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빠르게 흘렀지만 학생군 자유 행진이 남긴 상처는 쉽게 치유되지 않았다.
치료 끝에도 결국 살아남지 못한 수백 명의 죽음이 잇따랐으며, 많은 제국민이 국경을 넘어 인근 왕국으로 망명하기에 이르렀다.
환자 침상이 모두 비워질 때까지 제이디는 밤낮없이 치료소를 지켰다. 신성 마법으로도 회복되지 않는 상처에 효험을 보이는 약을 개발한 제이디 헤이스터. 그 ‘마녀’ 이야기가 황성을 넘어서까지 일파만파 퍼졌다. 심지어 제이디가, 몇 년 전 아카데미 아딜론 밀반입 사건에 엮여 희생될 뻔했던 평민 소녀임이 알려지면서 더욱 큰 파문이 일었다.
혁명군은 모든 것을 건 마지막 혁명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동시에, 제이디는 중대한 갈림길 앞에 섰다.
“황실이 전면전을 선포한 이상 물러설 싸움은 아니지 않나요? 꼭 학생군을 미끼로 던지겠다는 소리로 들리네요.”
“지금 상황에서는 더 큰 희생을 막는 게 중요해. 이번엔 학생군을 방패로 정보를 더 모아야 할 때야.”
“그게… 제국군의 논리와 다를 게 뭐예요?”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었던 혁명군의 결정, 그리고 그로 인해 희생된 사람들. 이를 떠올릴수록 끝도 없이 어둠에 잠식되어 가는 자신.
신념 갈등이 일어난 이상 스스로를 위해서라도 혁명군을 떠나는 것이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록펠라 광장, 학생군 추모 제단.
제이디는 꽃이 가득 놓인 제단 앞에 섰다. 공허한 눈동자가 제단을 내려다보았다. 오도 가도 못하는 사람처럼, 제이디는 한참을 덩그러니 서 있었다.
과거에도 록펠라 광장 추모제에 와서 이렇게 헌화를 했었다. 제국의 현실은 그때보다 나아지기는커녕 더욱 처참해졌다. 어딘가에 고여 버린 듯 온몸이 무거웠고, 계속해서 묵직한 죄책감이 마음을 짓눌렀다.
가만히 선 제이디의 주변을 추모객들이 계속해서 오갔다. 마침내 제이디가 무릎을 굽혀 앉아 꽃을 내려놓았다. 순서대로 붉은색, 노란색, 보라색 꽃이었다. 죽은 자들을 상징하는 색이었다.
‘미안해…. 미안해.’
툭, 눈물 한 방울이 꽃잎 귀퉁이에 떨어져 스며들었다.
오늘은 리노 슈펜하이어의 장례가 끝난 날이었다. 이로써 사랑했던 세 사람의 장례가 모두 끝났다.
제이디는 검은 코트 깃을 여미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딘가로 향하는 걸음걸음에, 여전히 지워지지 않은 희생자들의 핏자국이 밟혔다. 그 핏자국을 밟으며 제이디는 다시 한번 자신이 내린 결정을 되돌아봤다. 마침내 며칠간 자신을 괴롭게 했던 고민에 마침표를 찍었다.
오늘이야말로 혁명군을, 그리고 리안을 떠날 것이다.
* * *
마차를 타고 도착한 곳은 황성 외곽의 주거지였다. 오래된 건물 앞에 당도하여 마차가 천천히 멈췄다. 리안의 손을 잡고 마차에서 내려선 제이디는 자신을 따라오는 그를 만류하며 고개를 저었다.
“혼자 다녀올게요. 낯선 사람이 있으면 싫어하실 거예요.”
“…….”
리안은 말없이 멀어지는 제이디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매 순간 위태로운 그녀가 오늘의 만남을 감당할 수 있을지 걱정되었다.
아치형 문 앞에 선 제이디가 철제 도어 노커로 툭툭, 문을 두드렸다. 미리 언질을 넣어 둔 덕에, 집주인은 바로 벌컥 문을 열어 주고는 툴툴거렸다.
“어떻게 좀 해 보시게. 도무지 살 수가 없을 지경이니.”
문제의 세입자에게 잔뜩 시달린 듯 표정이 썩 좋지 않았다.
