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원의 불꽃은 꺼지지 않는다 (93)화 (94/116)

그날 그 마차 안에서, 당신은 내게 언제나 빛나는 태양일 거라며 환히 웃던 제이디에게 리안은 물었다.

“내가 당신에게 더 이상 빛나는 존재가 아니어도… 내 곁에 머물러 주겠습니까.”

“…….”

“내가 더 이상 태양이 아니어도, 그대의 빛이 될 수 있겠습니까?”

“약속할게요. 리안이 날 먼저 떠나지 않는 한 언제나 리안 곁에 있겠다고. 설령 리안이 다시 시간을 돌려 날 떠난다고 해도 나는 당신을 알아볼 거예요. 리안은 늘 여기 있으니까.”

여기 있으니까, 하고 제 가슴팍을 가만히 짚던 사랑스러운 여인이 있었다.

“약속했잖아.”

“확신이 필요합니다. 당신이 나와 함께하는 데 무엇까지 걸 수 있는지 말해 주세요. 나를 떠나지 않을 증거를 보여 줬으면 합니다.”

“난 이미 한 번 목숨을 잃은 거나 다름없어요. 누구도 지키지 못한 생에 당신이 기회를 준 거예요. 당신이 날 먼저 떠나지 않는다면 나도 모든 기억을 가진 당신을 떠날 이유가 없지 않나요?”

그렇게 약속했으면서.

허망한 듯 무너져 내리는 그를 향해 제이디는 자조적인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 약속. 그랬던 때가 있었다. 타오르는 태양 빛에 물든 그의 얼굴을 보며 희망을 찾았던 때.

지금도 다르지 않았다. 제이디는 여전히 리안에게서 빛을 보았다. 이 절망적인 세상을 구원할 단 하나의 빛이 있다면 리안 베르딘이었다. 수십 번을 싸우고 다치며 그 자체로 역사를 상징하는 존재였다.

하지만 인정할 수 없었다. 제이디는 다시 머릿속으로 되뇌었다. 지키고 싶은 사람들을 또 잃어버린 지금, 희망 따윈 사라져 버렸다고. 하늘 위를 가로지르는 불씨, 모든 것을 불태울 듯 떨어져 내리는 불덩이들을… 결코 이기지 못할 거라고. 나는 완전히 겁에 질렸으니, 이만 떠나야 한다고.

깊은숨을 내쉰 제이디는 결국 비수를 꺼내 들었다.

“잘못 생각했어. 당신은 더 이상 내 빛도, 태양도 아니야.”

“…제이디.”

끝이 보였다.

“당신이 잘하는 거 있잖아요. 이럴 때마다 시간을 돌려 왔겠죠. 편리하네요. 스물한 번의 회귀는 스물한 번 도망친 리안 베르딘을 상징하는 거였군요.”

“…….”

가장 가까운 사이란 곧 서로에게 가장 상처 되는 말을 안다는 것. 제이디는 리안의 미련을 깎아 내기 위해 독설했다. 찢어지고 깨지면서도 제국민을 지켜 내려 했던 그의 영광스러운 과거에 도망자라는 낙인을 찍었다.

“나는 당신의 명백한 ‘실패’예요. 그러니 과거로 돌아가요. 그리고 다시 시작해요.”

그렇게나 참았지만 어느새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무심결에 흐른 눈물이 얼굴을 적시는 것도 잊고서, 제이디는 절박하게 말했다. 날 버려요, 제발.

“그래서 내가 다시 모두를 지킬 수 있게… 제발 날 위해서, 시간을 돌려 줘.”

리안의 시간이 멈췄다. 고요한 공간 속,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만 들리는 듯했다.

몇 번의 시간을 되돌려 가까스로 만난 나의 ‘마녀’가 이 우주의 자신을 버려 달라고 애원했다. 너의 선택이 틀렸다고, 너는 실패했으며, 너 때문에 모든 걸 잃었다고. 나는 너에게 적합한 영혼이 아니니 자신을 떠나라고 말하고 있었다.

왜. 왜 갑자기 이토록 모진 말을 입에 담는 걸까.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리안은 절망하는 제이디를 품에 안았다. 그의 뜨거운 손이 제이디의 머리를 감쌌다. 파도처럼 밀려든 온기가 제이디를 품었다. 흐느낌이 짙어졌다.

“답을 줄게.”

