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원의 불꽃은 꺼지지 않는다 (97)화 (98/116)

“참으로 이상한 일이구나. 목숨 아까운 줄 모르고 반군의 편에서 이단 연구를 하던 자가, 그토록 혐오해 마지않는 황실의 ‘마녀’가 되겠다며 나서는 일이.”

“…….”

“너 같은 변절자에게 신뢰를 바랄 수는 없을 터.”

“…사람은, 아주 사소한 변수로도 쉽게 변하는 존재니까요. 전 ‘마녀’로서 편히 연구하기 위해 혁명군 편에 섰지만, 이번에 폐하께서 만들어 내신 ‘신무기’의 성능에 무척이나 감탄했을 뿐입니다. 혁명군도 미처 대응하지 못한 연구를 해내셨으니. ‘마녀’인 저는 감화될 수밖에요.”

“…….”

“무릇 전시에는 속고 속이고, 빼앗고 뺏기는 변수가 이렇듯 존재하는 법입니다. 그 기회를 잡는 것은 오롯이 폐하의 몫이겠지요.”

황제는 잠시 더 가늠하듯 제이디를 내려다보더니, 이윽고 거래에 대한 답을 내놓았다.

“거래는 보류하지. 다만… 7일의 시간을 주마.”

“……!”

“그 안에 태자를 깨워 보거라. 실패한다면 ‘마녀재판’의 최고형을 뛰어넘는 벌에 처한다.”

미끼가 물렸다.

제이디는 흥분한 마음을 숨긴 채, 끝까지 일관적인 태도를 잊지 않았다.

“7일까지는 걸리지도 않을 테죠.”

“친위대장은 ‘마녀’를 태자의 성으로 데려가거라. 나머지는 황녀가 처리하도록.”

“예, 폐하.”

자비에르가 하얀 제복 망토를 휘날리며 알현실을 나섰다. 뒤따르는 친위대원의 끝, 자카르는 여전히 못마땅한 눈빛으로 차갑게 제이디를 내려다보았다.

도무지 석연치 않다. 분명 자신이 놓친 게 있을 것이다.

제이디를 향하던 눈동자는 마침내 4황녀 아멜리아에게 가닿았다. 맹금류의 눈빛처럼 매서운 시선을 받은 4황녀는, 여느 때처럼 고고한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  *  *

사흘 후. 베르딘 황궁, 1황자 성.

성문을 넘어 진입하자마자 진한 꽃향기가 스며들었다. 1황자 성의 상징인 붉은 꽃 ‘엘데’가 성을 둘러싼 화원에 탐스럽게 피어 있었다.

마차 안으로까지 풍기는 엘데의 향을 느끼며, 제이디는 긴장한 마음을 가라앉히려 애썼다.

오늘은 사흘간 개발한 약물을 1황자의 몸에 시험하는 날이었다.

제이디는 처음으로 렉시드의 상태를 진단하고 나왔던 날을 떠올렸다. 알려진 대로 그는 혼수상태였지만 생명 반응은 정상이었다. 그러나 창백하고 차가운 육체와 내리감긴 두 눈은 시체나 다름없었다.

민간 의술은 주로 평민을 대상으로 하였으므로, 마법사의 육체는 깊게 연구해 보지 않았다. 간과한 부분이었다.

그럼에도 해 볼 만한 싸움이라 생각한 이유는 어쨌거나 마법사란 존재도 인간이기 때문이었다. 그 안에 마력이란 힘이 내재해 있을 뿐, 유기체로 이루어진 육체를 가진 것은 매한가지였다.

제이디에게는 렉시드의 의식을 깨우는 것과 별개로 다른 계획이 있었다.

바로 그가 영원히 마법을 쓰지 못하게 하는 것.

렉시드가 의식을 차릴 정도로만 약을 쓰고, 황실에서 개발한 ‘마력 억제제’를 바탕으로 자신이 개량한 약물을 그의 혈관에 소량 투입할 계획이었다.

그리고 황제에게는 아딜론 중독 증상과 맞물려 부작용이 생겼다고 둘러댈 것이다.

물론 황실이 ‘해독제’를 가졌다면 문제는 금방 해결될지도 몰랐다. 하지만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순 없었다. 적어도, 시도라도 해 볼 작정이었다.

그것이 첼시 교수님을 위한 복수이자 황성과 제국민을 무참히 날려 버리려 했던 1황자를 향한 보복이었다. 만약 이 일로 처형당한다고 해도… 끝까지 임무를 해내지 못하여 아쉬울지언정 황실의 큰 전력 하나를 지우고 가는 셈이니 최악은 아닐 터.

