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화 (7/14)

축제

특별한 의미가 있는 일
혹은 시간을 기념하는 의식

평상시에는 챙겨 입을 일이 없지만, 셰 상브르 아카데미에도 엄연히 제복이 있다. 보통의 학생들은 입학식과 졸업식, 일 년에 딱 두 번밖에 입을 일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셰 상브르의 학생들은 매년 자라나는 자신의 몸에 맞추어 새로 제복을 짓곤 했다. 그 제복이야말로 그들의 성장의 상징이었으며, 동시에 셰 상브르의 자랑스러운 학생이라는 증명이기 때문이다.

입학식에 처음으로 입었던 제복. 처음으로 후배가 생기는 2학년의 입학식에 입는 제복. 존경하는 선배님의 졸업식에 입은 제복. 셰 상브르를 졸업한 학생들에게는 제각기 다른 추억이 깃든 제복이 여섯 벌 있었다. 때로 여섯 벌보다 적거나 많기도 했지만, 어쨌든 학생들이 셰 상브르의 제복을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똑같았다.

아카데미 재학 시절이 아니면 겪을 수 없는 일들은 그 제복의 형태 안에 전부 깃들어 있기 때문에.

때로 어떤 성과를 올리거나 대외적인 활동을 할 때도 제복을 입었다. 에릭처럼 학술적인 발표를 하거나 그 공로를 치하 받거나 하는 때 말이다. 그 외에는 딱 한 번, 선택받은 사람들만이 제복을 입을 수 있는 때가 있다. 축제의 학생 대표를 맡게 되었을 때이다.

매년 두 명의 학생만이 제복에 그 자랑스러운 추억을 담아 둘 수 있다. 올해는 딜라일라 에리카와 에릭 브라이어가 그 주인으로 선택받았다.

딜라일라는 진작 옷장 구석에 고이 넣어 두었던 제복을 꺼내 세탁을 맡겨 둔 뒤였다. 기숙사의 사환이 축제 날 아침, 늦지 않게 말끔하게 세탁된 제복을 딜라일라의 방으로 가져다주었다.

셰 상브르의 제복은 예쁘기도 하다. 일 년에 딱 두 번 입기에는 아까울 만큼.

얇은 비단으로 만든 스커트는 흰빛에 가까운 연한 회색이었다. 장식적인 러플이나 드레이프도 없이 말끔한 일직선으로 발목까지 떨어지는 스커트는 평상시에는 입어 볼 일이 거의 없는 디자인이어서, 셰 상브르의 여학생들 중에는 딱히 의미가 없이도 제복을 입고 싶어 하는 학생들도 여럿이었다.

무릎 아래부터는 양옆에 트임이 들어가 있었는데, 벌어져도 다리가 드러나 보이지 않도록 안쪽에 천을 널찍하게 덧대 두었기 때문에 움직이는데도 불편함이 없었다. 스커트 아랫단과 트임을 따라 금사와 은사로 자잘하게 수놓은 나뭇잎 무늬가 움직일 때마다 은은하게 반짝였다.

재킷 역시 덥지 않도록 얇은 비단으로 지었지만, 어깨와 칼라에 심지를 넣어 부드럽게 몸에 휘감기지 않고 각이 잡히도록 만들어져 있었다. 스커트와 달리 짙은 푸른색으로 만들어진 재킷에도 소맷부리와 아랫단을 따라 똑같이 금사와 은사로 수가 놓여 있었다. 앞에서 잠그게 되어 있는 세 개의 단추는 은빛이었다.

재킷 안에는 자유롭게 블라우스나 보디스를 받쳐 입곤 했지만, 어떤 것이든 그 색은 흰색이어야 했다. 오늘 딜라일라는 소매 끝과 네모지게 파인 네크라인을 따라 앙증맞은 레이스가 달린 블라우스를 입었다. 딜라일라는 매년 제복을 새로 맞추었기 때문에, 올해도 완전히 새것이었다. 몸에 꼭 맞게 재단된 제복을 입고 거울 앞에 서자 딜라일라는 어렴풋한 감회에 사로잡혔다.

올해의 제복은 분명 셰 상브르를 떠나는 날 입은 제복이 아니라, 에릭과 함께 학생 대표를 맡은 날 입었던 제복으로 기억될 것이다. 딜라일라는 그 사실이 기쁜 것 같기도 했고 슬픈 것 같기도 했다.

“……좋아해요.”

어쩌면 꿈이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해 버릴 만큼 기쁜 말이었다.

“누나를 좋아해요.”

그런데 왜 그 말에 눈물부터 차올랐는지는 알 수 없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알 수 없고, 심지어는 목소리조차 낼 수 없었다. 목이 꽉 틀어 막힌 것 같았다.

그래서 입술을 맞대고, 소리로 만들 수 없는 마음이 닿기를 바랐다.

닿았을까? 닿았겠지……? 아마도 닿았을 것이다. 목소리를 내면 소리 내 펑펑 울어 버릴 것만 같아서 입을 꾹 다물고 있는 딜라일라를, 에릭은 따뜻하게 안아 주었으니까.

똑똑, 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에 가만히 거울을 들여다보고 있던 딜라일라가 퍼뜩 생각에서 깨어났다.

“누구세요?”

“쉴라랑, 디아나랑, 리리아!”

느닷없는 친구들의 방문이었다. 딜라일라는 머릿속을 맴도는 에릭의 생각을 휘휘 고개를 저어 몰아내곤 그녀를 찾아온 친구들에게 문을 열어 주었다.

“올해의 학생 대표님은 제복이 참 잘 어울리시네요!”

딜라일라가 문을 열어 주자 불쑥 그녀의 방 안으로 밀고 들어온 세 명의 친구들 중, 가장 앞에 선 디아나가 쾌활하게 외쳤다. 딜라일라는 무슨 일로 그녀들이 찾아왔는지를 알 수가 없어서, 고개를 옆으로 슬쩍 기울였다. 저도 모르는 새 에릭에게서 옮은 습관이었다.

“셰 상브르의 자랑, 행정 교양학부의 수석 에리카 양은 학생 대표를 맡을 정도로 대단하지만…….”

“으, 그런 말 하지 말랬잖아.”

“대신 손재주가 조금 없으니까 도와주러 왔어!”

다짜고짜 치켜세워 주는 친구의 말에 질색해 보인 것도 잠시, 딜라일라는 친구들의 손길에 떠밀려 의자에 앉았다. 그녀를 앉힌 친구들이 조그만 가방에 담아 들고 왔던 크고 작은 빗과 머리핀, 헤어 롤과 리본 따위를 꺼내 테이블에 늘어놓았다. 그러면서도 그녀들은 즐겁게 재잘댔다.

“아냐, 딜라일라 손재주는…… 조금보다는 조금 더 많이 없지.”

“너희 딜라일라한테 너무하다…….”

“맞아, 너무해.”

“사실이지만.”

얼떨떨하게 의자에 앉아 있는 딜라일라를 두고 친구들이 재빠르게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셋 중 가장 손재주가 좋은 리리아가 딜라일라의 머리를 열심히 빗어 내린 후에 한 움큼을 잡아 땋았다. 디아나와 쉴라는 곁에서 제복을 입었으니 단정한 흰 리본이 어울리네, 딜라일라의 눈동자를 닮은 하늘색 리본이 어울리네 하며 그녀의 머리칼에 리본을 대어 보고 있었다.

리리아는 바쁘게 딜라일라의 머리를 땋아 내리면서도 사랑스러운 분홍빛 머리카락에는 역시 장미처럼 빨간 리본을 묶어 장식하는 게 예쁘다고 첨언했다. 하지만 오늘 딜라일라의 옷차림까지 고려하며 진지하게 토론을 하고 있는 디아나와 쉴라는 리리아의 의견은 듣지도 못한 척 묵살해 버렸다. 물론 처음부터 딜라일라의 의견은 묻지도 않았다.

“딜라일라는 예쁜데, 정말 예쁜데…… 얼굴을 매일 썩히잖아.”

“그래도 예쁘긴 하지만, 그래도 항상 아까웠단 말이야.”

“맞아. 그래서 오늘은 한 풀 거야. 말리지 마!”

“으응…….”

와글와글 떠드는 친구들에게 딜라일라가 애매하게 웃어 보이는 사이에도 리리아는 착착 딜라일라의 머리를 꾸미고 있었다.

위쪽 머리를 양옆에서부터 땋아 넘기고, 나머지 머리칼을 잡아 이리 틀고 저리 틀어 보다가 결국은 크게 반 묶음을 해서 뒤로 늘어뜨리기로 했다.

머리를 장식할 리본은 결국 하얀색으로 결정됐다. 땋아 고정한 옆머리에 예쁘게 묶은 리본을 핀으로 꽂아 고정하고, 그 위로 다시 한 움큼을 새로 땋아 가리며 나머지 머리칼과 함께 모아 뒤에서 하나로 묶었다. 단정해 보이면서도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머리 모양을 보고는 쉴라가 박수치며 리리아의 손재주를 칭찬해서 리리아가 자랑스럽게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런데 뭔가 부족하지?”

