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셰 상브르 아카데미에는 그 화려한 명성에 걸맞게 자랑스러운 인재들이 넘쳐났지만, 어느 아카데미나 그렇듯이 개중에서도 특출 난 수재들이 몇 있었다. 그러한 수재들 가운데에서도 셰 상브르에는 천재로 이름 높은 이가 두 명 있었다. 한 명은 딜라일라 에리카, 다른 한 명은 에릭 브라이어였다.
딜라일라 에리카. 행정 교양학부 6학년. 그녀는 입학과 동시에 거머쥐었던 학년 수석 타이틀을 졸업 학년이 될 때까지 단 한 번도 놓치지 않은 천재이자, 그 사랑스러운 외모와 쾌활한 성격으로 남녀를 불문하고 인기와 동경을 얻은 소녀였다. 단 한 순간도 학업을 게을리하지 않고 교수들에게 찾아가 질문을 하는 일도 잦은 노력가이기도 했다. 교수와 학생을 불문하고 그녀를 좋아하지 않는 이가 드물었다.
딜라일라의 인기는 교내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에리카는 왕국 내에서는 누구나 알아주는 가문이었다. 몇 대째 성실하게 내무부의 일을 맡아 보고 있는 관리의 핏줄은 불행히도 딜라일라 대에서 끊길 예정이었다. 에리카의 아버지이자 현재 내무부 최고 위원인 로드릭 에리카의 슬하에 자식이라곤 그녀 하나뿐인 탓이었다. 왕국법에 따라 여성은 가문을 이을 수 없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딜라일라 에리카를 부인으로 맞아들인다면 어떨까? 내무부의 권력을 모두 쥐고 있다는 로드릭 에리카의 금지옥엽 외동딸을 부인으로 맞아들인 남자에게, 로드릭 에리카가 어디까지 해 줄 수 있을까?
어쩌면 에리카의 뒤를 이어 내무부의 권력을 물려받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은 한둘이 아니었다. 왕국 내에서 입지를 키우려는 가문은 어디든 딜라일라 에리카를 자신의 집안으로 끌어들이고 싶어 했다. 사실상 왕국의 모두가 딜라일라 에리카를 주목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허울과 명예만 남은 왕실보다도 훨씬 더 직접적인 권력의 가장 정점에서 태어난 그녀는 명실상부 왕국 사교계 최고의 인기인이었다.
그러나 에릭 브라이어는 조금 다른 축에 속했다.
에릭 브라이어. 마법 공학부 4학년. 그 역시 입학과 동시에 학년 수석을 차지하고 지금까지 수석을 놓치지 않는 수재였다. 처음에는 큰 키에 수려한 외모를 가져 남몰래 그에게 관심을 둔 여학생들 역시 여럿이었다. 그러나 그는 성격이 다소 무뚝뚝하고 붙임성이 없는 데다, 딜라일라 에리카와 달리 노력하는 모습이라곤 일절 보이지 않아 금세 평판이 바닥에 떨어졌다. 수업 중에 꾸벅꾸벅 졸며 교수의 말이라곤 귀담아듣지 않았고 때로 이유 없이 수업을 빠지기까지 해서 교수들에게 자주 눈총을 받았다.
꾸준히 학년 수석을 놓치지 않고 있어 교수들은 그를 크게 걸고넘어지지는 않았지만, 오히려 그 점이 다른 학생들에게 시기를 받는 이유가 되었다. 에릭 브라이어가 고작 3학년이 되었을 때 마력을 획기적으로 아낄 수 있는 마법 등 회로에 대한 특허를 출원해 공로를 인정받고, 이례적으로 개인 실험실이 주어지기까지 한 후부터는 그를 향한 시기에 더욱 불이 붙었다.
게다가 에릭 브라이어는 마법 공학으로 단승 작위를 받은 브라이어 남작의 아들이었다. 명분상 왕실은 남겨 두었지만, 신분제가 무너진 뒤 내각 정부의 권력이 훨씬 더 강력해진 지금, 왕실에서 내리는 단승 작위 따위는 명예 훈장이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브라이어의 핏줄에는 오래된 권력도, 드높은 지위도, 하다못해 많은 재산조차 따르지 않았다.
