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원의 불꽃은 꺼지지 않는다 (90)화 (91/116)

록펠라 광장 북부, 알테미스 거리.

마침내 전황이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하지만 이 자리에 생존한 모두가 알았다. 곧 제국군 보강 세력이 더 들이닥치리라고. 황실은, 단 한 명의 반동분자도 살려 두지 않을 테니….

절망이 내려앉은 자리, 친우의 죽음을 눈앞에서 목격한 제이디는 넋이 빠져 허물어졌다.

학생군 최후의 전력이 돌격했다. 리안은 제이디를 안전한 곳으로 옮기기 위해 그녀를 일으켰다. 몸이 들리는 감각을 느낀 제이디는 리안을 알아보지도 못한 채 그를 뿌리치고 앞으로 향했다.

마차 옆에 처참히 쓰러진 휘노의 시신이 보였다. 제이디는 주저앉아, 피투성이가 된 주검을 끌어안았다.

“날개가 찢겨서 날아오를 수 없다면, 태워서라도 세상을 밝힐 거야.”

“흐윽…. 아… 윽….”

제이디는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며 눈물을 흘렸다. 견딜 수 없는 슬픔이 처절한 울음이 되어 새어 나왔다. 리안이 계속해서 제이디를 부르며 그녀에게 달려드는 병사들을 처치했다. 그러나 제이디는 아무것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다.

후방을 완전히 통제한 교수들이 최전방에 합류했다.

어마어마한 마력이 뭉치는 기운이 온 전장을 휩쓸었다. 머리끝까지 분노한 첼시 아도라가 빠르게 활강하며 강력한 마법을 적진 한가운데 꽂았다. 쉴 새 없이 날아드는 공격에 제국군이 파도를 맞은 듯 쓸려 나갔다.

그때였다. 전장에서 보이지 않는 멀찍이 황궁 남쪽 성벽이 열렸다. 성문 앞, 검은 제복을 입고 양옆으로 도열한 친위대 사이를 누군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불어오는 바람에 그의 검은 머리칼이 흩날렸다. 붉은 눈동자가 형형히 빛나며 전방을 주시하다 곧 하늘을 향해 빛나며 흰자위를 잡아먹었다. 그러자 전장의 모든 마법사가 무형의 압도감에 놀라 몸을 움찔거렸다.

말도 안 되는 힘이 그 사내, 1황자 렉시드 베르딘에게서 폭발하듯 새어 나왔다. 사기를 잃은 몇몇은 공포감에 떨며 하나둘 무기를 떨어뜨리기도 했다.

“정신 차려!”

같은 위압감을 느꼈지만 첼시는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원드를 꼭 쥐며 더욱 맹렬하게 적진을 밀어붙였다. 원드 끝, 그 언젠가 제자에게 선물받은 유창목 손잡이의 모서리가 닳아 있었다.

“다 죽고 싶어?”

얼빠진 동료 교수들을 다그친 첼시는 그들의 눈동자가 향한 방향으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 먹구름 사이, 그 규모를 가히 예상도 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폭격의 전조가 보였다.

“…….”

첼시 아도라는 스물두 번째 우주에서 렉시드와 대적한 적 없었다. 그럼에도 이 엄청난 마력의 흐름이 낯설지 않다고 느꼈다. 분명 황족이 나선 것이다. 황제인가, 아니면 마법대장? 누구인지는 몰라도, 본능적으로 적수를 알아챈 그녀는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

단 한 번의 기회. 모든 마력을 끌어모은 폭격을 막기 위해서는 자신 또한 모든 힘을 걸어야 했다. 승자가 어느 쪽이 될지는 전혀 예상할 수 없었다.

가까스로 이성을 차린 동료 교수들이 어떻게든 힘을 모으기 위해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어떤 상황에서도 제국의 미래를 짊어질 상아탑의 등불들을 저버리고 도망칠 순 없었다.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순간, 첼시는 단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았다. 두 눈동자에서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다. 본능적인 두려움에 온몸이 떨렸지만 눈앞의 상황에 집중했다.

“붙어 보자고, 제기랄!”

첼시가 악을 내지르며 온몸의 마력을 방출하는 동시에, 붉게 물든 하늘에서 폭격이 시작됐다. 온 황성을 한낮처럼 환하게 밝힐 만큼 뜨거운 불덩어리가 지상으로 빠르게 떨어져 내렸다.

쾅─!

어마어마한 굉음이 울렸다. 첼시를 위시한 교수진의 마법 보호막과 충돌한 불덩어리들은 가루처럼 부서져 허공으로 흩어졌다. 충격으로 인한 대기의 파동이 땅을 흔들었다. 선 채로 버틸 수 없을 만큼 지대가 갈라지고, 온 세상이 휘청거리며 뒤흔들렸다.