“응, 리본으로는 역시 좀…… 혹시 딜라일라, 머리 장식 같은 거 없어?”

“딜라일라가 아카데미에 그런 걸 가져올 리가 없잖아.”

“어쩔 수 없네. 내 거라도 가져올까?”

넋이 쏙 빠져 있던 딜라일라가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아직 거울을 확인하지 못해서 제대로 보지는 못했지만, 평소에도 딜라일라의 머리칼을 예쁘게 땋아 주곤 하던 것이 리리아였음을 감안하면 분명 쉴라가 칭찬할 만큼 예쁘게 꾸며 주었을 것이 확실했다.

“이대로도 괜찮아. 고마워.”

“아냐. 역시 내 거라도 가져와 볼게.”

“정말, 정말 괜찮은데…….”

하지만 딜라일라의 만류는 당연히도 무시됐다. 결국 디아나가 자신의 보석함을 다 털어 오겠다며 비장하게 방을 나서려 했을 때에야 딜라일라가 다급하게 그녀를 붙잡았다.

“나 머리 장식 있어! 그거 쓰면 되지 않을까?”

“그래? 별일이네.”

“일단 꺼내 와 봐.”

딜라일라는 혹시 친구들이 다듬어 준 머리가 흐트러질까 봐 조심조심 움직여서 옷장으로 달려갔다. 그런 딜라일라의 뒤를 따라 걸어가면서 친구들은 그렇게 조심하지 않아도 된다며 웃었다.

옷장 깊은 곳에 넣어 두었던 상자를 꺼내 뚜껑을 열자, 그녀의 뒤를 쫓아왔던 친구들이 감탄사를 터뜨렸다. 과연 마가렛이 직접 골라 선물한 보석 핀은 친구들을 실망시키지 않았다.

“세상에!”

“너무 예쁘다……. 딜라일라한테도 잘 어울리고.”

“뒤에 꽂으면 딱이겠는걸.”

비장하게 아쿠아마린과 진주가 꽃처럼 매달린 머리 장식을 집어 든 리리아가 딜라일라의 묶은 머리 위에 예쁘게 핀을 꽂아 넣었다. 척 보기에도 값비싸 보이는 보석 핀이 빠질까 봐, 자잘한 핀을 보이지 않게 겹쳐 꽂아 단단히 고정한 뒤에야 그녀의 손이 딜라일라의 머리에서 떨어졌다.

“흰 리본으로 하길 잘했어.”

“나는 이제 여한이 없다…….”

손을 하나로 모아 쥐고 감동한 모양새를 해 보이는 리리아와 쉴라의 과장된 태도에 딜라일라도 결국은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딜라일라가 리리아에게 고맙다며 연신 인사를 하고 리리아가 손을 내저으며 사양하는 사이, 상자를 닫아 넣어 두려던 디아나가 함께 들어 있던 목걸이를 뒤늦게 발견했다.

“아, 목걸이도 있네.”

“아, 그건…….”

지난번 에릭이 채워 준 뒤로 줄곧 보이지 않게 옷 속으로 넣어 걸고 다니다가, 에릭과 냉전 아닌 냉전을 시작한 뒤에 혼자 낑낑거리며 애써 풀어서 상자에 넣어 둔 것이었다. 내심은 에릭이 다시 그녀의 목에 걸어 주기를 기대하면서.

잔뜩 신이 난 친구들에게 휩쓸려 갔던 생각이 반짝이는 목걸이의 푸른빛과 함께 딜라일라의 마음속으로 밀려들었다. 딜라일라는 잠시 멍하게, 마치 처음 보는 물건인 것처럼 목걸이를 쳐다보았다.

“목걸이도 예쁘네. 마침 스퀘어 넥이라 잘 어울릴 것 같아.”

“이리 줘 봐, 채워 줄게.”

“아, 아니!”

딜라일라는 신이 나서 당장이라도 그녀에게 목걸이를 채워 주려는 친구들에게 무작정 빽 큰 소리를 냈다가, 합 입을 다물었다. 양손으로 입을 꼭 가린 딜라일라뿐만 아니라, 즐겁게 떠들던 친구들도 일순간 조용해졌다. 딜라일라가 큰 소리를 내는 것을 처음 본 탓이었다.

“어, 어…… 그러니까.”

어색하게 입을 연 딜라일라가 손을 쥐었다 폈다 하다가, 결국 그냥 웃어 보였다. 언제든 어색하지 않게 미소를 만들어 보이는 것만큼은 딜라일라가 가장 잘할 수 있는 것이었다.

“목걸이보다, 나 화장해 주지 않을래……? 알다시피 내 손재주가, 음. 그렇잖아.”

“어머, 세상에.”

디아나가 놀란 듯 속삭였다. 휘둥그렇게 뜬 눈동자들이 반짝이며 다시 휘어지기 시작했다.

“내가 잘못 들은 거야?”

“아닐걸? 나도 그렇게 들었는데?”

“화장하고 싶어?”

그녀들의 웃음기 가득한 눈동자에 조금씩 달아오르기 시작한 얼굴로도 딜라일라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것을 본 친구들은 목걸이는 까맣게 잊어버린 듯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고는 딜라일라의 팔을 잡아끌기 시작했다.

“좋아. 일단 하자, 가자. 아예 내 방으로 가자! 지금 아니면 언제 화장한 딜라일라 에리카를 봐?”

“그런데 웬일로 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대?”

“드디어 예쁘게 보이고 싶은 사람이 생기기라도 했어?”

장난으로 놀리는 말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딜라일라의 얼굴은 더 빨갛게 물들었다. 그녀들이 모두 연애 따위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 사람들이라서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딜라일라는 참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여 버렸을지도 모를 일이니까.

“그냥, 학생 대표까지 하니까…….”

“좋아. 기대해. 내가 정말 예쁘게 해 줄게. 세상에서 제일 예쁘고 귀엽고 사랑스럽고 멋지고 단정하게!”

“그런 게 가능해?”

“리리아 님 사전에 불가능이란 없다!”

왁자하게 떠드는 목소리들이 즐거웠다. 기어코 자신의 방이 아닌 친구의 방까지 끌려 들어가 화장대 앞에 앉으면서, 딜라일라는 새삼스레 정말로 축제라는 생각을 했다.

* * *

평소보다 일찍 일어난 그는 신경 써서 제복을 갖춰 입었다. 비록 올해 새로 맞춘 것은 아니지만, 조금 짧아진 바지 탓에 걸을 때마다 발목이 조금 드러나 보이는 것을 제외하면 제복은 그의 몸에 꼭 맞았다.

금실과 은실로 자수가 놓인 새파란 재킷과 연회색 바지를 챙겨 입고, 에릭은 거울 앞에 섰다. 몇 번인가 머리를 만지작거리며 고민을 했지만, 그는 머리 모양을 다듬는 일 따위에는 재주가 없었다. 어젯밤 잊지 않고 약을 챙겨 먹은 탓에 눈가에 졌던 그늘은 다행히도 거의 사라진 뒤였다.

제복을 입고, 결국 손대지 못한 캐러멜 빛 머리카락을 평소처럼 조금 흐트러뜨린 채로 그는 기숙사를 나섰다.

조금 이른 시간에 나왔는데도 교정은 사람으로 가득했다. 사람, 사람들. 무리 짓고 손을 잡고 함께 웃고 떠드는 사람들의 사이를 헤치고 본관으로 향하는 동안 에릭은 조금 멍한 상태였다.

어제 그들은 잎 새로 지던 해가 사라지고 푸른 밤이 찾아온 뒤에야 서로를 꼭 껴안고 있던 팔을 풀어냈다. 멋쩍은 미소를 지어 보이는 딜라일라의 눈가에 말라붙은 눈물의 흔적을 에릭은 차마 닦아 내지도 못했다. 그는 그저 딜라일라의 등을 떠밀었다.

어서 가 보라고. 자신은 조금 뒤에 나가 보겠다고.

딜라일라는 칭얼대는 아이처럼 그를 놓지 않으려 했지만, 에릭은 결국 그녀를 자그만 숲 밖으로 밀어 보냈다. 그녀의 등을 떠밀 때마다 그렇게 했듯이 ‘나중에’라고 속삭이면서.

마침내 딜라일라의 뒷모습이 빽빽한 나무줄기 너머로 사라진 뒤에, 그는 그대로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봄밤의 공기는 향기롭고 조금 차가웠다. 그 선득한 온도를 느끼면서도 에릭은 한참 동안 나무숲 가운데를 비집고 앉아 일어나지 않았다. 일어날 수가 없었다.

한여름 밤도 아닌데 꿈인 것처럼 몽롱했다.

마침내 자리를 털고 일어나 기숙사로 돌아가는 동안에도, 몸을 씻고 잠자리에 들 준비를 하는 동안에도, 다음 날 아침 눈을 떠서도.

내내 그는 멍하니 정신이 붕 떠 있는 것 같았다. 발아래가 둥실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그 느낌은 어렴풋이 불안한 듯하다가도 기분이 좋은 것 같기도 했다.