남은 시간은 나흘. 모든 일은 자신의 손에 달렸다. 그 어느 때보다 제 능력을 가장 믿어야 할 때였다.

이윽고 마차가 멈췄다. 자카르 아르디오스가 양손이 결박된 제이디를 끌어 내렸다.

마차에서 내려서자마자 코를 찌르는 꽃향기는 감미롭다기보다는 묘하게 위협적이었다. 섣불리 만졌다간 꽃잎에 묻은 독에 감염될지도 모르는… 그 탓에 ‘살생화’라고 불리기도 하는, 잔인한 꽃으로 둘러싸인 성.

1황자의 잔혹함을 그대로 상징하는 성을 가로지르며 제이디는 다시 한번 결심을 다졌다. 반드시 제 손으로 1황자를 몰락시키겠다고.

그런 제이디의 옆에서, 자카르 아르디오스는 차가운 얼굴로 죄인을 연행하듯 사슬을 끌었다.

“아름다운 살생화로 사위가 뒤덮인 성이라니. 이토록 잘 만든 감옥이 따로 있을까.”

“…….”

“안 그래요? 자카르 경.”

“잡담은 불허한다.”

“…당신은 왜 여전히 그 목줄을 풀지 못한 채 매여 있나요?”

마치 어제 본 사람에게 말하는 듯한 태도였다.

철컥, 대답 대신 돌아온 것은 차가운 피스톨의 금속성이었다. 자카르의 부관 세이먼 레이투스였다.

반가움과 혐오감을 동시에 느낀 제이디가 희미하게 자조했다. 머리에 총구가 겨눠지거나 말거나, 제이디는 무심한 얼굴로 계속해서 천천히 걸었다.

“분명 이보다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었을 텐데.”

“한마디만 더 지껄이면 무사히 성문을 나서지 못할 거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 말아요, 세이먼 경.”

세이먼 경, 하고 부르며 제이디가 걸음을 멈췄다. 그러고는 장밋빛 눈동자를 들어 그의 자색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이름을 알려 준 적이 있던가. 동요하는 세이먼을 두고 제이디는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자카르가 나지막이 말했다.

“수상하리만치 아는 것이 많구나.”

“필시 경이 모르는 것과 알아 두면 좋을 것들을 더 말할 수 있어요.”

“그 입에서 나오는 말이니, 그다지 신빙성은 없을 테지.”

“정말 그럴까요?”

자카르 아르디오스는 입을 다물었다. 말을 섞을수록 상대의 약점만을 긁는 것이 못마땅했다.

노을 지는 록펠라 광장에서 처음 만났던 때로부터 고작 3년밖에 지나지 않았음에도, 무척이나 달라진 분위기에 자카르는 위화감을 느꼈다.

이 ‘마녀’가 지닌 오만함의 기반은 무엇일까. 아쉬울 것 하나 없다는 듯 당당한 태도가 다시 한번 그의 마음을 들쑤셨다.

무엇보다 마치 앞날을 아는 듯이 행동하는 태도가 가장 께름칙했다. 더는 엮여 봤자 유쾌하지 않을 터.

하지만, 이 말만큼은 꼭 하고 싶었다.

3년 전 그날부터 지금까지, 재회한다면 꼭 하고 싶었던 말이 있었다.

“너는 이미 한차례 날 배척하지 않았나?”

“…….”

“나와 어울리지 않는 곳에서, 나와 어울리지 않는 인간을 잡을 뿐이야. 당신이 내 자리를 똑똑히 정의해 준 덕분에 나는 내 의무를 다할 수 있었지.”

자카르의 금안이 제이디에게 향했다.

“어디에나 각자의 정의가 있음은 ‘마녀’인 네가 더욱 잘 알겠지만.”

그의 말은 왜 갑자기 이번 우주에서 그가 변했는지를 설명하기에는 불충분했다. 하지만 그 자체로 일리가 있었기에, 제이디는 가타부타 말을 얹지는 않았다.

각자의 정의, 라. 명백한 악에 복종하는 것도 정의가 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평민 출신 젊은 친위대장 자카르 아르디오스. 그가 혁명 세력에 속했던 우주도 있었을까? 그가 동참하는 혁명은 어떤 흐름과 변수를 낳을까. 그런 허망한 상상을 해 볼 뿐이었다.

마침내 1황자의 거처에 도착했다. 자카르는 제이디의 결박을 풀어 준 뒤 보안을 확인했다. 혹시 모를 ‘마녀’의 도주를 우려해 주둔군을 늘리고 안전장치를 마련했다.

