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화 (2/14)

밀회

남몰래 모이거나 만남

에릭이 자연스럽게 내민 것을 받아 깨문 딜라일라가 밝게 웃었다. 지난번에 그녀가 맛이 없어도 너무 없다고 투덜댄 탓에 어찌저찌 개량을 해 보았는데, 그것이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맛있다.”

그녀가 웃는 이유를 알면서도 에릭은 무뚝뚝하게 말했다. 그녀처럼 다정하거나 친절하게, 또는 쾌활하고 유쾌하게 말하는 방법 같은 건 몰랐으므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맛으로 먹는 거 아니에요.”

“알아, 알아.”

에릭의 말투가 어떻든 딜라일라는 신경 쓰지 않았다. 발간 입술 사이에서 달콤한 과일 향이 풍겼다. 씩 웃으며 입 안에서 사탕을 도르륵 굴린 그녀가 문고리를 잡았다.

“갈게.”

“네.”

문을 열고 어두운 복도로 걸어 나가는 그녀의 뒤에서 분홍빛 머리카락이 반짝거렸다. 언제 보아도 신기할 정도로 예쁜 색이었다. 열린 문에서 복도로 네모지게 드리워진 빛의 가운데서 딜라일라가 한들한들 손을 흔들었다. 천천히 문이 닫히고, 복도에 쏟아지던 빛도 그녀의 모습도 사라졌다. 에릭의 눈앞에는 굳게 닫힌 나무 문만이 비칠 뿐이었다.

에릭은 그녀가 어떻게 남자 기숙사를 지나 그의 방까지 찾아오는지, 또 어떻게 여자 기숙사로 돌아가는지, 그러면서도 어떻게 다른 사람들에게 단 한 번도 들키지 않는지 알 수 없었다. 굳이 물어본 적도 없었다. 그가 알고 있는 사실은 안뜰에서 찌르르르 울어 대는 풀벌레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잠든 깊은 밤, 그의 방문을 두드리는 방문자는 딜라일라 에리카뿐이라는 것이었다.

처음 그녀가 찾아오던 밤에도 그랬다.

에릭은 늘 그렇듯 늦게까지 깨어 있었다. 그에게 따로 주어진 실험실은 강의동에 있었기 때문에 밤에는 사용할 수 없었다. 그래서 밤이면 에릭은 기숙사 방 안에서 이런저런 것들을 구상하며 새로운 아이디어를 떠올리거나, 간단한 마력 회로를 종이 위에 그리곤 했다. 그러다 보면 늘 새벽까지 깨어 있는 탓에 자연히 수업을 들을 때에 졸곤 했지만, 수업과 관련한 수준의 내용은 이미 전부 독파해 버린 그에게는 그다지 문제가 되진 않았다.

주로 액체로 만들어지는 탓에 휴대하기 어려운 마법 약을 사탕의 형태로 만든다면 어떨까. 그런 생각을 하며 종이 위에 만년필을 굴리고 있던 에릭은 불현듯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들었다.

에릭은 아카데미 내에 친구라곤 없었기 때문에, 일부러 그의 방을 찾아올 사람 역시 없었다. 에릭의 방은 2층 복도 가장 끝 방이니 다른 사람의 방과 헷갈렸을 리도 없다. 게다가 사방이 쥐 죽은 듯 조용한 밤이었다. 깊어 가는 가을밤인데도 불구하고 벌레 우는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깊은 밤.

잘못 들은 것인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 누군가가 다시 문을 두드렸다. 똑똑똑 울리는 노크 소리가 마치 자신은 절대 환청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 같았다.

에릭은 느릿느릿 테이블에서 일어나 문밖으로 귀를 기울였다. 사각사각, 얇은 천이 스치는 소리가 얼핏 들린 것 같았다. 그리고 다시 노크.

똑똑똑! 조심스러웠던 첫 번째 노크보다 강하고 분명하게,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노크가 끝나기 무섭게 에릭이 휙 문을 열었다.

“앗, 아…… 안 자고 있었네.”

“…….”

“다행이다.”

당장이라도 다시 문을 두드릴 것처럼 말아 쥔 손을 들어 올리고 있는 자그만 체구의 여자가 그의 문 앞에 서 있었다. 분홍빛 머리카락이 그녀의 허리께에서 살랑살랑 흔들렸다. 어쩐지 조금 지친 듯한 얼굴로도 사르르 웃음 짓는 얼굴이 어두운 가운데 그의 방에서 쏟아져 나온 등불 빛을 받아 하얗게 떠올랐다.

“무슨…….”

“저, 저기 있지. 그…….”

언제나 다른 이와 대화를 나누는 데 거리낌이나 망설임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던 그녀가 답지 않게 어물거렸다. 머리칼과 비슷한 연한 벚꽃 색의 입술이 몇 번이나 동그랗게 오물거리는 모양을 에릭은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마침내 결심이 섰는지 그녀가 말아 쥔 주먹에 잔뜩 힘을 주고 눈까지 질끈 감은 순간, 복도 끝 모퉁이 너머에서부터 아른아른 빛이 비쳐 들었다. 시간을 맞춰 순찰을 나온 사감일지도 몰랐다. 에릭은 반사적으로 눈앞에 선 여자의 어깨를 한 팔로 감아 당겼다.

“일단 들어오세요.”

탁. 등 뒤에서 기숙사 문이 닫힌 뒤에야 그녀는 질끈 감았던 눈을 떴다. 에릭은 그녀를 방 안에 들여놓은 뒤에야 그 하얀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라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

어딘지 모르게 달콤한 향기가 났다. 쌉싸름한 술 냄새가 단 향에 뒤섞여 아른아른 피어올랐다. 에릭은 분홍색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동그란 정수리가 초콜릿 봉봉이나 사탕 같다는 생각을 했다.

“소, 손 좀…….”

“아, 네.”

무심코 그때껏 감아 안고 있던 어깨를 놓아주자 그녀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추위라도 느끼는 모양인지 웅크린 어깨가 파르르 떨렸다. 그러고 보니 그녀는 제법 쌀쌀한 가을밤의 공기를 막아 주기에는 역부족으로 보일 만큼 얇은 잠옷과 대충 걸친 카디건 차림이었다.

‘취객인가?’

후우우, 뿜어지는 습기 어린 숨에는 명백하게 알싸한 알코올 냄새가 섞여 있었다. 에릭은 코를 찡긋거리며 머리카락이며 얼굴, 목까지 분홍색으로 물든 여자에게서 한 발짝 떨어져 섰다. 취해서 방을 잘못 찾았다기에는, 너무 잘못 찾아왔는데.

“이, 이런 시간에 찾아와서 미안해.”

일단 기숙사 건물조차 헷갈릴 정도로 취한 사람은 아닌 모양이었다. 하지만 대체 왜 이런 시간에 다른 사람들의 눈을 피해서 남자 기숙사까지 숨어들었단 말인가? 에릭이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그녀가 웅얼웅얼 말을 이었다.

“나는 딜라일라 에리카라고 하는데……. 아, 행정 교양학부 6학년이고. 으음. 그러니까 기억할지 모르겠지만…….”

“……대식당에서.”

“맞아!”

처음부터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 같은 연한 분홍빛 머리칼이 흔한 것은 아니니까. 하지만 그가 자신을 기억해 준 것이 기쁜 모양인지 딜라일라 에리카라고 자신을 소개한 여자가 환하게 웃었다.

“그게, 사실…… 그날 있었던 일 때문에. 에릭 브라이어, 네가 곤란해졌다고 해서…….”

에릭의 얼굴이 미묘하게 모로 기울었다.

“애들이 전부 널 따돌리고 있다고…….”

그의 얼굴이 같은 방향으로 조금 더 기울었다.

“식사도 제대로 못 하게 방해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이제는 누가 봐도 알아챌 수 있을 만큼 그의 얼굴이 갸우뚱 기울어져 있었다. 힐끔 그의 눈치를 살핀 딜라일라가 입술을 오물거렸다. 예쁜 머리카락과 닮은, 통통한 벚꽃 색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아니야?”

“모르겠는데요.”

에릭의 대답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아닌 게 아니라, 그는 정말로 그런 것을 모르고 있었다. 그는 원래도 친구가 없었으니 누가 따돌린다고 해서 딱히 전과 달라질 게 없었다. 최근 들어서는 수업이 끝난 뒤로 곧장 카페테리아에서 대충 끼니를 때울 만한 것을 사서 실험실에 틀어박혔다가 학관이 폐쇄되는 시간 직전에야 기숙사로 향하곤 했으니 기숙사 대식당에는 갈 일도 없었다.

“다행이다……. 혹시 정말로 그런 짓을 당하고 있으면 어쩌지 싶어서, 걱정했는데.”

정말로 안심한 모양인지, 내내 우물쭈물하며 모기처럼 작게 속삭이던 목소리가 탁 풀렸다. 정말로 기쁜 기색이었다.

“왜요?”

