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원의 불꽃은 꺼지지 않는다 (114)화 (115/116)

【기억나요? 제가 로제타 씨 밑에서 온갖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1년이나 배운 전투법을 투산은 고작 보름 만에 해내더라구요. 그런데 이건 곁다리 이야기고요. 글쎄, 클로에가 뜻밖의 재능을 갖고 있어요.】

“언니, 이거 보세요.”

“어머? 나무 인형이네. 아르투스 님의 공방에서 나온 건가?”

“아니. 내가 만든 건데요!”

“이걸 직접? 어떻게?”

제이디는 오늘 아침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빙그레 미소 지었다. 연이은 출장을 마치고 잠시 이크람에 다시 방문했을 때, 그사이 키가 훌쩍 큰 클로에가 나무로 만든 토끼 인형을 건넸다.

그 정교함은 필시 공방을 운영하는 아르투스 무르칸만이 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놀랍게도 온전히 클로에의 솜씨만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입체 조형에 소질이 있구나.”

“응. 나… 열심히 해서, 언젠가는 리안의 팔을 만들어 줄래요.”

몰두할 거리가 생기고 성과를 확인받는 과정이 연이어지니, 클로에는 눈에 띄게 밝아져 갔다. 살굿빛 눈동자에 전처럼 말간 생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꿈을 품은 작은 아이는 언제나 반짝이는 법이지요.】

리안 역시 갱신되는 소식에 기쁘게 반응했다.

리안은 이미 헤이미 롤랑과 티샤카의 기술자들이 만든 최고급 의수를 착용하고 있었다. 인간의 신체를 대신하는 도구는 원래도 있어 왔지만, 정교한 기계로 이루어진 공학 발명품은 처음이었다.

마법사들까지 힘을 합쳐 새로운 발명에 일조하고 있었다. 화학과 마법을 융합하는 이론은 있어도 공학과 마법을 융합하는 이론은 여전히 개척되지 않은 분야였다. 이 ‘마법공학’은 응용 학문으로서 마법화학 다음으로 세상의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리라.

리안 역시 리안대로 새로운 분야의 지평을 열어 가고 있었다. 게다가, 이제는 작은 소녀마저 새로운 꿈을 품는 모습을 보며 제이디는 형용 못 할 고무감을 느꼈다. 정진을 멈춰서는 안 되었다.

비로소 빛나는 미래가 눈앞에 다가왔다는 직감이 들었다.

“약초 삽화 시안이랑, 원고 초안 정리 모두 끝났습니다.”

“네, 고생하셨어요.”

“저, 궁금한 게 있는데….”

루시와의 관계도 나날이 발전해 갔다.

처음 발렌틴 여관의 임시 치료소에서 만났을 때는 유난히 집중력이 부족한 학생이라고만 여겼었는데, 시간이 지나며 루시 또한 뜻밖의 모습을 많이 보여 주었다.

“그 시기는 사람을 직접 치료하는 게 처음이라 많이 긴장했었나 봐요.”

굳이 제이디가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아도 친해지고 나서 루시가 먼저 그때의 일을 언급했다. 전쟁 후유증에 긴장감까지 더해지니 본인이 생각해도 그때의 자신은 말도 못 할 만큼 문제아였다, 고.

“그 정도는 아니었어요.”

“두둔하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이렇게 황성과 멀어져서 다른 선생님들도 만나고 헤이스터 님과 같이 출장도 다니고… 정말 즐거워요. 고집을 부려서라도 헤이스터 님을 따라오길 참 잘했어요.”

“…그 호칭 좀 어떻게 안 될까요?”

꼬박꼬박 ‘헤이스터 님’이라고 불리는 것도 슬슬 부담이 되던 차였다. 그냥 이름으로 부르라는 말에 처음에는 스승님께 그럴 수는 없다고 한사코 거절했지만, 호칭이 바뀐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다.

이크람 인근, 깎아지른 모래 절벽에만 피는 약초를 채집하러 갔을 때였다.

“죽기 싫어어─!”

“안 죽어. 고정돼 있잖아요. 죽을 높이도 아니고요.”

“무서워요, 못 하겠어요, 내려 줘요, 제이디…! 꺄악!”

뮤리얼의 ‘베르딘 민간 의술 총서’에 한차례 언급된 적 있던 약초였다.

뮤리얼 웨버가 이크람에서 생활하던 시기. 아마도 제국력 770년에서 780년쯤. 당대 황금 매를 치료하기 위해 특수한 약초가 필요하다고 했다. 그 때문에 워낙 험준한 절벽에 가뭄에 콩 나듯 피는 약초 ‘플루오시아’를 채취하던 일이 짤막하게 적혀 있었다.