세기의 두 마법사가 방출한 마력이 전면으로 맞붙은 그 순간, 두 다리로 멀쩡히 땅을 디딜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제이디는 자신을 둘러싼 세상이 완전히 뒤바뀌었음을 알았다.

“…….”

눈을 뜨고 싶지 않았다. 감당할 수 없는 현실이, 이 전쟁이, 희생이… 벅찼다. 살아 숨을 쉬는 것조차 죄스러울 만큼 버겁고 괴로웠다.

하지만 속절없이 또 한 날의 태양은 밝았고, 살아 있는 자신은 눈을 뜨고야 말았다.

타다 만 잔해에서 튀어 오르는 불씨와 허공을 떠다니는 검은 분진 사이, 정신을 잃기 전보다 더 많은 희생자가 찬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1황자의 폭격을 막기 위해 힘을 보탠 마법사들이 충격을 버티지 못하고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그리고 고개를 내리니 여전히 제 곁에 누워 눈감은 친우의 창백한 얼굴이 보였다.

“…….”

나는 도대체 이 우주에서… 뭘 한 거지?

난….

“…리안.”

그제야 리안의 존재를 떠올린 제이디는 부동자세로 굳어 버렸다. 주검 사이에 있으니, 그 역시 주검이 되어 이곳 어딘가에 쓰러져 있을 것 같았다. 아…. 제이디는 신음을 내뱉듯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내며 다시 한번 공황에 빠졌다. 살아서 지옥에 들어온 것만 같았다.

어떻게 해도 리안이 이곳에 생존해 있다고 생각하기는 어려워서. 차오르는 눈물을 닦을 기력도 없이 앉은 채로 숨을 몰아쉬었다.

“리안이 죽으면 나도 죽는다는 결심은 변하지 않아요.”

결국 이렇게 끝나 버린 걸까. 단 하나의 목표만을 위해 스물한 번이나 시간을 돌아오며 운명을 견뎌 내던 그의 노력이 결국은 실패로 끝났나.

이제 겨우 실마리를 잡았는데… 모든 희망을 잃어버렸다.

어둠에 잠식된 의식 속을 배회하면서 제이디는 펜던트 목걸이를 쥐었다. 그리고 그 안에 든 작은 환 하나를 꺼냈다.

단번에 목숨을 끊을 수 있는 사약이었다.

리안과 운명을 같이하기로 마음먹은 날. 리안이 죽거나 자신이 제국군에 붙잡히게 된다면 삼키기 위해 계속 몸에 지니고 다녔다. 제이디가 떨리는 손으로 환을 집어 삼키려던 때였다.

탁, 누군가 거친 손길로 제이디의 손목을 잡아 저지했다.

리안이었다.

“살아남을 거라고 했잖아.”

환이 굴러떨어지는 것과 동시에, 제이디의 오감이 한꺼번에 돌아왔다. 눈앞에는 피투성이가 된 몰골로 자신을 바라보는 리안이 있었다.

제이디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살아남은 그를 본 순간 기쁘고 안도한 동시에 무거운 죄책감과 절망이 다시 마음을 짓누르기 시작했다.

그가 살았으면 나도 살아야 하는데… 더는 버틸 수가 없어서. 더는 살아 있기가 버거워서. 더는 이 싸움에서 생존할 자신이 없어서….

리안은 곧 제이디의 텅 빈 눈빛에서 살아갈 의욕을 잃은 마음을 확인했다. 아무리 신념이 뚜렷한 자라도, 이런 전쟁을 겪고 동료의 죽음을 목격한 직후에 온전한 정신을 유지하기란 힘들었다. 그 심정을 모르지 않았다. 저 역시 일찌감치 지겹도록 겪고 이겨 낸 감정이었기에.

하지만, 그럼에도 리안은 멈출 수 없었다. 결코 쓰러질 수 없었다. 여기서 모든 것을 포기해 버린다면, 함께 돌아온 의미와 여태까지의 희생들이 모조리 사라질 것이다.

“리안을 위해 내가 산다는 인과는 틀렸어요. 리안이 날 위해 살아야 해요.”

“당신을 살아 있게 하기 위해서라도 난 죽지 않을 겁니다.”

“…….”

제이디는 리안의 말과 표정에서 무엇으로도 꺾을 수 없는 굳은 심지를 느꼈다.

어째서 당신은 이렇게까지 강직할 수 있을까. 나는 도무지 단 한 번의 회귀조차 견딜 수가 없어서 이토록 괴로운데… 당신은 어떻게 그 많은 생을 되돌아 반복했을까.