마침내 본관 앞에 다다라서야 그는 어제 있었던 일이 현실이라는 것을 실감했다. 대체 언제부터 나와 있었던 것인지 일찌감치 본관에 도착해 서 있던 딜라일라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천천히 걸음을 옮기고 있던 그를 발견하고, 눈이 마주치는 순간에.

상기된 뺨이 통통하게 솟아오를 정도로 환하게 웃어 보이는 딜라일라의 얼굴이 둥실둥실 떠 있던 그의 발을 다시 지상에 내려놓았다.

“아, 브라이어 학생.”

그러나 에릭에게 먼저 말을 걸어온 것은 딜라일라가 아니었다.

“늦지 않게 잘 왔어요. 사람이 워낙 많아서 늦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지난번 딜라일라와 함께 홀로 들어오던 우아한 여자 교수가 에릭에게 말을 거는 모양을 보고 있던 딜라일라가 입 모양을 뻐끔거려 보였다. 하지만 에릭은 여전히 입술을 읽어 그녀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재주가 없었다. 그는 대신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가, 뒤늦게 인사말을 붙였다.

“……안녕하세요.”

그 자그만 인사에 다시 피어나는 꽃처럼 환하게 번져 나가는 딜라일라의 미소를 보면 어쩌면 그 인사말이 정답이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에릭은 그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교수의 뒤를 따라 총학장실로 올라가 개회식이 시작될 때까지 잠시 기다리는 동안에도 에릭과 딜라일라는 소리 내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그저 서로를 훔쳐보듯 시선을 힐긋거렸다.

에릭은 딜라일라의 머리칼에 하얀 리본이 매달려 살랑거리고 있다는 것을 뒤늦게 눈치챘다. 그녀를 처음 마주쳤을 때는 딜라일라의 얼굴밖에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것이다. 그것을 눈치채고 나자 평소와 다른 딜라일라의 모습이 하나씩 하나씩 눈에 들어왔다.

늘 길게 풀어 내리거나 가끔 하나로 땋아 내렸던 머리칼은 정성스럽게 꾸며져 있었다. 묶인 머리 위에는 연한 푸른색의 보석과 진주가 붙어 있는 머리 장식이 꽂혀 있었는데, 에릭은 그것이 언젠가 딜라일라에게 직접 걸어 주었던 목걸이와 한 세트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사실도 눈치챘다.

게다가 보송한 얼굴은 평소보다 더 뽀얗게 반짝였고, 하얀 뺨 위에는 붉은 장미 꽃잎을 빻은 가루를 뿌린 것처럼 은은한 홍조가 감돌았다. 풍성하게 늘어져 그녀의 눈가에 그림자를 드리우던 속눈썹이 동글동글 말려 올라가 있었다. 물론 에릭은 속눈썹을 말아 올리기 위해 눈가에 인두를 가져다 대는 리리아의 행동에 딜라일라가 비명을 질러 대며 기겁했던 사실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하나만큼은 알 수 있었다. 딜라일라 에리카는 여느 때와 같이 사랑스러웠다.

그러다 문득 딜라일라와 눈이 마주쳤다. 딜라일라의 새파란 눈동자가, 눈매가 휘어져 있는 것을 본 에릭은 딜라일라가 조금 전부터 하던 짓을 똑같이 따라 했다. 목에서 어떤 소리를 내지 않고 뻐끔뻐끔 입술만 움직여서 남몰래 말을 건넨 것이다.

‘예뻐요.’

‘……?’

딜라일라의 고개가 옆으로 갸우뚱 기울었다. 분홍빛으로 물든 입술이 의아하게 벌어졌다. 에릭은 그 모양을 바라보고 있다가 저도 모르게 조금, 웃었다.

딜라일라는 그를 보며 다시 환하게 미소 지었다. 그의 말을 알아들었는지 어쨌는지, 그런 것은 정말로 아무 상관도 없어졌다.

“시간 다 됐군. 갑시다.”

누군가 그렇게 말할 때까지, 그들은 계속 그렇게 붕어처럼 입술을 빠끔거리며 서로 닿지 않는 대화를 나누면서 웃었다.

일 년의 대부분을 잔잔한 공기에 잠겨 있던 교정에 즐거운 감탄사와 인사가 바글거렸다. 그 유명한 봄의 셰 상브르 교정을 돌아보며 감탄사를 터뜨리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아카데미에 재학 중인 학생들의 가족이나 친구였다. 그 외에 셰 상브르의 축제를 취재하려는 기자나 아카데미에 꾸준히 기부를 하고 있는 귀빈들도 있었지만, 그들은 교정을 수놓은 아름다운 화초나 관목 따위에 관심을 보이는 대신 개회식이 있을 본관 홀에 일찌감치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들이 눈여겨보는 것은 무엇보다도 홀 천장에 매달려 태양보다 더 환하게 빛을 밝히고 있는 마법 등이었다.

“저것이 마법 등인가요?”

“듣자 하니 개발한 자가 아직 학생이라던데…….”

“위험하지는 않을까……?”

그런 수군거림이 귀빈석의 여기저기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마법 등의 개발은 크게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마법 공학이나 왕실과 관련 된 사람들에게는 충분히 화제가 되었던 일이었다. 자연히 마법 등을 개발한 사람이자 셰 상브르 아카데미의 학생이고, 동시에 마법 공학자로 유명한 브라이어 남작의 아들인 에릭 브라이어의 이름 역시 알음알음 알려졌다.

누군가는 그를 두고 시대에 다시없을 천재라고 찬양했고, 다른 누군가는 아버지의 후광을 등에 업은 건방진 놈이라고 깎아내렸다. 어느 쪽이든 그를 두고 떠드는 사람들의 대다수는 에릭 브라이어와 대화 한번 나눠 본 일이 없었다.

“30분 후에 셰 상브르 아카데미 축제의 개회식이 시작됩니다!”

시간을 알리는 사환의 목소리가 우렁차게 홀 안의 공기를 울렸다. 겁 많은 숙녀들은 그 우렁우렁한 메아리에 머리 위에 달린 마법 등이 고장이 나지는 않을까 목을 움츠리고 속닥거렸고, 호기심 많은 신사들은 때로 머리 위를 올려다보며 눈을 찌르는 새하얀 빛에 인상을 찌푸렸다.

귀빈석 외에는 드문드문 자리가 채워져 있던 홀 안으로 사람들이 밀려들어 오기 시작했다. 고상한 속삭임 외에는 식을 준비하는 사환들의 발소리만이 가득하던 홀 안이 순식간에 시장통과 다를 바 없이 시끌벅적해졌다. 그런 것이 익숙하지 않은 고상한 취미의 사람들이 얼핏 인상을 찌푸렸다.

필립 샤니 역시 익숙하지 않은 소란에 인상을 찌푸린 이들 중 하나였다. 하지만 화려한 금발을 단정하게 쓸어 넘기고 새파란 벽안을 총명하게 빛내고 있는 그를 돌아보는 숙녀들이 적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금세 부드럽게 표정을 풀었다. 그가 입가에 살짝 미소를 걸치자 필립의 옆에 앉아 있던 꼬마 숙녀가 자신의 부모에게 종알거렸다.

“왕자님이야! 리리의 옆에 왕자님이 있어요!”

“쉿, 리리. 조용히 하렴. 그렇게 떠들어 대면 벨 언니의 뒤를 따라 셰 상브르에 입학할 수 없다고 했지?”

조그만 몸에도 드레스를 꿰어 입고 머리 위에는 앙증맞은 미니 햇을 얹은 아이의 부모가 그에게 사과의 눈짓을 보내왔다. 필립 샤니는 너그럽게 그들의 인사를 받으며 웃어 주었다. 뭐, 나쁜 말도 아니었는데 그쯤이야. 오히려 언짢아지려던 기분이 나아졌다.

그는 애초부터 마법 등이니 뭐니 하는 것에도 관심이 없었고, 학생들의 축제 따위에는 더더욱 관심이 없었다. 그것이 자신의 격에 맞지 않는 사람들이 와글와글 모여들어 떠들어 대는 것이라면 관심이 없는 수준을 넘어서 싫었다.

내무부에서 위원 보좌로 일하고 있는 그는 오로지 남자, 그것도 내로라하는 집안의 남자들만이 입학할 수 있는 명문 아카데미를 졸업했다. 필립 샤니의 아버지 지금은 위원직에서 물러나 있지만, 한때는 내무 위원으로 명망 높았던 자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필립 샤니 역시 언젠가는 내무부의 위원이 되어 나라를 이끌어 가는 주역 중 하나가 될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고작 명예직인 작위 하나 가지고 있는 남학생의 알량한 발명품에 감탄할 수도, 평생 섞일 일이 없는 질 낮은 인간들의 사이에 섞여 앉아 있는 것을 탐탁해 할 수도 없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가 그 모든 것을 감내하고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은 오직 한 가지 목적을 위해서였다.

딜라일라 에리카.