제이디는 집에 들어서자마자 코를 찌르는 탁한 궐련 냄새에 미간을 찌푸렸다. 늙은 집주인은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모퉁이를 돌아 사라졌다. 제이디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바로 나무 계단을 올라갔다. 위로 향할수록 공기가 더욱 매캐해지는 듯했다.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한 제이디는 망설임 없이 문을 두드렸다. 끼익… 잠기지도 않은 문이 힘없이 열렸다.
“저예요.”
아무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는 집 안은 마치 죽어 버린 공간 같았다.
소파 옆에는 책장에서 막무가내로 뽑혀 한바탕 내동댕이쳐진 듯 온갖 책이 널브러져 있었고. 음식이 지저분하게 말라붙은 접시나 집기 따위가 어지러이 널려 있었다. 한편에서는 깨진 술병에서 새어 나온 독주가 카펫에 스며들어 지독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위험한 유리 조각을 발로 밀어 구석으로 치우며 제이디는 천천히 나아갔다. 자신의 은사가 틀어박힌 곳을 찾아서.
“…교수님.”
온 집 안을 뒤져 마침내 찾아낸 스승의 모습은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
폐인처럼 헝클어진 머리와 매무새는 둘째 치고, 피골이 상접한 얼굴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문드러지는 심정을 감추며 제이디는 제 스승, 로건 리베르를 내려다보았다.
“일어나요.”
제이디는 애써 차분하게 말했다. 묵직하게 내려앉았다 올라가는 눈꺼풀이 형용할 수 없는 슬픔으로 파르르 떨렸다.
로건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욕조에 널브러져 있기만 했다.
“이게 무슨 꼴이에요. 좀 일어나 봐요. 네?”
팔을 당겨 보기도 하고, 몸통을 잡아 직접 일으켜 보려고도 했지만 만취한 장정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제발…!”
한 번 더 시도해 봤지만, 도무지 역부족이었다. 도대체 이 인간을 어떻게 한담.
한 손으로 마른세수를 한 제이디는 결국, 양동이에 담긴 물인지 뭔지 모를 차가운 액체를 냅다 뿌려 버렸다.
차악! 거친 소리를 내며 흩뿌려진 찬물을 뒤집어쓰자 정신이 들었는지, 로건이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제이디를 바라봤다.
“뭐야…. 너냐.”
그제야 제이디를 알아본 로건이 쫄딱 젖은 얼굴을 쓸어 올리며 비척비척 일어섰다. 그러더니 푹 고개를 숙여 제 몸을 내려다보았다.
“아무리 그래도… 걸레 물은 좀….”
“교수님!”
쿠당탕!
중심을 잡지 못하고 넘어진 로건은, 결국 찢어진 이마를 제이디의 손에 몇 바늘 꿰매고 나서야 제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가까스로 몸을 씻고 나온 로건이 풀썩 소파에 늘어져 누웠다. 습관적으로 술병을 찾아 들었지만 제이디가 황급히 빼앗은 터라 한 방울도 입에 대지 못했다. 속상한 마음에 부글부글 끓는 속을 가라앉히며 제이디가 물었다.
“도대체… 꼴이 이게 뭐예요?”
“뭐가.”
“똑바로 좀 대답해 봐요.”
“…….”
“교수님!”
“네가 뭘 알아, 뭘 안다고 참견이냐고?”
“산 사람은 살아야 할 거 아니에요!”
진심을 담은 고성이 튀어나왔다.
“나도…! 나도 이렇게 사는데 교수님은 왜 그러는데요, 왜!”
“하….”
괴로운 듯 두 눈을 가린 손바닥 아래로 눈물이 배어났다. 일그러진 입술이 파르르 떨리며 신음 같은 울음이 새어 나왔다. 로건은 한동안 연인을 잃은 슬픔을 괴롭게 토해 냈다.
“제발… 내 인생에 그만 좀 끼어들어라, 응?”
“싫어요.”
제이디는 같이 눈물을 흘리면서도 단호하게 말했다.
“미안하지만 교수님이 이러고 사는 꼴 절대 못 봐요. 첼시 교수님을 위해서라도 난 방관 안 해요. 그러니까 이제 일어나요.”
사랑하는 연인을 잃은 슬픔의 깊이를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지만, 저 또한 소중한 사람을 많이 잃어 왔다. 슬픔을 이겨 내는 방법은 사람마다 다르다고 해도 로건 교수님이 이렇게 자기 몸을 함부로 방치하는 것은 묵과할 수 없었다.