“왜냐니……?”

그것이 왠지 신기하게 느껴진 에릭의 물음에 오히려 그녀가 되물었다. 그때까지도 묘하게 갸우뚱 고개를 기울이고 있던 그를 따라 하는 것처럼 그녀의 고개가 같은 방향으로 갸우뚱거렸다.

“그걸 왜 에리카 선배님이 걱정을 해요?”

“어, 어?”

“선배님이 제 걱정을 할 이유가 없는데?”

“이유, 있지?”

“무슨 이유인데요?”

끄트머리에 물음표를 매단 말들이 그들 사이를 왕복했다. 왔다 갔다 하는 말 사이에 점점 더 모로 갸우뚱 기울어지던 목이 아파 올 즈음에, 딜라일라가 갑자기 고개를 푹 숙였다.

“그, 그런 말, 내 입으로 하게 만들지 마…….”

그의 친누나가 읽던 것을 따라 책장을 펼쳤다가 기겁하고 덮었던 고수위 로맨스 소설에나 나올 법한 말이 톡 튀어나왔다. 에릭이 자칫 옆으로 꺾어질 것처럼 고개를 기울이자 딜라일라의 손이 슥 뻗어 와서 그의 얼굴을 바로 세웠다. 갓 나온 빵처럼 따끈하고 말랑한 온기가 에릭의 뺨에 닿았다가 떨어져 나갔다.

“진짜 몰라서 묻는 건데.”

“…….”

뺨에서 떨어져 나간 손이 그녀의 카디건 소매 안에 쏙 숨겨지는 것을 바라보면서 에릭이 중얼거렸다. 그는 정말로 몰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말하면 사람들은 대체로 그를 언짢게 여긴다는 것 정도는 그도 알고 있었다. 그가 정말 몰라서 묻는 건데, 하고 말하는 때마다 그의 누나는 에릭에게 짜증을 부려 대곤 했으니까.

“나 때문이잖아…….”

하지만 돌아온 것은 짜증이 아니었다. 힘 빠진 목소리가 갑자기 축 처지더니 끝내 훌쩍, 울음을 삼키는 소리가 났다.

“애들이 전부 날 좋아해서, 크응. 그런데 네가 날 무시했다고. 흐윽. 그래서 혼쭐을 내 줄 거라고.”

뚝뚝 끊어지는 말 사이사이마다 훌쩍이는 소리가 뒤섞이더니. 끝내 그녀의 눈동자에 눈물이 가득 찼다. 커다란 하늘색 눈동자 위에 눈물이 막이 덧씌워져 일렁이는 모습을 에릭은 망연히 바라보았다. 대체 갑자기 왜 그녀가 우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후, 윽. 나는, 그런 거 해 달라고, 크응! 한 적 없는데. 흑, 다들 내가 좋다면서. 으, 흑…….”

뚝. 발갛게 달아오른 뺨 위로 투명한 눈물이 굴러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녀가 으앙 소리를 내며 울음을 터뜨렸다.

“다들 바, 바보야. 흑, 내가 언제 그래 달라고 했어? 흑, 그런데. 으아앙……!”

펑펑 울면서도 딜라일라는 끊임없이 뭐라 중얼댔지만, 에릭은 사실 그녀가 하는 말을 절반도 알아듣지 못했다. 애들이, 누가, 필요 없어, 좋아하면 다야. 그런 말들이 뚝뚝 분절된 채로 에릭의 귓가를 스쳤다. 하지만 머릿속에 제대로 입력되지는 않았다.

눈앞에서 딜라일라가 아이처럼 울고 있는 지금, 그가 세상에서 제일 멍청한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우, 흐으…… 으아앙…….”

딜라일라는 끝내 중얼거릴 말도 다 떨어졌는지 서럽게 우는 소리만 내며 눈물을 주룩주룩 흘렸다. 저 작은 몸에 있는 수분을 전부 눈물로 뽑아내고 있는 것 같았다. 그것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에릭은 이상한 기분에 휩싸였다.

불안하고, 가슴이 술렁거리고. 뭐라도 해야만 할 것 같았다. 이런 걸 안절부절못한다고 하는 것일까. 가슴속이 꾹꾹 죄어드는 것 같은, 막연히 이유도 없이 미안해지는, 그런 기분.

에릭은 눈앞에서 울고 있는 자그만 몸을 푹 껴안았다. 반쯤은 무의식적으로 한 일이었다.

“흑, 으응…….”

눈도 뜨지 못하고 울고 있던 딜라일라의 몸은 뜨거웠다. 그녀가 서러운 소리를 뱉을 때마다 술 냄새가 풍겼다. 그런데 그것이 불쾌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어렴풋이 그녀의 주위를 떠도는 달콤한 향기 탓인지도 몰랐다. 그의 품 안에서 파르르 떨리는 어깨가 새삼스럽게 정말로 조그맣게 느껴졌다.

“미안, 미안해. 흑, 흐아앙…….”

처음엔 어깨에 팔을 두른 것도 불편해했던 그녀는 아예 그의 품에 안겨 있으면서도 불편한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손을 뻗어 그의 하얀 셔츠 자락을 움켜쥐었다. 그러고는 갑자기 미안하다며 그에게 사과를 하기 시작했다.

“누나가 왜 미안해요.”

“흑, 나 누나야? 우, 크흥! 그런데 내가, 흐윽, 미안하다고 말했나?”

아, 그러니까 이건 술주정이군. 술에 취하면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 대며 욕설을 쏟아 내는 그의 친누나에 비하면 퍽 귀여운 주정이었다. 이쪽이 조금 더 대하기 곤란하긴 하지만.

에릭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품에 안긴 딜라일라의 분홍색 머리통을 끌어안았다.

그의 가슴팍에 콩 부딪힌 딜라일라의 이마에서 뜨거운 열기가 그의 피부로 전해졌다. 울음소리에 턱턱 막히는 그녀의 숨결이 그의 셔츠 자락 위를 쓸어내렸다.

“했어요. 했으니까 그만 우세요.”

“응, 흑. 그런데 내가, 후으으…….”

“알았어요. 사과 받을게요.”

“응, 고마, 흑, 고마워.”

에릭은 그녀가 울음을 그칠 때까지 한참 동안 그 작고 뜨거운 몸을 품에 안고 있었다.

한참을 그의 품에 얼굴을 묻고 울던 딜라일라의 울음소리가 천천히 잦아들었다. 내심 그녀가 이대로 울다 지쳐 쓰러지는 것이 아닐까 싶던 에릭으로서는 다행인 일이었다.

그들 사이에서 뚝뚝 떨어지는 서러운 소리, 거칠어진 숨소리, 눈물이 마침내 모두 잦아들고 색색 숨을 몰아쉬는 소리만이 방 안에 가득 찼다. 에릭은 이제 슬슬 그녀를 놓아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여전히 딜라일라의 작은 손이 그의 셔츠 자락을 꽉 움켜쥐고 있었다.

“저, 저기…….”

다시 더듬거리는 목소리. 에릭은 그녀가 처음 그의 방문 앞에 서 있었던 때로 기억을 되돌렸다. 그러니까 지금 그녀는 뭔가를 걱정하고 있었다.

“네, 누나.”

얌전히 대답하자 그녀가 화들짝 몸을 움츠렸다. 그들 사이의 거리는 한정 없이 가까웠고, 누나라고 말하는 에릭의 목소리는 딜라일라의 머리 위로 바로 떨어졌다.

“실망했어?”

“왜요?”

“……아냐. 갑자기 울어서 미안해.”

딜라일라가 말과 함께 내뱉는 숨결과 함께 흩어지던 술 냄새가 어느새 옅게 희석되어 있었다. 알코올의 냄새 위로 짠 눈물 냄새와 달콤한 향기가 덧입혀졌다. 마침내 그의 옷을 꽉 움켜쥐고 있던 손에서 스르륵 힘이 풀리는 것을 느끼고 그 역시 그녀를 껴안고 있던 팔을 풀어냈다.

한참을 울었던 딜라일라의 얼굴은 엉망이었다. 눈가가 발갛게 붓고, 눈물로 젖은 뺨이 반들거렸다. 얼마나 힘을 주었는지 하얗게 질린 손을 들어 뺨을 거칠게 문지른 그녀가 어색하게 입꼬리를 끌어당겨 웃는 모양을 만들었다. 하지만 뺨의 근육이 경련을 일으킨 듯 파르르 떨리고 있는 탓에 그녀의 표정은 어색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면 다행이야. 음, 내가 찾아온 건 비밀로 해 줄래?”

“네, 누나.”

“음, 그럼, 음……. 잘 자. 나는 가 볼게.”

에릭이 뭐라 대답을 하기도 전에 딜라일라가 후다닥 방문을 열고 뛰쳐나갔다. 콩. 그녀의 뒤에서, 그의 앞에서 문이 닫혔다.