현재 내무부에서 가장 큰 권력과 명성을 가지고 있는 이를 꼽자면, 당연히 로드릭 에리카였다. 대대로 내무부의 요직을 꿰차고 권력을 대물림해 온 에리카의 사람들은 로드릭의 대에서 결국 왕실의 명령 아래 최고 위원이라는 특별 직이나 다름없는 자리까지 따냈다. 딜라일라 에리카는 그런 로드릭의 외동딸이었다.

그녀를 붙잡으면 내무부의 권력을 자연스럽게 물려받을 수 있으리라는 추측은 내무부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거의 기정사실이나 다름없었다.

말하자면, 필립은 그에게 찾아온 일생일대의 기회를 위해 이곳에 와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필립 샤니가 막무가내로 그녀를 찾아 셰 상브르까지 걸음 한 것은 아니었다. 그런 고상하지 못한 접근은 애초에 딸을 아끼기로 유명한 로드릭에게 들키기라도 한다면 아주 경을 칠 일이었고, 실제로 그런 일이 몇 번 있었다는 소문도 있었다. 심지어는 딜라일라 에리카와 제대로 말 한마디 섞어 보지도 못하고 나가떨어졌다는 이들의 이야기를 필립도 잘 알고 있었다.

필립이 당당하게 귀빈석에 앉아 있을 수 있는 이유는 로드릭 에리카의 허락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로드릭은 필립 샤니에게 자신이 워낙 바빠 딜라일라의 마지막 축제에 갈 수 없을 것 같은데, 혹시 그 대신 축제 개회식에 참가해 꽃과 선물을 전해 줄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그것은 명백하게도 필립 샤니가 딜라일라를 만나 호감을 쌓게 해 주려는 포석이었다.

당연히 필립 샤니는 로드릭의 부탁을 기쁘게 수행하기로 했다. 그것이 지금 그가 한 아름이나 되는 꽃과 선물을 직접 든 채로 셰 상브르 아카데미의 축제에 와서 언짢음을 참고 앉아 있는 이유였다.

‘그래도 그렇지, 에리카 양은 왜 하필 이런 아카데미에……. 하긴, 여성을 받아 주는 수준 높은 아카데미는 없으니 어쩔 수 없나.’

“10분 후에 셰 상브르 아카데미 축제의 개회식이 시작됩니다!”

멍하니 딴생각에 빠져 있던 필립은 귀를 찌르는 외침에 번뜩 자세를 고쳐 앉았다. 여전히 탐탁찮은 그의 속내와 달리, 그의 얼굴에는 부드러운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귀빈석과 그 외 방문자들을 위한 자리는 이미 오래전에 꽉꽉 들어차 있었다. 홀 가운데 텅 빈 자리는 모두 아카데미의 학생들을 위한 자리였다. 그리고 이제는 그곳에도 한 명 한 명, 사람들이 앉기 시작했다. 제복은 아닐지라도 제각기 가장 단정한 옷을 골라 입은 학생들은 그들을 만나러 온 친구와 가족들이 지켜보고 있는 이 순간, 어느 때보다도 자부심에 가득 찬 얼굴이었다.

‘그래 봤자…….’

필립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 뒤는 굳이 더 생각하지도 않았다. 어차피 뻔하니까.

그는 오직 하나만을 기다렸다. 그 유명한 사교계의 명사인 마가렛 에리카를 닮아 흔치 않은 분홍빛 머리칼을 한 여성, 딜라일라 에리카를.

그녀는 학생들이 제각기 자신의 자리를 모두 차지하고 앉은 뒤, 개회식의 직전에야 등장했다. 이 아카데미에서 가장 중요한 주역이니 어쩌면 당연한 등장이었다. 원래 주인공은 늦게 등장하는 법이니까. 그녀의 등장과 동시에 학생들이 모여 앉은 곳에서 작은 소란이 일었다가 가라앉는 것을 보니 에리카의 딸은 인망까지 좋은 모양이었다.

아마도 졸업 후에는 사교계의 중심이 될 테지. 필립은 만족스럽게 턱을 쓸어내리며 안고 있던 꽃다발을 내려다보았다. 그녀를 닮은 분홍빛 꽃을 모아 만든 다발에서 산뜻한 꽃향기가 피어올랐다.

위풍당당하게 홀을 가로지르는 총장과 교수들의 무리 가장 뒤를 따라 걷는 딜라일라 에리카의 분홍빛 머리카락이 걸음을 따라 총총 흔들렸다. 그 눈에 띄는 빛깔의 머리칼을 사랑스럽게 땋아 리본과 보석으로 장식한 아래에는 단정한 제복이…….

‘셰 상브르 아카데미 제복은 여성스럽지가 못하군. 그녀에게는 조금 더 화려한 쪽이 잘 어울릴 것 같은데.’

뭐, 제복이야 어쨌든 딜라일라 에리카는 아름다웠다. 조금 어린 듯 보이기도 하지만 그 점이 오히려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과연 그 마가렛 에리카와 로드릭 에리카가 끼고돌 법도 했다. 어마어마한 뒷배경으로도 모자라서 저렇게 아름다운 외양까지 갖추었다니, 과연 그녀는 학생 대표를 맡아 마땅한 학생임이 분명했다.

단연 돋보이는 외모의 딜라일라 에리카 곁에는 훤칠하게 키가 큰 남학생이 나란히 걷고 있었다. 그 덕에 딜라일라 에리카의 조그마한 몸집이 더 작게 보였다. 캐러멜과 비슷한, 밝은 갈색 머리칼의 남학생 역시 제복을 입고 있었다.

“저 학생이 바로 그 브라이어라면서요?”

“마법 등을 개발한 학생 말이오.”

“듣기로는 상당히 오만한 성품이라던데…….”

“그래 봤자 제 아비를 따라 평생 연구나 할 인물 아닌가.”

귀빈석에서는 딜라일라 에리카뿐만 아니라 에릭 브라이어의 이름도 함께 떠돌았다. 필립은 그것을 무심히 들어 넘겼다. 어차피 그는 아무리 유명해져 보았댔자 한낱 마법 공학자에 불과할 테니까. 그가 아무리 명성을 쌓은들 대대로 물려받은 품격을 지닌 필립 샤니나 딜라일라 에리카와는 현저한 차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만약 필립 샤니가 바로 그 에리카와 결합하게 된다면…… 상상만 해도 기분이 좋아졌다. 필립 샤니는 너무 큰 기대를 품지 않도록 조심하며 딜라일라 에리카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행진이나 다름없는 무리가 홀의 가장 앞, 연단 가까이에 도착하자 거짓말처럼 수군거림이 사그라들었다. 총학장과 각 학부의 학장들이 인자한 미소를 띠고 아카데미를 찾은 손님들과 학생들을 둘러보았다. 딜라일라와 에릭은 학생들의 대표로서 가장 앞에 서서 학장들과 손님, 그리고 학생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았다.

천천히 찾아온 고요의 사이로 연륜 있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올해도 아카데미를 찾아 주신 분들이 많아 기쁩니다. 헨리 윌로우, 셰 상브르 아카데미의 총학장이 대표로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

사적인 모습과는 전혀 다른, 무게감 있는 얼굴을 한 헨리 윌로우 총학장을 힐끔 올려다본 딜라일라는 그만 살짝 웃어 버리고 말았다. 금세 다시 엄숙하고 진지하게 표정을 고쳐 보았지만, 자꾸만 웃음이 새어 나와서 딜라일라는 결국 남들에게 들키지 않도록 고개를 숙여야 했다.

헨리 아저씨가 웃겨서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교정에 가득한 사람들 사이로 확연하게 훌쩍 큰 에릭이 나타나 그녀를 바라본 순간부터 딜라일라는 자꾸만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제복을 챙겨 입으며 사로잡혔던 조금 슬픈 생각이나 어렴풋한 감회는 그 웃음 뒤에 밀려 사라졌다.

자꾸만 좋은 것만 생각났다. 그녀를 보며 입술을 움직이던 에릭의 얼굴에 꽃물처럼 번지던 흐릿한 미소 따위와도 같은 것만.

예전부터 에릭은 종종 딜라일라를 보며 그렇게 웃었다. 그때는 그냥 막연하게 뭔가 기분이 좋겠거니 했을 뿐이었다. 에릭이 그녀를 좋아할 거라고는 정말, 손톱만큼도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아니, 정말 손톱만큼도 생각 못 했나……? 그런데 어디서 에릭을 붙들고 따져 댈 용기가 났지.’

아무려면 어때. 이게 다 에릭이 전부터 자꾸 다정하게 대해 준 탓이었다. 그러니까 에릭이 막상 저를 밀어내는 걸 견디지 못하고 짜증을 냈다가 따져 물어 댔다가 한 것이다. 그리고 그 다정함이 딜라일라를 좋아해서였다고 하면, 음, 정말로 아무려면 어떤가 싶어졌다.

그래도 나중에 꼭 다 물어봐야지. 어제는 또 나중에라고 하면서 딜라일라를 떠밀어 대는 통에, 그리고 딜라일라가 자꾸만 울어 버릴 것 같아서 입을 다물고 있었던 탓에 별다른 대화를 못 했다. 딜라일라는 오늘 개회식이 끝나고 나면 당장이라도 그를 끌고 가서 단둘이 이야기를 해야지, 하고 결심했다.

