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사람과 반드시 싸워야 하는 순간은 제이디에게 언제나 고문과 같았다.
약물을 뿌리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묻은 독극물이 손등과 손끝에 점점이 붉은 반점을 남기기 시작했다. 쓰라림도 잊을 만큼, 제이디는 절박하게 뛰었다. 마침내 지하실 입구에 다다라 열쇠로 철제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있는 힘껏 문을 닫아 도로 잠갔다.
쾅….
닫힌 문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다.
“하아….”
제이디는 잠시 숨을 고르며 생각을 정리했다. 이제야 릭시의 함정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하지만 2주 뒤에도 연락이 없으면 명백히 개입하겠다고 아멜리아가 말하기도 했고, 릭시가 굳이 자신을 함정에 빠뜨릴 이유도 없었다.
‘혁명군도 알고 있을까.’
아무리 아멜리아가 손을 쓴다고 해도,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끊임없이 밀려드는 불안과 공포를 이겨 내며, 제이디는 다시 움직였다. 아래로 연결된 계단을 내려가니 또 하나의 철제문이 있었다. 소리가 새지 않을 만큼 아주 조심스러운 손길로 문을 열고 마침내 지하 공간에 들어섰다.
문과 문 사이 통로와는 달리 마력구로 환하게 밝혀진 넓은 공간이 펼쳐졌다. 마치 지상과는 무관한 별세계인 듯했다.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이 황성의 땅 밑에는 제국의 하층민이 오랜 시간 만들어 놓은 지하 도시가 있습니다. 오직 초대받은 자만 그 출입구를 알 수 있죠.”
언젠가 리안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가 본 적은 없지만, 그 ‘지하 도시’라는 곳도 이런 식으로 구축되었을까.
제6연구소 사람들과는 다른 복식을 한 군인과 수석 연구원이 지나다니는 것이 보였다. 서로 대화나 인사를 나누는 모습을 보니 이곳 연구원들은 최면 상태가 아닌 듯했다.
제이디는 능숙하게 기척을 숨기고 잠행을 이어 갔다. 홀로 제압하기에 무리 없어 보이는 작은 체구의 연구원을 발견하고는, 총으로 위협한 뒤 기절시켰다. 그리고 그 연구원이 입고 있던 푸른 연구복을 뺏어 입고 처음부터 이곳 사람인 양 연기하며 계속해서 나아갔다.
제이디는 곧 벽에 걸린 제1화원 전체 지도를 발견했다. 의심받을까 자세히 뜯어보지 못했지만, 스치듯 본 형태만으로도 추론할 수 있었다.
릭시가 말했듯, 이곳 지하 연구소는 제1화원 지상에 위치한 여섯 개의 연구소를 잇는 중심부이자 연결 통로였다.
【지하 연구소에 최고위 행정관이 파견되었다는 정보는 알아. 연구소장실을 찾아. 거기가 제1화원의 중심부일 거야.】
화원의 중심부에 자리한 최고 관리자. 그 ‘연구소장’이라는 자의 집무실만 찾는다면 핵심 정보가 모인 자료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자꾸만 긴장되는 마음을 어떻게든 가라앉히며 제이디는 나아갔다. 혹여나 들킬까, 로브 형식 연구복에 달린 모자를 눌러쓰고 고개를 숙였다. 이곳까지 오는 길에 그 난리를 쳐 놨으니. 아멜리아에 의한 가짜 경보가 아니라 ‘진짜’ 경보가 울리는 건 시간문제였다.
기회는 한 번뿐이라는 말이 자꾸만 머릿속에 맴돌았다.
【해가 지기 전까지는 어떻게든 증거를 구해.】
안 될 일도 되게 하겠다고 결심했었다. 고지가 눈앞이었다.
제이디는 앞서 지나가는 아무 연구원이나 붙잡고 조용히 말했다.
“소장께서 부르시던데.”
“뭐?”
“제6연구소 건으로.”
상대는 잠시 의아한 태도를 보이다 ‘소장’이라는 말에 방향을 틀었다.
