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원의 불꽃은 꺼지지 않는다 (87)화 (88/116)

회의가 끝나고, 사령부에는 리안과 제이디 단둘만 남았다. 약속이라도 한 듯 독대했지만 먼저 입을 여는 사람은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제이디는 혁명군의 결정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지킬 것이 있는 사람은 혁명군이 될 수 없다는 지론은 물론 기억하고 있었다. 내 사람의 희생을 감수하고도 역사의 진보를 위해 나아갈 신념을 가진 자만이 혁명군이 될 수 있다고.

하지만 제이디는 여전히 당혹스러웠다. 우리가 혁명을 하려는 이유는 미래를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냐고. 정의를 위한 희생과 무차별적인 살생은 그 결이 분명 다르지만, 막상 막대한 희생을 예견하고도 묵과해야 하는 순간에 놓이니 이성적인 판단이 어려웠다.

불편한 정적을 깨고 제이디가 목소리를 냈다. 시선은 탁상 위에 고정된 채였다.

“내 사람들을 지켜 주겠다고 했잖아요.”

제이디의 원망이 속절없이 리안을 향했다. 한 차례 숨을 고른 리안이 나지막이 대답했다.

“그들을 희생시키겠다고 한 적은 없습니다. 언제나처럼 전방에서 최선을 다할 거예요.”

매일매일 붙어 있던 사람과 오랜만에 마주하는데도 날을 세우는 현실이 못내 서글펐다. 마음대로 되는 게 없는 시기, 예민할 대로 예민해진 데다 신념 갈등까지 겪게 된 제이디는 말을 고를 여력이 없었다.

“됐어요. 이제 리안의 도움은 필요 없어. 내가 지켜야 할 내 사람들이니, 내가 알아서 할게요.”

“미안하지만 이번에는 부디 여기 남아 있어요. 전투원은 차고 넘칩니다. 하지만 독의 실마리를 풀 연구원은 제이디뿐이에요.”

“동료들을 사지에 보내고 내가 제정신으로 연구를 하겠어요?”

“당신이 잘못되면 지금까지 해 왔던 모든 노력이 수포가 된단 말입니다.”

리안의 기세가 맹렬했다. 가슴이 아릴 만큼 날카롭게 파고드는 말에, 제이디는 말문이 막혔다.

리안은 눈을 감고 생각을 정리했다. 제이디 앞에서 화를 내기는 싫었다.

“내 권위로 당신을 통제하고 싶진 않아요.”

조용한 목소리에서 미안함이 느껴졌다.

“리안….”

“그만하죠. 이렇게 부딪치는 거… 불편해요.”

그의 표정에 힘들어하는 심정이 고스란히 드러나서, 제이디는 차오르는 말을 꾹 눌렀다.

두 사람 사이에 다시 정적이 내려앉았다. 제이디는 스스로 리안에게 모질게 굴고 있음을 알았다. 또한 리안의 말도 일리가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하지만 휘노와 리노가 학생군에 속해 있기 때문에 쉽게 수긍하기는 역시 어려웠다.

학생군을 혁명군의 미끼로 쓴다니…. 여전히 내키지 않았다. 그러나 고민을 이어 가도 도무지 다른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제이디는 결국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든 빨리 맹독을 해결할 실마리를 잡는 수밖에. 역병 치료제를 개발할 때는 100일의 시간이 주어졌었지만, 지금은 단 10일의 여유도 없지 않은가. 이런 싸움으로 허비할 시간과 기력은 없었다.

“알겠어요. 전 여기 남을게요.”

“…….”

“당신 말대로 지금은 내 연구를 기다릴 여유가 없으니. 주어진 시간을 허투루 쓰지 않는 게 좋겠어요. 이렇게 우리끼리 논쟁할 시간조차 아까운 상황이잖아요. 나 역시 당신에게 통제당할 생각은 없어요. 그러니 내가 선택해서 이곳에 남겠어요.”

자리에서 일어선 제이디가 조금 망설이다 리안을 바라보았다.

“…어떤 상황에서도 리안이 죽으면 나도 죽는다는 결심은 변하지 않아요. 그러니… 부디 몸조심해요.”

제이디가 보일 수 있는 최선의 걱정이었다. 한심했다. 대의 앞에서 신념을 꺾지 못해 혁명군과 정면으로 부딪치고, 제국군과 다를 게 뭐냐며 리안에게 상처를 준 주제에…. 미안하다고 해도 모자랄 판에 고작 날 위해 몸조심하라는 말이나 건네다니.