에릭은 망연히 닫힌 문을 바라보고 서 있다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종이며 만년필 따위가 마구잡이로 굴러다니는 테이블 앞까지 천천히 걸어가 앉은 그가 문득 자신의 가슴팍을 내려다보았다.

작게 떨리는 어깨, 이마에서 전해지는 뜨끈한 온기. 어렴풋이 달콤한 향기와 뒤섞이던 술 냄새. 그런 것들은 모두 간데없이 사라지고, 그의 품 안에 남은 것은 점점이 찍힌 눈물 자국과 구겨진 셔츠 자락뿐이었다. 그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이 풀벌레 우는 소리도 잠든 깊은 가을밤 있었던 이상한 첫 밀회였다.

* * *

“에릭.”

“네.”

“재밌어?”

“네.”

“난 심심한데.”

“네.”

침대 위에서 베개를 껴안고 데굴데굴 구르던 딜라일라가 팔꿈치로 몸을 받치고 상체를 들어 올렸다. 턱을 괴고 에릭의 뒷모습을 짐짓 매서운 얼굴로 쏘아보았지만, 그는 고개 한번 이쪽으로 돌리지 않았다. 한숨을 푹 내쉰 딜라일라가 이불에 고개를 푹 파묻었다.

“네, 네 대답하는 기계야?”

“아뇨.”

“재미없어…….”

말소리가 이불에 묻혀 먹먹하게 울렸다. 에릭은 이쪽을 한번 돌아보지도 않으면서 그녀가 하는 말에 칼같이 대답을 돌려주었다. 죄다 짧기 그지없는 대답이었지만.

술에 취해 무작정 그의 방으로 쳐들어왔던 이후로 딜라일라는 종종 울적한 기분이 들 때면 남몰래 그의 방을 찾았다. 그녀는 여자 기숙사의 3층 복도 가장 끝 방을 쓰고 있어서, 복도 창밖으로 살짝 기어 나와 비상 사다리를 타고 아래로 내려온 뒤 안뜰을 곧장 통과하면 바로 그의 방 앞 복도로 올라갈 수 있었다. 비상시를 대비한 사다리를 밟을 때마다 종종 양심이 찔렸지만 애써 무시했다. 내 마음이 비상시니까 괜찮아. 그런 식으로 자기 합리화를 하면서.

남들은 술에 취해 온갖 이상한 일들을 저질러 놓고 다음 날 전부 잊어버려서 문제라던데. 딜라일라는 지금도 그날 자신이 에릭에게 보였던 온갖 추태를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다행히 에릭은 입을 굳게 다물었고, 딜라일라가 펑펑 울며 술주정을 부렸던 일은 아무도 입 밖으로 꺼내지 않는 비밀이 되었다.

오히려 그의 품에 안겨 펑펑 울어 버린 이후로 거짓말처럼 마음이 편해졌다. 물론 에릭이 다른 학생들에게 어떤 해코지를 당하지도 않았고, 해코지를 당해도 털끝만큼도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서 그런 것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딜라일라는 그것과는 다른, 오랫동안 그녀의 가슴께에 턱 걸려 있던 덩어리가 녹아 사라진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눈물은 나쁜 감정을 씻어 낸다던데. 하지만 혼자 침대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었던 때는 이렇지 않았다. 울고 나면 부은 눈가와 까슬해진 목, 울리는 머리 탓에 기분이 더 나빠지기만 할 뿐이었다.

그러니까 그건 에릭 덕분이야.

딜라일라는 그렇게 여기기로 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 다시 이유 모를 울적함이 찾아온 밤에 목이 막힌 듯한 갑갑함을 참지 못하고 다시 에릭의 방을 찾았다. 에릭은 말없이 그녀를 방 안으로 들여보내 주었고, 그녀는 우는 대신 가만히 앉아 에릭이 종이에 그녀는 알아볼 수 없는 무언가를 적어 내리고 그림을 그리는 것을 한동안 지켜보았다.

그것만으로도 신기하게 기분이 나아졌다. 에릭에게 방해가 되지 않느냐고 몇 번이나 물어보고 그렇지 않다는 대답을 들은 뒤로, 딜라일라는 아예 마음 놓고 그를 찾아왔다. 에릭은 그때마다 말없이 그녀를 자신의 방 안에 들였다.

몇 번을 들락거리다 보니 그의 방이 제 방처럼 편해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테이블에 앉아서 종이에 뭘 적어도, 책장에 꽂힌 책을 꺼내 읽어도, 심지어 침대 위에 누워도 에릭은 뭐라고 하지 않았다. 그러다 정작 침대 주인은 테이블 앞에 앉아 만년필이나 굴리고 있는 동안 손님이 침대를 차지하고 굴러다니는 상황이 된 것이다.

이게 다 에릭이 아무 말도 하지 않은 탓이지.

딜라일라는 의미 없는 책임 전가를 하며 침대 위에서 한 바퀴 데구루루 굴렀다. 아무래도 너무 심심했다. 에릭은 매일 밤늦게까지 깨어 있었지만, 깨어 있는 내내 종이 위에 뭔가를 끄적거릴 뿐 딜라일라에게 말 한마디 먼저 붙이는 법이 없었다. 그것도 마음에 들긴 했지만…… 어쨌든 심심한 것은 질색이다.

딜라일라는 별수 없이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책이라도 읽을 작정이었다.

에릭의 방에는 침실이건 응접실이건 책이 가득했다. 책장으로도 모자라 여기저기에 책이 마구잡이로 쌓여 있기까지 했다. 테이블 위에도, 의자 위에도. 어디건 책이 있었다.

그러나 몇 번인가 신이 나 책을 들었던 딜라일라는 에릭의 방에 있는 거의 모든 책을 이해하지 못했다. 행정 교양학부인 딜라일라가 마법 공학에 대한 심도 깊은 지식을 다룬 책들을 이해할 리가 만무했기 때문이었다. 생전 들어 본 적도 없는 단어와 수식, 도형 따위만 가득한 책들을 심심풀이로 읽기에는 머리가 아팠다.

그나마 딜라일라가 읽을 수 있는 책이라곤 몇 권 있는 로맨스 소설뿐이었다. 책장 가장 아래 칸 구석에 아무렇게나 꽂혀 먼지를 먹고 있었던 것을 발견해 낸 것은 오직 딜라일라가 심심함을 견디지 못하고 책이란 책은 다 들춰 본 성과였다.

‘마법 공학 말고는 아무것도 관심 없을 것 같은데, 이런 로맨스 소설을 방에 두다니. 어지간히 독특한 취미야.’

딜라일라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그것을 반겼다. 매일 공부하기 바쁜 그녀 역시 로맨스 소설 같은 것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마지못해 펼쳤던 소설은 분명 유치한데도 불구하고 재미있었다. 덕분에 그녀는 요즈음 생전 처음으로 공부가 목적이 아닌 독서에 재미를 붙이고 있었다.

오늘은 뭘 읽지? 룰루랄라 책장으로 걸어간 딜라일라는 제목도 보지 않고 대충 한 권을 골라 뽑았다. 옅은 분홍빛 천으로 표지를 감싼 것이 누가 보아도 로맨스 소설이었기 때문에, 굳이 펼쳐서 내용을 확인해 볼 필요도 없었다.

책을 들고 룰루랄라 테이블로 걸어간 딜라일라가 의자를 뽑아 앉았다. 여전히 종이 위에 뭔가를 휘갈기느라 바쁜 에릭의 맞은편이었다. 어차피 또 말을 걸어 봤자 제대로 된 대화가 시작될 리가 없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는 딜라일라는 그저 가만히 책을 펼쳤다. 즐거운 독서 시간이었다.

몇 분인지 몇십 분인지 모를 시간이 지나고, 에릭은 한참이나 붙들고 있던 종이를 내려놓았다. 잉크가 다 떨어진 만년필이 데구루루 굴러 바닥으로 뚝 떨어지는 것을 주울 생각도 하지 않았다.

드디어 끝났다. 에릭은 뿌듯하게 종이에 휘갈겨 놓은 것들을 바라보았다. 몇 주나 걸린 작품이었다. 딜라일라가 처음 그의 방에 난입하던 날 떠올렸던, 마법 약을 사탕의 형태로 정제해 휴대성을 높이는 방법을 끝내 그가 정리해 내고 만 것이다. 아직 실험은 하지 않았지만 분명 이대로만 한다면 성공할 것이 틀림없었다.

커다란 덩치를 테이블 위에 구부리고 있었던 탓에 뻣뻣해진 목을 우득우득 꺾던 에릭이 불현듯 딜라일라가 손에 쥔 책의 표지를 확인했다.

그리고 그는 곧장 펼쳐져 있던 책을 빼앗아 들었다.

“…….”

“…….”

불시에 읽던 책을 뺏기고도 딜라일라는 멍한 얼굴이었다. 그녀의 볼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첫날 술에 취해 그의 방에 난입했던 순간보다 더.

“그거…….”

“친누나가 쓴 거예요.”

“그렇구나…….”