“또 미하리 시즐리인가.”
“…….”
연구원이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고함량제를 써도 자꾸 의식을 차리고 난리를 피운다니. 나, 참.”
쯧, 혀를 차며, 그는 신경질적으로 방향을 바꿔 걸어 나갔다. 제이디는 조용히 입을 다물고 그를 따라갔다.
고함량제 이야기를 하는 걸 보니 상대는 최면제 제조 담당자인 듯했다.
미하리의 수척해진 모습이 아프게 뇌리를 스쳤다. 매일같이 주사약을 맞으면서도 어떻게든 해 보기 위해 노력하는 모양이었다.
‘의식을 차린다’는 말로 미루어 보아 그녀 역시 연구실 상황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괴롭고 잔인한 연구를 목격하고 얼마나 충격이 컸을까. 만약 자신이 제1화원에 오지 못했다면… 미하리는 어떻게 되었을까.
“마력 때문인가?”
증거 외로도 최대한 많은 정보를 빼내야 했다. 제이디는 말투를 차갑게 꾸미며 장단을 맞췄다. 비상시 빠르게 대처할 수 있도록 한 손은 은밀히 피스톨 손잡이에 댄 채였다.
상대는 수긍하듯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만큼 강하니 여태 추방되지 않는 거겠지만.”
“오히려 좋은 일이야. 강한 마법사일수록 뽑아낼 마력도 많을 테니. 추방하는 것보다는 문제를 개선하는 편이 낫지.”
별다른 부정은 돌아오지 않았다. 이로써 미하리가 ‘연구원’이 아닌 ‘실험체’ 신분으로 이곳에 오게 된 것이 확실시되었다.
흠, 그가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말을 이었다.
“차라리 영영 의식을 못 차리게 하는 방향도 나쁘지 않겠군. 매번 귀찮으니.”
“…….”
제이디는 치미는 역겨움을 삼키며 동조하는 척했다.
“관둬. 그러다 유용한 실험체가 잘못되면 연구에 손해야.”
“아. 확실히 그녀 덕분에 진전이 있긴 했지.”
상대는 제이디가 자연스럽게 자신을 따라옴에도 별로 개의치 않고 계속 움직였다. 당연히 제이디가 지하 연구소 소속이며, 그녀 역시 소장에게 볼일이 있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런데, 마침내 연구소장실 앞에 도착하여 문고리에 손을 대는 순간. 그가 제이디를 내려다보더니 조용히 말했다.
“신참인가? 처음 보는 얼굴인데 아는 게 많군. 그리고…”
연구원은 그제야 기이함을 느끼고 눈살을 찌푸렸다.
“오늘은 소장이 쉬는 날이잖아.”
철컥….
제이디가 연구원의 턱 밑에 은밀히 총구를 겨누며 목소리를 낮췄다.
“너같이 맹한 것이 과학자라고 설치는 꼴 정말 싫다.”
“…….”
“열어. 조용히 들어가.”
“…어떻게 잠입,”
말을 하고자 여는 입을 제이디가 총구를 치켜올려 막았다.
“자연스럽게 행동해.”
영문을 모르는 모습을 보니 지하 연구소까지는 침입자 경고가 전달되지 않은 듯했다. 그만큼 보안을 자신하는 모양이었다.
양손을 들어 올린 채 연구소장실에 함께 들어온 연구원은 두려움에 떨면서도 빈정거렸다.
“이런 짓을 하고도 무사할 것 같나? 뭘 원하는지 모르겠지만, 이미 경계군이 잠입을 알아챘을 거다.”
그때, 제이디의 눈에 아주 익숙한 금속 주사기가 보였다. 최면제 표본이었다. 망설임도 없이 주사기를 쥔 제이디가 똑같이 빈정거리며 내뱉었다.
“내가 해 봤는데, 자기 몸을 쓰는 실험도 나쁘진 않아.”
“……!”
연구원이 뒤늦게 주사약의 정체를 알아채고 반항했으나, 투약되는 속도가 훨씬 빨랐다.
