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원의 불꽃은 꺼지지 않는다 (100)화 (101/116)

오전 9시, 제1화원 제6연구소.

운송 마차에서 내려선 제이디는 마치 단단히 간수하듯이 연구복의 왼팔 소매를 쥐었다 놓았다.

약물을 이겨 낼 방법을 궁리하던 제이디는 그나마 실현 가능성이 있는 묘수를 냈다.

약물이 주사된 뒤에도 알아볼 수 있도록, 제 팔목에 문장을 적어 두기로 한 것이다.

제이디는 자신의 습관을 잘 알았다. 플라스크 가열대 앞에서는 반드시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어 올린다거나, 왼손에 착용한 손목시계를 습관적으로 본다는 점.

입소 전 강제로 주사되는 약물의 성분을 분석하려면 채혈이 필요했다. 숙소에는 어떤 도구도 반입되지 않으니, 어떻게든 연구소에 있을 때 피를 뽑아야 했다.

의식이 잠식되었을 때 무슨 일을 하는지는 미지수지만 혹시나 알아볼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자신에게 내릴 명령을 적어 둔 것이다.

과연 이 방법이 제대로 먹힐지는 모르겠으나, 가만히 손 놓고만 있을 순 없으니.

‘들키는 순간 총살이겠지만.’

“제1화원에 매주 정기적으로 연구 물품을 운반하는 운송 차의 경로를 확인했어. 총 여섯 군데의 연구소로 향하는 갈림길에서 군인들이 물자를 직접 운반해. 어떻게든 한 놈을 매수하든, 은신해서 잠입하든 이후의 일은 네 몫이야. 2주 안으로 신호가 없으면 실패한 것으로 간주, 이후 조치를 취할게. 아마 네가 알아볼 수 있는 방식일 거야.”

이미 아멜리아와 교신하기로 약속한 기한인 2주가 지났다.

연구소 정보를 빼내기는커녕 숙소와 제6연구소를 오가는 것 외에는 옴짝달싹도 못 하는 환경이었다. 기껏해야 석식에 포함된 불투명한 음료가 주사약의 부작용을 막는 역할인 듯하다는 추측밖에 하지 못했다.

미하리부터 자신까지. 지금쯤이면 아멜리아가 두 사람 모두 연락이 없는 상황을 인지하고 조치를 취하고 있을 것이다.

혹 아멜리아가 리안에게 보고한다면, 혁명군은 확실히 문제의식을 느끼고 ‘화원’ 습격을 계획할지도 모른다. 이렇게까지 철저한 보안은 결국 황제가 그만큼 숨기고 싶은 것이 있다는 방증이니.

‘조금만 더 버티면 돼….’

제이디는 마른침을 삼키며 다시 한번 글씨가 쓰여 있는 왼쪽 팔의 소매를 꼭 쥐었다 놓았다.

오늘도 총을 든 군인들은 저마다 표정 없이 정해진 임무만을 수행했다. 조금의 오차도 없는 움직임이 섬뜩하리만치 부자연스러웠다.

제이디는 지난 2주간 반복했듯 일렬로 줄지은 연구원 사이에 섞였다. 주사는 하루도 빠짐없이 오른팔에 놓였으니, 다른 연구원도 제이디도 미리 오른팔 소매를 걷어 올렸다.

하지만 제이디는 곧 심장이 선득하게 식을 수밖에 없었다.

매일 오른쪽에 도열해 있던 군인들이, 하필 오늘은 왼쪽에 서 있었다.

‘왜….’

2주마다 방향을 바꾸는 규칙일까? 그렇지만 다른 연구원도 오른팔을 걷었다.

성급하게 계획한 나머지 변수를 간과한 듯했다.

팔에 적힌 글을 지우기에는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다. 게다가 그런 모습은 눈에 띌 테니 바로 발각될 터. 문장을 들키는 순간 수색당한 뒤 총살될 것이다.

‘자연스럽게 반대 팔을 내밀면….’

운에 맡겨 봐야 할까? 하지만 모두 정연하게 왼쪽 팔목에 주사를 맞고 있는데, 혼자만 오른팔을 내밀 순 없었다. 조금이라도 수상함이 감지되면 바로 총구가 겨냥될 것이 분명했다.

호흡이 빨라졌다. 이미 순서가 코앞이었다. 묘안은 떠오르지 않고, 긴장한 심장 박동이 머리까지 울릴 지경이었다.