더욱 자세한 정보가 없어 이 약초 또한 ‘베르딘 약초 사전’에 수록할 생각이었다. 확실히 뮤리얼의 언급대로 밧줄을 달고 절벽을 탄 채로 채취해야 하는 약초였다. 절벽의 각도가 균일하지 않아 루시와 둘이서 해가 넘어가도록 고군분투했었다.

루시가 고소 공포증마저 이기고 플루오시아 채취에 성공한 날이자, 처음으로 제이디를 이름으로 부른 날이었다.

그날 만신창이가 되어 마을로 돌아와서는 피곤한 줄도 모르고 밤이 새도록 함께 과실주를 마시며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었다. 루시는 스승의 일대기를 듣더니 당사자보다도 더 눈물을 쏟으며 제이디를 위로했다. 그러고 보면, 루시는 제이디가 처음으로 가진 제자이기도 했지만 아카데미 친우들을 모두 잃고 처음으로 사귄 친구이기도 했다.

모쪼록 이런저런 사건을 함께 헤쳐 나가며 사제지간의 정도 날이 갈수록 끈끈해졌다.

제이디는 루시가 궁금한 것이 있다며 보고서를 정리하면서 적어 둔 의문점을 하나하나 물어보자 성심성의껏 답변을 해 주었다. 루시를 가르치는 일은 즐거웠다. 정확히는 누군가에게 자신의 지식을 나누는 행위 자체가 제이디를 무척이나 행복하고 보람 있게 했다.

“제이디는요. 가르치는 것도 정말 잘하시는군요.”

“응?”

어떤 질문이든 이해가 쏙쏙 되도록 논리 정연하게 알려 주는 모습이 루시에게는 또 다른 선망 요소였다.

“도대체 못하는 게 뭐예요?”

“음….”

못하는 일이라. 지식적인 면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열정이 있고, 몸을 쓰는 일도 자신 있었다. 그런 자신이 못하는 것, 그중에서도 가장 어려운 것이 있다면….

제이디는 눈을 내리깔며 들릴 듯 말 듯 중얼거렸다.

“사랑?”

확실히 그것 하나만큼은 참 알 수 없었다.

“나는, 누구보다 당신을 사랑하고 있으니까.”

자신 또한 리안을 사랑하고 있었다. 마침내 스스로 만족할 만한 지위를 갖추어서 그와 다시 만나, 시간을 되돌아와 혁명을 준비했던 때처럼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평생 살 수만 있다면 더는 바랄 것이 없으리라 생각했다.

그를 사랑한다. 그를 사랑하는 것 외로 누군가를 인간적으로 사랑해 본 적도 많다. 그런데 어째선지 단 한 번도 사랑해 본 적 없는 사람처럼 사랑이 어려웠다.

하지만, 못한다고 해도 불안하지는 않았다. 사랑에는 여전히 미숙해도 반드시 잘되리라는 믿음이 이제는 있기에.

오늘도 무척이나 그리운 단 한 사람의 모습을 그리며 제이디는 눈을 감았다.

*  *  *

제국력 835년, 겨울.

동부의 거점 도시 아타르에 신설된 수도행 열차는 꽤나 진보한 형태였다.

서쪽으로 갈수록 변하는 식생과 기후를 느끼며 제이디는 새삼 이 대륙의 자연이 참으로 다양한 모습을 가졌다고 생각했다. 이런 환경에서 자라나는 식물 역시 참으로 다채롭고 아름다워 사랑할 만했다. 그러니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그것들을 연구하기를 멈추지 못하고 줄곧 매료되어 있는 거겠지.

다시 돌아온 황성, 이제는 황제가 없어 ‘수도’라 불리는 곳.

플랫폼에 첫발을 내디딘 제이디는 숨을 흡, 들이켜 보았다. 누군가의 빵에서 나는 향긋한 단내와 열차의 매캐한 내연 기관 냄새가 섞여 들었다. 이곳을 떠날 때 가장 마지막으로 느꼈던 피비린내는 온데간데없었다.

부기관사에게 짐을 건네받은 제이디는 망설임 없이 발을 놀려 목적지로 향했다.

수도 발렌틴 여관.

“어서 오세… 어머? 이게 누구야!”

막 들어선 여객의 모습을 본 여관장 사샤 발렌틴이 놀란 눈을 치떴다.

“오랜만이에요, 사샤.”

“세상에나…. 못 본 사이 이렇게나 얼굴이 피었구나. 정말 보기 좋아. 응?”

