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합
행성이 태양과 같은 방향에 오는 일
에릭의 숨결이 허벅지 사이를 간지럽히는 탓에, 딜라일라는 무심코 벌리고 있던 무릎을 오므렸다. 하지만 말랑한 허벅지 안쪽을 붙들고 있는 손은 그녀가 마음대로 다리를 붙이게 두지 않았다.
“왜 그렇게 봐……?”
“신기해서요.”
예쁘다고 해 줄 법도 한데, 에릭은 그런 공치사 대신 솔직하게 제 생각을 내뱉었다. 딜라일라는 그의 말에 허벅지를 더 움츠렸다. 허벅지에 힘이 들어가고 아랫배가 꽉 조여들면서 그녀의 밀지가 움찔거렸다. 에릭은 여전히 그곳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이, 이상해?”
“아뇨.”
“그럼 뭐가 신기한데…….”
딜라일라의 목소리가 점점 더 작아졌다. 언제나 대담하게 관계의 시작을 조르는 것은 그녀인데도 불구하고 막상 에릭이 적극적으로 움직이면 딜라일라는 늘 부끄러워했다. 지금도 에릭에게 먼저 안겨 든 것은 그녀이면서 막상 에릭이 그녀의 스커트를 들추고 속옷을 벗겨 내는 순간부터 그녀는 에릭의 시선이나 숨결 하나에도 허리를 떨며 몸을 움츠리기 바빴다.
하지만 에릭은 그녀가 싫어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몇 번인가의 경험으로 깨우쳤다. 그래서 또 싫으냐고 묻기보다는 묻는 말에 솔직하게 대답을 하는 쪽을 선택했다.
“누나 입술이랑 똑같이 예쁜 벚꽃 색이에요.”
딜라일라는 대답도 하지 못하고 입술만 동그랗게 오므렸다. 그것을 따라 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움찔거리는 그녀의 아래로 에릭이 얼굴을 파묻었다.
“힛, 으응…….”
쪽. 버드 키스를 나누듯 가볍게 내려앉았다 떨어져 나간 입술이 금세 다시 달라붙었다. 이번에는 조금 더 깊고 진득하게. 츕츕. 말랑하고 질척한 살이 부딪치고 비벼지는 소리가 났다. 그럴 때마다 딜라일라는 작게 앓는 소리를 냈다.
“흐…… 아!”
내민 혀끝이 젖어 들기 시작한 점막을 쓸어 올렸다. 음순 사이를 부비며 올라온 감각이 예민한 곳을 스치자마자 곧장 딜라일라가 짧은 신음을 흘렸다. 그 신음이 고통에 의한 것이 아니라 쾌락에 의한 것임을 에릭은 잘 알았다. 그는 혀끝을 움직이며 입술 전체를 이용해 그녀를 감질나게 자극하기 시작했다.
“흑, 으응. 아…….”
혀끝이 음순을 젖히고 안쪽으로 파고들 때마다, 입술이 동그랗게 솟아오르는 살점을 스치고 문질러 댈 때마다 딜라일라의 허리가 움찔거렸다. 하지만 금세 다시 떨어져 나가는 듯하다가 은근하게 밀고 들어오는 부드러운 애무에 끝내 딜라일라는 끙끙대며 어색하게 허리를 들썩이기 시작했다. 에릭의 한 손이 그녀의 골반을 붙잡아 고정하자 결국 애타는 목소리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아, 에릭…….”
그의 혀가 곧장 음핵을 꾹 누르고 빙글 돌렸다. 동시에 위로 손을 뻗어 얇은 잠옷 아래에 갇힌 그녀의 유두를 살짝 긁어내렸다.
“아흑!”
옷 아래에서 단단하게 굳어져 솟은 유두를 그대로 살짝 꼬집은 채로 에릭이 입술을 움직였다. 입술과 혀끝으로 그녀의 밀지를 애무하는 속도가 점점 더 빨라져 갔다. 그새 완전히 젖다 못해 미끄러운 액체를 흘리기 시작한 아래는 빠르게 문질러지는 접촉에도 고통이 아닌 쾌락만을 신경으로 전달했다.
“아, 하아…… 으응!”
숨결과 함께 새어 나오는 신음은 뚝뚝 끊어졌다가도 금세 다시 이어졌다. 에릭의 입술이 그녀의 음핵을 아프지 않게 물었다가 쪽 빨아들일 때는 다시 그녀의 허리가 들썩이려다가 그의 손에 붙잡혔다. 꾹 유두를 눌러 꼬집는 손길에 딜라일라의 눈꺼풀이 꾹 감기며 시야를 새빨갛게 물들였다.
마침내 투명한 점액을 가득 묻힌 혀끝이 볼록 솟은 살점을 빙빙 돌리기 시작했을 때, 딜라일라는 제 손으로 입을 막았다.
그녀는 하얀 손등을 깨물며 신음을 참았다. 하지만 목 안쪽에서 끓는 애타는 소리마저 삼킬 수는 없었다. 아래에서 치밀어 오르는 새빨간 쾌락이 그녀의 몸을 떨게 하고, 소리를 내게 했다. 동그랗게 가슴 전체를 감아쥐는 손길이 없었다면 제 손으로 가슴을 움켜쥐었을지도 몰랐다.
“흐, 읏…….”
딜라일라가 고개를 흔들었다. 몸속에서 덩치를 불리고 있는 쾌락이 목구멍으로 치밀어 오르는 것 같았다. 입을 벌리고 신음을 내지르고 싶었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잠깐이라도 멈추면, 그러고 나면 다 참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에릭은 절대 그렇게 해 주지 않겠지만.
“읍, 으응. 흐읏!”
간지러운 것도, 따끔거리는 것도 같은. 뭔가가 부족한 것 같다가도 꾹 눌릴 때면 너무 과해서 눈물이 날 것 같은. 자기 자신을 가늠할 수 없게 만드는 감각. 그것이 쾌락이었다. 딜라일라는 허리 아래가 붕 뜨는 것 같은 느낌에 감았던 눈을 치켜떴다. 아예 음핵을 빨아들이듯 입술을 붙이고 혀로 눌러 문지르는 애무는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이대로는.
그렇게 생각한 순간 쪽 소리와 함께 에릭이 입술을 뗐다. 그녀의 무릎 사이에서 고개를 든 에릭의 매끈한 입가가 질척하게 젖어 반질거렸다.
언제 보아도 정말 야한 광경이었다. 언젠가 보았던 책 속에 등장하는 충격적인 정사 장면보다도 훨씬 더.
“넣어 줘…….”
“아직 안 돼요.”
저도 모르게 내뱉은 말에 단호한 대답이 돌아왔다. 언제든 에릭은 그랬다. 하지만 그것이 딜라일라의 몸을 걱정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그녀도 알고 있었다.
“으응, 빨리.”
그래도 입 밖으로 뱉어지는 말은 이성을 따라가지만은 않는 법이었다. 에릭을 내려다보느라 반쯤 뜬 눈을 깜빡이며 조르는 딜라일라의 목소리는 달콤했다. 에릭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조르지 말고요”
“흐윽……!”
난처한 표정을 지은 주제에 단번에 손가락을 두 개나 밀어 넣는 에릭을 보는 딜라일라의 눈가에 살풋 웃음기가 어렸다.
“너도, 빨리…… 흐읏. 하고 싶으면서…….”
좁은 질구를 벌리고 들어온 손가락이 안쪽을 꾹 눌렀다. 젖은 점막이 단단히 모여들어 있는 것을 풀어 주듯이 부드럽게 안쪽을 누르며 빠져나왔다가, 다시 밀고 들어왔다. 그 움직임은 잠깐 나른하게 풀어졌던 그녀의 몸속을 다시 달구었다. 느리지만 확실하게.
“그러다가 다치려고.”
에릭의 목소리가 가라앉아 있었다. 이제 완전히 상체를 일으켜 앉은 그의 얼굴은 딜라일라에게 너무나도 잘 보이는 위치에 있었다. 그의 미간이 살짝 모여든 것이 귀여워서 딜라일라는 웃었다.
“으응, 안 다쳐. 흐응……!”
보지 않아도 그의 아래쪽 사정을 알 것 같았다. 아마 한껏 부풀어서 단단하게 솟아 있겠지. 몇 번이나 본 것의 모양이 눈앞에 생생하게 그려졌다. 커다랗고 조금 징그럽게 생겼는데, 신기하게도 예쁜 분홍색이었다. 끄트머리에 투명한 액체가 매달려 반짝거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지금은 그의 바지 안에 숨겨져 있으니까, 남몰래 미끄럽게 속옷을 적시고 있을지도.
매번 그녀를 기분 좋게 해 주는 것을 떠올린 순간 그녀의 배 속이 빠듯하게 조여들었다. 동시에 그녀의 질구를 벌리고 들어오는 손가락이 세 개로 늘어났다. 입술과 혀로 바깥을 애무하던 것과는 전혀 다르고, 또 똑같이 선명한 쾌락이 치고 올라왔다.
“빨리. 아, 흑!”
촘촘하게 조여든 점막이 빼곡하게 그의 손가락에 달라붙었다. 그의 길고 예쁜 손에 유달리 불거진 마디마디가 그대로 느껴지는 것 같았다. 머릿속을 한바탕 휘젓고 빠져나간 감각에 딜라일라의 허리가 부르르 떨렸다.
“벌써 갔어요?”
“아, 아냐.”
“맞는 것 같은데.”
그렇게 말하면서 쿡 안쪽을 찔러 들어오는 손가락에 다시 한번 딜라일라가 허리를 떨었다. 징그러울 정도로 천천히 안쪽을 문지르며 빠져나갔다가 다시 꾹 누르며 밀려들어 오는 손마디가 얄미웠다.
“이제, 읏, 응……! 빨리, 아!”
“자꾸 재촉하지 마요.”
손끝이 안쪽에서 구부러졌다. 그대로 바깥으로 쭉 빠져나가는 통에 그녀의 아래가 왈칵 체액을 토해 냈다.
“……안 그래도 참기 힘든데.”
“흣, 응. 빨리이…….”
이제는 목소리마저 젖은 것처럼 녹진녹진 녹아내리는 딜라일라의 귀에 반가운 소리가 걸렸다. 벨트 버클을 풀어내는 달그락 소리, 천이 살갗을 스치는 소리.
아니나 다를까 곧 아래를 헤집던 그의 손가락이 빠져나갔다. 채워졌던 것이 빠져나가자 묘한 허망함이 느껴졌지만, 딜라일라는 구태여 아쉬운 소리를 하지 않았다. 곧 다시 채워질 테니까. 더 빠듯하게, 더 깊이.
아니나 다를까 뭉툭하고 단단한 것이 금세 그녀의 질구 위를 꾹 눌러 왔다. 바지를 채 벗지도 않고 대충 허리춤만 풀어내 성기를 꺼낸 그가 다급하게 몸을 맞춰 왔다.
“힘 빼요.”
“으응…… 아흣!”
늘상 여유를 두고 천천히 그녀의 안을 넓히며 밀고 들어오던 것과는 달리, 그가 단번에 자신의 성기를 그녀의 안에 쑤셔 박았다. 에릭이 시간을 들여 애무하며 풀어 주지 않았더라면 분명 아팠을 정도로.
하지만 아프지 않았다. 흘러내릴 정도로 젖은 아래와 뭉근하게 풀어진 안쪽은 빠듯하게 벌어지면서도 고통과 닮았으나 전혀 다른 감각을 받아들였다.
“흐으…….”
“아팠, 어요?”
그녀의 위로 허리를 구부린 에릭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아래에서 이어진 감각이, 참기 힘든 것처럼 말 가운데를 뚝 끊고 입술을 깨무는 모양이 아니었더라면 그렇게나 단번에 그녀의 몸속에 페니스를 박아 넣은 사람 같지 않게 다정한 물음이었다.
“으, 아…….”
딜라일라는 입을 벌렸지만 대답할 수 없었다. 몸속이 가득 차 버린 것 같았다. 목 너머로 무언가가 튀어나올 것만 같은데, 막상 입을 벌려도 뱉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움직이지도 않았는데 숨이 가빠서, 그대로 몇 번이나 숨을 골라야 할 만큼 벅찼다. 몸속이 전부 꽉 조여드는 것 같았다. 한 점, 그녀를 꿰뚫은 단단하고 커다란 것에 꽉 달라붙어서.
“아니…… 흐응!”
안쪽에서 혼자 꿈틀거리며 맥동하는 성기의 움직임이 그대로 전해져 왔다. 머릿속이 하얗게 뒤집혔다. 거칠어진 숨을 뱉은 딜라일라의 입이 정신없이 말을 토해 냈다.