말을 마친 제이디는 리안의 표정을 확인하지도 않고 회의실을 나섰다. 그를 등지고 문까지 걸어가는데, 미련이 늪처럼 퍼져 자꾸만 발목을 붙잡는 것 같았다.

흔들리지 마. 사무적으로 대하는 리안에게 장단을 맞춰 줘. 안 그래도 힘든 리안에게 그거라도 제대로 해 주자.

마음을 굳게 먹은 제이디가 막 문고리를 돌리던 때였다. 어느새 다가온 리안이 제이디의 팔목을 붙들었다. 제이디가 놀란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나 역시 당신이 그리워.”

“…….”

“언젠가 당신과 온전히 마음을 나누기 위해서라도 살아남을 테니까. 제발 그 입에 죽음을 담지 말아요.”

간절함이 짙게 묻은 리안의 말 한마디에 제이디는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이번에는 제이디가 먼저 그의 손을 놓았다. 속절없이 일그러지는 표정을 감추며, 제이디는 서둘러 그 자리를 벗어났다. 심장이 터질 듯이 뛰고 있었다.

*  *  *

제국력 832년 봄, 황성 대학 정문.

학생군의 자유 행진 날이 다가왔다. 평민 위주로 결집했던 1, 2차 평화 행진과는 달리 고위층 자제로 이루어진 새로운 혁명단은 그 자체로 뜻깊었다.

암살과 결투로 가문을 잃은 사람은 휘노 펠리디오스뿐만이 아니었다. 저마다의 사정을 안고 모여든 귀족 자제들의 눈빛이 결의에 차 반짝거렸다.

리노 슈펜하이어가 제작한 학생군 전투복은 최대한의 효율을 살린 형태였다. 거추장스러운 교복이나 일상복은 벗어던지고 마법 무기로 무장한 학생군이 대열을 맞춰 섰다.

오늘 학생군은 록펠라 광장 동부에 위치한 황립 대학에서 집결, 광장을 거쳐 황궁 성벽으로 향할 계획이었다.

뎅─ 아카데미의 종이 울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황립 대학 시계탑의 종도 함께 힘차게 울렸다. 기수들이 행진 양옆에 도열해 섰다.

묵직한 종소리가 온 황성에 울려 퍼지며, 학생군이 자유 행진의 첫발을 내디뎠다.

천천히 움직이는 선두 마차 위, 황립 대학 학생회장 세시아 엘리엇이 제국 최초의 혁명가 ‘태양과 불꽃의 노래’를 선창했다. 곧이어 학생군의 노랫소리가 온 거리에 크게 울렸다.

대지의 여명이 온 세상을 밝힐 때

찬란한 내일의 태양이 떠오를 때

물러난 어둠이 민중의 불꽃에 사그라질 때

자유와 평화의 바람 들이닥치면

오, 마침내 자유와 평화의 바람 들이닥치면

우리의 투지는 역사가 되리라

우리의 고동은 기쁨이 되리라

붉은 기 날리는 투쟁의 장

육신을 벗고 깃발을 들면

모든 진실은 영혼에 새겨지고

자유가 되어 불타오르리라

영원히 불타오르리라

혁명가의 마지막, 세시아가 커다란 ‘붉은 기’를 하늘 높이 치켜들었다.

모든 것을 재로 만드는 황실의 불꽃이 아닌, 무엇도 불태우지 않는 뜨거운 불꽃이 깃발을 감싸며 피어올랐다. 곧이어 학생군이 든 모든 깃발에 마법으로 피워 올린 불꽃이 옮겨붙었다.

거대한 붉은 물결이 황성 동쪽을 물들이며 광장으로 진격했다.

이곳 대학가와 록펠라 광장을 잇는 오필리아 거리는 제국 학술계의 중심지였다. 또한 미래의 등불과 주민이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는 일종의 공동체이기도 했다.

거리 양옆으로는 서점, 잡화점, 마법용품점과 학생이 거주하는 하숙 시설이 즐비했다.

하숙집 주인들은 저마다 걱정스러운 얼굴로 행렬을 내려다보았다. 몇 년을 식구처럼 함께한 학생을 알아본 누군가는 부모처럼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오필리아 거리의 터줏대감인 마법용품점의 유만 경 역시 새하얀 눈썹을 잔뜩 늘어뜨린 채, 하나라도 더 챙겨 주고 싶었는지 가게 문을 활짝 열고 무상으로 마법 용품을 나누어 주었다.

“황제는 사죄하라!”

“황제는 제국민의 선언에 대응하라!”

“황제는 성벽을 열고 모든 권리 주체의 요구를 들어라!”

마침내 행진의 선두가 오필리아 거리를 지나 록펠라 광장 초입에 들어섰다. 대기하던 혁명군이 가세하자 행군 세력이 눈에 띄게 커졌다.