살아도 산 게 아닌 제이디는 그저 흐느끼며 두 눈을 감아 버렸다. 피에 젖은 리안의 어깨가 제이디의 눈물에 붉게 번져 갔다.

【제국력 832년, 학생군 자유 행진 사상자 총 1만 3,762명】

【휘노 펠리디오스, 첼시 아도라 사망】

*  *  *

지저분한 가죽 시트에 은실 같은 머리카락이 흐드러지게 퍼졌다. 누적된 피로에, 제이디는 간이침대에 몸을 뉘자마자 기절하듯 잠들었다.

이곳은 황립 대학 안에 마련된 임시 치료소였다. 제이디는 참상 속 친우의 죽음을 목격한 정신을 돌볼 여유도 없이 자유 행진에서 살아남은 부상자를 치료하는 데 온 힘을 썼다.

참혹했던 자유 행진은 마법사들이 1황자의 폭격을 막아 내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황실이 극비리에 통제했지만, 1황자가 의식을 차리지 못하고 있다는 정보가 결국 새어 나왔다. 유례없던 황태자의 빈사 상태와 막대한 전력 손실로 황궁은 병력을 철수한 뒤 성벽을 굳게 걸어 잠갔다.

덕분에 숨 돌릴 틈이 생겼으나. 아무리 치료에 전념해도 의료 인력에 비해 부상자의 수가 너무 많았다. 제이디는 혼이 빠져나갈 만큼 바쁘게 움직이며 슬픔을 다스려 보려고 했다. 그러나 수많은 부상자의 참혹한 상태를 매일매일 관찰하고 치료할수록 어둠은 더욱더 깊이 내면을 잠식해 갔다.

제이디가 현장에서 부상자 치료를 하는 동안, 헐리 무니는 마법사의 마력을 상쇄하는 황실의 ‘신무기’를 심화 연구하며 그 결과를 공식적으로 문서화하고 있었다. 어느 정도 윤곽이 잡히면 선전을 통해 온 제국에 정보를 알려 경고하고, 혁명군의 신식 무기를 보급해야 했다.

제이디는 쓰러지듯 잠들었음에도 단잠을 자지 못하고 뒤척였다. 매일 밤이 악몽의 연속이었다. 막사에 들어온 리안이 그런 제이디를 안쓰러운 얼굴로 내려다보았다.

“제이디.”

“…….”

예민해진 신경은 아주 조심스러운 부름에도 번뜩이며 반응했다. 짧은 사이 또 끔찍한 꿈이라도 꾸었는지 제이디의 눈가가 발갛게 짓물러 있었다.

“무슨 일이에요?”

“…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한숨도 편히 자지 못하고 리안을 따라 급히 향한 곳은 리노 슈펜하이어의 침상이었다. 온몸이 창백해진 리노가 검은 피를 토하며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제이디는 당장 필요한 조치를 하고 리노의 상태를 살폈다. 약의 부작용이 너무 심했다.

리노는 마법을 배우진 않았지만 귀족 태생으로 어느 정도 마력을 타고난 자였다. 마력초를 가공해 만든 약이 제국군의 총탄에 맞아 ‘감염’된 몸에 효험이 있다는 것까지는 알아냈다. 하지만 연구 기간이 무척이나 짧아 아직 안정적이지는 않았다. 누군가에게는 부작용이 없어도, 다른 누군가에게는 치명적인 부작용을 보였다. 리노처럼 심한 자에게는 죽음의 문턱을 간신히 넘지 않을 정도의 도움밖에는 되지 않았다.

제이디는 참담한 심정을 감추고 애써 차분하게 행동했다. 자신까지 동요한다면 환자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리노에게 응급 처치를 하고 막사로 돌아온 뒤, 제이디는 그 즉시 얼굴을 가린 채 흐느꼈다. 도무지 견딜 수 없는 상황의 연속이었다. 감정이 치받아 울음을 터뜨리다가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가라앉히기 일쑤였다.

“…….”

그럴 때마다 리안은 그런 제이디를 도닥이며 위로해 주었다. 서로 지칠 법한 상황에서도 리안은 내내 제이디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까지 서로 떨어져 생활하기는 도저히 무리였다.

그렇게 하루하루 힘든 시간을 보내던 중, 결국 비보가 전해졌다.

소식을 듣고 달려간 제이디는 밤사이 운명한 친우의 마지막 모습을 보았다. 그 옆에는 절망에 빠진 그의 연인 멜라크가 서 있었다.

【리노 슈펜하이어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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