“……좋아. 그러니까, 빨리. 흐윽!”
퍽 소리가 난 것 같았다. 실제로는 아니었을 것이다. 아니, 진짜인가? 모르겠다. 거짓말처럼 그의 페니스가 더 깊이 박혀 들어왔다. 두툼한 귀두가 닫힌 점막을 짓눌러 벌렸다. 딜라일라의 현실 감각이 아득하게 멀어졌다가 되돌아왔다.
“자꾸, 재촉하지 말라고…….”
“흣, 아윽……!”
“참기 힘들다고, 했잖아요.”
에릭이 속삭이는 말들은 딜라일라의 머릿속으로 흘러들었다가 옅은 흔적을 남기고 다시 흘러나갔다. 도저히 다른 감각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하반신이 전부 녹아 버린 것 같다가도, 내벽을 짓누르는 압박감이 너무 선명해서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몸속이 전부 위로 밀려 올라오는 것 같았다. 토할지도 몰라. 하지만 정작 입 밖으로 흘러나오는 것은 신음뿐이라는 사실이 다행이었다.
조금 느린 듯하게 빼내고, 다시 빠르게 박아 넣는 움직임은 무자비했다. 정작 딜라일라가 그만하자고 하면 당장 멈출 것을 아는데도 그렇게 느껴졌다. 그녀의 몸속을 비집어 여는 것의 크기가 워낙 그래서일지도 모른다.
“흑, 응. 좋아. 아읏!”
단단한 기둥 전체로 문지른 곳을 귀두가 짓누르고 긁어내며 빠져나갔다. 아슬아슬할 만큼 허리를 빼냈다가 다시 단번에 깊은 곳을 짓쳐 올리는 통에 딜라일라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안쪽이 뜨거웠다. 연약한 살갗이, 점막이 마구 문질러지면서 열이 올랐다. 전류가 튀는 것 같았다. 마찰한 곳에서부터 튄 전류가 한데 뭉쳤다가 몸 전체로 퍼져 나갔다.
“아, 아……!”
등골을 타고 흐르는 짜릿한 감각. 몸속이 전부 끓어오르고, 녹아내리는 것 같은.
어느새 에릭이 허리를 움직이는 속도도 빨라져 있었다. 쿵쿵 짓쳐 올릴 때마다 시트 위에 누인 딜라일라의 몸이 위로 밀려났다. 딜라일라가 손을 뻗어 에릭의 목을 끌어안았다. 본능적인 움직임이었다. 꼭 달라붙은 탓에 더 깊이 몸속을 파고드는 것을 견디지 못해 아릿한 신음이 흘렀다.
“흑, 아윽!”
못 견디게 좋았다.
딜라일라의 입이 눈앞에 있는 것을 깨물었다. 깨물고 보니 탄력 있고 단단한 근육이었다. 그녀가 어깨를 깨무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에릭은 허리를 움직였다. 딜라일라 만큼이나 그도 본능을 좇고 있었다. 차분한 이성, 명확한 지성. 머릿속에 쌓아 둔 수많은 지식, 생각. 그 모든 것을 하얗게 날려 버리는 쾌락만이 남았다.
콱콱 아래를 치받는 벅찬 쾌락, 고통인가? 아니, 쾌락이다. 손끝이 벌벌 떨리는 쾌락이 그들을 덮쳤다. 몸속이 전부 벌어지는 것 같고, 전부 빨려들어 가는 것 같았다. 영혼이 갈가리 찢어지고 씹어 삼켜지는 듯한. 폭력적일 정도의 강렬한 쾌락.
“으응, 흑, 하윽!”
“누나, 윽.”
“좋, 흣, 좋아. 아……!”
녹아내리고, 찢겨 나가고, 부서진 것들이 모두 하나로 뭉쳤다. 아랫배가 꽉 조여들었다. 딜라일라의 다리가 에릭의 허리를 감았다. 온몸으로 매달리는 그녀의 몸을 부숴 버릴 듯이 에릭이 허리를 깊이 박아 넣었다. 한 점에 모여들었던 것이 단숨에 터져 나갔다.
“흐…….”
내내 벅찬 신음을 뱉었던 것이 무색하게, 절정의 순간에는 거친 숨소리를 토해 내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머릿속이 하얗게 비워지고, 손끝까지 뜨거운 열감이 밀어닥쳤다. 꾹 닫은 눈꺼풀 사이로 눈물이 질금질금 비어져 나왔다.
“아…….”
내벽을 비집어 박아 넣은 안에서, 한계까지 부풀어 거칠게 맥동하며 튀어 오르는 것에 파정했음을 알았다. 그 후에도 손끝, 발끝까지 온 구석구석을 휩쓰는 여운을 감당하지 못하고 벌벌 떨리는 서로를 껴안고, 그들은 몸을 맞물리고 있었다.
그것이 그대로 두 번째 정사로 이어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쾌락에는 한계가 없었으니까.
딜라일라의 긴 속눈썹이 팔랑거리며 눈꺼풀 아래로 호수 같은 하늘색 눈동자를 숨겼다가 다시 드러냈다. 눈을 깜빡일 때마다 붉은빛이 도는 속눈썹이 팔랑거렸다. 에릭은 그것을 한참이나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왜 그렇게 쳐다봐……?”
“속눈썹도 붉은색이네요.”
그녀의 머리카락은 분홍색인데 눈썹과 속눈썹은 붉은빛이었다. 원래 그런 걸까? 하지만 에릭은 속눈썹뿐만 아니라 온몸의 체모가 모두 비슷한 캐러멜 색이었다. 그런 차이가 신기했다.
“아래쪽은…….”
“그만 그만 그만!”
“왜요.”
“굳이 듣고 싶지 않아…….”
자신의 체모 색상에 대해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눌 뻔한 것을 재빠르게 막아 낸 그녀가 한숨을 쉬었다. 에릭은 여전히 고개를 갸웃거리며 팔랑거리는 그녀의 긴 속눈썹과 마구잡이로 흐트러진 분홍빛 곱슬머리를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딜라일라는 온몸에 힘이라곤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아서 에릭의 팔 위에 머리를 기대고 누운 채로 손끝 하나 꼼짝할 수가 없는데, 왜 에릭에게는 그녀를 관찰하고 신기해할 체력이 남아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넌 매일 실험실 아니면 방 안에 콕 틀어박혀 있으면서, 왜 이렇게 체력이 좋은 거야.”
“누나가 체력이 약한 거라니까요.”
“아니거든!”
빽 소리를 친 딜라일라가 꿈틀꿈틀 몸을 움직여 에릭을 향해 돌아누웠다. 눈을 살짝 치켜뜨자 여전히 그녀를 바라보고 있던 에릭의 금빛 눈동자가 곧장 그녀의 얼굴을 담아냈다. 깜빡, 깜빡. 캐러멜 색 속눈썹이 풍성하게 그림자를 드리운 눈꺼풀이 깜빡일 때마다 노랗게 물든 저녁 태양이 사라졌다가 다시 떠오르는 것 같았다.
그녀가 손을 뻗어 에릭의 하얀 뺨을 쓸었다. 또 며칠째 제대로 자지 않은 것인지 뺨이며 턱이 가칠가칠했다. 뺨을 쓰는 그녀의 손길이 기분 좋은지 에릭이 천천히 눈을 내리감았다. 땀에 젖어 뺨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고, 보드라운 머리칼이 엉키고 흐트러진 뒤통수를 가만가만 토닥여 주자 이내 색색 평온한 숨소리가 그녀의 귓가를 간지럽히기 시작했다.
잠든 에릭을 바라보는 딜라일라는 전염이라도 된 듯 무거워지는 눈꺼풀을 힘주어 들어 올렸다. 이대로 잠들면 안 된다.
그녀의 머리 아래에 깔린 에릭의 팔도, 그 팔에서 이어진 어깨며 가슴팍도 모두 하얀 피부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물론 그 아래로도. 딜라일라 역시 새하얗게 벗은 몸이었다. 하얀 피부가 맞닿은 곳에서부터 두근두근 심장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보다도 따스한 체온이 먼저 전해져 왔다.
사람의 체온은 이상하다. 슬프고 괴로울 때 손을 잡거나 가볍게 포옹을 하며 체온을 나누는 것만으로도 사람은 위로를 받을 수 있다. 긴장하거나 불안할 때 누군가가 머리를 쓸고 등을 토닥여 주면 그것만으로도 안심이 되는 일이 있다. 피부가 맞닿지 않아도 체온이 전해질 때 누군가의 감정이 함께 옮겨 오기도 한다. 뜨거운 숨결이나 차가운 손끝이 말하는 것이, 세상에는 분명 있다.
겨우 그 정도로도 상대방을 알 것 같은 순간이 있는데, 몸을 맞붙이면 어떨까?
그래서 이렇게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모습으로 살을 붙이고 누워 있는 것은, 때로 그녀에게 정말로 이상한 기분을 불러일으켰다.
상대방을 전부 알 것 같다가도 정작 그 바닥을 알 수가 없어서 문득 두려워진다. 얇은 피부 아래에 있는 것이 그대로 전해져 오는데도 불구하고, 그 아래 가장 깊은 곳에는 대체 무엇이 숨어 있는지 알고 싶어서 조바심을 낸다. 체온과 함께 옮아 오는 것은 극히 일부일 뿐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면서 불안에 휩싸인다.
그런데도 살을 맞대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은 순간이 있었다. 무작정 타인의 체온을 갈구하게 되는, 그런 날이.
그녀가 처음으로 그에게 먼저 안겼던 날도 그랬다. 아마도.
* * *
“너는 내일 오후에 간다고?”
“누나는 아침에 간다면서요.”
“응.”
끄덕끄덕 고개를 흔드는 딜라일라의 손에는 그녀가 제대로 보지도 못할 마법 공학 책이 들려 있었다. 에릭은 그나마 그게 그가 가진 것 중에서 제일 쉬운 책이라고 했지만, 딜라일라는 첫 페이지를 펼치자마자 펼쳐지는 마법의 정의가 어쩌고 공학적 사고가 어쩌고 하는 기나긴 서두부터 질색했다.
하지만 말 한마디 없이도 심심함을 온몸으로 표현하는 딜라일라를 견디지 못한 에릭이 찾아 건넨 책이기에, 그녀는 어쨌든 그 책을 읽기 위해 열심히 붙들고 있었다. 딱히 소득은 없었지만.
“그럼 얼른 가서 자요.”
“괜찮아, 뭣하면 밤새우지 뭐.”
“어제도 거의 못 잤으면서.”
사감에게 들킬 뻔한 다음 날에도 딜라일라는 대범하게 에릭의 방을 찾았다. 들키지만 않으면 되지! 당당한 딜라일라의 선언에 에릭이 그 무심한 낯으로도 어딘지 허탈한 웃음을 지어 보인 것도 같았다. 어떻게 들고 온 건지 품에 가득 안은 종잇조각을 와르르 쏟아 낸 딜라일라는 에릭의 침대에 엎어져서 데굴거리며 새벽이 밝아 오기 직전까지 공부를 하다 돌아갔다.
“아까 시험 끝나고 기절했었어. 안 그랬으면 이 책 표지 보자마자 잠들었을걸.”
밤을 새우다시피 해 가며 공부한 보람이 있게, 딜라일라는 남아 있던 두 개의 시험도 성공적으로 치렀다. 시험을 모두 마친 후에 제 방에서 세상모르게 깊이 잠들었다가 깬 덕분에 에릭의 방에도 평소보다 늦게 찾아온 그녀였다.
서로의 몸을 꼭 껴안고 심장 소리를 지척에서 들으며 한 번의 위기 아닌 위기를 넘긴 이후, 신기하게도 그들은 오히려 그 전보다 더 아무렇지 않게 대화를 나누었다. 동료 의식 비슷한 감정 같은 것이 생겨난 것일지도 몰랐다. 적어도 딜라일라는 그런 게 아닐까 생각했다. 사실 에릭이 단답이 아닌 다른 말을 하기 시작했다는 것만으로도 딜라일라는 그의 방을 찾는 늦은 밤이 조금 더 즐거워졌고, 실상이 어떻든 그다지 신경을 쓰지는 않았다.
매일 그랬듯이 종이 위에 만년필을 굴리는 사각사각 소리가 듣기 좋았다. 때로 잉크가 모자란지 뾰족한 촉이 종이 위를 거칠게 긁는 소리가 끼어들곤 했지만, 그러고 나면 신중하게 만년필을 해체해서 잉크를 흘려 넣는 에릭의 모습을 볼 수 있으니 괜찮았다. 때로 아무 생각 없이 던진 말에 에릭이 대답을 돌려주면 괜히 웃음이 났다.
