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몸이 완전히 망가진 로건을 위해 제이디는 대충 집에 있는 재료로 차와 요리를 내어 주었다. 창밖을 보니 벌써 해가 지평선으로 내려앉고 있었다.
“…….”
로건은 창백한 손으로 제이디가 만든 야채수프를 떠먹었다. 상한 채소로 만들었는지 매우 이상한 맛이 나는 바람에 순간 성질대로 신경질을 내려다가, 조용히 입을 닫았다. 대신 그런대로 괜찮은 따뜻한 차로 차가운 속을 채웠다.
시간이 너무 늦은 터라 제이디는 떠날 준비를 했다.
“그럼, 잘 부탁드려요.”
“그래. 가라.”
멀리 나오지도 않는 스승의 뒷모습은 전에 비해 눈에 띄게 왜소했다.
연약하게 무너져 내린 그 모습을 보며, 제이디는 다시 한번 다짐했다. 어떻게든 좌절하지 않고 싸우리라고. 설령 죽더라도, 악착같이 모든 것을 걸고서라도 황궁에 가겠다고.
그래서 다시는 이런 비참한 일이 벌어지지 않게 하리라고. 다시는 누구도 잃지 않으리라고.
수없이 다짐하고, 수없이 잃었지만… 그럼에도 이렇게 다시 일어서리라고.
“제이디. 너는 특별해. 개척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다른 누구도 아닌 너만의 길을 닦아야 해.”
그러기 위해선 독자적인 행보를 선택해야 한다. 처음부터 그래 왔듯이.
“역병도 맹독도, 그 기원이 모두 한곳을 가리켜요.”
“기원이라면 황궁을 말하는 겁니까?”
“네. 역시 제가 가지 않으면 안 되겠어요. 미하리 혼자서는 힘들지도 몰라요.”
“직접 잠입하기엔 어려움이 따를 거예요. 다른 방법은 없을지, 나 역시 고민해 보겠습니다.”
애초에 내가 가는 길에 타인의 허락 따위는 필요 없었다.
리안이 너무 소중해서. 리안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와 멀어지면서도 끝끝내 떠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를 향한 감정이 도리어 스스로의 길을 개척하려는 제 발목을 붙잡았다.
지켜야 할 사람이 있는 자는 혁명군이 될 수 없다. 하지만, 신념을 잃은 자는 ‘마녀’가 될 수 없다.
‘마녀’가 되기를 포기할 바엔 혁명군이 되지 않겠다. 그것이 제이디가 내린 결론이었다.
“늦었네요.”
로건의 집을 나서자마자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문 앞에서 기다리던 리안이었다.
그가 벽에 기대선 몸을 바로 하고 제이디에게 다가왔다. 제이디는 문득, 오랜만에 가까이서 그의 얼굴을 마주했음을 깨달았다. 지난 자유 행진에서 입은 상처가 여전히 자잘하게 남아 있었다.
내가 잃은 사람과 부상자들만 신경 쓰느라 정작 리안의 몸에는 전혀 신경 쓰지 못했다. 그의 거친 얼굴을 살펴본 제이디의 눈썹이 속절없이 축 처졌다.
그러고 보니 일전에 다친 팔은 잘 회복되고 있을까. 뼈가 붙었어도 분명 이번 전투로 다시 탈이 났을 텐데.
“…….”
말없이 슬픈 표정만 짓는 제이디를 리안이 가만 바라보았다.
“상태가 많이 안 좋나 봅니다.”
“네?”
“로건 리베르 말입니다.”
리안을 걱정하는 건데. 본인 몸 상태를 전혀 생각하지 않는 점은 여전했다. 제이디는 소리 없이 가만 한숨을 내쉬고는 대답했다.
“네. 정신을 차리지 못하셔서…. 다친 부위를 치료하느라 늦었어요. 급한 대로 끼니도 만들어 드리고.”
“그렇군요.”
리안은 제이디가 그저 스승의 안위를 걱정하여 찾아왔다고만 알았다. 제이디가 로건에게 자기 대신 헐리 무니와 부상자를 도와 달라 부탁했다는 사실은 전혀 몰랐다.
