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화 (6/14)

소회

마음속에 품고 있는 생각

오딜에게서 편지가 왔다. 장식이라곤 하나 없이 말끔하고 실용적인 모양새의 하얀 봉투 위에 대충 눌러 붙인 밀랍을 뜯어 내는 대신, 딜라일라는 봉투 모서리에 레터 나이프를 가져다 댔다. 사각사각 소리와 함께 끄트머리를 잘라 내고 안쪽에 든 편지를 꺼낸 딜라일라는 저도 모르게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큼직하고 날카로운 글씨체로 빼곡하게 쓰인 편지는 오딜의 목소리를 그대로 담아 놓은 것 같았다.

디디에게, 라고 시작된 편지는 별다른 인사말도 없이 대뜸 에릭의 욕부터 해 댔다. 멍청한 동생 자식이 학기가 시작되기 전에 본가에 들러서 브라이어 남작에게 인사를 하니 어쩌니 했으면서, 정작 본가에서 무슨 짓을 한 것인지 남작의 속만 박박 긁어 놓고 떠나 버린 통에 한 달이 넘도록 저택 분위기가 더럽기 짝이 없다는 이유였다.

그래 놓고는 자신이 아무리 편지를 써 봤자 에릭은 읽어 보는 것 같지도 않으니, 딜라일라에게 대신 욕을 해 달라는 엉뚱한 부탁이 따라붙었다. 딜라일라는 그 대목을 읽다가 다시 풋 소리 내 웃었다.

그 아래로는 갑자기 편지의 주제가 바뀌었다. 본론을 시작하기 전에, 사실은 이쪽이 본래 편지를 쓴 이유였는데 그만 짜증이 나서 몇 줄을 낭비하고 말았다는 짧은 사과가 덧붙여져 있었다. 아무래도 오딜에게는 편지를 버리고 다시 쓴다는 생각 따위는 없는 것 같았다.

그 아래에는 사랑하는 디디, 라는 말이 몇 번이나 반복되었다. 딜라일라와의 만남은 오딜에게는 특별히 즐거운 경험이었고, 덕분에 그 해안가 마을에서 오딜이 유례없이 빠르게 장편 소설 한 편의 초고를 완성했다는 기쁜 소식과 그에 대한 감사가 편지의 본 내용이었다.

딜라일라는 기쁜 마음으로 편지를 내려놓고 답장을 썼다. 편지 내용에 저도 모르게 에릭에 대한 칭찬을 조금 섞어 넣고 만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오딜은 분명 그것을 읽으며 질색부터 하고 난 뒤에 역시, 디디가 너무 착하다며 그녀를 치켜세워 주기나 하겠지만.

예쁜 편지지를 꺼내 날렵하고 아름다운 필기체로 오딜에게 보낼 답장을 완성한 그녀는, 가장자리에 금박이 장식된 봉투에 편지지를 잘 접어 넣었다. 묘한 금빛이 반짝이는 연분홍색 밀랍을 촛불에 녹여 붓고, 딜라일라가 어릴 적부터 쓰던 스탬프를 꾹 눌러 식히면 편지를 보낼 준비는 끝이었다.

밀랍이 식기를 기다리며 딜라일라는 가만히 시간을 셌다.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돌아와 잠깐 책을 읽다가 편지를 꺼내 읽기 시작했으니, 아직은 밤이 깊지 않았다.

벌써 계절은 봄의 한가운데였다.

조금씩 해가 길어지고 있었다. 오후가 되면 따스한 햇볕이 쏟아지고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아름다운 계절이 성큼 찾아왔다. 그만큼 밤이 짧아지기 시작하는 때이기도 했다.

앞으로 더 짧아질 것이다. 봄이 지나고, 여름이 오면 더. 딜라일라와 에릭이 함께 보낼 수 있는 시간은 그렇게 점점 짧아지다가, 여름의 한가운데서 그녀의 졸업과 함께 종막을 맞이할 예정이었다.

딜라일라의 서투르고 성급한 고백이 실패하고, 그들이 마음을 쏙 빼놓고 다른 것을 엮는 관계가 되기 시작한 지도 벌써 한 달이 지났다. 여름까지는 몇 달 남지 않았다.

보고 싶어.

딜라일라는 조급한 마음을 다잡고 천천히 다시 시간을 세기 시작했다. 일 분, 십 분. 한 시간, 두 시간……. 책을 읽고 공부를 하며 보내는 시간은 짧기도 하고 길기도 했다.

마침내 밤이 깊었을 때, 딜라일라는 테이블 앞에서 일어섰다. 가만히 적막의 가운데로 귀를 기울여 보던 그녀가 걸치고 있던 카디건을 살짝 여미고 방문을 빼꼼히 열었다. 어둠에 잠긴 복도로 살금살금 나서는 발걸음이 비밀스럽다. 날씨가 제법 따뜻해진 덕분인지, 복도의 창문은 그녀가 손대기도 전부터 열려 있었다.

오늘도 밤이 찾아왔다. 딜라일라는 창밖으로 조그만 몸을 훌쩍 내밀었다.

한편 에릭은 열 통도 넘는 오딜의 편지 봉투를 주워 들고 뒤늦게 방으로 들어온 후였다. 아무래도 사감실에 찾아가지 않은 편지가 쌓이기 시작한 것을 보다 못한 사감 대런이 직접 에릭의 방문 앞에 친절히 놓아두고 간 듯했다. 종종 있는 일이었다.

에릭은 열 통은 되어 보이는 편지들을 뜯어 볼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는 편지 뭉치를 대충 쌓여 있는 책 더미 위에 아무렇게나 얹어 두고는 욕실로 들어갔다. 에릭은 실험실에서 방으로 돌아오면 곧장 몸을 씻는 습관이 들어 있었다. 마법 공학과 관련된 실험을 하다 보면 온갖 마법 약과 그 재료, 시약 따위에 자주 노출되다 보니 당연한 일이었다.

샤워를 끝내고 수건으로 머리를 털어 말리며 에릭은 잠깐 생각에 잠겼다. 마법 약의 고형화에 관한 연구는 이미 다 끝낸 후였고, 연구 내용을 정리해 논문으로 만드는 단계만이 남아 있었다. 에릭이 가장 싫어하는 단계이기도 했다. 그는 평소처럼 곧장 종이를 뒤적이는 대신 다음 연구 주제를 생각해 보기로 했다.

그러고 보니 딜라일라는 마법을 일상적으로 활용하는 것에 상당한 관심을 보이던데. 오딜이 한때 재미를 붙여 잔뜩 만들어 댔던 마법이 깃든 옷을 좀 더 쉽게 만드는 방법을 찾아볼까. 아니면 일상에서 활용할 만한 소형 마법 기구의 설계를 해 볼까? 한다면 어떤 것을?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던 그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밤이 깊어 가고 있었다.

공연히 침실 쪽으로 향했다가, 옷장 문을 열었다가, 옷장 문에 달린 거울에 얼굴을 한번 비춰 보던 그가 신경질적으로 옷장 문을 닫았다. 딜라일라가 올지 안 올지도 모르는데 밤만 되면 그녀를 기다리는 꼴이라니. 차라리 학기가 시작되고 나흘간 매일 쓸데없이 찻물을 끓여 대던 때가 나았다. 그때는 언젠가 그녀가 다시 찾아오리란 확신이 있었으니까.

딜라일라가 그를 찾는 데는 확고한 주기가 없었다. 때로는 열흘이 넘도록 그를 찾아오지 않기도 했고, 가끔은 이틀 연속으로 그의 방문을 두드리기도 했다. 그녀가 찾아오는 시간만은 언제나 비슷비슷하게 깊은 밤이었지만. 그래서 에릭은 매일 그 시간이 다가올 때마다 평정심을 잃어버렸다. 며칠에 한 번, 내킬 때 제멋대로 찾아와 먹이를 잔뜩 쌓아 주고 사라지는 주인을 기다리는 개가 된 기분이었다.

차라리 개라면 마음 놓고 그녀의 애완동물이 될 수라도 있을 텐데.

아침이면 아무 생각도 없이 일어나서 강의동으로 향하고 강의가 끝난 후에는 실험실로 향했지만, 기숙사로 돌아온 후 밤이 찾아왔다는 것을 깨달으면 그때부터 그는 어떤 것에도 집중하지 못했다. 연구든 논문이든 책이든, 무엇이건 간에. 그의 신경을 돌릴 수 있는 것은 불행히도 에릭의 방 안에는 없었다.

그러면 그는 잠시 테이블 앞에 멍하니 앉아 있다가, 어느새 구석으로 밀려나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마법 포트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괜히 욕실로 가서 손을 씻거나 옷장을 열어 거울을 확인하곤 했다.

그렇게 방 안을 휘젓고 다니며 쓸데없이 시간을 죽이는 에릭을 멈춰 세울 수 있는 것은 딱 두 가지뿐이었다. 어스름하게 밝아 오며 밤이 끝나 가고 있음을 알리는 푸른 새벽빛이나, 조그맣고 조심스러운 세 번의 노크 소리.

똑똑똑. 노크 소리가 들리자 침실에서 서성대고 있던 에릭이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천천히 걸음을 옮기는 동안 그의 쿵쿵, 불안하게 뛰던 심장이 조금씩 평온을 되찾았다. 그는 순식간에 무심한 에릭 브라이어의 모습을 되찾았다.

문을 열면 방 안을 밝히던 빛이 복도로 쏟아져 내린다. 그 빛을 맞으며 딜라일라는 고개를 젖혀 에릭을 올려다보고는 살짝 웃었다.

“들어와요.”

그렇게 말하면 딜라일라가 방 안으로 들어선다. 문을 닫고, 몇 발짝 앞에서 종종걸음을 옮기는 딜라일라의 뒷모습을 바라볼 때면 그는 생각했다. 이런 것을 보통, 안도라고 명명하던가.

“에릭.”

“네.”

당연하다는 듯 책장 쪽으로 걸어가던 딜라일라가 돌연 에릭을 불렀다. 막 의자에 앉아 만년필을 집으려던 에릭의 짧은 대답에 그녀가 휙 이쪽을 돌아보았다. 에릭의 눈은 그녀가 그의 이름을 부른 순간부터 딜라일라를 향해 있었다.

“바보.”

“……?”

맥락도 없이 갑자기 튀어나온 말에 에릭이 갸우뚱 고개를 기울였다. 그것을 본 딜라일라가 즐겁게 덧붙였다. 곧 콧노래라도 부를 것 같았다.

“멍청이.”

“…….”

“해삼 말미잘 변태 실험 중독자.”

침대 곁 협탁 위에 놓여 있던 책을 찾아 든 그녀가 침대에 풀썩 소리를 내며 앉았다. 요즘 들어 딜라일라는 그 책을 제법 흥미롭게 읽고 있었다. 그러는 중에도 딜라일라의 연한 분홍색 입술이 쉴 새 없이 조잘조잘 심한 말을 신나게도 쏟아 냈다. 사실 그녀의 가느다랗고 통통 튀는 목소리로 그런 말을 해 봤자 하나도 심하게 들리지는 않았다.

“재수 없어. 인간미도 없어. 눈은 늑대 닮았는데 늑대보다 덩칫값도 못 해. 마법 공학이라도 할 줄 알아서 다행이다. 안 그랬으면 뭐 해 먹고 살았겠어.”

“…….”

“에릭 브라이어 바보!”

줄줄이 이어진 폭언을 마무리한 딜라일라가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고개를 살짝 돌려, 에릭을 노려보는 모양새를 만들었다. 그러면서도 우스운 기색을 지우지 못한 눈가가 샐쭉 접혔다.

그녀는 요즘 들어 장난기가 늘었다. 때로는 오딜의 말투를 흉내 내어 어울리지 않게 상스러운 말을 하기도 했는데, 에릭은 그럴 때면 조그만 사탕 요정이 욕설을 종알거리는 것 같아서 내심 조금 귀엽다고 생각했다.

“오딜이 편지했어요?”

에릭의 질문을 들은 딜라일라의 눈이 둥그렇게 커졌다가, 다시 반으로 접히며 휘어졌다. 붉은 기가 도는 풍성한 속눈썹에 파란 눈동자가 다 가려질 정도로 환한 미소가 그녀의 얼굴에 떠올랐다.

“응!”

“역시 그랬군요.”

“너한테 편지를 아무리 보내도 읽어 보는 것 같지도 않아서, 나한테 대신 욕해 달라고 하던데.”

에릭의 시선이 힐긋 미끄러졌다. 침실을 지나 욕실로 향하는 길목쯤에 쌓인 책 더미 위에 아무렇게나 놓여 있는 편지 뭉치를 본 에릭이 킥킥 웃기 시작했다.

“진짜네.”

“온 줄도 몰랐어요.”

드르륵 의자를 당겨 테이블에 바투 앉으며 에릭이 뒤늦게 만년필을 집어 들었다. 잉크병을 열자 익숙한 냄새가 눈앞을 휘돌았다. 촉을 잉크에 살짝 담가 둔 채로 잉크가 채워지기를 기다리는 동안 시답잖은 대화가 이어졌다.

“사감실에 가 본 적 없지?”

“네.”

“그러면 저건 어떻게 받아 왔어?”

“사감님이 방문 앞에 가져다 둔 것 같아요.”

“아하. 불쌍한 대런.”

에릭이 촉을 담가 두었던 만년필을 들어 올렸다. 테이블 위에 굴러다니는 아무 종이를 집어 들어 촉 주위에 묻은 잉크를 닦아 내고, 잉크병의 뚜껑을 닫았다. 진한 잉크 냄새가 잦아들고, 아까부터 은은하게 감돌던 단내가 그 사이로 스며들었다. 그의 등 뒤에서 딜라일라가 책을 펼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제야 그의 밤이 완성된 것 같았다. 에릭은 손에 쥔 만년필로 종이 위를 긁적이기 시작했다. 그녀가 오기 전 생각하고 있던 아이디어들을 하나씩 정리해 둔 뒤에 구체화할 방안을 찾아볼 생각이었다. 마법이 깃든 의복은 오딜이 종종 만들었던 만큼 지금도 만들 수는 있었지만, 상용화하기에는 너무 품이 많이 들었다. 게다가 일상생활에서 활용할 수 있는 마법 기구에 대한 것은 그 종류를 떠올리는 것부터 시작해야 했다.

사각사각 종이 위를 뾰족한 촉이 긁어내리는 소리. 스며드는 잉크 냄새. 간간이 페이지가 넘어가는 작은 소음. 그 모든 것들이 당연하게 그들의 밤을 채웠다.

딜라일라는 페이지를 넘기다가 문득 시선을 돌렸다. 그녀가 앉은 침대가 놓인 침실과 에릭이 앉은 테이블이 놓인 응접실은 공간이 분리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 사이를 막고 있는 널찍한 문이 닫힌 적은 그녀가 본 중에는 한 번도 없었다. 바닥에 여기저기 쌓여 있는 책 때문에 그 문은 항상 열린 채로 고정되어 있었다.

그렇게 활짝 열린 문 너머로는 언제나 에릭의 뒷모습이 보였다. 한때 딜라일라는 그 뒷모습을 보면 마음이 편해지곤 했다. 그래서 에릭의 방을 몇 번이나 찾지 않았던가. 그 이유도 모를 평온이 그리워서.

하지만 이제 그녀는 그 뒷모습을 보아도 마음이 편안해지지 않았다. 도리어 안달이 났다. 연구에 열중한 에릭을 방해하고 싶지 않다가도, 딜라일라는 안중에도 없이 종잇조각만 들여다보며 만년필을 굴리고 있는 그를 보면 괜히 방해하고 싶어졌다.

그러면 딜라일라는 괜히 그가 앉은 테이블로 척척 걸어가서, 그의 맞은편에 놓인 의자를 지익 끌어내서 앉는 것이다.

에릭이 슬쩍 시선을 들어 올렸다가 눈앞에 그녀가 앉은 것을 확인하고는 다시 종이 위로 시선을 내렸다. 그가 끄적이고 있는 종이에는 여전히 딜라일라가 알아볼 수 없는 것이 가득했다. 사실 이제 반쯤은 딜라일라도 읽을 수 있을 법한 내용이었지만, 어쨌든 에릭의 글씨는 그때나 지금이나 암호 같았다.

칫. 입술을 삐죽여 보인 그녀가 다시 책을 펼쳐 들었다. 그녀가 요즘 흥미롭게 읽고 있는 그 책은 마법 공학의 사회적 활용도에 관해 고찰한 것이었다. 에릭이 가지고 있는 것답게 전문적인 용어가 가득하긴 해도 맥락은 그녀가 가지고 있는 지식과도 맞춰 가며 생각해 볼 만한 데가 있었다. 그녀는 모르는 단어나 어려운 내용이 나오면 에릭에게 물어 가며 벌써 절반쯤 책을 독파했다.

“에릭, 여기…….”

“네.”

“이거, 이 문단에서 말이야…….”

에릭은 얌전히 책을 읽는가 싶었던 딜라일라가 한동안 페이지를 넘기지 못하고 같은 부분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을 일찌감치 눈치채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딜라일라가 그를 부르며 펼쳐진 페이지를 에릭의 앞에 들이밀었다.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을 짚어 내는 딜라일라의 하얀 손끝을 따라 에릭의 눈동자가 움직였다.

“이건…… 설명이 꽤 길어질 텐데요. 몰라도 전체적인 내용을 이해하는 데는 지장이 없을 거예요.”

“해 줘.”

“으음. 네.”

사실 그 문단을 정확히 이해할 필요가 없다는 것은 딜라일라도 알고 있었다. 애초에 그 책의 주제는 마법 공학과 사회 발전에 대해 다루고 있었으므로, 마법 공학의 기술적인 부분이나 상세한 전문 지식을 딜라일라가 알아야 할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딜라일라는 굳이 설명을 요구했다. 딜라일라가 해 달라고 말하면, 에릭은 거절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알아서. 과연 에릭은 천천히, 최대한 쉽게 설명을 해 나가기 시작했다.

“여기에서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전제한 이유는 마법 공학이 근본적인 한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에요. 지난번에 설명했듯이, 흔히 무슨 일이든 이뤄 낼 수 있는 신비로운 능력처럼 여겨지곤 하지만, 실상 작금의 시대에 마법은 기적이 아니라 하나의 기술과 결합한 동력이나 다름없기 때문에…….”

딜라일라는 조곤조곤 속삭이듯 말하는 에릭의 목소리를 열심히 듣다가 테이블 위에 살짝 턱을 괴었다. 손바닥 위에 뺨을 기대고 페이지 위에 고정되어 있던 눈을 들자, 시선을 내리깐 채로 조곤조곤 입술을 움직이고 있는 에릭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잘생겼어.

정말로, 객관적으로 평해서 에릭의 얼굴은 잘생겼다. 캐러멜과 닮은 연한 갈색 머리카락 아래로 곧게 뻗은 콧대나 굳건한 턱 선은 물론이고 시원한 눈매나 크지도 작지도 않은 입술까지, 진부하게 표현하자면 조각처럼 생겼다. 실내에서 주로 시간을 보내는 만큼 하얀 피부는 결점이라곤 없을 것처럼 매끄러웠다.

하지만 그런 에릭이 눈을 내리깔면 눈꺼풀 위에 아주 조그만 점이 있다는 사실을 딜라일라는 최근에 알게 되었다. 눈을 곧게 뜨면 접혀 보이지 않는 부분에 동그란 점이 딱 하나 숨어 있었다. 얼마 전, 책의 초반 부분에서 그녀가 모르는 전문 용어에 대해 묻고 설명을 듣다가 문득 알게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법 공학이 특별한 부분은 마법적이라고 명명되는 현상 자체를 동력으로 삼기 때문인데요. 그래서 대부분의 마법 공학은 회로와 함께 마법 시약을 활용하고 있죠. 마법 약이 마법적 현상을 일으키는 가장 간편한 방법이기 때문이죠. 물론 오늘날 주로 마법 공학의 영역으로 여겨지는 거대한 마법에는 그뿐만 아니라…….”

그 후부터는 에릭의 얼굴을 마주 볼 때마다 몰래몰래 그 점을 훔쳐봤다. 다른 사람들은 모르고 있을 에릭을 하나라도 더 알고 있다는 사실은 꽤 그녀를 즐겁게 해 주었다. 눈을 내리깔고 입술을 움직이며 그녀에게 설명을 해 주는 그를 보고 싶어서 일부러 책을 읽어 가며 모르는 부분을 열심히 찾아내 질문하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였다.

하지만 절반쯤이나 책을 읽어 내고 나니 이제는 일부러 에릭에게 굳이 질문할 만한 거리도 별로 없었다. 딜라일라로서는 조금은 아쉬운 일이었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전제를 깔고 있는 거예요. 설명이 됐을까요?”

“어, 어…… 응.”

멍하니 에릭의 눈가와 입술을 힐끔거리고 있던 딜라일라가 어색하게 웃었다. 사실 에릭의 얼굴을 훔쳐보느라 절반쯤은 알아듣지 못했지만, 어쨌든 질문의 목적은 달성했다. 딜라일라가 방긋 웃으며 에릭에게 고맙다고 말하자 에릭은 고개를 슬슬 저어 보이고는 다시 그녀에게 책을 돌려주었다.

책을 받아 든 딜라일라는 설명을 곱씹어 보는 듯 잠시 눈동자를 굴리다가, 이내 다시 책 속에 시선을 고정했다. 이럴 때면 그녀가 행정 교양학부의 수석이라는 사실이 에릭에게 새삼스럽게 와 닿고는 했다.

대체로 한 번 설명하면 어느 정도는 이해하고, 이해가 되지 않을 때는 몇 번이나 질문을 해서 납득할 만한 설명을 얻어 낸다. 딜라일라는 똑똑하고 성실한 학생이었다.

길고 복잡할지라도 설명을 시작하면, 딜라일라는 커다란 눈을 깜빡거리면서 에릭의 목소리를 가만가만 듣고 있다. 가끔은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고, 이해가 잘 되지 않을 때에는 분홍빛 머리칼을 만지작거리거나 턱을 괴고 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본다.

그러다 설명이 끝나고, 딜라일라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책 위로 시선을 떨어뜨리면 가당찮게도 아주 조금, 아쉬웠다. 그녀의 선명한 시선이 제게서 떨어지는 것이.

그러다 보면 딜라일라와 그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조차도 사실은 그에게는 과분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조금 자조하고 마는 것이다. 에릭은 자신이 이렇게나 욕심이 많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딜라일라를 만나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혹여나 자신의 욕심이 넘쳐서 딜라일라에게 닿을까 봐, 에릭은 일부러 테이블 위만 노려보다가 만년필을 손에 쥐었다. 사각사각 소리가 날 때마다 종이 위에 아무렇게나 휘갈긴 글씨가 그려졌다.

때로 눈동자만 움직여 딜라일라의 얼굴을 바라보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시선을 잡아끄는 사람이니까.

딜라일라는 책에 집중하면 눈썹을 조금 찌푸린다. 미간에 주름이 잡힐 만큼은 아니어도, 항상 둥그렇게 떨어지는 눈썹 끄트머리가 슬쩍 위로 치켜 올라가서 조금 뾰족한 인상이 된다. 에릭은 딜라일라가 책을 읽는 모양을 몇 번인가 훔쳐보다가 그것을 알게 되었다.

서로의 눈치를 훔치고 피해 가며 그들은 상대방에게서 좋아하는 부분을 하나 더 찾아냈다. 어떤 부분에서는 똑같고, 어떤 부분에서는 전혀 다른 마음을 상대방이 품고 있는 줄도 모르고.

* * *

방 안은 밝았다. 에릭이 불을 끄지 않아서, 정확히는 불을 끌 틈도 없이 갑작스럽게 상대의 몸부터 껴안았기 때문이다. 사실 그들이 몸을 섞을 때면 대체로 그랬다.

“아, 흐윽……!”

딜라일라는 테이블 위에 앉아 있었다. 그녀가 움찔거리며 몸을 움직일 때마다 엉덩이 아래에서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던 종이가 구겨졌다. 언제나 그 위를 굴러다니던 만년필은 이미 바닥으로 떨어져 어딘가로 굴러가 버린 지 오래였다.

에릭은 어디로 가 버렸는지도 알 수 없는 만년필로 종이 위를 긁어내는 대신, 손끝으로 딜라일라의 피부를 누르고 아프지 않게 긁어냈다. 말랑한 살이 점점이 붉게 물들었다가 다시 본래의 흰빛으로 돌아오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아, 에릭…….”