“어디까지 읽었어요?”

“어, 어.”

넋을 빼앗긴 사람처럼 멍하니 대답하던 딜라일라가 입술을 깨물었다. 얼굴도 모자라 귀 끝까지 빨개지기 시작한 것을 바라보며 에릭이 한숨을 삼켰다. 물론 그의 무심한 얼굴에는 그런 티라곤 하나도 나지 않았지만.

반면 딜라일라는 생각하고 있는 것을 얼굴에 써 붙이기라도 한 것 같았다. 혼란, 당황, 부끄러움……. 그런 것들이 한 데 뒤섞여서 그녀의 하얀 얼굴을 발갛게 물들였다.

짧고도 긴 정적이 이어졌다. 정적을 먼저 깨뜨린 것은 끝내 목까지 새빨갛게 달아오른 딜라일라였다. 그녀는 조그만 몸을 번뜩 의자에서 일으키더니 천천히 뒷걸음질 쳤다.

“나, 그, 이제 가 볼게! 오늘도 고마웠어!”

그리고 대뜸 인사를 외친 후에 후다닥 뛰쳐나갔다. 콩,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에릭은 손에 들린 책을 들어 올렸다. 펼쳐져 있던 페이지는 하필이면 아주 상세하고 섬세한 그림이 한 바닥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에릭 브라이어의 친누나, 오딜 브라이어가 읽다 못해 직접 써서 출판한 것 중에서도 그 대담함으로 인해 한바탕 독자들에게 파란을 일으켰던 초 고수위 로맨스 소설의 풀 컬러 채색 삽화본이었다.

‘미쳤어, 미쳤어. 딜라일라 에리카!’

물론 처음에는 몰랐다. 다른 로맨스 소설과 비슷하게 분홍빛 천으로 마감한 표지에는 금박으로 제목과 작가명이 새겨져 있었다. 제목도 달리 특이하지 않았다. 그건 너무나도 평범해 보였고, 그래서 딜라일라는 좀 뻔한 내용이더라도 재미만 있으면 좋겠다는 식의 생각을 하며 책을 펼친 참이었다.

하지만 정작 페이지 위에 새겨진 글자들은 뻔하거나 평범하기는커녕 충격적인 이야기를 마구잡이로 딜라일라의 눈앞에 펼쳐 보였다. 그것도 첫 페이지부터!

문장이 이어질 때마다, 대사가 읊어질 때마다 딜라일라는 새로운 충격에 빠졌다. 한 번도 접해 본 적 없는 새로운 세상이 딜라일라를 충격으로 몰아넣고 있었다. 세상에, 어머 어머. 세상에? 이게 되나? 아니 이게 가능은 한가? 충격과 의문이 파도처럼 연이어 밀려오는 가운데에서도 그녀를 가장 큰 충격에 빠뜨린 것은 몇 장인가를 넘긴 순간 나타난 삽화였다.

입은 건지 벗은 건지 모를 드레스 차림의 여자와 그녀에게 달라붙은 두 명의 남자의 몸이 지나치게 상세하게 그려져 있었다. 밝은 상아색, 연한 주홍색, 분홍색, 새빨간 색, 거무튀튀한 붉은색이 종이 위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아, 세상에. 이게…… 되네?

입을 다물지도 못하고 반쯤 벌린 채로 멍하니, 하지만 무심코 속속들이 뜯어보고 있던 페이지가 갑자기 쑥 사라졌다. 에릭이 그녀의 손에서 책을 빼앗아 든 것이다.

어쩐지 일그러진 듯한 에릭의 얼굴을 멍하니 올려다보던 딜라일라는 그가 입을 열고, 어디까지 봤느냐고 물었던 그 순간 정신을 차렸다.

다른 사람의 바로 눈앞에서 음란한 책을, 야한 그림을 아주 열렬히 뜯어보고 있었던 딜라일라 에리카 - 자신의 처지를 깨닫는 데에는 다행히도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내내 그녀를 때리던 파도는 이제 충격이 아니라 형용할 수 없는 부끄러움의 이름을 달고 다시 한번 거세게 밀려왔다.

어떻게 그의 방을 뛰쳐나왔는지, 어떻게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딜라일라가 할 수 있었던 생각은 당장이라도 아무도 없는 곳에 숨고 싶다는 것뿐이었다. 방으로 돌아와 무작정 침대에 뛰어든 그녀가 이불을 푹 뒤집어썼다. 그의 방에 갈 때면 언제나 그랬듯이, 얇은 잠옷 위에 품이 넓고 두툼한 카디건을 걸친 차림은 그녀가 당장 침대에 뛰어들어도 불편하지 않았다.

하지만 딜라일라는 뭔가가 불편한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한계까지 치솟았던 부끄러움이나 옅은 수치심이 한풀 가라앉고 난 뒤에도 어쩐지 몸이 불편했다.

가슴팍을 가린 속옷이 어쩐지 몸을 조이는 것 같았다. 다리에 휘감기는 치맛자락이며 발끝까지 덮어 감싼 이불의 감촉도 왠지 모르게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잔뜩 웅크린 탓에 얼굴에 닿는 카디건의 까슬한 표면에 몇 번인가 뺨을 문질러 비비던 딜라일라가 눈을 꾹 감았다.

심장이 두근두근 뛰며 핏줄을 따라 온몸의 신경이 깨어나 맥동하는 것 같은, 이유도 모르면서 날카롭게 피부를 찌르는 예민한 감각. 목이 타는 것처럼 입 안이 바짝 마르고, 몸속 깊은 곳이 간질거리며 꿈틀거렸다. 작은 손이 목적도 없이 웅크려져 손에 닿는 것을 꼭 쥐었다.

한참을 이불 속에 숨어 미동도 없이 웅크려 있던 딜라일라가 불현듯 이불을 박차고 일어났다. 그녀의 손이 치맛자락을 뒤집어 올리고, 속옷 위로 살며시 미끄러졌다.

“아.”

손끝에 닿은 얇고 보드라운 천에서 어렴풋이 습기가 묻어났다. 다시 한번 꾹 손끝으로 눌러 보자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젖어 있었다.

무심코 속옷 위로 손가락을 미끄러뜨린 딜라일라가 짜르르 퍼져 나가는 이상한 느낌에 화들짝 손을 뗐다. 제대로 치맛자락을 갈무리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그녀는 다시 이불을 푹 뒤집어썼다.

아무도 보고 있지 않은데도 부끄러웠다. 에릭의 금빛 눈동자가 떠오르려는 것을 애써 무시하고 그녀는 눈을 꾹 감았다. 얼른 자 버릴 생각이었다.

물론 새벽이 올 때까지 그녀는 잠들지 못했다.

* * *

그날 이후 딜라일라는 이 주가 넘게 에릭의 방에 찾아가지 않았다.

남몰래 들락거리는 사이 깊어진 가을은 이미 색색으로 물들었던 이파리들을 모두 말려 떨어낸 지 오래였고, 이제는 아무리 두텁게 껴입어도 그 틈으로 숨어들어 파드득 어깨를 떨게 하는 겨울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그들은 거짓말처럼 단 한 번도 마주치지 않았다. 사실 딜라일라가 부러 에릭을 찾지 않으면 그들은 마주칠 일이 없었다. 여전히 에릭은 실험실에 처박혀 있느라 대식당에는 들르지도 않았고, 행정 교양학부와 마법 공학부의 학생들이 수업을 듣는 강의동은 너무나도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렇게 그들이 단 한 번도 얼굴을 마주하지 않는 사이에 겨울 휴가를 앞두고 치러질 학기말 시험이 가까워졌다.

“딜라일라, 행정학 개론에서 이 부분 말이야, 혹시 설명해 줄 수 있어? 아무리 읽어 봐도 이해가 되지 않아서…….”

“에리카 선배님, 고전의 기초에 대한 이해 과목의 시험 출제 경향을 좀 물어봐도 될까요?”

“딜라일라, 여기 이거 말인데…….”

“딜라일라, 혹시 오늘 저녁 먹고 내 방에서 같이 공부하지 않을래?”

다시 말하자면 이런 질문들이 딜라일라에게 폭포수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는 뜻이었다.

딜라일라는 아카데미의 학생들에게 동경하는 친구이자 친해지고 싶은 선배였고, 그 외에도 온갖 좋은 관심이란 관심은 한데 받고 있으니 시험 기간이면 공부를 핑계로 말을 걸어 오는 사람이 두 배는 늘어났다.

딜라일라도 그런 것들을 싫어하지 않았다. 친구와 대화를 나누는 것은 즐겁고, 함께 공부하면 능률이 올라서 좋았다. 다른 사람에게 가르친 부분은 쉽게 잊히지 않아서 그녀 자신에게도 이득이었다. 그러니 그녀에게는 굳이 친구들의 요청과 초대를 무시할 이유가 없었다.

문제는 딱 하나뿐이었다.

“피곤해…….”