마침내 차례가 오자 주사기를 든 군인이 제이디의 왼팔을 붙잡았다.

모든 게 끝났다고 생각하며 가만히 눈을 감는 순간이었다.

“멈추세요.”

릭시 유디아였다.

반쯤 걷어지던 제이디의 소매가 도로 내려왔다.

“침입자 제보입니다. 최소한의 경계병을 제외한 모든 연구소 주둔군은 제1화원 정문으로 집결하십시오. 곧 경보가 울릴 거예요.”

명을 내린 릭시가 제이디 옆에 있는 군인에게서 주사기를 받았다.

“여긴 제가 알아서 할 테니.”

군인들은 아무 대꾸도 없이 묵례한 뒤 일사불란하게 대열을 맞춰 어딘가로 향했다.

“…….”

뜻밖의 상황에 잠깐 시간을 벌었지만, 안심할 순 없었다. 릭시라고 해서 마냥 믿을 순 없었기 때문이다.

유디아 가문은 대대로 황실에 충직한 행정 가문이었다. 옛정을 생각해 넘어가 줄지도 모르지만, 재회의 순간 릭시가 보인 태도를 보아 기대하긴 어려웠다.

게다가 이런 흉흉한 시국에 ‘마녀’와 조력했다는 혐의라도 받으면 목숨을 부지할 수 없을 터였다. 릭시 유디아는 그 정도 판단도 못 할 만큼 우둔한 자가 절대 아니었다.

잠시 멈췄던 투약이 다시 시작되었다.

제이디의 왼 손목을 붙잡은 릭시 유디아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소매를 걷어 올렸다. 까만 잉크로 새겨진 문장이 대놓고 드러났다.

“…….”

그런데, 릭시는 그 문장이 보이지 않는다는 듯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했다. 그러고는 주사기를 들어 올려 약을 주입하는 시늉만 하고는 옆에 놓인 통에 던져 넣었다.

릭시는 제이디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바로 새 주사기를 들어 뒤에 선 연구원에게 향했다. 제이디는 눈치껏 약을 맞은 척 연기를 하며 연구소로 입소했다.

최소한의 경계병만 남은 채 활짝 열린 제6연구소.

뜻밖의 조력으로 마침내 맨정신으로 입소하는 데 성공한 제이디는, 앞선 연구원들의 표정과 움직임을 따라 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절대 들키면 안 돼.’

왜 갑자기 릭시 유디아가 태세를 바꿔 자신을 도와주었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정말 침입자가 있는지도 확실치 않았지만, 잠시 후 릭시가 말한 대로 경계경보가 울렸다.

연구소 밖 소란과는 일절 상관없다는 듯, 약물을 주사당한 이들은 계속해서 배치된 연구실로 걸어 나갔다. 제이디는 모든 연구원이 입소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아무도 들어가지 않은 연구실 앞에 섰다. 아마도 이곳이 자신이 배정받은 연구실인 듯했다.

터벅, 터벅…

멀찍이 복도에서 군홧발 소리가 들려왔다. 제이디는 고민할 새도 없이 바로 연구실 문을 열었다. 어떻게 얻은 기회인데, 멍청하게 일을 그르칠 순 없었다.

그렇게, 마침내 목표했던 연구소 내부까지 들어온 제이디는, 연구실 문을 열자마자 펼쳐진 광경에 충격을 금치 못했다.

“……!”

너무 놀란 나머지 다리에 힘이 풀려 닫힌 문에 기댄 채 주륵 주저앉고 말았다. 비명을 지르지 않기 위해 입을 힘껏 막은 두 손이 파들파들 떨렸다.

장밋빛 눈동자가 연구실 내부를 둘러보며 혼란스럽게 흔들렸다.

‘말도 안 돼….’

커다랗게 뜨인 두 눈에 순식간에 뜨거운 눈물이 고여 손등을 타고 흘러내렸다.

*  *  *

제6연구소 정문 앞.

릭시 유디아는 맨 끝에 선 연구원까지 투약을 마친 뒤 마지막 주사기를 힘없이 떨어뜨렸다.

지난밤, 집무실로 날아든 문서 한 묶음은 자신을 둘러싼 모든 상황을 뒤엎기에 충분했다.

