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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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

어떤 범위에서 떨어져 나오거나
떨어져 나감

늦은 시간까지 2층 서재에서 벽난로를 뒤적이며 앉아 있던 딜라일라가 날 듯이 계단을 달려 내려갔다. 너른 창으로 넘어온 마차 소리, 투레질하는 말과 사람의 소리를 듣자마자 방을 뛰쳐나온 그녀였다.

“아빠!”

“내 딸.”

막 현관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선 듯, 마가렛의 뺨에 입을 맞추던 로드릭이 딜라일라를 향해 팔을 벌렸다. 이제는 마구 달려가서 그 품에 뛰어들 만한 나이가 아닌데도 그의 버릇은 여전했다. 딜라일라는 습관적인 그의 행동에 웃으며 사뿐사뿐 걸어가 살짝 몸을 기댔다. 싸늘한 겨울바람을 한가득 품고 있는 코트 자락에 뺨을 기대자 묻어 있던 눈이 사르르 녹으며 딜라일라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시간이 늦었는데, 피곤하시겠어요.”

“새해가 오기 전에 가족을 보는 것에는 성공했으니, 늦은 건 아니겠지.”

“올해는 정말 아슬아슬했다고요.”

“기다렸니?”

까슬한 코트에서 뺨을 떼어 내고 뒤로 한 발짝 물러나자, 비로소 로드릭의 얼굴이 보였다. 키는 보통보다 조금 더 클 뿐이지만 어쩐지 늘상 커다랗게만 느껴지는 그녀의 아버지를 올려다보며 딜라일라가 웃었다.

“하루 종일요.”

매년 새해가 올 때마다 별장에서 온 가족이 함께 시간을 보내곤 했지만, 점점 더 셋이 모두 별장에 붙어 있는 시간은 적어졌다. 로드릭은 하루가 다르게 바빠졌고, 딜라일라도 아카데미에 다니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마가렛이 사교 활동에 취미가 있어서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마가렛은 이 아름다운 별장에서 홀로 시간을 죽이다가 심심해서 죽어 버렸을지도 몰랐다.

그래도 딜라일라는 겨울 휴가 기간이 되면 반드시 마가렛이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는 별장으로 갔다. 로드릭은 어떻게든 새해가 밝는 전날에는 가족들을 볼 수 있도록 애를 썼다. 하얗고 예쁜 바닷가 별장에서 다 함께 모여 새해를 맞는, 남들이 보기엔 별 볼 일 없을지 몰라도 그들에게만은 더없이 소중한 에리카가의 불문율을 지키기 위해서.

이번만큼은 로드릭이 너무 바빠서 늦을지도 모른다며 내년에는 그놈의 최고 위원인지 뭔지 다 때려치우게 해 버릴 거라고 마가렛이 이를 갈고 있었다. 다행히 로드릭은 마가렛의 예상과 달리 새해가 오기 전날 별장에 도착했다. 비록 밤이 깊은 시간이기는 했지만, 어쨌든 해가 뜨기 전에는 도착했으니 올해도 에리카 가족들의 불문율은 지켜진 셈이었다.

“피곤하죠? 일단 씻고 쉬어요. 식사는 했어요?”

“그거 반가운 소리군. 눈을 맞았더니 따뜻한 물이 그리워 미치는 줄 알았어.”

내내 투덜대던 마가렛도 지금은 전혀 그런 기색 없이 행복한 얼굴로 웃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무서운 카리스마적인 존재로만 느껴진다는 로드릭의 입가에도 부드러운 미소가 맺혀 있었다.

“그러게 마차에 가만히 앉아 오면 될걸.”

“오늘 밤은 무슨 일이 있어도 저택에 도착해야 하니 별수 있나, 말을 타는 수밖에.”

마가렛과 로드릭이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며 저택 안쪽으로 향했다. 딜라일라는 그들의 뒤를 졸졸 쫓아가다가, 문득 팔을 뻗어 로드릭의 어깨에 하얗게 묻어 있던 눈을 털어 냈다. 로드릭이 고개를 뒤로 돌려 까딱이며 고마움을 표시했다. 딜라일라는 사랑하는 아버지에게 방긋 웃어 보였다.

“감기라도 걸리면 내년에는 최고 위원인지 뭔지 다 그만둬야 할 줄로 알아요.”

“그러면 우리 부인의 옷장은 더 갈아치워 줄 수가 없는데, 큰일이로군.”

“그깟 옷은 지금 있는 재산으로도 평생 갈아치우면서 살 수 있을걸요.”

통통거리면서도 초여름 종달새처럼 쉼 없이 말을 쏟아 내는 마가렛과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고 걷는 로드릭의 뒤에서 딜라일라가 작게 웃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본 것은 오랜만이었지만, 언제나 그랬듯 그들은 서로를 똑바로 마주 보고 있을 때 가장 즐겁고 행복해 보였다. 그 행복 사이에 자신이 끼어 있는 것이 새삼스레 어색할 만큼.

그렇게 딜라일라가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할 준비가 끝났다. 딜라일라는 부모님과 밤 인사를 나누고 제 방에 돌아와 침대에 누운 뒤에도 한참을 잠들지 못했다.

아니나 다를까, 다음 날 아침 딜라일라는 평소보다 한참이나 늦게 일어나고 말았다. 눈을 제대로 뜨지도 못한 채로 실크 잠옷 위에 가운을 걸치고 아래층으로 내려간 그녀는 예상대로 이미 식사까지 마치고 느긋하게 차를 마시고 있는 로드릭과 마가렛을 마주했다.

“우리 딸이 늦잠을 자다니. 오랜만에 귀한 구경을 했구나.”

지난밤 늦게 돌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일찍 일어난 듯, 이미 말끔한 차림인 로드릭이 웃으며 막 일어난 티가 역력한 딜라일라의 부스스한 분홍빛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마가렛은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아주 신이 난 얼굴로 얼른 외출 준비를 하라며 그녀의 등을 도닥였다.

“어디 가요?”

“네 아버지가 어제 늦은 대신 함께 쇼핑을 가 주겠다지 뭐니.”

“으엑.”

눈에 그득한 졸음을 떼어 내지도 못한 채로 질색을 하는 딜라일라를 보는 로드릭의 눈이 애석하게 접혔다. 아무래도 로드릭 역시 어떻게든 피해 보려 했지만, 결국 마가렛에게 지고 만 모양이었다.

마가렛의 열정적인 쇼핑에 어울리기를 힘들어하는 것은 딜라일라나 로드릭이나 똑같았다. 그 탓에 마가렛은 늘 네가 아버지를 닮아 자신이 물려준 예쁜 외모를 다 썩힌다며 투덜대기 일쑤였다. 먼젓번에 딜라일라와 함께 쇼핑을 한 것으로도 모자라 로드릭과 딜라일라를 다 함께 데리고 의상실에 가다니, 아무래도 올해는 마가렛이 그동안 품고 있던 소원을 모두 이루며 시작하게 되는 듯했다.

어쨌든 딜라일라에게는 크게만 느껴지는 로드릭마저 마가렛에게 지고 말았으니, 딜라일라는 별수 없이 가족 쇼핑에 참가해야만 하는 운명이 되고 말았다.

딜라일라까지 잽싸게 준비를 마친 뒤 다 함께 저택을 나선 가족은 아침을 먹지 못한 사랑스러운 딸을 배려해 가장 먼저 카페에 들러 가볍게 배를 채운 다음, 보무도 당당하게 거리를 가로지르는 마가렛의 손에 이끌려 의상실이 모인 거리로 향했다.

산더미처럼 쌓인 옷과 온갖 잡화를 적군처럼 노려보며 의상실 직원들을 아군처럼 거느린 마가렛이 용맹하게 자신의 싸움에 승리할 때쯤 딜라일라와 로드릭은 지친 얼굴로 마가렛 몰래 서로를 위로하는 눈짓을 주고받고 있었다.

오늘의 쇼핑에서 마가렛은 대승을 거두었다. 로드릭의 옷을 열 벌도 넘게 사들였고, 모자며 구두, 장갑 따위의 잡화는 셀 수도 없을 만큼 주문했다. 의상실을 모두 돌았을 즈음에는 딜라일라에게도 새 블라우스와 스커트가 각각 다섯 벌도 넘게 생겨 있었다.

반짝반짝했던 아침과 달리 낡고 지친 안색의 로드릭과 딜라일라는 홀로 생생한 기색의 마가렛과 함께 레스토랑으로 들어섰다. 그나마 로드릭이 미리 오찬을 예약해 두지 않았더라면 두 시간은 더 쇼핑에 시달려야 했을지도 몰랐다. 자리에 앉기 전, 딜라일라는 새 장갑이 끼워진 아버지의 손을 꼭 잡고 그에게 무언의 감사를 표했다.

다행히 얼마 전 새로 오픈했다는 레스토랑은 마가렛의 취향에 꼭 맞게 고상하고도 아름답게 꾸며져 있었고, 내오는 음식이나 점원들의 태도도 훌륭했다. 마가렛은 레스토랑이 마음에 쏙 든 나머지 더는 뭔가를 더 사야 한다는 말 대신 레스토랑의 예쁘장한 식기나 장식된 꽃 따위의 주제로 떠들기 시작했다. 그때에야 에리카 부녀는 마음을 놓고 식사를 온전히 즐길 수 있었다.

“참, 딜라일라. 새해도 되었는데 그 아가씨랑 동생도 한번 저택에 초대하는 건 어떠니?”

마가렛이 그런 말을 꺼낸 것은 딜라일라가 식후 주 삼아 주문한 사과술과 함께 디저트를 음미하고 있을 때였다.

“브라이어 남매 말이야.”

“브라이어? 브라이어 남작의 자제들인가?”

하필 눈처럼 사르르 녹아내리는 셔벗과 바삭바삭한 밀푀유, 설탕에 졸였다가 구운 사과를 욕심껏 입에 넣고 있었던 딜라일라는 조그만 입 안을 가득 채운 것을 삼키지도 못하고 우물대고 있었다. 그사이 로드릭과 마가렛은 에릭과 오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어머나, 남작가의 자녀였던가요? 아가씨가 워낙 당차기에 어느 댁 자제인가 했더니.”

“브라이어 남작의 딸이라면 그럴 만도 하지. 본인부터가 아주 자유분방한 인사거든. 연구 외에는 도무지 세상사에 관심이 없는 것 같더라니까.”

“만나 본 적이 있어요?”

“내무부에서 일하다 보면 어지간한 사람은 다 만나 보게 되는 법이지……. 그래, 그 댁 자제가 아버지를 닮아 마법 공학의 천재라는 이야기도 자주 들었군. 마법 공학과 관련이 깊은 부처에서는 하나같이 탐내는 인재라고 하던데.”

딜라일라가 겨우 구운 사과를 꼭꼭 씹어 전부 삼켰을 때는 마가렛이 까르르 웃으며 소녀처럼 조잘조잘 떠들고 있었다.

“브라이어 군에 대한 소문은 저도 들어 봤어요. 실제로 보니 아주 훤칠한 남학생이던걸요. 분명 천재가 아니었으면 그 얼굴로 유명세를 치렀을걸요. 딜라일라하고도 아주 잘 어울리던데.”

“엄마…….”

“흠.”

로드릭이 어색하게 헛기침을 하며 목을 가다듬었고, 딜라일라 역시 어색한 얼굴로 사과술을 한 모금 입에 머금었다. 마가렛은 그런 가족들을 둘러보더니 다시 한번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무어, 잘생긴 걸 잘생겼다고 하는데 그런 반응들이에요?”

“딜라일라, 내 딸. 남자는 얼굴이 다가 아니다.”

“아빠…….”

로드릭은 뜬금없이 딜라일라에게 훈계조로 말해서, 마가렛은 아예 배를 잡고 웃어 댔다. 딜라일라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로드릭과 마가렛을 번갈아 쳐다보다가 다시 사과술을 한 모금 머금었다. 따끈하게 데운 사과술은 셔벗을 먹어 차가워진 입 안을 뜨끈하게 달구고는 달콤한 사과 향을 남기며 부드럽게 목으로 넘어갔다.

“딜라일라는 아직 어려.”

“어리긴, 보통 아가씨들 같았으면 벌써 약혼한 지 오래였을 텐데요. 아카데미만 안 갔어도 딜라일라도 벌써 결혼했을지도 모른다고요. 아휴, 참. 난 딜라일라 결혼 준비를 할 생각만 하면 벌써 들뜨는데. 눈처럼 하얀 드레스가 얼마나 잘 어울리겠어요?”

“결혼이라니, 요즘 같은 시대에 우리 딜라일라처럼 똑똑한 아가씨가 일찌감치 결혼을 해서 공부를 마치지 못하면 그건 또 얼마나 손해겠소?”

“당신 이럴 때만 점잖은 말투 쓰지 말아요. 애 같아, 정말.”

로드릭이 호들갑 아닌 호들갑을 떤 탓에, 딜라일라가 고작 사과술 한 모금을 마시는 동안 이야기는 딜라일라의 결혼까지 달려가고 말았다. 딜라일라는 한숨을 포옥 내쉬었다. 그녀의 숨에 달콤한 사과 향과 알싸한 알코올 냄새가 뒤섞였다.

“아무튼 딜라일라와 결혼하려면 아무리 천재라도 모자라.”

“아휴, 당신이 그러니까 여태 딜라일라가 남자 친구 하나 없이 큰 거 아니겠어요. 브라이어 군이라도 사귀게 되어 얼마나 다행인지.”

“브라이어 군과 교제 중이라고?”

“그런 거 아니에요!”

사과술은 딜라일라가 마셨는데 로드릭과 마가렛이 취하기라도 한 것 같았다. 아주 난장판으로 흘러가는 대화를 참지 못한 딜라일라는 결국 부모의 대화에 삐약삐약 소리치며 끼어들고 말았다.

“에릭하고는 그냥…… 같이 공부하고 이야기나 나누는 사이라고요!”

“이름을 부른단 말이냐?”

“아카데미에서는 다들 이름으로 부르잖아요, 아빠…….”

하지만 딜라일라가 끼어든다고 해서 소강될 난장판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마가렛이 딜라일라에게 친구처럼 굴면서도 다정한 어머니라면, 로드릭은 근엄하고 카리스마 있는 아버지였다. 하지만 그는 딜라일라가 어릴 때부터 그녀를 철저히 교육해 온 만큼 딜라일라의 남자관계에 대해서 아주 유별나게 굴곤 했다.

마가렛의 말대로 진작 약혼을 했을 법한 나이의 딜라일라가 자유롭게 아카데미에 다니고 있는 것은 그런 로드릭 덕분이었다. 주위에서는 딜라일라의 몸값을 더 높이기 위한 거라고들 떠들어 댔지만, 딜라일라는 아버지가 자신을 두고 물건의 가치를 평가하듯 생각하지는 않을 거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아카데미 밖에서까지 굳이 이름으로 부를 필요는 없을 텐데, 그러다 자칫 오해라도 사면 어쩌려고.”

다만 이런 식으로 딜라일라의 관계를 통제하는 것이 새삼스레 조금 불편할 뿐이었다.

언제나 주변을 경계하고, 혹시 모를 일을 만들지 않기 위해 사소한 호칭까지도 신경 쓸 것. 딜라일라가 어릴 때부터 무수히 들어온 말이었다. 익숙했지만, 문득 그것이 갑갑하게 느껴졌다.

정작 목소리를 높인 것은 딜라일라가 아니라 마가렛이었다. 그녀는 어디에서 무슨 소리를 들은 적이라도 있는지, 갑작스레 짜증스럽게 목소리를 높였다.

“오해는 무슨 오해, 그깟 오해 좀 사면 어때요? 이러다 우리 딸이 평생 결혼 못 할 하자가 있다는 오해를 받게 생겼는데, 오해 좀 생기는게 낫지.”

“크흠. 세상에 우리 딸만 노리고 있는 한심한 놈들이 얼마나 많은지 압니까? 여지라도 생기면 달려들 놈들이 천지간에 널려 있는데, 뭐든 조심해서 나쁠 것 없어. 결혼이라면 내가 옥석을 가려 후보를 추려 놓을 테니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당신 정말 이럴 때만 이백 년 전 사람처럼 굴기예요? 요즘 같은 시대 어쩌구 하더니만, 결혼은 그렇게나 전통적으로 시키려고.”