분명 그 천재성으로 아버지보다 더 빨리 지위를 얻지 않겠냐는 이야기가 교내에 자자하긴 했지만, 어쨌든 지금 그는 마음껏 미워해도 뒤탈이 없을 만만한 학생이었다. 슬금슬금 덩치를 불려 오던 그를 향한 시기는 자연히 사소한 따돌림과 그를 향한 무시로 이어졌다.
“물론 넌 그런 건 눈곱만큼도 신경 쓰지 않지만.”
“갑자기 왜 그런 얘기를 해요?”
“일단 들어 봐.”
그러나 정작 그의 평판을 이렇게까지 망가뜨린 것은 그의 실력이나 부족한 뒷배, 하다못해 그 나태한 생활과도 전혀 관계가 없는 한 사건이었다.
해가 저물어 가는 하늘이 유달리 아름다운 저녁이었다. 태양은 새파랗게 깊어 가기 시작한 초가을의 하늘을 가장자리부터 금빛으로 태웠고, 하늘은 투명한 유리컵에 붉고 푸른 물감을 뒤섞어 떨어뜨린 것처럼 다양한 빛깔로 물들었다. 밝은 분홍빛 구름이 솜사탕처럼 군데군데 떠 있었다.
드리운 석양에 주홍빛으로 반짝거리던 아카데미 건물의 하얀 석벽이 마침내 밀려오는 밤의 파도를 이기지 못하고 보랏빛 그림자를 드리우기 시작한 때에 사건이 일어났다.
셰 상브르 아카데미에 다니는 학생은 모두 아카데미 내부의 기숙사에서 지내야 했다. 수업을 듣는 건물과는 동떨어진 곳에 지어진 기숙사는 시계탑이 있는 안뜰을 기준으로 두 개의 건물로 나뉘어 있었는데, 동편의 건물이 남학생용이고 서편의 건물이 여학생용이었다. 그 둘을 연결하는 가운데 건물에는 관리실과 숙직실, 대식당이 있었다.
기숙사는 학생들의 거주지치고는 호화로웠다. 방 하나를 학생 한 명이 홀로 썼는데, 방에는 간단히 몸을 씻을 수 있는 개인 욕실이며 친구를 맞아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응접실까지 딸려 있었다. 서편 기숙사의 응접실에는 자그만 테라스가 붙어 있어서 수업을 마친 여학생들이 응접실에서 석양을 바라보며 다과를 나누기도 했다.
그러니 기숙사에 들어가면 웬만해서는 방 밖으로 나올 일이 없는, 특히나 남녀 학생들이 마주칠 일이라곤 전혀 없는 구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한 장소에 모일 때가 있었다. 저녁 식사 시간이었다. 저녁이면 학생들은 남녀를 가리지 않고 대식당에 모여들었다.
석양이 지나치게 아름다웠던 그날 역시 학생들은 대식당에 삼삼오오 모여 앉아 저녁을 먹고 있었다. 입학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쭈뼛거리며 자리를 찾는 신입생들과 휴가가 끝나자마자 물밀듯 덮쳐 오는 과제에 순식간에 퀭한 그림자를 얼굴에 드리운 상급생들. 쾌활하게 웃고 떠드는 무리와 일 초라도 더 자기 위해 대충 식사를 입에 욱여넣으며 과제를 해치우고 있는 무리가 아무렇게나 뒤섞여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이 짝을 지어 자리를 차지한 가운데에서 혼자 동떨어져 조용히 식사를 이어 가는 학생이 딱 한 명 있었다. 에릭 브라이어였다.
함께 대화를 나누는 사람도, 인사를 건네는 사람도 없이 조용하고 느리게 식사를 이어 갈 뿐인 그를 두고 뒤에서 수군거리는 학생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셰 상브르의 학생들은 명예를 중요하게 여겼다.
“다시 말하자면 쓸데없이 고상 떠는 걸 좋아해서…….”
“오딜처럼 말하지 말고요. 오딜이면 몰라도 누나가 어디 가서 그런 소리 하면 큰일 날걸요.”
“당연히 안 하지. 알면서 왜 그래?”
