그녀가 받은 교육 역시 부모의 덕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었음을 안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가진 지식이, 영민한 머리가, 6년간 쌓아 온 노력이 없었던 일이 되는 것은 아니다.
말하자면 에릭이 그의 천재성과 능력을 통해 명성을 쌓아 올리고 있는 것처럼, 딜라일라 역시 자신이 해 온 노력을 통해 부모의 그림자를 벗어 낼 수도 있었다. 내무부 최고 위원인 로드릭 에리카와 사교계의 중심인 마가렛 에리카의 딸이 아니라, 딜라일라 에리카라는 한 사람으로 설 수 있는 힘이 그녀에게는 있었다.
딜라일라는 자신을 부르듯이 세상에 울려 퍼지는 에릭의 이름에, 자신의 이름으로 답하기로 했다.
“엄마, 나…….”
찻물로 입술을 적시던 마가렛에게 딜라일라가 속삭였다. 혹여 다른 사람에게 들릴까 걱정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아주 작게, 하지만 명료한 뜻을 담아서.
“……가 하고 싶어요.”
마가렛의 눈이 둥그렇게 떠졌다. 딜라일라는 자신과 꼭 닮은 얼굴이 놀란 표정을 짓는 것을 보면서, 자신 역시 놀라면 저런 얼굴일까, 하고 생각했다.
어릴 적부터 줄곧 가지고 있던 딜라일라의 꿈은, 어머니인 마가렛처럼 나이를 먹는 것. 하지만 그것이 꼭 마가렛처럼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아 키우며 사교계의 중심에 서서 웃고 있어야만 가능한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런 겉껍데기가 아니다.
마가렛처럼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것. 그래서 매일 사소한 고민을 품고 조금은 짜증을 내더라도 끝내는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마주 보며 웃는 것.
“그게 하고 싶어?”
“응.”
“그럼, 하렴.”
지금처럼.
“엄마는 항상 네 편이야. 알지?”
딜라일라의 얼굴에 웃음이 함빡 피어올랐다. 동그랗게 놀랐던 마가렛의 얼굴도 딜라일라의 미소를 마주하고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풀어졌다. 서로를 꼭 닮은 모녀가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다. 거울처럼 닮은 얼굴이었다.
“그런데 네 아빠는 좀 싫어할지도 모르겠구나.”
“으응, 나는 엄마만 내 편이면 돼요.”
“우리 딸은 말도 참 예쁘게 하지.”
“우리 집에서는 엄마가 왕인걸!”
아, 그러니까 지금 우리 딸, 줄 선 거니? 응. 아빠는 엄마 못 이기니까. 얘, 넌 정치해도 되겠다. 그런 실없는 이야기를 나누며 딜라일라는 마가렛과 차를 마셨다. 그러다 와르르 소리 내어 웃어 버리기도 하고, 심각한 표정을 짓거나 미간을 조금 찌푸리기도 했다. 하지만 끝내는 다시 웃었다.
“한동안 네 아빠한테는 비밀로 하자.”
“하지만 공부해야 하는데.”
“어차피 그이는 바빠서 집에도 잘 못 들어오는데 뭐. 말 안 해 주면 모를걸?”
모녀는 누가 듣기라도 할세라 킥킥 소리 죽여 웃으며 비밀스럽게 속닥거렸다. 사실 듣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비밀 이야기를 하는 기분은 즐거웠다. 오랜만에, 정말로 오랜만에 딜라일라는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힘이 차오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지난 6년간 지겹도록 해 온 공부를 또 할 생각을 하면서.
찻자리가 끝이 난 뒤 저녁 식사를 하면서 딜라일라는 오랜만에 접시를 싹싹 비워 가며 배를 채웠다. 공부에는 체력이 중요하니까. 에릭은 매번 딜라일라에게 체력이 모자란 것 아니냐고 했지만, 그거야 에릭이 체력이 너무 좋아서 비교된 거지. 딜라일라도 원래는 며칠쯤 밤을 새워 가며 공부를 해도 아파 본 적이 없는 강골이었다.
빵빵하게 부푼 배를 토닥토닥 두드리며 딜라일라는 자신의 침실로 올라왔다. 낮부터 창문을 열어 두었던 탓에 방 안에는 신선한 가을 밤공기가 가득했다. 썩어 가는 낙엽의 달콤한 냄새와 저 멀리서 밀려오는 서늘한 겨울 냄새가 뒤섞여서, 어쩐지 그리운 냄새가 났다.
몸을 씻기도 전에 침대 위에 뛰어든 딜라일라가 건조한 침구를 와락 끌어안고 침대 위에서 데구르르 한 바퀴 굴렀다. 고작 하고 싶다고, 하겠다고 생각만 했을 뿐인데도 어쩐지 가슴이 벅차서 오늘 밤은 도저히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았다. 아카데미에 갓 입학한 신입생 때로 돌아간 것마냥 설렜다.
그래도 자야지. 푹 자고, 다시 일어나서는 새로운 하루를 살 거야. 책을 읽고 차를 마시고,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그리고 언젠가 반짝이는 햇살 아래에서 키스를 하기 위해 찾아올 그녀만의 기사에게 부끄럽지 않도록, 자신의 두 발로 당당히 서서 웃으며 맞아 줄 수 있는 멋진 사람이 될 것이다.
그 과정에서 어쩌면 그녀를 사랑하던 사람들 중 몇몇은 등을 돌릴 수도 있고, 멀어지는 사람도 생기겠지만…… 돌이켜 보면, 원래 졸업이란 그런 것이 아니던가? 마냥 사랑만 받으며 웃을 수 있던 소녀 시절과 이별하고, 새로운 하루를 위해 한 발을 내딛는 것.
딜라일라는 그렇게 사로잡힌 나날들로부터 졸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