언제나 종달새처럼 웃으며 종알대는 마가렛과 그런 마가렛에게 다정하게 대꾸해 주는 것이 전부였던 부모의 평소와는 다른 대화에 딜라일라는 당황하기 시작했다. 재작년 즈음부터 딜라일라의 결혼에 대한 화제가 종종 부모님의 입에 오르는 일은 있었지만, 마가렛이 이 정도로 목소리를 높이는 것도 로드릭이 그런 마가렛을 달래지 않는 것도 딜라일라로서는 처음 보는 일이었다.

“두 분 다 그만해요…….”

“얘, 우리 딸. 엄마는 네가 그렇게 딱딱하게 결혼하는 꼴은 정말이지 보고 싶지 않구나. 사랑 없는 결혼이 얼마나 사람을 망치는지 아니?”

“우리 딜라일라야 어딜 가도 사랑받을 텐데, 그런 걱정은 할 필요가 없지.”

“아휴, 그런 문제가 아닌걸요! 결혼이란 게 그런 식으로 생각할 문제가 아닌 것은 당신도 알잖아요.”

놀란 딜라일라는 소심하게 자신의 결혼을 두고 싸움 아닌 싸움을 시작한 부모를 말려 보았지만, 당연히 그녀의 시도는 역부족이었다. 마가렛은 숫제 결혼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구구절절 피력하기 시작했고, 로드릭은 흠흠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돌리다가 딜라일라와 눈이 마주치자 눈썹을 찡긋거리며 근엄한 표정을 지었다.

“딜라일라가 결혼 못 할 이유가 있는 게 분명하다고 수군거리는 사람들이 있단 말예요!”

“그런 실없는 소리나 나누고들 있다니, 그럴 시간이 있으면 나눠 주면 좋겠군.”

“그게 다 당신이…….”

“그래도 조심해야 하는 건 당연하지 않소, 어릴 때부터…….”

마가렛과 로드릭의 대화가 기어코 길게 늘어지기 시작했다. 딜라일라는 한숨을 포옥 내쉬어 보았지만, 지금은 아무도 그녀의 한숨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대체 결혼이 뭐라고. 딜라일라가 내심 입을 삐죽였다. 작년까지만 해도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던 결혼이 이렇게 갑자기 아주 중요한 문제처럼 다뤄지는 것이 이상했다. 딜라일라는 언젠가 오딜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로맨스 소설의 가장 완벽한 결말이 결혼인 건 당연한 일이에요. 여자들에게는 멋지고 다정하며 지위도 높은 남편을 얻는 것 말고는 다른 성취가 허락되어 있지 않잖아요? 지금 현실에서 여자의 인생이 어떻게 흘러갈지 결정하는 가장 큰 사건이 바로 결혼인걸요. 당연히 성공적인 결혼이 여자들이 꿈꾸는 가장 완벽한 결말이 되는 거라고요.”

“그렇지 않니, 우리 딸?”

로드릭에게 일장 연설을 하던 마가렛이 홱 딜라일라를 돌아보았다. 딴생각에 빠졌던 딜라일라는 마가렛의 말을 듣지 않고 있었기에, 그녀는 어색하게 눈을 깜빡였다. 이제 보니 마가렛도 로드릭도 딜라일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꽂힌 가운데서 딜라일라는 잠깐 고민하다가,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예쁜 미소가 그녀의 얼굴 위에 그려졌다. 갸우뚱 고개가 옆으로 기울어지며 늘어뜨린 분홍빛 머리카락이 살랑살랑 어깨를 쓸어내렸다. 짐짓 사랑스러운 얼굴을 하고 딜라일라가 달콤하게, 사탕을 입에 문 어린아이처럼 속삭였다.

“아직 저는 결혼 같은 일은 잘 모르겠는걸요. 엄마하고 아빠하고 평생 행복하게 살고 싶은데.”

그리고 딜라일라의 조금은 어린아이 같고 현실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대답이 정답이라는 것을 알려 주는 것처럼, 살짝 구부러졌던 마가렛의 눈썹이나 딱딱하게 굳어져 있던 로드릭의 입매가 부드럽게 풀어지는 것이 확연히 보였다.

“아휴, 정말. 어쩜 저리 말을 예쁘게 하는지.”

“엄마 닮아서 그런 거 아닐까요? 사랑스러운 마가렛의 딸이잖아요.”

“하여튼 하는 행동은 로드릭이랑 꼭 닮았는데 말이야.”

“아빠 닮아서 똑똑하기도 하고요.”

딜라일라가 마가렛과 로드릭에게 차례로 눈을 맞추며 입술을 사랑스럽게 오므렸다가 보송한 뺨이 통통해지도록 웃었다. 마가렛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로드릭은 조금은 다행이라는 듯이 딜라일라에게 마주 웃어 주었다. 잔뜩 당겨진 뺨이 아파올 만큼, 딜라일라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남은 디저트 접시 위로 고개를 숙였다.

디저트 포크가 하얀 자기 접시 위에 놓은 밀푀유를 내리눌렀다. 하지만 그새 크림에 젖어 눅눅해진 밀푀유는 부서지지 않고 뭉그러졌다. 딜라일라는 별수 없이 으깨져 버린 밀푀유 조각 위에 구운 사과를 썰어 올린 뒤에 한가득 입 안에 물었다.

“그래, 내가 괜한 걱정을 했지. 우리 딸이 이렇게 착하고 예쁜데.”

“나는 처음부터 걱정 안 했다, 딸아.”

“당신은 조용히 하고 디저트나 먹어요.”

여전히 마가렛의 말투는 통통 튀었지만, 조금 전처럼 짜증스러운 기색은 싹 사라져 있었다. 로드릭 역시 다시 느슨해진 얼굴이었다. 그들의 사랑스러운 딸 덕분에 약간이나마 까칠해졌던 분위기가 다시 여느 때처럼 행복하고 다정한 가정의 것으로 돌아왔다.

그 사이에서 딜라일라는 입 안에서 뭉크러지는 밀푀유 사이에서 구운 사과가 뺨을 찌르는 것도 모르고 뺨을 볼록하게 부풀리며 그것들을 씹었다.

입 안에 단맛이 들러붙었다. 질척한 느낌을 지우기 위해 사과주를 한 모금 마셔 보았지만, 따끈한 온기를 잃고 식어 버린 사과주는 달콤한 사과 향보다도 씁쓸한 알코올 맛이 더 진해져 있었다.

* * *

“으음, 아직 괜찮아요.”

“하지만 벌써 어두워졌다고요. 어머님께서 걱정하시겠어.”

“정말 괜찮은데…….”

오딜은 웃으며 말하고 있었지만, 그녀의 목소리에는 걱정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그녀의 말대로 바깥은 이미 어둠이 짙게 내려와 있었다.

“아무리 내가 좋아도 집에는 가야죠.”

다시 한번 오딜이 그녀에게 돌아가기를 넌지시 권했지만, 딜라일라는 호텔 침대의 커다란 베개를 껴안고 고개를 저으며 괜찮다고 말했다. 괜찮다는 말만 몇 번째인지 셀 수도 없었다.

지난번에 이어 딜라일라는 하루 종일 오딜의 호텔방에서 글을 쓰는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오후가 지나 그녀를 찾아온 딜라일라가 저녁이 다 지나도록 그녀의 방을 떠날 기색이 없자 오딜은 딜라일라를 걱정하기 시작했다. 오늘은 에릭도 자신의 방에 틀어박혀 연구에 매진하고 있다는 모양이라, 방 안에는 딜라일라와 오딜 둘뿐이었다.

“좋아요, 그럼 심부름꾼이라도 보내서 집에 늦는다고 연락해요. 아니면 아예 자고 간다고 하든지.”

“자고 가도 돼요?”

혹시나 싶어 던져 본 말에 눈을 반짝이는 딜라일라의 얼굴을 보며 오딜이 한숨을 푹 쉬었다. 딜라일라가 고집 아닌 고집을 부리기 시작한 때부터 오딜은 내내 종이가 아니라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딜라일라는 습관처럼 입가에 미소를 방긋 띄워 올리고 있었지만, 그 아래에 다른 감정이 숨어 있다는 것은 금세 눈치챌 수 있었다. 종일 몇 마디 하지도 않고 오딜이 농담을 던져도 시들한 반응만 보이던 딜라일라였다.

처음에는 매년 겨울 휴가를 함께 보낸다는 그 자랑스러운 아버지가 일 때문에 고작 이틀을 머무르고 수도로 가 버렸다기에, 그 탓인가 싶기도 했다. 그래서 힘이 없어 보여도 그러려니 하고 내내 시답잖은 이야기나 떠들며 그녀의 기분이 풀리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저 작고 순진한 아가씨가 속이 상했던 이유는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석영이 길게 드리우고 짙은 겨울밤이 조금씩 하늘에 채워질수록 베개를 끌어안은 손에 힘이 들어가고, 고개는 점점 더 수그러들었다. 종내는 늘어뜨린 분홍빛 머리카락 사이에 얼굴이 반절도 넘게 가려질 정도로 고개를 푹 숙이고 아직 안 가도 된다는 말만 앵무새처럼 반복했다.

이제야 사춘기라도 된 건지. 아니면 부모님과 싸우기라도 했는지.

오딜로서는 이유까지는 짐작할 수 없었다. 어쨌든 딜라일라가 집으로 돌아가기 싫어하는 것만은 확실해 보였다.

그렇다고 딜라일라를 저대로 내버려 둘 수도 없었다. 오딜도 그녀가 얼마나 대단한 집안의 딸인지는 알고 있었다. 처음 마주쳤던 의상실에서 점원이 대뜸 그들을 부르며 굽실거리는 태도나 상류층답게 우아하기 짝이 없는 딜라일라의 어머니만 봐도 퍽 유세하는 집안임은 알 수 있었다.

거기다 에릭이 그녀에게 실례를 저지른 건 아닌지 걱정이 되어 에릭에게 그녀와 알게 된 계기를 캐묻다 보니 자연히 딜라일라 에리카가 진짜 그 에리카라는 것도 어쩔 수 없이 알게 되고 말았다.

그런 집 아가씨가 대뜸 집에 가기 싫다고 해서 함부로 그러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가문끼리 교류가 깊기라도 하면 모를까, 고작해야 명예직인 단승 작위를 받은 아버지 아래 난 브라이어 남매가 그 에리카와 가문 간의 교류가 있을 리도 없고, 앞으로도 없을 테고.

그러니까, 요약하자면 기분이 처진 딜라일라는 척 보기만 해도 안타까울 정도였지만, 그래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일이었다.

“밤새도록 내가 글 쓰는 거나 구경하고 있을 거예요?”

“밤새도록 글만 쓸 거예요?”

“디디가 그렇게 비 맞은 새끼 강아지처럼 축 늘어져서 나만 쳐다보고 있으면 밤새도록 글만 쓰지는 못하겠죠.”

딜라일라가 껴안고 있던 베개에 얼굴을 푹 파묻었다. 하얀 베개 위에 예쁜 분홍빛 머리카락이 구불구불 늘어졌다.

“나, 방해돼요……?”

그러잖아도 작은 목소리가 베개에 푹 파묻혀 먹먹하게 들렸다. 오딜은 다시 한숨을 푹 쉬고, 일부러 매정한 목소리를 냈다. 그러지 않으면 눈앞의 저 조그맣고 사랑스러운 아가씨는 정말로 밤새도록 축 처진 얼굴로 오딜이 만년필로 종이를 긁는 모양이나 쳐다보고 있을 것 같았다.

“적어도 지금은 디디가 나를 너무 걱정시키고 있어서, 방해예요.”

“그럼 갈래…….”

여전히 베개에 얼굴을 푹 파묻고 웅얼거리는 딜라일라를 보며 오딜이 세 번째로 한숨을 쉬었다. 아무래도 오늘은 제대로 대화를 나누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좋아요, 오늘은 일단 돌아가 보도록 해요……. 대신 내일 다시 만나서 이야기해요.”

베개에 짓눌려 발개진 얼굴을 힘없이 들어 올리는 딜라일라에게 오딜이 재차 확인을 했다. 조심해서 들어갈 것, 딴길로 새지 말고 곧장 집으로 갈 것 등을 마치 어린아이를 대하듯이 조목조목 말하는 오딜에게 딜라일라는 대충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오딜은 마지막으로 내일 만날 카페를 지정한 뒤에야 표정을 누그러뜨렸다.

“내일 그 카페에서 만나요. 나도 그렇고 디디도 그렇고, 우린 기분을 좀 전환할 필요가 있어.”

“알겠어요…….”

힘없이 휘청휘청 오딜의 방을 나온 딜라일라가 천천히 계단을 내려갔다. 그 맥없는 발소리가 멀어지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오딜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내일은 무슨 일이 있어도 저 귀여운 아가씨의 고민을 들어야지. 그렇게 생각한 오딜이 다시 테이블 앞에 앉았다. 오늘 내내 집중하지 못했으니, 지금부터는 정말로 집중해서 써야 했다.

정작 계단을 내려갔던 딜라일라가 살금살금 발소리를 죽여 가며 그녀의 방문 앞을 지나치고 있다는 사실은, 오딜은 꿈에서도 상상하지 못할 일이었다.

딜라일라는 호텔 로비로 내려가 사환에게 바닷가 저택에 오늘은 조금 늦을지도 모르겠으며, 안전히 돌아갈 테니 걱정 말고 계시라는 소식을 전해 주기를 부탁했다. 바쁜 로드릭이 새해가 밝고 하루가 지나자마자 다시 수도로 떠났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가지고 있던 작은 손가방을 열어 팁이라기엔 과한 액수의 동전을 쥐여 주자 날듯이 달려 나가는 사환의 뒷모습을 확인한 뒤에 그녀는 살금살금 다시 계단을 올랐다.

문득 든 생각이었다. 오딜이 스쳐 지나가듯 한 말이 머릿속에 박힌 것일지도 모른다.

발소리를 죽이고 오딜의 방문 앞을 지난 딜라일라가 바로 옆의, 다른 문 앞에 멈춰 섰다. 그리고 익숙하게 문을 두드렸다. 똑똑똑, 세 번의 노크 소리가 작지만 확실하게 울렸다. 문 안에 있는 상대에게는 확실히 들렸을 것이다. 그도 그녀의 노크 소리가 익숙할 테니까.

“……들어가도 될까?”

아니나 다를까, 누구인지 묻지도 않고 대뜸 문을 열어 준 에릭을 올려다보며 딜라일라가 물었다.

에릭은 당연히 그녀를 방 안으로 들였다. 이유도 무엇도 묻지 않고. 그게 기뻐서 딜라일라는 희미하게나마 미소를 지었다. 살랑살랑 방 안으로 들어서자 그때까지 문을 붙잡아 주고 있던 에릭이 그녀의 뒤에서 문을 닫는 소리가 났다.

“실험 중이었어?”

“네.”

지난번에는 종이가 그득 쌓여 있던 테이블 위에는 비커와 또 다른 유리 사발들이 놓여 있었다. 한쪽 귀퉁이에 놓인 길쭉한 금속 통, 물을 끓이는 기구를 본 딜라일라는 겨우 두 번째 보는 것인데도 괜히 그것이 반가웠다. 막 물을 끓인 것인지 금속 통 안에서는 보글보글 소리와 함께 김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다시 봐도 신기한 모양에 딜라일라가 그것을 살피는 사이, 에릭이 티 포트와 찻잔을 꺼내 왔다. 재빠르게 티포트 안에 찻잎을 계량해 넣은 그가 금속 통을 들어 올렸다.

“실험하는 데 쓰려고 끓인 물 아니야?”

“괜찮아요.”

혹시나 싶어 물은 말에 애매한 대답이 돌아왔다. 아마도 실험하는 데 쓰려고 물을 끓이고 있었던 것이 맞을 것이다. 에릭이 딜라일라가 이런 시간에 갑자기 방에 찾아올 것을 예상하지는 못했을 테니까.