딜라일라는 애타는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지만, 에릭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입에는 딜라일라의 가슴이 물려 있어서, 말이 새어 나올 틈이 없었다. 에릭의 혀끝이 빳빳하게 일어선 유두를 간질이는 것을 느끼며 딜라일라는 허리에 힘을 주어 바짝 세웠다. 그러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위태롭게 그녀를 받치고 있는 테이블 위에서 중심을 잃고 바닥으로 떨어질 것만 같았다.

그녀를 테이블 위에 아슬아슬하게 걸쳐 둔 것은 에릭이었다. 에릭의 맞은편에 앉아 책을 읽고 있던 그녀를 번쩍 들어 올리더니 그대로 테이블 위에 올려 버린 것이다. 순식간에 딜라일라의 옷이 벗겨져 내던져졌고, 까만 잉크로 얼룩진 종이 위에서 딜라일라는 새하얀 나신으로 에릭의 애무를 받고 있었다.

쇄골 위에도, 가슴골에도. 유두와 어깨까지 그의 키스가 끊임없이 쏟아졌다. 그의 손은 딜라일라의 발목을 감싸 쥐었다가 종아리를 만지며 위로 올라와 무릎 뒤를 간질였다. 그러다가는 무릎 위를 쓰다듬고 말랑한 허벅지 살을 누르며 서서히 위로 손을 움직였다. 딜라일라의 다리는 에릭을 가운데 두고 활짝 벌어져 있었다. 그 사이로 에릭의 손이 파고들자, 묘한 기대감으로 딜라일라의 아랫배가 경련하며 조여들었다.

하지만 그는 허벅지를 쓰다듬고 치골을 붙들었다가, 말랑한 살 위를 슬쩍 긁어낼 뿐이었다. 당장 그녀를 어떻게든 해 버릴 것처럼 그녀의 옷을 벗겨 냈으면서, 에릭은 정작 그녀의 온몸을 핥고 만지면서도 딱 한 군데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

“으응, 흣……!”

더 깊은 접촉을 조르는 것처럼 그의 입술에 가슴을 문지르며 에릭의 어깨를 붙잡아 당겨 보았지만, 그는 이를 세워 유두를 살짝 깨물며 손끝으로 허벅지를 긁어내릴 뿐이었다. 도리어 딜라일라만 유두를 깨물리는 감촉에 허리를 부르르 떨며 더 달아올랐다.

만지지 않아도 자신의 비부가 축축하게 젖어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치미는 성감을 참지 못하고 엉덩이를 움직일 때마다 젖은 피부에 종이가 쩍 달라붙으며 구겨졌다.

“에릭, 흐응…… 종이 구겨져. 앗……!”

괜히 걱정하는 척 말하자 에릭이 고개를 저었다. 괜찮다는 뜻인가? 가슴을 입에 물고 고개를 흔드는 그의 움직임을 가늠해 보려는 사이 에릭이 드디어 그녀의 다리 사이로 손을 뻗었다.

“흐으…….”

하지만 에릭은 그녀의 엉덩이에 젖어 달라붙은 종이를 떼어 낸 뒤에 야속하게도 다시 손을 빼 버렸다. 딜라일라는 눈을 가느스름하게 내리뜨고 그녀의 가슴께에서 흔들리는 에릭의 정수리를 보았다. 그보다 더 아래, 자신의 하얀 허벅지 위에서 마디진 손이 악기를 두드리듯 그녀의 살을 누르고 쓰다듬고 있었다.

딜라일라는 그의 손목을 잡아챘다. 마른 듯한 손목에 동그랗게 튀어나온 뼈가 만져졌다. 딜라일라는 그의 손을 천천히 잡아 이끌었다. 에릭은 그것만큼은 저지하거나 거절하지 않았다.

에릭의 손이 흥건하게 젖어 있는 둔덕 사이에 닿는 순간 딜라일라는 탄식처럼 깊은 한숨을 토해 냈다.

“하아, 에릭.”

에릭의 손끝이 바르르 떨리는 것이 그대로 느껴졌다. 딜라일라는 손을 조금 더 깊이 밀어 넣었다. 단정하게 다듬어진 에릭의 손끝이 통통하게 솟은 살 사이로 파묻혔다. 손목을 살짝 당겨 올리자, 갈라진 틈을 따라 미끄러진 그의 손가락이 동그란 살점에 닿았다.

“아흐으…….”

몸속에 꽉꽉 눌러 담긴 열기가 에릭과 맞닿은 곳에서만 피부 위로 튀어 오르는 것 같았다. 짜르르 퍼져 나가는 쾌감은 뜨거운 것 같기도, 시원한 것 같기도 했다.

“여기도, 만져 줘. 응……?”

속삭이는 딜라일라의 목소리는 한껏 낮아져 있었다. 얼핏 나이보다, 훨씬 어리게만 들리는 평상시의 가느다란 목소리보다 훨씬 더 농염한 그 목소리에는 숨소리마저 가득 섞여서 농염하고 유혹적인 느낌이 가득 묻어 있었다.

에릭이 그녀의 가슴을 콱 깨물더니 깊이 빨아들였다. 갑자기 덮쳐 온 강렬한 감각에 딜라일라는 숨을 집어삼켰다. 내내 끙끙거리며 흘려보내던 신음도 차마 뱉지 못했다. 그 틈에 에릭이 그녀의 손에 붙잡혀 있던 손목을 빼냈다.

꾸욱, 치골 아래 움푹한 곳을 따라 살갗을 누르며 미끄러뜨리는 에릭의 손에는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그 역시 딜라일라만큼이나 흥분해 있는 게 틀림없었다. 그런데도 왜 만져 주지 않는 것인지. 그녀를 번쩍 들어 올려 그대로 침대로 가지도 않은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딜라일라는 급기야 심통이 났다.

“흑, 으…….”

딜라일라는 에릭의 양 허벅지 위에 얌전히 얹혀 있던 발끝에 힘을 주어 꾹 눌렀다. 자신의 말랑한 허벅지보다도 훨씬 더 단단한 그의 허벅지는 탄력 있게 그녀의 발을 튕겨 냈다. 하지만 딜라일라는 발에서 힘을 풀지 않았다. 오히려 더 힘을 넣고 강하게 누르며 미끄러뜨렸다.

그녀의 맨발이 얇은 바지에 감싸여 숨어 있던 것을 찾아냈다. 과연 딜라일라의 예상대로 그녀의 말랑한 발바닥에 딱딱한 감촉이 닿아 왔다. 그의 것 역시 꽤 오래 전부터 흥분해 있었던 것이 확실하다. 유난히 딱딱하게 불룩 솟은 끄트머리쯤에서 묘하게 습기가 느껴졌으니까. 발끝에 힘을 빼고 그 위를 둥글게 문지르는 순간 그녀의 치골을 붙들고 있던 에릭의 손에 콱 힘이 들어갔다.

“흐읍…….”

“너도 이, 렇게 섰으면…… 서…….”

괴롭히는 것처럼 가슴을 잘근잘근 물어 당기는 감촉에 숨을 집어삼키면서도 딜라일라는 간지럽게 속삭였다. 에릭이 그녀의 가슴에 더 깊이 얼굴을 파묻는 통에 그녀의 상체가 뒤로 밀렸다. 테이블 뒤로 넘어가 버릴 것 같은 아슬아슬함에 딜라일라는 뒤로 손을 짚지도 못하고 에릭의 머리통을 껴안았다.

겨울 휴가 즈음에 짧아졌던 에릭의 머리카락은 다시 그의 목덜미에 닿을 만큼 자라나 있었다. 가늘고 부드러운 감촉을 붙들어 당기자 드디어 그의 입술이 딜라일라의 여린 피부 위에서 떨어져 나갔다.

얼마나 열심히 물고 빨아 댄 것인지, 하얀 가슴 위에는 점점이 붉은 순흔이 새겨져 있었다. 엷은 색의 유두 주변은 꽃이라도 핀 것처럼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딜라일라의 발끝이 그의 페니스를 감싼 천 위를 긁어 올렸다.

“언제까지 이렇게 애만 태우려고.”

다시 발을 미끄러뜨렸다가 느리게 밀어 올렸다. 에릭의 숨소리가 그때마다 어딘가에 탁 걸린 듯 멈췄다가 조금씩 빨라졌다. 조그맣게 젖어 있던 천이 밀려 올라갔다. 딜라일라는 아예 그의 것을 밟듯이 발 전체로 지그시 누르며 문질렀다. 발뒤꿈치에 달라붙는 끈적한 습기가 천천히 범위를 넓혔다.

“……누나.”

그러잖아도 낮은 톤인 에릭의 목소리가 한껏 가라앉아 있었다. 딜라일라의 등줄기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이처럼 그가 나무를 긁는 것처럼 거칠고 막힌 것 같은 목소리로 누나, 하고 부를 때면 매번 그랬다. 그의 목소리가 귓속으로 파고들어 와 머릿속을 진탕으로 휘젓는 것 같았다. 그리고 불꽃을 일으키며 목덜미를 타고 아래로, 아래로 흘러내려 아랫배 즈음에 고인다.

그 불꽃은 이내 기분 좋게 타오를 것이다. 혈관과 신경을 따라 흐르며 온몸을 데울 것이다. 그와 몸을 겹칠 때마다 으레 그랬듯이.

뭐든지 처음이 어렵다고 하던가. 한번 저지른 나쁜 짓은 버릇이 된다고 하던가. 아니면 몸정이 무섭다던가?

그 말들이 전부 진짜일지도 모른다고, 딜라일라는 생각했다. 에릭과 딜라일라는 이제 자연스럽게 입맞춤을 나누고 몸을 섞었다. 두 번째, 세 번째까지만 해도 그들 사이에 잔잔하게 맴돌던 어색함은 질척한 타액과 뒤섞이는 체액에 녹아 삼켜졌다.

언제나 이렇게 몸을 맞대지는 않았다. 각자 책을 보고 연구를 하며 밤을 전부 보내 버릴 때도 있었고, 가끔은 딜라일라가 에릭에게 질문을 던져 가며 그와 토론 아닌 토론을 하기도 했다. 대체로 에릭이 만들어 낸 고형 마법 약과 그 외에도 일상에서 상용화할 수 있는 마법, 마법의 발전과 사회의 발전 사이의 연관 관계 따위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욕정과 쾌락 따위는 끼어들 틈도 없이 학술적인 대화가 줄줄이 이어졌다.

그런가 하면 눈을 마주하자마자 입술부터 부딪칠 때도 있었다. 밤을 지새울 기세로 이어지던 학술적인 토론과 담백하게 나눴던 밤 인사가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끈적한 욕망이 뚝뚝 떨어지는 키스였다. 입맞춤은 금세 깊어졌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그들은 허겁지겁 단추를 풀어 내리고 몸을 감싸고 있던 천 조각들을 벗어 던졌다.

몸을 맞추는 순간은 처음보다도 더 처음같이 성급하고 엉성했다. 하지만 그만큼 짜릿했다. 그렇게 점점 더 익숙해졌다. 에릭의 방 안 어디서든 그들은 입술을 겹치고, 서로의 혀를 문지르고, 맨 살갗을 쓰다듬었다. 보송하던 피부가 끈적하게 달라붙을 때면 딜라일라는 매번 그와 처음 입을 맞추었던 날을 떠올렸다.

나쁜 짓을 저질러 버린 것만 같은 느낌. 작은 거짓말과 커진 마음이 한데 엉켜서 감정은 점점 더 무거워지기만 했다. 아마 이제는 분명 공기보다 무거울 것이다. 그녀가 가쁘게 뱉어 내는 숨에는 늘 그것이 뒤섞여 있었지만, 이내 바닥으로 가라앉아 버리고 말았으니까.

에릭과 함께 몸을 겹칠 때면 그녀가 뱉어 낸 마음이 발에 차이는 것 같기도 했다. 그것은 딜라일라의 발목 즈음에 걸려 공기 중으로 떠올랐다가, 이내 그녀를 덮쳐 오는 에릭의 체중과 함께 쾌락으로 변모했다.

그래서 그 모든 것들이 쾌락과 하나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흐윽…….”

에릭이 딜라일라의 가슴팍에 머리를 기대고 낮은 신음을 토했다. 생각에 빠진 사이 딜라일라의 발에 힘이 과하게 들어간 모양이었다. 딜라일라는 화들짝 놀라서 발을 떼어 내는 대신 의도했던 것처럼 슬쩍 발바닥을 문대며 힘을 뺐다. 어느새 그녀의 허리를 껴안고 있던 그의 팔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딜라일라는 자신에게 기댄 에릭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다 문득 고개를 숙여 그의 정수리에 입을 맞췄다. 달콤한 맛이 날 것만 같은 캐러멜 색 머리칼이 부드럽게 휘몰아치는 그곳에.

에릭이 늘어뜨렸던 고개를 번뜩 치켜들었다. 고개뿐만 아니라 몸 전체를 그대로 일으켰다. 그가 앉아 있던 의자가 뒤로 밀리며 우당탕 카펫 위로 넘어졌다.

“에릭……? 앗!”

순식간에 훌쩍 위로 올라간 에릭의 턱 끝을 올려다보려던 딜라일라의 몸이 뒤로 휙 쓰러졌다. 다행히 위태롭게 흔들리는 테이블째로 그녀가 바닥에 구르기 전에 에릭의 커다란 손이 그녀의 등허리를 받쳤다. 그녀의 벌어진 무릎 아래에 손을 집어넣고 한껏 들어 올린 것이 그였으니, 당연히 에릭은 그녀를 늦지 않게 붙잡을 수 있었다.

딜라일라의 허리를 잡아 바로 세운 후에도 그는 잡아 올린 가녀린 허벅지를 놓아주지는 않았다. 대신 한 손으로 다급하게 바지 단추를 풀어내기 시작했다. 헛손질을 할 법도 한데도 그는 한 번의 오차도 없이 재빨리 바지 단추를 전부 풀어 버렸다.

속옷과 바지를 한꺼번에 아래로 끌어 내리기가 무섭게 커다란 성기가 튕기듯 모습을 드러냈다. 몇 번을 보아도 익숙해지지 않는 크기였다. 달아오른 그의 얼굴보다도 훨씬 더 불그스레한 빛이 감도는 그것의 끄트머리가 방 안을 밝힌 등불 빛에 반드르르하게 빛났다.

“응, 흐윽!”

손끝을 더듬어 딜라일라의 아래가 아직 젖어 있는지 확인한 그가 볼록 솟은 음핵을 꾹 눌렀다. 그리고 곧장 그 아래로 손을 미끄러뜨렸다. 체액이 묻은 손가락이 질구를 벌렸다. 하나, 둘, 셋. 평소에 비하면 다급한 손길이 안으로 밀려들어 와 그녀의 근육을 푸는 동안 딜라일라는 에릭의 목에 팔을 감고 매달렸다.

에릭의 손가락이 쑤시고 들어올 때마다 그녀의 몸을 받치고 있는 테이블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그때마다 딜라일라의 입술이 에릭의 쇄골에, 목울대에 가 부딪쳤다.

“앗, 응. 에릭. 이제, 응?”

“누나는 진짜…….”

딜라일라의 입술이 닿아 있던 목울대가 꿀렁 움직였다. 그녀는 무심코 혀를 내밀어 그것을 핥아 냈다. 에릭의 마디진 손이 딜라일라의 다리를 확 위로 밀어 올렸다.

“앗……!”

그가 몸 전체를 밀어붙이는 통에 테이블이 크게 휘청거렸다. 하지만 딜라일라는 그 아슬아슬한 느낌에 에릭을 안은 팔에 힘을 꽉 주고 매달렸다. 에릭의 손이 그녀의 골반을 잡아당겼다. 질구에 단단한 끄트머리가 닿아 문질러지는 감각이 선득했다.

“왜 할 때만 그렇게 적극적이에요?”

“흐, 아. 아냐. 네가, 흣……!”

딜라일라는 뭔가를 더 말하려고 했지만, 좁은 입구가 한계까지 벌어지는 느낌에 말 대신 입술을 깨물었다. 아래에서부터 뻐근한 감각이 몰려왔다. 뭉툭한 귀두는 물론이고, 그만큼이나 두꺼운 뿌리까지 단번에 밀려들어 그녀의 몸속을 채웠다. 딜라일라는 신음조차 내지 못하고 숨을 할딱거렸다.

“지금도 그렇잖아요.”

바들바들 떨고 있는 딜라일라에 비하면 에릭의 말투는 내용과 달리 여상스러웠다. 처음에는 삽입하는 것만으로도 숨을 삼키며 좋다는 말밖에 못 하더니, 대체 왜 그는 그새 아무렇지도 않게 말할 수 있게 된 걸까? 딜라일라는 멍한 머리 한구석으로 그런 생각을 했다.

“움직일게요.”

하지만 움직이기 전에는 꼭 말을 한다. 그녀의 허락을 구하는 것처럼. 그런 점은 그대로였다.

“아, 너. 아읏!”

딜라일라는 무심코 입을 열었다가 신음을 토해 냈다. 에릭이 그새 허리를 슬쩍 빼냈다가 빠르게 쳐올리는 통에 생각이 삼켜졌다. 묵직한 쾌락이 그와 겹쳐진 피부 아래에서 꿈틀거렸다.

다음으로 이어지며 더 커질 쾌감의 파도를 예상한 딜라일라가 눈을 꾹 감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는 다시 움직이지 않았다.

슬쩍 눈을 뜨고 올려다보니, 에릭은 가만히 그녀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새삼스럽게 딜라일라는 그의 움푹 들어간 눈매가 이럴 때면 더 깊어 보인다고 생각했다. 아래에서 올려다보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혹은 너무 가까이에서 보고 있기 때문인지도. 솟은 광대뼈에 슬쩍 가려 보이니까.

그의 입술은 딜라일라와 한참 동안 키스를 나눈 탓인지 조금 부어 있었다. 대신 평소보다 더 혈색이 돌았다.

그 입술이 조그맣게 움직였다. 가지런한 윗니가 드러났다.

“무슨 말 하려고 했어요?”

“어, 어……?”

“말, 하려고 했잖아요.”

단정한 입술이 움직이는 것을 보면서 딜라일라는 조금 어안이 벙벙해졌다.

이 상황에……? 그러니까 한참을 그녀만 만져 대며 참다가 삽입해서 막 움직이려는 때에, 고작 딜라일라가 하려던 말이 끊겼다는 이유로 멈춰서 그녀의 말을 듣겠다고……?

“너는…….”

“네.”

딜라일라는 멍하니 쾌락 아래에 파묻힐 뻔했던 생각을 입 밖으로 끄집어냈다. 말하고 보니 진짜로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에릭은 당장 지금도 멈춰 설 여유가 있는 것이다. 그의 것이 몸 안으로 들어오면 숨이 넘어갈 것 같고, 생각이 전부 녹아 버리는 것만 같은 딜라일라와는 달리.

“안 좋아……?”

딜라일라는 그대로 우물쭈물하다가, 겨우 짧은 말 한마디만을 뱉어 낼 수 있었다. 너무나도 뜨거워서 곧 타 버릴 것만 같던 손끝이 조금씩 식어 가고 있었다.

“…….”

에릭은 대답이 없었다. 딜라일라는 어떻게든 말을 이어 가기 위해 애를 썼다. 사실 이건 딜라일라에게는 꽤 중요한 문제였다. 에릭이 자신과의 관계에 흥미를 잃어버리면, 언젠가는 그녀가 찾아와도 에릭이 거부할 수도 있는 일이니까. 마음을 쏙 빼놓고 이어 붙인 관계의 저변에는 언제나 불안이 깔려 있었다.

“나는 아닌데, 너는 음, 여유로워 보이니까…….”

“……뭐.”

“나는 너무 좋아서 아무 생각도 안 나는데…….”

어떻게든 딜라일라는 제 생각을 말로 만들어 보려고 했다. 하지만 에릭과의 접촉에 녹진녹진 녹아 버렸던 생각이 좀처럼 모양 잡힌 말로 굳어지지 않아서 딜라일라는 끙끙거렸다. 그 와중에도 묵직한 압박감이 그녀의 하반신을 빠듯하게 채우고 있었다.

“너는 아니야?”

“……누나는 진짜.”

골반을 붙잡고 있던 에릭의 손에 꽈악 힘이 들어갔다. 에릭은 그대로 딜라일라의 몸을 휙 들어 올렸다.

“으, 히익!”

그러잖아도 그녀의 몸 깊숙이 박혀 있던 에릭의 성기가 더 깊이 밀려들어 오는 감각에 딜라일라의 몸이 바짝 긴장했다. 에릭을 껴안은 팔에도 근육이 바들바들 떨릴 정도로 힘이 들어갔다. 그러거나 말거나 에릭은 자신의 몸과 이어진 딜라일라의 자그만 몸뚱이를 가볍게 안아 들었다.

“흑, 으…… 너무, 너무 깊어……!”

“누나.”

딜라일라가 바짝 매달려 안긴 탓에, 그녀의 귀 바로 옆에서 속삭이는 에릭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평소보다도 더 낮고, 작고, 깊은 목소리. 딜라일라가 대답도 하지 못하고 힉힉 숨만 들이 삼키는 동안 에릭이 발을 뗐다.

한 걸음. 그의 것이 깊숙이 비집고 들어왔다가 조금 빠져나갔다. 몸이 바짝 붙은 탓에 그의 성기는 딜라일라의 몸속을 평소와 다른 느낌으로 자극했다.

“누나 몸속이 어떤 느낌인지 알아요?”

“힉, 으. 에릭…….”

한 걸음. 그리고 다시 또 한 걸음. 에릭이 걸을 때마다 딜라일라의 허리가 들썩거렸다. 그가 작정하고 성기를 박아 넣는 것도 아닌데 안쪽이 콱콱 짓눌려 왔다. 평소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평소와 다른 곳이 자극되고 있었다. 조금 더 뒤쪽, 더 깊은 어딘가.

“부드럽고, 끈적거리고…….”

“아, 흐읏!”

“할 때마다 너무 조여서, 죽을 것 같아요.”

끝까지 그렇게 담백한 투로 속삭인 에릭이 그녀를 내려놓았다. 어느새 침대 위였다. 딜라일라의 머리카락이 하얀 침구 위에 동그랗게 흩어졌다.

“그래서 꾹 참고 있는 건데.”

“하아…….”

딜라일라는 목에 감았던 손을 위로 올렸다. 손가락 사이로 그의 머리카락이 엉켰다. 부드러운 감촉 사이로 온도가 느껴졌다. 딜라일라는 그의 뺨으로 손을 미끄러뜨리고, 그의 얼굴을 잡아 올리려 했다.

하지만 에릭은 그녀의 어깨 위에 더 깊이 얼굴을 파묻었다. 그대로 그의 허리가 움직였다.

“흐읏!”

“누나가 자꾸 조르니까.”

그녀의 몸을 침대 위로 내려놓는 사이, 절반도 넘게 빠져나갔던 에릭의 성기가 다시 깊숙이 처박혔다. 몸속이 전부 짓눌리는 듯한 압박감에, 딜라일라는 에릭의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하지만 에릭은 머리카락이 당겨지는 줄도 모르는 것처럼 딜라일라의 몸을 끌어안았다. 딜라일라의 귓가에 에릭의 벅찬 숨결이 흩어졌다.

“참기 힘들어…….”

그 말을 마지막으로 에릭이 딜라일라를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그녀의 말 한마디에 멈췄던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다급하게.

* * *

에릭이 내민 마법 사탕의 포장을 까면서 딜라일라가 뚱하게 중얼거렸다.

“사실은 아직도 이해가 잘 안 돼.”

“뭐가요?”

되묻는 목소리가 들렸지만, 딜라일라는 그의 얼굴 쪽으로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오히려 휙 소리가 날 정도로 몸을 반대로 틀어 버렸다. 그 통에 딜라일라의 잠옷 단추를 잠가 주던 에릭의 손이 엇나갔다. 단추를 놓친 손이 잠깐 멈췄다가, 다시 딜라일라의 허리를 끌어당겨 옷자락을 잡고 단추를 잠갔다.