남동생이 있었으면 이랬을까?
펼쳐 든 책에 쓰인 문장보다도 그 너머 맞은편에 앉아 쉴 틈 없이 뭔가를 끄적이고 있는 에릭의 모습을 더 열심히 훔쳐보고 있던 딜라일라는 상상하기 시작했다. 그녀에게 에릭 같은 남동생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에리카의 핏줄이 끊기지도 않을 테고, 딜라일라는 조금 더 평범하게 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남동생이 에릭처럼 똑똑한 아이라면 딜라일라를 두고 천재니 수재니 하는 말이 나오지도 않았을 테지. 그런 칭찬은 후계가 듣는 것이 가장 모양이 좋으니까. 물론 딜라일라의 영민함은 완전히 무시할 수 있을 만한 것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지금처럼 그녀를 여신처럼 추켜올리는 사람들은 없겠지.
아니, 어쩌면 반대일까? 후계가 따로 있다고 해도 여전히 딜라일라는 사교계에서 최고의 신붓감 중 한 명이 되었을 것이다. 오히려 후계가 명백하니 지금보다 더 그녀의 몸값이 올라갈지도 모른다. 에리카의 핏줄이 다시 한번 내무부를 휘어잡을 테니까, 그쪽에 연을 대면 분명 콩고물이 떨어지리라는 계산을 하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겠지.
음……. 그건 좀 싫은데. 나는 사랑하는 사람이랑 결혼하고 싶어. 지금도 그건 불가능하지만.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초점 없는 눈동자로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던 딜라일라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녀의 어깨를 타고 구불구불 늘어져 있던 분홍색 머리카락이 살랑살랑 흔들렸다.
딜라일라 에리카는 지금도 사교계에서 최고의 신붓감으로 손꼽힌다. 딜라일라 개인에 대한 평가도 상당히 높았지만, 무엇보다도 그녀의 이름 끝에 붙은 성씨가 에리카이기 때문이었다.
대를 이어 내무부의 실권을 쥐고 승승장구하다 결국에는 최고 위원의 자리까지 낚아챈 로드릭 에리카의 금지옥엽 외동딸. 그녀를 붙잡았을 때 주어지는 수많은 이점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딜라일라 자신과 그녀의 부모를 포함해서.
자연히 딜라일라는 어릴 때부터 부모님에게 철저한 교육을 받았다. 타인을 대할 때에 취해야 할 태도, 취하지 말아야 할 태도. 드러내도 괜찮은 부분과 드러내서는 안 되는 부분. 친구를 두는 것은 좋지만 그것이 지나쳐 간섭할 정도가 되면 안 되고, 관계를 쌓는 것은 좋지만 그 관계가 그녀를 붙잡아 세울 정도로 얽혀서는 안 된다.
자연히 연애는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누구에게든 함부로 에리카의 이름을 더럽히거나 남용할 여지를 주어서는 안 된다는 말을 귀에 못 박히도록 들었다. 딜라일라도 머리로는 이해했다. 권력을 노리는 자들은 언제나 신중하게 경계해야 하니까.
하지만 항상 그런 경계를 짊어지고 산다는 것은 피곤한 일이었다. 몸에 배어 있다고는 해도, 그래도.
그러니까 꿈 정도는 꿀 수 있는 것이 아니냐고, 요즈음 딜라일라는 생각했다. 언제부터였을까? 처음 에릭의 방에서 로맨스 소설을 읽어 본 날부터일까?
그러면 안 되는 건 알지만.
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 정도는, 해도 되잖아.
“많이 어려운가요?”
“……응?”
“한숨을 쉬셔서.”
저도 모르게 무거운 한숨을 내뱉은 모양이었다. 자신의 얼굴도 굳어져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인지한 그녀가 입꼬리를 당겼다. 순식간에 만들어 낸 천사 같은 미소를 자연스럽게 덧입고 딜라일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너무 어렵다. 역시 내가 이해하기는 무리였나 봐.”
에릭의 금빛 눈동자가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딜라일라는 애써 입꼬리를 끌어당겨 활짝 웃는 모양을 만들었다. 에릭이 손에 쥐고 있던 만년필을 내려놓았다. 톡, 데구르르. 종이 위로 미세하게 각이 진 금속이 구르면서 작게 소리를 냈다. 지익, 끼익. 의자가 바닥에 끌리는 소리가 곧 그 위를 덮었다.
조금 전까지 테이블 건너 맞은편에 앉아 있던 에릭이 그녀의 곁에 바짝 붙어 왔다.
“아직 서론이네요. 사실 서론은 전제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굳이 자세히 읽을 필요 없어요. 차라리 책을 끝까지 읽은 후에 다시 보면 좀 더 이해가 잘될 거예요.”
“그, 그래?”
“네. 단어에 대한 정의 정도만 제대로 짚고 본론으로 가는 게 빨라요. 일단 이쪽을 먼저 보시면…….”
“으응.”
딜라일라에 비하면 현저히 커다란 손이 휙휙 페이지를 넘겼다. 종이가 팔랑팔랑 넘어갈 때마다 어딘가에서 향기가 났다. 종이 냄새인 것도 같고 잉크 냄새인 것도 같은, 말하자면 책 냄새. 그리고 산뜻한 풀잎 향기가 났다.
“여기요.”
페이지 위를 짚은 긴 손가락은 하얗고 마디가 져 있었다. 잉크가 튄 얼룩이 그 위에 점처럼 군데군데 흩어져 있었다. 딜라일라는 손에 잉크가 튀는 것을 싫어해서 곧장 닦아 내곤 하는데, 그는 그런 것에는 신경 쓰지 않는 모양이었다. 다른 친구였다면 잉크 닦아야겠다, 손수건 빌려줄까? 따위의 말을 했을 법도 한데, 딜라일라는 그런 말을 하기보다는 그 위에 튄 잉크 얼룩의 개수를 세어 보고 있었다.
“마법 공학의 가장 기초적인 부분을 다루는 책이라서, 이런 단어도 하나하나 상세하게 정의를 해요. 누나도 잘 알겠지만, 마법 공학에서는 특히 정의가 중요하거든요. 같은 단어라도 책마다 정의를 다르게 잡기도 하고요.”
“…….”
“여기서 기기라고 하는 건 마법을 활용해 개별적인 효과를 드러내는 모든 물품을 총칭하는 말이에요.”
“……그렇구나.”
나름대로 쉽게 설명을 해 주려고 하는 것 같았다. 물론 신경이 전부 딴 데로 가 있는 딜라일라는 그 말들이 한 귀로 흘러들어 왔다가 전부 한 귀로 흘러나가 버렸지만 말이다.
오른손에만 일곱 개. 휙휙 움직이는 에릭의 오른손에 튄 잉크 얼룩을 전부 찾아내 개수를 센 딜라일라가 이번에는 왼손으로 시선을 옮겼다. 하지만 그의 왼손은 페이지가 덮이지 않도록 꼭 붙잡고 있는 탓에 엄지와 검지를 제외하고는 잘 보이지가 않았다. 그녀는 제대로 보이지 않는 에릭의 왼쪽 손등을 제대로 보려고 고개를 옆으로 살짝 기울였다.
콩. 그녀의 분홍색 머리통이 그의 오른쪽 어깨에 가 닿았다.
“여기서 효과라는 건 가시적이건 비가시적이건 현상 세계에 일으킨…….”
나직한 목소리로 책에 쓰인 단어에 대한 해설을 줄줄이 쏟아 내던 에릭의 목소리가 그 순간 멈칫했다.
딜라일라는 모른 척 목에 힘을 뺐다. 작은 머리의 무게가 그의 어깨에 완전히 내려앉았다. 에릭은 키가 큰 만큼 앉은키도 딜라일라보다 훨씬 더 커서, 그녀는 별 불편함도 없이 그의 어깨에 기댈 수 있었다.
“……모든 현상을 말하는 겁니다.”
“응.”
넓은 어깨에 기댄 조그만 머리가 작게 끄덕거렸다. 단단한 어깨는 그녀가 무게를 더한다고 해서 딱히 흔들리지는 않았지만, 어쩐지 조금 더 딱딱하게 굳은 것 같았다. 퐁, 따끈따끈한 온기를 피워 올리던 마음이 조그맣게 간지러운 기포를 터뜨렸다.
“그러니까 마법 공학이란…….”
“응.”
다시 끄덕. 이번에는 확실하게 그의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에릭에게 책을 빼앗기다시피 넘겨준 이후로 어색하게 놀고 있던 딜라일라의 한 손이 에릭의 팔뚝을 건드렸다. 팔꿈치 즈음에서부터 천천히 아래로, 아래로 옷 위를 쓸어내린 손끝이 천천히 하얀 손등 피부 위를 지나 툭 불거진 검지 마디에 가 닿았다.
“여기, 잉크 묻었어.”
“…….”
“여기도.”
“……그런 걸 보고 있었어요?”
“응.”
끄덕. 습관처럼 고개를 끄덕거리는 움직임이 그의 어깨에 벚꽃 색을 문질렀다. 하얀 셔츠에 분홍빛 물이 들 것 같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딜라일라는 조금 더 편하게 그의 손을 만지작거릴 수 있게, 아예 그의 팔뚝 안쪽으로 손을 끼워 넣었다. 팔짱을 끼고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로 딜라일라의 작은 손이 에릭의 손을 쥐었다.
“여기도, 여기도. 그리고 여기도. 얼룩투성이야.”
“……그러네요.”
아예 그의 오른손을 붙잡고 뒤집어 관찰하기 시작한 딜라일라가 그의 손바닥 아래쪽, 손목 즈음에 톡 튀어나온 뼈를 꾹 눌렀다. 몰래 그의 손을 관찰하던 때에는 보이지 않던 잉크 얼룩을 새로 찾아낸 그녀가 마음속으로 개수를 세었다. 여덟 개.
“여기도 있네. 이러니까 자꾸 종이에 잉크가 번지지.”
“그건 어차피 저만 보니까요.”
“아, 이건 아직 안 말랐네. 조금 전에 묻었나 봐.”
꾹 눌렀던 손을 떼어 낸 딜라일라가 자신의 검지 끝에 묻어난 잉크 자국을 그의 손등에 문질렀다. 하얀 피부 위에 흐릿하게 푸른빛이 도는 검은 얼룩이 번졌다.
“그걸 왜 제 손등에 닦아요.”
“어차피 얼룩투성이잖아.”
“그렇게 닦는다고 지워지지도 않을 텐데.”
“그건 그러네.”
다시 자신의 손을 들어 올려 검지를 들여다보는 딜라일라의 눈이 쓸데없이 진지했다. 그녀의 손끝에는 에릭의 손에 묻은 것과 똑같은 색의 잉크가 지문의 모양을 따라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팔짱을 낀 그대로 손을 들어 올린 탓에 그녀가 에릭의 팔을 꼭 껴안은 모양새가 된 것도 모르고 딜라일라는 한참 동안 자신의 검지 끝에 생긴 검푸른 빛의 소용돌이를 들여다보았다. 별로 의미도 없는 잉크 얼룩일 뿐인데도 불구하고, 무언가를 탐색하듯 그녀는 손끝에 생긴 무늬를 열심히도 관찰했다.
“누나.”
“……응?”
견디다 못한 에릭이 누나, 하고 불렀을 때까지도 딜라일라는 손끝에 남은 잉크의 파도를 시선으로 타넘고 있었다.
“그…… 닿는, 데요.”
“뭐가?”
딜라일라가 무심하게 되물었지만, 에릭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가 드물게 말하기를 망설이며 입술만 어물거리는 동안 딜라일라도 그가 말하려던 것을 깨달았다.
무심코 에릭의 팔을 꽉 껴안고 있었던 탓에, 딜라일라의 말캉한 가슴팍에 그의 팔뚝이 파묻혀 있었다. 불현듯 지금까지 느끼지 못했던 감촉이 밀려왔다. 단단한 근육이 어색하게 굳어 움찔거리며 말랑한 살덩이를 꾹꾹 누르고 문질렀다.
“아.”
바보 같은 소리를 낸 딜라일라가 어색하게 그의 팔을 놓아주었다. 팔이 풀려난 후에도 에릭은 차마 말을 꺼내지 못하고 몇 번인가 입술만 열었다 닫기를 반복했다. 딜라일라 역시 마찬가지였다.
무거운 듯, 가벼운 듯. 어색하고 조금 불편한, 하지만 어쩐지 피부가 근질거리는 듯한 정적이 그들 사이에 내려앉았다.
“……가 보시는 게 좋겠어요. 역시 피곤할 테니까.”