문서를 봉인한 보랏빛 인장에는 4황녀 성을 상징하는 꽃 세이지가 새겨져 있었다. 밀색 종이에 밴 부드러운 향기와는 달리, 봉투 속 서신과 문서의 내용은 가히 엄중하고 불온하기 그지없었다.

【벨로라 유디아 반군 결탁 정황 …】

【수수 인사 목록

아나루시아 갈레오

마고 루덴스

살로메 엘리엇

…】

언제나 가문의 안위만을 위하며 엄격하게 자신을 통제해 온 어머니 벨로라 유디아가 친혁명 인사와 불법적으로 결탁한 증거가 빼곡히 모여 있었다.

황실 손에 직접 처단된 사업가는 물론, 황립 대학 최고위 교수와 학생군을 이끈 수장 가문 등이 줄줄이, 셀 수도 없이 많이 엮여 있었다.

가문을 등지고 혁명군에 손을 뻗은 어머니에 대한 실망감은 우선하는 문제가 아니었다. 이 문서가 황실 행정부에 넘어가는 순간 어머니의 즉결 처형은 물론 연좌제로 가문과 연계된 모든 인사의 목이 날아갈 것이었다.

그 안에는 최연소 황실 행정관으로 이곳 황제의 비밀 연구소에 파견된 자신은 물론… 어머니의 입김을 피해 발테온 왕국으로 유학길에 오른 남동생 록시까지 포함될 터.

눈앞이 깜깜해짐과 동시에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릭시는 그대로 주저앉아, 공포심에 주체할 수 없이 떨리는 손을 꼬옥 맞잡았다.

깊게 고민할 것도 없었다. 서신이 보내진 곳은 4황녀 저하의 성. 이 모든 정보를 가지고도 곧바로 소환 명령을 내리지 않고 제 쪽으로 접근했다는 것은, 4황녀가 모종의 거래를 제안한다는 뜻일 터였다.

이어지는 서신을 통해 4황녀가 제게 바라는 역할과 그 대가를 확인한 릭시는 눈물을 닦고 차분히 호흡을 정리했다.

모든 결탁이 반드시 자발적이지만은 않다는 새삼스러운 사실을 깨우치며, 릭시 유디아는 일어섰다.

“졸업까지, 문제없으리라 믿겠다.”

“잘해 주었구나. 이제 너도 가문의 짐을 나누어 질 때가 되었어.”

“부디 실망할 일 없었으면 한다.”

“설마 두려운 것이냐?”

아버지가 죽고 과부의 몸으로 어떻게든 명맥을 연명해 보려는 어머니의 모습을 한때나마 존경했던 적이 있었다.

나의 어머니이자 우상, 꿈이자 미래였던 벨로라 유디아의 실체.

이럴 거면, 결국 이렇게 될 것이었으면… 어째서 나를 ‘황실의 개’로 키웠나.

난 어머니의 반역을 가릴 방패막이이자 모든 허물을 뒤집어쓸 일개 가신일 뿐이었나?

어머니의 뜻을 따르기 위해 앞만 보며 정상을 향해 달려왔지만 결국은 또 다른 황족에게 목줄이 쥐어지는 결말을 맞이했을 뿐이다.

【명에 따른다면 전쟁이 끝난 뒤 섭섭지 않은 대우가 뒤따를 것입니다.】

그러니 릭시 유디아는 다짐했다.

애초 사랑 따위 받아 본 적 없는 삶인 데다, 어머니라는 자는 자식을 방패막이로 삼고 이용만 했다. 이깟 가문이라면 명예고, 미래고, 꿈이고, 모두 소용없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차라리 간신히 명맥만 유지하는 가문 따윈 버리고 더욱 공고한 권력의 개가 되어 생존하리라. 비록 4황녀가 어떤 목적을 가졌는지는 모르지만, 목숨이 걸린 일이니 목적 따윈 중요치 않았다.

어머니도 이런 자신을 원망할 순 없을 것이다.

‘제이디 헤이스터.’

옛 친우가 여기까지 흘러들어온 정확한 경위는 알 수 없겠으나. 내 목줄을 쥔 주인께서 그녀에게 진실을 보여 주고 탈출시킬 것을 명하였으니, 기꺼이 그렇게 해 줄 셈이다.

모든 진실을 알게 된 ‘마녀’는 과연 어떤 선택을 할까. 릭시 유디아는 굳게 닫힌 제6연구소를 응시하다 뒤돌아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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