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화 (8/14)

유예

일을 결행하는 데 날짜나 시간을
미룸, 또는 그런 기간

몇 번인가 비가 내렸다. 때 늦은 봄비가 지나간 자리에는 신록에 맺힌 이슬이 눈물처럼 반짝였다. 그 이슬을 모두 받아 마시고, 꽃과 나무가 더 짙은 잎을 냈다. 비가 오고 난 뒤의 하늘에는 구름이 양떼처럼 뭉쳐 떠다녔다. 해가 질 무렵이면 한층 더 짙어진 노을이 셰 상브르 아카데미의 교정을 주홍빛으로 물들였다.

기숙사의 새하얀 석벽에 물든 석양은 아주 잠깐 뿐이었지만, 이내 보랏빛으로, 그리고 다시 푸른빛으로 가라앉는 공기는 좀처럼 차갑게 식을 줄을 몰랐다.

여름이 찾아왔다.

축제가 끝나자 아카데미 안의 분위기는 금세 바뀌었다. 일찍부터 학기 말 테스트를 준비하는 학생들이 생겨났고, 졸업 학년의 학생들은 닥쳐온 졸업과 그 이후의 일을 진지하게 고민해야 하는 때가 왔다. 딜라일라 역시 다르지 않았다. 그녀는 이전보다 더 열성적으로 수업에 참여했고, 저녁 식사를 대충 때운 뒤에는 곧장 방에 틀어박혀 공부를 하곤 했다.

그건 오히려 졸업 후에 있을 일에 대한 도피나 다름없었다. 딜라일라 스스로도 알고는 있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그리고 밤이 찾아오면 몰두했던 공부를 놓아 버리고 에릭의 방을 찾았다.

오딜이 책이 완성됐다며 딜라일라에게 한 세트를, 에릭에게 또 한 세트를 보냈다. 딜라일라는 에릭의 방에서 읽을 생각으로 자신에게 온 것은 집으로 다시 보내 두었다. 하지만 딜라일라는 매일같이 에릭의 방을 찾으면서도, 결국 그 책은 제대로 펴 보지도 못했다.

“잠깐만, 으응. 에릭…….”

에릭의 손이 딜라일라의 머리칼을 감아 쥐고 그 위에 입을 맞췄다. 당연하게도 키스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녀의 동그란 머리 위에, 이마에, 콧잔등으로 떨어진 입술의 종착지는 딜라일라의 입술 위였다. 입맞춤은 자연스럽게 깊어졌다.

에릭은 딜라일라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았다. 딜라일라 역시 에릭이 뻗어 오는 손을 도저히 내칠 수가 없었다. 여름이 깊어 갈수록 밤은 서로에게만 집중하기에도 짧았다.

“흣, 으응. 아읏……!”

“윽, 누나…….”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맨몸을 맞대고 숨을 섞는 일은 이제 당연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품 안에 벅차도록 끌어안고, 핥고 깨물고, 상대의 체온과 숨소리를 전부 느끼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놓아 버리기 전에 조금 더, 조금이라도 더 붙들어 두고 싶어서.

“에릭, 흣. 아!”

딜라일라의 팔이 에릭의 허리로 내려갔다. 척추 양옆으로 단단한 근육이 만져졌다. 딜라일라는 그 위에 손을 얹고 재촉하듯 잡아당겼다. 그가 허리를 움직일 때마다 근육이 꿈틀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딜라일라는 온몸으로 그에게 매달렸다. 에릭이 그녀의 안으로 깊숙이 닿아 올 때마다 몸이 떨렸다.

“으응…….”

에릭이 그녀의 가장 깊은 안쪽을 열어 제치고, 그 안에 자신의 마음을 쏟아 부었다. 뜨거웠다. 뜨거워서, 자꾸만 더 바라게 됐다.

“잠깐만 기다려요.”

딜라일라의 몸 위에 온통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던 에릭이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내내 감고 있던 눈에 곧장 등불의 환한 빛이 쏟아져서, 딜라일라는 미간을 조금 찌푸렸다. 마침내 완전히 그녀에게서 떨어져 나간 에릭이 욕실로 향하려는 것을, 그녀의 손이 붙잡아 세웠다.

언제나 그랬듯이, 에릭은 딜라일라가 미약한 팔로 당기는 힘에도 손쉽게 딸려 왔다. 에릭은 그녀가 당기는 대로 침대 위에 풀썩 주저앉았다. 푹신한 매트리스가 그가 앉은 방향으로 조금 기울어졌다.

딜라일라는 천천히 무릎을 움직여 그의 위로 올라탔다.

“누나……?”

“에릭.”

딜라일라가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그의 눈동자 안에 가득 찬 딜라일라의 얼굴이 생긋 웃었다. 딜라일라의 손끝이 에릭의 어깨에 가 닿았다. 아주 조금 힘을 주어 밀자, 그의 상체가 침대 위로 떨어졌다. 이미 엉망으로 구겨진 시트 위에 누인 에릭의 몸 위로 딜라일라의 손가락이 움직였다.

넓은 어깨부터 곧은 쇄골을 따라가다가, 단단한 가슴 사이를 지나 근육이 갈라진 배 위로 그녀의 손이 흘러내렸다. 피부 위를 닿을 듯 말 듯 쓸어 낼 때마다 에릭의 몸이 흠칫흠칫 떨렸다. 딜라일라의 손끝이 더 아래로 내려갔다. 에릭은 결국 참지 못하고 숨을 뱉어 냈다.

“흐, 으…….”

“피곤하다더니.”

“누나가 만지니까, 읏!”

딜라일라는 그새 다시 단단하게 굳어진 것을 위아래로 쓰다듬었다. 누구의 것인지 모를 체액이 딜라일라의 손에 끈적하게 묻어났다. 그녀가 무릎을 움직여 그의 위에 자신의 몸을 맞추었다. 벌어진 다리 사이로 흘러내린 하얀 것이 에릭의 성기 위로 뚝 떨어졌다. 선단에서부터 뭉툭하게 솟은 귀두를 지나 기둥을 타고, 그녀의 몸속을 채웠던 정액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딜라일라는 그대로 그것을 집어삼켰다.

“흑…….”

“후…….”

끄트머리가 입구를 꿰뚫고 밀려들어 오는 순간 딜라일라의 다리에서 힘이 풀렸다. 그대로 주저앉아 버린 탓에 의도치 않게 깊숙이 박혀 든 성기가 그녀의 안에서 꿈틀거리며 맥동했다.

딜라일라가 그대로 그의 몸 위로 쓰러지려는 것을, 에릭의 손이 받쳤다. 그녀의 가녀린 허리를 붙든 손이 천천히 치골 위를 누르고 둥글게 문지르자, 딜라일라는 겨우 아래에 들어갔던 힘을 풀어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몸속이 빠듯하게 차 버려서, 딜라일라는 몇 번이나 길게 숨을 내쉬어야 했다.