하지만 에릭은 망설이지도 않고 끓인 물을 티 포트 안으로 쏟아 넣었다. 섬세한 손놀림이 끓는 물을 한줄기로 길게 떨어뜨렸다. 가느다랗게 떨어져 내린 물은 포트 안에서 세차게 찻잎과 맞부딪치며 파도처럼 흔들렸다. 에릭이 그 작은 파도 위로 뚜껑을 덮고, 모래시계를 뒤집었다.

다시 보아도 실험을 하는 것처럼 정밀한 움직임이었다. 고작 그녀에게 내줄 차를 끓일 뿐인데도 그의 손놀림은 섬세하고 정확했다. 딜라일라가 조용히 감탄했고, 에릭은 묵묵히 모래시계에서 떨어지는 모래를 보며 시간을 쟀다.

모래가 좁은 틈으로 떨어지기를 마치기가 무섭게, 에릭이 스트레이너로 찻물을 걸러 찻잔에 따랐다. 연한 주황색 찻물이 반쯤 찬 찻잔이 자연스레 딜라일라에게 건네졌다. 두 번째로 차를 따른 잔을 들고 에릭이 흘긋 그녀를 돌아보았다. 찻잔을 입술 가까이 들어 올리고 하얀 김과 함께 피어오르는 차향을 들이마시고 있던 딜라일라가 겸연쩍게 웃었다.

“차 고마워. 향이 좋다.”

“네.”

“침대에 앉아도 돼?”

“……네.”

대답이 돌아오는 사이에 약간의 공백이 있었다. 아무래도 에릭이 실험을 하던 중이라 불편한 모양이라고 생각하면서 딜라일라는 가지런히 정리된 침대 위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여전히 양손으로 찻잔을 받쳐 든 채였다.

“조용히 있을게. 신경 쓰지 말고 하던 거 마저 해.”

그렇게 말한 딜라일라가 정말로 자신의 말을 실천하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시선 역시 어렴풋이 김이 피어오르는 찻잔 안에 틀어박혔다. 꼭 제 얼굴만 한 찻잔 안으로 숨어 버리기라도 하고 싶어 하는 것 같은 모양새였다.

딜라일라는 눈치채지 못했지만, 에릭은 그런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오딜의 방에 있는 것과 똑같은 모양의 나무 의자에 앉아서, 딜라일라가 손에 든 것과 똑같은 모양의 찻잔을 손에 들고 그녀와 같은 차향을 들이마시면서.

에릭의 시선이 고개를 숙인 딜라일라의 정수리에 가 박혔다. 분홍빛 머리카락이 아른아른 쏟아지며 얼굴을 가리고 있어서, 그녀의 낯빛을 살피지는 못했다. 푹 숙인 동그란 머리 꼭대기만이 그의 눈앞에서 작게 흔들리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평소와 달리 힘이 없는 듯한 딜라일라의 모습이 낯설었다.

그는 아주 어릴 때부터 타인의 감정에 무뎠다. 조금 지나칠 정도로. 다른 사람들이 웃고 울고 화내는 것을 보아도 공감하지 못했고, 함께 웃거나 위로를 해 주어야 할 순간에도 고개나 갸우뚱 기울이고 멀뚱히 서 있기 일쑤였다.

에릭도 그 사실을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스스로 납득할 수 없는 것을 대충 모양만이라도 흉내 내며 애쓸 정도로 다른 사람과 섞여들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도 못했다. 그래서 에릭은 그저 멀뚱히 고개를 기울이며, 공감하고 가슴 깊이 이해하지 못할 일들을 그대로 흘려보냈다.

대신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일들에 집착적으로 파고들었다. 예를 들면, 어려서부터 집 안에 가득 널려 있던 마법 공학과 관련된 책이라든가, 실험 도구라든가 하는 것들. 그 덕분인지 혹은 우연인지 알 수는 없어도, 에릭은 마법 공학을 이해하고 그것을 실현하는 데 있어서 천부적인 재능을 자랑했다.

타인의 감정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붙임성 없고 뚱한 꼬마는 그렇게 천재가 되었다. 심지어는 그 능력으로 작위까지 수여 받은 그의 아버지조차 단번에 뛰어넘을 불세출의 천재.

그의 모자란 부분과 지나치게 뛰어난 부분이 겹쳐졌을 때 타인으로부터 미움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에릭은 아카데미에 입학하기 전에도 이미 그런 일에는 익숙해져 있었다. 그가 처음으로 만들어 낸 마법 기구, 물을 끓이는 마법 포트를 보았을 때 브라이어 남작의 표정이 어땠던가?

천재적인 아들을 자랑스러워했던가, 혹은 응당 그럴 만도 할 일이라며 무심하게 굴었던가?

혹은 아들의 재능과 능력을 질투해 화를 냈던가?

에릭은 그 당시에 고작 열두 살이었고, 몇 년이 지난 지금에는 그의 얼굴이 어땠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다만 그날 이후부터 브라이어 남작이 자신의 아들을 미워하기 시작했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그러니 일 년에 고작 두 번 있는 휴가에도 오딜과 함께 아버지를 피해 휴양지에나 와서 시간을 때우게 된 것이다.

물론 오딜도 한때는 그런 에릭을 죽도록 싫어했다. 다만 그녀는 아버지보다도 더 오래 그와 붙어 있어야 했기 때문에, 그 명석한 머리로 에릭의 모자란 부분을 재빠르게 간파했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많아서 대신 이해할 수 있는 것에 파고들 수밖에 없는 한심한 동생을, 오딜은 미워할 수 없게 되었다.

그렇게 그들은 자식을 시기하는 아버지 아래에서도 제법 평범한 남매가 되었다.

에릭이 그나마 ‘조금 남다른 구석이 있는’ 정도로 자란 것은 전부 아버지에게 미움받는 동생을 열심히 챙기며 키운 오딜의 덕이었다. 그래서 에릭은 다른 이들과 달리 오딜의 말만큼은 이해되지 않더라도 경청했다. 그의 세상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사람은 오딜이 유일했다.

자연히 에릭은 오딜을 제외한 사람 전부와 거리를 두게 되었다. 의도한 것도 아니었지만, 그 거리가 사라지기를 바란 적도 없었다. 셰 상브르 아카데미에 입학하고, 오딜과 자주 만나지 못하게 되었으며, 그를 둘러싼 모든 환경이 다 변한 뒤로도 그 거리는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견고해지기만 할 뿐.

그러나 딜라일라 에리카는 어쩌면 아주 가볍게, 별것 아닌 것처럼, 조금은 제멋대로 그 견고한 벽을 넘어와 버렸는지도 모른다. 친누나인 오딜만이 유의미하던 그의 세상에 어느 순간 딜라일라가 있었다.

그녀는 오딜과는 달랐다. 존중하고 경청하기만 해서는 알 수 없는 것투성이였다. 그야, 그들이 함께 보낸 시간은 턱없이 짧았으니까.

에릭은 드물게 먼저 딜라일라에게 말을 걸었다.

“슬퍼요?”

화들짝 고개를 들어 올린 딜라일라의 눈이 동그랗게 커져 있었다. 원래도 커다란 눈을 저렇게 커다랗게 뜬 얼굴을 보니 왠지 모르게 목이 탔다. 에릭이 뜨거운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아직 찻물이 지나치게 뜨거웠던 탓에 그는 혀를 데고 말았다.

“……아니, 슬픈 거 아냐.”

“…….”

“갑갑해서 그래.”

딜라일라는 언제나 그랬듯이 그에게 솔직했다. 처음 그를 찾아오던 순간부터 그랬다. 비록 그때는 술에 취해 있긴 했지만……. 어쩌면 첫 단추를 그렇게 꿰었던 덕분에 그에게 솔직하게 구는 것일지도 모르고.

그때 딜라일라는 울음을 터뜨렸다. 에릭은 그녀가 우는 이유도 몰랐고 그녀의 말도 이해하지 못했지만, 하나만은 확실히 배웠다. 몇 번인가 복습 아닌 복습까지 했다. 그래서 에릭은 자신이 아는 그녀의 기분을 낫게 만드는 가장 좋은 방법을 입 밖으로 꺼냈다.

“안아 줄까요?”

딜라일라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그녀가 받쳐 든 찻잔 안에서 찻물이 넘칠 것처럼 넘실거렸지만, 아슬아슬하게 넘치지는 않았다. 하얀 자기 안에서 오렌지색 파도가 일렁였다. 그것을 가만히 내려다본 딜라일라가 조그맣게 속삭였다.

“……응.”

에릭이 고작 한 모금을 마셨을 뿐인 찻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저벅저벅 침대로 걸어간 그가 딜라일라의 앞에 멈춰 섰다. 그녀의 손에 들린 찻잔을 잡아 침대 곁에 놓인 조그만 협탁 위에 내려놓고 난 뒤에야, 그는 딜라일라의 곁에 꼭 붙어 앉았다. 엉덩이 아래에서 매트리스가 그의 무게만큼 푹신하게 내려앉으며 출렁였다.

에릭이 긴 팔로 딜라일라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침대 가에 나란히 앉은 모양인 탓에 한 팔로만 그녀를 안은 모양이었지만, 이내 딜라일라가 상체를 옆으로 돌려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기댔다. 에릭 역시 그녀 쪽으로 몸을 기울이고, 이번에는 양팔을 모두 뻗어 그녀의 등까지 감쌌다. 작고 동글동글한 몸이 에릭의 단단한 팔과 가슴팍 안에 완전히 갇혔다.

언제나 그랬듯이, 그녀가 방 안에 들어설 때부터 어렴풋이 느껴지던 은은한 단 향이 단번에 확 끼쳐 왔다. 빵을 구울 때나 설탕을 태워 만든 캐러멜 시럽을 만들 때 나는 것 같은 향기가 났다.

딜라일라는 그녀의 체향이 그렇게 달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에릭의 턱 바로 아래에 분홍색 정수리가 닿았다. 단단한 팔뚝 위로 매끄럽고 긴 머리카락이 구불구불 늘어졌다. 두 손을 어설프게 말아 쥔 자그만 주먹이 에릭의 가슴을 꾹꾹 눌렀다. 얇고 동그란 어깨, 가느다란 팔뚝과 척추가 도드라진 마른 등 따위가 에릭의 팔에 닿았다. 말랑한 뺨이 그의 쇄골 아래에 꾹 눌리는 감촉에 이어, 그녀가 뱉어 내는 숨결이 얇은 옷 너머로 흐릿한 습기를 전달했다.

식사 때를 제외하고는 내내 방 안에 틀어박혀 있었던 에릭은 얇은 셔츠와 면바지 위에 가운 한 장을 걸친 것이 전부인 차림이었다. 며칠 내내 조끼며 코트까지 챙겨 입고 보았던 딜라일라를 맞이하기에는 지나치게 얇은 차림이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돌이켜 보면 언제나 그의 기숙사 방에서 딜라일라를 만날 때와 별다를 바가 없는 차림이었는데도.

그때 딜라일라가 몸을 움직였다. 그의 가슴팍에 주먹을 대고 있던 그녀가 팔을 꼼지락거리더니 어깨를 감싸 안은 에릭의 팔 아래로 자신의 팔을 빼 버렸다. 그리고 에릭의 허리를 꼭 껴안았다.

분명 그 가느다란 팔이 에릭을 숨 막히도록 강하게 붙잡을 수 있을 리가 없는데도, 숨이 막혀 왔다. 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가슴이 오르내릴 때마다 자신의 몸에 꼭 맞닿은 딜라일라의 몸이 더 밀착되는 것 같아서 숨을 크게 쉴 수가 없었다.

그런 에릭을 아는지 모르는지 딜라일라는 그의 얇은 셔츠 위에 대고 길게 숨을 뱉어 냈다. 그녀의 숨결이 천 사이로 스며들고, 피부 위를 적셨다.

젖어 드는 것은 숨결뿐만이 아니었다. 어느새 정말로 축축하게 젖어 달라붙기 시작한 천의 감촉으로 에릭은 딜라일라가 울고 있음을 알았다.

“내가, 왜 울지…….”

아주 조금 거칠어진 숨을 헐떡이며 딜라일라가 속삭였다. 에릭은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서 그냥, 그녀의 어깨를 조금 더 힘주어 껴안았다. 그들 사이에 조금의 틈이라도 남겨 두지 않겠다는 듯이. 그가 할 수 있는 위로는 그게 전부였다.

딜라일라는 에릭에게 안겨 한참을 소리도 없이 울었다. 에릭은 셔츠 자락이 젖어 가슴팍에 들러붙는 것을 느낄 때마다 딜라일라의 몸을 껴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그때마다 딜라일라도 에릭의 허리를 껴안은 팔에 힘을 줘 당겼다. 꼭 달라붙은 몸은 상대가 숨을 들이쉴 때마다 가슴이 부풀어 오르는 것을, 부푼 가슴 안에서 심장이 빠르게 달음박질치는 것을 그대로 전달했다.

그들의 숨이 서로와 꼭 같이 맞추어 졌을 때, 딜라일라가 에릭의 쇄골 즈음에 이마를 부볐다. 어린아이나 새끼 짐승이 애교를 부리는 것 같은 행동이었다.

그 감촉에 에릭이 상체를 뒤로 물리려 하자 딜라일라가 그를 안은 팔을 당겨 멀어지지 못하게 붙잡았다. 가녀린 힘에도 에릭은 꼼짝하지 못하고 그녀가 당기는 대로 붙들렸다.

“에릭.”

“……네.”

“입 맞춰 줄 수 있어?”

눈물로 젖어 든 셔츠 위로 딜라일라가 가라앉은 숨결을 후 불었다. 한참을 운 탓에 뜨거워진 숨결이 선득하게 그의 몸을 훑었다.

에릭은 반사적으로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동그란 분홍색 머리꼭지가 아니라, 오밀조밀한 이목구비를 위로 바짝 쳐들고 그를 올려다보고 있던 딜라일라의 얼굴이 곧장 그의 눈에 비쳤다. 금빛 눈동자와 푸른 빛 눈동자가 마주쳤다.

아, 맞아. 이 눈, 이 눈이었어. 처음 본 순간 사로잡힌 것 같았던.

딜라일라는 차마 그 금빛 눈동자를 마주하지 못하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 머리칼을 닮아 붉은 기운이 도는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눈꺼풀이 떨려서 속눈썹이 흔들리는 것인지, 혹은 지척에서 흩날리는 에릭의 숨결에 마음이 흔들리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에릭은 떨리는 딜라일라의 속눈썹을 내려다보며 무심결에 마른 입술을 축였다. 달콤하고, 젖은 냄새가 났다.

그들은 지금 지나치게 가까웠다. 서로가 뱉은 미적지근한 숨결을 받아 마시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 만큼.

그래서 입술을 맞대고 숨을 겹치는 일은 생각보다 쉬웠다.

가볍게 맞닿았던 입술이 살짝 떨어졌다가, 이내 다시 맞붙었다. 말캉한 입술을 서로 뭉개기라도 할 것처럼 꼭 붙어 문질렀다. 그 서슬에 벌어진 입술 새로 뱉어지는 단 숨결을 빨아들이고, 삼켰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서로의 입술을 깨물듯 빨아 당기고 있었다.

조금 거친 듯한 에릭의 입술이 딜라일라의 통통한 아랫입술을 아프지 않게 물었다. 그의 입술 사이에서 말캉한 것이 짓눌리는 감촉이 얇은 점막을 넘어 신경으로 전해졌다. 에릭은 무심결에 혀를 내밀어 입술에 물린 것을 핥아 냈다. 뜨거운 찻물에 데어 까슬까슬한 혀끝을 말랑한 것이 문질렀다.

혀가 섞이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어색하게 시작된 키스는 조심스럽고도 열정적으로 깊이를 더해 갔다. 딜라일라는 바짝 고개를 치켜들고 쏟아지는 키스를 기꺼이 전부 받아 삼켰다. 어떤 거부도 거절도 없이 점점 더 뜨겁고 농밀해지는 입맞춤을 받아들이는 딜라일라의 눈은 여전히 감겨 있었다.

하지만 에릭은 내내 눈을 뜨고 있었다. 그래서 딜라일라의 미간이 저도 모르게 아주 조금 오므라들었을 때, 그는 지체 없이 입술을 떼어 냈다.

“흐, 아……?”

