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원의 불꽃은 꺼지지 않는다 (105)화 (106/116)

 제이디는 리안을 떠난 이후로 텅 비었던 마음 한편이 다시 채워짐을 느꼈다. 식었던 체온도 뜨겁게 되살아났다.

“아멜리아!”

저쪽에서, 리안과 함께 티샤카 수송대를 이끌고 온 아멜리아가 다가왔다.

마침내 아멜리아를 만난 제이디는 사건의 진상을 전해 들었다. 친위대장에게 꼬리를 밟혔지만, 다행히 늦지 않게 낌새를 눈치챈 아멜리아는 즉시 리안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이에 원래 보내기로 했던 4황녀 기사단 대신 가장 기동력이 좋은 티샤카 수송대를 제1화원에 보냈다. 막강한 신무기를 싣고 온 그들의 조력 덕에 성공적인 반격이 가능했다.

단번에 친위대를 쓸어 버린 티샤카 수송대의 새롭고 막강한 화력은 계속해서 제1화원의 모든 것을 뒤엎기 시작했다.

제국군 정규대와 황실 마법사들이 뒤늦게라도 대응해 왔지만 티샤카인의 신무기를 이기진 못했다. 조악한 데다 총열이 쉽게 과열된다는 단점이 있으나 현존하는 가장 강력한 화기임은 분명했다. 훗날 ‘기관총’이라 명명될 무기였다.

역사적인 현장 한복판. 제이디는 조력하러 온 혁명군을 이끌며 황제의 ‘화원’을 해방해 나갔다.

온실에서 피어오른 불로 인해 지하에 있던 수석 연구원과 경계병은 저마다 도망치기 바빴다. 지상의 여섯 연구소까지 불이 번지지는 않았으나, 여전히 최면에 빠져 있는 연구원과 실험체도 대피해야 했다. 제이디는 가장 먼저 그들을 구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혁명군은 빠르게 움직여 그들에게 최면을 푸는 약을 주입했다. 무고한 연구원과 잔인한 실험에 희생되던 제국민이 차례차례 풀려났다. 수송차와 운송 마차에 실린 희생자들은 서로 눈물을 흘리며 ‘탈옥’과 다름없는 상황에 기뻐했다.

해가 가라앉아 어둑해진 무렵, 혁명군은 이윽고 모든 희생자를 구출하고 제1화원을 벗어났다. 펠라스 산지의 험준한 언덕을 넘던 중, 돌연 아멜리아가 차를 멈춰 세웠다.

차에서 내려선 그녀는 제이디에게 무언가를 건넸다. 물건을 받아 든 제이디는 밀려드는 그리움에 또다시 눈시울이 시큰해졌다.

“옛 생각이 나네.”

아멜리아가 내민 물건은 마법 증폭기와 마력석 꾸러미였다. 제이디는 단번에 아멜리아의 의도를 알아챘다.

“한번 해 보자. 실은 나도 마법사거든.”

아멜리아는 제1화원을 완전히 폭파할 셈이었다.

증거물을 확보하고 포로와 다름없던 제국민까지 구출했으니. 이곳을 남겨 둘 이유가 없었다.

그녀의 말대로 4황녀는 마법사 자격을 가지고 있었다. 황실에서 마력으로는 인정받지 못하니 행정관으로서의 역량을 더 키우고자 독단적으로 아카데미 행정학부에 진학했었다.

아카데미는 정적의 견제를 피해 몸을 숨기기에도 안성맞춤인 장소였다. 그러나 아멜리아에게는 학구열을 충족시킬 목적이 더 컸다. 황궁 관리의 고리타분한 교육만으로는 배울 수 없었던 다양한 분야를 배울 수 있었으니.

“화, 화, 황실 번개 마법사만큼의 위력, 위력이야…!”

특히 제이디 헤이스터, 일로이 헌트와 함께했던 졸업 시험에서의 경험은 아멜리아에게도 고무적인 사건이 되었다. 엉망진창인 일로이 헌트의 마법도 그토록 증폭시켰던 제이디 헤이스터 같은 보좌관이 있다면, 제대로 계발되지 못한 제 마력도 쓸 만해지지 않을까, 하고.

