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원의 불꽃은 꺼지지 않는다 (103)화 (104/116)

최면에 쓰이는 약물에 대한 자료뿐만 아니라 그토록 찾고자 했던 기이한 식물의 정보, 그리고 ‘역병’의 황실 태동설을 증명할 완벽한 증거까지.

이 모든 것을 손에 넣었다. 이제, 어떻게든 이 자료를 혁명군 선전부에 넘기는 일만 남았다.

하지만 진실을 알게 된 제이디에게는 또 다른 과제가 남아 있었다.

“벨라도나 온실로 날 안내해.”

생화학 무기 살포일은 사흘밖에 남지 않았다. 아무리 치료제가 있다지만 역병의 원천을 알아내고도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을 순 없었다.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최대한 유리한 조치를 해 놔야 했다.

보고서를 통해 확인한 바, 살상 기제는 가열하지 않은 생초에 서식하는 기생충을 이용한 방식이었다. 그러니 숙주를 불태워야 했다.

시간을 확인하니 곧 해가 질 시각이었다.

‘서둘러야 해.’

대피 무리에 섞여 있던 제이디는 길모어 해리슨을 앞장세워 벨라도나 온실로 향하는 길로 이탈했다. 다행히 어수선한 터라 눈에 띄지 않고 벗어날 수 있었다.

온실은 지하 1층보다 더 아래에 위치한 듯했다. 계단으로 이어진 또 다른 문을 열고 복도를 걷던 때였다. 온실을 지키던 한 무리의 군인이 열을 맞춰 다가오고 있었다.

제이디는 혁명군 무기를 이용한 사격술과 단검술 위주로 훈련받았기에 구식 피스톨 하나만을 가지고는 저 많은 군인을 이기지 못하리라 판단했다. 싸우게 된다면 체술뿐인데… 여럿을 상대로는 이기지 못할 것이다.

“돌아가.”

우회해서 벗어나야 했다.

왔던 길을 다시 뒤돌아 나갈 때, 이번에는 또 다른 연구원 몇몇이 길모어 해리슨을 발견하고 말을 걸었다.

“침입자 경보를 못 들으셨습니까? 얼른 벗어나셔야 합니다.”

“…….”

“해리슨 님?”

“온실에 두고 온 보고서가 있다. 얼른 비켜.”

제이디가 대신 대답했으나, 다들 처음 보는 얼굴을 경계하며 길을 내어 주지 않았다.

“수석께는 조수가 따로 없다. 넌 누구지?”

눈앞의 연구원은 총 셋. 실랑이할 시간이 없었다. 제이디는 단번에 세 사람의 급소를 노려 때려눕히고 총으로 위협했다.

“치, 침입자다!”

붙잡히기 전에 움직여 온실을 찾아내야 했다. 제이디는 소리친 연구원을 기절시키고 최면에 걸리지 않은 한 명을 붙잡아 위협하며 빠르게 움직였다.

“온실로 가.”

“당신, 목적이 뭐죠?”

총구에 떠밀려 움직이면서도 인질은 반항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는 넌? 너흰 뭘 목적해서 이런 잔인한 연구를 서슴지 않지? 왜?”

울분 섞인 물음에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마침내 벨라도나 온실에 도착한 제이디는 눈앞에 펼쳐진 청보랏빛 물결을 두고 선 채로 굳었다.

단 한 송이만으로도 기이한 감정을 느끼게 했던 그 독초가 무수히, 끝도 없이 피어 있었다. 며칠 후면 온 제국을 휩쓸어 무수히 많은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할, 악마의 초. 그랬다. 이름을 붙이자면 ‘악마의 초’라는 말이 아딜론보다 훨씬 잘 어울렸다.

제6연구소에서부터 지하 연구소, 그리고 이곳 벨라도나 온실까지.

도무지 믿을 수 없는 광경을 연이어 두 눈으로 목격한 제이디는, 이 순간 또다시 머릿속을 스치는 과거를 현재와 겹쳐 보았다.

“왜 이러는 거예요! 이거 놔요! 우리 엄마 놔 달라고요!”

“위대한 광휘의 베르딘 제국에 반기를 드는 ‘마녀’가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들은 황실을 위해 봉사하는 일꾼이다. …”

그 어디에도 자신이 사랑하던 것들이 남아 있지 않았던 어린 시절.