“이상으로 셰 상브르 아카데미 봄 축제의 개회식을 마칩니다. 손님 여러분께서는 질서를 지켜 홀을 나가 주세요. 잠시간의 정리를 마친 후에 이 홀은 축제 기간 내내 개방되어 손님들께서 휴식할 수 있는 장소가 될 예정이니 혹시 축제를 즐기시던 중에 지치실 때면 언제든지…….”

개회식은 금세 끝이 났다. 총학장실에서 대기하는 동안 윌로우 총학장이 귀찮아하며 개회식 같은 건 없애도 되는 것 아니냐고 했던 것이 수긍이 갈 정도였다. 물론 그에 미스 란치가 기부금을 낸 귀빈들이 개회식이 아니면 언제 얼굴을 내밀겠느냐는 말을 우아하게 돌려 말했던 것 역시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얼른 식이 끝나기만 기다리고 있던 딜라일라에게는 금방 끝나서 차라리 다행이었다.

물론 학생 대표씩이나 맡은 딜라일라와 에릭은 식이 끝났다고 해서 곧장 돌아갈 수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에리카 양, 브라이어 군. 잠시 이쪽으로.”

식이 진행되는 동안 조용하던 사람들이 왁자하게 떠들며 홀을 빠져나가는 소리 가운데로 윌로우 총학장이 그들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딜라일라는 얌전히 윌로우 총학장의 뒤를 따라 귀빈석으로 향했다.

“참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윌로우 씨, 올해도 교정이 아름답더군요.”

“하하, 칭찬 감사합니다. 밀리 부인께서도 함께 와 주셨군요!”

윌로우 총학장은 어수선한 가운데서도 꼭 다른 공간에 있는 것처럼 품위 있게 귀빈석에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하나 인사를 건넸다. 에릭과 딜라일라는 그 뒤에 얌전히 서서 학생 대표의 맡은 바 소임을 다했다. 그들을 흘긋거리며 흥미를 보이는 사람들에게 어색하게 웃어주거나 얌전히 고개를 숙여 보이는 것 따위 말이다.

“안녕하십니까, 총학장님! <데일리 일러스트레이티드>의 수석 기자입니다.”

“아이고, 학교 축제에 수석 기자씩이나 되는 분이 와 주시다니. 매년 감사합니다.”

잔뜩 거드름을 피우는 얼굴 뒤로 호기심이나 지루함 따위를 숨긴 사람들의 다음에는 종이와 펜을 쥐고 있는 기자들의 순서였다. 작년보다 확연히 많은 그 숫자에 딜라일라는 문득 머리 위에서 반짝이는 환한 빛을 올려다보았다가, 눈이 부셔서 얼른 고개를 숙였다. 눈앞이 잠깐 깜깜하게 물들었다.

“올해는 특이한 기삿거리도 있지 않습니까? 마법으로 불을 켜는 등이라니, 당연히 취재하러 와야지요.”

딜라일라는 천천히 눈을 깜빡이며 조금씩 돌아오는 시야 너머로 열정적으로 종이 위에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휘갈겨 쓰고 있는 기자들을 바라보았다.

“아시다시피 왕궁에 설치되기 전에 미리 설치해 볼 곳이 마땅찮아서 이곳에서 활용해 보고 있습니다. 머잖아 셰 상브르의 새로운 자랑이 될 테지요.”

“마법 등에 대해서 질문하고 싶은 것이 있는데, 해도 됩니까?”

“아, 저는 마법 공학부가 아니라 자세한 설명은 못 해 드립니다. 대신 여기에 개발자가 있으니 질문은 그쪽으로 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윌로우 총학장이 에릭과 딜라일라가 서 있는 쪽을 향해 슬쩍 고개를 돌려 보였다. 기자들의 시선 역시도 그 뒤를 따라 학교 제복을 입고 서 있는 두 명의 학생들에게로 향했다.

“그렇게 할 수 있으면 저희야 좋지요!”

“브라이어 군? 잠시 이쪽으로 와 주겠나?”

“……네.”

에릭의 대답이 뒤늦게 떨어졌다. 그가 천천히 윌로우 총학장의 옆으로 걸어가는 뒷모습을 보면서, 딜라일라는 그녀의 곁에서 멀어지며 마지못해 내쉰 긴 한숨에 다시 조금 웃음을 참아야 했다.

그러나 딜라일라도 얌전히 서 있기만 할 수는 없었다. 에릭이 그녀의 곁에서 멀어지자 그때까지도 모른 척 얌전히 앉아 있던 귀빈들의 시선이 딜라일라에게로 향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에리카 양?”

“아, 안녕하세요.”

“나를 기억하고 있나요? 이전에 에리카 부인과 함께 한 사교회에서 마주한 적이 있는데.”

“물론이죠, 밀리 부인.”

딜라일라는 조금 난처한 기분을 숨기고 부드럽게 웃으며 자신에게로 쏟아지는 관심을 받아 넘겼다. 격식을 차린 인사를 나누고 나면 은근슬쩍 로드릭이나 마가렛에게로 넘어가려는 이야기를 끊어 내는 일은 제법 힘들었지만, 어쨌든 익숙한 일이기는 했다. 셰 상브르에 입학하기 전까지만 해도 딜라일라는 마가렛을 따라 자본가들과 권력가들의 사교 모임에 끌려가곤 했으니까.

“에리카 양!”

하지만 이런 것은 전혀 예상하지도, 익숙하지도 않은 일이었다. 아무리 그녀가 사람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아도, 그래서 더 개인적으로 접근하는 사람들의 수는 손에 꼽았기 때문이다. 남성이라면 특히나.

남자의 품에도 가득 찰 만큼 커다란 꽃다발이 딜라일라의 앞에 불쑥 내밀어졌다. 그녀가 막 다른 이와의 대화를 끝낸 직후였으니, 아마도 그녀에게 말을 걸 기회만을 노리고 있던 사람이었던 듯했다. 딜라일라는 커다란 눈을 천천히 깜빡거리며 꽃다발을 내민 사람을 올려다보았다.

예쁜 금발을 멋을 내 쓸어 넘기고 고급스러운 정장을 입은 남자는 매끈한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를 띠고 있었다. 머리가 아찔해질 정도로 짙은 꽃향기가 단번에 딜라일라에게로 몰아닥쳤다.

“……?”

딜라일라는 엉겁결에 품으로 쏟아진 꽃다발을 받아 들었다. 손안에서 꽃 무더기를 감싼 종이가 바스락거렸다. 그것을 잠시 내려다본 딜라일라가 고개를 들어 올렸지만, 여전히 금발 남자는 부드러운 웃음을 띤 얼굴로 딜라일라를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어쩔 수 없이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저…….”

“예.”

“누구신지…….”

유달리 잘생긴 외모를 뽐내고 있던 남자가 시원스레 활짝 웃었다. 딜라일라는 그 모습에 저도 모르게 주춤 뒷걸음질을 칠 뻔했다. 몸에 밴 예의가 아니었더라면 꽃다발을 떨어뜨리고 표정을 굳혔을지도 몰랐다.

“소개부터 드렸어야 했는데, 제가 조금 무례했지요. 사과드립니다.”

“네에…….”

필립 샤니는 사실 조금 당황한 상태였다. 그처럼 잘생기고 훤칠한 남자가 꽃다발을 안겨 주면 분명 사랑스러운 에리카 양은 뺨을 붉히며 가장 먼저 감사 인사를 건넬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로드릭 에리카가 그 딸을 얼마나 감싸고 돌았는지를 생각해보면 그런 어색한 반응도 이해가 갔다. 그는 최대한 자신의 매력이 잘 전달될 수 있게 유쾌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저는 샤니 전 내무부 의원의 장남입니다. 현재는 내무부에서 작게 일을 돕고 있지요. 어쩌면 에리카 양께서도 제 이야기를 전해 들으신 적이 있으실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자만이었던 모양입니다. 하하!”

“죄송해요, 제가 사교계에는 그다지 발이 넓지 않아서.”

의례적으로 돌아오는 대답이었지만, 그것도 필립 샤니에게는 꽤 매력적이었다. 겸손한 미녀라니, 동화 속에나 나올 법한 존재가 아닌가? 그는 점점 더 딜라일라 에리카에 대한 호감이 커져 갔다. 물론 그녀가 로드릭 에리카의 외동딸이라는 사실만으로도 그녀를 향한 호감은 이미 하늘을 찌르고 있었지만 말이다.

“내무부에서 오셨다면, 혹시 아버님께서 보내신 건가요?”

“예, 그렇습니다. 최고 위원님께서 에리카 양의 마지막 축제를 축하해 드리고 싶어 하셨는데 워낙 바쁘셔서 시간이 나지 않으신다고 하시기에.”

“그렇군요.”