언제나와 같았다면 뒤처리는 물론이고 딜라일라의 옷매무새까지 정리해 주려는 그의 손을 고마워하며 사양했을 딜라일라는 여전히 뚱한 얼굴이었다.

그럴 만도 했다. 에릭은 그대로 딜라일라를 침대 위에 내리누르고 세 번이나 했다.

무려 세 번이었다.

세 번.

딜라일라의 손에 힘이 다 빠져서, 에릭의 어깨를 긁어내리던 손끝이 맥없이 미끄러져 내리는 동안에도 그는 멈추지 않았다. 나중에는 아예 아프도록 그의 머리카락을 당겨 보기도 했지만, 에릭은 그대로 고개를 숙여 딜라일라의 입술을 키스로 막아 버렸다. 세 번째에는 신음을 참을 힘도 내지를 힘도 없어서 힉힉 바람 빠지는 소리만 내며 에릭의 움직임에 따라 흔들린 그녀였다.

말이 세 번이지, 세 번을 하는 내내 딜라일라는 쉴 틈 없이 자신을 덮쳐 오는 오르가슴에 허덕여야 했다. 온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지치다 못해 그녀의 몸이 조금 식어 내릴 것 같은 때가 되면 에릭은 어김없이 그녀가 예민하게 느끼는 곳을 잘도 찾아 자극했다. 아프지도, 과하지도 않게 힘을 뺀 손과 혀와 페니스를 모두 써서. 그러면 속절없이 다시 딜라일라의 밀지는 젖어 들고, 오르가슴을 느끼기 직전에 에릭이 제 것을 그녀의 안에 박아 넣었다.

오르가슴 직전의, 잔뜩 민감해진 내벽을 단단한 귀두와 기둥으로 긁고 문지르는 에릭의 허리 짓에 딜라일라는 결국 또 절정을 맞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세 번을 했으니, 적어도 딜라일라는 에릭의 두 배는 오르가슴을 느꼈을 것이다.

게다가 내내 그가 딜라일라의 귀에다 대고 속삭였던 말들은 또 어떤가. 그녀의 안쪽이 조여서 힘들다느니, 뜨거워서 녹아 버릴 것 같다느니. 에릭은 그런 말을 잘도 속삭였다. 그때마다 딜라일라는 몸속에 불이 붙는 것 같았다.

요망한 에릭 브라이어. 딜라일라는 오늘부로 에릭의 이름을 수식하는 단어 목록에 ‘천재’나 ‘무심한’ 대신 ‘요망한’을 집어넣기로 했다. 오늘 그녀가 겪은 일만 보자면 그만큼 딱 어울리는 단어가 또 없었다.

‘그렇게 해 놓고는 또 저렇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말하고. 얄미워.’

딜라일라는 자신의 잠옷 단추를 전부 잠그고 아예 어깨에 도톰한 카디건까지 걸쳐 주고 있는 에릭의 머리꼭지를 흘겨보았다. 그녀가 참지 못하고 쥐어뜯은 탓인지 언제나 부드럽게 흘러내리던 그의 캐러멜 색 머리칼이 엉망으로 삐쳐 있었다.

“뭐가 이해가 안 돼요.”

딜라일라를 약 올리는 것처럼 담담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가 되물었다. 딜라일라는 흥, 콧소리를 내며 괜히 고개만 옆으로 팩 돌렸다. 그 탓에 어깨에 걸쳐져 있던 카디건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에릭은 짜증 한번 내지 않고 그것을 다시 주워 들었다. 그는 늘 그랬다. 딜라일라와 하고 난 다음에는 꼭 조금 과하다 싶을 정도로 딜라일라를 챙겼다.

그건 때로 딜라일라를 슬프게 했다. 이유를 명확히 짚어 낼 수는 없었지만, 그저 막연하게 조금 슬펐다.

“……정화의 마법 약 말이야.”

포옥 한숨을 내쉰 딜라일라가 에릭의 손에서 카디건을 받아 제대로 입기 시작했다. 잠옷 너머로 포근한 온기가 그녀의 어깨를 둘러 감쌌다. 소매에 팔을 끼워 넣으며 딜라일라가 말을 마저 이었다.

“정화의 부작용이 왜, 그…….”

“피임이요.”

“으응…….”

애매하게 말을 흐리는 딜라일라 대신 에릭이 부끄러운 기색 하나 없이 정확하게 피임, 하고 발음했다. 카디건에 팔을 다 꿰어 넣은 딜라일라가 손을 흔들었다.

“왜 그렇게 되는 건지 잘 모르겠어.”

“정화의 마법 약을 만든 사람도 처음에는 몰랐다던데요.”

“그래?”

“그래서 부작용인 거예요.”

딜라일라의 옷매무새를 다듬어 주기를 포기한 듯, 에릭은 그녀의 앞에서 일어나 저벅저벅 테이블을 향해 걸어갔다. 오랜만에 그가 마법 포트에 물을 붓는 단추를 누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단추를 눌러 발열판을 꺼내고 그 위에 마법 시약을 부어 넣는 자잘한 소리들이 딜라일라의 귀를 간지럽혔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보글보글 물이 끓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가 차 통의 뚜껑을 열고 찻잎을 꺼내는 소리, 그리고 차를 우릴 티 포트와 찻잔을 꺼내는 달그락 소리도 함께 들려왔다. 딜라일라는 여전히 몸에 힘이 없어서 일어나지는 못한 채로 가만히 그 소리를 듣고 있었다.

아, 안 돼. 졸려. 부르르 고개를 떨어 잠을 털어 낸 딜라일라가 뺨을 살짝 꼬집었다.

에릭은 이내 따끈한 김이 피어오르는 찻잔 두 개를 들고 침대 가에 앉아 있는 딜라일라에게 돌아왔다. 딜라일라는 자연스럽게 그의 손에서 찻잔 하나를 받아 들었다. 상쾌한 풀잎 향기가 코끝을 간질였다. 오늘도 로즈마리인 모양이었다.

요망한 에릭 브라이어는 이제 그녀가 오기 전부터 물을 끓여 두고 기다리지 않았다. 대신 딜라일라가 유달리 틱틱대거나 우울해 보일 때면 테이블 구석에 밀어 두었던 포트를 다시 꺼내서 물을 끓였다. 마법처럼 그녀의 눈앞에 에릭이 찻잔을 가져올 때면 딜라일라는 별수 없이 웃게 됐다.

정말 요망하기 짝이 없어. 딜라일라는 그렇게 생각하며 찻잔을 후 불었다. 연한 노란색 찻물 표면에 그녀가 후 불어 낸 입김이 닿자 동그랗게 파문이 일며 하얀 김이 피어올랐다.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추측하기로는…….”

조금 전에 나누던 이야기의 연장이었다. 딜라일라는 찻잔 가득 찬 뜨거운 물을 입으로 후후 불면서 그의 목소리를 들었다.

“부정한 결합의 흔적을 지우는 것이 아닐까 하는 말이 있는데.”

“…….”

“오딜은 그걸 두고 개소리도 그런 개소리가 또 없다고 화를 내던데요.”

부정한 결합이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찻잔에 입김을 불어 식히던 모양 그대로 딱 굳었던 딜라일라는, 에릭이 덧붙인 말에 다시 길게 숨을 내쉬었다. 한숨인지 입김인지 모를 것이 다시 찻잔 위로 번졌다.

“정확히는 ‘미친 노친네들 뇌가 썩어서는 개 같은 짓거리만 저지르고 다니니 꼭 지들 같은 것만 생각만 한다’고 했죠.”

“…….”

“그렇게 말하고는 개한테 사과하기까지 했어요. 개는 귀엽기라도 하지, 귀엽지도 못한 쓰레기들을 귀여운 개님한테 비유했다고.”

“풉.”

에릭이 굳이 오딜이 했던 말을 똑같이 읊어 주기까지 하자 딜라일라는 별수 없이 킥킥 웃기 시작했다. 오딜이 테이블을 탕탕 내리치며 욕을 섞어 외치는 소리가 들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생생하게 떠올랐다. 불처럼 화를 내며 소리치는 모습을 상상하다 보니 다시 웃음이 터져서, 결국 딜라일라는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아하하! 흡.”

그러다가는 소리가 너무 큰가 싶어서 손으로 입을 합 막았다.

한 손으로 입을 막고 눈치를 보며 눈을 데구르르 굴리다가 에릭과 눈이 마주치자 다시 웃음이 꾸물꾸물 새어 나왔다. 소리 내 웃는 대신 눈이 다 접히도록 웃어 보이자 에릭 역시 미미하게 표정을 누그러뜨렸다.

아, 일부러 말해 준 거야. 부정이 어떠니 하는 말에 내가 신경 쓰지 않도록.

요망한 에릭 브라이어. 이렇게 자꾸만 다정하게 굴면, 더 좋아져 버릴지도 모르는데.

“……정화의 마법 약은 몸에 악영향을 미치는 마법적, 비마법적인 요소를 모두 제거하는 약이죠. 잠들기 전에 먹는 게 좋은 이유도 그 때문이에요. 몇 시간에 걸쳐서 천천히 몸속에 잔류하는 악영향을 천천히 지워 내거든요.”

여전히 입을 한 손으로 막은 채로 고개를 끄덕거리자 에릭이 홀짝 차를 한 모금 마셔 목을 축이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임신은 10달간 다른 생명체가 몸속에 ‘기생’하는 일이니까요. 당연히 몸에는 악영향이 가고요. 정화의 마법 약은 그 영향을 없애 버리기 위해 임신의 여지를 막아 버리는게 아닐까…….”

“으음…….”

딜라일라는 손으로 막았던 보람도 없이 바보처럼 입을 헤 벌렸다. 그녀가 듣기에는 너무 이질적인 말이었기 때문이다.

“저는 그렇게 생각했어요.”

이질적으로 들린 것은 그녀가 지금까지 임신에 대해 들은 것 중에서 가장 새로운 관점의 이야기인 탓이었다. 딜라일라는 임신을 두고 ‘기생’ 같은 단어로 설명하는 것을 처음 들었다.

딜라일라가 평생 들어온 이야기는 당연히 그의 설명과는 전혀 달랐다. 임신은 생명을 품게 되는 고귀한 일이라거나, 가정을 더 행복하게 해 주는 축복이라거나. 통상적으로 임신은 그런 식으로 두루뭉술하게 설명되는 일이었다.

그런가 하면, 또 정반대로 설명되는 일도 있었다. 부정의 증거라는 둥, 천박하기 짝이 없는 일이라는 둥 하는 말들. 두루뭉술하고 애매한 것만은 똑같았지만, 축복이니 행복이니 하는 말과는 반대로 부정적인 뉘앙스를 가득 품은 설명이 임신에 따라붙는 일도 있었다.

같은 임신을 두고도 어떤 경우는 고귀한 일로 취급하고, 어떤 경우는 천박한 일로 취급한다. 사람들은 언제나 그런 식으로 같은 현상을 다른 맥락으로 파악하고 판결을 내린다. 그런 식으로 내려진 판결은 영원불변할 것처럼 사람에게 낙인을 찍었다가도, 어느 순간 판결을 정반대로 뒤집기도 한다.

딜라일라는 그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그녀가 천재여서가 아니라, 착한 아이로 살아왔기 때문이었다.

딜라일라 에리카는 명실상부 셰 상브르 아카데미가 자랑하는 인재이다. 그녀는 뛰어난 성적까지 기록하고 있는 데다, 아름다운 외모와 성실하고 순한 성품으로 학생과 교수 모두에게 사랑받고 있다. 셰 상브르 아카데미에 있는 사람 대부분은 그녀를 인정하고 아끼며, 때로는 자랑스러워하기까지 한다. 딜라일라는 셰 상브르에 입학하기 전부터 그런 식으로 살아왔다. 누군가의 자랑으로, 누군가의 동경의 대상으로.

그러나 당장 그녀가 밤마다 에릭의 방에 제 발로 들락날락하며 그와 살을 맞대는 것을 누군가에게 들키기라도 한다면 어떨까.

약혼자도 남편도 아닌 남자의 방에 제 발로 찾아가서 몸을 섞는 여자라니. 아카데미는 물론이고 사회 전체에서 지탄받게 될 것이다. 딜라일라 에리카의 똑똑한 머리와 성실한 태도, 아름다운 외모는 순식간에 아무것도 아니게 될 것이다. 혹은 문란하고 제멋대로인 딜라일라 에리카를 조롱할 수 있는 꼬투리가 되거나.

교수한테도 몸 팔아서 성적 잘 받은 거 아냐? 제 발로 남자 방에 찾아갔다잖아. 교수한테도 한번 해 달라고 매달렸을지 알아? 잘 보이려고 열심히 하는 척한 거 아냐? 예쁜 애들은 얼굴값 한다더니. 얼굴이 아깝네. 그 외모로 사창가에라도 가면 돈을 쓸어 담겠네. 에리카의 딸이 그럴 일은 없겠지만.

그런 말들이 순식간에 자신의 뒤에 따라붙을 것을 딜라일라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일을 당해 보아서가 아니었다. 단지 그녀가 너무나도 똑똑하고, 성실하고, 예쁘고 착한 아이로 살아왔기 때문이다. 착하고 예쁜 딜라일라 에리카는 가진 것이 많았고, 그래서 그것들을 잃어버리는 순간 자신이 다른 이들보다 더한 바닥으로 처박히게 될 것을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완벽한 딜라일라 에리카’로 지내지 않아도 되는 것은 에릭의 눈앞에서가 유일했다. 심지어 그녀는 가족의 앞에서조차 착하고 사랑스러운 딸의 역할을 해 내야만 하니까.

하지만 에릭의 앞에서 그녀는 완벽하지 않아도 됐다. 에릭은 임신을 두고 ‘부정’이니 ‘축복’이니 하는 말 대신 ‘기생’이라고 설명하는 남자니까.

그는 딜라일라를 두고 어떠한 판결도 내릴 생각이 없다.

“너 같은 사람하고 약혼하게 되면 좋을 텐데.”

딜라일라는 무심코 그렇게 중얼거리고 말았다.

하필이면 에릭은 그녀의 가까이에 서서 입을 딱 다물고 소리도 없이 차를 마시고 있었다. 딜라일라는 에릭의 말에 입이 헤 벌어지고 말아서, 입을 가렸던 손도 아래로 내린 채였다. 그녀의 한 손에 들린 찻잔 안에 담긴 향 좋은 찻물이 방 안을 밝힌 등불 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의 목소리가 작지만 확실하게, 아직 후끈한 기운이 남은 방 안의 공기를 흔들며 퍼져 나가는 것을 똑똑히 들을 수밖에 없었다.

뒤늦게 얼굴이 달아올랐다. 급하게 찻잔을 들어 올려 입가를 가려 보았지만, 이미 말은 뱉어진 뒤였다. 꼴깍, 뜨거운 액체가 목 너머로 삼켜졌다. 따끈따끈한 온기가 가슴속으로 퍼져 나갔다.

‘나는 사랑하는 사람하고 결혼하고 싶어……. 그러니까, 사랑은 빼고.’

이미 서로의 가슴속에 돌처럼 단단히 굳어져 쌓인 말들이 따끈따끈하게 부풀어 오르려는 딜라일라의 마음을 짓눌렀다.

딜라일라가 바보 같은 말을 내뱉어 버린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혹시 그가 자신의 마음을 눈치채면 어떡하지. 그래서 또 그만하자고 하면, 없었던 일로 하자고 하면. 자신이 찾아와도 들여보내 주지 않으면 어떡하지.

딜라일라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보기 좋게 달아올랐던 얼굴이 조금씩 하얗게 질려 갔다.

“……그, 그러니까 내 말은.”

“알아요.”

딜라일라는 일단 자신이 내뱉고 만 혼잣말을 수습하기 위해 어물어물 입을 열었다. 하지만 에릭은 드물게 그녀의 말을 끊어 냈다. 여전히 그는 찻잔을 입가에 가져다 대고 있어서, 그의 입술이 어떤 모양을 그리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 뒤에서 흘러나온 단정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가 어떤 뜻을 품고 있는지 가늠이 가지 않았다.

“누나.”

그는 언제나 자연스럽게 딜라일라를 누나, 하고 불렀다. 그가 귓가에 대고 쇳소리가 섞인 목소리로 뜨거운 숨을 뿜으며 그렇게 부를 때면, 새삼스레 그 호칭이 좋아지기도 했다.

하지만 갑자기 그 말이 귓가에 뚝 떨어져서, 그녀를 내리누르는 것 같았다. 마치 쫓아내기라도 할 것처럼.

“……에릭.”

“오늘은 이만 가는 게 좋겠어요. 시간이 늦었으니까.”

“아니, 그게. 그러니까…….”

“누나.”

에릭이 손을 뻗었다. 그의 손은 커다랗고, 손가락은 마디마디가 불거져 있다. 퍽 예쁜 편이기는 하지만, 어느 모로 보나 딜라일라보다 훨씬 힘이 센 남자의 손이었다.

그런 그의 손이 딜라일라의 어깨를 아프지 않게 붙잡고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딜라일라의 손에 들려 있던 찻잔은 채 식기도 전에 다시 에릭의 손 위로 되돌아갔다. 그의 손은 커다래서, 찻잔 두 개를 한 손으로도 들 수 있다. 달그락 찻잔이 맞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에릭은 딜라일라의 팔을 끌어당겼다. 그녀는 어느새 에릭의 방문 앞에 서 있었다. 에릭은 그녀의 등 뒤에 서서, 양옆으로 도드라진 동그란 날개뼈 사이에 한 손을 댔다.

그리고 살짝 밀어냈다. 황량한 장미 정원에서 어서 가라며 그녀의 등을 밀어 주었듯이.

“일단 가요.”

“하지, 하지만.”

갑작스럽게 깨달은 것들이 머릿속을 가득 채워서 혼란한 딜라일라는 에릭을 돌아보며 뭔가를 말하려고 했다. 하지만 무엇을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에릭은 여전히 한 손에 찻잔 두 개의 손잡이를 걸어 들고 있었다. 달그락, 찻잔이 맞부딪치는 소리가 쨍하니 울렸다.

“나중에요.”

그의 손이 딜라일라의 뒤에서 어깨 위로 뻗어 나왔다. 그는 딜라일라에 비하면 정말로 키가 크고 팔도 길어서, 그 상태로도 그의 손은 문고리를 잡아 돌릴 수 있었다. 딜라일라의 눈앞에서 소리도 없이 방문이 열렸다.

환한 안쪽과 달리 문 너머는 선을 그은 것처럼 깜깜했다. 하지만 문이 열리고, 파랗게 어두운 복도에 환한 빛이 네모지게 드리워졌다. 딜라일라의 발길이 닿기를 바라는 것처럼.

그의 손이 다시 그녀의 등을 살짝 떠밀었다. 딜라일라는 엉겁결에 비틀거리며 방문 밖으로 발을 내디뎠다.

어둡고 싸늘한 복도에, 그녀만을 위해서 드리운 노랗고 따뜻한 빛 가운데 서서 딜라일라가 에릭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올려다본 얼굴에는 역광 탓에 그림자가 졌다.

“내일은 오지 말고요.”

“어, 어……?”

탁. 혼란으로 일그러진 딜라일라의 눈앞에서 문이 닫혔다. 거짓말처럼 복도는 깜깜해졌다. 딜라일라는 갑자기 어둠 속에 홀로 남았다.

* * *

그날 이후 에릭은 딜라일라를 피하기 시작했다.

애초에 교정에서 그녀와 마주치는 일은 없었으니, 그가 할 일은 하나뿐이었다. 기숙사 방으로 돌아가지 않는 것.

에릭은 교수에게 야간에도 실험실을 사용할 수 있도록 허가를 받으러 교수실을 찾았다. 마법 공학부의 학장은 에릭이 먼저 그를 찾아오자 작은 눈을 휘둥그레 뜨며 놀랐고, 그다음에 이어진 에릭의 말을 들은 후에는 눈알이 튀어나올 지경이었다. 그가 마법 약의 고형화에 관한 실험이 성공적으로 끝났다는 사실을 알리고, 여러 마법 약에도 같은 방식을 적용할 수 있는지 확인해 보고 싶다는 이유를 대며 야간 실험의 허가를 요구했기 때문이었다.

“마법 약의 고형화라니! 마법 약은 그 특수성 때문에 함부로 정제하기도 까다로운데, 역시 브라이어 군은 천재인 게 틀림없네. 허가는 걱정하지 말고 마음껏 실험실을 쓰도록 하게! 결과를 발표하기 전에 내게도 살짝 귀띔해 주고 말이야.”

이럴 때만 호탕하게 껄껄 웃어 대며 에릭에게 친근하게 구는 교수의 목소리는 한 귀로 흘려버렸다. 어차피 에릭이 무엇이건 성과를 내고 나면 셰 상브르 아카데미의 이름값이 더 드높아지고, 더불어 교수도 명성을 더하게 될 것이다. 에릭이 그들에게 속한 학생이기 때문에. 이것까지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다만 그 이상으로 연관될 필요는 없었다. 귀찮아질 테니까.

“브라이어 군이 내 학생이 된 것이 얼마나 기쁜지, 자네는 모를걸세. 하하! 혹시 예전에 셰 상브르를 졸업한 마법 공학부 학생인 티모시를 아는가? 아, 티모시 샐비어 말일세. 하하. 내가 워낙 그 학생을 아꼈다 보니 이름으로 부르는 게 습관이 되어서……. 자네도 알다시피 내가 학생들과 긴밀한 관계를 잘 갖지 않는데 말이야…….”

잔뜩 신이 난 교수는 그 뒤로도 자신이 지금껏 키워 온 학생들과 그 학생들이 졸업 후 이뤄 낸 성과 따위를 자랑하며 오래도록 떠들었다. 한참이나 이어지는 교수의 말을 에릭이 듣는 둥 마는 둥 하는 것은 신경도 쓰지 않는 눈치였다.

“내가 너무 오래 떠들었군. 실험에 쓸 귀한 시간을 너무 빼앗을 수도 없으니 오늘은 그만하고 가 보게. 허가는 걱정하지 말고. 자 여기…….”

교수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그렇게 말할 때까지 에릭은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교수가 책상 서랍을 뒤져 허가증을 건네줄 때가 되어서야 겨우 고개를 끄덕여 보였을 뿐이었다. 마법 공학부의 학장씩이나 되는 사람에게 보일 만한 태도는 아니었으나, 교수는 그런 것은 신경 쓰지도 않았다. 에릭은 원래도 말이 많은 편이 아니었고, 게다가 아카데미의 이름을 더할 나위 없이 높여 주는 대단한 천재였으니까.

어쨌든 그렇게 에릭은 허가증을 얻을 수 있었다. 본래 야간이면 학생의 출입이 금지되는 실험동에서, 합법적으로 밤을 지새울 수 있게 된 것이다.

허가증을 손에 대충 구겨 쥐고 실험실로 향한 에릭은 그대로 그곳에 틀어박혔다. 원래도 실험실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던 그였다. 하지만 이제 그는 강의를 듣는 시간을 제외한 거의 모든 시간을 실험실에서 보냈다.

강의가 끝나면 카페테리아에서 대충 저녁을 해치우고 실험실로 갔다. 그리고 밤이 새도록 연구에 매달린 뒤에는 실험실 구석에 놓인 낡은 가죽 소파에서 쪽잠을 잤다. 아침이 밝으면 잠에서 깼고, 강의가 시작하기 전에 잠깐 기숙사에 들렀다. 그곳에서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은 뒤에, 다시 강의를 들으러 갔다.

그런 생활을 일주일도 넘게 했다. 에릭에게 허가증을 내준 교수조차도 괜히 그의 건강을 걱정할 정도로, 그는 실험실에서 살다시피 하기 시작했다.

사실 교수에게 말한 것처럼 다양한 약물에 그가 개발한 고형화 방법이 적용되는지를 확인해야 할 필요는 없었다. 그저 논문으로 만들기가 귀찮아 미뤄 두었을 뿐, 실험해야 할 것은 예전에 다 끝냈다. 애초에 그러지 않았으면 제 손으로 만든 약을 딜라일라에게 먹일 리도 없었다.

“하아…….”

그가 꺼질 듯 긴 숨을 내쉬었다. 널찍한 실험용 테이블 위에는 실험도구 대신 빈 종이와 빽빽하게 글씨를 채운 종이가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미뤄 뒀던 논문 작업을 시작한 탓이었다. 어쨌든 허가를 받아 낸 결과물은 내놓아야 할 테니까. 하지만 이래서야 기숙사에서 연구하던 때와 별로 다를 바가 없었다.