언젠가 꿈결 같던 그 찬란한 미소가 마음에 스며들 때, 리안은 제이디의 존재를 새롭게 정의했었다.

제이디 헤이스터는 리안 베르딘에게 명백한 구원이었다.

“우리의 ‘내일’이 새롭든 새롭지 않든 내게 제이디의 의미는 같아요.”

“…….”

“당신이 날 떠나지 않겠다고 약속한 날, 당신의 가슴 안에 내가 있다는 말을 했을 때. 나는 당신의 존재를 새롭게 정의했어. 제이디 헤이스터는 리안 베르딘에게 ‘구원’이라고.”

희생된 생명들을 구해 내고, 제이디가 절망에 빠지지 않도록 모든 것이 알맞게 굴러가는 미래를 만들어 줄 수만 있다면. 제이디의 말대로 시간을 되돌리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이미 회중시계는 고장 나 버렸지만 남은 수명을 끝까지 깎는다면. 제 어머니가 그랬듯 누군가에게 회중시계를 물려주고, 시작도 하지 못한 제이디 헤이스터와의 사랑을 완전히 포기한다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스물두 번째 우주가 아닌 곳에서 만난 제이디 헤이스터는 지금과 다를 것이었다. 자신이 죽고, 현재의 제이디 헤이스터가 아닌 자가 남으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건 가짜였다. 진짜를 두고 돌아갈 순 없었다. 이 미련을 갖고서는 어떤 우주로도 갈 수 없다.

마침내 리안은 이성이 완전히 달아나고 머릿속이 텅 비어 버렸다.

제이디는 울음을 멈추고 리안을 올려다보았다. 의중을 알 수 없는 표정이 그의 얼굴에 드리워 있었다.

마침내 그가 입을 열자 익숙한 목소리가 울렸다. 한때는 이 울림이 참 좋았었는데.

“이제 와 과거의 당신은 의미 없어. 내겐 이 우주의 당신이 구원이야. 그 구원이 날 떠나겠다면….”

철컥, 총의 쇳소리가 들렸다.

“죽여서라도 미련을 없애겠습니다. 그러니 차라리 내 품에서 죽으세요, 제이디.”

그와 자신 사이에 자리한 총구를 바라보는 제이디의 눈빛은 텅 비어 있었다.

성공일까. 그가 내게 총을 겨누는 상황까지 오게 되었으니. 이제 모든 게 다 끝났다. 제이디는 쐐기를 박기 위해 마지막 연기를 짜내며, 해 보란 듯이 웃었다.

“네, 그럴게요.”

화약에 물든 손끝이 방아쇠에 닿았다.

“그것참 영광일 거예요.”

우리는 서로에게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정말 시간을 돌려, 한 번의 기회가 더 주어진다면… 당신은 지금의 리안 베르딘과 다른 모습일까. 그렇다면 내가 당신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답은 영영 모를 것이다. 나 역시 지금의 내가 아닐 테니까.

그런 허망한 상상을 해 보며 제이디는 두 눈을 감았다. 그를 닮은 태양 빛이 어둠 속에서도 타올랐다.

총구 앞에서 눈을 감아 버리는 제이디를 보며, 리안은 모든 의지를 잃었다.

금방이라도 방아쇠를 당기려던 손은 곧 거칠게 총을 내던지고 힘없이 떨어졌다. 리안은 고개를 떨구고 떨리는 손으로 눈을 가렸다.

금속이 땅에 부딪치는 소리가 들리자 제이디는 눈을 뜨고, 쓰게 미소 지으며 물러났다. 이것이 리안과 자신의 결말이었다.

제이디는 일찌감치 리안이 자신을 쏘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았다.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가 ‘마녀’로서의 신념이듯, 리안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는 혁명과 진보였다. 사랑하는 사람을 쏠 만큼 최악의 인간도 아닐뿐더러, 최후의 희망이 꺼질 때까지 그는 이번 우주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자유 행진은 수많은 희생을 낳았지만 혁명의 흐름 자체에는 큰 영향을 준 사건이니 리안이 시간을 돌릴 이유는 없었다.

그렇지만 그가 얼마나 이 이별에 아파하고 있는지는 알 수 있었다. 격동에 못 이겨 자신에게 총구를 겨누기까지 했으니. 명백한 이별의 당위성이 마련된 셈이다.

이만하면 되었다고 생각하며, 제이디는 차갑게 마지막 한마디를 남겼다.