이상이 없음을 확인한 자카르가 침실 문을 열었다. 사흘 전 그날 그대로, 시체처럼 누워 있는 렉시드가 보였다.

제이디의 결박이 풀림과 동시에 사방에 배치된 호위군이 경계 태세를 취했다. 제이디는 가방에서 약병과 금속 주사기를 꺼내 펼쳐 놓았다. 시퍼런 혈관이 드러나 보일 만큼 창백한 피부 위에 손가락을 얹어 희미한 맥박을 확인하고는 약물을 주사기에 넣었다.

이 주사기에 든 약물이 사약이면 얼마나 좋을까.

이윽고 주사기의 누름대에 엄지를 댄 제이디가 렉시드의 혈관에 바늘을 가져다 대었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약물을 주입한 제이디는 반응이 오기를 기다렸다.

15분, 30분, 1시간…

더는 기다릴 수 없었던 자카르가 다시 제이디의 양 손목에 족쇄를 대려던 순간이었다.

“기다려요.”

계속해서 렉시드의 맥을 확인하던 제이디가 벌떡 일어섰다. 차근차근 생명 반응을 확인하고는 흡족한 미소를 띠었다.

“효과가 있어요.”

“…….”

“의식은 여전히 심연에 있지만 아까보다 육체가 더 깨어난 게 느껴져요.”

자카르는 못마땅한 듯 미간을 좁혔다. 황제의 정확한 지령은 1황자의 의식을 깨우는 것이었다. 눈으로 확인할 수 없는 육체의 미묘한 변화로는 모자랐다.

제이디도 안다는 듯 말을 이었다.

“아직 나흘이 남았어요. 약의 농도를 높여 와야겠어요.”

그로부터 이어진 사흘간, 제이디는 조금씩 약의 농도를 높여 계속해서 약물을 주사했다. 1황자의 팔에 주삿바늘 자국이 늘어 갔다.

마침내 엿새째 되는 날, 믿기지 않게도, 렉시드가 눈을 떴다.

조금 오락가락했지만 분명히 의식을 되찾은 황태자를 보며 황궁 신하들이 분주하게 드나들었다. 제이디는 그 요란한 면회를 엄격히 반대했다.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다.

그녀는 사후 관리라는 명목으로 렉시드의 몸을 살피는 척하며 개량 신약을 소량 투입했다.

그러나 제이디는 곧 알아챘다. 이 황태자에게는 계략도 크게 필요하지 않았다.

한순간 마력을 모두 방출하고 혼수상태에 빠져 있다 깨어난 렉시드의 뇌 상태가 멀쩡할 리 없었으니. 게다가 만성적인 마약초 투약으로 약해져 있던 육체 또한 큰 충격을 감당하지 못했는지 온전히 회복되지 않았다.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제이디가 거짓말을 할 필요도 없이, 그의 아딜론 중독은 정말 뇌와 육체에 좋지 않은 후유증을 남겼다.

“…어, 머니?”

렉시드는 언어 능력을 크게 상실했고, 가까운 과거의 기억을 모두 잃었다.

떠듬떠듬 부르는 ‘어머니’란 죽은 황후를 가리킬 터. 황후가 살아 있을 적과 현재를 착각하는 모양이었다. 제이디가 추측하기로는 지난 10년간의 기억을 모두 잃었거나, 헛것을 보는 듯했다.

“마력이 차오르지 않아요. 혈액을 만들어 내지 못하는 몸처럼요. 그릇이 완전히 깨졌어요.”

게다가 제이디의 실험적 약물로 마력까지 되찾지 못했으니. 극소량의 억제제마저 이겨 내지 못할 만큼 그의 마력은 소멸 수준으로 약해졌다.

한때 제국의 찬란한 첫 번째 태양이던 렉시드 베르딘은 이제, 평민만도 못한 몸이 되고 말았다.

모두 스스로의 업보였다.

“오라버니…. 이를… 이를 어찌해야….”

아멜리아는 온전한 정신을 잃고 누워만 있는 렉시드 옆에 엎드려 서러워하는 연기를 펼쳐 보였고. 급기야 기절할 듯 울음을 멈추지 않자 측근의 손에 이끌려 다시 4황녀 성으로 향하는 마차를 탔다.

“흑… 흐…… 하하….”

1황자의 몰락.

4황녀 아멜리아는 마차가 출발하는 것과 동시에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최근 십몇 년 사이, 이토록이나 유쾌한 일은 처음이었다.

‘제이디 헤이스터.’

기어코 그 아이가 황실 몰락을 향한 가능성의 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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