“에…… 릭. 더 커진 거, 아냐……?”

말을 하려고 숨을 들이쉴 때마다 몸 안쪽이 꽉 차 있는 것이 느껴졌다. 길지도 않은 문장을 내뱉는 동안에도 짧은 숨을 삼켰다 내뱉기를 반복해야 했다. 그의 단단한 배 위를 짚은 자그만 손이 덜덜 떨렸다.

“너무, 꽉 차서…… 못 움직이겠어…….”

딜라일라의 치골을 붙잡았던 에릭의 손에 힘이 꽉 들어갔다가 금세 다시 풀렸다. 그녀의 하얀 피부가 잠깐 발갛게 물들었다가 본래 색으로 돌아왔다. 그의 손이 조금 더 위로 올라갔다. 허리를 감싸듯 쥔 그가 딜라일라의 허리를 슬쩍 들어 올렸다. 그의 귀두가 안쪽을 긁어내리는 감각에, 딜라일라의 고개가 젖혀졌다. 몸을 가누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에릭이 그녀의 허리를 단단히 붙잡고 있어서, 뒤로 넘어가려던 상체가 금세 바로 세워졌다. 긴장한 허벅지가 파르르 떨렸다.

“……!”

에릭이 깊숙이 허리를 쳐올린 순간, 딜라일라는 제 손으로 입을 막았다. 소리 없는 신음이 목 너머로 삼켜졌다.

분명 위에 올라탄 것은 딜라일라인데, 그녀의 몸은 에릭이 움직이는 대로 흔들렸다. 에릭의 손이 허리 위로 움직여 그녀의 가슴을 간질였다.

“흣, 아, 응!”

“누나는, 가끔. 윽……!”

“에릭, 읏, 흐윽…….”

에릭이 상체를 일으켰다. 그의 위에 앉은 딜라일라의 허리를 양팔로 가득 껴안고, 허리 힘으로 쿵쿵 그녀를 짓쳐 올렸다. 상체를 꽉 맞붙인 채로 녹아내린 것처럼 체액이 흘러내리는 아래가 쉴 틈 없이 마찰했다. 딜라일라는 에릭의 가슴팍을 긁어냈다가, 끝내 다시 그의 몸을 가득 껴안았다. 순식간에 거칠어진 숨결이 딜라일라의 귓가에 와 닿았다. 먼젓번의 정사로 잔뜩 예민해져 있던 딜라일라의 내벽이 꽉 조여들었다.

“놀라게 해요…….”

“에릭, 흣. 나, 으응. 앗!”

평소와 다른 자세로 몸을 겹친 탓에, 몸속을 헤집는 그의 것이 더 선명하게 느껴졌다. 에릭의 두툼한 귀두가 배 위를 꾹 찌르는 것 같았다. 딜라일라는 다리마저 그의 허리에 감았다. 온몸이 파르르 떨린 것이 먼저였고, 그다음으로 머리끝까지 쾌감이 치솟았다.

그녀에게 오르가슴이 밀어닥친 것을 알면서도 에릭은 멈추지 않았다. 살갗이 마찰하는 곳마다 찌릿한 쾌감이 퍼져 나갔다. 찰팍, 찰팍. 하반신이 거세게 부딪칠 때마다 젖은 소리가 났다. 딜라일라는 강렬한 쾌감을 이기지 못하고 그의 등을 쥐어뜯었다. 하지만 에릭은 끝까지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끝내 그녀가 다시 찾아온 오르가슴에 그의 어깨를 물어뜯어 버린 후에야 그는 딜라일라의 몸속에 파정했다.

“흑, 으…….”

“아팠어요?”

“아니이…….”

완전히 지쳐 늘어진 딜라일라를 달래듯 토닥이는 그의 손길마저 자극적이었다. 딜라일라는 축 늘어져 그의 가슴에 머리를 기대고도 잔류하는 쾌락에 움찔움찔 몸을 떨었다. 그가 딜라일라의 허리를 붙들고 끌어 올리자, 그녀의 아래에서 후드득 쏟아진 체액이 에릭의 배 위로 떨어졌다.

그는 그것을 대충 손으로 훔쳐 낸 뒤에 욕실로 향했다. 딜라일라는 흐물흐물해진 것 같은 몸에 억지로 힘을 줘 일어났다. 다리가 후들거려서 자꾸만 힘이 빠졌지만, 그녀는 어떻게든 에릭의 뒤를 따라 욕실로 걸음을 옮겼다. 채 다 빠져나오지 못한 정액이 허벅지를 타고 흘렀다.

타월에 따뜻한 물을 적시고 있던 에릭이 딜라일라의 기척을 느끼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비척비척 걸어 에릭의 등을 끌어안고 그에게 몸을 기댔다.

“기다리지 않고요.”

“으응, 씻고 싶어.”

에릭이 몸을 돌려 세웠다. 그러는 동안에도 딜라일라의 팔을 붙잡은 손에서 혹여나 그녀가 넘어지기라도 할까 조심스러운 그의 걱정이 느껴졌다. 딜라일라는 마침내 다시 마주 본 에릭에게 푹 안겼다가, 비틀거리며 에릭과 함께 쏟아지는 따뜻한 물 아래에 섰다.

그에게 안긴 채로 뜨거운 물을 맞으며 잠깐 서 있자, 조금 힘이 돌아왔다. 딜라일라가 자신의 두 발로 제대로 선 것을 확인한 에릭이 손을 움직였다.

쏴아아, 쏟아지는 물소리와 피어오르는 수증기 가운데 서서 딜라일라는 습한 공기를 들이쉬었다. 에릭의 서늘한 체향은 물에 씻겨 내려가지도 않고 도리어 수증기에 섞여 더 진해지기만 했다.

그녀의 하얀 피부 위를 꼼꼼히 씻어 내는 에릭의 손길에서는 조금 전까지 그녀를 가만히 두지 못하던 욕정이 조금도 묻어나지 않았다. 담백한 손길에서 묻어나는 것은 따끈따끈한 애정뿐이었다. 딜라일라는 젖은 손을 들어 에릭의 머리를 흐트러뜨렸다.

“왜요?”

자신의 머리칼이 다 젖어 버린 것은 신경도 쓰지 않고 그저 자신에게만 향하는 에릭의 시선이 기꺼워서, 딜라일라는 그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그 겨를에 딜라일라의 머리도 온통 젖어 버리고 말았다. 소나기를 맞기라도 한 것처럼 짙게 물든 딜라일라의 머리칼에 에릭이 입을 맞추고,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 속삭임은 쏟아지는 물소리에 묻혀서, 딜라일라 말고는 아무도 들을 수 없었다. 딜라일라는 그의 어깨에 매달려 똑같은 말을 돌려주었다. 에릭이 웃었고, 그녀도 웃었다.