잔뜩 지친 몸을 질질 끌어와 가까스로 침대 위에 눕힌 딜라일라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오늘도 그녀는 딜라일라는 역시 다르다는 둥, 에리카 선배님이 최고라는 둥, 온갖 칭찬을 잔뜩 받았다. 하다 하다 이제는 대대로 에리카의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내무부를 휘어잡은 이유는 딜라일라만 봐도 알겠다는 말까지 들었다.

딜라일라가 친구들을 대하며 가장 힘이 빠질 때가 이런 순간이었다. 딜라일라를 끝도 없이 대단하다고 치켜세우는 순간들.

딜라일라가 생각하기에 그건 선을 긋는 행위였다. 저들과 딜라일라 사이에 하나의 선을 그어 두는 것이다. 절대 넘을 수 없고, 넘을 생각조차 없는 어떤 것.

선 너머의 그녀는 어쩔 수 없이 대단한 인간이고, 저들과는 아예 처음부터 다를 수밖에 없는 사람이다. 놀라울 것도 없이 ‘당연히’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같이 수업을 듣는 친구들뿐만 아니라 다른 학년의 학생들, 심지어는 교수나 가족들까지도…….

거기까지 생각한 딜라일라는 힘겹게 몸을 뒤집어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더 생각해 봤자 우울해지기만 한다는 것을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막연히 울고 싶었다. 가슴 깊은 곳이 탁 틀어막힌 것처럼 갑갑했다. 이럴 때면 꼭 그가 생각났다.

에릭 브라이어.

딜라일라보다 두 살이 어리고, 셰 상브르의 마법 공학부 수석이고, 항상 실험실이 아니면 기숙사에 콱 처박혀서 다른 것은 신경도 쓰지 않고 자신이 할 일만을 하는. 잘생긴 얼굴과 훤칠한 키를 하고도 인간관계에 무딘 탓에 친구나 애인 하나 없이 하루 종일 제가 하고 싶은 것만 하고있는 그 남자. 그가 보고 싶었다.

그는 다른 친구들처럼 딜라일라에게 다정하게 굴거나 선의를 건네지도 않았지만, 꼭 그만큼 딜라일라를 유달리 특별한 취급을 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녀가 방에서 데굴거리고 있어도 신경도 쓰지 않고 자신이 좋아하는 마법 공학만 들이팠다.

어쩌면 그는 인간관계라든가 하는 것에는 관심도 눈치도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학교 전체가 그를 괴롭혀 주겠다고 기세등등할 때도 전혀 모르겠다는 얼굴을 했으니까. 설령 눈치채지 못했단들 다른 사람에게 그런 이야기를 전해 듣는 순간 딜라일라라면 놀라고 괴로워했을 텐데도, 그는 정말로 담담하고 무심해 보였다.

그렇다고 해서 눈앞에 있는 사람을 아예 없는 취급을 할 정도로 무례한 것도 아니었다. 어쨌거나 말을 걸면 대답을 했고, 그녀가 울음을 터뜨렸던 때는 안아서 달래 주기도 했다. 물론 그녀와 처음 본 그 순간에는 딜라일라를 무시하긴 했지만…… 그건 어쩌면 사정이 있었을지도 모르니까.

이상한 사람. 하지만 좋은 애야.

막상 밤에 그의 방에 들락거리던 때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이, 만나지 못하는 동안 딜라일라의 마음속에서 점점 더 부풀어만 갔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나쁜 쪽으로 상상할 수도 있고 아예 관심을 잃어버릴 수도 있는데도, 그녀는 점점 더 에릭에게 좋은 이미지를 덧씌웠다.

그리고 그만큼 그를 그리워했다. 그리워할 만큼 추억을 가진 것도 아니면서.

‘하지만 그런 일도 있었고, 무엇보다 지금은 시험 기간이니까 자꾸 찾아가면 안 돼. 나중에 다시 이야기를 해 보더라도 지금은 참아야 해…….’

딜라일라는 감은 눈꺼풀 안쪽에 그의 모습을 그렸다. 언제나 테이블에 앉아서 등을 구부리고 종이에 무언가를 써 내려가던 뒷모습. 캐러멜 색 머리카락과 하얀 피부. 매양 네, 네 짧은 대답만 돌려주다가도 때로 익숙하게 누나, 하고 그녀를 부르는 목소리. 만년필이 사각사각 종이 위를 긁는 소리.

그녀는 그를 그리면서 까무룩 잠이 들었다.

정신없이 바빠지던 일정은 시험이 끝나갈 무렵에야 딜라일라를 놓아주었다.

중요한 시험은 모두 끝이 났다. 졸업 학년인 육 학년쯤 되면 같은 학부 안에서도 제각기 듣는 과목이 달라서, 먼저 시험을 마치고 재빨리 기숙사에서 방을 뺀 친구들도 있었다. 하지만 딜라일라는 육 학년이 되어서도 언제나 그랬듯이 빠듯하게 시간표를 채워 놓았고, 당연히 아직 두 개의 시험이 남아 있었다. 다행히 둘 다 제법 자신 있는 과목이었다.

“둘 다 모레가 시험이니까…….”

늦은 저녁, 자신의 방 안에 앉아 입 속으로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일정을 세어 보던 그녀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정말로 견딜 길 없이 피곤하고 갑갑했다. 내일 하루는 아예 푹 쉰 뒤에 오후부터 느긋하게 복습을 할 예정이었는데, 오히려 그렇게 여유가 생기자 쌓아 두었던 갑갑함과 우울함이 단번에 치고 올라왔다. 속에서 울컥거리는 감정을 눌러 두는 동안 단단한 덩어리로 뭉치기라도 했는지, 입을 열고 고개를 숙이면 그것들을 게워 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딜라일라는 시험 기간 내내 잠들기 전이면 머릿속으로 그렸던 모습을 다시 한번 떠올려 보았다. 꽤 큰 키에 넓은 어깨를 가졌는데도 테이블 위에 놓인 종이에 집중하느라 푹 숙인 탓에 실제보다 작아 보이는 뒷모습. 부드러워 보이는 캐러멜 색 머리카락이나 오랫동안 만년필을 잡아 마디에 굳은살이 박인 손가락…….

벌써 그를 만나지 않은 지도 한 달이 다 되어 갔다. 그래서인지 기억이 조금 흐려져 있었다. 매일 밤 되새겨도 어쩔 수 없이 바쁘게 하루를 보내고 나면 기억은 쓸려 나가게 마련인 탓일까.

흐릿해진 부분을 선명하게 되새기기 위해 딜라일라는 그와 같은 공간에서 보냈던 짧고도 긴 시간을 하나하나 떠올렸다. 처음 그를 보던 순간 마주쳤던, 태양처럼 선명한 금빛 눈동자부터.

기억을 밟아 나가던 딜라일라는 그와 마지막으로 인사를 나눴던 날을 떠올렸다. 차마 그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다급하게 인사만을 내던진 채 그의 방을 뒤로하고 달려 나오던 깊은 밤, 싸늘한 밤공기도 알아채지 못할 만큼 뺨이 화끈거렸었다. 부끄러운 기억을 되새기는 딜라일라의 뺨은 지금도 조금 달아올라 있었다.

하지만 머릿속이 빙빙 도는 것 같던 그때와는 달랐다. 이상할 정도로 치밀어 올랐던 수치와 부끄러움은 이제 그녀를 스쳐 지나간 시간과 그동안 쌓인 피곤함에 씻겨 나가고 희석되어 있었다.

생각해 보면 애초부터 그 책은 에릭의 방에 있던 것이었다. 그때는 미처 눈치채지 못했지만, 에릭은 책 내용을 알면서도 오히려 그것에 딜라일라가 놀랄까 봐 책을 빼앗아 든 것 같기도 했다. 친누나가 쓴 소설이라고도 했고…….

하지만 그녀가 그 책을 지나치게 열심히, 집중해서 읽은 것은 사실이었다. 물론 놀라기는 했지만 그래서 더, 아니 그건 아니지만, 절대 그런 걸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혼자서 생각에 빠졌다가 고개를 도리도리 저어 대던 딜라일라는 불현듯 생각했다.

‘에릭이 내가 그, 그런 걸 좋아한다고 여겼으면 어쩌지……?’

사실 딜라일라가 조금만 더 이성적이었더라면, 그리고 에릭과 몇 번만 더 대화를 나누어 보았더라면 그런 걱정 따위는 절대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딜라일라는 너무나도 피곤했고, 희석되었다고는 하나 그녀의 이성은 아직까지 부끄러움에 젖어 방어적으로 움직였으며, 그녀와 에릭이 나눈 짧았던 대화들로 그의 성격을 온전히 파악하기에는 무리가 있었으므로, 결국 딜라일라는 불현듯 퐁 샘솟은 걱정이 자신의 이성을 전부 걱정으로 물들이는 것을 어쩌지 못했다.

‘혹시 이대로 방학 내내 나를 그런…… 으, 음란한 여자라고 생각하면 어쩌지……?’