딜라일라를 만나지 않는 것만 제외하면.

“에릭.”

그를 부르는 딜라일라의 목소리가 그의 귓가에 생생하게 들리는 것 같았다.

딜라일라의 목소리는 꽤 독특한 데가 있었다. 얼핏 듣기에는 높고 가느다란 톤이어서 나이보다 훨씬 더 어리게 들리는 데다, 아이처럼 해맑고 둥글둥글한 말투가 더해지면 영락없이 사랑스러운 아이 같은 느낌을 물씬 풍겼다.

“어, 어……?”

당황하면 꼭 자신의 머리칼과 꼭 닮은 분홍색 입술을 오므려 어리바리한 소리를 냈다. 웃을 때는 정말로 어린아이라도 된 것처럼 으하항 소리를 내 웃었다. 졸릴 때면 말투가 느리고 조곤조곤해졌고, 놀랐을 때는 그러잖아도 높은 톤의 목소리가 한 톤 더 올라가서 마치 자그만 새가 지저귀는 것처럼 들리기도 했다.

“흐읏…… 아, 흑!”

하지만 그의 손에 몸을 맡기고 흔들리며 내는 신음 소리는 전혀 달랐다.

아이 같은 느낌은 완전히 사라지고, 대신 목소리에는 달고 진득한 숨결이 가득 섞였다. 평소와는 전혀 다르게 느껴질 정도로 잔뜩 내리깔린 목소리는 때로 거칠어졌고, 쇠나 유리가 긁히는 것처럼 쨍하게 찢어지기도 했다.

가끔은 울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에릭은 멈칫거리며 그녀를 만지고 있던 손을 멈췄다. 하지만 그러면 딜라일라는 이내 멈춘 에릭의 어깨나 팔을, 또는 허리를 끌어안고 속삭였다.

“계속해 줘, 빨리…….”

그렇게 속삭이는 목소리는 정말이지, 그에게 새처럼 재잘대며 말을 거는 그녀와 같은 사람의 목소리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끈적해서.

“윽……!”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에릭의 하반신이 부풀어 오를 정도로 야했다.

깊은 밤, 실험동은 입구를 지키는 수위를 제외하면 대체로 아무도 없었다. 문틈으로 스며든 바람이 텅 빈 복도를 울리며 윙윙대는 소리를 제외하면 사방이 쥐 죽은 듯 고요했다. 온 세상에 혼자만이 남아 있는 것 같은 정적이 실험동 전체에 내려앉아 있었다.

단 한 곳, 에릭의 실험실을 제외하고.

“후, 읏…….”

굳게 잠긴 실험실 안의 공기는 싸늘했다. 기숙사와 달리 따로 부탁하지 않는 이상 난방을 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실험할 때 온도가 중요한 변수가 되는 일도 있으니까.

하지만 싸늘한 방 안에서 울리는 소리에는 후끈한 열기가 감돌았다. 거칠게 뱉어지는 뜨거운 숨과 때로 짧게 섞이는 신음이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그 사이로 천이 쓸리고 살이 부딪치는 질척한 소리, 낡은 가죽 소파가 삐걱거리는 소리가 끼어들었다.

수음하는 소리는 남에게 들리지 않을 만큼만 조용하고, 스스로에게는 지나치게 크게 느껴질 정도로만 컸다.

하지만 에릭은 자신의 것을 훑어 올리는 손을 멈출 수 없었다. 그의 바지 앞섶은 대충 풀어 헤쳐져 있었고, 속옷은 아슬아슬하게 끌어 내려져 있었다. 구겨진 셔츠 자락이 아무렇게나 흘러내렸다. 맨 끝단의 단추가 하나 풀려 있었다.

그 새를 비집고 튀어나온 페니스는 징그러울 정도로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커다란 손안에서 성기가 꿈틀거리며 맥동할 때마다 투명한 체액이 옴폭 패인 선단에 맺혔다가 이내 흘러내렸다. 에릭은 그것을 닦아 낼 여력도, 그럴 생각도 없었다.

그의 손은 이미 흘러내린 체액으로 흥건해져 있었다. 손을 훑어 올렸다가 다시 아래로 미끄러뜨릴 때마다 살이 맞부딪치며 끈적거리는 소리가 났다. 에릭이 나직하게 내뱉는, 한숨인지 신음인지 모를 소리와 함께.

“아, 흐. 젠장…….”

딜라일라의 앞에서는 단 한 번도 입 밖으로 낸 적 없던 욕설이 잇새로 새어 나왔다. 다른 접촉이라곤 없이 성기를 쥐고 위아래로 흔들어 댈 뿐인 무미건조한 행위에도 시뻘건 쾌감이 목까지 치밀어 올랐다. 숨이 턱턱 틀어 막혔다. 그럴 때마다 딜라일라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것 같았다.

“아, 에릭…….”

그렇게 그를 부르는 딜라일라의 달고, 끈적하고, 질척하게 젖은 목소리. 그녀의 신음, 한숨.

에릭은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도저히 눈을 감을 수가 없었다. 그의 눈앞에는 널려 있는 종이와 굴러다니는 잉크병, 구석으로 밀어 치워진 갖가지 실험 도구뿐이었다. 보이는 거라곤 그 꼴뿐인데도 이렇게 발정하는 자신을 억누르지 못하고 제 것을 아무렇게나 뒤흔들고 있는데.

눈을 감으면 하얗게 번쩍거리는 눈꺼풀 안쪽에 딜라일라의 모습이 새겨져서. 나풀거리는 그녀의 긴 분홍빛 머리카락과 떨리는 눈꺼풀, 그 아래에서 드러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차가운 하늘색 눈동자. 들썩이는 어깨와 흔들리는 가슴. 하얀 피부…….

그런 것들이 자꾸만 눈앞에 떠올라서, 눈을 감고 있으면 정말로 참지 못하게 되고야 말 것 같았다. 참아야 하는 것이 무엇이건 간에.

“후으…….”

질척거리는 소리가 점점 더 빨라졌다. 성기를 훑어 올리는 커다란 손이 거칠게 움직였다. 기둥뿌리부터 휘감아 올라가는 쾌락이 체액에 젖어 반들거리는 귀두에 닿을 때마다 번쩍거리며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심장이 쿵쿵거리며 빠르게 뛰고 있는데도 머릿속은 점점 더 하얗게 녹아내렸다. 피란 피는 전부 하반신으로 몰려드는 것 같았다.

“그러지 마…….”

아주 조용한 벼락처럼 귓가에 쏟아지던 딜라일라의 속삭임은 아예 그곳에 새겨져 버린 것만 같았다. 그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착각이 들 때마다, 에릭은 참을 수가 없어졌다. 몇 번이나 딜라일라의 몸을 안고, 안고, 또 안으면서 그녀의 목소리를 그 위에 덮어씌우고도.

“계속해 줘.”

전신이 부들부들 떨렸다. 페니스를 감아 쥔 손에도 바짝 힘이 들어갔다. 아래가 터져 나갈 것처럼 세게 움켜쥐어도 아프지 않았다. 아픔 대신 느껴지는 것은 그만큼 강렬한 쾌감이었다. 긴장한 배가 앞으로 휙 구부러졌다. 그가 다급하게 다른 손을 더듬어 근처에 널브러져 있던 수건을 찾았다.

“윽……!”

자신의 몸을 쥐어짜는 것처럼 웅크리고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쾌락을 토하면서, 그는 파정했다.

아슬아슬한 타이밍에 맞춰 성기 위로 덮어씌운 수건이 그가 토해 낸 정액으로 젖어들었다. 토정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가 숨을 뱉어 내며 몸을 경련할 때마다 성기 끄트머리에서 반투명한 정액이 밀려 나왔다.

그의 커다란 손을 전부 적실 정도로 흘러내렸던 쿠퍼액에 비하면 현저히 적은 양의 정액을 전부 토해 낼 때까지, 그는 그대로 소파 위에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나는 사랑하는 사람하고 결혼하고 싶어.”

그렇게 말한 것은 그녀 자신이었으면서.

“그러니까, 사랑만 빼고.”

그렇게 선을 그었으면서.

“너 같은 사람이 내 약혼자가 되면 좋을 텐데.”

딜라일라가 무심하게 그렇게 속삭이면, 에릭이 어떤 생각을 하고야 마는지도 모르면서.

황량한 장미 정원 바깥으로 쏟아지던 석양을 기억했다. 하늘 전부를 진한 금빛과 오렌지색으로 물들이던, 마법과 공학이라는 이름하에 잊힌 신의 존재마저도 무심코 믿어 버리게 할 정도로 아름답던 석양빛 가운데로 발을 내딛던 그녀의 조그만 뒷모습도. 그 빛 가운데서 홀로 푸른 그림자에 잠긴 그를 돌아보던 하얀 얼굴도. 손을 내저어 보이고 난 뒤에야 아른아른 멀어지던 분홍빛 머리칼도 전부 기억하고 있었다.

그 풍경을 눈에 담으면서 떠올렸던 생각마저도 여전히 잊지 않고 있었다. 그녀는 빛의 가운데 서서 아름다운 것들만을 온몸으로 맞으며 살아야 할 사람이 아닌가 하는, 그런 생각 말이다.

딜라일라의 환하게 웃는 얼굴을 보고 재잘대는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그 생각은 점점 더 커졌다. 딜라일라 에리카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반짝거리는 사람이었다. 외모뿐만이 아니라.

그에게 장난을 걸거나 일부러 상스러운 말을 할 때조차 뒤꽁무니에 남아 있는 아름답고 고풍스러운 어조. 가느다랗고 통통 튀는 목소리에 흐르는 잔잔한 품위. 그렇게 품위 있는 목소리로 쏟아 내는 풍부한 지식과 그로부터 짐작되는 그녀가 살아온 시간의 더미.

그 모든 것들이 에릭이 가진 것과는 너무 큰 차이가 났다.

이미 타고난 계급으로 모든 것이 결정되는 시대는 지났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수도 없이 흩뿌려지는 작위는 명예로운 훈장의 이름으로 전락했고, 왕실과 그 종친을 제외하고서는 누구나 평등하다고. 그러니 살아가는 방식은 스스로 선택하는 시대가 왔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그러나 딜라일라 에리카를 보고 있으면 에릭은 그녀가 자신과는 시작부터 다른 삶을 살아왔고 살아가게 될 거라는 사실을 어쩔 수 없이 깨닫게 되고 말았다.

살아가는 방식은 스스로 선택하는 시대가 왔다고 한들, 딜라일라는 에릭보다 한참이나 높은 곳에 있는 사람이었다. 에릭이 단승 작위나마 가진 남작의 아들이고 딜라일라는 작위가 없는 집안의 딸이지만, 실상은 반대인 것이다. 작위 하나 없이도 에리카 가문은 대대로 내무부의 권력을 잡고 있었고, 딜라일라 에리카는 그중에서도 가장 높은 권력을 거머쥐었다는 로드릭 에리카의 사랑받는 외동딸이다.

평생을 연구와 실험에 바쳐 자식마저 반쯤 방치하며 키워 온 브라이어 남작의 아들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아왔을 것이다. 아버지가 자신의 어린 아들을 시기해 미워하는 일 따위는 상상도 못 할 테지.

하지만 그건 에릭에게도 당연한 사실이었다. 이제 와서 그 사실이 끔찍해지지는 않았다. 딜라일라의 삶이 부럽다거나, 그녀가 자신과 같은 경험을 하기를 바라는 것은 더욱 아니었다.

그저 그 변함없는 일련의 사실이 에릭에게 끊임없이 속삭이는 것만 같았을 뿐이다. 네가 욕심을 내서는 안 될 사람이라고. 딜라일라 에리카는 에릭 브라이어 따위와는 반대로 평생을 아름답고 행복한 것에만 둘러싸여 살아야 하는 사람이라고. 그러니 에릭 따위는 얼른 그녀의 삶에서 사라져 주어야 할 사람이라고. 그렇게 속삭이는 것 같았을 뿐이다.

우연히 아카데미에서 마주치지 않았다면 평생 만날 수도 없었을 것이다. 딱 한 번 대화를 나누게 되는 정도도 그에게는 기적 같은 일이다. 그런데 하물며 연인, 혹은 약혼자 같은 이름을 붙인 관계가 그에게 허락될 리가 없었다.

그녀가 약혼자라는 단어를 입에 담는 순간, 에릭은 말도 안 되는 꿈을 품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 꿈을 제 손으로 짓이겨 가슴 깊은 곳으로 밀어 넣었다. 아니, 그게, 그러니까. 딜라일라가 어떻게든 이어 붙이려는 변명은 그에게는 잔인하게 틀어박힐 뿐이었다. 그래서 그는 아무것도 모르고 말을 우물거리는 딜라일라를 방 밖으로 내쫓고야 말았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여전히 회피하는 것뿐이다. 처음 그녀와 입을 맞춘 뒤로 내내 그래 왔듯이.

“젠장…….”

닳은 가죽 표면에 얼굴을 파묻고, 그가 욕설을 잘근잘근 씹었다. 그는 원래부터 욕을 못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애초에 에릭은 욕을 입에 달고 사는 오딜과 함께 자랐으니까. 다만 딜라일라의 앞에 서면 거짓말처럼 거친 말은 전부 목구멍에서 턱 걸려 흘러나오지 않을 뿐이었다.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자연히 그렇게 됐다. 선량하고 순한 그녀 자신의 성품을 그대로 뭉쳐 빚어낸 것 같은 하얗고 동그란 얼굴을 보면 거칠고 더러운 것은 뭐든 알지 못하게 해야만 할 것 같았다.

하지만 그 거칠고 더러운 것이 에릭 브라이어라는 사람 그 자체라면 그는 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젖은 수건을 아무렇게나 내던진 그가 소파 위로 쓰러지듯 몸을 기댔다. 뺨에 닿는 낡은 소파의 가죽이 뿌드득 소리를 냈다.

짐승 같은 새끼. 이제 에릭은 재수 없고 기분 나쁜 데다 다른 사람의 속이라곤 모르는 뻔뻔한 자식을 넘어서서, 욕심을 품고 만 상대를 떠올리며 수음하는 더러운 짐승 새끼까지 되고 말았다. 그것의 정체가 자괴인 줄도 모르면서 그는 자신을 향해 몇 번이나 욕을 뱉었다. 그러지 않으면 다시 제 아랫도리에 손을 밀어 넣고야 말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노력도 부질없게, 눈을 감으면 다시 딜라일라의 하얀 얼굴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생각에 빠져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면 으레 자그맣게 패는 미간. 신이 나서 조잘조잘 떠들어 댈 때마다 당겨지는 뺨의 근육.

말을 거는 사람도, 말을 걸어 줄 사람도 없이 홀로 식사를 하던 대식당에서 처음으로 그의 얼굴을 똑바로 직시해 오던, 다른 감정이라곤 들어 있지 않은 환한 웃음. 그의 앞에서 당황하거나 울음을 터뜨리는 것 따위는 상상도 하지 못할 만큼.

일주일도 넘게 만나지 못했다. 이대로 계속해서 그녀를 피해 다니다 보면 언젠가는 딜라일라도 에릭 따위는 까맣게 잊어버리고, 다시 그를 마주쳐도 그처럼 평온하게 웃어 보이고, 인사를 하고, 지나쳐 가지는 않을까.

아니면 지금 이 순간에도 그녀는 언제나와 같이 그의 방문을 두드리고 있을까.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 텅 빈 방 안에 그녀의 작은 노크 소리가 울리고 있을까.

에릭 브라이어는 이제 그 자신이 어느 쪽을 바라는지도 명확히 알 수 없었다. 태어난 이래 내내 잠잠하게 잠들어 있던 내면에는 방향도 가늠할 수 없는 바람이 불고 있었다.

낡은 가죽 소파에서는 맨살이 비벼질 때마다 뿌드득거리는 소리가 났다. 하지만 그것을 제외하면 사방은 너무나도 조용했다. 정말로 세상에 그 혼자만이 남은 것처럼. 혹은 온 세상이 그를 잊어버린 것처럼.

* * *

아무도 잠에서 깨지 못한 이른 시간에 기숙사 복도를 걷는 발소리가 저벅저벅 울렸다. 에릭이 기숙사에서 잠을 자지 않은 지도 벌써 열흘째였다. 열흘 내내 그는 해가 뜬 직후에 기숙사로 향했다. 내내 비어 있었을 방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은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았다. 몇 날 며칠을 다리도 다 뻗을 수 없는 소파에서 웅크려 자느라 굳어진 몸 여기저기가 삐걱거릴 뿐이었다.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석양처럼 붉고 노란 여명이 투명한 유리창으로 비스듬하게 비쳐 들었다. 하얀 석조 건물이 그 빛에 붉고 알록달록 물들었다. 그러나 빛이 닿지 않는 부분은 여전히 파란 새벽에 잠겨 있었다. 붉은색, 노란색, 푸른색이 그의 몸을 번갈아 덮었다가 지워졌다. 온통 조용한 사방에 에릭의 발소리만이 저벅저벅 울렸다.

이윽고 자신의 방문 앞에 도달했을 때, 그는 방문 앞 복도의 창문만이 살며시 틈을 벌리고 열려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잠깐 망설이다가 이내 자신의 방문을 열었다. 전보다는 희미해졌지만, 방문을 여는 순간 여전히 마른 종이와 잉크 냄새가 밀려 나왔다.

그 사이로 삭막한 먼지 냄새가 어렴풋이 코끝을 감돌아서, 에릭은 방 안으로 들어서기 전부터 두어 번 재채기를 했다.

사람이 머물지 않는 방 안은 사흘도 되지 않아 썰렁해졌다. 신기한 일이다. 분명 기숙사 전체에 난방이 똑같이 돌고 있는데도, 그가 방에서 보내는 시간이 짧아진 것만으로도 공기가 식고 먼지가 쌓인다. 사람의 흔적은 생각보다 빨리 지워진다.

언젠가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마법과 약초학 강의였던가. 교수가 흥미로운 이야기를 했었다. 에릭은 대부분의 강의를 흘려듣는 불량한 수업 태도의 학생이었지만, 그 말만은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 정도로 인상에 남는 이야기였다.

이 세상에서 한순간 인간이 모두 사라져 버리게 된다면, 인간이 남겨 놓은 징그러울 정도로 많은 흔적은 얼마나 빨리 세상에서 지워지게 될 것인가?

학생들은 제각기 다른 대답을 내놓았지만, 그들 중 정답을 맞힌 사람은 없었다. 그들은 모두 인간이었고, 인간이 세상에 미치는 영향을 과신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교수가 알려 준 답은 고작 일 년이었다. 일 년이면 사람의 흔적 따위는 세상에서 지워진다. 인간에게 자리를 빼앗겼던 수많은 것들이 인간이 사라진 자리를 채우고 흔적을 지워 내기 때문에.

그러니 사라진 사람의 흔적이 세상에 남아 있다면, 그것은 모두 그를 기억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라고 교수는 말했다.

에릭이 방 안으로 들어서기 전에, 방문 안쪽에 떨어져 있는 종잇조각을 주워 들었다. 엽서만 한 크기로 잘린 종이에는 꼭 딜라일라의 눈썹 빛과 같이 붉은 빛이 감도는 잉크로 꾹꾹 눌러 쓴 글씨가 쓰여 있었다.

그것이 구겨지지 않도록 조심스레 손에 쥔 에릭이 비로소 방 안으로 들어섰다. 그의 너른 등 뒤에서 문이 닫혔다.

언제나 그의 얼룩덜룩하고 마구잡이인 글씨로 가득 찬 종이가 널려 있던 응접실 테이블 위에는 이제 다른 종이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하나같이 엽서 크기로 잘린 하얗고 얇은 종이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붉은색이 도는 잉크로 쓴 글씨가 수놓아져 있었다.

에릭은 펼쳐진 종이들 곁에 손에 쥐고 있던 한 장을 내려놓았다. 이것으로 아홉 장째였다. 에릭이 딜라일라를 방에서 내쫓다시피 몰아냈던 다음 날을 제외하고, 매일 그가 돌아오는 아침마다 방문 틈에 끼어 있었다. 문을 열면 소리도 없이 방문 안쪽으로 살랑살랑 떨어져 바닥을 수놓는, 그녀가 아직은 그를 잊지 않았다는 증거.

첫날에는 없었던 이유는 아마도 에릭이 그녀를 밀어내며 ‘내일은 오지 말라’고 말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밤손님은 사칙 따위는 싹 무시하고 그의 방을 찾는 대담한 짓을 아무렇지 않게 저지르면서도, 그의 말에는 착실하게 따라 준 것이다.

에릭은 눈을 굴려 나란히 펼쳐 둔 종이 위를 수놓은 글씨들을 한 자 한 자 읽어 나갔다. 이미 다 외워 버릴 정도로 읽었던 첫 편지부터 차례대로.

[에릭 브라이어, 친애하는.]

맨 첫 편지는 이렇게 시작했다. 그녀의 조그만 몸집과 아이 같이 동그랗게 뜬 눈을 생각하면 다소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날렵하고 고풍스러운 멋이 있는 글씨가 그 모양새만큼이나 격식 있게 그에게 건네는 말의 서두를 장식했다.

그녀의 날렵한 글씨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우연히 마주쳤던 그녀의 어머니가 떠올랐다. 딜라일라와 꼭 닮은, 소녀처럼 사랑스러운 얼굴을 하고도 도저히 그로서는 함부로 범접할 수 없을 만큼 고아한 품위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뒤집어쓰고 있던 중년 여자의 모습이 편지지에 새겨진 글씨 위로 비치는 것만 같았다.

같은 아카데미 안에서 지내며, 함께 천재라며 추켜세워지고 있었던 그들이었다. 하지만 에릭과는 달리 딜라일라는 본래 그렇게 고풍스럽고 품위 있는 삶을 살아왔고, 살아야 할 사람이라는 사실이 천천히 그의 뇌수를 헤치고 스며들었다.

하지만 그런 것을 오래 떠올리고 있을 필요는 없었다. 그 아름다운 글씨와는 별개로 간결하기 짝이 없는 한 줄짜리 편지의 내용이 그에게 그것을 허락하지 않기도 했다.

[내가 뭐 잘못했어?]

다음 편지도 똑같이 한 줄이었다.

[많이 바빠?]

그다음에도.

[언제 와? 읽긴 하는 거지?]

그렇게 아홉 장째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 언제나 날렵하게 기울어져 꼬리를 빼던 글씨가 동글동글 뭉쳐 있었다. 삐끗거리며 엇나간 부분에 잉크가 번져 있기도 했고, 가운데 어딘가에는 박박 줄을 쳐서 잉크 자국 아래로 묻어 버린 단어마저 있었다. 그렇게 이전과 남다른 모양새를 한 편지는 시작마저도 남달랐다.

[에릭 나ㅏ쁜 새끼에게.]

에릭의 입가로 푸스스 한숨이 샜다. 아름답고 날렵한 글씨체는 어디론가 증발해 사라지고, 남은 자리는 어긋난 철자가 채웠다. 또 술을 마시기라도 한 모양일까.

[변태 실험 중독.]

잉크로 덧그려 지운 부분 아래에는 종이가 반쯤 벗겨지도록 박박 선을 그어 놓은 보람도 없이 상스러운 욕설이 비쳐 보였다. 생각나는 대로 써 놓고 보니 술김에라도 너무하게 느껴졌던 모양이었다. 물론 에릭으로 말할 것 같으면 또 술에 취해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종이 위에 욕설을 갈겨쓰고 있는 딜라일라의 얼굴이 떠올라서, 그것도 그냥 귀엽게 느껴질 뿐이었다.

문제는 마지막 한 줄이었다. 종이가 잉크 선을 따라 움푹 파일 정도로 꾹꾹 눌러 가며 쓰여 있는 문장은 가시를 잔뜩 부풀린 조그만 고슴도치처럼, 나름대로 그녀가 할 수 있는 가장 위협적인 내용이 삐죽삐죽하게 쓰여 있었다.

