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원의 불꽃은 꺼지지 않는다 (108)화 (109/116)

아무도 미동조차 할 수 없는 상황 속, 흩어지는 화약 연기만이 시간이 멈추지 않았음을 증명했다.

붙잡힌 인질들이 저마다 눈물을 흘리며 애원하는 얼굴로 혁명군을 바라보았다.

“이 비겁한…!”

앞서 나간 민병대 중 누군가가 들고 있던 피스톨을 그러쥐고 전방을 겨냥했다. 그러나 움직이는 순간, 탕─ 2열의 인질들이 총을 맞고 쓰러졌다.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총격에 손쓸 틈도 없이 포로들이 희생되었다. 분한 마음이 눈물이 되어 몇몇 혁명군의 두 눈에서 흘러내렸다. 아무리 지켜야 할 것을 내려 두고 온 자로만 꾸린 집단이라 해도, 학살과도 다름없는 현장에서 아무렇지 않을 수는 없었다.

심지어 민간인 포로 중에는 힘이 없어 저항하지 못한 어린아이와 노인마저 포함돼 있었다.

“어떡하죠?”

혁명군에게 마지막 선택의 시간이 찾아왔다.

“계획대로 간다.”

아니타 리젤의 말에 아놀드 막시무스가 대답했다. 리젤의 표정이 썩 좋지 않았다. 생각 없이 명령을 수행하기 어려웠다.

“다른 방법은….”

“약속대로 진입로를 만들지 못하면 리안이 곤란해져.”

여기까지 이루어 내기 위해 스물두 번의 기회가 필요했다. 대의를 위해서라면 그보다 작은 희생은 감수하는 결단이 필요했다.

리안이 아놀드 막시무스를 제1간부로 임명하고 전술 사령부를 맡긴 이유는, 어떤 상황에서도 무엇이 최선인지 아는 냉철한 그가 혁명군의 이상과 대의를 실현하기에 가장 부합하는 인물이기 때문이었다.

아놀드 막시무스는 명령을 번복하지 않았다. 명에 따라 리젤이 곧 전 수송대에 수신호를 보내자, 냉각을 마친 혁명군의 신무기가 다시 정면을 겨냥하며 격발을 준비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제국군이 3열 포로들의 머리에 총구를 가져다 대었다.

그때 어디선가 비명처럼 울부짖는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두 눈을 꾹 감고 처절하게 흐느끼는 아이는, 4열의 끄트머리에 선 클로에였다.

클로에의 바로 앞 3열에는 고개를 수그린 투산 라빈스키가 무릎 꿇린 채 죽음의 문턱을 밟고 서 있었다.

처절하게 흐느끼는 소녀의 울음소리에 모두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클로에…?”

멀찍이서 총구를 겨냥하고 있던 다이앤 록산느 원장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째서….”

얌전히 딜레앙 저택에서 보호받고 있어야 할 아이들이 어째서 포로 행렬에 끼어 있을까. 심지어 조만간 처형될 순서였다. 다이앤은 눈앞이 새하얘졌다.

행동은 생각보다 앞섰다. 다이앤은 더 볼 것도 없이 민병대를 헤치며 앞으로 나아갔다.

“안 돼… 클로에!”

성벽 진입을 준비하다 포로를 맞닥뜨린 리안 역시 클로에와 투산을 발견했다. 다이앤이 성벽을 넘어서려 하고 있었다. 성벽을 지나는 순간 사살될 것이 자명했다.

심지어 상황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혁명군들이 성벽 너머로 신무기를 겨냥한 채 폭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대로면 다이앤 록산느는 온몸에 구멍이 나 시신조차 무사하지 못할 터였다. 그뿐 아니라 3열 포로 행렬에 있는 투산 또한 즉시 사살될 것이었다.

리안 역시 완전한 판단을 내리기도 전에 몸을 움직였다. 가장 먼저 성벽을 넘으려는 다이앤 록산느를 저지했다.

“아이들이…!”

다이앤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며 성벽 너머를 가리키고는 울부짖었다.

“나도 봤습니다. 물러나 있어요.”

리안은 자신에게 다시 한번 선택의 순간이 도래했음을 알았다.

분명 이번 우주에서도 언젠가는 소중한 사람으로 인해 위기에 빠질지 모른다고.

누군가를 버리지 않아도 되는 혁명을 이루기 위해, 언제나 제 뒷모습만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작은 아이를 위해 더 강해져야 한다고.

분명 그렇게 예감하고 생각했었는데. 막상 정말로 선택의 순간이 다가오자 머릿속이 하얗게 비워졌다.

일촉즉발의 상황, 당장 결정을 내리지 않으면… 정말 잃고 말 것이다.

내게 삶과 죽음에 대한 감정을 일깨워준 존재. 리안 베르딘에게 ‘희망’을 상징하는 존재를.

지금 이 상황은 옳지 않았다. 명백히 그것 하나만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은 언제나 옳지 않은 것에 대항해 왔다. 마치 태생의 이유가 그것이라는 듯.

죄 없는 자의 목숨, 아직 올바른 미래를 만나지도 못한 아이들의 목숨이 방아쇠 한 번에 사그라드는 현실.

너무나 옳지 않아서, 더는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결정을 내린 순간 리안은 자신을 둘러싼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것만 같았다.

‘리안!’

어디선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도 들리는 듯했다.

총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힘껏 잡은 총신의 감각이 무척이나 선명하게 전해졌다.