어쨌든 그런 이유로, 그를 공연히 괴롭히거나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오히려 그것이 이 소란스러운 청춘들의 공간에서 그를 더욱 유리시키는 것 같았다. 마치 보이지 않는 벽이 그들 사이에 존재하고 있는 것처럼.
그 벽을 깬 것은 딜라일라 에리카였다.
“같이 먹어도 될까?”
아름다운 분홍빛 머리카락을 하나로 땋아 내린 그녀는 혼자였다. 수업이 끝난 뒤에도 교수를 찾아가 질문을 하느라 친구들보다 한참이나 늦게 기숙사에 도착한 탓이었다. 대충 짐을 가져다 놓고 대식당에 내려온 그녀는 여전히 머릿속으로 교수와 나누었던 대화를 곱씹느라 쓰고 있는 동그란 안경이 비뚤어진 것도 모르고 있었다.
“조용히 먹고 얼른 갈 테니까.”
딜라일라는 넓고 시끄러운 대식당에서 친구들을 찾기보다는 아무 곳이나 빈자리에 앉아 얼른 식사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녀의 눈에 남학생 한 명이 혼자 앉아 있는 테이블은, 마치 그런 자신을 위해 준비된 것처럼 보였다.
물론 꾸밈이라곤 하나 없이 수수하게 땋은 머리에 비뚤어진 안경을 쓰고 손가락에는 잉크를 묻히고 있어도 그녀는 아름다웠다. 머릿속이야 어쨌건 테이블을 나누기를 청하는 태도도 예의 발랐고, 얼굴에는 언제나 친구들이 칭찬해 마지않는 천사 같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러나 혼자 식사를 하던 남학생, 에릭 브라이어는 그녀의 아름다움에 놀라 인사를 건네지도, 벌떡 일어나 다정하게 의자를 빼주며 얼마든지 편하게 식사를 하시라는 말을 건네지도 않았다.
그는 음식이 담긴 쟁반을 들고 서 있는 딜라일라를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표정이라곤 없는 무뚝뚝한 얼굴로, 말 한마디 없이, 몇 분 내내.
왁자지껄하던 식당이 천천히 조용해졌다. 쟁반을 들고 웃으며 가만히 서 있는 딜라일라와 그녀에게 대꾸 하나 없이 앉아 있는 에릭에게 하나둘 시선이 모였다. 어느새 그렇게나 시끄럽던 것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대식당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그곳에 있는 눈들이 모두 에릭과 딜라일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에릭은 여전히 대답이라곤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로,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 버렸다.
그가 채 다 먹지 않은 음식 쟁반을 반납하는 소리. 저벅저벅 걸어 나가는 발소리. 말없이 그대로 나가 버린 그의 등 뒤에서 식당 문이 닫히는 소리.
그 소리가 완전히 멎고, 사방이 조용해진 뒤에야 누군가가 입을 열었다.
“쟤 지금 딜라일라를 무시한 거야?”
그것이 시작이었다. 에릭 브라이어를 향한 학생들의 철저한 무시는.
“그러니까 그게 우리가 이러고 있는 이유랑 무슨 관계가 있는데요.”
“여기까지 말했는데도 몰라? 오딜 말이 맞아. 네가 수석이라니, 마법 공학부도 미래가 깜깜하다.”
“아, 진짜.”
딜라일라 에리카에게 모두가 보는 앞에서 무례를 저지른 탓에 우수한 성적과 수려한 외모에도 불구하고 철저하게 배척받게 된 남학생, 에릭 브라이어가 설핏 미간을 찡그렸다. 그에게 무례를 당하고 당황해 그 자리에서 펑펑 울음을 터뜨렸던 여학생, 딜라일라 에리카가 손을 뻗어 그의 미간을 꾹꾹 눌렀다.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길게 기른 분홍빛 머리카락이 살랑거리며 에릭의 맨 어깨를 간지럽혔다. 에릭은 마지못해 찡그렸던 미간을 폈다.