[오딜한테 다 일ㄹ러줄거야ㅏ]

아, 세상에. 에릭은 실소인지 뭔지 모를 것을 입가에 슬쩍 머금었다가, 이내 정말로 웃어 버리고 말았다.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은 뒤 강의동으로 향하는 그의 뒤로 시선이 몇 번인가 달라붙었다가 떨어져 나갔다. 적의와 아니꼬움이 담긴 시선에는 다 들릴 정도로 크거나, 혹은 내용을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조그만 수군거림이 종종 함께 섞였다.

“야간 실험 허가 받아 냈다며?”

“심화 과정 하는 선배님들한테도 잘 안 떨어지는 건데, 학장님이 한 번에 줬다더라.”

“교수님들한테 인사도 제대로 안 하면서. 필요하니까 학장님한테 쫓아가서 날름 받아 내냐.”

“또 뭐 대단한 거 하나 뽑아내겠지. 우리랑 다르게 천재시라잖냐.”

익숙한 대화였다. 에릭이 개인 실험실을 받았을 때도 마법 공학부는 뒤집어지다시피 했다. 붙임성도 없고 강의 시간에도 멀뚱히 앉아 창밖을 내다보기나 하는 에릭이 기말시험에서 수석을 차지할 때마다 슬금슬금 기어 나왔던 말들이, 에릭에게 눈에 띄는 특혜가 주어지는 순간 단번에 터져 나왔다.

에릭은 그때도 묵묵히 그들의 불만을 흘려보낼 뿐이었다. 아무래도 그 태도가 오히려 더 아니꼽게 느껴진 모양이었다. 오딜은 가끔 에릭에게 넌 하는 행동도 문제지만 얼굴도 문제라는 식의 이야기를 하곤 했는데, 어쩌면 정말로 그의 얼굴에도 뭔가 문제가 있을지도 모른다.

“난 브라이어 얼굴만 봐도 재수 없어.”

“맞아. 뻔뻔하게 생기지 않았냐?”

“뻔뻔하게 생긴 게 아니라 진짜 뻔뻔한 거겠지. 뭐든지 당연하다는 듯한 표정이잖아. 수석을 하든, 남들은 못 받는 걸 혼자 받아먹든.”

이런 말이 늘 그를 보고 수군대는 이야기에 따라붙는 것을 보면 말이다. 어느 쪽이든 에릭은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다. 요즘 들어 유난히 수군거림이 잘 들리는 것 같긴 했지만, 그게 전부였다. 게다가 에릭은 마법 공학부의 학장조차 인연을 만들어 놓으려는 천재가 아닌가? 결국 그에게 직접적으로 피해를 끼치는 대담한 짓을 할 수 있는 학생은 아무도 없었다. 그 정도면 괜찮았다. 어차피 그런 소리를 듣는 것 정도야, 익숙하니까.

그가 강의실에 들어서자 순간 정적이 내려앉았다. 에릭의 곁에는 늘 그런 정적이 맴돌았다. 다른 사람들의 입을 다물게 하고 시선을 잡아끄는 묘한 분위기와, 그를 시기해 배척하는 이들의 시선을 양옆에 끼고 있는 탓이었다. 에릭이 천천히 창가 제일 뒷자리로 걸어가 앉은 후에야 그가 몰고 온 고요가 깨졌다.

교수는 시간에 딱 맞춰 강의실로 들어왔다. 대강 강의실을 둘러보며 그에게 인사를 건네는 학생들에게 마주 고개를 끄덕여 주던 교수는 에릭과 눈이 마주치자 어색하게 시선을 돌렸다. 에릭도 그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강의가 시작되고 한참이 지나도록 에릭은 창밖에서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그런 에릭을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가 강의를 듣지 않고 딴짓을 하는 것이야말로 마법 공학부 4학년의 일상이었다.

유리가 끼워진 창문 너머에서는 틀 안에 갇힌 그림처럼 아름다운 봄볕이 쏟아지고 있었다.

딜라일라는 그처럼 아름다운 볕을 맞으며 강의동으로 걸어가는 중이었다.

“좋은 아침, 에리카.”

“안녕, 딜라일라!”

“쉴라, 디아나. 좋은 아침.”

말갛게 웃어 보이며 손을 흔들자 친구들이 그녀를 향해 마주 웃었다. 인사를 마친 그녀들은 함께 강의동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기숙사에서부터 인사를 나누고 함께 걷기 시작한 친구들이 어느새 다섯이 넘는 무리가 됐다. 딜라일라는 그 가운데 서서 조잘대는 친구들의 대화에 간간이 첨언하거나 와르르 웃음이 터질 때면 함께 웃었다.

“이제 완전히 봄인 것 같지? 좀 아쉽다. 올 겨울엔 눈이 한 번밖에 안 왔잖니.”

“졸업하고 나면 북부로 여행이라도 가. 거긴 한여름에도 그늘진 데는 눈이 쌓여 있을걸.”

“한여름에 눈이라니! 나름대로 운치 있구나.”

완연히 봄이 되어 버린 햇살 가운데로 유리 종을 울리는 듯한 청아한 웃음소리가 물결을 그렸다. 산들산들 불어오는 미풍에 나무 이파리가 연초록색 그림자를 흔들며 그녀들의 웃음에 동조하는 듯했다.

“북부 남자하고 결혼하게 되면 눈 구경은 실컷 하겠지.”

“으, 그래도 북부에서 살긴 싫어!”

“그게 어디 네 맘대로 될 일이니?”

“아버지께서 내 결혼은 마음대로 하라셨는걸.”

“글쎄, 네가 천방지축인 게 나라 전체에 소문이 나서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말씀하신 게 아닐까?”

강의실에 도착해서도 쉴 틈 없이 속닥대다가 와르르 웃음을 터뜨리곤 하던 행정 교양학부의 6학년들은 교수가 강의실에 들어온 뒤에는 엄숙하고 교양 넘치는 표정을 지으며 교수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 우아한 껍데기 아래로 여전히 톡톡 소녀 같은 웃음이 튀어 오르는 것은, 이곳이 아카데미이고 모두가 학생 신분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졸업을 앞둔 행정 교양학부의 여학생들 사이에서는 결혼이 화제가 되는 일이 잦아졌다. 남학생이라면 모를까, 여학생들은 졸업 후 제각기 혼처를 물색해 명가의 주인이 되는 것이 당연한 수순인 만큼 관심사가 그쪽으로 기울어 있는 것이다.

오래전 왕가를 제외한 귀족은 그 이름을 잃고 해체되었지만, 그 자리를 대신한 자본가들과 권력가들은 신귀족이라 불려도 손색이 없을 만큼 일련의 행보를 답습하고 있다. 정략결혼이 그 예였다. 결혼은 여전히 가문과 가문 사이의 계약이었다. 다만 그 계약으로 오고 가는 것이 군권이나 작위 따위가 아니라 재산과 인맥, 그로부터 얻을 수 있는 권위가 되었을 뿐이다.

그리고 셰 상브르의 행정 교양학부에 다니고 있는 여학생들은 대체로 그 재산과 인맥, 권위를 가진 집안의 딸들이었다. 그들 대다수가 자신의 입장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장래에 가문 간의 계약에서 그들 자신이 가장 먼저 앞장서 훌륭한 계약의 조건 중 하나가 되리라는 야망마저 품고 있기도 했다.

그런 학생들이 졸업을 앞두고 결혼에 대해 떠드는 일이 잦아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때마다 딜라일라는 어색하게 웃곤 했다. 달리 할 말도 없었고, 하고 싶은 말도 없었다. 사실은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그중 어느 하나도 친구에게 꺼내 놓을 수 없는 것들뿐이었다.

연애 감정 따위에 대해서는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렇게 살아왔고, 그렇게 살아갈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래서 딜라일라는 열흘 내내 혼자서 고민하고 있었다. 그날 에릭이 그녀를 갑자기 내쫓아 버린 뒤에 방문을 굳게 닫아 건 이유에 대해서.

사실 딜라일라는 에릭이 내일은 오지 말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바로 다음 날 에릭의 방을 찾았었다. 다만 그날은 편지고 뭐고 할 것도 없이 여전히 혼란스러운 머리를 움켜쥐고 뭐든 대화를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무작정 그의 방을 찾았다.

하지만 몇 번을 두드려도 에릭의 방문은 열리지 않았다. 안에 있는데도 문을 열어 주지 않는 것인지, 혹은 아예 방을 비워 버린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알 수 있는 것은 그가 딜라일라와 만나기를 피하고 있다는 것뿐이었다. 열리지 않는 방문이 말하듯이. 그것을 알고도 딜라일라는 몇 번 더 에릭의 방문을 두드렸다. 그 문이 열리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문 앞에서 무용하게 문을 두드리기만 하며 시간을 보내다가, 문득 사감인 대런이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도망치듯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편지는 그날 밤부터 쓰기 시작했다.

조그맣게 문을 두드려도 돌아오는 인기척도, 열리는 문 안에서 쏟아져 나오는 익숙한 향기와 온기도 없이 열 번의 밤을 보냈다.

그동안 딜라일라는 매일 편지를 썼다. 애용하는 노트를 꼭 엽서 크기만큼으로 잘라 내서, 아버지에게 편지를 보낼 때만큼이나 공들인 글씨로 딱 한 문장을 눌러 적었다. 그렇게 쓴 편지는 다음 날 밤에 에릭의 방을 찾아 문을 두드리고, 여전히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 문틈으로 끼워 넣었다.

그렇게 전날 쓴 편지를 문틈으로 밀어 넣고, 방으로 돌아오면 다음 날 전해 줄 편지를 쓰기를 여덟 번을 했다.

난데없이 억울함이 퐁퐁 샘솟은 것은 열리지 않는 방문을 두드리기를 아홉 번, 그리고 그 문틈으로 편지를 밀어 넣기를 여덟 번째 하던 밤이었다.

‘너 같은 사람이 약혼자면 좋겠다는 말이 그렇게, 기분 나쁠 말이었나?’

대답이 없는 방문 너머로 편지가 구겨지지 않도록 살며시 끼워 넣고 딜라일라는 등을 돌렸다. 이제는 그녀도 몇 번씩이나 에릭의 방문을 두드리며 기약 없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그저 똑똑똑, 세 번 두드리고 잠깐 대답을 기다렸다가 편지를 끼워 넣고 돌아갈 뿐이다. 창문을 열고 사다리에 매달리는 맨손이 유난히 시렸다. 이제는 날이 제법 따뜻해졌는데, 그래도 아직 밤은 쌀쌀했다.

‘아니면 내가 좋아하는, 아니 좋아할지도 모르는 게 그렇게 기분이 나쁜가…….’

흐린 날 하늘에서 종종 떨어지곤 하는 한 방울 빗물처럼 자그마했던 억울함은, 한 칸 한 칸 사다리를 밟아 내려가는 동안에 샘물만큼이나 둥그렇게 불어나 그녀의 마음속에 고였다. 정원을 가로지르는 동안에는 아예 넘쳐흘러 시냇물처럼 마음속에 흘렀고, 자신의 방으로 올라가는 사다리를 밟는 동안에는 기어코 쏟아지는 비에 불어난 강물처럼 세차게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그건 좀, 너무한 거 아냐……?”

조심조심 방문을 닫고 침실로 걸어 들어간 그녀가 걸쳤던 카디건을 홱 벗어 아무렇게나 내던졌다. 그 뒤에는 숫제 다이빙이라도 하는 것처럼 침대로 뛰어들었다.

“으앗, 아야야…….”

그 바람에 침대 머리에 정수리가 부딪쳐 끙끙대며 몸을 웅크리고 나니 억울함은 서러움이 되어서 그녀를 온통 적셨다. 아닌 게 아니라 실제로 그녀의 속눈썹이며 말간 눈가에 눈물이 맺혀 젖어 들기 시작했다.

“으…….”

아프게 부어오른 정수리를 두 손으로 꼭 감싸고 침대 위에서 데구르르 한 바퀴를 굴러 천장을 보고 눕자 결국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그것을 시작으로 그녀는 펑펑 눈물을 쏟기 시작했다. 처음엔 소리도 없이 뚝뚝 굴러 떨어지던 눈물에 금세 흐느낌이 섞였다.

“흐, 윽…… 흑. 만나서 얘기, 정도는. 히끅. 해 줄 수 있잖아…….”

생각만 하던 것을 말로 꺼내 놓고 보니 더 서러워졌다. 그녀는 꾸물꾸물 몸을 움직여 머리끝까지 이불을 뒤집어쓰고 난 뒤에는 엉엉 소리 내 울기 시작했다. 중간중간 에릭을 향한 원망 아닌 원망이 마구잡이로 섞여 나왔고, 그것마저 다 떨어진 다음에는 엉엉대며 한참 동안 울기만 했다.

“흑, 아…….”

이불 속에서 잔뜩 웅크린 딜라일라의 목에 걸려 있던 사슬이 베개 끄트머리에 걸려 당겨졌다. 목이 조여드는 기분에 딜라일라가 손으로 목덜미를 더듬었다. 체온에 미지근하게 데워진 목걸이가 만져지자 불현듯 또 서러워졌다. 딜라일라는 히끅히끅 흘러나오는 지친 울음소리를 내면서 목 뒤로 손을 가져다 댔다.

채우기도 어렵더니, 풀기도 어려웠다. 하지만 한참이나 끙끙거린 끝에 딜라일라는 잡아 뜯다시피 해서 겨우 목걸이를 풀어 낼 수 있었다. 그것을 손에 꼭 쥐고 이불속에 파묻혀 있자니, 에릭에게 고백도 하기 전에 거절을 당하고 며칠 동안 앓았던 날의 기억까지 되살아났다.

결국 또 울음이 터졌다. 목이 다 쉬어서 울음소리조차 삐그덕거리고, 숨은 목께에서 턱턱 걸렸다가 한 번에 토해지며 그녀의 가슴을 더 답답하게 했다. 그래도 도저히 멈출 수가 없었다. 열흘 동안 참아 온 것을 한 번에 토해 내기라도 할 것처럼, 딜라일라는 머리가 핑 돌 때까지 계속해서 울다가 그대로 잠들었다.

울다 잠든 여파는 다음 날 아침부터 그녀의 머릿속을 징징 울리는 두통으로 찾아왔다. 몸살 난 지 얼마나 됐다고 또 얼굴이 창백하다느니 하는 친구들의 걱정을 전부 억지로 웃으며 물리친 그녀는 강의가 전부 끝나자마자 기숙사 방문을 잠그고 그 안에 콕 틀어박혔다.

그리고 침실 창틀 틈새에 숨겨 두었던 술병을 끄집어냈다. 취한 채로 에릭의 방에 찾아 갔다가 펑펑 울어 댄 후로는 한 번도 마시지 않았던 덕분에 술은 커다란 병에 반절도 넘게 남아 있었다. 딜라일라는 아주 옳다구나 신이 나서 술을 꼴깍꼴깍 마셔 댔다. 안주도 없이.

그것이 ‘에릭 나ㅏ쁜 새끼에게.’로 시작해 ‘오딜한테 다 일ㄹ러줄거야ㅏ!’로 끝나는 편지를 쓰게 된 경위였다. 다 쓴 후에는 취한 채로 휘청거리며 사다리를 오르내리는 위험천만한 짓을 해 가며 그 편지를 정성스레 에릭의 방에 가져다 놓기까지 하고 왔다.

아, 딜라일라 에리카. 이 바보 멍청이, 셰 상브르에서 제일가는 주정뱅이 같으니. 실험 중독자가 아니라 알코올 중독자겠지. 에릭이 아니라 딜라일라 에리카 네가…….

아니, 아니야. 내가 뭘 잘못했어. 에릭이 나쁜 거야. 그렇게 아무 말도 없이, 이유도 안 알려 주고 쫓아내고는 이야기 한번 안 해 주잖아. 에릭이 나쁜 거야. 나는 잘못 없어!

두 가지 생각이 딜라일라의 머릿속에서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다. 머릿속이 뒤죽박죽이었다. 고민으로 꽉 찬 머릿속에는 그녀가 생각에 빠진 사이에 시작되어 이제는 거의 끝나 가고 있는 강의 따위는 들어올 틈도 없었다. 혼자서 끙끙대며 머리를 쥐어뜯던 딜라일라가 한숨을 포옥 내쉬었다. 언제나 그랬듯이 딜라일라의 생각은 한 가지 결론에 도달했다.

‘내가 싫어진 걸까, 꼴도 보기 싫을 만큼…….’

그 말을 하기 전까지만 해도 에릭은 막 차를 끓여다 주기까지 할 정도였으니, 그때까지는 괜찮았던 것일 테다. 그렇다면 역시 딜라일라가 무심코 뱉어 낸 말이 문제였다. 하지만 고작 그 정도 말이 그렇게 기분이 나빠질 이유가 된다는 게 딜라일라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에릭이 자신과 연애 감정 따위로 엮이는 것이 그렇게나 싫었던 것이라고밖에는 생각할 수가 없었다.

에릭은 분명 잘생긴 데다 똑똑하니까, 그를 좋아하는 사람도 많았을 것이다. 아니면 그 애는 역시 천재니까 이용하려는 사람이 많았을 수도 있다. 아니, 분명 그럴 것이다. 그래서 그 전까지는 사람을 피해 다녔던 것일 수도 있고. 그런데 갑자기 딜라일라가 나타나서는, 너 같은 사람이 약혼자면 좋겠다는 말을 해 버렸으니 싫어졌을 수도…….

생각에 골몰하던 딜라일라가 다시 한번 포옥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하면 할수록 우울한 가정만 떠올랐다.

“에리카, 에리카 학생?”

“어, 네!”

그녀를 부르는 교수의 목소리에 딜라일라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강의실에 앉은 학생들 전부 딜라일라를 쳐다보고 있었다. 자신이 강의를 하나도 듣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은 딜라일라가 어색하게 미소를 그렸다.

“생각이 많은 모양이에요. 혹시 몸이 안 좋거나 한 건…….”

“그런 건 아니에요! 조금 생각이 많아져서…… 죄송합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고요.”

“걱정해 주셔서 감사해요.”

예의 바르게 인사를 남기자 교수가 그녀에게서 시선을 뗐다. 딜라일라는 세 번째로 한숨을 내쉬었다. 교수님께서 기분이 상하셨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이 더 무거워졌다. 어째 요즘은 마음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아, 참. 강의 끝난 뒤에 잠깐 따라와요. 전달할 게 있으니까.”

그래서 딜라일라는 교수가 그녀에게 덧붙인 말에 다시 한숨을 쉬고 말았다. 마가렛은 종종 딜라일라가 한숨을 쉴 때마다 행복이 빠져나가는 소리라며 잔소리를 하곤 했는데, 그게 사실이라면 오늘 딜라일라는 네 번이나 행복을 흘려보내고 말았다. 이래서는 일어날 좋은 일도 전부 한숨 때문에 사라질 것만 같았다. 비록 지금 그녀에게 좋은 일이라곤 하나도 없는 것 같긴 하지만.

딜라일라는 저도 모르게 다시 한숨을 쉬지 않도록 입을 꼭 가리고, 이번에야말로 강의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저어, 죄송합니다…….”

“졸업이 가까워져 오면 생각이 많아질 수도 있죠. 이해해요.”

“그래도…….”

“정말 괜찮아요. 에리카 학생은 가끔 보면 걱정이 너무 많아서 오히려 걱정돼요. 그런 이유 때문에 따라오라고 한 것 아니니까, 사과는 여기까지.”

“네에.”

강의가 끝난 뒤 교수의 뒤로 졸졸 따라붙은 딜라일라는 교수에게 연신 사과를 하기 바빴다. 의외로 교수님이 정말로 딜라일라의 딴짓에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아서 다행이었다.

교수님께 사과를 하느라 어디를 걷고 있는 줄도 신경 쓰지 못했던 딜라일라는 뒤늦게 그들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눈치챘다. 막 강의가 끝나 학생들이 와글와글 쏟아져 나오는 강의동을 벗어난 지는 벌써 한참이나 지난 후였다. 강의동에서 비교적 가까운 교수동 역시 진작에 지나쳐 있었다.

한들한들 불어오는 봄바람이 풀어 내린 딜라일라의 머리칼을 흔들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그녀가 걷는 길목을 따라 핀 짙은 색 봄꽃이 화르르 진한 향기를 피워 올렸다. 길을 걷는 학생들이 서서히 줄어들고, 대신 띄엄띄엄 보이는 사람들은 모조리 교수가 아니면 아카데미의 행정 직원들이었다.

고급스러운 나무와 석재로 꾸며진 본관에 다다라서는 딜라일라도 교수가 그녀를 불러낸 용무를 눈치챘다.

정말로 봄이 왔구나,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셰 상브르 아카데미 학생들에게 봄은 축제의 계절이었다.

봄의 셰 상브르 교정은 그 어느 때보다도 아름다웠다. 둥글고 곧게 뻗은 길목 가장자리에 심어진 화초는 일제히 꽃망울을 터뜨렸고, 갓 내민 이파리가 진 초록빛으로 여물며 싱그러운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 위로 노릇노릇하게 익은 봄볕이 쏟아지면 마치 천국의 가장자리를 뚝 떼어다 놓은 것 같았다.

그렇게 아름다운 풍경을 학생과 교수, 그리고 셰 상브르의 직원들이 독차지하기에는 아깝지 않은가. 평상시에는 꽉 닫혀 있던 아카데미의 정문은 화초와 관목이 가장 짙은 향기를 뿜어내는 사흘간 누구에게나 개방되었다. 그것이 셰 상브르 아카데미 축제의 시작이었다.

아카데미를 개방할 뿐만 아니라 온갖 행사도 열렸다. 사흘 중 첫 하루는 제법 엄숙한 개회식이 있었고, 이튿날에는 학생들을 찾아온 가족과 친구들이 즐길 수 있도록 각 학부에서 소소한 티파티나 학술 발표 따위를 준비했다. 셋째 날에는 폐회식 후에 외부인이 거의 빠져나가고 나면 학생들만의 뒤풀이나 다름없는 가든파티가 있었다.

딜라일라가 본관까지 불려온 이유는 아마도 축제 첫날의 개회식 때문일 것이다. 개회식에는 전통적으로 졸업 학년의 학생 중 남녀 학생이 각각 한 명씩 학생 대표를 맡았다. 딜라일라는 아마도 그 학생 대표로 내정된 모양이었다.

“오, 왔구나!”

본관 삼 층, 창밖으로 교정의 널찍한 정원이 환히 내려다보이는 총학장실로 들어서자 익숙한 얼굴이 딜라일라를 맞았다. 딜라일라는 환히 웃는 그의 얼굴에 마주 웃으며 묵례를 해 보였다.

“미스 란치, 에리카 양을 데려와 주셔서 고맙소.”

“별말씀을요. 그럼 저는 먼저 가 보겠습니다.”

“그래요, 그래요. 에리카 양은 이쪽으로 앉게. 잠깐 기다려야 할 것 같아서 말이야.”

“네에.”

미스 란치라고 불린, 딜라일라를 데려온 교수가 우아하게 문밖으로 나서자 총학장실에는 딜라일라와 총학장 두 명만이 남았다. 학장은 싱글벙글 웃으며 널찍한 소파에 앉은 딜라일라에게 직접 차를 내주었다. 향이 진한 꽃차를 받아 마시며 예의상 감사함을 전한 그녀에게 아니나 다를까 학장이 미스 란치가 있었을 때와는 달리 제법 친근한 투로 이런저런 말을 꺼내 왔다.

“학교생활이 힘들지는 않은가? 물론 딜라일라 양이 훌륭한 성적을 거두고 있다는 사실은 나도 잘 알고 있네만, 혹시 내가 모르는 불편함이 있을지도 몰라서 말일세.”

“셰 상브르의 학생 대우가 얼마나 좋은지는 세간에 소문이 자자할 정도인걸요.”

“하지만 어디 안심할 수가 있어야지. 딜라일라 양이 입학하던 때 로드릭이 나를 얼마나 괴롭혔는지 아나? 만약 나 모르는 새 힘든 일이라도 겪으면, 내가 로드릭한테 아주 탈탈 털릴지도 몰라.”

“아버지께서 저를 너무 아껴 주셔서…….”

셰 상브르 아카데미의 총학장을 지내고 있는 헨리 윌로우는 로드릭의 오래된 친우였다. 로드릭과 함께 아카데미 시절을 보낸 그가 총학장이 되지 않았더라면 로드릭은 딜라일라를 영영 아카데미에 보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소중한 딸의 안위가 걱정된다는 이유로 말이다. 딜라일라에게는 다행인 일이었다.