“역시 반동분자 기질이 있다니까.”

제이디는 유쾌한 기분으로 그 시절, 졸업 시험 때 했던 대로 마법 증폭기를 설치한 뒤 마력석을 장착했다. 아카데미 시절 불완전한 실험으로 만든 어설픈 특수 마력석이 아니었다. 황실 마법대에 대항하기 위해 최근 자신이 직접 만들어 혁명군에 보급한 것이었다. 이 마력석이 황실에서 만든 최고급 증폭기를 만난다면, 이깟 ‘화원’ 하나 날리는 것쯤이야 일도 아닐 터.

증폭기는 활활 불타고 있는 제1화원 중심부를 겨냥했다. 표적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증폭기 설치를 마치고, 제이디가 아멜리아와 눈짓을 주고받았다.

원드를 든 아멜리아는 정신을 집중한 뒤 가장 자신 있는 마법의 주문을 외웠다.

“솔라 이그니스 플람마.”

빠르게 뻗어 나간 빛줄기는 제이디의 증폭기를 만나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콰앙─

허공을 가르며 제1화원 부지로 향한 마법은 어둠에 물든 밤하늘을 낮처럼 밝히다 모든 것을 재로 만들기 시작했다.

오직 황족에게만 허락된 태양 마법과, 불 마법의 융합.

매우 역설적이게도 어린 시절 아버지 자비에르에게 직접 배운 마법이었다.

공격은 몇 차례 더 이어졌다. 지하에서 솟구친 불길과 4황녀와 제이디의 무자비한 마법 폭격까지 연이어 맞은 제1화원은, 형체조차 알아보지 못할 만큼 파괴되어 갔다.

【제국력 832년 4월, 황실 비밀 연구소 폭파】

언덕 위까지 열기가 느껴질 만큼 뜨겁게 타오르는 황제의 ‘화원’을 내려다보는 제이디의 눈동자에는 더할 수 없이 뜨거운 열망이 맺혔다.

이 전쟁에서 반드시 승리하리라.

반드시… 이 제국에 평화를 가져오리라, 고.

*  *  *

딜레앙 제1저택, 이크람 주둔지.

저택은 막바지 전쟁 준비로 어수선했다. 깊은 밤 횃불로 밝혀진 진지, 제이디는 동부의 스승 아스타샤의 막사에 들렀다.

이크람에서 넘어온 ‘마녀’들이 헐리, 로건과 함께 연구를 마쳐 준 덕에 황실의 마력 억제제에 대응할 완벽한 약이 완성되었다.

제이디는 오랜만에 재회한 아스타샤와 칸나를 기쁘게 맞이했다.

“아스타샤 님의 말이 맞았어요. 하늘의 힘으로 고칠 수 없는 병이 있다면, 땅으로부터 비롯되었기 때문이라는 말이요.”

아스타샤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크람의 ‘마녀’들 역시 황제의 비밀 연구소 이야기를 듣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동족을 착취하고, 심지어는 스스로 억압한 세력의 힘까지 가져다 쓰다니.

어쩌면 처음부터 그 짓을 들키지 않기 위해 ‘마녀’들을 몰아내었을지도 몰랐다.

“아스타샤 님께서는… 이 싸움에서 우리가 승리할 거라고 생각하시나요?”

답변은 곧바로 돌아오지 않았다. 제이디는 막사를 밝힌 마력구의 빛을 응시하며 가만히 대답을 기다렸다. 마침내 아스타샤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잠시 고민하던 그녀가 말했다.

“허나 나는 도무지 이 질문을 멈출 수 없구나. 이 싸움에 과연 끝이 있을까.”

“…균형은 언젠가 또다시 깨어질지도 모르죠.”

