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원의 불꽃은 꺼지지 않는다 (113)화 (114/116)

동녘 트는 곳으로 천만 걸음, 약속과 예언의 땅 이크람으로 떠나는 자동차가 준비되었다. 투산과 클로에를 이끌고 차에 오른 제이디는 다소 공허한 미소를 지으며 전경을 바라보았다.

리안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제이디는 알 수 있었다. 조금이라도 편한 여정을 위해, 그가 많은 부분 신경 써 줬음을.

“너희들, 이거 먹어 봤니?”

제이디가 차 안에 놓인 붉은 비스킷 상자를 들어 올렸다.

“세상에 이렇게 맛있는 과자가 있었단 걸 알면 분명 놀랄 거야.”

어린아이는 어린아이라고, ‘비스킷’이라는 말에 투산과 클로에의 눈빛이 순간 반짝였다. 물론 눈 깜빡하는 사이 다시 겸연쩍은 표정으로 변했지만.

그런 장면에서도 아이답지 못하게 욕구를 참는 모습이 엿보여 제이디는 마음 한편이 조금 아렸다.

“엄청 많지만, 단 건 몸에 안 좋으니 조금만 먹어. 알겠지?”

일부러 제한하는 어조로 시식을 허락하자마자 소년이 먼저 상자를 열었다. 와중에도 소녀를 먼저 챙겼지만, 클로에는 감히 자신이 이런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될지 고민했다.

“네가 안 먹으면 나도 싫어.”

“……!”

클로에의 표정이 다시 슬퍼졌다. 그럼에도 죄책감은 소녀의 욕구를 끝까지 막았다.

결국 세 사람 중 비스킷을 먹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제이디는 이 아이들을 다시 아이답게 만들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했다.

“곧 출발하겠습니다.”

안전한 여정을 위해 파견된 맥 칼리스토 경이 똑똑, 차 문을 두드리며 차창 너머로 전했다.

“맥 씨. 운전법은 알고요?”

“참으로 쓸데없는 고민을 하는군요.”

맥 칼리스토는 2차 평화 행진 당시 지하도에 갇힌 일로 여전히 제이디에게 꽁해 있었다. 무시무시한 전쟁을 함께 겪은 전우에게 그런 어마어마한 뒤끝을 보이기가 창피하지도 않냐고 핀잔도 줘 봤지만 소용없었다. 참으로 지독하게 자존심 강한 사내였다.

“쓸데없지 않아요. 가뜩이나 황성이 재건 중인 판에 기둥이라도 박으면 어쩌려고요?”

“그런 허황한 걱정에 허비할 시간 없습니다. 동력 기관을 보고 올 테니 기다리세요.”

말은 저렇게 하지만, 제이디는 그의 본심을 어렴풋이 알았다. 세시아 엘리엇이 그의 친동생이었으며, 그녀와 제이디 자신이 아주 닮았다는 사실을 리안에게 뒤늦게 전해 들었다.

이를 알게 되고부터는 그가 자신을 여동생처럼 대한다고 느껴 마음이 풀어졌다. 이후에는 제이디도 그에게 틱틱대며 장단을 맞춰 주는 판이 되었다.

맥 칼리스토를 놀려 먹으면서도 제이디의 신경은 여전히 밖으로 쏠린 채였다. 끝까지 리안은 나타나지 않았다. 제이디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창밖에서 시선을 돌렸다.

그때였다. 자동차에 시동이 걸리는 순간, 어디선가 다급한 뜀박질 소리가 들렸다.

“잠깐만요, 헤이스터 님! 멈춰요, 멈춰! 꺅!”

이 덜렁거리는 목소리의 주인은 분명 루시였다. 제이디는 소란한 창밖을 넘겨다보고는 차에서 내려섰다.

“루시. 무슨 일이에요?”

“저도 데려가 주세요, 헤이스터 님.”

“네?”

“헤이스터 님과 같이 갈게요. 이렇게 이별할 순 없어요!”

루시가 절박한 얼굴로 외치듯이 말했다. 제이디는 잠시 두 눈을 끔뻑거리다가 대답했다.

“아예 떠나는 게 아니에요.”

“그래도요. 하루라도 배움을 멈추고 싶지 않아요.”

“…….”

“부탁드려요. 저도 데려가 주세요…!”

애원하는 모습이 누가 보아도 절절했다. 내가 너무 무신경했나. 제이디는 깊게 고민하지도 않았다. 아이도 둘씩이나 데려가는데 루시를 두고 가야만 하는 이유는 별달리 없었다. 일손이야 많으면 많을수록 좋으니.

제이디는 빙그레 웃으며 차 문을 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적당히는 없을 테니, 행여나 돌아가고 싶다고 울지나 말아요.”

“와…! 감사합니다! 저 정말 열심히 할게요!”

참으로 기뻐하는 모습이 보는 사람까지 유쾌하게 만들었다.

루시를 먼저 태우고 다시 차에 올라타려던 때였다. 제이디를 찾아온 또 다른 이가 있었다.

“리안….”

멀찍이서 리안 베르딘이 걸어왔다. 어깨에 걸친 코트가 실바람을 따라 흔들렸다. 함께 흔들리는 코트 안 흰 소매가 오른팔의 부재를 드러냈다. 그의 육체에서는 끝끝내 생존한 승리자의 여운이 느껴졌다.

그 모습을 보자마자 서글픔을 닮은 감정이 걷잡을 수 없이 휘몰아쳤다. 제이디는 울지 않으려 애쓰며 흔들리는 눈동자를 그에게 고정했다.

리안은 생각이 많은 얼굴로 제이디를 바라보더니 몸을 숙여 그녀를 안았다. 커다란 손이 뒷머리를 감싸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알아줬으면 하는 게 있어.”