밤마다 남몰래 전하는 고백과 미소를 주고받으며, 그들은 여름을 맞았다.

* * *

여름이 다가왔다는 것은 졸업이 다가왔다는 뜻이기도 했지만, 그 전에 학기말 시험이 다가왔다는 뜻이기도 했다. 당연히 딜라일라에게 함께 공부를 하자거나 질문을 하려는 학생들이 늘어났다. 사실 딜라일라만큼이나 열심히 학업에 매달리는 친구는 그다지 많지 않았지만, 어쨌든 졸업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치르게 될 시험에서 평소보다 나쁜 성적을 받고 싶은 사람은 없었던 것이다.

딜라일라는 순식간에 바빠진 사이에도 꼬박꼬박 에릭을 만나러 갔다. 비가 오는 날이 아니면 거의 매일 에릭을 찾아가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그녀는 익숙하게 남자 기숙사 2층 복도 가장 끝에 섰다. 꼭 세 번 노크를 하면, 에릭은 이제 누구인지 묻지 않고 문을 열어 준다.

똑똑똑, 세 번의 노크 소리에 자연스럽게 그녀에게로 쏟아지는 등불의 빛은 여전히 반갑고, 이전보다 더 기뻤다. 딜라일라는 열린 문 안쪽에 선 에릭을 올려다보았다. 날씨가 제법 더워질 만큼 시간이 지났는데도, 그는 여전히 얇은 셔츠와 바지 차림으로 캐러멜 빛 앞머리를 조금 흐트러뜨린 채였다.

“어…….”

“응?”

에릭은 딜라일라를 내려다보다가, 일단 문 앞에서 비켜섰다. 방 안으로 들어선 딜라일라가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가 다시 내뱉었다. 언제나처럼 오래된 종이의 어렴풋이 달콤한 냄새와 아침 이슬이 맺힌 풀잎처럼 싸늘한 향기가 났다. 짙었던 잉크 냄새가 엷어진 탓에 에릭의 서늘한 체향이 더 선명하게 느껴졌다. 얇은 여름용 잠옷이 사각거리며 딜라일라의 다리에 감겨들었다.

에릭의 손이 양 갈래로 땋아 내린 딜라일라의 머리칼을 쓸어내리자, 그녀는 뒤늦게 에릭이 자신을 내려다보며 내뱉었던 짧은 감탄사를 이해했다.

“푸는 거, 깜빡했다.”

“안경도 썼네요.”

“앗, 진짜네.”

딜라일라가 어색하게 안경을 밀어 올렸다. 공부할 때만 끼는 건데 오늘은 벗고 오는 것을 잊어버렸다고, 변명하듯 중얼거리는 딜라일라를 가볍게 안아 들자 그녀가 에릭의 목에 팔을 감고 매달렸다. 가느다란 안경테가 등불의 빛을 받아 금빛으로 반짝거리는 모양을 보며 에릭이 조금 웃었다. 그러고 보면 처음 딜라일라를 보았을 때에도 그녀는 이런 모습이었다.

땋은 머리와 비뚜름하게 안경을 쓴 얼굴로 그를 내려다보던 딜라일라의 얼굴이 아직도 선명하게 떠올랐다. 지금의 딜라일라도 꼭 그런 모양이었다. 어딘지 서투르게 삐죽삐죽 머리칼이 튀어나온 땋은 머리와 콧잔등에 걸친 동그란 안경. 그 뒤에서 호수처럼 반짝이는 파란 눈동자.

하지만 이제 그 눈동자는 누구에게나 그러하듯이 친절한 미소를 그려 보이지 않았다. 에릭의 품에 안긴 딜라일라는 지친 기색을 한껏 드러내고 있었다. 졸린 듯 눈은 반쯤 감겨 느릿느릿 끔뻑거렸고, 통통한 입술은 반쯤 벌어져 새하얀 앞니가 빼꼼 드러나 보였다. 피곤한 탓인지 조금 야윈 데다 눈가에 얼핏 푸른 그림자가 비치는 것 같기도 했다.

딜라일라는 다른 이들에게 이렇게 지치고 피곤한 얼굴을 곧잘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을 그도 이제 알고 있었다. 딜라일라가 다른 사람들의 앞에서는 언제나 그린 듯이 완벽한 표정을 유지하다가도, 밤이 깊어 그를 찾아오면 피곤한 기색을 숨기지 않고 칭얼거리곤 했으니까.

에릭은 그 모든 것을 눈으로 담아 머릿속에 새겼다.

“자꾸 이렇게 오지 않아도 되는데.”

괜히 뚱한 목소리를 내자 곧 무너질 것처럼 느리게 깜빡이던 눈꺼풀이 반짝 뜨였다. 에릭은 파랗게 일렁이는 눈동자에서 시선을 비껴들었다.

“에릭은 바보야.”

“피곤하잖아요.”

허공에 동동 떠 있는 발을 한들한들 흔들던 딜라일라가 그의 목에 감겨 있던 팔에 힘을 주었다. 순식간에 가까워진 입술이 에릭의 턱에 콩 찍혔다가 떨어져 내렸다. 에릭의 심장도 그녀에게 맞추어 한들한들 흔들리다가, 콩 떨어져 내렸다.

“위험하게…….”

“좋으면서.”

“…….”

차마 고개를 끄덕이지는 못하고, 에릭은 대신 그녀를 조심스럽게 침대 위에 내려놓았다. 애초부터 가벼운 잠옷 차림이었던 그녀를 침대 위에 내려놓는 일은 당연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푹신한 매트리스 위에 푹 파묻혀서 이불을 뭉쳐 끌어안는 딜라일라를 본 에릭이 잠깐 머뭇거리다가 그녀에게서 등을 돌렸다.

“어디 가?”

베개에 얼굴을 파묻은 모양인지, 먹먹하게 들리는 딜라일라의 조그마한 목소리가 에릭의 뒷덜미를 잡아챘다. 하지만 에릭은 다시 그녀에게로 돌아서지 않았다. 그러잖아도 피곤한 기색이 가득한 딜라일라의 곁에 붙어 앉았다가 그녀를 더 피곤하게 만들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그러나 딜라일라의 곁이 아니면 할 일도 없었다. 언제나 잉크 얼룩과 엉망으로 휘갈겨 쓴 메모로 빼곡하던 테이블 위는 텅 비어 있었다. 에릭이 전부 대강 치워 둔 탓이었다. 어차피 그녀를 두고 연구 따위에 집중할 수도 없었으니까.

그는 테이블 구석에 동그마니 놓여 있던 마법 포트의 뚜껑을 열었다. 그녀가 매일같이 찾아오게 된 뒤로는 꼬박꼬박 채워 놓는 주전자를 들어 물을 부어 넣고 발열판을 작동시키자 금세 물이 끓기 시작했다. 더운 바깥 공기는 기숙사의 두꺼운 석벽을 뚫고 들어오지는 못해서, 방 안의 공기는 조금 서늘했다. 그 사이로 따스한 수증기가 피어올랐다.