그녀의 이성을 갉아먹고 무럭무럭 자란 걱정은 이제 조금 더 구체적이고 다양한 방식으로 딜라일라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이제 곧 휴가니까, 돌아가면 오해를 풀 틈도 없을 텐데. 그동안 고향 친구나 가족들에게 그런 이야기를 떠들기라도 하면…….’

안 돼! 내적 비명을 지른 딜라일라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금세 다시 풀썩 주저앉았다. 늦은 저녁이긴 했지만, 아직 그의 방으로 대뜸 쳐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깊은 밤은 아니었다. 지금 남자 기숙사로 향했다가는 필시 벽에 달린 비상용 사다리를 타고 오르다가 누군가에게 발각될 것이다.

그 순간부터 딜라일라는 초조하게 밤이 깊어지기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이해 못 할 정도로 불안한 마음을 꼭꼭 내리누르면서.

물먹은 솜처럼 늘어지게 만들던 피곤함도 잊은 채로 초조함에 몸서리를 치던 딜라일라가 아예 자리에서 일어나 방 안을 서성이기 시작한 지도 한참이 지난 뒤, 마침내 기다리던 밤이 무거운 어둠의 장막을 드리웠다.

실내복으로 갈아입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있던 그녀는 창밖에서 정원을 밝히는 등이 꺼지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문을 열었다. 싸늘한 추위에 어깨가 떨려 왔지만, 다시 방 안으로 들어가서 겉옷을 챙겨 입을 생각이 들지 않았다. 내내 혼자 생각에 빠져 있던 딜라일라의 머릿속에는 급기야 아카데미를 포함한 이 나라 전체에 딜라일라 에리카가 어떻다느니 하는 소문이 퍼져 나가는 상상이 번지고 있었다.

소리가 나지 않게 복도 창문을 열고 사다리에 몸을 걸친 그녀가 빠르게 정원을 가로질렀다. 몇 분 지나지 않아 그녀는 남자 기숙사의 2층 복도 끝에 섰다. 뒤늦게 에릭이 시험을 일찌감치 끝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가 버렸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떠올랐다.

까만 어둠에 잠긴 복도에는 가느다란 빛의 실금이 그어져 있었다. 에릭의 방 안에 켜져 있는 불빛이 문틈으로 흘러나온 흔적이었다.

심장이 쿵쿵거렸다. 몇 번이나 해 본 일인데 어쩐지 나쁜 짓을 하려는 것처럼 마음이 불안했다. 하지만 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똑똑똑. 노크 소리는 언제나처럼 울렸다.

* * *

에릭 브라이어는 어쩐지 등 뒤가 허전한 느낌에 좀처럼 집중하지 못하고 있었다.

사실 지난 한 달간 내내 그랬다. 아침이 되어 강의동으로 향했다가 실험실에 틀어박혀 있을 때는 거짓말처럼 잊었지만, 밤이 되어 기숙사로 돌아올 때면 이상한 허전함이 느껴졌다. 마치 그의 방 안에 있어야만 하는 무언가가 사라져 버린 것만 같았다.

그게 무엇인지는 알고 있었다.

모두가 잠든 시간, 예고 없이 찾아오는 세 번의 작은 노크 소리. 문을 열어 주면 분홍빛 머리카락을 살랑거리며 제 방처럼 익숙하게 걸어 들어오는 자그만 몸집과 풍겨 오는 달콤한 향기. 종종 말을 걸어 오는 목적 없는 부름과 의미 없이 주고받는 대화, 그의 등 뒤에서 때로 느껴지는 시선.

없는 것이 당연했던 것들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것이 없음이 이상하고 허전하게만 느껴졌다. 채워져야 비로소 온전해지는 퍼즐의 마지막 한 조각처럼.

언제나처럼 만년필을 굴리다가도 에릭은 그 허전함에 한참이나 생각을 놓치고 멍하니 앉아 있곤 했다.

그럴 때면 자신이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의 노크 소리를, 달콤한 체향을. 그녀, 딜라일라 에리카를. 그것이 진실임을 증명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때로 바람이 창문을 흔들며 달그락 소리를 낼 때면 번뜩 고개를 치켜들기도 했다.

하지만 비밀스러운 방문은 그를 찾아오지 않았다.

시험 기간이 시작된 후부터는 그도 반쯤 체념하고 있었다. 어차피 처음부터 있을 수 없던 일이었다. 때로 그녀를 떠올릴 때면 에릭 브라이어는 그렇게 자신의 생각을 붙들었다.

시험 기간도 이제는 끝물이었다. 어쩌면 딜라일라 에리카는 벌써 시험을 모두 마치고 기숙사를 떠나 버렸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기숙사 구석에 저질스러운 로맨스 소설을 감춰 두고 있던 에릭 브라이어에게 치를 떨면서 말이다.

따로 공부하지 않아도 그는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다. 애초에 마법 공학에 있어서는 남다른 지식을 가진 그였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지금도 그가 테이블 위에 어지럽게 펼쳐 둔 종이는 시험과 관련된 공부 자료가 아닌 실험 결과를 빼곡하게 메모해 둔 것이었다. 딜라일라가 처음 찾아오던 날 떠올리고, 그녀가 마지막으로 찾아왔던 날 제조 방법을 정리했던 마법 약의 정제화는 당연하게도 성공했다. 이제 그 결과를 정리해 학계에 알리기만 하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집중이 되지 않았다.

에릭의 금빛 눈동자는 종이 위에 휘갈겨 쓴 자신의 글씨를 노려보았다. 직접 쓴 수식과 설명인데도 하나도 와 닿지 않았다.

노크 소리가 울린 것은, 그로부터 몇 분인지 혹은 몇 십 분인지 모를 시간이 지난 후였다.

똑똑똑. 익숙하게 세 번을 울린 노크 소리에 번뜩 정신이 들었다. 착각인가 싶을 정도로 작은 노크 소리였지만 에릭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어둠 속에서 작은 손이 방문을 두드리는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지는 것 같았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가 천천히 방문을 향해 걸음을 뗐다.

똑똑똑, 그새를 참지 못하고 조바심을 치듯이 다시 한번 노크 소리가 울렸다. 오랜만이라 긴장했을까, 아니면 화가 나 있을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에릭은 손을 뻗어 문고리를 돌렸다. 달칵, 소리가 나고 문이 열렸다. 어두운 복도에 쏟아지는 빛이 천천히 면적을 늘렸다.

빛 속에 딜라일라 에리카가 서 있었다.

“……들어가도 될까?”

“네.”

언제나처럼 간결한 대화를 주고받은 뒤에 그녀가 방 안으로 들어섰다. 그녀의 등 뒤에서 문이 소리 없이 닫혔다.

한 달 내내 그를 괴롭히던 허전함이 거짓말처럼 녹아 사라진 순간이었다.

“…….”

“…….”

하지만 그들은 평소처럼 자연스럽게 자신의 자리를 찾아 걸음을 옮기지 않았다. 애매하게 두세 걸음 정도 떨어져 마주 보고 선 딜라일라와 에릭의 사이에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딜라일라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어서, 그러잖아도 그녀보다 키가 훨씬 큰 에릭은 그녀가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그는 막연히 그녀가 화를 내거나 울음을 터뜨리리라고 생각하며, 동그란 분홍색 정수리를 내려다보았다. 언제쯤 저 정수리가 휙 들리고 하얀 콧대가 드러날지, 머리칼과 닮은 벚꽃 색 입술이 어떤 말을 토해 낼지. 어쩌면 기대하며 기다리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마침내 그녀가 그 하얀 얼굴을 들어 올렸을 때에 에릭 브라이어는 막연히 생각만 하던 것이 그대로 그 얼굴에 드러나 있음에 묘한 만족을 느꼈다.

미약한 격정, 그리고 그새 발갛게 달아오른 눈가에 매달린 물기가 반짝거렸다.

“나 그런 여자 아냐…….”

“……예?”

하지만 그녀가 내뱉은 말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딜라일라는 그 예쁜 입술을 오물거리며 말을 쏟아 냈다.

“그런 거 좋아하고, 그런 거 아냐. 아무튼 아냐!”

“누나가 뭘 좋아해요?”

“그, 그런 거!”

“그런 거?”

으앙. 딜라일라의 얼굴이 당장이라도 우는 소리를 낼 것처럼 애처롭게 일그러졌다. 붉은빛이 도는 눈썹이 하얀 이마 아래로 축 처지는 곡선을 그렸다. 그녀의 분홍빛 입술 역시 비슷하게 아래로 처졌다. 말랑해 보이는 뺨에 동그랗게 자국이 났다가 사라졌다.

딜라일라가 한참을 어물거리는 사이에 에릭이 뒤늦게 딜라일라가 지칭하는 ‘그런 것’이 뭔지 떠올렸다. 아마도 지난번 그녀가 읽던 오딜의 소설을 말하는 듯했다.

“좋아하잖아요.”