마치 따라 죽으려는 사람처럼 아무 생기도 없는 모습이어서 또 다른 죽음을 목도하는 듯해 두려웠다.
“교수님. 내 부탁 좀 하나 들어줘요.”
그래서, 죽음의 문턱에서 로건을 끄집어내기 위해 제이디는 그에게 새로운 목적의식을 심어 주기로 했다.
“저, 아카데미에서 교수님과 함께하지 않았으면 벌써 처형됐거나 꿈을 포기했을지도 몰라요. 누가 뭐래도 교수님은 내 은인이잖아요.”
“…….”
“교수님도 그렇게 생각하죠? 저도 교수님의 은인이라고.”
“너는 그 언젠가 내게 은인이라고 했지만… 내게는 네가 은인이었다.”
“사실 왜 그렇게 생각하시는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교수님이 날 은인으로 여긴단 거 알고 있어요. 그러니까, 은인을 위해서라도 부탁 하나만 들어줘요.”
더 이상 울 기력도 남지 않은 로건은 공허한 눈빛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은인이라. 확실히 그렇게 생각했다.
역겨운 황실에 굴복하고 ‘마녀재판’에서 구차하게 살아남았다. 그렇게 연명한 목숨을 달고 의미 없이 살아가던 지긋지긋한 삶이었다.
몰락한 ‘마녀’ 로건 리베르.
가족에게도 외면당할 만큼 위험한 사상과 원대한 꿈을 품었던 ‘마녀’가 결국 한낱 목숨 따위가 아까워서 황실의 개가 됐었다. 그 이후로는, 구차한 인생일 뿐이었다.
제이디 헤이스터라는 요망한 ‘마녀’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영원히 그랬을지도 모르지.
제이디 헤이스터가 있었던 덕분에 로건 리베르는 다시 불순한 ‘마녀’가 될 수 있었다. 제이디 헤이스터가 있었던 덕분에 아카데미를 떠나지 않았고, 옛 시절 자신 같은 ‘마녀’에게 의술을 가르쳤고, 또 한 번 사랑을 누렸고, 다시 행복이라는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이깟 별 볼 일 없는 목숨은 어째서 이다지도 끊기지 않고 붙어 있어서. 첼시 아도라를 잃은 로건은 더 이상 살아갈 가치를 느끼지 못했다. 그런데 요망한 ‘마녀’가 또 한 번 제 인생에 끼어들어 자신을 구원하려 하고 있었다.
“…말해.”
한겨울의 마른 장작처럼 갈라진 목소리가 마침내 새어 나왔다. 제이디는 울 것처럼 일그러진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저 대신 연구해 주실 게 있어요.”
“…….”
‘연구’라는 말에, 로건은 잠깐 멈춰 있다가 허탈한 한숨을 내쉬었다.
“너도 참 여전하구나.”
“우리 ‘마녀’들한테 연구를 빼면 뭐가 남겠어요?”
“이런 꼴을 보고도 머리 굴리는 일을 부탁하다니….”
“솔깃한 거 다 알아요.”
“이곳 등불 사이에 ‘마녀’가 있을 줄은 몰랐는데 말이에요. 날 가르치세요, 교수님. 우린 아주 좋은 친구가 될 것 같아요.”
빙긋 웃는 제자의 얼굴에서 아카데미 신입생 제이디 헤이스터를 겹쳐 본 로건의 마음에 뜨끈한 그리움이 녹아들었다.
“그래…. 들어나 보자.”
제이디는 딜레앙의 ‘마녀’로 지내 왔던 이야기, 그리고 헐리 무니와 함께하고 있는 연구에 관해 전했다. 여전히 부상자가 많아 치료 인력이 필요하며, 조만간 이크람의 ‘마녀’들이 조력하러 황성으로 온다는 정보도 함께였다.
로건은 중간중간 고개를 끄덕이며 진지하게 제이디의 이야기를 들었다. 마침내 모든 이야기를 마쳤을 때, 제이디는 로건의 얼굴에 그 옛날 히스테릭한 ‘마녀’의 표정이 떠올라 있음을 보았다.
“진작 왔어야지?”
특유의 거만한 말투도 함께였다. 제이디가 마침내 환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