눈을 감고 있던 딜라일라는 입술을 막고 지분거리고 있던 것이 떨어져 나간 뒤에 본능적으로 막혔던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가, 그제야 키스가 끝나 버린 것을 알고 눈을 떴다.

초여름의 호수처럼 옅은 하늘색 눈동자가 자신을 올려다보자 에릭이 그제야 눈을 꾹 감았다.

그래서 에릭은 딜라일라의 표정을 보지 못했다. 딜라일라는 웃지도 울지도 않는 무표정한 얼굴로, 무언가를 곱씹는 듯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 표정은 이내 보는 이가 없는데도 부러 방긋 띄워 올린 미소의 뒤로 숨어들었다.

딜라일라는 다시 자신의 눈물로 젖은 에릭의 가슴팍에 이마를 기댔다. 쿵쿵, 심장이 달려 나가는 소리가 귓가로 고스란히 전해졌다.

“……미안해요.”

심장 소리에 섞여 에릭이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귀로 들렸다기보다는, 이마를 맞댄 가슴팍에서 울리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그의 목소리는 작았다. 딜라일라는 팔을 뻗어 다시 에릭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헉, 숨을 들이마시는 에릭의 상체에 그녀가 가슴을 짓누르다시피 달라붙었다.

“…….”

누구의 것인지도 모를 타액으로 젖은 딜라일라의 입술이 열렸다가, 닫혔다가, 열렸다가, 다시 닫혔다. 그리고 다시는 열리지 않았다.

에릭도 딜라일라도 입을 열지 않았다. 몸을 꼭 맞붙인 채로 서로의 체온을 느끼면서 그들은 한참을 그대로 앉아 있었다. 저녁이라 부를 수 있는 시간이 지나고, 밤이 되어 정말로 그녀가 돌아가야 할 시간이 올 때까지.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짭조름하고 조금은 비릿한 바닷바람이 겨울에도 얼핏 따스하게 불어오는, 안온한 남쪽 마을에서 있었던 그들의 만남은 그렇게 끝났다.

* * *

신년 휴가가 끝나고, 셰 상브르에 학생들이 돌아왔다.

딜라일라로서는 감회가 새로웠다. 졸업 학년인 그녀는 이제 한 학기를 수료하고 나면 아카데미를 영원히 떠나게 될 것이다. 아무리 딜라일라가 행정 교양학부의 수석이라고는 하지만, 주로 평민에 가까운 학생들이 연줄과 미래를 위해 선택하는 아카데미 상위 과정을 선택하게 되지는 않을 테니까.

그러니까 이제 그녀에게는 졸업식이 있는 여름까지만 시간이 남아있는 셈이었다.

딜라일라는 오랜만에 돌아온 기숙사에서 혼자서 짐을 풀다가 문득 가방 안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에릭은 먼저 돌아갔어요. 여기서는 실험하기가 힘들다나, 곧 아카데미 휴가도 끝나니까, 아버지께 얼굴을 비칠 겸 해서 본가로 간다더군요. 저는 더 쓸 게 있어서 남아 있지만.”

그 밤, 묘하게 잠이 밀려온 탓에 늦잠을 잔 딜라일라가 에릭에게 돌려줄 코트를 가져다주기를 깜빡했다고 말하자 오딜은 에릭이 아침 일찍 해안가 마을을 떠났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아마도 자신은 에릭과 다시 만날 틈이 없을 테니, 아카데미에 돌아가서 직접 돌려주는 편이 좋을 거라는 말을 덧붙이기도 했다.

그녀의 조언에 따라 코트는 아카데미로 돌아온 딜라일라의 짐 속에 얌전히 끼어 있었다. 몸을 따뜻하게 해 주는 마법이 깃들어 있는, 흔치 않은 코트였다. 돌려주지 않을 수도 없었다.

하지만 당당하게 사람들이 가득한 곳에서 코트를 돌려줄 수도 없었다. 그렇게 하면 딜라일라와 에릭을 두고 그들이 휴가 기간 동안 만남을 가졌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알게 될 테고, 로드릭이 끔찍하게 염려하는 ‘오해’가 생겨날 여지를 대놓고 사방에 뿌리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니 남들의 눈을 피해서 돌려주어야 했다. 딜라일라에게는 그럴 방법 역시 있었다. 지금까지 몇 번이나 그래 왔듯이, 모두가 잠든 밤에 에릭의 방으로 숨어드는 것이다.

손끝으로 코트의 표면을 가만히 쓸어 보던 딜라일라의 얼굴이 천천히 달아올랐다. 흰 피부에 물이 들듯 퍼져 나간 열기는 그간 딜라일라를 괴롭혀 온 기억이 떠오를 때마다 그녀의 얼굴 위에 붉은빛을 덧칠했다.

처음 에릭의 방에서 고작 책을 좀 읽다가 들켜서 뛰쳐나왔을 때도 딜라일라는 스스로가 미친 게 아닐까 의심하며 얼굴을 붉혔다. 두 번째로는 그의 품에 먼저 좀 파고들었다는 것으로도, 돌아선 뒤부터 내내 어떻게 그런 대담한 짓을 했는지를 생각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먼저, 자신의 입으로 입 맞춰 달라고 했다. 심지어 이유조차 명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과정도 결과도 명확히 알고 있었다.

당연히 처음부터 그럴 생각으로 찾아간 것은 아니었다.

항상 착한 아이로 살아간다는 것은 힘든 일이다. 딜라일라도 가끔은 화가 나고, 짜증이 나고, 갑갑하고 우울할 때가 있었다. 그럴 때면 전부 다 집어던지고 부숴 버린 뒤에 엉엉 울고 싶기도 했다. 착하고 사랑스러운 딜라일라의 모습 따위는 전부 벗어 던져 버리고, 다른 사람들이 상상 못 할 행동을 마구 저질러 버리고 싶을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고 난 뒤가 무서웠다. 착하지도 않고 사랑스럽지도 않은 딜라일라 에리카가 되고 나면, 그녀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 갈피를 잃게 될 것이다. 그게 너무 두려웠다.

그래서 내내 꾹 참아 왔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혼자서 침대에 틀어박혀 이불을 뒤집어쓰고, 조그만 손으로 베개를 꾹꾹 눌러 대면서 소리 죽여 우는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이제는 에릭이 있었다. 그녀가 조금은 제멋대로 굴어도 무심하게 보아 넘기는 에릭. 딜라일라가 자신의 침대에서 데굴데굴 굴러다녀도, 갑자기 뒷걸음질 쳐 그의 품으로 뛰어들어도 신경도 쓰지 않는 에릭 브라이어.

잠깐만 그의 곁에서 조용히 앉아 있다가, 그 무심한 얼굴을 보고 몇 마디 말을 나누고 나면 괜찮아질 것 같았다. 그래서 딜라일라는 남몰래 에릭의 방으로 향했다. 그가 먼저 딜라일라에게 슬프냐고 물어볼 줄은, 안아 줄까 말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하고.

호의였을까? 호기심이었을까? 어쩌면 그냥 그렇게 무심한 낯을 하고도 사실은 다정한 구석이 있으니까 그랬을 뿐인지도 모른다. 아니, 아마 그럴 것이다.

그러나 무심한 다정함을 뜨끈한 그의 체온과 함께 마주했을 때, 불현듯 꾹꾹 눌러 놓았던 충동이 날카롭게 고개를 쳐들었다. ‘착하고 사랑스러운 딜라일라 에리카’에게는 불가능한, 아무도 상상 하지 못한 짓을 저질러 버리고 싶은 충동이.

“입 맞춰 줄 수 있어?”

충동은 딜라일라의 이상을 가뿐하게 내리누르고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그 순간 어떤 쾌감이 번득였다. 그녀를 꽉꽉 내리누르고 있는 것만 같던 압박감이 이성과 함께 파도에 휘말리는 금빛 모래처럼 스르르 흘러내렸다. 손가락 사이가 간지러운 것 같은 느낌.

맞닿은 입술은 뜨겁고 말랑했다. 싸늘한 냄새가 났다. 그가 홀짝거리고 있던 차 향, 풀잎 냄새. 어딘지 아득하게 흔들리는 잉크와 묵은 종이 냄새. 침대 시트가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온몸을 뒤덮은 무거운 에릭의 체온. 입술 새로 파고들던, 도저히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어떤 격정과도 같은 것. 딜라일라는 쏟아지는 감각의 폭포를 고스란히 받아들였다.

나쁜 짓을 저지르는 기분은 상상보다 훨씬 더 짜릿하고, 좋았다.

“미안해요.”

그래서 딜라일라는 에릭에게 말하지 못했다. 미안해야 하는 것은 자신이라고.

떠오를 때마다 딜라일라의 머릿속을 날카롭게 헤집는 첫 키스의 기억은 딜라일라가 처음으로 저지른 나쁜 짓의 추억이다. 그녀의 생애 첫 죄악은 입맞춤이 아니라, 그를 이용한 것이다.

그러니 딜라일라가 해야 할 일은 명확했다. 에릭에게 코트를 돌려주고,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사과하는 것이다. 그 후로도 입맞춤의 기억이 떠오를 때마다 자신이 저지른 일을 부끄러워하고 죄스러워해야 한다. 그게 옳다.

하지만 처음 경험한 키스는 너무나도 자극적이었다. 충격적이기 짝이 없었던 수위 높은 소설보다도 훨씬 더.

딜라일라는 그 키스로 무언가가 변해 버렸음을 알았다. 착하고 사랑스러운 딜라일라 에리카의 껍질은 에릭에게 키스를 조르던 순간 쩍 틈을 벌리며 찢어졌다. 그와 입술이 맞닿는 순간에는 기어코 녹아서 떨어져 나가 버리고 말았다. 한 꺼풀 벗겨지고 난 뒤에는 되돌릴 수 없다. 변태를 끝낸 나비가 고치를 다시 주워 입는다고 번데기로 돌아갈 수 없듯이.

이제 딜라일라는 수위 높은 소설을 그 애의 눈앞에서 읽었다는 이유만으로 전전긍긍하며 얼굴을 붉히던 순진한 소녀로 돌아갈 수 없었다. 적어도 그의 앞에서는 절대 그럴 수 없을 것이다.

나쁜 짓의 맛을 알아 버렸으니까.

그래서 딜라일라는 예전처럼 깊은 밤 에릭의 기숙사 방을 찾아가기가 두려웠다. 자신이 다시 에릭을 끌어들여 다음을 맛보고자 할까 봐.

딜라일라는 처음으로 자신이 가진 의지와 이성을 낮잡아 보게 되었다. 에릭의 방에 가서 잉크와 종이 냄새와 뒤섞여 피어오르는 싸한 나뭇잎 냄새를 맡으면, 맡는 것만으로도 어쩐지 마음이 편안해지는 그의 체향을 느끼게 되면, 참지 못할 것 같았다. 차라리 그 애를 다시 보지 않으면 괜찮을까?

하지만 언제나 본능이 그러하듯이, 그녀의 마음은 이성을 배신하고 있었다. 마침 아주 훌륭하고 적절한 핑계도 그녀의 손에 있었다. 분명 부드러웠을 코트의 감촉이 어쩐지 까슬하게 손끝에 걸렸다.

딜라일라는 에릭의 코트를 곁에 빼 두고, 짐 정리를 마저 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막 기숙사에 도착해 마주친 친구들과 인사를 나누고 방으로 들어온 참이었다. 아직 밤까지는 시간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내내 곁에 둔 코트를 보았다가, 괜히 한번 쓸어보았다가, 다시 곁에 내려 두기를 반복하던 딜라일라는 저녁이 다 되도록 간소하게 챙겨 갔던 짐마저 전부 정리하지 못했다. 그래 놓고는 괜히 피곤해진 탓에 침대에 제대로 눕지도 않고 잠깐 기댔다가 아예 푹 잠들어 버리기까지 했다.

그래서 딜라일라가 에릭의 방으로 찾아간 것은 다시 아카데미의 강의가 시작되고도 나흘이나 지난 후였다. 당연히 그녀가 그때까지도 짐 정리를 마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첫날 찾아갈 기회를 놓치고 나자, 괜히 생각이 많아져 용기가 사그라든 탓이었다.

언제나처럼 깊은 밤이었다.

딜라일라는 마가렛이 주문해 준 실크 잠옷 차림이었다. 종아리 아래까지 내려오는 긴 치맛자락이 넉넉하게 휘감기는 상아색 원피스는 끝자락과 소매에 큼직한 러플이 달려 있어 그녀가 팔을 쭉 뻗어도 긴 러플이 손등을 반절이나 덮었다. 잠잘 때 편하도록 목선은 넓었고, 가슴팍에는 손으로 짠 아기자기한 레이스가 붙어 있었다. 얼핏 보기에는 잠옷보다 품이 넓은 실내복 드레스와 다름없는 디자인이었다.

그래도 그것만으로는 정원을 가로지르는 동안 추위에 떨 것이 확실했기 때문에, 딜라일라는 허벅지까지 내려오는 긴 녹색 카디건을 위에 걸쳤다. 그녀가 가진 카디건 중에서 가장 도톰하고 따뜻한 것이었다.

그러고도 딜라일라는 차가운 사다리를 쥐고 여자 기숙사를 내려와 정원을 가로지르는 짧은 시간 동안 손에 든 코트를 어깨에 걸치고 싶은 충동을 참아야만 했다. 따뜻한 남부와 달리 셰 상브르의 메마른 겨울바람은 순식간에 체온을 빼앗아 갔다. 딜라일라는 남자 기숙사 벽면에 붙은 사다리를 오를 때쯤 되어서는 사다리를 잡을 때마다 시린 손을 호호 불어야 했다.

마침내 그녀가 남자 기숙사의 이 층 복도 끝에 올라섰을 때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어깨를 떨고 있었다. 그를 찾아가는 짧은 사이에 자신이 다시 어떤 쓸모도 없고 도움도 되지 않는 생각에 사로잡히지 않을까 걱정했던 것이 무색하게, 그녀는 뼛속까지 스며드는 추위 말고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복도는 실내이긴 하지만 난방이 되는 방 안보다는 썰렁했다. 딜라일라는 당장이라도 따뜻한 공기가 절실했다.

그래서 그녀는 망설임 없이 에릭의 방문을 두들길 수 있었다.

똑똑똑, 세 번의 노크 소리는 언제나 그의 방을 여는 마법의 주문이었다. 이번에도 그랬다. 에릭은 이 깊은 밤에 방문한 이가 누구인지 묻지도 않고 문부터 열었다.

에릭의 시선은 처음부터 딜라일라의 얼굴이 있을 높이에 고정되어 있었다. 곧장 눈이 마주쳤다.

딜라일라는 인사를 건네거나 언제나처럼 들어가도 되는지 따위를 묻지 않았다. 통통하고 예쁜 분홍빛 입술은 꼭 다물린 채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손에 든 에릭의 코트를 슬쩍 들어 보였다. 코트를 쥔 손이 파랗게 질려서 덜덜 떨리고 있었다.

“……들어와요.”

에릭이 문 앞에서 비켜섰다.

방 안으로 들어선 순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따스한 공기가 몰아닥쳤다. 안온하기보다는 폭력적인 온기였다. 따뜻하고 습한 공기가 건조하게 얼어 있던 딜라일라의 뺨이며 손가락, 목덜미에 달라붙었다. 순식간에 녹아내리기 시작한 피부가 따끔따끔했다.

오랜만에 찾은 그의 기숙사 방은 무작정 안온하기만 하던 이전과 달리, 그 폭력적인 온기로 딜라일라의 인상에 다시금 새겨졌다.

“따뜻하다.”

“누나는 추워 보여요.”

며칠 내내 망설이던 것이 무색하게, 딜라일라에게 몰아닥친 열기는 그녀의 생각을 깨끗하게 녹여 버렸다. 남아 있는 것은 에릭뿐이었다.

그가 걸음을 걷거나 말을 할 때마다 어렴풋이 흔들리는 따뜻한 캐러멜 색 머리카락은 여전히 부드럽게 빛났다. 매끄러운 얼굴에는 표정이 없었지만, 방 안에 가득한 열기 탓인지 그의 얼굴은 조금 발갛게 달아오른 것처럼 보였다. 그의 콧대며 풍성한 속눈썹이 등불의 빛을 받아 따뜻한 색으로 반짝였다.

