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원의 불꽃은 꺼지지 않는다 (111)화 (112/116)

Ⅴ. 나의 태양에게

며칠 후, 황성 발렌틴 여관.

“항생제를 가져와요, 루시. 외상이 심각하니 제때 투약하지 않으면 패혈증이 올 거예요.”

“항생… 항생제가….”

“왼쪽에서 두 번째요!”

“네, 네!”

제이디는 저를 따라다니는 조수를 쳐다보지도 않고 윽박질렀다. 답답함이 잔뜩 밴 어조였다.

“헤이스터 님의 사설을 읽고 감동받았어요. 꼭 헤이스터 님 밑에서 일하고 싶습니다!”

제이디가 신문에 기고한 【제국 민간 의술의 억압된 역사와 그 정립의 필요성】을 읽고 임시 치료소로 쓰이고 있는 발렌틴 여관에 찾아온 10대 소녀였다. 처음에는 전쟁으로 인한 부상자 수습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치료소에 새 인력이 들어와 반가운 마음이었다.

게다가 제이디로서는 처음으로 문하생이 생긴 셈이었다. 풍파가 일듯 혼란한 정세에 아직 선뜻 의술을 배우겠다 나서는 사람이 없던 차에 무척 고무적인 일이었다.

“아, 앗…!”

챙그랑─

“…지금 뭐 하는 거예요?”

“그게, 그… 죄, 죄송합니다!”

“꾸물거리지 말고 다시 가져와요!”

약병을 꺼내다 말고 떨어뜨려 버린 루시를 향해 다시 한번 제이디의 질책이 날아들었다.

그러니까… 속 터지게 답답하고, 덜렁거리고, 말도 못 하게 기억력이 나쁜 것을 빼면, 성실성 하나만큼은 나쁘지 않은 친구였다. 의사가 되려면 차라리 살짝 불성실할지언정 빠릿하고, 꼼꼼하고, 암기를 잘하는 편이 훨씬 도움이 될 테지만, 제이디는 굳이 그 점을 지적하진 않았다.

“아악!”

제이디가 고통에 찬 신음을 내지르는 환자의 팔을 붙잡았다. 그러고는 수술용 칼을 들고 팔목 절개를 준비했다. 부풀어 오른 환부를 째서 안에 갇힌 피와 부기를 빼야 했다.

“마취제 수급이 원활하지 않아요. 미안하지만 방법이 없어요. 조금 아플 거예요.”

미하리가 깨끗한 면포를 가져와 환자의 입에 물리는 것과 동시에, 제이디가 환자의 생살을 갈랐다.

끔찍한 비명이 울리고, 팔목에 갇혀 있던 피가 솟구쳐 폭포처럼 쏟아져 내렸다. 제이디의 뺨까지 핏방울이 튀었다. 그러나 제이디는 피를 닦을 생각도 하지 않고 처치에 집중했다.

챙그랑─

다시 한번 약병이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바닥까지 쏟아지는 피를 보고 기절한 조수가 있었다.

“아. 주의를 준다는 게.”

첫 조수가 하필이면 피를 보고 기절하는 유형이라니.

한차례 수술을 마치고 제이디는 빠르게 움직여 바닥을 흥건히 적신 피를 대걸레로 닦아 냈다. 원래라면 조수가 할 일이었지만, 루시가 기절해 버린 탓에 손이 없었다. 그럼에도 제이디는 묵묵히 할 일을 해냈다.

“거동이 가능한 분은 일어나 주세요. 침상이 모자라니 협조 부탁드립니다.”

“아직 머리가 아파요, 선생님.”

제이디는 엄살을 부리며 침상을 비워 주지 않는 환자를 보며 팔짱을 꼈다. 눈빛으로 압박을 줬지만 통하지 않았다. 차악, 제이디가 커튼을 걷어 옆 침상에 기절한 듯 누운 환자를 보여 주었다. 머리에 시뻘겋게 물든 붕대가 감긴 채였다.

“자, 보세요. 아예 머리가 터진 사람이에요. 세 바늘 꿰맨 걸로 엄살 부리면 안 되겠죠?”

“…….”

“여기 마티스 씨가 배웅해 드릴 거예요. 일주일 후에도 얼얼하거나 부기가 빠지지 않으면 찾아오세요. 다음! 어떤 환자죠?”

환자는 계속해서 밀려드는데 가용 인력은 턱없이 부족했다. 로건 교수님과 헐리 씨, 마티스 아저씨를 비롯해 이크람의 모든 ‘마녀’와 신성 마법사가 도와주고 있었고, 심지어 여태 정체를 숨기고 있던 이름 모를 ‘마녀’들까지 속속 등장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그리운 얼굴이 많더군. 너, 아카데미에 로건 말고도 다른 마녀들이 있는 거 알아?”