먼저 정적을 깬 것은 에릭이었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목소리였지만, 딜라일라의 귀 바로 곁에서 울린 탓에 그녀에게는 커다랗게만 들렸다. 흡, 순간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쉬는 딜라일라의 작은 숨소리가 에릭의 귀에 곧장 와 닿았다. 이제 그들의 어깨 사이에는 애매하게 빈공간이 있었지만, 그런데도 어쩐지 딜라일라의 어깨가 떨리는 것이 전해지는 것 같았다. 에릭의 어깨가 여전히 어색하게 굳어 있는 것도.
밀착하지 않아도 밀착한 것처럼, 한없이 가까운 공기를 공유하고 있는 그들은 뭔가를 느끼고 있었다. 아직은 정확히 무엇인지도 모르는 그 분위기를.
“……응.”
작은 대답과 함께 딜라일라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에릭도 바로 그녀의 뒤를 따라 의자를 밀고 몸을 세웠다. 닫혀 있는 방문까지 고작 몇 발짝을 걷는 짧은 순간이 길게 늘어나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시간과 함께 길고 가늘게 늘어난 신경이 예민하게 떨리고 있었다.
딜라일라는 한 발짝 떨어져 그녀의 뒤를 따라 걷는 에릭의 숨결이 등줄기를 간지럽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실제로는 풀어 내린 머리카락에 뒤덮인 등에는 그의 숨결이 닿을 리가 없는데도.
그녀가 문 앞에 멈춰 섰다. 그도 딱 한 발짝 떨어진 뒤에, 멈춰 섰다.
딜라일라는 그대로 한 발을, 뒤로 내디뎠다.
“앗.”
생각보다 에릭이 더 가까이 있었다. 디딘 발이 그의 발등 위를 꾹 눌렀다. 그 통에 화들짝 놀란 딜라일라가 휘청거렸다. 중심을 잃어버리고 흔들리는 어깨를 에릭의 단단한 오른팔이 감아 붙잡았다. 왼팔은 그녀의 가느다란 허리에 감겼다.
분홍빛 머리카락이 치렁거리며 에릭의 가슴팍을 간지럽히고 떨어졌다. 그 아래 숨겨진 작고 동그란 뒤통수부터 어깨와 날개뼈, 허리와 그 아래까지가 전부 에릭의 몸에 그대로 맞닿았다.
그때까지도 무거운 듯 가벼운 듯, 피부 위를 근질거리게 하던 뭔가가 거짓말처럼 녹아내렸다. 꽉 밀착한 피부 사이에서 피어오르는 체온에 녹아 버린 것만 같았다. 녹아서, 상대의 체온과 함께 피부 아래로 스며드는 것 같았다.
딜라일라는 어쩐지 자신이 아주 오래전부터 이런 순간을 기다려 온 것처럼 느껴졌다. 보글보글 작게 기포를 터뜨리며 끓던 마음이 소리를 죽였다. 전부 끓어 날아가 버린 것인지, 식어 가라앉은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미안해요.”
“……놓지 마.”
그들은 동시에 서로에게 속삭였다. 힘을 풀고 그녀를 놓아주려던 에릭의 팔을 정작 그녀의 손이 붙들었다.
“에릭.”
“……네, 누나.”
“방학하면, 음, 자주 못 보겠지?”
“…….”
에릭이 대답을 하지 않았다. 여전히 그녀는 에릭의 품 안에 꼭 안겨 있었다. 단단한 몸이 어색하게 움찔거리며 멀어지려 했지만, 딜라일라는 자신의 어깨를 안은 그의 팔을 놓아주지 않았다. 그의 근육이 움직이는 모양이 등으로 생생하게 전해져 왔다. 피부 위에서 간지럽게 돌아다니던 것이 몸속으로 스며들어 따끈따끈한 온기로 변했다.
“그러니까 잠깐만 이렇게 있어 줄 수 있을까? 혹시 불편하면…….”
“불편하지 않아요.”
재깍 돌아오는 대답에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익숙하게 만들어 낸 미소가 아닌 탓인지 뺨이 움찔거리며 경련을 일으켰다. 그녀를 떼어 내는 것을 포기한 에릭이 딜라일라의 머리 위로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정수리로 에릭의 숨결이 쏟아져 내렸다. 종이 냄새가 났다. 묵은 종이와 싸한 새 잉크 냄새. 그리고 그 사이에 섞인 산뜻한 향기.
책 냄새가 아니라 에릭의 체향이었어.
어쩌면 돌아간 후에도 딜라일라의 머리칼에서는 그 향기가 날지도 모른다. 딜라일라는 괜히 외로워지는 밤에 그녀가 떠올리게 될 것이 조금 더 늘어났음을 알았다. 만년필의 펜촉이 사각거리며 종이 위를 긁는 소리. 구부러진 뒷모습과 가끔 작게 흔들리는 캐러멜 색의 머리카락. 비록 짧을지라도 매번 성실하게 대답을 돌려주는 낮은 목소리. 그리고 이제는 그의 향기와 피부로 전해지는 온기도.
딜라일라는 얼굴을 살짝 치켜들고 에릭의 가슴팍에 뒤통수를 문질렀다. 그에게 자신의 향기를 남기려는 것처럼. 조그만 동물들이 자신의 영역에 그렇게 하듯이.
“따뜻해서, 좋아.”
그 말을 내뱉기가 무섭게 에릭이 그녀를 힘주어 끌어안았다. 확신할 수 없을 정도로 아주 미세하게, 하지만 조금 더 따뜻하게.
* * *
돌이켜보면 어떻게 그런 대담한 짓을 했는지 모르겠다고, 딜라일라는 생각했다.
취한 것도 아니었다. 울음을 터뜨린 것도, 피곤한 탓에 반쯤 졸고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모든 감각이 아주 예민하고 날카롭게 곤두서 있었다. 덕분에 딜라일라는 시간이 지난 뒤에도 그때 공기 중을 떠돌던 냄새와 온기, 말랑하고 단단한 촉감과 작게 옷감이 스치며 바스락대던 소리까지 모두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그래서 더 명확하게 알 수 있었다. 딜라일라는 그때 명백히 제정신이었고, 완전히 이성적이었다. 뒤로 한 걸음을 내디디면 에릭의 품에 자신의 몸이 쏙 파묻히리라는 것을, 그때의 그녀는 알고 있었다. 중심을 잃고 휘청거리다 그에게 꽉 안기게 되기까지 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어쨌든 하나는 확실했다. 딜라일라는 그 밤에 에릭과 닿고 싶었다.
“얘, 딜라일라!”
“……앗, 네에!”
그녀를 부르는, 그녀와 꼭 닮은 사랑스러운 목소리에 딜라일라는 생각에서 깨어났다. 그녀는 지금 가족과 함께 에리카 가문 소유의 남부 별장에 와 있었다.
“또 정신을 쏙 빼놓고 있었니? 오늘은 같이 외출하기로 했잖아.”
“잊지 않았어요. 외출 준비도 끝냈는걸.”
“그래그래, 네가 여름까지 입을 새 옷을 전부 장만해 버리고 말겠다는 엄마의 결심을 알아주렴.”
“그건 좀 참아 줘요…….”
딜라일라가 부러 시무룩한 투로 대답하자 마가렛이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종소리처럼 맑은 웃음소리가 벽난로가 타닥타닥 불꽃을 튀기는 소리와 겹쳐 행복의 모양을 그려냈다. 그녀와 꼭 닮은 얼굴에는 살아온 시간을 증명하는 나이테가 몇 개나 새겨져 있었지만, 딜라일라는 그 주름이 모두 저 웃음으로 비롯되었음을 알았다.
그래서 그녀는 어머니의 얼굴을 좋아했다. 꼭 어머니처럼 행복한 얼굴로 나이를 먹고 싶다며 애교를 부리는 딸을 보듬는 마가렛의 뺨으로 하얗게 소금기를 머금은 햇볕이 쏟아졌다.
에리카 가문이 소유한 저택은 수도 없이 많았지만, 그중에서도 별장으로 쓰고 있는 남부의 저택은 특별했다. 바다가 곧장 내다보이는 해안가에 지어진 하얀 석조 저택은 그리 크지는 않아도 아름다웠다. 바다가 있는 남쪽으로는 값비싼 고급 유리를 끼운 넓은 창을 몇 개나 내서 낮이면 따스한 햇볕이, 밤이면 잔잔한 파도 소리가 창을 넘어 들어왔다.
그녀의 어머니, 마가렛 에리카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 로드릭 에리카는 분명 마가렛을 꼭 닮은 딸일 거라며 이 별장을 짓기 시작했다고 들었다. 모든 이가 에리카의 피를 이을 아들이 태어나기를 빌어 주는 가운데, 로드릭은 반드시 사랑스러운 딸이 태어날 거라고 자랑을 하고 다녔다고 한다.
그리고 저택이 완성된 직후에, 그의 말대로 마가렛을 꼭 닮은 분홍빛 머리칼을 가진 딸이 태어났다. 로드릭과 마가렛은 자신들에게 찾아온 축복과도 같은 딸에게 기쁨이라는 뜻의 이름을 붙였다. 그렇게 딜라일라 에리카가 태어났다.
딜라일라 에리카는 태어난 후부터 지금까지 매년 겨울이 되면 이 남부 별장에서 지냈다. 그녀가 태어난 직후 내무부 최고 위원이 되어 바빠진 로드릭을 자주 만나지는 못했지만, 이곳에 오면 그녀는 아버지의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새해가 밝아 오는 날에는 로드릭 역시 바쁜 일을 모두 미루어 두고 별장으로 내려와 딜라일라와 시간을 보냈다. 비록 하루를 머물고 수도로 돌아가게 되더라도, 반드시.
그래서 딜라일라에게 이 남부 별장은 가장 좋아하는 곳이자 가장 특별한 공간이었다.
이곳에 올 때면 딜라일라는 우울한 생각이나 힘든 일은 모두 의식의 저편으로 미루어 두었다. 좋아하는 공부마저 모두 미뤄 두고 벽난로 앞에서 온기를 쬐며 데굴거리거나 담요를 두르고 창가에 앉아 멍하니 바다를 바라보며 시간을 죽이다가, 식사 시간이 되면 어머니와 재잘거리며 수다를 떠는 것이 그녀가 매년 겨울을 나는 방법이었다.
하지만 올해의 딜라일라는 조금 달랐다.
그녀는 아버지가 보내 준 마차를 타고 셰 상브르를 떠나는 순간부터 지금까지 줄곧 생각에 빠져 있었다. 어머니와 수다를 떨 때는 전과 같이 재잘거리며 온갖 잡다한 이야기를 쏟아 냈지만, 혼자 난롯가에 무릎을 끌어안고 앉아 있을 때나 파도 소리를 들으며 누워 있는 한적한 시간이 찾아오면 그녀는 머릿속을 비집고 들어오는 상념을 밀어내지 못하고 그 속으로 빠져들곤 했다.
에릭 브라이어는 언제나 그 바다처럼 펼쳐진 생각 더미의 가장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핸드 머프도 꼭 하라니까, 아무리 남부여도 지금은 겨울이잖니.”
마가렛도 그 사실을 눈치챈 것인지, 딜라일라가 질색하는 것을 알면서도 올해는 꼭 딸을 데리고 외출을 해야겠다며 엄포를 놓았다. 딜라일라도 조금쯤은 그녀의 제안을 반길 수밖에 없었다. 그녀 역시 쉴 새 없이 자신을 덮치는 생각으로부터 잠깐이라도 벗어나고 싶었다. 분명 질색을 하다못해 집에 돌아올 즈음이면 녹초가 되어 있겠지만, 그러면 적어도 밤에는 생각에 빠질 틈도 없이 잠들 수 있을 테니까.
“어머니랑 손잡고 걷고 싶단 말이에요.”
“아유, 정말. 누구 딸 아니랄까 봐, 말을 너무 예쁘게 해.”
“당연히 사랑스러운 마가렛 여사의 딸이지요.”
“우아하다고 해 줄래? 이 나이에 내가 딸한테까지 사랑스럽다는 말을 들어야겠니?”
사이좋은 모녀가 똑같은 목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결국 딜라일라는 거추장스러운 핸드 머프를 끼지 않는 대신 어린아이처럼 어머니의 손을 꼭 붙들고 별장을 나섰다.
로드릭이 별장을 짓기 전부터 알음알음 별장지로 선호되던 남부의 해안 도시는 에리카의 별장이 지어진 후부터는 수도의 이름 있는 가문들이 모조리 모여드는 이름난 겨울 휴양지가 되었다. 에리카가 기억하는 어린 시절부터 그 주위는 이미 멀끔한 별장과 화려한 상점가가 복작복작 공존하고 있었다.