그리고 문을 여는 순간 곧장 마주치던 금빛 눈동자. 그 눈동자는 딜라일라를 두고 속단하거나 거리를 두는 법이 없었다. 그런 일이 있은 후에도 에릭은 곧장 딜라일라를 직시했다.

하지만 그 눈동자는 이전과 꼭 같지는 않았다.

녹아내리는 태양처럼 반짝이는 금빛 눈동자 안에 딜라일라의 얼굴이 담기는 순간, 심지에 불꽃이 일렁이듯 어떤 것이 일렁이는 것을 딜라일라는 보고야 말았다. 어쩌면 딜라일라의 생각을 녹여 버린 것은 따스한 온기보다도 그의 눈 안에서 타오르던 미약한 열망일지도 모른다.

“코트, 돌려주는 걸 깜빡했지 뭐야. 다음 날 오딜에게 가지고 갔더니 네가 이미 떠났다고 해서.”

“네.”

“아카데미에서 돌려주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어.”

오딜의 조언을 자신이 생각한 것처럼 말하며 딜라일라는 생긋 웃었다. 에릭이 딜라일라가 내민 코트를 받아 들고는 방 안쪽으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갔다. 침실 곁에 있는 옷장에 넣어 둘 생각일 테지. 딜라일라는 그의 뒤를 졸졸 따라 침실로 들어갔다.

딜라일라가 책을 껴안고 몇 번이나 뒹굴던 침대는 언제나처럼 거기에 있었다. 누운 적이 없는 것처럼 말끔하게 정리된 침구와 함께. 딜라일라는 스스럼없이 침대에 털썩 앉았다. 푹신한 매트리스가 그녀의 무게만큼 꺼져 들었다.

그녀를 내버려 둔 채로 응접실로 걸어 나갔던 에릭은 금세 양손에 하나씩 찻잔을 들고 그녀의 곁으로 돌아왔다.

“일단 마셔요.”

차를 끓일 만한 다구는 물론이고 찻잔마저 없던 방에서 갑자기 어디서 차가 나왔는지, 의아하게 에릭을 올려다보는 딜라일라에게 그는 짧게 말할 뿐이었다. 딜라일라는 일단 그의 손에서 잔을 받아 들고, 안에서 찰랑거리는 짙은 노란색 액체를 입술에 살짝 대어 보았다. 막 끓인 거라면 너무 뜨겁지 않을까 싶어 온도를 가늠해 본 것이었는데, 어찌 된 일인지 입술에 닿은 찻물은 딱 마시기 좋게 따끈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홀짝홀짝 차를 마시기 시작한 딜라일라를 내려다보며 에릭이 말했다.

“마침 끓인 참이었어요.”

“어떻게?”

“그거, 가져와서요.”

정확하게 무엇인지 말하지 않아도 딜라일라는 그가 가져왔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들었다. 물을 끓이는 마법 기구를 말하는 것이었다. 목 안으로 넘어간 액체가 몸속부터 온기를 전하는 것을 느끼며 그녀가 추위에 움츠렸던 어깨를 폈다. 뜨끈한 온기와 상반되는 싸늘한 향기가 수증기와 함께 물씬 피어올랐다. 언젠가 딜라일라가 무심코 고르고 오딜이 좋은 선택이라고 말했던 로즈마리 차였다.

“가져와도 돼? 기숙사에서 실험은 금지잖아.”

그녀의 말대로였다. 사칙 상 기숙사 방에서 실험은 금지다. 그렇기에 마법 공학부 학생이라도 본래 실험을 하려면 따로 빈 실험실을 시간에 맞추어 요청하거나 정해진 실험 시간을 활용해야만 했다. 에릭은 개인적인 연구로 능력이 뛰어남을 입증했기 때문에 그의 연구 활동을 장려하는 차원에서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개인적인 실험을 할 수 있는 실험실을 따로 배정받았다.

“실험을 하는 게 아니라 완성된 기구를 쓰는 거니까요.”

“아, 그러네. 음…… 그럼 괜찮은가……?”

가볍게 덧붙이는 말에 딜라일라가 갸우뚱거리며 사칙을 되새겨 보았다. 그러고 보니 확실히 마법 기구를 기숙사 내에서 사용하면 안 된다는 사칙은 없었다. 물론 실험에 이용하는 것이 아닌 일상적으로 쓰는 마법 기구는 지금까지 존재하지 않았으니, 실험만 금지하면 따로 기숙사에서 마법 기구를 사용하는 일이 있을 거라는 생각조차 못 했기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누나도.”

“응?”

제 방처럼 침대 위에 앉아서는 괜찮은가? 으음, 괜찮겠지? 따위의 혼잣말을 입 속으로 중얼거리던 딜라일라에게서 몇 발짝 떨어진 곳에 서서 찻잔을 한 손에 든 에릭이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누나도 지금 사칙 어기고 있으면서.”

사실을 말했을 뿐인데도, 어쩐지 비난처럼 들리는 말이었다. 투정 같기도 했다. 어쨌든 그의 말을 듣고 제풀에 움찔한 딜라일라는 다행히 손에 든 찻잔을 아슬아슬하게 침대 위에 엎지르지 않는 것에 성공했다.

하지만 대신이라고 할지, 싸늘한 풀잎 냄새가 그득한 찻물이 딜라일라의 실크 잠옷에 튀었다. 찻잔을 얼굴에 가깝게 바짝 받쳐 들고 있었던 탓에, 흔들리는 찻잔 밖으로 흘러넘친 액체가 그녀의 손을 적시고 가슴 위로 뚝뚝 떨어지고 만 것이다.

앞가슴을 장식한 하얀 레이스가 연한 노란빛으로 물들었다. 그 아래 밝은 상아색의 실크 위에도 찻물이 튀고 흘러내린 모양대로 젖은 자국이 남았다.

“앗, 뜨…… 겁지는 않지.”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말을 딜라일라가 겸연쩍게 마무리했다. 손바닥을 적신 찻물은 아까 전 입술로 확인하고 삼킬 때부터 뜨겁지는 않았으니까. 적당히 뜨끈하게 느껴질 정도의 온기가 그녀의 손을 타고 흘러내렸다. 결국 가슴팍뿐만 아니라 소매에 달린 러플이나 치맛자락에도 찻물이 들고 말았다.

손을 따라 흘러내리는 찻물의 온도에, 다 녹은 줄만 알았던 피부가 다시 한번 따끔거렸다. 딜라일라는 찻잔을 곧장 내려놓지도 못했다. 당장 가까이 내려놓을 곳이 없었을뿐더러, 젖은 손을 함부로 움직였다가는 이번에야말로 침대 위에 찻잔을 엎지를 것 같았다. 어정쩡하게 찻잔을 든 자세 그대로 딜라일라가 입술을 달싹였다.

“이거 안 지워지겠는걸…….”

재빠르게 움직인 것은 에릭이었다. 그는 가까이 있는 책 더미 위에 들고 있던 찻잔을 대충 내려놓았다. 자칫하다가 건드리기라도 하면 책이 그대로 쏟아지는 찻물에 젖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하지도 않는 것 같았다. 찻잔을 내려놓은 그가 침대 가에 걸터앉은 딜라일라의 앞에 몸을 숙였다.

아니, 그냥 숙인 게 아니었다. 그는 딜라일라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커다란 몸을 그녀보다 더 아래로 낮추었다. 딜라일라의 시선 아래에, 처음으로 에릭의 머리꼭지가 놓였다.

여전히 애매한 자세로 찻잔을 바짝 받쳐 들고 앉은 딜라일라는 갑작스레 눈앞에 나타난 부드러운 캐러멜 색이 휘몰아치는 정수리를 내려다보았다. 고개를 숙인 에릭의 머리칼이 흐드러져서, 그의 눈이 보이지 않았다. 보이는 것은 곧게 뻗은 콧대와 그 아래에서 조심스럽게 움직이는 에릭의 크고 마디진 손뿐이었다.

에릭의 손이 입고 있던 셔츠의 소매를 당겨 냈다. 그의 셔츠 역시 흰색인 것은 똑같았으나, 그는 개의치 않고 당겨 쥔 소매 끝으로 딜라일라의 잠옷 위에 떨어진 찻물 얼룩을 꾹 눌렀다.

처음에는 치맛자락으로 덮인 무릎 위쪽을, 다음에는 허벅지 위를. 얼룩을 새기고도 실크 안으로 온전히 스며들지는 못하고 흔적을 더 넓게 퍼트리는 찻물이 완전히 자신의 소매로 옮아 오도록 누르고 느리게 문질렀다.

그것으로 이미 스며든 얼룩이 지워지는 것은 아니었으나, 더 넓게 퍼지지는 않았다.

“팔 들어 봐요.”

“으, 응.”

치맛자락에 떨어진 얼룩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꾹꾹 눌러 대던 에릭이 속삭였다.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는 그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딜라일라는 티 하나 없이 새하얗던 그의 셔츠 소매가 노랗게 얼룩진 모양을 바라보며, 엉겁결에 찻잔을 든 손을 주춤 들어 올렸다. 그녀의 시야가 동그란 찻잔과 그 안에 고여 흔들리는 맑은 액체, 그리고 로즈마리 특유의 싸늘한 향기로 가득 찼다.

꾸욱. 가슴이 눌렸다. 가장 크게 찻물이 번진, 가슴팍 전체를 장식한 섬세한 레이스 위에 그의 손이 닿았다.

세게 누른 것도 아닌데 숨이 턱 틀어 막혔다. 뒤로 몸을 확 빼 버리거나 피할 수도 없었다. 그랬다가는 침구고 뭐고, 당장 눈앞에 무릎을 꿇고 앉은 에릭의 갈색 머리카락 위에 그나마 남아 있는 찻물을 전부 엎어 버릴 터였다. 딜라일라는 몸을 바로 세우고 양손으로 찻잔을 얼굴에 가깝게 바짝 들어 올린 채로 뻣뻣하게 굳었다.

에릭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괜히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얼굴이 보이지 않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지금 분명 자신이 쏟아 버린 얼룩을 문질러 주고 있을 뿐인데. 얼굴이 보여도, 언제나 그랬듯이 속내라곤 전혀 없는 것 같은 매끈한 무표정일 텐데.

쇄골에 가까운 가슴 위쪽을 누르고 있던 그의 손이 천천히 아래로 미끄러졌다. 둥글게 부푼 살덩이의 모양을 가늠해 보는 것처럼, 하지만 딱 그뿐인 담백한 움직임으로. 딜라일라는 저도 모르게 숨을 참았다.

에릭의 손은 아주 느리게 그녀의 앞가슴 위를 배회했다. 어쩐지 몸이 더웠다. 잠옷 아래 가슴골에 땀이 맺히고 있는 것 같다고, 딜라일라는 생각했다.

“으응…….”

소매를 당겨 쥔 손가락의 접힌 마디가 주름진 실크와 올록볼록하게 짜인 레이스 위를 스쳤다. 딜라일라는 그 순간부터 후회하기 시작했다. 속이 비치지 않는 잠옷인 데다 가슴은 레이스 장식으로 가려지고 그 위에 카디건까지 걸친 차림이라고 해도, 두꺼운 속옷을 챙겨 입었어야 했는데.

이제는 춥지도 않은데 단단히 굳어지기 시작한 돌기를 에릭이 눈치채면 어쩌지.

딜라일라의 걱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에릭은 쏟아진 찻물이 번진 모양을 따라 무심하게 손을 움직였다. 그러니까, 결국에는 딜라일라의 유두 위를 꾹 누르고 문지르기 시작했다는 뜻이었다.

“……!”

참았던 숨을 짧게 내쉬고 있던 딜라일라는 입에서 흘러나오려는 신음을 온 힘을 다해 참았다. 방 안은 더할 나위 없이 조용한데, 귓속에 윙윙대는 잡음이 가득 찼다. 눈앞이 빙글빙글 도는 것 같았다.

문득 숨소리가 들렸다. 애써 참아도 결국에는 참지 못하고 헐떡이는 딜라일라 자신의 숨소리. 그리고 그와는 판이하게 다른, 침착하고 일정하게 공기를 들이마시고 내쉬는 평온한 에릭의 숨소리가.

그 평온한 숨소리가 문제였다. 딜라일라는 이렇게나 곧 끊어질 줄 위에서 버티고 있는 것처럼 힘겹게 헐떡대고 있는데, 에릭은 그걸 구경하는 사람처럼 미동이라고는 없는 것이 문제였다.

납득도 이해도 할 수 없는 이유였지만, 결과는 확실했다. 딜라일라는 짜증이 났다.

“다 됐어요.”

전부 그 탓이었다. 그렇게 말하며 손을 뗀 에릭이 딜라일라의 잠옷에 있는 것과 꼭 같은 색으로 얼룩진 셔츠 소매를 놓고 대신 딜라일라의 찻잔을 받아 들었을 때, 딜라일라가 찻잔이야 엎어지든 말든 에릭의 목덜미를 잡아채고 끌어당긴 것은.

조심스럽고 어색하게 시작됐던 지난번과는 달랐다. 고개를 빳빳이 들어야 했던 딜라일라는 이번에는 몸을 구부리고 얼굴을 아래로 내렸다. 작은 손으로 두툼한 뒷목을 감아 쥐고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손등을 간지럽히는 것을 느끼면서, 자신보다 아래에 있는 에릭의 입술에 무작정 입술을 가져다 댔다. 이가 부딪치는 소리가 날 만큼이나 거칠게 입술과 입술이 맞부딪쳤다.

하지만 무작정 입술을 부딪친 후 딜라일라는 당황했다. 충동적으로 그를 끌어당기긴 했지만, 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지난번에는 어땠더라……? 딜라일라는 용감하고 적극적이었던 자신의 행위와는 달리 어색한 생각에 빠져들었다.

그 짧은 대치에서 먼저 움직인 것은 그런 딜라일라가 아니라 에릭이었다.

단단한 것이 바닥에 떨어져 구르는 둔탁한 소음이 났다. 그와 동시에 에릭의 커다란 손이 딜라일라의 뒤통수를 붙들었다. 세게 부딪쳤다 조금 떨어졌던 입술이 다시 한번 맞붙었다. 입술이 꾹 눌리고 비벼졌다. 아예 이를 세워 통통한 아랫입술을 슬쩍 깨무는 통에, 딜라일라의 입술이 틈을 내보였다. 에릭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입술 새로 두툼한 혀가 파고들었다. 분명 그 표면은 말캉한데, 더 말랑한 것만이 맞붙은 사이에서 파고드는 혀끝은 왠지 단단하게 느껴졌다. 딜라일라의 입 속을 침범한 혀는 점막을 문지르고, 치열을 쓸어 내고 두드리다가, 끝내 딜라일라의 혀에 감겨 왔다.

살짝 맞닿은 듯했다가, 이내 휘감겼다. 감아올리는 듯하다가 또 떨어져 나갔다. 그러고는 아래로 파고들었다. 혀 아래, 혓바닥보다도 더 말캉하고 예민한, 입 안에서 가장 연약한 점막이 마구잡이로 파고드는 혀와 마찰했다.

뒤통수를 붙잡은 커다란 손이 딜라일라의 머리칼을 헤집었다. 두피를 간지럽히는 접촉이 키스로 빼앗긴 정신에도 선명하게 느껴졌다. 뜨거웠다. 그래서 딜라일라도 에릭의 뒤통수를 붙잡았다.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손가락 사이를 간지럽혔다. 둘은 마치 싸움이라도 하듯 서로의 머리칼을 붙들고 쓸어내리며 혀를 섞었다.

흣, 응. 어느새 딜라일라는 목 안으로 끙끙대며 앓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것을 자각하지도 못하면서, 딜라일라는 빈손을 뻗어 에릭의 가슴팍을 짚었다. 손끝에 빳빳하게 다려진 셔츠가 걸렸다. 딜라일라는 밀어낼 듯 에릭의 가슴팍을 짚었지만, 그를 밀어내지 않았다. 도리어 빳빳한 셔츠가 엉망으로 구겨지도록 움켜쥐고 당겼다.

