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군은 승리했지만 비참한 후유증을 겪었다.
사상자가 끝도 없이 잇따라 집계되었으며, 그 안에는 리안이 오랜 시간 믿고 함께한 간부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리안은 영정 하나 남지 않은 로제타의 묘에 꽃 한 송이를 내려놓았다.
클로에는 자신을 구하느라 리안의 팔이 희생되었다는 사실에 감당하기 어려운 충격을 받았다. 함묵증을 앓게 되었고, 음식을 전혀 입에 대지 않았으며, 리안의 얼굴을 보기조차 미안해했다.
한편 베르딘 황궁이 혁명군에 점령되고 황좌가 비었다는 소식이 온 대륙에 퍼졌다.
【빈 황좌 위 재를 털 자는 누구인가】
【버나드 차기 마법부 총리, 급진 개혁의 위험성을 당언하다】
황성의 인쇄소는 쉴 새 없이 돌아가며 기자들의 기사를 찍어 냈다.
숨어 있던 혁명가들의 사설이 천편일률적으로 체제 변화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한편, 사교계 잡지를 비롯, 귀족 계층 일반은 여전히 보수적인 태도를 보였다.
“외세 침략에 대비해 황좌를 비워 둬선 안 돼.”
아멜리아는 허울뿐일지라도 우선은 황좌에 누구든지 앉혀야 한다고 주장했다.
리안과 아멜리아는 자비에르를 없앤다는 목적은 같았지만, 바라보는 미래가 달랐다. 리안은 황정 자체를 없애려 했고 아멜리아는 남은 직계 혈족과 권력 다툼을 하려 들었다. 이 때문에 황제가 사라진 베르딘 황실에는 또 다른 칼바람이 부는 듯했다. 자넷이 중재하려 했으나 잘되지 않았다.
로제타의 묘를 떠나는 리안의 표정이 어둠에 물들었다. 난리 통에 제대로 된 장례조차 치러 주지 못하고 보낸 터라 마음이 좋지 않았다.
‘무엇을 기대했나. 황제가 죽으면, 곧바로 제국이 올바르게 돌아가리라 생각했나.’
걸음마다 상념이 흘러내려 바닥에 진득이 눌어붙는 듯했다.
‘도무지 끝나지 않는 싸움이구나.’
진짜 과업은 황좌를 대체할 통치 도구를 만들어 내는 것까지였다.
【황궁의 일이 정리되는 즉시 합법적인 병원 설립이 필요해요.】
다시 펼쳐 본 공책에는 제이디의 답장이 도착해 있었다. 리안의 눈빛에 깊은 슬픔이 어렸다.
제이디에게는 미안한 마음뿐이었다. 황궁 내 갈등이 마음처럼 빨리 해결되지 않았다. 폐허가 된 제국의 기틀을 다시 닦아 올려 안전하고 규율 잡힌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꽤나 긴 시간이 필요해 보였다.
【보고 싶습니다.】
리안의 편지가 이어졌지만, 돌아오는 답장은 없었다. 낯설지 않은 감각이었다.
리안은 ‘마녀’가 완전히 합법적으로 안전하게 의술을 펼칠 사회를 이루기 전까지는 제이디가 이 제국에 마음을 열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전쟁을 치르기 전에도 항상 시간에 쫓긴다고 느꼈는데. 여전히 시간이 모자라다는 느낌만 들었다.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고충들에 비하면, 팔 한쪽이 없어진 건 별일도 아니었다.
* * *
며칠 후, 베르딘 황궁.
혁명 세력의 강경한 주장으로 ‘승리에 일조한’ 마녀만은 황궁 출입이 허가되었다.
제이디는 마침내 황궁 성벽을 넘을 수 있었지만 마냥 기쁘지만은 않았다. 차별이 계속되는 한 끝끝내 안심할 수 없었다.
제이디는 그동안 계속 생각했던 질문을 다시 한번 자문했다.
‘이 모든 일을 해내고자 했던 이유가 뭐지?’
답은 명백했다.
모든 제국민이 의술의 힘을 누리며 평등하게 치료받는 세상을 만드는 것.