마법 무기를 든 학생군의 선두에는 황립 대학 학생회가, 신식 소총을 든 혁명군의 선두에는 리안을 위시한 혁명군 정예 부대가 자리했다. 그들은 사전에 협의한 대로 전열을 맞춰 행진을 이어 갔다.

이윽고 황궁 남쪽 성벽으로 뻗은 알테미스 거리까지 접어들었다. 예상대로 제국군 머스킷 부대가 열을 맞춰 학생군을 겨누고 있었다.

“대기!”

대치한 두 세력이 서로의 동태를 살폈다.

곧 총격이 쏟아지리라 예상한 학생군 쪽에서 방어진을 겹겹이 치기 시작했다. 불붙은 붉은 기를 든 마법사들은 총구 앞에 동요하지 않고 대기했다. 오늘을 위해 혹독한 수련을 거친 그들이었다.

혁명군 또한 일제히 장전을 마치고 총구를 마주 겨누었다. 건물 위 저격대에서도 전투 준비가 끝났다는 수신호가 전해져 왔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대치 상태가 오래 지속되었지만, 제국군 쪽에서 아무 대응도 하지 않았다.

황제가 전면전을 선포했던지라 당연히 제국군이 선제공격을 할 줄 알았다. 세시아 엘리엇을 위시한 최전방 마법 부대가 의문스러운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왜 공격하지 않지?”

“싸우지 않을 거면 비켜!”

“우회해야 할까요?”

해산을 명하는 명령조차 없었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고요한 대치만 이어질 뿐이었다. 알테미스 거리에 무거운 긴장감이 감돌았다.

“무슨 생각인지 알 수가 있어야….”

저격대에서도 ‘습격 없음’ 신호가 전해졌다.

선제공격을 할 순 없었다. 조금이라도 황실에 유리한 전황을 만드는 일은 계획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구호를 외치는 목소리도 사그라들고, 분위기 또한 느슨해져 갔다.

황궁으로 향하는 모든 진입로가 제국군 정규대로 꽉 막힌 터라 자유 행진 부대는 아예 진을 쳤다. 이에 자유 행진은 점점 농성의 형태로 변해 갔다.

이른 저녁이 되자 록펠라 광장 전체가 붉게 물들 만큼 시위자가 더욱 모여들었다. 언제 시작될지 모르는 포격을 막기 위해 방어 마법사들이 시위대를 둘러싸고 포진했다.

록펠라 광장 상인들이 이런저런 보급 물자와 음식을 나누어 주는데도, 제국군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학생군은 자신감에 차 있었으며, 오늘 행진의 결과가 제국의 미래에 중요하게 작용하리라 판단했다. 그렇기에 여기서 멈출 수는 없었다. 학생군 지도부와 긴급회의를 마친 세시아 엘리엇은 조금 더 인파가 늘어났을 때 마법 보호막을 형성한 뒤 적진을 흩트리며 진격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아직 해가 짧아 밤은 이르게 찾아왔다. 선두 마차에서 대열을 정비한 최전방 부대가 다시 한번 타오르는 붉은 기를 높이 들어 올렸다. 앞에서 뒤로 전달되는 신호에 농성에 지쳐 가던 시위대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행진!”

자유 행진이 다시 시작되었다.

적 진영과 맞닿을 즈음, 제국군 부대가 길을 터 주듯 반으로 갈라졌다. 그리고 마치 시위대를 포위하듯이 넓고 길게 퍼져 학생군을 둘러쌌다.

세시아 엘리엇의 마음이 선득해진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그녀는 재빨리 마법사들이 보호막을 넓게 펼치도록 지시했다. 조금이라도 방심해서는 안 되었다. 혁명군의 저격대를 포함해 원거리 마법사들이 알테미스 거리 건물 위에 넓게 포진했다고는 하나, 완벽한 안전을 장담할 수는 없었다.

“황제는 사죄하라!”

“사죄하라!”

거대한 마법 보호막에 둘러싸인 채, 학생군이 다시 구호를 외쳤다. 그때였다.

탕─

어디선가 총성이 울렸다. 총격이 시작되었음을 눈치챈 학생군 마법 부대가 저마다 공격 태세를 갖추었다.

“보호막을 간수해! 뚫려선 안 돼!”

전술 부대가 재빨리 마법 증폭기를 설치했다. 이윽고 공격 부대가 일사불란하게 마법을 시전할 때였다.

탕─ 탕, 탕─

사방에서 총격이 날아들었다. 그 총격은, 여태까지의 모든 것을 뒤집기에 충분했다.

0