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원의 불꽃은 꺼지지 않는다 (109)화 (110/116)

대치는 끝나지 않았다.

생의 마지막까지 제 본성을 따르며 전장을 헤집어 놓은 로제타 덕분에 리안은 빈틈을 노릴 수 있었다.

전방에 선 제국군의 대열이 흐트러지자 주춤했던 민병대와 혁명군이 일제히 성벽을 넘기 시작했다. 제국군이 다시 포로들을 수습해 꿇리려 했지만, 적군과 아군, 포로가 뒤섞여 전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포로들은 두 손이 결박된 터라 쉬이 도주할 수 없었다. 기회를 틈탄 투산 라빈스키가 클로에 딜레앙과 도망치려 했으나 얽혀 버린 전선 속에 넘어질 수밖에 없었다.

두두두─

혁명군의 총격이 다시 시작되었다.

“엎드려!”

충격에 넘어진 클로에를 감싸며 투산이 외쳤다.

“투산! 거기 가만있어! 이쪽으로 오면 안 돼!”

어머니가 포로수용소로 끌려갈 때, 자신은 엎어진 채 아무것도 하지 못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날아드는 총격에 바닥의 모래가 사방으로 튀었다. 어떻게든 중심을 잡고 일어난 소년은 이제 여동생과 다름없게 된 소녀를 필사적으로 일으켜 세웠다.

‘나 때문이야.’

어떻게든 클로에는 두고 와야 했는데…. 저보다도 어리고 여린 소녀는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겁에 질려 울기만 했다.

“정신 차려!”

“흐윽….”

비명인지 흐느낌인지 모를 소리가 작은 입에서 계속해서 새어 나왔다.

멀찍이 의무대 차량이 보였다. 저기 타는 것만이 살길이라 본능적으로 생각한 투산은 묶인 양팔로 클로에의 어깨를 밀며 어떻게든 앞으로 나아갔다.

그때, 갑자기 온몸이 무언가에 압도된 듯 꼼짝할 수도 없이 얼어붙었다.

아마도 그것은 짧은 인생에서 본 그 무엇보다 끔찍하고 공포스러운 것이었다.

대비할 틈도 없이 날아든 폭격은 현존하는 모든 마법 중 가장 빠르고, 강하고, 무자비했다. 그 짧고 강력한 공격의 근원이 누구인지는, 직감으로 알 수 있었다.

눈앞의 목적지였던 의무대 차량은 그사이 흔적도 없이 부서져 불타올랐다.

바로 직전 뒤통수에 총구가 겨냥돼 있었다. 죽을 뻔하다 누군가의 도움으로 간신히 살아났는데, 그때의 공포심과 절박함조차도 지금에 비할 것이 전혀 되지 못했다.

그 정도로 압도하는 기운이 온몸을 휘감고 놓아주지 않았다.

폭격은 단발로 끝나지 않았다. 정신을 되찾을 새도 없이 계속해 쏟아졌다. 사람들이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죽어 나가는 모습이 실시간으로 보였다.

“보호막을, 어서!”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된 전장, 어디선가 누군가 절박하게 외쳤지만 그 목소리의 주인마저 폭격에 휩쓸려 사그라졌다.

그리고 소년은, 마침내 자신과 클로에 위에서도 타오르다 못해 하얗게 보이는 불덩이 하나가 빠른 속도로 낙하하고 있음을 알았다.

“…아.”

끝이다.

최후를 예감한 정신이 갈무리되기도 전에 소년과 소녀는 뜬눈으로 의식을 잃을 것만 같았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할 만큼 얼어붙은 채 죽음을 기다리는 것밖에는 무엇도 할 수 없었다.

쾅─

고막을 찢을 듯 맹렬한 폭발음과 함께, 딛고 선 땅이 흔들렸다. 부서진 성벽의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순식간에 시야가 뒤집히고, 균형을 잡지 못한 몸이 나뒹굴었다.

소년이 흔들리는 머리를 쥐고 상체를 일으킨 때였다. 아이는 자신이 보고 있는 광경을 믿을 수 없었다.

바닥을 짚은 손바닥에 흠뻑 묻은 피는 제 것이 아니었다.

완전히 현실 감각이 달아났다.

“흐으… 흑… 윽….”

서럽게 우는 클로에를 안고 있는 누군가가 있었다.

지옥도 같은 전장 한편, 한 팔로 아이를 안은 갈색 머리 청년은 초면이 아니었다.

털썩, 몸을 일으키려던 투산은 다리에 힘이 풀려 다시 고꾸라져 버렸다. 딜레앙 백작, 아니, 리안의 붉은 피가 바짓가랑이를 축축하게 적셨다.

그의 오른팔은 폭격에 희생돼 어디론가 잘려 날아간 채였다.

