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실의 베라눔-Ⅵ제 살포 일자는 4월 28일. 혁명군이 선전 포고를 한 결전의 날과 같았다.
혁명군은 황제의 ‘화원’을 폭파한 즉시 전 제국에 역병 치료제 배포를 시작했다.
두 차례의 평화 시위, 그리고 학살과 다름없는 일이 자행된 학생군 자유 행진을 거쳐 몇백 명의 제국민을 실험체로 삼아 진행하던 비밀 연구까지. 이 모든 사건의 진실과 증거가 각 혁명군 지부의 손으로 온 대륙에 전해졌지만, 제국민은 선뜻 혁명군의 역병 치료제를 믿지 않았다.
계급을 가리지 않고 전 제국민을 학살하기 위해 만든 생화학 무기.
너무나 비현실적이기에 오히려 가짜 같을 만큼 잔인한 이야기였다. 여전히 베르딘 황실을 향한 충성심이 강한 몇몇 귀족가는 황실에 그런 짓을 할 당위가 어디 있으며, 설령 진짜라 한들 왜 몇백 년의 세월 몸 바쳐 충성한 귀족가까지 몰살하려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제국민을 속여 이익을 꾀하려는 이단의 산물】
【‘마녀’가 지배한 혁명군… 악마의 물약으로 집단 세뇌 목적】
일부에서는 역병 치료제를 의심하고 모함하는 조잡한 선전물이 뿌려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 의혹은 곧 자취를 감출 수밖에 없었다.
황성 록펠라 광장.
황실은 예정대로 4월 28일, 베라눔-Ⅵ제 살포를 시작했다. 본래라면 ‘역병’을 가장해 제국 최남단부터 시작되었을 작전이나, 중앙 장벽을 점령한 혁명군이 남부로 향하는 관문을 철저히 통제하는 터라 실패했다. 제이디 헤이스터가 빼돌린 보고서가 선전물이 되어 온 제국에 퍼진 것도 막대한 피해였다.
자비에르 베르딘은 더 이상 눈에 보이는 것이 없었고, 오직 지배와 정복만을 욕망하며 모두가 제 앞에 무릎을 꿇기를 바랐다. 그 쉽고 당연한 일에 왜 이다지도 방해꾼이 많은지, 타오르는 분노를 억누를 길이 없었다.
결국 황성에 살포된 생화학 무기는 삽시간에 모두의 일상을 망가뜨렸다. 제국민은 혁명군의 치료제를 맞지 않은 자들이 정말 시름시름 앓다 죽어 나가자 그제야 끔찍한 내전이 시작되었음을 실감했다.
내전 발발 사흘째에 접어들어 사망자가 우후죽순 쏟아질 무렵, 제국군의 황성 침략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귀족, 평민 할 것 없이 앞다투어 치료제를 맞고, 집집마다 무기를 집어 들고 생존을 향한 몸부림을 시작했다. 혁명군은 최대한 대피 체계를 마련하고 각 지방으로 향하는 길목을 막아서며 제국군과 대치했다. 내전의 피해를 최대한 황성 안으로 좁히려는 전략이었다.
광장 시장 거리로 파견된 제국군은 상점을 파헤치며 숨어 있던 상인들을 끄집어냈다. 일반 제국민을 포로로 삼아 혁명군을 굴복시킬 작전이었다.
그러던 중, 시장 중심가에 있는 발렌틴 여관에서 포로들을 탈출시켜 숨겨 준다는 제보가 들어왔다. 그곳은 록펠라 광장을 찾은 방방곡곡의 여행자가 주로 머무는 여관이었기에 한눈에도 돋보이고 규모가 큰 곳이었다.
검은 군인들이 여관 정문을 거칠게 열어젖히고 밀려들었다. 그러나 마룻바닥에 군홧발을 우수수 찍기도 전에 일제히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여관 주인 사샤 발렌틴을 비롯, 오랫동안 일꾼이자 식구로서 발렌틴 여관을 지켜 온 부녀자들이 일제히 혁명군의 신식 총기를 들고 그들을 겨누고 있었다.
1층뿐만이 아니었다. 2, 3층까지 이어진 여관 곳곳의 난간 사이로 튀어나온 총구가 제국군을 향해 있었다.
“나가. 여긴 우리 모두의 터전이다. 당신네들이 함부로 훼손할 곳이 아니야.”