습관처럼 두 잔의 차를 끓여 들고 침대 가로 다가가자, 딜라일라는 그 짧은 사이에 잠들어 있었다.

협탁에 찻잔을 내려놓는 소리마저 그녀의 잠을 깨울 것 같아 에릭은 잠깐 멈칫거렸다. 최대한 조심해서 찻잔을 내려놓아 보았지만, 역시나 그는 자그맣게 달그락 소리를 내고 말았다. 에릭은 소리 없이 찻잔을 내려놓는 교양 따위는 배워 본 일이 없었다.

다행히 그녀는 깨어나지 않았다. 걱정한 것이 무색할 정도로 푹 잠든 딜라일라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에릭이 침대 가에 무릎을 꿇었다. 그녀가 팔을 양옆으로 뻗고 자도 괜찮을 만큼 커다란 침대인데도, 어째서인지 이불을 끌어안은 딜라일라는 한쪽 구석에 바짝 붙어 누워 있었다.

마치 그녀의 곁에 에릭이 누울 자리를 비워 놓은 것처럼.

결국 에릭은 침대 위로 올라갔다. 잠든 딜라일라의 목 아래에 팔을 받쳐 주고 허리에 살며시 팔을 감자 뜨끈한 체온이 팔 안에 가득 찼다. 에릭은 벅차게 숨을 들이쉬었다.

“으응…… 에릭?”

“네.”

“나, 잠들었어?”

웅얼거리면서 그의 품으로 파고들어 오는 자그맣고 말랑한 몸뚱이는 다시는 놓아주고 싶지 않을 정도로 사랑스러웠다. 꽉 당겨 안은 채로 등을 토닥이자, 흐릿하게 잠이 깬 듯하던 딜라일라는 다시 색색 일정한 숨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에릭은 그녀의 동그란 정수리에 입술을 가져다 대고 생각했다.

이 몸을, 향기를, 체온을. 이 사랑을 놓아 보낼 준비를 해야 하는데…….

“진작 깨우지 그랬어?”

새벽이 찾아오기 직전에야 그녀의 잠을 깨운 에릭에게 딜라일라가 시무룩하게 중얼거렸다. 에릭은 대답 대신 그녀의 헝클어진 머리를 풀어냈다가 다시 땋아 주고 있었다. 딜라일라가 직접 땋은 것보다도 훨씬 깔끔하고 단정하게 묶인 분홍빛 머리칼을 만지작거리던 딜라일라의 입술이 뚜하게 튀어나왔다.

“푹 잤으면서.”

“네가 깨웠으면 깼을 거야.”

에릭은 대답 대신 딜라일라의 목에 걸려 있는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몇 번이나 그가 다시 걸어 준 목걸이였다. 에릭이 일부러 그녀에게 부루퉁하게 대하거나 조금이라도 멀리하려는 기색이 보일 때마다, 딜라일라는 모른 척 목걸이를 풀어서는 다시 채워 달라며 가지고 왔다.

속이 빤히 들여다보이는 짓이었지만, 에릭은 도저히 그런 딜라일라를 밀어낼 수가 없었다. 그녀가 처음으로 목걸이를 가지고 찾아왔다가, 목걸이의 이야기는 꺼내 보지도 못하고 돌아가 혼자서 펑펑 울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난 뒤로는 더 그랬다. 자신의 생각에만 빠져서 그녀에게 상처를 줬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는 딜라일라의 목에서 달랑거리는 파란빛을 볼 때마다 죄스러워지곤 했다.

“이제 가요, 곧 해가 뜰 테니까.”

“밤이 너무 짧다, 그치.”

“안 그래도 짧은 밤에 잠도 안 자고 자꾸 찾아오지 말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딜라일라에게 그런 소리를 하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에릭으로서는, 정말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딜라일라가 홱 고개를 돌려 안경 너머로 에릭을 노려보았다. 에릭은 가만히 그 삐죽빼죽한 얼굴을 내려다보다가, 저도 모르게 또 웃었다. 딜라일라의 손이 에릭의 뺨을 꾹꾹 눌러 댔다.

“밉살맞은 소리 자꾸 하지 말고.”

그녀의 말랑한 손이 양 뺨을 꾹꾹 눌러 대는 통에 에릭의 입술이 오리처럼 튀어나왔다. 딜라일라가 그 위에 새가 쪼아 내는 것처럼 쪽 입을 맞추었다. 그녀의 동그란 눈썹이 아래로 축 처져 있었다.

“예쁜 말만 해 줘.”

이럴 때면 딜라일라가 에릭의 마음속을 전부 들여다보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는 요즘 들어 한참이나 덩치가 작고 목소리는 아이 같은 그녀가 그보다 두 살이 더 많다는 사실을 문득 되새기곤 했다.

“좋아해요, 누나.”

“……나도.”

배시시 웃는 딜라일라의 입술에 쪽 입을 맞추고, 그녀의 어깨를 잡아 돌려 세웠다. 곧 해가 뜰 시간이었다. 딜라일라의 말대로, 이제 그들이 온전히 함께할 수 있는 밤은 여섯 시간도 채 되지 않았다. 나날이 짧아지기만 하는 시간이 그들을 재촉했다.

“안녕, 에릭.”

“네.”

“나중에 또 봐.”

“네.”

괜히 인사말을 질질 끌며 시간을 잡아먹던 딜라일라는 결국 에릭의 손에 등이 떠밀리다시피 방 밖으로 나섰다. 끝까지 그를 돌아보며 꿈쩍도 하지 않고 복도에 서 있는 딜라일라를 본 에릭은 어쩔 수 없이 그녀의 눈앞에서 문을 닫았다. 잠시 후에 다시 문을 열자 그녀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후우…….”

길게 한숨을 쉰 그가 침대 위에 몸을 파묻었다. 구겨진 시트와 이불에서 흐릿하게 달콤한 향기가 났다. 에릭은 딜라일라가 했던 것처럼 이불을 둘둘 뭉쳐 끌어안고는 잠을 청했다. 분명 춥지 않은데 어쩐지 서늘한 기분이 들었다. 의식이 아른아른 멀어지는 동안에도 에릭은 그 서늘함을 참지 못하고 이불을 더 세게 끌어안았다.

아침이 찾아오면 그녀의 체온은 물론이고, 향기마저 휘발되어 사라져 있었다. 그래서 에릭은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공허한 기분에 사로잡히곤 했다.

에릭은 테스트를 앞두고 따로 공부를 하지 않았으니, 그의 생활만은 이전과 거의 다르지 않았다. 적어도 겉보기로는.