딜라일라는 계속해서 그의 얼굴을 손으로 꾹꾹 눌러 대다가 끝내는 부드러운 캐러멜 색 곱슬머리에 손을 넣어 흐트러뜨린 뒤에야 손을 뗐다. 하지만 손을 제외한 다른 부분들은 여전히 착 달라붙어 있었다. 딜라일라는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었다. 아무렇게나 구겨진 침대 시트에서 은은하게 배어 나오는 에릭의 살 향을 한번 들이마신 그녀가 그대로 입을 뗐다. 그의 귀와 그녀의 입술이 지나치게 가까웠으므로, 자연히 목소리는 속삭이듯이 작아졌다.
“그러니까, 내가 너랑 이런 짓을 할 거라곤 아무도 생각 못 할 거란 말이야.”
목덜미로 흘러내리는 딜라일라의 단 숨결에 에릭이 움찔 몸을 떨었다. 맞닿은 몸으로 그의 움직임을 고스란히 느낀 딜라일라가 작게 웃으며 눈앞의 여린 살에 입술을 붙였다. 혀끝을 내밀어 귀 뒤를 핥아 내고 나서는 귓바퀴를 살짝 깨물었다.
“……한 번 더 할까?”
딜라일라의 손이 은근히 그의 쇄골을 쓸어내렸다. 하아, 길게 숨을 내쉰 에릭이 어이가 없다는 투로 말했다.
“누나가 이런 짓을 할 거라곤 어차피 아무도 생각 못 할 텐데.”
“넌 하잖아.”
“겪었으니까요.”
다시 입술을 아래로 움직여 에릭의 매끈한 턱을 살짝 깨무는 딜라일라의 머리칼을 잡아 귀 뒤로 넘겨주는 에릭의 손길은 부드러웠다. 얼핏 보기에는 길고 두툼한 데다 마디가 져서 좀처럼 부드럽게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지 않은데, 그의 손은 언제나 생각 이상으로 유연하게 움직였다. 언젠가 신기하다며 말을 꺼냈던 딜라일라에게, 에릭은 마력 회로를 만들려면 섬세하게 움직여야하기 때문에 그게 당연한 거라고 했다.
가만가만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주는 에릭의 손길을 느끼면서 딜라일라가 눈을 감았다. 대리석을 조각한 것처럼 선이 고운 목 가운데, 남자라는 것을 드러내려는 것처럼 불쑥 튀어나온 목울대에 입을 맞추자 파르르 떨리는 감촉이 말캉한 입술에 그대로 닿아 왔다.
“그래서 안 할 거야?”
“……뭘요.”
어느새 그의 가슴팍을 짚었던 손이 살금살금 아래로 기어 내려갔다. 단단하게 갈라진 복근 위를 지나 느릿느릿 그의 치골 위를 문지른 손이 문득 손에 걸린 묵직한 것을 단번에 말아 쥐었다.
“이런 짓.”
휙 그들의 위치가 바뀌었다. 쿠션 대신 그의 몸을 반쯤 깔고 누웠던 딜라일라의 몸이 순식간에 푹신한 침대 위에 파묻혔다. 단단한 팔로 제 무게를 받친 에릭이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놀라 눈을 뜬 딜라일라의 연한 푸른색 눈동자가 신비로운 금빛으로 반짝이는 에릭의 눈동자를 올려다보았다.
그때도 너는 그렇게 무심한 얼굴로 나를 보았지.
딜라일라는 조금 전 제 입으로 줄줄이 내뱉었던 그날의 상황이 머릿속에서 되감기는 것을 느꼈다. 그때는 에릭이 그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눈동자는 너무나도 신비로운 금빛이어서, 딜라일라는 홀린 듯 그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일 초, 이 초, 일 분, 몇 분이 지나도록.
마치 무언가가 그녀를 단단히 감싸 안고 옭아매는 것처럼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의 눈동자가 깜빡일 때마다 얇은 눈꺼풀 아래로 잠겨 들었다가 다시 환하게 드러나는 금빛이 마치 그날 저녁 하늘을 불사르던 태양 같았다.
그리고 지금도.
입술이 맞닿았다. 하아, 저도 모르게 달콤한 한숨을 내뱉느라 틈을 벌린 딜라일라의 입술 사이로 두툼한 살덩이가 밀려들어 왔다. 어렴풋이 씁쓸한 맛이 났다.