“감히 내가 돌아올 거란 기대는 말아요.”

“…….”

“그동안 고마웠어요…, 리안. 내게 또 한 번의 삶을 선물해 줘서.”

당신처럼 빛나는 사람과 함께한 추억을 남겨 줘서.

【제국력 832년 봄, 제이디 헤이스터 혁명군 탈퇴】

*  *  *

제이디는 뒤돌아보지 않도록 시선을 바닥에 고정한 채 빠르게 자리를 벗어났다. 딜레앙 저택 부지를 벗어날 즈음에는 쫓기는 사람처럼 내달리기 시작했다.

숨이 턱까지 차오를 만큼 달리고, 또 달리던 제이디는 더는 달릴 수 없게 되자 무너지듯 제자리에 웅크려 앉았다. 두 손으로 입을 꾹 막았지만 흐느낌은 속절없이 새어 나왔다.

마침내 바라던 대로 관계의 끝에 다다랐지만 제이디에게 남은 건 공허뿐이었다.

리안과 함께하지 않겠다는 선택을 했지만, 무서웠다. 헬렌이 죽은 뒤로 언제나 모든 삶을 강인하게 헤쳐 왔는데. 사랑이 한 사람을 이렇게나 나약하게 만들었다.

제이디는 한참을 떨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일어섰다. 목적도 정신도 없이 달려온 곳은 광장 인근의 호수 공원 외곽이었다.

제이디는 호숫가 벤치에 앉아 꽃노을에 물들어 가는 지평선을 바라보았다. 사뭇 추위가 밀려와 어깨를 감싸고는 차분히 생각을 정리했다. 애석하게도 슬픔에 빠져 있을 여유는 없었으니까. 처량하게 한탄하느라 시간을 허비한다면 리안과 헤어진 의미가 없다.

얼굴을 닦고 심호흡한 제이디는 구상해 둔 계획을 점검했다.

“사실 마법화학론은 조금 구시대적인 접근법이죠. 마력초에서 유효한 성분만 추출하면 이런 거추장스러운 조합식을 계산하지 않아도…”

“마력초…? 그게 뭔데? 그런 게 있어?”

‘마력초’는 애초 제국에 널리 알려지지 않은 식물이다. 한때 그저 언급한 것만으로 이단으로 몰리지 않을까 노심초사했을 만큼.

그런데, 그 마력초로 황궁의 ‘신무기’에 대응할 수 있었다.

물론 우연일 가능성도 있다. 마력초가 ‘신무기’의 유일한 방패는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연이 아니라면?

마법이 황실의 강력한 통치 도구이려면 마력의 원천은 오직 마법사, 그중에서도 황족처럼 강한 그릇을 타고난 인간이어야만 했다. 신성 마법사가 아닌 자가 사람을 치료한다는 이유만으로 민간 의술을 탄압하는 황실이다. 황제는 제 지위가 흔들릴 게 무서워 수천, 수만의 원주민을 학살하고 몰아낸 잔혹한 자였다.

황족은 권력을 위협하는 장애물이라면 어떻게든 억압하며 8세기의 역사를 이어 왔다. 그런데 마력초와 같이 마력을 추출할 수 있는 다른 출처가 밝혀지고, 이것이 널리 통용된다면?

제이디는 생각했다. 황제라면, 그런 것이 제국민에게 발견되기 전에 먼저 찾아 씨를 말려 버릴 것이다. 자연 속 무수한 약초 식생을 불태우고, 수없이 많은 ‘마녀’를 처형한 것처럼.

추측이 맞다면 황제의 비밀 연구소인 ‘화원’이란 곳에서는 분명 관련 연구를 진행하고 있을 터. 또 다른 ‘신무기’의 유무를 알아내고 철저히 대항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곳을 조사해야 한다.

다시 한번 계획을 정리한 제이디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가장 가까운 여관으로 가서 객실을 빌렸다. 금방이라도 쓰러져 잠들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억지로라도 낡은 책상에 앉아 헐리 씨께 보낼 편지를 적었다.

혁명군을 떠나게 되었다는 이야기, 로건 교수님을 대신 보낼 테니 잘 부탁한다는 이야기를 차례로 적어 내려갔다. 그러다 마지막 장에 이르러서는 또 흐르려는 눈물을 참기 위해 애써야 했다.

【리안의 몸을 잘 부탁해요. 헐리 씨밖에 도와줄 사람이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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