아침이면 일어나 강의동으로 향했다. 내내 꾸벅꾸벅 졸며 강의를 듣는 둥 마는 둥 하다가 실험실에 들러 시간을 때우고 저녁 즈음이 되어 기숙사로 돌아온다. 기숙사에서는 제 방에 틀어박혀 밤이 깊도록 딜라일라를 기다리다가 새벽이 찾아오기 전에 딜라일라를 보내고 뒤늦게 짧게 잠이 든다. 축제 전과 다를 것 없는 일과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달라진 점이 있었다.

그중 하나는, 종종 에릭과 딜라일라가 기숙사 앞에서 마주치곤 했다는 것이다. 에릭이 전보다 빠른 시간에 기숙사로 돌아오기 때문에, 그리고 때로 기숙사 본관 앞이나 포플러 나무 그늘 아래, 또는 안뜰에서 멍하니 시간을 보내는 일이 생긴 덕분에 일어나는 일이었다.

그럴 때면 다른 사람들의 눈이 그들을 주시하고 있어도, 에릭과 딜라일라는 인사를 나누곤 했다.

“안녕, 에릭.”

“안녕하세요.”

적당히 거리를 둔 짧은 인사였지만, 그 사이에 주고받는 눈길에 따스한 온기가 감도는 것을 눈치챈 사람은 다행히도 없었다.

대신 딜라일라가 그와 인사를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는 사실 덕분에, 에릭 브라이어라는 사람 자체에 대한 평가가 바뀌었다. 여학생들은 주로 에릭에게 미묘하게 우호적인 태도를 취했고, 남학생들은 절반쯤으로 갈라져 그를 이전보다 더 적대하거나 혹은 그에게 일부러 아는 척을 하거나 둘 중 하나였다. 물론 후자보다는 전자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에리카 선배님하고 좀 친해졌다고 우쭐대지 마!”

촥, 그의 머리 위로 양동이에 담긴 물이 쏟아졌다. 오랫동안 실험동으로 향하는 길목 덤불 사이에 숨어서 기다리고 있었던 듯, 물은 미지근했다.

텅. 한구석이 찌그러진 양동이가 바닥에 내던져지고 그 뒤로 탁탁 도망치는 발소리가 멀어져 갔다. 삽시간에 물을 뒤집어쓴 에릭은 도망치는 남자의 인상착의를 확인하지 못했다. 그저 그를 비난하는 날카로운 목소리가 익숙해서, 마법 공학부의 동급생이 아닐까 추측할 뿐이었다.

실험동에는 교수와 조교들 외에는 출입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으므로, 실험동으로 가는 길목에서 그가 당한 일을 목격한 사람은 없었다. 처음 겪는 일도 아니었다. 그의 등 뒤에서 다 들리도록 커다랗게 욕설을 지껄이거나 하는 일은 이전부터 있었지만, 축제 이후부터는 종종 이런 일이 생겼다.

이런 식으로 음습한 공격을 받기 시작한 것을 딜라일라는 모르고 있었다. 알게 할 생각은 없었다.

캐러멜처럼 부드러운 밝은 갈색 머리칼이 물에 젖어 그의 매끈한 얼굴 위로 늘어졌다. 물의 양이 많지 않아 옷까지 전부 젖어 버리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깊어 가는 여름 오후의 공기가 그의 피부 위로 달라붙었다. 에릭은 머리를 대충 쓸어 넘기고 실험동으로 걸어갔다.

언제나 온도와 습도가 일정하게 유지되는 실험동 안의 공기는 더운 여름에도 서늘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에릭은 바닥에 뚝뚝 동그랗고 투명한 흔적을 남기며 복도를 가로질렀다. 익숙하게 자신의 실험실로 찾아든 그가 찬장을 뒤져 깨끗한 수건을 꺼냈다. 반쯤 젖은 상의는 벗어 창가에 걸어 두고, 머리를 타월로 털어 말리며 다 망가져 가는 낡은 소파에 주저앉았다.

서늘하고 건조한 공기가 그를 감쌌다. 마른 먼지 냄새. 텅 비고 허무한 것들의 냄새. 손을 내밀어도 인간인 이상 붙잡을 수 없는 것들이 떠나간 자리에 남는 공허의 향기가 실험실 안을 떠돌았다.

에릭은 실험을 그만두었다. 연구도 그만뒀다. 발표를 앞두고 있던 고형 마법 약에 대한 논문은 실험대 위에 놓인 채로 손도 대지 않았다.

그런 것에 시간을 빼앗기고 싶지 않았다. 가능하다면 자신의 모든 시간을 잘라 내서 딜라일라의 곁에 붙여 두고 싶을 정도였다. 그렇게 일 초라도 더, 조금이라도 더 그녀의 곁에 머무르고 싶었다.

졸업식까지는 한 달도 남지 않았다.

그 후에는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갈 것이다. 그녀의 삶도, 그의 삶도. 그러니까 그때까지만이라도…….

머리가 다 마를 때까지 에릭은 소파 위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습관적으로 손을 움직여 머리칼에 묻은 물기를 털어 낼 뿐,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로.

마침내 저녁 해가 기울고 석양이 지기 시작했을 때에야 그는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걸음을 옮기는 그의 뒤로 길게 늘어진 그림자가 따라붙었다. 쏟아지는 주홍빛 석양을 온몸으로 받아 내며 에릭은 교정을 걸었다. 조용한 실험동 근처를 벗어나 기숙사로 향하는 동안에도 그는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기숙사를 감싼 포플러 나무 숲을 지날 때부터 그의 표정이 천천히 풀어지기 시작했다. 서늘하고 무관심하던 눈이 무심코 주위를 둘러보며 무언가를 찾았다.

마치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처럼 산들바람에 흔들리는 분홍빛 머리칼이 눈에 띄었을 때, 비로소 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에릭은 자신의 발걸음이 눈에 띄게 빨라지지 않도록 신경을 쓰며 천천히 본관 앞으로 다가갔다.

“아, 에릭!”

아니나 다를까, 딜라일라는 금세 그를 발견했다. 저를 올려다보는 새파란 눈동자를 마주한 에릭이 의식적으로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안녕, 저녁은 먹었어?”

“네.”

거짓말이었다. 식사를 걸렀다는 사실을 딜라일라가 알게 되면 신경을 쓰게 만들 것 같아서 굳이 거짓말을 했다. 그녀가 자신에게 유달리 신경을 써 주는 일이 싫은 것이 아니었다. 그에게 쏟아지는 딜라일라의 사소한 관심조차도 그에게는 기쁜 일이었다. 그가 싫어하는 것은 다른 쪽이었다.

에릭은 좀처럼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해 본 일이 없었다. 하지만 딜라일라와 우연히라도 함께 있을 때면 쏟아지는 시선만큼은 불편했다.