사샤 발렌틴.
여관을 찾은 방랑객을 언제나 푸근한 풍채로 따스히 맞아 주는 그녀는 오랜 시간 혁명군의 대모로서 활동해 온 간부이자, 무기 개발에 일조한 기술자였다.
그녀가 두 눈을 번뜩이며 제국군을 위협했다. 제국군은 잠시 주춤했지만, 물러서지 않고 부녀자들에게 맞서 총구를 들어 올렸다. 하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발포!”
탕─ 탕, 탕─
사샤 발렌틴 산하, 때 묻은 앞치마를 두른 부녀자들이 일제히 방아쇠를 당겼다. 일사불란하게 재장전을 마치고 다시 한번 제국군을 겨누었지만, 두 번째 발포는 필요하지도 않았다.
사방에서 날아든 포격을 맞은 검은 군인들이 피 웅덩이를 만들며 쓰러져 있었다.
시뻘건 피로 더러워진 여관 바닥을 본 여인 하나가 총을 내리며 어깨를 으쓱했다.
“바닥 닦는 건 일도 아니거든.”
한편 광장 동부, 오필리아 거리.
학생군 자유 행진의 아픔이 여전히 짙게 스며 있는 거리 곳곳. 상처가 아물 새도 없이 다시 한번 싸움이 시작되었다.
마법 상점과 고서적을 파는 서점이 즐비한 오필리아 거리는 유서가 깊은 만큼 옛 시절 건축 양식을 따른 건물이 많았다. 골목과 골목 사이가 좁고 어지러워 초행자에게 불친절했으며, 고대 문자에 빠삭하거나 토박이가 아닌 이상 해석할 수 없는 표지판이 난무했다.
뾰족하고 기울어진 지붕 위. 어린 소년, 소녀들이 꼬질한 얼굴을 빼꼼 드러낸 채 아래 길목을 주시했다.
“우와, 온통 까매…. 무서워….”
“저기 봐, 유만 아저씨가 붙잡혔어!”
“아저씨 어떡해…!”
“쉿. 조용.”
어수선하게 속닥거리는 아이들을 투산 라빈스키가 진정시켰다.
“온다.”
제국군의 오필리아 거리 습격이 시작되자 투산 라빈스키는 놀이터를 빼앗긴 아이들을 건물의 지붕 위로 피신시켰다.
시장가에서 생선 장사를 하던 어머니를 대신해 자신을 돌봐 준 사람은 록펠라 광장의 상인과 집시 노인들이었다. 태어나 세상을 인지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거리 곳곳을 뛰어다니며 세상 물정을 배우고 지도에는 없는 지저분한 뒷골목 지리를 익혔다.
누군가는 손가락질할지언정, 길거리는 투산 라빈스키의 고향이자 삶의 터전, 배움의 장이었다. 그러니 부모와 다름없는 상인들을 해치는 것을 순순히 두고 볼 수 없었다.
“숙여!”
오필리아 거리의 터줏대감 유만이 붙잡혀 우왕좌왕하던 아이들이 소년 대장의 명령에 일제히 몸을 납작하게 숙였다.
틱, 직접 만든 엉성한 연막탄의 안전 고리를 앞니로 뜯어낸 투산이 기회를 틈타 골목 사이로 연막을 터뜨렸다.
콜록콜록, 여기저기서 기침하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지금이야.”
어느 여자아이 하나가 지붕 위에서 신중하게 총을 조준했다.
“숨을 들이쉬면 시간이 멈춘 것처럼 가슴을 움직이지 말아요. 아무리 반동을 줄여도 여러분에게는 버거울 수 있어요. 그러니 조준은 반동을 대비해 표적의 조금 아래로. 방아쇠를 당김과 동시에, 숨을 내쉽니다.”
소녀는 머릿속으로 다이앤 록산느 원장의 가르침을 끊임없이 되뇌었다. 최대한 집중하며 두 손으로 검은 군화를 조준한 아이가 마침내 방아쇠를 당겼다. 총알은 정확히 유만을 끌고 가는 군인의 종아리를 맞혔다.
투산을 따라 딜레앙 저택을 도망쳐 나온 클로에 딜레앙이었다. 반짝이는 살굿빛 눈동자에는 어느새 두려움이 아닌 용기가 맺혀 있었다.