“이건 너무 부조리하잖아요.”

“선생님, 제발 부탁드립니다!”

“자, 잘라 주시오…! 잘라서 이 고통이 없어지는 거라면! 차라리 팔을 잘라 달라고!”

가난한 사람은 응당 팔을 잃어야만 하는 부조리한 현실에 분노했던 때.

【후원 조건은 단 하나입니다. 연구를 멈추지 말 것.】

【나는 그대와 같은 사람이 격변하는 이 시대에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하니까.】

이 썩어 버린 제국을 구제하기 위해 영혼을 깎아 시간을 돌리며 살아온 리안 베르딘을 만났던 때. 날 알아봐 주고 이끌어 주었던 그와 함께했던 여정과…

“도와…줘….”

부조리에 불복종한다는 이유로 무차별적으로 살육당한 학생군의 모습…

“너는 그 언젠가 내게 은인이라고 했지만… 내게는 네가 은인이었다.”

“날개가 찢겨서 날아오를 수 없다면, 태워서라도 세상을 밝힐 거야.”

마지막으로 그동안 잃었다가 되찾고, 새롭게 잃기도 했던 나의 모든 인연까지.

이 순간 파도처럼 자신을 스쳐 가는 과거를 온몸으로 맞으며 제이디가 느끼는 감정은 오직 하나였다.

참을 수 없을 만큼 들끓는 분노.

너무 힘들어서, 끝도 없는 상실을 겪는 마음이 너무나 많이 닳고 닳아서, 더는 눈을 뜨고 싶지 않다고, 더는 싸울 수 없을 것 같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제이디는 분노를 자양분 삼아 계속해서 일어나 달려왔다.

“당신이 날 떠나지 않겠다고 약속한 날, 당신의 가슴 안에 내가 있다는 말을 했을 때. 나는 당신의 존재를 새롭게 정의했어. 제이디 헤이스터는 리안 베르딘에게 ‘구원’이라고.”

그러니 여기까지 와서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내게 찾아온 나의 구원, 유일한 사랑인 리안 베르딘을 위해서. 그리고 아직 살아 있는 이 제국의 수많은 생명을 위해서.

꺼지지 않는 구원의 불꽃이 마음에 타오르는 것을 느끼며, 제이디는 움직였다. 플라스크 가열대에 놓인 성냥을 집어 들고 망설임 없이 불을 붙였다. 그리고 빽빽하게 줄지어 자라난 끔찍하고 역겨운 독초를 향해 던졌다.

화륵─ 작은 불씨는 삽시간에 온실에 번져 나갔다. 마치 그 어린 날, 사랑하던 자신의 숲을 불태우던 황실 마법대의 불꽃처럼.

인질은 그사이 줄행랑쳤고, 제이디는 지하실을 가득 메우기 시작한 검은 연기를 피해 온실을 탈출했다. 이제 온 힘을 다해 이곳을 빠져나가 품 안의 보고서들을 외부로 전달하는 일만 남았다.

벨라도나 온실에 침입자가 있다는 정보를 받은 경계병들은 일제히 계단을 내려오다 검게 번지는 연기에 막혀 우왕좌왕했다. 제이디는 뒤늦게 또 다른 도주로를 찾았지만 밀폐된 지하실에서 연기를 많이 마신 바람에 눈앞이 어지러웠다.

쾅─

어디선가 폭발음이 들리고, 진동이 전해졌다. 벽을 짚는 손이 파들파들 떨렸다. 제이디는 휘청이면서도 필사적으로 계단을 올랐다.

마침내 다시 제6연구소와 연결된 문이 보였다. 무거운 철문을 겨우 열어젖혔으나, 몇 걸음 가지 않아 현기증이 몰려와 넘어져 버렸다. 헛구역질을 하면서도 흩어진 보고서를 그러모으는 제이디의 모습이 누군가에게 발각되었다.

“저기다!”

눈앞이 가물거려도 보고서를 꼭 붙들고 제이디는 빠르게 달렸다. 총격이 날아들었지만,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렸다. 지하 연구소의 연구원들이 저마다 총격과 연기를 피해 비명을 지르며 도망쳤다.