그 딜라일라 에리카가 에릭 브라이어에게 친근하게 군다. 그 사실을 탐탁찮아 하는 사람이 많았다. 딜라일라와 오딜이 고상을 떤다느니 하고 표현할 정도로 자신들의 평판을 신경 쓰는 셰 상브르의 학생들 중 나서서 그에게 물을 뒤집어씌우는 따위의 일을 벌이는 사람이 있을 정도니까.

적대적인 시선만이 불편한 게 아니었다. 에릭에게 갑자기 호의적으로 대하기 시작한 사람들 역시도 불편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는 그 호의가 길게 가지는 않을 것이라고 여겼다. 어차피 모두 그를 딜라일라에게 접근하기 위한 발판 정도로나 여기고 있을 테니까. 그게 아니라면, 에릭과 딜라일라의 관계에 호기심을 가지고 그들의 사이를 캐 보려는 것이거나.

어느 쪽이든 딜라일라에게 좋은 일은 아니었다. 혹여나 에릭 때문에 딜라일라가 내키지 않는 사람과 인연을 쌓게 되거나, 구설수에 휘말리기라도 하면 어떻게 한단 말인가? 아주 만약에, 그와의 관계를 누군가에게 들키기라도 한다면…… 그가 없을 때까지만 해도 어떤 허점 하나 없이 모두에게 사랑받아 오던 딜라일라 에리카는 절대 이전처럼 살 수는 없게 될 것이다.

에릭만 없다면 딜라일라는 전처럼 누구에게든 사랑받으며 그녀에게 주어진 빛나는 길을 걸을 수 있었다. 훌륭한 집안의 남자와 결혼해서 사랑을 받고, 태어날 때부터 그래 왔듯이 누구보다도 높은 곳에서 아름답게 살아갈 수 있었다. 그녀를 꼭 닮은 에리카 부인, 마가렛 에리카처럼.

그러니까 에릭 브라이어는 지금 딜라일라 에리카의 유일한 오점인 셈이었다. 그래서 에릭은 딜라일라와 함께 있을 때 쏟아지는 시선만큼은 의식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들을 바라보는 눈들이, 소곤대는 목소리가 전부 에릭에게 말하는 것 같았다. 네가 그녀의 걸림돌이라고.

“나는 이제 먹으려고.”

“……네.”

조금 전까지 딜라일라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여학생들의 유리알처럼 투명한 시선들마저도 그를 비난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에릭은 딜라일라의 말에 짤막한 단답만을 돌려주었다. 빨리 대화를 끝내야만 할 것 같은 의무감이 그의 목소리 뒤를 쫓았다.

“그럼 들어가서 쉬어. 나중에 또 봐.”

고개를 끄덕이자 딜라일라가 휙 등을 돌렸다. 그녀의 조금 뒤에서 에릭을 힐끔거리던 여자들의 시선이 동시에 딜라일라에게 돌아갔다. 그녀들과 소곤소곤 대화를 나누다가, 무슨 이유에서인지 까르르 웃음을 터뜨린 딜라일라가 그에게서 멀어져 갔다. 마침내 친구들에게 둘러싸인 그녀의 뒷모습이 본관 안으로 사라진 뒤에야 에릭은 남자 기숙사 안으로 들어섰다.

그녀는 오늘도 바빴을 것이다. 하루 종일 열성적으로 강의를 듣고, 교수에게 질문을 하러 다니고, 친구들의 물음에 답을 하고 어울렸을 테다. 아마도 저녁 식사를 한 후에도 친구들과 함께 공부를 하겠지.

하지만 밤이 깊으면 그를 찾을 것이다. 분명히 그럴 것이다. 그들에게는 시간이 없으니까.

그러니 에릭 브라이어는 지금보다 더 많은 욕심을 부려서는 안 된다. 에릭은 자기 자신에게 그렇게 속삭이면서 계단을 오르고 복도를 가로질렀다. 옷이 조금 덜 말랐던 것인지, 재킷 안감이 셔츠와 눅눅하게 달라붙어 거슬렸다.

에릭은 방에 들어서자마자 옷을 벗어 런드리 백에 던져 넣고, 욕실로 향했다. 그는 한참 동안이나 쏟아지는 뜨거운 물 아래 서서 몸을 씻었다. 젖은 몸뿐만 아니라, 마음마저 뜨거운 물에 흘려보내고 싶은 사람처럼.

밤은 그를 배신하지 않고 찾아왔다.

“밖에서 마주치면 깜짝깜짝 놀란다니까.”

“왜요?”

“으응, 글쎄?”

문을 열자마자 그의 품으로 달려들어 폭 안긴 딜라일라의 목소리는 조금 지친 듯했지만, 그래도 즐거워 보였다. 에릭은 그녀의 등을 꼭 껴안았다가 놓아주었다. 딜라일라가 발뒤꿈치를 반짝 들어 올리는 타이밍에 맞춰 모른 척 허리를 숙여 주자, 그녀가 에릭의 뺨에 쪽 입 맞추었다가 다시 그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밖에서 보면 새삼스럽게 너무 멋있어서.”

얇은 옷자락 사이에 파묻힌 목소리가 사각사각 에릭의 귓가를 긁어냈다. 사랑스러운 온기가 품 안에 가득 들어찼다. 에릭은 물씬 피어오르는 달콤한 향기를 담뿍 들이쉬었다가, 길게 내뱉었다. 그녀의 향기를 모아 둘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녀의 몸을 안아 올리자, 언제라도 날아갈 수 있을 것처럼 가벼운 무게가 그의 팔 위에 얹혔다.

“에릭 너, 너무 잘생겼어. 다른 사람들도 다 널 좋아해 버리면 어떻게 할지 걱정될 정도란 말이야.”

자연스럽게 그의 목에 매달린 딜라일라가 에릭의 귓가에 대고 소곤소곤 속삭였다. 에릭은 그녀를 안아 올린 채로 타박타박 응접실을 건넜다. 활짝 열린 침실 문 안쪽으로 걸어 들어가는 동안에도 딜라일라는 그의 목을 휘감은 팔을 풀지 않았다.

“그래서 싫어요?”

“그런 건 아니지만……. 글쎄 오늘도 쉴라가 있지…….”

그녀의 몸을 침대 위에 내려놓는 동안에도 딜라일라는 에릭에게 즐겁게 떠들었다. 그녀의 친구가 딜라일라에게 에릭의 외모를 칭찬했다는 둥, 에릭이 다음에 또 신기한 걸 만들어 낼 거라고 기대하고 있다는 둥. 사소한 이야기들이 에릭의 귓가를 스쳐 시트 위에 살랑살랑 내려앉았다.

고작 이 방이 아닌 다른 곳에서 그와 짧은 인사를 나눈 것만으로도 이렇게 즐거워하는 딜라일라의 목소리를 듣고 나면, 세상 모든 사람들이 그를 비난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정도는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었다. 머리 위에 쏟아 부어진 것이 미지근한 물이 아니라 살갗을 모두 얼려 버릴 만큼 차가운 얼음물이어도, 끓는 물이어도 괜찮았다.