“……아니라니까!”

“저번엔 재미있다고 했는데……?”

“내가 언제!”

음, 아무래도 이게 아닌가. 소스라치며 부정을 하는 딜라일라의 얼굴이 점점 더 빨개지고 있었다. 에릭은 곰곰이 생각에 빠졌다. 분명 딜라일라는 오딜이 쓴 소설을 좋아했다. 에릭이야 친누나가 쓴 것이니 예의상 읽었을 뿐 영 재미를 느끼지는 못했던 소설들을 딜라일라는 차례차례 독파했다. 그 모습을 보고 무심코 재미있냐고 물어봤을 때, 이런 건 처음이라며 재미있다고 대답했었는데, 분명.

“로맨스 소설, 처음 읽어 보는 건데 이렇게 재미있을 줄 몰랐다고 했잖아요.”

“어……?”

축 처져서는 새끼 동물처럼 삐약삐약 부정을 하던 얼굴이 갑자기 동그랗게 모였다. 분홍색 입술이 포옹 벌어지고 아래로 굽었던 눈썹이 위로 말려 올라갔다. 에릭은 딜라일라의 표정이 변하는 것을 보면서 자신이 뭔가 틀린 대답을 했다는 것을 눈치챘다.

“소설 얘기가 아닌가요?”

“어…….”

딜라일라도 그쯤 되자 어딘가 핀트가 맞지 않는 이 대화의 문제점을 깨달았다. 딜라일라에게 무한한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 했던 걱정 대신 슬며시 이성이 한 조각이나마 되돌아왔다.

그녀의 얼굴이 다시 풀어지는 것을 본 에릭이 입을 뗐다. 계속 서서 이야기하기에는 딜라일라가 불편할 것 같았다.

“일단 앉아요.”

“으응.”

딜라일라는 에릭의 손짓을 따라 걸음을 뗐다. 무심코 테이블 앞에 빈 의자를 당겨 앉고 보니 에릭이 늘 앉아 있던 의자에 자신이 먼저 앉아 버렸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정작 그는 무심하게 반대편 의자 위에 놓여 있던 책 몇 권을 대충 바닥에 내려놓고 있었다. 딜라일라는 싸늘한 공기에도 어쩐지 의자가 따듯하게 느껴지는 것을 느끼며, 어쩌면 조금 전까지도 이 자리에 그가 앉아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중에 에릭이 마지막으로 바닥에 쌓인 책 더미 위에 분홍색 표지의 책을 얹어 놓는 것을 발견하고 말았다.

“그거!”

“……?”

무심코 손가락으로 책 표지를 가리키며 빽 외친 소리에 에릭이 눈을 조금 크게 떴다. 딜라일라는 다급하게 손짓을 하며 에릭에게 말했다. 흥분한 탓에 그녀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커져 있었다.

“그, 그거 말이야. 지난번에 그거, 맞지?”

“이거요?”

“그런 거, 좋아하는 거 아니야. 안 좋아해.”

“…….”

에릭이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책 표지를 들여다보았다. 분홍색 천으로 감싼 양장본을 들여다보던 에릭은 딜라일라에게는 몇 시간처럼 느껴지는 몇 초 후에야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게 다야?”

“그렇군요.”

“그거 말고…….”

무심하기 짝이 없는 반응에 오히려 딜라일라가 당황했다. 반면 에릭은 정말로 태연하게만 보였다. 그가 책을 마저 내려놓고 의자를 당기며 말했다.

“충격적일 수도 있는 내용이니까요. 싫어하실 수도 있죠.”

“어, 그, 그건 그런데.”

“오딜은 직접 쓸 만큼 좋아하던데.”

“어, 어?”

“제 친누나요. 취향은 사람마다 다른 법이니까요.”

“그래. 그렇지…….”

“좋아한다고 나쁠 것도 없지만.”

“……그래?”

“다른 사람한테 피해 주는 것도 아닌데요.”

“그러네…….”

에릭이 말을 뱉을 때마다 딜라일라는 놀랐다가 고개를 끄덕였다가, 또 의문스러운 얼굴을 했다가 묘하게 수긍하는 등 차례로 표정을 바꿔 가며 대답했다. 짧은 대화인데도 휙휙 표정을 바꾸는 그녀를 내심 신기하게 여기면서 에릭이 마침내 딜라일라의 맞은편에 제대로 자리를 잡았다.

테이블 아래에서 그와 그녀의 발이 살짝 부딪혔다가 떨어졌다. 에릭이 신은 푹신한 실내화 위에 딜라일라의 단단한 구두 밑창이 잠깐이나마 푹 꺼진 자국을 냈다.

“그럼.”

“네.”

“내가 이상한 여자라거나, 그, 음란한 여자라거나……!”

“네?”

“그런 생각 한 거 아니지?!”

에릭은 여전히 무표정이었고, 딜라일라는 자신이 한참 동안 걱정하던 것을 입 밖으로 꺼내 놓기가 힘들어서 눈을 질끈 감고 있었다. 하지만 딜라일라는 알 수 있었다. 그는 지금 딜라일라의 물음을 정말로 의아해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 느낌의 정적이 그들 사이에 내려앉았으니까.

하지만 딜라이라는 명확한 대답을 들어야만 했다. 에릭과의 대화로 분명 그러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그래도 확인받고 싶었으니까. 그건 그녀에게는 정말로 중요한 문제였다.

“그럴 리가…….”

“브라이어, 에릭 브라이어!”

하지만 똑똑, 보다는 조금 더 큰 소리와 함께 에릭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그의 대답을 막아 버렸다. 동시에 에릭의 대답보다도 훨씬 더 중요한 문제가 일어나고야 말았다.

기숙사 사감인 대런의 목소리가 에릭을 부르고 있었다.

대런은 기숙사의 사감인 만큼 때맞춰 복도를 순찰하며 무슨 일이 일어나지는 않는지, 학생들이 남몰래 일탈을 저지르지는 않는지 확인한다. 명문으로 유명한 셰 상브르에서는 흔치 않은 일이지만, 다른 학교에서는 기숙사 내에서 과도하게 음주를 하고 싸움이 붙거나 마약을 태우는 등 부적절한 일들이 왕왕 일어났다. 대런은 이런 일들을 막기 위해 성실하게 순찰을 하는 사감이었다.

오늘도 대런은 평범하게 순찰을 돌고 있었다. 학생들은 대부분 잠든 시간이었기 때문에 복도는 조용했다. 누군가가 방 안에서 깨어 있어도 상관은 없었다. 실제로도 2층 복도 제일 끝에 있는 에릭 브라이어의 방에는 여전히 불이 켜져 있는 것 같았다. 매일 그랬듯이.

모든 것이 평소와 다름없는 것을 확인한 대런이 그의 방문 앞에서 발걸음을 돌리려 할 때였다.

“……?”

뭔가 목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물론 아직 깨어 있을 에릭의 혼잣말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대런은 본능적으로 귀를 기울였다. 몇 번인가 작은 소리가 났다. 에릭이 혼잣말을 하고 있는 것인가.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에는, 뭔가가 이상했다. 뭔가 톤이 높고 가느다란…….

대런은 잠깐 고민을 하다가 결국 에릭의 방문을 두들겼다.

“브라이어, 에릭 브라이어!”

어디선가 들려오던, 종달새가 지저귀는 듯한 소리도 그 순간 멈춘 것 같았다. 종달새라니, 기숙사에서 허락 없이 새라도 키우고 있는 것인가. 혹은, 어쩌면 여성의 목소리였을까. 대런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문득 샘솟는 의구심을 완전히 지우지는 않았다.

셰 상브르의 각 기숙사에는 사사로이 이성을 끌어들이는 일이 금지되어 있었다. 타당한 이유를 대고 사감의 허락을 받으면 이성의 기숙사에 출입할 수 있었지만, 이런 깊은 밤에는 그것도 당연히 안 될 일이었다.

몇 번인가 에릭을 불러 보던 대런은 결국 주머니에서 마스터키를 꺼냈다. 문은 저항 없이 열렸다.

“브라이어?”

방 안으로 들어온 그가 에릭을 불렀다. 하지만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눈앞에 가장 먼저 드러난 응접실은 텅 비어 있었다. 대런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잉크 자국으로 너덜너덜한 종이가 가득 널린 테이블로 다가갔다. 당연히 그 앞에는 아무도 앉아 있지 않았다. 방 안에는 환히 불이 켜져 있었지만, 처음부터 아무도 없었던 것처럼 조용했다.

타박타박, 응접실을 지나는 대런의 발걸음 소리만이 살아 있는 것의 기척을 냈다. 테이블 앞을 지난 그가 응접실을 지나 침실을 향해 다가갔다.

침실에도 불이 켜져 있었다. 마치 방금까지 깨어 있다가 다급히 잠든 척을 하는 것 같은 모양새였다. 물론 아닐 수도 있었다. 늦은 시간까지 시험공부를 하다가 피곤함을 이기지 못하고 침대에 쓰러져 눈을 붙인 것일 수도 있으니까.