‘황제가 죽었다고 해서, 그 목표가 저절로 이루어지진 않아.’
현 베르딘 제국 내 의학 기반은 전무한 수준이다. 파편적으로 퍼진 지식을 체계적으로, 기초부터 쌓아 올려야 하는 상황이었다.
아무리 병원을 설립한다고 해도 진정으로 의술과 약초학의 의미를 깨닫고 배우고자 하는 후학을 양성하지 못하면 아무 의미 없었다.
제이디는 여전히 리안의 심장을 수술하며 느꼈던, 말로 다하지 못할 어떠한 경지를 공식적인 학문으로 정립하고 싶었다. 그리고 루시와 같은 후학을 더 양성하고 싶었다. 그들과 함께 뮤리얼의 생명을 앗아 갔던 병의 치료법도 알아내고, 그리고….
여태 잊고 있었던, 과거의 자신이 이루고자 했던 꿈, ‘베르딘 약초 사전’을 다시 완성하고 싶었다.
“제이디.”
제이디를 만난 리안이 반가운 얼굴로 빠르게 다가왔다. 그의 모습은 달빛 아래 있어도 태양처럼 빛났다.
문득 제이디는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내가 당신에게 더 이상 빛나는 존재가 아니어도… 내 곁에 머물러 주겠습니까. 내가 더 이상 태양이 아니어도, 그대의 빛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 언젠가 그가 물었던 질문이 무색하게도 그는 여전히 너무나도 소중한 사람, 여전히 빛나는 태양이었다.
그래서, 그렇기 때문에 제이디는 더 단단히 결심했다.
‘당신은 내게 태양 같은 사람이지만. 나는 결코 그 그늘에 가려질 생각이 없어.’
리안 베르딘만큼 빛나는 사람이 되어야 했다. 자신의 업적을 인정받고, 그와 동등한 대우를 받기 전까지는 리안과 함께해도 그 빛에 가려지는 사람만 될 뿐이었다.
우선 제이디는 속마음을 숨기고 웃는 얼굴로 리안을 맞았다. 그와 반가운 포옹을 하고, 호화로운 저녁 식사를 함께 나누고, 그의 몸 상태를 봐 주고, 그와 한 침실에서 온기를 나눌 때까지도 자신의 마음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마녀’가 여전히 배척되는 현실에 아무 불만도 없는 사람처럼.
“내일 이크람의 ‘마녀’들이 떠난다고요.”
“네. 그들이 있을 자리로 돌아간다고 하더군요.”
조금 정적이 일었다. 리안의 직감이 미세하게 달라진 분위기를 알아챘다.
“…리안.”
제이디가 가만히 리안을 불렀다. 리안은 대답 없이 뒤에서 제이디를 안은 채 머리카락에 얼굴을 묻었다. 꼭 제이디가 무슨 말을 할지 다 알고 있다는 듯이, 불안한 기색을 보였다.
“리안.”
제이디가 다시 한번 리안을 부르고, 리안은 더욱 세게 제이디를 끌어안았다.
“…‘그들이 있을 자리’란 어디일까요?”
“제이디.”
제이디는 가만 리안의 왼 팔목을 쓰다듬었다. 불온한 정적이 이어졌다. 눈을 감고 있던 제이디가 마침내 먼저 정적을 깼다.
“저… 이크람의 ‘마녀’들과 같이 갈게요.”
“…….”
“나를 위한 선택이에요.”
두 사람을 둘러싼 밤이 더욱 깊고 길게 흘러갔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피로한 눈을 감고 먼저 잠들지 못했다. 시간은 자정을 넘어 새벽으로 달렸다.
깊은숨을 내쉰 리안이 마침내 대답했다.
“우린… 왜 이렇게 어려울까.”
“아예 떠나겠다는 소리가 아니에요. 그저…”
“설명하지 않아도 돼요. 당신이 무슨 생각으로 떠나겠다 하는지 압니다. 다… 알아요.”