어차피 전부 다 금세 사라질 것들이니까. 그의 팔 아래에서 새파란 눈을 깜빡이다가 이내 곱게 눈꼬리를 휘어 웃어 보이는 딜라일라의 얼굴도, 그의 턱 끝에 부딪쳐 오는 말캉한 입술의 감촉도, 전부 다.

딜라일라가 바쁘고 지친 가운데서도 매일같이 그의 방을 찾는 이유는, 그녀 역시 다가올 끝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에릭은 딜라일라가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고, 딜라일라는 에릭이 그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말하지 않아도 그들은 전부 알았다. 그래서 더 절박하게 서로의 몸을 껴안았고, 더 즐거운 이야기만을 나눴다.

밤은 에릭을 배신하는 일 없이 매일 찾아왔고, 그만큼 착실하게 시간이 흘러갔다. 오늘도 그들의 결말이 하루 더 가까워졌다. 졸업식까지는 채 한 달도 남지 않았다.

에릭이 딜라일라의 이마에 입술을 꾹 찍어 눌렀다. 눈꺼풀 위로 입술을 끌어 내리자 딜라일라가 간지럽다며 킥킥 웃었다. 에릭은 딜라일라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그녀의 콧잔등에도 입을 맞추었다.

끝이 정해져 있다면, 그때까지는 그녀에게 부디 즐거운 일만 있기를 바라면서.

* * *

딜라일라의 하루는 바빴다.

아침이면 졸린 눈을 비비며 일어나 어떻게든 정신을 차린 후에, 아침 식사는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재빨리 강의동으로 향했다. 틈틈이 차가운 물을 마셔 가며 졸음을 참고 강의를 듣고 나면, 교수님들께 질문을 하러 가거나 친구들의 질문에 답해 주며 자신이 공부했던 것을 점검했다.

그렇게 바쁘게 하루를 보내고 기숙사로 돌아오고 난 뒤에도 그녀의 하루는 끝나지 않았다. 친구들과 함께 저녁 식사를 할 때에도 딜라일라는 도무지 긴장을 풀지 못했다. 종종 기숙사 앞에서 에릭과 마주치게 된 후로는 혹여나 자신이 친구들의 앞에서 에릭과 너무 친하게 굴까 봐, 그래서 에릭이 곤란한 상황이 될까 봐 걱정하기도 했다.

다행히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 대신 딜라일라의 친구들은 요즘 들어 에릭과 그녀가 이야기를 나누는 모양을 지켜보고 나면 곧잘 에릭에 대한 이야기를 떠들어 대는 것에 재미를 붙였다. 마지막 테스트를 준비하느라 지친 가운데, 졸업 학년의 여학생들에게 주어진 새로운 이야깃거리를 반기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저렇게 잘생긴 줄 왜 지금까지 몰랐지?”

“전엔 좀 무서웠는데 요즘은 안 그런 느낌이지 않아?”

“그보다 전에는 제대로 본 적도 없단 말이야. 소문만 들었지.”

“소문 진짜 굉장했지.”

“마법 공학부 남자 애들이 엄청 싫어하잖아. 지금도 싫어하는 애 많을걸.”

남학생들이 유난히 그를 싫어하는 것조차 에릭에 대해 생각을 고친 여학생들에게는 묘하게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능력이 너무 뛰어나서 그런 것이라느니, 남자가 여자보다 더 시기와 질투가 심하다느니. 여학생들은 그런 이야기를 소곤대며 남몰래 킥킥 웃었다.

“잘생겨서 질투하는 거 아냐?”

결국 이런 말까지 나와 버린 직후에는 다들 한바탕 크게 웃어 젖히기까지 했다. 대식당 전체를 울리는 경쾌한 웃음소리에 시선이 그녀들이 모여 앉은 테이블에 집중되었다가 다시 흩어졌다. 딜라일라는 그 사이에서 차마 크게 소리 내 웃지 못하고 공연히 쟁반에 놓인 음식만 뒤적거렸다.

셰 상브르 아카데미는 비교적 개방적인 분위기지만, 그래도 여학생들의 수는 현저히 적었다. 여학생이 가장 많은 행정 교양학부에서도 여학생들의 비율은 절반이 조금 안 되는 정도였고 다른 학부에는 여학생이래 봐야 한 학년에 세 명이 넘으면 많은 수준이었다. 여학생들이 와글와글 모여 앉은 테이블을 힐끔거리는 시선이 그치지 않는 것은 그런 탓도 있었다.

여전히 하층민들은 여자가 일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여긴다지만, 그런 가정의 사람들이 여자인 자식을 아카데미씩이나 되는 곳에 보낼 리 없었다. 그러니 아카데미에 다니는 여학생들이란 으레 그럴 만한 여유가 흘러넘치는 소위 신귀족들의 자녀거나, 혹은 신귀족이 되고 싶은 부유한 집안의 자녀들이었다.

그들은 거의 모두가 딜라일라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으니, 딜라일라가 에릭과 친하게 지내는 모습을 보인 후로는 그를 소문처럼 나쁜 사람이라고 여기지 않게 되었다. 혹은 그런 티를 내지 않거나.

“마법 공학부가 아니라 행정 교양학부였으면 좀 달랐을 텐데.”

“그건 재능 낭비지.”

“아하하! 그건 그렇다. 마법 등 진짜 신기하더라. 내년부터는 왕실에도 들어간다며?”

“뒷배가 없어서 더 그런 거지, 좀만 더 나은 집안에서 태어났으면 지금 같지는 않았을걸.”

그렇다곤 해도 심심풀이처럼 줄줄이 이어지는 에릭의 이야기가 자꾸만 귀에 콕콕 틀어박혀서 딜라일라는 좀처럼 음식을 씹는 데 집중할 수가 없었다. 결국 식사는 절반도 먹지 못한 그녀는 여름을 맞아 식사와 함께 제공된 레모네이드를 마시며 친구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랬으면 셰 상브르가 아니라 다른 데로 갔겠지.”

“아, 그런가?”

그러다 그만 사레가 들리고 말았다.

“콜록, 콜록! 으…….”

“어머, 딜라일라. 괜찮아?”

“응, 콜록!”

가끔은 딜라일라도 어쩔 수 없이 생각하게 되곤 했다. 에릭의 집안이 사교적으로든 사회적으로든 영향력이 있었다면 좋았을 거라고. 그러면 그들은 짧아지기만 하는 밤을 틈타 남몰래 만나는 사이가 아니라 당당하게 결혼을 전제로 한 교제를 할 수도 있었을 거라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친구들의 말대로였다. 만약 에릭이 에리카와 견줄 수 있을 법한 집안의 아들이었다면, 그는 셰 상브르 아카데미에 입학하지 않았을 것이다. 셰 상브르보다 훨씬 더 오랜 전통을 가지고 내로라하는 집안의 자제들만을 학생으로 받아들이며, 동시에 여학생의 입학을 아직도 허락하지 않는 디예프 아카데미나 르아브르 아카데미로 향했을 것이다.