눈썹을 한껏 내려뜨리며 제이디의 신변과 얼굴을 살핀 사샤 발렌틴이 일꾼들을 시켜 객실과 음식을 준비했다. 반강제로 여관 로비에 앉혀진 제이디는 그리웠던 분위기를 만끽하며 내부를 둘러보았다.

여전히 성황인 모습에서 지난 전쟁의 흔적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지만, 그럼에도 역사적 진실은 잊히지 않고 회자되었다. 결전의 날과 그 이후 뒷수습을 할 때에도 이곳의 조력이 얼마나 컸는지.

환대를 받으며 조금 휴식한 제이디는 탁자에 놓인 신문을 펼쳐 들었다.

【베르딘 공화국 헌법 선포】

베르딘 공화력 1년, 최초의 헌법이 선포되었다는 소식이 1면에 가득 실려 있었다. 기사 한편에는 리안 베르딘의 멋들어진 초상화도 함께 있어 제이디는 설핏 웃음부터 났다. 손가락으로 그 초상화를 괜스레 쓰다듬어 보았다.

리안은 황제가 죽은 베르딘 제국의 황좌를 없애고, 공화제를 선포했다.

물론 베르딘 공화국의 기틀을 닦는 일은 쉽지만은 않았다. 아멜리아를 포함한 잔존 황실 세력을 설득하는 일, 급진적인 개혁파를 자중시키는 일 등. 호시탐탐 베르딘 제국의 황위를 노렸던 발테온 왕국의 압박도 있었다.

그럼에도 그 모든 싸움을 견디고 이겨 낸 이유는 하나였다. 무슨 일이 있어도 사랑하는 여인의 앞길을 막는 것은 모두 이기겠다고 다짐했으니.

도시 국가급 영향력을 지닌 이크람을 포함해 코라냐크 지방 소수 민족들에게는 자치권이 주어졌다.

존재 자체로 막강한 통치 도구였던 ‘자비에르 베르딘’이 없어졌지만, 그 위대한 마력조차 무너뜨린 베르딘 공화국의 기술력을 따라올 국가는 없었다. 역사상 가장 강력했던 마법사가 없어졌을 뿐, 베르딘 공화국은 마법과 기술이 조화를 이루며 전례 없는 호황기를 누릴 예정이었다.

기사를 모두 읽은 제이디는 마침내 그의 모든 과업이 끝나 가고 있음을 깨닫고 눈시울을 붉혔다. 발간 눈가를 문지르며 신문을 내려놓고, 따뜻한 차를 주문한 뒤 객실로 올라갔다.

리안은 자신이 수도에 복귀한 사실을 아직 모르고 있었다.

놀라게 할 목적은 아니었고, 편집을 마친 ‘베르딘 약초 사전’이 출간되려면 공교롭게도 며칠이 더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장이라도 그가 있는 곳으로 달려가고 싶었지만… 이왕이면 출간 후에 그 앞에 당당히 서고 싶었다. 그사이 다녀와야 할 곳도 있으니 며칠만 더 참기로 했다.

다음 날, 잠에서 깨자 사샤 발렌틴이 제이디 앞으로 온 서신 한 장을 건넸다.

【로건 리베르】

다음 회신은 발렌틴 여관으로 보내라고 했던 부탁을 들어준 모양이었다. 제이디는 반가운 미소를 지으며 아카데미 인장으로 봉해진 서신을 뜯었다.

【굳이 검수할 것도 없이 완성도 있는 초고였다. 반드시 필요한 실용적인 약초 위주로 모았더구나. 너란 녀석은 참…. 나 역시 ‘마녀’로서 경각심이 들더군.

그래서 세계 일주를 떠나기로 했다. 네가 ‘베르딘 약초 사전’을 만든다면, 난 동방 제국을 통틀어 전 세계의 약초 사전을 만들어 봐도 좋겠지. 별수 있나? 청출어람 꼴이 나지 않으려면 정진해야겠지.

아카데미 시절처럼 나와 함께하자고 하고 싶지만 애석하게도 네게 맡길 일이 있어. 뭐, 자연스러운 수순이지. 해가 바뀌기 전에는 아카데미에 한번 들르려무나. 분명 네게도 나쁘지 않은 제안일 테니. 기다리고 있으마.

영원한 나의 등불에게, 로건 리베르.】

‘말투가 왜 이렇게 의뭉스러워졌담.’

이렇게 구구절절 돌려 말하는 사람이 아닌데. 로건 교수님도 나이가 들긴 드는 모양이었다.

제이디는 그의 용건이 무엇일지 궁금했다. 시간은 많으니 방문해 달라는 그의 요청을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그리하여, 제이디는 아주 오랜만에 그리운 추억이 가득한 그곳, 베르딘 황립 아카데미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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