더 가까워질 것도 없을 것 같았는데, 당기는 대로 에릭이 가까워졌다. 그 서슬에 자신의 상체가 조금씩 뒤로 기울고 있다는 사실도 그녀는 몰랐다. 그래서 계속해서 당기고, 당기고, 또 당기다가 어느 순간 그녀는 침대 위에 등을 대고 누웠다.

조금 전까지는 내려다보고 있었는데, 다시 딜라일라는 에릭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내리깔린 금빛 눈동자를 마주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 눈동자에는 이제는 숨길 생각도 없이 타오르고 있는 욕망이 있었다. 지는 태양처럼 금빛으로 번쩍이는…….

그래서 딜라일라는 눈을 감아 버렸다. 아직도 축축함이 남아 있는 그녀의 가슴이 에릭의 단단한 가슴에 내리눌렸다.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 * *

에릭은 딜라일라보다 하루 먼저 기숙사에 도착했다. 그때에야 그는 자신이 딜라일라의 손에 코트를 남겨 두고 왔음을 깨달았다. 겨울 휴가를 보내기 위해 바리바리 짐을 싸서 떠났다가 다시 양손 가득 짐을 들고 돌아오는 다른 학우들과 달리, 그가 기숙사에서 챙겨 갔던 것이라곤 그 코트뿐이었다.

옷장 가운데 텅 빈 자리를 바라보며 에릭은 생각에 잠겼다. 무심코 챙겨 와서는 응접실 테이블 위에 올려 둔 마법 포트와 함께, 그 빈자리는 어쩔 수 없이 그에게 딜라일라를 떠올리게 했다.

그녀는 올 것이다. 그에게 돌려줄 코트를 손에 들고 에릭이 모르는 길을 따라, 다시 그의 방으로.

그 밤부터 에릭은 밤이 깊어 가고 사위가 조용해질 무렵이면 물을 끓였다. 딱 두 사람이 마실 차를 우려낼 분량의 물을 공연히 한 번, 두 번, 세 번씩 끓였다. 따뜻한 방 안이 조금 갑갑하게 느껴질 정도로 더워질 때까지.

보글보글 물이 끓는 소리가 들리면 반사적으로 기억이 떠올랐다.

“네가 만들었어?!”

그러잖아도 하얗고 말랑한 얼굴이 가득 찰 정도로 커다란 눈을 더 크고 둥그렇게 뜨면서, 순수한 경탄을 내뱉던 딜라일라의 목소리가 보글거리는 물소리에 섞여 들렸다.

“그래도, 대단해.”

시기도 비꼼도 없는 칭찬은 그에게는 너무나도 생소한 것이었다. 그래서 마법 약을 만드는 것 같다며 신기해하는 딜라일라에게 괜히 더 별것도 아니라는 듯 굴고 말았다. 차를 우리고 있는 것뿐이라고, 별다른 효능도 없다고. 그러나 딜라일라는 뚱한 에릭의 목소리에도 달짝지근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마법의 차니까, 마시면 기분이 좋아질 거라고.

그래서 에릭은 척 보기에도 시무룩해 보이는 딜라일라가 찾아온 그날 저녁, 다시 차를 끓였다. 딜라일라는 결국 찻잔에는 입도 대지 않았지만.

“입 맞춰 줄 수 있어?”

제대로 들은 것인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가슴속에서 무언가가 와르르 무너지는 소리가 나서, 딜라일라의 말이 그 소리에 묻혔다. 심장이 쿵쿵거리며 온몸으로 내달리는 것 같았다.

내리감은 눈꺼풀이, 촘촘하니 젖은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는 것을 본 순간에는 그 시끄럽던 심장 소리마저 전부 사라졌다. 시간이 멈춰 버린 게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 정도로 세상 모든 것이 아득하게 멀어졌다.

선명한 것은, 품에 안긴 딜라일라의 몸에서 피어오르는 달큰한 체향. 목덜미에 닿아 오는 그녀의 떨리는 숨결. 도톰한 천을 사이에 두고도 느껴지는 그녀의 말랑하고 동그란 어깨의 감촉 같은 것들이었다.

무슨 정신으로 입술을 맞부딪쳤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입술이 닿자마자 그는 한 가지 명백한 사실을 깨달았다.

뭔가가 잘못됐다.

연구나 실험을 하다 보면 어느 순간 깨달을 때가 있다. 뭔가가 어긋났다고, 이 실험은 실패할 거라고. 명백한 증거나 이유도 없이 그저 그렇게 느껴지는 순간이 있었다. 내리막길을 달려 내려가다가 어느 순간 곧 넘어지고 말 것을 예상하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그 근거 없는 예지는 명백한 불안감을 동반하고, 그리고 대부분 들어맞는다. 끝없는 내리막길을 달려 내려가는 사람이 언젠가는 넘어지는 게 당연하듯이.

그래서 에릭은 내내 눈을 뜨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굴러 떨어지기 전에 멈춰 서기 위해서.

“……미안해요.”

마침내 입술이 떨어지고 딜라일라가 막혔던 숨을 몰아쉬는 동안, 에릭이 어렵게 말을 뱉어냈다. 하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돌아오는 것은 품 안에 닿는 말랑하고 조그만 몸뿐이었다.

그 순간 에릭은, 마침내 그가 앞도 보지 못하고 달려 내려가던 내리막길에서 넘어져 구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평소대로라면 아무리 힘이 없어도 고개를 저으며 웃어 보이고는, 아니라며 조근조근 돌아왔을 대답이 전혀 돌아오지 않음에.

머리 위로 차가운 물이 쏟아지는 것 같았다. 열 오른 접촉과 함께 미지근하게 달아올랐던 그의 손끝이 차갑게 식었다. 절절히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그의 앞에서는 조금 제멋대로고, 그럼에도 언제나 순하고 사랑스럽던 사람이었다.

그래, 사랑스러웠다. 그 사실을 에릭은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타인으로부터 유리된 자신만의 세상으로 아무렇지 않게 들어서는 것을 말끄러미 보고 있으면서도 차마 거부할 수 없을 정도로 사랑스러운 사람이었다. 어쩌면 대식당에서 눈이 마주쳤던 가장 첫 순간부터, 당황해서 제대로 대답도 하지 못하고 자리를 피해야만 했을 정도로.

그녀와 눈을 마주한 첫 순간부터, 그는 이미 그녀를 거부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찾아온 것은 환희가 아니라 고통이었다.

배웅을 단박에 거절하고 밤거리로 달려 나가던 딜라일라를 호텔 로비에 서서 멍하니 바라보던 에릭은, 그녀의 뒷모습이 상점가의 불빛 사이로 사라진 뒤에도 한참을 더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느릿느릿 걸음을 옮겨 방으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늦은 밤이었다.

그는 그때서야 자신이 저지른 짓을 실감했다.

부글부글 성이라도 난 것처럼 거칠게 끓어오르는 물소리에 에릭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단단하게 굳었던 어깨를 한번 쭉 늘려 펴고는 포트 아래쪽을 눌러 물을 끓이기를 멈췄다. 달칵거리며 튀어나온 마법 회로에서 화끈한 열기가 치밀어 올랐다. 그 열기에 방 안이 조금 더 더워졌다.

노크 소리는 오늘 밤에도 들리지 않았다. 에릭은 한숨을 내쉬고 다 끓은 물을 그대로 내버려 둔 채로 의자에 커다란 몸을 걸쳤다. 긴 밤이 지나는 동안 물은 수증기를 피워 올리며 서서히 식었다. 물이 미지근하게 식어 버릴 즈음이 되면 그는 다시 발열판에 시약을 부어 넣고 물을 끓이기를 반복했다.

새벽이 밝아 오기 직전이 되면 두 잔의 차를 우렸다. 그리고 두 잔 모두 자신이 마셔 버린 뒤에 잠들었다.

홀로 끓어오르는 물과, 두 잔의 차. 그리고 옷장 가운데 텅 빈 자리와 함께 잠들기를 며칠째 반복한 후에야 익숙한 노크 소리가 찾아왔다. 마침 막 두 번째로 물을 끓인 포트에서 마법 회로를 뽑아내고 있던 참이었다.

아직 그가 미숙하던 시절에 만든 물건인 탓에 물이 끓고 나면 꼬박꼬박 포트에서 마법 회로를 뽑아내야 했다. 뽑아낼 때마다 위험할 정도로 뜨거운 열기가 터져 나와서, 방 안의 공기는 그만큼 뜨거워져 있었다. 며칠 내내 그랬다. 남자 기숙사 이 층 복도 끝, 그의 방 안에는 기다림이 가득 차 있었다.

그는 기다리고 있었다. 무엇을 위해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르는 채로.

그리고 마침내 그녀가 찾아온 것이다. 에릭은 심장이 쿵 내려앉아 버린 것처럼 묵직해진 가슴을 두드리며 문가로 걸어갔다.

“들어와요.”

문을 열고, 며칠간의 기다림이 열기처럼 쌓인 방 안으로 그녀를 들이는 동안 에릭이 얼마나 긴장했던가. 하지만 딜라일라는 그의 긴장이 무색하게 말짱한 낯이었다. 다만 뺨이며 코, 손가락이 새파랗게 얼어 있었다. 에릭은 일단 며칠 내내 반복해서 익숙해진 손놀림으로 재빠르게 두 잔의 차를 우려냈다.

찻잔을 받아 든 뒤에도, 딜라일라는 놀라울 정도로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았다. 사칙 따위나 생각하며 혼잣말을 중얼댈 때는 정말로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그와의 입맞춤 따위는, 그리고 그 후 에릭이 느꼈던 짧은 절망 따위는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천진하게 종알거렸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똑같이 착하고 사랑스러울 딜라일라 에리카. 일순 그의 눈앞에서 녹아 사라져 버린 것만 같았던 여자가 거기 있었다.

“누나도 지금 사칙 어기고 있으면서.”

어린아이가 으레 하는 투정처럼 유치한 말이 튀어나온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그조차도 뱉어 놓고 얼핏 뾰족하게 모가 난 그 말에 놀랐는데, 딜라일라가 놀라 어깨를 움츠린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손에 들린 잔 안에서 찻물이 흘러넘친 것도.

당연하지 않은 것은 미친놈처럼 닦여지지도 않을 얼룩을 소매로 눌러 대고 있는 에릭 자신뿐이었다.

그도 자신이 왜 이런 미친 짓을 하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알 수 없는 것투성이였다. 아니, 그는 원래 알 수 없는 것이 많았다. 그동안 알 수 없다는 이유로 멀리했을 뿐.

하지만 딜라일라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불쑥 그의 방에 그 조그맣고 달짝한 몸으로 찾아왔다. 밀어낼 수도 없게 파랗게 언 손을 떨면서도 그의 코트를 손에 꼭 쥐고, 그의 세계로 발을 들였다. 이전과 똑같이 들어와서는 원래 자신의 자리였던 양 풀썩 앉아서 그의 시선을 봄 햇살을 맞듯이 당연하게 맞는다.

이전과 똑같을 수는 없는데도.

그래도 닿아 오는 체온만은 이전과 꼭 같은 만큼 따뜻했다. 에릭은 그 체온이 노란빛의 얼룩과 함께 자신의 소매 끝으로 옮아 오는 만큼 뾰족하게 가슴속을 찔러 대는 무언가를 애써 참아 냈다.

그러나 가까스로 그녀의 몸에서 손을 떼어 냈을 때, 딜라일라가 그에게 입을 맞춰 왔다. 뾰족하게 가슴 안쪽을 찔러 대던 것이 울컥 목 너머로 튀어나왔다.

“흣, 응…….”

미친 사람처럼 혀를 얽는 에릭을, 딜라일라는 끙끙거리면서도 밀어내지 않았다. 도리어 그의 셔츠 자락을 붙잡고 더 깊이 해 달라는 듯 끌어당겼다. 그는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떨쳐 낼 수 있을 그 미약한 힘에 이끌려 그녀에게 더 가까이 몸을 기댔다.

푹신한 매트리스 위로 소리도 없이 딜라일라의 어깨가 넘어갔다. 그는 짐승처럼 쏟아 내는 욕망을 받아들이고 있는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여름날의 호수처럼 새파랗게 맑은 눈동자에 그의 눈동자가 비쳤다.

그렇게 마주한 자신의 눈에는 질척한 욕망이 끈적대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목도한 후에도 그는 멈추지 못했다. 어쩌면 딜라일라의 눈동자가 그녀의 얇은 눈꺼풀 아래로 숨어 버린 탓인지도 모른다. 스스로의 저열함을 직시한 순간이 아주 짧았기 때문에.

침대 위에 길게 흩어진 분홍빛 머리카락이 그의 손가락 사이사이로 감겨 왔다. 그 감촉마저 달았다. 달콤한 향기가 그를 가득 에워싸고 있었다. 딜라일라의 체향이었다.

그녀의 머리칼을, 이마를, 뺨을 쓸어내리던 손이 아래로 미끄러졌다. 분명 그녀의 피부는 아직 조금 차갑고 보송한데도, 어쩐지 손바닥에 달라붙는 것 같았다. 손바닥으로 빠르게 맥동하는 그녀의 심장 소리가 전해져 왔다. 에릭은 그것을 느끼다가, 손을 더 아래로 미끄러뜨렸다.

딜라일라가 입은 드레스는 목선이 넓었고, 그녀의 눈부시게 하얀 쇄골은 무방비하게 노출되어 있었다. 손끝으로 그 모양을 가늠하듯 만지자 딜라일라의 목에서 가르릉대는 신음이 흘러나왔다.

“우, 응…….”

숨결도 목소리도 뭉개지는 입 안은 뜨거웠다. 달게 터져 나오는 신음이 에릭의 목 안으로 삼켜졌다.

고작 그따위 것을 허락이라고 여기면 안 된다. 그녀에게 자신이 그래서는 안 된다. 딜라일라 에리카는 너무나도 뛰어난 사람이고, 에릭 브라이어는 어떤 방식으로든 그녀에게는 부족했다.

손에 쥘 수 없는 보석이다. 벼랑 위 가장 높은 곳에 피어 있는 봄꽃이다. 진하고 연한 분홍빛과 달짝한 향기를 뚝뚝 떨어뜨리지만, 고작 에릭 따위가 손을 댈 수 없을 만큼 높은 곳에 있었다. 집안의 문제를 떼어 놓고도 그랬다. 딜라일라 에리카는 그야말로 세상 모두가 사랑해 마지않는 사람이 아니던가?

세상 모두에게 미움받는 에릭 브라이어와 달리.

에릭은 필사적으로 생각했다. 딜라일라가 그와 같은 마음을 가졌을 리가 없다고. 그녀는 그래서는 안 되는 사람이라고. 무의식적인 회피인 줄도 모르고 그는 그렇게 했다.

그러니까 그녀가 에릭에게 입을 맞춰 줄 수 있느냐고 물었던 것은, 어쩌면 반쯤은 장난이었을 수도 있다. 혹은 그저 기댈 사람이 필요했거나, 체온이 필요했거나, 어느 쪽이든.

그렇다면, 그 어린아이처럼 천진한 필요에 맞춰 주는 건, 괜찮지 않나?

생각은 격정과 함께 불쑥 어긋난 레일을 탔다. 에릭은 더 아래로 손을 미끄러뜨렸다.

봉긋한 살덩어리가그의 손안을 꽉 채웠다. 분명 조금 전에 소매로 눌러 보았던 것인데도, 막상 손에 쥐자 생전 처음 느껴 보는 감촉이었다. 얇은 천이 바스락대는 아래에서 부드러운 동시에 탄력 있는 가슴이 그의 손길을 받아들이며 모양을 바꾸었다. 세게 쥐기라도 하면 그대로 손바닥 안에서 뭉크러질 것 같았다.

그래서 에릭은 조심스럽게 손을 움직였다. 매끈한 실크 위를 쓰다듬을 때마다 구겨지는 소리가 났다. 손가락을 구부려 주름을 펴듯 긁어내자 손끝에 오돌토돌한 레이스가 걸렸다.

“흐응……!”

가느다란 신음이 터졌다. 지금껏 끙끙대던 것과는 전혀 다른 날카로운 목소리에 에릭이 흠칫 놀라 쓰다듬던 손을 떼어 냈다. 손뿐만 아니라, 반사적으로 그는 몸 전체를 물렸다.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으나 지금 그는 조그만 딜라일라의 몸을 덮치듯 온몸으로 뒤덮고 있었다. 그는 푹신한 매트리스를 짚은 손에 힘을 주어, 상체를 들어 올렸다.