딜라일라는 어색하게 들고 있던 꽃다발을 뒤늦게 꽉 끌어안았다. 필립 샤니는 그 외에도 딜라일라에게 전해 줄 선물을 가져 왔지만, 이미 꽃다발만으로도 그 자그만 몸집의 숙녀는 이미 다른 것을 받아 들 여력이 없어 보였다. 그는 머릿속으로 재빠르게 자신이 선물을 들어다 줄 테니, 아름답기로 소문난 교정을 안내해 주십사 부탁할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죄송해요. 아버지께서 워낙 걱정이 많으셔서 그런 부탁을 하신 것 같아요. 하지만 아무리 아버지의 직위가 높다고 해도 이런 사적인 부탁은 들어주지 않으셔도 된답니다.”

그러나 딜라일라는 필립이 입을 여는 것과 동시에 겸연쩍은 얼굴을 지어 보였다. 필립은 예상과는 달리 흘러나온 그녀의 사과에 얼핏 미간을 찌푸릴 뻔했다. 다행히 그는 오랫동안 사람들과 관계를 쌓으며 익숙해진 덕분에 티도 나지 않게 표정을 잘 관리할 수 있었다.

“아니, 아닙니다. 저는……”

“제게 선물을 전달해 주시는 일이 내무부의 업무는 아닐 텐데, 여기까지 먼 걸음 하게 해 드려서 죄송해요. 아버지께는 제가 편지를 보내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할게요.”

하지만 ‘이렇게 아름다운 숙녀분에게 선물을 전달하게 되어서 오히려 제가 더 기쁘고’ 어쩌고 하는 말을 꺼내려던 것도 딜라일라는 말끔하게 차단해 버렸다.

“그런 것이 아니라…….”

“혹시 그것도 제게 전달하실 선물인가요?”

그가 어떻게 말을 하건 간에, 딜라일라는 그가 어색하게 손에 들고 있던 선물 상자를 눈짓해 보이며 물었다. 이쯤 되니 말문이 막히지도 않았다. 과연 로드릭 에리카와 마가렛 에리카가 그렇게 열심히 싸고돌았다더니. 에리카의 외동딸은 남성에게 호의를 받는 것에 전혀 익숙하지 않은 것 같았다. 여지를 주지 않는 것에는 누구보다도 익숙해 보였지만 말이다.

“그렇습니다.”

“으음. 그건…… 두고 가시면 제가 친구에게 부탁해서 함께 가지고 돌아가도록 할게요. 다시 한번 죄송합니다. 혹시 아버지께서 이런 업무 외의 부탁을 자주 하시는 편인가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정말 다행이네요. 앞으로 또 이런 부탁을 받으시면 그때는 꼭 거절하세요. 다시 한번 죄송합니다.”

“아니, 아닙니다.”

얼떨떨하게 딜라일라의 말을 받아 내던 필립 샤니는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물론 로드릭 에리카가 그에게 한 것은 업무 외 부탁이 맞았고, 들어주지 않아도 되는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어디 사회생활이라는 게 그리 되는 일이던가? 게다가 이것은 무엇보다도 필립 샤니에게 주어진 중요한 기회였다.

하지만 이대로라면 기회고 나발이고, 그가 꿈꾸던 수줍은 호의로 발판을 만들어 에리카의 딸과 함께 훌륭한 미래를 맞겠다는, 다소 성급하긴 해도 나름대로 확실한 그의 목표가 시작도 전에 무너져 버릴 위기였다. 필립은 조금 더 시원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이며 딜라일라의 위로 살짝 상체를 숙였다.

“실은, 제가 최고 위원님께 졸랐습니다.”

“네……?”

동그란 눈을 커다랗게 치켜뜨고 올려다보는 얼굴이 귀여웠다. 필립 샤니는 과연 로드릭 에리카의 딸이 아니더라도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을 법한 외모라고 생각하며 눈썹을 슥 올려 능청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업무 외의 일이어도 이토록 아름다운 숙녀분께 선물을 전하는 일이라면 응당 모든 신사가 자청할 법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이번에야말로 예상대로 딜라일라 에리카의 얼굴이 수줍게 달아올랐다. 물씬 피어오르는 상쾌한 꽃향기를 맡으며 필립은 딜라일라 에리카에게 이보다 더 잘 어울리는 향기는 없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는 손에 든 선물 상자를 내려놓지 않고 오히려 더 단단히 잡았다.

“그러니 제가 이 선물을 들어 드릴 수 있는 자비를 베푸시지 않겠습니까? 값은, 글쎄요. 에리카 양과 함께 아름답기로 유명한 셰 상브르의 교정을 산책할 수 있는 기회로 주시면 기쁘겠군요.”

그는 아름답기로 소문이 나건 말건 이런 고상하지 못한 학교의 축제에 끼어야 하는 것이 마뜩찮은 기색 따위는 전혀 내비치지 않았다. 꽃이 대수겠는가? 그에게 권력을 보장해 줄 아름다운 숙녀와 함께라면 시장 바닥을 구르래도 괜찮았다. 물론 정말로 시장 바닥을 구르라면 거절하겠지만.

그를 올려다보는 딜라일라 에리카와 다소 능청스러워도 매력적인 얼굴을 하고 있는 자신, 그리고 다른 사람들로부터 유리하는 듯 그들을 감싼 진한 꽃향기까지. 모든 것이 완벽했다. 이번에야말로 필립 샤니는 자신이 이곳까지 행차한 목적을 달성하게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아, 에릭.”

하지만 순식간에 그 완벽하던 공기가 깨져 나갔다. 딜라일라가 바짝 붙어 서 있던 필립에게서 한 발짝 물러서더니, 옆을 올려다보며 친근하게 다른 남자의 이름을 부른 것이다. 결국 필립 샤니의 매끈한 미간이 아주 미세하게 구겨졌다.

“……에리카 선배님.”

어딘지 망설이는 듯한 묵직한 목소리에 딜라일라의 눈이 친근하게 휘어졌다. 내내 조금 당황스럽기는 해도 단호하고 거리감 있는 시선을 유지하고 있던 딜라일라의 표정이 풀어지는 것을 필립은 재빠르게 눈치챘다.

내내 딜라일라에게 고정하고 있었던 시선을 들어 올리자, 묘하게 벌어진 거리에 서 있는 남학생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키가 훌쩍 크고 제복을 입은 밝은 갈색 머리의 남학생은 개회식이 시작될 때 딜라일라와 나란히 걷던 올해의 학생 대표, 마법 공학자의 아들이라는 브라이어인가 하는 남자였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말끔하고 품위 있는 차림새의 귀빈들 사이에서 혼자 살짝 흐트러진 그의 머리 모양이었다. 그리고 제복을 걸친 널찍한 어깨와 다른 이들보다 훌쩍 큰 키. 필립 샤니 역시 제법 훤칠한 편에 속하는 키였는데도, 그는 필립이 아주 조금이지만 시선을 들어 올려야 할 만큼 키가 컸다. 자그만 몸집의 딜라일라 에리카와는 머리가 하나쯤 차이가 났다.

그의 얼굴은 과연 주워들었던 대로 꽤 오만해 보였다. 귀빈들의 앞에서도 무뚝뚝하게 굳어진 입매나 휘어질 줄을 모르는 서늘한 눈매 따위가 특히 그렇게 보였다. 필립 샤니는 먼저 인사를 할 줄도, 눈치 좋게 비켜 줄 줄도 모르는 그 건방진 자식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머나. 두 학생이 친분이 있나 봐요.”

“같은 아카데미의 재원들이니 그럴 만도 하죠.”

“에리카 양은 누구에게든 친절하니까…….”

주위에서 남몰래 속삭이는 감탄사가 필립의 예민한 귀에 흘러들어 왔다. 무엇보다도 아까 전까지만 해도 필립을 보고는 왕자님이라며 떠들던 꼬마 숙녀가 다시 즐겁게 입을 열었다.

“엄마, 엄마. 잘생긴 기사님이에요!”

“어머나, 얘도 참! 조용히 있으라고 했잖니.”

“하지만, 응? 기사님인걸.”

“아휴, 동화책을 적당히 읽어 줬어야 했는데.”

필립의 미간이 조금 더 구겨졌다. 아무리 어린아이라고는 하지만 눈이 삐어도 단단히 삔 게 틀림없었다. 저 건방지고 무례한 남자를 보고 기사님이라니, 이래서 동화만 읽고 자란 소녀들이 허황된 꿈을 꾸는 것이다.

물론 그까짓 꼬마가 떠들어 대는 소리 때문에 그가 미간을 구긴 것은 당연히, 절대로 아니었다.

등장만으로 딜라일라 에리카의 시선을 몽땅 빼앗아 간 그 남학생의 존재가 고까웠다.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다가 로드릭 에리카의 허락 아닌 허락을 받아 내고 나서야 겨우 얼굴을 마주할 수 있었던 딜라일라 에리카의 시선을, 저 남자는 고작 같은 아카데미를 다녔다는 이유로 익숙하게 받아 낸다고 생각하면 짜증이 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저 단정치 못하게 흐트러진 머리하며, 짤막한 제복 바짓단 따위를 보라지. 품위 있는 신사는 무릇 발목을 드러내지 않는 법이었다. 게다가 그는 마법 공학자라고 하지 않았던가?