“아가. 이 세계의 역사를 이루는 근본적인 흐름이 무엇인지 아느냐. ‘균형’이란다. 그것이 하늘과 땅의 균형이든, 다른 무엇과의 균형이든…. 균형이 깨어지면 어둠이 깃들고, 우주는 그 균형을 되찾기 위해 자정 작용을 시작할 것이야.”

만약 우리의 바람대로 이 전쟁에서 혁명군이 승리한다고 해도 균형을 잃은 우주는 또다시 자정 작용을 할지도 모른다. 수레바퀴가 굴러가듯… 계속해서 돌고 도는 우주의 운명 앞에, 우리는 다시 한번 목숨을 건 투쟁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것이 이 세계를 살아가는 우리의 숙명이 아닐까, 제이디는 생각했다.

“허나 그렇대도 이 싸움을 막을 순 없지. 우리 이크람은 평화를 사랑하고 수호하는 자들이지만, 이토록 시대가 잔혹하니 어쩔 도리가 없구나. 어느 때보다 자신이 믿는 바를 지키고 따르는 것이 중요하겠지.”

“네….”

“제이디.”

아스타샤는 눌러쓰고 있던 로브를 걷고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눈동자로 제이디를 응시했다.

“네 눈에서 나는 미래를 보는구나.”

말하지 않아도 아스타샤의 격려가 온몸으로 느껴지는 듯해, 제이디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옆에서 가만 듣고만 있던 칸나도 제이디의 손등에 제 손을 올리며 온기를 나누어 주었다.

“제이디.”

그때, 리안이 제이디를 불렀다. 제이디는 두 사람과 작별 인사를 나누고 막사를 나왔다.

“리안?”

“보여 주고 싶은 게 있어요.”

그가 향한 곳은 일전, 공동 집무실을 떠나 따로 마련한 그의 개인 집무실이었다.

벽난로에 다가간 리안이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손 위에 올려놓았다. 그가 언제나 몸에 간직하는 회중시계였다. 보여 주고 싶은 게 새삼스레 회중시계는 아닐 테고. 제이디는 리안의 옆모습을 가만 지켜보다가, 이내 그의 돌발 행동에 놀라고 말았다.

리안이 아무 망설임도 없이 회중시계를 벽난로 속으로 던져 넣은 것이다.

“리안!”

놀라 저를 올려다보는 제이디를 바라보다, 리안은 다시 벽난로로 시선을 돌리며 빙그레 미소 지었다.

“시계를 버리면 어떡해요!”

제이디는 여전히 리안의 의중을 알 수 없어서 혼란스러웠다. 저 시계가 어떤 시계인데…. 고민하다, 결국 집게를 들어 회중시계를 다시 꺼내려고 했다. 그런 제이디를 리안이 부드럽게 만류했다.

제이디의 왼손을 붙잡은 리안은 독극물 때문에 남은 흉터를 안쓰럽게 내려다보았다. 그러고는 가느다란 손목에 자리한 상앗빛 손목시계를 엄지로 쓰다듬었다. 다 닳아 해졌는데도 여전히 자리를 차지한 손목시계를 물끄러미 바라보는데, 그 눈빛이 조금 슬퍼 보였다.

제이디는 그제야 리안에게 어떠한 의도가 있음을 깨달았다.

“말뿐인 맹세는 하고 싶지 않아서.”

리안이 말했다.

“내게 또 다른 우주는 없다고 결정했어. 스물세 번째 우주는 이제 필요 없습니다.”

“…….”

“언젠가 내게도 슬픔이 있냐고 물었던 적 있었죠.”

【백작님에게도 슬픔이 있나요?】

【감당하기 전에 희미해진 슬픔은 남아 있습니다. 굳이 슬픔뿐만이 아닙니다. 실재한 순간에 제대로 마주하지 못해 처리를 미뤄 버린 감정은 덧없이 딱딱해지더군요.】

【어려운 이야기네요.】

【나는 나의 수혜자가 순간의 희노애락을 즐기는 사람이 되었으면 합니다. ‘현재’를 충실히 살아요. 그대에겐 그럴 자격이 충분합니다.】(

“실재한 순간, 제대로 마주하지 못해 처리를 미뤄 버린 감정은 덧없이 딱딱해진다고. 제이디를 향한 내 감정이 그렇게 되는 걸 두고 보긴 싫습니다.”