그때 헐리 씨가 언급했던 대로 아카데미 소속으로 보이는 ‘마녀’도 있었다. 제이디는 그들이 조심스레 정체를 드러내고 조력하는 모습을 보며 황제의 몰락을 새삼 실감했다.

전쟁에서 부상을 입은 사람은 대개 마력 억제제를 바른 무기나 탄알에 맞았기에 신성 마법으로 치료하지 못했다. 게다가 여전히 역병이 떠돌고 있었으므로, 역병 치료제 제작 인력을 빼 올 수도 없었다. 이러나저러나 인력이 모자라니 누구든지 배움이 빠른 사람이라면 투입해야 할 지경이었다.

전쟁은 끝났지만, 남겨진 자들이 해결해야 할 일은 늘기만 했다.

【‘마녀’의 수술법은 과연 온당한가?】

리안은 제이디에게 제국 최초의 심장 수술을 받고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그러나, 그 방법에 대하여 많은 논란이 일었다. 아직 계급제가 타파되지 않은 상황에서는 평민이 황족의 가슴을 난도질한 사건에 불과했다.

제이디의 방식은 급진적이었기에, 많은 업적을 세워도 쉬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제이디의 임시 치료소에 찾아오는 환자도 대부분 민병대나 혁명군에 소속돼 있던 평민이었다.

제이디는 리안의 심장을 수술하며 느꼈던 고무감을 회상했다. 말로 할 수 없이 강렬했던, 평생에 느껴 본 적이 없었던 감정. 모든 일이 신기루같이 느껴졌다. 비밀스러운 보물섬을 발견한 해적처럼 그동안 닿지 못했던 경지에 닿은 듯했다.

제이디는 직감했다. 굳이 심장 수술뿐만이 아니었다. 아직 완전히 개척되지 않은 외과술이지만, 언젠가 반드시 세상을 바꿀 ‘마법’이 되리라.

비록 시대를 앞선 수술법으로 하늘 같은 황족의 가슴을 파헤친 ‘마녀’ 취급을 받았지만. 역병으로부터 제국을 구한 것, 죽음의 문턱에 있던 2황자를 구한 것 모두 제이디 헤이스터가 해낸 일이라는 사실을 제국민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오늘도 치열하게 사람들을 치료한 제이디는 피로한 눈두덩이를 문질렀다. 밤이 되자 환자도 줄고 어느 정도 정리가 되었다.

“나머진 제게 맡기고 조금 쉬다 오세요, 선생님.”

의료 도구들을 정리할 때, 제이디와 마찬가지로 완전히 녹초가 된 루시가 다가왔다. 제이디가 힘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힘들죠?”

“아, 아닙니다! 선생님에 비하면 전 힘든 것도 아니죠!”

손사래를 치며 부정하는 앳된 소녀를 보고 제이디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뭘. 똑같이 움직였는데. 오늘은 늦게까지 공부하지 말고 좀 쉬도록 해요. 충분히 휴식해야 실수도 줄고 집중력도 생기죠.”

“아….”

알고 계셨구나.

루시는 낮 동안 고역에 시달리고도 밤새도록 제이디가 준 책을 펼쳐 놓고 공부했다. 사실 그래서 집중력이 점점 감퇴하는지도 몰랐다.

“배울 시간은 많으니 너무 무리하지 말아요. 우리가 하는 싸움은 정신력 싸움이기도 하니까. 그렇게 몰아붙이면 될 것도 안 되잖아요.”

“네…. 감사합니다. 생각해 주셔서.”

몇 년 전, 고학생이던 시절 제게 이렇게 말해 주는 스승이 있었다면 참 좋았겠지. 로건이나 헐리, 뮤리얼 모두 그다지 살가운 사람은 아니었으니. 그러고 보면 참, 제 스승들은 하나같이 까칠하고 못되기만 했었다. 그 점이 마음에 들긴 했지만 가끔은 힘들었어.

학문을 시작하며 고군분투하는 루시에게서 어린 시절 자신의 모습을 본 제이디는 그때 자신이 듣지 못했던 말, 듣고 싶었던 말을 해 주었다.

조언을 남긴 제이디는 여관 뒤편으로 향했다. 문을 열면 여전히 가시지 않고 밤공기에 섞여든 피비린내가 느껴졌다.

반사적으로 인상을 쓰며 걸어간 곳은 인근 벤치였다. 자리를 잡고 앉은 제이디는 들고 있던 낡은 가죽 공책을 펼쳤다.

【치료소가 여전히 바쁘다고 들었습니다. 내일이면 지원이 도착할 겁니다. 이곳의 수습이 끝나는 대로 그쪽으로 갈 테니 조금만 더 기다려 주세요, 제이디.】

리안의 전언이었다. 회중시계를 불태우고 황제가 죽으면서 리안과 제이디는 회중시계의 규율을 벗어났다. 미하리가 급한 마음에 신성 마법으로 제이디의 외상을 치료하면서, 제이디는 자신의 몸에 다시 신성 마법이 통하게 되었음을 알았다. 시간을 돌아온 대가가 사라진 것이었다.