“클로에는 꼭 강한 어른이 되어서, 백작님을 지켜 줄 거야!”

소녀의 흐느낌은 어느새 처절한 울부짖음이 되어 있었다.

*  *  *

하늘에서는 다시 한번 뜨거운 불덩이가 쏟아져 내렸다.

손짓 한 번으로 이토록이나 쉽게, 연이어 마법을 운용할 수 있는 자는 이 제국에 오직 한 명뿐이었다. 폭군 자비에르 베르딘은 모든 것을 잿더미로 만든 뒤에나 파괴를 멈출 것이었다.

바로 그때, 잔인한 공격에 또 한 번 희생되려는 대지 위로 누군가의 보호막이 넓게 펼쳐졌다.

보호막은 끊임없이 퍼부어지는 절대자의 공격을 계속해 막아 냈다.

이토록 강한 힘에 맞서는 존재가 누구인지 알 수 없던 때, 마침내 정체불명의 대항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고급스러운 원단으로 제작된 녹색 로브를 걷고 얼굴을 드러낸 자를 발견하고는 모두가 놀랐다.

녹음이 감도는 세피아빛 머리칼을 길게 내려뜨린 여인은 전 황후 아이다의 외모를 쏙 빼닮아 있었다.

그녀를 바라보는 아멜리아의 눈빛이 물결처럼 흔들렸다.

“형이나 아버지가 괴롭게 하거든 나한테 말해. 난 누구보다 네 행복을 비는 사람이니까.”

“거짓말. 그건 자넷 언니일걸?”

“언니가 많이 사랑하는 거 알지, 멜리? 어머니가 달라도, 우린 영원한 자매야.”

제국의 3황녀이자 속국 발테온의 왕세자비, 자넷 베르딘이었다.

승냥이 같은 간신들의 입김으로 팔려 가듯 발테온에 보내지면서도 자넷 베르딘은 싫은 소리 한번 하지 않았다.

자신이 아버지의 명을 거부하고 희생하지 않으면 그 의무는 반드시 리안이나 아멜리아에게로 돌아갈 것이기에.

본디 맑고 순한 천성이 지켜진 데는 1황자에게만 정신이 팔려 있던 아이다 황후 대신 그녀를 키운 유모의 덕이 컸다. 자넷은 언제나 우애 좋은 형제가 생기기를 꿈꿨다. 비록 한배에서 난 형제들은 아니었으나, 리안과 아멜리아는 고이고 썩은 황궁에 새어 들어온 작은 빛이었다.

그래서, 그 빛이 어떻게든 황궁의 그늘에 가려지지 않도록 자넷은 자기 나름의 처신을 해 왔다. 가진 마력을 다 내보이지 않고 숨긴 것도 그 일환이었다.

사실 자넷은 한 살 터울 오라비인 1황자 렉시드보다 더 큰 잠재력을 갖고 있었다. 평균적으로 여성 마법사가 남성 마법사보다 마력을 품는 그릇과 지구력이 더 강했다. 그래서 비슷한 힘을 가지고도 렉시드보다 더 많은 마력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자넷은 이를 숨겼다. 제힘을 온전히 내보이는 순간 오라비만 아끼는 어머니의 눈총을 받을 것이며, 발테온과 혼약을 맺고 망명했을 때 그쪽 왕실에서도 권력 다툼에 휘말릴 우려가 클 테니까. 또, 마력이 거의 없는 리안과 아멜리아가 더욱 비교될 터였다.

은연중 우위를 느끼고 자신을 하대한 렉시드. 3황녀의 마력 또한 별 볼 일 없으니 그녀를 정략혼에 이용해야겠다고 결정한 황제. 차라리 잘되었다며, 발테온으로 가 그들이 렉시드의 든든한 배후가 되게끔 처신하라고 충고하던 어머니.

그 모든 상황에서, 오직 라비앙 황후와 그녀의 두 자녀만이 자신을 자넷 베르딘 자체로 봐 주었다. 마력의 유무나 강약이 아닌 잣대로 판단되는 것은 무척이나 생소한 일이었지만 기분만은 좋았다. 정말 가족을 만난 듯 기뻤으니.

그렇게 자넷 베르딘은 1황자 못지않은 마력을 가지고도 숨죽여 살며 발테온의 왕태자와 진정 사랑에 빠진 듯, 이 정략혼이 사실은 연애결혼과 다름없다는 듯 꾸미며 생존했다. 마침내 동생들에게 자신의 힘이 필요할 때, 온전히 나설 수 있도록.

“아버지가 추구하는 방향은 나랑 맞지 않아. 너는 어떻게 생각해, 리안?”

어린 리안이 드문드문 불편함과 부조리를 느낀 것처럼, 아버지의 사상은 제게도 끔찍하기 짝이 없었으니까.