“…….”

“그래서 나도 ‘현재’를 충실히 사는 사람이 되려고 합니다. 더는 미래에 연연하지 않고… 당신이랑 온전히 남은 시간을 누리고 싶어. 그게, 회중시계가 필요 없는 이유입니다.”

맞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의 온기가 뜨겁게 전해졌다.

“불확실한 내일의 확실한 어제에 서서, 모든 지나온 우주를 생각해 봤습니다. 이제는 명확히 알겠어요.”

리안이 제이디를 내려다보았다.

“망가지고 엉망이 된 미래여도 좋아. 당신과 함께면 그조차 아름다울 테니. 그러니 나를 따라 미래로 가요. 망가진 찬란한 첫 번째의 내일로.”

최초의 미래. 스물두 번째 우주의 시간 대부분은 ‘최초의 미래’이자 ‘첫 번째의 내일’이었다. 회중시계를 가지고 난 뒤부터 리안은 미래의 모든 변수를 따지고 바꾸고 감당하는 것에 매몰되어 왔다. 하지만 이제 다시는 시간을 돌아 살지 않기로 결정했다. 미래를 생각하기보다 현재의 순간에만 존재하며 운명에 순응할 것이다.

제이디는 리안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리안이 스물두 번째 우주의 제이디 헤이스터를 잃고 싶지 않은 것처럼, 제이디 또한 스물두 번째 우주의 리안 베르딘을 잃고 싶지 않았기에.

제이디는 대답 대신 그에게 다가섰다. 그리고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그의 뺨을 붙잡고 입술을 겹쳤다. 파도처럼 밀려드는 격정에 두 사람은 마음껏 휩쓸렸다. 제이디의 얼굴을 감싸 쥔 리안의 손을 타고, 눈물 한 줄기가 흘렀다.

이 순간이 영원하기를 간절히 바랐다. 이토록 바랄 수 없을 만큼, 너무 간절해서 온몸이 타 버릴 만큼.

마침내 입술이 떨어지고, 제이디가 말했다.

“당신과 나의 ‘오늘’을 잊지 말아요.”

이번에는 리안이 먼저 제이디에게 다가갔다. 제이디는 마치 서로의 영혼이 온전히 이어지는 듯했다. 온기를 품다 못해 타오를 듯 뜨거운 감각이 두 사람의 밤을 물들였다.

*  *  *

재회한 리안과 제이디는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그간 있었던 모든 일을 공유했다.

제이디는 ‘화원’에서 보고 들었던 일,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증명할 보고서를 혁명군에 전했다. 자료는 혁명군의 최종 결전을 알리는 최후의 선전물이 되어 온 제국에 흩뿌려졌다.

【잔혹한 생체 실험이 자행된 비밀 연구소 ‘화원’의 정체】

【무고한 마법사와 제국민을 이용한 수명 연장 연구 …】

【생화학 무기 ‘베라눔-Ⅵ제’ 살포 계획서 입수】

【치명률 10할의 역병 … 신의 정의는 존재하지 않았다】

비밀 연구소 폭파 소식은 빠르게 황궁에 전해졌지만, 이미 4황녀는 도주한 뒤였으니.

4황녀 아멜리아 베르딘이 제국 최고의 ‘마녀’ 제이디 헤이스터와 결탁해 비밀 연구소를 터뜨린 이 사건을 계기로 자비에르 역시 최후의 전쟁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제국력 832년 4월 28일, 베르딘 제국 내전 발발】

스물두 번째 우주, 제국력 832년 봄.

마침내 격전의 날이 밝았다. 붉은 깃발이 다시 한번 온 제국을 물들이며 솟아올랐다. 모든 것을 건 마지막 전쟁의 서막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