마가렛과 딜라일라는 잡은 손을 경쾌하게 흔들며 별장 지구를 벗어나 상점가로 접어들었다. 곧장 의상실과 소품점이 그득그득 들어찬 거리로 향하려는 마가렛의 손을 당기며 작은 반항을 해 보던 딜라일라는 결국 그녀의 귓가에 끊임없이 딸과 함께 쇼핑을 하는 게 소원이었다는 말을 장난스럽게 속삭이는 어머니에게 패배하고 말았다.
힘차게 의상실의 문을 여는 마가렛의 밝은 표정을 보며 딜라일라가 그녀와 꼭 닮은 미소를 얼굴 위에 그려냈다. 어쨌든 그녀도 어머니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은 좋아했다. 쇼핑은, 음, 여전히 질색이지만.
아니나 다를까 그들 모녀는 의상실과 소품점을 몇 군데나 돌아다니며 발목이 드러나는 길이의 원피스 세 벌과 발목을 덮는 드레스 두 벌, 블라우스 네 벌, 스커트와 재킷을 세 세트, 챙이 넓은 모자 세 개와 볼러햇 두 개, 편하면서 예쁜 학생용 구두를 색이 다른 것으로 두 개, 굽이 높은 구두를 외출용과 야회용으로 각각 하나씩 샀다.
한사코 자신은 낄 일이 없다며 만류하는 딜라일라를 쌩하니 무시한 마가렛은 손목을 충분히 덮는 따뜻한 장갑 두 개를 사는 것으로도 모자라 조그만 손가방과 학교에서 쓸 커다란 가방을 각각 세 개씩 사기까지 했다.
딜라일라가 먼저 사고 싶다고 말한 것은 얇은 실크가 몸에 부드럽게 감기는 긴 잠옷 두 벌과 도톰한 털실로 짠 품이 넓은 카디건 두 벌뿐이었다. 나머지는 모두 신이 난 마가렛이 점원들이 가져온 것 중에서 까탈스럽게 선별해 낸 물건들이었다.
길고 지난한 쇼핑의 시간 내내 딜라일라는 옷을 몸에 대어 보고, 입었다가 벗고, 모자를 쓰고 손가방을 메어 보는 등 마가렛의 손짓에 따라 예쁘고 귀여운 딸이 해야 할 모든 일을 충실하게 수행했다.
그리고 완전히 녹초가 됐다.
“넌 한창때면서 그렇게 체력이 없어서 어떡하니. 너무 책상 앞에 앉아서 공부만 해도 못써.”
괜히 핀잔을 주는 마가렛의 목소리에 은근히 걱정이 깔린 것을 눈치챈 딜라일라가 그녀에게 웃어 보였다. 산더미처럼 구매한 옷은 모두 배달을 부탁한 뒤 카페에 마주 앉은 차였다. 모녀의 가운데에는 은은한 향을 피워 올리는 찻잔과 티 포트, 그리고 딜라일라의 빨려 나간 기력을 채워 줄 달콤한 한 입 거리들이 쌓여 있었다. 단것을 보고도 즐겁게 웃는 얼굴이 아닌 지친 표정을 짓고 있었던 것을 딜라일라는 뒤늦게 깨달았다.
“책을 읽거나 공부를 하는 건 쇼핑보다 훨씬 잘할 수 있다고요.”
“난 정말 이해가 안 되는구나. 겉모습은 날 닮았는데 아무래도 속에 든 건 로드릭을 쏙 뺐다니까.”
“서로 다르니까 더 좋은 사이가 될 수도 있잖아요, 어머니랑 아버지처럼.”
애교를 담뿍 담아 말한 딜라일라가 찻잔을 들었다. 마시기 딱 좋을 정도로 식은 찻물에서는 싱그러운 풀잎 냄새가 폴폴 피어올랐다. 남부 해안가의 특산물인 로즈마리였다.
“그래서 너랑 나도 사이가 좋은 거니?”
“하지만 전 아버지랑도 사이가 좋은데.”
“그이하고 사이가 나쁜 사람은 전부 나아아쁜 사람뿐일걸.”
나아아쁜, 하고 길게 목소리를 늘리는 마가렛의 얼굴을 보며 딜라일라는 다시 웃었다. 소녀처럼 입술을 삐죽거리며 말하는 어머니의 얼굴을 보면 괜히 사랑스럽다는 말이 성년을 넘긴 딸을 둔 부인의 이름을 장식하는지 알 것 같았다.
“넌 그런 점도 로드릭을 꼭 닮았지.”
소리 하나 없이 들어 올린 찻잔에서 싸하게 피어오르는 하얀 김을 맞자, 분주히 거리를 돌아다니는 새 차가운 겨울바람을 맞아 얼었던 뺨이 녹아내리며 부드러운 홍조를 띠었다. 사분사분 녹아내린 뺨에 행복한 주름을 만들며 마가렛이 찻물을 한 모금 머금었다. 딜라일라는 아무리 따라 하려고 해도 할 수 없는 우아한 움직임이었다.
“그런가요?”
“우리 딸 인기가 얼마나 좋은지, 매일 딜라일라 에리카를 칭송하는 소리가 저택 담장을 넘어오는데.”
“에이, 아니에요. 칭송이라니.”
“아니긴? 너 좋다는 남자애들이 줄을 섰는데. 아침마다 은 쟁반 위에 딸 얼굴 좀 구경시켜 주십사 하는 편지가 산처럼 쌓인단다.”
딜라일라가 소서 위에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녀의 뺨처럼 분홍빛이 감도는 하얀 자기가 맞부딪치며 달그락 소리를 냈다. 뭐라 대답을 하기가 어려워서, 그녀는 대답 대신 케이크 위에 장식되어 있던 딸기를 입에 물었다. 가루 설탕의 단맛이 먼저 혀끝에 은은하게 퍼지고, 그 뒤에 산뜻한 과육이 씹혔다.
“그래도 우리 딸, 남자는 잘 골라야 하는 거 알지? 네가 누군데.”
“당연히 알죠. 아버지의 자랑인 딜라일라 에리카인걸요.”
딜라일라와는 달리 고소한 휘낭시에를 입에 문 마가렛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의 한쪽 눈썹이 쓰윽 위로 들려지는 중에도 그녀의 벚꽃 색 입술은 빠르지 않게 오물오물 휘낭시에를 씹었다. 고작 과자 하나도 우아하게 씹어 삼킨 뒤에 찻물로 마른 입 안을 적신 마가렛이 뒤늦게 톡 쏘아붙였다.
“무슨 소리니. 넌 내 자랑이지. 똑똑하고 사랑스럽고 말도 잘하는 우리 딸을 낳은 건 네 아버지가 아니라 나란다.”
단 입 안을 찻물로 씻어 내고 있던 딜라일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거울을 마주 보는 것처럼 그녀의 한쪽 눈썹도 쓰윽 위로 들려 올라가 있었다.
‘아버지의 자랑인 딜라일라 에리카’라고 말하는 동안에도 내내 입 안에 달라붙어 있던 딸기 향이 싸한 풀잎 냄새에 깨끗하게 지워졌다.
“그러니까 남자 친구 생기면 엄마한테 제일 먼저 말해야 해. 네 아빠한테는 비밀로 해 줄게.”
“그런 거 없어요. 조금 전까지 함부로 남자 만나지 말라고 하셨으면서.”
“잘 고르라고 했지, 만나지 말라고는 안 했잖니. 내가 너처럼 아카데미에 다녔으면 남자 친구를 열다섯 명은 만들었을 거야.”
다정하게 속삭이다가도 갑자기 스스럼없이 대단한 가설을 세우는 어머니의 목소리에 결국 딜라일라는 깔깔 소리 내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얼마나 즐겁게 웃음을 터뜨렸던지 멀찍이 떨어진 테이블에 앉아 있던 사람이 고개를 돌려 그들 모녀를 쳐다보았을 정도였다. 주변에 작게 사과를 건넨 뒤에도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해 쿡쿡 소리를 내면서 딜라일라가 속살거렸다.
“아버지한테 다 일러 줄 거예요.”
“그러렴. 그이도 내가 그이랑 결혼해 준 걸 좀 더 고마워할 필요가 있어.”
“지금은 부족해요?”
“딜라일라, 네 어머니는 사실 엄청난 욕심쟁이라는 사실을 알아 두도록 해. 네가 날 닮았어야 했는데.”
“저도 알고 보면 욕심이 많을지도 모르지요.”
“그럴 리가 없어. 남자 친구가 하나도 없다니! 예쁘게 낳아 준 보람이 없잖니.”
다시 딜라일라가 웃음을 터뜨렸고, 이번에는 마가렛도 딸의 얼굴을 보며 작게 소리를 내어 웃었다. 그 뒤로도 그들은 한동안 내가 너였으면 아카데미에 있는 남자들로 친위대를 만들었을 거라는 둥, 저도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할 수 있다는 둥, 하는 이야기를 나누며 한참을 떠들었다.
목적도 의미도 없지만 간간이 웃음이 터져 나오는 즐거운 이야기는 그것만으로도 마음을 가볍게 했다. 그러는 동안만큼은 딜라일라도 에릭 브라이어와 자신의 처지에 대해 잊어버리고 신이 나서 어머니와 떠들었다. 법적으로 허용되기만 하면, 너는 남편을 잘생긴 남자만 골라 스무 명은 둘 수 있을지도 모른다며 부러워하는 목소리를 내는 마가렛 때문에 딜라일라가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조용한 카페 안에 웃음소리가 울릴 때마다 딜라일라는 주변에 사과를 건넸다. 친구처럼 서로에게 장난스럽게 속삭이며 차를 마시는 모녀를 바라보는 주위의 시선은 따뜻했다. 아마도 그들이 그 유명한 딜라일라 에리카와 마가렛 에리카가 아니었더라도 그랬을 것이다. 그만큼이나 그들은 사랑스러운 모녀였다.
* * *
집으로 배달을 부탁했던 옷과 소품들 사이에 주문한 적도 없는 물건이 섞여 있는 것을 발견한 건 다음 날 아침이었다. 배달이 늦은 시간에 도착한 데다, 길었던 외출로 지친 딜라일라와 마가렛이 산더미처럼 쌓인 상자를 풀어 보기를 포기하고 일찍 잠들었던 탓이었다.
에게 주는 선물이라고 하기에는 별다른 첨언이나 메모도 없었고, 심지어 딜라일라가 주문한 것 중 그녀가 직접 고른 유일한 옷이었던 실크 잠옷이 없었다. 대신 커다란 가운과 드레스 셔츠 두 벌, 크라바트 따위가 든 상자가 잠옷을 샀던 의상실의 이름을 달고 버젓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어느 모로 보나 웬 남자에게 가야 할 상자가 잘못 섞여 온 꼴이었다.
결국 딜라일라는 마가렛과 함께 이틀 연속으로 외출을 감행해야 했다. 남부 별장에 내려오면 별장 안에만 콕 틀어박혀 지내는 그녀에게는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물론 겨울 휴가를 별장에서 보내면서도 매일 티 파티나 연회 따위를 여는 다른 이들이 보기엔 딜라일라가 특이한 경우이겠지만 말이다.
“아휴, 정말 별일이구나.”
“그러게요.”
어제와 달리 마냥 즐겁지만은 않은 얼굴로 걷는 마가렛의 옆으로 딜라일라가 종종종 따라붙었다. 그녀가 마가렛의 손을 꼭 붙잡자 그제야 구겨져 있던 얼굴이 조금 펴졌다. 딜라일라와 마가렛은 어제처럼 손을 꼭 붙잡고 딜라일라가 잠옷을 주문한 의상실 문을 열었다. 딸랑딸랑, 문에 매달린 방울이 경쾌한 소리를 울렸다.
그러나 딜라일라는 문이 등 뒤에서 채 닫히기도 전에 움찔 멈춰 섰다. 마가렛도 마찬가지였다. 문이 열리자마자 안쪽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모조리 그들에게 꽂힌 탓이었다. 딱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그러니까 그쪽에서는 물건을 제대로 보냈다, 그러니까 못 받은 우리 잘못이다. 뭐 그런 거예요?”
딜라일라보다 키가 훌쩍 크고, 짙은 갈색 생머리를 길게 길러 늘어뜨린 여자만이 등을 보이고 있었다. 나머지 사람들 - 의상실의 직원들은 모두 문을 열고 등장한 딜라일라와 마가렛을 그녀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기회쯤으로 여기고 있는 것 같았다.
“아이구, 마가렛 에리카 님 아니십니까. 또 와 주셨군요!”