신의 영역이니 정확한 원리는 알 수 없었지만. 어쩌면 회귀를 하면서 막혔던 것이 다시 동작한 것이리라 추론했다. 이후 먼지 쌓인 편지 공책을 열어 보았더니 그와 나누었던 편지가 되살아나 있었다.

리안의 정체가 제국의 2황자임이 밝혀지며 그는 정식으로 황족 대우를 받게 되었다. 리안은 황궁에 남아 있던 측근들과, 재빨리 태세를 전환한 황족들의 손에 의해 제이디의 치료소에서 황궁으로 곧바로 옮겨졌다.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한다는 제이디의 의견은 가뿐히 묵살되었다. 그가 완전히 회복되기도 전에 벌어진 일이었다.

“황자의 옥체를 황궁에 귀속하겠습니다.”

“사후 조치를 할 사람이 필요해요. 함께 가겠어요.”

“‘마녀’의 황궁 출입은 엄격히 불허하겠습니다. 2황자께 해야 할 조치를 정리해 행정관에게 올리십시오.”

“……!”

제정신이냐고, 어떻게 이렇게 막무가내로 의사에게서 환자를 빼앗아 가느냐고. 그러다 리안이 잘못되기라도 하면 어떡할 거냐고.

감정적으로 따지고 싶었지만 역효과일 듯했다. 제이디는 잠자코 비서관의 명에 따랐다. 리안을 위해서라도 그것이 최선이었다.

‘어차피 허울만 남은 격식일 뿐.’

그저 모든 게 어리석다고 생각하면서도, 제이디는 밀려드는 서글픔을 어찌할 바 몰랐다.

혁명군이 황궁을 점령하여 분명 모든 간부가 리안과 함께 있는데, 어째서 ‘마녀’라는 이유로 자신과 헐리는 리안과 함께하지 못하는지. 도대체 왜….

【황자였던 시절 측근들이 여전히 살아 있더군요. 참으로 나설 때와 물러설 때를 잘 아는 자들입니다. 내가 의식이 없을 때 그들이 무례를 범했다면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 정말 미안합니다, 제이디.】

【우리가 ‘마녀’들의 거취를 치열하게 논하고 있습니다. 곧 규정이 결정될 테니 조금만 더 기다려 주세요. 상황이 이렇게 되어 나 역시 유감입니다.】

이런저런 전쟁 뒷수습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면서도 리안은 제게 틈틈이 황궁에서의 일을 전했다. 피로한 제이디가 답장할 기력도 없어 그대로 잠들어도, 매일매일 소식을 보내왔다.

그가 말하는 ‘우리’에 여전히 자신과 같은 ‘마녀’는 배척되어 있어 제이디는 급기야 배신감까지 느끼게 되었다.

아멜리아조차도 사태 수습에 바쁜지 제게 사람을 보내지 않았다. 제이디는 혁명에 공헌했음에도 철저히 외면당하는 감정을 느꼈다.

“…….”

속상한 마음을 감추고, 오늘만큼은 어떻게든 펜을 들어 답장을 쓰려 했지만…. 제이디의 손이 다시 힘없이 떨어졌다.

리안이 자신을 데리러 오더라도, 자신은 아직 임시 치료소에 밀려드는 환자들을 위해 어차피 황궁에는 가지 않을 것이다. 모든 침상이 비고 난 뒤에도 후속 관리가 필요한 환자가 있을 테니 이곳을 떠날 수 없다.

그저 각자의 위치에서 할 일을 하고 있을 뿐이라고 생각하면 편했다.

그런데, 양쪽 모두 힘들게 일하기는 마찬가지인데, 왜 인정받는 쪽은… 반짝이는 쪽은 한 사람뿐일까.

【황족의 심장을 잡아먹은 ‘마녀’ …】

【그들이 말하는 의술의 안정성을 검증할 방안을 촉구해야 한다. …】

제국민을 구원하는 데 일조했음에도 주목받는 자는 2황자 리안 베르딘뿐. 제이디는 제게 날아드는 눈총을 견디기가 조금은 버거웠다.

【황궁의 일이 정리되는 즉시 합법적인 병원 설립이 필요해요.】

겨우 한 줄의 답장을 쓰고 제이디는 침대에 누워 힘겨운 눈꺼풀을 내리감았다.

내일은 또 얼마나 치열할지, 걱정은 미루어 두고 눈을 붙였지만 단잠은 오지 않았고, 결국 쪽잠만 자다가 해를 맞았다.

너무 많은 책임감과 억울함이 제이디를 억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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