혀가 얽히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혀 아래 연약한 점막을 부드럽게 간질이는 접촉에 몸이 달떴다. 살금살금 입 안에서부터 온도를 올리기 시작한 열감이 서서히 신경을 따라 퍼져 나갔다. 꼴깍, 저도 모르게 삼킨 타액이 누구의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으응, 빨리…….”
입술이 떨어진 틈을 타 재촉하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새 붉어진 뺨에 쪽, 키스를 남긴 에릭이 손을 아래로 내렸다. 둥근 가슴을 살짝 쓰다듬은 손은 짧은 애무를 아쉬워할 틈도 없이 그녀의 다리 사이로 향했다.
“읏, 아…….”
“벌써 이렇게 젖었어요?”
“으응, 흐…… 읏!”
이미 몇 번이나 만져 본 곳의 모양을 가늠해 보듯 쓰다듬던 손이 예민한 곳을 꾹 눌렀다. 찌르르 퍼져 나가는 전류 같은 쾌감에 딜라일라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것을 내려다보던 에릭이 희미하게 눈을 접었다.
그는 딜라일라가 쾌락에 몸부림치는 모습을 볼 때 꼭 저렇게 웃었다. 정작 자신은 웃고 있다는 걸 모르는 눈치였지만.
이미 젖어 있던 점막을 부드럽게 가르고 문지르던 손이 불현듯 질구 안으로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마디 진 손가락이 몸속을 가르고 들어오는 감촉에 숨이 턱 막혀 오는 것 같았다. 고작 손가락 한 개인데도 기분이 좋았다. 안쪽을 꾹꾹 누르며 몇 번인가 왕복하던 손가락이 빠져나가는 것이 아쉬워서 딜라일라는 입술을 꼭 물었다. 그러지 않으면 재촉하는 말이 나올 것 같았다.
“그렇게 아쉬운 표정 하지 마요.”
여전히 눈가에 아주 희미한 미소를 띤 에릭이 몸을 움직였다. 그의 허리에 손을 얹고 있던 딜라일라는 손바닥 아래에서 단단한 근육이 모양을 바꾸는 것을 그대로 느꼈다. 미끈하고 투명한 액체가 묻은 손이 가녀린 다리를 잡아 벌렸다. 순식간에 그녀의 다리 사이에 남자의 몸이 자리했다.
기대감에 잔뜩 조여드는 딜라일라의 가슴을 슬쩍 주무르는 손이 뜨끈했다.
“누나는 이걸 더 좋아하잖아.”
소리도 없이 단번에 딜라일라의 몸이 깊숙이 꿰뚫렸다. 안쪽은 앞선 정사로 이미 부드럽게 풀려 있었지만, 그럼에도 버겁게 느껴질 정도로 안쪽을 채워 오는 감각에 그녀의 발끝이 굽어 들었다.
“아흑…….”
“힘들어요?”
벅찬 숨을 내뱉는 딜라일라의 얼굴에 에릭의 손이 닿았다. 커다란 손이 부드럽게 이마를 덮은 머리칼을 쓸어 넘기고 일그러진 미간을 꾹 눌러 폈다. 한두 번 한 것도 아닌 사이에 이 정도 반응에는 무뎌질 만도 한데, 에릭은 항상 그녀가 아파하거나 싫어하지는 않는지 세심하게 눈치를 살폈다.
이런 것도 마법 공학을 하는 사람한테 필요한 섬세함에 속하는 걸까? 눈가를 쓸어내리고 뺨을 감싸 안는 그의 손바닥에 부러 입술을 붙이며 딜라일라가 속삭였다.
“아니, 좋아.”
구부러진 엄지의 마디에 쪽 소리를 내어 입 맞추자 아예 엄지 끝이 입술을 가르고 들어왔다. 그것을 장난스럽게 깨물던 딜라일라는 예고도 없이 쑥 빠져나갔다가 깊이 들이박히는 감각에 눈을 질끈 감았다.
“좋다며.”
묻는 건지 놀리는 건지 알 수 없는 목소리에는 웃음기 하나 없었다. 딜라일라는 다시 천천히 빠져나가며 질 벽을 눌러 긁어 내는 단단한 것의 감촉에 어떤 대답도 하지 못하고, 그저 입 안에 든 것을 물어 당겼다. 벌어진 잇새로 흐으, 한숨인지 신음인지 모를 것이 흘렀다.