그들의 길었던 두 번째 키스도 끝이 났다.

침대 위에 누워 그를 올려다보는 딜라일라의 얼굴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뺨이며 눈가, 귓불까지 전부 붉은 물을 떨어뜨린 것처럼 발간빛이었다. 살짝 벌어진 꽃잎 같은 그녀의 입술은 더할 것도 없이 통통하게 부어올라 있었다. 누구의 것인지도 알 수 없는 타액이 입가에 번져 반들거렸다.

축축하고, 끈적거리고, 붉게 달아오른 얼굴 위에서 유일하게 차가운 빛을 띤 것이 깜빡거렸다. 딜라일라의 커다랗고 투명한 눈동자에 에릭의 얼굴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샘 가에 처음으로 낯을 비춰 본 사람처럼, 그녀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얼굴이 낯설었다. 어쩔 길 없이 그는 자조했다.

여기서 멈춰야 한다. 에릭은 그렇게 생각했다. 아직도 손바닥에 남아 있는 뭉크러질 듯 부드러운 감촉과 입 안에 닿아 오던 뜨거운 열기가 그의 머릿속을 어지럽게 뒤흔들었다. 하지만 여기서 멈춰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더는…….

“그만할 거야……?”

그녀가 그렇게 묻지만 않았더라도.

“그러지 마.”

그렇게 속삭이지만 않았더라도, 그는 정말로 멈출 수 있었을 텐데.

“계속해 줘…….”

그 작고 달콤한 속삭임만으로도 본능은 몸속에 흐르는 피를 데웠다. 하반신이 뻐근했다. 이른 아침 불현듯 기억나지 않는 꿈에서 깨어났을 때처럼. 목적도 모를 열기에 허덕이다가 흐린 꿈의 경계에서 피가 몰린 하체를 붙들고 경련하던 때처럼.

에릭은 다시 고개를 숙였다. 깜빡이는 눈동자에 그의 얼굴이 비치지 않을 정도로 가까이.

다시 입술이 맞닿고, 에릭은 그녀의 입 안에 차오른 열기를 토해 내듯 맞닿은 입 안을 비집어 열었다. 토해 내는 숨결이 가빴다. 딜라일라는 얌전히 그가 쏟아 내는 것을 모두 받아 삼켰다. 그런 그녀가 조금 잔인하게 느껴졌다.

에릭의 손이 침대를 짚었다가, 그녀의 어깨를 쥐었다가, 다시 아래로 움직였다. 아주 잠깐 떨어져 있었을 뿐인데, 손바닥을 가득 채우는 말랑한 감촉이 반가웠다. 딜라일라의 손이 어설프게 그의 가슴팍을 긁어냈다. 읏, 흐응……. 단 숨결과 함께 아른아른 앓는 소리가 다시 들리기 시작했다.

에릭은 정신없이 키스했다. 더는 생각 따위가 남아 있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딜라일라가 그의 셔츠 단추를 풀어내고 있다는 사실도 몰랐다. 알아챈 것은 그녀의 손이 그의 바지 단추에 걸렸을 때였다.

단추는 이미 뜯어져 나갈 듯이 팽팽했다. 그 안에서 딱딱하게 부푼 것이 천을 빠듯하게 당기고 있었다. 그 위에 딜라일라의 손끝이 닿는 순간 미칠 것 같은 전율이 일었다. 에릭은 딜라일라의 손을 밀어내고 대신 재빠르게 단추를 풀어냈다. 딜라일라는 바지춤을 붙잡고 미처 단추가 전부 끌러지기도 전에 아래로 당겼다.

“허억…….”

그의 하반신을 옥죄고 있던 천이 치워지기가 무섭게, 딜라일라의 손이 그 속에 숨어 있다 튕겨 나온 것을 붙잡았다. 엉겁결에 그렇게 한 것 같았다. 작은 손안에 채 잡히지도 않을 크기를, 그녀는 어색하게 휘어 감고 꽉 쥐었다.

“아…… 누나.”

에릭이 그때껏 뜨고 있던 눈을 꾹 눌러 감았다. 잇새로 거친 숨과 함께 자신에게도 익숙지 않을 정도로 가라앉은 목소리가 샜다.

“아, 아파?”

“아니.”

눈앞이 번쩍이는 것 같은 짜릿한 쾌감이 채 가라앉지 않아서, 그는 입술을 깨물어야 했다. 말이 토막토막 끊어졌다.

“좋아요…….”

도저히 그것 말고는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결국 쾌락과 본능과 욕정 말고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딜라일라가, 그녀의 존재가 다른 것은 모두 지워 버렸다.

이건 모두 당신 탓이다. 딜라일라의 쇄골을 핥아 올리면서 에릭은 아주 잠깐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했다. 그것이 그가 마지막으로 명징하게 떠올린 생각이었다.

그녀의 손이 그의 성기를 훑어 올렸다. 끄트머리를 둥글게 쥐다시피 할 정도로 밀려 올라간 손바닥에, 선단에 맺혀 있던 점액이 묻었다. 거짓말처럼 순식간에 손을 적신 체액 덕분에 딜라일라는 조금 더 수월하게 다시 손을 아래로 밀어 내렸다.

그 어색한 손길만으로도 당장이라도 사정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에릭은 이를 악물고 치밀어 오른 사정감을 가까스로 참아 냈다. 이대로 사정했다가는 그의 침구는 물론이고 딜라일라의 옷마저 더럽힐 테니까.

그런 그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딜라일라는 쭈뼛거리면서도 계속해서 손을 움직였다. 그때마다 마찰하는 부위가 녹아내리는 것 같은 쾌감이 찾아왔다. 그래서 그는 차라리 딜라일라의 가슴팍을 깨물다시피 하며 키스를 남겼다. 그녀의 하얀 피부 위에 점점이 흔적이 남도록.

더듬거리던 손이 잠옷 드레스 단추를 찾아냈다. 단추 두어 개를 풀자 순식간에 그녀의 어깨 아래로 실크 자락이 미끄러져 내렸다. 그 안에는 속이 비칠 듯 얇은 슬립 한 장뿐이었다. 어깨끈을 아래로 당기자 그가 몇 번이고 주물렀던 가슴이 온전히 드러났다. 에릭은 허겁지겁 그것을 입에 물었다. 단 향기가 그의 코끝에 확 끼쳐 왔다.

부풀어 오른 살을 삼킬 듯이 입에 물고 빨아들였다가, 매끈한 피부 위로 혀를 굴렸다. 보송한 솜털이 혀끝을 간지럽혔다. 부푼 두 개의 살덩이 사이에 얼굴을 파묻었다가, 다시 슬금슬금 입술을 옮겼다. 보드랍기만 하던 피부 위에서 마침내 볼록 솟은 정점이 그의 입술 끝에 걸렸다.

“아……!”

이미 솟아올라 있던 것을 무심코 입술로 부비자 그의 머리 위에서 신음이 터졌다.

“흐응, 아…….”

“아파요?”

입술을 닿을 듯 말 듯 떨어뜨리고 묻자 딜라일라의 고개가 좌우로 흔들렸다. 그것을 확인한 그는 단번에 돌기를 입 안으로 빨아들였다.

쪽, 츕. 키스를 나눌 때처럼 끈적한 소리가 그의 입 안을 가득 채웠다. 빨아들이고 핥아 올릴 때마다 입 안에서 단단하게 굳어지는 감각이 신기했다. 에릭은 순식간에 그 행위에 몰입했다. 한 손을 뻗어 입에 물지 않은 쪽의 가슴을 움켜쥐자 이유 모를 만족감이 들었다.

“흣, 응. 이상해. 흑……!”

손가락으로 유두를 꼬집듯 비비자 딜라일라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혀끝을 빙글 돌리며 입에 문 돌기를 뭉갤 때마다 딜라일라의 어깨가 파들파들 떨렸다. 에릭은 한참 동안 그녀의 가슴을 애무했다. 애무라는 자각도 없이, 그저 딜라일라의 반응이 더 커지는 순간을 찾아, 가슴을 빨고 주물렀다.

그녀의 허리가 들썩이고 있는 것은 진작부터 눈치채고 있었다. 다만 조르듯 뒤채는 그녀의 허리를 붙잡아 파고들 타이밍을 찾지 못했을 뿐이다.

그런 그를 잡아 이끈 것은 딜라일라의 손이었다.

“여기, 그, 아래쪽이.”

“…….”

“간지러워…….”

에릭의 성기에서 흘러나온 점액이 가득 묻어 젖은 손으로 그녀가 자신의 다리를 덮은 천 자락을 쥐었다. 에릭은 홀린 듯 그 아래로 손을 집어넣었다.

그녀의 말랑한 허벅지 안쪽 살을 스치고, 망설일 틈도 없이 그녀의 속옷 위를 꾹 눌렀다. 그의 손끝에 습기가 옮아 왔다.

“여기, 젖었어요…….”

“으응, 아흣!”

속옷 위를 엄지로 꾹 눌렀다가 슬슬 문지르자 딜라일라의 고개가 뒤로 넘어갔다. 바짝 젖혀진 그녀의 하얀 목이 가쁘게 숨을 들이마시는 것이 보였다.

에릭은 손가락에서 힘을 빼고 조금 더 부드럽게 움직였다. 으응, 하아……. 그녀의 숨은 조금 늦춰졌고, 대신 조금 더 뜨거워졌다.

그녀는 간지럽다고 했다. 하지만 마냥 긁어 대서는 안 된다. 손가락을 세워 긁듯이 움직이되, 대신 혹여나 여린 살점에 상처가 나지 않도록. 에릭은 손끝을 더듬어 젖은 천이 들러붙은 아래의 모양을 가늠했다. 그의 손 아래서 부드러운 살이 겹겹이 주름지고 겹쳐져서, 녹아내린 듯 젖어 만질 때마다 모양을 바꾸었다. 그 사이를 헤집다가, 문질렀다가.

어느 순간 손끝에 걸린 단단한 살점을 빙글 돌렸다.

“……!”

딜라일라가 자신의 손을 들어 입을 막았다. 그녀의 허리가 크게 들썩인 것을 에릭은 놓치지 않았다. 그는 아예 속옷을 옆으로 젖혀 버렸다. 그리고 다시금 그녀의 다리 사이를 더듬었다. 도톰한 둔덕 사이에 파묻힌 매끄러운 점막이 그의 손끝에 달라붙었다.

“아읏, 흐응…….”

그는 본능적으로 그녀가 느끼고 있는 것을 눈치챘다. 아마도 자신의 성기를 딜라일라가 쥐었을 때와 비슷한 감각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할 일은 명확했다.

손끝에 미끄러운 체액을 묻혔다. 너무 힘이 들어가지 않게, 너무 자극이 세지 않게. 그는 손가락을 움직였다. 느릿느릿 손가락을 돌렸다가 위아래로 문질렀다. 조금씩 조금씩 속도를 빨리하면서.

빳빳하게 굳었던 딜라일라의 허리가 오래지 않아 다시 들썩이기 시작했다. 마치 에릭의 손이 더 강하게, 더 빠르게 만져 주기를 바라는 것처럼. 에릭은 그때마다 손을 뗐다. 혹여나 그녀가 다칠까 봐. 하지만 그것을 참지 못한 딜라일라가 아예 그의 손목을 붙들었다.

“흑, 더. 더…….”

“더?”

“만져 줘…….”

꺼져 들어가는 듯 자그만 목소리가 그렇게 애원하는데 그가 어떻게 더 참을 수 있었겠는가.

에릭의 입술이 그녀의 가슴을 물었다. 동시에 그의 손이 속도를 올렸다. 감당 못 할 격정은 그의 아래를 부풀리는 것도 모자라 결국 그의 손에 잔뜩 힘을 넣었다. 저도 모르게 거칠게 그녀의 아래를 비벼 대면서 에릭은 아이처럼 딜라일라의 가슴을 빨았다.

“아읏. 하, 아응!”

딜라일라의 가슴이 가쁘게 오르내렸다. 그녀의 가느다란 다리가 위태롭게 오므라들었지만, 에릭을 멈추지는 못했다. 오히려 그의 몸을 다리로 감아 당기는 모양이 되어 에릭을 더 자극할 뿐이었다. 에릭은 빳빳하게 솟아오른 성기가 때로 그녀의 허벅지에 닿을 때마다 전율했다. 그때마다 에릭의 손짓이 더 빨라졌다.

에릭의 입술이 딜라일라의 가슴을 잘근 깨물며 깊게 빨아올리는 순간, 딜라일라의 온몸이 바짝 굳었다. 그녀의 다리가 아예 에릭의 엉덩이를 뱀처럼 조였다. 에릭의 손 아래서 미끌미끌한 점막이 움찔거렸다. 그리고 이내.

“흑, 앗, 으응. 아앙!”

울음 같은 신음이 터졌다. 그녀의 팔이 허겁지겁 에릭의 머리를 껴안았다. 그녀의 가슴에 에릭의 얼굴이 파묻히도록. 그녀의 허벅지가 바르르 떨리며 경련하는 것이 맞닿은 피부로 전해졌다.

에릭은 딜라일라가 처음으로 오르가슴을 맞는 순간을 온몸으로 받아들였다.

* * *

“하, 으응. 후으…….”

딜라일라는 가쁜 숨을 진정시키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경련하는 아랫배가 움찔거릴 때마다 에릭의 손에 닿은 곳이 짜릿한 쾌감을 온몸으로 퍼뜨렸다. 그때마다 딜라일라는 헉 숨을 들이마시고 퍼지는 쾌감에 몸을 떨었다. 그러면 다시 문질러진 아래와 가슴에서 쾌감이 폭죽처럼 터졌다. 그 연쇄는 좀처럼 잦아들지 않아서, 딜라일라는 한참이나 숨을 골라야 했다.

“아…….”

겨우 숨이 잦아든 후에야 그녀는 자신이 온몸으로 에릭을 끌어안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좀 진정됐어요?”

“으응.”

팔을 놓아주자 딜라일라의 맨가슴에 파묻혔던 얼굴을 들어 올리고 에릭이 물었다. 그녀는 애매한 대답을 돌려주었다. 아직 머리 한구석이 녹아내린 것처럼 멍했고, 귓가에는 찡한 이명이 들려오고 있었다. 그녀는 무심코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그리고 에릭의 눈동자를 확인한 순간, 그녀는 다시 합 숨을 집어삼키고 말았다.

“누나.”

“어, 응……?”

언제나 녹아내리는 태양 같다고, 석양빛을 닮았다고. 그렇게 생각했던 눈동자였다. 금빛으로 찬란하게 반짝이지만, 어딘가 멀게 느껴지는 것. 매일 뜨고 지는 태양처럼 그 자리에 있을 뿐인 금빛.

하지만 지금 그의 눈은, 마치 육식동물의 그것처럼 샛노랗게 번득이고 있었다.

딜라일라의 목덜미에 짜르르 소름이 돋았다. 부드럽게 누워 있던 보송한 솜털이 바짝 곤두섰다. 뒷덜미가 싸늘해질 정도로, 막연히 정체를 알 수 없는 감정이 뭉클 샘솟았다.

“으으, 흐윽!”

전부 녹아내려 형체도 없이, 다만 감각만이 남은 것 같았던 아래에서 에릭이 손가락을 움직였다. 싸늘하게 식어 가기 시작한 몸에 다시 찌릿한 쾌감이 잔물결처럼 퍼져 나갔다. 왈칵 아래가 젖어 든 것이 느껴졌다. 그녀의 체액으로 축축하게 젖은 에릭의 손이 더 깊은 곳으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아직 안 끝났어요.”

“응, 아읏…….”

생전 처음으로 타인의 말단이 그녀의 몸속으로 파고들었다. 생경한 감각에 딜라일라의 몸이 바싹 굳었다. 그것을 어르듯이 에릭이 혀끝을 내어 딜라일라의 가슴을 핥았다. 문득 그 혀끝이 까슬까슬하게 느껴졌다. 맹수의 혀처럼…….

“하, 아윽!”

