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원의 불꽃은 꺼지지 않는다 (99)화 (100/116)

정체불명의 주사를 맞은 제이디는 잠잠해진 채 다른 연구원들과 열을 맞춰 연구실에 들어섰다.

그리고 정확히 9시간 후, 저녁이 되어 다시 한번 팔에 주사를 맞았다. 그러자 또렷한 자의식을 되찾았지만 그사이의 일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충격적인 상황이었다.

약을 맞고 제6연구소에 출입한 뒤 9시간…. 무슨 일이 있었을까.

제이디는 가장 먼저 몸을 더듬으며 다친 곳은 없는지 확인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약을 맞기 전후로 달라진 곳은 없었다. 하지만 부작용 시험도 하지 않은 알 수 없는 약을 맞은 몸이 온전히 멀쩡하리라 판단하기는 어려웠다.

다른 연구원들은 이미 너무나 익숙하다는 듯 무기력하게 통제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순간, 주체할 수 없는 분노가 울컥 치밀었다.

제이디는 연구소를 지키고 선 군인 하나를 붙잡고 따지듯 물었다.

“내가 저 안에서 무슨 일을 한 거죠?”

“…….”

“이런 법이 어디 있어요? 동료들과 학술적 논의 없이 어떻게 연구를 해요? 제발 바른대로 말해 줘요. 이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건가요?”

“…….”

아무 대답도 없이 그저 정면만 응시하는 군인의 모습은 무섭기를 넘어 기괴할 정도였다.

철컥, 다시 한번 제이디의 등에 머스킷이 겨누어졌다. 다른 연구원들은 그런 제이디를 보고도 못 본 척할 뿐이었다.

함께 나온 미하리 또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군인의 통제에 이끌려 다른 숙소로 향하는 운송 마차에 올랐다. 완전히 모습이 가려지기 전, 미하리는 제이디에게 많은 뜻이 담긴 눈빛을 보냈다.

여기선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위험해. 나도 어쩔 수 없었어. 미안해….

“…….”

도대체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황제의 ‘화원’이 이런 식으로 운영된다는 사실을 알고도… 릭시는 제게 그런 태도를 보였던 걸까.

뒤죽박죽 꼬여 가는 머릿속을 최대한 정리하며, 제이디는 이성을 잃지 않기 위해 애썼다.

그때, 함께 마차에 올라 옆자리에 앉은 한 연구원이 아주 작은 목소리로 경고하듯 일렀다.

“여기선 누구와도 대화할 수 없어. 그러니 눈에 띄는 행동은 그만둬.”

시선은 정면에 고정된 채였다.

“그쪽은,”

쉿. 그녀는 더 이상 말을 잇지 않고 입을 닫았다.

충격은 쉬이 가시지 않았다. 제이디는 숙소로 돌아와서도 한동안 제대로 된 사고를 못 했다. 꼭 몸에 맞지 않는 약물을 맞고 부작용을 겪는 것만 같았다.

배식 담당자가 숙소 안으로 저녁 식사를 배급했다. 마치 감옥처럼 각 연구원의 방으로 배급되는 식량을 보며 제이디는 다시 정신을 차렸다.

마른 호밀빵과 야채수프,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불투명한 음료.

선득한 마음이 답 없는 물음을 계속했다.

‘도대체 뭐지? 최면? 내가 무슨 약물을 맞았지?’

음식에는 손도 대지 않은 채, 제이디는 방문을 열어젖혔다. 총을 든 군인이 방과 방 사이 복도를 거닐며 경계했다. 마치 황성 계엄군의 모습을 보는 듯했다.

“…….”

숙식을 해결하는 공간마저 철저히 통제되고 있다.

이 모든 정황을 통해 제이디는 알 수 있었다.

4황녀가 더 이상의 정보를 얻을 수 없었던 이유.

미하리가 연락을 할 수 없었던 이유.

이곳은 그저 평범한 ‘연구소’가 아니었다.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아무도 알지 못하는, 자유의지로 어느 곳에도 출입할 수 없고 벗어날 수 없는, 일종의 수용소와 다름없었다.

이곳 연구원은 매일같이 알 수 없는 약물을 투여받으며, 오직 지식만을 착취당한 채 자신이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모르고 생활한다.

황제가 순순히 자신을 ‘화원’에 보내겠다고 했을 때부터 알았어야 했는데.

‘리안….’

리안에게, 혁명군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 한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모르는 이곳 ‘화원’을 해방해야 했다.

하지만 아멜리아가 다시 첩자를 심는다고 해도 이런 체계라면 연락을 내보낼 방법이 없기는 매한가지였다.

예외 행동을 하는 즉시 사살되거나 황실에 보고되는 듯하니. 우선은 복종하는 척하면서 어떻게든 연구소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아내고, 기회를 노려야 했다.

‘우선순위는… 저 주사를 맞지 않는 것.’

주사를 맞는 순간 최면에 걸리듯 모든 기억과 의지를 잃었다. 저 위험한 약물을 맞지 않는 방법 먼저 강구해야 했다.

최악의 경우 무력을 이용해서라도.

그토록 원했던 황궁 잠입에 성공했는데… 눈앞은 여전히 깜깜할 뿐이었다.

*  *  *

혁명군 간부 회의.

“중앙 장벽 공성전에서 남부 혁명군이 승리해 장벽을 점령했습니다. 서부와 동부로 향하는 성문 역시 문제없이 개방되었고요.”

최후의 혁명은 계획대로 착실히 진행 중이었다.

최종 결전을 대비하여 황실은 혁명군 세력 증진을 막기 위해 중앙 장벽을 걸어 잠갔고, 밤낮없이 황성 진입로를 차단했다.