아니나 다를까 직원 두 명이 당장 눈을 빛내며 그녀들을 향해 다가왔다. 다른 한 명은 시끄러운 틈을 타서 가게 안쪽으로 쏙 들어가 버렸고, 갈색 머리의 여자 바로 앞에 서서 그녀가 따져 묻는 것을 들어 주고 있던 직원 한 명만이 벗어나지 못하고 제자리에 서 있을 뿐이었다.
“분위기가 좀 어수선하네요.”
“죄송합니다. 부디 신경 쓰지 마시고 이쪽으로…….”
“오늘은 뭘 사러 온 게 아니어서요.”
그러잖아도 그다지 좋은 기분은 아니었던 마가렛이 직원에게 우아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 안에는 차마 숨겨지지 않는 언짢음이 고스란히 들어 있었다. 반색하며 달려 나왔던 직원들이 저들끼리 눈짓을 주고받았다. 그 모양을 전부 지켜본 딜라일라가 상냥한 목소리를 냈다.
“물건을 못 받으신 분이 계신가요?”
“그, 그렇다고는 합니다만…….”
“아마 어떤 착오가 있었겠지요. 호텔로 배달을 부탁하셔서, 아마 그 호텔에서 제대로 전달을 해 주지 않은 것이 아닌가 말씀을 드리던 참입니다.”
흐응, 마가렛이 슬쩍 코웃음을 흘렸다. 그러고는 딜라일라가 끼어들기도 전에 먼저 톡 가시 돋친 말을 내뱉었다.
“그럼 우리 물건은 저택 사용인들이 빼돌리기라도 했나 보죠?”
“예……?”
“우리 쪽에도 물건이 오지 않은 게 있어서요.”
당황한 듯하더니 아예 사색이 되기 시작하는 직원들에게 딜라일라가 품에 안고 있던 상자를 내밀었다. 마가렛은 무얼 직접 가져다주기까지 하느냐고 했지만, 딜라일라가 이 물건을 못 받은 분이 있으시면 빨리 드려야 할 게 아니냐며 굳이 가지고 온 것이었다.
“대신 이게 왔더라고요.”
“아, 아니. 이런 죄송할 데가…….”
“어쩌면 저분께서 받지 못한 물건일지도 모르겠네요.”
딜라일라의 말투는 갈색 머리 여자나 마가렛에 비해서는 훨씬 상냥하고 부드러웠지만, 직원들은 얼굴에서 하얗게 핏기가 빠져나가고 있었다.
물건을 잘못 보내는 실수를 저지를 수는 있었다. 하지만 눈앞의 직원들은 제대로 확인해 보지도 않고 저들의 실수가 아니라고 말하면서 오히려 손님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있었다. 그리고 딜라일라와 마가렛의 눈앞에서 딱 들키고 만 것이다.
이쪽의 이야기가 들렸는지, 갈색 머리칼의 여자가 그들을 향해 홱 고개를 돌렸다. 딜라일라는 순간 왠지 모르게 익숙한 느낌에 저도 모르게 표정을 풀었다. 하지만 여자는 여전히 무시무시한 표정이었다. 아무래도 화가 많이 난 듯했다.
딸랑딸랑, 다시 한번 문이 열리고 방울이 쓸데없이 경쾌한 소리를 울렸다. 딜라일라도, 직원들도 모두 무심코 그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차가운 겨울 공기가 가장 먼저 밀려들어 왔다. 그 뒤를 이어서 남자가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여성용 물건이 대부분인 의상실 안에는 다소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큰 키에 캐러멜 색 머리카락을 대충 흐트러뜨린 채로, 정강이까지 내려오는 긴 코트를 입은 차림이었다. 익숙한 듯 익숙하지 않은 모습이 딜라일라의 연한 푸른색 눈동자에 가득 들어찼다.
싸늘한 겨울바람과 함께 잉크와 나무 냄새가 났다.
“……누나?”
“에…….”
“에릭!”
무심코 그의 이름을 부르려던 딜라일라는 정작 다른 곳에서 빽 터져 나오는 외침에 후다닥 정신을 차렸다. 따뜻한 캐러멜 색 눈동자가 딜라일라를 스쳐 지나갔다.
그의 시선은 한참 뒤에서 그의 이름을 부른 갈색 머리 여자에게 고정되었다. 에릭이 담담한 말투로 질문을 꺼냈다.
“누나, 작가는 목청도 좋아야 해?”
“얘들이 빡치게 하잖아!”
“단어 선택도 남달라야 하고?”
“물음표 살인마 짓 하지 말고 넌 거기 서서 덩칫값이나 해!”
시원시원하다 못해 호쾌한 말을 쾅쾅 내던진 갈색 머리 여자가 성큼성큼 걸어왔다. 에릭의 곁에 선 그녀를 본 딜라일라는 깨달았다. 바로 옆에 나란히 서고 보니 묘하게 비슷한 분위기가 흐르는 얼굴이었다. 머리 색도 이목구비도 미묘하게 달랐지만, 닮았다. 시원시원하게 큰 키라든가 곧은 턱, 따뜻한 색의 눈동자 같은 것들이.
“남매가 사이가 좋군요.”
딜라일라만 그렇게 느낀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내내 뾰로통한 표정을 짓고 있던 마가렛이 설핏 미소를 띤 얼굴로 에릭의 친누나에게 말을 걸었다.
“실례되는 모습을 보여 드려 죄송합니다.”
하지만 막상 입을 열면 에릭과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낮고 묵직한 목소리인 데도 불구하고 묘하게 잔잔하고 붕 떠 있는 듯한 에릭과는 달리 딱 부러지는 목소리로 그녀가 마가렛에게 사과를 건넸다. 정작 마가렛은 개의치 않는 듯 손을 내저었다.
“그럴 것 없어요. 나라도 화가 났을 테니.”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잘못 받으셨다는 물건을 확인해 보아도 될까요?”
“드레스 셔츠와 남성용 크라바트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확실한 건 이쪽 직원분께 확인해 보시면 될 것 같네요.”
“역시 그랬군요. 감사합니다.”
자연스럽게 직원이 물건을 빼돌리거나 발뺌할 틈도 남겨 주지 않은 마가렛이 흥미롭게 눈앞의 남매를 훑어보는 동안, 에릭의 누나는 똑 부러지게 직원에게 당장 이곳에서 상자를 열라고 다그쳤다. 울상이 되어서는 마지못해 상자를 묶은 끈을 푸는 직원과 매서운 기색의 여자, 그리고 한 발짝 떨어져서 멀뚱히 선 에릭으로 차례차례 시선을 옮기던 딜라일라의 입가에 어렴풋이 미소가 매달렸다.
내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처럼 금빛 눈동자와 곧장 눈이 마주친 덕분이었다.
이분이 그 친누나분이셔? 뻐끔뻐끔 입술을 움직여 묻자 에릭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소리가 없는 그녀의 질문을 제대로 읽어 내지 못한 것 같았다. 딜라일라가 사르르 웃으며 다시 입술을 움직였다. 물고기처럼 뻐끔뻐끔 몇 번이나 입술을 움직여도 그는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고 그 무뚝뚝한 얼굴을 슬쩍 기울이기만 했다.
“아는 사이니?”
“앗.”
어느새 딜라일라에게 바짝 붙어 선 마가렛이 속삭이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어머니 성격에 물건을 확인하는 것을 끝까지 지켜보고 있을 줄 알았는데.
“얘는 뭘 그렇게 놀라고 그러니.”
놀란 어깨를 토닥토닥 쓸어 주는 마가렛의 손길에 딜라일라가 뒤늦게 어깨에서 힘을 뺐다. 에헤헤, 아이처럼 소리 내 웃어 보이자 마가렛이 눈짓을 했다. 소개해 달라는 뜻이었다.
“에릭?”
“네.”
“이쪽은 우리 어머니셔. 보면 알겠지만.”
에릭이 다시 한번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딜라일라는 문득 학교에서 그가 다른 학생이나 교수님들과 인사를 나누는 것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리고 매양 그의 방을 들락날락하는 그녀에게 꼬박꼬박 짧게만 대답하던 순간들도. 그녀는 혹시 그가 제대로 인사를 하지 않는 게 아닐까, 불안한 기분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에릭 브라이어입니다.”
“마가렛 에리카예요.”
다행히 에릭은 금세 정중하게 꾸벅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했다. 딜라일라가 남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브라이어라면, 마법 공학부의 천재라고 명성이 자자한 학생인가 보군요.”
“명성이랄 만한 것은 없습니다.”
“겸손은. 학생 이름을 몇 번이나 들었는데요. 우리 딸하고 함께 셰 상브르에서 손꼽히는 인재라고요.”
그런 딜라일라의 속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에릭은 조금 딱딱하긴 해도 평범하게 마가렛과 대화를 나누었다. 마음속으로 가슴을 몇 번이나 쓸어내린 딜라일라가 금세 대화에 은근슬쩍 딸 자랑을 섞어 넣는 마가렛을 말리려던 순간이었다.
에릭이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누나와 이름을 나란히 하기에는 제가 많이 모자랍니다.”
“어머.”
마가렛이 고운 손을 들어 입가를 살짝 가렸다. 에릭에게는 아마 보이지 않겠지만, 마가렛의 바로 곁에 서 있던 딜라일라는 볼 수 있었다. 그녀의 손 아래에 가려진 입가에 아주 신이 난 미소가 맺혀 있었다. 마가렛이 여전히 그 미소를 하얀 손가락 뒤에 숨긴 채로 말을 하려던 때에 에릭의 곁에 그녀의 친누나가 다가와 섰다.
“일은 잘 마무리되었나요?”
“네. 구매한 것들 모두 취소하기로 했습니다. 도움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시 들어도 에릭과 달리 똑 부러지는 말투였다. 화가 나 있을 때는 잘 몰랐는데, 표정을 누그러뜨리자 분위기가 확 바뀌었다. 별일이 없으면 내내 무심한 표정을 짓고 있는 에릭과는 달리 씩 웃는 얼굴은 개구쟁이처럼 장난스러웠다.
에릭도 웃으면 저럴까?
“그거 잘됐네요. 얘, 딜라일라. 넌 어쩔 거니? 네 것도 취소할까?”
“음…… 전 그냥 다시 가져다 달라고 할래요.”
“뭐, 그러렴.”
살랑살랑 손을 저어 보인 마가렛이 직원을 향해 발걸음을 뗐다. 딜라일라는 여전히 그 자리에 어색하게 서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에릭의 누나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
“오딜 브라이어입니다.”
딜라일라에게 먼저 악수를 청하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보통 여성은 악수로 인사를 나누지 않기 때문이었다. 딜라일라는 어색하게 내밀어진 손을 맞잡았다. 손을 꽉 잡고 위아래로 흔드는 오딜은 악수가 익숙해 보였다.
“딜라일라 에리카예요……. 쓰신 책은 즐겁게 읽었어요.”
맞잡은 손이 떨어질 즈음에 작게 덧붙인 말에 오딜이 반색을 했다.
“아, 제 책을 읽으셨어요?”
“에릭이 빌려주어서…….”
딜라일라는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에릭이 ‘친누나가 썼다’고 말했던 것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나중에 문득 떠오른 생각에 책장을 뒤져 보며 그의 방 안에 있는 로맨스 소설을 전부 확인해 보았더니, 저자의 이름이 모두 같았다. 오딜 브라이어. 그녀는 딜라일라가 그의 방에서 읽은 로맨스 소설을 쓴 작가였다. 그것이 생각나서 덧붙인 말이었는데, 눈에 띄게 반색을 하는 그녀를 보니 말하기를 잘한 것 같았다.
“아까부터 눈치를 보아하니 에릭하고 아는 사이셨던 모양이에요.”
“셰 상브르에 다니고 있어요.”
“그렇군요. 마법 공학부이신가요?”
“아, 아뇨. 행정 교양학부 6학년입니다.”
그때껏 멀뚱히 서 있던 에릭을 오딜이 휙 돌아보았다. 오딜의 찌르는 듯한 시선에도 에릭은 무덤덤한 얼굴로 작게 고개를 끄덕여 보일 뿐이었다.
“모자란 동생하고 친하게 지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모자라지는 않는걸요.”
“그래요. 셰 상브르 아카데미 마법 공학부에 천재가 나타났다고 소문이 자자하던데. 너무 겸손해도 좋지 않지요.”
직원과 이야기를 끝낸 마가렛이 딜라일라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자연스럽게 이야기에 끼어들었다. 오딜과 마가렛이 다시 한번 서로를 소개하고 소개받으며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묘하게 화기애애한 분위기에 끼어들지 못하고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은 에릭뿐이었다.
“그럼 모두 볼일을 마친 것 같으니, 돌아갈까요?”