몸속으로 천천히 밀려들어 오는 감각은 이상했다. 아픈 것과도 비슷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그녀의 몸에는 오르가슴의 잔재가 남아 있었다. 얼핏 그의 손이며 입술이 예민한 곳을 스칠 때마다 은은한 쾌감이 피부 아래를 맴돌았다. 그래서 아프지 않은 것 같았다. 아니, 좋은 것 같기도 했다.

도무지 자신의 감각을 종잡을 수가 없었다. 딜라일라는 무력하게 자신의 몸을 뒤덮고 파고드는 자극을 무력하게 받아들였다.

“싫으면 말해요.”

예민하게 떨리는 피부 위에 그렇게나 가까이 입술을 대고 말하는 것은 반칙이라고, 어렴풋이 그녀는 생각했다.

“멈추라고, 그냥 그렇게만 말해요.

에릭의 숨이 그렇게나 거칠어져 있다는 것을 딜라일라는 이제야 알았다. 그녀가 절정에 허덕이며 신음을 뱉어 내는 사이 에릭은 거칠어진 숨을 내내 내리누르고 있었을까? 습하고 뜨거운 숨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와 딜라일라의 피부에 달라붙었다. 곤두선 신경은 그것마저 자극으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딜라일라는 차마 멈추라고 말하지 못했다. 이성을 녹진하게 녹여 버린 짜릿한 쾌감과, 아직도 몸속에 남아 끓는 열기와, 처음 보는 에릭의 그 짐승 같은 눈동자 때문에.

“흣, 으응. 아윽……!”

스스로도 만져 본 적이 없던 내벽은 고작 손가락 하나도 빠듯하게 받아들였다. 에릭의 손은 아주 천천히, 느릿느릿 그 안을 침범해 들어갔다. 뭉툭한 손끝이며 손마디 위로 젖은 살이 달라붙는 것이 느껴졌다. 에릭은 바짝 긴장한 안쪽을 달래듯이 손을 움직였다.

아프지 않게 누르고, 살짝 문지르듯 손가락을 빼냈다가 다시 더 깊이 밀어 넣었다. 그럴 때마다 딜라일라는 차오르는 숨을 내쉬기만도 바빴다.

겨우 그녀가 숨을 고르게 내 쉴 수 있을 때가 되었을 때, 안쪽을 비집어 여는 손가락이 두 개로 늘어났다. 겨우 긴장이 풀려 가던 내벽이 다시 뻣뻣하게 조여들었다. 하지만 딜라일라는 여전히 그에게 그만하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애초부터 그는 시작하지 않으려고 했다. 도중에 멈추려고도 했다. 그런 그에게 그러지 말라고, 계속해 달라고 말한 것은 딜라일라였다. 생전 처음 보는 욕망으로 가득 찬 금빛 눈동자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여전히 딜라일라의 하얀 가슴에 얼굴을 파묻은 그의 눈동자가 보일 리가 없는데도.

끈적하고 짙은, 동시에 찬란하던 금빛이 희게 바래버린 눈동자. 태양처럼 아름답던 그것을 그렇게 만든 것은 그녀 자신이었다.

“아, 읏. 하윽……!”

에릭이 그녀의 가슴을 잘근 깨물었다. 고통인지 쾌락인지, 여전히 가늠할 수 없는 감각이 신경을 태우는 사이에 손가락이 하나 더 늘어났다. 이제는 세 개의 손가락이 그녀의 안으로 밀려들어 와 있었다. 젖은 내벽에 그의 손마디가 걸려 문질러졌다.

그때부터 감각의 추는 고통과 쾌락 사이에서 명백히 쾌락의 편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흑, 앗. 히익!”

안쪽 가득 고여 있는 열기를 긁어내듯이 에릭이 손을 빼냈다. 그리고 다시 밀어 넣었다. 그때마다 딜라일라의 허리가 들썩였다. 오르가슴을 느끼기 직전에 에릭이 문질렀던 것과 비슷한 느낌이 일었다. 하지만 조금 달랐다. 더 벅차고, 더 깊었다. 조금 전에 느꼈던 쾌감이 피부를 타고 퍼져 나가는 전류와 같았다면, 이번에는 몸속을 파고들어 쌓이는 열기와도 같았다.

딜라일라는 그제야 에릭이 손가락을 밀어 넣은 곳이 자신의 몸 안이라는 사실을 여실히 깨달았다. 마치 열려서는 안 될 것이 열리고 있는 것 같았다. 점막 위로 미끄러지는 타인의 살갗이 돌연 낯설었다.

“아, 흐으…….”

마침내 그의 손가락이 빠져나온 곳에 다른 것이 닿았다. 그제야 딜라일라는 움찔거리며 다시 몸을 긴장시켰다.

뭉툭하고, 미끈하고, 단단했다. 그녀의 질구에 문질러지는 것이 무엇인지 딜라일라는 알고 있었다. 조금 전에는 직접 손으로 만져 보기까지 했으니까. 그녀는 성에 면역이 없을 뿐, 무지하지는 않았다. 차라리 아예 무지했더라면 그런 식으로 도망치듯 허리를 뒤로 물리지 않았을 텐데.

‘그렇게 커다란 게 내 몸속에 들어갈 수 있을 리가 없어…….’

그녀가 몸을 움츠리는 것을 본 에릭이 그녀의 허리를 붙들었다. 침대 위에 골반이 내리눌리듯 붙잡힌 그녀가 흠칫거리며 눈을 들어 올렸다. 에릭은 이미 한참 전부터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

“…….”

날카롭게 뒤집힌 눈동자를 하고도 에릭은 그녀에게 말없이 묻고 있었다. 여기까지 와서, 이런 상황까지 와서도 끝까지.

그녀가 멈추라고 말하면 그는 당장 멈추겠지. 그리고 딜라일라에게 사과할 것이다. 미안하다고, 언젠가 딜라일라에게 말했던 것처럼 담담한 투로 말할 것이다. 그러면 딜라일라는 차마 그의 눈을, 태양 같은 눈동자를 마주하지 못하고 피하고야 말 것이다.

그리고 다시는 전처럼 그의 눈을 바라보지 못하겠지.

아, 에릭. 왜 너여야만 했던 걸까. 왜 너였을까.

딜라일라는 입을 열었다. 한동안 신음과 가쁜 숨소리밖에 새지 않던 입술에서 흘러나온 목소리는 가라앉아 있었고, 그래서 조금은 쇠가 긁히는 것처럼 거친 소리가 났다.

“……괜찮아.”

입 밖으로 꺼내고 나니 정말 그런 것 같았다. 아니, 정말로 그녀는 괜찮았다.

애초부터 그의 방에 오면서부터 그녀는 키스 다음으로 나아갈 생각을 했다. 그러니까 괜찮다. 딜라일라는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다시 한번 말했다.

“괜찮아.”

딜라일라는 애매하게 침대 위에 흩어져 있던 손을 들어 올렸다. 양쪽 손 모두 다. 자그만 손 두 개가 에릭의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의 어깨에는 벗겨지다 만 셔츠가 걸려 있었다. 딜라일라는 그것을 끌어 내리며 그의 등 뒤로 손을 뻗었다. 단단한 등 위로 불쑥 솟은 날개뼈가 만져졌다.

“그러니까, 에릭.”

그의 옆구리로 손을 떨어뜨렸다. 마른 듯 보여도 그의 몸은 단단한 근육으로 꽉 짜여 있었다. 마법 공학과 애들은 다 이런가? 쓸데없는 상념이 스쳐 지나갔다.

“해 줘.”

딜라일라는 손에 닿는 커다랗고 단단한 몸을 껴안았다. 그녀가 당기는 통에 침대를 짚은 팔에서 힘을 뺀 에릭의 몸이 그녀의 위로 무너져 내렸다. 그의 무게가 그녀를 내리눌렀다.

내려앉는 무게만큼, 그가 그녀의 안으로 밀려들어 왔다.

“아, 아…… 윽.”

딜라일라는 뒤늦게 에릭이 자신의 아래에 손가락을 밀어 넣고 문질러 댄 이유를 이해했다. 그러지 않았더라면 뻣뻣하게 긴장한 그녀의 몸은 절대 그를 받아들이지 못했을 것이다. 단단하고 길쭉한 살덩이는 손으로 쥐었을 때보다 아래로 받아들일 때 더 큰 것처럼 느껴졌다.

조금씩, 조금씩. 커다랗게만 느껴지는 것이 몸속으로 전진했다. 목이 졸리는 것처럼 막힌 소리가 가슴 안에서부터 올라왔다.

“윽, 하아…….”

“흐윽…….”

애끓는 신음을 뱉고 있는 것은 딜라일라만이 아니었다. 언제나 담담한 투로 속삭이던 에릭의 낮은 목소리가 그르륵 끓는 소리를 냈다. 두 사람의 숨이 막혔다가 터져 나오기를 반복하며 겹쳐졌다.

한참 만에 에릭이 그녀의 안을 가득 채웠다. 딜라일라는 거의 숨이 넘어가기 직전이었다. 손가락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압박감이 그녀의 몸속 가장 깊은 곳까지 열어젖히고 있었다. 그녀의 사슴처럼 가느다란 목 안에서 끄윽끄윽 애끓는 소리가 났다.

“아, 흐읏.”

에릭의 팔은 가만히 딜라일라의 어깨를 끌어안고 있었지만, 그녀의 몸을 꿰뚫고 들어온 것은 쉴 새 없이 파르르 떨리며 맥동했다. 그 움직임이 너무 적나라하게, 고스란히 느껴져서 딜라일라는 그때마다 짧게 숨을 내쉬어야 했다.

힘겨웠다. 이제 겨우 몸을 겹쳤을 뿐인데도 그렇게나 벅찼다. 허리 아래가 완전히 남의 몸이 된 것 같았다. 그녀가 가쁘게 들썩일 수 있는 것은 가슴까지였다. 그 아래로는 도저히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움직일게요.”

그래서 에릭이 그렇게 속삭였을 때, 딜라일라는 벅찬 숨을 뱉으면서 그를 졸랐다.

“빠, 빨리.”

“…….”

“빨리해. 응……?”

차라리 그가 빨리 움직였으면 했다. 온몸이 꿰뚫린 듯한 둔통을 느낄 틈도 없을 정도로 거칠게 뒤흔들렸으면 했다. 정신이 쏙 빠져 버릴 정도로 몰아붙여져서, 전부 잊어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

딜라일라의 조름을 그가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는 다만 짧게 숨을 토했다. 비웃음 같기도 했다. 침대를 짚은 그의 팔꿈치가 바르르 떨렸다.

“좋아요.”

그리고 딜라일라는 자신이 바라던 대로 되었다.

그녀에게 대답을 돌려주자마자 에릭이 휙 허리를 빼냈다. 몸속을 빠듯하게 채우고 내리누르던 압박감이 단번에 밀려났다. 대신 그곳에서 뜨거운 열기가 피어올랐다. 불뚝 솟은 귀두가 내벽을 긁어내는 감각이 선명했다. 안쪽에 고여 있던 체액이 긁혀 나오며 회음부로 주르르 흘러내렸다.

“아, 아……!”

딜라일라가 뭐라 말할 틈도 없이 다시 한번 그의 것이 깊숙이 처박혔다. 천천히 안쪽을 벌리듯 밀고 들어오던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거친 움직임이었다. 몸이 반으로 갈라지는 것 같았다. 둔하게 느껴지던 통증이 순식간에 날카롭게 살갗을 파고들었다.

“흑, 아읏!”

에릭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는 충실히 그녀의 명령 같은 조름을 들어주었다. 다시 그의 성기가 빠져나가고, 더 깊이 처박혔다. 그때마다 날이 선 신경이 찢어질 듯한 고통을 퍼뜨렸다. 에릭은 마치 벌을 내리는 것처럼, 혹은 벌을 받는 것처럼 허리를 뒤흔들었다. 콱콱 페니스가 들이박힐 때마다 딜라일라의 자그만 몸이 위로 밀려 올라갔다.

딜라일라의 손이 에릭의 등을 속절없이 긁어내렸다. 고통이 그녀의 머릿속을 뒤흔들고, 다른 것은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게 했다. 온몸이 산산이 부서져 흩어질 것 같았다. 그런 고통의 가운데서 그녀를 내리누르는 에릭의 무게만이 선명했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손톱을 세웠다. 에릭의 살갗이 긁혀 나오는 것도 모르고 그녀는 에릭에게 매달리며 손톱을 박아 넣고 미끄러지기를 반복했다.

분명 고통의 이유는 그인데도 왜 그 무게가 자신을 지켜 주고 있는 것 같은지.

“누나 안이…… 너무 조여서.”

“흐윽. 아읏!”

“죽을 것 같아요…….”

“하으윽!”

정신없이 허리를 움직이며 에릭이 그녀에게 속삭였다. 그의 말은 뚝뚝 끊어지고 공백이 있었다. 그 공백 사이에는 거친 숨과 딜라일라가 내뱉은 신음이 들어찼다. 제대로 알아듣지도 못하면서, 에릭의 목소리가 들릴 때마다 딜라일라는 에릭에게 더 강하게 매달렸다.

“기분 좋아…….”

그가 딜라일라의 귀 바로 옆에 대고 그렇게 속삭인 순간, 무언가가 딜라일라의 몸속에서 탁 터졌다.

울컥 뜨거운 것이 치솟았다. 살갗이 올올이 찢어져 나가는 것 같던 고통이 순식간에 뜨겁게 변모했다. 피부 위로 짜릿한 전류가 흘렀다.

고통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보다도 압도적인 무언가가 그녀의 감각을 전부 뒤덮었을 뿐이었다. 발끝이 안으로 말려들었다. 근육이 빳빳이 긴장했다. 그러지 않으면 정말로 터져 버릴 것만 같았다. 몸 안을 전부 헤집어 열던 고통이 순식간에 열기로 타올랐다. 살갗 아래에서 새빨갛게 더운 피가 뛰어 돌아다녔다.

“으응. 하. 앗, 흐윽……!”

몸속을 긁어내리던 마찰이 매끄럽게 변했다. 에릭이 그녀의 안에 성기를 박아 넣는 속도를 더욱 높였다. 시야가 새빨갛게 깜빡거렸다. 그것이 그녀가 눈을 감고 있기 때문인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이제는 흔들리는 감각마저 멀어졌다. 아래를 문지르고 치받는 쾌감만이 시뻘겋게 번득였다. 딱딱한 페니스가 부푼 내벽을 온통 밀어 올리며 들어왔다가, 고통인지 쾌락인지 구분할 수 없는 감각을 남기고 빠져나갔다. 사실 딜라일라는 그가 언제 몸을 밀어 넣고 빼내는지 구분할 수는 없었다. 그가 너무도 빠르게 그녀를 몰아붙이고 있었기 때문에.

다만 그들의 살갗이 쉴 틈 없이 마찰했다. 찢어질 것 같은 고통의 자리를 둔중하고 묵직한 쾌락이 대신 채웠다. 찢어질 것처럼 비명을 지르던 신경은 이제 타오르는 것 같았다. 숨이 막힐 것 같은 압박감은 그대로였지만, 그래서 더 좋은 것 같았다.

아, 이제 온다.

그렇게 느낀 순간, 에릭의 팔이 그녀의 어깨를 꽉 껴안았다. 철벅철벅 젖은 살이 맞부딪치는 소리가 더는 들리지 않았다. 그런 소리가 날 틈도 없을 정도로 그는 허리를 흔드는 속도를 높였다.

딜라일라는 아득하고 먼 쾌락이 밀물처럼 그녀를 덮치는 것을 선명하게 느꼈다.

“흑, 하아! 흐읍……!”

딜라일라가 토해 낸 신음이 에릭의 입술에 삼켜졌다. 에릭은 아예 딜라일라의 입술을 전부 삼켜 버릴 것처럼 빨아 당겼다. 딜라일라의 영혼마저 그에게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다. 까무룩 멀어지는 의식의 너머에서 그가 전에 없이 깊게 페니스를 박아 넣었다. 잔뜩 젖은 내벽이 부풀어 올라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것을 쥐어짜듯 압박했다.

“아, 누나…….”

흐릿하게 꺼져 드는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딜라일라는 깜빡 정신을 놓쳐 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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