“그래, 그래. 로드릭의 딸 사랑이야말로 세간에 소문이 자자하지. 그럼.”

“항상 감사하고 있답니다. 학장님께도요.”

“아이고, 어릴 때처럼 헨리 아저씨라고 불러 주면 좋겠는데.”

“어떻게 그러겠어요. 이제는 저도 나이가 찼는걸요.”

“그러게나 말이야. 그 귀엽던 아이가 사랑스러운 숙녀가 다 됐구만. 마가렛이 젊을 적을 쏙 빼놓은 것 같아.”

딜라일라가 웃으며 대꾸할 때마다 윌로우 학장은 와르르 말을 쏟아 냈다. 그로서는 친구의 딸이 훌쩍 자라 자신이 학장을 지내고 있는 아카데미의 졸업을 앞둔 것이 퍽 즐거운 모양이었다.

“칭찬이시죠?”

“당연하지 않나, 마가렛이 젊었던 적에…….”

다행히 윌로우가 구구절절 젊었던 시절 마가렛이 그 아름다운 외모와 사랑스러운 태도로 얼마나 인기가 높았는지를 줄줄이 쏟아 내기 전에 그들 사이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끼어들었다.

“아이고, 왔군. 들어오게.”

허락이 떨어지자 묵직한 나무 문이 조용히 열렸다. 그 사이로 나타난 사람은 딜라일라의 예상과 달리 졸업 학년의 남학생이 아니었다.

“브라이어 군.”

“……안녕하세요.”

진한 색의 나무 문을 열고 학장실로 들어온 것은 에릭이었다. 딜라일라와 달리 그는 함께 온 이 하나 없이 혼자였다.

열린 문틈으로 얼핏 바람이 새어 들어왔다. 그 탓에 흔들리는 캐러멜 빛 머리카락이 마지막으로 본 때보다 조금 더 길게 자라 있었다. 눈썹 아래까지 흘러내리는 머리칼을 대충 흐트러뜨린 아래에 자리한 그의 눈가에 전보다 조금 더 길게 그림자가 졌다. 그 탓인지 몰라도, 에릭은 훌쩍 큰 키나 널찍한 어깨에도 불구하고 꽤 수척해 보였다.

그러나 내려앉은 짙은 그림자 속에서도 그의 눈동자는 여전히 딜라일라의 시선을 사로잡기에 부족함이 없을 만큼 예쁜 금빛이었다. 무심코 문을 향해 시선을 돌렸던 딜라일라는 그 빛에 사로잡힌 것처럼 그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고작 열흘하고 하루 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무려 열흘하고도 하루나 더 지난 뒤에 보는 얼굴이기도 했다. 딜라일라는 순간 저도 모르게 웃어 버릴 뻔했다.

“그래, 자네도 이쪽으로 와 앉게. 여기, 딜라일라…… 아니지, 에리카 양 옆자리에.”

윌로우 학장의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린 딜라일라는 그때서야 그와 그녀가 이유도 모를 냉전 중이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 탓에 그녀가 아홉 번이나 대답 없는 그의 방문을 두드리고 돌아서야 했던 것도, 그리고 딜라일라가 엉엉 울다 못해 술에 취해 욕을 가득 써 놓은 편지를 그의 방문에 꽂아 놓고 온 것도.

그런데 에릭은 조금 수척해 보일 뿐, 평소와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문득 꾹꾹 묻어 두었던 생각이 퐁 튀어 올랐다.

‘……너무해.’

딜라일라가 홱 고개를 돌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학장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인 에릭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녀의 곁으로 걸어왔다.

한 발짝 한 발짝 그들의 거리가 가까워질 때마다 싸늘한 그의 체향이 가까워지는 것 같았다. 그래서 딜라일라는 좋아하지도 않는 꽃차가 담긴 찻잔을 들어 올려 향을 맡아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무심코 다시 그를 바라보고, 결국에는 저도 모르게 웃어 버리고 말 것 같았다.

좋아하면 얼굴만 봐도 화가 풀린다더니. 진짠가 봐…….

에릭이 그녀의 곁에 앉자 고급스러운 소파의 쿠션이 슬쩍 기울었다. 딜라일라가 옆으로 조금 엉덩이를 뺐다. 에릭이 앉은 쪽과 반대 방향으로. 저도 모르게 그녀는 에릭을 피하듯이 움직였다. 이유를 붙인 것은 움직이고 난 다음이었다.

‘먼저 피한 건 에릭이니까, 나도. 나도 피할 거야. 그래도 돼!’

어린애처럼 유치한 생각이었지만, 딜라일라는 꿋꿋이 그 생각을 머릿속으로 되풀이했다. 당장은 그것이 어린애 같은 생각이라는 것조차 깨닫지 못했다. 애초에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에릭이 슬쩍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딜라일라는 차를 마시는 척하며 그의 시선을 외면했다. 옆얼굴에 와 머무르는 에릭의 시전이 어쩐지 그녀를 책망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딜라일라는 괜히 차를 한 모금 더 들이켰다. 입 안에 진한 꽃향기가 맴돌았다.

“왜 불렀는지는 눈치챘겠지?”

다행히 바짝 굳어진 딜라일라는 에릭 말고도 신경을 써야 할 대상이 있었다. 딜라일라는 코앞에 찻잔을 들어 올린 채로 윌로우 학장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혹시 축제의 학생 대표를 맡게 되었나요?”

“맞네, 맞아. 역시 올해의 학생 대표를 맡아 줄 학생이 에리카 양 말고 또 누가 있겠나?”

“저, 하지만.”

에릭은 입을 꾹 다물고 있었는데 괜히 딜라일라가 입을 열었다. 윌로우 학장은 손을 내저어 보이며 호쾌하게 말을 이었다.

“브라이어 군은 비록 4학년이지만, 그의 성취는 졸업 학년을 넘어섰으니 말이야. 이미 알음알음 이름이 알려진 지는 오래이지 않나? 그러니 대표를 맡기에도 무리가 없을 거야.”

“그렇군요…….”

“게다가 최근 실험실에서 밤까지 새워 가면서 연구하고 있다는 그……. 아이쿠, 딜라일라 양. 이다음 얘기는 비밀일세. 정식으로 발표될 때까지는.”

“음, 그러면 말씀하시지 않으셔도…….”

학장은 정작 용건은 간단하기 짝이 없게 끝내 버리고는,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생각만 해도 즐거운 모양인지 에릭이 학장실에 들어오고 나서부터는 에리카 양, 하고 거리를 뒀던 호칭도 자연스럽게 딜라일라의 이름으로 바뀌었다. 딜라일라는 에릭이 자신의 부모님과 학장 사이에 친분이 있었던 사실을 알까, 하고 막연히 생각했다.

“로드릭한테도 비밀 지켜야 하네. 이거 알면 브라이어 군 졸업하기도 전에 내무부에 뽑혀 가서 아주 탈탈 털릴걸. 우리 셰 상브르의 가장 큰 자랑인데 그렇게 뺏길 순 없어.”

“정말, 헨리 아저씨!”

아주 신이 나서 말을 주절주절 늘어놓는 윌로우 학장에게 딜라일라가 부러 뾰로통한 투로 작게 외치자, 학장이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아, 오랜만에 들으니 옛날로 돌아간 것 같네.”

“아저씨는 언제 봐도 그대로이신 것 같아요…….”

여전히 뾰로통한 얼굴로 말끄러미 학장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찻잔을 들어 호로록 차를 한 모금 삼키는 딜라일라를 보면서 학장은 더 크게 웃어 댔다. 딜라일라는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마가렛이 언제나 윌로우 학장을 두고 ‘언제 봐도 철딱서니 없는 양반, 학장 자리도 그 주둥이로 조잘조잘 떠들어 대면서 남들 정신 쏙 빼놓고 가로챈 것이 확실해.’ 따위로 말했던 것을 동시에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아니, 아무튼 딜라일라 양도 들으면 놀랄걸?”

“안 들어도 되는데, 정말…….”

“내가 자랑하고 싶어서 그래. 좀 들어 줘. 총학장씩이나 돼서 학교에 천재가 난 걸 자랑하고 싶은데 아직 어디 말도 못 하고 아주 죽겠다니까!”

추억을 공유하고 나니 분위기는 더 말할 것도 없이 풀어져 버리고 말았다. 딜라일라는 어릴 적 말 많고 괴짜 같던 아버지의 친구에게 통통거리던 것처럼 편하게 말을 했고, 윌로우 학장이 도리어 그녀에게 제 말 좀 들어 달라 부탁을 하는 모양새가 됐다.

사실 딜라일라도 에릭이 뭔가를 한다는 이야기가 궁금하긴 했다. 윌로우 학장이 지나가듯 실험실에서 밤까지 새워 가면서 연구를 한다고 했으니, 어쩌면 그간 딜라일라를 피한 것이 아니라 정말로 연구가 바빠서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는 희망도 조금은 품었다. 결국 딜라일라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새침하게 약속했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면 어쩔 수 없죠. 비밀 꼭 지킬게요.”

그녀의 새침한 태도에 윌로우 학장이 다 큰 줄 알았더니 이런 건 어릴 때랑 똑같다며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웃음은 딜라일라가 뾰로통하게 놀리시면 아버지께 다 일러 드리겠다고 콕 찔러 버린 후에야 멎었다. 크흠 헛기침을 해서 분위기를 바꾼 윌로우 학장이 딜라일라에게 말을 꺼냈다.

“그래, 그래. 딜라일라 양. 마법 약은 반드시 액체 형태여야만 한다는 사실을 아나? 꼭 크리스털 병에 담아 운반해야 한다는 것도 말이야.”

“아…….”

“마법 약은 그 특성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거든. 그 때문에 운반에 걸리는 수고가 보통이 아니야. 크리스털 병은 워낙 깨지기도 쉬운데, 그걸 대량으로 운송하기도 어렵고 해서.”

“네, 들어 본 적 있어요.”

들어 본 적만 있었던 것도 아니다. 딜라일라가 제 입으로 그 사실을 열심히 떠들어 댄 적도 있었다. 그녀의 옆에 앉은 남자애의 앞에서.

“워낙 고가인 것도 그래서인데, 글쎄 브라이어 군이 마법 약을 액체가 아닌 고체 형태로 고정시키는 실험을 하고 있다지 뭔가! 듣기로는 성공의 실마리를 잡아내서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위해 야간 실험 허가까지 받아 냈다던데.”

“아.”

그것도 딜라일라는 알고 있었다. 학장이 아주 자랑스럽게 떠드는 이름인 브라이어 군에게 직접 들어서. 하지만 그 실험은 분명, 이미 성공한 지 한참 지났을 텐데…….

“성공하면 아주 대단한 발견이 될 테지. 요즘 아주 기대가 되어서 말이야.”

성공한 것을 비밀로 해 오고 있었나? 아니면 딜라일라에게 미완성의 약을 먹였던 것일까? 아니, 그럴 리가 없었다. 딜라일라는 최소한 에릭의 그런 점만은 믿었다. 그가 다른 사람에게 미완성의 약을 직접 먹일 리가 없었다. 게다가 에릭은 딜라일라가 몇 번인가 맛이 없다고 칭얼대는 것을 듣고 정말로 사탕처럼 달콤한 맛이 나게 해 주기까지 했다. 미완성인 약을 가지고 그렇게는 할 수 없었다.

그러니까 딜라일라가 생각할 수 있는 쪽은 다른 가능성뿐이었다.

그는 딜라일라를 피하고 있었던 것이 맞았다. 오래전에 이미 성공한 실험을 핑계로 기숙사에 돌아오지 않고 실험실에 틀어박혀서. 직감적인 판단이었다.

“……정말, 대단하네요.”

“그렇지? 하하하! 내 연구도 아닌데 얼른 발표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조바심까지 날 정도야. 브라이어 군, 어떤가. 실험은 잘되고 있나?”

“……예”

지금껏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에릭은 잔뜩 신이 난 윌로우 학장에게 짧게 대답했다. 딜라일라의 시선이 그의 목소리가 난 쪽을 향해서 미끄러졌다. 여전히 고개는 앞으로 돌린 채로, 눈동자만 움직여서. 늘상 보던 에릭의 무심한 옆얼굴이 조금 떨어진 곳에 있었다.

딜라일라는 그 옆얼굴에다 대고 정말 나를 일부러 피한 거냐고 묻고 싶은 마음이 왈칵 치밀어 오른 것을, 기적적으로 참아 냈다.

“내가 아주 기대가 커. 아, 재촉하는 것은 아닐세. 알지?”

“예.”

“성공하면 바로 알려 주게. 마법 공학부 학장에게 알리면 바로 이쪽으로 연락이 올 테니……. 다음부터는 아카데미 측에서 물심양면으로 돕겠네.”

“예.”

에릭은 그답게도 셰 상브르 아카데미의 총학장씩이나 되는 헨리 윌로우에게도 단답을 돌려줄 뿐 딱히 다른 말을 덧붙일 줄을 몰랐다. 딜라일라는 속에서 물컹거리는 질문을 삼키기 위해 연거푸 찻잔을 들어 올렸다. 이미 입 안에는 그녀가 좋아하지 않는 단 꽃향기가 가득 들어차 있었다.

윌로우 총학장, 아버지의 친구와 떠들며 조금이나마 즐거웠던 기분이 봄볕에 내놓은 얼음 덩어리처럼 녹아서 사라졌다. 딜라일라의 마음속에는 미적지근한 질문만이 녹아 질척거렸다.

“내 정신 좀 보게. 오늘 용무가 이게 아닌데.”

윌로우 학장이 말을 끊은 것은 딜라일라가 가득 차 있던 찻잔의 바닥을 보고야 만 후였다. 그는 딜라일라의 앞에서야 어찌 됐건, 따로 친분도 없는 학생인 에릭의 앞에서도 신이 나서 너스레를 떨어 버리고 만 것을 뒤늦게 눈치챈 듯 어흠, 어흠 위엄 있는 헛기침을 해 댔다. 딜라일라가 소리도 없이 소서 위에 찻잔을 내려놓았다.

“아무튼 올해 축제의 학생 대표는 자네들 둘이 될 걸세. 조금 귀찮아도 맡아 주게.”

“…….”

“저야말로 영광입니다.”

에릭이 말없이 뚱하니 앉아 있는 것과 달리, 딜라일라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윌로우 학장은 이미 다 잃어버린 총학장으로서의 위엄을 되찾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마주 끄덕여 주었다.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따로 전달하도록 하지. 오늘은 시간 내주어서 고맙네. 에리카 양, 브라이어 군.”

“…….”

“별말씀을요.”

딜라일라와 윌로우 학장이 몇 마디 상투적인 인사를 나눈 뒤에 그들은 자연스럽게 소파에서 일어섰다. 윌로우 학장이 손을 내저어 보이는 모양새에 웃으며 고개를 숙여 보인 딜라일라가 학장실 밖으로 나서기 위해 돌아섰다.

에릭은 이미 저벅저벅 걸어 나가서는 문을 열고 서 있었다. 딜라일라가 흡, 숨을 들이마시고 그를 향해, 아니 문밖을 향해 걸어갔다.

복도에는 아까 전보다 조금 더 기울어진 봄볕이 넓은 창으로 짜하게 쏟아지고 있었다. 그 복도로 나가는 무거운 나무 문을 붙들고 서 있던 에릭은, 딜라일라가 복도로 나온 뒤에야 손을 놓았다. 닫힌 나무문 위로 두 명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섰다. 공교롭다고 할지, 당연하다고 할지. 총학장실 앞의 복도에는 그들을 빼고는 아무도 없었다.

딜라일라의 머릿속에서 아주 짧은 시간 동안 수많은 생각이 동시에 떠올랐다가 꺼져 들었다. 하지만 무엇 하나 꺼내 놓기도 전에 에릭이 그녀에게서 등을 돌렸다. 저벅저벅, 복도를 걷는 발소리가 무정했다. 그는 그대로 그녀를 내버려 두고 복도를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이제 아는 척도 하기 싫은 거야?’

사실 딜라일라는 그때까지도 약간은 희망을 품고 있었다. 직감적으로 에릭이 정말로 그녀를 피해 실험실에 틀어박혔다는 것을 눈치챘으면서도, 그래 놓고도 미련하게. 에릭이 문을 열어 붙들고 서 있는 것을 볼 때는 그 희망이, 미련이 조금 더 커지기도 했다.

그런데 저렇게 거짓말처럼 무정하게 멀어져 가는 에릭의 등을 보고 있자니 불쑥 짜증이 났다. 지난 열흘간 내내 그녀를 우울하게도 슬프게도 했던 생각이 방향을 바꾸었다.

‘내가 좋아하는 게 그 정도로 싫은 거냐고.’

멀어지던 에릭의 뒷모습이 계단을 내려가면서 딜라일라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딜라일라는 여전히 총학장실의 앞에 서 있었다. 에릭의 뒷모습이 한 칸 한 칸 사라지는 것을 멀거니 쳐다보면서.

‘아무리 그래도, 말 한마디 정도는 해 줄 수도 있잖아.’

한 칸 한 칸, 그의 머리꼭지가 아래로 내려갈 때마다 딜라일라의 가슴속에서 울컥거리던 생각이 한 칸 한 칸 고개를 쳐들었다. 내내 눌러 참고 있었던 짜증인지 원망인지, 그 비슷한 무언가가 그녀의 목에 턱 걸려서 쏟아져 나오기 직전이었다. 딜라일라는 무심코 손을 올려 목을 더듬었다. 아무것도 걸려 있지 않은 허전한 목이 만져졌다.

에릭의 뒷모습이 아예 사라져 버린 뒤에도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던 딜라일라가 불현듯 종종걸음 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조금 빠른 걸음으로 걷는 정도였던 그녀의 발소리가 복도를 다 지나고 계단을 내려가면서 조금씩 빨라졌다. 본관을 벗어나 한적한 길에 들어섰을 때는 거의 달리다시피 했다. 가냘픈 숨이 턱까지 차올랐지만,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그녀보다 한참이나 긴 다리를 휘적휘적 움직이고 있는 에릭의 뒷모습을 다시 발견한 것은 교정에서 본관으로 빠지는 길목의 끝 즈음에 다다라서였다.

딜라일라는 발걸음의 속도를 높였다. 탁탁탁탁, 바닥을 딛는 소리가 점점 더 빨라졌다. 그녀가 달리는 소리를 분명 들었을 텐데도 걷기를 멈추지 않는 에릭이 무작정 얄미웠다.

딜라일라는 에릭에게 온몸으로 부딪치기 직전에 멈춰 서서, 그 짜증나게 무정한 뒷자락을 잡아챘다. 재킷의 뒷자락을 꽉 붙든 손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그녀가 허리를 숙인 채로 헉헉 숨을 몰아쉬고 있는 탓이었다. 어쩌면 언젠가 에릭이 했던 말대로, 그녀는 체력이 부족한 것일지도 모른다.

딜라일라가 에릭을 붙들고 서서 숨을 헉헉 몰아쉬는 동안 움찔 멈춰 섰던 에릭이 천천히 주위를 살폈다. 그러거나 말거나 제 숨 고르기에 바빴던 딜라일라는 어느 정도 진정되자마자 홱 고개를 쳐들었다. 손이 놓이자 에릭이 뒤돌아 그녀를 마주 보고 섰다.

아, 안 돼. 딜라일라가 쳐들었던 고개를 다시 푹 숙였다. 에릭과 얼굴을 마주하면 또 바보같이 웃어 버릴 것 같았다. 딜라일라는 그의 얼굴을 피해서 에릭의 가슴팍에 매달린 조끼 단추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러나 황동으로 만든 단추가 빛을 받아 반짝이는 모양이 그의 눈동자와 닮았다는 생각이 들어서, 딜라일라는 아예 눈을 꽉 감아 버렸다.

온통 쏟아지는 봄볕 아래에 선 딜라일라가, 제 딴에는 나름대로 표독스럽게 말을 씹어뱉었다.

“바보.”

무작정 내뱉고 난 뒤에야 딜라일라가 힐끔 실눈을 떴다. 하지만 실낱같이 뜬 눈꺼풀 사이로 기우는 봄볕이 아롱져서, 에릭의 얼굴을 제대로 확인할 수는 없었다. 그냥, 그냥 에릭의 매끈한 콧대와 곧은 턱, 그리고 잘생긴 눈매가 어렴풋이 그려졌을 뿐이었다. 다시 눈을 질끈 감아 버린 딜라일라는 되는 대로 말을 내던졌다.

“해삼 말미잘 멍게. 헉, 콜록.”

“누나.”

아직 다 진정되지 않았던 모양인지, 말을 하는 중에 숨이 엇나간 것인지 모양 빠지게 콜록콜록 기침이 터져 나왔다. 그 통에 그녀의 허리가 다시 푹 수그러들며 비틀 댔다. 에릭의 손이 그녀의 어깨를 붙잡아 지탱해 주려 했지만, 딜라일라는 비틀대면서 무심코 그것을 탁 밀어냈다.

“나, 콜록…… 나도 너 싫어.”

“…….”

“바, 바보 에릭.”

에릭이 뻗은 손이 무안하게 멈춰 선 것을 본 딜라일라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여전히 그녀는 에릭의 얼굴만은 똑바로 올려다볼 수가 없었다. 그럴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멍청하게 선 채로 굳어져 있는 에릭을 두고 그대로 줄행랑을 쳐 버렸다.

* * *

쏟아지는 봄볕을 맞으면서 에릭은 멍하니 생각했다.

“나, 콜록…… 나도 너 싫어.”

저는 딜라일라를 단 한 번도 싫어한 적이 없는데.

“바, 바보 에릭.”

그건, 맞는 말이지만.

강의가 끝난 뒤 교수가 일러 준 대로 총학장실로 향했다가, 그곳에서 딜라일라를 마주했을 때 그가 얼마나 바보 같이 굴었던가? 제 손으로 딜라일라를 방 밖으로 쫓아내고 열흘이 넘도록 그녀를 피해 실험실에 틀어박혀 있었던 주제에, 그는 딜라일라를 보자마자 생각했다.

그 하얀 뺨에, 늘어진 머리칼에, 달콤한 꽃향기가 가득한 목덜미에, 입술에. 어디든 좋으니 입 맞추고 싶다.

멍청하게 그런 생각에 빠져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다가, 총학장이 그에게 말을 건 뒤에야 몸을 움직였다. 한 발짝, 한 발짝. 그녀의 곁으로 다가갈 때마다 진한 꽃향기와 함께 단내가 풍겨 왔다. 언제나 딜라일라의 주위에 떠도는 그 사탕 같은 달콤한 향기에 뇌가 녹진녹진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그녀의 곁에 앉았을 때, 딜라일라가 옆으로 비켜나며 그를 피하는 것을 보고서야 그가 그녀를 열흘이 넘도록 문전박대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오늘 아침, 그를 웃게 만들었던 그 깜찍하고 어설픈 협박 편지도 함께.

[오딜한테 다 일ㄹ러줄거야ㅏ!]

우아하게 차를 마시고 있는 그녀의 옆모습을 가만 들여다보고 있자니, 정말 그 편지를 쓴 사람과 같은 사람이 맞을까 싶었다. 고상한 어투로 총학장과 스스럼없이 대화를 나누는 모습은 신기할 정도였다.

하지만 아마도 저게 본래의 딜라일라 에리카겠지.

“정말, 헨리 아저씨!”

총학장실에 들어설 때부터 어렴풋이 짐작하긴 했지만, 딜라일라는 헨리 윌로우 총학장과 본래 친분이 있는 사이인 듯했다. 그럴 법도 하다. 영향력이 있다 못해 넘치는 로드릭 에리카가 애지중지하는 외동딸을 아무 아카데미에나 보냈을 리가 없었다. 친우가 총학장을 지내고 있는 아카데미라면 그나마 마음을 놓고 그녀를 입학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다시 그녀가 멀게 느껴졌다. 그 자신이 잡을 수도 없고, 잡아서도 안 될 것처럼 멀고 아득한 존재가 되었다. 그러다가도.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면 어쩔 수 없죠. 비밀 꼭 지킬게요.”