밀려오는 죄책감에 제이디는 또 한 번 마음이 흔들렸다. 결정을 내린 뒤로 마음이 약해지지 않도록 수도 없이 다짐했는데… 작별을 고할 때가 다가오자 일렁이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
분명 상처받겠지. 배신감을 느끼겠지. 하지만… 말해야 했다. 오늘부로 혁명군을 떠나겠다고. 독자적인 방법으로 혁명에 기여하겠다고.
두 사람은 건물을 나와 다시 마차에 올랐다. 서먹했던 사이는 자유 행진 이후로 봉합되고 있었다. 가까스로 그와 다시 생활하게 되었는데, 예전 같은 사이로 돌아가기도 전에 이번 우주에서의 연이 끊어지게 생겼다.
감정이란 변수는 누구도 예상할 수 없기에. 이 상황은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다.
문득 마음속에 뜨거운 덩어리가 울컥 치미는 듯했다. 습관대로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는데, 눈가가 발갛게 물들며 눈물이 고였다.
그때, 리안이 말했다.
“미안합니다.”
난데없는 사과를 듣자마자 무게를 이기지 못한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제이디는 조용히 손을 들어 눈물을 닦아 냈다. 그런 제이디가 안타까워 리안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가 숨을 한 번 고르고 차분히 말을 이었다.
“이 모든 일이 당신한테 버겁고 힘들다는 거 알아요.”
“…….”
“미안해요, 제이디. 내가… 더 신경 쓰겠습니다.”
리안은 제이디가 상실의 슬픔 때문에 힘들어한다고 생각했다. 제이디는 스물한 번의 시간을 돌아온 그 앞에서 힘들다고 어리광 부릴 마음은 전혀 없었다. 리안 역시 제이디가 고통을 토로하며 남을 탓하는 부류가 아님을 알았다. 그저 속으로만 힘들어하리라 판단해 먼저 사과한 것이다.
“제이디의 말이 맞아요. 당신이 잘못했던 게 아니라 내가 비겁했습니다. 그러니 속죄할 기회를 주세요. 허락만 해 준다면… 우리 관계에 내가 더 솔직해지겠습니다.”
“아….”
“감정을 억누르는 것보다 당신이 망가지지 않게 돌보는 일이 내겐 훨씬 중요해.”
왜. 왜 하필 오늘 이렇게 다정한 모습을 보일까. 난 헤어질 생각을 하고 있는데. 왜….
제이디의 울음이 멈추지 않았다. 그동안의 서러움이 터져 나왔다고 생각한 리안은 옆자리로 다가가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도닥이는 손짓이 이어질수록 미안함은 커져만 갔다.
제이디는 리안에게 기대 죄인처럼 서럽게 울기만 했다. 마차가 딜레앙 저택 앞에 멈춰 서고도 한참을 그대로 앉아 있었다. 이제 다시는 느끼지 못할 온기를 온몸에 각인하듯이.
자신이 작별을 고해도 리안은 분명 인연을 놓지 않으려 할 것이다. 그렇기에 그의 미련을 끊어 낼 만큼 강하고 모질게 말해야 했다. 마침내 결심한 제이디는 떨리는 마음을 다잡으며 먼저 마차에서 내려섰다.
곧 따라 내린 리안이 조심스레 눈물을 닦아 주었다. 짙은 녹색 눈동자는 처음 만났던 그날처럼 끝을 알 수 없을 만큼 깊었다. 제이디는 마지막으로 그 눈동자를 가슴에 새기듯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이 눈을 참 사랑했는데.
“답은 천천히 주고, 오늘은 아무 생각 말고 편히 쉬도록 해요.”
“리안.”
제이디는 자신을 저택으로 이끄는 리안을 저지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리안이 제이디를 내려다보았다.
“할 말이 있어요.”
리안에게서 한 발 물러나자 어깨를 감쌌던 그의 팔이 스륵, 떨어졌다. 어두운 분위기를 직감한 리안의 표정이 조금 가라앉았다.
제이디는 떨리는 아랫입술을 물었다 떼며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마침내 준비해 온 말을 꺼냈다.
“저, 혁명군을 떠날 거예요.”
“…….”
“미안해요.”
차마 리안을 바라볼 수 없어 제이디의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리안이 어떤 표정을 짓는지 일부러 확인하지 않았다. 듣자마자 화를 내거나 추궁할 줄 알았는데, 리안은 아무 말도 없었다. 대신 자세한 설명을 원한다는 듯 그저 가만히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그게 다예요.”