“그만, 둘까요?”
귀두만이 아슬아슬하게 안쪽에 걸려 있을 정도로 허리를 빼낸 에릭이 문득 물었다. 그가 하는 말은 항상 놀리는 것인지 아니면 진심인지 알 수가 없었다. 괜히 사람을 놀리는 타입의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도, 어쩐지 하는 도중에 그가 하는 질문은 전부 놀리려는 것처럼 들렸다.
어쩌면 정말 놀리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지. 그럼 뭐 어때? 딜라일라는 대답 대신 팔을 뻗었다. 그녀의 가녀린 팔이 에릭의 목을 잡아당겼다. 당기는 대로 순순히 상체를 숙여 오는 그에게 팔을 감아 안으며 딜라일라는 눈을 떴다. 눈앞에서 부드럽게 흔들리는 연한 캐러멜 색 머리카락을 입에 물면 단맛이 날 것만 같았다.
“자꾸, 묻지 말고…… 빨리해.”
퍽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하지만 정말로 그랬는지는 알 수 없었다. 순식간에 몸속을 치받고 들어오는 두꺼운 것의 감촉이 너무나도 강렬해서, 다른 감각이 아득하게 멀어졌다. 손을 더듬어 아래로 쓸어내리자 그의 허리 근육이 단단하게 조여드는 것이 느껴졌다.
“하…….”
귓가에 토해지는 한숨은 분명 에릭의 것이었다. 때로 파르르 떨며 허리를 치받는 그의 몸이, 귓가에 떨어지는 짙은 숨이 선명했다. 이미 한차례 겪었던 쾌락이 다시 아래에서부터 빠듯하게 차올랐다. 그가 허리를 움직이는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아랫배 안쪽 깊숙한 곳을 자비 없이 짓누르는 감촉이 전류 같은 쾌락을 튀겼다.
“흣, 으응. 아읏……. 좋아, 아읍……!”
순식간에 입이 막힌 딜라일라가 흐응, 목 안으로 앓는 소리를 냈다. 허리 아래를 격렬하게 움직이면서도 그녀의 입을 막은 손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누나, 옆방에…… 들리겠어요…….”
불현듯 쾌감이 치솟았다. 살갗이 마찰하는 곳에서부터 불꽃이 튀어 신경을 전부 태우는 것 같았다. 야금야금 신경을 갉아 먹은 열기가 피부 안쪽에서부터 그 덩치를 불리기 시작했다. 뻐근하게 느껴질 만큼, 아랫배 안쪽이 콱 조여들었다. 오르가슴의 전조였다.
“으, 흐응, 우, 읍……!”
목 안쪽이 간지러웠다. 당장 불꽃이라도 토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입이 단단히 막혀 있는 탓에 아무것도 뱉어낼 수가 없었다. 딜라일라의 목 안에서 신음이 끓었다. 조금, 조금만 더. 절정 직전에 으레 찾아오는, 애타는 갈망이 딜라일라의 눈가를 적셨다. 여전히 그녀의 눈동자 앞에서는 캐러멜 색 머리카락이 흔들리고 있었다. 단맛이 날 것 같은.
아무리 무심한 표정을 하고 있어도, 무뚝뚝하게 말을 해도. 너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같은 쾌락을 느끼고 있을까?
그런 생각이 잠깐 떠올랐다가, 순간 몸속에서 터져 나가는 쾌락에 하얗게 지워졌다. 애타는 만큼 강렬한 오르가슴이 그녀를 덮쳤다.
“아, 누나…….”
에릭의 허리가 파르르 떨렸다. 콱콱 몸속을 치받는 움직임이 더할 나위 없이 거세지고, 이내 허리를 깊이 박아 넣은 채로 뱉어내는 긴 한숨과 함께 뜨끈한 감각이 그녀의 몸속으로 퍼져 나갔다. 파정이었다.
딜라일라의 팔이 그의 허리를 꽉 껴안았다. 각자의 절정 안에서 서로를 껴안은 몸은 한참 동안 서로를 놓아주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