“온전한 진실은 알 수 없어. 진실은 시간의 흐름을 타고 전해질수록 마모되고 변형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확실한 현재의 진실은 있어. 우월의식에 잠식된 나머지, 세계를 착취하고 훼손하는 것은 도리어 신성신자 본인들이 되었지.”

역겨우리만치 잔인하고 끔찍한 황제의 진짜 비밀을 알게 된 단 한 명의 목격자, 제이디 헤이스터는 오직 자신이 본 것을 외부에 전달하겠다는 일념 하나로 달리고 또 달렸다.

저마다의 정의와 사정으로 이 황정이 존속하기를 바라는 사람이 몇이나 남아 있든 상관없었다. 신성신이고 대지신이고, 신들의 싸움에서 누가 이기든 말든 그런 것도 아무짝에 쓸모없었다.

일말의 인간성조차 상실한 황실의 이념은 그 어떤 당위로도 비호하지 못해.

이 황정은 반드시 끝나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증거가 필요했다. 자신은 반드시 살아남아야 했다.

마침내 출구가 보였다.

탕─

곳곳에서 총소리가 울렸다. 제이디는 총격을 피해 마른 수풀로 숨어들었다. 숨이 턱까지 차올라 더는 달릴 수 없다고 온몸이 아우성쳤지만, 멈출 수 없었다.

‘화원’의 출구를 가리키는 표지는 어디에도 없었지만 제이디는 어렴풋이 방향을 알 수 있었다. 매일 최면제를 맞고 제6연구소와 숙소만 오갔던 시기, 해와 그림자의 방향을 살펴 이미 머릿속에 대강의 지도를 그려 둔 상태였다.

펠라스 산지에서 남동쪽으로 가다 보면 언젠가는 아카데미 부지에 닿을 것이다. 아무리 통제한다고 해도 자연이 알려 주는 표지를 막을 수야 없을 터.

이윽고 바퀴 자국이 여섯 갈래로 갈라지는 갈림길에 도달한 제이디는 이곳이 연구소가 나뉘는 중심지임을 깨달았다. 실시간으로 머릿속 지도를 덧그리며 제이디는 계속 달렸다.

그렇게 마침내 ‘화원’의 출구로 보이는 곳에 당도했을 때였다.

“……!”

제이디는 눈앞에 선 장정과, 그 옆에 잡힌 채 총살 위협을 받는 여인을 맞닥뜨리고 뜀박질을 멈췄다.

자카르 아르디오스가 릭시 유디아를 인질로 잡은 채 길목을 막아서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에는 부관 세이먼 레이투스를 위시한 친위대가 도열하여 제게 총구를 겨누고 있었다.

하아, 하아, 거칠게 몰아 내쉬는 제이디의 숨소리만이 쥐 죽은 듯 고요한 공간을 물들였다.

릭시가 겁에 질린 얼굴로 벌벌 떨며 제이디를 바라보았다. 내통의 꼬리가 잡혔다는 듯 작게 고개를 젓는 모습에 희망은 없었다.

여기까지가 끝일까. 이제 다 되었는데. 정말 여기서 끝나는 걸까.

“4황녀 기사단에 첩자 하나 심어 두지 않았을까.”

자카르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황제와 1황자는 4황녀를 견제하지 않았다. 4황녀 따위가 작당을 꾸미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을 만큼 그녀를 깔보았기 때문에. 하지만 자카르는 아니었다. 석연치 않은 직감으로 일찌감치 4황녀 성 기사단에 첩자를 파견해 두었다. 제대로 된 병력마저 지원받지 못해 개인 용병을 꾸리듯 기사단을 꾸린 데다 관리도 잘되지 않아 크게 어렵지도 않았다.

“폐하의 은총에 이런 식으로 보답하다니 유감이군.”

“…은총? 여기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고도 감히 그런 말을 하는 거라면 나야말로 유감이에요.”

“순순히 잡히면 재판의 기회 정도는 주겠다. 이제라도 네 재능을 황실에 바칠 것을 맹세하거라.”

철컥, 자카르가 릭시의 관자놀이에 더욱 가까이 총구를 들이밀며 위협했다.

“당장 결정하지 않으면 친우의 목숨은 없다. 선택은 네 몫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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