제이디는 보름간 매일같이 제게 주입되던 약이 어떻게 작용하고 그 양상은 어떤지 세심하게 관찰했다.
연구원은 아무 말도, 행동도 하지 않고 가만히 허공만을 바라본 채 서 있었다. 제이디는 그의 주머니에서 연구원 신분증을 확인하고는 이름을 불렀다.
“길모어 해리슨.”
“…….”
“묻는 말에 대답해. 이곳에선 어떤 연구를 하고 있지?”
“…….”
“…너는, 어떤 연구를 하지?”
“내 연구의 목적은… 후천적 마법사 양성. 마법사의 마력을 일반인에게 옮기는 실험을 한다.”
‘화원’에서는 역시 자신이 목격한 수명 연장 실험뿐 아니라 다른 실험 역시 진행 중이었다. 마법사를 후천적으로 양성한다니….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실험일까.
제이디는 다른 질문을 던졌다.
“그럼, 여기 지하 연구소에서는?”
“벨라도나 독초의 인공 육성.”
“…‘벨라도나’?”
처음 들어 보는 식물명이었다. 하지만 그 이름을 듣는 순간, 이유를 알 순 없지만 제이디는 온몸에 끔찍한 전율이 내달리는 듯했다. 굳이 설명을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 약초에 대한 정보가 필요한데, 뭐라도 단서가 될 만한 걸 아실까요?”
“처음 봤을 때, 꼭 제게 말을 건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그 정도로 기묘했어요.”
“약초보다는 독초가 아닐까 하는데.”
“꼭 환상 속에 존재하는 것처럼 기이하구나.”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벨라도나’라는 독초가 바로, 자신이 찾고 있는 그 식물이라는 것을.
연구원은 계속해 말을 이었다.
“대규모 살생이 가능한 생화학 무기의 제조를 실험하고 연구한다.”
“목적은?”
“영원불멸의 제국.”
더 들을 것도 없었다. 제이디는 최면에 걸린 연구원을 이용해 연구소장실에 숨은 서류 보관소를 알아냈다.
그곳에는 황제의 ‘화원’에 관한 모든 자료가 보관돼 있었다.
【살생초 벨라도나의 효율적 온실 육성 …】
【벨라도나 가공식 목록
베라눔-Ⅰ제 … 실패
베라눔-Ⅱ제 … 실패
베라눔-Ⅲ제 … 실패
…
베라눔-Ⅵ제 … 성공】
【베라눔-Ⅵ제 제작 레시피】
【범위 및 살상력 시험 결과 보고서】
보고서에 첨부된 ‘벨라도나’ 그림은, 여태 제이디가 계속해서 찾고자 했던 청보랏빛 식물의 모습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쏟아져 나오는 보고서 속 ‘베라눔-Ⅵ제’의 정체는… 스물한 번째 우주에서 ‘역병’이라 불렀던, 전염병을 유발하는 물질이 틀림없었다.
‘가공한 뒤의 화학 구조식이 정확히 반대로 일치한다.’
자신이 리안의 몸을 이용해 수십 가지 약초로 실험한 끝에 만들어 낸 역병 치료제의 화학식과 대비되는 화학식이 적혀 있었다. 의심할 수가 없을 만큼 정확하게.
‘화원’. 꽃을 심은 언덕. ‘벨라도나’가 바로, 황제가 키우는 꽃이었으며.
그 꽃을 통해 만들어 낸 생물학 무기 ‘베라눔-Ⅵ제’가 곧 역병의 근원이었다.
제이디의 예측이 정확했다. 역병의 발생지는 남부도, 다른 어디도 아닌 황실이었다.
【베라눔-Ⅵ제 살포 보류 명령 …】
그리고 역병은 태동하지 않은 게 아니라, 아직 ‘살포’되지 않은 것이었다.
【변경 일자: 832년 4월 28일
장소: 록펠라 광장
대상: 반군 일체】
그 살포 일자는… 오늘로부터 정확히 일주일 뒤. 혁명군의 최종 결전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