셰 상브르가 유명해진 것은 여학생의 입학을 허용한 최초의 아카데미인 동시에, 개개 학부를 졸업한 학생들이 사회로 나가 뛰어난 기량을 펼치고 있기 때문일 뿐. 신분제가 사라지기 전부터 귀족 남성의 자제만을 학생으로 받던 디예프나 르아브르와는 유명세의 궤가 달랐다. 에릭이 셰 상브르에 입학한 것부터가 에리카에게 견줄 수는 없는, 신귀족에 포함되지 못한 집안의 자제라는 증명이나 다름없었다.

딜라일라가 에릭과 우연히 마주칠 수 있었던 것도, 마음이 통하게 된 것도, 에릭이 허울만 남은 명예 말고는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집안의 자제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딜라일라는 차마 그 사실을 원망할 수조차 없었다.

“여기, 물. 오랜만에 차가운 거 마셔서 몸이 놀랐나 보다.”

“고마워…….”

딜라일라가 물을 꼴깍꼴깍 삼켜 따끔거리는 목을 진정시키는 동안 이야기는 에릭에게서 벗어나 다른 곳으로 흘러갔다. 요즘 들어 여학생들의 이야기는 틈만 나면 결혼이 중요한 화제로 떠올랐다. 졸업을 목전에 둔 그녀들은 동시에 결혼을 목전에 두고 있는 것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난 벌써 거의 정해진 것 같아. 아버지가 졸업하면 몽샤르맹가 둘째 아드님을 소개해 주겠다고 편지하셨는걸.”

“몽샤르맹가 둘째 아드님이면 아르망 씨? 나 그분 알아. 예술 쪽으로 조예가 깊으셔서 예전부터 우리 집안이랑 종종 만났어.”

당연한 일이기는 했지만, 에릭의 이야기에 뒤이어 곧바로 결혼 이야기가 쏟아지기 시작하자 딜라일라는 어쩐지 기분이 가라앉고 말았다. 결국 마시던 물도 내려놓고, 아직까지 음식이 반도 넘게 남아 있는 쟁반에는 손도 대지 않고 그녀는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진짜 다 정해진 거나 다름없네, 너네 집안에서 오페라 하우스에 투자하기로 했다면서. 그렇게 이어진 거 아냐?”

“네가 제일 먼저 결혼하겠다.”

“빠르면 내년 여름쯤?”

신귀족의 딸들은 대다수가 정략결혼을 한다. 그를 통해서 저들의 입지를 더 공고히 다질 수 있으니까.

제도가 사라져도 사람들의 머릿속에 붙박인 신분과 계급은 도무지 사라질 줄을 몰랐다. 뛰어난 핏줄을 물려받은 이들이 가장 첫 번째,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위에 서서 사람을 부리고 권력을 휘두르는 것이 두 번째였다. 고상하고 격조 높은 철학과 예술에 조예가 깊은 사람들이 세 번째. 그리고 그 아래로는 부유한 자들, 그 아래로는…….

비록 그 분야가 마법 공학이라고는 해도, 누군가가 사용할 물건을 직접 만들고 개발하는 이들은 오래도록 사람들의 머릿속에 새겨진 계급의 층계 위로는 절대 올라갈 수 없었다. 아무리 천재적이고, 명예 작위를 수여 받고, 왕실에 물건을 납품해도 그 차이만큼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마치 남성과 여성의 차이처럼, 신분과 계층의 우열은 이토록 명백했다.

마가렛의 말대로였다. 딜라일라와 에릭이 사회의 규칙을 깨뜨리면, 가장 먼저 사람들은 에릭에게 비난의 화살을 돌릴 것이다. 그쪽이 더 공격하기 쉽기 때문이다. 비록 여성일지라도 로드릭과 마가렛이 뒤에 버티고 있는 딜라일라보다도 더 먼저, 그 뒤를 지켜 줄 것이 아무것도 없는 에릭을 비난하는 것이 훨씬 더 쉽기 때문에.

실제로 에릭은 그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도 아카데미에서 오래도록 다른 사람들과 섞이지 못하고 미움받은 전적이 있지 않은가…….

“딜라일라, 뭐 해? 다 먹었어?”

“아, 응!”

딜라일라는 깊어져 가던 생각에서 퍼뜩 깨어났다. 친구들은 딜라일라가 피곤하긴 한가 보다며 그녀의 손을 잡고 조심스레 일으켰다. 한번 크게 앓은 이후로 딜라일라를 아주 연약한 아가씨 취급을 하는 데 재미를 붙인 그녀의 친구들이었다. 딜라일라는 별수 없이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친구들 사이에 섞여서 그녀는 쟁반을 치우고 대식당을 나섰다. 저녁이 되어도 좀처럼 차가워지지 않는 공기가 그녀들의 옷자락을 살랑살랑 흔들었다.

“딜라일라, 오늘은 무슨 공부 할 거야?”

“전기 문학이랑 고전을 할까 싶어. 그 둘은 이어지는 데가 있으니까 같이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앗, 그럼 나 모르는 거 물으러 가도 돼? 전기 문학은 어떻게든 할 수 있는데 고전은 너무 어려워서.”

“내가 알려 줄 수 있는 부분이라면…….”

“아, 그럼 나도 같이 들을래. 고전은 진짜 모르겠어.”

대식당을 나서서 기숙사로 올라가는 동안 자연스럽게 저녁 후의 공부 모임이 생겨났다. 딜라일라에게는 익숙한 일이어서, 그녀도 거절하지 않았다. 결국 딜라일라의 방에 옹기종기 모여 한참 동안 공부를 하던 친구들은 긴 여름 해가 저물고 밤이 찾아온 후에야 각자의 방으로 돌아갔다.

딜라일라는 친구들이 돌아간 후에 적당히 몸을 씻고 다시 공부를 하며 기다렸다. 차근차근 사위가 고요로 물들고, 밤이 푸르게 깊어지기를.

시간은 그 누구도 배신하지 않고 흘렀다. 마침내 산들바람에 풀잎이 흔들리는 소리만이 안뜰을 가득 채웠을 때 즈음에 딜라일라는 방을 나섰다. 복도 창문을 열고 사다리를 내려가서는 풀숲과 덤불을 지나 에릭에게로 향하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누나는 졸업하고 나면 금세 약혼하게 될 텐데. 조심하는 게 당연하죠.”

“그날 일은…… 없었던 것으로 해 두는 게 좋겠죠. 혹시 그것 때문에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곤란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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