아, 어차피 풍전등화처럼 삭아 버린 영혼. 지금 이곳에서 기꺼이 불태워질 영혼이 있다면 제 것이리라.

“제발 날 위해 무사해요. 내 곁에 머물러요. 그리고 계속 살아 있어 줘요.”

“이제는 명확히 알겠어요. 망가지고 엉망이 된 미래여도 좋아. 당신과 함께면 그조차 아름다울 테니.”

제이디, 미안합니다. 미안해요….

마침내 리안이 성벽을 넘는 순간이었다. 3열의 포로들을 향해 있던 제국군의 총구가 일제히, 먼지투성이가 된 채 피를 흘리며 돌진하는 갈색 머리 청년에게 향했다.

그때였다.

치익─

어디선가 희뿌연 연기가 피어나 사방을 물들였다. 제국군 진영이었다.

연막은 화약 연기보다 짙고 어두웠다. 빠르게 퍼진 회색빛 연무에 제국군의 시야가 가려졌다.

탕─….

의미 없이 쏘아진 총알은 표적을 빗맞혔다. 갈색 머리 청년은 운무 속으로 사라졌다.

제국군 대열은 일제히 연기의 근원이 된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자신들과 같은 검은색 제복을 입은 누군가가 서 있었다.

찰나의 순간 흩어진 연기 사이로 보인 것은, 마치 폭군의 것처럼 번뜩이는 붉은 눈동자였다. 전방을 노려보며 서 있던 정체불명의 인영은 곧 자취를 감췄다.

순식간에 사라진 자는 다시 빠르게 모습을 드러냈다.

“으아악─!”

그리고 누군가의 비명이 연이었다. 빠른 움직임에 군모가 벗겨지고, 운무 사이로 선명한 붉은 머리가 드러났다.

“혁명군이다!”

붉은 머리의 혁명군은 마치 살인귀처럼 제국군 진영 한복판에서 적을 도륙하며 날뛰었다. 흩날리는 머리카락의 궤적이 마치 ‘붉은 기’를 연상시켰다.

“살생을 위해 살아가는구나. 안개 속에선 짙은 피비린내도 가려지지.”

날카로운 단검으로 적의 급소를 찌르며 나아갈수록 튀는 피로 전신이 붉게 물들어 갔다. 단 하나, 새까만 제복만이 핏물이 튀어도 티 한 점 나지 않았다.

“나는 당신의 본성을 거부하지 않아. 당신은 그저 자신답게 살아갈 곳이 필요할 뿐. 우리 모두가 그렇듯이.”

마침내 흩어지는 연기 사이, 붉은 머리 로제타의 칼끝에는 생혈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그렇지만 궁금하기도 해. 당신은 어째서 이토록 많은 화를 가슴에 품고 사는지.”

먼 옛날, 일찍이 부모에게 버려진 자신이 2황자 성 기사단에 소속되어 있을 때의 이야기였다.

안개가 짙게 낀 새벽, 가족처럼 믿고 따르던 행정관이 자신을 겁탈하려 하자 무자비하게 찔러 죽인 것이 살생의 시작이었다. 이후 조금의 타락도 용납하지 않고 암살을 이어 가던 제게 소년 리안 베르딘은 모든 범행을 알고 있었다는 듯 말했다.

그는 자신의 죗값을 보류해 주었고, 몇 년 후 장성한 청년이 되어 다시 찾아와 혁명군을 위해 일할 것을 명했다.

처음에는 숭고한 척 점잔을 빼는 그 모습이 싫었다. 황족의 타락은 제게 살생의 당위에 지나지 않음을 알면서, 마치 자비를 베푼다는 듯이 구는 태도가 황족 특유의 거만함과 다르지 않아 거북했다.

그가 황족에게 반기를 드는 혁명군을 조직했다고 해서 그것이 자신을 멋대로 부릴 명분은 되지 못했다. 그런데 왜일까. 결국은 함께하게 될 것을 확신하는 그의 태도에 감화되었나. 그도 아니면 그의 눈에서 자신과 닮은 슬픔을 봤던가.

동방에서 넘어온 최고급 과자 같은 거, 사실 내겐 아무짝에도 매력 없는 조건이었어. 버려지지 않는다는 것. 배신하지 않는다는 것. 내가 무너뜨리고 싶은 악에 온몸을 내던져 맞선다는 것. 그게 어떤 느낌인지 궁금했을 뿐이야.

‘사실 내 명분은 리안의 생각과 조금 다를지도요. 상황을 바꾸지 못한다는 분노가 자기혐오로 이어진 거야. 죽음을 불사한다는 건 그런 거라고 생각해.’

리안은 알았을까. 결국 이렇게 될 운명을. 미래를. 나의 죽음을.

로제타는 위장을 위해 입었던 제국군 제복을 벗고 단검을 고쳐 쥐었다.

‘삶에 대한 욕구를 포기한 자만이 인간 병기가 될 수 있는 거라고.’

선혈이 묻은 얼굴을 손등으로 슥 닦아 내고, 형형한 눈동자를 치켜떴다.

‘그러니 지킬 게 남은 당신은 살아남아. 그 길 하나는 만들어 주고 떠날 테니.’

그리고,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다시 적진으로 몸을 내던졌다. 미뤄 왔던 죗값을 치를 때였다.

【제국력 832년 5월, 로제타 아로헨 전사】

남겨진 주검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이 훼손된 채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