그렇게 새침한 투로 호기심을 숨기려 할 때는 다시 그에게 익숙한 딜라일라가 되었다. 총학장씩이나 되는 사람과 아무렇지도 않게 친근한 대화를 나누는 모습은 분명 그녀가 본래 에릭과는 너무나도 거리가 먼 삶을 살아갈 사람임을 알려 주는 듯하다가, 조금 어설프면서도 사랑스럽게 말하는 모습을 보면 그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밤손님의 모습이 언뜻 고개를 내밀었다.

그쯤 되자 에릭은 종잡을 수 없는 기분에 사로잡혔다. 아니, 그의 기분이 아니라 딜라일라 에리카라는 사람을 종잡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에릭은 어수선하게 흐트러진 정신을 대충 붙잡아 가며 총학장이 말을 걸 때마다 건성으로 대답했다. 어영부영 자리가 파할 때까지도 그는 사실 조금 멍했다. 딜라일라가 그의 곁에 앉아서 꽃향기를 포르르 흘려 가며 웃고 있다는 사실이 더 그렇게 느끼게 했다.

이건, 꿈일까? 며칠 내내 제대로 쉬지 못해 쌓인 피곤함 탓에 강의 중에 졸아 버려서 꾸는 꿈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멍한 상태로 총학장실을 나와서, 그러면서도 반사적으로 딜라일라를 피해 걸음을 옮겼다. 뒷자락이 잡힌 것은 사실, 예상대로였다. 어쩌면 기대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녀가 잡아 주기를, 그를 쫓아와 주기를. 에릭에게 제법 날카롭게, 하지만 여전히 어이없을 정도로 귀여운 욕을 쏟아 낼 줄도 예상했었던가……? 그것까지는 잘 모르겠다.

헉헉, 숨을 몰아쉬며 달려온 지 얼마나 되었다고, 또 숨 가쁘게 도망치는 뒷모습을 보면서 에릭은 멍하니 햇살 한가운데 서 있었다.

기울어진 빛에 길게 늘어진 그림자가 힘겹게 달음박질쳤다. 에릭은 무심코 다시 팔을 길게 뻗었다가, 다시 내렸다. 이미 그녀의 뒷모습은 길을 꺾어 사라진 후였다.

습관적으로 실험실로 향했던 에릭은 실험대 위에 어질러 놓은 종이 더미를 대충 모아 쥐었다. 그렇게 하기 싫던 논문 작업마저도 딜라일라가 떠오를 때마다 필사적으로 생각을 돌리기 위해 매달렸더니 이제는 거의 막바지에 다다라 있었다. 손안에서 아무렇게나 겹쳐진 종잇조각들이 바스락거렸다.

그것들을 손에 쥐고, 에릭은 열흘 하고도 하루 만에 다시 기숙사 방으로 돌아갔다. 야간 실험 허가는 반납하지 않았지만, 어차피 앞으로는 쓸 일도 없을 것이다. 딜라일라를 피해 온 실험실에서도 밤만 되면 연구는커녕 선명하게 그를 쫓는 딜라일라와의 기억을 피해 도망치기 바빴다.

더 회피해 보았자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에릭은 정작 저에게서 도망치는 딜라일라의 뒷모습을 보며 깨달았다.

오랜만에 주홍빛으로 물들어 가는 저녁 하늘이 내다보이는 기숙사 방에 들어서자 고작 며칠을 떠나 있었다고 그 풍경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실험대 위를 제외하면 늘 말끔하게 정리해 두는 실험실과 달리, 바닥에 아무렇게나 쌓인 책들 위에는 잉크병이 놓여 있거나 만년필이 굴러다니거나, 차마 정리하지 못한 종잇조각이 구겨진 채 떨어져 있기도 했다.

그는 새삼스레 이런 난잡한 방에 잘도 딜라일라를 들여놓았다고 생각했다. 오랜만에 그는 대청소를 시작했다. 또 딜라일라가 찾아오면, 조금 말끔한 모습으로 맞고 싶었으니까. 다른 학생들은 기숙사에 딸린 사환들에게 청소를 맡기곤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방에서 늘 연구를 하는 탓에 그는 청소 사환을 부르지 않는 편이었다. 대신 그는 직접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먼지 냄새가 쌓인 방의 창문을 열어 환기를 하고, 어질러진 테이블 위를 치웠다. 다 쓴 잉크병과 쓸데없는 종잇조각, 고장 난 만년필 따위는 내다 버리기 위해 한데 모아 두었다. 실험실에서 쫓기듯 써 내려갔던 논문은 말끔해진 테이블 위에 얹어 두었다. 몇 번만 더 고쳐 쓰고 나면 학계에 내놓을 만한 물건이 될 것이다.

가장 많이 손이 간 것은 당연히 한도 끝도 없이 쌓여 있는 책 더미였다. 그는 그것을 잠깐 곤란하게 쳐다보다가, 책장을 한번 돌아보았다. 기숙사에 딸린 책장은 그가 가진 책들을 전부 꽂아 두기에는 너무 작았다. 이미 한계까지 책이 그득 들어찬 책장에 책을 정리해 꽂는 것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대신 그는 아무렇게나 쌓여 있는 책을 전부 책장 근처로 가져왔다.

복도 너머에서 떠들어대는 학생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녁 식사를 위해 모여 계단을 내려가는 발소리. 식사를 마치고 안뜰을 산책하는 여학생들의 웃음소리. 소리들.

이제는 푸른 보랏빛으로 물들어 가기 시작한 저녁 하늘이 열어 둔 창문으로 쏟아져 내렸다. 멀리서 들려오는 즐거운 소란을 아득하게 들으면서 그는 한 권 한 권 책을 모아 정리했다. 하늘이 완전히 어둠으로 물들고 창백한 달이 떠오를 때까지.

정리를 마치고 일어서자 오랫동안 바닥에 웅크려 있었던 탓인지 허리가 뻐근했다. 며칠 내내 쌓아 온 피곤이 한 덩어리로 뭉쳐 그를 짓누르는 것 같았다.

그러나 에릭은 침대로 가 잠드는 대신, 구석에 밀쳐 두었던 마법 포트를 꺼냈다. 내내 방을 비워 두었던 탓에 물 비슷한 것도 준비되어 있지 않아서, 그는 본관까지 내려가 식수를 받아 와야 했다.

그가 기숙사에서 왔다 갔다 하는 모습은 흔히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를 발견한 몇몇 학생들이 그의 등 뒤에서 수군거렸다. 하지만 에릭은 그런 것은 안중에도 없이 뚜벅뚜벅 물이 든 주전자를 들고 제 방으로 돌아갔다.

쏴아아……. 포트에 물을 채우면서도 그는 사실 아무 생각이 없었다. 그 모든, 저답지 않은 행동들은 모두 제대로 생각조차 하지 않고 그저 움직인 것에 불과했다.

달칵. 발열판을 꺼내 시약을 붓고 밀어 넣은 뒤 멍하니 테이블 앞에 앉아 있자니 금세 물이 끓는 소리가 들려왔다. 바글바글 세차게 끓으며 세차게 뿜어져 나온 하얀 증기가 아직 창을 닫아 놓지 않아 서늘한 방 안으로 퍼져 나갔다. 조금 서늘하고, 그러면서도 조금 안온한 봄밤이 그의 방 안에 가득 찼다.

물이 다 끓은 뒤에도 에릭은 테이블 앞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물이 김을 피워 올리지도 못할 만큼 식어 내린 후에는 다시 발열판을 꺼내 시약을 부어 넣었다. 다시 물이 끓고, 식고, 다시 물이 끓었다. 그러는 사이 밤이 깊었다.

에릭은 딜라일라를 기다리는 줄도 모르면서, 기다렸다.

그러나 그날 밤, 에릭의 방문을 두드리는 사람은 없었다.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에릭이 딜라일라를 다시 볼 수 있었던 것은 그로부터 무려 2주가 지나 셰 상브르 아카데미 축제가 하루 앞으로 다가온 날이었다.

학생 대표라고 해 보았자 개회식과 폐회식에서 가장 앞에 서서 내외의 손님들 앞에 얼굴을 내밀어 두는 것이 해야 할 일의 전부였다. 그래서 따로 불려 갈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지만, 나름대로 꽤 유명해진 축제인 만큼 학교 측에서는 제법 신경을 쓰는 듯했다.

에릭은 본관 홀로 가라는 말만 전해 듣고 혼자서 터덜터덜 본관으로 가는 길을 걸었다. 분명 실험실이 아니라 기숙사 방에 돌아와 제대로 침대에서 잠을 자고 있는데도 몸이 무거운 것은 나아지지 않았다. 좀처럼 마음 편히 잠들지 못한 탓일 것이다.

이전처럼 매달릴 연구라도 있으면 상황이 나았을지도 모르겠다. 연구에 기력을 전부 쏟아붓고 기절하듯 잠들면 되니까. 하지만 에릭은 딜라일라를 기다리는 매일 밤 안절부절못하면서도 어떻게든 논문을 완성해 버린 뒤였다. 발표는 축제의 뒤로 미루었지만, 교수 측에도 연구가 성공적으로 끝났다는 사실을 알려 뒀다.

그래서 에릭은 딱히 기력을 쏟아부을 곳도 없었고, 남아도는 기력은 밤만 되면 예민해지는 신경이 갉아먹었다. 혹시나 자신이 자그만 세 번의 노크 소리를 놓치고 말까 봐, 그는 뭔가에 제대로 몰두하지도 못했다. 그러다 새벽빛이 밝아 오면 비척비척 침대에 몸을 뉘였고, 그러고도 푹 자지 못하고 자다가 깨기를 반복했다.

그 결과, 에릭의 몸은 물먹은 솜처럼 무거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거운 몸을 질질 끌고 교수의 말대로 착실히 본관까지 찾아온 것은 순전히 딜라일라를 만나게 되리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활짝 열려 있는 본관의 홀에 들어서자 어수선하게 뛰어다니는 사람들의 시선이 그에게 모여들었다가, 다시 떨어져 나갔다. 에릭은 그저 어디로 가라는 말만 전해 들었을 뿐, 누구를 찾아 무엇을 해야 할지는 들은 바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그저 멀뚱히 그 앞에 서 있었다.

홀 안은 아직 해가 떠 있는 바깥보다도 더 환하게 밝았다. 쏟아지는 하얀 빛이 눈을 찌르는 듯해서, 에릭은 홀 바깥쪽에 펼쳐진 본관 앞 정원을 향해 섰다.

‘굳이 학생 대표로 뽑은 이유가 이것 때문이었나.’

멍하니 쏟아지는 하얀 빛을 등지고 에릭이 생각에 빠져들었다. 홀을 단장하느라 바쁜 사람들이 커다랗게 뭔가를 외치며 대화를 나눌 때마다 머리가 딩딩 울려 왔다. 오늘 방으로 돌아가면 딜라일라가 자주 그의 방을 찾을 때 미리 잔뜩 만들어 쌓아 두었던 회복 마법 약이라도 하나쯤 먹어야 할 성싶었다.

그런 에릭의 눈앞에 갑자기 포근한 분홍빛 머리통이 뿅 튀어나왔다.

행정 교양학부의 교수인지 우아하게 곧추세운 자세가 돋보이는 여성의 옆에서 딜라일라가 종종 걸어오고 있었다. 이 주 만에 보는 분홍빛에 저도 모르게 찌푸리고 있던 에릭의 미간이 펴졌다.

딜라일라가 조금씩 그에게 가까워졌다. 그만큼 그녀의 모습이 에릭의 시야 안에서 조금씩 커졌다.

늦은 오후를 휘감아 도는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리는 분홍빛 머리칼, 동그란 어깨와 가느다란 팔다리가 우아하고 발랄하게 움직인다. 그녀에게 꼭 어울리는 연한 하늘색 드레스를 입고 하얀 카디건을 걸친 모습이 귀여웠다.

마침내 홀 안을 정리하고 있는 사람들도 그들이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을 때 즈음에는 노란 봄볕을 받아 반짝이는 하얀 얼굴과 호수처럼 파란 눈동자가 선명하게 들여다보일 정도로 가까워져 있었다. 걸어오는 내내 그녀의 얼굴은 교수와 즐거운 대화라도 나누고 있는 모양인지 매양 웃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마침내 홀 앞에 멀뚱히 서 있는 에릭과 눈이 마주쳤을 때, 환한 미소는 순식간에 사그라졌다. 딜라일라의 연분홍색 입술이 뾰로통하게 튀어나왔다.

딜라일라의 변화는 눈치채지 못한 듯, 그녀와 함께 걸어온 교수가 에릭에게 먼저 인사를 건넸다. 에릭은 가까스로 딜라일라에게서 눈을 떼고 교수를 바라보았다.

“브라이어 학생, 잘 왔어요. 시간은 따로 전달해 두었지만, 식순은 제대로 알아 두는 것이 나을 것 같아 불렀어요.”

“네.”

“에리카 학생과는 지난번에 학장실에서 만난 적이 있지요?”

“……네.”

교수가 늦은 소개를 하듯 팔을 펼쳐 보였다. 에릭이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고, 딜라일라도 그에 맞춰 우아하게 묵례했다. 하지만 그들의 시선은 서로를 비껴 나갔다. 정확히는 딜라일라가 그녀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에릭의 눈을 피하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다지 티도 나지 않게 시선이 스쳐 지나갔다.

“일단 이쪽으로 오겠어요? 에리카 학생도.”

“네.”

“네에.”

교수가 앞장서 걷기 시작했다. 딜라일라는 그녀의 뒤에 바짝 따라붙어 종종 걷기 시작했고, 에릭은 그런 딜라일라의 옆에서 한 발짝 뒤로 처져서 그들을 쫓았다.

홀은 넓었다. 축제가 열리는 사흘간이 아니면 좀처럼 개방되지 않는 탓에 먼지 냄새와 정체된 공기 특유의 마른 냄새가 났다. 하지만 아마 내일은 여기저기 장식한 꽃에서 흘러나온 향기가 진동하게 될 것이다. 지금도 몇몇 사람들이 입구 근처에 꽃을 쌓아 두고 있었다.

꽃 무더기를 지날 때 딜라일라의 미간이 살짝 구겨졌다가 펴지는 것을 에릭은 놓치지 않고 보았다. 하지만 그녀가 순간 걸음을 빨리한 탓에 제대로 본 것인지 확신할 수는 없었다.

천장에 다닥다닥 붙어 켜진 새하얀 조명 탓에 그림자가 여러 방향으로 늘어졌다. 천장에 매달린 조명을 신기하게 올려다보다가 눈이 부신지 손을 들어 머리 위를 가리는 딜라일라를 보며 에릭이 짧게 숨을 뱉었다. 웃어 버린 것일지도 모르겠다.

“딜라일라 양은 이쪽에…… 눈이 부신가요?”

“앗, 아니에요. 괜찮아요.”

“마법 등이 익숙지 않겠죠. 직접 올려다보지는 말도록 해요. 보통 등불보다 빛이 강하니까.”

덤덤하게 읊어지는 교수의 말에 딜라일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에릭은 그녀가 곧 쏟아 낼 말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듣기도 전부터 등줄기가 간질거렸다.

“마법 등이라고요?”

“그래요. 처음 볼 수도 있겠군요. 개발된 지 얼마 되지 않았어요. 운 좋게도 상용화되기 전에 셰 상브르에서 가장 먼저 실험적으로 설치해 볼 수 있게 됐죠.”

“와, 대단해요. 그럼 기름도 쓸 필요가 없고, 그을음도 없겠네요.”

“자세한 사항은 저도 잘 모릅니다. 그런 건 나중에.”

에릭은 피곤에 절어 있던 것도 까맣게 잊고 또다시, 처음으로 칭찬을 들은 어린아이처럼 조금 으쓱해졌다.

“브라이어 군에게 묻는 게 나을 거예요.”

“…….”

“그가 마법 등을 개발한 사람이니까요.”

딜라일라가 입을 꼭 다물었다. 에릭은 그때까지 그녀에게 붙박여 있던 시선을 무심한 척 옆으로 돌렸다.

에릭이 개인 실험실을 받은 이유가 바로 저 마법 등을 개발한 공로 덕분이었다. 오딜이 흔히 꼰대들이라고 부르는 마법 공학계의 늙은이들은 마법 공학을 고작 불을 밝히는 데 쓰느냐고 떠들어 댔지만, 마법 등의 필요성만큼은 왕실에서조차 받아들였다. 딜라일라의 말대로 기름을 태우는 것보다 훨씬 더 실용적이고 관리하기가 쉬운 데다, 지금껏 그 어디에도 없었던 것이니만큼 뽐내기에 좋기 때문일 것이다.

셰 상브르에서 상용화 이전에 실험적으로 사용해 본 뒤에 곧장 왕성과 각 정부 부처에도 설치될 거라더니, 아카데미 측에서도 축제를 기회로 화려하게 그들의 천재를 뽐낼 예정인 듯했다. 굳이 에릭을 학생 대표로 뽑은 것도 개회식에서 마법 등의 시연을 할 예정이라면 당연한 일이었다.

“일단 지금은 내일 해야 할 일에 집중할까요?”

“네에…….”

웅얼거리는 대답이 제법 당황한 것 같았다. 에릭이 지금껏 그녀에게 자신이 어떤 것을 해냈는지 제대로 말한 적이 없으니, 몰랐던 것도 당연했다. 에릭은 교수가 지시하는 대로 딜라일라의 곁에 나란히 붙어 서면서 힐끔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동그란 머리통이 새하얀 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무심결에 그저 이런 것이 있으면 좋겠거니 하고 만들었을 뿐인데. 딜라일라가 자신이 만든 마법 등의 빛을 받으며 서 있는 것을 보자 새삼스레 개발하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일은 이 앞쪽에 학생들이 서고, 그 뒤로는 전부 손님들이 서게 될 거예요. 둘 다 축제는 겪어 보았으니 알겠죠?”

“네.”

“예.”

“식이 시작되면 일단 가장 먼저…….”

내일 그들이 해야 할 일에 대한 설명을 이어 나가는 교수의 말을 흘려들으면서 에릭은 몇 번인가 딜라일라의 머리꼭지를 힐끔거렸다. 저도 모르게 한 일이었다.

여전히 홀을 정리하고 꾸미느라 바쁜 사람들의 어수선한 소리가 왕왕 머리를 울려왔고, 그 가운데에 선 그의 몸은 무거웠다. 그런데도 쏟아지는 빛을 받아 반짝거리는 딜라일라의 분홍빛 머리칼을 보고 있자니, 다 괜찮은 것 같았다. 그게 뭐든.

“내일은 식이 시작되기 삼십 분 전까지 총학장실 앞으로 오면 돼요. 제복은 준비해 뒀나요?”

“네.”

“좋아요. 그럼 더 설명할 것도 없겠네요. 내일 잘 부탁해요.”

“친절하게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통 튀어 오르는 딜라일라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에릭은 교수의 설명이 끝났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가 꾸벅 고개를 숙여 보이자 여자 교수가 우아하게 손을 흔들고는 먼저 자리를 떴다.

에릭은 멍청하게 그 자리에 서 있었고, 딜라일라는 그의 곁에 서서 교수의 뒤에다 대고 내일 뵐게요! 하고 조그맣게 외쳤다. 그 뒤로는, 시끌벅적한 사환들의 목소리와 발소리뿐이었다.

에릭은 주위에 사람이 가득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누…….”

“말 걸지 마, 바보 에릭.”

하지만 그의 목소리를 매몰차게 끊어 낸 딜라일라의 목소리에 에릭은 다시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가 머뭇거리는 사이 딜라일라가 조그맣게 덧붙였다.

“제복 입는 거, 까먹지 말고.”

그러고는 분홍빛 머리카락이 일순간 공중에 떠오를 정도로 재빠르게 그녀가 몸을 홱 돌렸다. 새하얀 빛 아래로 수십 개나 되는 그림자를 사방으로 흩뜨리며 도도도도 빠르게 걸어가는 딜라일라의 뒷모습은, 마치 그에게서 도망치는 것 같았다. 거기, 조금 더 당겨! 누군가가 커다랗게 외치는 통에 머리가 딩 울려왔다.

“……아무것도 모르는 게 누군데.”

그의 중얼거림을 귀 담아 듣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딜라일라의 뒤를 쫓아 달리기 시작했다.

* * *

지난 이 주간, 딜라일라는 매일 밤마다 에릭을 떠올리면서 이랬다저랬다 몸부림을 쳤다.

분명 이번만큼은 에릭이 먼저 잘못한 게 맞았다. 이유도 말해 주지 않고 딜라일라를 쫓아낸 데다 실험을 한다는 핑계로 아예 기숙사를 비워 버린 것은 솔직히 너무한 일이니까. 분명 딜라일라가 그가 없는 새 기숙사를 찾을 것을 알면서도 그랬으니 진짜, 정말로 이번만큼은 에릭이 나빴다.

그러면서도 평소대로 바쁜 낮을 보내고 밤이 찾아오면 막연히 에릭이 보고 싶었다. 그 무뚝뚝한 단답이라도 듣고 싶고, 표정이 없는 얼굴이라도 바라보고 싶었다. 그래서 결국은 또 찾아갈까 싶다가도, 또 에릭의 방이 텅 비어 있으면, 그래서 다시 헛물을 켜면 어쩌나 무섭기도 하고.

게다가 분명 잘못한 건 에릭인데, 왜 딜라일라가 먼저 찾아가야 하느냔 말이다!

돌이켜 보면 원래도 항상 먼저 에릭을 찾는 것은 그녀 자신이었다. 처음 그의 방을 찾던 날도, 다음에도, 그다음에도. 심지어는 아카데미가 아닌 그 해안가 마을에서조차 딜라일라가 먼저 그를 찾아가지 않았던가?

그 사실을 깨닫자 막연히 서운하고 화가 나고, 또 억울했다. 딜라일라가 혼자 그를 좋아하고 있으니까, 어쩌면 당연한 일인데도 그랬다. 그래도 본관 앞 정원 길목에서 딜라일라는 명백하게 그에게 화를 냈는데, 그 정도는 풀어 주러 와도 되잖아. 그런 생각이 자꾸만 그녀의 이성을 가로막고 괜히 혼자서 발만 동동 구르게 만들었다.

에릭이 먼저 그녀를 찾아와 주면, 그래서 딜라일라에게 누나라고 부르며 말을 걸어 주면. 많이 화가 났느냐고, 정말로 바빠서 그랬다고 어쭙잖은 변명이라도 해 준다면. 그러기만 하면 다 괜찮을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도록 에릭은 그녀를 찾지도 않았고, 소식 한번 전해 오는 일이 없었다. 소식 없는 날이 하루씩 늘어날수록, 막연한 서운함도 함께 쌓였다. 쌓여 가는 서운함은 뭉치고 뭉치다가 끝내는 오기에 가깝게 변해 버렸다.

‘이러다 영영 다시는 못 만나게 되면 어떡하지?’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다만 금세 ‘다시 만나서 또 연락하지 말자고 하면 어떡해!’ 또는 ‘그렇다고 꼭 내가 찾아가서 사과를 받아야 해? 옆구리 찔러 절 받는 것도 아니고!’ 같은 생각이 와글와글 몰려들었을 뿐이다. 그러고 나면 혼자 방 안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생각만 했을 뿐인데도 몇 시간 동안 공부를 하고 난 것처럼 진이 쏙 빠져 기절하듯 잠들곤 했다.

그렇게 이 주를 보내고, 축제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어쩔 수 없이 에릭과 딜라일라가 마주해야만 하는 날이 온 것이다. 결국 그때까지 에릭에게서는 연락 비슷한 것도 없었다. 지난 이 주간 그녀가 밤마다 혹여나 그에게서 뭐 하나라도 먼저 전해 오는 것이 없을까 생각하며 동동거렸던 것을 생각하면 맥 빠지는 일이었다.

미스 란치를 따라 본관으로 향하면서 딜라일라는 부러 신나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떠들며 웃었다. 에릭에게 그가 없어도 자신은 잘 지내고 있다고 보여 주고 싶었다. 딜라일라는 최근 들어 유치한 짓이라는 걸 알아도 그렇게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때가 있다는 걸 깨닫고 있었다.

그러나 일부러 더 환하게 웃는 얼굴로 마주친 에릭은 수척해 보였다. 눈 밑에는 그늘이 졌고, 보기 좋던 뺨이 조금 말라 있었다. 피부도 버석하고, 눈꺼풀도 무거워 보이고…….