리안이 납득할 만한 이유를 말할 수는 없었다. 리안이라면 어떻게든 그 이유를 만회할 방법을 찾아낼 테니. 차라리 혼자 지레짐작하도록 두는 편이 나았다.
“떠나겠다는 말입니까.”
“네.”
“…….”
리안은 짧은 순간 무슨 말을 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였다. 자신이 무엇을 놓쳤는지 궁리해 보았지만 끝내 알아내지 못했다.
“기회를 줄 마음이 없다는 뜻입니까?”
“아뇨. 훨씬 전부터 내린 결론이에요.”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행동이 먼저 나갔다. 제이디가 벌린 거리만큼 리안이 다시 다가갔지만, 제이디는 그의 손을 피하여 더욱 떨어졌다.
“…….”
마침내 금이 가듯 리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반면 제이디의 얼굴은 어느새 차갑게 굳었다. 조금의 여지도 남기지 말아야 했기에.
“조금 더 설명이 필요합니다. 나는….”
리안은 입을 다물며 고개를 저었다. 눈동자가 길을 잃고 헤맸다. 나는 이대로는 납득할 수 없는데.
“신념의 문제일 뿐이에요.”
“그러니 만회할 기회를 달라고 했잖아요.”
“…….”
“섣불리 결정하지 말고 좀 더 이야기해요. 시간이 걸려도 괜찮으니까… 타협할 지점을 같이 찾아봐요.”
“오늘 밤 안으로 떠날게요.”
그리 말하며, 제이디는 매정하게 뒤돌아 저택 정문으로 향했다. 리안이 어떤 표정을 짓는지 끝까지 확인하지 않았지만,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의 흔들리는 어조가 전부 말해 주었으니.
“이렇게 떠나는 걸 내가 용납할 것 같습니까?”
리안은 성큼성큼 거리를 좁혀 제이디의 팔을 붙들었다. 말이 생각을 앞서고, 그 말보다 행동이 더 앞섰다.
“내 결정을 막을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어요. 설령 리안일지라도요.”
리안은 더욱 강한 힘으로 제이디를 붙잡았고, 분위기는 빠르게 격앙되었다.
제이디는 그제야 리안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본래 무표정이 유독 차가웠다. 그런데 지금은 차갑다 못해 시리고 무서웠다. 그 얼굴을 보자 실감이 났다. 끝이 다가오고 있다고.
지금이라도 결정을 번복하고 리안을 따른다면, 서로에게 더 큰 상처를 주기 전에 멈출 수 있겠지. 하지만 제이디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이 순간 제이디는 오직 자신의 목표만을 생각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스스로의 길을 개척하라는 어머니의 말. 어떻게든 단 하나의 생명이라도 더 살리겠다는 자기만의 신념을.
“언젠가 당신이 내게 물었지.”
가라앉은 목소리로, 리안이 나지막이 말했다.
“모든 것이 끝나고 새로운 ‘내일’이 오면, 우린 서로에게 어떤 의미일까, 하고.”
“…그리고 당신은 답을 찾는다면 가장 먼저 내게 알려 준다고 했죠.”
제이디는 혁명이 시작되기 3개월 전, 오후의 햇살이 들이치는 마차 안에서 그와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그 ‘내일’이 새롭든 새롭지 않든 내게 리안의 의미는 같아요. 리안 베르딘은 제이디 헤이스터에게 언제나 빛나는 태양일 거예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당신은 내게 언제나 빛나는 태양일 거라고 말했던 한때.
회상하자마자 밀려드는 설움에 제이디는 입술을 단단히 다물었다.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질 것 같았다.
당신을 그렇게까지 사랑했던 나는 이제 없어. 앞으로의 내 인생에는.
제이디는 애써 얼굴빛을 지우며, 차가운 얼굴로 돌아섰다.
떠나야 한다. 그와 함께하면 소중한 사람을 자꾸 잃는다. 제이디는 스스로를 세뇌하듯 필사적으로 되뇌었다. 그렇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그의 온기에 도로 몸을 파묻을 것 같았기에.
리안은 다시 한번 다급하게 제이디를 붙잡으며 그녀를 돌려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