마법 공학자라고 하면 제법 우쭐할 법도 하지만, 그 실상은 직접 온갖 재료를 만지고 조립해 가며 손에 잉크가 아닌 다른 것을 잔뜩 묻히며 사는 사람이었다. 이미 신분제가 사라졌다고 한들 실제로 사람들 사이에서 계급이 온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최상위 계급이란 응당 다른 사람과 교류하며 지시를 내리는 사람이지, 다른 사람의 지시를 받아 뭔가를 만드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니 당연히 에릭 브라이어는 필립 샤니에 비하면 모자랐다.

그런 모자란 남자를 친근하게 바라보는 딜라일라 에리카의 시선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역시 이렇게 격이 떨어지는 아카데미에 다니다 보니 그런 구분조차도 제대로 하지 못하게 된 것이 틀림없었다.

‘에리카 최고 위원님께서는 그렇게 딸을 아끼시면 얌전히 여학교에나 입학시키실 것이지…….’

필립이 그렇게 속으로 혀를 차고 있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딜라일라 에리카는 웃으면서 품에 안은 꽃다발을 살짝 들어 브라이어인지 뭔지 하는 남자에게 보여 주고 있었다.

“예쁘지? 아버지께서 보내셨대.”

“흠흠, 에리카 양?”

필립은 겨우 구겨진 얼굴을 펴고 딜라일라 에리카에게 다시 말을 걸었다. 저 건방지고 무례하며 격 떨어지는 남학생과 딜라일라 에리카가 더 대화를 나누는 것을 막아야 했다. 아마도 그녀 역시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나서 명가의 안주인이 되고 나면 그 방종한 태도를 후회할 테니까 말이다.

“아, 네.”

그런 자신의 굳은 믿음에 갇힌 필립 샤니는 에릭에게서 시선을 떼고 돌아보는 딜라일라의 시선이 차갑게 굳어 있는 것을 눈치채지도 못하고 뻔뻔하게 웃었다. 물론 다른 사람과의 대화에 끼어드는 짓은 다소 예의에 어긋나긴 했지만, 어쨌든 그는 로드릭 에리카에게서 기회를 하사받은 몸이 아니던가? 저런 일개 마법 공학자 학생과는 당연히 다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아가씨를 에스코트할 기회를 주시겠습니까?”

필립은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잘생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느라고 에릭 브라이어가 딜라일라의 뒤로 스쳐 지나가며 뭔가를 속삭이는 것도 몰랐다.

“네에…….”

다소 마지못해 내뱉는 듯한 대답이어도, 어쨌든 필립 샤니는 괜찮았다. 그는 절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로드릭이 보냈다는 말에 곤란해하면서도 내심 선물 상자를 핑계로 에릭과 나란히 걸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기대했던 딜라일라는 등 뒤로 스쳐 지나가는 에릭의 목소리에 결국 오늘 처음 만난 남자의 에스코트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먼저 갈게요. 나중에 봐요.”

에릭이 그렇게 속삭이지만 않았더라도 딜라일라는 이 무례하고 뻔뻔한 남자를 예의 바르게 거절하고, 에릭에게 선물 상자를 들려서 재빨리 기숙사로 돌아왔을 것이다. 그렇게 나란히 걸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보이고 나면 딜라일라와 에릭의 사이가 나쁘지 않다는 것도 자연스럽게 주위에 알려질 테고, 어쩌면 에릭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그를 다시 봐줄지도 모른다고 조그만 희망도 품었다.

“과연 아름다운 풍경이군요, 저 화려한 붉은 장미 하며……. 하지만 에리카 양의 미모에 비하면 전부 하잘것없이 느껴지는데요.”

하지만 딜라일라의 옆에서 내내 자신이 무슨 로맨스 소설의 치명적인 남자 주인공이라도 된 양 느끼한 말만 뱉어 대는 남자가 그녀의 소박한 계획을 다 망쳤다. 대놓고 청하는 남자를 다른 사람들의 눈앞에서 매몰차게 거절하기도 어려웠고, 어쨌든 로드릭이 보낸 사람을 함부로 대할 수도 없었던 탓이었다.

물론 남자는 그런 대사를 뱉어도 어색하지 않을 만큼 잘생긴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쓸어 넘긴 금발은 햇볕에 화사하게 반짝였고, 새파란 눈동자나 잘 차려입은 옷매무새도 나쁘지 않았다. 그런 남자가 시종일관 미소를 입가에 걸고 로맨틱한 말만 해 대는 모습은 분명 다른 사람들에게는 멋지게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딜라일라는 그런 말보다도 소리 없이 입술만 빠끔거리며 그녀를 바라보다가, 허물어지듯이 웃던 에릭의 금빛 눈동자가 훨씬 더 좋았다.

그리고 에릭이 훨씬 더 잘생겼어.

“과찬이세요. 아, 그쪽보다는 이쪽으로 가는 편이 더 빠르답니다.”

“하하, 저는 조금 돌아가는 편이 더 좋은데요. 에리카 양과 함께 걷는 시간이 늘어날 테니까요.”

아버지는 뭐 저런 남자한테 선물을 들려서 보낸 거야? 딜라일라는 처음으로 로드릭을 원망했다.

물론 로드릭이 그에게 선물을 들려 보낸 것에 어떤 의미가 있을 거라는 사실은 딜라일라도 알았다. 지금껏 직접 찾아오지 못한대도 굳이 선물을 전하거나 한 적이 없었던 로드릭이었다. 물론 마지막 축제인 데다 딜라일라가 학생 대표가 된 것을 축하해 주고 싶을 수는 있었지만, 굳이 선물을 전하고 싶다면 로드릭은 친우인 윌로우 총학장을 통해 선물을 보내거나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로드릭이 내무부에서 일을 하고 있다는, 딜라일라와 면식도 없는 남자에게 굳이 선물을 전해 주라고 부탁했다면 의도는 거의 명확했다.

그래서 더 싫었다.

“감사한 말씀이지만, 더 오래 폐를 끼칠 수는 없죠. 그렇잖아도 이미 과하게 폐를 끼치고 있는걸요.”

“에리카 양이라면 제게 어떤 폐를 끼쳐도 기꺼이 받아들이지요.”

저렇게 눈치 없고 제멋에 빠져 사는 남자는 별로다. 딜라일라는 단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지만,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렇게 생각했다. 잘 정돈된 길 위로 사람들을 헤치며 걷는 발소리가 티 나지 않게 빨라졌다.

“어머, 딜라일라!”

“세리아!”

하지만 어딜 가도 딜라일라를 알아보는 친구들이 있었고, 어쩔 수 없이 그녀는 몇 번인가 걸음을 멈춰야 했다.

“제복 정말 잘 어울려. 올해의 학생 대표는 정말 잘 골랐다니까.”

“고마워, 세리아도 오늘 예쁘다.”

“동생이랑 부모님이 오셨거든! 시계탑 앞에서 만나기로 했어.”

“아마 곧 오시지 않을까? 내가 나올 때 귀빈석에 계시던 분들도 나오시는 기색이었거든.”

“그래? 그럼 정말 곧 오겠네. 아휴, 동생이 셰 상브르가 궁금하다고 자꾸 그래서…….”

인사를 나누고, 사소한 잡담을 나누다 보면 친구들은 꼭 목소리를 죽이고 딜라일라에게 속닥거렸다.

“옆에 계신 분은 누구셔?”

그렇게 속삭이는 친구들의 얼굴이 조금 상기되어 있는 것은 분명 축제의 여파 때문만은 아니었다. 품 안에 가득 찰 만큼 커다란 꽃다발을 들고 있는 딜라일라와 그 곁에서 나란히 걷고 있는 선물 상자를 든 잘생긴 금발 남자는 당연히 그들의 상상력을 자극할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께서 선물을 보내셨는데, 전달해 주러 오셨대.”

“아하.”

딜라일라는 최대한 담백하게 말했지만, 그럴 때마다 눈치 빠른 친구들이 눈썹이나 콧잔등을 찡긋거려 보였다. ‘아하, 그러니까 저 잘생긴 신사분께서 네 아버지께서 점찍은 미래의 남편감이구나?’ 같은 질문을 한껏 요약한 표현이었다.

게다가 그럴 때면 꼭 그 눈치 없고 뺀질뺀질한 남자, 필립 샤니는 딜라일라와 친구들 사이에 자연스럽게 끼어들기까지 했다.

“안녕하십니까.”

“어머나, 숙녀들의 대화에 끼어드시는 건 곤란하답니다.”

“하하, 제가 그만 욕심을 부렸습니다. 에리카 양과 퍽 친근해 보이시니 저 역시 친분을 쌓고 싶은 마음에. 필립 샤니라고 합니다.”

그러면 딜라일라의 친구들은 하나같이 그의 인사를 받아 주며 눈동자를 슬쩍 돌려서 웃어 보이는 것이다. 네 미래의 남편은 꽤 다정하고 유쾌한 사람이구나? 같은 느낌으로 말이다.

“세리아, 보다시피 짐이 많아서 먼저 가 볼게.”

“그래. 마침 부모님도 저기 오고 계시네.”