먼저 대화를 끝낸 것은 마가렛이었다. 오딜은 마가렛과 딜라일라에게 감사하다는 인사를 건넸고, 딜라일라와 마가렛은 웃으며 사양했다. 그들은 다 함께 의상실을 나왔다.
그리고 다음 날, 딜라일라는 카페에서 종이와 만년필, 잉크와 찻잔, 조그만 단 음식들이 어지럽게 쌓인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오딜과 마주 앉았다.
“억지로 나오실 필요는 없었는데요.”
오딜은 빙글빙글 웃으며 그렇게 말했지만, 딜라일라가 이 자리에 나오게 한 것은 그녀였다. 어제 의상실에서 나와 잠시 같은 방향으로 걷는 사이에, 딜라일라도 아닌 마가렛에게 넌지시 이야기를 붙여 가면서.
“에리카 양을 만나게 되어서 정말 반가웠어요. 언제 한번 같이 차라도 마실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물론 요즘 딜라일라 에리카 양의 멍한 상태에 걱정이 많던 마가렛은 신이 나서 맞장구를 쳤다.
“그거 정말 좋은 생각이네요. 우리 딜라일라는 겨울이면 통 밖으로 나오질 않아서 걱정이 많답니다.”
“저런, 너무 실내에만 있는 것도 건강에 좋지 않을 텐데요.”
“그러잖아도 요즘 너무 몸이 약해진 것 같아 걱정이에요. 그런데 저 애는 공부가 아니면 재미있어하는 게 없어서는…….”
뜬금없는 곳에서 돌아온 대답에도 오딜은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 나갔고, 결국 오딜과 마가렛은 각기 호텔과 저택으로 향하는 갈림길이 나타나기도 전에 다음 날 딜라일라와 오딜이 함께 외출할 계획을 세워 버리고 말았다.
그 결과가 이것이었다. 그 오딜이라는 아가씨가 참 시원시원하니 마음에 쏙 드니 친구가 되어 보는 것도 좋지 않겠느냐며 일찍부터 성화를 부리는 마가렛 덕분에 딜라일라는 저택에서 쫓겨나다시피 나와 오딜과 만나기로 한 카페로 나와야 했다. 약속했던 것보다 이른 시간에 저택을 나선 딜라일라가 카페에 도착했을 때 이미 오딜은 창가의 넓은 테이블을 혼자 차지하고 앉아 있었다.
“억지로 나온 것은 아닌걸요.”
“그렇담 다행이고요.”
호쾌하게 웃으며 손에 쥔 만년필을 내려놓은 오딜이 찻잔을 들고 벌컥벌컥 찻물을 들이켰다. 달캉 소리와 함께 내려놓은 찻잔 안에는 이미 차갑게 식어 있었는지 색이 진한 액체가 고여 있었다.
“일찍부터 나와 계셨나 봐요.”
“글을 쓰러 왔거든요. 호텔 방에 틀어박혀서 창문 너머로 바다를 내다보며 쓰는 것도 좋지만, 이렇게 카페에 앉아서 쓰는 것도 재밌네요. 아, 마침 제가 차를 다 비웠으니 에리카 양께서 마실 차와 함께 새로 주문하도록 하죠.”
오딜이 빠르게 말을 쏟아 냈다. 딜라일라가 어어, 하는 사이에 어느새 주문이 끝났다. 오딜은 마구잡이로 널려 있던 종이를 대충 밀어 정리한 뒤에 딜라일라의 찻잔이 놓일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테이블 위는 여전히 어수선했지만, 어떻게든 찻잔과 티 포트가 놓일 자리만은 생겼다. 딜라일라가 주문한 것은 어제와 같은 로즈마리 차였다.
“로즈마리는 여자 몸에 좋죠.”
“그런가요? 전혀 몰랐어요.”
“마법 약을 만들 때 자주 쓰는 재료라서 알 뿐입니다. 집안이 그렇다 보니.”
“그러고 보니 브라이어 남작님께서도 마법 공학자셨죠.”
“그렇습니다. 아버지 때문이 아니라 에릭 녀석 때문에 아는 거지만. 그 녀석은 아버지와 달리 마법과 연관이 있는 건 다 하거든요.”
두 사람의 대화는 자연스럽게 에릭에 관련한 이야기로 흘러갔다. 딜라일라는 뜨거운 찻잔을 들어 뜨거운 김에 섞여 올라오는 싸하고 상쾌한 풀잎 냄새를 맡으며 오딜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늘 제가 이해 못 할 만큼 어려운 걸 쓰거나 읽고 있죠.”
“집에서도 똑같아요. 하루 종일 실험만 해요. 이번엔 어째 더 심해져서 잠도 제대로 안 자는 것 같고. 그게 꼴 보기 싫어 여기까지 데리고 왔는데, 데려온 보람도 없이호텔 방에 처박혀서 또 뭘 끄적거리고 있지만. 저 자식이 쓰라고 챙겨 온 잉크가 아닌데 동이 나 버리는 바람에 나오는 길에 잉크를 새로 사야 했다니까요.”
손에 쥔 만년필을 휙휙 돌리더니 뭉툭한 뒤꽁무니로 잉크병을 가리키며 찡긋 눈짓을 하는 오딜이었다. 딜라일라는 그 익숙지 않게 유쾌한 태도에 어색하게 눈을 접어 웃었다.
“사실 에리카 양과 굳이 자리를 만든 것도, 그렇게 하면 그 녀석도 같이 나오지 않을까 싶어서 그랬는데……. 오늘은 또 밤새도록 뭘 한 건지 아무리 깨워도 일어나지를 않더라고요. 죄송합니다, 불편하실 텐데. 사과의 의미로 오늘 차는 제가 사죠.”
“아, 아뇨. 괜찮아요. 음, 작가님과 함께 차를 마시는 것도 저는 좋은데요.”
빈말은 아니었다. 손에 튄 잉크를 제대로 닦지도 않은 채로 테이블 위에 종이를 가득 흩어 놓고 만년필을 굴리는 오딜의 모습은 어제보다 훨씬 딜라일라에게 친근하게 느껴졌다. 게다가 에릭과 묘하게 닮은 얼굴이 호탕하게 웃거나 끊임없이 말을 쏟아 내는 모습은 신기했다.
오딜의 눈동자는 에릭의 것보다는 색이 어두워서 얼핏 보기에는 갈색처럼 보였다. 하지만 눈꺼풀을 치켜뜨고 그 눈 안에 빛이 담기는 순간에는 영락없이 녹아내린 태양 빛을 두른 것처럼 금빛이 반짝거렸다. 고양이 같은 모습이었다.
“작가님이라고 불러 주시니 괜히 멋있는 사람이 된 것 같고 좋네요.”
“멋있는 분이 맞으신걸요.”
“그렇게 말씀하시는 에리카 양이야말로 멋진 분 같네요. 작가님이라는 호칭도 좋지만, 지금은 오딜이라고 불러 주세요. 편집자님이 부르는 것 같아서 괜히 무섭네요.”
무섭네요, 라고 말하면서도 전혀 무서워 보이지 않는 오딜의 당당한 표정을 보면서 딜라일라가 풋, 웃음을 흘렸다.
“그럼 저도 딜라일라라고 불러 주세요, 오딜.”
“좋아요. 애독자에게는 그런 서비스가 있어야 하는 법이죠.”
흔쾌히 호칭을 편하게 한 그들은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호칭이란 신비한 것이어서, 그것 말고는 달라진 것이 없는데도 어쩐지 딜라일라는 오딜과의 대화가 조금 더 편해진 것 같았다. 오딜 역시 그랬는지 이전보다 한결 말하는 방식이 편안해졌다. 다시 말하자면, 그녀의 말에서 딱딱한 정중함이 사라지는 대신 호쾌한 단어 선택이 늘어났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그 새끼가 뭐라고 했는지 알아요?”
“……네?”
“그런 소설을 쓸 정도면 굴러먹을 만큼 굴러먹은 년 아니냐고, 자기랑도 찐하게 연애 한번 해 보자 뭐 이런 개 같은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더군요.”
“세상에.”
대화는 주로 오딜이 이끌어 가고 딜라일라가 맞장구를 치거나 대답을 하는 식으로 흘러갔다. 그래도 딜라일라는 시종일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오딜이 풀어 놓는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었다. 도무지 집중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오딜은 흔치 않게 아카데미에 다니지 않고도 직업을 가진 여성이었고, 자연히 아직 아카데미도 졸업하지 않은 딜라일라와는 전혀 다른 경험을 하고 살아온 것 같았다.
자연히 그녀는 딜라일라가 시종일관 ‘교양 있고 뛰어난 셰 상브르의 학생들’과 나누던 것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마구잡이로 쏟아 냈다. 내용뿐만 아니라 말하는 방식도 전혀 달랐다.
“진짜 세상에 맙소사죠. 그런 새끼들은 다 잘라 버려야 해요.”
“……뭘요?”
딜라일라가 차마 목적어를 짐작하지 못하고 불안하게 눈동자를 떨며 물었을 때 오딜은 장난스럽게 눈을 찡긋거리며 대담한 손짓을 해 보여서 딜라일라를 기겁하게 만들기도 했다.
“그, 그런.”
“없으면 그런 개 소리도 못 하겠죠. 하여간 뭐 달린 새끼들이 다 문제예요. 그래서 제가 로맨스 소설을 쓰죠. 적어도 달린 걸 제대로 쓸 줄 아는 놈들이 좀 있었으면 싶었거든요.”
“그러시구나…….”
딜라일라는 거의 넋이 다 빠져나간 채로 찻잔을 홀짝거렸다. 미지근한 찻물을 삼키고 잔을 내려놓자 오딜이 자상하게 포트를 들고 딜라일라의 찻잔을 채워 주었다. 다시금 싸늘한 풀잎 냄새가 피어올랐다.
“그런 의미에서 <환희>는 정말 제가 말하기도 뭣하지만, 역작이죠.”
“풉, 콜록!”
모르는 사람이면 그저 흘려보낼 법한 짧은 단어가 어떤 책의 제목인지를 알고 있는 딜라일라는 전부 빠져나가려던 넋을 붙잡기 위해 마시던 찻물을 순간 잘못 삼키고 거하게 사레가 들리고 말았다.
“이런, 물이라도 좀 가져다 달라고 할까요?”
“콜록, 죄송, 콜록콜록!”
오딜이 점원을 불러 부탁한 찬물이 자신의 앞에 놓일 때까지 딜라일라는 제대로 숨을 고르지도 못하고 기침을 하다가, 숨을 참았다가, 다시 기침을 토해 내길 반복했다. 힘겹게 찬물 한 잔을 몇 번에 나눠 마시고 난 뒤에야 조금 진정된 딜라일라를 앞에 두고 오딜은 내내 걱정스러운 눈을 하고 있었다.
“이제 괜찮아요.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뭘 감사까지 해요. 당연한 건데.”
그새 다 식어 버린 딜라일라의 차를 치워 버린 오딜이 씩 웃었다. 딜라일라는 그 스스럼없는 얼굴에서 금빛으로 빛나는 눈동자를 발견하고는 잠깐이나마 에릭을 떠올렸다.
“그런데.”
“네?”
씩 웃어 보이는 오딜의 얼굴에서 에릭의 흔적이 흩어졌다. 오딜은 도무지 그녀를 앞에 두고 다른 사람을 연상할 틈을 주지 않았다.
“<환희>를 읽어 보셨군요?”
“…….”
“대답하지 않아도 돼요. 이해해요. 그건 원래 제 소설을 좋아하시던 분들이 더 쉬쉬하거든요. 욕도 많이 먹었어요. 무슨 여자가 그런 걸 쓰고 읽느냐고 말이에요. 그런 것치곤 제일 많이 팔렸지만.”
“조금, 앞 부분만요.”
“저런. 저로서는 끝까지 읽어 주셨으면 했는데요. 결말이 중요해서. 하지만 뭐, 거기까지 가는 내용이 어떤 분들에겐 좀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사실은 저도 알아요.”
눈동자가 빛났던 것은 자신의 책과 관련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랬던 걸까. 원래 작가란 사람들은 다 이런 걸까……. 딜라일라가 생각하기가 무섭게 오딜이 말을 쏟아 냈다. 하지만 의외로 딜라일라가 더 이상 넋을 잃어버릴 만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하지만 전 여성에게도 욕망과 욕구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요. 물론 다들 알고는 있지만, 모르는 척하는 사실이죠. 전 모른 척하기 싫었을 뿐이고요. 그걸 적나라하게 꺼내 보이고 싶어서 쓴 게 <환희>예요.”
어쩐지 귀에 쏙 틀어박히는 말이었다. 심장이 쿵 내려앉는 것도 같았다.