제이디 헤이스터의 시간을 돌리기 위해 60년을 기다렸다. 그때의 경험으로 미루어 보면 고작 몇 년 더 기다리는 건 리안에게는 일도 아니었다. 지금은 제이디가 구원해 준 육체까지 가지고 있지 않나.
리안이 슬퍼하는 이유는 기다리는 행위가 힘겹기 때문이 아니었다. 결국은 모두를 만족시킬 미래를 만들지는 못했다는 사실, 그로 인해 제이디 헤이스터를 실망시켰다는 사실이 절망적일 뿐.
“미안합니다, 제이디.”
“…….”
“내가… 더 나은 결과를 내야 했습니다. 당신이 고민할 필요조차 없도록.”
“리안의 잘못이 아니에요. 당신 곁에 설 만큼 강하지 않아서 내가 미안해요. 다… 내 탓이에요.”
리안이 만류하며 달래는 소리가 들렸다. 왜 이렇게 한없이 작아지는 기분인지 제이디는 알 수 없었다.
“지금도 난 리안의 눈도 바라보지 못하고 있잖아요….”
먼저 떠나겠다 말했지만, 제이디는 그에게 등을 보인 채 웅크리고 조용히 우는 일밖에 할 수 없었다. 그럴수록 몸을 감싸는 리안의 온기는 더욱 뜨거워졌다. 이 뜨거운 품을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해야 했다. 제이디는 본능적으로 알았다. 자신의 진짜 목표를 이룰 사람은 이 제국에 오직 저뿐임을.
이별 선언을 한 제이디는 한참을 더 뜬눈으로 밤을 새우다 결국 잠들었다. 리안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무엇이 가장 제이디를 위하는 길일지 고민을 이어 갔다.
누군가를 향한 애정과 세상을 위한 대의는 어째서 이렇게나 함께하지 못할까.
과연 제이디 헤이스터를 보내는 것이 정답이 맞을까….
푸른 새벽녘, 제이디가 다시 눈을 떴을 때, 옆자리는 비어 있었다. 차가운 시트를 손으로 더듬고 나서야 제이디는 마음 놓고 울 수 있었다.
마침내 떨어지는 눈물 줄기마저 식을 만큼 마음이 가라앉았을 때, 제이디는 침대에서 일어나 침실을 벗어났다. 리안과의 일과는 별개로 마음이 쓰였던 것이 하나 있었다.
누군가의 침실 앞에 도착한 제이디는 작게 문을 두드린 뒤 문고리를 돌렸다.
문틈으로 드러난 침대 위, 작은 소녀가 베개에 등을 기대고 동이 터 오는 창밖을 물끄러미 내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 침대맡에는 검은 머리 소년이 엎드린 채 잠들어 있었다.
소녀는 인기척을 느끼더니 화들짝 놀라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기민하게 잠에서 깬 소년은 발작적으로 몸을 일으켜 소리가 들린 쪽으로 단검을 겨누었다.
“…….”
소년, 투산 라빈스키는 제이디의 얼굴을 확인하고 그제야 검을 거두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소녀, 클로에는 제이디를 보자마자 눈물부터 쏟았다.
“나… 난…. 미, 미안해요….”
소녀는 제이디가 리안을 얼마나 아끼는지 알고 있었다. 말을 하지 않는다던 아이가 떠듬떠듬 내뱉은 첫마디가 사과였다. 정작 리안 본인에게는 너무나 미안해서 차마 전하지 못한 사과가, 제이디의 앞에서 터져 나왔다.
이 일련의 모습만 보아도, 지난 전쟁이 아이들에게 얼마나 많은 정신적 충격을 안겼는지 알 수 있었다.
전쟁을 겪고도 서로를 의지하며 견뎌 내는 두 아이를 바라보며 제이디는 잠시 깊은 생각에 잠겼다. 마침내 미소를 지으며 아이들에게 다가간 제이디가 한마디를 건넸다.
“너희, 나랑 같이 가자.”
“…같이?”
“그래. 상처뿐인 황성에 남아 있지 말고. 더 큰 세상을 보러 가지 않을래?”
창살 사이로 새어 든 아침 해가, 시리게 빛나는 제이디의 미소를 비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