피격 소리에 당황한 제국군 무리를 향해 지붕 위 곳곳에서 돌팔매와 연장이 날아들었다.
“아저씨!”
그 틈을 타 유만이 제국군 무리를 벗어났다. 유만 역시 어려서부터 이곳에서 자라난 터라 골목가 지리에 빠삭했다. 조악한 연막탄에 시야가 가려졌지만 몸이 기억하는 감각으로 길을 찾기는 충분했다.
몸집이 작고 날랜 아이들은 간격 좁은 지붕 위를 뛰어다니며 계속해서 연막을 뿌려 댔다. 오필리아 거리가 초행인 제국군은 골목에 갇혀 오도 가도 못한 채로 소년, 소녀의 함정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장성한 훈련병들이 한낱 주민과 어린아이들에게 쪽도 못 쓰고 쓰러지다니…. 이보다 치욕스러울 수는 없었다.
그러나 지리적 이점과 순발력을 활용한 토박이들이 우위를 점한 것도 그저 한순간이었다. 반복되는 전술은 쉽게 파악되었고, 아무리 군인을 몰아낸들 수적으로 열세일 수밖에 없었다.
오필리아 거리가 제국군에 완전히 점령되기까지는 고작 반나절로 충분했다.
붙잡힌 포로 행렬에는, 투산 라빈스키와 클로에 딜레앙도 함께였다.
* * *
광장 북부, 알테미스 거리.
혁명군은 티샤카인들의 자동차를 타고 기동력을 내세워 파도처럼 제국군 정규대를 휩쓸었다. 제아무리 마력 억제제를 바른 탄알을 쓴다고 해도, 정예군 대부분이 마력이 없는 일반인으로 이루어진 혁명군에게는 그다지 효용이 없었다.
정규대와 혁명군의 기술력과 전투력 격차는 일찌감치 벌어져 있었다. 혁명군에게 늘 문제였던 마법대 역시 쉽게 처리할 수 있었다. 황실에서 비롯된 마력 억제제를 바탕으로 개량 약물을 생산해 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장전 시간 단축을 넘어 이제는 연발까지 가능한 신무기는 그야말로 대지의 폭격 그 자체였다.
아주 발달한 기술은 마법과 다름없음을 혁명군은 증명해 내었다.
게다가, 어떻게 개발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생화학 무기 베라눔-Ⅵ제의 치료제, 심지어 황실이 일부 귀족과 황족에게만 나누어 준 예방약보다 훨씬 효능이 좋은 약까지 혁명군은 미리 생산해 놓았다.
마치 이렇게 될 미래를 미리 알았다는 듯 일찌감치 중앙 장벽을 점거하고 온 지방에 약을 배포하고 있다니.
기술력뿐만 아니라 정보력까지 더 이상은 황실이 손쓸 수 없는 수준이었다.
어떤 힘으로도 무너뜨릴 수 없었던 황궁의 성벽이 정말로 위태로워졌다.
이제 모든 의문은 한 방향으로 몰리기 시작했다.
전투, 기술, 정보. 전쟁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필요한 이 모든 준비를 가능하게 한 혁명군의 수장은 도대체 누구일까.
내전이 계속될수록 베일에 싸인 수장의 정체를 궁금해하는 목소리가 커졌다.
누군가는 혁명군 세력으로 밝혀진 경무청장 아놀드 막시무스가 유력하다고 했고, 다른 누군가는 동부 원주민을 이끌고 역병 치료제를 미리 만들어 낸 ‘마녀’ 제이디 헤이스터가 수장일 거라고 했다.
또 다른 누군가는 혁명군의 수장은 황족이리라 예상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 모든 정보와 기술을 갖출 만한 재력이 없을 터라고.
하지만 어떤 후보를 내세워도 앞뒤가 맞지 않는 점투성이였다.
마침내 추측의 방향은 국경을 넘은 곳까지 뻗어 나갔다. 모든 것은 베르딘 제국의 황좌를 빼앗으려는 속국 발테온의 소행일지도 모른다는 추측이 일파만파 퍼졌다.
1황자의 영락, 2황자의 실종, 4황녀의 배반.
이 모든 사건이 벌어질 때 어디에서도 언급되지 않았던 단 한 명의 적통이 남아 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