“어떤 지적이고 영혼 적인, 흔히 여성이 남성보다 뛰어나다고 여겨지는 비물질적인 부분이 아니라 다른 부분, 물질적이고 신체적인 환희를 여성도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을 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었어요. 딜라일라, 행정 교양학부에 다닌다고 했죠? 행정 교양학부에는 여성인 동기들이 많은가요?”
“……네.”
“마법 공학부에는 남성에 비해 여성인 학생이 현저히 적다고 들었어요. 전 그게 정말 이상하다고 생각해요. 본래 마법은 여성의 것이었거든요. 마법의 원천은 여성이었어요. 마녀 말이에요.”
“그렇죠, 들어 본 적 있어요.”
“오래전에는 한 명의 마녀가 한 부족을 이끌었어요. 마녀는 축복받은 존재였고, 마법은 무리의 생명을 지키는 데나 사용하는 신비롭고 기적적인 힘이었어요. 하지만 현재는 어떻죠? 마법은 이제 신비의 영역이 아니에요. 하나의 법칙처럼 여겨지죠. 그 법칙을 활용한 마법 공학이라는 분야가 생겨났고요. 마법은 이제 비물질적 환상이 아니라 물질적인 현상이에요.”
“그렇……군요.”
“그리고 어떻게 되었죠? 마법 공학은 남자들의 전유물이 되었어요. 이건 정말 이상한 일이죠. 분명 오래전부터 마법과 좀 더 가깝게 여겨졌던 것은 분명 여성이었어요. 마녀가 세상을 이끌던 시대에 마법을 부리는 남성이 태어나면 죽였다더군요. 불길하다는 이유로요. 하지만 지금은 어떻죠? 마녀는 없어졌어요. 마법 공학자들뿐이죠, 대부분이 남자인.”
그 순간 딜라일라는 오딜의 눈을 보면서 어떤, 형언할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혔다. 오딜의 금빛 눈동자는 흉흉하게 번득이고 있었다. 내내 장난스럽거나 활기차게만 보이던 것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가 그녀의 얼굴에 감돌고 있었다. 딜라일라는 찻잔을 드는 대신 침을 꼴깍 삼켰다. 정체 모를 긴장감이 발끝에서부터 올라왔다.
“여성은 영적이고 신비로운 영역에 놓인 존재로, 남성을 물질 현실의 영역에 놓인 존재로 보기 때문이에요…… 세상을 이끌어 가는 것은 남자라고들 하죠. 정말 개소리 아닌가요?”
“…….”
“개소리라고 생각해요. 여자들도 분명 같은 현재를 살고 있는데 말이에요. 눈깔들이 삐었나.”
무시무시하게 씹어뱉은 오딜이 문득 표정을 풀었다. 날카로운 금빛 안광이 저녁 태양 빛처럼 안온하게 녹아내렸다. 눈꼬리를 희미하게 접으면서 오딜이 웃었다.
“이해하기 어려운 이야기를 했죠, 미안해요.”
그 순간 목 뒤를 간지럽히던 긴장감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딜라일라는 괜히 목 뒤로 손을 가져가 머리칼을 빗어 내렸다. 손가락에 매끄러운 감촉이 휘감겨 왔다. 몇 번인가 입을 오물오물 움직이던 딜라일라는 차마 가슴속에 차오른 감정을 말로 표현해 내지 못하고 짧게 말했다.
“아뇨, 재밌어요.”
“……그래요?”
“네.”
오딜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별안간 커다랗게 웃음을 터뜨렸다. 카페 홀이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크고 호쾌한 웃음이었다. 딜라일라는 오딜이 한참 동안 웃음을 멈추지 못하고 웃어 대는 것을 보며 외려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렇게 우스운 말을 했던가?
“딜라일라 양이 에릭하고 친하게 지내는 이유를 알겠어요.”
“……네?”
“걔는 사회적인 부분이 많이 모자라거든요. 대신 편견도 없고. 제가 보기엔 좋은 거지만, 세상 살긴 어려운 타입이죠. 걔는 아직도 제가 자기보다 더 마법 공학을 잘한다고 생각하는 애예요. 아무도, 심지어 우릴 키운 아버지마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도요.”
딜라일라는 머릿속으로 에릭과 보냈던 시간을 되새겨 보았다. 정확히는 그동안 에릭이 보였던 말과 행동을.
에릭은 분명 얼핏 보기에는 이상하게 여겨질 법한 사람이었다. 다른 사람과 어울리지 못하는 것뿐만 아니라, 보통이라면 알아서 짐작하고 넘겨짚을 법한 부분에 대해서도 꼭 되묻는다든가 하는 부분들이 그랬다. 마법 공학부의 학생들은 그런 에릭을 두고 마법 공학밖에 모르는 천재라서 그렇다거나 사실은 다 알면서 비꼬려고 그러는 거라고 말하곤 했다.
하지만 딜라일라가 겪은 에릭은 그렇지 않았다. 그 애는 사회에 대해서는 이해를 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사회가 돌아가는 ‘법칙’에 대해서. 그렇지 않았더라면 에릭은 기숙사 방에 단둘이 있다가 사감에게 들킬 뻔했던 때에 그녀를 숨겨 주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야 할 필요가 없으니까. 하지만 에릭은 그녀를 숨겼다. 딜라일라가 사감에게 들키면 안 된다는 사실은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반면 딜라일라가 당연히 알아들을 거라고 여기며 제대로 말하지 않거나, 에둘러 표현할 때에는 꼭 되물었다. 그럴 때는 그의 고개가 아주 미세하게 기울어졌다. 딜라일라는 그것이 에릭이 잘 모르는 것, 이해할 수 없는 것, 그래서 궁금한 것을 대할 때 보이는 버릇이라는 것을 눈치챘다.
그러니까 에릭은, 사회의 규칙은 알아도 암묵적인 합의는 모르는 사람이었다. 모두가 당연히 어떠하다고 여기는 것을, 에릭은 당연하게 여기지 않는다.
“아.”
그래서였을까. 에릭은 한 번도 딜라일라에게 ‘특별하다’ 따위의 이유로 선을 긋지 않았다. 그것은 자기 자신 역시 천재이기 때문이 아니라…….
“알겠죠? 그런 애예요. 제가 하도 붙잡고 탈탈 털어 대서 그렇게 큰 거긴 하지만.”
“그렇군요.”
“심성이 나쁜 애는 아니에요. 하도 표정이 없어서 속을 알 수가 없어서 그렇지.”
“그건, 음, 정말 그렇죠…….”
오딜이 덧붙이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하는 딜라일라의 심각한 표정을 들여다보고서는, 오딜은 다시 한번 카페가 떠나가라 커다랗게 웃어젖히고 말았다. 그 소리에 번뜩 정신이 깬 딜라일라는 오딜이 웃는 이유도 모르면서 자연스럽게 그녀를 따라 웃어 버렸다. 웃음은 전염된다더니, 그래서일까? 어쩌면 호쾌한 웃음소리가 공기를 흔드는 감촉이 간지러워서였는지도 몰랐다.
* * *
그날 이후 오딜과 딜라일라는 하루걸러 하루꼴로 만나서 함께 차를 마셨다. 딜라일라의 외출이 잦아진 것에 마가렛은 지나치게 기쁜 기색을 내보이며 외출복을 더 장만해야겠다는 말을 해서 딜라일라를 또 질색하게 했다. 다행히도 마가렛은 쇼핑을 힘겨워하는 딸을 배려해 혼자서 의상실에 다녀왔고, 딜라일라가 주문했던 잠옷은 괜히 그 상식 모자란 의상실이 생각나서 기분이 나쁘다며 내다 버린 뒤에 다른 의상실에서 딜라일라가 골랐던 것보다 더 보드라운 감촉의 실크 잠옷을 세 벌이나 주문해 주었다.
딜라일라는 오딜이 말하는, 때로는 경박한 듯하고 때로는 이해하기 어려울 법한 이야기들도 언제나 인상 깊게 들었다.
오딜은 처음 딜라일라를 긴장하게 했던 때만큼 날카로운 기색을 띠지는 않았지만 종종 선명하게 속에 든 감정을 드러내는 때가 있었다. 경멸이나 냉소와 같은 것들. 그래서 오딜이 매번 유쾌한 태도로 감추고 있지만, 그녀의 속에는 뭔가가 부글부글 끓고 있다는 사실을 딜라일라는 알 수 있었다.
오딜은 그런 자신의 이야기를 듣고 긍정적인 반응을 돌려주는, 종종 동의해 주는 사람은 처음이라고 했다. 딜라일라가 듣기에는 타당한 이야기였는데도 말이다. 어쩌면 그녀 자신도 오딜처럼 남몰래 무언가를 속에서 끓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며 오딜과 단둘이 차를 마시기를 몇 번째. 대략 일주일가량이 지나고 새해가 성큼 다가온 즈음에야 딜라일라는 에릭을 다시 만날 수 있었다.
“디디, 내 기쁨! 그대를 이런 누추한 곳에 모시게 되어서 면목이 없소!”
“정말 뭐예요, 낯간지럽게.”
연극적인 투로 외치는 오딜을 가볍게 타박한 딜라일라가 힐끔 방 안을 곁눈질했다. 오딜이 머무는 방은 그 호텔에서도 가장 넓고 좋은 방이었지만, 과연 오딜이 누추한 곳이라고 칭할 만큼은 어질러져 있었다. 온 사방에 뭔가가 빼곡히 쓰인 종이가 아무렇게나 뭉쳐져 놓여 있었고 추울 정도로 창문을 활짝 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공기 중에 잉크 냄새가 가득했다.
“마음이 맞는 친구와 매일같이 이야기를 나눴더니 그만 영감이 너무 잘 떠올랐지 뭐요!”
“신작 남자 주인공 말투예요?”
“당연히 아니죠. 한 권도 못 팔고 말아먹을 일 있어요?”
테이블 위에 앉아 두꺼운 새 종이를 만년필로 사각사각 긁어내며 오딜이 낄낄거렸다. 종이 위에 얼룩인지 낙서인지 알아볼 수 없는 글씨들이 빠르게 채워져 나갔다.
정말 남매구나. 이런 점도 닮았네. 창가에 놓인 티 테이블 위에 종이를 가득 널어 두고 글을 쓰고 있는 오딜의 모습은 영락없이 기숙사 방에 틀어박혀 책을 잔뜩 쌓아 두고 연구를 하는 에릭과 판박이인 모습이었다. 하지만 딜라일라는 그 생각을 속에만 담아 두고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몇 번인가 오딜에게 에릭과 닮았다는 이야기를 꺼냈다가 격렬하게 부정하는 반응을 겪고 난 뒤에, 그런 이야기는 오딜과의 원활한 대화에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해한 그녀였다.
대신 딜라일라는 자신의 뒤에 서 있는 에릭을 돌아보았다. 그는 이전에 의상실에서 보았던 것처럼 멀끔한 코트를 차려입고 있었다. 게다가 오늘은 머리 위에 모자를 눌러쓰기까지 해서, 학교에서 보던 에릭과는 전혀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물론 그 잘생긴 얼굴이 모자 아래에 전부 감춰지지는 않았지만.
에릭의 얼굴이야 어떻든, 늘 기숙사에서 입고 있던 가벼운 차림에 캐러멜 색 머리칼을 흐트러뜨린 에릭이 눈에 익은 딜라일라는 새삼스럽게 익숙지 않은 에릭의 모습에 괜히 그의 눈을 피하며 에릭의 코트 소매 아래로 삐져나온 커프스 링크 따위에나 시선을 주었다. 왠지 모르게 잘 차려입은 그와 눈을 똑바로 마주하기가 어려웠다.
매일같이 상점가의 카페를 하나씩 돌아가며 제패하고 있던 오딜과 딜라일라는 이번에는 처음 만났던 카페에서 다시 만날 예정이었다. 하지만 딜라일라가 카페에 도착했을 때는 웬일로 오딜이 먼저 카페에 나와 글을 쓰고 있지 않았다. 대신 그곳에서 혼자 앉아 찻잔을 앞에 두고 종이에 만년필을 굴리고 있던 것은 에릭이었다.
“누나가 도저히 밖으로 나올 몰골이 아니라고, 혹시 괜찮으면 호텔로 와 주지 않겠냐고 전해 달라고 해서요.”
에릭을 뒤늦게 알아보고 자리로 다가가자 그는 인사도 없이 대뜸 부탁받은 말부터 꺼냈다. 문득 기숙사에서 헤어질 때 자신이 저질렀던 행동을 떠올리며 혼자서 얼굴을 붉히고 있던 딜라일라와는 달리 더할 나위 없이 무덤덤한 태도였다.
“좋아, 갈게.”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