그렇게 자신이 숨을 죽이고 있을 때, 아멜리아가 믿을 수 없는 이야기가 담긴 서신을 보내왔다.

【리안이 돌아왔어. 곧 내전이 일어날 거야.】

서신에는 1황자의 마력 소실과 기억 상실증, 행방불명됐던 리안의 역사와 권력에 대한 아멜리아 본인의 입장이 적혀 있었다.

【하지만 만약의 경우 2황자와 4황녀가 사라지면 베르딘 제국에는 3황녀 자넷 베르딘이 필요해. 언니에게도 선택의 기회가 주어진 거야.

지금이 언니가 말한 ‘때’인 것 같아.】

그리고 모든 것을 건 멜리의 마지막 전언이 있었다.

“언젠가, 이 황궁에서 도저히 버틸 수 없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을 거야. 그때가 되면 꼭 세이지가 새겨진 인장을 붙여서 서신을 보내렴. 너라면 반드시 그 순간을 알아채겠지.”

자신이 그 말을 남기고 발테온으로 떠날 때 아멜리아의 나이는 고작 열하나였다.

자매만의 약속을 잊지 않고 지킨 여동생의 서신을 읽는 순간 자넷은 더 이상 무슨 말도 필요하지 않음을 알았다.

“비밀 사절을 준비해 줘. 믿을 수 있는 아이들로.”

자넷은 그 즉시 비밀 사절을 파견해 국경 너머 전해지지 못하도록 통제돼 있던 현 베르딘 제국의 정황을 파악했다. 그리고 4황녀 성과 내통해 모든 정보를 확인한 뒤 원정을 준비했다. 다행히 늦지 않은 듯했다.

내 말을 기억한 네가 얼마나 영리한지 넌 모를 거야.

자넷은 북받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막내를 향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러나 재회의 감명은 스산한 분위기에 가려졌다.

3황녀의 등장은 전쟁의 판도를 뒤바꾸었다. 그녀가 개입한 순간 이 싸움은 더 이상 베르딘 제국만의 내전이 아니게 되었다.

황제는 자신의 마력을 받아친 3황녀를 무감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천천히 떼는 걸음걸음에 자신이 파괴한 것들의 잔해가 밟혔다.

피와 먼지, 쌓여 있는 인간의 육체… 범속하고 지저분한 탄피들.

고고한 하늘의 ‘질서’로써 파괴된 ‘무질서’를 바라보는 황제의 눈에는 어떤 가치와 감정도 들어 있지 않았다.

폭격으로 인한 먼지가 걷히고 마침내 전장이 완전히 드러났다. 피아를 구분하지 않은 폭격으로 쑥대밭이 된 전장에서도 생존한 자들은 황제의 용안 앞에 다시금 압도되어 도주했다. 손을 벌벌 떨면서도 그를 향해 총구를 겨눈 이도 있었지만, 손짓 한 번에 목이 꺾였다.

완벽한 폐허를 마주한 자비에르의 얼굴에는 비로소 경멸밖에 남지 않았다.

해가 지기 시작했다. 붉게 타오르는 태양이 지평선에 걸쳐지며 노을이 내려앉았다.

저 멀찍이, 제국군의 주검이 산처럼 쌓인 곳.

그곳을 밟고 올라서는 청년 하나가 있었다.

잘려 버린 팔에서 흐르는 붉은 피가 걸음마다 흔적을 남기듯 떨어졌다. 피는 시신들 사이로 흘러내려 땅으로 스며들었다.

역광을 맞은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다만 고목처럼 짙은 갈색 머리가 태양 빛 아래 선명히 반짝였다. 그 머리카락은 서서히 밝아지다 곧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그는 들고 있던 총을 고쳐 쥐고, 방관하듯 전장 가운데 선 폭군을 내려다보았다.

언제나 근본 없는 색이라며 천대받던, 눈부시게 빛나는 금발. 그럼에도 품위를 숨길 수 없는 고고한 녹색 눈동자.

“역시 너였구나.”

황제는 듣는 이 없이 읊조리며 노을 아래 드디어 존재를 드러낸 2황자를 바라보았다.

“내 모를 리가 없지 않느냐.”

제국의 잃어버린 태양, 혁명군의 수장 리안 베르딘이 더할 수 없이 차가운 얼굴로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2황자도, 3황녀도, 4황녀도… 그리고 어쩌면 이 모든 것의 배후일지도 모르는 전 황비 라비앙까지.

도대체가, 죽은 황후와 1황자를 제외한 모든 것이 거짓투성이였다.

황제는 아비의 일을 그르칠 작정으로 뭉친 자식들을 어찌해야 할지 판가름했다. 판단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는 다시 몸 안의 마력을 끌어모았다.

방해하는 것은 혈육이든 충신이든 상관없었으니.

모든 것을 파괴하고 재건한 세상에, 이와 같은 천박한 미래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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