“그럼 즐거운 축제 보내!”

“딜라일라 너도!”

그렇게 어영부영 친구들과 필립 샤니의 대화를 뚝 끊어 내고 나서도 남자는 정중하게 인사를 남긴 뒤에 딜라일라의 뒤에 따라붙곤 했다. 마치 이미 딜라일라의 약혼자라도 된 것처럼 그녀의 친구들에게까지 말을 걸어 대는 남자의 행동 때문에, 딜라일라의 기분은 갈수록 더 심란해지기만 했다.

이럴 때는 오딜이 있으면 좋았을 텐데. 딜라일라는 오딜이 저 남자를 보면서 무슨 소리를 외쳐 댈지를 상상하며 불뚝불뚝 치솟아 오르려는 짜증을 참아 냈다. 어쩌면 얼굴은 잘생겼으니 써먹을 만하다고 할까? 아니면 얼굴 빼면 도저히 건질 거라곤 없는 재수 없는 놈이라고 할까? 그렇게 속으로 오딜이 할 법한 상스러운 소리를 몇 번인가 떠올리다 보니 그나마 견딜 만했다.

그렇게 한참을 걸어서야 딜라일라는 교정으로부터 기숙사를 가리고 선 포플러 나무 숲 앞에 멈춰 섰다.

아무리 아카데미를 개방하고 있다지만 굳이 기숙사까지 찾아오는 무례한 객은 딜라일라의 옆에서 선물 상자를 들고 있는 남자를 빼고는 아무도 없었다. 덕분에 주위는 비교적 한산했다. 기숙사에 일찍 돌아왔다가 다시 축제를 즐기러 나가려는 학생 몇몇이 딜라일라와 필립 샤니를 힐끔거리며 지나갔다.

“샤니 씨.”

“부디 필립이라고 불러 주세요, 에리카 양.”

“아니, 저는…….”

날씨가 어찌나 좋던지, 바람 한 점 불지를 않았다. 품에 안은 꽃다발이 머리 위에서 떨어지는 쨍쨍한 볕에 시들시들해져 가고 있었다. 딜라일라는 저도 모르게 흘러나오려는 한숨 대신 정중한 감사 인사를 뱉어 냈다.

“짐을 들어다 주셔서 감사합니다. 선물을 전달해 주신 것도 정말 감사해요.”

“하하, 제가 아까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에리카 양처럼 아름다운 숙녀분에게 도움이 되는 것은 오히려 제게도 기쁜 일이니 그렇게까지…….”

혓바닥에 기름칠이라도 한 게 아닐까? 잘도 굴러가는 꼴을 보면 그럴지도 몰랐다. 남자는 여기까지 오는 동안 쉴 틈 없이 떠들어 대고도 아직 할 말이 많은 것 같았다. 딜라일라는 줄줄이 이어지려는 번드르르한 남자의 말을 뚝 끊어 냈다.

“하지만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거예요.”

“……부담스러워하지 않으셔도 됩, 되는데요.”

작지만 단호한 목소리에 필립 샤니의 목소리가 드디어 삐끗했다. 딜라일라는 꽃다발을 한 팔로 바싹 당겨 안았다. 꽃을 감싼 종이며 리본이 바스락 소리를 내며 구겨졌다. 조금 버겁기는 했지만 어떻게든 비워 낸 손을 내밀자, 그는 저도 모르게 상자를 내밀었다가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미 딜라일라는 상자를 위태롭게 받아 안은 후였다.

“바로 앞이 기숙사예요. 여기서부터는 제가 들고 갈 수 있어요.”

“그래도…….”

“아무래도 외부인을 기숙사까지 들이기도 저어되고요.”

“그럼…….”

“다시 한번 감사합니다. 먼길 오느라 고생하셨는데 얼른 돌아가셔서 푹 쉬세요.”

딜라일라는 조금 숙이고 있던 고개를 바짝 치켜 올렸다. 웃는 모양 그대로 어색하게 입을 벌리고 굳어져 있는 남자에게 그녀가 처음으로 다정하게 웃어 보였다.

“그럼 안녕히.”

딜라일라는 얼핏 도도해 보일 정도로 말끔하게 인사를 해 보이곤 등을 돌렸다. 꽉 껴안은 탓에 모양이 찌그러진 꽃다발과 선물 상자를 받쳐 든 팔이 위태롭게 떨렸지만, 그녀의 얼굴에는 불안한 기색이라곤 눈곱만큼도 없었다. 로드릭과 마가렛이 딜라일라의 뼛속까지 새겨 준 우아하고 철벽같은 태도가 빛을 발한 순간이었다. 물론 로드릭은 그녀가 지금 같은 상황에도 그럴 줄은 몰랐을 테지만.

그리고 딜라일라도 갑자기 그가 나타날 줄은 몰랐다.

“앗!”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커다란 꽃다발과 상자를 껴안은 딜라일라는 몇 걸음 떼지 않아 팔 안에서 미끄러지는 상자를 붙잡지 못하고 떨어뜨렸다. 아니, 떨어뜨릴 뻔했다.

“조심해요.”

“어, 어…… 응?”

하마터면 딜라일라의 발등 위로 떨어질 뻔한 상자를 에릭이 받쳐 들었다. 그는 자연스럽게 딜라일라의 팔 안에 아슬아슬하게 걸려 있는 상자를 완전히 빼내서 제 손으로 들었다. 딜라일라가 혼자 들기에는 버거울 정도로 커다랗게만 보이던 상자가 에릭에게는 그다지 큰 짐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에릭?”

“네.”

“왜 여기 있어?”

“……어쩌다 보니까.”

에릭이 당연하다는 듯 상자를 빼앗아 가고 나자 딜라일라에게는 다시 품 안을 가득 채우는 꽃다발만이 남았다. 그녀는 꽃다발을 바짝 끌어안고 에릭을 올려다보았다.

“일단 가요. 들어 줄게요.”

“아, 응!”

아직도 방으로 돌아가지 않았던 것인지, 제복을 차려입은 모양새 그대로인 에릭이 딜라일라의 곁에서 걸음을 천천히 옮기기 시작했다. 그녀보다 훌쩍 큰 에릭이 그녀의 곁에 붙어 서자 딜라일라의 머리 위로 서늘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따가운 볕에도 불구하고 차갑게 식었던 마음이 몽글몽글 녹아내렸다. 딜라일라는 멍하니 그늘진 에릭의 옆모습을 올려다보다가 다시 정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마음이 간지러웠다.

에릭은 딜라일라가 정면으로 시선을 돌리는 것을 확인한 후에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딜라일라가 등을 돌려 걸음을 떼는 순간, 그녀를 붙잡기 위해 우악스럽게 팔을 뻗었던 금발 남자는 이제 그림처럼 걸려 있던 부드러운 미소 대신 흉하게 일그러진 표정을 짓고 그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에릭이 던지는 서늘한 시선을 마주한 그 남자는 움찔하더니 주먹을 꽉 말아 쥐고는 등을 돌려 성큼성큼 멀어지기 시작했다. 그 뒷모습에서도 분기가 느껴지는 것 같아서 에릭의 입가에서 픽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났다.

저 남자가 딜라일라에게 더 잘 어울린다고, 잠깐이나마 그렇게 생각했던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졌다. 어쩌면 그는 딜라일라가 몇 번이고 그에게 외쳐 댄 말대로 정말로 바보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화려한 금발을 멋들어지게 쓸어 넘기고 고급스러운 옷을 한껏 차려입은 남자가 미소 띤 얼굴로 그녀에게 꽃다발을 내미는 모습은 분명 동화 속의 한 장면처럼 아름다워 보였다. 에릭에게 질문을 던지던 기자들조차 한순간 그들에게 시선을 빼앗겼을 정도였다.

그때 에릭이 어떤 생각을 했는지는, 스스로도 정확히 가늠할 수 없었다. 그는 막연히 생각했다. 그녀의 곁에는 저렇게 빛나는 사람이 있어야 하는 것이 맞는 일이 아닐까.

그러나 딜라일라의 등 뒤를 스쳐 지나면서 먼저 가겠다고 말해 놓고도 차마 미련 없이 제 방으로 돌아가지도 못한 채로 기숙사 앞을 서성이고 있었던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에릭은 포플러 나뭇잎이 햇볕에 반짝이는 것을, 멀리서 활기찬 웅성거림과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그리고 환하게 내리쪼이는 봄볕에 반짝거리는 교정을 바라보면서 안절부절못하고 제자리를 빙빙 돌았다.

어느 순간 숲 앞에 서서 금발 남자를 마주 보고 선 딜라일라의 뒷모습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그 순간 그는 저도 모르게 그들의 뒤로 다가갔다.

“하지만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거예요.”

에릭은 한 번도 상상해 보지 못한, 단호하게 여지를 잘라 내는 딜라일라의 목소리가 조근조근 들려왔다.

“……부담스러워하지 않으셔도 됩, 되는데요.”

멍청하게 삐걱거리는 남자의 목소리도.

“바로 앞이 기숙사예요. 여기서부터는 제가 들고 갈 수 있어요.”

“그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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