그의 한 마디, 한 마디가 제이디에게 새겨지듯 다가왔다.

“당신은 내게 태양이라 했지만, 내겐 당신이 태양이야. 그 빛에 가려질 사람이 있다면 그건 제이디가 아니라 내가 될 겁니다.”

“…….”

“그럼에도 스스로를 인정할 때까지 시간이 필요하다면 가십시오. 1년이든 10년이든… 당신을 위한 기다림은 어떤 시간보다 가치 있을 테니. 나는 내가 있는 곳에서 당신이 되돌아올 길을 닦아 놓겠습니다. 그조차도 내게는 얼마나 영광된 일인지 당신은 모를 겁니다.”

리안은 더욱 따스히 제이디를 품었다. 한 팔에도 깊숙이 안길 만큼 가녀린 몸이 떨렸다. 리안의 허리를 감싼 팔에 조금 더 힘이 들어갔다.

단둘만 남은 듯이 고요한 분위기 속. 그의 마지막 한마디가 제이디의 세상을 울렸다.

“나는, 누구보다 당신을 사랑하고 있으니까.”

더 이상의 친애는 없었다.

마침내 사륜구동 자동차가 출발했다. 가히 마차와는 비할 수 없는 속도와 승차감이었다. 황궁 동쪽 성벽을 넘자 폐허를 재건하는 황성민들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차창 밖을 보며 감상에 빠질 틈도 없었다. 루시가 아무도 손대지 않은 요르디히 계란 비스킷을 맛보고 환호성을 질렀기 때문이다.

왜 이 맛있는 걸 두고도 먹지 않느냐며, 그녀가 직접 모두의 손에 비스킷을 쥐여 주는 바람에 결국 나머지 세 사람도 한 입씩 과자를 베어 물었다.

차 안에 지독히도 달콤한 내음이 풍겼다.

“요르디히 계란 비스킷? 이걸 어떻게 구했어? 하리몽드 티백이랑 묶음 구성이잖아! 정말 나 주는 거야?”

“통 못 자는 거 같아서.”

“그러고 보면 은근히 세심한 구석이 있어.”

“그걸 이제 알았어?”

그리움을 품은 버터 향기가 이제는 떠나 버린 인연을 떠올리게 했다.

같이 가, 하며.

마음을 다 열지 않고 회피하는 자신을 뒤따라오던 어느 연보랏빛 머리 청년의 목소리가 신기루처럼 피어올랐다. 금방이라도 차창을 스치며 제게 인사를 할 것만 같아 제이디는 울컥 눈물이 차올랐다.

‘이 과자, 로제타 씨가 참 좋아했을 텐데….’

잊혀 가는 희생자들의 얼굴이 차례차례 떠오르고 말았다.

아무도 죽지 않은 미래, 모두가 살아 있는 현실을 상상할 때면 꼭 몽롱한 꿈을 꾸는 듯이 아득해졌다.

살리지 못한 인연들, 끝내 떠나 버린 모든 소중한 사람의 기억은 여전히 산 사람의 마음에 남아 불시에 밀려들곤 했다. 진한 추억이 담긴 향기 속에서 제이디는 속절없이 밀려드는 그리움의 파도를 맞았다.

그러나 앞으로는 이렇게 무너질 듯 서글퍼질 때면 리안이 건넨 말을 떠올리며 버텨 낼 수 있으리라.

가장 좋아하는 비스킷을 맛보고서도 무척이나 슬픈 얼굴을 한 제이디를 옆자리에 앉은 클로에가 바라보았다. 덩달아 축 처지던 소녀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무릎 위에 놓인 제이디의 손을 꼭 잡았다. 말하지 않아도 전달되는 따뜻한 위로가 제이디의 마음을 녹였다.

제 손을 쥔 작은 손을 내려다보며, 제이디는 되뇌었다.

이는 결코 끝이 아니라고. 그저 다시 시작하는 것일 뿐이라고. 정상에 선 리안 베르딘의 그늘에 가려지지 않도록 노력하겠다고. 살아남은 의미를 증명하겠노라고. 반드시 제 손으로 직접 세상을 이롭게 하리라고….

한편 리안은 동쪽으로 떠나는 행렬을 끝까지 묵묵히 지켜보았다. 마침내 완전히 모습이 사라진 뒤에도 잔상처럼 남은 여운을 느끼듯 한동안 붙박여 서 있었다.

제이디 헤이스터에게 건넨 친애의 말에는 조금의 거짓도 없었다. 리안은 이제 어떻게든 이루어 낼 또 다른 목표를 세웠다.

제이디가 돌아오기 전, 그녀가 꿈을 이룰 수 있는 기반을 반드시 마련해 놓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설령 아멜리아와 적이 되는 한이 있어도 강경하게 자신의 세력을 늘려 가야 했다. 한 치의 타협도 양보도 없는 또 다른 전쟁이었다.

*  *  *

세월은 빠르게 흘러갔다.

제이디의 말대로, 상처뿐인 황성을 떠나 새로운 지역에 머물게 된 아이들은 느리지만 꾸준히 마음의 상처를 회복해 나갔다.

제이디는 자신을 따라온 루시와 함께 ‘베르딘 약초 사전’의 초석이 될 다양한 약초를 함께 채집하고 연구해 나갔다. 투산은 이크람 전사 무리에 속해 타고난 전투 재능을 더욱 발전해 나아갔으며, 클로에는 새로운 공동체에서 이런저런 것을 배워 나갔다.

전쟁이 남긴 상흔은 결코 완전히 흐려질 수 없었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더는 덧나지 않는 흉터가 되어 갔다.

【오늘도 재미있는 일이 있었죠.】

제국력 833년 가을.

제이디는 경쾌하게 펜을 놀리며 리안에게 전할 새 소식을 적어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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