어쨌든 대런은 침실 안으로 한 발짝 들어섰다. 다른 사람이라면 초대 없이 함부로 남의 침실까지 들어가는 일은 아무리 기숙사라고 한들 문제가 될 법도 했지만, 대런은 그 기숙사에서 유일하게 그래도 되는 사람이었다. 정확히는 남자 기숙사만.

어쨌든 그는 내심 유명한 마법 공학부의 천재가 저지른 일탈을 발견할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안고 침실로 들어섰다. 그리고 곧장 혀를 찼다.

에릭은 침대 위에 엎어져 제대로 덮지도 않고 대충 뭉쳐진 이불을 끌어안은 채 잠들어 있었다. 그런 중에도 그의 손에는 척 보기에도 어려워 보이는 책이 반쯤 펼쳐진 채로 걸려 있었다. 침대 가며 머리맡에도 책이 잔뜩 쌓여 있었다. 척 보기에도 교과 과정을 한참 벗어난 것 같은 두꺼운 책이 쌓인 가운데서 에릭은 위태롭게 잠들어 있었다.

저 정도는 해야 천재 소리를 듣는다는 건가.

평범했던 자신의 학창 시절을 돌이켜본 사감이 다시 한번 혀를 찼다. 천재로 사는 것도 쉽지 않구만. 역시 평범한 게 최고야. 괜히 그런 생각을 한 그는 발길을 돌렸다. 저벅저벅 침실을 나선 그가 다시 한번 테이블 위에 널린 종이들을 흘긋 눈에 담았다. 이제 보니 얼핏 잉크 자국인가 싶었던 종이들은 얼핏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빼곡하게 뭔가를 적어 넣은 메모였다.

정말 마법 공학 말고는 아무것도 모르는 학생이군. 하긴 그래서 사 학년이나 되었는데도 학교에 친구가 한 명도 없다지.

잠깐이나마 그를 의심했던 대신 그는 방을 나서기 전에 불을 꺼 주는 친절을 잊지 않았다. 방 밖으로 나가서 마스터키로 문을 잠가 준 그가 다시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이 층을 모두 돌았으니 삼 층을 한 바퀴 돌아 보고 나서 다시 사감실로 가서 차라도 한 잔 마시며 쉴 생각이었다.

어둠이 내려앉은 방 안에서 두 개의 한숨 소리가 섞여 든 것은, 대런이 영원히 모를 일이었다.

만약 에릭의 방에서 딜라일라가 그와 함께 있다가 발각되었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딜라일라는 당장 다음 날에라도 자신에게 일어날 나쁜 일들을 열다섯 개는 꼽을 수 있었다.

사감이 에릭의 방문을 두드린 순간, 딱딱하게 굳어 버린 딜라일라를 곧장 일으켜 세운 것은 에릭이었다. 그가 딜라일라의 손을 잡고 침대로 향했다. 뻣뻣하게 굳은 채로 어, 어 하며 에릭에게 이끌려 간 딜라일라가 침대 위에 앉자마자 그가 분홍색 머리통 위로 이불을 뒤집어씌웠다.

“에릭 브라이어!”

다시 한번 에릭을 부르는 대런의 목소리에 딜라일라가 화들짝 몸을 움츠렸다.

“잘 숨어 있어요.”

그렇게 속삭인 뒤에 에릭이 그녀의 손을 놓았다.

하지만 딜라일라는 그의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작은 손이 에릭의 손가락을 꼭 붙들어 당겼다. 겁먹은 채로 이불에 푹 파묻혀서 다른 것은 보이지 않는 와중에 붙잡을 수 있는 것은 그의 손뿐이었다.

“나 혼자 이불 속에 있으면 분명 들킬 거야…….”

“그런가요?”

“응.”

침대 위에 아무도 없는데도 이불이 불쑥 솟아 있으면 이상하잖아. 분명 들킬 거야. 그러면 나는, 너도……. 중얼거리는 딜라일라의 목소리는 너무 작은 데다 바들바들 떨리고 있어서, 에릭은 그 말을 전부 알아듣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실례할게요.”

“응……?”

에릭이 딜라일라 위로 덮어씌운 이불을 파고들어 왔다. 그녀를 옆으로 눕힌 그의 팔이, 다리가 그녀의 몸을 휘어 감았다. 웅크린 딜라일라는 이불째 그에게 바짝 당겨 안겼다. 딜라일라의 얼굴이 에릭의 가슴팍에 그대로 파묻혔다. 그러고도 몇 번을 더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종이와 천이 스치는 듯한 소리. 와르르, 책 더미가 쏟아지는 듯 양장본의 표지가 저들끼리 부딪치고 쓸리는 소리.

하지만 딜라일라의 귓가에 가장 크게 들리는 것은 심장 소리였다. 빠르게 뛰고 있는 소리가 누구의 것인지도 알 수 없을 정도로 가까워졌다.

겨우 에릭이 부스럭거리기를 멈췄을 때쯤, 달칵 문고리가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대런이 마스터키로 방문을 연 것이다. 뚜벅뚜벅 방 안으로 걸어 들어오는 발소리가 소름 끼치는 정적 사이로 선명하게 울렸다. 딜라일라는 잔뜩 어깨를 움츠린 채로 그것을 듣고 있었다.

발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졌다. 그만큼 심장이 뛰는 소리도 점점 더 빨라졌다. 하지만 딜라일라의 머리 위에서 내쉬는 에릭의 숨소리는 거짓말처럼 잔잔했다.

대런이 쯧쯧, 혀를 차는 소리에 움찔 몸을 움직일 뻔한 딜라일라를 에릭이 꽉 감아 눌렀다. 그러잖아도 에릭의 품 안에 푹 파묻혀 있던 딜라일라는 숨조차 멈췄다. 쿵쿵쿵쿵. 심장이 뛰는 소리만이 딜라일라의 귓가에서 요란하게 날뛰었다.

대런이 침실을 걸어 나가 불을 끄고 나가며 방문을 잠가 준 뒤에도 한동안 그들은 그대로 서로의 몸을 끌어안은 채로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들의 귀에는 들리지도 않는 발걸음 소리가 완전히 멀어졌을 때쯤에야 긴 한숨이 쏟아졌다. 누구의 것이랄 것도 없이 딜라일라와 에릭이 동시에 가슴을 부풀렸다가 숨을 내뱉었다.

딜라일라가 꾸물꾸물 몸을 움직여 이불 밖으로 얼굴을 빼냈다. 퐁, 이불속에서 튀어나온 분홍색 머리통이 에릭의 턱에 쿡 부딪쳤다. 둘 모두 아픈 소리를 내지는 않았다. 딜라일라의 머리가 다시 침대에 푹 파묻혔다. 에릭의 팔을 베개 삼아서.

“에릭, 있지.”

“네.”

“너 심장 엄청 빨리 뛴다.”

“……누나도요.”

콩콩, 쿵쿵. 맞닿아 겹쳐진 두 개의 심장 소리는 여전히 빨랐다. 그들을 긴장하게 했던 위험이 복도 너머로 멀어진 후에도 심장은 마치 한참을 달린 직후처럼 크게 소리를 울렸다.

“완전 멀쩡한 얼굴 하고 있으면서.”

“오딜도 그런 얘기 자주 해요.”

“그래?”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얼굴에 티가 안 난다고요.”

딜라일라의 눈앞에 바로 에릭의 목이 있었다. 셔츠 깃 사이로 드러난 목울대가 말을 할 때마다 움직이는 모습을 딜라일라는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상식적으로 알고는 있던 사실이어도 바로 눈앞에서 움직이는 것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신기했다.

“……오딜이면 그 친누나분?”

“네.”

다시 꿀렁. 하얀 목에 도드라진 목뼈 사이에 볼록하게 튀어나온 것이 위로 움직였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언제 고향에 돌아가?”

“사흘 후요.”

“나도 사흘 후 아침.”

“전 오후에 가요.”

꿀렁꿀렁. 에릭의 목울대가 움직이는 것을 홀린 듯 바라보며 딜라일라가 속삭였다. 정작 자신이 말할 때마다 습하고 달콤한 숨결이 에릭의 쇄골 즈음을 간지럽히고 있는 것도 그녀는 모르고 있었다.

“그럼 나, 모레 시험 끝나고 밤에 또 와도 돼?”

“…….”

“안 돼?”

“돼요.”

“그래.”

에릭은 품 안에서 조물조물 움직이는 딜라일라의 작은 몸이 너무 버겁다는 생각을 했다. 목을 간지럽히는 숨결도, 너무 가까운 곳에서 폴폴 풍기는 달콤한 체향도. 슬며시 그녀의 목 아래에 놓인 팔을 빼내려는 순간 딜라일라가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푹 파묻었다.

“고마워.”

쿵쿵쿵쿵. 여전히 심장이 시끄럽게 소리를 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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