하지만 이미 남부 쪽은 혁명군 세력이 점거한 상태였다. 뿐만 아니라 역병을 예상한 리안이 몇 년 전부터 중앙 장벽에 첩자들을 파견해 두었기에, 집결군은 미리 마련한 진입로로 쳐들어와 손쉽게 장벽을 점령했다.

혁명군과 시민 세력은 빠르게 결집하고 있고, 기술부는 이크람에서 포섭한 티샤카인들이 제작한 혁신적인 자동차를 통해 혁명군 지부 곳곳에 빠르게 무기를 운송했다.

지금껏 존재한 어떤 운송 수단보다 빠르고 편리한 자동차의 등장, 그리고 장전이 빠르고 용이한 신식 총기는 혁명군의 기술 수준을 단번에 입증했다.

이제 남은 관문은 단 하나.

여전히 태동하지 않은 ‘역병’의 출처를 알아내는 것뿐이었다.

역병의 출처가 황실일지도 모른다는 가설을 확인하기 위해 제이디 헤이스터가 황제의 비밀 연구소에 잠입한 사실이 곧 혁명군 간부들 사이에도 알려졌다.

제1간부 아놀드 막시무스가 사안을 정리했다.

“정말로 역병의 출처가 황실이라면 혁명의 당위가 더욱 마련되는 셈이겠군요. 다만 가설이 증명되지 않을 경우를 대비해 남부 경계를 넘나드는 물자와 인력은 계속해서 철저히 관리하고 감독하겠습니다.”

그는 여전히 황실 산하 경무청을 꽉 쥐고 있었다. 최종 결전의 날, 경무청으로 밀려들 제국군의 지원 요청 전보에 혼선을 일으킬 체계를 모두 갖추어 놓았다. 그때가 되면 베르딘 경무청장이 혁명군의 주요 세력이었음이 결국에는 밝혀지겠지만. 아놀드는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

한편 회의장의 끝, 아멜리아는 리안에게 현 상황을 어떻게 보고해야 할지 고민했다.

제이디가 ‘화원’에 잠입하는 것까지는 성공했지만, 그 이후 소식이 들려오지 않았다.

1황자의 영락으로 인해 국정을 돌보는 인력이 개편되며 4황녀 아멜리아 또한 여전히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제이디 덕분에 ‘화원’ 문제를 드디어 해결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거늘.

미하리 시즐리가 모종의 이유로 연락을 보내지 않는다고만 생각했는데… 오판이었다.

제이디는 분명 ‘화원’의 연구원으로 일하며 어떻게든 제게 연락을 할 사람이었다.

미하리 시즐리는 연락을 하지 않은 게 아니었다. ‘화원’ 안에서 무슨 문제가 생긴 것이 틀림없었다.

미하리나 제이디나 황제가 필요에 의해 데려간 인력이니 죽이지는 않았을 텐데. 신변에 문제가 생긴다면 곤란했다. 제이디 헤이스터는 누구보다 제게 필요한 인재였으니.

“비밀 연구소 쪽은?”

리안이 아멜리아를 향해 물었다.

대업을 앞둔 리안이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아마 결전을 미루고서라도 제이디를 구하는 데 혈안이 되겠지.

‘며칠만 더….’

대의를 위한다면, 단 며칠만이라도 더 스스로의 선에서 해 볼 수 있는 데까지 해 본 뒤 보고해도 늦지 않다. 아직 제이디와 교신을 약속한 기한인 보름이 지나지도 않았고.

“잘 있다고 해. 우선 적응하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다행이군. 미하리의 행방은 여전히 모르고?”

“발령된 연구소가 달라서 제이디도 아직은 모르는 것 같아. 천천히 안전하게 알아보고 있으니, 조금만 더 기다려 줘.”

설령 훗날 리안이 자신을 원망한다고 해도.

“큰일은 없을 거야.”

아멜리아는 싱긋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그래. 부탁할게.”

이 상황을 해결할 새로운 방법을 떠올려야 한다. 아멜리아는 머리를 굴리며 간부 회의장을 빠져나왔다.

가만히 앉아 제이디에게 기별이 오기만을 기다리기에는 여유가 없었다.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제이디를 도울 수단을 하루빨리 강구해야 했다.

아멜리아는 결국, 준비해 둔 카드를 꺼내기로 결심했다.

【릭시 유디아】

‘화원’ 인력 관리자 명단에서 그 이름을 발견하고부터, 제2의 수단으로 계획했던 일.

폭력적인 방식이라 껄끄러워도 지금으로서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반쪽짜리라도 엄연히 황족이지만 찍어 누르듯 권력을 휘두른 적은 드물었다.

언제나 논리와 당위를 갖추지 않고서는 섣불리 행동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랬던 덕분에 바람 불면 꺼져 버릴 듯 위태로웠던 지위를 가지고도 자신을 따르는 측근을 많이 만들 수 있었다.

아멜리아는 늘 아버지 자비에르와 1황자 렉시드와는 다른 인물이 되고 싶었다. 아이다 황후의 온갖 계책 속에서도 저와 리안을 키워 낸 어머니의 강인함만을 물려받고 싶었다.

하지만 리안이 돌아오고, 회중시계의 비밀을 알게 되고, 이 싸움에 끼게 되고, 황위를 향한 태도가 바뀌면서부터 상황이 달라졌다.

물러설 수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든 이루어야 하는 목적을 위해서라면, 작은 희생이 필요하기도 하다고.

때마침 좋은 구실도 마련했으니 지금이 적기였다.

“살쾡이의 수염을 건드려야겠어.”

유디아 가문의 상징, 푸른 삵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최측근 비서관이 가만 묵례했다.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저하.”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