고작 그 짧은 순간 그의 얼굴을 마주 보았을 뿐인데, 너무 많은 것들이 눈에 띄었다. 저도 모르게 굳어지는 얼굴을 숨기기 위해 딜라일라는 필사적으로 에릭을 외면했다.

저도 모르게 터뜨린 감탄사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마법 등의 개발자가 에릭이라니. 너무 대단한 일이고, 감탄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또 자존심이 상했다. 딜라일라는 에릭이 지금까지 무엇을, 어떻게, 얼마나 대단한 일을 잔뜩 했는지조차 모르고 있었던 것 아닌가! 그 정도로 대단한 일이라면 에릭이 딜라일라에게 한 번쯤 말해 줬어도 될 일인데.

바보, 바보 에릭. 에릭 브라이어는 진짜 정말 바보야. 오딜이 하는 말 중에 틀린 게 하나도 없어. 정말!

아, 도저히 감당이 안 됐다. 생각이 자꾸만 비비 꼬아졌다. 그런 중에도 에릭은 태연해 보여서 더 짜증이 났다.

“제복 입는 거, 까먹지 말고.”

그런 와중에 가장 짜증이 나는 것은, 제복을 제대로 챙겨 입은 에릭의 모습이 조금, 아주 조금이지만, 꼭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딜라일라 자신이었다. 딜라일라는 혹시 자신의 그런 생각이 티가 날까 봐 그를 뒤에 내버려 두고 쏙 내빼 버렸다.

어쩐지 에릭이 그녀를 붙잡으려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아마 착각일 것이다. 에릭은 열흘하고도 하루가 넘도록 딜라일라를 무시하고, 그다음 이 주 동안은 그녀가 화를 낸 일도 없었던 것처럼 연락 한번 없었던 매정하고 나쁜 애니까.

“딜라일라!”

“어, 어……?”

다람쥐처럼 도도도 걸음을 놀려 도망치듯 기숙사로 향하는 딜라일라에게 익숙한 목소리가 말을 걸었다. 셰 상브르에 입학한 후 내내 친하게 지내고 있는 친구 디아나였다.

“축제에서 학생 대표 맡게 됐다며? 축하해.”

“아, 응! 고마워.”

어영부영 대답하는 딜라일라에게 다가오는 디아나는 활짝 웃는 얼굴이었다. 불현듯 딜라일라는 자신의 표정이 울상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의식적으로 뺨에 힘을 주어 입꼬리를 끌어 올려 그럭저럭 웃는 얼굴을 만들어 보이자 디아나가 까르르 웃으며 그럼 그렇지, 하며 입을 열었다.

“딜라일라, 수줍음을 타는 건 아는데, 혹시 그래서 학생 대표도 하기 싫은 거야?”

“그, 그런 거 아냐. 맡게 돼서 영광인걸.”

강의가 모두 끝난 시간이었으니, 당연히 디아나도 기숙사로 가는 길이었다. 두 여학생은 나란히 기숙사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걷기보다는 뛰는 것에 가까웠던 딜라일라의 걸음이 디아나의 속도에 맞추어 늦춰졌다. 천천히 걷기 시작하니 뒤늦게 숨이 차는 것 같아서, 딜라일라는 디아나가 조잘조잘 떠드는 것에 적당히 대답을 하며 천천히 숨을 들이쉬었다.

“우리 학년에서 딜라일라가 아니면 누가 학생 대표를 하겠어? 나는 딜라일라가 대표가 되어서 기쁜걸.”

“정말, 고마워.”

“그러니까 내일은 예쁘게 웃어야 돼. 부끄러워도 좀 참아 봐. 셰 상브르의 자랑 딜라일라 에리카 양.”

“그렇게 부르지 마…….”

아닌 척 딜라일라를 놀리는 디아나의 말에 고개를 푹 숙이며 딜라일라가 발밑에 차이는 조그만 돌멩이를 톡 걷어찼다. 잘 정리된 교정에 어울리지 않게 굴러 나와 있던 돌멩이가 딜라일라에게 차여 데굴데굴 굴러가서는 화단에 톡 부딪히며 멈춰 섰다.

셰 상브르의 자랑이면 뭘 하나. 에릭은 딜라일라에게는 관심도 없는 것 같은데.

분명 남들처럼 딜라일라를 판단하고 선을 긋지 않는 에릭이 좋았는데, 왜일까. 남들처럼 그녀를 좋아해 주지 않는 에릭이 얄미웠다. 분명 모순된 생각인 것을 알지만, 그녀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를 좋아하고 나서부터는 생각이라는 것이 제대로 굴러가는 날이 없었다. 스스로를 종잡을 수 없는 나날이 늘어 간다.

사람을 좋아한다는 건 정말 어렵다. 마음의 온도도, 깊이도, 무엇도 가늠할 수 없는 순간이 자꾸만 많아진다. 이성적이지 않은 것들과 말도 안 되는 감정이 마구잡이로 몰아쳐서 자신이 대체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도 제대로 확신할 수가 없다. 혼란했다.

“그리고 우리한테는 마지막 축제잖아. 즐겁게 보내야지.”

기숙사에 다 도착해 갈 때 즈음에야 딜라일라를 놀리기를 그만둔 디아나가 어딘지 아련한 목소리로 속닥거렸다. 딜라일라는 습관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빙그레 웃었다가 마음 한구석이 싸늘해져 오는 것을 느끼고 덜컥 멈춰 섰다.

“왜 그래?”

“그러네, 진짜.”

“응?”

“진짜 마지막이네…….”

얘도 참, 갑자기 너무 슬퍼졌어? 다시 딜라일라를 놀리듯 말을 꺼내면서도 역시 조금쯤 슬픈 기색을 내비치는 디아나의 목소리를 들으며 딜라일라가 멍하니 생각했다.

시간은 빠르고, 그녀에게 주어진 순간들은 너무나도 짧다.

“축제 끝나고 나면…….”

“학기말 시험 준비하고, 그러고 나면 졸업하겠지?”

크흠, 괜스레 헛기침을 하며 목을 가다듬는 디아나의 목소리가 어쩐지 멀게 들렸다. 딜라일라는 멈췄던 걸음을 천천히 떼어 한 발짝 내디뎠다.

“졸업하고 나면…….”

“결혼하겠지, 뭐. 우리 아버지는 벌써 내 혼처 찾느라 바쁘시다던걸.”

“으응…….”

디아나가 딜라일라의 보폭에 속도를 맞춰 나란히 걸음을 옮겼다. 자연스럽게 이야기가 다시 결혼을 향해 흘러갔다. 딜라일라는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에 잠겼다.

“아무튼, 내 말은! 마지막 축제니까 딜라일라 너도 너무 부끄러워하지 말고…….”

딜라일라의 기분이 축 처진 것을 느낀 디아나가 일부러 즐거운 투로 종알종알 속삭이기 시작했다. 딜라일라는 그런 디아나에게 맞춰 어영부영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기울어지는 햇빛을 받아 노랗게 물든 풍경이 그녀의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시간이 조금 더 지나면 저녁놀이 지며 주홍빛이 번졌다가, 파란 어둠에 잠길 풍경이었다.

새삼스레 그 풍경이 너무나 익숙하고, 동시에 낯설었다. 딜라일라는 몇 번이나 눈을 깜빡이며 기숙사의 전경을 눈 안에 담았다.

남자 기숙사와 여자 기숙사, 새하얀 석벽을 두른 두 개의 건물 위로 샛노란 볕이 흘러내렸다. 그 사이를 잇듯이 전면에 위풍당당하게 세워진 본관과 양쪽 기숙사에서 본관으로 바로 통하는, 안뜰로 열린 1층 외부 복도까지도 그 노오란 빛에 휩싸여 있었다. 본관 너머로 얼핏 보이는 안뜰에서 연초록빛 이파리를 매단 나무들이 보였다. 성급한 몇몇 꽃나무들은 벌써 봉오리를 틔웠다.

정말로 봄이었고, 정말로 축제였다. 딜라일라가 셰 상브르에서 맞을 수 있는 마지막 축제.

여전히 딜라일라의 속은 시끄러웠다. 감정은 혼란하게 뒤엉켜서 그녀의 생각을 마구잡이로 흩어 놓았다. 그러는 사이에 정해진 끝이 선명하게 찾아오고 있었다. 눈앞에 닥쳐오는 감정에 매몰되어 잊고 있었던, 일부러라도 잊으려 했던 사실이 갑작스럽게 그녀의 눈앞에 온전한 형태로 모습을 드러냈다.

에릭과 함께 보낼 수 있는 시간은 정말로 얼마 남지 않았다.

딜라일라는 문득 어떤 예감에 뒤를 돌아보았다. 푸른 잎을 빽빽이 늘어뜨린 포플러 나무 아래 그늘에 에릭이 서 있었다. 푸른 이파리 아래서 그의 금빛 눈동자가 태양처럼 빛났다.

“딜라일라? 왜 그래?”

“어, 아니. 그냥…….”

디아나의 목소리에 딜라일라가 홱 고개를 돌렸다. 아무렇지 않은 척 기숙사를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지만, 어쩐지 뒤통수가 따끔거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딜라일라는 다시 한번 뒤를 돌아보았다.

여전히 에릭은 그곳에 서 있었다.

“……디아나.”

“응?”

“먼저 돌아갈래? 나 잠깐, 중요한 일을 잊고 있었던 것 같아서.”

딜라일라는 조금 억지에 가까운 말로 친구를 먼저 기숙사로 들여보냈다. 그러는 중에도 그녀가 간간이 뒤를 돌아보고 있었기 때문인지, 디아나는 딜라일라가 정말로 뭔가를 잊었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딜라일라가 돌아보는 쪽을 향해서 디아나가 눈을 돌렸을 때는, 거짓말처럼 에릭의 모습이 사라져 있었던 덕분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분명 그는 아직 거기 있었다. 빽빽하게 모여 선 나무줄기 뒤로 햇살에 녹아내리는 캐러멜처럼 엷은 갈색이 흘긋 비치고 있는 것을 딜라일라는 놓치지 않았다.

딜라일라는 디아나가 기숙사 건물 안쪽으로 사라지는 것을 확인한 뒤에, 그가 숨은 나무 그늘로 달려들었다.

“에릭 브라이어!”

그녀의 조그만 외침은 산들바람에 무겁게 휩쓸리는 포플러 잎사귀 사이에 묻혔다. 교정으로부터 기숙사를 분리하는 그 자그만 숲은 온통 반질반질한 잎사귀가 서로 몸을 비비며 내는 소리로 가득했다. 저 너머 어딘가에서 기숙사로 돌아가는 학생들이 쾌활하게 떠들어 대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나무줄기 사이로 조금 더 비집고 들어가자 금세 아득하게 멀어졌다.

그는 그곳에 있었다.

“에릭.”

그늘 사이로 조각난 햇살이 점점이 떨어져 내렸다. 딜라일라는 햇살의 조각이 점점이 흔들리는 에릭의 뒷모습에 말을 걸었다.

“……날 쫓아온 거야?”

“…….”

“에릭 브라이어, 대답해.”

“……네.”

“왜?”

쏴아아……. 봄바람이 늘어뜨린 딜라일라의 긴 머리칼 대신 나뭇잎을 흔들어 댔다. 금분처럼 에릭의 머리에, 어깨 위에 흩뿌려진 햇살이 흔들렸다. 딜라일라는 그것을 잡아야 할 것만 같은 기분에 휩싸였다.

“왜?”

“누나.”

“왜 그랬어? 왜, 왜 날 무시하고, 피하고……. 그래 놓고는 쫓아오고.”

에릭은 여전히 그녀를 돌아보지 않고 있었다. 딜라일라의 눈에 들어오는 것은 에릭의 뒷모습뿐이었다. 훤칠하게 큰 키, 흔들리는 머리카락. 널찍한 어깨와 그에 비하면 호리호리해 보이는 허리. 전부 딜라일라가 알고 있는 것들이었다. 몇 번이나 보아 온 그의 뒷모습이었다.

“왜……?”

여전히 그의 뒷모습을 보면 조바심이 났다. 에릭이 그녀를 등지고 있는 것은 싫다. 무시하는 것도, 피하는 것도 싫다. 이대로는 뭐든 싫었다. 그가 딜라일라를 싫어한다고 해도, 최소한 이렇게는 아니었다.

이대로는 싫었다. 그들에게는 시간이 없으니까.

“누나.”

“네가 날 싫어해도 괜찮아.”

“그런…….”

“하지만 이렇게 이유도 모르고 무시당하는 건 싫어!”

딜라일라의 손이 마침내 에릭의 뒷덜미를 잡아챘다. 그녀는 단숨에 그의 허리를 꽉 껴안았다. 에릭의 몸이 바짝 긴장하는 것이 느껴졌다. 어쩌면 이대로 딜라일라의 조그만 몸 따위는 단번에 떨쳐 내고 다시 그녀를 피해 도망쳐 버릴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감이 들었다. 딜라일라는 팔에 힘을 꽉 주었다. 몇 번이나 껴안았던 단단한 허리를 양팔로 조이고, 풀리지 않도록 그의 배 위에서 깍지를 껴 붙잡았다.

“피하지 마. 도망치지 마.”

딜라일라가 그의 등에 이마를 기댔다. 몇 겹의 천 너머로 전해져 오는 체온은 따스한 봄 공기보다도 뜨거웠다.

“말해 줘, 왜 화가 났는지.”

“……화난 거 아니에요.”

“거짓말.”

말을 할 때마다 껴안은 몸이 움직이는 모양이 팔 안으로 와 닿았다. 불어오는 바람이 새어 들 틈도 없이 상체가 꽉 맞닿았다. 딜라일라는 그의 등에 입술을 묻었다. 웅얼거리는 목소리는 숨결과 함께 에릭에게 곧장 스며들었다.

“내가 뭘 잘못했어? 그래서 싫어졌어? 이제는 꼴도 보기 싫을 만큼? 그래서 무시했던 거야?”

“누나.”

에릭은 언제나 딜라일라의 팔이 빈틈없이 그의 몸을 껴안아 올 때면 숨이 턱 막혀 왔다. 그녀의 부드러운 몸이 그의 숨을 막아 버릴 정도로 강하게 붙잡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뿌리치려면 얼마든지 뿌리칠 수 있는 손도 팔도, 딜라일라 에리카의 것이기 때문에 뿌리칠 수 없었다.

그래서 도망쳤다. 뿌리칠 수 없을 것을 피해서, 숨을 쉬고 싶어서. 하지만 도망친 곳에서는 정작 숨을 틀어막는 그녀의 감촉이 그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나 딜라일라와 다시 닿는 순간에는 또 뭔가가, 견딜 수 없을 만큼 그리워졌다.

가져 본 적도 없는 애정이 그리울 수도 있을까? 태어나 단 한 번도 햇살을 맞아 본 적 없는 인간이 태양을 그리워 할 수도 있을까?

“다정하게 대해 주고, 모른 척하고, 그래 놓고 다시 쫓아오고.”

감당할 수 없는 것이 늘어 간다. 무너진 이성의 틈바구니에서 새어 나오는 감정은 혼란하기 짝이 없다. 딜라일라를 어둠 속으로 내쫓던 그 순간 이미 마음을 틀어막았던 마개는 부서져 있었다. 울컥 치밀어 오르던 것을 도저히 견디지 못한 순간순간이 쌓이고 쌓인다.

“왜 그래, 에릭. 왜……?”

그리고 또 한 번, 에릭은 더는 참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파르르 떨리는 딜라일라의 숨결이 그의 등에, 몸에 스며들었다.

그건 마치 허락처럼 느껴졌다. 이제는 정말로, 어쩔 수가 없었다.

“일단, 손 좀…….”

“싫어.”

딜라일라는 여전히 뒤에서부터 그를 꽉 껴안은 팔을 풀지 않았다. 에릭은 자신의 배 위에서 엮인 딜라일라의 손가락을 내려다보았다.

“싫어. 안 놔줄 거야. 전부, 전부 말할 때까지 붙잡고 있을 거야.”

말랑한 손끝이 창백하게 질릴 정도로 바짝 힘주어 맞잡은 손은 간헐적으로 덜덜 떨렸다. 그러면서도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몇 번이나, 몇 번이나 다시 손가락을 얽었다. 나뭇잎 사이로 떨어져 내린 빛의 조각이 그녀의 손등 위에서 노랗게 녹아내렸다.

“누나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딜라일라에게 굳이 묻는 것은, 하나쯤은 희망을 가지고 싶어서였다. 도망치고, 피하고, 그늘 아래 숨어도 결국에는 그의 뒤를 쫓아와 찾아내고 마는 딜라일라로부터 작은 희망이라도 얻고 싶어서.

“누나는 왜 물어보는데요.”

흡, 숨을 집어삼키는 소리가 바람에 섞여 흘러들어 왔다. 에릭은 그녀의 손등 위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먼저 붙잡은 것은 그녀이면서, 붙잡히는 것에는 움츠러드는 딜라일라의 손가락을 에릭의 손끝이 천천히 쓸어 냈다. 그의 손 위에도 금빛 흔적이 내려앉았다. 에릭은 그녀의 손을 감싸 쥐었다. 저들끼리 꼭 맞붙어 얽힌 손가락을 하나하나 풀어내고, 자신의 손에 얽었다.

휙 돌아서자 무심코 그를 올려다보는 호수 빛 눈동자에 금빛이 반짝거렸다. 에릭의 눈 안에도 아마, 분홍빛 그림자가 흔들리고 있을 것이다.

봄꽃 같은.

딜라일라는 막상 에릭이 그녀를 마주 보자 파드득 놀라 고개를 숙였다. 에릭은 목적도 모르고 아래로 향한 딜라일라의 얼굴을 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딜라일라의 얼굴을 붙잡아 올릴 수도 없으니, 그가 딜라일라의 시선에 맞추어야 했다. 이번에는 반쯤 무릎을 꿇고 몸을 낮춘 에릭이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짙은 나무 그늘 아래에서도 구불구불 늘어져 환하게만 보이는 분홍색 머리카락과 그 아래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흔들리는 눈동자. 뽀얀 피부와 발갛게 달아오른 뺨. 오물오물 움직이면서도 차마 뱉어 낼 말을 찾지 못해 다시 닫히고 마는 입술이 그의 시야에 가득 들어찼다. 쥐고 있던 손을 당기자 새하얀 손이 힘없이 딸려 왔다가…….

산들산들 부는 바람은 빽빽한 숲의 머리채만을 흔들어 댈 뿐, 그들의 사이로 흘러들지 못했다. 대신 에릭과 딜라일라의 사이에 흩뿌려지는 것은 그늘 새로 비쳐드는 한 자락 봄볕이었다.

“누나.”

여전히 그는 푸른 그림자에 잠긴 삭막한 정원에서 했던 생각을 기억했다. 딜라일라 에리카에게는 반짝이고 아름다운 것만이 어울리리라는, 그 막연한 생각을.

“왜 궁금해해요?”

“……바보, 멍청이 에릭.”

아이처럼 가느다란 목소리가 그와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 어떻게 웃는지를 기억했다.

하지만 위협조차 되지 않을 욕을 톡톡 쏘아 대는 장난스러운 목소리 또한 기억하고 있었다.

다시 눈을 피해 버리려다가 에릭이 그녀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기울이자 딜라일라는 아예 눈을 꽉 감아 버렸다. 하지만 맞잡은 손을 당겨 그 손등에 에릭이 이마를 대자 그녀는 다시 화들짝 눈을 떴다. 달아오른 뺨에는 이제 꽃물을 들인 것처럼 붉은 흔적이 선명했다.

“누나.”

“내가 먼저 물어봤잖아. 대답, 대답부터 해.”

아마도 본래의 딜라일라 에리카이리라고 생각했던, 아득하게 멀게만 느껴지는 그녀의 옆모습을 기억했다.

하지만 더없이 천진한 얼굴로 가끔은 믿기지 않을 정도로 당돌한 요구를 하며 그를 끌어안는 손끝 역시 기억했다.

언젠가는 잊어야 한다고 해도.

그 모든 것이 전부 딜라일라 에리카였다. 에릭이 그리워하고, 곁에 두고 싶어 하고, 가지고 싶어 하는 것은 그녀의 전부였다. 그런 욕심을 감당할 수 없어서 모른 척했을 뿐이다. 도무지 그녀에 대해 종잡을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은 그가 도피한 결과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가 사랑한 딜라일라 에리카는 이제 모른 척하는 것도, 도망치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그녀가 허락한 것은 에릭이 진심을 토해 내는 것뿐이었다.

“……좋아해요.”

입술이 움직인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에릭은 딜라일라의 손등에 기댔던 이마를 떼고,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하얀 손등에 흩어지는 빛과 뒤섞인 그림자. 가느다란 손목을 감싼, 그녀가 즐겨 입는 카디건의 소매. 동그란 어깨와 그 위로 구불구불 쏟아지는 머리칼 위로 천천히 그의 시선이 스쳤다.

마침내 금빛 눈동자가 마주한 것은 입술을 꼭 깨물고 그를 내려다보는 차가운 물빛 눈동자였다.

“누나를 좋아해요.”

흩뿌려지는 햇살과 바람에 휩쓸리며 몸을 부비는 나뭇잎 소리가 가득한, 줄기가 빽빽한 나무들 사이에서 그의 고백은 아주 작게 들렸다. 어쩌면 그녀에게 들리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고 무심코 생각할 정도로.

그러나 분명, 분명히 딜라일라는 그의 고백을 들었을 것이다. 그러지 않고서야…… 그녀의 눈동자가 일렁일 정도로 눈물이 가득 차오르지는 않았을 테니까.

그녀는 에릭에게 붙잡힌 손을 잡아 뺐다. 순식간에 손안이 허전하게 비었다. 말랑한 감촉 대신 허공을 꾹 말아 쥐며 에릭은 생각했다.

역시 안 될 일이었던 거라고.

그러나 다음 순간 딜라일라의 손은 에릭의 뺨을 붙잡아 올렸다. 그리고 이번에는 딜라일라의 허리가 낮추어졌다. 아주 조금, 아주 조금이지만.

입술이 맞닿기에는 충분했다.

몇 번이나 입술로, 혀끝으로 헤치고 빨아들인 적이 있는 입술이었다. 하지만 에릭은 감히 무엇도 하지 못한 채로 가만히 숨을 참았다. 숨을 내쉬는 순간 말랑한 감촉이 떨어져 나갈까 봐.

대신 떨어져 내린 것은 딜라일라의 속눈썹에 애처롭게 맺힌 눈물방울이었다. 눈물이 딜라일라의 뺨으로, 그리고 에릭의 뺨으로 뚝뚝 떨어져 내렸다. 찝찌름한 액체는 어색하게 맞붙어서 움직일 줄을 모르는 두 사람의 입술 사이로 흘러들었다. 분홍빛 머리카락이 에릭의 목덜미로, 어깨 위로 쏟아져 간지럽게 살랑거렸다.

맞붙은 입술이 조금 움직였다. 벌어졌다가 닫히고, 다시 벌어졌다가 닫혔다. 그 입술이 소리 없이 전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결국 말 대신에 전해진 것은 그의 입 안으로 어색하게 파고드는 혀끝의 말랑한 감촉과 뜨끈한 체온뿐이었다.

그때에야 에릭은 긴 한숨을 내쉬며 딜라일라의 뺨을 붙들었다. 그의 커다란 손이 마치 남들로부터 그들을 숨기려는 듯 쏟아진 머리칼을 쓸어 넘기고, 그녀의 뒷머리를 잡아당겼다. 뚝, 고개를 치켜든 에릭의 눈 위로 딜라일라의 눈물이 떨어졌다. 울고 있는 것은 한 사람뿐인데, 두 사람의 속눈썹이 눈물에 젖었다.

젖은 속눈썹이 다시 말라붙을 때까지 그들은 입을 맞췄다. 어디선가 달큼한 향기가 났다.

마침내 입술이 떨어져 나간 후에 에릭은 딜라일라의 작은 몸을 벅차게 끌어안았다. 딜라일라가 에릭의 가슴팍에 뺨을 비비며 그를 마주 안아 왔다.

간헐적으로 떨리는 숨이 겹쳐졌다가 다시 엇나가기를 반복했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상대의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가 꺼져 드는 것이 맞닿은 몸으로 느껴졌다. 심장이 쿵쿵 뛰는 소리가 들려왔다.

빠르게 뛰는 심장 소리가 누구의 것이랄 것도 없이 한데 섞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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